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시리아는 서아시아의 레반트 지역에 위치한 국가로, 지중해 동부 연안에 자리 잡고 있다. 국토는 비옥한 평원, 높은 산맥, 그리고 사막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아랍인이 다수를 차지하나 쿠르드족, 시리아 투르크멘, 아시리아인, 아르메니아인, 체르케스인, 그리스인 등 다양한 민족과 이슬람교 수니파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기독교, 알라위파, 드루즈교, 야지디교 등 여러 종교 집단이 공존한다. 수도 다마스쿠스와 알레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들 중 하나로 손꼽힌다.
역사적으로 시리아 지역은 에블라 문명을 비롯한 고대 문명의 발상지였으며, 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우마이야 칼리파국(수도 다마스쿠스), 맘루크 술탄국, 오스만 제국 등 여러 제국의 지배를 거쳤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면서 프랑스의 위임통치를 받았고, 1946년에 독립을 이루었다. 독립 이후 시리아는 정치적 불안정과 군사 쿠데타를 여러 차례 겪었다. 1958년에는 이집트와 잠시 아랍 연합 공화국을 결성했으나 1961년 쿠데타로 해체되었다.
1963년 바트당이 쿠데타로 집권한 이래 일당 독재 체제가 이어졌으며, 1970년 하페즈 알아사드가 다시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후 그의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에게 권력이 세습되었다. 아사드 정권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와 인권 탄압으로 비판받았다. 2011년 아랍의 봄의 영향으로 시작된 민주화 시위는 시리아 내전으로 격화되었고, 내전은 수많은 사상자와 난민을 발생시키며 국제사회의 개입을 초래했다. 2024년 11월 말부터 시작된 반군의 대규모 공세로 2024년 12월 8일 수도 다마스쿠스가 함락되고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이 러시아로 망명하면서 53년간 이어진 아사드 정권은 붕괴되었다. 현재 시리아는 과도 정부 체제로 전환 중이며, 정치적 안정과 국가 재건이라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시리아 경제는 전통적으로 석유, 농업, 관광업에 의존해왔으나, 내전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불법 마약인 캡타곤 생산 및 밀매가 과거 아사드 정권 하에서 주요 외화벌이 수단이 되기도 했다. 사회적으로는 내전으로 인한 난민 문제, 빈곤, 식량 부족, 높은 실업률 등 다양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문화적으로 시리아는 고대 유적과 풍부한 이슬람 문화 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다마스쿠스 고대 도시, 팔미라 유적 등 다수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있다.
2. 국호
'시리아'라는 명칭은 역사적으로 현재의 시리아 국가 영역보다 훨씬 넓은 지역, 즉 레반트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아랍어로는 '앗샴'(الشَّام앗샴아랍어)으로 알려져 있다. '시리아'라는 이름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가장 유력한 설은 기원전 8세기 루위아어 "수라/이"(Sura/i)에서 유래했으며, 이것이 고대 그리스어 '시리오이'(Σύριοι시리오이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또는 '시로이'(Σύροι시로이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로 변형되었고, 이 단어들은 원래 메소포타미아 북부(현재의 이라크 및 시리아 북동부)의 '아슈르'(Aššur아슈르아카드어, 아시리아)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제국(기원전 323년 ~ 기원전 150년) 시대부터 이 용어는 레반트 지역에도 적용되기 시작했으며, 이 시점부터 그리스인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아시리아인과 레반트의 아람인을 구분하지 않고 이 용어를 사용했다. 현대 학계의 주류 의견은 그리스어 단어가 동족어인 '아시리아'(Ἀσσυρία아시리아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와 관련이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아카드어 '아슈르'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이 그리스어 명칭은 기원전 8세기 치네쾨이 비문에 기록된 페니키아어 '아슈르'(ʾšr페니키아어) 및 '아시림'(ʾšrym페니키아어, 아시리아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리아'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지역은 변화했다. 고전적으로 시리아는 남쪽의 아라비아와 북쪽의 소아시아 사이, 지중해 동쪽 끝에 위치하며, 내륙으로 이라크 일부를 포함하고 북동쪽으로는 불확실한 국경을 가졌다. 대 플리니우스는 이 지역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콤마게네, 소페네, 아디아베네를 포함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플리니우스 시대에는 이 더 넓은 시리아가 로마 제국 하의 여러 주로 나뉘었다. 남서쪽 끝에는 유대아(나중에 기원후 135년 팔레스티나로 개칭), 서쪽에는 페니키아(기원후 194년 설치, 현재의 레바논, 다마스쿠스, 홈스 지역 해당), 그리고 엘레우테루스강(현재의 안 나흐르 알 카비르강) 남쪽의 코엘레-시리아("텅 빈 시리아")가 있었다.
현대 시리아의 공식 국호는 시리아 아랍 공화국(اَلْجُمْهُورِيَّةُ ٱلْعَرَبِيَّةُ ٱلْسُوْرِيَّة알줌후리야 알알아라비야 앗수리야아랍어)이다. 일본어로는 시리아 아랍 공화국(シリア・アラブ共和国시리아・아라부・쿄와코쿠일본어) 또는 시리아(シリア시리아일본어)로 표기한다. 인도네시아어와 말레이어에서는 수리아(Suriah인도네시아어, Suriyah말레이어) 또는 공식 명칭인 공화국 아랍 수리아(Republik Arab Suriah인도네시아어, Republik Arab Suriyah말레이어)로 표기한다. 베트남어에서는 시리아(Syria베트남어) 또는 시리(Xy-ri베트남어)로 불리며, 공식 명칭은 콩호아 아랍 시리아(Cộng hoà Ả Rập Syria베트남어)이다. 태국어로는 시리아(ซีเรีย씨리아태국어) 또는 공식 명칭인 사타라나랏 아랍 시리아(สาธารณรัฐอาหรับซีเรีย사타라나랏 아랍 씨리아태국어)로 표기한다.
2.1. 국명의 변천
- 1930년 ~ 1958년: 시리아 공화국
- 1958년 ~ 1961년: 아랍 연합 공화국 (이집트와 통합)
- 1961년 ~ 2024년: 시리아 아랍 공화국
- 2024년 ~ 현재: 과도 정부 하에서 공식 국호 변경은 없으나, 국기 등 상징물 변경 논의 중
3. 역사
시리아 지역은 고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로, 선사 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해왔다. 고대에는 에블라 문명, 페니키아, 아람인 등의 문명이 번성했으며, 이후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제국, 마케도니아 제국, 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 중세에는 이슬람 제국의 등장과 함께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수도가 다마스쿠스에 세워지며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이후 아바스 칼리파국, 셀주크 제국, 십자군 국가, 아이유브 왕조, 몽골 제국, 맘루크 술탄국의 통치를 거쳤다. 16세기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전후 프랑스 위임통치령이 되었다가 1946년 독립을 달성했다. 독립 이후 시리아는 정치적 불안정과 군사 쿠데타, 중동전쟁 참전 등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 1963년 바트당이 집권한 이후 일당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고, 1970년 하페즈 알아사드가 집권하여 장기 통치 기반을 마련했다. 2000년 그의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가 권력을 승계했으나, 2011년 '아랍의 봄'의 영향으로 민주화 시위가 발생하며 시리아 내전으로 확산되었다. 13년간의 내전 끝에 2024년 12월 아사드 정권은 붕괴되었고, 현재 시리아는 과도 정부 하에 정치적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3.1. 고대

시리아 지역의 인류 정착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나투프 문화는 기원전 11천년 경 처음으로 정착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곳은 농업과 목축이 처음 등장한 신석기 시대 문화(토기 이전 신석기 A, PPNA)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텔 카라멜 유적지에서는 기원전 106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원형 석탑 여러 기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건축물이다. 신석기 시대(토기 이전 신석기 B, PPNB)는 무레이베트 문화의 직사각형 가옥으로 대표된다. 당시 사람들은 돌, 석고, 태운 석회로 만든 용기(Vaisselle blanche백색 식기프랑스어)를 사용했다. 아나톨리아에서 발견된 흑요석 도구는 초기 교역의 증거이다. 고대 도시 하무카르와 에마르는 후기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고학자들은 시리아의 문명이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중 하나이며, 아마도 메소포타미아 문명 다음으로 오래되었을 것이라고 입증했다.

이 지역에서 기록된 최초의 토착 문명은 현재 시리아 북부 이드리브 근처의 에블라 왕국이었다. 에블라는 기원전 3500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수메르, 아시리아, 아카드 등 메소포타미아 국가들과의 교역, 그리고 북서쪽 소아시아의 후르리인 및 하티인과의 교역을 통해 점차 부를 축적했다.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파라오들의 선물은 에블라가 고대 이집트와 접촉했음을 확인시켜 준다. 시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 기록 중 하나는 에블라의 재상 이브리움과 아바르살이라는 불분명한 왕국 사이의 기원전 2300년경 교역 협정으로, 이는 에블라와 아바르살 간의 조약으로 알려져 있다. 학자들은 에블라어가 아카드어 다음으로 가장 오래된 문자화된 셈어파 언어 중 하나라고 믿는다. 최근 에블라어 분류에 따르면, 에블라어는 아카드어와 밀접하게 관련된 동셈어군 언어였다. 에블라는 마리와의 오랜 전쟁으로 약화되었고, 기원전 23세기 전반 아카드의 사르곤과 그의 손자 나람신의 정복으로 에블라의 시리아 지배가 끝나면서 시리아 전체가 메소포타미아 아카드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기원전 21세기까지 후르리인들은 시리아 북동부에 정착했고, 나머지 지역은 아모리인들이 지배했다. 시리아는 아시리아-바빌로니아 이웃들에게 '아무루(아모리인)의 땅'으로 불렸다. 북서 셈어파인 아모리어는 가나안어군 중 가장 초기에 입증된 언어이다. 마리는 이 시기에 다시 등장했지만 함무라비에게 정복당했다. 우가리트도 이 시기인 기원전 1800년경 현재의 라타키아 근처에서 일어났다. 우가리트어는 가나안어군과 느슨하게 관련된 셈어파 언어였으며, 세계 최초의 알파벳으로 여겨지는 우가리트 문자를 발전시켰다. 우가리트 왕국은 기원전 12세기 후기 청동기 시대의 종말로 알려진 시기에 인도-유럽계 바다 민족의 약탈로 파괴될 때까지 존속했다.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적으로 사람이 거주해 온 도시들 중 하나이다. 얌하드(현재의 알레포)는 2세기 동안 북부 시리아를 지배했지만, 기원전 19세기와 18세기에는 샴시-아다드 1세의 아모리인 왕조가 다스리던 고대 아시리아 제국과 아모리인들이 세운 바빌로니아 제국이 동부 시리아를 점령했다. 얌하드는 마리 석판에서 근동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이자 함무라비보다 더 많은 속국을 거느린 국가로 묘사되었다. 얌하드는 알랄라크, 카트나, 후르리인 국가들, 그리고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바빌론 국경까지 권위를 행사했다. 얌하드 군대는 멀리 엘람(현재의 이란) 국경의 데르까지 원정했다. 얌하드는 에블라와 함께 기원전 1600년경 소아시아의 히타이트에게 정복당하고 파괴되었다. 이때부터 시리아는 히타이트 제국, 미탄니 제국, 이집트 제국, 중아시리아 제국, 그리고 다소 약했지만 바빌로니아 등 다양한 외세 제국들의 전쟁터가 되었다. 이집트인들은 초기에 남부 대부분을 점령했고, 히타이트와 미탄니는 북부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러나 아시리아가 결국 우위를 점하여 미탄니 제국을 파괴하고 히타이트와 바빌로니아가 이전에 차지했던 광대한 영토를 합병했다.

기원전 14세기경, 반유목민인 수투인과 서셈어파를 사용하는 아람인 등 다양한 셈족 민족이 이 지역에 나타났다. 수투인은 동쪽의 바빌로니아와 충돌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아람인은 이전의 아모리인을 흡수했다. 그들 역시 수세기 동안 아시리아와 히타이트에 예속되었다. 이집트인들은 서부 시리아의 지배권을 놓고 히타이트와 싸웠으며, 이 싸움은 기원전 1274년 카데시 전투에서 절정에 달했다. 서부 시리아는 기원전 1200년경 히타이트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 일부로 남아 있었고, 동부 시리아는 대체로 중아시리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아시리아는 티글라트-필레세르 1세(기원전 1114년 ~ 기원전 1076년) 통치 기간 동안 서부 대부분도 합병했다. 히타이트가 멸망하고 기원전 11세기 후반 아시리아가 쇠퇴하자, 아람 부족들은 내륙 대부분을 장악하고 비트 바히아니, 아람-다마스쿠스, 하마, 아람-르홉, 아람-나하라임, 루후티와 같은 국가들을 세웠다. 이 시점부터 이 지역은 아람 또는 아람 지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셈족 아람인과 인도-유럽계 히타이트인의 잔존 세력 사이에 통합이 이루어져, 북부 중앙 아람(시리아)과 남부 중앙 소아시아(현재의 터키)를 중심으로 팔리스틴, 카르케미시, 삼알 등 여러 시리아-히타이트 국가들이 세워졌다.

페니키아인으로 알려진 가나안어군 집단은 기원전 13세기부터 시리아 해안(그리고 레바논과 북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며 암리트, 시미라, 아르와드, 팔토스, 라미타, 슉시와 같은 도시 국가를 세웠다. 이 해안 지역에서 그들은 결국 지중해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장했으며, 몰타, 시칠리아, 이베리아반도, 북아프리카 해안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가장 중요하게는 기원전 9세기에 주요 도시 국가인 카르타고를 세웠는데, 이는 훨씬 나중에 로마 공화국과 경쟁하는 주요 제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시리아와 근동 서반부는 광대한 신아시리아 제국(기원전 911년 ~ 기원전 605년)에 함락되었다. 아시리아인들은 제국 아람어를 제국의 링구아 프랑카로 도입했다. 이 언어는 기원후 7~8세기 이슬람 정복 이후까지 시리아와 근동 전체에서 지배적인 언어로 남아 있었으며, 기독교 확산의 매개가 되었다. 아시리아인들은 시리아와 레바논 식민지를 에베르-나리라고 명명했다. 아시리아의 지배는 아시리아인들이 일련의 잔혹한 내부 내전으로 크게 약화된 후, 메디아, 바빌로니아인, 칼데아인, 페르시아인, 스키타이인, 킴메르인의 공격을 받아 끝났다. 아시리아 몰락기에 스키타이인들은 시리아 대부분을 유린하고 약탈했다. 아시리아 군대의 마지막 저항은 기원전 605년 북부 시리아의 카르케미시에서 있었다. 아시리아 제국 다음에는 신바빌로니아 제국(기원전 605년 ~ 기원전 539년)이 뒤따랐다. 이 기간 동안 시리아는 바빌로니아와 또 다른 이전 아시리아 식민지였던 이집트 사이의 전쟁터가 되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아시리아 친척들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에 승리했다.
3.2. 고전 고대

현대 시리아를 구성하는 땅은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일부였으며, 기원전 539년 키루스 대제가 이끄는 아케메네스 제국에 의해 합병되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인들은 제국 아람어를 제국의 외교 언어 중 하나로 유지했으며, 아람/시리아의 새로운 사트라피인 에베르-나리에 대한 아시리아 명칭도 유지했다. 시리아는 기원전 330년경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통치하는 마케도니아 제국에 정복되었고, 그 결과 셀레우코스 제국(기원전 323년 ~ 기원전 64년)의 코엘레-시리아 속주가 되었으며, 셀레우코스 왕들은 스스로를 "시리아의 왕"이라 칭했고, 안티오키아 시는 기원전 240년부터 수도가 되었다. 이처럼 이 지역에 "시리아"라는 이름을 도입한 것은 그리스인들이었다. 원래 북부 메소포타미아(이라크)의 "아시리아"를 인도-유럽어식으로 변형한 이 용어를 그리스인들은 아시리아 자체뿐만 아니라 수세기 동안 아시리아 지배하에 있던 서쪽 땅을 묘사하는 데 사용했다. 따라서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는 시리아의 아람인과 동쪽 메소포타미아(현대 이라크)의 아시리아인 모두 "시리아인" 또는 "시리아크인"으로 불렸는데, 이들은 실제로는 서로 다른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혼동은 현대까지 이어졌다. 결국 남부 셀레우코스 시리아의 일부는 헬레니즘 시대 제국이 서서히 해체되면서 유대인 하스몬 왕조에게 넘어갔다.

시리아는 기원전 83년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 대왕의 정복으로 잠시 아르메니아인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티그라네스는 시리아인들에게 셀레우코스인과 로마인으로부터의 구원자로 환영받았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장군 폼페이우스 대제는 시리아로 진군하여 안티오키아를 점령하고 기원전 64년 시리아를 로마 속주로 만들었고, 이로써 20년간 지속된 아르메니아의 이 지역 지배는 끝났다. 시리아는 로마 통치하에서 번영했으며, 실크로드에 전략적으로 위치하여 막대한 부와 중요성을 얻었고, 경쟁 관계에 있던 로마인과 페르시아인의 전쟁터가 되었다.


2세기에 북부 시리아에는 부유하고 때로는 강력했던 토착 아람어 사용 왕국인 팔미라가 일어났다. 팔미라인들은 교역망을 구축하여 도시를 로마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로 만들었다. 3세기 후반 팔미라 왕 오다에나투스는 페르시아 황제 샤푸르 1세를 격파하고 로마 동부 전체를 장악했으며, 그의 후계자이자 미망인인 제노비아는 팔미라 제국을 세워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 소아시아 대부분, 유대, 레바논을 잠시 정복했으나 273년 결국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아시리아 왕국인 아디아베네는 10년부터 117년까지 북동부 시리아 지역을 지배하다가 로마에 정복당했다. 아람어는 멀리 로마령 브리튼의 하드리아누스 방벽에서도 발견되었으며, 아르베이아 요새 유적지에는 팔미라 이주민이 쓴 비문이 있다. 시리아의 지배권은 결국 로마 제국의 분열과 함께 로마인에게서 비잔티움 제국으로 넘어갔다. 비잔티움 제국 전성기 시리아의 아람어 사용 인구는 아마도 19세기까지 다시 초과되지 않았을 것이다. 7세기 아랍 이슬람 정복 이전에는 인구 대부분이 아람인이었지만, 시리아에는 그리스인과 로마인 지배 계급도 거주했으며, 아시리아인들은 여전히 북동부에 살았고, 페니키아인들은 해안을 따라, 유대인과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도 주요 도시에 존재했으며, 나바테아인과 라흠인, 가산인과 같은 이슬람 이전 아랍인들은 남부 시리아 사막에 거주했다. 시리아 기독교가 주요 종교로 자리 잡았지만, 다른 이들은 여전히 유대교, 미트라교, 마니교, 그리스-로마 종교, 가나안 종교, 메소포타미아 종교를 따랐다. 시리아의 크고 번영하는 인구는 시리아를 로마와 비잔티움 속주 중 가장 중요한 곳 중 하나로 만들었으며, 특히 기원후 2세기와 3세기에 그러했다.

시리아인들은 세베루스 왕조 기간 동안 상당한 권력을 장악했다. 이 가문의 가장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아내로서 로마 황후였던 율리아 돔나는 에메사(현재의 홈스) 출신의 시리아인이었으며, 그녀의 가문은 엘-가발 신의 사제직에 대한 세습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조카손자들 또한 시리아 출신의 아랍인으로 로마 황제가 되었는데, 첫 번째는 엘라가발루스였고 두 번째는 그의 사촌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였다. 또 다른 시리아 출신 로마 황제는 필리푸스 아라부스(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로, 그는 로마령 아라비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244년부터 249년까지 황제였으며, 3세기의 위기 동안 잠시 통치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그는 고향인 필리포폴리스(현재의 샤흐바)에 집중하여 도시 개선을 위한 많은 건설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나, 대부분 그의 사후 중단되었다.
시리아는 기독교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타르수스의 사울, 더 잘 알려진 사도 바울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회심했으며, 고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기독교 교회에서 중요한 인물로 부상했다.
3.3. 중세
무함마드가 시리아 사람들과 처음 교류한 것은 626년 7월 두마툴 잔달 침공 때였다. 당시 무함마드는 일부 부족이 노상강도에 연루되어 메디나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추종자들에게 두마를 침공하라고 명령했다. 윌리엄 몽고메리 와트는 이것이 당시 무함마드가 명령한 가장 중요한 원정이었지만, 주요 사료에서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두마트 알잔달은 메디나에서 804670 m (500 mile) 떨어져 있었고, 와트는 시리아와의 통신이나 메디나로의 보급이 중단될 가능성 외에는 무함마드에게 즉각적인 위협은 없었다고 말한다. 와트는 "무함마드가 이미 사후에 일어날 확장의 일부를 구상하고 있었다고 가정하고 싶다"며, 그의 군대의 신속한 행군은 "그것을 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윌리엄 뮤어 또한 무함마드가 1,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시리아 국경에 도달하여 먼 부족들이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무함마드의 정치적 지평이 확장되었다는 점에서 이 원정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640년까지 시리아는 칼리드 이븐 알왈리드가 이끄는 라시둔 군대에 의해 정복되었다. 7세기 중반, 우마이야 왕조는 제국의 수도를 다마스쿠스에 두었다. 후기 우마이야 통치 기간 동안 국가의 힘은 쇠퇴했는데, 이는 주로 전체주의, 부패, 그리고 그 결과로 일어난 혁명 때문이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750년 아바스 왕조에 의해 전복되었고, 아바스 왕조는 제국의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겼다. 우마이야 통치하에 공식화된 아랍어는 비잔티움 시대의 그리스어와 아람어를 대체하여 지배적인 언어가 되었다. 887년 이집트에 기반을 둔 툴룬 왕조가 아바스 왕조로부터 시리아를 합병했고, 나중에는 이집트에 기반을 둔 이흐시드 왕조와 그 후 사이프 알다울라가 세운 알레포에서 유래한 함단 왕조로 대체되었다.
시리아의 일부 지역은 1098년에서 1189년 사이 십자군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독일 군주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들을 통칭하여 십자군 국가라고 불렀는데, 그중 시리아의 주요 국가는 안티오키아 공국이었다. 해안 산악 지역은 니자리 이스마일파, 소위 암살단에게 일부 점령되었으며, 이들은 십자군 국가들과 간헐적인 대립과 휴전을 반복했다. 이후 역사에서 "니자리파가 프랑크족의 새로운 적대 행위에 직면했을 때, 그들은 아이유브 왕조로부터 시기적절한 지원을 받았다." 한 세기 동안의 셀주크 통치 후, 시리아는 대부분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를 세운 쿠르드족 해방자 살라딘에게 정복되었다(1175년 ~ 1185년). 알레포는 1260년 1월 훌라구 칸의 몽골군에게 함락되었고, 다마스쿠스는 3월에 함락되었지만, 그 후 훌라구는 왕위 계승 분쟁을 처리하기 위해 중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몇 달 후, 맘루크가 이집트에서 군대를 이끌고 와서 갈릴리에서 벌어진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했다. 맘루크의 지도자 바이바르스는 다마스쿠스를 지방 수도로 삼았다. 그가 죽자 칼라운이 권력을 잡았다. 그동안 순쿠르 알아쉬카르라는 에미르가 다마스쿠스의 통치자를 자처하려 했으나, 1280년 6월 21일 칼라운에게 패배하고 북부 시리아로 도망쳤다. 몽골 여인과 결혼했던 알아쉬카르는 몽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일 칸국의 몽골군은 1280년 10월 알레포를 점령했지만, 칼라운은 알아쉬카르를 설득하여 자신에게 합류하도록 했고, 그들은 1281년 10월 29일 제2차 홈스 전투에서 몽골군과 싸워 맘루크가 승리했다. 1400년, 이슬람 튀르크-몽골 정복자 티무르가 시리아를 침공하여 알레포를 약탈하고 맘루크 군대를 격파한 후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도시 주민들은 학살당했고, 장인들만 사마르칸트로 추방되었다. 티무르는 아시리아 기독교인 인구를 학살하여 그들의 수를 크게 줄였다. 15세기 말, 유럽에서 극동으로 가는 해상 항로가 발견되면서 시리아를 통과하는 육상 교역로의 필요성이 사라졌다.
3.4. 오스만 제국 시대


1516년, 오스만 제국은 맘루크 술탄국을 침공하여 시리아를 정복하고 제국에 편입시켰다. 오스만 제도는 시리아인들에게 부담스럽지 않았는데, 터키인들이 쿠란의 언어인 아랍어를 존중하고 신앙의 수호자라는 역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다마스쿠스는 메카로 가는 주요 중계지가 되었고, 그 결과 하즈를 위해 통과하는 수많은 순례자들로 인해 무슬림들에게 성스러운 성격을 띠게 되었다.
오스만 행정은 평화로운 공존을 이끄는 제도를 따랐다. 각 민족-종교 소수 집단, 즉 아랍 시아파 무슬림, 아랍 수니파 무슬림, 시리아 정교회, 그리스 정교회, 마론파 기독교인, 아시리아 기독교인,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인, 유대인은 밀레트를 구성했다. 각 공동체의 종교 지도자들은 모든 개인 신분법을 관리하고 특정 민사 기능을 수행했다. 1831년, 이집트의 이브라힘 파샤는 제국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고 오스만령 시리아를 점령하여 다마스쿠스를 함락했다. 그의 단기 통치는 이 지역의 인구 구성과 사회 구조를 바꾸려 시도했다. 그는 수천 명의 이집트 마을 사람들을 데려와 남부 시리아 평야에 정착시켰고, 자파를 재건하여 퇴역 이집트 군인들을 정착시켜 지역 수도로 만들려 했으며, 농민과 드루즈 반란을 진압하고 비협조적인 부족민들을 추방했다. 그러나 1840년까지 그는 이 지역을 다시 오스만 제국에 반환해야 했다. 1864년부터 탄지마트 개혁이 오스만 시리아에 적용되어 알레포, 조르, 베이루트, 다마스쿠스 주(빌라예트)가 설치되었다. 레바논산 무타사르리프령이 만들어졌고, 곧이어 예루살렘 무타사르리프령이 별도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만 제국은 동맹국으로 참전했다. 결국 패배하여 근동 전체의 지배권을 대영제국과 프랑스 식민제국에 상실했다. 분쟁 중에 오스만인들과 그 동맹국들은 아르메니아인 집단살해와 아시리아인 집단살해의 형태로 토착 기독교인들에 대한 집단학살을 자행했으며, 오스만 시리아의 데이르에조르는 이 죽음의 행진의 최종 목적지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두 연합국 외교관(프랑스인 프랑수아 조르주-피코와 영국인 마크 사이크스)은 1916년 사이크스-피코 협정에서 전후 오스만 제국을 각자의 영향권으로 분할하기로 비밀리에 합의했다. 처음에는 두 영토가 요르단에서 이란까지 거의 직선으로 이어지는 국경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기 직전 모술 지역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1918년 프랑스와의 또 다른 협상이 이루어져 이 지역을 영국의 영향권(이라크가 될 지역)으로 할양하게 되었다. 중간에 위치한 조르 주의 운명은 불확실하게 남겨졌고,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점령으로 인해 시리아에 편입되었다. 이 국경은 1920년 시리아가 국제 연맹 위임통치령이 되면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으며 현재까지 변하지 않았다.
3.5. 프랑스 위임통치령

1920년, 하심 왕조의 파이살 1세 치하에 단명한 독립 시리아 아랍 왕국이 세워졌다. 그러나 그의 시리아 통치는 마이살룬 전투 이후 불과 몇 달 만에 끝났다. 프랑스군은 산레모 회의에서 국제 연맹이 시리아를 프랑스 위임통치령으로 둘 것을 제안한 후 그해 말 시리아를 점령했다. 구로 장군은 그의 비서 드 카이에 따르면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시리아 국가를 건설하거나... 여전히 분열시키는 균열을 완화하거나" 또는 "이러한 분열이 야기하는 우리의 중재를 필요로 하는 모든 현상을 배양하고 유지하는 것"이었다. 드 카이는 "두 번째 선택만이 나에게 흥미롭다고 말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것이 구로가 한 일이었다.
1925년, 술탄 알아트라쉬는 드루즈 산에서 발발하여 시리아 전체와 레바논 일부를 휩쓴 봉기를 이끌었다. 알아트라쉬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는데, 특히 1925년 7월 21일 알카프르 전투, 1925년 8월 2일~3일 알마즈라아 전투, 그리고 살카드, 알무사이피라, 수웨이다 전투가 유명하다. 프랑스는 모로코와 세네갈에서 수천 명의 군대를 파견했고, 이로 인해 프랑스는 많은 도시를 되찾았지만 저항은 1927년 봄까지 계속되었다. 프랑스는 알아트라쉬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그는 반란군과 함께 트란스요르단으로 탈출했고 결국 사면되었다. 그는 시리아-프랑스 조약 체결 후 1937년에 시리아로 돌아왔다.

시리아와 프랑스는 1936년 9월 독립 조약을 협상했고, 하시ם 알아타시는 현대 시리아 공화국의 첫 번째 화신 하에 선출된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입법부가 비준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 조약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가 함락되면서 시리아는 비시 프랑스의 통제하에 놓였고, 1941년 7월 영국과 자유 프랑스가 시리아-레바논 전역에서 이 나라를 점령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시리아 민족주의자들과 영국의 지속적인 압력으로 인해 프랑스는 1946년 4월 군대를 철수시켜야 했고, 나라는 위임통치 기간 동안 구성된 공화국 정부의 손에 넘겨졌다.
3.6. 독립 이후
시리아 정치는 독립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격변이 지배했다. 1948년 5월, 시리아군은 다른 아랍 국가들과 함께 팔레스타인을 침공하여 즉시 유대인 정착촌을 공격했다. 슈크리 알쿠와틀리 대통령은 전선의 군대에 "시오니스트들을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침공 목적은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막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시리아 정부는 군대와 군사 정보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전 나치 당원들, 특히 전 친위대 대원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하는 과정에 착수했다. 이 전쟁에서의 패배는 1949년 3월 후스니 알자임 대령에 의한 시리아 쿠데타의 여러 유발 요인 중 하나였으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시작 이래 아랍 세계 최초의 군사 전복으로 묘사된다. 이는 곧 사미 알힌나위 대령에 의한 또 다른 전복으로 이어졌고, 그는 같은 해 아디브 시샤클리 대령에 의해 신속하게 축출되었다.

시샤클리는 결국 다당제를 완전히 폐지했지만 1954년 쿠데타로 전복되었고 의회 제도가 복원되었다. 그러나 이때쯤 권력은 군대와 안보 기관에 점점 더 집중되었다. 의회 제도의 취약성과 경제 관리 부실은 불안과 나세르주의 및 기타 이념의 영향을 초래했다. 다양한 아랍 민족주의, 시리아 민족주의, 사회주의 운동을 위한 비옥한 토양이 있었으며, 이는 사회의 불만을 품은 요소들을 대표했다. 특히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소수 종교 집단이 포함되었다.
1956년 11월, 수에즈 위기의 직접적인 결과로 시리아는 소련과 협정을 체결했다. 이는 군사 장비를 대가로 정부 내 공산주의 영향력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이후 튀르키예는 시리아 군사 기술력 증강에 대해 우려하게 되었는데, 시리아가 이스켄데룬을 탈환하려 할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유엔에서의 격렬한 논쟁만이 전쟁의 위협을 줄였다.
3.6.1. 초기 공화국과 정치적 불안정 (1946년 ~ 1958년)
독립 직후 시리아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에 휩싸였다. 잦은 쿠데타 시도와 군부의 정치 개입이 이어졌으며, 이는 국가의 안정과 발전을 저해하는 주요 요인이었다. 1948년에는 제1차 중동전쟁에 참전하여 신생 이스라엘과 싸웠으나 패배하였고, 이는 국내 정치 불안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 시기 시리아는 공화국 수립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으며, 정치 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슈크리 알쿠와틀리 대통령은 여러 차례 실각과 복귀를 반복했으며, 군부 실세들의 영향력 아래 국정이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었고,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은 이후 아랍 연합 공화국 결성 시도와 바트당 집권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3.6.2. 아랍 연합 공화국 (1958년 ~ 1961년)

1958년 2월 1일, 시리아 대통령 슈크리 알쿠와틀리와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통합을 발표하여 아랍 연합 공화국(UAR)을 창설했고, 시리아의 모든 정당과 그 안의 공산주의자들은 공개 활동을 중단했다. 한편, 당의 취약한 지위와 연합의 점증하는 불안정성에 경각심을 느낀 일단의 시리아 바트당 장교들은 비밀 군사위원회를 결성하기로 결정했다. 초기 구성원은 중령 무함마드 움란, 소령 살라 자디드, 대위 하페즈 알아사드였다. 시리아는 쿠데타 이후 1961년 9월 28일 이집트와의 연합에서 탈퇴하여 정치적 통합을 종료했다.
UAR 시기 동안 농업 개혁 조치가 도입되었는데, 이는 세 가지 상호 관련된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었다. 농업 노동자와 지주 간의 관계를 규제하는 법률, 사유지 및 국유지 소유 및 사용을 규율하고 농민의 경제 조직을 지시하는 법률, 그리고 국가 통제하에 농업 생산을 재편하는 조치였다. 토지 소유의 불평등 수준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개혁은 1958년부터 1961년까지 독립 이후 시리아 역사상 다른 어떤 개혁보다 토지 재분배에서 더 많은 진전을 이루었다. 1958년 9월 4일에 통과된 첫 번째 법률(법률 134호)은 농민 동원에 대한 우려와 농민 권리 확대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는 소작농과 농업 노동자의 지위를 지주에 비해 강화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이 법은 노동사회부를 창설하게 했고, 노동사회부는 특히 여성과 청소년의 노동 조건을 규제하고, 노동 시간을 정하고, 유급 노동자를 위한 최저 임금 원칙과 소작농을 위한 공평한 수확물 분배를 도입하는 새로운 법률의 시행을 발표했다. 더욱이, 지주에게 서면 및 구두 계약을 준수하도록 의무화하고, 단체 교섭을 확립했으며, 노동자 보상, 건강, 주택 및 고용 서비스에 대한 조항을 포함했다. 법률 134호는 노동자 보호만을 목적으로 설계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지주들이 자신들의 조합을 결성할 권리도 인정했다.
3.6.3. 바트당 정권 (1963년 ~ 2024년)
1961년 쿠데타 이후의 불안정은 1963년 3월 8일 바트당 쿠데타로 절정에 달했다. 이 장악은 미셸 아플라크와 살라흐 알딘 알비타르가 이끄는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원들에 의해 계획되었다. 새로운 시리아 내각은 바트당원들이 장악했다. 1963년 군사위원회에 의한 권력 장악부터 2024년 정권 붕괴까지, 바트당은 시리아를 종종 전체주의로 묘사되는 독재 체제로 통치했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묘사를 거부했다. 바트당은 강력한 무카바라트(비밀경찰)를 통해 국가 정치, 교육, 문화, 종교를 통제하고 시민 사회의 모든 측면을 감시했다. 시리아 아랍군과 비밀경찰은 바트당 기구와 통합되었으며, 정권에 의해 전통적인 민간 및 군 엘리트들이 숙청된 후였다.

1963년 바트당 쿠데타는 현대 시리아 역사에서 "급진적인 단절"을 의미했으며, 이후 바트당은 국가 권력을 독점하여 일당제 국가를 수립하고 국가 이념(신바트주의)을 강요함으로써 사회정치적 질서를 형성했다. 1966년 2월 23일, 신바트주의 군사위원회는 바트당 구세대(미셸 아플라크, 살라흐 알딘 알비타르)에 대항하여 당내 반란을 일으켜 아민 알하피즈 대통령을 투옥하고 3월 1일 지역주의적 민간 바트당 정부를 지정했다. 누레딘 알아타시가 공식적인 국가 원수가 되었지만, 살라 자디드는 1966년부터 1970년 11월까지 시리아의 실질적인 통치자였으며,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하페즈 알아사드에게 축출되었다.
이 쿠데타는 원래의 범아랍 바트당 내 분열을 초래하여, 이라크 주도 바트 운동(1968년부터 2003년까지 이라크 통치)과 시리아 주도 바트 운동이 수립되었다. 1967년 상반기에는 시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에 소규모 전쟁 상태가 존재했다. 비무장지대에서 이스라엘의 토지 경작을 둘러싼 분쟁은 4월 7일 전쟁 전 공중 충돌로 이어졌다.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 6일 전쟁이 발발하자 시리아도 참전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전쟁 마지막 날, 이스라엘은 시리아로 관심을 돌려 48시간 이내에 골란고원의 3분의 2를 점령했다. 이 패배는 다음에 취할 조치를 놓고 자디드와 아사드 사이에 분열을 야기했다. 당 기구를 장악한 자디드와 군부를 장악한 아사드 사이에 의견 불일치가 발생했다. 1970년 검은 9월(요르단 내전이라고도 함) 기간 동안 요르단과의 적대 행위에서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시리아 군대의 철수는 이러한 의견 불일치를 반영했다.
권력 투쟁은 1970년 11월 시리아 교정운동으로 절정에 달했는데, 이는 하페즈 알아사드를 정부의 실력자로 세운 무혈 군사 쿠데타였다. 아사드는 바트당 국가를 자신의 당, 군대, 비밀경찰, 언론, 교육 부문, 종교 및 문화 영역, 그리고 시민 사회의 모든 측면에 대한 광범위한 장악력을 특징으로 하는 독재 체제로 전환했다. 그는 군대, 관료, 정보 및 지배 엘리트의 주요 직책에 알라위파 충성파를 임명했다. 하페즈와 그의 가족을 중심으로 한 개인숭배는 바트주의 이념의 핵심 신조가 되었으며, 이는 아사드 가문이 영원히 통치할 운명이라고 주장했다. 1973년 10월 6일, 시리아와 이집트는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욤키푸르 전쟁을 시작했다. 이스라엘 방위군은 초기 시리아의 이득을 뒤집고 시리아 영토 깊숙이 진격했다. 쿠네이트라 마을은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 대부분 파괴되었다. 1970년대 후반, 시리아 무슬림 형제단에 의한 이슬람 봉기가 정부를 겨냥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민간인과 비번 군인을 공격했고, 보안군은 보복 공격으로 민간인을 살해했다. 이 봉기는 1982년 하마 학살에서 절정에 달했으며, 시리아 군대와 바트당 민병대에 의해 4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는 현대 아랍 역사에서 어떤 국가가 자국민에게 자행한 가장 치명적인 단일 폭력 행위로 묘사된다.
다른 아랍 국가 및 서방 세계와의 관계에서 주요한 변화로, 시리아는 사담 후세인에 대항하는 미국 주도 걸프 전쟁에 참여했다. 시리아는 다자간 마드리드 회의에 참여했으며, 1990년대에는 팔레스타인 및 요르단과 함께 이스라엘과 협상했다. 이러한 협상은 실패했고, 2000년 아사드가 제네바에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회담한 이후 직접적인 시리아-이스라엘 회담은 없었다.
3.6.4. 아사드 정권 붕괴와 과도 정부 (2024년 ~ 현재)
시리아군 (흰색)과 SOR (분홍색), 튀르키예와 SNA (연녹색), 미국과 SDF (노란색), IS (회색), 시리아 불확실/혼합 (빨간색/연회색), 미국과 SFA (청록색)이 통제하는 영토.
반군 세력은 12월 5일 홈스 외곽에 도달하여 도시를 위한 3일간의 전투를 시작했다. 동시에, HTS가 조정한 대규모 봉기가 드루즈 부족과 반군 세력 연합에 의해 주도되어 12월 6일까지 남부 도시 수와이다와 다라를 점령하고, 다음 날 다마스쿠스를 포위하기 위해 북쪽으로 신속하게 진격했다. 홈스는 12월 8일 새벽 반군 세력에게 점령되어 반군의 진격과 다마스쿠스 사이에 주요 정권 거점이 남지 않게 되었다.
알라위파의 심장부인 타르투스 및 라타키아 주와 단절되고, 북쪽과 남쪽에서 다마스쿠스로 향하는 반군의 협공에 직면했으며, 정권의 러시아 및 이란 후원자들로부터의 외세 개입 희망이 없어진 상황에서, 남아있는 정권 장악 지역에 대한 아사드주의 권위는 급속히 와해되었다. 시리아 아랍군은 병사들이 무기와 군복을 버리고 탈영하여 이라크와 레바논 국경을 넘어 흩어졌다. 반군 세력은 12월 8일 수도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여 바샤르 알아사드 정부를 전복시키고 53년간 지속된 아사드 가문의 통치를 종식시켰다. 아사드는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로 도피하여 망명을 허가받았다.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아사드의 9번째 총리였던 무함마드 가지 알잘랄리는 반군과 아흐메드 알샤라의 지원을 받아 다음 날 무함마드 알바시르가 이끄는 과도 정부가 구성될 때까지 임시로 직무를 유지했다. 알잘랄리는 시리아 국민이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도록 새로운 선거를 촉구했다.

아사드 정권 붕괴 이전, 무함마드 알바시르는 2024년 12월 아사드를 전복시킨 이슬람 무장 단체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HTS)이 이드리브 주에 설립한 시리아 구국정부(SSG)를 이끌었다. 일반적으로 과도 정부 구성은 SSG를 "시리아 전체로 확장"한 것으로, 새 정부의 구성은 SSG의 구성과 거의 동일했다. 시리아 인권 네트워크의 보고서에 따르면, HTS의 비판자와 반대자들은 강제 실종과 고문 형태로 탄압을 받았다.
아사드 정권 붕괴 직후, 이스라엘은 골란고원 인근 퍼플 라인 완충 지대에 대한 지상 침공을 시작했으며, 시리아 군사 창고와 해군 기지에 대한 일련의 공습도 개시했다. 이스라엘 방위군은 반군이 사용할 수 없도록 화학무기 공장을 포함한 바트주의 군사 기반 시설을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사드 정권 붕괴에도 불구하고, 시리아 북부의 터키 지원 시리아 국민군 전투원들은 12월 11일 휴전이 이루어질 때까지 미국 지원 시리아 민주군(SDF)에 대한 공세를 계속했다. 2025년 2월, SDF, 자치 행정부, 시리아 민주 평의회는 회의에서 SDF가 시리아군과 통합하기로 결정했다. ISIL에 대항하는 국제 연합 또한 SDF와 새로운 시리아 정부 간의 지속적인 대화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과도 정부 총리 무함마드 알바시르는 기독교인과 기타 소수자들이 방해 없이 종교를 계속 실천할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많은 반군 세력이 이전에 알카에다 및 이슬람 국가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이는 의구심을 샀다. 새 정부가 반군 깃발과 함께 타우히드 깃발 변형을 사용하는 것 또한 새로운 국가가 덜 세속적일 수 있다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아이샤 알딥스는 2024년 12월 22일 여성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2024년 12월 12일, 과도 정부 대변인은 AF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정부의 3개월 임기 동안 헌법과 의회가 정지될 것이며, 헌법 개정 이전에 헌법을 검토하기 위한 '사법 및 인권 위원회'가 설립될 것이라고 말했다.
2025년 2월 12일, 아사드 알샤이바니 외무장관은 3월 1일까지 새 정부가 구성될 것이며, 이는 "가능한 한 시리아 국민을 대표하고 다양성을 고려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4. 지리
시리아는 아시아 대륙 서쪽 끝, 지중해 동쪽 연안에 위치하며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지리적 요충지이다. 국토 면적은 약 18.52 만 km2이며, 북쪽으로는 튀르키예, 동쪽과 남동쪽으로는 이라크, 남쪽으로는 요르단, 남서쪽으로는 이스라엘 및 레바논과 국경을 접한다. 서쪽은 지중해에 면해 있다.
국토의 대부분은 건조한 고원 지대이며, 특히 동부는 시리아 사막이 넓게 펼쳐져 있다. 그러나 북서부 지중해 연안 지역은 비교적 녹지가 발달해 있으며, 남부의 하우란 평원과 북동부의 자지라 지역은 주요 농업 지대이다. 시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강인 유프라테스강은 북부에서 발원하여 국토 동부를 관통하며 남동쪽으로 흘러 이라크로 들어간다. 그 외 주요 강으로는 오론테스강이 있다. 남서부에는 안티레바논 산맥이 레바논과의 국경을 이루며, 이 산맥의 최고봉인 헤르몬산(해발 2814 m)이 시리아 최고봉이기도 하다. 시리아는 "문명의 요람"으로 불리는 15개 국가 중 하나로, 아라비아판의 북서쪽에 걸쳐 있다.
상업적 규모의 석유는 1956년 북동부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주요 유전지대로는 알수와이디야, 카라초크, 르멜란, 그리고 데이르에조르 인근의 알오마르, 알타임 유전 등이 있다. 이 유전들은 이라크의 모술 및 키르쿠크 유전의 자연적인 연장선상에 있다. 석유는 1974년 이후 시리아의 주요 천연자원이자 주요 수출품이 되었다. 천연가스는 1940년 즈베사 유전에서 발견되었다. 시리아는 물 부족이 심각한 국가 중 하나로 분류된다.
4.1. 기후
시리아의 기후는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서부 지중해 연안은 습윤한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겨울은 온화하고 비가 많이 내린다. 내륙으로 갈수록 건조해져 스텝 기후를 보이다가 동부 지역은 사막 기후로 이어진다. 연평균 강수량은 지중해 연안이 750 mm에서 1000 mm에 달하는 반면, 내륙 사막 지역은 250 mm 미만이다.
수도 다마스쿠스는 내륙에 위치하며 연평균 기온은 1월에 5.8 °C, 7월에 26.5 °C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158.5 mm로 매우 건조하다. 북부의 알레포 역시 비슷한 기후 패턴을 보인다. 고지대에서는 겨울에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도 하며 눈이 내리기도 한다. 여름철에는 해안 지역이 고온 다습한 반면, 해발 600 m 이상의 산악 지역인 슬룬페, 블루단, 마쉬타 알헬루 등은 상대적으로 시원하여 현지인들의 피서지로 인기가 있다.
4.2. 생물 다양성
시리아는 4개의 육상 생태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시리아 건조 초원 및 관목지, 동부 지중해 침엽수림-경엽수림-활엽수림, 남부 아나톨리아 산지 침엽수림 및 낙엽수림,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관목 사막. 2019년 산림 경관 보전 지수(Forest Landscape Integrity Index) 평균 점수는 3.64/10으로, 세계 172개국 중 144위를 기록했다.
시리아의 생물 다양성은 지리적 위치와 다양한 기후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 해안 지역, 산악 지대, 스텝 지역, 사막 지역 각각 독특한 동식물 군집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오랜 기간의 인간 활동, 특히 시리아 내전으로 인한 환경 파괴와 밀렵 등으로 인해 많은 종들이 위협받고 있다. 과거에는 시리아 야생 당나귀, 아시아 사자, 시리아 갈색곰 등이 서식했으나 현재는 멸종되었거나 국지적으로 사라진 상태이다. 현재 보호가 필요한 주요 포유류로는 시리아 햄스터, 아라비아 영양 등이 있으며, 다양한 조류와 파충류, 양서류도 서식한다. 전국에 여러 자연보호구역이 지정되어 있으나, 내전으로 인해 관리 및 보전 노력이 심각하게 저해되고 있다.
5. 정치

시리아는 2024년 12월 8일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이 붕괴된 이후 현재 정치적 과도기를 겪고 있다. 무함마드 알바시르가 이끄는 시리아 과도 정부가 구성되어 초기에는 2025년 3월 1일까지 국가를 통치할 예정이며, 2024년 12월 12일부로 과도 기간 동안 헌법과 의회의 기능이 정지되었다. 2025년 1월 29일, 시리아 총사령부는 아흐메드 알샤라를 과도기 대통령으로 임명했으며, 그는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사실상의 지도자 역할을 해왔다. 새로운 헌법이 채택될 때까지 시리아의 입법부 역할을 할 임시 입법 평의회가 구성될 것으로 예상된다.
과거 바트당 정권(1963년 ~ 2024년) 하에서 시리아 아랍 공화국은 명목상으로는 바트당이 통제하는 국민진보전선에 속하지 않은 개인의 입후보를 허용하는 대통령제 공화국이었으나, 실제로는 광범위한 비밀경찰 조직을 통해 어떠한 독립적인 정치 활동도 억압하는 일당제 국가였다. 아사드 정권이 일방적으로 도입한 2012년 헌법은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여 권위주의적 성격을 강화했으며, 바트당 정치위원회는 계속해서 정당 인가 책임을 맡았다.
집권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은 시리아 군대와 안보 기구에 대한 통제를 통해 시리아를 경찰 국가로 통치했으며, 이러한 체제는 종종 전체주의로 묘사되기도 했으나 일부 학자들은 권위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했다. 2023년 프리덤 하우스가 발표한 제50차 세계의 자유 보고서는 시리아를 "자유롭지 않은" 국가 중 "최악 중의 최악"으로 지정하고 남수단과 함께 가장 낮은 점수(1/100)를 부여했다.
과거 2012년 헌법에 따르면, 시리아의 대통령은 시리아 국가 원수였고, 시리아의 총리는 명목상 정부 수반이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대통령에게 있었다. 입법부인 인민의회는 법률 통과, 정부 세출 승인, 정책 토론을 담당하는 기관이었으나, 주로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의 입법 절차를 확인하고 일당제 체제를 재확인하는 기관으로 기능했다. 하페즈 알아사드 통치 이후 바트당 정치 체제는 아사드 가문에 초점을 맞춘 포괄적인 개인숭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바트당의 알라위파 충성파들이 군부, 비밀경찰, 정치 엘리트의 주요 직책을 장악했다.
행정부는 대통령, 두 명의 부통령, 총리, 각료회의(내각)로 구성되었다. 헌법은 대통령이 무슬림이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이슬람을 국교로 만들지는 않았다. 1973년 1월 31일, 하페즈 알아사드는 새 헌법을 시행하여 국가적 위기를 초래했다. 이전 헌법과 달리 이 헌법은 시리아 대통령이 무슬림이어야 한다는 요건을 두지 않아, 무슬림 형제단과 전통적인 울라마가 조직한 하마, 홈스, 알레포에서의 격렬한 시위를 야기했다. 그들은 아사드를 "알라의 적"으로 낙인찍고 그의 통치에 대항하는 지하드를 촉구했다. 정부는 1976년에서 1982년 사이에 주로 무슬림 형제단의 이슬람주의자들이 주도한 일련의 무장 반란을 여러 차례의 탄압과 학살을 통해 극복했다. 헌법은 대통령에게 각료 임명권, 선전포고 및 계엄 선포권, 법률 제정권(긴급 상황을 제외하고는 인민의회의 비준 필요), 사면권, 헌법 개정권, 공무원 및 군인 임명권을 부여했다. 2012년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직접 선거를 통해 시리아 시민에 의해 선출되었다. 시리아의 입법부는 단원제인 인민의회였다. 인민의회는 주로 시리아의 일당제 체제를 확인하고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의 입법 절차를 재확인하는 기관으로 기능했다.
시리아에는 모든 판사와 검사가 바트당 임명자여야 했기 때문에 독립적인 사법부가 없었다. 시리아의 사법부는 최고헌법재판소, 최고법무위원회, 파기법원, 국가안보법원을 포함했다. 이슬람 법학이 입법의 주요 원천이었으며 시리아의 사법 제도는 오스만법, 프랑스법, 이슬람법의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시리아에는 1심 법원, 항소 법원, 최고 재판소인 헌법재판소의 세 단계 법원이 있었다. 종교 법원은 개인 및 가족법 문제를 다루었다. 최고국가안보법원은 2011년 바샤르 알아사드에 의해 폐지되었다. 진행 중인 내전의 결과로, 시리아 임시정부, 민주연합당, 그리고 샤리아에 의해 통치되는 지역화된 지역들을 포함한 다양한 대안 정부가 형성되었다. 시리아 임시정부 대표들은 2013년 아랍 연맹에서 시리아의 의석을 차지하도록 초청받았으며, 미국, 영국, 프랑스를 포함한 여러 국가로부터 "시리아 국민의 유일한 대표자"로 인정받았다.

시리아의 선거는 광범위한 조작, 반복 투표, 유권자 등록 및 확인 시스템 부재를 특징으로 하는 형식적인 과정을 통해 치러졌다. 2016년 4월 13일 시리아 정부 통제 지역에서 시리아 단원제 입법부인 마즐리스 알샤압(인민의회) 250석 전체에 대한 의회 선거가 치러졌다. 결과가 발표되기도 전에 독일, 미국, 영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가 주로 "시리아 국민의 의지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과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러시아 연방 대표들은 이 선거 결과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다양한 독립 관찰자와 국제기구들은 아사드 정권의 선거 행위를 사기라고 비난했으며, 유엔은 이를 "권한 없는" 불법 선거라고 규탄했다. 선거 공정성 프로젝트(Electoral Integrity Project)의 2022년 세계 보고서는 시리아 선거를 코모로, 중앙아프리카 공화국과 함께 세계에서 선거 공정성이 가장 낮은 "위장" 선거로 규정했다. 시리아 내전 기간 동안 형성된 세 개의 대안 정부, 즉 시리아 임시정부(2013년 구성), 로자바(2016년 구성), 시리아 구국정부(2017년 구성)는 국가 북부 지역을 통제하며 시리아 아랍 공화국과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5.1. 정부 구조
2024년 12월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시리아는 과도 정부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무함마드 알바시르가 총리로 임명되었으며,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HTS)의 지도자 아흐메드 알샤라가 과도기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현재 헌법과 의회의 기능은 정지된 상태이며, 새로운 헌법 제정 및 정치 체제 수립을 위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과도 정부는 사법 및 인권 위원회를 설치하여 헌법 개정 작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과거 바트당 정권 하에서의 정부 구조는 다음과 같았다.
- 행정부**: 시리아의 대통령이 국가원수이자 행정부의 수반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대통령은 2명의 부통령, 총리, 그리고 각료회의(내각) 구성원을 임명했다. 총리는 명목상 정부 수반이었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 입법부**: 단원제 의회인 인민의회(Majlis al-Sha'ab)가 입법권을 행사했다. 의원 정수는 250명이었으며, 국민의 직접 선거로 선출되었고 임기는 4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바트당의 결정 사항을 추인하는 거수기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 사법부**: 최고헌법재판소, 최고법무위원회, 파기법원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사법부의 독립성은 보장되지 않았으며, 모든 판사와 검사는 바트당의 승인을 받아 임명되어 대통령과 집권당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이슬람 법학(샤리아)이 주요 법원(法源) 중 하나였으며, 개인 및 가족법 문제에서는 종교 법원이 관할권을 가졌다. 국가안보 관련 사건을 다루던 국가안보법원은 2011년 폐지되었다.
5.2. 행정 구역
시리아는 14개의 주(muhafazat, 단수형: muhafazah)로 구성되어 있다. 각 주는 다시 총 61개의 구(manatiq, 단수형: mintaqah)로 나뉘며, 구는 다시 하위 행정 단위인 나히야(nawahi, 단수형: nahiya)로 세분된다. 수도 다마스쿠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주로 간주된다.
각 주의 행정은 내무부 장관의 제청과 각료회의의 승인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는 주지사가 담당한다. 주지사는 선출된 주의회의 지원을 받는다. 쿠네이트라주의 대부분은 현재 이스라엘이 점령한 골란고원 지역에 해당한다.
번호 | 주 | 주도 |
---|---|---|
1 | 다마스쿠스주 | 다마스쿠스 |
2 | 리프디마슈크주 | 두마 |
3 | 쿠네이트라주 | 쿠네이트라 |
4 | 다라주 | 다라 |
5 | 알수와이다주 | 알수와이다 |
6 | 홈스주 | 홈스 |
7 | 타르투스주 | 타르투스 |
8 | 라타키아주 | 라타키아 |
9 | 하마주 | 하마 |
10 | 이드리브주 | 이드리브 |
11 | 알레포주 | 알레포 |
12 | 락까주 | 락까 |
13 | 데이르에조르주 | 데이르에조르 |
14 | 알하사카주 | 알하사카 |
5.2.1. 주요 도시


시리아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는 다마스쿠스이다. 다마스쿠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그 외 주요 도시들은 다음과 같다.
- 알레포: 시리아 북부의 주요 도시이자 과거 상업과 산업의 중심지였으나, 내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역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
- 홈스: 시리아 중서부에 위치한 산업 도시로, 내전 기간 동안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 라타키아: 지중해 연안의 주요 항구 도시이자 휴양지이다.
- 하마: 시리아 중부에 위치한 도시로, 오론테스강 유역의 농업 중심지이다. 1982년 하마 학살이 일어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 데이르에조르: 시리아 동부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중심 도시로, 석유 산업과 농업이 발달했다.
- 락까: 시리아 북동부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도시로, 한때 ISIL의 사실상 수도 역할을 했다.
- 타르투스: 지중해 연안의 또 다른 주요 항구 도시로, 러시아 해군 기지가 위치해 있다.
- 이드리브: 시리아 북서부의 도시로, 내전 기간 동안 반군의 주요 거점이었다.
- 알하사카: 시리아 북동부 자지라 지역의 중심 도시로, 다양한 민족이 거주한다.
- 알카미실리: 시리아 북동부 터키 국경 인근의 도시로, 쿠르드족 인구가 많다.
이 외에도 두마, 만비즈, 다라, 수와이다 등 여러 중소 도시들이 각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5.2.2. 북동부 시리아 자치 행정부 (AANES)
북동부 시리아 자치 행정부(AANES), 통칭 로자바(서부 쿠르디스탄)는 시리아 내전 중인 2012년부터 시리아 북동부 지역에서 사실상의 자치를 시행하고 있는 정치체이다. 쿠르드족이 주도하고 있으나 아랍인, 아시리아인, 시리아 투르크멘 등 다양한 민족이 함께 참여하는 다민족 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한다. AANES는 아프린, 자지라, 유프라테스, 락까, 타브카, 만비즈, 데이르에조르의 일부 지역을 관할한다. 주요 군사력은 시리아 민주군(SDF)으로, 이들은 ISIL 격퇴전에서 미국 등 국제 연합군의 주요 파트너 역할을 수행했다.
AANES는 압둘라 외잘란의 민주적 연방주의 사상에 기반하여 풀뿌리 민주주의, 여성 해방, 생태주의, 다원주의를 핵심 가치로 삼고 있다. 코뮌을 기반으로 한 직접 민주주의와 남녀 공동 의장제를 특징으로 하는 독특한 정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여성의 권익 향상을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며, 모든 민족과 종교의 평등을 강조한다. AANES는 시리아 중앙 정부나 국제 사회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으나(스페인 카탈루냐 의회는 인정), 일부 국가 및 국제기구와 비공식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시리아 중앙 정부와의 관계는 복잡하다. 때로는 ISIL과 같은 공동의 적에 맞서 협력하기도 하지만, 자치권 문제를 둘러싸고 긴장이 존재한다. 특히 튀르키예는 AANES를 자국 내 쿠르드 분리주의 단체인 쿠르디스탄 노동자당(PKK)의 연장선으로 간주하여 안보 위협으로 보고 있으며, 여러 차례 군사 작전을 감행하여 아프린 등 일부 지역을 점령했다. 2019년에는 시리아 정부군이 터키의 공격을 막기 위해 SDF와의 합의 하에 만비즈와 코바니 등 일부 AANES 통제 지역에 진입하기도 했다. 2024년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AANES와 SDF는 새로운 시리아 과도 정부와의 관계 설정 및 향후 시리아 정치 질서 내에서의 지위 확보라는 중요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 2025년 2월, SDF는 새로운 시리아군에 통합될 것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5.3. 인권

바트당 정권 시기(1963년 ~ 2024년) 시리아의 인권 상황은 국제 사회로부터 지속적으로 심각한 우려를 받아왔다. 휴먼 라이츠 워치와 같은 독립적인 인권 단체들은 시리아의 인권 기록을 "세계 최악 수준"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프리덤 하우스는 연례 보고서에서 시리아를 "자유롭지 않은 국가" 중에서도 가장 낮은 등급으로 분류했다.
바트당 정권은 전체주의적 독재 체제로 운영되었으며, 국내 정치 활동과 표현의 자유를 극도로 억압했다. 주요 인권 문제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지적되었다.
- 표현의 자유 제한**: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심각하게 제한되었다. 인터넷 검열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반정부적인 내용을 게시한 블로거나 활동가들이 체포, 구금되었다.
- 정치범 및 양심수**: 수많은 정치범과 양심수가 장기간 재판 없이 구금되거나 불공정한 재판을 받았다.
- 고문 및 강제 실종**: 구금 시설에서의 고문과 가혹행위가 만연했으며, 반체제 인사나 시위 참가자들이 강제로 실종되는 사례가 빈번했다. 특히 시리아 내전 기간 동안 이러한 인권 유린은 더욱 심화되었다.
- 사법 시스템의 문제**: 사법부의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았으며, 국가안보 관련 사건을 다루는 특별 재판소는 공정한 재판 절차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1963년부터 2011년까지 시행된 계엄령은 대부분의 헌법적 보호를 정지시켰다.
- 소수자 권리**: 쿠르드족을 비롯한 소수 민족의 문화적, 정치적 권리가 제한되었으며, 특정 종교 집단에 대한 차별도 존재했다.
- 여성 인권**: 헌법상 양성평등이 보장되었으나, 관습법과 일부 법률 조항으로 인해 여성에 대한 차별이 존재했으며, 이른바 '명예 살인'에 대한 관대한 처벌도 문제로 지적되었다.
- 내전 중 인권 유린**: 시리아 내전(2011년 ~ 2024년) 기간 동안 정부군과 친정부 민병대는 민간인 거주 지역에 대한 무차별적인 통폭탄 투하, 화학무기 사용, 포위 공격을 통한 기아 유발 등 심각한 전쟁 범죄와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비난을 받았다. 유엔은 2011년 봉기 초기부터 아동 살해 및 성폭행 등 심각한 아동 인권 침해를 보고했으며, 내전으로 인해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2024년 12월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시리아 과도 정부는 인권 상황 개선과 과거사 청산을 중요한 과제로 안고 있다. 표현의 자유 확대, 정치범 석방, 강제 실종 문제 해결, 사법 개혁 등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그러나 과도 정부를 주도하는 세력 중 일부가 과거 인권 침해 논란이 있었던 단체와 연관되어 있어, 실질적인 인권 개선이 이루어질지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6. 대외 관계
시리아는 역사적으로 아랍 민족주의와 반제국주의를 외교 정책의 핵심 기조로 삼아왔다. 국가 안보 확보, 주변 아랍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 증대, 그리고 골란고원 반환은 시리아 외교의 주요 목표였다. 바트당 정권 하에서 시리아는 이스라엘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으며, 팔레스타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이란과는 전략적 동맹 관계를 유지했고, 러시아(구 소련 시절부터)와도 군사 및 정치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반면,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과는 대체로 긴장 관계에 있었으며, 특히 테러 지원 및 대량살상무기 개발 의혹 등으로 인해 제재를 받아왔다.
시리아 내전(2011년 ~ 2024년)은 시리아의 대외 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아사드 정권의 민간인 탄압으로 인해 다수의 서방 국가 및 아랍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거나 악화되었다. 아랍 연맹과 이슬람 협력 기구에서도 회원 자격이 정지되었다가 2023년에야 아랍 연맹에 복귀했다. 내전 기간 동안 러시아와 이란은 아사드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국제 사회에서의 고립을 막는 역할을 했다. 반면, 튀르키예,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은 반군을 지원하며 아사드 정권과 대립했다.
2024년 12월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시리아 과도 정부는 국제 사회와의 관계 개선 및 인도적 지원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새로운 정부는 주변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는 한편, 서방 국가들과의 대화 채널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과도 정부의 성격과 향후 시리아의 정치적 방향에 따라 국제 사회의 반응과 지원 양상은 달라질 수 있다.
6.1. 주변국과의 관계
시리아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어 주변국들과 복잡하고 다층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 튀르키예: 역사적으로 하타이주(알렉산드레타 산자크) 영유권 문제로 갈등이 있었으나, 2000년대 초반 관계 개선의 조짐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리아 내전 발발 이후 튀르키예가 시리아 반군을 적극 지원하면서 양국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튀르키예는 자국 안보를 이유로 시리아 북부에서 여러 차례 군사 작전을 감행했으며, 현재도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있다.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튀르키예는 시리아 과도 정부와의 관계 설정 및 국경 안보 문제에 주력하고 있다.
- 이스라엘: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래 지속적인 적대 관계에 있다. 주요 갈등 요인은 골란고원 점령 문제이며, 양국은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다. 시리아는 헤즈볼라 등 반이스라엘 무장 단체를 지원해왔으며, 이스라엘은 시리아 내 이란 관련 시설 및 헤즈볼라 목표물에 대한 공습을 단행해왔다. 2024년 12월 아사드 정권 붕괴 후 이스라엘은 골란고원 완충 지대를 점령하고 시리아 남부의 비무장화를 요구하는 등 공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 이라크: 과거 바트당 시절에는 시리아 바트당과 이라크 바트당 간의 노선 차이로 갈등을 겪었으며,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시리아는 이란을 지원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에는 다수의 이라크 난민이 시리아로 유입되었고, ISIL의 등장으로 양국 국경 지역의 안보 불안이 심화되었다.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양국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으며, 국경 통제 및 안보 협력이 주요 과제로 남아있다.
- 레바논: 시리아는 역사적으로 레바논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왔으며, 레바논 내전(1975년 ~ 1990년) 기간 동안 군대를 파견하여 2005년까지 주둔했다. 라피크 하리리 전 레바논 총리 암살 사건 이후 국제적 압력으로 철군했으나, 정치적 영향력은 지속되었다. 시리아 내전은 레바논에도 큰 영향을 미쳐 다수의 시리아 난민이 유입되었고, 헤즈볼라는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며 내전에 개입했다. 아사드 정권 붕괴는 레바논 내 시리아의 영향력 변화 및 헤즈볼라의 입지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 요르단: 시리아 내전 초기에는 반군을 일부 지원했으나, ISIL의 위협이 커지면서 국경 통제를 강화하고 시리아 정부와 제한적인 협력을 모색하기도 했다. 다수의 시리아 난민을 수용하고 있으며, 국경 안보와 난민 문제가 주요 현안이다.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요르단은 시리아의 안정과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 사회의 노력에 동참하고 있다.
6.2. 주요 강대국과의 관계
시리아는 국제 정치에서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주요 강대국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어왔다.
- 러시아: 소련 시절부터 시리아의 핵심 동맹국이었으며, 군사, 경제, 정치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특히 타르투스 해군 기지와 흐메이밈 공군 기지를 통해 지중해에서 군사적 영향력을 확보했다. 시리아 내전 발발 이후 러시아는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군사적으로 강력히 지원하며 정권 유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러시아는 시리아에서의 영향력 유지 및 새로운 과도 정부와의 관계 설정을 모색하고 있으나, 아사드 정권의 갑작스러운 붕괴로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 미국: 대체로 시리아와 긴장 관계를 유지해왔다. 미국은 시리아를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하고 경제 제재를 가해왔으며, 시리아의 인권 문제와 대량살상무기 개발 의혹을 비판해왔다. 시리아 내전 기간 동안 미국은 반군 일부를 지원하고 ISIL 격퇴를 위한 국제 연합군을 주도하며 시리아 내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미국은 시리아의 안정과 민주적 전환을 지지하며 과도 정부와의 협력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 이란: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시리아와 강력한 전략적 동맹 관계를 구축했다. 양국은 반(反)이스라엘, 반(反)서방 노선을 공유하며, 레바논의 헤즈볼라를 공동으로 지원하는 등 역내 문제에서 긴밀히 협력해왔다. 시리아 내전 기간 동안 이란은 아사드 정권에 막대한 군사 및 경제 지원을 제공하며 정권 유지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아사드 정권 붕괴는 이란의 역내 영향력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이란은 시리아 과도 정부와의 관계 재설정을 시도하고 있다.
- 중국: 전통적으로 시리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경제 협력을 중심으로 관계를 발전시켜왔다. 시리아 내전 문제에 있어서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러시아와 함께 아사드 정권에 대한 비판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등 비교적 정권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중국은 시리아의 전후 재건 사업 참여에 관심을 보여왔으며,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에도 시리아의 안정과 자국의 경제적 이익 확보를 위한 외교를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6.3. 국제 분쟁

시리아는 독립 이후 여러 국제 분쟁에 연루되어 왔다. 주요 분쟁은 다음과 같다.
- 골란고원 문제: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시리아 영토인 골란고원을 점령한 이후, 이 지역은 양국 간 핵심 분쟁 지역으로 남아있다. 이스라엘은 1981년 골란고원을 자국법에 따라 사실상 병합했으나, 국제 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497호는 이스라엘의 병합을 무효로 규정하고 있다. 시리아는 지속적으로 골란고원 반환을 요구해왔다. 유엔 평화유지군(UNDOF)이 양측 사이에 완충 지대를 유지하며 정전을 감시해왔다. 2024년 12월 아사드 정권 붕괴 후, 이스라엘은 시리아 내 혼란을 틈타 완충 지대를 점령하고 시리아 남부 지역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으며, 해당 지역의 비무장화를 요구하고 있다. 시리아 과도 정부는 이스라엘의 점령을 규탄하며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 하타이주(이스켄데룬) 문제: 현재 튀르키예 영토인 하타이주는 과거 프랑스 위임통치령 시리아의 일부였던 알렉산드레타 산자크였다. 1939년 프랑스는 이 지역에서 주민투표를 실시하여 터키로의 귀속을 결정했으나, 시리아는 이 과정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하타이주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해왔다. 다만, 이 문제는 최근 양국 관계에서 전면에 부각되지는 않고 있다.
- 터키의 북시리아 점령: 시리아 내전 기간 동안 튀르키예는 자국 안보를 이유로 시리아 북부 지역에서 여러 차례 군사 작전을 감행하여 시리아 국민군과 함께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있다. 이는 시리아의 주권 침해 문제로 국제적인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 셰바팜스 문제: 레바논-시리아 국경과 이스라엘 점령 골란고원이 교차하는 지역에 위치한 셰바팜스는 이스라엘, 레바논, 시리아 간의 영유권 분쟁 지역이다. 이스라엘은 1967년 골란고원과 함께 이 지역을 점령했으며, 레바논은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시리아는 과거 레바논의 주장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2024년 12월 아사드 정권 붕괴 후 이스라엘의 시리아 침공 상황은 골란고원 문제를 넘어 시리아 전체의 안보 지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스라엘은 시리아 내 친(親)이란 세력 및 헤즈볼라의 위협 제거를 명분으로 군사 행동을 확대하고 있으며, 이는 시리아 과도 정부의 주권 및 안정에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다.
7. 군사


시리아의 대통령은 시리아군의 총사령관이다. 과거 아사드 정권 하에서 시리아군은 동원 시 약 40만 명의 병력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징병제를 채택하여 만 18세 남성은 군 복무 의무를 가졌으며, 복무 기간은 2011년 기준 1년 6개월이었다. (과거에는 30개월에서 점차 단축됨). 한 가정의 외아들은 징병에서 면제되기도 했다. 군 복무를 원치 않을 경우 일정 금액을 납부하고 면제받는 제도도 있었다.
소련은 오랫동안 시리아군의 훈련, 장비, 차관의 주요 공급원이었으나, 소련 해체 후 시리아의 현대 군사 장비 획득 능력은 다소 둔화되었을 수 있다. 시리아는 지대지 미사일 무기고를 보유하고 있다. 1990년대 초, 사거리 500 km의 스커드-C 미사일을 북한으로부터 조달했으며, 사거리 최대 700 km의 스커드-D 미사일은 북한과 이란의 도움으로 시리아가 개발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시리아는 걸프 전쟁 참전의 결과로 페르시아만 아랍 국가들로부터 상당한 재정 지원을 받았으며, 이 자금의 상당 부분이 군사비 지출에 사용되었다. 이란과 러시아는 아사드 주도 시리아 정부에 대한 군사 지원의 가장 큰 공급국이었다. 러시아는 타르투스 해군 기지와 라타키아 인근 흐메이밈 공군 기지를 운영하며 지중해에서 군사적 영향력을 유지해왔다.
시리아 내전은 시리아군에 막대한 손실과 변화를 가져왔다. 정부군의 규모는 크게 축소되었고, 다양한 민병대와 외국군이 시리아 영토 내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2024년 12월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시리아군의 미래와 국가 안보 체제 재편은 과도 정부의 주요 과제 중 하나이다. 과거 정부군의 잔존 병력, 다양한 반군 세력, 그리고 시리아 민주군(SDF) 등 여러 무장 조직의 통합 또는 해체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8. 경제

시리아의 경제는 시리아 내전(2011년~2024년) 이전에는 석유, 농업, 관광업, 제조업 등에 의존하는 다각화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전으로 인해 국가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산업 기반 시설이 파괴되고 생산량이 급감했다. 2024년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시리아 과도 정부는 피폐해진 경제를 재건하고 민생 안정을 도모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해 있다.
과거 시리아 경제는 바트당의 강력한 국가 통제 하에 운영되었으며, 계획 경제 요소와 함께 부분적인 시장 경제 도입이 시도되었다. 주요 수출품은 원유, 정제 석유제품, 원면, 의류, 과일, 곡물 등이었고, 수입품은 산업용 원자재, 차량, 농업 장비, 중장비 등이었다. 석유 수출과 해외 노동자 송금이 주요 외화 수입원이었다. 그러나 석유 생산량 감소와 국제 유가 변동에 취약한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내전 기간 동안 시리아 경제는 급격히 위축되었다. 세계은행은 2010년부터 2023년까지 시리아의 GDP가 84% 감소했으며, 2023년 GDP는 62억 달러에 불과하다고 추정했다. 수출은 급감했고, 석유 및 관광 산업은 특히 큰 피해를 입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의 경제 제재는 정부 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 기간 동안 시리아는 이란, 러시아, 중국 등 우방국으로부터의 신용 지원에 크게 의존했다. 시리아 파운드화 가치는 폭락했고,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실업률은 급증했고, 인구의 90% 이상이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는 등 인도주의적 위기가 심화되었다. 불법 마약인 캡타곤 생산 및 밀매가 아사드 정권 하에서 주요 외화벌이 수단이자 비공식 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기도 했다.
새로운 과도 정부는 캡타곤 산업 근절을 천명했으며, 파괴된 석유 산업 재건을 위한 막대한 투자 유치가 필요하지만 성공 여부는 불투명하다. 농업 부문은 여전히 GDP와 고용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만, 관개 시설 파괴와 물 부족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알레포 비누와 같은 전통적인 제품도 존재한다. 시리아 경제의 장기적인 제약 요인으로는 대외 무역 장벽, 높은 실업률, 재정 적자, 농업용수 과다 사용, 급격한 인구 증가, 산업 확장, 수질 오염으로 인한 물 공급 압박 등이 있다.
8.1. 경제사
시리아의 경제사는 독립 이후 여러 단계를 거치며 발전과 침체를 반복했다.
- 독립 초기 (1940년대 ~ 1960년대 초반)**: 독립 직후 시리아 경제는 전통적인 농업 중심 구조를 유지했다. 그러나 지주 중심의 토지 소유 구조로 인해 다수의 농민들은 소작농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고, 경제 발전은 더디었다. 정치적 불안정과 잦은 쿠데타도 경제 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 바트당 집권과 사회주의 경제 (1960년대 ~ 1980년대)**: 1963년 바트당이 집권하면서 시리아는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도입했다. 주요 산업의 국유화, 토지 개혁, 국가 주도의 산업화가 추진되었다. 이 시기에는 석유 자원 개발이 본격화되었고, 1970년대 초 하페즈 알아사드 집권 이후 부분적인 경제 자유화 정책과 함께 석유 수출 호황에 힘입어 상당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국가 통제와 계획 경제의 비효율성, 관료주의, 그리고 중동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국방비 지출은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았다. 1980년대에는 국제 유가 하락, 가뭄, 해외 노동자 송금 감소 등으로 경제가 다시 침체되었다.
- 제한적 시장 개방 시도 (1990년대 ~ 2000년대)**: 1990년대 이후 시리아 정부는 점진적인 경제 개혁과 시장 개방을 시도했다. 바샤르 알아사드가 집권한 2000년대에는 외국인 투자 유치, 민간 부문 육성 등 보다 적극적인 개방 정책이 추진되었다. 이로 인해 무역이 활성화되고 서비스업이 성장하는 등 일부 성과가 있었으나, 여전히 국가 통제가 강하게 남아 있었고, 부정부패와 정실 자본주의가 만연하여 경제 구조의 근본적인 개선에는 이르지 못했다. 사회적으로는 빈부 격차가 확대되고 공공 서비스 질이 저하되는 문제가 발생하여 국민들의 불만이 누적되었다.
- 시리아 내전과 경제 붕괴 (2011년 ~ 2024년)**: 2011년 시리아 내전 발발은 시리아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산업 시설 파괴, 생산 급감, 교역 단절, 국제 사회의 경제 제재 등으로 인해 경제는 급격히 위축되었다. GDP는 전쟁 이전 대비 80% 이상 감소한 것으로 추정되며, 실업률 급증, 통화 가치 폭락, 초인플레이션, 극심한 빈곤과 식량 부족 등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이 기간 동안 시리아 경제는 사실상 전쟁 경제 체제로 변모했으며, 불법적인 캡타곤 생산 및 밀매가 정권의 주요 자금원이 되기도 했다.
- 정권 교체 이후 (2024년 ~ 현재)**: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들어선 과도 정부는 파탄 난 경제를 재건하고 민생을 안정시켜야 하는 막중한 과제를 안고 있다. 국제 사회의 지원과 투자 유치, 산업 기반 복구, 부정부패 척결, 새로운 경제 시스템 구축 등이 시급한 과제로 남아있다.
8.2. 주요 부문
시리아 경제는 역사적으로 몇몇 주요 부문에 의해 지탱되어 왔으나,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모든 부문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 석유 및 천연가스**: 시리아는 한때 중요한 석유 수출국이었으며, 북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유전이 분포해 있다. 1970년대 이후 석유는 국가의 주요 외화 수입원이었다. 천연가스도 생산되어 주로 국내 소비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내전 기간 동안 많은 유전 지대가 반군이나 ISIL 등 외부 세력에게 장악되거나 파괴되었고, 생산량이 급감했다. 국제 제재 또한 석유 수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파괴된 석유 및 가스 인프라 복구와 생산 정상화가 시급한 과제이지만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지중해 연안 시리아-키프로스 해역에도 상당량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개발은 미미한 상태이다.
- 농업**: 농업은 전통적으로 시리아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GDP와 고용에서 상당한 비중을 담당해왔다. 주요 작물로는 밀, 보리, 목화, 올리브, 과일, 채소 등이 있다. 유프라테스강 유역과 지중해 연안 평야가 주요 농경지이다. 그러나 내전으로 인해 농경지가 황폐화되고 관개 시설이 파괴되었으며, 농촌 인구가 대거 이탈하여 생산량이 크게 감소했다. 물 부족 문제 또한 농업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다. 식량 안보 확보를 위한 농업 부문 재건이 시급하다.
- 제조업**: 내전 이전 시리아의 제조업 부문은 섬유, 식품 가공, 시멘트, 화학제품 등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특히 알레포는 전통적인 산업 중심지였다. 그러나 내전으로 인해 공장들이 파괴되거나 가동을 중단했고, 원자재 공급과 물류 시스템이 마비되면서 제조업 기반이 크게 약화되었다. 알레포 비누와 같은 전통 수공업 제품도 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제조업 부흥을 위해서는 인프라 복구, 투자 유치, 기술 이전 등이 필요하다.
- 관광업**: 시리아는 다마스쿠스 고대 도시, 팔미라 유적 등 풍부한 역사 유적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한때 유망한 관광 산업을 보유했었다. 그러나 내전 발발 이후 관광객의 발길이 완전히 끊겼고, 많은 유적지가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관광 산업은 사실상 붕괴 상태에 있으며, 국가 안정과 유적 복원이 선행되어야 재개를 기대할 수 있다.
8.3. 교통 및 통신

시리아의 교통 및 통신 인프라는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심각하게 손상되었으며, 복구와 현대화가 시급한 과제이다.
- 도로**: 내전 이전 시리아는 비교적 잘 발달된 도로망을 갖추고 있었으며, 총연장은 약 6.99 만 km에 달했고 이 중 약 1103 km는 고속도로였다.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는 간선 도로망이 있었으나, 내전으로 인해 많은 도로와 교량이 파괴되거나 통행이 불가능해졌다.
- 철도**: 시리아 철도공사(CFS)가 국영으로 운영하는 철도망이 있었으며, 총연장은 약 2423 km에 달했다. 주로 화물 수송에 이용되었으며, 튀르키예 등 인접 국가와의 국제선도 운행되었으나 내전으로 대부분 중단되었다.
- 항공**: 주요 국제공항으로는 다마스쿠스 국제공항, 알레포 국제공항, 바셀 알아사드 국제공항(라타키아), 카미실리 공항 등이 있으며, 국영 항공사인 시리아 항공의 허브 공항 역할을 했다. 내전으로 인해 국제선 운항이 크게 축소되었고, 공항 시설도 피해를 입었다.
- 항만**: 라타키아와 타르투스가 지중해 연안의 주요 항구 도시로, 시리아의 해상 무역 관문 역할을 했다. 특히 타르투스항에는 러시아 해군 기지가 위치해 있다.
- 수로**: 약 900 km의 운항 가능한 수로가 있으나 경제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 통신**: 통신 부문은 통신기술부가 관장하며, 국영 기업인 시리아 텔레콤이 유선 전화 및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해왔다. 이동통신 서비스도 보급되어 있었으나, 내전으로 인해 통신망이 크게 파괴되었다. 과거 아사드 정권 하에서는 인터넷 검열이 심했으며, 친정부 성향의 해킹 그룹인 시리아 전자군이 활동하기도 했다. 반정부적인 인터넷 활동가들은 체포 및 구금의 대상이 되었다.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과도 정부는 파괴된 교통 및 통신 인프라 복구와 함께, 과거 정권의 통제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정보 접근 환경 조성이란 과제를 안고 있다.
8.4. 마약 산업
과거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 하에서 시리아는 캡타곤으로 알려진 암페타민 계열의 불법 마약 생산 및 밀매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이 마약 산업은 아사드 정권의 주요 외화벌이 수단이자 경제적 버팀목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권과 연관된 인물들이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파악된다.
시리아에서 생산된 캡타곤은 주로 중동 및 유럽 국가로 밀매되었으며, 그 규모는 연간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2021년 뉴욕 타임스는 시리아를 "세계 최신 마약 국가"로 지칭했으며, 마약 수출액이 합법적인 수출액을 훨씬 초과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도했다. 캡타곤은 시리아의 주요 수출품으로, 연간 최소 미화 34억 달러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며, 이는 시리아의 주요 합법 수출품인 올리브유(연간 약 1억 2,200만 달러)를 훨씬 능가하는 수치였다. 이 불법 마약 거래는 아사드 정권이 국제 사회의 경제 제재를 우회하고 경화를 확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시리아 내전 기간 동안 캡타곤 생산 시설이 시리아 정부군 통제 지역 및 친정부 민병대 활동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24년 12월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새롭게 들어선 시리아 과도 정부는 캡타곤 생산 및 밀매를 근절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이미 시리아 경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된 이 불법 산업을 뿌리 뽑는 것은 상당한 도전 과제가 될 것으로 예상되며, 국제 사회와의 공조가 필수적이다. 캡타곤 생산 및 유통망 해체, 관련자 처벌, 그리고 대체 경제 수단 마련 등이 시급한 과제로 남아있다.
9. 사회
시리아 사회는 다양한 민족, 종교, 문화가 공존하는 다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가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가 강하며, 종교는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오랜 시리아 내전과 정치적 격변은 시리아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인구 구성, 사회 시스템, 가치관 등 여러 면에서 큰 변화를 겪고 있다.
9.1. 인구
연도 | 인구 |
---|---|
1960 | 4,565,000 |
1970 | 6,305,000 |
1981 | 9,046,000 |
1994 | 13,782,000 |
2004 | 17,921,000 |
2011 | 21,124,000 |
2015 (추정) | 18,734,987 |
2019 (추정) | 18,528,105 |
시리아 내전 이전 시리아의 총인구는 약 2,100만 명(2011년 추정)이었으나, 내전으로 인해 막대한 인명 피해와 함께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여 인구 통계에 큰 변화가 있었다. 유엔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550만 명 이상의 시리아인이 국외 난민으로 생활하고 있으며, 610만 명 이상이 국내 실향민 상태이다. 2024년 현재 시리아의 총인구는 약 2,500만 명으로 추정되나, 이는 국내외 난민 상황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
대부분의 인구는 유프라테스강 유역과 지중해 연안 평야 지대에 집중되어 거주한다. 내전 이전 인구 밀도는 1제곱킬로미터당 약 99명이었다. 2008년 미국 난민이민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시리아에는 약 185만 명의 난민 및 망명 신청자가 거주했으며, 이들 대부분은 이라크 출신이었고, 팔레스타인인과 소말리아인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내전으로 인한 인구 변화는 출생률 감소, 사망률 증가, 평균 수명 단축 등으로 나타났다. 특히 젊은 층의 인구 유출이 심각하여 장기적인 국가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된다.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국외로 피난 간 난민들의 귀환 문제와 국내 실향민들의 정착 지원이 시리아 사회의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9.2. 민족 구성


시리아는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는 다민족 국가이다. 주류 민족은 아랍인으로, 전체 인구의 약 74%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아랍인 인구에는 약 6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도 포함된다. (국외 시리아 난민 600만 명은 제외한 수치)
주요 소수 민족은 다음과 같다.
- 쿠르드족: 시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민족 집단으로, 전체 인구의 약 9~10%(약 200만 명)를 차지한다. 이 중 약 4만 명은 야지디교를 믿는 쿠르드족이다. 대부분 시리아 북동부 지역에 거주하며, 쿠르만지어를 주로 사용한다.
- 아시리아인: 시리아의 토착 기독교 민족으로, 약 40만 명으로 추산된다. 주로 북부와 북동부(홈스, 알레포, 카미실리, 하사카)에 거주하며, 많은 이들이 여전히 여러 신아람어 방언을 구어와 문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서부 신아람어를 사용하며, 주로 말룰라, 주바딘, 바카 마을에 거주한다.
- 시리아 투르크멘: 튀르크계 민족으로, 정확한 인구 통계는 없으나 수십만 명에서 최대 35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알레포, 다마스쿠스, 라타키아 등지에 거주한다.
- 아르메니아인: 전체 인구의 약 1%(약 19만 명)를 차지하며, 대부분 아르메니아인 집단살해 당시 시리아로 피난 온 난민들의 후손이다. 시리아는 세계에서 7번째로 큰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가지고 있으며, 주로 알레포, 카미실리, 다마스쿠스, 케사브에 모여 산다.
- 체르케스인: 캅카스 지역에서 이주해 온 민족으로, 전체 인구의 약 1.5%를 차지한다.
이 외에도 알바니아인, 보스니아인, 조지아인, 그리스인, 페르시아인, 파슈툰인, 러시아인 등 소수의 다른 민족 집단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 소수 민족 대부분은 어느 정도 아랍화되었으며, 특히 이슬람교를 믿는 경우 더욱 그러하다.
시리아 디아스포라는 전 세계에 퍼져 있으며, 아랍 세계를 제외하고 가장 큰 규모의 시리아인 공동체는 브라질에 있다. 브라질은 수백만 명의 아랍 및 기타 근동계 혈통 인구를 보유하고 있으며, 아메리카 대륙에서 시리아 난민에게 인도주의 비자를 제공한 최초의 국가이기도 하다. 아르헨티나의 아랍인 대다수는 레바논 또는 시리아계이다.
9.3. 언어
시리아의 공식어는 현대 표준 아랍어이다. 일상생활에서는 다양한 아랍어 방언이 사용되는데, 서부에서는 레반트 아랍어가, 북동부에서는 메소포타미아 아랍어가 주로 사용된다.
아랍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소수 언어들이 사용된다. (화자 수 순서대로)
- 쿠르드어: 주로 시리아 북동부의 쿠르드족이 사용하며, 쿠르만지어 방언이 일반적이다.
- 튀르키예어: 시리아 투르크멘 공동체에서 사용된다.
- 신아람어: 4가지 방언이 존재하며, 아시리아인 공동체와 일부 기독교 공동체에서 사용된다. 특히 서부 신아람어는 말룰라 및 인근 두 마을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고전 시리아어는 다양한 시리아 기독교 교파의 전례 언어로 계속 사용된다. 아람어는 아랍어가 등장하기 전 이 지역의 링구아 프랑카였다.
- 체르케스어
- 체첸어
- 아르메니아어
- 그리스어
이들 소수 언어는 공식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외국어로는 영어와 프랑스어가 널리 사용되나, 영어가 더 자주 사용된다. 프랑스어는 과거 위임통치 시절의 영향으로 일부 교육받은 계층에서 사용된다.
9.4. 종교

시리아는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국가로, 이슬람교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전체 인구의 약 87%~94%가 무슬림이다. 2010년 추정에 따르면 시리아의 종교 구성은 수니파 이슬람이 약 68.4%, 알라위파를 포함한 시아파 이슬람이 약 14.5%, 기독교가 약 11.2%, 드루즈교가 약 3.2%, 기타 종교(예: 영지주의)가 약 2.7%를 차지했다.
- 이슬람교:
- 수니파: 시리아 무슬림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전체 인구의 약 68.4%~74%에 이른다. 대부분의 아랍인과 쿠르드족, 시리아 투르크멘이 수니파에 속한다.
- 시아파: 전체 인구의 약 13%~14.5%를 차지하며, 다양한 분파가 존재한다.
- 알라위파: 시아파의 한 분파로 간주되며, 전체 인구의 약 10%를 차지한다. 과거 아사드 가문이 알라위파 출신으로, 정권의 핵심 지지 기반이었다. 주로 라타키아 등 해안 지역에 거주한다.
- 열두 이맘파와 이스마일파: 아랍인, 쿠르드인, 투르크멘인 일부가 속하며, 전체 시아파 인구의 나머지를 구성한다.
- 기독교: 전체 인구의 약 10%~11.2%를 차지하며, 다양한 교파가 존재한다. 내전 이전에는 약 250만 명에 달했으나, 2023년에는 약 50만 명으로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 안티오키아 그리스 정교회: 시리아 기독교인 중 가장 큰 교파로, 기독교인 인구의 약 45.7%를 차지한다.
- 시리아 정교회: 기독교인 인구의 약 22.4%를 차지한다.
- 동방 가톨릭교회: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교회, 시리아 가톨릭교회, 아르메니아 가톨릭교회, 마론파, 칼데아 가톨릭교회, 라틴 전례 등을 포함하며, 기독교인 인구의 약 16.2%를 차지한다.
-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기독교인 인구의 약 10.9%를 차지한다.
- 아시리아 동방교회 및 기타 소규모 개신교 교파들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시리아에는 많은 기독교 수도원이 존재하며, 많은 시리아 기독교인들은 높은 사회경제적 계층에 속한다.
- 드루즈교: 전체 인구의 약 3% (약 50만 명)를 차지하며, 주로 남부의 자발 드루즈 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한다.
- 야지디교: 쿠르드족 일부가 믿는 소수 종교이다.
- 유대교: 과거에는 다마스쿠스, 알레포, 카미실리 등에 상당한 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으나, 박해와 이주로 인해 현재는 극소수(100명 미만)만 남아있다. 미국에는 여전히 시리아 정부가 시리아 시민으로 간주하는 대규모 시리아 유대인 공동체가 있다.
시리아 헌법은 국교를 정하고 있지 않지만, 과거 바트당 정권 하에서는 대통령이 무슬림이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아사드 가문이 알라위파였기 때문에, 알라위파는 역사적으로 정부 및 군 주요 직책을 장악해왔다.
9.5. 교육


시리아의 교육 제도는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나, 기본적인 학제는 유지되고 있다. 교육은 만 6세부터 12세까지(초등 1학년~중등 3학년에 해당) 무상 의무 교육으로 제공된다.
- 학제**: 기본적으로 6-3-3 학제를 따른다.
- 초등 교육(기본 교육 1단계): 6년 과정 (과거 자료에는 1~4학년으로 표기된 경우도 있으나, 최근 정보는 6년)
- 전기 중등 교육(기본 교육 2단계): 3년 과정
- 후기 중등 교육: 3년 과정. 이 단계에서 일반 인문계 또는 직업 교육 과정을 선택한다. 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인문계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 대학 입학**: 후기 중등 교육을 마치고 국가적으로 시행되는 졸업 시험(바칼로레아) 결과에 따라 대학, 전문대학 또는 특정 직업 학교에 진학한다.
- 고등 교육**: 시리아에는 6개의 국립 대학교와 15개의 사립 대학교가 있다. 주요 국립 대학교로는 다마스쿠스 대학교(2014년 기준 학생 수 21만 명)와 알레포 대학교가 있으며, 주요 사립 대학교로는 시리아 사립 대학교, 아랍 국제 대학교, 칼라문 대학교, 국제 과학 기술 대학교 등이 있다. 경영학 학부 및 대학원 과정을 제공하는 경영 관리 고등 연구소(HIBA)와 같은 고등 교육 기관도 있다.
- 문해율**: 내전 이전인 2011년 기준 15세 이상 인구의 문해율은 남성 90.7%, 여성 82.2%였다.
내전 기간 동안 많은 학교와 교육 시설이 파괴되거나 군사적 목적으로 전용되었으며, 교사 부족과 학생들의 학업 중단 문제도 심각했다. 특히 분쟁 지역에서는 교육 시스템이 거의 붕괴된 상태였다.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교육 시스템 재건과 모든 아동에게 안전한 교육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시리아 과도 정부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다.
9.6. 보건
시리아 내전 이전, 시리아는 비교적 양호한 공공 의료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으나, 내전으로 인해 의료 인프라가 심각하게 파괴되고 의료 서비스 제공에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2010년 기준, 시리아의 보건 의료 지출은 GDP의 3.4%를 차지했다. 2008년에는 인구 1만 명당 의사 14.9명, 간호사 18.5명 수준이었다. 2010년 출생 시 기대수명은 75.7세(남성 74.2세, 여성 77.3세)였다.
내전 기간 동안 병원과 보건소가 폭격 대상이 되거나 점령당했으며, 의료 장비와 의약품 부족이 심각했다. 많은 의료진이 사망하거나 국외로 피난을 떠나 의료 인력 공백도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전염병 발병 위험이 높아졌고, 특히 포위된 지역 주민들은 기본적인 의료 서비스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제 구호 단체들의 의료 지원 활동도 안전 문제와 접근성 제한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주요 건강 지표는 내전으로 인해 크게 악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풍토병으로는 리슈만편모충증 등이 있으며, 전쟁으로 인한 외상, 영양실조, 정신 건강 문제 등이 주요 질병 현황으로 부상했다.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파괴된 의료 시스템 복구, 의료 인력 확보, 의약품 및 의료 장비 공급, 그리고 전 국민에 대한 의료 서비스 접근성 향상이 시리아 과도 정부와 국제 사회의 시급한 과제로 남아있다. 특히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 치료와 장애인 지원 등 장기적인 보건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9.7. 사회 문제
시리아는 오랜 시리아 내전(2011년~2024년)으로 인해 극심한 사회 문제에 직면해 있다.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에도 이러한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으며, 국가 재건과 안정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 난민 문제**: 내전으로 인해 수백만 명의 시리아인이 국내외로 피난을 떠났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550만 명 이상이 국외 난민으로, 610만 명 이상이 국내 실향민으로 집계되었다. 이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식량, 식수, 의료, 교육 등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난민 수용국의 경제적, 사회적 부담도 크다. 과도 정부는 난민 귀환 및 국내 실향민 정착 지원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 빈곤 심화**: 내전으로 경제가 파탄 나면서 인구의 절대다수가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다. 2023년 기준 인구의 90% 이상이 빈곤에 시달리고 있으며, 기본적인 생계유지가 어려운 상황이다.
- 식량 부족**: 농업 생산 기반 파괴, 물류 시스템 붕괴, 구매력 하락 등으로 인해 광범위한 식량 부족 사태가 발생했다. 인구의 80%가 식량 불안에 직면해 있으며, 특히 아동과 취약 계층의 영양실조 문제가 심각하다.
- 높은 실업률**: 경제 활동 위축과 산업 기반 붕괴로 인해 실업률이 극도로 높아졌다. 특히 청년 실업 문제는 사회 불안을 야기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이다.
- 사회 기반 시설 파괴**: 도로, 교량, 학교, 병원, 전력 및 수도 시설 등 국가의 핵심 기반 시설이 내전으로 인해 광범위하게 파괴되었다. 이는 주민들의 일상생활에 큰 불편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국가 재건에도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 인도주의적 위기**: 위에 언급된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시리아는 심각한 인도주의적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국제 사회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나, 정치적 상황과 안전 문제로 인해 구호 활동에도 많은 제약이 따르고 있다.
- 심리적 트라우마 및 사회 통합 문제**: 장기간의 전쟁과 폭력은 시리아 국민들에게 깊은 심리적 상처를 남겼다.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 치료와 더불어,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고 국민적 화해를 이루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다.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이러한 사회 문제 해결은 시리아 과도 정부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이며, 국제 사회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력이 필요하다.
10. 문화

시리아는 오랜 역사와 다양한 문명이 교차했던 지역으로, 풍부하고 다채로운 문화 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가족, 종교, 교육, 자기 수양, 존중을 중시하는 사회이다. 시리아인들의 전통 예술에 대한 취향은 알사마(al-Samah), 다양한 변형의 다브케(Dabkeh), 칼춤 등에서 표현된다. 결혼식과 아이들의 탄생은 민속 풍습을 활기차게 보여주는 계기가 된다.
다마스쿠스, 알레포 등 주요 도시의 구시가지에는 전통 가옥들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이들 가옥은 보통 하나 이상의 안뜰을 중심으로 배치되고 중앙에는 분수대가 있으며 감귤류 나무, 포도나무, 꽃 등으로 장식된다. 대도시 외곽 지역의 주거지는 보통 작은 마을에 집중되어 있으며, 주택은 종종 수백 년 된 것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가족 구성원에게 전해져 내려왔다. 이러한 주택들은 보통 콘크리트와 생벽돌로 지어지며 페인트칠을 하지 않아 단순한 갈색과 회색 톤을 띤다.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많은 문화 유산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며, 문화 활동 또한 크게 위축되었다.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문화 유산 복원과 문화 예술 활동 부흥이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10.1. 문학
시리아 문학은 아랍 문학에 중요한 기여를 해왔으며, 구전 및 문자 시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가지고 있다. 19세기 나흐다(아랍 문학 및 문화 부흥 운동) 시기에는 이집트로 이주한 많은 시리아 작가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현대 시리아의 저명한 작가로는 아도니스, 무함마드 마구트, 하이дар 하이дар, 가다 알삼만, 니자르 카바니, 자카리야 타메르 등이 있다.
바트당 통치 하에서는 검열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빌 술레이만, 파와즈 하다드, 카이리 알다하비, 니하드 시리스 등이 주도한 역사 소설 장르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비판하고 반체제적 목소리를 내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역사 소설의 하위 장르인 시리아 민담은 마술적 사실주의와 결합하여 현재에 대한 은유적인 비판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스웨덴에 거주하는 시리아 망명 작가 살림 바라카트는 이 장르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다. 현대 시리아 문학은 또한 누하드 샤리프, 탈립 움란 등의 작가들이 이끄는 과학 소설과 미래 유토피아 장르를 포함하며, 이 역시 반체제적 표현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
10.2. 음악
시리아의 음악, 특히 다마스쿠스의 음악계는 오랫동안 아랍 고전 음악 분야에서 아랍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곳 중 하나였다. 시리아는 아스마한, 파리드 알아트라쉬, 가수 레나 샤마미안 등 여러 범아랍 스타를 배출했다. 알레포 시는 무와샤(안달루시아의 노래 형식 시)로 유명하며, 이는 사브리 무달랄에 의해 대중화되었고, 사바 파크리와 같은 인기 스타들도 배출했다. 다브케를 비롯한 다양한 민속 셔플 댄스 음악도 인기가 있다.
또한 시리아는 시리아 성가로 알려진 기독교 성가의 초기 중심지 중 하나였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여러 시리아 기독교 교파의 전례 음악으로 사용되고 있다. 과거에는 시리아 유대인들의 독특한 종교 음악 전통이 있었으며, 이는 현재 뉴욕의 시리아 유대인 공동체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10.3. 대중 매체

시리아에 텔레비전이 도입된 것은 1960년으로, 당시 시리아와 이집트가 아랍 연합 공화국의 일부였을 때였다. 1976년까지 흑백으로 방송되었다. 시리아 연속극(드라마)은 동부 아랍 세계 전역에서 상당한 시장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
과거 바트당 정권 하에서는 거의 모든 시리아 언론 매체가 국영이었으며, 정부는 여러 정보기관(슈바트 알무카바라트 알아스카리야 등)을 운영하며 많은 요원을 고용했다. 언론에 대한 통제와 검열이 심했으며,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는 억압되었다. 시리아 내전 기간 동안 많은 시리아 예술가, 시인, 작가, 활동가들이 투옥되었고, 일부는 살해당했으며, 그중에는 유명한 만화가 아크람 라슬란도 포함되어 있다.
2024년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시리아 과도 정부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과거 정권의 언론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정치 환경에서 언론이 얼마나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을지는 아직 불확실하며, 다양한 정치 세력의 영향과 사회적 불안정 요소들이 존재한다. 독립적이고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대중 매체의 발전은 시리아의 민주적 전환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10.4. 음식
시리아 요리는 재료가 풍부하고 다양하며, 특정 요리가 유래한 지역과 연관되어 있다. 시리아 음식은 주로 남부 지중해, 그리스, 서남아시아 요리로 구성된다. 일부 시리아 요리는 터키와 프랑스 요리에서 발전하기도 했다. 시시 케밥, 속을 채운 주키니/쿠르제트, 야브라(يبرق야브라크아랍어, 속을 채운 포도잎, '야브라크'라는 단어는 잎을 의미하는 터키어 '야프락'에서 유래)과 같은 요리가 대표적이다.
주요 요리로는 키베, 훔무스, 타불레, 파투시, 라브네, 샤와르마, 무잣다라, 샨클리시, 파스트르마, 수주크, 바클라와 등이 있다. 바클라와는 필로 반죽에 다진 견과류를 채우고 꿀에 적신 디저트이다. 시리아인들은 종종 메인 코스 전에 메제로 알려진 다양한 전채 요리를 제공한다. 자타르, 다진 소고기, 치즈 마나키시는 인기 있는 오르되브르이다. 아랍 평빵인 쿠브즈는 항상 메제와 함께 먹는다.
음료는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다양하다. 아랍 커피는 가장 잘 알려진 뜨거운 음료로, 보통 아침 식사 때나 저녁에 준비된다. 손님에게 대접하거나 식사 후에 주로 제공된다. 알코올 음료인 아라크는 잘 알려진 음료로, 주로 특별한 경우에 제공된다. 다른 시리아 음료로는 아이란, 잘라브, 화이트 커피, 그리고 알 샤르크라는 현지 맥주가 있다.
10.5. 스포츠
시리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이다. 1966년에 프로 축구 리그인 시리아 프리미어리그가 창설되었으며, 창설 이후 알자이슈 SC가 리그 최다인 17회 우승을 포함하여 압도적인 강세를 보여왔다.
시리아 축구 협회(SFA)가 구성하는 시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아직까지 FIFA 월드컵 본선 진출 경험은 없다. AFC 아시안컵에는 7번 출전했으며, 2023년 대회에서는 16강에 진출하는 성적을 거두었다.
시리아는 올림픽에는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처음 참가했다. 그 이후 중동전쟁 등의 영향으로 참가와 불참을 반복했으나,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이후로는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 그러나 동계 올림픽 참가 경험은 없다. 2021년 도쿄 올림픽에서는 역도 남자 109kg 이상급에서 만 아사드가 시리아 선수로는 4개 대회 만에 메달(동메달)을 획득했다.
이 외에도 농구, 레슬링, 권투 등도 시리아에서 인기 있는 스포츠 종목이다.
10.6. 세계유산

시리아는 풍부한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다수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일부 유산이 심각하게 손상되거나 파괴 위험에 처하기도 했으나, 그 역사적, 문화적 가치는 여전히 높이 평가받고 있다. 다음은 시리아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이다.
- 다마스쿠스 고대 도시 (1979년 등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는 다양한 시대의 건축물과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우마이야 모스크가 대표적이다.
- 팔미라 유적 (1980년 등재):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였던 팔미라의 광대한 유적으로, 로마 양식과 페르시아 양식이 결합된 독특한 건축물들이 남아있다. 내전 중 ISIL에 의해 일부 중요 유적이 파괴되는 아픔을 겪었다.
- 보스라 고대 도시 (1980년 등재): 잘 보존된 로마 시대 원형 극장으로 유명하며, 나바테아, 로마, 비잔틴, 이슬람 시대의 다양한 유적이 남아있다.
- 알레포 고대 도시 (1986년 등재): 중세 시대의 중요한 교역 도시였던 알레포의 구시가지로, 성채, 모스크, 시장(수크), 카라반사라이 등이 남아있다. 내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 크락 데 슈발리에와 칼라트 살라딘 (2006년 등재): 중세 십자군 시대의 대표적인 성채들로, 뛰어난 군사 건축 기술을 보여준다.
- 시리아 북부의 고대 마을 (2011년 등재): 로마 후기 및 비잔틴 시대에 번성했던 약 40개의 고대 마을 유적으로, 당시 농촌 생활과 기독교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이들 세계유산은 인류 공동의 자산으로,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시리아의 안정과 함께 체계적인 복원 및 보존 노력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
10.7. 축제
시리아는 다양한 종교적 배경과 오랜 전통을 바탕으로 여러 축제를 기념한다. 주요 축제는 다음과 같다.
- 이슬람교 관련 축제**:
- 이드 알아드하 (희생제): 이슬람력 12월 10일부터 며칠간 열리는 가장 큰 축제 중 하나로, 이브라힘이 아들 이스마일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것을 기념한다. 양이나 염소를 제물로 바치고 가족, 친지, 가난한 이웃과 음식을 나눈다.
- 이드 알피트르 (단식 종료 대축제): 라마단 단식월이 끝난 후 열리는 축제로, 새로운 옷을 입고 특별한 음식을 나누며 서로 축하한다.
- 마울리드 알나비 (예언자 탄생일): 예언자 무함마드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로, 다양한 종교 행사와 모임이 열린다.
- 기독교 관련 축제**:
- 부활절: 그레고리력과 율리우스력을 따르는 교파에 따라 날짜가 다를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중요한 축제이다. 특별 예배와 가족 모임이 이루어진다.
- 크리스마스: 12월 25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다.
- 국가 기념일 및 전통 민속 축제**:
- 새해 첫날: 1월 1일.
- 3월 8일 혁명 기념일: 1963년 바트당 집권을 기념하는 날이다. (과거 아사드 정권 시절)
- 어머니날: 3월 21일.
- 아시리아 새해 (카 비니산): 4월 1일, 주로 카미실리 등지에서 아시리아인들이 기념한다.
- 독립기념일: 4월 17일, 1946년 프랑스군의 완전 철수를 기념하는 날이다.
- 노동절: 5월 1일.
- 순국자의 날: 5월 6일, 1916년 오스만 제국의 아흐메트 제말 파샤가 다수의 시리아 민족주의자들을 처형한 것을 추모하는 날이다.
- 10월 해방 전쟁 기념일: 10월 6일, 욤키푸르 전쟁(제4차 중동전쟁) 발발을 기념하는 날이다. (과거 아사드 정권 시절)
- 꽃 축제: 4월, 라타키아.
- 전통 축제: 5월, 팔미라.
- 국제 꽃 박람회: 5월, 다마스쿠스.
- 시리아 노래 축제: 7월, 알레포.
- 마르마리타 축제: 8월, 홈스.
- 크락 데 슈발리에 및 와디 알나사라 예술 문화 축제: 8월, 홈스.
- 포도 축제: 9월, 수와이다.
- 목화 축제: 9월, 알레포.
- 다마스쿠스 국제 박람회: 9월, 다마스쿠스.
- 사랑과 평화 축제: 8월, 라타키아.
- 보스라 축제: 9월, 보스라.
- 영화 및 연극 축제: 11월, 다마스쿠스.
- 자블레 문화 축제: 7월, 자블레.
- 재스민 축제: 4월, 다마스쿠스.
시리아 내전과 정치적 상황 변화로 인해 일부 축제의 성격이나 규모가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아사드 정권 붕괴 이후, 국가 정체성과 관련된 기념일이나 축제는 재검토되거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