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노비 스타일스는 1942년 5월 18일, 잉글랜드 북부 맨체스터의 노동 계급 지역인 콜리허스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공습 중에 가족이 살던 집의 지하실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찰리는 가족 사업인 장의사 사장으로 일했고, 어머니 키티는 재봉사로 일하며 가계 수입을 보탰다. 그는 아일랜드계 혈통이었다. 그는 지역의 성 패트릭 가톨릭 (초등) 학교에 다녔다.
2. Playing Career
노비 스타일스는 선수로서 주로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을 수행하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의 터프하고 헌신적인 플레이는 동료들에게 공간을 만들어주고 팀의 전술적 안정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2.1. Club Career
노비 스타일스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보냈으며, 이후 미들즈브러와 프레스턴 노스 엔드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2.1.1. Manchester United
스타일스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15세에 잉글랜드 학원 축구팀에서 활약할 때부터 그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같은 해인 1959년 9월, 그가 지지하던 클럽에서 수습 생활을 시작하며 어릴 적 꿈을 이뤘다. 스타일스는 여러모로 특이한 외모의 축구 선수였다. 그는 구단들이 단지 키가 작다는 이유로 십 대 선수들을 거부하던 시절에 키가 작았고, 여러 개의 치아가 없어 의치를 착용했으며, 경기 전에 의치를 빼면 상대를 위협할 수 있는 듬성듬성한 치아를 드러냈다. 또한 그는 젊은 나이에 상당한 탈모를 겪어 극적인 콤 오버 헤어스타일을 연출했고, 심한 근시여서 경기 중에는 강한 콘택트렌즈를 착용했고 경기장 밖에서는 두꺼운 안경을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 맷 버스비는 이 끈기 있는 젊은 선수에게서 가능성을 보았다. 스타일스는 1960년 10월 볼턴 원더러스와의 경기에서 풀백으로 데뷔했다. 그의 단순한 패스 게임과 두려움 없는 공 따내기 기술 덕분에 그는 빠르게 "홀딩" 미드필더로 전환되었다. 이는 오늘날 모든 상위 팀에서 필수적인 역할이지만, 당시에는 공격 라인이 5명의 선수로 구성되고 미드필드가 하프백을 보조하는 역할에만 국한되어 있던 시기여서 여전히 드문 역할이었다. 공을 얻고 유지하는 그의 능력은 보비 찰턴과 나중에는 조지 베스트와 같은 동료들이 경기장에서 더 많은 공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스타일스의 수비 기술은 그의 성공적인 선수 경력 내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들에 의해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버스비는 필요할 경우 스타일스를 희생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1963년 FA컵 결승전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레스터 시티를 3-1로 이겼을 때 스타일스는 경기에 선발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시즌에 더 자주 출전하기 시작했으며, 1965년에 퍼스트 디비전 우승을 차지했다. 1967년, 스타일스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함께 두 번째 리그 챔피언십 메달을 획득했지만, 더 큰 클럽의 영광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웸블리에서 열릴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진출했고, 스타일스의 오랜 숙적 에우제비우는 벤피카의 강력한 공격 잠재력의 일부로서 다시 한번 그가 상대해야 할 선수였다. 스타일스는 에우제비우를 완전히 침묵시키지는 못했지만 잘 활약했고, 경기 종료 몇 분을 남기고 1-1 동점 상황에서 포르투갈의 전설적인 선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수비진을 뚫고 알렉스 스테프니 골키퍼를 상대했지만, 공을 스테프니의 몸통에 그대로 박아넣는 데 그쳤다. 결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4-1로 승리하며 유럽의 주요 트로피를 들어 올린 최초의 잉글랜드 클럽이 되었다.
2.1.2. Later Clubs
395경기 출전과 19골을 기록한 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971년 스타일스를 미들즈브러에 2.00 만 GBP의 이적료로 매각했다. 2년 후, 그는 보비 찰턴이 감독으로 있을 때 프레스턴 노스 엔드에서 선수 겸 코치가 되었다.
2.2. International Career
노비 스타일스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핵심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특히 1966년 월드컵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2.1. 1966 FIFA World Cup
잉글랜드가 1966년 월드컵 개최국이 되면서 알프 램지 감독은 예선전을 준비할 필요가 없었고, 대신 이전 2년 동안 친선 경기와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경기를 통해 선수들을 꼼꼼하게 평가했다. 보비 찰턴만이 월드컵 미드필드에서 확실한 선수였으므로, 램지 감독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공격수를 보완할 세 명의 선수를 만들어야 했고, 그중에는 "스포일러" 역할에 대한 요구가 포함되었다. 스타일스는 1965년 4월 10일 웸블리에서 스코틀랜드와의 2-2 무승부 경기에서 이 역할을 시험받았다. 그는 다음 9번의 국제 경기 중 8번의 경기에서 자리를 지켰고, 그 과정에서 서독을 상대로 웸블리에서 1-0 승리를 거두는 유일한 골을 기록했다. 램지 감독이 22명 선수 명단을 확정할 때쯤, 그는 월드컵 잉글랜드 선발팀에 포함될 것이 확실시되었다.
스타일스는 우루과이와의 무득점 무승부로 대회를 시작하면서 15번째 캡을 기록했고, 백 포 라인 앞에서 타협하지 않는 강인한 선수로 자리를 유지하며 찰턴과 같은 선수들이 그 앞에서 공간과 시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스타일스는 한 경기도 빠지지 않고 멕시코와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하며 조별 리그를 통과했고, 8강에서는 거친 아르헨티나 팀을 간신히 제쳤다. 프랑스전에서 스타일스는 거친 태클로 프랑스의 미드필더 자크 시몽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혔고, 언론과 축구 협회에서는 스타일스를 제외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다. 램지 감독은 태클이 악의적이라기보다는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고 확신하며 스타일스를 공개적으로 옹호했다.
준결승전에서 스타일스는 포르투갈의 플레이메이커이자 골 득점원인 에우제비우에 대한 효과적인 대인 방어를 수행하여, 뛰어난 기술을 가진 선수가 잉글랜드가 2-1로 승리한 경기 내내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일부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술은 효과적이었다. 에우제비우의 유일한 주요 기여는 막판에 얻은 페널티킥이었으며, 양 팀 모두 적은 파울로 매력적인 축구를 했다고 평가받는 경기에서 잉글랜드는 결승에 진출했다. 경기 후 라커룸에서 램지 감독은 스타일스의 개인적인 활약에 대해 칭찬했는데, 이는 흔치 않은 찬사였다.
20번째 캡을 기록한 스타일스는 서독을 상대로 특별한 대인 방어 임무를 부여받지 않았지만, 잉글랜드가 2-1로 앞선 상황에서 경기 종료 직전 동점을 허용한 후 연장전에서 제프 허스트가 해트트릭을 완성하며 우승을 차지하는 강하고 터프한 경기를 펼쳤다. 최종 휘슬이 울리자 스타일스는 줄리메컵을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의치를 든 채 즉흥적으로 춤을 추었다. 30년 후 이 순간은 1996년 UEFA 유로 1996을 위해 더 라이트닝 시즈와 함께 작사한 잉글랜드 응원가 "Three Lions"의 가사에서 프랭크 스키너와 데이비드 배디엘에 의해 언급되었다. 1996년 버전에서는 잉글랜드 축구 추억 목록이 "...노비 댄싱"으로 끝나고, 1998년 버전에서는 프랑스에서 열린 월드컵 결승전을 언급하며 중간 부분이 "우리는 노비의 춤을 출 수 있어, 우리는 프랑스에서 춤을 출 수 있어"라는 가사로 구성되었다.

2.2.2. Later International Appearances
스타일스는 다음 4번의 국제 경기에 출전했지만, 1967년 웸블리에서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에 패배하면서 부진한 경기력을 보였다고 평가되어 램지 감독에 의해 제외되었다. 스타일스는 1968년 유럽 선수권 대회에 출전할 잉글랜드 대표팀에 선발되었지만, 미드필드의 홀딩 역할은 토트넘 홋스퍼의 앨런 멀러리가 차지했다. 잉글랜드는 준결승전에서 유고슬라비아에 패배했고, 이 경기에서 멀러리는 잉글랜드 선수로는 최초로 퇴장당했다. 스타일스는 소련과의 의미 없는 3위 결정전에 다시 소집되었지만, 멀러리가 비록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램지 감독의 첫 번째 선택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스타일스는 1969년에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단 한 번, 1970년에 두 번만 출전했다. 그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대표팀에 램지 감독에 의해 선발되었지만, 멀러리의 백업 선수로서였다. 잉글랜드가 8강에서 우승 타이틀을 내주는 동안 그는 대회에 한 번도 출전하지 못했고, 이후 다시는 국가대표팀에서 뛰지 못했다. 그는 28캡으로 국가대표팀 경력을 마쳤는데, 이는 1966년 우승팀 주전 11명 중 가장 적은 캡 수였으며, 1골을 기록했다.
2.3. Playing Style
노비 스타일스는 필드 위에서 파이터이자 전략가였다. 그는 "터프한 태클"과 "볼 따내기 능력"으로 유명했으며, 이는 그를 "홀딩 미드필더" 또는 "파괴자"로 불리게 했다. 그의 주요 임무는 공을 되찾고, 끊임없이 뛰며, 그 공을 보비 찰턴이나 조지 베스트와 같은 창의적인 공격수들에게 정확하게 배급하여 그들이 더 많은 공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는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패스 게임을 구사했으며,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상대 공격을 저지하고 팀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존재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잉글랜드 대표팀 모두에게 전술적인 안정성을 제공했다.
3. Managerial and Post-Playing Career
선수 은퇴 후 노비 스타일스는 다양한 감독직을 수행하며 축구계에 계속 기여했다. 특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소년팀 코치로서 미래의 스타들을 양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3.1. Managerial Career
1975년 8월, 스타일스는 보비 찰턴이 수비수 존 버드가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이적한 것에 항의하여 사임하자 프레스턴의 임시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나, 일주일 후 옛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 동료를 지지하며 사임했다. 스타일스는 1977년 7월 22일부터 1981년 6월 1일까지 프레스턴의 감독으로 다시 돌아와 봉사했다.
스타일스는 1981년 나이든 유럽 선수들이 NASL로 이주하는 흐름에 합류하여 밴쿠버 화이트캡스의 코치가 되었고, 캐나다 클럽에서 3년간 일했다. 1985년 9월 29일, 스타일스는 웨스트 브롬위치 앨비언의 감독직을 맡았지만, 그의 지도 아래 팀이 단 3승만을 기록한 후 다음 해 2월에 해고되었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감독직 시도였다. 그는 나중에 이 직책을 맡으면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밝혔는데, 미들랜즈에서 일하며 가족이 살던 맨체스터에서 매일 출퇴근하는 것에 대처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3.2. Youth Coaching and Other Roles
1989년부터 1993년까지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유소년팀 코치로 일하며 데이비드 베컴, 라이언 긱스, 폴 스콜스와 같은 십대 신동들의 상당한 기술을 개발했다. 니키 버트와 네빌 형제인 게리 네빌과 필 네빌도 이때 성장했다. 2000년, 스타일스는 1966년 팀의 다섯 명의 선수가 그들의 업적에 대해 공식적으로 훈장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한 언론의 캠페인 끝에 대영 제국 훈장 (MBE)을 수여받았다. 스타일스는 앨런 볼 주니어, 로저 헌트, 레이 윌슨, 조지 코언과 함께 이 상을 수상했다.
4. Personal Life
노비 스타일스는 1963년 6월 케이 자일스와 결혼했다. 그의 아내는 조니 자일스의 누이였으며, 두 사람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팀 동료로 지내던 무렵에 서로 소개받았다. 그들은 맨체스터에 살며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스타일스의 아들 존 스타일스도 축구 선수였으며, 1980년대에 섐록 로버스와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뛰었다.
스타일스는 평생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심지어 월드컵 결승전 당일에도 미사에 참석하려고 노력했다. 1968년, 스타일스는 첫 번째 자서전인 축구 나의 전장(Soccer My Battlefield)을 출간했고, 2003년에는 두 번째 자서전인 경기 후(After the Ball)를 출간했다. 2007년, 그는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스타일스의 FIFA 월드컵 메달과 유러피언컵 메달은 2010년 10월 27일 경매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의해 20.00 만 GBP 이상에 구매되었다. 스타일스가 1966년 서독과의 결승전에서 획득한 월드컵 메달은 16.00 만 GBP에 팔렸다. 그가 1968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획득한 유러피언컵 메달 또한 4.90 만 GBP 이상에 팔렸다. 스타일스는 가족이 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메달을 팔았다. 2011년 BBC TV 드라마 유나이티드에서 십대 시절의 스타일스가 배우 카일 워드에 의해 연기되었다. 이 드라마는 8명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가 사망한 1958년 뮌헨 비행기 참사를 중심으로 다루었다.
5. Health and Death
2013년 11월 24일, 스타일스가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다고 발표되었고, 2016년에는 진행성 치매를 앓고 있다고 발표되었다. 그는 잉글랜드의 1966년 월드컵 우승 50주년 기념 만찬에 참석하기에는 너무 아팠다. 2017년 11월, 전 잉글랜드 스트라이커 앨런 시어러가 진행한 은퇴한 축구 선수들의 뇌 손상에 관한 BBC 다큐멘터리에는 스타일스의 아들과의 인터뷰가 포함되었다.
스타일스는 2020년 10월 30일, 78세의 나이로 맨체스터의 매너 헤이 케어 센터에서 사망했다. 그는 만성 외상성 뇌병증 (CTE)으로 인한 전립선암과 치매로 고통받았다. 이는 반복적인 축구공 헤딩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타일스의 뇌는 치매와 프로 축구 선수 경력 간의 연관성을 연구하는 윌리 스튜어트 박사의 FIELD 연구에 기증되었다. 스타일스는 1966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뛰었던 잉글랜드 선수 중 치매로 사망했거나 고통받은 5명 중 한 명이다. 그의 뇌 기증은 축구와 같은 신체 접촉이 많은 스포츠에서 뇌 손상의 위험성과 그로 인한 만성 질환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6. Legacy and Honours
노비 스타일스는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선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되며, 특히 1966년 월드컵 우승의 주역이자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강인한 정신과 헌신적인 플레이는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6.1. Honours and Achievements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퍼스트 디비전: 1964-65, 1966-67
- FA컵: 1962-63
- 채리티 실드: 1965 (공동 우승), 1967 (공동 우승)
- 유러피언컵: 1967-68
잉글랜드
- FIFA 월드컵: 1966
개인
- 풋볼 리그 100 레전드: 1998 (헌액)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7 (헌액)
- PFA 세기의 팀 (1907-1976): 2007
- FAI 국제 축구 시상식 - 국제 인물: 1998
6.2. Cultural Impact and Evaluation
노비 스타일스는 그의 1966년 월드컵 우승 후 세리머니인 "노비 댄스"로 대중문화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춤은 1996년 유로 96 잉글랜드 응원가 "Three Lions"의 가사에도 등장하며 그를 국민적인 영웅으로 각인시켰다. 그는 경기장에서 보여준 터프하고 타협하지 않는 모습과 달리, 월드컵 우승 후 의치를 뺀 채 춤을 추는 소박하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강인하면서도 우리 중 한 명'이라는 대중의 인식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말년에 만성 외상성 뇌병증 (CTE)으로 인한 치매로 고통받으며 뇌를 연구에 기증한 사실은 축구 선수들의 뇌 건강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촉발하고 인식을 높이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의 희생은 스포츠 관련 뇌 질환 연구와 선수 보호를 위한 노력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단순한 축구 선수를 넘어 사회적 문제 해결에 이바지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7. Career Statistics
7.1. Club
클럽 | 시즌 | 리그 | FA컵 | 리그컵 | 유럽 | 기타 | 합계 | |||||||||||
---|---|---|---|---|---|---|---|---|---|---|---|---|---|---|---|---|---|---|
디비전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1960-61 | 퍼스트 디비전 | 26 | 2 | 3 | 0 | 2 | 0 | - | - | 31 | 2 | ||||||
1961-62 | 퍼스트 디비전 | 34 | 7 | 4 | 0 | 0 | 0 | - | - | 38 | 7 | |||||||
1962-63 | 퍼스트 디비전 | 31 | 2 | 4 | 0 | 0 | 0 | - | - | 35 | 2 | |||||||
1963-64 | 퍼스트 디비전 | 17 | 0 | 2 | 0 | 0 | 0 | 2 | 0 | - | 21 | 0 | ||||||
1964-65 | 퍼스트 디비전 | 41 | 0 | 7 | 0 | 0 | 0 | 11 | 0 | - | 59 | 0 | ||||||
1965-66 | 퍼스트 디비전 | 39 | 2 | 7 | 0 | 0 | 0 | 8 | 1 | 1 | 0 | 55 | 3 | |||||
1966-67 | 퍼스트 디비전 | 37 | 3 | 2 | 0 | 1 | 0 | - | - | 40 | 3 | |||||||
1967-68 | 퍼스트 디비전 | 20 | 0 | 0 | 0 | 0 | 0 | 7 | 0 | 1 | 0 | 28 | 0 | |||||
1968-69 | 퍼스트 디비전 | 41 | 1 | 6 | 0 | 0 | 0 | 8 | 1 | 1 | 0 | 56 | 2 | |||||
1969-70 | 퍼스트 디비전 | 8 | 0 | 3 | 0 | 2 | 0 | - | - | 13 | 0 | |||||||
1970-71 | 퍼스트 디비전 | 17 | 0 | 0 | 0 | 2 | 0 | - | - | 19 | 0 | |||||||
합계 | 311 | 17 | 38 | 0 | 7 | 0 | 36 | 2 | 3 | 0 | 395 | 19 | ||||||
미들즈브러 | 1971-72 | 세컨드 디비전 | 25 | 1 | 6 | 0 | 2 | 0 | - | - | 33 | 1 | ||||||
1972-73 | 세컨드 디비전 | 32 | 1 | 1 | 0 | 3 | 0 | - | - | 36 | 1 | |||||||
합계 | 57 | 2 | 7 | 0 | 5 | 0 | 0 | 0 | 0 | 0 | 69 | 2 | ||||||
프레스턴 노스 엔드 | 1973-74 | 세컨드 디비전 | 27 | 1 | - | - | 27 | 1 | ||||||||||
1974-75 | 서드 디비전 | 19 | 0 | - | - | 19 | 0 | |||||||||||
합계 | 46 | 1 | 0 | 0 | 0 | 0 | 46 | 1 | ||||||||||
커리어 합계 | 414 | 20 | 45 | 0 | 12 | 0 | 36 | 2 | 3 | 0 | 510 | 22 |
7.2. International
국가대표팀 | 연도 | 출전 | 득점 |
---|---|---|---|
잉글랜드 | 1965 | 8 | 0 |
1966 | 15 | 1 | |
1967 | 1 | 0 | |
1968 | 1 | 0 | |
1969 | 1 | 0 | |
1970 | 2 | 0 | |
합계 | 28 | 1 |
:점수 및 결과는 잉글랜드의 득점을 먼저 표시하며, 점수 열은 스타일스의 각 득점 후의 점수를 나타냅니다.
번호 | 날짜 | 경기장 | 상대 | 점수 | 결과 | 대회 |
---|---|---|---|---|---|---|
1 | 1966년 2월 23일 | 웸블리 스타디움, 런던 | 서독 | 1-0 | 1-0 | 친선 경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