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몰타 공화국은 남유럽 지중해 중앙에 위치한 섬나라로, 여러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 국가이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남쪽 약 80 km, 튀니지 동쪽 약 284 km, 리비아 북쪽 약 333 km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주요 섬으로는 몰타섬, 고조섬, 코미노섬이 있으며, 이 중 세 섬에만 사람이 거주한다. 수도는 발레타로, 유럽 연합에서 면적과 인구 모두 가장 작은 수도이다. 국토 면적은 약 316 km2이며, 인구는 약 54만 2천 명(2021년 기준)으로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매우 높은 국가 중 하나이다. 공용어는 몰타어와 영어이며, 몰타어는 아랍어의 영향을 받은 셈어 계통 언어이다.
몰타는 기원전 5900년경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지중해 중심부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페니키아, 카르타고, 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아랍, 노르만, 아라곤 왕국, 성 요한 기사단, 프랑스, 영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으며 다양한 문화가 융합되었다. 특히 성 요한 기사단 통치 시기(1530년-1798년)에는 1565년 오스만 제국의 대공세를 막아내며 유럽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고, 이 시기에 수도 발레타가 건설되었다.
19세기 초 영국의 식민지가 된 몰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추축국의 포위 공격을 견뎌내며 연합군의 중요한 기지 역할을 수행했고, 이 공로로 영국 국왕 조지 6세로부터 조지 십자 훈장을 받았다. 1964년 9월 21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으며, 1974년 공화국을 선포했다. 2004년 유럽 연합(EU)에, 2008년 유로존에 가입하며 유럽 통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몰타의 정치 체제는 의원내각제를 기반으로 하는 공화국이다. 경제는 관광, 금융 서비스, 제조업 등이 주요 산업이며, 특히 따뜻한 기후, 풍부한 역사 유적, 아름다운 자연 경관으로 매년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몰타에는 발레타 시 전체, 할 사플리에니 지하 유적, 거석 신전군 등 3개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있으며, 이는 몰타의 풍부한 역사와 문화를 보여준다. 사회적으로는 로마 가톨릭이 국교이지만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며, 최근에는 성소수자 권리 등 인권 분야에서도 진전을 이루고 있다.
2. 국명
몰타라는 국명의 정확한 어원은 불분명하며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은 고대 그리스어 μέλι멜리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에서 유래했다는 것으로, 이는 '꿀'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몰타 섬을 Μελίτη멜리테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라고 불렀는데, 이는 '꿀처럼 달콤한' 또는 '꿀의 장소'라는 뜻으로, 몰타 토종벌이 생산하는 독특한 꿀 때문에 붙여졌을 가능성이 있다. 로마인들은 이 그리스어 이름을 받아들여 섬을 Melita멜리타라틴어라고 불렀다.
또 다른 설은 페니키아어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페니키아어 𐤌𐤋𐤈말레트페니키아어는 '항구', '피난처', 또는 '안식처'를 의미하는데, 이는 몰타의 그랜드 하버와 같이 천연 항구가 많은 지리적 특성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기원전 10세기에 해수면 상승으로 몰타 군도가 분리되고 원래 해안 정착지가 침수된 후, 코스피쿠아의 그랜드 하버가 주요 정착지가 되면서 이러한 이름이 붙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후 그리스인들이 이 이름을 받아들여 섬 전체와 고대 수도였던 므디나를 지칭하는 데 사용했을 수 있다.
중세 아랍어에서는 مَالِطَا말리타아랍어로 불렸으며, 이탈리아어와 현대 몰타어에서는 Malta말타이탈리아어로 정착되었다. 영어 이름 'Malta'는 이탈리아어와 몰타어에서 파생된 것이다. 16세기 후반부터 영어 문헌에 'Malta'와 그 파생형인 'Maltese'(몰타인, 몰타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1611년 킹 제임스 성경을 포함한 초기 영어 성경 번역본에서는 라틴어 형태인 Melita라틴어를 오랫동안 사용했으나, 1525년 틴들 성경에서는 그리스어 음차인 Melite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를 사용하기도 했다. 현대의 성경 번역본에서는 대부분 'Malta'를 사용하고 있다.
3. 역사
몰타의 역사는 지중해 문명의 교차로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다양한 외부 세력의 영향을 받으며 전개되었다. 선사 시대의 거석 문화부터 시작하여 고대 페니키아, 로마, 중세 아랍과 노르만, 근대 성 요한 기사단과 영국 통치를 거쳐 현대 독립 국가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다.
3.1. 선사 시대

몰타 섬에는 기원전 5900년경부터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유럽 신석기 시대 농업인들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고학자들은 스코르바 신전 유적에서 이탈리아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한 토기를 발굴했으며, 이는 몰타 섬에 최초로 정착한 사람들이 기원전 5200년경 시칠리아에서 건너온 석기 시대 사냥꾼이나 농부들, 아마도 시카니족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몰타의 초기 인류 도착은 난쟁이 하마, 거대한 백조, 난쟁이 코끼리 등 고유 동물군의 멸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초기 신석기 시대의 농경 정착지로는 아르 달람 동굴 등이 있다. 이 시기 몰타의 주민들은 곡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길렀으며, 다른 고대 지중해 문화와 마찬가지로 다산의 여신상을 숭배했다.
기원전 3600년경부터는 거석 신전 건축 문화가 등장하거나 기존 문화에서 발전했다. 이들은 고조섬의 잔티야 신전을 비롯하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 구조물 중 일부를 건설했으며, 하르 임 신전과 므나이드라 신전 등도 이 시기에 세워졌다. 이 신전들은 독특한 건축 양식, 특히 복잡한 세잎 클로버 형태의 디자인을 특징으로 하며, 기원전 4000년부터 기원전 2500년까지 사용되었다. 발레타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된 여신상으로 미루어 볼 때, 다산의 여신에게 동물 제물을 바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몰타 섬의 또 다른 고고학적 특징으로는 고대 건축가들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일정한 간격의 홈, 이른바 '수레바퀴 자국'(cart ruts)이 있다. 이는 섬 곳곳에서 발견되며, 특히 미스라 가르 일-크비르 지역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자국들은 나무 바퀴 수레가 부드러운 석회암을 침식시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기원전 2500년경, 이 거석 문화는 기근이나 질병으로 인해 섬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2500년 이후, 몰타 섬은 수십 년간 사람이 살지 않다가 청동기 시대 이주민들이 유입되었다. 이들은 화장 풍습을 가졌으며, 돌멘이라 불리는 더 작은 거석 구조물을 남겼다. 이들은 이전의 거석 신전을 건축한 사람들과는 다른 집단으로 여겨지며, 몰타의 돌멘이 시칠리아에서 발견된 작은 구조물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시칠리아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3.2. 고대

기원전 1000년 이후, 페니키아 상인들이 동지중해에서 콘월에 이르는 교역로의 기착지로 몰타 섬을 식민화하고 𐤀𐤍𐤍안페니키아어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통치 중심지는 섬의 이름과 같은 므디나였으며, 주요 항구는 그랜드 하버의 코스피쿠아로 𐤌𐤋𐤈말레트페니키아어라 불렸다. 기원전 332년 페니키아가 멸망한 후, 이 지역은 카르타고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 시기 몰타 주민들은 주로 올리브와 캐럽을 재배하고 직물을 생산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중,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가 치열한 전투 끝에 섬을 정복했으나, 그의 원정 실패 후 섬은 다시 카르타고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인 기원전 218년, 로마 집정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가 다시 몰타를 점령했다. 몰타는 Foederata Civitas라틴어의 지위를 얻어 공물 납부나 로마법 적용에서 면제되었으며, 시칠리아 속주의 관할하에 놓였다. 수도 므디나는 그리스와 로마식 이름인 멜리타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푸닉 문화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으며, 푸닉어 해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멜카르트의 키푸스는 기원전 2세기에 봉헌되었다. 기원전 1세기에 중단된 지역 로마 주화는 섬의 느린 로마화를 보여주는데, 마지막으로 주조된 동전에는 여전히 고대 그리스어 명문과 푸닉 양식이 남아 있어 그리스 및 푸닉 문화의 저항력을 나타낸다.

2세기, 하드리아누스 황제(재위 117년-138년)는 몰타의 지위를 무니키피움(자유 도시)으로 격상시켰다. 섬의 지방 행정은 4명의 quattuorviri iuri dicundo라틴어와 시 의회가 담당했으며, 므디나에 거주하는 로마 행정관이 시칠리아 총독을 대리했다. 서기 58년, 사도 바울과 복음사가 누가가 몰타 섬에서 난파했다. 바울은 3개월간 머물며 초기 기독교 신앙을 전파했다. 이 섬은 사도행전에서 Μελιτήνη멜리테네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로 언급된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사망으로 로마 제국이 최종 분할되면서, 몰타는 시칠리아를 따라 서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게르만 민족 대이동 시기 서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몰타는 여러 차례 정복되거나 점령당했다. 454년부터 464년까지는 반달족에게, 464년 이후에는 동고트족에게 복속되었다. 533년, 벨리사리우스는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정복하러 가는 길에 몰타 섬을 동로마(비잔티움) 제국의 지배하에 재통합시켰다. 몰타의 비잔티움 통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섬은 시칠리아 테마에 속했으며, 그리스인 총독과 소규모 그리스 주둔군이 있었다. 주민 대다수는 여전히 라틴화된 기존 거주민들이었으나, 이 시기 종교적 귀속은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사이를 오갔다. 비잔티움 통치는 그리스계 가족들을 몰타 사회에 유입시켰다. 몰타는 870년 아랍인들에게 정복될 때까지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3.3. 중세
몰타는 아랍-비잔티움 전쟁에 휘말렸으며, 몰타 정복은 827년 에우페미우스 제독이 동료 비잔티움인들을 배신하고 아글라브 왕조에게 시칠리아 침공을 요청하면서 시작된 시칠리아의 이슬람 정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슬람 연대기 작가이자 지리학자인 알 히미야리는 870년, 할라프 알 하딤이 처음 이끌고 나중에는 사와다 이븐 무함마드가 이끈 아랍 침략자들이 방어하던 비잔티움인들과 격렬한 전투 끝에 섬을 약탈하고 주요 건물을 파괴하여, 1048년-1049년 시칠리아에서 온 아랍인들에 의해 재식민화될 때까지 사실상 무인 상태로 남겨두었다고 기록했다. 이 새로운 정착이 시칠리아의 인구 팽창, 시칠리아의 더 높은 생활 수준(이 경우 재식민화는 수십 년 더 일찍 일어났을 수 있음), 또는 1038년 시칠리아의 아랍 통치자들 사이에서 발발한 내전의 결과인지는 불확실하다. 아랍 농업 혁명은 새로운 관개 시설, 목화, 그리고 일부 과일을 도입했다. 시칠리아에서 온 시쿨로-아랍어가 섬에서 채택되었고, 이는 결국 몰타어로 발전했다.
3.3.1. 노르만 정복

노르만족은 1091년 시칠리아 정복의 일환으로 몰타를 공격했다. 노르만 지도자 루지에로 1세는 기독교 포로들의 환영을 받았다. 신화와는 달리, 그는 자신의 바둑판 무늬 적백 깃발 일부를 찢어 몰타인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주어 현대 몰타 국기의 기초를 형성하지는 않았다.
몰타는 시칠리아 섬과 이탈리아 반도 남부를 포함하는 새로 형성된 시칠리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가톨릭 교회가 국교로 복원되었고, 몰타는 팔레르모 교구의 관할하에 놓였다. 일부 노르만 건축물이 몰타 주변, 특히 고대 수도 므디나에 세워졌다. 탄크레드 왕은 몰타를 왕국의 봉토로 삼고 1192년에 몰타 백작을 임명했다. 섬은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매우 탐나는 곳이었으므로, 이 시기에 몰타 남성들은 침략 시도를 막기 위해 군사화되었다. 초기 백작들은 숙련된 제노바 사략선 선원들이었다.
왕국은 1194년부터 1266년까지 호엔슈타우펜 왕조에게 넘어갔다. 프리드리히 2세 황제가 시칠리아 왕국을 재편성하기 시작하면서 서양 문화와 종교가 더욱 강렬하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몰타는 백작령 및 후작령으로 선포되었으나 무역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오랫동안 몰타는 요새화된 주둔지로만 남아 있었다.
1224년 아랍인 대량 추방이 있었고, 같은 해 아브루초의 첼라노의 모든 기독교 남성 인구가 몰타로 강제 이주되었다. 1249년 프리드리히 2세는 남아있는 모든 무슬림을 몰타에서 추방하거나 강제로 개종시키도록 명령했다.
짧은 기간 동안 왕국은 앙주 카페 왕조에게 넘어갔으나, 높은 세금으로 인해 왕조는 몰타에서 인기를 얻지 못했으며, 이는 부분적으로 나폴리의 샤를 1세가 제노바 공화국과 벌인 전쟁 때문이었고, 1275년 고조섬이 약탈당했다.
3.4. 몰타 기사단 통치 시기
몰타는 1282년부터 1409년까지 아라곤 왕국의 지배 왕조인 바르셀로나 가문의 통치를 받았으며, 아라곤인들은 1283년 그랜드 하버에서의 해전(몰타 해전)에서 시칠리아 만종 사건의 몰타 반란군을 지원했다.
아라곤 왕가의 친척들이 1409년까지 섬을 통치하다가 공식적으로 아라곤 왕국에 넘어갔다. 아라곤 지배 초기에는 군주들의 아들들이 몰타 백작 칭호를 받았다. 이 시기에 많은 지역 귀족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1397년까지 백작 칭호 보유는 봉건적 기반으로 되돌아갔고, 두 가문이 이 칭호를 놓고 다투었다. 이로 인해 시칠리아의 마르티노 1세는 칭호를 폐지했다. 몇 년 후 칭호가 복원되자 칭호 분쟁이 다시 일어났고, 지역 귀족들이 이끄는 몰타인들은 곤살보 몬로이 백작에 대항하여 봉기했다. 비록 백작에게 반대했지만, 몰타인들은 시칠리아 왕실에 대한 충성을 표명했고, 이는 아라곤의 알폰소 5세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반란에 대해 백성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제3자에게 칭호를 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왕실에 다시 통합시켰다. 므디나 시는 '귀족 도시'라는 칭호를 받았다.

1530년 3월 23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프랑스인 필리프 빌리에르 드 릴 아담의 지휘 아래 성 요한 기사단에게 섬을 영구 임대료로 주었고, 그들은 매년 몰타 매 한 마리를 공물로 바쳐야 했다. 이 기사단은 성 요한 기사단으로도 알려진 군사 종교 기사단이었으며 나중에는 몰타 기사단으로 불렸는데, 1522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로도스섬에서 쫓겨난 상태였다.
성 요한 기사단은 1530년부터 1798년까지 몰타와 고조를 통치했다. 이 기간 동안 섬의 전략적, 군사적 중요성은 크게 증대되었는데, 작지만 효율적인 성 요한 기사단의 함대가 이 새로운 기지에서 출격하여 지중해 주변 오스만 영토의 해상 항로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1551년, 고조섬 인구(약 5,000명)가 바르바리 해적에게 노예로 잡혀 북아프리카 바르바리 해안으로 끌려갔다.

프랑스인 장 파리조 드 발레트가 이끄는 기사단은 1565년 오스만 제국의 몰타 대공세를 막아냈다. 기사단은 포르투갈, 스페인, 몰타 군대의 도움으로 공격을 격퇴했다. 공성전 이후 그들은 몰타의 요새, 특히 내부 항구 지역을 강화하기로 결정했고, 발레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명명된 새로운 도시 발레타가 건설되었다. 그들은 또한 해안을 따라 감시탑(비냐쿠르 타워, 라스카리스 타워, 드 레딘 타워)을 세웠는데, 이 탑들은 작업을 명령한 기사단장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기사단은 치타 비토리오사(현대 비르구)의 장식과 치타 로앙(현대 아즈-제부즈)을 포함한 새로운 도시 건설 등 많은 건축 및 문화 프로젝트를 완료했다. 그러나 1700년대 후반에 이르러 기사단의 힘은 쇠퇴했고 기사단은 인기를 잃었다.
3.5. 프랑스 점령과 영국 식민 통치

기사단의 통치는 1798년 프랑스 혁명 전쟁 중 나폴레옹이 이집트로 가는 길에 몰타를 점령하면서 끝났다. 1798년 6월 12일부터 18일까지 나폴레옹은 발레타의 팔라초 파리시오에 머물렀다. 그는 정부 위원회 창설, 12개 지방 자치 단체 설립, 공공 재정 관리, 모든 봉건적 권리 및 특권 폐지, 노예제 폐지, 모든 터키 및 유대인 노예 석방 등으로 국가 행정을 개혁했다. 사법 차원에서는 가족법이 제정되었고 12명의 판사가 지명되었다. 공교육은 보나파르트 자신이 제시한 원칙에 따라 조직되어 초등 및 중등 교육을 제공했다. 그 후 그는 이집트로 항해하여 몰타에 상당한 수비대를 남겼다.
남겨진 프랑스군은 몰타인들에게 인기가 없었는데, 특히 프랑스군이 가톨릭에 적대적이고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지역 교회를 약탈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재정 및 종교 정책은 몰타인들을 격분시켜 반란을 일으켰고 프랑스군을 몰아냈다. 영국은 나폴리 왕국 및 시칠리아 왕국과 함께 몰타인들에게 탄약과 원조를 보냈고, 영국은 또한 해군을 파견하여 섬들을 봉쇄했다.
1798년 10월 28일, 알렉산더 볼 경은 고조섬의 프랑스 주둔군과의 항복 및 섬의 영국 이양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영국은 그날 섬을 현지인들에게 넘겨주었고, 시칠리아의 페르디난도 3세를 대신하여 사베리오 카사르 대주교가 관리했다. 고조는 1801년 카사르가 영국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클로드-앙리 벨그랑 드 보부아 장군은 1800년에 프랑스군을 항복시켰다. 몰타 지도자들은 본섬을 알렉산더 볼 경에게 바치며 섬이 영국 자치령이 되기를 요청했다. 몰타인들은 권리 선언을 통해 "자유민의 왕, 대영 제국 및 아일랜드 국왕 폐하의 보호와 주권 하에" 들어가는 데 동의했다. 선언문은 또한 "폐하께서는 이 섬들을 어떤 세력에게도 양도할 권리가 없으며... 만약 보호를 철회하고 주권을 포기하기로 선택하신다면, 다른 주권을 선출하거나 이 섬들을 통치할 권리는 오직 우리, 주민과 원주민에게만 있으며, 통제 없이 속한다"고 명시했다.
3.6. 제2차 세계 대전

1814년 파리 조약의 일부로 몰타는 공식적으로 대영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해운 중계 기지 및 함대 본부로 사용되었다.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후, 지브롤터 해협과 이집트 사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몰타의 지리적 이점은 주요 자산이 되었고, 영국의 주요 교역로인 인도행 길목의 중요한 기착지로 여겨졌다. 술탄 압둘 아지즈의 명으로 1873년에서 1874년 사이에 몰타 대공성전에서 전사한 오스만 병사들을 위한 터키 군 묘지가 건설되었다.
1915년에서 1918년 사이, 제1차 세계 대전 중 몰타는 많은 부상병들을 수용하여 '지중해의 간호사'로 알려졌다. 1919년 6월 7일, 몰타 대중은 생계비 위기에 대응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영국군은 결국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4명을 사살했다. '세테 준요'(Sette Giugno, "6월 7일")로 알려진 이 사건은 매년 기념되며 5개의 국경일 중 하나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몰타 정치는 이탈리아어 사용자와 영어 사용자 정당 간의 언어 문제로 점철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발레타는 영국 해군 지중해 함대 본부의 위치였으나, 윈스턴 처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37년 유럽으로부터의 공습에 너무 취약하다는 우려로 인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사령부가 이전되었다. 전쟁 중 몰타는 연합군에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국의 식민지로서 시칠리아와 추축국 해운 항로에 근접해 있던 몰타는 이탈리아와 독일 공군의 폭격을 받았다. 몰타는 영국이 이탈리아 해군을 공격하는 데 사용되었고 잠수함 기지가 있었다. 또한 독일 무선 메시지, 특히 에니그마 암호를 가로채는 도청 기지로도 사용되었다. 제2차 몰타 공방전 중 몰타인들의 용맹함은 1942년 4월 15일 조지 6세 국왕이 몰타 전체에 조지 십자 훈장을 수여하도록 만들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훈장 수여로 인해 영국이 몰타 방어에 불균형적인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하는데, 만약 몰타가 싱가포르의 영국군처럼 항복했다면 영국의 신뢰도가 손상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지 십자 훈장의 묘사는 현재 몰타 국기와 국장에 나타난다.
3.7. 독립과 공화국

몰타는 1964년 9월 21일(독립 기념일) 몰타국으로 독립을 달성했다. 1964년 헌법에 따라 몰타는 초기에 엘리자베스 2세를 몰타의 여왕이자 국가 원수로 유지했으며, 총독이 여왕을 대신하여 행정권을 행사했다. 1971년, 돔 민토프가 이끄는 몰타 노동당이 총선에서 승리하여, 1974년 12월 13일(공화국 기념일) 몰타는 영연방 내 공화국을 선포했다. 독립 직후 국방 협정이 체결되었고, 1972년 재협상 후 1979년 3월 31일(자유의 날)에 만료되었다. 만료와 함께 영국 기지는 폐쇄되었고 이전에 영국이 통제하던 토지는 몰타 정부에 주어졌다.

1979년 남아있던 영국군이 철수한 후, 몰타는 비동맹 운동 참여를 강화했다. 몰타는 1980년에 중립 정책을 채택했다. 같은 해, 수도 발레타를 포함한 몰타의 3개 유적지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89년, 몰타는 미국 대통령 조지 H. W. 부시와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 간의 첫 대면 정상회담 장소가 되었으며, 이는 냉전 종식을 알리는 신호였다. 몰타 국제공항은 1992년 3월 25일 개장하여 완전히 운영되기 시작하여 지역 항공 및 관광 산업을 활성화시켰다. 2003년 3월 8일 유럽 연합 가입에 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53.65%가 찬성했다. 몰타는 2004년 5월 1일 유럽 연합에 가입했고, 2008년 1월 1일 유로존에 가입했다.
4. 지리
몰타는 지중해성 기후를 특징으로 하며, 높은 도시화율과 독특한 동식물상을 지니고 있다.

몰타는 지중해 중앙부(동부 분지)에 위치한 군도 국가로, 몰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이탈리아 남부에서 약 80 km 떨어져 있다. 가장 큰 세 섬인 몰타섬(Malta몰타어), 고조섬(Għawdex몰타어), 코미노섬(Kemmuna몰타어)에만 사람이 거주한다. 군도의 섬들은 몰타 고원 위에 놓여 있으며, 이 고원은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를 잇던 육교의 높은 지점들이 마지막 빙하기 이후 해수면 상승으로 고립되면서 형성된 얕은 대륙붕이다. 이 군도는 아프리카 지각판 위에 위치한다. 몰타는 수세기 동안 북아프리카의 섬으로 간주되었다. 몰타 주변 해저는 고대 해양 지질학적 특징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어, 이 지역의 선사 시대 환경을 밝힐 수 있는 잠재적인 고고학적 발견 가능성을 시사한다.
섬들의 움푹 들어간 해안선을 따라 수많은 만이 좋은 항구를 제공한다. 지형은 계단식 밭이 있는 낮은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다. 몰타의 가장 높은 지점은 딩글리 근처의 타 드메이렉으로, 해발 253 m이다. 강우량이 많을 때 작은 강이 생기기도 하지만, 몰타에는 영구적인 강이나 호수가 없다. 그러나 바흐리야(라스 이르-라헤브 근처), 르-임타흘렙, 산 마르틴, 그리고 고조섬의 룬자타 계곡과 같은 일부 수로에는 일 년 내내 담수가 흐른다.
식물지리학적으로 몰타는 아북극 왕국 내 지중해 지역의 리구로-티레니아 지방에 속한다. 세계 자연 기금(WWF)에 따르면, 몰타 영토는 티레니아-아드리아 경엽수혼합림 육상 생태 지역에 속한다.
다음은 사람이 살지 않는 군도의 작은 섬들이다:
- 바르바잔니 바위 (고조섬)
- 코미노토섬 (Kemmunett몰타어)
- 델리마라섬 (마르사슬록)
- 필플라섬 (주리끄)/(시지위)
- 페세이 바위
- 펑거스 록 (Il-Ġebla tal-Ġeneral몰타어), (고조섬)
- 알리스 바위 (나샤르)
- 할파 바위 (고조섬)
- 큰 블루 라군 바위들 (코미노섬)
- 성 바오로 제도/셀무네트섬 (멜리에하)
- 마노엘섬, 본토의 그지라 마을과 다리로 연결됨
- 미스트라 바위들 (산 파울 일-바하르)
- 타치-차울 바위 (고조섬)
- 카우라 포인트/타 프라벤섬 (산 파울 일-바하르)
- 작은 블루 라군 바위들 (코미노섬)
- 살라 바위 (자바르)
- 스롭 ㄹ-아진 바위 (마르사슬록)
- 타 타흐트 일-마즈 바위
4.1. 기후
몰타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쾨펜 기후 구분 Csa)를 나타내며, 겨울은 온화하고 여름은 덥고 내륙 지역은 더욱 덥다. 비는 주로 가을과 겨울에 내리며, 여름은 대체로 건조하다.
연평균 기온은 낮에는 약 23 °C, 밤에는 15.5 °C이다. 가장 추운 달인 1월의 평균 최고 기온은 낮에는 12 °C에서 18 °C, 밤에는 평균 최저 기온이 6 °C에서 12 °C 사이이다. 가장 더운 달인 8월의 평균 최고 기온은 낮에는 28 °C에서 34 °C, 밤에는 평균 최저 기온이 20 °C에서 24 °C 사이이다. 유럽 대륙의 모든 수도 중에서 몰타의 수도 발레타는 겨울이 가장 따뜻하며, 1-2월 기간 동안 낮 평균 기온은 약 15 °C에서 16 °C, 밤 평균 기온은 약 9 °C에서 10 °C이다. 3월과 12월의 평균 기온은 낮에는 약 17 °C, 밤에는 약 11 °C이다. 큰 기온 변화는 드물다. 눈은 매우 드물지만, 지난 세기에 몇 차례 눈이 기록되었으며 마지막은 2014년이었다.
연평균 해수 온도는 20 °C이며, 2월에는 15 °C에서 16 °C까지, 8월에는 26 °C까지 다양하다. 6월부터 11월까지 6개월 동안 평균 해수 온도는 20 °C를 초과한다.
연평균 상대 습도는 75%로 높으며, 7월에는 65%(오전: 78%, 저녁: 53%)에서 12월에는 80%(오전: 83%, 저녁: 73%)까지 다양하다.
연간 일조 시간은 총 3,000시간 정도로, 12월에는 하루 평균 5.2시간에서 7월에는 평균 12시간 이상이다. 이는 유럽 북반구 도시들의 약 두 배에 해당하며, 예를 들어 런던은 1,461시간이다. 겨울에는 일조량이 최대 4배 더 많아, 12월에 런던은 37시간의 일조량을 갖는 반면 몰타는 160시간 이상이다.
월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연간 |
---|---|---|---|---|---|---|---|---|---|---|---|---|---|
평균 최고 기온 (°C) | 15.7 | 15.7 | 17.4 | 20.0 | 24.2 | 28.7 | 31.7 | 32.0 | 28.6 | 25.0 | 20.8 | 17.2 | 23.1 |
일평균 기온 (°C) | 12.9 | 12.6 | 14.1 | 16.4 | 20.1 | 24.2 | 26.9 | 27.5 | 24.9 | 21.8 | 17.9 | 14.5 | 19.5 |
평균 최저 기온 (°C) | 10.1 | 9.5 | 10.9 | 12.8 | 15.8 | 19.6 | 22.1 | 23.0 | 21.2 | 18.4 | 14.9 | 11.8 | 15.9 |
평균 강수량 (mm) | 79.3 | 73.2 | 45.3 | 20.7 | 11.0 | 6.2 | 0.2 | 17.0 | 60.7 | 81.8 | 91.0 | 93.7 | 580.7 |
평균 강수일수 (≥ 1.0 mm) | 10.0 | 8.2 | 6.1 | 3.8 | 1.5 | 0.8 | 0.0 | 1.0 | 4.3 | 6.6 | 8.7 | 10.0 | 61 |
월평균 일조시간 | 169.3 | 178.1 | 227.2 | 253.8 | 309.7 | 336.9 | 376.7 | 352.2 | 270.0 | 223.8 | 195.0 | 161.2 | 3054 |
출처: Meteo Climate (1991년-2020년 자료), MaltaWeather.com (일조량 자료) |
4.2. 도시화
유럽 통계청(Eurostat)에 따르면, 몰타는 명목상 "발레타"(몰타 본섬)와 "고조"라는 두 개의 대도시권(larger urban zones)으로 구성된다. 주요 도시 지역은 본섬 전체를 포괄하며, 인구는 약 40만 명이다. 도시 지역의 핵심부인 발레타 광역시는 인구가 205,768명이다. 2020년 유로스타트 자료에 따르면, 기능적 도시 지역(Functional Urban Area)과 광역 도시권(metropolitan region)은 섬 전체를 포함하며 인구는 480,134명이다. 유엔에 따르면, 몰타 지역의 약 95%가 도시화되었으며 이 수치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ESPON과 EU 위원회 연구에 따르면, "몰타 영토 전체가 단일 도시 지역을 구성한다".
면적이 316 km2이고 인구가 0.5백만 명 이상인 몰타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국가 중 하나이다. 일부 자료에서는 도시 국가로 언급되기도 한다. 때때로 몰타는 도시 또는 대도시권 순위에 포함되기도 한다.
4.3. 동식물

몰타에는 자연적으로 재생되는 숲이 4.6 km2에 불과하며, 높이 2~5미터의 성숙한 나무들이 특징이다. 나무가 차지하는 전체 면적은 약 320 km2로 추정되며, 이는 군도 전체 육지 면적의 약 1.44%에 해당한다. 가장 흔한 토종 나무 종은 버드나무(Salix alba), 포플러(Populus alba), 올리브(Olea europaea), 캐럽(Ceratonia siliqua), 참나무(Quercus ilex 및 Quercus rotundifolia), 알레포소나무(Pinus halepensis), 월계수(Laurus nobilis), 무화과나무(Ficus carica)이며, 가장 흔한 외래종 나무는 유칼립투스, 아카시아, 대추야자, 부채선인장이다. 몰타 군도는 또한 다양한 토종, 아고유종 및 고유종 식물의 서식지이다. 이들은 가뭄 저항성과 같은 지중해성 기후의 전형적인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다. 고유 식물로는 국화인 widnet il-baħar몰타어(Cheirolophus crassifolius), sempreviva ta' Malta몰타어(Helichrysum panormitanum subsp. melitense), żigland t' Għawdex몰타어(Hyoseris frutescens), ġiżi ta' Malta몰타어(Matthiola incana subsp. melitensis) 등이 있으며, 아고유종으로는 kromb il-baħar몰타어(Jacobaea maritima subsp. sicula)와 xkattapietra몰타어(Micromeria microphylla)가 있다. 몰타의 생물 다양성은 서식지 손실, 침입종 및 인간의 개입으로 인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5. 정치
몰타는 웨스트민스터 체제를 기반으로 한 의원내각제 공화국이다. 국가의 주요 정치 기관으로는 대통령, 총리, 그리고 단원제 의회가 있다.
5.1. 정부 구조

몰타의 국가원수인 대통령은 의례적인 직위이며, 5년 임기로 하원(몰타어: Kamra tad-Deputati몰타어)의 단순 과반수 결의로 임명된다. 현재 대통령은 2024년 3월 27일 간접 선거로 선출된 미리암 스피테리 데보노이다. 몰타 헌법 제80조에 따르면, 대통령은 하원에서 과반수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하원 의원을 총리로 임명한다. 총리는 행정부의 수장으로서 정부를 이끈다.
단원제인 하원은 65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5년 임기로 13개의 5석 선거구(몰타어: distretti elettorali몰타어)에서 선출된다. 정당 의석수와 득표율 간의 엄격한 비례성을 확보하기 위한 헌법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하원 의원은 총리가 대통령에게 조언하거나 불신임 결의를 통해 대통령이 하원을 조기 해산하지 않는 한, 5년마다 단기 이양식 투표제를 통한 직접 보통 선거로 선출된다. 몰타는 1960년부터 1995년까지 하원 선거 투표율을 기준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투표율(의무 투표제가 없는 국가 중에서는 가장 높음)을 기록했다.
몰타 정치는 중도 좌파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노동당(몰타어: Partit Laburista몰타어)과 중도 우파 기독교 민주주의 정당인 국민당(몰타어: Partit Nazzjonalista몰타어)이 주도하는 양당제이다. 노동당은 2013년부터 집권당이며, 현재 총리는 2020년 1월 13일부터 재임 중인 로베르트 아벨라이다. 의회에 의석이 없는 소수 정당들도 존재한다.
노동당 집권 이후 몰타의 부패, 자금 세탁, 정부 행정 부실이 상당히 증가했다는 지적이 있다. 실제로 몰타의 청렴 통치 기록은 2013년 이후 감소했으며, 국제투명성기구에 따르면 현재 EU 회원국 중 부패 대처 능력이 가장 낮은 국가 중 하나로 간주된다. 동일 협회는 2025년 2월 발표된 보고서에서 몰타가 역대 최저 순위인 65위로 하락했다고 보고했다.
5.2. 행정 구역
몰타는 1993년부터 유럽 지방 자치 헌장에 기반한 지방 정부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국가는 6개 지역(그중 하나는 고조)으로 나뉘며, 각 지역에는 자체 지역 의회가 있어 지방 정부와 국가 정부 사이의 중간 단계 역할을 한다. 이 지역들은 다시 현재 총 68개(몰타 본섬 54개, 고조섬 14개)의 지방 의회로 나뉜다. 6개 구역(몰타 본섬 5개, 고조섬 1개)은 주로 통계 목적으로 사용된다.
각 의회는 해당 지역 인구에 비례하여 5명에서 13명의 의원으로 구성된다. 시장과 부시장은 의원들 중에서 선출된다. 의회가 임명하는 행정 사무관은 의회의 집행, 행정 및 재정 책임자이다. 의원은 4년마다 단기 이양식 투표제를 통해 선출된다. 제도 개혁으로 인해 2012년 이전에는 선거가 열리지 않았으나, 그 이후로는 격년으로 번갈아 가며 절반의 의회에 대해 선거가 실시된다.
지방 의회는 지역의 일반적인 유지 보수 및 미화(비간선 도로 수리 포함), 지역 경비원 배정, 쓰레기 수거 등을 담당한다. 또한 정부 임대료 및 자금 징수, 정부 관련 민원 응대 등 중앙 정부를 위한 일반 행정 업무도 수행한다. 또한 몰타 공화국의 여러 개별 도시와 마을은 자매 도시 관계를 맺고 있다.
5.3. 군사

몰타군(AFM)의 목표는 정부가 설정한 국방 역할에 따라 효율적이고 비용 효과적인 방식으로 섬의 통합성을 방어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하는 군사 조직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는 몰타 영해 및 영공의 통합성 유지를 강조함으로써 달성된다.
몰타군은 또한 테러 퇴치, 불법 마약 밀매 방지, 불법 이민 작전 및 순찰 수행, 불법 어업 단속, 수색 구조(SAR) 서비스 운영, 민감한 장소의 물리적 또는 전자적 보안 및 감시 활동에 참여한다. 몰타의 수색 구조 구역은 튀니지 동쪽에서 크레타섬 서쪽까지 약 25.00 만 km2에 달한다.
군사 조직으로서 몰타군은 국가 비상사태(자연재해 등)나 내부 보안 및 폭탄 처리 상황 발생 시 필요에 따라 조직적이고 훈련된 방식으로 몰타 경찰(MPF) 및 기타 정부 부처/기관에 지원을 제공한다.
2020년 몰타는 유엔 핵무기금지조약에 서명하고 비준했다.
5.4. 인권
몰타는 세계에서 성소수자(LGBT)를 가장 지지하는 국가 중 하나로 간주되며, 유럽 연합에서 최초로 전환 치료를 금지한 국가이다. 몰타는 또한 헌법적으로 장애에 근거한 차별을 금지한다.
몰타 법률은 민사 결혼과 교회법상 결혼을 모두 인정한다. 교회 법원과 민사 법원의 혼인 무효는 서로 관련이 없으며 반드시 상호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몰타는 2011년 5월 28일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이혼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몰타에서의 낙태는 불법이다. 몰타와 폴란드는 유럽 연합 회원국 중 낙태를 거의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유일한 국가이다. 강간이나 근친상간에 대한 예외는 없다. 2022년 11월 21일, 노동당 정부는 "산모의 생명이 위험하거나 건강이 심각하게 위태로운 경우 임신 중지를 허용하는 새로운 조항을 형법에 도입하는" 법안을 제안했다. 이 법안은 2023년 6월에 산모의 생명이 위험한 상황으로 예외를 제한하는 수정안과 함께 통과되었다.
6. 대외 관계
몰타는 중립 정책을 기본으로 하며, 유럽 연합(EU), 영연방, 유엔(UN) 등 국제 기구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지중해 중심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유럽과 북아프리카 간의 교량 역할을 수행하고자 노력한다. 주요 교역국은 유럽 국가들이며, 특히 이탈리아, 영국, 독일 등과 긴밀한 경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몰타는 1980년 중립을 선언하였으며, 이는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다. 냉전 종식 후에는 유럽 연합 가입을 추진하여 2004년에 정식 회원국이 되었고, 2008년에는 유로존에 가입했다. 유럽 연합 내에서는 소국으로서의 목소리를 내며 지중해 문제, 이민 문제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또한 영연방 회원국으로서 영국 및 다른 영연방 국가들과도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이민 및 난민 문제와 관련하여 몰타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북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주요 경로에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유럽 연합 차원의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6.1. 대한민국과의 관계
몰타는 대한민국과 1965년 7월 16일에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71년에 수교한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다. 대한민국과는 1971년 몰타 노동당 정부 시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수교 이후 관계가 다소 소원해졌으나, 1988년 몰타 국민당 정부 출범과 대한민국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관계가 회복되어 1988년 서울 올림픽에도 참가했다.
양국 간 주요 교류는 경제 및 문화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관광객 교류가 있으며, 해운업 분야에서 협력 가능성이 논의되기도 한다. 현재 주이탈리아 대한민국 대사관이 몰타를 겸임하고 있으며, 몰타는 주중국 몰타 대사관이 대한민국을 겸임하고 있다. 서울에 명예 영사관을 두고 있다.
7. 경제
몰타의 경제는 금융, 은행업, 관광 산업을 중심으로 발전해왔으며, 유로화를 사용하고 과학 기술 분야 투자도 이루어지고 있다.


몰타는 국제 통화 기금(IMF)에 의해 선진 경제국으로 분류된다. 몰타의 주요 자원은 석회암, 유리한 지리적 위치, 그리고 생산적인 노동력이다. 몰타는 식량 수요의 약 20%만을 생산하며, 여름철 가뭄으로 인해 담수 공급이 제한적이고, 풍부한 햇빛으로부터의 태양 에너지 잠재력을 제외하고는 국내 에너지원이 없다. 경제는 대외 무역(화물 환적 지점 역할), 제조업(특히 전자 및 섬유), 관광에 의존한다. 영화 제작도 몰타 경제에 기여해왔다.
몰타의 생물 용량 접근성은 세계 평균보다 낮다. 2016년 몰타의 1인당 생물 용량은 0.6 글로벌 헥타르로, 세계 평균 1.6 글로벌 헥타르와 대조된다. 또한 몰타 주민들은 1인당 5.8 글로벌 헥타르의 생물 용량 소비 생태 발자국을 보여 상당한 생물 용량 부족을 나타냈다.
몰타는 2004년 5월 1일 유럽 연합에 가입하기 위한 준비 과정에서 일부 국영 기업을 민영화하고 시장을 자유화했다. 몰타에는 강력한 사업 개발 마인드를 가진 금융 규제 기관인 몰타 금융 서비스 당국(MFSA)이 있으며, 게임 사업, 항공기 및 선박 등록, 신용카드 발급 은행 라이선스, 펀드 관리 유치에 성공을 거두었다. 몰타는 UCITs IV 및 대체 투자 펀드 매니저(AIFM)를 포함한 EU 금융 서비스 지침을 이행하는 데 큰 진전을 이루었다. 새로운 지침을 준수해야 하는 대체 자산 관리자를 위한 기반으로서 몰타는 IDS, Iconic Funds, Apex Fund Services 및 TMF/Customs House를 포함한 다수의 주요 업체를 유치했다.
2015년 기준, 몰타에는 재산세가 없었다. 특히 항구 주변 지역의 부동산 시장은 호황을 누렸으며, 세인트 줄리언스, 슬리마, 그지라와 같은 일부 도시의 아파트 가격이 급등했다.
유로스타트 자료에 따르면, 2015년 몰타의 1인당 GDP는 21,000유로로 EU 평균의 88% 수준이었다.
투자 시민권 프로그램인 개인 투자자 프로그램(일명 "시민권 제도")을 통한 국가 개발 및 사회 기금은 몰타 정부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어 2018년 예산에 4억 3천 2백만 유로를 추가했다.
7.1. 금융 및 은행업

몰타의 두 가장 큰 상업 은행은 발레타 은행(Bank of Valletta)과 HSBC 몰타 은행(HSBC Bank Malta)이다. 최근에는 레볼루트(Revolut)와 같은 디지털 은행의 인기도 증가하고 있다. 몰타 중앙은행(Bank Ċentrali ta' Malta)은 통화 정책 수립 및 시행, 건전하고 효율적인 금융 시스템 촉진이라는 두 가지 핵심 책임을 맡고 있다. 몰타 정부는 2005년 5월 4일 유럽 환율 메커니즘 II(ERM II)에 가입했으며, 2008년 1월 1일 유로를 국가 통화로 채택했다.
7.2. 통화
몰타 유로 주화에는 2유로와 1유로 동전에 몰타 십자가, 50센트, 20센트, 10센트 동전에 몰타 국장, 그리고 5센트, 2센트, 1센트 동전에 므나이드라 신전이 새겨져 있다.
몰타는 액면가 10유로에서 50유로에 이르는 수집가용 주화를 발행해왔다. 이 주화들은 은화 및 금화 기념주화를 주조하는 기존의 국가적 관행을 이어가고 있다. 일반 발행 주화와 달리 이 주화들은 모든 유로존에서 통용되지는 않는다.
1972년 도입되어 2008년 유로가 도입될 때까지 사용된 통화는 몰타 리라였으며, 이는 몰타 파운드를 대체한 것이었다. 파운드는 1825년에 몰타 스쿠도를 대체했다.
7.3. 관광

몰타는 인기 있는 관광 목적지로, 연간 16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며 이는 주민 수보다 3배 많은 수치이다. 관광 인프라는 수년에 걸쳐 극적으로 증가했으며 섬에는 다수의 호텔이 있지만, 과도한 개발과 전통 주택 파괴는 우려를 낳고 있다. 2019년 몰타는 관광업에서 기록적인 해를 보냈으며, 한 해에 21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을 기록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몰타는 의료 관광 목적지로 광고해 왔으며, 다수의 건강 관광 제공업체가 이 산업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러나 몰타 병원 중 독립적인 국제 의료 인증을 받은 곳은 없다. 몰타는 영국 의료 관광객에게 인기가 있어, 몰타 병원들이 트렌트 인증 제도와 같은 영국 출처의 인증을 모색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몰타의 관광 산업은 국가 국내 총생산(GDP)의 약 11.6%에 기여한다.
7.4. 과학 기술
몰타는 유럽 우주국(ESA) 프로젝트에 대한 보다 집중적인 협력을 위해 ESA와 협력 협정을 체결했다.
몰타 과학 기술 위원회(MCST)는 교육 및 사회적 차원에서 과학 기술 발전을 책임지는 민간 기관이다. 몰타의 대부분 과학 학생들은 몰타 대학교를 졸업하며, S-Cubed(과학 학생회), UESA(대학 공학 학생 협회), ICTSA(몰타 대학교 ICT 학생 협회)가 이들을 대표한다. 몰타는 2024년 글로벌 혁신 지수에서 29위를 차지했다.
8. 사회 기반 시설
몰타는 섬나라이지만 비교적 잘 발달된 사회 기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주요 항구, 국제공항, 도로망, 통신 시스템, 에너지 공급망 및 보건 의료 시스템이 국가 운영의 핵심을 이룬다.
8.1. 교통

영국 식민 통치의 영향으로 몰타의 교통은 좌측 통행이다. 몰타의 자동차 보유율은 섬의 작은 크기를 고려할 때 매우 높으며, 유럽 연합에서 네 번째로 높다. 1990년에는 182,254대의 등록 차량이 있었으며, 자동차 밀도는 km2당 577대였다. 몰타에는 2254 km의 도로가 있으며, 이 중 1972 km(87.5%)가 2003년 12월 기준으로 포장되어 있다.
버스(xarabank 또는 karozza tal-linja)는 1905년에 설립된 주요 대중교통 수단이다. 몰타의 빈티지 버스는 2011년까지 몰타 섬에서 운행되었으며 인기 있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이 버스들은 많은 몰타 광고와 관광객용 상품에 등장한다.
버스 서비스는 2011년 7월에 대대적인 개혁을 겪었다. 관리 구조는 자영업 운전자가 자신의 차량을 운전하는 것에서 공개 입찰을 통해 단일 회사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공개 입찰은 아리바 몰타(Arriva Malta)가 낙찰받았으며, 아리바 몰타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킹롱(King Long)의 새로운 버스 차량과 아리바 런던(Arriva London)에서 들여온 소규모 굴절버스 차량을 도입했다. 또한 발레타 내부 노선 전용 소형 버스 2대와 고밀도 노선의 혼잡을 완화하는 데 사용된 9미터 버스 61대를 운영했다. 전체적으로 아리바 몰타는 264대의 버스를 운영했다. 2014년 1월 1일, 아리바는 재정난으로 인해 몰타에서 운영을 중단하고 '몰타 대중교통'(Malta Public Transport)으로 국유화되었다. 정부는 2014년 10월 아우토부세스 우르바노스 데 레온(알사 자회사)을 국가 버스 운영 우선 사업자로 선정했다. 2022년 10월부터 버스 시스템은 몰타 거주자에게 무료로 제공된다.
2021년 기준으로 총 예상 비용이 62억 유로에 달하는 지하철인 몰타 메트로가 계획 중이다.

몰타 본섬에는 3개의 큰 천연 항구가 있다:
- 그랜드 하버(또는 포트 일-크비르): 수도 발레타 동쪽에 위치하며 로마 시대부터 항구였다. 여러 개의 광범위한 부두와 선창, 그리고 유람선 터미널이 있다. 그랜드 하버의 터미널은 몰타와 시칠리아의 포찰로 및 카타니아를 연결하는 페리를 운항한다.
- 마르삼셋 하버: 발레타 서쪽에 위치하며 다수의 요트 정박지를 수용한다.
- 마르사슬록 하버(몰타 자유항): 몰타 남동쪽 비르제부자에 위치하며 섬의 주요 화물 터미널이다. 몰타 자유항은 2008년 230만 TEU의 교역량으로 유럽 대륙에서 11번째, 세계에서 46번째로 분주한 컨테이너 항구이다.
또한 몰타섬의 치르케와 항구와 고조섬의 므자르 항구를 연결하는 여객 및 자동차 페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두 개의 인공 항구가 있다.
몰타 국제공항(Ajruport Internazzjonali ta' Malta)은 몰타 군도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유일한 공항이다. 이전 RAF 루카 공군 기지 부지에 건설되었다. 헬리포트도 이곳에 위치해 있다. 고조의 헬리포트는 셰우키야에 있다. 타알리의 이전 RAF 타 칼리 비행장에는 국립 공원, 스타디움, 공예 마을 관광 명소 및 몰타 항공 박물관이 있다.

1974년 4월 1일부터 2024년 3월 30일까지 국영 항공사는 에어 몰타였으며, 몰타 국제공항을 기반으로 유럽과 북아프리카 22개 목적지에 서비스를 운영했다. 에어 몰타의 소유주는 몰타 정부(98%)와 개인 투자자(2%)였다. 2024년 3월 31일, KM 몰타 항공이 몰타의 새로운 국영 항공사가 되었다. 이전 에어 몰타의 모든 항공기와 기타 자산, 직원이 새 항공사로 이전되었다. KM 몰타 항공은 몰타 국제공항을 기반으로 유럽 18개 목적지에 서비스를 운영한다. 2019년 6월, 라이언에어는 몰타 에어라는 저가 모델을 운영하는 완전 자회사 항공사에 투자했다. 몰타 정부는 이 항공사의 지분 1주를 보유하고 있다.
8.2. 통신
몰타의 이동통신 보급률은 2009년 말까지 100%를 초과했다. 몰타는 유럽 나머지 국가, 호주, 뉴질랜드와 호환되는 GSM900, UMTS(3G) 및 LTE(4G) 휴대폰 시스템을 사용한다.
2012년 초, 정부는 최소 광대역 서비스가 4 Mbit/s에서 100 Mbit/s로 업그레이드되는 전국적인 FttH(Fibre to the Home) 네트워크 구축을 요구했다.
8.3. 에너지
몰타는 1996년까지 석탄에 의존하여 전기를 생산했다. 1992년, 마르사슬록의 델리마라 반도에 새로운 발전소가 건설되었다. 원래 델리마라 발전소는 2015년까지 석유를 사용하여 전기를 생산했으나, 2017년에 액화천연가스(LNG)로 전환되었다. 이 발전소에는 또한 비상 상황이나 다른 전력원 부족 시 예비 발전 용량으로 사용되는 두 개의 경유 발전 설비가 포함되어 있다. 2015년부터 몰타-시칠리아 인터커넥터를 통해 몰타는 유럽 대륙 전력망에 연결되어 상당량의 전기를 수입할 수 있게 되었다.
8.4. 보건 의료

몰타는 공공 자금 지원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나라에서 기록된 최초의 병원은 1372년 이미 운영되고 있었다.
오늘날 몰타는 의료 서비스가 무료로 제공되는 공공 의료 시스템과 민간 의료 시스템을 모두 갖추고 있다. 몰타는 강력한 일반의 중심의 1차 진료 기반을 갖추고 있으며 공립 병원은 2차 및 3차 진료를 제공한다. 몰타 보건부는 외국인 거주자에게 민간 의료 보험에 가입할 것을 권고한다.
몰타에는 알파 메디컬(응급 치료), 응급 소방 구조대(E.F.R.U.), 세인트 존 앰뷸런스, 몰타 적십자사와 같은 자원 봉사 단체도 있으며, 이들은 군중이 모이는 행사에서 응급 처치/간호 서비스를 제공한다. 몰타의 주요 병원인 마터 데이 병원은 2007년에 개원했으며, 유럽에서 가장 큰 의료 건물 중 하나이다.
몰타 대학교에는 의과대학과 보건 과학 학부가 있다. 몰타 의사 협회는 의료 전문가들을 대표한다. 영국에서 시행되는 파운데이션 프로그램이 몰타에 도입되어 새로 졸업한 의사들이 영국으로 유출되는 '두뇌 유출'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9. 인구
몰타의 인구는 몰타어와 영어를 주로 사용하며, 가톨릭교가 우세하고 이민과 교육 시스템 또한 사회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몰타의 외국인 인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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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도 | 인구 | 총인구 대비 % |
2005 | 12,112 | 3.0% |
2011 | 20,289 | 4.9% |
2019 | 98,918 | 21.0% |
2020 | 119,261 | 23.17% |
2021년 인구 조사 기준으로, 몰타 태생 원주민은 총인구 519,562명 중 386,280명으로 섬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소수 민족도 존재하며, 출생지별 가장 큰 소수 민족은 영국(15,082명), 이탈리아(13,361명), 인도(7,946명), 필리핀(7,784명), 세르비아(5,935명) 순이다. 비몰타인의 인종적 기원 중 58.1%는 백인, 22.2%는 아시아인, 6.3%는 아랍인, 6.0%는 아프리카인, 4.5%는 히스패닉 또는 라틴계, 2.9%는 둘 이상의 인종적 기원을 가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2005년 기준으로, 14세 이하는 17%, 15-64세 연령대는 68%, 나머지 13%는 65세 이상이었다. 몰타의 인구 밀도는 1282 /km2로 유럽 연합에서 단연 가장 높으며 세계적으로도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2004년 몰타 거주 인구는 총 거주 인구의 97.0%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1842년 이후 모든 인구 조사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약간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인구 성장은 1985년과 1995년 인구 조사 사이의 +9.5%에서 1995년과 2005년 인구 조사 사이의 +6.9%(연평균 +0.7%)로 둔화되었다. 출생자 수는 3,860명(1995년 인구 조사 대비 21.8% 감소)이었고 사망자 수는 3,025명이었다. 따라서 자연 인구 증가는 835명이었다(2004년 +888명 대비, 이 중 100명 이상이 외국인 거주자).
인구의 연령 구성은 유럽 연합에서 일반적인 연령 구조와 유사하다. 몰타의 노년 부양비는 1995년 17.2%에서 2005년 19.8%로 증가했으며, 이는 EU 평균 24.9%보다 상당히 낮다. 몰타 인구의 31.5%는 25세 미만(EU 29.1% 대비)이지만, 50-64세 연령대는 인구의 20.3%를 차지하여 EU의 17.9%보다 상당히 높다. 몰타의 노년 부양비는 앞으로 몇 년 동안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2021년 몰타 군도의 인구는 519,562명이었다.
2016년 기준 합계 출산율(TFR)은 여성 1인당 1.45명으로 추정되어, 대체율인 2.1명보다 낮다. 2012년에는 출생아의 25.8%가 미혼 여성에게서 태어났다. 2018년 기대 수명은 83세로 추정되었다.
9.1. 언어

몰타의 공용어는 몰타어(Malti몰타어)와 영어이다. 몰타어는 헌법상 국가 언어로 간주된다. 법률은 몰타어와 영어 모두로 제정되지만, 헌법 제74조는 "어떤 법률의 몰타어 본문과 영어 본문 사이에 충돌이 있는 경우 몰타어 본문이 우선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많은 영어 사용자는 현지 방언인 몰타 영어를 사용한다.
몰타어는 시칠리아 토후국 시대에 발전한, 현재는 사멸된 시칠리아-아랍어 방언(남부 이탈리아어에서 유래)에서 파생된 셈어 계통 언어이다. 몰타 알파벳은 라틴 알파벳을 기반으로 한 30개의 문자로 구성된다.
2022년 몰타 국립 통계청에 따르면, 몰타 인구의 90%가 몰타어 기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96%는 영어, 62%는 이탈리아어, 20%는 프랑스어를 구사한다. 이처럼 광범위한 제2언어 지식은 몰타를 유럽 연합에서 가장 다국어를 구사하는 국가 중 하나로 만든다. 어떤 언어가 "선호되는지"에 대한 여론을 수집한 연구에 따르면, 인구의 86%가 몰타어를 선호하고, 12%가 영어, 2%가 이탈리아어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탈리아에 본사를 둔 방송사(예: 메디아셋, RAI)의 이탈리아 텔레비전 채널은 몰타에서도 시청 가능하며 여전히 인기가 있다.
몰타 수화는 몰타의 수화 사용자들이 사용한다.
9.2. 종교
202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몰타의 주요 종교 분포는 다음과 같다:
- 가톨릭교: 82.6%
- 동방 정교회: 3.6%
- 성공회: 1.3%
- 기타 개신교: 1.0%
- 이슬람교: 3.9%
- 힌두교: 1.4%
- 불교: 0.5%
- 유대교: 0.3%
- 기타 종교 단체: 0.04%
- 무종교: 5.1%
몰타의 주요 종교는 가톨릭이다. 몰타 헌법 제2조는 가톨릭을 국교로 정하고 있으며, 이는 몰타 문화의 다양한 요소에도 반영되어 있지만, 종교의 자유에 대한 확고한 조항이 마련되어 있다. 몰타, 고조, 코미노에는 360개 이상의 교회가 있으며, 이는 주민 1,000명당 교회 1개에 해당한다. 본당 교회(몰타어: il-parroċċa 또는 il-knisja parrokkjali)는 모든 몰타 마을과 촌락의 건축적, 지리적 중심지이다.
몰타는 사도좌이다. 사도행전(사도행전 28장)은 사도 바울이 "멜리테" 섬에서 난파한 이야기를 전하는데, 많은 성서학자들은 이를 몰타로 간주하며, 이 사건은 서기 60년경으로 추정된다. 최초의 몰타 성인인 성 푸블리우스는 몰타의 초대 주교로 임명되었다고 전해진다. 로마 박해 시대의 기독교 관습과 신앙에 대한 추가 증거는 성 바오로 카타콤을 포함하여 몰타 주변 여러 유적지 아래에 있는 카타콤에서 나타난다. 멜리에하 성모 마리아 성소의 동굴을 포함한 여러 동굴 교회도 있으며, 전설에 따르면 성 루가가 성모 마리아의 그림을 그린 곳이다. 이곳은 중세 시대부터 순례지였다.

수세기 동안 몰타 교회는 팔레르모 교구에 종속되었으나, 앙주의 샤를 치하에서는 그가 몰타 주교를 임명했고, 드물게는 스페인과 이후 기사단도 주교를 임명했다. 1808년 이후 모든 몰타 주교는 몰타인이었다. 몰타의 수호성인은 사도 바울, 성 푸블리우스, 성 아가타이다. 수호성인은 아니지만, 성 조지 프레카(San Ġorġ Preca)는 성 푸블리우스에 이어 두 번째로 시성된 몰타 성인으로 크게 존경받는다. 예수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카르멜회, 가난한 자매회 등 다양한 가톨릭 수도회가 몰타에 존재한다.
몰타에는 상당수의 동방 정교회 신자가 있으며, 202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16,457명이다. 이 수치에는 동방 정교회와 완전한 친교 관계에 있지 않은 오리엔탈 정교회 신자도 포함될 수 있다. 각 독립 교회에 속하는 소수의 본당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각 교회마다 하나씩 있다. 몰타에는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세르비아 정교회, 루마니아 정교회, 불가리아 정교회 본당이 있다.
지역 개신교 교회의 신자 대부분은 몰타인이 아니며, 주로 휴가객과 이 나라에 거주하는 영국 퇴직자들로 구성된다. 비르키르카라에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교회가 있으며, 1983년 과르다만자에 설립된 신사도교회 신도회도 있다. 여호와의 증인은 약 600명이다. 몰몬교도 모스타에 1개의 신도회에 241명의 신자가 있다.
몰타의 유대인 인구는 노르만 통치하 중세 시대에 정점에 달했다. 1479년 몰타와 시칠리아는 아라곤 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1492년 알함브라 칙령으로 모든 유대인이 나라를 떠나야 했다. 오늘날에는 두 개의 유대인 신도회가 있다. 2019년 몰타의 유대인 공동체는 약 150명으로, 2003년 추정치인 120명(이 중 80명 활동)보다 약간 많았으며 대부분 노년층이다. 신세대 중 다수는 영국과 이스라엘을 포함한 해외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현대 몰타 유대인의 대부분은 세파르딤이지만, 아슈케나짐 기도서가 사용된다. 2013년 몰타에 하바드 유대인 센터가 설립되었다.
특별히 지어진 이슬람 사원인 마리암 알-바툴 모스크가 하나 있으며, 섬 곳곳의 무슬림 가정에 위치한 몇 개의 임시 모스크도 있다. 몰타의 약 3,000명의 무슬림 중 약 2,250명은 외국인, 약 600명은 귀화 시민, 약 150명은 몰타 태생이다.
선불교와 바하이 신앙은 약 40명의 신자가 있다고 주장한다.
몰타 투데이(Malta Today)가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몰타 인구의 압도적 다수가 기독교(95.2%)를 따르며, 가톨릭이 주요 교파(93.9%)이다. 인구의 4.5%는 자신을 무신론자 또는 불가지론자로 밝혔는데, 이는 유럽에서 가장 낮은 수치 중 하나이다. 2019년 유로바로미터 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83%가 가톨릭 신자로 확인되었다. 무신론자 수는 2014년에서 2018년 사이에 두 배로 증가했다. 비종교인은 차별을 받을 위험이 더 높다. 국제 인문 윤리 연합(International Humanist and Ethical Union)의 연례 사상의 자유 보고서 2015년판에서 몰타는 "심각한 차별" 범주에 속했다. 2016년 신성모독법 폐지 이후 몰타는 대부분의 EU 국가와 마찬가지로 "체계적 차별" 범주로 전환되었다.
9.3. 이민

역사적으로 이민을 보내는 나라였던 몰타는 21세기 초부터 순이민이 크게 증가하여 2005년에서 2020년 사이에 외국 태생 인구가 거의 8배 증가했다. 몰타의 외국인 공동체 대부분은 슬리마와 주변 교외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거나 은퇴한 영국 국민과 그 부양가족으로 구성된다. 다른 소규모 외국인 그룹으로는 이탈리아인, 리비아인, 세르비아인이 있으며, 이들 중 다수는 수십 년에 걸쳐 몰타 민족에 동화되었다.
몰타는 또한 경제적 기회를 찾아 섬으로 이주한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주는 주로 21세기 초에 이루어졌는데, 당시 몰타 경제는 꾸준히 호황을 누리고 있었지만 섬의 생활비와 삶의 질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몰타 현지 주택 지수가 두 배로 증가하여 부동산 및 임대료가 매우 높고 거의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치솟았다. 결과적으로 몰타의 일부 외국인 거주자들은 상대적인 재정적 재산이 감소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아예 다른 유럽 국가로 이주하기도 했다.
20세기 후반부터 몰타는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이민 경로의 경유지가 되었다. 유럽 연합 및 솅겐 협정 회원국으로서 몰타는 더블린 규정에 따라 몰타에서 처음으로 EU 영토에 들어오는 망명 신청자들의 모든 망명 신청을 처리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몰타에 상륙하는 불법 이민자들은 할 파르 및 할 사피 근처의 캠프를 포함하여 몰타군(AFM)이 조직한 여러 캠프에 수용되는 강제 구금 정책의 대상이 된다. 강제 구금 정책은 여러 NGO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며, 2010년 7월 유럽 인권 재판소는 몰타의 이민자 구금이 자의적이고 구금에 이의를 제기할 적절한 절차가 부족하며 유럽 인권 협약에 따른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2020년 9월 8일, 국제앰네스티는 몰타가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오려는 이민자들에 대해 지중해에서 "불법적인 전술"을 사용했다고 비판했다. 보고서는 정부의 접근 방식이 피할 수 있는 사망자를 초래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14년 1월, 몰타는 거주 및 범죄 경력 확인을 조건으로 65만 유로 기부금과 투자를 통해 시민권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이 "골든 패스포트" 시민권 제도는 몰타 정부의 사기 행위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몰타 시민권 제도가 이러한 개인들을 유럽 연합 전체로 유입시키고 있는지에 대한 우려는 대중과 유럽 이사회 모두에서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19세기 몰타로부터의 이민 대부분은 북아프리카와 중동으로 향했지만, 몰타로의 귀환 이주율은 높았다. 20세기에는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신세계, 특히 호주, 캐나다, 미국으로 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몰타 이민부는 이민자들의 여행 비용을 지원했다. 1948년에서 1967년 사이에 인구의 30%가 이민을 갔다. 1946년에서 1970년대 후반 사이에 14만 명 이상이 지원 통로 계획을 통해 몰타를 떠났으며, 57.6%는 호주, 22%는 영국, 13%는 캐나다, 7%는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민은 197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감소했으며 이후 중요한 사회 현상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몰타가 2004년 EU에 가입한 이후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중심으로 여러 유럽 국가에 외국인 거주자 공동체가 등장했다.
9.4. 교육


초등 교육은 1946년부터 의무화되었으며, 16세까지의 중등 교육은 1971년에 의무화되었다. 국가와 가톨릭 교회는 몰타와 고조섬에 다수의 학교를 운영하며 무상 교육을 제공한다. 2006년 기준으로 국립 학교는 칼리지로 알려진 네트워크로 조직되어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를 통합한다. 몰타에는 다수의 사립 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펨브로크의 세인트 캐서린 고등학교는 주류 교육에 들어가기 전에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을 위해 국제 기초 과정을 제공한다. 2008년 기준으로 베르달라 국제 학교와 QSI 몰타라는 두 개의 국제 학교가 있다. 국가는 교회 학교 교사 급여의 일부를 지불한다.
몰타의 교육은 영국 모델을 기반으로 한다. 초등학교는 6년 과정이다. 학생들은 16세에 SEC O-레벨 시험을 치르며, 수학, 최소 1개의 과학 과목, 영어, 몰타어에서 합격이 필수이다. 학생들은 2년 동안 식스폼 칼리지에서 계속 공부할 수 있으며, 이 과정이 끝나면 입학 시험을 치른다. 성적에 따라 학생들은 학부 학위 또는 디플로마 과정에 지원할 수 있다.
성인 문해율은 99.5%이다.
몰타어와 영어는 초등학교 및 중학교 수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모두 사용되며, 두 언어 모두 필수 과목이다. 공립학교는 몰타어와 영어를 균형 있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사립학교는 몰타 대학교의 대부분 학과와 마찬가지로 교육에 영어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며, 이는 몰타어의 역량과 발전에 제한적인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의 대학 과정은 영어로 진행된다. 몰타에 기반을 둔 원격 및 해양 의학 대학은 영어로만 가르친다.
중등 과정에서 제1외국어를 공부하는 전체 학생 수 중 51%는 이탈리아어를, 38%는 프랑스어를 선택한다. 다른 선택 과목으로는 독일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라틴어, 중국어, 아랍어가 있다.
몰타는 또한 영어 학습 인기 목적지로, 2019년에 83,000명 이상의 학생을 유치했다.
10. 문화
몰타의 문화는 수세기에 걸쳐 몰타 섬과 접촉해 온 다양한 문화를 반영한다. 지중해 문화와 영국 문화의 영향이 두드러지며, 이는 언어, 종교, 건축, 요리, 풍습 등 다방면에 걸쳐 나타난다.
10.1. 음악

오늘날 몰타 음악은 대체로 서양 음악의 영향을 받았지만, 전통 몰타 음악에는 아나(għana)로 알려진 것이 있다. 이는 배경 민요 기타 음악으로 구성되며, 몇몇 사람들(주로 남성)이 돌아가며 노래하듯 특정 주제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음악은 몰타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각 지역은 자체 밴드 클럽을 자랑하며, 다양한 경우 지역마다 여러 밴드가 있으며, 다양한 마을 축제의 주제별 음악 배경을 설정하는 기능을 한다. 몰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몰타 최고의 음악 기관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중요한 국가 행사에 참여하도록 요청받는 것으로 유명하다.
몰타의 현대 음악은 다양한 스타일을 아우르며, 미리암 가우치와 조지프 칼레자와 같은 국제적인 클래식 재능뿐만 아니라 윈터 무즈, 레드 일렉트릭과 같은 비클래식 음악 밴드와 이라 로스코, 파브리치오 파니엘로, 글렌 벨라, 케빈 보리, 쿠르트 칼레자, 키아라 시라쿠사, 테아 가렛과 같은 가수들을 배출했다.
10.2. 문학
기록된 몰타 문학은 200년이 넘는다. 그러나 최근 발굴된 사랑 발라드는 중세 시대부터 현지 언어로 문학 활동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몰타는 낭만주의 문학 전통을 따랐으며, 몰타의 국민 시인인 둔 카름 프사일라의 작품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후 루자르 브리파와 카르메누 바살로와 같은 작가들은 형식적인 주제와 운율의 경직성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칼 슈렘브리와 임마누엘 미프수드를 포함한 다음 세대 작가들은 특히 산문과 시에서 그 영역을 더욱 넓혔다.
10.3. 건축

몰타 건축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지중해 문화와 영국 건축의 영향을 받았다. 섬의 첫 정착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독립 구조물 중 하나인 잔티야를 건설했다. 신석기 시대 사원 건축가들(기원전 3800년-2500년)은 몰타와 고조의 수많은 사원에 복잡한浅浮彫 디자인을 부여했다.
로마 시대에는 화려한 모자이크 바닥, 대리석 주랑, 고전 조각상이 도입되었으며, 그 유물은 므디나 성벽 바로 바깥에 있는 시골 빌라인 로마 도무스에 아름답게 보존되어 전시되어 있다. 몰타 지하 카타콤을 장식하는 초기 기독교 프레스코는 동양적인 비잔틴 취향을 드러낸다. 이러한 취향은 중세 몰타 예술가들의 노력에 계속 영향을 미쳤지만, 로마네스크와 남부 고딕 운동의 영향을 점점 더 많이 받았다.
몰타 건축은 거석 신전의 웅장함, 바로크 양식 교회의 화려함, 영국 식민지 시대 건물의 실용성이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발레타의 요새화된 도시 계획과 전통적인 몰타 발코니(gallarija)는 특히 유명하다.
10.4. 미술

15세기 말, 몰타 예술가들은 시칠리아의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안토넬로 다 메시나 화파의 영향을 받아 몰타 장식 예술에 르네상스 이상과 개념을 도입했다.
몰타의 예술 유산은 성 요한 기사단 치하에서 꽃을 피웠는데, 이들은 궁전과 교회를 장식하기 위해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매너리즘 화가들을 데려왔다. 특히 발레타의 총장 궁전과 성 요한 부주교좌 성당에 작품이 남아 있는 마테오 페레스 달레초와 1590년부터 1595년까지 몰타에서 활동한 필리포 팔라디니가 유명하다. 오랫동안 매너리즘은 현지 몰타 예술가들의 취향과 이상에 계속 영향을 미쳤다.
몰타에 도착하여 15개월 동안 최소 7점의 작품을 그린 카라바조의 등장은 현지 예술에 더욱 혁명을 일으켰다. 카라바조의 가장 주목할 만한 두 작품인 세례자 요한의 참수와 글을 쓰는 성 예로니모는 성 요한 부주교좌 성당에 전시되어 있다. 그의 유산은 현지 예술가 줄리오 카사리노와 스테파노 에라르디의 작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뒤따른 바로크 운동은 몰타 예술과 건축에 가장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칼라브리아 예술가 마티아 프레티의 천장화는 성 요한 부주교좌 성당을 바로크 걸작으로 변모시켰다. 멜키오레 가파는 로마 화파의 최고 바로크 조각가 중 한 명으로 부상했다.

17세기와 18세기 동안 나폴리와 로코코의 영향이 이탈리아 화가 루카 조르다노와 프란체스코 솔리메나의 작품에 나타났으며, 이러한 발전은 그들의 몰타 동시대인인 조 니콜라 부하지아르와 프란체스코 자하라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로코코 운동은 1744년 총장 핀토의 궁정 화가 자리를 맡은 앙투안 드 파브레가 몰타로 이전하면서 크게 향상되었다.
신고전주의는 18세기 후반 현지 몰타 예술가들 사이에서 약간의 진전을 이루었으나, 19세기 초 영국 통치 초기에 개신교의 위협으로 인식된 것에 맞서 가톨릭의 결의를 강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현지 교회 당국이 나자렛 운동이 포용한 종교적 주제를 선호하고 열렬히 장려하면서 이러한 경향은 역전되었다. 주세페 칼리에 의해 몰타에 도입된 자연주의로 조절된 낭만주의는 에드워드와 로버트 카루아나 딩리를 포함한 20세기 초 "살롱"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의회는 1920년대에 국립 미술 학교를 설립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재건 기간 동안 요제프 칼레야, 조지 프레카, 안톤 인글로트, 엠빈 크레모나, 프랭크 포르텔리, 앙투안 카밀레리, 가브리엘 카루아나, 에스프리 바르테트 등이 포함된 "현대 미술 그룹"의 등장은 현지 미술계를 크게 향상시켰다. 이 그룹은 몰타 예술의 부흥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영향력 있는 압력 단체인 현대 미술 그룹을 결성했다. 대부분의 몰타 현대 예술가들은 실제로 영국이나 유럽 대륙의 미술 기관에서 공부하여 현대 몰타 예술의 특징으로 남아 있는 다양한 예술적 표현을 이끌어냈다. 발레타의 국립 미술관은 H. 크레이그 한나와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했다. 2018년 국립 미술 컬렉션은 발레타의 오베르주 디탈리에 있는 새로운 국립 미술관 MUŻA에 전시되었다.
10.5. 요리
몰타 요리는 강력한 시칠리아 및 이탈리아 요리의 영향뿐만 아니라 영국, 스페인, 마그레브 및 프로방스 요리의 영향을 보여준다. 농산물의 계절적 가용성과 기독교 축일(사순절, 부활절, 크리스마스 등)과 관련된 계절적 변화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적 변형도 주목할 수 있다. 음식은 특히 전통적인 페카타(즉, 토끼 스튜 또는 튀김을 먹는 것)와 같이 국가 정체성 발전에 역사적으로 중요했다. 감자 또한 몰타 식단의 주요 식품이다.
몰타에는 지르젠티나와 젤레우자를 포함한 여러 토종 포도 품종이 있다. 이러한 토종 포도뿐만 아니라 현지에서 재배된 다른 일반적인 품종의 포도를 사용하여 상당한 양의 와인을 생산하는 강력한 몰타 와인 산업이 있다. 다수의 와인이 보호 원산지 명칭(PDO)을 획득했으며, 몰타와 고조에서 재배된 포도로 생산된 와인은 "DOK" 와인, 즉 Denominazzjoni ta' l-Oriġini Kontrollata로 지정된다.
10.6. 풍습 및 전통
2010년 자선 지원 재단(Charities Aid Foundation) 연구에 따르면 몰타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관대한 사람들로, 83%가 자선 단체에 기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몰타 민담에는 신비한 생물과 초자연적인 사건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이는 학자(이자 몰타 고고학의 선구자) 마누엘 마그리가 그의 핵심 비평서 "Ħrejjef Missirijietna"("우리 선조들의 우화")에 가장 포괄적으로 편집했다. 이 자료 모음은 후속 연구자와 학자들이 군도 전역에서 전통 민담, 우화, 전설을 수집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거인, 마녀, 용이 많은 이야기에 등장하지만, 일부에는 카우카우, 일-벨리에아, ㄹ-임할라 등 순전히 몰타 고유의 생물이 포함되어 있다.
전통적인 몰타 속담은 출산과 다산의 문화적 중요성을 드러낸다: "iż-żwieġ mingħajr tarbija ma fihx tgawdija"(아이가 없는 결혼은 행복할 수 없다). 이는 몰타가 다른 많은 지중해 문화와 공유하는 믿음이다. 몰타 민담에서 고전적인 결말 문구인 "그리고 그들은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의 현지 변형은 "u għammru u tgħammru, u spiċċat"(그리고 그들은 함께 살았고, 함께 아이를 낳았고, 이야기는 끝났다)이다.

시골 몰타는 지중해 사회와 다산, 월경, 임신에 관한 여러 미신을 공유하는데, 여기에는 출산 직전에 묘지를 피하는 것과 월경 중 특정 음식 준비를 피하는 것이 포함된다. 임산부는 태아가 상징적인 모반(몰타어: xewqa, 문자 그대로 "욕망" 또는 "갈망")을 가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음식 갈망을 만족시키도록 권장된다. 몰타와 시칠리아 여성들은 또한 태아의 성별을 예측한다고 믿어지는 특정 전통을 공유한다.
전통적으로 몰타 신생아는 가능한 한 빨리 세례를 받았다. 세례식 잔치에서 제공되는 전통적인 몰타 진미로는 비스쿠티니 탈-마흐무디야(아몬드 마카롱), 잇-토르타 탈-마르모라타(초콜릿 맛 아몬드 페이스트로 만든 매콤한 하트 모양 타르트), 장미 꽃잎, 제비꽃, 아몬드로 만든 로졸린이라는 리큐어가 있다.
아이의 첫 번째 생일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남은 전통으로, 몰타 부모들은 일-쿠치야라는 게임을 조직하는데, 다양한 상징적인 물건들이 아이 주위에 무작위로 놓인다. 아이가 가장 관심을 보이는 물건이 아이의 장래와 행운을 드러낸다고 한다.
전통적인 몰타 결혼식에서는 신부 가족의 집에서 본당 교회까지 화려한 차양 아래 신부 행렬이 진행되었고, 가수들이 뒤따랐다(일-질와). 새 신부는 몰타 전통 의상인 온넬라를 입었다. 오늘날의 커플들은 자신이 선택한 마을이나 도시의 교회나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리며, 보통 호화로운 결혼 피로연이 이어진다. 때때로 커플들은 전통적인 몰타 결혼식의 요소를 축하 행사에 통합하려고 노력한다. 전통 결혼식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난 것은 2007년 5월, 수천 명의 몰타인과 관광객들이 주리크에서 16세기 스타일의 전통 몰타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 분명하게 나타났다.
10.7. 축제 및 행사


남부 이탈리아와 유사한 지역 축제는 몰타와 고조에서 흔하며, 결혼식, 세례식, 그리고 가장 두드러지게는 성인의 날을 기념한다. 성인의 날 아침, 페스타는 수호성인의 삶과 업적에 대한 설교가 있는 대미사로 절정에 이른다. 저녁에는 종교 수호성인의 동상이 엄숙한 행렬로 지역 거리를 돌며, 신자들이 기도로 뒤따른다. 종교적 헌신의 분위기는 며칠간의 축하와 환락, 즉 밴드 행진, 불꽃놀이, 심야 파티가 선행된다. 가장 큰 페스타는 아마도 8월 15일 8개 본당에서, 그리고 다음 일요일 2개 다른 본당에서 기념되는 성모 승천 대축일일 것이다.
몰타 카니발(몰타어: il-karnival ta' Malta)은 총장 이후 문화 달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재의 수요일로 이어지는 주간에 열리며, 일반적으로 가면 무도회, 가장 무도회 및 기괴한 가면 경연 대회, 호화로운 심야 파티, 사육제 왕(몰타어: ir-Re tal-Karnival)이 주재하는 우화적인 꽃마차의 화려한 색종이 테이프 퍼레이드, 행진 밴드 및 의상을 입은 참가자들로 구성된다.

성주간(몰타어: il-Ġimgħa Mqaddsa)은 성지 주일(Ħadd il-Palm)에 시작하여 부활절 주일(Ħadd il-Għid)에 끝난다.
므나야(Mnarja), 또는 ㄹ-임나야(l-Imnarja, 발음: 림나르야)는 몰타 문화 달력에서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이다. 공식적으로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의 축일에 봉헌된 국가 축제이다. 그 뿌리는 6월 29일 초여름 밤을 횃불과 모닥불로 밝혔던 이교도 로마 공화국의 축제 루미나리아(문자 그대로 "조명")로 거슬러 올라간다. 축제는 오늘날에도 16세기부터 몰타에서 이 날 읽혀온 공식 정부 발표문인 반두 낭독으로 시작된다. 기사단 치하에서는 몰타인들이 야생 토끼를 사냥하고 먹을 수 있도록 허용된 유일한 날이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외에는 기사들의 사냥 즐거움을 위해 유보되었다. 므나야와 토끼 스튜(몰타어: fenkata) 사이의 밀접한 관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하다.
아일 오브 MTV(Isle of MTV)는 MTV가 매년 제작하고 방송하는 하루짜리 음악 축제이다. 이 축제는 2007년부터 몰타에서 매년 개최되었으며, 매년 주요 팝 아티스트들이 공연한다. 2012년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티스트 플로 라이다, 넬리 퍼타도, 윌 아이 앰이 공연했다. 5만 명 이상이 참석하여 역대 최대 참석자 수를 기록했다.
몰타 국제 불꽃 축제는 2003년부터 발레타 그랜드 하버에서 매년 개최되고 있다.
10.8. 미디어
가장 널리 읽히고 재정적으로 가장 강력한 신문은 얼라이드 뉴스페이퍼즈(Allied Newspapers Ltd.)에서 발행하며, 주로 타임스 오브 몰타(The Times of Malta, 27%)와 그 일요판인 선데이 타임스 오브 몰타(The Sunday Times of Malta, 51.6%)이다. 이중 언어 사용으로 인해 신문의 절반은 영어로, 나머지 절반은 몰타어로 발행된다. 몰타 노동조합 총연맹(General Workers' Union)의 자회사가 발행하는 일요 신문 잇-토르차(It-Torċa, "횃불")는 가장 널리 읽히는 몰타어 신문이다. 자매지인 로리존트(L-Orizzont, "지평선")는 가장 발행 부수가 많은 몰타어 일간지이다. 일간지 또는 주간지가 많아 인구 28,000명당 1개꼴이다. 광고, 판매, 보조금이 세 가지 주요 자금 조달 방법이다.
몰타에는 TVM, TVMNews+, Parliament TV, One, NET Television, Smash Television, F Living, TVMSport+, Xejk 등 9개의 지상파 텔레비전 채널이 있다. 국가와 정당이 이러한 채널 자금의 대부분을 보조한다. TVM, TVMNews+, Parliament TV는 국영 방송사이자 유럽 방송 연맹(EBU) 회원사인 공영 방송 서비스(Public Broadcasting Services)에서 운영한다. NET Television의 소유주인 Media.link Communications Ltd.와 One의 소유주인 One Productions Ltd.는 각각 국민당과 노동당과 제휴하고 있다. 나머지는 개인 소유이다. 몰타 방송 당국은 모든 지역 방송국을 감독하고 법적 및 라이선스 의무 준수와 공정성 유지를 보장할 권한을 갖는다.
몰타 통신 당국은 2012년 말 기준으로 147,896개의 유료 TV 가입이 활성화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참고로 2011년 인구 조사에서는 몰타에 139,583가구가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위성 수신을 통해 다른 유럽 텔레비전 네트워크를 시청할 수 있다.
10.9. 스포츠
축구는 몰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중 하나이다. 다른 인기 있는 스포츠로는 보치(boċċi, 몰타 전통 공놀이), 경마, 고스트라(gostra, 기름 바른 장대 오르기), 레가타(regatta, 전통 보트 경주), 수구, 클레이 사격, 모터스포츠 등이 있다.
2018년 몰타는 첫 번째 e스포츠 토너먼트인 '슈퍼노바 CS:GO 몰타'를 개최했는데, 이는 카운터-스트라이크: 글로벌 오펜시브 토너먼트였다. 또한 2018년부터 몰타는 ESL 프로 리그를 개최하는 주요 장소가 되었다. 몰타는 2010년까지 유럽 연합(EU) 회원국 중 유일하게 동계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았으나,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 엘리즈 펠레그린이 알파인 스키 종목에 출전하면서 EU 회원국 전체가 동계 올림픽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후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과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에도 참가하며 3회 연속 EU 회원국 전체 참가 기록을 세웠다. 몰타는 또한 유럽 소국 경기 대회를 개최하고 참가한다.
몰타 축구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며, 1909년에 축구 리그인 몰타 프리미어리그가 창설되었다. 슬리마 원더러스 FC가 리그 최다인 26회 우승을 차지했으며, 컵 대회인 몰타 FA 트로피에서도 역대 최다인 21회 우승을 기록했다. 1900년에 설립된 몰타 축구 협회(MFA)에 의해 몰타 축구 국가대표팀이 구성되어 있으나, FIFA 월드컵 및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본선 진출 경력은 없으며, UEFA 네이션스 리그에서도 최하위 그룹인 리그 D에 속해 있다(2022년 기준).
10.10. 세계유산
몰타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문화유산이 3건 있다.
- 발레타 시 (1980년)
- 할 사플리에니 지하 유적 (1980년)
- 몰타의 거석 신전 (1980년, 1992년 확장) - 잔티야, 하르 임, 므나이드라, 타르신, 스코르바, 타 하그라트 신전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