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아르헨티나 공화국, 통칭 아르헨티나는 남아메리카 남부에 위치한 연방 공화국이다. 국토 면적은 278.04 만 km2로, 남아메리카에서 브라질에 이어 두 번째, 세계에서는 여덟 번째로 넓다. 서쪽으로는 안데스산맥을 경계로 칠레, 북쪽으로는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북동쪽으로는 브라질과 우루과이와 국경을 접하며, 동쪽과 남쪽은 대서양에 면한다. 수도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이며,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아르헨티나의 역사는 구석기 시대에 최초의 인류가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콜럼버스 이전 시대에는 북서부 지역이 잉카 제국의 일부였으며, 그 외 지역에는 다양한 원주민 부족이 거주했다. 16세기 스페인 제국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었고, 1776년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이 설립되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가 그 중심지가 되었다. 1810년 5월 혁명을 통해 자치 정부를 수립하였고, 1816년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후 약 70년간의 내전과 정치적 혼란을 거쳐 19세기 후반 연방 공화국으로 재편되었다. 이 시기 대규모 유럽 이민, 특히 이탈리아계와 스페인계 이민이 이루어져 아르헨티나의 문화와 인구 구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초 아르헨티나는 농업 수출을 바탕으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로 성장했으나, 대공황 이후 경제적 쇠퇴와 정치적 불안정을 겪었다. 후안 페론 대통령 집권기에는 노동자 보호와 산업화 정책이 추진되었으나, 그의 실각 이후 군부 독재와 민주주의 정권이 반복되었다. 특히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이어진 군사 독재 정권의 '더러운 전쟁'은 수많은 인권 탄압을 자행했다. 1983년 민주화 이후에도 경제 위기와 정치적 변동을 겪으며 현대에 이르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정치는 대통령 중심제 연방 공화국이며,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 분립을 채택하고 있다. 23개의 주와 1개의 자치시(부에노스아이레스)로 구성된다. 국제적으로는 유엔,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메르코수르, 라틴 아메리카·카리브해 국가 공동체, 이베로-아메리카 국가 기구의 창립 회원국이며, G20 회원국이다.
경제는 풍부한 천연자원, 높은 교육 수준의 인구, 다변화된 산업 기반, 수출 지향적인 농업 부문을 특징으로 한다. 주요 산업으로는 농업, 목축업, 제조업, 광업 등이 있으며, 관광업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인플레이션과 외채 문제가 반복되어 경제적 불안정성을 겪어왔다.
사회적으로는 유럽계 이민자의 영향으로 유럽 문화가 강하게 나타나며, 다수의 국민이 로마 가톨릭을 신봉한다. 교육 수준이 높고 도시화율 또한 매우 높다. 문화적으로는 탱고 음악과 춤, 아사도로 대표되는 음식 문화, 축구에 대한 열정 등이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같은 세계적인 문학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제도(말비나스 제도), 사우스조지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 그리고 아르헨티나령 남극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2. 국명

아르헨티나의 공식 국명은 아르헨티나 공화국(República Argentina레푸블리카 아르헨티나스페인어)이다. 흔히 줄여서 아르헨티나(Argentina아르헨티나스페인어)라고 부른다. 1994년 개정된 현행 헌법 제35조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사용된 국명인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Provincias Unidas del Río de la Plata프로빈시아스 우니다스 델 리오 데 라 플라타스페인어), '아르헨티나 연합'(Confederación Argentina콘페데라시온 아르헨티나스페인어) 또한 공식적인 국명으로 인정된다. 법률 제정 시에는 '아르헨티나국'(Nación Argentina나시온 아르헨티나스페인어)이라는 명칭도 사용될 수 있다.
'아르헨티나'라는 이름은 라틴어로 '은'을 의미하는 '아르겐툼'(argentum아르겐툼라틴어)에서 유래했다. 16세기 초, 스페인 탐험가들이 라플라타강 유역에 도착했을 때, 원주민들이 은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이 지역 상류에 '은의 산맥'(Sierra de la Plata시에라 데 라 플라타스페인어)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로 인해 강 이름이 '리오데라플라타'('은의 강')로 불리게 되었다. '아르헨티나'라는 지명은 1536년 베네치아 지도에서 처음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학 작품에서 '아르헨티나'라는 이름이 처음 사용된 것은 1602년 마르틴 델 바르코 센테네라가 쓴 서사시 『라 아르헨티나와 라플라타강의 정복』(La Argentina y conquista del Río de la Plata, con otros acaecimientos de los reinos del Perú, Tucumán y estado del Brasil라 아르헨티나 이 콩키스타 델 리오 데 라 플라타, 콘 오트로스 아카에시미엔토스 데 로스 레이노스 델 페루, 투쿠만 이 에스타도 델 브라실스페인어)에서이다. 이 시는 이 지역을 묘사하고 있다. 18세기에는 이미 '아르헨티나'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나, 공식적으로는 스페인 제국에 의해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 독립 후에는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로 불렸다.
1826년 헌법에서 법률 문서상 '아르헨티나 공화국'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되었다. '아르헨티나 연합'이라는 명칭도 널리 사용되었으며, 1853년 헌법의 서문에서 공식화되었다. 1860년 대통령령으로 국명이 '아르헨티나 공화국'으로 확정되었고, 같은 해 헌법 개정을 통해 1810년 이후 사용된 모든 국명이 법적으로 유효하다고 규정되었다.
영어권에서는 전통적으로 스페인어의 관용적 표현인 '라 아르헨티나'(la Argentina라 아르헨티나스페인어)를 모방하여 '디 아르헨틴'(the Argentine디 아르젠틴영어)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20세기 중후반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표현은 점차 사라지고 현재는 '아르헨티나'(Argentina아르젠티나영어)로 통칭된다.
3. 역사
아르헨티나의 역사는 선사 시대 원주민 문화에서 시작하여 스페인 식민 시대를 거쳐 독립과 국가 형성,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이민, 페론주의의 등장과 군부 독재, 민주화와 경제 위기 등 중요한 사건들이 아르헨티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3.1. 선콜럼버스 시대

현재 아르헨티나로 알려진 지역에 인류가 처음 정착한 흔적은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후 중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의 유적도 발견된다. 유럽 식민화 이전까지 아르헨티나는 다양한 사회 조직을 가진 여러 문화권으로 비교적 인구 밀도가 낮았다. 이들 문화는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그룹은 도기 제작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기본적인 수렵 채집인들로, 남쪽 끝 지역의 셀크남족과 야간족이 이에 해당한다. 두 번째 그룹은 발전된 수렵 채집인들로, 중동부의 푸엘체족, 케란디족, 세라노족, 그리고 남부의 테우엘체족(이들은 모두 칠레에서 확산된 마푸체족에게 정복당함)과 북부의 콤족, 위치족을 포함한다. 마지막 그룹은 도기를 사용한 농경민들로, 북동부에서 화전 농업을 하며 반정착 생활을 한 차루아족, 미누아네족, 과라니족, 그리고 북서부에서 발전된 정주형 교역 문화를 이루었으나 1480년경 잉카 제국에 정복된 디아기타족, 중부의 토코노테족과 에니아-카미아레족(코메칭곤족), 그리고 중서부에서 라마를 사육하며 잉카의 강한 영향을 받은 우아르페족이 있었다.
15세기 후반, 현재 페루의 쿠스코를 중심으로 발전한 케추아족의 국가는 잉카 제국으로 성장하여, 황제 투팍 잉카 유팡키와 우아이나 카팍의 통치하에 현재 아르헨티나 북서부 안데스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정복된 지역은 잉카 제국의 4개 주 중 하나인 콜라수유의 일부가 되었으며, 약 30만 명의 케추아족과 아이마라족이 거주하게 되었다. 아르헨티나 내 콜라수유의 영역은 북쪽으로는 현재의 후후이주에서 남쪽으로는 멘도사주, 동쪽으로는 산티아고델에스테로주 북부에 이르렀다. 반면, 잉카 제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한 그란차코, 팜파스, 파타고니아 지역에는 차루아족과 같은 수렵 인디헤나(원주민)가 주로 거주했으며, 팜파스와 차코 지역에는 과라니족과 같이 소규모 농경을 하는 인디헤나도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이 지역의 인구는 적었다.
3.2. 스페인 식민 시대

유럽인이 아르헨티나 지역에 처음 도달한 것은 1502년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항해 때였다. 스페인 항해사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와 세바스티안 카봇은 각각 1516년과 1526년에 현재 아르헨티나 영토를 방문했다. 1536년 페드로 데 멘도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작은 정착촌을 건설했으나, 1541년 포기되었다.
이후 파라과이(리오데라플라타 총독부 설립), 페루, 칠레 등지에서 추가적인 식민화 노력이 이루어졌다. 프란시스코 데 아기레는 1553년 산티아고델에스테로를 건설했다. 론드레스는 1558년, 멘도사는 1561년, 산후안은 1562년, 산미겔데투쿠만은 1565년에 각각 건설되었다. 후안 데 가라이는 1573년 산타페를 건설했고, 같은 해 헤로니모 루이스 데 카브레라는 코르도바를 세웠다. 가라이는 남쪽으로 더 나아가 1580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재건했다. 산루이스는 1596년에 설립되었다.
스페인 제국은 아르헨티나 영토의 경제적 잠재력을 볼리비아와 페루의 금은광의 즉각적인 부에 종속시켰고, 따라서 1776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수도로 하는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이 창설될 때까지 페루 부왕령의 일부로 남아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1806년과 1807년 두 차례에 걸친 영국의 침공(리오데라플라타 영국군 침공)을 격퇴했다. 계몽주의 사상과 초기 대서양 혁명의 사례들은 이 지역을 지배하던 절대군주제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켰다.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반도 전쟁 중 페르난도 7세의 폐위는 큰 우려를 낳았다.
3.3. 독립과 내전


아르헨티나가 부왕령의 계승 국가로 부상하는 과정의 시작점에서, 1810년 5월 혁명은 부왕 발타사르 이달고 데 시스네로스를 몰아내고 현지인들로 구성된 새로운 정부인 프리메라 훈타를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수립했다. 독립 전쟁 초기 충돌에서 훈타는 코르도바에서 왕당파의 반혁명(리니에르스 반혁명)을 진압했지만, 이후 독립 국가가 된 반다 오리엔탈, 알토 페루, 파라과이의 왕당파는 극복하지 못했다. 프랑스-아르헨티나 혼혈인 이폴리트 부샤르는 이후 함대를 이끌고 해외에서 스페인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였으며, 스페인령 캘리포니아, 스페인령 페루, 스페인령 필리핀을 공격했다. 그는 스페인 식민 통치에 대한 아르헨티나와 필리핀의 공동 불만으로 인해 스페인에서 탈주하여 아르헨티나 해군에 합류한 필리핀인들의 충성을 확보했다. 호세 데 산마르틴의 형제인 후안 페르민 데 산마르틴은 이미 필리핀에서 혁명적 열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훗날, 아르헨티나의 잉카 기원 상징인 5월의 태양은 필리핀인들이 스페인에 대항한 필리핀 혁명에서 상징으로 채택되었다. 그는 또한 하와이 왕국의 카메하메하 1세로부터 아르헨티나의 외교적 승인을 확보했다. 역사가 파초 오도넬은 하와이가 아르헨티나의 독립을 인정한 최초의 국가라고 주장한다. 그는 결국 1819년 칠레 애국자들에게 체포되었다.
혁명가들은 두 개의 적대적인 집단, 즉 중앙집권파(Unitarios)와 연방파(Federales)로 나뉘었는데, 이는 아르헨티나 독립 초기 수십 년을 규정하는 분열이었다. 13년 총회는 헤르바시오 안토니오 데 포사다스를 아르헨티나 초대 최고 지도자로 임명했다.
1816년 7월 9일, 투쿠만 의회는 독립 선언을 공식화했으며, 이날은 현재 국경일인 독립기념일로 기념된다. 1년 후 마르틴 미겔 데 구에메스 장군은 북부에서 왕당파를 저지했다. 호세 데 산마르틴 장군은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와 합류하여 연합군을 이끌고 안데스산맥을 넘어 칠레의 독립을 확보했으며, 이후 오이긴스의 명령에 따라 스페인의 거점인 리마로 진격하여 페루의 독립을 선포했다. 1819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중앙집권적 헌법(1819년 아르헨티나 헌법)을 제정했으나 곧 연방파에 의해 폐기되었다.
아르헨티나 독립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일부는 1816년 잉카 계획으로 알려진 제안을 했는데, 이는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현재 아르헨티나)가 사파 잉카의 후손이 이끄는 군주국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투팍 아마루 2세의 이복형제인 후안 바우티스타 투팍 아마루가 군주로 제안되었다. 이 제안을 지지한 인물로는 마누엘 벨그라노, 호세 데 산마르틴, 마르틴 미겔 데 구에메스 등이 있다. 투쿠만 의회는 결국 잉카 계획을 거부하고 대신 공화주의적 중앙집권 국가를 수립하기로 결정했다.
1820년 중앙집권파와 연방파 간의 세페다 전투는 최고 지도자 통치의 종식을 가져왔다. 1826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또 다른 중앙집권적 헌법(1826년 아르헨티나 헌법)을 제정했고,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가 초대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내륙 주들이 곧 그에 반발하여 그의 사임을 강요하고 헌법을 폐기했다. 중앙집권파와 연방파는 내전을 재개했고, 후자가 우세하여 1831년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이끄는 아르헨티나 연합을 결성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그는 프랑스 봉쇄(1838년~1840년), 연합 전쟁(1836년~1839년), 영국-프랑스 봉쇄(1845년~1850년)에 직면했지만 패배하지 않고 추가적인 국토 손실을 막았다. 그러나 그의 무역 제한 정책은 내륙 주들의 분노를 샀고, 1852년 또 다른 강력한 카우디요인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가 그를 권좌에서 몰아냈다. 연합의 새 대통령으로서 우르키사는 자유주의적이고 연방적인 1853년 헌법을 제정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주는 분리 독립했으나 1859년 세페다 전투에서 패배한 후 연합에 다시 편입되었다.
3.4. 근대 국가의 형성


1861년 파본 전투에서 우르키사를 압도한 바르톨로메 미트레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우위를 확보하고 통일된 국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뒤를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와 니콜라스 아베야네다가 이었고, 이 세 대통령 임기는 현대 아르헨티나 국가의 기초를 마련했다.
1880년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를 시작으로 10명의 연속적인 연방 정부는 경제적 자유주의 정책을 강조했다. 그들이 추진한 대규모 유럽 이민 물결(미국에 이어 두 번째 규모)은 아르헨티나 사회와 경제를 거의 재창조했으며, 1908년까지 아르헨티나를 세계 7위의 부유한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이 이민 물결과 사망률 감소에 힘입어 아르헨티나 인구는 5배, 경제는 15배 성장했다. 1870년부터 1910년까지 아르헨티나의 밀 수출량은 연간 10.00 만 t에서 250.00 만 t으로 증가했고, 냉동 쇠고기 수출량은 연간 2.50 만 t에서 36.50 만 t으로 증가하여 아르헨티나를 세계 5대 수출국 중 하나로 만들었다. 철도 총연장은 503 km에서 3.11 만 km로 늘어났다. 새로운 공립, 의무, 무상, 세속 교육 시스템에 힘입어 문해율은 22%에서 65%로 급격히 증가했는데, 이는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50년 후에도 도달하지 못한 수준이었다. 더욱이, 실질 GDP는 급격히 성장하여 막대한 이민 유입에도 불구하고 1862년에서 1920년 사이 1인당 소득은 선진국 수준의 67%에서 100%로 증가했다. 1865년 아르헨티나는 이미 1인당 소득 기준 상위 25개국 중 하나였다. 1908년에는 덴마크, 캐나다, 네덜란드를 제치고 스위스,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영국, 벨기에에 이어 7위를 차지했다. 아르헨티나의 1인당 소득은 이탈리아보다 70%, 스페인보다 90%, 일본보다 180%, 브라질보다 400% 높았다. 이러한 독보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산업화라는 원래 목표를 달성하는 데 더디었다. 1920년대 자본 집약적인 지역 산업의 급격한 발전 이후, 1930년대 제조업 부문의 상당 부분은 노동 집약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

1878년부터 1884년까지 소위 사막의 정복이 일어났는데, 이는 국경에서 원주민과 크리오요 간의 끊임없는 대립과 원주민 영토의 전유를 통해 아르헨티나 영토를 세 배로 늘리려는 목적이었다. 첫 번째 정복은 원주민이 지배하던 팜파스와 파타고니아 영토에 대한 일련의 군사적 침공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영토는 탐험 자금 지원자인 아르헨티나 농촌 협회 회원들 사이에 분배되었다. 차코 정복은 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는 단순한 목재와 타닌 추출이 목화 생산으로 대체되면서 국가 경제 시스템에 완전히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원주민을 크리오요나 유럽인과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한 열등한 존재로 간주했다.
1912년 로케 사엔스 페냐 대통령은 사엔스 페냐 법으로 보편적이고 비밀스러운 남성 참정권을 제정하여 급진시민연합(UCR)의 지도자인 이폴리토 이리고옌이 1916년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사회 경제 개혁을 단행하고 소규모 농장과 기업에 대한 지원을 확대했다. 아르헨티나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중립을 지켰다. 이리고옌의 두 번째 행정부는 대공황으로 촉발된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1930년, 이리고옌은 호세 펠릭스 우리부루가 이끄는 군부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되었다. 아르헨티나가 세기 중반까지 15대 부국 중 하나로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쿠데타는 국가를 다시 저개발 상태로 몰아넣은 꾸준한 경제적, 사회적 쇠퇴의 시작을 알렸다.
우리부루는 2년 동안 통치했고, 그 후 아구스틴 페드로 후스토가 부정 선거로 당선되어 영국과 논란이 많은 로카-런시먼 조약을 체결했다. 아르헨티나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중립을 유지했는데, 이는 영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의 반대에 부딪혔다. 1943년 아르투로 라우손 장군이 이끄는 군사 쿠데타가 라몬 카스티요의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시켰다. 미국의 압력으로 아르헨티나는 나중에 추축국에 선전포고했다(1945년 3월 27일, 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약 한 달 전).
라우손 독재 기간 동안 비교적 무명이었던 군 대령 후안 페론이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페론은 빠르게 정치적 지위를 상승시켜 1944년 국방부 장관이 되었다. 군 내부와 보수 진영의 경쟁자들에게 정치적 위협으로 인식되면서 1945년 사임을 강요당했고 며칠 후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지지 기반과 여러 동맹 노조의 거센 압력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이후 1946년 아르헨티나 총선에서 노동당 후보로서 급진시민연합(UCR)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대통령이 되었다.
3.5. 페론주의 시대

노동당(이후 정의당으로 개칭)은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정당으로, 1946년 후안 페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집권했다. 그는 전략 산업과 서비스를 국유화하고, 임금과 노동 조건을 개선했으며, 외채 전액을 상환하고 거의 완전 고용을 달성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1947년 의회를 압박하여 여성 투표권을 제정하도록 했고,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을 위한 사회 부조 시스템을 개발했다. 경제는 1950년부터 정부 지출과 보호무역주의 경제 정책 등으로 인해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정치적 탄압 운동에도 가담했다. 정치적 반체제 인사나 잠재적 경쟁자로 인식되는 사람은 누구나 위협, 신체적 폭력,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다. 아르헨티나 지식인, 중산층, 대학생, 교수들은 특히 골칫거리로 여겨졌다. 페론은 모든 주요 공립 교육 기관에서 2,000명 이상의 대학교수와 교직원을 해고했다.
페론은 대부분의 노동조합과 노동조합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고 했으며, 필요할 때는 정기적으로 폭력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정육 포장업자 노조 지도자인 시프리아노 레예스는 선출된 노동운동 간부들이 페론당의 페론주의 꼭두각시들로 강제 교체된 후 정부에 항의하는 파업을 조직했다. 레예스는 곧 테러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혐의는 입증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기소되지 않은 레예스는 감옥에서 5년 동안 고문을 당했고 1955년 정권이 몰락한 후에야 석방되었다.
페론은 1951년 재선에 성공했다. 당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그의 아내 에바 페론은 1952년 암으로 사망했다. 경제가 계속 침체되면서 페론은 대중의 지지를 잃기 시작했고 국가 과정에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해군은 페론의 약화된 정치력을 이용하여 1955년 5월 광장을 폭격했다. 페론은 공격에서 살아남았지만, 몇 달 후 자유혁명 쿠데타 동안 그는 축출되어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3.6. 페론 실각과 군부 통치 (자유혁명)
새로운 국가 원수 페드로 에우헤니오 아람부루는 페론주의를 금지하고 페론당이 향후 어떠한 선거에도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급진시민연합(UCR)의 아르투로 프론디시가 1958년 총선에서 승리했다. 그는 에너지 및 산업 자급자족을 달성하기 위해 투자를 장려하고, 만성적인 무역 적자를 해소했으며, 페론주의 금지를 해제했다. 그러나 페론주의자들과 군부 양측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그의 노력은 양측 모두로부터 거부당했고, 새로운 쿠데타로 인해 그는 축출되었다. 정치적 혼란 속에서 상원 지도자 호세 마리아 기도는 신속하게 대응하여 권력 공백 방지법을 적용하여 스스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선거는 무효화되었고 페론주의는 다시 한번 금지되었다. 아르투로 일리아는 1963년 선거에서 당선되어 전반적인 번영을 이끌었지만, 1966년 후안 카를로스 온가니아 장군이 이끄는 또 다른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고, 이 쿠데타는 자칭 아르헨티나 혁명으로 불리며 무기한 통치를 추구하는 새로운 군사 정부를 수립했다.
3.7. 페론의 복귀와 사망

수년간의 군사 통치 이후, 알레한드로 아구스틴 라누세는 1971년 군사정권에 의해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민주주의 복귀에 대한 정치적 압력이 커지자 라누세는 1973년 선거를 소집했다. 페론은 출마가 금지되었지만 페론주의 정당은 참여가 허용되었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페론의 대리 후보이자 좌파 페론주의자인 엑토르 호세 캄포라가 승리하여 1973년 5월 25일 취임했다. 한 달 뒤인 6월, 페론은 스페인에서 귀국했다. 캄포라의 첫 대통령 조치 중 하나는 정치적 암살과 테러 공격을 자행한 조직의 구성원들과 판사들에 의해 재판을 받고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에게 사면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캄포라의 수개월간의 재임 기간은 정치적, 사회적 불안으로 점철되었다. 단 한 달 만에 600건이 넘는 사회적 갈등, 파업, 공장 점거가 발생했다. 극좌 테러 조직들이 무장 투쟁을 중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참여 민주주의 과정에 합류한 것은 페론주의 우파 세력에게 직접적인 위협으로 해석되었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격변 속에서 캄포라와 비센테 솔라노 리마 부통령은 1973년 7월 사임하고 새로운 선거를 요구했지만, 이번에는 페론이 정의당 후보로 나섰다. 페론은 그의 아내 이사벨 페론을 부통령으로 하여 선거에서 승리했다. 페론의 세 번째 임기는 페론주의 정당 내 좌파와 우파 세력 간의 갈등이 격화되고, 게바라주의 ERP, 좌파 페론주의 몬토네로스, 그리고 국가가 지원하는 극우 AAA와 같은 무장 테러 게릴라 단체들이 다시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1974년 일련의 심장마비와 폐렴 징후 이후 페론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는 1974년 7월 1일 월요일 마지막 심장마비를 일으켜 오후 1시 15분에 사망했다. 그의 나이는 78세였다. 그의 사망 후, 그의 아내이자 부통령이었던 이사벨 페론이 그의 뒤를 이었다. 그녀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군사정권은 페론주의자들의 극우 파시스트 세력과 함께 다시 한번 사실상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이사벨 페론은 1974년부터 1976년 군부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녀의 짧은 대통령 임기는 아르헨티나 정치 및 사회 시스템의 붕괴로 특징지어졌으며, 이는 수십 년간의 불안정, 좌파 테러리스트 게릴라 공격, 국가 지원 테러리즘으로 이어지는 헌법적 위기를 초래했다.
3.8. 국가 재편성 과정 (군사독재)

"더러운 전쟁" (Guerra Sucia게라 수시아스페인어)은 콘도르 작전의 일부였으며, 남부 원뿔 지역의 다른 우익 독재 정권들도 참여했다. 더러운 전쟁은 아르헨티나와 남부 원뿔 지역의 다른 곳에서 정치적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국가 테러를 포함했으며, 군대와 보안군은 좌익 게릴라, 정치적 반체제 인사, 그리고 사회주의와 관련이 있거나 정권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에 반대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도시와 농촌에서 폭력을 사용했다. 아르헨티나에서만 폭력의 희생자는 약 15,000명에서 30,000명의 좌익 운동가와 무장세력으로 추정되며, 여기에는 노동조합원, 학생, 언론인, 마르크스주의자, 페론주의 게릴라, 그리고 동조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희생자 대부분은 국가 테러의 희생자였다. 반대파 게릴라의 희생자는 군인과 경찰관 약 500~540명, 민간인 최대 230명에 달했다. 아르헨티나는 존슨, 닉슨, 포드, 카터, 레이건 행정부 기간 동안 미국 정부로부터 기술 지원과 군사 원조를 받았다.
정치적 억압의 정확한 연대기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오랜 정치 전쟁의 뿌리는 1969년 노동조합원들이 페론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 준군사조직의 암살 대상이 되면서 시작되었을 수 있다. 페론주의와 좌파에 대한 국가 지원 테러의 개별 사례는 1955년 5월 광장 폭격 사건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972년 트렐레우 학살, 1973년부터 시작된 아르헨티나 반공주의자 동맹의 활동, 그리고 1975년 독립 작전 기간 동안 이사벨 페론의 좌익 게릴라에 대한 "섬멸 포고령" 또한 더러운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가능한 사건들이다.
온가니아는 의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당을 금지했으며 학생 및 노동조합을 해체했다. 1969년 대중의 불만은 두 차례의 대규모 시위, 즉 코르도바소와 로사리아소로 이어졌다. 테러리스트 게릴라 조직 몬토네로스는 아람부루를 납치하여 처형했다. 새로 선출된 정부 수반 알레한드로 아구스틴 라누세는 커지는 정치적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페론 대신 엑토르 호세 캄포라를 페론주의 후보로 내세웠다. 캄포라는 1973년 3월 선거에서 승리하여 유죄 판결을 받은 게릴라 조직원들을 사면하고 페론이 스페인 망명지에서 귀국하도록 확보했다.

페론이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날, 페론주의 내부 파벌인 우익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좌익 몬토네로스 청년들 간의 충돌로 에세이사 학살이 발생했다. 정치적 폭력에 압도된 캄포라는 사임했고 페론은 그의 세 번째 부인 이사벨 페론을 부통령으로 하여 다음 1973년 9월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는 몬토네로스를 당에서 추방했고 그들은 다시 한번 비밀 조직이 되었다. 호세 로페스 레가는 그들과 민중혁명군(ERP)에 맞서 싸우기 위해 아르헨티나 반공주의자 동맹(AAA)을 조직했다.
페론은 1974년 7월 사망했고 그의 아내가 그 뒤를 이었으며, 그녀는 군대와 경찰에게 좌익 전복 세력을 "섬멸"하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비밀 포고령에 서명하여, 투쿠만주에서 농촌 반란을 시작하려는 ERP의 시도를 중단시켰다. 이사벨 페론은 1년 후 육군 장군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가 이끄는 연합군 합동 군사 평의회에 의해 축출되었다. 그들은 국가 재편성 과정(종종 프로세소로 축약됨)을 시작했다.
프로세소는 의회를 해산하고 대법원 판사들을 해임했으며 정당과 노동조합을 금지했고, 좌익과 관련된 것으로 의심되는 개인을 포함하여 게릴라 조직원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강제 실종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1976년 말까지 몬토네로스는 거의 2,000명의 조직원을 잃었고 1977년까지 ERP는 완전히 진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하게 약화된 몬토네로스는 1979년에 반격을 시작했지만 신속하게 진압되어 게릴라 위협을 효과적으로 종식시키고 군사 평의회의 권력을 확보했다.
1982년 3월, 아르헨티나군은 영국 영토인 사우스조지아를 점령했고, 4월 2일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했다. 영국은 영유권을 되찾기 위해 기동 함대를 파견했다. 아르헨티나는 6월 14일 항복했고 군대는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굴욕적인 패배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거리 시위가 이어졌고 군 지도부는 물러났다. 레이날도 비그노네가 갈티에리를 대신하여 민주적 통치로의 전환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3.9. 민주주의로의 복귀와 현대

라울 알폰신은 프로세소 기간 동안의 인권 유린 책임자들을 기소하겠다는 공약으로 1983년 선거에서 승리했다. 군사정권 재판과 기타 군사 법정에서는 쿠데타 지도자들 모두에게 유죄를 선고했지만, 군부의 압력으로 그는 또한 완전 종결법과 정당방위법을 제정하여 지휘 계통 하위자들에 대한 기소를 중단시켰다. 악화되는 경제 위기와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그의 대중적 지지도는 하락했고, 페론주의자 카를로스 메넴이 1989년 선거에서 승리했다. 곧이어 폭동으로 인해 알폰신은 조기 사임해야 했다.

메넴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용하고 시행했다. 즉, 고정 환율제, 기업 규제 완화, 사유화, 보호무역주의 장벽 철폐 등은 단기적으로 경제를 정상화시켰다. 그는 알폰신 정부 시절 유죄 판결을 받은 장교들을 사면했다. 1994년 헌법 개정으로 메넴은 두 번째 임기에 당선될 수 있었다. 1995년부터 경제가 쇠퇴하기 시작하고 실업과 불황이 증가하면서, 페르난도 데 라 루아가 이끄는 급진시민연합(UCR)이 1999년 선거에서 대통령직에 복귀했다.
데 라 루아는 악화되는 위기에도 불구하고 메넴의 경제 계획을 그대로 유지하여 사회적 불만을 키웠다. 막대한 자본 유출에 대해 은행 계좌 동결로 대응하여 더 큰 혼란을 야기했다. 2001년 12월 폭동으로 그는 사임해야 했다. 의회는 에두아르도 두알데를 대통령 대행으로 임명했고, 그는 메넴이 설정한 고정 환율제를 폐지하여 많은 노동자와 중산층 아르헨티나인들이 저축액의 상당 부분을 잃게 만들었다. 2002년 말 경제 위기는 수그러들기 시작했지만, 경찰에 의한 두 명의 피케테로 살해 사건으로 정치적 불안이 야기되어 두알데는 선거를 앞당기게 되었다.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새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03년 5월 26일, 그는 취임했다.

두알데가 마련한 신케인스주의 경제 정책을 강화하면서 키르치네르는 상당한 재정 및 무역 흑자와 급격한 GDP 성장을 달성하며 경제 위기를 종식시켰다. 그의 행정부 하에서 아르헨티나는 대부분의 채권에 대해 전례 없는 약 70%의 할인율로 채무불이행 부채를 구조조정하고 국제 통화 기금(IMF)에 대한 부채를 상환했으며, 의심스러운 인권 기록을 가진 장교들을 군에서 숙청하고, 완전 종결법과 정당방위법을 무효화하고 폐지하여 위헌으로 판결하고 군사정권의 범죄에 대한 법적 기소를 재개했다. 그는 재선에 출마하지 않고 대신 아내인 상원의원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의 후보직을 지지하여 그녀가 2007년과 2011년 선거에서 승리했다. 키르치네르 대통령 임기 동안 그녀는 베네수엘라, 이란, 쿠바와 같은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를 증진시켰고, 반면 미국 및 영국과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다. 그녀의 재임 기간 동안 재생 에너지 생산과 보조금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2011년 이후 경제는 전반적으로 부진했다.
2015년 11월 22일, 10월 25일 대통령 선거 1차 투표에서 동점 이후, 중도 우파 연합 후보 마우리시오 마크리가 아르헨티나 역사상 최초의 결선투표에서 승리하여 승리를 위한 전선 후보 다니엘 시올리를 누르고 대통령 당선인이 되었다. 마크리는 1916년 이후 최초로 축출되지 않고 임기를 마친 민주적으로 선출된 비페론주의자 대통령이었다. 그는 2015년 12월 10일 취임하여 높은 인플레이션율과 열악한 경제 상황을 물려받았다. 2016년 4월, 마크리 정부는 인플레이션과 과도한 공공 적자를 해결하기 위한 신자유주의적 긴축 조치를 도입했다. 마크리 행정부 하에서 경제 회복은 요원했고 GDP는 3.4% 감소했으며, 인플레이션은 총 240%에 달했고, 수십억 미국 달러의 국채가 발행되었으며, 그의 임기 말에는 대규모 빈곤이 증가했다. 그는 2019년 재선에 출마했지만 정의당 후보인 알베르토 페르난데스에게 거의 8% 포인트 차이로 패배했다.

페르난데스와 부통령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는 코로나19 범유행이 아르헨티나를 강타하기 불과 몇 달 전인 2019년 12월에 취임했으며, 네스토르와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의 부패, 뇌물 수수, 공적 자금 유용 혐의 속에서였다. 2021년 11월, 아르헨티나 집권 페론주의 정당의 중도 좌파 연합인 모두의 전선은 중간 선거에서 거의 40년 만에 처음으로 의회 과반수를 잃었다. 중도 우파 연합인 변화를 위해 함께의 선거 승리는 페르난데스의 임기 마지막 2년 동안 그의 권력을 제한했다. 상원 장악력을 잃으면서 사법부를 포함한 주요 인사를 임명하기 어려워졌으며, 또한 의회에 제출하는 모든 법안에 대해 야당과 협상해야 했다.
2023년 4월, 페르난데스는 다음 대통령 선거에 재선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2023년 11월 선거 결선투표는 자유지상주의 아웃사이더 하비에르 밀레이가 집권 연합 후보 세르히오 마사를 44.4% 대 55.7%로 누르고 승리했다. 밀레이 대통령 임기는 2023년 12월 10일 취임식과 함께 시작되었다.
4. 지리
아르헨티나는 남아메리카 남부에 위치하며, 서쪽으로는 안데스산맥을 경계로 칠레와, 북쪽으로는 볼리비아 및 파라과이, 북동쪽으로는 브라질, 동쪽으로는 우루과이 및 남대서양, 남쪽으로는 드레이크 해협과 접한다. 국토 면적은 278.04 만 km2로 세계에서 8번째로 넓다. 이 외에도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제도, 사우스조지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 아르헨티나령 남극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4.1. 지형 및 지역 구분

아르헨티나의 지형은 매우 다양하다. 서부에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안데스산맥이 장엄하게 솟아 있으며, 이곳에 아메리카 대륙 최고봉인 아콩카과산(6959 m)이 위치한다. 안데스 산맥 동쪽으로는 건조한 쿠요 지역이 펼쳐져 있으며, 포도 재배와 와인 생산으로 유명하다. 북서부 지역은 평균 고도가 가장 높은 곳으로, 여러 평행 산맥과 비옥한 계곡이 교차한다.
국토 중앙부에는 광활하고 비옥한 평원인 팜파스가 자리 잡고 있다. 팜파스는 다시 습윤 팜파스와 건조 팜파스로 나뉘며, 아르헨티나 농업과 목축업의 중심지이다. 북동부에는 파라나강과 우루과이강 사이에 위치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있으며, 이곳은 아열대 기후로 이과수 폭포와 같은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남부의 파타고니아 지역은 콜로라도강 이남에서 티에라델푸에고섬까지 이어지는 광대한 고원 및 스텝 지대이다. 대부분 건조하고 바람이 강하지만, 서쪽 안데스 산맥 인근에는 숲과 호수가 발달해 있다. 최남단 티에라델푸에고섬은 한랭 습윤한 기후를 보인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낮은 지점은 산타크루스주의 산훌리안 대함몰지 내에 있는 라구나델카르본으로, 해수면 아래 -105 m이다. 이는 남반구와 서반구에서 가장 낮은 지점이기도 하다.
4.2. 수계


아르헨티나의 주요 강으로는 파라나강, 우루과이강, 파라과이강, 살라도강, 네그로강, 산타크루스강, 필코마요강, 베르메호강, 콜로라도강 등이 있다. 파라나강과 우루과이강은 합류하여 거대한 하구인 라플라타강을 형성하며 대서양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 강들은 아르헨티나해로 알려진 파타고니아 대륙붕 위의 넓고 얕은 바다로 유입된다. 아르헨티나 해역은 따뜻한 브라질 해류와 차가운 포클랜드 해류의 영향을 받는다.
파타고니아 지역에는 아르헨티노호, 비에드마호, 나우엘우아피호 등 큰 호수가 다수 존재하며, 티에라델푸에고섬에는 파냐노호가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큰 염호는 마르치키타호이다. 또한, 전국적으로 다수의 댐 건설로 인해 인공 저수지가 조성되어 있다.
4.3. 생물 다양성

아르헨티나는 세계적으로 생물 다양성이 매우 풍부한 국가 중 하나로, 15개의 대륙 생태 지역, 2개의 해양 생태 지역, 그리고 남극 지역을 포함하는 광대한 생태계 다양성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은 세계 최고 수준의 생물 종 다양성으로 이어져, 9,372종의 관다발 식물(세계 24위), 1,038종의 조류(세계 14위), 375종의 포유류(세계 12위), 338종의 파충류(세계 16위), 162종의 양서류(세계 19위)가 기록되어 있다.
팜파스 지역은 본래 나무가 거의 없는 초원이었으나, 미국플라타너스나 유칼립투스와 같은 외래종이 도로변이나 농장(에스탄시아)에 심어져 있다. 팜파스 고유의 유일한 교목성 식물은 상록수인 옴부이다. 팜파스의 표토는 주로 몰리솔로 이루어진 검은색의 비옥한 토양으로, 세계적으로 농업 생산성이 높은 지역 중 하나이다. 그러나 상업적 농업의 확장으로 인해 원래 생태계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아르헨티나에는 35개의 국립공원이 있으며, 이들은 북쪽 국경의 바리투 국립공원부터 남쪽 끝의 티에라델푸에고 국립공원까지 매우 다양한 지형과 생물군계를 포함한다. 국립공원 관리청(Administración de Parques Nacionales)이 이들 국립공원과 천연기념물, 국립 보호구를 관리한다. 2020년 기준, 아르헨티나의 산림 면적은 약 2,857만 헥타르로 전체 국토 면적의 약 10%를 차지한다.
4.4. 기후

아르헨티나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주요 기후 유형을 나타낸다: 따뜻한 습윤 아열대 기후, 온화한 습윤 아열대 기후, 사막 기후, 그리고 한랭 사막 기후. 이는 넓은 위도 범위, 고도 변화, 지형적 특징에 의해 결정된다. 인구 밀집 지역은 대체로 온대 기후이지만, 아르헨티나는 북쪽의 아열대에서 남쪽 끝의 극지방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기후를 보인다. 결과적으로 아열대 우림, 반건조 및 건조 지역, 팜파스의 온대 평원, 남부의 추운 아남극 등 다양한 생물 군계가 존재한다. 연평균 강수량은 파타고니아의 가장 건조한 지역에서는 150 mm에서 파타고니아 서부와 북동부 지역에서는 2000 mm 이상까지 다양하다. 연평균 기온은 남쪽 끝에서는 5 °C에서 북쪽에서는 25 °C까지 분포한다.
주요 바람으로는 파타고니아와 팜파스의 평원을 가로지르는 차가운 팜페로 바람이 있으며, 한랭 전선이 지나간 후에는 겨울 중후반에 북쪽에서 따뜻한 기류가 불어와 온화한 날씨를 만든다. 수데스타다는 보통 추운 기온을 완화시키지만 폭우, 거친 바다, 해안 홍수를 동반하며, 늦가을과 겨울에 중부 해안과 라플라타강 하구에서 가장 흔하게 발생한다. 존다 바람은 덥고 건조한 바람으로 쿠요와 중부 팜파스에 영향을 미친다. 안데스산맥에서 6000 m를 내려오면서 습기가 모두 제거된 존다 바람은 시속 120 km/h의 돌풍을 동반하며 몇 시간 동안 불 수 있어 산불을 유발하고 피해를 입힌다. 존다 바람이 부는 6월에서 11월 사이에는 고지대에서 눈보라(비엔토 블랑코)가 자주 발생한다.
아르헨티나의 기후 변화는 아르헨티나의 생활 조건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측된다. 강수 패턴과 기온 측면에서 아르헨티나의 기후는 변화하고 있다. 강수량 증가가 가장 두드러진 지역(1960년~2010년 기간)은 동부 지역이다. 강수량 증가는 북부 지역의 연간 강수량 변동성을 더 크게 만들어 장기간의 가뭄 위험을 높여 이 지역 농업에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4.5. 환경 문제
아르헨티나가 직면한 주요 환경 문제로는 부적절한 폐기물 관리로 인한 수질 및 토양 오염, 부실한 농업 관리로 인한 삼림 벌채와 사막화, 그리고 살충제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인한 생물 다양성 및 주민 건강 피해 등이 있다. 특히 농업 부문에서의 화학 물질 사용 증가는 환경 및 건강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다. 또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한 대기 오염 문제도 일부 대도시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기후 변화로 인한 극심한 기상 현상(가뭄, 홍수 등)의 빈도 증가 또한 중요한 환경 문제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대응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
5. 정치


아르헨티나는 대통령 중심제 연방 공화국이며, 대의 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정부는 국가 최고 법규인 헌법에 규정된 권력 분립 원칙에 따라 운영된다. 정부 소재지는 의회가 지정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이다. 참정권은 보편 선거, 평등 선거, 비밀 선거, 의무 투표의 원칙을 따른다. (2012년부터 16세 및 17세 청소년에게도 투표권이 부여되었으나 의무는 아니다.)
20세기에 아르헨티나는 상당한 정치적 혼란과 민주주의의 후퇴를 경험했다. 1930년부터 1976년까지 군부는 여섯 차례 정부를 전복시켰으며, 국가는 민주주의 시기(1912년~1930년, 1946년~1955년, 1973년~1976년)와 제한적 민주주의 및 군사 통치 시기를 번갈아 겪었다. 1983년에 시작된 민주화 이후 완전한 민주주의가 재건되었다. 아르헨티나의 민주주의는 2001년~2002년의 경제 위기를 견뎌내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1983년 이전의 체제나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민주주의보다 더 견고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V-Dem 민주주의 지수에 따르면, 2023년 아르헨티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두 번째로 선거 민주주의가 발달한 국가이다.
5.1. 정부 구조
연방 정부는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의 세 부문으로 구성된다.
입법부는 양원제인 국회로, 상원과 하원으로 이루어진다. 국회는 연방법 제정, 선전포고, 조약 승인, 재정권, 그리고 정부 구성원 탄핵 권한을 가진다. 하원은 국민을 대표하며, 임기 4년의 의원 257명으로 구성된다. 의석은 10년마다 인구에 비례하여 주별로 배분된다. 2014년 현재 10개 주는 5명의 하원의원을 가지며, 인구가 가장 많은 부에노스아이레스주는 70명의 의원을 가진다. 상원은 주를 대표하며, 임기 6년의 의원 72명으로 구성되고 각 주는 3석을 가진다. 상원 의석의 3분의 1은 2년마다 선출된다. 정당이 제시하는 후보의 최소 3분의 1은 여성이어야 한다.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은 군대의 최고통수권자이며, 법안이 법률로 제정되기 전에 거부할 수 있고(의회의 재의결 가능), 연방법과 정책을 관리하고 집행하는 내각 구성원과 기타 공무원을 임명한다.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 투표로 선출되며, 임기는 4년이고 연임은 한 번만 가능하다.
사법부는 대법원과 하급 연방 법원으로 구성되며, 법률을 해석하고 위헌으로 판단되는 법률을 무효화한다. 사법부는 행정부와 입법부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대법원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의 승인을 받은 7명의 종신직 대법관으로 구성된다. 하급 법원 판사는 국가사법위원회(판사, 변호사, 연구원, 행정부 및 입법부 대표로 구성된 사무국)의 제안을 받아 대통령이 상원의 승인을 거쳐 임명한다.
5.2. 행정 구역

아르헨티나는 23개의 주와 1개의 자치시인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구성된 연방 국가이다. 주는 행정 목적으로 데파르타멘토(주를 구성하는 하위 행정 단위)와 무니시피오(지방 자치체)로 나뉘며, 예외적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주는 파르티도로 나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시는 코무나로 나뉜다.
주는 연방 정부에 위임하지 않은 모든 권한을 보유하며, 대의 공화제여야 하고 연방 헌법에 위배되지 않아야 한다. 이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자치적이다. 즉, 자체 헌법을 제정하고, 지방 정부를 자유롭게 조직하며, 천연자원과 재정 자원을 소유하고 관리한다. 일부 주는 양원제 의회를, 다른 주는 단원제 의회를 가지고 있다.
라팜파주와 차코주는 1951년에 주가 되었다. 미시오네스주는 1953년에, 포르모사주, 네우켄주, 리오네그로주, 추부트주, 산타크루스주는 1955년에 주가 되었다. 마지막 국가 직할령이었던 티에라델푸에고는 1990년에 티에라델푸에고주가 되었다. 이 주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지만, 두 부분은 아르헨티나 주권 하에 있지 않아 명목상이다. 첫 번째는 티에라델푸에고의 아르헨티나 부분이다. 두 번째는 아르헨티나가 영유권을 주장하는 남극 지역으로, 영국과 칠레가 주장하는 지역과 겹친다. 세 번째는 포클랜드 제도와 사우스조지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라는 두 개의 분쟁 중인 영국 해외 영토로 구성된다.
5.3. 대외 관계

외교 정책은 대통령에게 책임을 지는 외교국제통상종교부에서 담당한다. 아르헨티나는 G15 및 G20 주요 경제국 중 하나이며, 유엔,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WTO), 미주 기구(OAS)의 창립 회원국이다.
2012년 아르헨티나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비상임 이사국으로 재선출되어 2년간 활동했으며, 아이티, 키프로스, 서사하라, 중동 등지에서 주요 평화 유지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중견국으로 평가받는다.
저명한 라틴 아메리카 및 남부 원뿔 지역의 지역 강국인 아르헨티나는 이베로-아메리카 국가 기구(OEI)와 라틴 아메리카·카리브해 국가 공동체(CELAC)를 공동 창설했다. 또한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베네수엘라를 파트너로 하는 메르코수르 블록의 창립 회원국이다. 2002년 이후 아르헨티나는 라틴 아메리카 통합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강조해 왔으며, 초국가적 입법 기능을 일부 가진 이 블록은 아르헨티나의 최우선 국제 협력 대상이다.
아르헨티나는 1904년부터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적인 국가 주둔을 유지하고 있는 아르헨티나령 남극의 96.56 만 km2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다. 이는 칠레와 영국의 주장과 중첩되지만, 이러한 모든 주장은 아르헨티나가 창립 서명국이자 영구 협의 회원국이며 남극 조약 사무국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기반을 둔 1961년 남극 조약의 규정에 따른다.
아르헨티나는 영국이 해외 영토로 관리하는 포클랜드 제도와 사우스조지아 및 사우스샌드위치 제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다. 아르헨티나는 국제형사재판소 로마 규정의 당사국이다. 아르헨티나는 1998년부터 미국의 주요 비NATO 동맹국이며, 2022년 1월부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후보국이다.
5.4. 군사


대통령은 아르헨티나군의 최고사령관 직위를 가지며, 이는 국방과 내부 안보 시스템 간의 엄격한 분리를 부과하는 법적 프레임워크의 일부이다. 연방 정부의 배타적 책임인 국가 방위 시스템은 국방부가 조정하며, 육군, 해군, 공군으로 구성된다. 의회의 국방위원회를 통해 의회의 지배와 감시를 받는 이 시스템은 합법적인 자위라는 본질적인 원칙에 따라 조직된다. 즉, 국민의 자유, 국가 주권, 영토 보전을 보장하기 위해 외부의 군사적 침략을 격퇴하는 것이다. 부차적인 임무로는 유엔의 틀 내에서 다국적 작전에 참여하고, 내부 지원 임무에 참여하며, 우방국을 지원하고, 하위 지역 방위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 등이 있다.
병역은 자원제로, 입대 연령은 18세에서 24세 사이이며 징병제는 없다. 아르헨티나의 국방은 역사적으로 이 지역에서 가장 잘 갖춰진 국방력 중 하나였으며, 자체 무기 연구 시설, 조선소, 군수품, 탱크 및 항공기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포클랜드 전쟁 패배 이후 실제 군비 지출은 꾸준히 감소했으며, 2011년 국방 예산은 GDP의 약 0.74%로 역사적 최저 수준이었고, 이는 라틴 아메리카 평균보다 낮았다. 국방 예산 자체 내에서도 훈련 및 기본 유지 보수 자금이 크게 삭감되었으며, 이는 2017년 아르헨티나 잠수함 산후안호의 사고로 인한 손실에 기여한 요인이었다. 그 결과 아르헨티나 군사력은 꾸준히 약화되었으며, 일부에서는 2010년대 말까지 아르헨티나가 더 이상 유능한 군사 강국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내부 안보 시스템은 연방 정부와 참여 주 정부가 공동으로 관리한다. 연방 차원에서는 내무부, 국방부, 사법부가 조정하고 의회가 감시한다. 이는 연방경찰, 해안경비대 임무를 수행하는 해군현, 국경수비대 임무를 수행하는 국가헌병대, 그리고 공항경찰에 의해 시행된다. 주 차원에서는 각 주의 내부 안보 부처가 조정하고 지방 경찰 기관이 시행한다.
아르헨티나는 1991년 걸프 전쟁에 유엔의 위임 하에 군함과 수송기를 파견한 유일한 남아메리카 국가였으며, 크로아티아/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UNPROFOR, 폰세카만, 키프로스의 UNFICYP(육군 및 해병대 병력과 함께 1994년부터 공군이 유엔 항공 파견대를 제공), 아이티의 MINUSTAH 등 여러 지역에서 평화 유지 노력에 계속 참여해 왔다. 아르헨티나는 코소보에서 SFOR(이후 EUFOR) 작전 중 병력을 유지한 유일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로, 아르헨티나군의 공병이 이탈리아 여단에 배속되어 있다.
2007년, 헬리콥터, 보트, 정수 시설을 포함한 아르헨티나 파견대가 수십 년 만의 최악의 홍수에 맞서 볼리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2010년에는 각각의 지진 이후 아이티와 칠레 인도적 지원 활동에도 군대가 참여했다.
6. 경제


풍부한 천연자원, 높은 문해율의 인구, 다각화된 산업 기반, 수출 지향적인 농업 부문을 바탕으로 아르헨티나 경제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세 번째로 크며, 남아메리카에서는 두 번째로 크다.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초인 1913년에 1인당 GDP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였다. 아르헨티나는 인간 개발 지수에서 "매우 높음" 등급을 받았으며, 1인당 명목 GDP는 66위로, 상당한 내수 시장 규모와 첨단 기술 부문의 점유율 증가를 보이고 있다. 중간 신흥 경제국이자 세계 최고의 개발도상국 중 하나로서 G20 회원국이다.
아르헨티나는 세계 최대의 마테차 생산국이며(국내 마테 소비량이 많기 때문), 콩, 옥수수, 해바라기씨, 레몬, 배의 세계 5대 생산국 중 하나이다. 또한 보리, 포도, 아티초크, 담배, 목화의 세계 10대 생산국 중 하나이며, 밀, 사탕수수, 수수, 자몽의 세계 15대 생산국 중 하나이다. 남아메리카에서는 밀, 해바라기씨, 보리, 레몬, 배의 최대 생산국이다. 포도주의 경우, 아르헨티나는 일반적으로 세계 10대 생산국 안에 든다. 아르헨티나는 전통적인 육류 수출국이기도 하며, 2019년에는 쇠고기 생산량 세계 4위(300만 톤, 미국, 브라질, 중국에 이어)를 기록했고, 꿀 생산량 세계 4위, 양모 생산량 세계 10위를 차지했다.

아르헨티나의 광업은 다른 나라에 비해 덜 두드러지지만, 리튬 생산량 세계 4위, 은 생산량 세계 11위, 금 생산량 세계 17위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천연가스 생산에서도 뛰어나 남아메리카 최대 생산국이자 세계 18위 생산국이다. 아르헨티나는 바카 무에르타 유전의 자원 추출 기술 및 재정적 한계로 인한 활용 부족에도 불구하고 하루 평균 50만 배럴의 석유를 생산한다.

2012년 기준, 제조업은 GDP의 20.3%를 차지하며 국가 경제에서 가장 큰 부문이었다. 아르헨티나 농업과 잘 통합되어 산업 수출의 절반이 농촌에서 비롯된다. 2011년 생산 성장률 6.5%를 기록한 다각화된 제조업 부문은 꾸준히 성장하는 공업 단지 네트워크(2013년 기준 314개)에 기반을 두고 있다. 2012년 기준 주요 부문(물량 기준)은 식품 가공, 음료 및 담배 제품, 자동차 및 자동차 부품, 섬유 및 가죽, 정유 제품 및 바이오디젤, 화학 물질 및 의약품, 철강, 알루미늄 및 철, 산업 및 농업 기계, 가전제품 및 가구, 플라스틱 및 타이어, 유리 및 시멘트, 음반 및 인쇄 매체 등이다. 또한 아르헨티나는 오랫동안 세계 5대 와인 생산국 중 하나였다.
수십 년 동안 아르헨티나 경제의 약점이었던 높은 인플레이션이 다시 한번 문제가 되었으며, 2017년 연간 인플레이션율은 24.8%에 달했다. 2023년 인플레이션은 102.5%에 이르러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플레이션율을 기록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2023년 기준 아르헨티나 인구의 약 43%가 빈곤선 이하로 생활하고 있다. 이를 억제하고 페소화를 지지하기 위해 정부는 외화 통제를 시행했다. 소득 분배는 2002년 이후 개선되었지만 "중간"으로 분류되며 여전히 상당히 불평등하다. 2024년 1월, 아르헨티나의 빈곤율은 57.4%에 달해 2004년 이후 가장 높은 빈곤율을 기록했다.
아르헨티나는 2017년 국제투명성기구의 부패 인식 지수에서 180개국 중 85위를 차지하여 2014년 순위보다 22계단 상승했다. 아르헨티나는 2016년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 당선 이후 소위 벌처 펀드와의 오랜 채무불이행 위기를 해결하여 10년 만에 처음으로 자본 시장에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2020년 5월 22일 채권자들에게 만기일까지 5억 달러를 지불하지 못해 채무불이행 상태가 되었다. 660억 달러 규모의 부채 구조조정을 위한 협상은 계속되었다.
아르헨티나의 빈곤율은 2023년 하반기 말 41.7%였다. 그러나 2024년 11월, 아르헨티나의 월간 인플레이션율은 2.4%로 둔화되어 4년여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연간 인플레이션율은 2024년 말 100%에 가까울 것으로 예상되었다. 2025년에는 아르헨티나 경제의 유리한 결과와 정상화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2023년 211%였던 연간 인플레이션율은 2025년 30% 미만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경제 활동 또한 2024년 초 심각한 경기 침체 이후 회복되기 시작했다. 경제는 2025년에 4% 이상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6.1. 관광

아르헨티나는 2013년 557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여 남아메리카에서 최고의 관광 목적지이자 멕시코에 이어 라틴 아메리카에서 두 번째 순위를 기록했다. 해외 관광객 수입은 2013년 44.10 억 USD에 달했으며, 이는 2012년의 48.90 억 USD에서 감소한 수치이다.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도시이다. 아르헨티나에는 30개의 국립공원이 있으며, 그중 다수가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6.2. 교통 및 기반 시설

2004년 기준, 부에노스아이레스, 우수아이아를 제외한 모든 주도, 그리고 모든 중소도시는 총 23.14 만 km의 도로망 중 6.94 만 km의 포장도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2021년 기준, 아르헨티나에는 약 2800 km의 이중 차도가 있으며, 대부분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출발하여 로사리오, 코르도바, 산타페, 마르델플라타, 파소데로스리브레스(브라질 국경)와 같은 도시들과 연결된다. 또한 멘도사에서 수도로 향하는 이중 차도와 코르도바와 산타페 사이의 이중 차도 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도로 기반 시설은 여전히 미흡하며, 철도 시스템의 악화로 인해 급증하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철도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으며, 2008년 기준 운영 노선은 3.70 만 km이고, 전체 네트워크는 거의 4.80 만 km에 달한다. 이 시스템은 23개 주와 부에노스아이레스시를 모두 연결하며 모든 인접 국가와 연결된다. 사용 중인 궤간은 호환되지 않는 4가지 종류가 있어 사실상 모든 지역 간 화물 운송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통과해야 한다. 이 시스템은 1940년대 이후 쇠퇴해 왔으며, 정기적으로 막대한 예산 적자를 기록하여 1991년에는 1973년보다 1,400배 적은 물품을 운송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이 시스템은 통근 철도 노선과 장거리 노선 모두에서 국가로부터 더 많은 투자를 받아 차량과 기반 시설을 개선하고 있다. 2015년 4월, 아르헨티나 상원은 압도적인 다수결로 아르헨티나 철도를 재창설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사실상 국가 철도를 재국유화했으며, 이는 정치 스펙트럼 양쪽의 모든 주요 정당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2012년 기준, 아르헨티나에는 약 1.10 만 km의 수로가 있으며, 주로 라플라타강, 파라나강, 파라과이강, 우루과이강으로 구성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라테, 캄파나, 로사리오, 산로렌소, 산타페, 바랑케라스, 산니콜라스데로스아로요스가 주요 하항이다. 가장 큰 해항으로는 라플라타-엔세나다, 바이아블랑카, 마르델플라타, 케켄-네코체아, 코모도로리바다비아, 푸에르토데세아도, 푸에르토마드린, 우수아이아, 산안토니오오에스테 등이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항구였으나, 1990년대 이후에는 산타페주의 파라나강 연안 67 km에 걸쳐 있는 상류 항만 지역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는 17개의 항구가 있으며, 2013년 기준 전체 수출의 50%를 차지했다.
2013년 기준, 아르헨티나에는 1,000개가 넘는 공항 중 포장 활주로가 있는 공항은 161개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에서 약 35 km 떨어진 에세이사 국제공항은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큰 공항이며, 미시오네스주의 카타라타스델이과수 국제공항과 멘도사주의 엘플루메리요 국제공항이 그 뒤를 잇는다. 부에노스아이레스시에 있는 아에로파르케 호르헤 뉴베리는 가장 중요한 국내 공항이다.
6.3. 에너지
2020년 아르헨티나 전력의 60% 이상이 천연가스, 석유, 석탄과 같은 비재생 에너지원에서 나왔다. 27%는 수력 발전, 7.3%는 풍력 및 태양 에너지, 4.4%는 원자력 에너지에서 나왔다. 2021년 말 아르헨티나는 설치된 수력 발전 용량(11.3 GW)에서 세계 21위, 설치된 풍력 에너지 용량(3.2 GW)에서 세계 26위, 설치된 태양 에너지 용량(1.0 GW)에서 세계 43위를 차지했다.
파타고니아 지역의 풍력 잠재력은 막대한 것으로 간주되며, 이 지역이 브라질과 같은 국가의 소비를 단독으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전기를 공급할 수 있다는 추정이 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풍부한 풍력 자원을 가진 농촌 지역에서 인구 밀집 지역으로 전기를 전송하는 데 기반 시설 문제를 겪고 있다.
1974년 아르헨티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상업용 원자력 발전소인 아투차 1호기를 가동했다. 이 발전소에 사용된 아르헨티나산 부품은 전체의 10%에 불과했지만, 사용하는 핵연료는 전적으로 국내에서 생산된다. 이후의 원자력 발전소들은 아르헨티나산 부품의 비율이 더 높아졌다. 1983년에 완공된 엠발세 발전소는 30%, 2011년 아투차 2호기 원자로는 40%의 국산 부품을 사용했다.
6.4. 과학 기술


아르헨티나 출신 과학자들은 세 차례 노벨상을 수상했다.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수상자인 베르나르도 우사이는 동물의 포도당 조절에서 뇌하수체 호르몬의 역할을 발견하여 1947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루이스 페데리코 를루아르는 유기체가 포도당을 글리코겐으로 전환하여 에너지를 저장하는 방식과 탄수화물 물질대사에 필수적인 화합물을 발견하여 1970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세사르 밀스테인은 항체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하여 1984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아르헨티나의 연구는 심장 질환과 여러 형태의 암 치료법 개발로 이어졌다. 도밍고 리오타는 1969년 인간에게 성공적으로 이식된 최초의 인공 심장을 설계하고 개발했다. 레네 파바로로는 관상동맥우회로이식술 기술을 개발하고 세계 최초로 수술을 시행했다.
아르헨티나의 핵 프로그램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1957년 아르헨티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자체 기술로 연구용 원자로인 RA-1 엔리코 페르미를 설계하고 건설했다. 해외에서 기술을 구매하는 대신 자체 핵 관련 기술 개발에 의존하는 것은 민간 국립원자력위원회(CNEA)가 수행한 아르헨티나 핵 프로그램의 일관된 특징이었다. 아르헨티나 기술로 건설된 핵 시설은 페루, 알제리, 호주, 이집트에 건설되었다. 1983년, 아르헨티나는 핵무기 조립에 필요한 주요 단계인 무기급 우라늄 생산 능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이후 아르헨티나는 핵 에너지를 평화적 목적으로만 사용하겠다고 약속했다. 국제 원자력 기구(IAEA) 이사회 회원국으로서 아르헨티나는 핵 비확산 노력을 강력히 지지해 왔으며, 세계 핵 안보에 매우 헌신적이다.
겸손한 예산과 수많은 좌절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의 학계와 과학계는 루이스 아고테가 최초의 안전하고 효과적인 수혈 방법을 고안하고 레네 파바로로가 관상동맥우회로이식술 개선의 선구자였던 1900년대 초부터 국제적인 존경을 받아왔다. 아르헨티나 과학자들은 여전히 나노기술, 물리학, 컴퓨터 과학, 분자생물학, 종양학, 생태학, 심장학 분야에서 최첨단을 달리고 있다. 아르헨티나계 미국인 과학자인 후안 말다세나는 끈 이론 분야의 선도적인 인물이다.
우주 연구 또한 아르헨티나에서 점점 더 활발해지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제작한 위성으로는 LUSAT-1 (1990년), Víctor-1 (1996년), PEHUENSAT-1 (2007년), 그리고 아르헨티나 우주국 CONAE가 개발한 SAC 시리즈 위성들이 있다. 아르헨티나는 자체 위성 프로그램, 원자력 발전소 설계(4세대), 그리고 여러 국가에 원자로를 공급하는 공기업 INVAP을 보유하고 있다. 1991년에 설립된 CONAE는 이후 두 개의 위성을 성공적으로 발사했으며, 2009년 6월에는 세계 최고의 우주선 관측소인 피에르 오제 관측소에 직경 35m 안테나 및 기타 임무 지원 시설을 설치하기로 유럽 우주국(ESA)과 합의했다. 이 시설은 수많은 ESA 우주 탐사선뿐만 아니라 CONAE 자체 국내 연구 프로젝트에도 기여할 것이다. 20개의 잠재적 부지 중에서 선택되었으며 세계에서 단 3개뿐인 ESA 시설 중 하나인 새 안테나는 ESA가 24시간 내내 임무 범위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삼각 측량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2024년 세계 혁신 지수에서 76위를 차지했다.
7. 사회
아르헨티나 사회는 역사적으로 유럽 이민의 영향을 크게 받아 형성되었으며, 인구 구성, 언어, 종교, 교육 시스템 등 다양한 측면에서 그 특징이 나타난다. 높은 도시화율과 함께 현대적인 사회 문제들도 공존하고 있다.
7.1. 인구
2022년 아르헨티나 통계청(INDEC)이 실시한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의 총인구는 46,044,703명으로, 2010년의 40,117,096명에서 증가했다. 아르헨티나는 남아메리카에서 총인구 기준으로 세 번째,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네 번째, 세계적으로는 33번째에 해당한다. 인구 밀도는 제곱킬로미터당 15명으로 세계 평균인 50명보다 훨씬 낮다. 2010년 인구 증가율은 연간 약 1.03%였으며, 출생률은 인구 1,000명당 17.7명, 사망률은 인구 1,000명당 7.4명이었다. 2010년 이후 순 이주율은 0 미만에서 연간 인구 1,000명당 최대 4명의 이민자까지 다양했다.
아르헨티나는 고령화되고 인구 증가 속도가 느려지는 인구 변천을 겪고 있다. 15세 미만 인구 비율은 25.6%로 세계 평균인 28%보다 약간 낮으며, 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10.8%로 비교적 높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우루과이에 이어 두 번째로 높으며, 현재 7%인 세계 평균보다 훨씬 높다. 아르헨티나는 영아 사망률이 비교적 낮다. 여성 1인당 출생아 수 2.3명은 1895년 여성 1인당 출생아 수 7.0명보다는 현저히 낮지만, 문화적, 인구학적으로 유사한 스페인이나 이탈리아보다는 여전히 거의 두 배 높다. 중위 연령은 31.9세이며 출생 시 기대수명은 77.14세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태도는 아르헨티나 내에서 대체로 긍정적이다. 2010년 아르헨티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두 번째로, 세계에서는 열 번째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다.
7.2. 민족 구성

아르헨티나는 이민 국가로 간주되며, 국민들은 종종 자국을 '인종의 도가니'(crisol de razas크리솔 데 라사스스페인어)라고 부른다. 2010년 아르헨티나 유전학자 다니엘 코라치가 21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인의 평균 유전적 조상은 유럽계 79%(주로 이탈리아계와 스페인계), 원주민 18%, 아프리카계 4.3%로 나타났으며, 조사 대상자의 63.6%가 최소 한 명 이상의 원주민 조상을 두고 있었다. 대다수의 아르헨티나인은 주로 이탈리아계와 스페인계를 비롯한 여러 유럽 민족 집단의 후손이며, 약 2,500만 명(인구의 거의 60%)이 부분적으로 이탈리아계 혈통을 가지고 있다.
아르헨티나에는 주목할 만한 아시아계 인구도 거주하고 있으며, 대다수는 서아시아인(레바논계 및 시리아계) 또는 동아시아인(중국계, 한국계, 일본계)의 후손이다. 일본계는 약 18만 명에 달한다. 아랍계 아르헨티나인(대부분 레바논 또는 시리아 출신)의 총인구는 130만에서 350만 명으로 추산된다. 많은 사람들이 19세기(특히 후반)와 20세기 전반에 걸쳐 다양한 아시아 국가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대부분의 아랍계 아르헨티나인은 가톨릭교회(라틴 교회 및 동방 가톨릭교회 포함) 또는 동방 정교회에 속한다. 소수는 이슬람교도이다. 아르헨티나에는 18만 명의 알라위파 신도가 있다.
1970년대부터 이민은 주로 볼리비아, 파라과이, 페루에서 왔으며, 도미니카 공화국, 에콰도르, 루마니아에서는 더 적은 수가 유입되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약 75만 명의 주민이 공식 서류가 없는 것으로 추정하고, 불법 이민자들이 신분을 신고하면 2년간의 거주 비자를 발급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하여 현재까지 67만 건 이상의 신청이 처리되었다. 2023년 7월 기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18,500명 이상의 러시아인이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7.3. 언어

사실상의 공식 언어는 스페인어이며, 거의 모든 아르헨티나인이 사용한다. 아르헨티나는 대명사 'tú투스페인어'(너) 대신 'vos보스스페인어'를 사용하며, 이에 따라 대체 동사 형태를 사용하는 보세오를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가장 큰 스페인어권 사회이다. 아르헨티나의 광범위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지역에 따라 스페인어의 변이가 강하게 나타나지만, 지배적인 방언은 주로 팜파스와 파타고니아 지역에서 사용되며 나폴리어와 유사한 억양을 가진 리오플라텐세 스페인어이다. 이탈리아 및 기타 유럽 이민자들은 지역 속어인 룬파르도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구어체 어휘에도 스며들었다.
아르헨티나 인구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는 제2 언어는 다음과 같다:
- 영어 (280만 명 사용)
- 이탈리아어 (150만 명 사용). 많은 노년층은 19세기 말 이탈리아 이민자들에 의해 형성된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의 마카로닉 언어인 코콜리체를 사용하기도 한다.
- 아랍어 (특히 북부 레반트 방언, 100만 명 사용)
- 표준 독일어 (20만 명 사용). 이는 스페인어와 독일어가 혼합된 벨그라노도이치를 탄생시켰다.
- 과라니어 (20만 명 사용, 주로 코리엔테스주와 미시오네스주). 코리엔테스주에서는 공식 언어이다.
- 카탈루냐어 (17만 4천 명 사용)
- 케추아어 (6만 5천 명 사용, 주로 북서부)
- 위치어 (5만 3천 7백 명 사용, 주로 차코주). 차코주에서는 콤어, 모코이트어와 함께 법적 공식 언어이다.
- 블락스롬어 (5만 2천 명 사용)
- 알바니아어 (4만 명 사용)
- 일본어 (3만 2천 명 사용)
- 아이마라어 (3만 명 사용, 주로 북서부)
- 우크라이나어 (2만 7천 명 사용)
7.4. 종교

기독교는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큰 종교이다.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공식적이거나 국가적인 신앙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로마 가톨릭교에 우선적인 지위를 부여한다. (실질적으로 이 특권적 지위는 면세 학교 보조금과 라디오 방송 주파수 허가 우선권에 해당한다.)
2008년 CONICET 여론 조사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인의 76.5%가 가톨릭 신자, 11.3%가 불가지론자 및 무신론자, 9%가 복음주의 개신교인, 1.2%가 여호와의 증인, 0.9%가 모르몬교인이었으며, 1.2%는 이슬람교, 유대교, 불교를 포함한 다른 종교를 따랐다. 이러한 수치는 최근 몇 년 동안 상당히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2017년에 기록된 데이터에 따르면 가톨릭 신자는 인구의 66%를 차지하여 9년 동안 10.5% 감소했으며, 국내 무종교인은 인구의 21%로 같은 기간 동안 거의 두 배 증가했다.
아르헨티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무슬림 공동체와 유대인 공동체 중 하나가 있으며, 후자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인구가 많다. 아르헨티나는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 연맹 회원국이다.
아르헨티나인들은 종교적 신념에 대한 높은 개인화와 탈제도화를 보인다. 23.8%는 항상 종교 예배에 참석한다고 주장하고, 49.1%는 거의 참석하지 않으며, 26.8%는 전혀 참석하지 않는다.
2013년 3월 13일,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 대주교)이 로마 주교이자 가톨릭교회의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아메리카 대륙 또는 남반구 출신의 첫 번째 교황이 되었다. 그는 741년 교황 그레고리오 3세(시리아 출신) 선출 이후 유럽 외부에서 태어난 첫 번째 교황이다.
7.5. 보건

의료 서비스는 고용주 및 노동조합 후원 계획(Obras Sociales), 정부 보험 계획, 공립 병원 및 진료소, 그리고 민간 건강 보험 계획의 조합을 통해 제공된다. 의료 협동조합은 300개가 넘으며(그중 200개는 노동조합과 관련됨) 인구의 절반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국가 INSSJP(일반적으로 PAMI로 알려짐)는 거의 모든 500만 명의 노인을 대상으로 한다.
병원 병상 수는 153,000개가 넘고, 의사는 121,000명, 치과의사는 37,000명으로, 이는 선진국과 비슷한 비율이다. 의료 서비스에 대한 비교적 높은 접근성은 역사적으로 선진국과 유사한 사망 패턴 및 추세를 가져왔다. 1953년부터 2005년까지 심혈관계 질환으로 인한 사망은 전체 사망의 20%에서 23%로, 종양으로 인한 사망은 14%에서 20%로, 호흡기 질환은 7%에서 14%로, 소화기계 질환(비감염성)은 7%에서 11%로 증가했으며, 뇌졸중은 꾸준히 7%, 부상은 6%, 감염병은 4%를 차지했다. 노쇠와 관련된 원인이 나머지 사망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영아 사망은 1953년 전체 사망의 19%에서 2005년 3%로 감소했다.
의료 서비스의 이용 가능성은 또한 1948년 출생아 1,000명당 70명이었던 영아 사망률을 2009년 12.1명으로 낮추었고, 출생 시 기대수명을 60세에서 76세로 높였다. 이러한 수치는 세계 평균과 비교할 때 양호하지만 선진국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며, 2006년 아르헨티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4위를 차지했다.
7.6. 교육

아르헨티나 교육 시스템은 네 단계로 구성된다. 생후 45일부터 5세까지의 아동을 위한 초기 단계가 있으며, 마지막 두 해는 의무 교육이다. 초등 또는 초등학교 의무 교육은 6년 또는 7년 동안 지속된다. (교육 기간은 관할 지역에 따라 다름) 2010년 기준, 문해율은 98.07%였다. 중등 또는 고등학교 의무 교육은 5년 또는 6년 동안 지속된다. 2010년 기준, 20세 이상 인구의 38.5%가 중등 교육을 마쳤다. 고등 교육은 3차, 대학 및 대학원 하위 단계로 나뉜다. 2013년 기준, 전국에 47개의 국립 공립 대학교와 46개의 사립 대학교가 있었다. 2010년 기준, 20세 이상 인구의 7.1%가 대학을 졸업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코르도바 대학교, 라플라타 대학교, 로사리오 대학교, 국립 공과 대학교는 가장 중요한 대학 중 일부이다. 아르헨티나 국가는 모든 수준에 대해 보편적이고 세속적이며 무상인 공교육을 보장한다. (고등 교육의 대학원 하위 단계는 일반적으로 유료이다.) 교육 감독 책임은 연방 및 개별 주 정부 차원에서 조직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모든 교육 단계에서 사립 부문의 역할이 커졌다.
7.7. 도시화
아르헨티나는 인구의 92%가 도시에 거주하는 고도로 도시화된 국가이다. 10대 대도시권에 인구의 절반이 거주한다. 약 300만 명이 부에노스아이레스시에 거주하며, 그란 부에노스아이레스 대도시권을 포함하면 총 약 1,300만 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지역 중 하나이다. 코르도바와 로사리오 대도시권은 각각 약 130만 명의 주민이 거주한다. 멘도사, 산미겔데투쿠만, 라플라타, 마르델플라타, 살타, 산타페는 각각 최소 50만 명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인구는 불균등하게 분포되어 있다. 약 60%가 전체 면적의 21%를 차지하는 팜파스 지역에 거주하며, 여기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주에 1,500만 명이 포함된다. 코르도바주와 산타페주,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시는 각각 300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멘도사주, 투쿠만주, 엔트레리오스주, 살타주, 차코주, 코리엔테스주, 미시오네스주 등 7개 주는 각각 100만 명 이상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제곱킬로미터당 64.3명으로 투쿠만주는 세계 평균보다 인구 밀도가 높은 유일한 아르헨티나 주이다. 반대로 남부 산타크루스주는 제곱킬로미터당 약 1.1명이다.
순위 | 도시 | 주 | 인구 | 대표 이미지 |
---|---|---|---|---|
1 | 부에노스아이레스 | 자치시 | 3,003,000 | ![]() |
2 | 코르도바 | 코르도바주 | 1,577,000 | ![]() |
3 | 로사리오 | 산타페주 | 1,333,000 | ![]() |
4 | 멘도사 | 멘도사주 | 1,036,000 | ![]() |
5 | 산미겔데투쿠만 | 투쿠만주 | 909,000 | |
6 | 라플라타 | 부에노스아이레스주 | 909,000 | |
7 | 마르델플라타 | 부에노스아이레스주 | 651,000 | |
8 | 살타 | 살타주 | 647,000 | |
9 | 산후안 | 산후안주 | 542,000 | |
10 | 산타페 | 산타페주 | 540,000 | |
11 | 레시스텐시아 | 차코주 | 418,000 | |
12 | 산티아고델에스테로 | 산티아고델에스테로주 | 407,000 | |
13 | 코리엔테스 | 코리엔테스주 | 384,000 | |
14 | 포사다스 | 미시오네스주 | 378,000 | |
15 | 산살바도르데후후이 | 후후이주 | 351,000 | |
16 | 바이아블랑카 | 부에노스아이레스주 | 317,000 | |
17 | 네우켄 | 네우켄주 | 313,000 | |
18 | 파라나 | 엔트레리오스주 | 283,000 | |
19 | 포르모사 | 포르모사주 | 256,000 | |
20 | 코모도로리바다비아 | 추부트주 | 243,000 |
8. 문화

아르헨티나는 유럽의 영향이 두드러지는 다문화 국가이다. 현대 아르헨티나 문화는 주로 이탈리아, 스페인 및 프랑스, 러시아, 영국 등 기타 유럽 국가로부터의 이민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다. 아르헨티나 도시들은 유럽계 후손들의 우세와 패션, 건축, 디자인에서 미국 및 유럽 스타일을 의식적으로 모방하는 것이 특징이다. 모든 대도시 중심지에는 박물관, 영화관, 갤러리가 풍부하며, 문학 바 또는 다양한 장르의 라이브 음악을 제공하는 바와 같은 전통적인 시설도 많다. 아메리카 원주민 및 아프리카의 영향 요소는 특히 음악과 미술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적게 나타난다. 또 다른 큰 영향은 가우초와 그들의 전통적인 자립적인 시골 생활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아메리카 원주민 전통은 일반적인 문화 환경에 흡수되었다.
아르헨티나 작가 에르네스토 사바토는 아르헨티나 문화의 본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성찰했다.
{{인용문|이민으로 인해 라플라타 분지에서 원시 히스패닉 아메리카 현실이 파편화되면서, 그곳 주민들은 그러한 조건의 모든 위험과 동시에 모든 이점을 안고 다소 이중적인 존재가 되었다. 우리의 유럽적 뿌리 때문에 우리는 국가를 구세계의 지속적인 가치와 깊이 연결한다. 아메리카인이라는 조건 때문에 우리는 내륙의 민속과 우리를 통합하는 오래된 카스티야어를 통해 대륙의 나머지 지역과 연결되며, 산 마르틴과 볼리바르가 한때 상상했던 위대한 조국의 소명을 어느 정도 느낀다.|에르네스토 사바토|국가적 기로에 선 문화 (1976)}}
8.1. 문학

아르헨티나의 풍부한 문학사는 1550년경 시작되었지만, 에스테반 에체베리아의 엘 마타데로와 함께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이 작품은 19세기 아르헨티나 서사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낭만주의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호세 에르난데스의 민중적이고 연방주의적인 서사시 마르틴 피에로와 사르미엔토의 걸작 파쿤도의 엘리트적이고 교양 있는 담론 사이의 이념적 분열로 나뉘었다.
모더니즘 운동은 레오폴도 루고네스와 시인 알폰시나 스토르니와 같은 대표 작가들을 포함하며 20세기로 이어졌고, 이후 리카르도 귀랄데스의 돈 세군도 솜브라를 중요한 기준으로 하는 전위주의가 뒤따랐다.
아르헨티나의 가장 찬사를 받는 작가이자 문학사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은유와 철학적 논쟁에서 현대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발견했으며, 그의 영향력은 전 세계 작가들에게 미쳤다. 단편 소설 픽션들과 알레프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일부이다. 그는 가장 찬사를 받는 SF 소설 중 하나인 모렐의 발명을 쓴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친구이자 협력자였다. 라틴아메리카 붐의 주요 멤버이자 20세기 문학의 주요 인물인 훌리오 코르타사르는 아메리카와 유럽의 한 세대 전체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아르헨티나 문학사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은 소위 플로리다 그룹과 보에도 그룹 간의 사회적, 문학적 변증법이다. 플로리다 그룹은 회원들이 플로리다 거리의 리치먼드 카페테리아에서 만나 마르틴 피에로 잡지에 작품을 발표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렸으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레오폴도 마레찰, 안토니오 베르니(화가) 등이 속했다. 반면, 로베르토 아를트, 세사르 티엠포, 오메로 만시(탱고 작곡가) 등의 보에도 그룹은 일본 카페에서 만나 보에도 가에 위치한 클라리다드 출판사에서 작품을 출판했다.
그 외 높이 평가받는 아르헨티나 작가, 시인, 수필가로는 에스타니슬라오 델 캄포, 에우헤니오 캄바세레스, 페드로 보니파시오 팔라시오스, 우고 와스트, 베니토 린치, 엔리케 반치스, 올리베리오 히론도, 에세키엘 마르티네스 에스트라다, 빅토리아 오캄포, 레오폴도 마레찰, 실비나 오캄포, 로베르토 아를트, 에두아르도 마예아, 마누엘 무히카 라이네스, 에르네스토 사바토, 실비나 불리치, 로돌포 왈시, 마리아 엘레나 왈시, 토마스 엘로이 마르티네스, 마누엘 푸익, 알레한드라 피사르니크, 오스발도 소리아노 등이 있다.
8.2. 음악

유럽과 아프리카의 영향을 받은 리오플라텐세 음악 장르인 탱고는 아르헨티나의 국제적인 문화 상징 중 하나이다. 탱고의 황금기(1930년 ~ 1950년대 중반)는 미국의 재즈 및 스윙 음악과 유사했으며, 오스발도 푸글리에세, 아니발 트로일로, 프란시스코 카나로, 훌리오 데 카로, 후안 다리엔소와 같은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특징이었다. 1955년 이후 거장 아스토르 피아졸라는 탱고 장르에 더 섬세하고 지적인 경향을 더한 누에보 탱고를 대중화했다. 현재 탱고는 고탄 프로젝트, 바호폰도, 탕게토와 같은 그룹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강력한 클래식 음악과 무용계를 발전시켜 작곡가 알베르토 히나스테라, 바이올리니스트 알베르토 리시,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에두아르도 델가도, 피아니스트 겸 교향악단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 테너 호세 쿠라와 마르셀로 알바레스, 그리고 발레 무용수 호르헤 돈, 호세 네글리아, 노르마 폰텐라, 막시밀리아노 게라, 팔로마 에레라, 마리아넬라 누녜스, 이냐키 우를레사가, 훌리오 보카와 같은 저명한 예술가들을 배출했다.
아르헨티나 국가 민속 스타일은 1930년대 수십 개의 지역 음악 장르에서 등장하여 라틴 아메리카 음악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아타우알파 유팡키와 메르세데스 소사와 같은 일부 연주자들은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다. 낭만적인 발라드 장르에는 산드로 데 아메리카와 같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가수들이 포함되었다. 테너 색소폰 연주자 레안드로 "가토" 바르비에리와 작곡가 겸 빅 밴드 지휘자 랄로 시프린은 가장 국제적으로 성공한 아르헨티나 재즈 음악가 중 하나이다.
아르헨티나 록은 1960년대 중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로사리오가 유망한 음악가들의 발상지가 되면서 독특한 음악 스타일로 발전했다. 로스 가토스, 수이 헤네리스, 알멘드라, 마날과 같은 창립 밴드들에 이어 세루 히란, 로스 아부엘로스 데 라 나다, 소다 스테레오, 파트리시오 레이 이 수스 레돈디토스 데 리코타가 등장했으며, 구스타보 세라티, 리토 네비아, 안드레스 칼라마로, 루이스 알베르토 스피네타, 찰리 가르시아, 피토 파에스, 레온 히에코와 같은 저명한 아티스트들이 활동했다.
현재 인기 있는 춤과 음악 장르로는 아르헨티나 쿰비아와 레게톤의 하위 장르인 카첸게가 있으며, 우루과이, 칠레, 파라과이, 볼리비아와 같은 인근 국가에서도 인기가 확산되고 있다.
8.3. 영화 및 연극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세계 연극의 주요 중심지 중 하나로, 코리엔테스 대로("잠들지 않는 거리", 때로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브로드웨이라고도 불림)를 중심으로 국제적인 수준의 연극계가 형성되어 있다. 콜론 극장은 오페라와 클래식 공연의 세계적인 명소이며, 음향 시설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아르헨티나 영화 산업은 역사적으로 멕시코 및 브라질에서 제작된 영화와 함께 라틴 아메리카 영화에서 가장 발전된 세 곳 중 하나였다. 1896년에 시작되어 1930년대 초까지 라틴 아메리카 최고의 영화 제작국이었으며, 이 지위는 1950년대 초까지 유지되었다. 세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는 만화가 키리노 크리스티아니에 의해 아르헨티나에서 제작되어 1917년과 1918년에 개봉되었다.
아르헨티나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공식 발표(1985년)와 엘 시크레토: 비밀의 눈동자(2009년)로 두 차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 또한 아르헨티나 작곡가 루이스 엔리케 바칼로프와 구스타보 산타올라야는 아카데미 음악상을, 아르만도 보와 니콜라스 히아코보네는 2014년 아카데미 각본상을 공동 수상했다. 또한 아르헨티나계 프랑스 배우 베레니스 베조는 2011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영화 과거에서의 역할로 세자르상 여우주연상과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아르헨티나는 또한 고야상 스페인어 외국어 영화상을 17회 수상하여, 24회 후보 지명으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단연 가장 많은 상을 받은 국가이다. 다른 많은 아르헨티나 영화들도 국제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2013년 기준, 매년 약 100편의 장편 영화가 제작되고 있다.
8.4. 미술 및 건축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화가로는 칸디도 로페스와 플로렌시오 몰리나 캄포스(소박파), 에르네스토 데 라 카르코바와 에두아르도 시보리(사실주의), 페르난도 파데르(인상주의), 피오 코이바디노, 아틸리오 말린베르노, 세사레오 베르날도 데 키로스(후기인상주의), 에밀리오 페토루티(입체주의), 훌리오 바라간(구체주의 및 입체주의), 안토니오 베르니(신구상주의), 로베르토 아이젠베르크와 술 솔라르(초현실주의), 줄라 코시체(구성주의), 에두아르도 마크 엔타이어(생성 예술), 루이스 세오아네, 카를로스 토랄라르도나, 루이스 아키노, 알프레도 그라마호 구티에레스(모더니즘), 루초 폰타나(공간주의), 토마스 말도나도, 기예르모 쿠이트카(추상 미술), 레온 페라리, 마르타 미누힌(개념 미술), 구스타보 카브랄(판타지 미술), 파비안 페레스(신감성주의) 등이 있다.
1946년 줄라 코시체 등은 아르헨티나에서 마디 운동을 창시했고, 이후 유럽과 미국으로 확산되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토마스 말도나도는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미치는 울름 디자인 교육 모델의 주요 이론가 중 한 명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른 아르헨티나 예술가로는 1920년대부터 석판화가 영향력을 발휘한 아돌포 베요크와 이민자들이 모여 살던 라 보카 지역에서 영감을 받은 항구 화가 베니토 킨켈라 마르틴이 있다. 국제적으로 수상 경력이 있는 조각가 에르미니오 블로타, 롤라 모라, 로헬리오 이루르티아는 아르헨티나 도시 경관의 고전적이고 인상적인 기념물 다수를 제작했다.
식민지화는 스페인 바로크 건축을 가져왔으며, 이는 산 이그나시오 미니의 감화원, 코르도바 대성당, 루한의 카빌도에서 더 단순한 리오플라텐세 양식으로 여전히 감상할 수 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영향은 19세기 초에 증가했으며, 강력한 절충주의적 색채가 현지 건축에 독특한 느낌을 부여했다.
8.5. 대중 매체
아르헨티나의 인쇄 매체 산업은 매우 발달하여 200개가 넘는 신문이 있다. 주요 전국지로는 중도 성향의 클라린(라틴 아메리카 베스트셀러이자 스페인어권에서 두 번째로 널리 배포됨), 1870년부터 발행된 중도 우파 성향의 라 나시온, 1987년에 창간된 좌파 성향의 파히나/12, 1904년에 창간된 중도 성향의 라 보스 델 인테리오르 등이 있다.
아르헨티나는 1920년 8월 27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리세오 극장에서 엔리케 텔레마코 수시니가 이끄는 의대생 팀이 리하르트 바그너의 파르지팔을 방송하면서 세계 최초의 정규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다. 2002년 기준, 아르헨티나에는 260개의 AM 라디오 방송국과 1150개의 FM 라디오 방송국이 등록되어 있었다.
아르헨티나 텔레비전 산업은 규모가 크고 다양하며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인기가 있으며, 많은 제작물과 TV 포맷이 해외로 수출되었다. 1999년부터 아르헨티나인들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케이블 및 위성 텔레비전의 가용성이 가장 높았으며, 2014년 기준 전국 가구의 87.4%에 달하여 미국, 캐나다, 유럽과 비슷한 비율을 보였다.
2011년 기준, 아르헨티나는 또한 라틴 아메리카 강대국 중 네트워크 통신 보급률이 가장 높았다. 인구의 약 67%가 인터넷에 접속했고, 인구 대비 휴대폰 가입자 비율은 137.2%였다.
8.6. 음식

대륙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스타, 소시지, 디저트 요리 외에도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엠파나다(속을 채운 작은 페이스트리), 로크로(옥수수, 콩, 고기, 베이컨, 양파, 호박을 섞은 요리), 우미타, 마테 등 다양한 원주민 및 크리오요 요리를 즐긴다. 아르헨티나의 여러 지역에서는 이 요리를 쇠고기 멜트로 먹기도 한다.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붉은 살코기 소비량이 가장 높은 국가로, 전통적으로 아르헨티나식 바비큐인 아사도로 준비된다. 다양한 종류의 고기로 만들며, 종종 초리소, 흉선, 곱창, 순대 등이 포함된다.
일반적인 디저트로는 팍투라스(비엔나식 페이스트리), 둘세데레체(우유 캐러멜 잼의 일종)를 채운 케이크와 팬케이크, 알파호르(초콜릿, 둘세데레체 또는 과일 페이스트를 사이에 넣은 쇼트브레드 쿠키), 토르타스 프리타스(튀긴 케이크) 등이 있다.
세계 최고급 와인 중 하나인 아르헨티나 와인은 현지 메뉴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말벡, 토론테스, 카베르네 소비뇽, 시라, 샤르도네는 가장 인기 있는 품종 중 일부이다.
8.7. 스포츠


파토는 아르헨티나의 국기로, 1600년대 초 현지에서 유래한 고대 승마 경기로 호스볼의 전신이다.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이다. 브라질, 독일, 프랑스와 함께 남자 대표팀은 FIFA 월드컵(1978년, 1986년, 2022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올림픽 금메달을 모두 획득한 유일한 팀이다. 또한 코파 아메리카 16회, 팬아메리칸 게임 금메달 7회 등 수많은 트로피를 획득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디에고 마라도나, 리오넬 메시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자 필드하키팀 라스 레오나스는 올림픽 메달 4개, 월드컵 2개, 월드 리그 1개, 챔피언스 트로피 7개를 획득하며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팀 중 하나이다. 루시아나 아이마르는 국제 하키 연맹(FIH) 올해의 선수상을 8회 수상한 유일한 선수로,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여자 선수로 인정받고 있다.
농구는 매우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남자 대표팀은 FIBA 아메리카 지역에서 세계 선수권 대회, 올림픽 금메달, 다이아몬드볼, 아메리카 선수권 대회, 팬아메리칸 게임 금메달 등 5관왕을 달성한 유일한 팀이다. 또한 남아메리카 선수권 대회 13회 우승 등 수많은 대회에서 우승했다. 마누 히노빌리, 루이스 스콜라, 안드레스 노시오니, 파브리시오 오베르토, 파블로 프리지오니, 카를로스 델피노, 후안 이그나시오 산체스는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찬사를 받는 선수 중 일부이며, 모두 NBA에서 활약했다. 아르헨티나는 1950년과 1990년에 농구 월드컵을 개최했다.
럭비는 아르헨티나에서 또 다른 인기 스포츠이다. 2017년 기준, '로스 푸마스'로 알려진 남자 대표팀은 럭비 월드컵이 개최될 때마다 참가했으며, 2007년에는 3위를 차지하며 역대 최고 성적을 거두었다. 2012년부터 로스 푸마스는 남반구 최고의 국제 럭비 대회인 더 럭비 챔피언십에서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경쟁하고 있다. 2009년부터 '하과레스'로 알려진 2군 남자 대표팀은 아메리카 럭비 챔피언십에서 미국, 캐나다, 우루과이 1군 팀과 경쟁하여 8번의 대회 중 6번 우승했다.
아르헨티나는 역사상 최고의 미들급 복서 카를로스 몬손, 역대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플라이급 복서 중 한 명인 파스쿠알 페레스, 전 WBA 및 WBC 세계 플라이급 챔피언 오라시오 아카바요, 2009년 기준 세계 라이트헤비급 타이틀 연속 방어 기록 보유자인 빅토르 갈린데스, 그리고 뛰어난 수비력으로 "무적"이라는 별명을 얻은 니콜리노 로체 등 가장 강력한 권투 챔피언들을 배출했다. 이들은 모두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테니스는 모든 연령층에서 매우 인기가 있다. 기예르모 빌라스는 오픈 시대 최고의 라틴 아메리카 선수이며, 가브리엘라 사바티니는 역대 가장 뛰어난 아르헨티나 여자 선수로 WTA 랭킹 3위까지 올랐으며, 두 선수 모두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아르헨티나는 월드 팀 컵에서 1980년, 2002년, 2007년, 2010년 등 4번 우승했으며, 지난 10년 동안 데이비스 컵 준결승에 7번 진출하여 2006년 러시아, 2008년과 2011년 스페인과의 결승전에서 패배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1981년 결승전에도 진출하여 미국에 패배했다. 국가대표팀은 2016년 데이비스 컵에서 우승했다.
아르헨티나는 폴로에서 논란의 여지 없이 군림하며, 다른 어떤 나라보다 많은 국제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1930년대 이후 거의 패배하지 않았다. 아르헨티나 폴로 오픈 챔피언십은 이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국제 단체 트로피이다. 아르헨티나는 폴로 역사상 최고의 선수인 아돌포 캄비아소를 비롯하여 세계 최고 선수 대부분의 본고장이다.
역사적으로 아르헨티나는 자동차 경주에서 강력한 면모를 보여왔다. 후안 마누엘 판히오는 4개의 다른 팀에서 5번의 포뮬러 원 세계 챔피언이었으며, 184번의 국제 경기 중 102번 우승했고, 역대 최고의 드라이버로 널리 평가받고 있다. 다른 뛰어난 레이서로는 오스카 알프레도 갈베스, 후안 갈베스, 호세 프로일란 곤살레스, 카를로스 로이트만 등이 있다.
8.8. 국기 및 상징


아르헨티나의 여러 국가 상징물은 법률로 정해져 있으며, 일부는 비공식적이지만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들도 있다. 아르헨티나의 국기는 하늘색, 흰색, 하늘색의 세 가로줄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앙 흰색 줄에는 5월의 태양이 그려져 있다. 이 국기는 1812년 마누엘 벨그라노가 디자인했으며, 1816년 7월 20일 국가 상징으로 채택되었다. 주의 통합을 상징하는 아르헨티나의 국장은 1813년부터 공식 문서의 인장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비센테 로페스 이 플라네스가 작사하고 블라스 파레라가 작곡한 아르헨티나의 국가는 1813년에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국가 코케이드는 1810년 5월 혁명 때 처음 사용되었고 2년 후 공식화되었다. 루한의 성모는 아르헨티나의 수호성인이다.
대부분의 아르헨티나 지역에 서식하는 붉은오븐새(Hornero)는 1928년 초등학교 설문 조사를 통해 국조로 선정되었다. 아메리카산호수(Ceibo)는 국화이자 국목이며, 케브라초 콜로라도(Quebracho colorado)는 국가 삼림목이다. 능망간석(Rhodochrosite)은 국가 보석으로 알려져 있다.
아르헨티나의 국기는 가우초(전통 목동)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고대 승마 스포츠인 파토이다. 아르헨티나 와인은 국가 술이며, 마테는 국가 침출 음료이다. 아사도와 로크로는 국민 음식으로 간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