1. 개요
존 "잭" 찰턴은 잉글랜드의 저명한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1935년 5월 8일 노동 계급의 중심지인 노섬벌랜드주 애싱턴에서 태어나 2020년 7월 10일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평생을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센터백으로 활약하며 629번의 리그 출장과 총 762번의 공식 경기에 출전하여 클럽 기록을 세웠다. 선수로서 그는 1966년 FIFA 월드컵에서 잉글랜드의 우승을 이끌었으며, 1967년에는 FWA 올해의 축구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선수 은퇴 후 감독으로 변신한 찰턴은 미들즈브러와 셰필드 웬즈데이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특히 아일랜드 공화국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1986년부터 1996년까지 팀을 두 번의 월드컵(1990년, 1994년)과 한 번의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1988년) 본선으로 이끌며 아일랜드 축구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리더십은 아일랜드 사회에 통합과 자긍심을 불어넣는 상징적인 역할을 했다.
찰턴은 단순히 축구계의 거인이 아니라, 사회주의 신념을 가진 반나치 연맹의 창립 지지자이자 1984~1985년 영국 광부 파업을 지지하는 등 사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이었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그가 노동 계급의 뿌리를 잊지 않고 사회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냈던 '인민의 영웅'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동생인 보비 찰턴과의 복잡한 가족 관계 또한 그의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축구와 사회 양면에서 깊은 유산을 남겼으며, 아일랜드 축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가적 자부심을 고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존 "잭" 찰턴은 1935년 5월 8일 잉글랜드 노섬벌랜드주의 애싱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축구 명문가였지만, 아버지 밥은 광부였고, 가족의 재정은 넉넉지 않아 네 형제(잭, 보비, 고든, 토미)가 같은 침대를 사용해야 했다.
2.1. 출생과 가족
찰턴은 1935년 5월 8일 노섬벌랜드주 애싱턴에서 태어났다. 그는 네 형제 중 맏이였으며, 동생으로는 훗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적인 공격수가 되는 보비 찰턴이 있다. 찰턴의 아버지는 광부였지만, 어머니 시시는 자녀들과 함께 축구를 즐기고 나중에는 지역 학교 팀을 코치하기도 했다. 찰턴 가문은 축구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는데, 그의 외삼촌들인 잭 밀번, 조지 밀번, 짐 밀번, 스탠 밀번 모두 축구 선수였다. 특히 전설적인 뉴캐슬 유나이티드와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선수였던 재키 밀번은 그의 어머니의 사촌이었다.
2.2. 어린 시절과 교육
찰턴이 자란 애싱턴 마을의 경제는 전적으로 탄광 산업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축구에 관심이 없었지만, 어머니는 십대 시절부터 그들을 데리고 애싱턴과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경기를 보러 다녔고, 찰턴은 평생 뉴캐슬의 열렬한 지지자로 남았다. 그는 북동 잉글랜드의 노동 계급 문화 속에서 자라며 적은 보수로 열심히 일하는 것이 당연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재능 있는 선수들에게 프로 축구 선수가 되는 것은 현실적인 목표였지만, 여전히 많은 노력과 헌신이 필요했으며, 이는 좋은 노동 계급 임금 이상의 것을 제공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2.3. 초기 경력과 광산 생활
15세에 찰턴은 외삼촌 짐이 레프트백으로 뛰고 있던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입단 테스트 제안을 받았지만, 처음에는 이를 거절하고 아버지와 함께 광산에서 일했다. 그는 지하 깊은 곳에서의 노동이 얼마나 힘들고 불쾌한지 깨닫고는 짧은 기간 광산에서 일한 후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후 그는 경찰에 지원했고, 동시에 리즈 유나이티드의 제안을 다시 고려했다. 리즈에서의 입단 테스트 경기가 경찰 면접과 겹쳤을 때, 찰턴은 축구 경기를 선택했다. 테스트는 성공적이었고, 그는 엘런드 로드의 구단 직원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3. 선수 경력
찰턴은 선수 생활의 전부를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보냈으며,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1966년 FIFA 월드컵 우승을 경험했다. 그의 선수 경력은 끈질긴 수비력과 리더십으로 특징지어진다.
3.1. 리즈 유나이티드
찰턴은 1950년부터 1973년까지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그는 클럽의 풋볼 리그 2부 우승(1963-64), 풋볼 리그 1부 우승(1968-69), FA컵 우승(1972), EFL컵 우승(1968), FA 채리티 실드 우승(1969),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우승(1968, 1971)에 기여했으며, 1955-56 시즌 2부 리그 승격과 1부 리그 5회 준우승, FA컵 결승 2회 패배,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결승 1회 패배를 기록했다. 그의 629번의 리그 출장과 총 762번의 공식 경기 출장은 클럽 기록으로 남아 있다. 2006년 리즈 유나이티드 서포터들은 찰턴을 클럽 역대 최고의 11인에 선정했다.
3.1.1. 데뷔와 성장
찰턴은 리즈 유나이티드의 북부 중간 리그 유소년 팀에서 뛰었고, 이어서 요크셔 풋볼 리그의 3군에서 활약했다. 16세의 나이에 신체적으로 힘든 요크셔 리그에서 뛰는 모습은 구단 경영진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는 곧 리저브 팀으로 승격되었다. 찰턴은 17세가 되던 해 첫 프로 계약을 맺었다. 그는 1953년 4월 25일 돈캐스터 로버스와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는데, 당시 존 찰스가 센터 포워드로 이동하면서 그의 자리를 대신하여 센터 하프로 출전했다. 이 경기는 1952-53 시즌 풋볼 리그 2부의 마지막 경기였으며, 1대1 무승부로 끝났다.
이후 찰턴은 영국 징병제에 따라 가정 기병대에서 2년간의 병역 의무를 수행했으며, 하노버에서 기병대 컵에서 호스 가즈의 주장을 맡아 우승을 이끌었다. 그의 병역 의무로 인해 리즈에서의 기여는 제한적이었고, 1954-55 시즌에는 단 한 경기에만 출전했다.
찰턴은 1955년 9월 1군으로 복귀했다. 그는 1955-56 시즌 남은 기간 동안 자신의 자리를 지켰고, 셰필드 웬즈데이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풋볼 리그 1부로 승격하는 데 기여했다. 1956-57 시즌 후반기에는 밤늦게 파티를 즐기며 축구에 집중하지 못하는 습관 때문에 잠시 팀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 생활에 정착하면서 파티를 즐기는 생활 방식을 멈췄고, 1957-58 시즌에 다시 주전으로 복귀했다. 1957년 10월에는 아일랜드 리그와의 경기에서 잉글리시 풋볼 리그 대표로 선발되기도 했다.
1958년 레이치 카터가 팀을 떠난 후 리즈는 어려움을 겪었고, 1958-59 시즌에는 윌리스 에드워즈, 이어서 빌 램턴이 지휘봉을 잡았지만, 리즈는 강등권에서 9점 차로 간신히 벗어났다. 잭 테일러가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1959-60 시즌이 끝날 무렵 리즈를 강등권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실패했다. 이 기간 동안 찰턴은 코칭 자격증을 따기 시작했고, 릴레셜에서 잉글랜드 축구 협회의 코칭 과정에 참여했다.
1960-61 시즌 리즈는 2부 리그 강등권에서 불과 5점 차로 마쳤고, 테일러는 사임했다. 그의 후임인 돈 레비는 1군에서 승격되었는데, 처음에는 찰턴을 좋아하지 않았다. 레비는 1961-62 시즌 초반 찰턴을 공격수로 기용했지만, 그가 센터 포워드로서 비효율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자 곧 다시 센터 하프로 돌려놓았다. 찰턴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동생과는 달리,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듯한 클럽에서 뛰는 것에 좌절하고 다루기 힘든 선수가 되었다. 레비는 1962년에 찰턴을 보내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그를 이적 명단에 올리지는 않았다. 리버풀의 감독 빌 샹클리는 리즈가 찰턴에게 요구한 3.00 만 GBP의 이적료를 맞추지 못했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 맷 버스비는 처음에는 이적료를 지불할 의사가 있었지만, 결국 검증되지 않은 젊은 선수를 센터 하프로 기용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논의 중에 찰턴은 리즈와 새로운 계약을 맺기를 거부했지만, 버스비의 망설임에 좌절감을 느꼈고, 결국 리즈와 새로운 계약을 맺으면서 레비에게 더 전문적인 자세를 보이겠다고 약속했다.
1962-63 시즌은 리즈 유나이티드에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해였다. 레비는 팀과 클럽을 자신의 취향에 맞게 만들기 시작했다. 9월 스완지 타운과의 경기에서 레비는 많은 고참 선수들을 제외하고 찰턴을 젊은 새 수비 라인업에 기용했다. 이 라인업은 게리 스프레이크 (골키퍼), 폴 레이니 (라이트백), 노먼 헌터와 찰턴 (센터백), 그리고 로드 존슨 (레프트백)으로 구성되었다. 존슨을 제외하고는 이 수비 라인업은 그 후 10년 동안 대부분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찰턴은 그날 수비를 지휘하며 지역 방어 시스템을 고집했다. 레비는 찰턴이 수비에서 핵심 조직자가 되는 것을 허용했다. 새로운 미드필더 영입 선수인 조니 자일스의 도움으로 리즈는 강력한 승격 도전을 펼쳤고 5위를 차지한 후, 1963-64 시즌에는 선덜랜드를 2점 차로 제치고 챔피언 자격으로 승격을 확정 지었다. 1군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다른 선수들로는 빌리 브렘너, 폴 메들리, 피터 로리머 등이 있었다.
3.1.2. 주요 대회 우승 및 준우승

리즈는 1964-65 시즌 1부 리그 복귀 첫 시즌부터 즉각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팀은 거친 플레이로 명성을 얻었고, 찰턴은 자서전에서 "우리가 성공을 이룬 방식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엘런드 로드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하기 전까지 25경기 무패를 기록했다. 그들의 우승 경쟁은 두 클럽 간의 강렬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 리즈는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우승을 확정 짓기 위해 승리가 필요했지만,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버밍엄 시티와 3대3 무승부에 그쳤다. 찰턴은 86분에 동점골을 넣었지만, 결승골을 넣지는 못했다. 그들은 FA컵 준결승 재경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1대0으로 꺾으며 어느 정도 복수에 성공했다. 리즈는 웸블리에서 열린 1965년 FA컵 결승에서 리버풀을 만났고, 경기는 득점 없이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로저 헌트가 연장전 3분 만에 선제골을 넣었지만, 7분 뒤 찰턴이 브렘너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했고, 7분 뒤 이언 세인트 존이 리버풀의 2대1 승리를 이끄는 골을 넣었다.
리즈는 1965-66 시즌에도 우승 경쟁을 벌였지만, 리그에서 리버풀에 이어 2위를 차지했고,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준결승에 진출했다. 이는 클럽의 첫 유럽 대회 시즌이었으며, 이탈리아의 토리노, 동독의 1. FC 로코모티프 라이프치히, 스페인의 발렌시아, 헝가리의 우이페슈트를 꺾었지만, 합계 2대2 무승부 후 재경기에서 스페인의 레알 사라고사에게 1대3으로 패했다. 찰턴은 발렌시아와의 경기에서 수비수 비다가니가 공이 없는 상황에서 찰턴을 발로 차자 싸움이 붙어 논란을 일으켰다. 찰턴은 실제로 스페인 선수를 때리지는 않았고, 비다가니는 팀원들 뒤에 숨었다.
1966-67 시즌은 에디 그레이와 같은 또 다른 위대한 선수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리즈에게는 실망스러운 시즌이었다. 리즈는 챔피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5점 뒤진 4위를 차지했으며, 첼시에게 패하며 FA컵 준결승에서 탈락했다. 그들은 인터시티스 페어스컵에서 진전을 보여 DWS (네덜란드), 발렌시아, 볼로냐 (이탈리아), 킬마녹 (스코틀랜드)을 꺾고 결승에 진출했지만, 유고슬라비아의 디나모 자그레브에게 합계 0대2로 패했다. 시즌이 끝날 무렵 그는 전년도에 이 상을 수상한 동생에 이어 FWA 올해의 축구 선수로 선정되었다. 시상식에서 그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기립박수를 받았고, 이는 그의 성공적인 연설가로서의 부업을 시작하게 했다.
찰턴은 1967-68 시즌에 새로운 전술을 개발했는데, 코너킥 상황에서 골키퍼 옆에 서서 골키퍼가 공을 잡으러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상대 수비진에게 혼란을 야기했으며, 현대에도 자주 사용되는 전술이다. 그러나 2시즌 연속으로 리즈는 4위를 차지했고, FA컵에서는 준결승에서 올드 트래퍼드에서 에버턴에게 0대1로 패하며 탈락했다. 그들은 마침내 EFL컵 결승에서 아스널을 1대0으로 꺾고 주요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테리 쿠퍼가 유일한 골을 넣었지만, 찰턴이 골을 넣기 전에 골키퍼 짐 퍼넬을 밀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리즈는 이어서 CA 스포라 룩셈부르크, FK 파르티잔 (유고슬라비아), 하이버니언 (스코틀랜드), 레인저스 (스코틀랜드), 던디 (스코틀랜드)를 꺾고 헝가리 클럽 페렌츠바로시와의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결승에 진출했다. 그들은 엘런드 로드에서 1대0으로 승리하고 부다페스트에서 0대0으로 비기며 첫 유럽 트로피를 차지했다.
찰턴은 1968-69 시즌 리즈가 처음으로 잉글리시 풋볼 리그 타이틀을 획득하는 데 기여했다. 그들은 단 두 경기만 패하며 2위 리버풀보다 6점 앞서 우승을 차지했다. 4월 28일 안필드에서 열린 무득점 무승부로 우승을 확정 지었고, 찰턴은 나중에 리버풀 서포터들이 자신을 "크고 더러운 기린"이라고 애정 어린 별명으로 불렀으며, 감독 빌 샹클리가 경기 후 리즈 라커룸에 들어와 그들에게 "자격 있는 챔피언"이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리즈는 1969-70 시즌을 FA 채리티 실드에서 맨체스터 시티를 2대1로 꺾으며 시작했고, 리그, FA컵, 유러피언컵 트레블을 달성할 현실적인 가능성에 직면했다. 그러나 시즌 막바지에 경기가 쌓이면서 세 트로피 모두 놓쳤다. 리그 타이틀은 에버턴이 넘을 수 없는 리드를 쌓으면서 가장 먼저 손에서 미끄러졌다. 그들은 이어서 셀틱에게 합계 1대3으로 패하며 유러피언컵에서 탈락했는데, 햄던 파크에서 UEFA 기록인 136,505명의 관중 앞에서 1대2로 패했다. 그들은 FA컵 준결승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꺾기 위해 두 번의 재경기를 치렀지만(브렘너가 300분 동안 유일한 골을 넣었다), 원래 2대2 무승부였던 1970년 FA컵 결승 재경기에서 첼시에게 1대2로 패했다. 이 경기에서 찰턴은 선제골을 넣었지만, 재경기에서 피터 오스굿의 골에 대해 자신이 책임을 졌는데, 이는 찰턴이 자신을 걷어찬 첼시 선수에게 복수하려다가 마크 임무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찰턴은 1970-71 시즌 초반인 10월 ITV 타인 티스 축구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선수 시절에 해를 입히거나 어떤 형태로든 복수할 의도가 있는 선수들의 이름을 적어둔 "작은 검은 책"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잉글랜드 축구 협회의 조사를 받았고, 언론이 자신을 오보했다고 주장한 후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실제로 그런 책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 심한 태클을 가한 선수들의 짧은 명단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었고, 경기 중에 기회가 생긴다면 그 선수들에게 강하지만 공정한 태클을 가할 의도가 있었다고 인정했다. 리즈는 시즌을 다시 2위로 마쳤는데, 찰턴이 결승골을 넣으며 아스널을 꺾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스널이 막판 1대0 승리 시리즈로 리즈를 추월했다. 최종 64점은 2위 팀으로서는 역대 최고 기록이었다. 인터시티스 페어스컵의 마지막 시즌에 그들은 사릅스보르그 FK (노르웨이), 디나모 드레스덴 (독일), 스파르타 프라하 (체코슬로바키아), 비토리아 (포르투갈), 리버풀을 꺾고 이탈리아 클럽 유벤투스와의 결승에 진출했다. 그들은 토리노 올림피코 스타디움에서 2대2로 비기고 엘런드 로드에서 1대1로 비기며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우승컵을 차지했다. 그들은 영구적으로 우승컵을 소유할 기회가 있었지만, 캄 노우에서 열린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트로피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바르셀로나에게 1대2로 패했다.
리즈는 1971-72 시즌에 3시즌 연속으로 2위를 차지했으며, 이번에는 시즌 마지막 날 몰리뉴에서 울버햄프턴 원더러스에게 패하며 챔피언 더비 카운티에 단 1점 뒤진 채 시즌을 마쳤다. 그러나 찰턴은 FA컵 결승에서 아스널을 1대0으로 꺾으며 국내 대회 우승 목록을 완성했다. 그는 찰리 조지를 매우 조용한 경기로 이끌며 리즈가 근소한 리드를 성공적으로 지키는 데 기여했다.
찰턴은 1972-73 시즌에 25경기에만 출전했고, 울브스와의 FA컵 준결승에서 부상을 입어 시즌을 마감했다. 결승전에서 체력을 회복하지 못하자 그는 은퇴를 발표했다. 폴 메들리가 그의 자리를 대신했지만, 고든 맥퀸이 그의 장기적인 대체자로 영입되었다. 그는 셀틱과의 고별 경기를 치렀고, 경기 수익 4.00 만 GBP 중 2.80 만 GBP를 받았다.
3.2.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찰턴은 30세 생일을 며칠 앞둔 1965년 4월 10일, 알프 램지 감독의 부름을 받아 웸블리에서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 잉글랜드 대표로 출전했다.
3.2.1. 월드컵 우승
1965년 4월 10일 웸블리에서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 잉글랜드 대표로 출전했다. 이 경기는 잉글랜드가 두 명의 부상 선수를 내면서 9명으로 경기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2대2 무승부로 끝났으며, 찰턴은 동생 보비의 잉글랜드 첫 골을 어시스트했다. 램지 감독은 나중에 찰턴을 보비 무어와 함께 기용한 이유가, 찰턴이 보비 무어의 드문 실수를 커버할 수 있는 보수적인 선수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966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수비진은 비교적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고든 뱅크스 (골키퍼), 레이 윌슨 (레프트백), 찰턴과 무어 (센터백), 그리고 조지 코언 (라이트백)이 그들이었다. 다음 달 헝가리와의 1대0 승리 경기에 출전한 후, 찰턴은 잉글랜드 대표팀과 함께 유럽 투어에 참여하여 유고슬라비아와 1대1 무승부를 기록했고, 서독을 1대0, 스웨덴을 2대1로 꺾었다. 그는 웨일스와의 0대0 무승부와 북아일랜드와의 2대1 승리 경기에 출전하여 잉글랜드가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는 데 기여했다. 이 두 경기 사이에 오스트리아에게 2대3으로 패한 경기가 있었는데, 이는 그가 잉글랜드 유니폼을 입고 패배한 단 두 번의 경기 중 첫 번째였다. 그는 1965년 잉글랜드의 9경기에 모두 출전했으며, 마지막 경기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스타디움에서 스페인을 2대0으로 꺾은 경기였다.
잉글랜드는 1966년 1월 5일 구디슨 파크에서 폴란드와 1대1 무승부로 한 해를 시작했다. 이 경기에서 램지 감독의 지도력은 보비 무어의 동점골에서 드러났다. 찰턴이 수비에서 비어있는 공간을 커버하면서 보비 무어가 전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찰턴은 월드컵을 준비하는 잉글랜드의 다음 7번의 국제 경기 중 6번의 승리에 출전했다. 이 연승은 서독을 상대로 인상적인 승리를 거둔 후 햄던 파크에서 13만 3천 명의 팬 앞에서 스코틀랜드를 꺾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6월 26일 헬싱키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핀란드를 3대0으로 꺾은 경기에서 굴절된 슛으로 첫 국제 골을 기록했다. 그는 노르웨이와의 경기에 결장했지만, 이데츠파르켄에서 덴마크를 2대0으로 꺾은 경기에서 헤딩골로 복귀했다.
잉글랜드는 월드컵 조별 리그 첫 경기에서 우루과이와 0대0 무승부를 기록했다. 남미 팀이 무승부를 목표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어서 멕시코를 2대0으로 꺾었는데, 하프타임 직전 보비 찰턴의 "엄청난 골"이 경기를 열었다. 잉글랜드는 마지막 조별 리그 경기에서 프랑스를 2대0으로 꺾었고, 찰턴은 공을 골대에 헤딩하여 로저 헌트의 골을 어시스트했다. 잉글랜드는 1대0 승리로 아르헨티나를 8강에서 탈락시켰다. 아르헨티나의 센터 하프 안토니오 라틴이 불복종으로 퇴장당한 후 아르헨티나가 공격을 멈추고 공격적인 수비로 무승부를 지키는 데 집중하면서 잉글랜드의 노력은 크게 도움이 되었다. 준결승에서 잉글랜드의 상대는 포르투갈이었는데, 거구의 센터 포워드 조제 토레스가 찰턴과 공중볼 경합을 벌였다. 경기 막판 찰턴은 토레스가 득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손을 뻗어 페널티킥을 내주었다. 에우제비우가 페널티킥을 성공시켰지만, 노비 스타일스에 의해 대부분 봉쇄되었고, 잉글랜드는 보비 찰턴의 두 골로 2대1 승리를 거두었다.
웸블리에서 열린 결승전에서는 서독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은 12분 만에 헬무트 할러의 골로 리드를 잡았다. 찰턴은 자신이 슛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당시에는 고든 뱅크스가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할러에게 슛 기회를 허용한 것은 윌슨의 실책이었다. 잉글랜드는 역전하여 리드를 잡았지만, 경기 종료 몇 분을 남기고 찰턴이 공중볼 경합 중 우베 젤러에게 파울을 범하여 프리킥을 내주었다. 볼프강 베버는 이 프리킥에서 이어진 골문 앞 혼전 상황에서 동점골을 넣었다. 제프 허스트는 연장전에서 두 골을 넣어 4대2 승리를 이끌었다.
3.2.2. 국가대표 경력 및 통계
월드컵 우승 후 잉글랜드는 1967년 4월 스코틀랜드에게 2대3으로 패하며 연례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놓쳤다. 찰턴은 전년도 11월 웨일스를 상대로 득점한 데 이어 두 경기 연속 국제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했다. 그는 경기 중 발 부상을 입어 엄지발가락의 종자골 두 개가 부러졌다. 그의 경력이 진행되면서 그는 리즈의 중요한 경기를 위해 친선 경기를 피하고 잔부상으로 잉글랜드 경기에 결장하기 시작했다. 찰턴이 결장하는 동안 브라이언 라본이 잉글랜드 팀에서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그는 UEFA 유로 1968 스쿼드에 포함되었지만, 잉글랜드의 두 경기 중 어느 경기에도 출전하지 않았다. 그는 1969년에 5경기에 출전하여 프랑스를 5대0으로 꺾는 인상적인 승리에 기여했으며, 동생 보비의 코너킥을 받아 포르투갈과의 1대0 승리 경기에서 득점했다.
1970년 중반, 램지 감독은 찰턴을 멕시코에서 열리는 1970년 FIFA 월드컵 22인 스쿼드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그는 찰턴보다 라본을 선호했고, 찰턴을 에스타디오 할리스코에서 열린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조별 리그 1대0 승리 경기에서 그의 35번째이자 마지막 잉글랜드 경기로만 기용했다. 잉글랜드는 8강에서 독일에게 패했고, 귀국 비행기에서 찰턴은 램지에게 다시는 국제 경기에 자신을 고려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램지에게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할지 고심했고, 결국 "정말 좋았던 시간... 말할 수 없는 영광... 나이가 들고... 느려지고... 더 이상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제 물러날 때가 되었다"고 말했다. 램지는 그의 말을 듣고 동의하며 "네, 저도 이미 그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라고 답했다.
국가대표팀 | 연도 | 출장 | 득점 |
---|---|---|---|
잉글랜드 | 1965 | 9 | 0 |
1966 | 16 | 3 | |
1967 | 2 | 1 | |
1968 | 1 | 0 | |
1969 | 5 | 2 | |
1970 | 2 | 0 | |
총합 | 35 | 6 |
:점수 및 결과는 잉글랜드의 득점을 먼저 나타내며, 점수 열은 각 찰턴 골 이후의 점수를 나타낸다.
번호 | 날짜 | 경기장 | 상대팀 | 스코어 | 결과 | 대회 |
---|---|---|---|---|---|---|
1 | 1966년 6월 26일 | 헬싱키 올림픽 스타디움, 헬싱키, 핀란드 | 핀란드 | 3-0 | 3-0 | 친선 경기 |
2 | 1966년 7월 3일 | 이데츠파르켄, 코펜하겐, 덴마크 | 덴마크 | 1-0 | 2-0 | 친선 경기 |
3 | 1966년 11월 16일 | 웸블리 스타디움, 런던, 잉글랜드 | 웨일스 | 5-1 | 5-1 | 1966-67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
4 | 1967년 4월 15일 | 웸블리 스타디움, 런던, 잉글랜드 | 스코틀랜드 | 1-2 | 2-3 | 1966-67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
5 | 1969년 1월 15일 | 웸블리 스타디움, 런던, 잉글랜드 | 루마니아 | 1-0 | 1-1 | 친선 경기 |
6 | 1969년 12월 10일 | 웸블리 스타디움, 런던, 잉글랜드 | 포르투갈 | 1-0 | 1-0 | 친선 경기 |
4. 지도자 경력
선수 은퇴 후 찰턴은 감독으로 활동했다. 그는 미들즈브러를 1973-74 시즌 2부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감독으로서 첫 시즌에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4.1. 미들즈브러 FC
찰턴은 1973년 38세 생일에 풋볼 리그 2부 클럽 미들즈브러의 감독직을 제안받았다. 그는 면접을 거부하고 대신 클럽 운영의 전권을 자신에게 줄 것이라는 책임 목록을 클럽에 제출했다. 그는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감독 경력 내내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회장이 훨씬 더 많은 급여를 지불할 의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봉 1.00 만 GBP를 받았다. 그의 유일한 조건은 해고되지 않을 것이라는 신사 협정, 팀 운영에 이사회 간섭이 없을 것이라는 보장, 그리고 낚시와 사냥을 위한 주 3일의 휴가였다. 그는 먼저 에어섬 파크를 다시 칠하고 다가오는 리그 캠페인을 홍보하여 더 높은 관중 수를 유도하기로 결정했다.
찰턴은 셀틱 감독 조크 스타인에게 조언을 구했고, 조크 스타인은 그에게 바비 머독을 자유 이적으로 영입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머독 외에도 클럽에는 이미 10명의 선수가 있었는데, 찰턴은 이들을 챔피언십 우승팀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짐 플랫 (골키퍼), 존 크래그스 (라이트백), 스튜어트 보엄과 윌리 매드런 (센터백), 프랭크 스프래건 (레프트백), 데이비드 암스트롱 (레프트 미드필드), 그레이엄 수네스 (중앙 미드필드), 앨런 포건 (공격형 미드필드), 존 힉턴과 데이비드 밀스 (공격수)였다. 이 선수들 중 일부는 이미 클럽과 자신의 포지션에 정착해 있었지만, 찰턴은 다른 선수들과 함께 작업해야 했다. 그는 수네스를 레프트 미드필드에서 중앙 미드필드로 옮겨 그의 속도 부족을 보완했고, 그의 본능대로 좌우로 패스하기보다는 앞으로 패스하도록 코치했다. 포건은 찰턴이 상대 수비수들이 설정한 오프사이드 트랩을 깨기 위해 만든 새로운 역할에서 뛰었다. 그는 매우 빠른 선수였고, 수비수 뒤로 달려들어가 긴 패스를 받아 골키퍼와 1대1 상황을 만드는 지시를 받았다.
미들즈브러는 1973-74 시즌 7경기를 남겨두고 승격을 확정 지었다. 찰턴은 팀에게 루턴 타운 원정에서 승점 1점을 얻어 홈에서 우승을 확정 지으라고 지시했지만, 선수들은 골을 내주라는 그의 지시를 무시했고, 케닐워스 로드에서 1대0 승리로 우승을 확정 지었다. 그들은 15점 차로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승리 시 2점만 주어졌다). 대조적으로 승격한 칼라일 유나이티드 (3위)는 강등된 크리스털 팰리스 (20위)보다 불과 15점 앞섰다. 그는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는데, 이는 1부 리그 외의 감독이 이런 영예를 얻은 첫 번째 사례였다.
그는 클럽의 모든 측면을 계속해서 관리하고 변화시켰다. 그는 클럽의 스카우트 네트워크를 해체하고 대신 노섬벌랜드와 더럼주의 지역 인재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1974-75 시즌 그의 유일한 주요 신규 영입 선수는 전 리즈 유나이티드 팀 동료였던 테리 쿠퍼였다. 그들은 풋볼 리그 1부에 잘 적응하여 7위를 차지했지만, 시즌 마지막 날 더비 카운티가 그들을 상대로 막판 골을 넣지 않았다면 4위를 차지하여 유럽 대회에 진출했을 것이다.
1975-76 시즌을 준비하면서 그는 리버풀에서 필 보어스마를 영입하여 머독을 대체했지만, 보어스마는 클럽에 정착하지 못했고 자주 부상을 입었다. 그들은 13위를 차지했고, 풀럼을 1대0으로 꺾고 앵글로-스코티시 컵에서 우승했다. 그들은 또한 풋볼 리그 컵 준결승에 진출하여 맨체스터 시티를 상대로 메인 로드에서 열린 2차전에서 1대0으로 앞섰지만, 0대4로 완패했다. 상대 팀들은 찰턴의 공격 전략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포건의 위협을 무력화하기 위해 센터백을 페널티 박스 밖에 두었다. 팀의 꾸준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클럽 이사회는 1976년 7월 찰턴이 클럽을 대표하여 사업 거래를 협상하고 클럽의 유니폼을 선택하는 데 권한을 남용하는 것에 대해 점점 더 우려하며 찰턴을 해고하기로 투표했다. 클럽 회장은 이 결정을 뒤집었고 찰턴은 계속해서 지휘를 맡았다.
힉턴이 선수 경력의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찰턴은 데이비드 크로스를 대체자로 영입하려 했지만, 8.00 만 GBP 이상을 지불하는 것을 거부했고, 크로스는 대신 12.00 만 GBP에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미들즈브러는 1976-77 시즌을 12위로 마쳤고, 찰턴은 4년이 한 그룹의 선수들과 함께하는 최적의 시간이며, 그들과 함께 정점에 도달했다고 믿고 시즌이 끝날 무렵 클럽을 떠났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그는 만약 자신이 머물렀고 두 명의 최고 수준 선수를 더 영입했다면 클럽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돈 레비가 역할을 그만두고 잉글랜드 축구 협회가 브라이언 클러프를 제외한 후 잉글랜드 감독직에 지원했다. 찰턴은 자신의 지원서에 대한 답변을 받지 못했고, 다시는 다른 직업에 지원하지 않고 제안을 기다리겠다고 다짐했다.
4.2. 셰필드 웬즈데이 FC
1977년 10월, 찰턴은 당시 풋볼 리그 3부 최하위에 있던 셰필드 웬즈데이의 감독으로 렌 애쉬허스트를 대신했다. 그는 그 레벨에서 감독 경험이 있었지만 돈캐스터 로버스를 부당 해고로 고소한 후 사실상 다른 감독직에서 제외되었던 모리스 세터스를 자신의 조수로 임명했다. 두 사람은 리그의 축구 수준은 낮지만, 작업량은 높다는 데 동의했다. 따라서 발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 페널티 지역으로 긴 패스를 하고, 비슷한 전술을 사용하는 상대 팀에게 잡히지 않도록 큰 수비수들을 영입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올빼미"를 1977-78 시즌 14위로 중위권 안전지대로 이끌었지만, FA컵에서 노던 프리미어 리그 팀인 위건 애슬레틱에게 패하며 굴욕을 겪었다.
1978년 여름 그의 최우선 과제는 토미 타이넌과 함께 뛸 타겟맨을 찾는 것이었다. 그는 브렌트퍼드에서 7.00 만 GBP의 이적료로 영입된 1.88 m의 앤드류 맥컬록에서 그를 찾았다. 그는 테리 커런을 윙어로 영입했지만, 결국 그를 공격수로 옮겨 맥컬록과 함께 뛰게 했다. 그는 골키퍼 크리스 터너를 선덜랜드로 팔고, 그를 대신하여 더 큰 밥 볼더를 영입했다. 그는 사우샘프턴에서 타협하지 않는 센터 하프 믹 피커링을 영입하여 팀의 평균 신장을 더욱 높였다. 팀은 리그에서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1978-79 시즌에도 다시 14위를 기록했다. 그들은 FA컵 3라운드에서 아스널을 상대로 4번의 재경기를 치른 끝에 0대2로 패하며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찰턴의 1979-80 시즌 주요 영입은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 미드필더 안테 미로체비치를 FK 부두치노스트 포드고리차에서 20.00 만 GBP의 이적료로 영입한 것이었다. 미로체비치는 영국의 겨울 날씨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날씨가 좋을 때는 팀에 재능을 더했다. 셰필드 웬즈데이는 3위를 차지하며 승격을 확정 지었고, 커런은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
1980-81 시즌이 다가오면서 셰필드 웬즈데이에는 마크 스미스, 케빈 테일러, 피터 셔틀리프, 멜 스털랜드와 같은 젊은 재능들이 1군에 진입했다. 클럽은 풋볼 리그 2부에서 편안하게 10위를 차지했다.
셰필드 웬즈데이는 1981-82 시즌에 승격을 추진했지만, 승격권에서 단 한 단계, 1점 차이로 마쳤으며, 시즌 초에 도입된 3점 승점 제도가 아닌 이전 2점 승점 제도였다면 승격했을 것이다.
1982-83 시즌을 준비하면서 찰턴은 에버턴에서 경험 많은 수비수 믹 라이언스를 영입했고, 크리스마스 무렵 셰필드 웬즈데이는 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클럽은 제한된 선수단을 가지고 있었고, 성공적인 컵 대회 출전은 큰 부담이 되었으며, 맥컬록과 브라이언 혼스비의 부상도 시즌 막바지에 6위로 밀려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FA컵 준결승에 진출했지만, 하이베리에서 브라이턴 & 호브 앨비언에게 1대2로 패했다. 핵심 수비수 이언 베일리는 전주에 다리 골절 부상을 당해 출전하지 못했다. 찰턴은 이사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83년 5월 힐스버러를 떠난다고 발표했다.
1984년 3월, 맬컴 앨리슨이 미들즈브러를 떠났고, 찰턴은 1983-84 시즌이 끝날 때까지 클럽을 관리하여 2부 리그 강등권에서 벗어나게 돕기로 동의했다. 그는 경비를 제외하고는 보수를 받지 않았으며, 클럽 회장이었던 친구 마이크 맥컬러에게 호의로 이 직책을 맡았다. 미들즈브러는 시즌을 17위로 마쳤고, 강등권에서 7점 앞섰다.
4.3.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찰턴은 1984년 6월 재키 밀번의 설득으로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아서 콕스는 "까치"를 풋볼 리그 1부로 이끈 후 클럽을 떠났고, 핵심 선수 케빈 키건은 은퇴를 발표했다. 그의 첫 조치는 찰턴의 새 계약 제안에 동의하지 않은 테리 맥더모트를 계약에서 해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1984-85 시즌을 준비하는 데 쓸 돈이 거의 없었지만, 크리스 워들과 피터 비어즐리와 같은 젊은 재능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미드필더 게리 멕슨과 거구의 공격수 조지 라일리를 영입했다. "툰"은 안전하게 14위를 차지했으며, 십대 폴 개스코인은 1군에 진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찰턴은 1985-86 시즌 프리시즌 훈련이 끝날 무렵 사임했다. 세인트 제임스 파크의 팬들이 클럽이 에릭 게이츠 영입에 실패하고 그가 대신 로리 맥미네미를 따라 선덜랜드로 이적하자 그의 해임을 요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4.4. 아일랜드 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
찰턴은 1985년 12월 FAI로부터 아일랜드 공화국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제안받았다. 당시 아일랜드에서는 잉글랜드인인 그의 임명이 논란이 많았다. 그의 첫 지휘 경기는 1986년 3월 26일 랜스다운 로드에서 웨일스를 상대로 치러졌으며, 1대0 패배로 끝났다.
1986년 5월, 아일랜드는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 있는 라우가르달스뵐루르에서 열린 아이슬란드 삼각 토너먼트에서 아이슬란드를 2대1로 꺾고 체코슬로바키아를 1대0으로 꺾으며 우승했다. 이 무렵 찰턴은 자신의 전술을 개발했는데, 이는 대부분의 아일랜드 국가대표 선수들이 잉글랜드에서 뛰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딥-라잉 미드필더를 사용하는 대륙식 접근 방식과는 달리 전통적인 영국식 4-4-2 시스템에 기반을 두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팀의 모든 선수들에게 상대 선수들을 압박하고, 특히 볼을 잘 다루는 수비수들이 실수를 저지르도록 강요하라고 지시했다.
4.4.1. UEFA 유로 1988
UEFA 유로 1988 본선 진출을 위해서는 벨기에, 불가리아, 룩셈부르크, 스코틀랜드가 포함된 조에서 우승해야 했다. 캠페인은 하이젤 스타디움에서 벨기에와의 경기로 시작되었는데, 아일랜드는 위험한 선수 니코 클라센을 잘 막았지만, 코너킥에서 두 골을 허용하며 2대2 무승부에 만족해야 했다. 프랭크 스테이플턴과 리엄 브래디가 아일랜드의 골을 넣었다. 그들은 이어서 랜스다운 로드에서 스코틀랜드를 압도했지만, 골을 넣지 못하고 0대0 무승부를 기록했다. 햄던 파크에서 열린 재경기에서는 마크 로렌슨이 일찍 골을 넣었고, 또 한 번의 무실점 경기로 아일랜드는 예선 첫 승을 거두었다. 캠페인은 불가리아 원정에서 1대2 패배로 흔들렸는데, 찰턴은 카를로스 실바 발렌테 심판에게 격분했다. 그는 라체자르 타네프의 두 골 모두 인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첫 골 상황에서는 나스코 시라코프가 믹 매카시를 밀었다고 주장했고, 두 번째 골 상황에서는 케빈 모런에게 파울을 당했을 때 시라코프가 페널티 박스 밖에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발렌테는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그들은 더블린에서 벨기에와 0대0 무승부를 기록하며 또 한 점을 얻었다. 아일랜드는 인상적이지는 않았지만, 룩셈부르크와의 두 경기에서 승리하며 4점을 추가했다. 그들은 불가리아와의 홈 경기에서 2대0 승리로 캠페인을 마쳤다. 폴 맥그레스와 케빈 모런이 득점했지만, 예선 내내 꾸준히 출전했던 리엄 브래디는 불가리아 미드필더 아얀 사다코프에게 반복적으로 차인 후 경기 막판에 분노를 터뜨려 두 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다. 승리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는 스코틀랜드의 도움에 의존해야만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는데, 스코틀랜드는 소피아에서 게리 매케이의 골로 1대0 승리를 거두며 불가리아를 아일랜드보다 1점 뒤처지게 만들었다.
서독에서 열린 유로 1988을 앞두고 준비는 이상적이지 않았다. 핵심 선수 마크 로렌슨은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은퇴해야 했고, 리엄 브래디는 심각한 무릎 부상을 입었으며, 마크 켈리도 부상을 당했다. 대회 첫 경기는 네카어슈타디온에서 잉글랜드를 상대로 치러졌다. 찰턴은 잉글랜드 윙어 크리스 워들과 존 반스의 위협을 무력화하기 위해 잉글랜드 수비진이 편안하게 볼을 소유하게 하되, 패스를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빌드업 플레이를 느리게 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의 경기 계획은 성공했고, 아일랜드는 레이 호턴이 일찍 리드를 잡으며 1대0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이어서 일련의 부상에 대처하기 위해 로니 웰런과 케빈 시디를 중앙 미드필드에 기용했고, 니더작센슈타디온에서 소련과의 1대1 무승부에서 웰런의 골로 훌륭한 경기력을 보상받았다. 본선 진출을 위해서는 파르크슈타디온에서 네덜란드를 상대로 승점 1점만 필요했고, 찰턴은 골키퍼 패키 보너와 함께 시간 지연 전술을 고안했지만, 호르스트 브룸마이어 심판이 불쾌해하자 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일랜드는 빔 키프트가 82분에 골을 넣으면서 0대1로 패했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는 탈락했고, 네덜란드와 소련은 본선에 진출했으며, 두 팀은 결국 2대0으로 네덜란드가 우승한 결승전에서 맞붙었다.
4.4.2. 1990년 FIFA 월드컵
1990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해서는 찰턴이 스페인, 헝가리, 북아일랜드, 몰타로 구성된 조에서 상위 2위 안에 드는 것을 계획해야 했다. 캠페인은 벨파스트의 윈저 파크라는 적대적인 환경에서 시작되었고, 그는 게리 페이턴의 대리 골키퍼 덕분에 북아일랜드와의 무득점 무승부에서 승점 1점을 얻었다. 일련의 부상으로 인해 에스타디오 베니토 비야마린에서 스페인을 상대할 때 선수단이 부족해졌고, 수비수 데이비드 오리어리가 다시 소집되었지만, 아일랜드는 0대2로 패했다。그들은 이어서 부다페스트의 네프스타디온에서 또 다른 무득점 무승부로 승점 1점을 얻었다. 그러나 경기를 지배하고도 2점을 모두 얻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다음 네 경기는 랜스다운 로드에서 치러졌고, 네 경기 모두 승리로 끝났다. 먼저 미첼의 자책골로 스페인을 1대0으로 꺾었고, 이어서 몰타와 헝가리를 2대0으로 이겼으며, 북아일랜드를 3대0으로 꺾었다. 아일랜드의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은 타 칼리 국립 경기장에서 존 앨드리지가 두 골을 모두 넣으며 2대0 승리를 거두면서 확정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열린 1990년 월드컵에서 아일랜드의 조별 리그 상대는 잉글랜드, 이집트, 네덜란드였다. 찰턴은 워들, 반스, 브라이언 롭슨, 폴 개스코인으로 구성된 잉글랜드의 4인 미드필드가 수비진에게 충분한 보호를 제공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스타디오 산텔리아에서 열린 조별 리그 첫 경기에서 게리 리네커의 선제골을 케빈 시디가 취소시키며 1대1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그의 생각이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스타디오 라 파보리타에서 소극적인 이집트 팀을 상대로 한 부진한 경기력은 양 팀 모두 득점 없이 지루한 무승부로 끝났다. 그들은 네덜란드와 1대1 무승부로 조별 리그를 마쳤는데, 뤼트 휠릿의 선제골을 나이얼 퀸이 71분에 취소시켰고, 이후 양 팀은 무승부에 만족했다. 무승부로 인해 두 팀 모두 이집트를 제치고 본선에 진출했다. 아일랜드는 이어서 스타디오 루이지 페라리스에서 열린 2라운드 경기에서 루마니아를 0대0 무승부 후 승부차기로 꺾었고, 이후 팀 전체가 바티칸 시국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만났다.
1990년 FIFA 월드컵에서 아일랜드의 예상치 못한 성공 중 가장 상징적인 순간 중 하나는 아일랜드가 루마니아를 승부차기로 꺾은 1990년 6월 25일 더블린의 워크킨스타운 로터리에서 일어났다. 인근 술집인 케스트렐과 체리 트리에서 군중들이 쏟아져 나와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로터리를 점거했다. 이 즐거운 장면을 담은 아마추어 영상은 그 해 아일랜드의 성공과 동의어가 되었고, 특히 10년간의 경제 불황 이후 전국에 퍼져 있던 희망의 감정을 잘 보여주었다. 2020년 찰턴이 사망하자 팬들은 로터리에 모여 그 순간을 재현하고 전 감독에게 경의를 표했다.
아일랜드는 결국 8강전에서 개최국인 이탈리아에게 스타디오 올림피코에서 0대1로 패하며 탈락했다. 집중력 부족으로 인해 이탈리아의 살바토레 스킬라치가 38분에 득점했다. 아일랜드는 동점골을 넣을 만큼 충분한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더블린으로 돌아온 후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팀을 환영하기 위해 모였다.
4.4.3. 1994년 FIFA 월드컵
스웨덴에서 열리는 UEFA 유로 1992 본선 진출을 위해 아일랜드는 잉글랜드, 폴란드, 튀르키예가 포함된 조에서 경쟁해야 했다. 그들은 튀르키예를 상대로 5대0 홈 승리를 거두며 멋지게 시작했고, 이어서 잉글랜드와 홈 앤 어웨이에서 1대1 무승부를 기록했다. 아일랜드는 두 경기 모두 잉글랜드보다 나은 팀이었고, 찰턴은 호턴이 두 경기 모두 쉬운 기회를 놓치면서 "두 번이나 그들을 놓아주었다"고 말했다. 이어서 폴란드와의 홈 경기에서 0대0 무승부를 기록했고, 포즈난에서 열린 재경기에서는 3대1로 앞서고 있었지만, 막판 두 골을 허용하여 3대3 무승부로 경기를 마쳤다. 아일랜드는 이뇌뉘 스타디움의 위협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스탄불에서 튀르키예를 3대1로 꺾었지만, 잉글랜드가 폴란드에서 막판 동점골을 넣어 조에서 아일랜드보다 높은 순위를 확보하면서 본선 진출이 좌절되었다.
미국에서 열리는 1994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해 아일랜드는 스페인, 유럽 챔피언 덴마크, 북아일랜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알바니아가 포함된 7개 팀 조에서 1위 또는 2위를 차지해야 했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알바니아는 아일랜드에게 거의 위협이 되지 않았고, 이 세 팀과의 홈 앤 어웨이 경기 모두에서 아일랜드는 최대 2점을 얻었다. 가장 어려운 두 경기인 덴마크와 스페인 원정은 무득점 무승부로 끝났다. 존 앨드리지는 스페인을 상대로 오프사이드로 골이 취소되었는데, 하비에르 클레멘테 스페인 감독조차도 그 골이 인정되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아일랜드는 이어서 북아일랜드를 홈에서 3대0으로 꺾었고, 덴마크와 1대1 무승부를 기록했다. 본선 진출 캠페인은 스페인과의 홈 경기 시작 26분 만에 스페인이 세 골을 앞서면서 흔들렸다. 경기는 3대1로 끝났고, 존 셰리던의 막판 만회골은 결국 캠페인 막바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지막 경기는 더 트러블의 긴장된 시기 동안 벨파스트에서 북아일랜드를 상대로 치러졌다. 지미 퀸이 74분에 북아일랜드에게 리드를 안겼지만, 4분 뒤 앨런 맥로린이 동점골을 넣어 아일랜드 공화국이 덴마크보다 득점 수가 많아 조 2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퀸이 득점하자 북아일랜드의 수석 코치 지미 니콜은 상대편 모리스 세터스 (찰턴의 조수)에게 "엿 먹어라!"라고 외쳤다. 이에 대해 찰턴은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빌리 빙엄 북아일랜드 감독에게 다가가 "빌리, 너도 엿 먹어라"라고 말했다.
월드컵을 앞두고 찰턴은 게리 켈리, 필 배브, 제이슨 맥아티어에게 첫 국가대표 출전 기회를 주었다. 그는 맥아티어가 FA의 잉글랜드 U-21 대표팀 제안을 거절해야 했기 때문에 그를 아일랜드 대표팀에 합류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대회 전에 어려운 경기를 잡았고, 아일랜드는 네덜란드와 독일 원정에서 모두 승리하며 긍정적인 결과를 얻었다. 아일랜드는 대회 조별 리그를 자이언츠 스타디움에서 이탈리아를 1대0으로 꺾으며 시작했고, 레이 호턴이 11분에 결승골을 넣었다. 그들은 이어서 플로리다 시트러스 볼 스타디움에서 멕시코에게 1대2로 패했는데, 이 경기에서 찰턴은 교체 선수 존 앨드리지 (위로골을 넣었다)가 팀 동료 토미 코인이 경기장을 떠나 벤치에 앉은 지 몇 분 만에 경기장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심판과 경기장 옆에서 언쟁을 벌였다. 이 언쟁으로 인해 찰턴은 FIFA로부터 노르웨이와의 마지막 조별 리그 경기에서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고, 해설자석에서 아일랜드가 0대0 무승부로 본선에 진출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들은 16강에서 네덜란드를 만났다. 데니스 베르흐캄프는 마르크 오버르마르스가 테리 필런의 실수를 이용한 후 11분에 네덜란드에게 리드를 안겼고, 빔 용크는 패키 보너가 평범한 선방을 놓치자 27.432m 거리에서 두 번째이자 마지막 골을 넣었다. 그의 업적으로 찰턴은 1994년 더블린 시장 토마스 맥 길라로부터 더블린 명예 시민권을 받았는데, 이는 1854년 이후 처음으로 이 영예를 얻은 잉글랜드인이었다. 그는 1994년 9월 9일 리머릭 대학교로부터 명예 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4.4.4. 아일랜드 축구에 미친 영향
찰턴 감독은 아일랜드 축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아일랜드 국가대표팀을 약체에서 국제 대회에 꾸준히 진출하는 강팀으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실용적이고 직접적인 전술은 아일랜드 선수들의 강점을 극대화하고 약점을 보완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특히 1990년대 초 아일랜드가 경제 불황을 겪고 있던 시기에, 찰턴 감독이 이끈 축구팀의 성공은 단순한 스포츠적 성과를 넘어 국가적 통합과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90년 FIFA 월드컵에서 아일랜드가 8강에 진출했을 때 더블린의 워크킨스타운 로터리에서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축제를 벌인 사건은 아일랜드 국민들에게 깊은 희망과 연대감을 안겨주었다. 이는 찰턴이 잉글랜드인임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국민들에게 '잭키 아미(Jackie's Army)'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리더십은 축구라는 매개체를 통해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아일랜드의 국가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UEFA 유로 1996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조별 리그에서 북아일랜드를 4대0으로 꺾는 등 초반 세 경기를 모두 승리하며 강력한 출발을 보였다. 다음 경기 역시 북아일랜드와의 경기였지만, 1대1 무승부로 끝났다. 그 시점부터 로이 킨, 앤디 타운젠드, 존 셰리던, 스티브 스톤턴 등 핵심 선수들의 부상이 겹치면서 아일랜드는 심하게 흔들렸다.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포르투갈을 꺾은 후에도, 리히텐슈타인 (리히텐슈타인이 10경기에서 얻은 유일한 승점이었다)과의 굴욕적인 0대0 무승부를 기록했고, 이어서 오스트리아에게 두 번 모두 1대3으로 패했다. 라트비아를 꺾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는 본선 진출을 위해 리스본에서 포르투갈을 꺾어야 했지만, 0대3으로 패했다. 그들은 조 2위를 차지했지만, 북아일랜드보다 골 득실에서 앞섰을 뿐이었고, 최악의 조 2위 팀으로 분류되어 안필드에서 네덜란드와의 플레이오프 경기를 치러야 했다. 아일랜드는 파트릭 클라위버르트의 두 골로 0대2로 패했다. 찰턴은 경기 직후 사임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은퇴 결정에 대해 "내 마음속으로는 내가 가진 선수단에서 뽑아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뽑아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이가 든 선수들 중 일부는 나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었다"고 말했다.
5. 개인 생활 및 사상

찰턴은 1958년 1월 6일 팻 켐프와 결혼했으며, 그의 동생 보비가 들러리를 섰다. 그들은 세 자녀를 두었다.
5.1. 가족 및 결혼
찰턴은 1958년 1월 6일 팻 켐프와 결혼했으며, 그의 동생 보비 찰턴이 베스트 맨을 맡았다. 그들은 세 자녀를 두었다. 1959년 1월에 태어난 존, 1961년에 태어난 데보라, 그리고 1966년 월드컵 결승전 직후에 태어난 피터이다. 1960년대 동안 그는 리즈에서 두 개의 의류 매장을 운영했으며, 나중에는 엘런드 로드에 있는 클럽 상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5.2. 취미 및 관심사
찰턴은 열렬한 아마추어 낚시꾼이었고 영국에서의 사냥 및 사격에 참여했다. 그는 또한 1980년대 초반 사격 스포츠에 관한 "잭의 게임"이라는 텔레비전 쇼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는 1972년과 1996년에 데저트 아일랜드 디스크에 출연했으며,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 생존 백과사전, 망원경, 그리고 낚싯대를 선택했다. 찰턴은 1973년 이즈 유어 라이프의 주인공이 되었고, 이먼 앤드루스에게 깜짝 놀랐다.
5.3. 정치적 신념 및 사회 활동
정치적으로 찰턴은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반나치 연맹의 창립 지지자였다. 그는 아내와 함께 1984-85년 영국 광부 파업을 지지했으며, 파업 중인 광부들이 피켓을 위해 이동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자동차 두 대를 빌려주기도 했다.
5.4. 형제와의 관계
찰턴은 1996년 자서전에서 동생 보비 찰턴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밝혔다. 잭은 보비가 노마와 결혼한 후 찰턴 가족과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느꼈는데, 노마는 그들의 어머니와 잘 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비는 이 불화로 인해 1992년 이후 1996년 3월 25일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를 만나지 않았다. 비록 두 형제는 계속 멀리 지냈지만, 잭은 2008년 12월 14일 보비에게 BBC 올해의 스포츠인 평생 공로상을 수여했다.
6. 수상 및 영예
찰턴은 선수와 지도자로서 수많은 상과 영예를 받았다.
6.1. 선수로서의 수상
리즈 유나이티드
- 풋볼 리그 1부: 1968-69
- 풋볼 리그 2부: 1963-64
- FA컵: 1971-72; 준우승: 1964-65, 1969-70
- 풋볼 리그 컵: 1967-68
- FA 채리티 실드: 1969
-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1967-68, 1970-71
잉글랜드
- FIFA 월드컵: 1966
-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64-65, 1965-66, 1967-68, 1968-69
-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3위: 1968
개인
- FUWO 올해의 유럽 팀: 1966, 1967
- FWA 올해의 축구 선수: 1967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5
- PFA 세기의 팀 (1907-1976): 2007
6.2. 지도자로서의 수상
미들즈브러
- 풋볼 리그 2부: 1973-74
- 앵글로-스코티시 컵: 1975-76
셰필드 웬즈데이
- 풋볼 리그 3부 3위 승격: 1979-80
아일랜드 공화국
- 아이슬란드 삼각 토너먼트: 1986
개인
- 잉글랜드 올해의 감독: 1974
- 필립스 올해의 스포츠 감독: 1987, 1988, 1989, 1993
6.3. 개인 수상 및 서훈
찰턴은 1974년 생일 서훈에서 대영 제국 훈장 4등급 (OBE)을 받았다. 1996년에는 아일랜드 명예 시민권을 받았는데, 이는 아일랜드 국가가 수여하는 최고 영예이며 드물게 부여되는 것이다. 1994년에는 더블린 시의 명예 시민으로 선정되었으며, 이는 1854년 이후 처음으로 이 영예를 얻은 잉글랜드인이었다. 또한 1994년 9월 9일 리머릭 대학교로부터 명예 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2020년 사후에 해외 아일랜드인을 위한 대통령 공로상을 수상했다. 1997년에는 노섬벌랜드주의 부지사로 임명되었다. 찰턴은 잉글랜드 축구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5년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아일랜드 코크 공항에는 그의 실물 크기 동상이 있는데, 낚시 장비를 착용하고 연어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2019년 12월 4일, 그는 1960년대와 1970년대 레비 팀의 다른 멤버들과 함께 리즈 시의 명예 시민으로 선정되었지만,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7. 사망
찰턴은 2020년 7월 10일 85세의 나이로 림프종과 치매를 앓다가 고향 노섬벌랜드주 애싱턴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망 다음 날, 그의 전 소속팀 리즈 유나이티드는 스완지 시티를 상대로 막판 결승골로 1대0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골의 주인공인 파블로 에르난데스는 자신의 골을 찰턴에게 헌정했다. 7월 20일, 그의 사망 10일 후, 아일랜드 팬들은 더블린의 워크킨스타운 로터리에 모여 찰턴 감독이 이끌었던 1990년 월드컵에서의 아일랜드 성공의 정점을 재현하고 경의를 표했다. 아일랜드 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1990년 캠페인 공식 노래인 풋 엠 언더 프레셔 (찰턴 감독의 상징적인 문구가 포함되어 있다)가 모든 전국 라디오 방송국에서 정오 12시 30분에 동시에 재생되어, 아일랜드를 UEFA 유로 1988과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1994년 미국 월드컵으로 이끌었던 그를 추모했다.
찰턴은 1966년 FIFA 월드컵 우승팀 선수 중 12번째로 사망한 선수였다. 그 전에는 보비 무어 (1993), 앨런 볼 주니어 (2007), 존 코넬리 (2012), 론 스프링겟 (2015), 게리 번 (2015), 지미 암필드 (2018), 레이 윌슨 (2018), 고든 뱅크스 (2019), 마틴 피터스 (2019), 피터 보네티 (2020), 노먼 헌터 (2020)가 사망했다. 1966년 FIFA 월드컵 우승팀의 일원이었던 그의 동생 보비 찰턴은 2023년에 사망했다.
8. 유산 및 평가
잭 찰턴은 축구계와 사회 전반에 걸쳐 깊은 영향을 남겼다. 그의 유산은 선수로서의 뛰어난 업적뿐만 아니라, 감독으로서의 혁신적인 리더십, 그리고 사회적 신념을 행동으로 옮긴 진정한 노동 계급의 영웅으로서의 면모를 포괄한다.
8.1. 축구계에 미친 영향
선수로서 찰턴은 리즈 유나이티드의 황금기를 이끈 핵심 수비수이자 1966년 FIFA 월드컵에서 잉글랜드의 우승을 견인한 주역이었다. 그의 거칠고 타협 없는 플레이 스타일은 상대 공격수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특히 코너킥 상황에서 상대 골키퍼를 방해하는 전술은 현대 축구에서도 널리 사용되는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다.
감독으로서 그는 미들즈브러와 셰필드 웬즈데이를 성공적으로 승격시키며 자신의 지도력을 입증했다. 하지만 그의 가장 큰 축구적 유산은 단연 아일랜드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에 남겼다. 그는 약체로 평가받던 아일랜드를 두 번의 월드컵과 한 번의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본선으로 이끌며 국제 축구 무대에 아일랜드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그의 실용적인 4-4-2 전술과 선수들에게 끊임없이 압박을 가하고 상대의 실수를 유도하도록 지시한 방식은 아일랜드 축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아일랜드 선수들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단점을 보완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8.2. 사회적 영향
찰턴의 사회적 영향은 축구장 밖에서도 두드러졌다. 그는 평생 사회주의자로서의 신념을 지켰으며, 반나치 연맹의 창립 지지자이자 1984-85년 영국 광부 파업에 적극적으로 연대하며 자신의 차량을 파업 중인 광부들에게 빌려주는 등 노동 계급의 권리와 사회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냈다. 이는 그가 단순한 스포츠 스타를 넘어 사회적 책임감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아일랜드 사회에 대한 그의 기여는 지대하다. 1990년대 초 아일랜드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기에, 찰턴 감독이 이끈 아일랜드 축구팀의 성공은 국민들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1990년 FIFA 월드컵에서 아일랜드가 8강에 진출했을 때 더블린의 워크킨스타운 로터리에서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축제를 벌인 사건은 아일랜드 국민들의 국가적 통합과 자긍심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순간으로 기억된다. 그는 잉글랜드인임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국민들에게 '잭키 아미'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았고, 축구를 통해 국가적 자부심을 고취하고 사회적 연대감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리더십은 아일랜드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그의 유산은 단순한 스포츠 성과를 넘어선 사회적, 문화적 중요성을 지닌다.
9. 통계
9.1. 선수 경력 통계
클럽 | 시즌 | 리그 | 내셔널 컵 | 유럽 | 총합 | |||||
---|---|---|---|---|---|---|---|---|---|---|
디비전 | 출장 | 득점 | 출장 | 득점 | 출장 | 득점 | 출장 | 득점 | ||
리즈 유나이티드 | 1952-53 | 2부 | 1 | 0 | 0 | 0 | 0 | 0 | 1 | 0 |
1953-54 | 2부 | 0 | 0 | 0 | 0 | 0 | 0 | 0 | 0 | |
1954-55 | 2부 | 1 | 0 | 0 | 0 | 0 | 0 | 1 | 0 | |
1955-56 | 2부 | 34 | 0 | 0 | 0 | 0 | 0 | 34 | 0 | |
1956-57 | 1부 | 21 | 0 | 1 | 0 | 0 | 0 | 22 | 0 | |
1957-58 | 1부 | 40 | 0 | 1 | 0 | 0 | 0 | 41 | 0 | |
1958-59 | 1부 | 39 | 1 | 1 | 0 | 0 | 0 | 40 | 1 | |
1959-60 | 1부 | 41 | 3 | 1 | 0 | 0 | 0 | 42 | 3 | |
1960-61 | 2부 | 41 | 7 | 4 | 1 | 0 | 0 | 45 | 8 | |
1961-62 | 2부 | 34 | 9 | 5 | 3 | 0 | 0 | 39 | 12 | |
1962-63 | 2부 | 38 | 2 | 4 | 2 | 0 | 0 | 42 | 4 | |
1963-64 | 2부 | 25 | 3 | 2 | 0 | 0 | 0 | 27 | 3 | |
1964-65 | 1부 | 39 | 9 | 10 | 1 | 0 | 0 | 49 | 10 | |
1965-66 | 1부 | 40 | 6 | 3 | 0 | 11 | 2 | 54 | 8 | |
1966-67 | 1부 | 28 | 5 | 10 | 2 | 7 | 0 | 45 | 7 | |
1967-68 | 1부 | 34 | 5 | 9 | 2 | 11 | 1 | 54 | 8 | |
1968-69 | 1부 | 41 | 3 | 4 | 0 | 7 | 4 | 52 | 7 | |
1969-70 | 1부 | 32 | 3 | 11 | 2 | 10 | 3 | 53 | 8 | |
1970-71 | 1부 | 41 | 6 | 5 | 0 | 0 | 0 | 46 | 6 | |
1971-72 | 1부 | 41 | 5 | 9 | 1 | 0 | 0 | 50 | 6 | |
1972-73 | 1부 | 18 | 3 | 5 | 1 | 2 | 0 | 25 | 4 | |
커리어 총합 | 629 | 70 | 85 | 15 | 48 | 10 | 762 | 95 |
9.2. 지도자 경력 통계
팀 | 시작 | 종료 | 기록 | ||||
---|---|---|---|---|---|---|---|
경기 | 승 | 무 | 패 | 승률 | |||
미들즈브러 | 1973년 5월 7일 | 1977년 4월 21일 | 88|49|56|45.6% | ||||
셰필드 웬즈데이 | 1977년 10월 8일 | 1983년 5월 27일 | 122|94|87|40.3% | ||||
미들즈브러 (감독대행) | 1984년 3월 28일 | 1984년 6월 2일 | 3|3|3|33.3% | ||||
뉴캐슬 유나이티드 | 1984년 6월 14일 | 1985년 8월 13일 | 15|15|18|31.3% | ||||
아일랜드 공화국 | 1986년 2월 7일 | 1996년 1월 21일 | 46|30|17|49.5% | ||||
총합 | 274|191|181|42.4% |
10. 관련 항목
- 보비 찰턴
- 리즈 유나이티드 FC
- 아일랜드 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
- 1966년 FIFA 월드컵
- 1990년 FIFA 월드컵
- 1994년 FIFA 월드컵
- UEFA 유로 1988
- 사회주의
- 영국 광부 파업 (1984년-198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