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수 경력
빙엄은 주로 최우측 공격수로 활약했으며, 그의 경력은 북아일랜드와 잉글랜드의 여러 클럽에서 성공적인 시기를 보냈다. 북아일랜드 국가대표팀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국제 무대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1.1. 초기 생활 및 유소년 경력
빙엄은 벨파스트의 블룸필드 지역에서 태어나 재키 블랜치플라워와 함께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엘름그로브 초등학교에 다녔으며, 학교 축구팀의 주장을 맡았고, 북아일랜드 유소년 대표팀 선수단에도 선발되었다.
1.2. 클럽 경력
빙엄의 클럽 경력은 1948년 북아일랜드의 글렌토런에서 시작하여, 잉글랜드 리그의 여러 주요 클럽들을 거치며 그의 재능을 입증했다.
1.2.1. 글렌토런
빙엄은 1948년 글렌토런에서 주급 6 GBP를 받으며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49년 3월 12일, 그는 밸리미나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1-1로 비기며 1군 무대에 데뷔했다. "글렌"은 1949-50 시즌 아이리시 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글렌토런 소속으로 활동하는 동안, 빙엄은 아일랜드 리그 축구 대표팀 경기에 두 차례 출전하기도 했다.
1.2.2. 선덜랜드
1950년 10월, 빙엄은 1.00 만 GBP의 이적료로 선덜랜드에 합류했다. 로커 파크에서 프로 축구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 동시에, 그는 선덜랜드 조선소에서 선박 건조 견습생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의 빠른 속도와 뛰어난 공 제어 능력 덕분에 "검은 고양이 군단" 팬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으며, 빌 머리 감독 체제의 1950-51 시즌에 점차 1군 주전으로 자리 잡았다.
1951-52 시즌에는 주전 최우측 공격수로 활약했으나, 1952-53 시즌에는 토미 라이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1953-54 시즌에도 라이트에 밀려 19경기 출전에 그쳤다. 하지만 1954-55 시즌에 다시 주전으로 복귀하여 42경기에서 10골을 기록했고, 선덜랜드는 1부 리그 4위를 기록하며 우승팀 첼시와는 단 4점 차이를 보였다. 같은 해, 선덜랜드는 FA컵 준결승에 진출했으나, 빌라 파크에서 맨체스터 시티에 패했다.
1955-56 시즌에는 리그 성적이 9위로 하락했으며, FA컵에서도 다시 준결승에서 탈락했는데, 이번에는 버밍엄 시티에 0-3으로 패했다. 1956-57 시즌은 부진하게 시작하여 10월에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그 결과 이적 요청을 했으나 거절되었다. 후임 앨런 브라운 감독은 글렌토런에서 최우측 공격수 앰비 포거티를 영입했으나, 팀은 1957-58 시즌에 강등되었다. 1군에서 밀려난 빙엄은 브라운 감독과 갈등을 겪었고, 여름에 8000 GBP의 이적료로 1부 리그의 루턴 타운으로 이적했다. 그는 선덜랜드 소속으로 모든 대회를 통틀어 227경기에 출전하여 47골을 기록했다.
1.2.3. 루턴 타운
루턴 타운은 1958-59 시즌에 리그를 17위로 마쳤으나, 빙엄이 노리치 시티와의 FA컵 준결승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리며 결승전에 진출했다. 웸블리에서 열린 결승전에서는 그의 코너킥이 데이브 페이시의 만회골로 이어졌지만, 팀은 노팅엄 포리스트에 1-2로 패했다.
1959-60 시즌에 빙엄은 리그에서 16골을 기록하며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었으나, 시드 오언 감독 체제에서 루턴은 강등되었다. 샘 버트럼 신임 감독도 빙엄을 케닐워스 로드에 오래 머물게 하지 못했다. 그는 2부 리그 11경기에서 3골을 기록했는데, 특히 앤필드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35 yd짜리 뜬 공 슛을 성공시키며 에버턴과 아스널의 관심을 받았다. 그는 루턴 타운에서 총 99경기에 출전하여 33골을 기록했다.
1.2.4. 에버턴
1960년 10월, 빙엄은 1.50 만 GBP의 이적료로 에버턴에 합류했다. 조니 캐리와 해리 캐터릭이 구디슨 파크의 지휘봉을 잡았고, 팀은 1960-61 시즌을 5위로 마쳤다. 1961-62 시즌에는 4위를 기록했고, "토피 군단"은 1962-63 시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캐터릭 감독이 1963년 2월에 스코틀랜드 출신 앨릭스 스콧을 4.00 만 GBP에 영입하면서, 빙엄의 에버턴에서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에버턴 소속으로 98경기에 출전하여 26골을 기록했다.
1.2.5. 포트 베일
1963년 8월, 빙엄은 당시 구단 역대 최고 이적료인 1.50 만 GBP에 포트 베일로 이적했다. 그는 1963-64 시즌에 38경기에 출전하여 7골을 기록했고, 프레디 스틸 감독의 "용기 군단"은 3부 리그를 13위로 마쳤다. 당시 노팅엄 포리스트의 감독이었던 조니 캐리는 그를 1부 리그로 복귀시키기 위해 1.20 만 GBP를 제안했지만, 빙엄은 베일 파크에 남기로 결정했다.
그는 1964년 9월 5일 브렌트퍼드와의 경기에서 팀이 0-4로 패배하는 도중 다리 골절을 당하며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33세의 나이에 선수 경력을 마감했고, 1965년 4월 자유 이적으로 사우스포트로 옮겨 기술 코치 역할을 맡았다. 그는 모든 국내 대회를 통틀어 525경기에 출전하여 133골을 기록했다. 포트 베일에서는 43경기에 출전하여 7골을 기록했다.
1.3. 국가대표팀 경력
빙엄은 19세의 나이에 프랑스를 상대로 첫 북아일랜드 국가대표팀 경기에 출전했다. 피터 도허티 감독은 그를 스웨덴에서 열린 1958년 FIFA 월드컵에 차출했다. 이에 앞서 빙엄은 리스본에서 열린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득점하며 북아일랜드가 포르투갈과 이탈리아를 제치고 본선 진출을 확정 짓는 데 기여했다.
대회 본선에서 북아일랜드는 체코슬로바키아를 꺾고 서독과 비긴 뒤,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다시 체코슬로바키아를 물리치고 8강전에 진출했으나, 프랑스에 0-4로 패했다. 그는 총 56번의 국제 경기에 출전하여 당시 역대 최다 출전 기록을 세웠으며, 10골을 기록했는데, 이 중 절반은 스코틀랜드와의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경기에서 기록했다.
1.4. 경기 방식
빙엄은 최우측 공격수 포지션에서 뛰어난 전술적이고 위치적인 기술과 득점 능력을 겸비한 선수였다. 그는 자연스러운 측면 공격 재능을 가진 토미 로턴, 스탠리 매슈스, 톰 핀리와는 달랐지만, 잉글랜드 축구에 발을 들인 후에는 실질적이고 이론적인 면에서 모두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측면 수비수들을 제치고 문전 안으로 날카로운 패스를 공급할 수 있도록 주력, 힘, 그리고 통제력을 길렀다. 또한 먼 거리에서의 슈팅과 문전 6 yd 이내에서의 섬세한 터치 연습을 통해 효율적으로 득점을 노렸다. 무엇보다도 그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인 몸싸움과 충돌을 마다하지 않을 만큼 용감했다.
2. 감독 경력
선수 은퇴 후 빌리 빙엄은 감독으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선보였다. 그는 여러 클럽과 국가대표팀을 이끌며 팀의 수준을 끌어올리고 역사적인 성과를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북아일랜드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두 차례 월드컵 본선에 진출시킨 것은 그의 감독 경력 중 가장 빛나는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2.1. 사우스포트
빙엄은 1965년 6월 사우스포트의 기술 코치로 합류했으며, 그해 말 윌리 커닝엄의 후임으로 감독에 임명되었다. 그는 1965-66 시즌에 4부 리그에서 팀을 10위에 올렸다. 감독으로서 첫 풀 시즌이었던 1966-67 시즌에는 "모래갈이 군단"을 이끌고 준우승을 차지하며 구단 역사상 첫 승격을 이룩했다. 그는 1967년 10월 헤이그 애비뉴를 떠났으며, 사우스포트는 던 매키보이 감독의 지휘 아래 1967-68 시즌 3부 리그에서 13위로 안전하게 시즌을 마쳤다.
2.2. 북아일랜드, 플리머스, 린필드
빙엄은 1967년 10월 사우스포트를 떠나 북아일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국가대표팀 감독직은 비교적 여유가 있었기에, 빙엄은 1968년 2월 데렉 우프턴의 후임으로 플리머스 아가일 감독직을 겸임하기 시작했다. 그는 팀을 강등에서 구해내지 못했고, "순례자들"은 2부 리그 최하위로 강등되었다. 그는 팀을 이끌고 1968-69 시즌 3부 리그에서 5위를 차지했지만, 2위 팀 스윈던 타운과는 15점 차이였다. 1969-70 시즌에도 강등권에서 허덕이자, 빙엄은 1970년 3월 홈 파크를 떠났고, 팀은 엘리스 스튜어드 감독의 지휘 아래 17위로 시즌을 마쳤다.
여전히 북아일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유지하던 그는 1970년 8월 자국 최대 클럽인 린필드 감독직도 겸임했다. 그가 윈저 파크에서 보낸 한 시즌은 대성공적이었다. 그는 "파란 군단"을 이끌고 글렌토런을 3점 차로 제치고 1970-71 시즌 아이리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같은 해, 린필드는 얼스터컵, 골드컵, 블랙스니트컵도 석권하며 4관왕을 달성했다. 그는 1971년 5월 북아일랜드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내려놓았고, 같은 해 8월 린필드도 떠났다. 북아일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20경기를 치러 8승 3무 9패를 기록했으며, 모스크바 원정에서 소련에 패하며 1970년 월드컵 예선에서 탈락했다.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는 1969년 3위, 1970년 4위, 1971년 2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2.3. 그리스 국가대표팀
1971년 9월, 빙엄은 라키스 페트로풀로스의 후임으로 그리스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그리스는 12월 1일 카라이스카키스 경기장에서 열린 잉글랜드와의 유로 1972 예선전에서 제프 허스트와 마틴 치버스에게 실점하며 0-2로 패배하여 잉글랜드의 본선 진출을 확정시켰다. 그는 스페인과의 두 차례 경기에서 모두 패한 후 1973년 2월에 사임했고, 그리스는 1974년 월드컵 예선전을 통과하지 못했다.
2.4. AEK 아테네
그리스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내려놓은 직후, 빙엄은 브란코 스탄코비치 감독의 후임을 찾던 AEK 아테네의 지휘봉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세 달 만에 성적 부진으로 해임되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팀은 다음 시즌 유럽 대항전 진출권에서 멀어졌다.
2.5. 에버턴 (두 번째 임기)
1973년 5월, 빙엄은 해리 캐터릭의 후임으로 에버턴 감독이 되면서 잉글랜드 축구계로 복귀했다. 그는 마틴 도브슨과 밥 래치퍼드와 같은 선수들을 영입하며 "토피 군단"을 1973-74 시즌 1부 리그 7위로 이끌었는데, UEFA컵 진출권까지는 불과 2점 차이였다. 에버턴은 1974-75 시즌에 다시 우승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지만, 마지막 5경기에서 단 한 번만 승리하며 실망스러운 4위로 시즌을 마쳤고, 우승팀 더비 카운티와는 3점 차이였다. 1975-76 시즌에는 에버턴이 11위로 마감하며 구디슨 파크의 팀의 하락세가 시작되었다. 8경기 연속 무승의 성적 부진으로 인해 빙엄은 1977년 1월에 해임되었다. 이후 팀은 고든 리 감독의 지휘 아래 1976-77 시즌을 9위로 마쳤고, 풋볼 리그컵 준우승과 FA컵 준결승 진출도 달성했다.
2.6. PAOK와 맨스필드
빙엄은 1977년 4월 그리스로 돌아와 브란코 스탄코비치의 후임으로 PAOK 감독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6개월 만에 해임되었고, 후임 라키스 페트로풀로스 감독은 1977-78 시즌 알파 에트니키에서 팀을 2위로 이끌었다. 이후 그는 1978년 2월 피터 모리스의 후임으로 맨스필드 타운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1977-78 시즌 2부 리그 강등 위기에 처한 "숫사슴 군단"을 구해내지 못했다. 1978-79 시즌은 그가 클럽 감독으로 보낸 마지막 시즌이었는데, 그는 맨스필드를 3부 리그 18위로 이끈 후 여름에 필드 밀을 떠났다.
2.7. 북아일랜드 국가대표팀 (두 번째 임기)
빙엄은 1980년 3월 북아일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으며, 이 시기는 그의 감독 경력 중 가장 성공적인 기간으로 기억된다. 그는 1980년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하여 96년 만에 처음으로 단독 우승을 이룩했다. 이 대회에서 그는 스코틀랜드와 웨일스를 꺾고 잉글랜드와는 무승부를 기록했다. 하지만 1982년 대회에서는 단 1점을 얻는 데 그쳤다.
빙엄은 1982년 FIFA 월드컵 예선전에서 스웨덴, 포르투갈, 이스라엘을 차례로 꺾으며 스코틀랜드와 함께 놀라운 본선 진출을 이뤄냈다. 대회 본선에서 북아일랜드는 팻 제닝스 골키퍼, 마틴 오닐 주장, 17세 유망주 노먼 화이트사이드 등 소수의 정상급 선수들만 보유한 한정된 전력에도 불구하고, 개최국 스페인을 메스타야에서 1-0으로 꺾는 이변을 연출했다. 온두라스와 유고슬라비아와의 무승부 이후, 제러드 조지프 암스트롱의 단 2골만으로 조 1위를 차지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2차 조별 리그에서는 오스트리아와 2-2 무승부를 기록하고 프랑스에 1-4로 패하며 토너먼트에서 탈락했다.
그는 1983년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 3위를 차지했고, 1984년 마지막으로 열린 이 대회에서 스코틀랜드를 2-0으로 꺾고 다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북아일랜드는 유로 1984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예선 조 경기에서 벨파스트와 폴크스파르크슈타디온에서 열린 서독과의 두 경기를 모두 1-0으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경기에서 서독의 게르하르트 슈트라크가 알바니아를 상대로 결승골을 터뜨리면서 서독이 골득실차로 북아일랜드를 제치고 유일한 본선 진출권을 획득했다.
빙엄은 팀을 1986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시키며 1982년의 성공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북아일랜드는 예선전에서 루마니아, 핀란드, 튀르키예를 꺾고 조 2위를 차지하여 잉글랜드와 함께 본선에 올랐다. 그러나 D조에서 브라질과 스페인이라는 강팀을 상대해야 하는 어려운 도전에 직면했으며, 알제리와의 경기에서 1점을 얻는 데 그치며 토너먼트에서 탈락했다. 그는 또한 1987-88 시즌 동안 사우디 프로페셔널 리그의 알-나스르를 지도하여 1987년 국왕컵에서 구단 통산 5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마틴 오닐, 팻 제닝스의 은퇴와 노먼 화이트사이드의 부상으로 인해 빙엄은 핵심 선수들을 잃었다. 북아일랜드는 1990년과 1994년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고, 그는 1993년 11월에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1994년 월드컵 예선전의 마지막 상대는 아일랜드였는데, 이 경기는 파벌주의와 논란으로 얼룩졌다. 빙엄의 팀은 아일랜드가 덴마크를 제치고 본선 진출에 필요한 승점을 얻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북아일랜드는 이미 본선 진출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지미 퀸의 골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의 막판 동점골이 터졌다. 경기 후, 빙엄과 잭 찰턴 아일랜드 국가대표팀 감독 사이에 거친 언쟁이 오갔다. 1990년과 1994년 예선 조는 모두 스페인과 아일랜드가 본선에 진출했으며, 북아일랜드는 본선 진출권과 큰 승점 차이를 보였다.
2.8. 이후 활동
감독직 은퇴 후 빙엄은 블랙풀의 단장을 역임했다. 2008년 5월, 그는 은퇴를 번복하고 번리의 아일랜드 지역 스카우터로 활동했다.
3. 사생활과 말년
빙엄은 1981년 여왕 생축 수여식에서 축구계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대영 제국 구성원장(MBE)을 받았다. 그는 두 번 결혼하고 이혼했으며, 첫 결혼에서 아들과 딸을 두었다.
2006년에 치매 진단을 받은 그는 2022년 6월 9일, 90세의 나이로 사우스포트의 한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그는 1994년 FA컵 공로자 표창, 2004년 FIFA 공로자 표창을 받았다.
4. 수상 경력
4.1. 선수
- 루턴 타운
- FA컵 준우승: 1958-59
- 에버턴
- 풋볼 리그 1부: 1962-63
4.2. 감독
- 사우스포트
- 풋볼 리그 4부 준우승 (3부 리그 승격): 1966-67
- 린필드
- 아이리시 리그: 1970-71
- 얼스터컵: 1971
- 골드컵: 1971
- 블랙스니트컵: 1971
- 북아일랜드
-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80, 1984
- 알-나스르
-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컵: 1987
5. 경력 통계
5.1. 클럽 통계
구단 | 시즌 | 리그명 | 리그 | FA컵 | 기타 | 합계 | ||||
---|---|---|---|---|---|---|---|---|---|---|
출장 | 골 | 출장 | 골 | 출장 | 골 | 출장 | 골 | |||
글렌토런 | 1948-49 | 아이리시 리그 | 0 | 0 | 0 | 0 | 0 | 0 | 0 | 0 |
1949-50 | 0 | 0 | 0 | 0 | 0 | 0 | 0 | 0 | ||
1950-51 | 0 | 0 | 0 | 0 | 0 | 0 | 0 | 0 | ||
합계 | 60 | 21 | 0 | 0 | 0 | 0 | 60 | 21 | ||
선덜랜드 | 1950-51 | 1부 리그 | 13 | 4 | 0 | 0 | 0 | 0 | 13 | 4 |
1951-52 | 36 | 7 | 2 | 0 | 0 | 0 | 38 | 7 | ||
1952-53 | 19 | 6 | 2 | 0 | 0 | 0 | 21 | 6 | ||
1953-54 | 19 | 3 | 1 | 0 | 0 | 0 | 20 | 3 | ||
1954-55 | 35 | 10 | 7 | 0 | 0 | 0 | 42 | 10 | ||
1955-56 | 27 | 6 | 6 | 0 | 0 | 0 | 33 | 6 | ||
1956-57 | 27 | 5 | 1 | 1 | 0 | 0 | 28 | 6 | ||
1957-58 | 30 | 4 | 2 | 1 | 0 | 0 | 32 | 5 | ||
합계 | 206 | 45 | 21 | 2 | 0 | 0 | 227 | 47 | ||
루턴 타운 | 1958-59 | 1부 리그 | 36 | 8 | 9 | 6 | 0 | 0 | 45 | 14 |
1959-60 | 40 | 16 | 3 | 0 | 0 | 0 | 43 | 16 | ||
1960-61 | 2부 리그 | 11 | 3 | 0 | 0 | 0 | 0 | 11 | 3 | |
합계 | 87 | 27 | 12 | 6 | 0 | 0 | 99 | 33 | ||
에버턴 | 1960-61 | 1부 리그 | 26 | 9 | 1 | 0 | 3 | 1 | 30 | 10 |
1961-62 | 37 | 9 | 3 | 1 | 0 | 0 | 40 | 10 | ||
1962-63 | 23 | 5 | 3 | 1 | 2 | 0 | 28 | 6 | ||
합계 | 86 | 23 | 7 | 2 | 5 | 1 | 98 | 26 | ||
포트 베일 | 1963-64 | 3부 리그 | 35 | 6 | 2 | 1 | 1 | 0 | 38 | 7 |
1964-65 | 5 | 0 | 0 | 0 | 0 | 0 | 5 | 0 | ||
합계 | 40 | 6 | 2 | 1 | 1 | 0 | 43 | 7 | ||
경력 합계 | 479 | 122 | 42 | 11 | 6 | 1 | 527 | 134 |
5.2. 국가대표팀 통계
국가대표팀 | 연도 | 출장 | 골 |
---|---|---|---|
북아일랜드 | 1951 | 3 | 0 |
1952 | 4 | 0 | |
1953 | 3 | 0 | |
1954 | 3 | 1 | |
1955 | 3 | 1 | |
1956 | 3 | 0 | |
1957 | 7 | 1 | |
1958 | 10 | 0 | |
1959 | 3 | 1 | |
1960 | 4 | 1 | |
1961 | 5 | 0 | |
1962 | 4 | 2 | |
1963 | 4 | 1 | |
합계 | 56 | 10 |
5.3. 국가대표팀 득점 목록
아래의 점수에서 왼쪽의 점수가 북아일랜드의 점수이다.
# | 날짜 | 경기장 | 상대 | 점수 | 결과 | 대회 |
---|---|---|---|---|---|---|
1 | 1954년 11월 3일 |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 스코틀랜드 | 2-2 | 1954-55년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 |
2 | 1955년 10월 8일 |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 스코틀랜드 | 2-1 | 1955-56년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 |
3 | 1957년 1월 16일 | 포르투갈 리스본 | 포르투갈 | 1-1 | 1958년 FIFA 월드컵 예선 | |
4 | 1957년 10월 5일 |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 스코틀랜드 | 1-1 | 1957-58년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 |
5 | 1958년 10월 15일 | 스페인 마드리드 | 스페인 | 2-6 | 친선경기 | |
6 | 1959년 11월 18일 | 잉글랜드 런던 | 잉글랜드 | 1-2 | 1959-60년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 |
7 | 1960년 4월 6일 | 웨일스 렉섬 | 웨일스 | 2-3 | 1959-60년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 |
8 | 1962년 11월 7일 |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 스코틀랜드 | 1-1 | 1962-63 년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 |
9 | 1962년 11월 28일 |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 폴란드 | 2-0 | 유로 1964 예선전 | |
10 | 1963년 10월 12일 |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 스코틀랜드 | 2-1 | 1963-64년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
5.4. 감독 통계
구단 | 취임 | 해임 | 기록 | ||||
---|---|---|---|---|---|---|---|
경기 횟수 | 승리 횟수 | 무승부 횟수 | 패배 횟수 | 승률 | |||
사우스포트 | 1965년 6월 1일 | 1968년 2월 14일 | 134 | 58 | 32 | 44 | 43.3% |
플리머스 아가일 | 1968년 2월 14일 | 1970년 3월 1일 | 104 | 35 | 29 | 40 | 33.7% |
에버턴 | 1973년 5월 28일 | 1977년 1월 8일 | 171 | 63 | 55 | 53 | 36.8% |
맨스필드 타운 | 1978년 2월 23일 | 1979년 7월 9일 | 71 | 21 | 24 | 26 | 29.6% |
합계 | 480 | 177 | 140 | 163 | 36.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