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Football Beginnings
보비 무어는 어린 시절부터 축구와 크리켓에 재능을 보였으며,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유소년팀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1.1. Childhood and Youth Career

보비 무어는 1941년 4월 12일 토요일, 잉글랜드 에식스주 바킹에 있는 업니 병원에서 로버트 E. 무어와 도리스 버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바킹의 웨스트버리 초등학교와 레이턴스톤의 톰 후드 스쿨에서 축구를 하며 성장했다.
1956년, 무어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의 선수로 입단하여 구단의 유소년 시스템을 거쳤다. 그는 제프 허스트와 함께 에식스 카운티 크리켓 클럽(Essex County Cricket Club영어) 유소년 팀에서 크리켓 선수로도 활동했다.
국가대표팀 수준에서는 잉글랜드 U-18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뛰었으며, 팀은 1958년 UEFA 유럽 U-19 챔피언십 결승에 진출했고 같은 해 영국 아마추어 유소년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그와 제프 허스트는 1959년 FA 유스컵 결승전 팀에서 뛰었으나 블랙번 로버스 FC에 총합 1-2로 패했다. 또한 같은 해에 서던 주니어 플러드라이트 컵에서 첼시 FC를 1-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한 팀의 일원이기도 했다.
1.2. Professional Debut and Early Club Career
1958년 9월 8일, 무어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를 상대로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에서 첫 프로 경기를 치렀다. 등번호 6번을 달았던 그는 결핵으로 고생하던 멘토 맬컴 앨리슨의 자리를 대신했다. 맬컴 앨리슨은 무어가 주전 선수로 자리 잡으면서 더 이상 웨스트햄에서 1군 경기를 뛰지 못하게 되었다.
차분한 센터백이었던 무어는 경기를 읽는 능력과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능력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이는 강한 태클이나 높은 점프를 하는 수비수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었다. 무어의 헤딩 능력이나 속도를 따라가는 능력은 기껏해야 평범했지만, 경기를 읽고 팀을 지휘하며 태클 타이밍을 잡는 방식은 그를 세계적인 선수로 만들었다. 무어는 웨스트햄 경력 동안 단 한 번 퇴장당했는데, 1961년 11월 맨체스터 시티 FC와의 경기 막판에 데이브 워그스태프에게 파울을 범했을 때였다. 심판은 파울 휘슬과 동시에 경기 종료 휘슬을 불었기에, 퇴장은 경기 후에야 분명해졌다.
2. Club Career
보비 무어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상징이었으며, 이후 풀럼 FC와 북미 리그에서도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2.1. West Ham United
무어는 16년 동안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에서 600경기 이상을 뛰며 구단의 역대 최고 선수로 널리 평가받았다. 그는 웨스트햄의 주장으로서 1963-64 시즌 FA컵 우승과 1964-65 시즌 UEFA 컵위너스컵 우승을 이끌었다.
1964년 FA컵 결승에서 웨스트햄은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를 3-2로 꺾고 우승했으며, 로니 보이스의 막판 골이 결정적이었다. 이 해에 무어는 축구 기자 협회 올해의 축구 선수 상을 수상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고환암 치료를 성공적으로 받았다.
1965년에는 TSV 1860 뮌헨을 2-0으로 꺾고 유러피언컵위너스컵에서 우승하며 두 번째 웸블리 결승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앨런 실리가 두 골을 모두 넣었다. 이 시기 그는 이미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주전 주장이었으며, 30경기에 출전했다. 알프 램지 감독은 1966년 FIFA 월드컵 우승을 예측하며 무어를 중심으로 팀을 구성하고 있었다.
1966년은 무어에게는 다사다난한 해였다. 1월에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1-1로 비기며 첫 국가대표 골을 기록했지만, 두 달 뒤 풋볼 리그 컵 결승에서 웨스트브로미치 앨비언 FC에 총합 5-3으로 패했다. 무어는 1차전에서 골을 넣었지만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무어와 웨스트햄 팀 동료인 제프 허스트, 마틴 피터스에게는 앞으로 큰 위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월드컵이 시작되기 2주 전, 무어는 노르웨이와의 친선 경기에서 자신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국가대표 골을 기록했다.
1973년, 무어는 509번째 출장으로 웨스트햄 역대 최다 출장 기록을 경신했다. 그의 기록은 이후 빌리 본즈에 의해 경신되었다. 그의 사망 15년 후인 2008년 8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는 그의 등번호 6번을 공식적으로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2.2. Fulham and Later Career
1974년 1월, 무어는 헤러포드 유나이티드 FC와의 FA컵 경기에서 부상을 당하며 웨스트햄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같은 해 3월 14일, 그는 15년 이상의 웨스트햄 생활을 마감하며 구단 역대 최다 출장 기록(이후 빌리 본즈가 경신)과 아웃필드 선수 최다 국가대표 출장 기록을 남겼다.
그는 2부 리그에 속한 런던 라이벌 풀럼 FC에 2.50 만 GBP의 이적료로 합류했다. 무어의 풀럼 첫 시즌 동안 팀은 리그컵에서 웨스트햄을 꺾고, 이후 FA컵 결승에 진출하여 다시 웨스트햄과 맞붙었다. 이번에는 풀럼이 2-0으로 패했고, 무어는 프로 선수로서 웸블리 스타디움에 마지막으로 등장했다.
무어는 1977년 5월 14일 블랙번 로버스 FC와의 경기를 끝으로 잉글랜드에서의 마지막 프로 경기를 치렀다. 이후 그는 북미 축구 리그(NASL)의 두 팀에서 뛰었다. 1976년 샌안토니오 선더에서 24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기록했고, 1978년 시애틀 사운더스에서 7경기에 출전했다. 1976년에는 U.S.A. 바이센테니얼 컵 토너먼트에서 팀 USA의 일원으로 이탈리아, 브라질, 게리 프랜시스가 주장으로 나선 잉글랜드 팀과의 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
1978년 4월, 그는 덴마크 축구의 프로 전환을 홍보하기 위해 덴마크 클럽 헤르닝 프레마드와 프로 선수 계약을 맺고 은퇴하기 전까지 9경기를 뛰었다. 같은 해 5월, 캐나다 클럽 에드먼턴 블랙 골드와 여름 친선 경기 일정에 합류했으며, 6월 23일 벤피카와의 경기를 앞두고 6주 후에 팀에 합류했다. 6월 28일 에드먼턴과 시애틀 사운더스의 두 번째 경기 후, 그는 7월 7일 시애틀 사운더스에 영입되었다.
이듬해인 1979년, 무어는 말레이시아 투어를 위해 하이게이트를 연고로 하는 클럽 크라코비아에서 뛰었다. 1983년에는 부상으로 선수 보강이 필요했던 캐롤라이나 라이트닝에서 8경기에 출전했다.
3. International Career
보비 무어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특히 1966년 FIFA 월드컵 우승을 이끌며 국가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3.1. Early International Matches and Captaincy

1960년, 무어는 잉글랜드 U-23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다. 웨스트햄과 U-23팀에서의 활약은 월터 윈터보텀 감독과 축구 협회 선정 위원회의 1962년 칠레 FIFA 월드컵 결승전 최종 준비 과정에서 성인 국가대표팀에 뒤늦게 합류할 수 있게 해주었다. 무어는 남미로 떠나기 전까지 국가대표팀에 출전한 적이 없었지만, 1962년 5월 20일 리마에서 열린 페루와의 대회 전 마지막 친선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으며 4-0으로 승리했다. 이날 토트넘 홋스퍼 FC의 수비수 모리스 노먼도 데뷔전을 치렀다. 두 선수 모두 인상적인 활약을 펼쳐 월드컵 내내 팀에 머물렀으나, 비냐델마르에서 열린 8강전에서 결국 우승팀인 브라질에게 패배하며 탈락했다.
1963년 5월 29일, 22세의 무어는 고참 선수인 조니 헤인즈의 은퇴와 그의 후계자인 지미 암필드의 부상으로 인해 자신의 12번째 출전 경기에서 처음으로 국가대표팀 주장을 맡았다. 그는 역대 잉글랜드 최연소 주장 기록을 세웠다. 잉글랜드는 그 경기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4-2로 꺾었으며, 암필드가 부상에서 복귀한 후에도 알프 램지 신임 감독은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본선 진출에 실패한 잉글랜드가 조직한 1964년 여름 친선 경기 시리즈 동안 무어에게 영구적으로 주장직을 부여했다.
3.2. 1966 FIFA World Cup Victory

1966년 월드컵을 앞두고, 무어가 웨스트햄을 떠나고 싶어한다는 소식이 언론에 알려졌다. 무어는 계약 만료를 앞두고 있었는데, 알프 램지 경의 개입과 기술적으로 경기 출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웨스트햄과 재계약하여 1966년 잉글랜드 팀의 주장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램지는 웨스트햄 감독 론 그린우드를 잉글랜드 팀 호텔로 불러 두 사람에게 갈등을 해결하고 계약을 체결하라고 지시했다. 무어는 1966년 FIFA 월드컵 우승팀의 리더였으며, 세계적인 선수이자 스포츠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모든 경기가 웸블리에서 열린 가운데, 잉글랜드는 조별 리그를 순조롭게 통과했고, 8강전에서 아르헨티나를, 준결승전에서 에우제비우가 이끄는 포르투갈을 꺾었다. 결승전에서는 서독을 만났다.

제프 허스트의 자서전에 따르면, 잉글랜드 수비수 조지 코언은 램지 감독이 코칭 스태프와 무어를 결승전에서 제외하고 더 노련한 노먼 헌터를 투입할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무어를 팀에 남겨두기로 결정했다. 무어는 못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고, 대회 전 계약 분쟁으로 인해 방해받았다는 인상을 주지도 않았다. 유일한 가능한 설명은 독일 팀에 무어의 부족한 속도를 드러낼 수 있는 빠른 공격수들이 있었고, 무어와 비슷한 나이였지만 A매치 4경기 출전에 불과했던 헌터가 무어의 잉글랜드 수비 파트너인 잭 찰턴의 클럽 동료였다는 점이다.
결승전에서 잉글랜드는 헬무트 할러의 골로 1-0으로 뒤처졌지만, 무어의 통찰력과 빠른 판단력은 잉글랜드의 빠른 동점골에 기여했다. 그는 독일 진영 한가운데서 볼프강 오버라트에게 파울을 당했는데, 항의하거나 수비로 돌아가지 않고 재빨리 일어서서 웨스트햄에서 연습했던 움직임 그대로 허스트의 머리에 정확하게 프리킥을 연결했고, 허스트가 득점에 성공했다.
웨스트햄 선수들이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가장 큰 날에 더 큰 기여를 했다. 마틴 피터스가 잉글랜드를 2-1로 앞서나가게 하는 골을 넣었지만, 독일은 정규 시간 마지막 순간에 볼프강 베버의 골로 동점을 만들었다. 무어는 핸드볼 파울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경기는 연장전으로 돌입했다.
램지 감독은 독일 선수들이 지쳤다고 확신했고, 허스트가 논란이 많은 3번째 골을 넣자 경기는 거의 끝난 듯 보였다. 경기가 몇 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잉글랜드는 또 다른 독일의 공격 압박을 받고 있었고, 공은 무어에게로 흘러왔다. 팀 동료들은 무어에게 공을 걷어내라고 소리쳤지만, 그는 침착하게 허스트에게 공을 정확히 패스했고, 허스트는 4-2 승리를 확정 짓는 골을 넣었다.
그날의 많은 기억에 남는 이미지 중 하나는 무어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줄리메컵을 수여받기 전, 벨벳 식탁보에 진흙과 땀으로 더러워진 손을 닦는 모습이다. 가디언은 "무어는 잉글랜드 선수들을 로열 박스로 이끌 때 경기장에서 가장 침착한 사람이었다"고 평했다.
3.3. Post-World Cup Period and Final Caps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 성공으로 무어는 국가적인 아이콘이 되었고, 그와 웨스트햄의 다른 두 선수들은 다음 국내 시즌 동안 웨스트햄이 방문하는 경기장마다 월드컵 트로피를 가지고 다녔다. 그는 1966년 말 BBC 올해의 스포츠인상을 수상하며 축구 선수로는 최초로 이 상을 받았고, 이후 24년 동안 유일한 수상자로 남았다. 또한 신년 서훈 명단에서 대영 제국 훈장을 받았다.
무어의 이미지와 인기는 그가 다양한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했다. 웨스트햄의 홈구장인 불린 그라운드 옆에 스포츠 상점을 열었으며, 아내 티나, 피터스와 그의 아내 캐시와 함께 TV 광고에 출연하여 사람들에게 "지역 술집에 들러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그는 계속해서 웨스트햄과 잉글랜드에서 뛰었으며, 1966년 말 웨일스와의 홈 국제 경기에서 5-1 승리를 거두며 50번째 A매치 출장을 기록했다. 이 경기는 1968년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예선을 겸했다. 잉글랜드는 궁극적으로 준결승전(당시 대회는 4팀 이벤트였다)에서 유고슬라비아와 피렌체에서 경기를 치렀고 1-0으로 패했다.
잉글랜드는 우승팀으로서 다음 월드컵에 예선전을 치를 필요가 없었으며, 무어는 램지 감독의 팀 명단에 항상 첫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1970년 FIFA 월드컵 결승전이 열리는 멕시코로 가기 전, 짧은 고지 적응 기간을 위해 남아메리카로 떠나기 전에 78번째 A매치 출장을 기록했다.
1970년은 무어에게는 씁쓸하면서도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1970년 월드컵의 주장으로 유임되었으나, 잉글랜드가 워밍업 경기에 참가했던 콜롬비아 보고타의 한 보석상에서 팔찌 절도 사건에 무어를 연루시키려는 시도가 있어 준비에 큰 혼란이 있었다. 한 젊은 점원이 무어가 호텔 상점에서 돈을 내지 않고 팔찌를 가져갔다고 주장했다. 무어는 분명히 보비 찰턴과 함께 찰턴의 아내에게 줄 선물을 찾기 위해 상점에 있었지만, 혐의를 뒷받침할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무어는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는 이후 키토에서 열린 에콰도르와의 또 다른 경기를 위해 잉글랜드 팀과 함께 이동했다. 그는 경기에 출전하여 80번째 A매치 출장을 기록했으며, 잉글랜드는 2-0으로 승리했다. 그러나 팀 비행기가 멕시코로 돌아오는 길에 콜롬비아에 다시 들렀을 때, 무어는 다시 구금되어 4일 동안 가택 연금되었다. 외교적 압력과 증거의 명백한 약점으로 인해 결국 사건은 완전히 기각되었고, 무죄가 입증된 무어는 멕시코로 돌아와 대표팀에 재합류하여 월드컵을 준비했다. 그는 팀 호텔에 도착했을 때 동료들로부터 의장대를 받았다.
무어는 잉글랜드가 조별 리그를 통과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6월 2일, 그는 루마니아를 상대로 1-0 승리를 거두며 잉글랜드의 주장을 맡았다.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브라질과의 두 번째 경기에서는 자이르지뉴에게 한 태클이 너무나 정확하고 깨끗하여 '완벽한 태클'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BBC의 유명한 노래 'Three Lions' 가사에도 등장할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계속해서 방송되고 있다. 브라질은 그 경기를 1-0으로 이겼지만, 잉글랜드는 조별 리그를 통과했다. 무어는 경기 후 펠레와 유니폼을 교환했으며, 이 유니폼은 맨체스터의 국립 축구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를 1-0으로 꺾은 잉글랜드는 조 2위로 토너먼트 단계에 진출했다.
8강전에서는 1966년 월드컵 결승의 재대결로 서독과 맞붙었다. 잉글랜드는 2-0으로 앞서갔지만, 연장전에서 3-2로 역전패했다. 그 해 말, 무어는 1970년 유럽 올해의 축구 선수 투표에서 서독의 게르트 뮐러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1970년 8월 10일, 무어는 아내 티나 무어가 납치되었으며 1.00 만 GBP의 몸값을 요구하는 익명의 협박을 받았다. 이로 인해 그는 브리스틀 시티 FC와 AFC 본머스와의 프리시즌 친선 경기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웨스트햄에서의 그의 공헌은 1970년 말 셀틱 FC와의 기념 경기로 보상받았다.
무어는 축구계의 아이콘이자 완벽한 영향력으로 여겨졌지만, 그에게도 잘못이나 논란이 없지 않았다. 1971년 1월 7일, 그와 웨스트햄 팀 동료 세 명(지미 그리브스, 브라이언 디어, 클라이드 베스트)은 FA컵 3라운드 블랙풀 FC와의 경기를 앞두고 새벽까지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마신 죄로 론 그린우드 웨스트햄 감독으로부터 한 주간의 임금을 벌금으로 부과받았다. 웨스트햄은 그 경기에서 0-4로 패배했다. 당시 블랙풀에 있던 나이트클럽은 무어의 친구인 복서 브라이언 런던 소유였다. 블랙풀은 당시 풋볼 리그 1부의 최하위 팀이었고, 그 시즌 말에 강등되었다. 공교롭게도 전날 밤, 무어는 This Is Your Life라는 TV 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브라이언 글랜빌은 무어가 폭음하는 것이 드물지 않았지만, 그는 종종 다음 날 웨스트햄 훈련장에서 전날 마신 술을 해소하기 위해 훈련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고 언급했다. 1972년 6월 12일, 그는 그리스 팀인 올림피아코스 FC의 주장으로 브라질 클럽 코린치앙스와의 친선 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
무어는 1973년 509번째 출장으로 웨스트햄 역대 최다 출장 기록을 경신했다. 3일 전인 1973년 2월 14일, 그는 햄던 파크에서 스코틀랜드를 5-0으로 완파한 경기에서 100번째 잉글랜드 A매치 출장을 기록했다. 이 시기에는 1966년 월드컵 스쿼드 중 마틴 피터스와 앨런 볼 주니어만이 잉글랜드 팀에 남아 있었다. 같은 해 말, 무어는 폴란드와의 1974년 FIFA 월드컵 예선전에서 수비적으로 노출되어, 피터 실턴 골키퍼를 지나 프리킥을 굴절시켜 홈팀에게 선제골을 내주었고, 이후 블라디미르 루반스키에게 공을 빼앗겨 두 번째 골을 허용했다.
무어의 기량이 떨어지면서 램지 감독은 잉글랜드가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해 반드시 이겨야 했던 웸블리에서의 폴란드와의 재대결에 그를 선발하지 않았다. 다른 결과가 나오면 폴란드가 진출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수비에서는 노먼 헌터가, 주장으로는 피터스가 무어를 대신하여 출전했다. 무어는 램지에게 자신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뜻이냐고 물었고, 램지는 "당연히 아니지. 내년 월드컵에서 자네가 주장으로 필요하네."라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1-1로 비기는 데 그쳤다. 웸블리 경기에서 헌터는 태클을 시도하다 공을 밟고 놓치는 실수를 저질렀는데, 이는 무어가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공을 빼앗긴 것과 비슷한 실수였다. 이로 인해 폴란드는 재빨리 역습하여 실턴의 실수로 골을 넣었다. 앨런 클라크가 페널티킥으로 동점골을 넣었지만, 얀 토마셰프스키 골키퍼가 잉글랜드의 수많은 득점 기회를 막아내면서 잉글랜드는 더 이상 골을 넣지 못했다. 무어는 나중에 램지 감독과 벤치에 앉아 교체를 계속 촉구했지만 램지 감독이 망설였다고 말했다. 케빈 헥터가 마틴 치버스를 대신하여 85분에 마침내 투입되자 무어는 램지가 꼼짝하지 않는 동안 헥터의 트레이닝복 바지를 잡아당기는 모습이 TV에 포착되기도 했다. 무어는 나중에 데이비드 밀러에게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램지에게 누군가 중앙을 돌파해야 한다고 말했고, 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케빈을 빨리 투입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를 거의 경기장으로 던져 넣을 뻔했다."고 말했다. 헌터는 해럴드 셰퍼드슨과 무어에게 이끌려 경기장을 떠날 때 위로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태였다。잉글랜드의 1974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 실패는 램지 감독의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의 통치가 6개월 후에 해고로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무어는 다음 경기인 1973년 11월 14일 이탈리아와의 친선 경기에서 0-1로 패배하며 자신의 108번째이자 마지막 A매치 출장을 기록했다. 그는 보비 찰턴의 기록을 2경기 앞지르며 잉글랜드 역대 최다 출장 선수가 되었고, 빌리 라이트의 90경기 주장 출장 기록과 동률을 이뤘다. 이후 피터 실턴, 데이비드 베컴, 스티븐 제라드가 출장 기록을 경신했지만, 공동 주장 기록은 여전히 남아 있다.
4. Managerial Career
선수 은퇴 후, 보비 무어는 감독직을 맡아 다양한 팀에서 경험을 쌓았다.
1978년 프로 선수 생활 은퇴 후, 무어는 크리스털 팰리스에서 코칭 역할을 맡았다. 1980년, 그는 이스미언 리그 팀인 옥스퍼드 시티의 감독직을 맡았으며, 전 웨스트햄 팀 동료인 해리 레드냅의 도움을 받았다. 무어가 옥스퍼드 시티에 있는 동안 그는 구단의 인지도를 높였고, 새로운 미디어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필 빌과 존 프레이저와 같은 선수들을 영입했다. 1981년, 무어와 레드냅은 옥스퍼드 시티를 떠났고, 존 딜레이니가 그들을 대신했다.
옥스퍼드 시티에서의 시간을 보낸 후, 전 잉글랜드 주장이었던 무어는 홍콩으로 건너가 이스턴의 감독을 맡았으며, 1982년 8월 피터 웡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무어는 이전에 이스턴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었는데, 1981년 12월 홍콩 시니어 챌린지 실드에서 홍콩 레인저스 FC를 4-0으로 이긴 이스턴의 경기에서 마지막 12분 동안 뛰었다. 1983년 1월, 무어는 테리 코크레인과 앨런 볼을 이스턴으로 영입했다。무어가 새로운 선수들을 영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983년 3월에 클럽을 떠났다.
1984년에는 사우스엔드 유나이티드 FC의 감독이 되었다. 그의 첫 번째 정식 시즌인 1984-85 시즌, 사우스엔드는 심각한 재정난 속에서 풋볼 리그 재선출 신청을 간신히 피했다. 그러나 팀은 점차 재건되었고, 1985-86 시즌에는 사우스엔드가 좋은 출발을 보이며 새해까지 승격 경쟁을 벌이다가 결국 9위로 마쳤다. 그의 후임인 데이비드 웹은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다음 해 승격을 달성했다. 무어는 구단의 이사회에 참여하는 데 동의했으며, 사망할 때까지 이 역할을 수행했다.
5. Personal Life
보비 무어의 사적인 삶은 여러 결혼 생활과 사업적 어려움, 그리고 공적인 논란들을 포함했다.
무어는 재능 있는 유소년 크리켓 선수였으며, 남잉글랜드 학원 축구팀의 주장을 맡았고, 오랜 축구 팀 동료인 제프 허스트와 함께 에식스 유소년팀을 대표했다.
무어는 1957년 첫 번째 부인인 티나 딘을 만났다. 그들은 1962년 6월 30일에 결혼했으며, 에식스주 치그웰에 "모어랜드"라고 이름 붙인 집에서 살았다. 그들은 딸 로베르타와 아들 딘을 두었다. 그들은 1984년에 별거했고, 1986년에 이혼했다. 이후 8살 연하의 스테파니 팔레인과 관계를 발전시켰고, 1991년 12월 4일에 결혼했지만, 무어는 14개월 반 뒤인 1993년 2월 24일에 사망했다.
무어는 1977년 4월 12일 36번째 생일 축하 후 런던 스트랫퍼드에서 음주 운전으로 150 GBP의 벌금을 물고 12개월 동안 운전 금지 처분을 받았다. 1983년 12월 15일에는 베드퍼드셔주 비글스웨이드에서 체포되어 3년 동안 운전 금지 처분을 받고 175 GBP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무어는 1979년 영국 총선에서 마거릿 대처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1986년부터 1990년까지 선데이 스포츠의 스포츠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1990년에는 런던 라디오 방송국 캐피털 골드에 축구 분석가이자 해설자로 합류하여 사망 직전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축구 은퇴 후 그의 삶은 순탄치 못했고, 사업 실패와 결혼 생활의 파탄 등 어려움이 많았다. 무어의 지지자들은 잉글랜드 축구 협회가 FIFA 월드컵 우승팀의 주장을 맡았던 유일한 잉글랜드인인 그에게 역할을 주거나 대사 직책을 부여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아들 딘은 2011년 7월 28일 43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사망했으며, 사인은 질병과 자연사로 밝혀졌다.
6. Illness and Death
무어의 첫 번째 암은 잉글랜드가 첫 월드컵 우승을 거두기 2년 전인 1964년에 진단받은 고환암이었다. 이 암은 고환 절제술로 치료되었고 전이되지 않았다. 1991년 4월, 무어는 대장암 의심 증상으로 수술을 받았다. 당시 이는 "응급 복부 수술"로 보도되었다.
1993년 2월 14일, 그는 자신이 대장암과 간암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이미 전이되었다고 발표했다. 3일 뒤, 그는 친구 조너선 피어스와 함께 웸블리에서 열린 잉글랜드와 산마리노의 경기를 중계했다. 무어는 경기 후 만찬에 참석하여 시상도 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공식 활동이었으며, 7일 뒤인 2월 24일 오전 6시 36분,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무어는 1966년 월드컵 우승팀 멤버 중 최초로 사망한 인물이었다. 그의 장례식은 1993년 3월 2일 퍼트니 베일 화장장에서 거행되었으며, 그의 유해는 런던 시티 공동묘지 및 화장장에 안장된 아버지 로버트 에드워드(1978년 사망)와 어머니 도리스 조이스(1992년 사망)의 묘지에 보관되었다.
1993년 3월 6일, 그의 사망 후 첫 웨스트햄 홈 경기가 울버햄프턴 원더러스를 상대로 열렸다. 불린 그라운드는 웨스트햄 팬들과 다른 구단 팬들이 가져온 꽃, 스카프, 기타 축구 기념품으로 가득했다. 1966년 월드컵 우승 동료인 제프 허스트와 마틴 피터스는 경기 전 중앙에 무어의 등번호 6번이 새겨진 웨스트햄 유니폼 모양의 꽃 장식을 놓았다. 웨스트햄은 이 경기에서 6번을 결번으로 하고, 평소 6번을 달던 이언 비숍은 12번을 달고 뛰었다. 경기는 웨스트햄이 3-1로 승리했으며, 트레버 몰리, 줄리언 딕스, 매티 홈즈가 웨스트햄의 골을 넣었고, 울버햄프턴에서는 스티브 불이 한 골을 만회했다.
그의 전 잉글랜드 팀 동료인 잭 찰턴은 무어의 삶과 축구 안팎에 대한 BBC 다큐멘터리에서 무어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음, 저는 오직 두 사람 때문에 울었어요. 빌리 브렘너와 밥... 그는 사랑스러운 남자였습니다."
1993년 6월 28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중 추모 예배가 열렸으며, 1966년 월드컵 팀의 다른 모든 멤버들이 참석했다. 그는 웨스트 인디스 크리켓 선수 프랭크 워렐 경에 이어 두 번째로 이러한 영예를 얻은 스포츠인이었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학장은 "오랜 세월 동안 그는 웨스트햄 서포터들을 즐겁게 했고, 그와 맞서는 상대들에게는 강력한 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주로 기억될 것은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90번 출전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 1966년 월드컵 팀의 주장으로서의 그의 모습이다"라고 말했다.
7. Legacy and Influence
보비 무어는 영국 축구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정신과 업적은 다양한 기념물과 재단을 통해 후대에 계승되고 있다.
7.1. Public Recognition and Honours

무어는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 성공의 결과로 국가적인 아이콘이 되었다. 그는 1966년 말 BBC 올해의 스포츠인상을 수상했으며, 축구 선수로는 최초로 이 상을 받았고, 이후 24년 동안 유일한 축구인 수상자로 남아 있었다. 또한 신년 서훈 명단에서 대영 제국 훈장을 받았다.
2002년, 무어는 선수로서 잉글랜드 축구에 미친 영향력을 인정받아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의 초대 헌액자로 이름을 올렸다. 같은 해 그는 BBC의 '위대한 영국인 100인' 목록에 선정되었다. 2003년 11월, UEFA 주빌리를 기념하여, 그는 지난 50년간의 가장 뛰어난 선수로서 잉글랜드 축구 협회에 의해 잉글랜드의 '골든 플레이어'로 선정되었다. 그는 또한 20세기 세계 축구 역대 베스트의 일원이며, 국가대표팀의 아이콘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1970년 발롱도르 2위를 차지했으며,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의 올해의 선수로 1961년, 1963년, 1968년, 1970년에 선정되었다. FUWO 유럽 올해의 팀에 1965년, 1966년, 1967년, 1969년, 1970년, 1972년에 이름을 올렸다. 1966년 FIFA 월드컵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고, 1968년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토너먼트 팀에 포함되었다. 월드 사커 선정 월드 XI에 1968년, 1969년, 1971년, 1972년, 1973년에 이름을 올렸다. 로스맨스 골든 부츠 상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에 수상했으며, 스포츠 아이디얼 유럽 XI에 1971년, 1972년에 선정되었다. 2013년에는 월드 사커 역대 베스트 XI에 포함되었다.
7.2. Memorials and Foundations

보비 무어 재단은 1993년 스테파니 무어와 암 연구 UK(Cancer Research UK, CRUK영어)가 그녀의 남편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자선 단체로, 대장암 연구 기금을 모으고 대중의 질병 인식을 높이는 데 목적이 있다. 2013년에는 모금 캠페인 메이크 보비 프라우드(Make Bobby Proud영어)가 시작되었다. 2013년 2월 기준으로 보비 무어 재단은 대장암 연구를 위해 1880.00 만 GBP를 모금했다.
2003년 4월 28일, 앤드루 왕자 (당시 잉글랜드 축구 협회 회장)는 불린 그라운드 근처, 바킹 로드와 그린 스트리트 교차로에 눈에 띄는 위치에 월드컵 조각상(일명 챔피언스)을 공개했다. 이 조각상은 무어가 줄리메컵을 들고 제프 허스트와 레이 윌슨의 어깨 위에 서 있는 모습과 마틴 피터스의 모습을 담고 있다. 1.5배 크기의 청동상은 필립 잭슨이 옛 웸블리에서 1966년 결승 직후 찍힌 유명한 사진을 바탕으로 조각했다. 웨스트햄 구장인 불린 그라운드의 남쪽 스탠드는 2016년까지 '보비 무어 스탠드'로 명명되었다. 웨스트햄이 2016년 런던 스타디움으로 옮기면서, 경기장 북쪽 끝 스탠드가 '보비 무어 스탠드'로 재지정되었고, 유벤투스 FC와의 프리시즌 친선 경기 전에 그의 손자인 프레더릭 무어-호비스가 참석하여 공식적으로 개장했다.

2007년 5월 11일 금요일, 보비 찰턴 경은 새로 재건축된 웸블리 스타디움 입구 외곽에 보비 무어 동상을 "마무리 작업"으로 공개했다. 스타디움은 5월 19일 토요일 2007년 FA컵 결승을 개최하며 공식적으로 개장했다. 이 2배 크기의 청동상은 필립 잭슨이 조각했으며, 무어가 웸블리 웨이를 내려다보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2008년 8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는 그의 사망 15주기를 기념하여 등번호 6번을 공식적으로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2016년 7월 26일, 무어는 자신의 집 외부에 잉글리시 헤리티지 블루 플라크 명판을 받은 최초의 축구 선수가 되었다. 이 명판은 바킹의 웨이블리 가든에 있는 무어의 어린 시절 집의 벽에 설치되었으며, 그의 딸 로베르타가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이 열렸다.
7.3. Cultural and Historical Impact
2017년 4월, 노르웨이 에어 항공사는 보잉 737-800 항공기 꼬리날개에 무어의 이미지가 들어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무어는 프레디 머큐리, 로알드 달, 에이미 존슨, 제인 오스틴, 프레디 레이커와 함께 이 회사의 6명의 "영국 꼬리날개 영웅" 중 한 명이다. 2018년, 무어는 EA 스포츠의 FIFA 비디오 게임 FIFA 19의 얼티밋 팀에 아이콘으로 추가되었다.
1996년 프랭크 스키너와 데이비드 배디엘은 1996년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잉글랜드 팀의 공식 노래였던 "Three Lions"의 가사에 "But I still see that tackle by Moore" (하지만 나는 여전히 무어의 그 태클을 본다)라는 구절을 사용했다. 이 구절은 1970년 자이르지뉴와의 유명한 태클을 언급하는 것으로, 배디엘, 스키너, 잉글랜드 왼쪽 수비수 스튜어트 피어스가 비디오에서 재연하기도 했다. 이 가사는 잉글랜드가 다시 우승할 수 있다는 증거로서 과거 잉글랜드의 위대한 순간들을 나열하는 맥락에서 쓰였다.
무어는 1981년 영화 승리의 탈출에서 테리 브래디 역으로 출연했으며, 여러 에피소드의 Till Death Do Us Part와 그 스핀오프 영화 The Alf Garnett Saga에 본인 역으로 카메오 출연했다. 1969년 영화 이탈리안 잡에서는 폭스바겐 버스에 쓰여진 보비 무어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일본의 유명 코미디언인 아카시야 산마는 무어를 보기 위해 승리의 탈출을 극장에서 관람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무어와 티나 무어의 관계를 다룬 TV 드라마 시리즈 Tina and Bobby는 ITV에서 2017년 1월에 방영되었고, 2020년 8월과 2021년 6월에 재방송되었다. 보비 무어 역은 론 맥패디언이 연기했다.
2017년에 설립된 보비 무어 아카데미 초등 및 중등 학교는 런던 스타디움 근처 뉴엄의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 공원에 위치해 있다. 이 아카데미는 공원 내 시설을 이용할 수 있으며,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와 연계되어 있고, 최대 1,500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다.
8. Criticism and Controversies
보비 무어의 경력과 삶에는 몇 가지 논란과 비판이 제기되었다.
- 1970년 보고타 팔찌 사건**: 1970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열린 전지훈련 중, 보석상에서 팔찌를 훔쳤다는 혐의로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석방되었으나, 귀국길에 다시 구금되어 4일간의 가택 연금을 당했다. 명백한 증거 부족과 외교적 압력으로 결국 사건은 기각되었으나, 당시 월드컵 준비에 큰 혼란을 야기했다. 이 사건은 중남미와 유럽 국가들 간의 무역 마찰을 배경으로 한 조작 사건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 FA컵 경기 전 음주 사건**: 1971년 1월 7일, 무어는 팀 동료인 지미 그리브스, 브라이언 디어, 클라이드 베스트와 함께 FA컵 경기를 앞두고 새벽까지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마신 죄로 소속팀 감독으로부터 벌금을 부과받았다. 이 사건이 있었던 블랙풀 FC와의 경기는 웨스트햄이 0-4로 대패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 은퇴 후의 어려운 삶**: 선수 은퇴 후 무어는 사업 실패와 결혼 생활의 파탄 등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가 잉글랜드 유일의 월드컵 우승팀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축구 협회로부터 적절한 역할이나 대사직을 부여받지 못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 음주 운전 논란**: 무어는 1977년과 1983년 두 차례에 걸쳐 음주 운전으로 적발되어 벌금과 운전면허 정지 처분을 받았다.
9. Career Statistics
9.1. Club
구단 | 시즌 | 리그 | FA컵 | 리그컵 | 기타 | 합계 | ||||||
---|---|---|---|---|---|---|---|---|---|---|---|---|
디비전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 1958-59 | 1부 리그 | 5 | 0 | 0 | 0 | 0 | 0 | 1 | 0 | 6 | 0 |
1959-60 | 13 | 0 | 0 | 0 | 0 | 0 | 2 | 0 | 15 | 0 | ||
1960-61 | 38 | 1 | 2 | 0 | 2 | 1 | - | 42 | 2 | |||
1961-62 | 41 | 3 | 1 | 0 | 2 | 0 | - | 44 | 3 | |||
1962-63 | 41 | 3 | 5 | 0 | 1 | 0 | - | 47 | 3 | |||
1963-64 | 37 | 2 | 7 | 0 | 6 | 0 | - | 50 | 2 | |||
1964-65 | 28 | 1 | 0 | 0 | 0 | 0 | 8 | 0 | 35 | 1 | ||
1965-66 | 37 | 0 | 4 | 0 | 9 | 2 | 6 | 0 | 56 | 2 | ||
1966-67 | 40 | 2 | 2 | 0 | 6 | 0 | - | 48 | 2 | |||
1967-68 | 40 | 4 | 3 | 0 | 3 | 0 | - | 46 | 4 | |||
1968-69 | 41 | 2 | 3 | 0 | 3 | 0 | - | 47 | 2 | |||
1969-70 | 40 | 0 | 1 | 0 | 2 | 0 | - | 43 | 0 | |||
1970-71 | 39 | 2 | 1 | 0 | 2 | 0 | - | 42 | 2 | |||
1971-72 | 40 | 1 | 4 | 0 | 10 | 0 | - | 54 | 1 | |||
1972-73 | 42 | 3 | 2 | 0 | 2 | 0 | - | 46 | 3 | |||
1973-74 | 22 | 0 | 1 | 0 | 1 | 0 | 1 | 0 | 24 | 0 | ||
합계 | 544 | 24 | 36 | 0 | 49 | 3 | 18 | 0 | 647 | 27 | ||
풀럼 | 1973-74 | 2부 리그 | 10 | 1 | - | - | - | 10 | 1 | |||
1974-75 | 41 | 0 | 12 | 0 | 3 | 0 | - | 54 | 0 | |||
1975-76 | 33 | 0 | 1 | 0 | 3 | 0 | - | 37 | 0 | |||
1976-77 | 40 | 0 | 2 | 0 | 5 | 0 | - | 47 | 0 | |||
합계 | 124 | 1 | 15 | 0 | 11 | 0 | - | 148 | 1 | |||
샌안토니오 선더 | 1976 | NASL | 24 | 1 | - | - | - | 24 | 1 | |||
시애틀 사운더스 | 1978 | NASL | 7 | 0 | - | - | - | 7 | 0 | |||
헤르닝 프레마드 | 1978년 | 덴마크 리그 | 9 | 0 | - | - | - | 9 | 0 | |||
캐롤라이나 라이트닝 | 1983년 | NASL | 8 | 0 | - | - | - | 8 | 0 | |||
커리어 합계 | 716 | 26 | 51 | 0 | 60 | 3 | 18 | 0 | 843 | 29 |
9.2. International
국가대표팀 | 연도 | 출전 | 득점 |
---|---|---|---|
잉글랜드 | 1962 | 8 | 0 |
1963 | 9 | 0 | |
1964 | 9 | 0 | |
1965 | 9 | 0 | |
1966 | 15 | 2 | |
1967 | 6 | 0 | |
1968 | 9 | 0 | |
1969 | 9 | 0 | |
1970 | 11 | 0 | |
1971 | 7 | 0 | |
1972 | 6 | 0 | |
1973 | 10 | 0 | |
합계 | 108 | 2 |
득점은 잉글랜드의 골을 먼저 표기하며, 득점란은 각 무어의 골 이후 점수를 나타낸다.
순번 | 날짜 | 장소 | 상대 | 득점 | 결과 | 대회 |
---|---|---|---|---|---|---|
1 | 1966년 1월 5일 | 구디슨 파크, 리버풀, 잉글랜드 | 폴란드 | 1-1 | 1-1 | 친선 경기 |
2 | 1966년 6월 29일 | 울레볼 스타디온, 오슬로, 노르웨이 | 노르웨이 | 4-1 | 6-1 | 친선 경기 |
10. Honours
보비 무어는 선수로서 수많은 영예를 안았으며, 특히 1966년 FIFA 월드컵 우승은 그의 경력의 정점이었다.
- 대영 제국 훈장 (OBE): 1967
선수
- FIFA 월드컵 : 1966
-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3위: 1968
-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
- 우승: 1964-65, 1965-66, 1967-68, 1968-69, 1970-71, 1972-73
- 공동 우승: 1963-64, 1969-70, 1971-72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 FA컵: 1963-64
- FA 채리티 실드: 1964
- UEFA 컵위너스컵: 1964-65
풀럼
- FA컵 준우승: 1974-75
이스턴
- 홍콩 시니어 챌린지 실드: 1981-82
개인
- 발롱도르 2위: 1970
- 축구 기자 협회 올해의 축구 선수 상: 1964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올해의 선수: 1961, 1963, 1968, 1970
- FUWO 유럽 올해의 팀: 1965, 1966, 1967, 1969, 1970, 1972
- FIFA 월드컵 올스타 팀: 1966
- BBC 올해의 스포츠인상: 1966
- UEFA 유로 토너먼트 팀: 1968
- 월드 사커 월드 XI: 1968, 1969, 1971, 1972, 1973
- 로스맨스 골든 부츠 상: 1970, 1971, 1972, 1973
- 스포츠 아이디얼 유럽 XI: 1971, 1972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02
- UEFA 주빌리 어워드 - 지난 50년간 최고의 잉글랜드 축구 선수 (골든 플레이어): 2003
- FIFA 월드컵 역대 베스트 팀: 1994
- FIFA 공로상: 1996
- 20세기 월드 팀: 1998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등번호 6번 영구 결번: 2008 (사후)
- 월드 사커 역대 베스트 XI: 2013
- 위대한 영국인 100인: 2002
- 풋볼 리그 100 레전드
- IFFHS 역대 남자 B 드림 팀: 2021
- PFA 세기의 선수: 2007
- PFA 세기의 팀: 2007
11. See also
- A매치 100경기 이상 출전한 축구 선수 명단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