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이탈리아 공화국은 남유럽에 위치한 국가로, 이탈리아반도와 지중해의 주요 섬인 시칠리아, 사르데냐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으로는 알프스산맥을 경계로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와 국경을 접하며, 영토 내에는 독립국인 산마리노와 바티칸 시국이 있다. 수도는 로마이며, 고대 로마 문명의 중심지이자 이후 르네상스를 꽃피운 역사적·문화적 중요성을 지닌다.
1861년 이탈리아 왕국으로 통일되기 전까지 여러 왕국과 도시 국가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통일 이후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을 겪고 1946년 국민투표를 통해 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 이탈리아는 유럽 연합(EU)의 창립 회원국이자 G7, G20의 일원으로서 국제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세계 8위권의 경제 대국이며, 제조업, 패션, 디자인, 관광 산업이 발달했다. 문화적으로는 건축, 미술, 음악, 문학, 요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지니며, 수많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현대 이탈리아는 높은 인간 개발 지수와 삶의 질을 자랑하지만, 남북 간 경제 격차, 정치적 불안정, 마피아와 같은 사회 문제도 안고 있다.
2. 국호

이탈리아라는 국명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존재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설 중 하나는 고대 오스키어에서 송아지를 뜻하는 단어 Víteliú비텔리우osc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이는 라틴어 vitulus비툴루스 (송아지)라틴어, 움브리아어 vitlo비틀로 (송아지)xum와 관련이 있으며, '송아지의 땅'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고대 이탈리아 남부 부족들은 황소나 송아지를 토템 동물로 숭배했으며, 이는 동맹시 전쟁 당시 로마의 늑대에 맞서는 이탈리아 독립의 상징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는 이탈리아라는 이름이 전설적인 왕 이탈루스에서 유래했다고 기록했으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투키디데스의 저술에서도 언급된다.
원래 '이탈리아'라는 명칭은 현재의 칼라브리아 남부 지역, 즉 브루티움 반도의 남쪽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시라쿠사의 안티오쿠스에 따르면, 당시 이 지역에는 에노트리아인들이 거주했으며, '이탈리아'와 '에노트리아'는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스인들은 '이탈리아'라는 명칭의 범위를 확장하여 루카니아 대부분 지역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고대 로마 공화국이 확장되기 전까지 그리스인들은 메시나 해협과 살레르노만 및 타란토만을 잇는 선 사이의 땅, 즉 오늘날의 칼라브리아 지역을 '이탈리아'라고 불렀다. 남부의 '그리스령 이탈리아' 외에도, 일부 역사가들은 중부 이탈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에트루리아령 이탈리아'의 존재를 제시하기도 한다.
로마 시대의 Italia이탈리아라틴어의 경계는 비교적 명확하게 확립되었다. 카토의 저서 《기원》에서는 이탈리아를 알프스 이남의 반도 전체로 묘사했다. 기원전 264년, 로마령 이탈리아는 중북부의 아르노강과 루비콘강에서부터 남부 전체에 이르렀다. 지리적으로 이탈리아의 일부로 간주되었던 북부의 갈리아 키살피나는 기원전 220년대에 로마에 점령되었으나 정치적으로는 분리되어 있다가 기원전 42년에 이탈리아 행정 구역에 법적으로 통합되었다. 사르데냐, 코르시카, 시칠리아, 몰타는 서기 292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이탈리아에 편입되었으며, 이로써 고대 후기의 이탈리아는 현대의 이탈리아 지리적 지역과 거의 일치하게 되었다.
라틴어 Italicus이탈리쿠스라틴어는 로마의 속주민과 구별하여 '이탈리아 사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탈리아의'를 뜻하는 형용사 italianus이탈리아누스라틴어는 중세 라틴어에서 유래했으며, 근세 초기에는 '이탈리쿠스'와 번갈아 사용되었다. 서로마 제국 멸망 후에는 동고트 왕국이 '이탈리아'라는 국명을 사용했으며, 이후 랑고바르드인들의 침입 후에도 그들의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 내 후계 왕국에서 '이탈리아'라는 명칭은 계속 유지되었다.
3. 역사
이탈리아의 역사는 선사 시대 이탈리아 반도에 인류가 정착한 시기부터 시작하여, 고대 로마의 흥망성쇠, 중세 도시 국가들의 발전, 르네상스의 개화, 근대의 통일 운동과 두 차례의 세계 대전, 그리고 현대 공화국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매우 길고 다채로운 과정을 거쳐왔다. 각 시대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 나아가 세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1. 선사 시대와 고대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한 흔적이 발견되며, 약 85만 년 전의 유물이 몬테 포졸로에서 발굴되었다. 약 20만 년 전 중기 구석기 시대에는 네안데르탈인이 이탈리아 전역에 거주했으며, 현생인류는 약 4만 년 전 리파로 모키 유적지에서 처음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 이전 이탈리아의 고대 민족들은 주로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이탈리아족이었으나, 에트루리아인, 시칠리아의 엘리미아인과 시카니인, 누라게 문명을 건설한 고대 사르데냐인과 같이 비(非)인도유럽어족 또는 선(先)인도유럽어족 계통의 민족들도 존재했다. 그 외에도 알프스 지역의 라이티아인과 카무니족 (발카모니카 암각화로 유명) 등이 있었다. 1991년에는 외치 아이스맨으로 알려진 기원전 3400년에서 3100년 사이의 자연 미라가 시밀로운산 빙하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이탈리아 반도에 최초로 식민지를 건설한 외부 민족은 페니키아인들로, 그들은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해안에 교역 거점을 세웠다. 이들 중 일부는 소규모 도시로 발전하여 그리스 식민 도시들과 나란히 발전했다. 기원전 8세기에서 7세기경에는 피테쿠사이를 시작으로 이탈리아 반도 남부와 시칠리아 해안을 따라 그리스 식민 도시들이 건설되었으며, 이 지역은 훗날 마그나 그라이키아(대 그리스)로 알려지게 된다. 이오니아인, 도리스인, 시라쿠사인, 아카이아인 등이 여러 도시를 건설했다. 그리스의 식민화는 이탈리아족에게 민주적 통치 형태와 수준 높은 예술 및 문화적 표현을 접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3.2. 고대 로마


기원전 753년 이탈리아 중부 테베레강 유역에 세워진 로마는 초기 244년간 왕정 체제로 운영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하고 초대 왕이 되었으며, 이후 6명의 왕이 뒤를 이었다. 기원전 509년, 로마인들은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축출하고 원로원과 시민 중심의 과두 공화정(SPQR)을 수립하였다.
'이탈리아'로 명명된 이탈리아 반도는 로마의 팽창 과정에서 점차 하나의 통일된 실체로 통합되었다. 로마는 삼니움 전쟁, 로마-에트루리아 전쟁, 로마-갈리아 전쟁, 피로스 전쟁 등을 통해 다른 이탈리아 부족, 에트루리아, 켈트족, 그리스 세력을 정복하거나 동맹을 맺었다. 로마는 점차 서유럽, 북아프리카, 중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이후, 로마는 브리타니아에서 페르시아 국경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하며 지중해 전역을 아우르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리스, 로마 및 여타 문화가 융합되어 강력한 문명을 형성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오랜 통치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인 '팍스 로마나'를 열었다. 로마 시대의 이탈리아는 제국의 본토이자 로마인의 고향, 그리고 수도의 소재지로서 중심적 지위를 유지했다.
로마 제국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 중 하나로, 경제, 문화, 정치, 군사적으로 막강한 힘을 행사했다. 최대 판도였던 트라야누스 황제 치세(서기 117년)에는 면적이 약 5 e6km2에 달했다. 로마의 유산은 서구 문명에 깊은 영향을 미쳐 현대 세계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라틴어에서 파생된 로망스어군의 광범위한 사용, 수 체계, 현대 서양 알파벳과 달력, 그리고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부상한 것 등은 로마 지배의 수많은 유산 중 일부이다.
3.3. 중세


서로마 제국 멸망 후, 이탈리아는 오도아케르 왕국의 지배를 받다가 동고트족에게 점령당했다. 연이은 침입은 왕국들의 혼란스러운 계승과 이른바 '암흑시대'를 초래했다. 6세기에는 또 다른 게르만족인 랑고바르드족이 침입하여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반도의 정치적 통일성을 종식시켰다. 북부는 랑고바르드 왕국을 형성했고, 중남부 역시 랑고바르드족의 지배를 받았으며, 나머지 일부 지역은 동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남았다.
8세기 후반, 랑고바르드 왕국은 샤를마뉴에 의해 프랑크 왕국에 흡수되어 이탈리아 왕국이 되었다. 프랑크족은 교황령 형성에 기여했다. 13세기까지 이탈리아 정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교황청 간의 관계에 의해 좌우되었으며, 도시 국가들은 일시적인 이익을 위해 황제파(기벨린파) 또는 교황파(구엘프파)에 가담했다. 게르만 황제와 로마 교황은 중세 유럽의 보편적 권력이 되었으나, 서임권 투쟁과 구엘프파와 기벨린파 간의 갈등은 북부에서 제국-봉건 체제를 종식시키고 도시들이 독립을 획득하는 결과를 낳았다. 1176년 도시 국가들의 연합인 롬바르디아 동맹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를 격파하여 독립을 확보했다.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와 같은 도시 국가들은 은행업 관행을 고안하고 새로운 사회 조직 형태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금융 발전에 혁신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해안 및 남부 지역에서는 해양 공화국들이 지중해를 지배하고 동방 무역을 독점했다. 이들은 독립적인 해상 도시 국가였으며, 상인들이 상당한 권력을 가졌다. 비록 과두정이었지만, 이들이 제공한 상대적인 정치적 자유는 학문과 예술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가장 잘 알려진 해양 공화국은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아말피였다. 각 공화국은 아드리아해, 에게해, 흑해 연안의 해외 영토, 섬, 육지 및 근동과 북아프리카의 상업 식민지를 지배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유럽과 동방을 잇는 관문이자 고급 유리 생산지였으며, 피렌체는 비단, 양모, 은행업, 보석의 중심지였다. 창출된 부는 대규모 공공 및 민간 예술 프로젝트를 가능하게 했다. 공화국들은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여 지원과 수송을 제공했지만, 주로 정치적, 무역적 기회를 활용했다. 이탈리아는 상업 혁명을 이끈 경제 변화를 가장 먼저 체감했다.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약탈하고 마르코 폴로의 아시아 여행 자금을 지원할 수 있었으며, 최초의 대학들이 이탈리아 도시에 설립되었고,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학자들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자본주의와 은행 가문들이 피렌체에서 등장했으며, 단테와 조토는 1300년경 이 도시에서 활동했다. 남부의 시칠리아는 9세기에 아랍 이슬람 토후국이 되었으며, 11세기 후반 이탈리아-노르만인들이 남부 이탈리아의 대부분 롬바르드 및 동로마 공국들과 함께 시칠리아를 정복할 때까지 번성했다. 이 지역은 이후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으로 나뉘었다. 흑사병은 1348년에 이탈리아 인구의 약 3분의 1을 사망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3.4. 르네상스와 근세

1400년대와 1500년대에 이탈리아는 르네상스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였다. 이 시대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을 의미하며, 상업 도시들이 축적한 부와 지배 가문들의 후원으로 육성되었다. 이탈리아의 정치 체제는 이제 사실상 군주들이 통치하는 지역 국가들로, 무역과 행정을 장악했으며 그들의 궁정은 예술과 과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공국들은 피렌체의 메디치가와 같은 정치 왕조와 상인 가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서방 교회 대분열이 끝난 후, 새로 선출된 교황 마르티노 5세는 교황령으로 돌아와 이탈리아를 서방 기독교의 유일한 중심지로 복원했다. 메디치 은행은 교황청의 신용 기관이 되었고, 교회와 새로운 정치 왕조들 사이에 중요한 유대 관계가 형성되었다.
1453년, 교황 니콜라오 5세가 동로마 제국을 지원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되었다. 이로 인해 그리스 학자들과 문헌들이 이탈리아로 유입되어 그리스 인문주의의 재발견을 촉진했다.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와 교황 비오 2세와 같은 인문주의 통치자들은 이상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여 우르비노와 피엔차를 건설했다. 피코 델라 미란돌라는 르네상스의 선언문으로 여겨지는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을 저술했다. 예술 분야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수세기 동안 유럽 예술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조토, 도나텔로, 티치아노와 같은 예술가들과 브루넬레스키, 팔라디오, 브라만테와 같은 건축가들이 활동했다. 해양 공화국 출신의 이탈리아 탐험가들과 항해가들은 오스만 제국을 우회하여 인도에 도달할 새로운 항로를 찾고자 대서양 연안 국가들의 군주들에게 봉사하며 대항해시대와 아메리카 식민지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로는 유럽인에 의한 아메리카 정복의 문을 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노르드인 이후 북아메리카를 탐험한 최초의 유럽인 존 캐벗,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이름이 유래된 아메리고 베스푸치 등이 있다.
이탈리아 동맹으로 알려진 방어 동맹이 베네치아, 나폴리, 피렌체, 밀라노, 교황령 사이에 형성되었다. 로렌초 '일 마니피코' 데 메디치는 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한 후원자였으며, 그의 지원으로 동맹은 투르크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동맹은 1490년대에 붕괴되었고, 프랑스 샤를 8세의 침공은 반도에서 일련의 전쟁을 촉발시켰다. 전성기 르네상스 동안, 율리오 2세(1503년~1513년)와 같은 교황들은 외세 군주들에 맞서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위해 싸웠으며, 바오로 3세(1534년~1549년)는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유럽 강대국들 사이를 중재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메디치가 출신 교황들인 레오 10세(1513년~1521년)와 클레멘스 7세(1523년~1534년)는 독일, 영국 등지에서 종교 개혁에 직면했다.
1559년,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 간의 이탈리아 전쟁이 끝난 후, 이탈리아의 약 절반(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사르데냐 왕국, 밀라노 공국)이 스페인의 지배하에 놓였고, 나머지 절반은 독립을 유지했다(많은 국가들이 공식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교황청은 반종교 개혁을 시작했으며, 주요 사건으로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년~1563년), 그레고리력 채택, 예수회 중국 선교, 프랑스 종교 전쟁, 30년 전쟁(1618년~1648년) 종결, 대튀르크 전쟁 등이 있다. 이탈리아 경제는 1600년대와 1700년대에 쇠퇴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0년~1714년) 동안 오스트리아는 밀라노, 나폴리, 사르데냐 등 이탈리아 내 스페인 영토 대부분을 획득했다. 사르데냐는 1720년 시칠리아와 교환 조건으로 사보이아 가문에 주어졌다. 이후 부르봉 왕가의 한 분파가 시칠리아와 나폴리의 왕위에 올랐다. 나폴레옹 전쟁 동안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는 프랑스의 자매 공화국으로, 나중에는 이탈리아 왕국으로 재편되었다. 남부는 나폴레옹의 매제인 조아킴 뮈라가 통치했다. 1814년 빈 회의는 18세기 후반의 상황을 복원했지만, 프랑스 혁명의 이상은 근절될 수 없었고 19세기 초의 정치적 격변기에 다시 부상했다. 나폴레옹 시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혁명 이후 국가적 자결권을 주창하며 최초의 이탈리아 삼색기가 치스파다나 공화국에 의해 채택되었다. 이 사건은 삼색기 축제로 기념된다.
3.5. 통일 운동과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의 탄생은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과 사보이아 가문에 충성하는 군주주의자들이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통일 왕국을 수립하려는 노력의 결과였다. 19세기 중반까지 고조된 이탈리아 민족주의는 혁명으로 이어졌다. 1815년 빈 회의 이후, 이탈리아 통일 운동 또는 리소르지멘토로 알려진 정치·사회적 운동은 여러 국가로 분열된 이탈리아를 통합하고 외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일어났다. 급진적인 인물로는 1830년대에 정치 운동 단체 청년 이탈리아당을 창설한 애국 언론인 주세페 마치니가 있으며, 그는 통일 공화국을 지지하고 광범위한 민족주의 운동을 주창했다. 1847년에는 1946년에 국가가 된 "일 칸토 델리 이탈리아니"가 처음으로 공개 연주되었다.
청년 이탈리아당의 가장 유명한 구성원은 혁명가이자 장군인 주세페 가리발디로, 그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공화주의적 통일 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카보우르 백작이 이끄는 사르데냐 왕국의 사보이아 가문 군주정 역시 통일 이탈리아 국가 수립이라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을 휩쓴 1848년 자유주의 혁명의 맥락에서 오스트리아에 대항한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이 선포되었으나 실패로 끝났다. 1855년, 사르데냐는 크림 전쟁에서 영국 및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사르데냐는 1859년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서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오스트리아 제국과 싸워 롬바르디아를 해방시켰다. 플롱비에르 밀약에 따라 사르데냐는 사보이아와 니스를 프랑스에 할양했고, 이는 니스 주민들의 탈출을 야기했다.


1860년~1861년, 가리발디는 나폴리와 시칠리아에서 통일 운동을 이끌었다. 테아노는 가리발디와 사르데냐의 마지막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사이의 유명한 만남이 이루어진 장소로, 이 만남에서 가리발디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의 손을 잡고 그를 이탈리아의 왕으로 칭송했다. 카보우르는 1860년 가리발디의 남부 이탈리아를 사르데냐 왕국과의 연합에 포함시키는 데 동의했다. 이로써 사르데냐 정부는 1861년 3월 17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초대 국왕으로 하는 통일 이탈리아 왕국을 선포할 수 있었다. 1865년 왕국의 수도는 토리노에서 피렌체로 이전되었다. 1866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동안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을 벌여 이탈리아가 베네토를 합병하는 결과를 낳았다. 마침내 1870년, 프랑스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동안 로마를 포기하자 이탈리아인들은 교황령을 점령했고, 통일이 완료되었으며 수도는 로마로 이전되었다.
사르데냐의 헌법은 1861년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대 적용되어 신생 국가의 기본적 자유를 보장했지만, 선거법은 무산 계층을 배제했다. 신생 왕국은 자유주의자들이 지배하는 의회 입헌군주제로 통치되었다. 북부 이탈리아가 빠르게 산업화되는 동안, 남부와 북부 농촌 지역은 미개발 상태로 남아 과잉 인구를 겪었고, 수백만 명이 이주하여 크고 영향력 있는 디아스포라를 형성했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세력을 키워 전통적인 자유주의 및 보수주의 기득권층에 도전했다. 19세기 마지막 20년 동안 이탈리아는 아프리카의 에리트레아, 소말릴란드, 트리폴리타니아, 키레나이카를 복속시켜 식민 강국으로 발전했다. 1913년에는 남성 보통 선거가 채택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시기는 1892년부터 1921년까지 다섯 차례 총리를 역임한 조반니 졸리티가 주도했다.
이탈리아는 1915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국가 통일을 완수하고자 했으며, 따라서 역사학적 관점에서 이탈리아 통일의 완결로서 제4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으로도 간주된다. 명목상 독일 제국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삼국 동맹을 맺고 있던 이탈리아는 1915년 연합국에 가담하여, 이전 오스트리아 연안 지대, 달마티아 및 오스만 제국 일부를 포함하는 상당한 영토 획득을 약속받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연합국의 승리에 대한 이탈리아의 기여는 이탈리아를 "빅 4" 강대국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군대 재편성과 징병은 이탈리아의 승리로 이어졌다. 1918년 10월, 이탈리아는 대규모 공세를 시작하여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전쟁 종결을 의미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를 확보하고, 2주 이내에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 중 65만 명 이상의 이탈리아 군인과 그만큼의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왕국은 파산 직전에 이르렀다. 생제르맹 조약(1919년)과 라팔로 조약(1920년)은 트렌티노 알토아디제, 율리안 변경주, 이스트리아, 크바르네르만, 달마티아 도시 차라의 합병을 허용했다. 이후 로마 조약(1924년)은 이탈리아에 의한 피우메 합병으로 이어졌다. 이탈리아는 런던 조약에서 약속된 다른 영토를 받지 못했으므로, 이 결과는 베니토 무솔리니에 의해 "절단된 승리"로 비난받았으며, 이는 이탈리아 파시즘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역사가들은 "절단된 승리"를 파시스트들이 이탈리아 제국주의를 부추기기 위해 사용한 "정치적 신화"로 간주한다. 이탈리아는 국제 연맹 집행위원회에서 영구 의석을 얻었다.
3.6. 파시스트 정권과 제2차 세계 대전

대전쟁의 참화 이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적 소요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반혁명과 탄압으로 이어졌다. 소련식 혁명을 두려워한 자유주의 기득권층은 무솔리니가 이끄는 소규모 국가 파시스트당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1922년 10월, 국가 파시스트당의 검은셔츠단은 대규모 시위와 "로마 진군" 쿠데타를 조직했다.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총리로 임명하여 무력 충돌 없이 파시스트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무솔리니는 정당을 금지하고 개인의 자유를 축소하여 독재 체제를 확립했다. 이러한 조치는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나치 독일과 프랑코 정권의 유사한 독재 체제에 영감을 주었다.
파시즘은 이탈리아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에 기반을 두었으며, 로마 제국과 베네치아 제국의 유산을 바탕으로 한 미회수 영토 주장을 통해 이탈리아 영토를 확장하고자 했다. 이러한 이유로 파시스트들은 개입주의적 외교 정책을 펼쳤다. 1935년,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여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를 건설했으나, 이는 국제적 고립을 초래하여 이탈리아가 국제 연맹에서 탈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후 이탈리아는 나치 독일 및 일본 제국과 동맹을 맺고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강력히 지원했다. 1939년,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병합했다.
이탈리아는 1940년 6월 10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여러 시기에 걸쳐 이탈리아군은 영국령 소말릴란드, 이집트, 발칸반도, 동부 전선 등에서 진격했다. 그러나 동부 전선과 동아프리카 전역,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패배하여 아프리카와 발칸반도의 영토를 잃었다. 이탈리아의 전쟁 범죄에는 초법적 살인과 인종 청소가 포함되었으며, 주로 유고슬라비아인 약 25,000명을 이탈리아 강제 수용소 등으로 추방했다.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전쟁 중후반 이탈리아계 민간인에 대한 포이베 학살을 포함한 자체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1943년 7월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이 시작되면서 7월 25일 파시스트 정권이 붕괴되었다. 무솔리니는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명령으로 실각하고 체포되었다. 9월 8일, 이탈리아는 카시빌레 휴전 협정에 서명하여 연합국과의 전쟁을 종식시켰다. 독일은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도움을 받아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탈리아는 남부에서 진격하는 연합군과 함께 전쟁터로 남았다.

북부에서는 독일이 이탈리아 사회공화국(RSI)을 세웠는데, 이는 나치의 괴뢰 국가이자 협력주의 정권으로, 무솔리니가 독일 낙하산 부대에 의해 구출된 후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남은 이탈리아군은 연합군과 함께 싸우는 이탈리아 공동교전군으로 조직되었고, 무솔리니에게 충성하는 다른 이탈리아군은 공화국 국가 방위군에서 독일군과 함께 싸우기로 결정했다. RSI와 협력한 독일군은 학살을 저지르고 수천 명의 유대인을 죽음의 수용소로 추방했다. 휴전 이후에는 독일 점령군과 협력자들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인 이탈리아 저항 운동이 등장했다. 이는 파르티잔과 파시스트 RSI 군대 간의 전투로 인해 이탈리아 내전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1945년 4월, 패배가 임박하자 무솔리니는 북쪽으로 탈출하려 했으나 파르티잔에게 붙잡혀 즉결 처형되었다.
적대 행위는 1945년 4월 29일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이 항복하면서 끝났다. 분쟁으로 거의 50만 명의 이탈리아인이 사망했고, 사회는 분열되었으며 경제는 거의 파괴되었다. 1944년 1인당 소득은 1900년 이후 최저 수준이었다. 전쟁의 여파로 이탈리아는 파시스트 정권을 지지한 군주제에 분노했고, 이는 이탈리아 공화주의 부활에 기여했다.
3.7. 공화국 시대

이탈리아는 1946년 6월 2일에 열린 국민투표 이후 공화국이 되었으며, 이날은 이후 페스타 델라 레푸블리카로 기념되고 있다. 이는 여성이 전국적으로 투표한 최초의 사례였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아들 움베르토 2세는 퇴위할 수밖에 없었다. 공화국 헌법은 1948년에 승인되었다. 파리 조약에 따라 아드리아해 인근 지역은 유고슬라비아에 합병되었고, 이로 인해 약 30만 명의 이스트리아인과 달마티아인이 이주하는 탈출이 발생했다. 이탈리아는 모든 식민지를 잃었고, 이탈리아 제국은 종식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정권 장악에 대한 두려움은 1948년 총선에서 알치데 데 가스페리가 이끄는 기독교민주당이 압승을 거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결과 1949년 이탈리아는 NATO 회원국이 되었다. 마셜 플랜은 경제를 부흥시켰고, 1960년대 후반까지 경제 기적으로 불리는 시기를 누렸다. 1950년대에 이탈리아는 유럽 연합의 전신인 유럽 공동체의 창립국이 되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이탈리아는 경제적 어려움, 특히 1973년 석유 파동 이후의 사회적 갈등, 테러리스트 학살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납의 시대를 겪었다.
경제가 회복되면서 이탈리아는 1970년대에 G7에 가입한 후 세계 5대 산업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국가 부채는 GDP의 100%를 넘어섰다. 1992년에서 1993년 사이 이탈리아는 정부의 새로운 반마피아 조치에 대한 보복으로 시칠리아 마피아가 저지른 테러 공격에 직면했다. 정치적 마비, 막대한 공공 부채, 깨끗한 손 수사로 드러난 광범위한 부패에 환멸을 느낀 유권자들은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했다. 거의 50년 동안 통치해 온 기독교민주당은 위기를 겪고 해체되어 여러 파벌로 나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 세력으로 재편되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미디어 재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주도하는 중도우파와 로마노 프로디 교수가 이끄는 중도좌파 연립 정부가 번갈아 통치했다.
2011년 대침체 와중에 베를루스코니는 사임했고, 마리오 몬티의 기술관료 내각으로 교체되었다. 2014년 마테오 렌치가 총리가 되었고 정부는 헌법 개혁을 시작했다. 이는 2016년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었고 파올로 젠틸로니가 총리가 되었다.
2010년대 유럽 난민 위기 동안 이탈리아는 EU로 들어오는 대부분의 망명 신청자들의 입국 지점이자 주요 목적지였다. 2013년에서 2018년 사이에 이탈리아는 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온 70만 명 이상의 이민자를 수용했는데, 이는 공공 재정에 부담을 주었고 극우 또는 유럽 회의주의 정당에 대한 지지 급증으로 이어졌다. 2018년 총선 이후 주세페 콘테는 포퓰리즘 연립 정부의 총리가 되었다.
약 20만 명의 희생자를 낸 이탈리아는 코로나19 범유행으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국가 중 하나였으며, 경제적으로도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국가 중 하나였다. 2021년 2월, 정부 위기 이후 콘테는 사임했다. 전 유럽 중앙은행 총재였던 마리오 드라기는 대부분의 주요 정당이 지지하는 국민 통합 정부를 구성하여, 범유행으로 인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경제 부양책을 시행할 것을 약속했다. 2022년 조르자 멜로니는 이탈리아 최초의 여성 총리로 취임했다.
4. 지리

영토가 동명의 지리적 지역과 대체로 일치하는 이탈리아는 남유럽(또한 서유럽의 일부로도 간주됨)에 위치하며, 북위 35도에서 47도, 동경 6도에서 19도 사이에 있다. 북쪽으로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와 국경을 접하며, 대략 알프스 분수령으로 경계가 정해져 포 계곡과 베네치아 평원을 둘러싸고 있다. 이탈리아는 이탈리아반도 전체,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인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그리고 수많은 작은 섬들로 구성된다. 이탈리아 영토의 일부는 알프스 분지를 넘어서며, 일부 섬은 유라시아 대륙붕 외부에 위치한다.
국토 면적은 30.12 만 abbr=out이며, 이 중 육지는 29.40 만 abbr=on, 수역은 7210 abbr=on이다. 섬을 포함하여 이탈리아는 지중해, 리구리아해, 티레니아해, 이오니아해, 아드리아해에 걸쳐 7600 abbr=off의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와의 국경은 488 abbr=on, 스위스와는 740 abbr=on, 오스트리아와는 430 abbr=on, 슬로베니아와는 232 abbr=on이다. 주권 국가인 산마리노와 바티칸 시국(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이자 천주교회의 전 세계 본부인 성좌의 통치하에 있음)은 이탈리아 내의 위요지이며, 캄피오네디탈리아는 스위스 내의 이탈리아 월경지이다. 산마리노와의 국경은 39 abbr=on, 바티칸 시국과의 국경은 3.2 abbr=on이다.
4.1. 지형

이탈리아 영토의 35% 이상이 산악 지대이다. 아펜니노산맥은 반도의 등뼈를 이루고, 알프스산맥은 북부 경계의 대부분을 형성하며, 이탈리아 최고봉인 몽블랑산(몬테 비안코) 정상(해발 4810 m)이 이곳에 위치한다. 다른 유명한 산으로는 서부 알프스의 마터호른산(몬테 체르비노)과 동부 알프스의 돌로미티산맥이 있다. 이탈리아의 많은 지역이 화산 기원이다. 남부의 작은 섬과 군도 대부분은 화산섬이다. 활화산으로는 시칠리아의 에트나산(유럽 최대), 불카노, 스트롬볼리, 베수비오산이 있다.
이탈리아의 강 대부분은 아드리아해 또는 티레니아해로 흘러든다. 가장 긴 강은 포강으로, 서쪽 국경의 알프스에서 발원하여 파단 평야를 가로질러 아드리아해로 흐른다. 포 계곡은 4.60 만 abbr=on의 면적을 가진 가장 큰 평야이며, 국토의 저지대 70% 이상을 차지한다. 가장 큰 호수는 크기순으로 가르다호(면적 367.94 disp=or), 마조레호(면적 212.51 disp=or), 코모호(면적 145.9 disp=or)이다.
4.2. 기후
이탈리아의 기후는 북쪽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이탈리아를 둘러싸고 있는 바다의 영향을 받으며, 이 바다는 열과 습기의 저장고 역할을 한다. 남부 온대 지역 내에서 지중해성 기후를 결정하며 지역적 차이가 나타난다. 반도의 길이와 대부분 산악 지형인 내륙 때문에 기후는 매우 다양하다. 대부분의 내륙 북부 및 중부 지역에서는 온난 습윤 기후에서 습윤 대륙성 기후 및 해양성 기후까지 다양하다. 포 계곡은 대부분 온난 습윤 기후로, 겨울은 시원하고 여름은 덥다. 리구리아, 토스카나의 해안 지역과 남부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쾨펜의 기후 구분에서처럼 지중해성 기후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인다.
해안 지역의 기후 조건은 내륙 지역과 다르며, 특히 겨울에는 고지대가 춥고 습하며 눈이 자주 내리는 경향이 있다. 해안 지역은 겨울이 온화하고 여름은 덥고 일반적으로 건조하며, 저지대 계곡은 여름에 덥다. 겨울 기온은 알프스산맥에서 0 °C에서 시칠리아에서 12 °C까지 다양하며, 따라서 평균 여름 기온은 20 °C에서 25 °C 이상까지 다양하다. 겨울은 북부에서는 춥고 안개가 끼며 눈이 오는 기간이 길게 이어질 수 있고, 남부에서는 더 온화하고 맑은 날씨가 나타나는 등 매우 다양할 수 있다. 여름은 고지대를 제외하고 전국적으로 더우며, 특히 남부에서 그렇다. 북부 및 중부 지역에서는 봄부터 가을까지 강한 뇌우가 발생할 수 있다.
4.3. 생물 다양성

이탈리아의 다양한 지리적 특성, 즉 알프스산맥, 아펜니노산맥, 중부 이탈리아 삼림 지대, 남부 이탈리아의 가리그 및 마키 관목림 등은 서식지의 다양성에 기여한다. 이탈리아 반도가 지중해 중심부에 위치하여 중앙 유럽과 북아프리카 사이의 통로를 형성하고 약 8000 km의 해안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칸반도, 유라시아, 중동에서 온 여러 종들이 유입되었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동물상 생물 다양성 수준이 가장 높은 국가일 가능성이 높으며, 57,000종 이상이 기록되어 유럽 전체 동물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한다. 또한 유럽 연합 내에서 동식물 종의 생물 다양성 수준이 가장 높다.
이탈리아의 동물상에는 4,777종의 고유 동물종이 포함되며, 여기에는 사르데냐긴귀박쥐, 사르데냐붉은사슴, 안경도롱뇽, 갈색동굴도롱뇽, 이탈리아도롱뇽, 이탈리아개구리, 아펜니노노란배두꺼비, 이탈리아벽도마뱀, 시칠리아연못거북 등이 있다. 포유류는 119종, 조류는 550종, 파충류는 69종, 양서류는 39종, 어류는 623종, 무척추동물은 56,213종(이 중 37,303종이 곤충)이 있다.
이탈리아의 식물상은 전통적으로 약 5,500종의 관다발식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As of|2005|lc=y}} 기준, 이탈리아 관다발식물 데이터뱅크에는 6,759종이 기록되어 있다. 이탈리아에는 1,371종의 고유 식물 및 아종이 있으며, 여기에는 시칠리아전나무, 바르바리치나물레나물, 바다금잔화, 라벤더 코튼, 우크리아나제비꽃 등이 포함된다. 이탈리아는 유럽 야생생물 및 자연 서식지 보전에 관한 베른 협약 및 서식지 지침의 서명국이다.
이탈리아에는 많은 식물원과 역사 정원이 있다. 이탈리아식 정원은 대칭, 축 기하학,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는 원칙에 문체적으로 기반을 두고 있으며, 정원 가꾸기의 역사, 특히 프랑스식 및 영국식 정원에 영향을 미쳤다. 이탈리아식 정원은 로마식 정원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정원의 영향을 받았다.
이탈리아늑대는 이탈리아의 국수(國獸)이며, 국목(國樹)은 딸기나무(아르부투스 우네도)이다. 이는 이탈리아늑대가 아펜니노산맥과 서부 알프스에 서식하며 로마 건국 신화와 같이 라틴 및 이탈리아 문화에서 두드러지게 등장하기 때문이며, 딸기나무의 녹색 잎, 흰색 꽃, 붉은 열매는 지중해 자생종으로 국기의 색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국조(國鳥)는 이탈리아참새이며, 국화(國花)는 딸기나무 꽃이다.
4.4. 환경 문제
급속한 산업 성장 이후, 이탈리아는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개선 이후 이탈리아는 현재 생태학적 지속 가능성 부문에서 세계 84위를 차지하고 있다. 국립공원, 지역공원, 자연보호구역으로 보호되는 총면적은 이탈리아 영토의 약 11%를 차지하며, 이탈리아 해안선의 12%가 보호되고 있다.
이탈리아는 재생 에너지 생산 분야에서 세계 선두 국가 중 하나였으며, 2010년에는 설치된 태양 에너지 용량 기준으로 세계 4위, 풍력 발전 용량 기준으로는 6위를 기록했다. 2020년 재생 에너지는 이탈리아 에너지 소비량의 약 37%를 차지했다.
이탈리아는 1963년부터 1990년까지 원자력 발전소를 운영했지만, 체르노빌 참사와 국민투표 이후 원자력 프로그램은 중단되었다. 이 결정은 2008년 정부에 의해 뒤집혀 최대 4기의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국민투표에 의해 다시 무산되었다.
대기오염은 특히 산업화된 북부 지역에서 여전히 심각하며, 이탈리아는 세계 12위의 이산화탄소 배출국이다. 대도시의 광범위한 교통량과 혼잡은 환경 및 건강 문제를 계속 야기하고 있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 이후 스모그 수준은 감소했으며, 스모그는 점점 드문 현상이 되고 이산화황 수준도 감소하고 있다.
삼림 벌채, 불법 건축, 부실한 토지 관리 정책은 이탈리아 산악 지역에서 심각한 침식을 초래하여 1963년 바이온트댐 홍수, 1998년 사르노, 2009년 메시나 산사태와 같은 생태 재앙을 야기했다.
5. 정치
{{본문|이탈리아의 정치}}
이탈리아는 군주제가 폐지된 1946년 이래 단일 의회 공화국이다. 이탈리아의 대통령은 현재 2015년부터 재임 중인 세르조 마타렐라이며, 이탈리아의 국가원수이다. 대통령은 이탈리아 의회와 지역 유권자들이 합동 회의에서 7년 단임으로 선출한다.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및 파시스트 세력 패배에 기여한 반파시즘 세력 대표들로 구성된 제헌의회의 결과물인 성문 민주 헌법을 가지고 있다.
5.1. 정부
{{다중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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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age1 = Sergio Mattarella Official (cropped).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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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ption1 = 세르조 마타렐라
{{작은 글씨|이탈리아의 대통령
2015년 이후 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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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ption2 = 조르자 멜로니
{{작은 글씨|이탈리아의 총리
2022년 이후 재임}}
}}
이탈리아는 혼합 비례대표 및 다수결 투표 제도에 기반한 의회 정부를 가지고 있다. 의회는 완전한 양원제이며, 각 원은 동일한 권한을 갖는다. 두 의회는 대의원(몬테치토리오궁에서 회의)과 공화국 원로원(로마 마다마궁에서 회의)이다. 이탈리아 의회의 특징 중 하나는 해외에 영구 거주하는 이탈리아 시민에게 주어지는 대표성으로, 4개의 별도 해외 선거구에서 하원의원 8명과 상원의원 4명이 선출된다. 대통령이 "사회, 과학, 예술 또는 문학 분야에서 뛰어난 애국적 공로를 인정하여" 임명하는 종신 상원의원도 있다. 전직 대통령은 직권상 종신 상원의원이 된다.

이탈리아 총리는 정부 수반이며 행정권을 가지지만, 대부분의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각료회의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총리와 내각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의회의 신임 투표로 확정된다. 총리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임 투표를 통과해야 한다. 총리의 역할은 대부분의 다른 의원내각제와 유사하지만, 의회 해산권은 없다. 또 다른 차이점은 정보기관에 대한 정치적 책임이 총리에게 있으며, 총리는 정보 정책 조정, 재정 자원 결정, 사이버 보안 강화, 국가 기밀 적용 및 보호, 국내외 요원의 작전 수행 승인 등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가진다는 점이다.
주요 정당으로는 이탈리아의 형제들, 민주당, 오성운동이 있다. 2022년 총선에서 이 세 정당과 그 연합은 하원 400석 중 357석, 상원 200석 중 187석을 차지했다. 조르자 멜로니의 이탈리아의 형제들, 마테오 살비니의 동맹,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포르차 이탈리아italic=no이탈리아어, 마우리치오 루피의 우리 보통당을 포함한 중도우파 연합이 의회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다. 나머지 의석은 민주당, 녹색과 좌파 동맹, 아오스타 계곡, 더 유럽, 시민의 약속, 오성운동, 행동 - 이탈리아 비바, 쥐트티롤 인민당, 남부의 북부 요청, 해외 이탈리아인 연합 운동을 포함한 중도좌파 연합이 차지했다.
5.2. 사법 및 형사 사법

이탈리아의 법은 여러 법원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계층적이다. 하위 법원의 법이나 규정은 상위 법원의 규칙과 충돌할 수 없다(법원의 계층 구조). 1948년의 헌법이 최고의 법원이다. 이탈리아 헌법재판소는 법률의 합헌성을 심판한다. 사법부는 나폴레옹 법전과 후대 법령에 의해 수정된 로마법에 기초하여 판결을 내린다. 최고 파기 법원은 형사 및 민사 항소 모두에 대한 최고 법원이다.
이탈리아는 성소수자 권리에서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 뒤처져 있다. 이탈리아의 고문 금지법은 국제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법 집행은 여러 경찰력으로 복잡하다. 국가 경찰 기관은 국가 경찰 (Polizia di Stato), 카라비니에리, 재무 경찰 (Guardia di Finanza), 형무 경찰 (Polizia Penitenziaria)이며, 해안 경비대 (Guardia Costiera)도 있다. 경찰 업무는 주로 국가 차원에서 제공되지만, 지방 경찰과 자치 경찰도 있다.
19세기 중반부터 등장한 이탈리아 조직범죄와 범죄 조직은 이탈리아 남부 여러 지역의 사회 및 경제 생활에 침투했다. 가장 악명 높은 것은 시칠리아 마피아로, 미국을 포함한 해외로 확장되었다. 마피아 수입은 GDP의 9%에 이를 수 있다. 2009년 보고서에 따르면 마피아의 강력한 영향력이 있는 코무네nocat=true이탈리아어는 610개로, 1,300만 명의 이탈리아인이 거주하며 GDP의 15%가 생산되는 곳이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범죄 조직일 가능성이 있는 칼라브리아의 은드랑게타는 GDP의 3%를 차지한다.
인구 1,000명당 0.013명으로 이탈리아는 살인율이 47번째로 높으며, 세계 61개국과 비교된다. 인구 1,000명당 강간 건수는 43번째로 높으며, 세계 64개국과 비교된다. 이는 선진국 중에서는 비교적 낮은 수치이다.
5.3. 대외 관계

이탈리아는 현재 유럽 연합(EU)의 전신인 유럽 경제 공동체(EEC)와 NATO의 창립 회원국이다. 이탈리아는 1955년 유엔에 가입했으며, OECD,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세계 무역 기구(GATT/WTO),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 유럽 평의회, 중앙유럽 구상과 같은 국제기구의 회원국이자 강력한 지지자이다. 국제기구의 순회 의장국으로서 2018년 OSCE, 2017년 G7, 2014년 EU 이사회 의장국을 역임했다. 이탈리아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비상임 이사국을 반복적으로 맡고 있다.
이탈리아는 다자간 국제 정치를 강력히 지지하며 유엔과 그 국제 안보 활동을 지지한다. 2013년 이탈리아는 해외에 5,296명의 병력을 파병하여 25개국에서 33개의 유엔 및 NATO 임무에 참여했다. 이탈리아는 소말리아, 모잠비크, 동티모르에서의 유엔 평화 유지 임무를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파병했다. 이탈리아는 보스니아, 코소보, 알바니아에서의 NATO 및 유엔 작전을 지원하며, 2003년부터 항구적 자유 작전(OEF)을 지원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2,000명 이상의 병력을 파병했다.
이탈리아는 이라크 재건 및 안정화를 위한 국제적 노력을 지지했지만, 2006년까지 군사 파병단 3,200명을 철수했다. 2006년 8월, 이탈리아는 유엔 레바논 임시 주둔군을 위해 약 2,450명의 병력을 파병했다. 이탈리아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최대 재정 지원국 중 하나로, 2013년에만 6천만 유로를 기부했다.
5.4. 군사

이탈리아의 군사사는 고대 이탈리아 민족들이 치른 군사적 충돌, 특히 고대 로마인들의 지중해 세계 정복부터 시작하여 중세 시대 이탈리아 도시 국가와 해양 공화국의 셔력 확장, 이탈리아 전쟁과 계승 전쟁에 역사적 이탈리아 국가들의 참여, 나폴레옹 시대, 이탈리아 통일, 식민 제국의 군사 작전, 두 차례의 세계 대전,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NATO, EU 또는 UN의 후원 하에 전 세계 평화 유지 작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기간을 기록한다.
이탈리아 육군, 해군, 공군, 카라비니에리는 이탈리아 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방최고위원회의 지휘하에 이탈리아군을 구성한다. 헌법 제78조에 따르면, 의회는 전쟁 상태를 선포하고 정부에 필요한 전쟁 수행 권한을 부여할 권한을 갖는다.
재무 경찰은 군대의 한 부서는 아니지만, 군사적 지위를 가지며 군대 조직에 따라 편성된다. 2005년부터 군 복무는 자원제로 변경되었다. 2010년 이탈리아군은 현역 293,202명이었으며, 이 중 114,778명이 카라비니에리이다. NATO의 핵 공유 전략의 일환으로 이탈리아는 게디 및 아비아노 공군 기지에 위치한 90기의 미국 B61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다.
육군은 국가 지상 방위군이다. 1946년 이탈리아가 공화국이 되면서 "왕립 이탈리아 육군"의 잔존 병력으로 창설되었다. 가장 잘 알려진 전투 차량으로는 다르도 보병전투차량, B1 켄타우로 구축전차, 아리에테 전차가 있으며, 항공기로는 EU, NATO, UN 임무에 배치되는 망구스타 공격헬기가 있다. 또한 레오파르트 1 및 M113 장갑차를 보유하고 있다.
이탈리아 해군은 대양해군이다. 1946년 레지아 마리나('왕립 해군')의 잔존 병력으로 창설되었다. 해군은 EU 및 NATO 회원국으로서 전 세계 연합 평화 유지 작전에 참여해 왔다. 2014년 해군은 소형 보조함을 포함하여 154척의 함정을 운용했다.
이탈리아 공군은 1923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 의해 독립 군종인 레지아 아에로나우티카('왕립 공군')로 창설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레지아 아에로나우티카로 개칭되었다. 2021년 이탈리아 공군은 219대의 전투기를 운용했다. 수송 능력은 27대의 C-130J와 C-27J 스파르탄으로 보장된다. 곡예 비행팀은 프레체 트리콜로리('삼색 화살')이다.
군의 자치 부대인 카라비니에리는 이탈리아의 헌병대이자 군사경찰로서, 이탈리아의 다른 경찰력과 함께 군 및 민간인을 치안한다. 카라비니에리의 여러 부서는 별도의 부처에 보고하지만, 공공 질서와 안보 유지 시에는 내무부에 보고한다.
6. 행정 구역
{{본문|이탈리아의 주|이탈리아의 현|이탈리아의 광역시|코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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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는 20개의 주(레조네)로 구성되며, 이 중 5개 주는 추가적인 문제에 대한 입법권을 부여하는 특별 자치 지위를 가지고 있다.
- 아브루초
- 발레다오스타
- 풀리아
- 바실리카타
- 칼라브리아
- 캄파니아
- 에밀리아로마냐
-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
- 라치오
- 리구리아
- 롬바르디아
- 마르케
- 몰리세
- 피에몬테
- 사르데냐
- 시칠리아
- 트렌티노알토아디제
- 토스카나
- 움브리아
- 베네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