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우루과이 동방공화국, 약칭 우루과이는 남아메리카 남동부에 위치한 공화국이다. 북쪽과 북동쪽으로는 브라질, 서쪽과 남서쪽으로는 아르헨티나와 국경을 접하며, 남쪽으로는 라플라타강, 남동쪽으로는 대서양에 면해 있다. 남아메리카의 코노 수르 지역의 일부이다. 우루과이의 국토 면적은 약 17.62 만 km2이며, 인구는 약 350만 명으로, 그중 약 200만 명이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인 몬테비데오의 수도권 지역에 거주한다.
우루과이 지역에는 약 13,000년 전부터 수렵채집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유럽인이 처음 도착했을 당시 주요 원주민 부족은 차루아족이었으며, 과라니족, 차나족 등 다른 부족들도 존재했다. 1680년 포르투갈이 콜로니아델사크라멘토를 건설하면서 유럽인의 식민화가 시작되었으나, 주변 국가들에 비해 늦게 이루어졌다. 스페인은 18세기 초 이 지역에 대한 경쟁적 영유권 주장 속에서 몬테비데오를 군사 거점으로 건설했다. 우루과이는 1811년에서 1828년 사이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고 이후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간의 4자간 투쟁 끝에 독립을 쟁취했다. 19세기 전반에 걸쳐 외세의 영향과 간섭을 받았으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다수의 선구적인 경제, 노동, 사회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고도로 발전된 복지 국가를 건설하였고, 이로 인해 '아메리카의 스위스'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의 경제 위기와 극좌 도시 게릴라 활동은 1973년 군부 쿠데타로 이어져 1985년까지 시민-군부 독재 체제가 수립되었다.
오늘날 우루과이는 대통령제를 채택한 민주공화국으로, 대통령이 국가원수와 정부수반을 겸한다. 2023년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의 민주주의 지수에서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었으며, 정부 투명성, 경제적 자유, 사회 발전, 소득 평등, 1인당 소득, 혁신, 인프라 등 국제 평가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하고 있다. 세계 최초로 대마초를 전면 합법화했으며, 동성결혼과 낙태도 합법화했다. 유엔, OAS, 메르코수르의 창립 회원국이다.
2. 어원
우루과이라는 국명은 우루과이강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원주민 언어인 과라니어에서 비롯되었다.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하는데, 그중 하나는 '새의 강'이라는 의미로, "(우루)라는 새가 사는 강"을 뜻한다. 이는 차루아어를 통해 전해진 것으로 보이며, urú우루과라니어는 야생 조류를 통칭하는 일반 명사이다. 다른 해석으로는 그 강가에 풍부했던 uruguá우루과과라니어(폼벨라 메가스토마)라는 강달팽이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해석 중 하나는 우루과이의 저명한 시인 후안 소리야 데 산 마르틴이 제시한 "색칠된 새들의 강"이다. 이 해석은 학문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우루과이 내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문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스페인 식민 시대와 그 이후 한동안 우루과이와 일부 인접 지역은 '반다 오리엔탈 [델 우루과이]반다 오리엔탈스페인어'(우루과이강 동쪽 강둑)으로 불렸고, 그 후 몇 년간은 '동방주'로 불렸다. 독립 이후 국가는 'República Oriental del Uruguay레푸블리카 오리엔탈 델 우루과이스페인어'로 알려졌으며, 이는 문자 그대로 '우루과이강 동쪽 공화국'을 의미한다. 공식적으로는 'República Oriental del Uruguay우루과이 동방 공화국스페인어'으로 번역된다.
3. 역사
우루과이의 역사는 선콜럼버스 시대 원주민 사회에서부터 시작하여 유럽 식민 지배, 독립 투쟁, 내전과 국가 형성, 20세기 초 복지 국가 건설, 군부 독재와 민주화 과정을 거쳐 현대에 이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우루과이는 주변 강대국들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국가 정체성을 확립해왔다.
3.1. 선콜럼버스 시대 및 식민 초기
우루과이 지역에는 약 13,000년 전부터 수렵채집민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16세기 유럽인들과 처음 접촉했을 당시에는 약 9,000명의 차루아족과 6,000명의 차나족, 그리고 일부 과라니족 섬 정착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나라 동부 지역에는 "세리토스 데 인디오스"로 알려진 인공 고분군이 광범위하게 분포하며, 그중 일부는 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고분을 만든 사람들에 대해서는 문자로 기록된 유물이 없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콜럼버스 이전 시대의 농업과 멸종된 콜럼버스 이전 시대의 개에 대한 증거가 발견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은 1512년 현재의 우루과이 지역에 처음으로 들어온 유럽인들이었다. 스페인은 1515년 현재의 우루과이에 도착하여 왕실 영토임을 주장하며 처음으로 발을 디뎠다. 원주민들의 정복에 대한 격렬한 저항과 가치 있는 자원의 부재로 인해 16세기와 17세기 동안 이 지역의 유럽인 정착은 제한적이었다. 그 후 우루과이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제국 간의 분쟁 지역이 되었다. 1603년 스페인인들은 소를 들여오기 시작했고, 이는 지역적 부의 원천이 되었다. 최초의 영구적인 스페인 정착지는 1624년 리오 네그로강 유역의 소리아노에 세워졌다. 1669년부터 1671년까지 포르투갈인들은 콜로니아델사크라멘토에 요새를 건설했다.
현재 우루과이의 수도인 몬테비데오는 18세기 초 스페인인들에 의해 군사 거점으로 건설되었다. 몬테비데오의 천연 항구는 곧 라플라타강 부왕령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경쟁하는 상업 지역으로 발전했다. 19세기 초 우루과이의 역사는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및 기타 식민 세력 간의 플라티네 지역 지배를 위한 지속적인 싸움으로 점철되었다. 1806년과 1807년, 영국군은 나폴레옹 전쟁의 일환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몬테비데오를 점령하려 시도했다. 몬테비데오는 1807년 2월부터 9월까지 영국군에게 점령당했다.
3.2. 독립 투쟁

1811년, 우루과이의 민족 영웅이 된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는 스페인 당국에 대항하여 성공적인 반란을 일으켜 5월 18일 라스피에드라스 전투에서 그들을 격파했다. 1813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새 정부는 제헌 의회를 소집했고, 여기서 아르티가스는 연방주의의 옹호자로 부상하여 각 지역, 특히 반다오리엔탈의 정치적, 경제적 자치권을 요구했다. 의회는 반다 오리엔탈 대표단의 의석을 거부했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중앙집권적 단일 체제를 추구했다.
그 결과, 아르티가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결별하고 몬테비데오를 포위하여 1815년 초에 도시를 점령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군대가 철수한 후, 반다 오리엔탈은 최초의 자치 정부를 임명했다. 아르티가스는 그의 보호 아래 연방 동맹을 조직했으며, 이 동맹은 6개 주로 구성되었고 그중 5개 주는 나중에 아르헨티나의 일부가 되었다.
1816년, 1만 명의 포르투갈 군대가 브라질에서 반다 오리엔탈을 침공하여 1817년 1월 몬테비데오를 점령했다. 거의 4년간의 투쟁 끝에, 포르투갈-브라질 연합왕국은 반다 오리엔탈을 "시스플라티나"라는 이름의 주로 병합했다. 브라질 제국은 1822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했다. 병합에 대한 대응으로, 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가 이끄는 33인의 동부인은 리오데라플라타 합중국(현재의 아르헨티나)의 지원을 받아 1825년 8월 25일 독립을 선언했다. 이는 500일간 지속된 시스플라티나 전쟁으로 이어졌다. 어느 쪽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고, 1828년 영국의 존 폰슨비 자작의 외교적 노력을 통해 체결된 몬테비데오 조약은 우루과이를 독립 국가로 탄생시켰다. 8월 25일은 독립 기념일로, 국경일로 기념된다. 우루과이의 첫 헌법은 1830년 7월 18일에 채택되었다.
3.3. 19세기: 내전과 국가 형성

독립 당시 우루과이의 인구는 약 75,000명 미만으로 추정되었다. 우루과이 정치계는 두 정당으로 분열되었다. 제2대 대통령 마누엘 오리베가 이끄는 보수적인 블랑코당(백당)은 농촌의 농업 이익을 대변했고, 초대 대통령 프룩투오소 리베라가 이끄는 자유주의적인 콜로라도당(홍당)은 몬테비데오의 사업 이익을 대변했다. 우루과이 정당들은 이웃 아르헨티나의 적대적인 정치 세력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이는 우루과이 문제에 개입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콜로라도당은 망명한 아르헨티나 자유주의 단일파를 지지했는데, 이들 중 다수는 몬테비데오에 피신해 있었다. 반면 블랑코당 대통령 마누엘 오리베는 아르헨티나 통치자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와 가까운 친구였다. 1838년 6월 15일, 콜로라도당 지도자 리베라가 이끄는 군대가 오리베 대통령을 타도했고, 오리베는 아르헨티나로 도피했다. 리베라는 1839년 로사스에게 선전포고했다. 이 분쟁은 13년간 지속되었으며, 대전쟁(Guerra Grande)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843년, 아르헨티나 군대가 오리베를 대신하여 우루과이를 점령했지만 수도를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몬테비데오 공성전은 1843년 2월에 시작되어 9년간 지속되었다. 포위된 우루과이인들은 거주 외국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로 인해 프랑스 군단과 이탈리아 군단이 결성되었으며, 후자는 망명 중이던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끌었다.

1845년, 영국과 프랑스는 이 지역의 정상적인 상거래를 회복시키기 위해 로사스에 대항하여 개입했다. 그들의 노력은 효과가 없었고, 1849년 전쟁에 지친 양국은 로사스에게 유리한 조약을 체결한 후 철수했다. 아르헨티나 엔트레리오스주 주지사인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가 이끄는 로사스에 대한 봉기가 시작되면서 몬테비데오가 마침내 함락될 것처럼 보였다. 1851년 5월 콜로라도당을 대신한 브라질의 개입과 봉기가 결합되면서 상황이 바뀌었고 오리베는 패배했다. 몬테비데오 공성전은 해제되었고 대전쟁은 마침내 끝났다. 몬테비데오는 브라질의 지원에 보답하여 브라질이 우루과이 내정에 개입할 권리를 확인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1851년 조약에 따라 브라질은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마다 우루과이에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1865년, 삼국 동맹은 브라질 황제, 아르헨티나 대통령, 그리고 그들 모두가 권력을 잡도록 도왔던 우루과이 정부 수반인 콜로라도당 장군 베난시오 플로레스에 의해 결성되었다. 삼국 동맹은 파라과이 지도자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에게 선전포고했다. 그 결과 파라과이 전쟁은 파라과이 침공과 세 나라 군대에 의한 패배로 끝났다. 몬테비데오는 브라질 해군의 보급 기지로 사용되었고, 전쟁 중 번영과 상대적인 평온의 시기를 경험했다.

우루과이 최초의 철도 노선은 1867년에 건설되었고, 마차 열차로 구성된 지선이 개통되었다. 현재의 우루과이 국영 철도는 2900 km의 확장 가능한 철도망을 유지하고 있다.
로렌소 바트예 이 그라우 장군(1868-72)의 헌정 정부는 블랑코당의 창의 혁명을 진압했다. 2년간의 투쟁 끝에 1872년 평화 협정이 체결되어 블랑코당은 4개 주를 통제함으로써 정부의 봉급과 기능에 대한 지분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공동 참여 정책의 수립은 집권당과 야당의 공존에 기반한 새로운 타협 공식을 모색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 협정에도 불구하고 콜로라도당의 통치는 1875년 실패한 삼색 혁명과 1886년 케브라초 혁명으로 위협받았다.
콜로라도당이 블랑코당을 단 3개 주로 축소하려는 노력은 1897년 블랑코당 봉기를 야기했고, 이는 16개 주를 창설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블랑코당은 이제 그중 6개 주를 통제하게 되었다. 블랑코당은 의회 의석의 1/3을 할당받았다. 이러한 권력 분할은 호세 바트예 이 오르도녜스 대통령이 정치 개혁을 단행할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이는 1904년 블랑코당의 마지막 봉기를 야기했고, 마솔레르 전투와 블랑코당 지도자 아파리시오 사라비아의 사망으로 끝났다.
1875년에서 1890년 사이에 군부가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이 권위주의 시대 동안 정부는 국가를 현대 국가로 조직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여 경제적, 사회적 변혁을 장려했다. 주로 사업가, 아센다도, 산업가로 구성된 압력 단체들이 조직되어 정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과도기(1886-90)가 이어졌고, 이 기간 동안 정치인들은 잃어버린 입지를 회복하기 시작했으며 일부 민간인의 정부 참여가 이루어졌다. 대전쟁 이후, 주로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온 이민자 수가 급증했다. 1879년까지 우루과이의 총인구는 438,500명 이상이었다. 경제는 가축 사육과 수출에서 급격한 상승세를 보였다. 몬테비데오는 이 지역의 주요 금융 중심지이자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로부터의 상품 앙트르포가 되었다.
3.4. 20세기 초: 바트예 시대와 복지 국가

콜로라도당 지도자 호세 바트예 이 오르도녜스는 1903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블랑코당은 농촌 반란을 주도했고, 그들의 지도자 아파리시오 사라비아가 전투에서 사망하기 전까지 8개월간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이어졌다. 정부군이 승리하면서 1872년에 시작된 공동 참여 정치는 종식되었다. 바트예는 두 차례의 임기(1903-07년, 1911-15년) 동안 복지 프로그램, 경제에 대한 정부 참여, 복수 행정부와 같은 주요 개혁을 단행했다. 이 시기 우루과이는 높은 수준의 복지 제도를 갖추며 '남미의 스위스'로 불리게 되었다.
가브리엘 테라는 1931년 3월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취임은 대공황의 영향과 일치했고, 일자리 부족으로 인해 사회 분위기는 긴장되었다. 경찰과 좌파가 사망하는 충돌이 있었다. 1933년 테라는 쿠데타를 조직하여 총회를 해산하고 포고령으로 통치했다. 1934년 새 헌법이 공포되어 대통령에게 권력이 이양되었다. 일반적으로 테라 정부는 경제 민족주의와 사회 개혁을 약화시키거나 무력화했다.
1938년 총선거가 치러졌고 테라의 매부인 알프레도 발도미르 장군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조직 노동계와 국민당의 압력으로 발도미르는 자유 선거, 언론의 자유, 새 헌법을 옹호했다. 발도미르는 1939년 우루과이를 중립국으로 선언했지만, 영국 군함과 독일 군함 아드미랄 그라프 슈페는 우루과이 해안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아드미랄 그라프 슈페는 중립항이라는 명분으로 몬테비데오에 피신했지만 나중에 출항 명령을 받았다.

1945년 우루과이는 연합국 선언에 공식적으로 서명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독일과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전쟁이 끝난 후 유엔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
1960년대에는 투파마로스로 알려진 마르크스-레닌주의 도시 게릴라 무장 단체가 등장하여 은행 강도, 납치, 암살과 같은 활동을 벌였으며 정부 전복을 시도하기도 했다.
3.5. 군부 독재와 민주화

호르헤 파체코 대통령은 1968년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1972년에는 시민 자유를 더욱 정지시켰다. 1973년 경제적,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후안 마리아 보르다베리 대통령의 요청으로 군부는 의회를 해산하고 시민-군부 정권을 수립했다. CIA의 지원을 받은 정치적 탄압과 국가 테러 작전에는 정보 작전과 반대파 암살이 포함되었으며, 이는 콘도르 작전으로 불렸다.
한 자료에 따르면, 1973년부터 1985년까지 12년간의 시민-군부 통치 기간 동안 약 180명의 우루과이인이 살해되거나 실종되었으며, 수천 명이 불법적으로 구금되고 고문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은 아르헨티나와 다른 인접 국가에서 살해되었으며, 그중 36명은 우루과이에서 살해되었다. 데이비드 알트만이 인용한 에디 카우프만에 따르면, 당시 우루과이는 세계에서 1인당 정치범 수가 가장 많았다. "1976년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국제앰네스티를 대신하여 증언한 카우프만은 우루과이인 5명 중 1명이 망명했고, 50명 중 1명이 구금되었으며, 500명 중 1명이 감옥에 갔다고 추정했다(대부분 고문당했다)." 사회 지출은 줄어들었고 많은 국영 기업이 민영화되었다. 그러나 경제는 개선되지 않았고 1980년 이후 악화되었다. 국내총생산(GDP)은 20% 감소했고 실업률은 17%로 상승했다. 국가는 파산하는 기업과 은행을 구제하려 개입했다.
군부가 작성한 새 헌법은 1980년 11월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었다. 국민투표 이후 군부는 민간 통치로의 복귀 계획을 발표했고, 1984년 총선거가 치러졌다. 콜로라도당 지도자 훌리오 마리아 상기네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85년부터 1990년까지 재임했다. 첫 상기네티 행정부는 경제 개혁을 시행하고 군부 통치 기간 이후 민주주의를 공고히 했다. 국민당의 루이스 알베르토 라카예가 1989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고, 국민투표는 인권 유린자들에 대한 사면을 승인했다. 상기네티는 1994년에 재선되었다. 두 대통령 모두 민주주의 회복 이후 시작된 경제 구조 개혁을 계속했다.
3.6. 21세기: 최근 동향

1999년 총선은 1996년 헌법 개정으로 수립된 새로운 선거 제도하에 치러졌다. 국민당의 지원을 받은 콜로라도당 후보 호르헤 바트예가 확대 전선 후보 타바레 바스케스를 물리쳤다. 공식적인 연립 정부는 2002년 11월 블랑코당이 내각에서 장관들을 철수시키면서 끝났지만, 블랑코당은 대부분의 문제에서 콜로라도당을 계속 지지했다. 우루과이 주요 수출 시장(브라질의 헤알 평가절하로 시작하여 2002년 아르헨티나)의 낮은 원자재 가격과 경제적 어려움은 심각한 경기 침체를 야기했다. 경제는 11% 위축되었고, 실업률은 21%로 치솟았으며, 빈곤층 우루과이인의 비율은 30% 이상으로 증가했다.
2004년, 우루과이인들은 타바레 바스케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동시에 확대 전선에 상하 양원 모두에서 과반수 의석을 부여했다. 바스케스는 경제 정통성을 고수했다.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고 경제가 침체에서 회복되면서 그는 외국인 투자를 세 배로 늘리고, 빈곤과 실업을 줄였으며, 공공 부채를 GDP의 79%에서 60%로 줄이고 인플레이션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2009년, 군부 통치 기간 동안 거의 15년간 투옥되었던 전 좌익 게릴라 지도자(투파마로스) 호세 무히카가 확대 전선이 두 번째로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새 대통령으로 부상했다. 낙태는 2012년에 합법화되었고, 이듬해에는 동성 결혼과 대마초가 합법화되어 우루과이는 현대에 대마초를 합법화한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2014년, 타바레 바스케스는 비연속적인 두 번째 대통령 임기로 선출되어 2015년 3월 1일에 임기를 시작했다. 2020년, 15년간의 좌파 통치 이후 보수적인 국민당 소속의 루이스 알베르토 라카예 포우가 제42대 우루과이 대통령으로 그 뒤를 이었다.
4. 지리
우루과이는 지리적으로 남아메리카 남동부에 위치하며, 국토 면적은 약 17.62 만 km2의 대륙 육지와 14.22 만 km2의 관할 수역 및 작은 강 섬으로 구성되어, 남아메리카에서는 수리남 다음으로 작은 주권 국가이다. 지형은 대부분 완만한 평원과 낮은 구릉지대(cuchillas)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옥한 해안 저지대가 특징이다. 해안선 길이는 약 660 km이다.
4.1. 지형과 영토
우루과이의 지형은 대부분 완만한 평원과 낮은 구릉지대(cuchillas)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옥한 해안 저지대가 특징이다. 국토의 최고점은 시에라 카라페 구릉지에 있는 카테드랄 산으로, 해발 514 m에 달한다. 남서쪽에는 우루과이강의 하구인 라플라타강이 있으며, 이 강은 우루과이의 서쪽 국경을 형성한다.
우루과이는 4개의 강 유역 또는 삼각주(라플라타강 유역, 우루과이강, 메린호, 네그로강)로 구성된 촘촘한 하천망으로 덮여 있다. 주요 내륙 강은 네그로강('검은 강')으로, 1945년에 댐이 건설되어 우루과이 중앙에 인공 호수인 린콘델보네테호가 형성되었다. 대서양 연안에는 여러 석호가 있다.
몬테비데오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수도이며, 세계에서는 캔버라와 웰링턴 다음으로 세 번째로 남쪽에 있다. 우루과이는 남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남회귀선 남쪽에 완전히 위치한 국가이며, 위도상 가장 북쪽 지점을 기준으로 할 때 세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주권 국가이다. 우루과이에는 10개의 국립공원이 있으며, 동부 습지 지역에 5개, 중부 구릉지대에 3개, 서부 우루과이강을 따라 1개가 있다. 우루과이는 우루과이 사바나 육상 생태 지역의 본고장이다. 이 나라의 2019년 산림 경관 보전 지수 평균 점수는 3.61/10으로, 172개국 중 세계 147위를 차지했다.
4.2. 기후
전적으로 남부 온대 지역에 위치한 우루과이는 전국적으로 비교적 온화하고 상당히 균일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쾨펜 기후 구분에 따르면, 국토의 대부분은 온난 습윤 기후(Cfa)에 속한다. 대서양 연안의 일부 지역과 쿠치야 그란데의 가장 높은 언덕 정상에서만 해양성 기후(Cfb)가 나타난다.
우루과이는 사계절이 뚜렷하며, 여름은 12월부터 3월까지, 겨울은 6월부터 9월까지이다. 계절 변화는 뚜렷하지만 극단적인 기온 변화는 드물다. 여름은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완화되며, 겨울의 혹한은 알려져 있지 않다. 너무 춥지는 않지만 겨울철에는 매년 서리가 내리고, 진눈깨비나 우박과 같은 강수 현상이 거의 매 겨울 발생하지만 눈은 매우 드물다. 높은 고도에서는 몇 년에 한 번씩 눈이 내리지만 거의 쌓이지 않는다. 물이 풍부한 만큼 습도가 높고 안개가 자주 낀다.
날씨 장벽 역할을 하는 산이 없어 모든 지역이 강풍과 전선이나 폭풍이 나라를 휩쓸 때 급격한 날씨 변화에 취약하다. 이러한 폭풍은 강할 수 있으며, 스콜, 우박, 때로는 토네이도를 동반할 수 있다. 우루과이는 온대 저기압을 경험하지만, 남대서양이 열대 저기압 발생에 충분히 따뜻하지 않기 때문에 열대 저기압은 발생하지 않는다. 여름과 겨울 날씨 모두 폭풍 전선이 지나가면서 매일 바뀔 수 있으며, 때로는 뜨거운 북풍 뒤에 아르헨티나 팜파스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팜페로)이 이어질 수 있다.
기온과 강수량 모두 전국적으로 상당히 균일하지만, 지역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연평균 기온은 17.5 °C이며, 남동쪽의 16 °C에서 북서쪽의 19 °C까지 다양하다. 겨울철 일평균 기온은 남쪽의 11 °C에서 북쪽의 14 °C까지이며, 여름철 일평균 기온은 남동쪽의 21 °C에서 북서쪽의 25 °C까지이다. 남동쪽은 특히 봄철에 나머지 지역보다 상당히 시원한데, 겨울 이후 차가운 바닷물이 공기를 냉각시키고 해당 지역에 더 많은 습도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부 지역은 북부 지역보다 강수량이 적다. 예를 들어, 몬테비데오는 연간 약 1100 mm의 강수량을 기록하는 반면, 북동쪽의 리베라시는 1600 mm의 강수량을 기록한다. 가장 많은 강수량은 가을철에 발생하지만, 겨울철에 더 잦은 비가 내린다. 그러나 가뭄이나 과도한 비는 연중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해수면에서의 전국 극단 기온은 파이산두시(1943년 1月 20일)와 플로리다시(2022년 1月 14일)에서 기록된 44 °C, 멜로시(1967년 6月 14일)에서 기록된 -11 °C이다.
4.3. 주요 강과 호수
우루과이의 주요 강으로는 국경을 이루는 우루과이강, 국토 중앙을 가로지르는 네그로강, 그리고 남쪽의 넓은 하구인 라플라타강이 있다. 네그로강에는 대규모 인공호수인 린콘델보네테호가 조성되어 수력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부 해안에는 메린호와 같은 여러 석호가 분포하며, 이는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다. 이들 강과 호수는 우루과이의 농업, 교통,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5. 정치
우루과이는 대통령제를 채택한 대의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정부가 구성된다. 국가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정부가 운영되며, 입법부는 양원제로, 사법부는 독립적인 사법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정당으로는 역사적으로 콜로라도당과 국민당이 양대 세력을 이루었으나, 최근에는 확대 전선과 같은 좌파 연합이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다. 선거는 보통선거 원칙에 따라 정기적으로 실시된다.
5.1. 정부 구조
우루과이는 대의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다. 정부 구성원은 보통선거 제도를 통해 5년 임기로 선출된다. 우루과이는 단일 국가로서 사법, 교육, 보건, 안보, 외교 정책 및 국방은 모두 전국적으로 관리된다. 행정권은 대통령과 14명의 장관으로 구성된 내각에 의해 행사된다.

입법권은 총회에 의해 구성되며, 양원제로 이루어져 있다. 하원은 19개 주를 대표하는 99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비례대표제에 따라 5년 임기로 선출된다. 상원은 31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그중 30명은 비례대표제로 5년 임기로 선출되고, 부통령은 상원의장을 겸하며 투표권을 갖는다.
사법권은 대법원, 법관 및 전국 판사들에 의해 행사된다. 대법원 구성원은 총회에서 선출되며, 법관 구성원은 상원의 동의를 얻어 대법원에서 선정하고, 판사는 대법원에서 직접 임명한다.
우루과이는 현재의 헌법을 1967년에 채택했다. 많은 조항이 1973년에 정지되었으나 1985년에 복원되었다. 스위스와 그 발의제 사용을 참고하여, 우루과이 헌법은 또한 시민들이 국민 발의를 통해 법률을 폐지하거나 헌법을 변경할 수 있도록 허용하며, 이는 전국적인 국민투표로 이어진다. 이 방법은 지난 15년간 여러 차례 사용되었다: 군사 정권(1973-1985) 동안 인권을 침해한 군 구성원의 기소를 포기하는 법률을 확인하기 위해; 공공 유틸리티 회사의 민영화를 중단하기 위해; 연금 수급자의 소득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수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우루과이 역사 대부분 동안 콜로라도당이 집권했다. 그러나 2004년 우루과이 총선에서 확대 전선이 의회 선거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했으며, 2009년에는 확대 전선의 호세 무히카가 국민당의 루이스 알베르토 라카예를 물리치고 대통령직을 차지했다. 2020년 3월, 확대 전선 연합 하의 15년간의 좌파 통치가 끝나고 우루과이는 보수 정부를 맞이했다. 동시에 중도 우파 국민당의 루이스 라카예 포우가 새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2010년 라티노바로메트로 여론조사에 따르면, 라틴 아메리카 내에서 우루과이인들은 민주주의를 가장 지지하는 편이며 자국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에 가장 만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루과이는 프리덤 하우스의 "세계의 자유" 지수에서 27위를 차지했다. 2023년 V-Dem 민주주의 지수에 따르면, 우루과이는 선거 민주주의에서 세계 31위, 시민 발의 직접 민주주의에서 스위스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5.2. 행정 구역

우루과이는 19개의 주(departamento)로 나뉘며, 각 주의 지방 행정은 중앙 정부의 행정부와 입법부의 분할을 따른다. 각 주는 보통선거 제도를 통해 자체적인 행정 당국을 선출한다. 주의 행정권은 주지사(intendente)에게 있으며, 입법권은 주의회(junta departamental)에 있다.
주 | 주도 | 면적 | 인구 (2011년 인구 조사) |
---|---|---|---|
아르티가스 | 아르티가스 | 1.19 만 km2 | 73,378 |
카넬로네스 | 카넬로네스 | 4536 km2 | 520,187 |
세로라르고 | 멜로 | 1.36 만 km2 | 84,698 |
콜로니아 | 콜로니아델사크라멘토 | 6106 km2 | 123,203 |
두라스노 | 두라스노 | 1.16 만 km2 | 57,088 |
플로레스 | 트리니다드 | 5144 km2 | 25,050 |
플로리다 | 플로리다 | 1.04 만 km2 | 67,048 |
라바예하 | 미나스 | 1.00 만 km2 | 58,815 |
말도나도 | 말도나도 | 4793 km2 | 164,300 |
몬테비데오 | 몬테비데오 | 530 km2 | 1,319,108 |
파이산두 | 파이산두 | 1.39 만 km2 | 113,124 |
리오네그로 | 프라이벤토스 | 9282 km2 | 54,765 |
리베라 | 리베라 | 9370 km2 | 103,493 |
로차 | 로차 | 1.06 만 km2 | 68,088 |
살토 | 살토 | 1.42 만 km2 | 124,878 |
산호세 | 산호세데마요 | 4992 km2 | 108,309 |
소리아노 | 메르세데스 | 9008 km2 | 82,595 |
타콰렘보 | 타콰렘보 | 1.54 만 km2 | 90,053 |
트레인타이트레스 | 트레인타이트레스 | 9529 km2 | 48,134 |
합계 | - | 17.50 만 km2 | 3,286,314 |
5.3. 대외 관계

우루과이의 외교 정책은 외무부가 주관한다. 우루과이는 전통적으로 이웃 국가 및 유럽과 강력한 정치적, 문화적 유대 관계를 맺어왔으며, 국제 관계는 비개입 및 다자주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져 왔다. 유엔, 미주 기구, 남미공동시장, 라틴 아메리카 통합 연합의 창립 회원국이다. 후자 두 기구의 본부는 수도 몬테비데오에 위치해 있어, 몬테비데오의 역할은 유럽의 브뤼셀에 비유되기도 한다.

우루과이는 브라질과 브라질 섬 및 마솔레르 근처의 235 km2 인베르나다 강 지역에 대해 두 건의 미해결 국경 분쟁을 겪고 있다. 양국은 어느 지류가 콰라이/콰레임강의 합법적인 발원지를 나타내는지에 대해 의견이 다른데, 이는 양국 간의 1851년 국경 조약에 따라 후자 분쟁 지역의 국경을 정의하게 된다. 분쟁 지역은 사실상 브라질의 통제하에 있으며, 우루과이는 자국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실제적인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고 있다. 양국은 우호적인 외교 관계와 강력한 경제적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우루과이는 유엔에서 자발적이고 비공식적인 그룹인 소국 포럼 (FOSS)의 창립 회원국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로 복귀한 이후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양국 간의 상업적 유대는 2004년 양자 투자 조약과 2007년 1월 무역 투자 기본 협정 체결로 확대되었다. 미국과 우루과이는 군사 문제에서도 협력해 왔으며, 양국 모두 아이티 유엔 안정화 미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2017년 우루과이는 유엔 핵무기 금지 조약에 서명했다. 또한 2020년에는 미주 상호 원조 조약(TIAR 또는 "리오 조약")에 재가입했다.
대한민국과는 1964년 10월 7일 수교하였다. 양국은 정치, 경제, 문화 및 국제무대에서 전통적으로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여 오고 있다. 2008년 9월, 우루과이의 대통령 타바레 바스케스가 한국을 방문했다. 양국 간 문화, 어업, 무역, 경제과학기술, 사증면제협정 등이 체결되었다. 한국은 몬테비데오에 상주 대사관을 두고 있고, 우루과이는 2002년 11월 30일 경제위기로 주한 대사관을 잠정 폐쇄한 바 있으나 2006년 2월에 다시 열었다. 2007년 양국 간 교역규모는 1.12 억 USD였고, 50여 척의 한국 어선이 몬테비데오항을 전진기지로 하여 남대서양에서 조업하고 있으며, 현재 50여 가구 150여 명의 한국 교민이 거주하고 있다.
5.4. 군사


우루과이 군대는 헌법상 국방부 장관을 통해 공화국 대통령에게 종속된다. 군 병력은 육군 약 18,000명, 해군 6,000명, 공군 3,000명이다. 평시에는 모병제를 시행하지만, 정부는 비상시에 징병할 권한을 갖는다.
우루과이는 10개 유엔 평화유지 임무에 2,513명의 군인과 장교를 파견하여 1인당 유엔 평화유지군 기여도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2010년 2월 현재 우루과이는 MINUSTAH 지원을 위해 아이티에 1,136명의 군 병력을, 콩고 MONUC 지원을 위해 1,360명의 군 병력을 파견했다. 2010년 12월, 우루과이 소장 글로트도프스키가 인도 파키스탄 유엔 군사 감시단의 최고 군사 감시관 겸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2009년 5월부터 국방부 장관이 군 모집 정책이 더 이상 성적 지향에 따라 차별하지 않을 것이라는 법령에 서명한 후 동성애자도 군 복무가 허용되었다. 2010 회계연도에 미국은 우루과이에 170만 달러의 군사 지원을 제공했으며, 여기에는 100만 달러의 해외 군사 자금 지원과 48만 달러의 국제 군사 교육 및 훈련이 포함되었다.
5.5. 치안
우루과이는 과거 중남미 국가 중 안전한 나라로 평가받았으나, 2012년 8월 내무부 발표에 따르면 살인, 강도 등 흉악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 특히 인구가 집중된 몬테비데오주, 카넬로네스주, 말도나도주에서 범죄가 다수 발생한다. 소년범죄 처벌이 가볍고 청소년 수용 시설이 미비하여 재범률이 높은 편이다. 총기 규제가 있으나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으며, 불법 유통으로 인해 국민 3명 중 1명이 총기를 소지한 것으로 추정되어 이를 이용한 흉악 범죄도 빈번하다. 2013년 세계 최초로 마리화나 등 대마초를 합법화했는데, 이는 밀매 가격 하락을 목표로 한 조치였다.
6. 경제
우루과이의 경제는 수출 지향적이며, 농목축업, 관광업, 금융업 등이 주요 산업이다. 특히 농목축업은 전통적으로 우루과이 경제의 근간을 이루어 왔으며, 소고기와 양모는 주요 수출품이다. 최근에는 정보 기술 및 재생 가능 에너지 분야도 성장하고 있다. 메르코수르 회원국으로서 역내 무역이 활발하며, 안정적인 정치 환경과 사회 기반 시설을 바탕으로 외국인 투자 유치에도 적극적이다.

1991년, 우루과이는 임금 보상을 위한 파업 증가와 루이스 알베르토 라카예 정부가 추진한 민영화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겪었다. 1992년 총파업이 있었고, 민영화 정책은 국민투표에서 광범위하게 거부되었다. 1994년과 1995년, 우루과이는 대외 무역 자유화로 인한 무역 적자 증가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몬테비데오 가스 회사와 플루나 항공사는 민간 부문으로 넘어갔지만, 민영화 속도는 1996년에 둔화되었다. 우루과이는 1999년에서 2002년 사이에 주로 아르헨티나의 경제 문제로 인한 파급 효과로 심각한 경제 및 금융 위기를 경험했다. 경제는 11% 위축되었고 실업률은 14~21%로 치솟았다.
2004년 바트예 정부는 국제 통화 기금(IMF)과 3년간 11.00 억 USD 규모의 대기성 차관 협정을 체결하여, 상당한 기초 재정 흑자, 낮은 인플레이션, 상당한 대외 부채 감축, 그리고 경쟁력 향상과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한 여러 구조 개혁을 약속했다. 우루과이는 2006년 부채 조기 상환 후 협정을 종료했지만, 여러 정책 공약은 유지했다. 2005년 3월에 집권한 바스케스는 사회 개발부를 창설하고, 약 75 USD의 월별 조건부 현금 지원을 극빈층 10만 가구 이상에 제공하는 2.40 억 USD 규모의 국가 사회 긴급 상황 대처 계획(PANES)을 통해 국가 빈곤율을 낮추고자 했다. 그 대가로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지역 사회 봉사 활동에 참여하고, 자녀들이 매일 학교에 출석하도록 하며, 정기적인 건강 검진을 받아야 했다.
2001년 아르헨티나 신용 불이행 이후, 우루과이 경제의 물가는 정보 기술 및 건축 전문 지식을 포함한 다양한 서비스를, 과거에는 많은 해외 시장에서 너무 비쌌던 것을 수출 가능하게 만들었다. 프렌테 암플리오 정부는 우루과이의 대외 부채 상환을 계속하면서도 광범위한 빈곤과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긴급 계획을 착수했다. 경제는 2004-2008년 기간 동안 연간 6.7%의 성장률을 보였다. 우루과이의 수출 시장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다변화되었다. 빈곤율은 2002년 33%에서 2008년 7월 21.7%로 감소했고, 극빈곤율은 3.3%에서 1.7%로 떨어졌다.
2007년에서 2009년 사이에 우루과이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기술적으로 경기 침체(2분기 연속 하락)를 겪지 않은 유일한 국가였다. 실업률은 2010년 12월 5.4%로 사상 최저를 기록한 후 2011년 1월 6.1%로 상승했다. 실업률은 여전히 낮은 수준이지만, IMF는 인플레이션 압력 상승을 관찰했으며, 우루과이의 GDP는 2010년 상반기에 10.4% 확장되었다. IMF 추정에 따르면, 우루과이는 2010년에 실질 GDP 성장률 8%에서 8.5%를 달성할 가능성이 높았으며, 2011년에는 5%, 그 이후에는 4%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총 공공 부채는 2010년 2분기에 5분기 연속 지속적인 증가 후 감소하여 GDP의 59.5%에 해당하는 218.85 억 USD에 도달했다.
우루과이는 2024년 세계 혁신 지수에서 62위를 차지했다. 노동조합원 수는 2003년 이후 4배 증가하여 11만 명에서 2015년에는 150만 명의 노동 인구 중 40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국제 노동 조합 총연맹에 따르면, 우루과이는 "8개 핵심 ILO 노동 협약을 모두 비준했다". 대마초의 재배, 사용 및 판매는 2013년 12월 11일 전 대통령 호세 "페페" 무히카에 의해 합법화되어 우루과이는 세계에서 마리화나를 완전히 합법화한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이 법은 같은 날 우루과이 상원에서 찬성 16표, 반대 13표로 통과되었다.
6.1. 농목축업

2010년 우루과이의 수출 지향적인 농업 부문은 GDP의 9.3%를 차지했으며 노동력의 13%를 고용했다. 우루과이 농축산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우루과이의 육류 및 양 사육은 토지의 59.6%를 차지한다. 이 비율은 낙농, 사료 작물, 쌀과 같은 작물과의 순환과 같은 다른 농장 활동과 소 사육이 연결될 때 82.4%로 더욱 증가한다.
FAOSTAT에 따르면 우루과이는 세계에서 콩 (9위), 양모 (12위), 말고기 (14위), 밀랍 (14위), 모과 (17위)의 주요 생산국 중 하나이다. 대부분의 농장(39,120개 중 25,500개)은 가족 경영이며, 소고기와 양모가 주요 활동이자 65% 농장의 주요 수입원이며, 채소 재배 12%, 낙농업 11%, 돼지 사육 2%, 가금류 사육도 2% 순이다. 소고기는 우루과이의 주요 수출 상품으로, 2006년에 총 10.00 억 USD 이상을 기록했다.
2007년 우루과이는 총 1,200만 마리의 소떼를 보유하여 1인당 소 보유량이 3.8마리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54%는 최소 500마리를 보유한 11%의 농부 손에 있다. 반대로, 농부의 38%는 소규모 부지를 경작하며 평균 100마리 미만의 소떼를 보유하고 있다.
6.2. 광업 및 임업
우루과이는 자수정, 마노와 같은 보석류 광물 자원이 풍부하며, 특히 북부 아르티가스 지역에서 많이 산출된다. 철광석, 금 등도 일부 매장되어 있으나 대규모 개발은 미미하다. 임업은 유칼립투스를 중심으로 한 인공림 조성이 활발하며, 주로 펄프 및 제지 산업에 기여하고 있다. 광업 및 임업은 국가 경제에서 농목축업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지역 경제 활성화와 수출 다변화에 기여하고 있다.
6.3. 관광

우루과이의 관광 산업은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2012년 이 부문은 97,0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GDP의 9%(직간접적으로)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우루과이는 인구 대비 가장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이다. 2023년에는 380만 명의 관광객이 우루과이에 입국했으며, 그중 대다수는 아르헨티나인과 브라질인이었고, 칠레인, 파라과이인, 미국인 및 다양한 국적의 유럽인이 그 뒤를 이었다.

우루과이의 문화 체험에는 콜로니아델사크라멘토에서 볼 수 있는 식민지 시대 유산 탐험이 포함된다. 역사적 기념물로는 토레스 가르시아 박물관과 센테나리오 경기장이 있다. 우루과이의 주요 자연 명소 중 하나는 푼타델에스테이다. 푼타델에스테는 우루과이 남동쪽 해안의 작은 반도에 위치해 있다. 해변은 만사(Mansa, 잔잔한 강 쪽)와 브라바(Brava, 거친 바다 쪽)로 나뉜다. 푼타델에스테는 말도나도 시와 인접해 있으며, 해안을 따라 북동쪽에는 라바라(La Barra)와 호세 이그나시오(José Ignacio)와 같은 작은 휴양지가 있다.
6.4. 교통


몬테비데오항은 주요 컨테이너 터미널 항구 중 하나로, 연간 110만 개 이상의 컨테이너를 처리한다. 부두는 14 흘수 선박을 수용할 수 있다. 9대의 스트래들 캐리어를 통해 시간당 80~100회 이동이 가능하다. 누에바팔미라항은 주요 지역 상품 환적 지점이며, 민간 및 정부 운영 터미널을 모두 갖추고 있다.
6.4.1. 항공
카라스코 국제공항은 1947년에 처음 개항했으며, 2009년 공항 소유주이자 운영사인 푸에르타 델 수르(Puerta del Sur)는 라파엘 비뇰리 건축가에게 1.65 억 USD를 투자하여 기존 시설을 확장하고 현대화하는 넓은 새 여객 터미널 건설을 의뢰했다. 공항은 연간 최대 450만 명의 이용객을 수용할 수 있다. PLUNA는 우루과이의 국적 항공사였으며, 본사는 카라스코에 있었다.
푼타델에스테 국제공항은 푼타델에스테에서 15 km 떨어진 말도나도주에 위치하며, 우루과이 건축가 카를로스 오트가 건설한 우루과이에서 두 번째로 분주한 항공 터미널이다. 1997년에 개항했다.
6.4.2. 육상
우루과이 국영 철도는 철도 운송 및 철도망 유지 관리를 담당하는 자치 기관이다. 우루과이는 약 1200 km의 운영 가능한 철도 선로를 보유하고 있다. 1947년까지 철도 시스템의 약 90%가 영국 소유였다. 1949년 정부는 전기 트램 및 몬테비데오 수도 회사와 함께 철도를 국유화했다. 그러나 1985년 "국가 교통 계획"은 여객 열차가 수리 및 유지 관리에 너무 많은 비용이 든다고 제안했다. 화물 열차는 계속 운행되지만 버스 교통이 여행객을 위한 "경제적인" 대안이 되었다. 그 후 여객 서비스는 1988년에 중단되었다. 그러나 몬테비데오로 들어오는 철도 여객 통근 서비스는 1993년에 재개되었으며 현재 3개의 교외 노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포장 도로는 몬테비데오와 국내 다른 도시 중심지를 연결하며, 주요 고속도로는 국경 및 인접 도시로 이어진다. 수많은 비포장도로가 농장과 작은 마을을 연결한다. 1990년대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가 형성된 이후 육상 무역이 현저하게 증가했으며, 2000년대 후반에도 다시 증가했다. 국내 화물 및 여객 서비스의 대부분은 철도보다는 도로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루과이에는 수도 및 국경 지역과 인접 국가를 연결하는 여러 국제 버스 서비스가 있다. 여기에는 아르헨티나 17개 목적지, 브라질 12개 목적지, 그리고 칠레와 파라과이의 수도가 포함된다.
6.5. 통신
우루과이의 통신 산업은 대부분의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보다 더 발전했으며, 1997년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최초로 완전한 디지털 전화망을 구축한 국가이다. 이 시스템은 정부 소유이며, 1990년대 이후 부분적으로 민영화하려는 논란이 많은 제안이 있었다.
이동통신 시장은 국영 기업인 ANTEL과 두 민간 기업인 모비스타 및 클라로가 공유하고 있다. ANTEL은 우루과이 이동통신 회선의 49%로 가장 큰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ANTEL은 2019년 4월 상용 5G 네트워크를 출시했으며 지속적으로 개발 중이다. 반면 모비스타와 클라로는 각각 30%와 21%의 시장 점유율만을 차지하고 있다. 구글 검색 엔진은 2023-2024년에 전체 검색 엔진 시장 점유율의 95%를 차지했다.
6.6. 에너지
2010년 우루과이 에너지 광업 산업부는 재생 가능 에너지 증진에 관한 법령 354호를 승인했다. 2021년 우루과이는 설치된 재생 가능 전기 용량 기준으로 수력 발전 1,538MW, 풍력 발전 1,514MW(세계 35위), 태양광 발전 258MW(세계 66위), 바이오매스 423MW를 보유했다. 2023년 우루과이 전력의 98%가 재생 가능 에너지에서 생산되었다. 10년도 채 걸리지 않아 정부 자금 지원 없이 이루어진 극적인 전환은 전기 요금을 낮추고 국가의 탄소 발자국을 대폭 줄였다. 대부분의 전기는 수력 발전 시설과 풍력 발전 단지에서 생산된다. 우루과이는 더 이상 전기를 수입하지 않는다. 2022년 국가 전체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49%는 경유 연소에서 발생했으며, 휘발유가 25%로 그 뒤를 이었다.
7. 사회
우루과이 사회는 유럽계 이민자들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으며, 비교적 높은 교육 수준과 사회 복지 제도를 갖추고 있다. 인구의 대다수가 도시에 거주하며, 수도 몬테비데오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다. 언어는 스페인어가 공용어이며, 종교적으로는 세속 국가의 성격이 강하다. 최근에는 동성 결혼 합법화, 마리화나 합법화 등 진보적인 사회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7.1. 인구

우루과이인들은 주로 유럽계이며, 2023년 인구 조사에서 인구의 85.2%가 "백인"을 주된 혈통으로 자가 식별했으며, 이는 2011년 인구 조사의 87.7%에서 감소한 수치이다.
유럽계 우루과이인 대부분은 19세기와 20세기에 스페인에서 온 이민자들의 후손이며,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출신은 그보다 적다. 초기 정착민들은 아르헨티나에서 이주해 왔다. 아프리카계는 전체 인구의 약 5%를 차지한다. 일본인 공동체도 중요하다. 전반적으로 민족 구성은 인접한 아르헨티나 주들과 브라질 남부 지역과 유사하다.
1963년부터 1985년까지 약 32만 명의 우루과이인이 이민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우루과이 이민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국가는 아르헨티나이며, 그 뒤를 이어 미국, 호주, 캐나다, 스페인, 브라질, 이탈리아, 프랑스, 포르투갈 순이다. 2009년에는 44년 만에 처음으로 이민자 유입이 유출보다 많아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유입을 보였다. 2009년에는 3,825건의 거주 허가가 발급되었는데, 이는 2005년 1,216건에 비해 증가한 수치이다. 신규 합법 거주자의 50%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출신이다. 2008년에 통과된 이민법은 이민자들에게 월 650 USD의 소득을 증명하는 조건으로 자국민과 동일한 권리와 기회를 부여한다.
몬테비데오 수도권은 유일한 대도시로, 약 190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며 이는 전국 인구의 절반 이상에 해당한다. 나머지 도시 인구는 약 30개의 도시에 거주한다. 우루과이의 인구 증가율은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보다 훨씬 낮다. 중간 연령은 35.3세로, 낮은 출생률, 높은 기대 수명, 젊은층의 상대적으로 높은 이민율로 인해 세계 평균보다 높다. 인구의 4분의 1이 15세 미만이고, 약 6분의 1이 60세 이상이다. 2017년 우루과이의 평균 합계출산율(TFR)은 여성 1인당 1.70명으로, 대체율인 2.1명보다 낮다. 이는 1882년 여성 1인당 5.76명이었던 높은 수치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2017년 IADB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 노동 조건에 관한 보고서는 우루과이를 성별, 연령, 소득, 공식성, 노동 참여 등 하나의 하위 지수를 제외한 모든 부문에서 지역 선두로 평가했다.
7.2. 주요 도시
우루과이의 수도는 몬테비데오이며, 국가 인구의 거의 절반이 거주하는 최대 도시이다. 그 외 주요 도시로는 북서부의 살토, 해안 도시인 시우다드데라코스타, 서부의 파이산두 등이 있다. 이들 도시는 각 지역의 행정, 경제, 문화 중심지 역할을 하며, 저마다의 역사적 배경과 지리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살토는 온천으로 유명하며, 파이산두는 중요한 강변 항구 도시이다.
순위 | 도시 | 주 | 인구 (2011년) |
---|---|---|---|
1 | 몬테비데오 | 몬테비데오 | 1,304,687 |
2 | 살토 | 살토 | 104,011 |
3 | 시우다드데라코스타 | 카넬로네스 | 95,176 |
4 | 파이산두 | 파이산두 | 76,412 |
5 | 라스피에드라스 | 카넬로네스 | 71,258 |
6 | 리베라 | 리베라 | 64,465 |
7 | 말도나도 | 말도나도 | 62,590 |
8 | 타콰렘보 | 타콰렘보 | 54,755 |
9 | 멜로 | 세로라르고 | 51,830 |
10 | 메르세데스 | 소리아노 | 41,974 |
7.3. 민족
우루과이의 인구는 주로 유럽계 이민자들의 후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스페인계와 이탈리아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 외 독일, 프랑스, 영국 등 다른 유럽 국가 출신 이민자들의 후손도 존재한다. 아프리카계 우루과이인은 전체 인구의 약 5%를 차지하며, 주로 식민지 시대에 노예로 끌려온 아프리카인들의 후손이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차루아족과 같은 원주민의 후손도 일부 남아 있으며, 일본계를 비롯한 아시아계 이민자 커뮤니티도 형성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우루과이의 민족 구성은 이웃 아르헨티나의 주들과 브라질 남부 지역과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7.4. 언어
스페인어가 사실상의 국가 언어이다. 우루과이 스페인어는 리오플라텐세의 한 변형으로, 보세오(voseo)스페인어와 예이스모(yeísmo)스페인어(IPA|[ʃ] 또는 IPA|[ʒ] 사용)를 모두 사용하며, 이탈리아어와 그 다양한 방언의 큰 영향을 받아 룬파르도(lunfardo)를 포함한다. 북동부 브라질 국경 지역에서는 우루과이 포르투갈어가 사용되는데, 이는 스페인어와 브라질 포르투갈어가 혼합된 형태이다. 이 방언은 공식적으로 정의된 철자법이나 공식적인 인정 없이 사용된다. 영어는 우루과이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퍼진 외국어이며, 교육 과정의 일부이다.
원주민 인구가 적기 때문에, 우루과이에서는 현재 사용되는 원주민 언어가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또 다른 사용 방언은 오크어의 한 방언인 파투아였다. 이 방언은 주로 최초의 순례자들이 정착한 도시인 라파스가 있는 콜로니아주에서 사용되었다. 콜로니아 발덴세 마을의 발덴시아 도서관(Biblioteca Valdense)에는 여전히 이 언어로 된 문서들이 남아 있다. 파투아 사용자들은 피에몬테에서 우루과이로 왔다. 원래 그들은 발덴시아인이 된 보두아인들이었으며, 스페인어에서 "발덴시아 식민지"로 번역되는 콜로니아 발덴세라는 도시 이름을 붙였다.
2001년, 우루과이 수화(LSU)는 법률 17.378호에 따라 우루과이의 공식 언어로 인정받았다.
7.5. 종교

기독교는 우루과이에서 가장 큰 종교이다. 우루과이는 공식적인 국교가 없으며, 교회와 국가는 공식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다. 2008년 우루과이 통계청(INE) 조사에 따르면 가톨릭 기독교가 주요 종교로, 인구의 45.7~81.4%를 차지했다. 9.0%는 비가톨릭 기독교인, 0.6%는 애니미즘 신자 또는 움반다교 신자(아프리카계 브라질 종교), 0.4%는 유대교인이었다. 30.1%는 신을 믿지만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답했으며, 14%는 무신론자 또는 불가지론자였다. 몬테비데오의 상당수 아르메니아인 공동체에서는 기독교, 특히 아르메니아 사도교회가 지배적인 종교이다.
정치 관찰자들은 우루과이를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세속적인 국가로 간주한다. 우루과이의 세속화는 스페인 제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식민지 시대에 교회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미미했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우루과이 원주민의 수가 적고 그들의 개종에 대한 저항이 교권의 영향력을 감소시켰다.
독립 후 반교권주의 사상이 우루과이, 특히 프랑스로부터 확산되어 교회의 영향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1837년 시민 결혼이 인정되었고, 1861년 국가가 공공 묘지 운영을 인수했다. 1907년 이혼이 합법화되었고, 1909년 모든 종교 교육이 국립 학교에서 금지되었다. 콜로라도당 정치인 호세 바트예 이 오르도녜스(1903-1911)의 영향으로 1917년 새 헌법과 함께 완전한 정교분리가 도입되었다. 우루과이 수도에는 12개의 유대교 회당이 있으며, 2011년 기준 2만 명의 유대인 공동체가 있다. 1960년대 중반 5만 명으로 정점을 찍었던 우루과이는 유대인 인구 비율 대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알리야 비율을 보이고 있다.
7.6. 교육

우루과이의 교육은 세속적이고, 무료이며, 4세부터 시작하여 14년간 의무 교육이다. 교육 시스템은 유아 교육(3-5세), 초등 교육(6-11세), 기초 중등 교육(12-14세), 고등 중등 교육(15-17세), 고등 교육(18세 이상), 대학원 교육의 6단계로 나뉜다. 공교육은 주로 세 기관이 담당한다: 교육 정책을 조정하는 교육문화부, 유아부터 중등 교육까지의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국립 공교육 행정처, 그리고 고등 교육을 담당하는 공화국 대학교. 2009년 정부는 GDP의 4.5%를 교육에 투자할 계획이었다.
우루과이는 PISA와 같은 표준화된 시험에서 지역적으로 높은 순위를 차지하지만, OECD 평균과 비슷한 소득 수준을 가진 일부 국가보다는 낮은 수준이다. 2006년 PISA 시험에서 우루과이는 학교 간 표준 편차가 가장 큰 국가 중 하나로, 사회경제적 수준에 따른 상당한 변동성을 시사했다. 우루과이는 OLPC(One Laptop per Child)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09년에 세이발 계획의 일부로 모든 초등학생에게 노트북을 제공한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2007-2009년 기간 동안 362,000명의 학생과 18,000명의 교사가 이 계획에 참여했으며, 노트북의 약 70%가 집에 컴퓨터가 없는 어린이들에게 지급되었다. OLPC 프로그램은 국가 교육 예산의 5% 미만을 차지한다.
7.7. 결혼 및 사회 문제
우루과이는 동성 결혼을 합법화한 남미 최초의 국가 중 하나이며, 2013년에 관련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는 사회적 관용과 평등을 중시하는 우루과이의 진보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소득 불평등은 여전히 중요한 사회 문제로 남아 있으며, 지니 계수를 통해 그 수준이 측정된다. 정부는 이를 완화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우루과이는 세계 최초로 마리화나를 합법화한 국가로, 이는 마약 밀매를 줄이고 공중 보건 관점에서 접근하려는 시도였으나, 이에 대한 사회적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쟁점들은 우루과이 사회의 역동성과 변화를 반영한다.
8. 문화
우루과이 문화는 유럽, 특히 남부 유럽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가우초 전통은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예술 및 민속의 중요한 요소이다. 시각 예술, 음악, 음식, 문학, 미디어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독특한 문화적 특징을 발전시켜 왔다.
8.1. 시각 예술


추상 화가이자 조각가인 카를로스 파에스 빌라로는 저명한 우루과이 예술가였다. 그는 팀북투와 미코노스에서 영감을 받아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푼타델에스테 근처의 집, 호텔, 아틀리에 카사푸에블로를 만들었다. 역사적 사건을 묘사한 작품으로 유명한 19세기 화가 후안 마누엘 블라네스는 널리 인정받은 최초의 우루과이 예술가였다. 후기인상주의 화가 페드로 피가리는 몬테비데오와 시골에서 파스텔화를 그렸다. 대부분의 그림은 벽화주의가 아닌 추상적 경향의 일부였다.
우루과이에는 많은 미술관이 있으며, 대부분 몬테비데오에 위치하고 있다. 토레스 가르시아 미술관과 구르비치 미술관 등이 대표적이다. 토레스 가르시아 미술관은 우루과이 예술가 호아킨 토레스 가르시아를 기리기 위해 헌정되었다.
8.2. 음악


우루과이의 민속 및 대중 음악은 아르헨티나와 마찬가지로 가우초 뿌리를 공유하며, 탱고도 그중 하나이다. 가장 유명한 탱고 중 하나인 "라 쿰파르시타"(1917)는 우루과이 작곡가 헤라르도 마토스 로드리게스가 작곡했다. 칸돔베는 카니발, 특히 우루과이 카니발에서 주로 아프리카계 우루과이인들이 추는 민속춤이다. 기타는 선호되는 악기이며, 파야다라고 불리는 인기 있는 전통 경연에서는 두 명의 가수가 각각 기타를 들고 같은 곡조에 즉흥적으로 시를 번갈아 부른다. 민속 음악은 칸토 포풀라르라고 불리며, 로스 올리마레뇨스, 누마 모라에스와 같은 기타 연주자 및 가수를 포함한다.
록 음악과 카리브해 장르의 수많은 라디오 방송국과 음악 행사가 있다. 우루과이의 초기 클래식 음악은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영향을 보여주었지만, 20세기 이후 에두아르도 파비니, 엑토르 토사르, 에두아르도 힐라르도니를 포함한 여러 클래식 음악 작곡가들이 라틴 아메리카 음악 어법을 더 많이 사용했다. 몬테비데오에는 OSSODRE와 몬테비데오 필하모닉이라는 두 개의 교향악단이 있다. 잘 알려진 클래식 음악가로는 피아니스트 알베르트 엔리케 그라프, 기타리스트 에두아르도 페르난데스와 마르코 사르토르, 그리고 가수 에르빈 슈로트가 있다.
탱고는 20세기, 특히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라스피에드라스 출신의 훌리오 소사와 같은 우루과이 가수들을 통해 우루과이 문화에 특히 영향을 미쳤다. 탱고 가수 카를로스 가르델이 29세였을 때, 그는 타콰렘보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며 국적을 우루과이로 변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9년 타콰렘보 근처의 바예 에덴에 카를로스 가르델 박물관이 설립되었다.
로큰롤은 1960년대 초 비틀즈와 다른 영국 밴드들의 등장과 함께 우루과이에 처음 소개되었다. 몬테비데오에서는 로스 셰이커스, 로스 이라쿤도스, 로스 문라이츠, 로스 말디토스를 포함한 여러 밴드가 등장했으며, 이들 모두 소위 아르헨티나의 우루과이 침공에서 주요 인물이 되었다. 인기 있는 우루과이 록 밴드로는 라 벨라 푸에르카, 엘 쿠아르테토 데 노스, 쿠르시가 있다. 2004년 우루과이 음악가이자 배우인 호르헤 드렉슬러는 체 게바라의 삶을 그린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의 노래 "Al otro lado del río"를 작곡하여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8.3. 음식
우루과이 음식 문화는 주로 유럽 요리 문화에서 비롯되었다. 대부분의 우루과이 요리는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브라질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과거 유럽 전쟁으로 인한 이민의 결과이다. 일상 식사는 육류, 모든 종류의 파스타, 쌀, 달콤한 디저트 등으로 다양하며, 우루과이가 세계적으로 품질 좋은 육류 생산국 중 하나이기 때문에 육류가 주요 요리이다.
대표적인 요리로는 "아사도 우루과요"(모든 종류의 고기를 굽는 큰 그릴 또는 바비큐), 구운 양고기, 치비토(얇게 구운 소고기, 양상추, 토마토, 달걀 프라이, 햄, 올리브 등을 넣고 감자튀김과 함께 제공되는 샌드위치), 밀라네사(빵가루를 입혀 튀긴 소고기의 일종), 토르텔리니, 스파게티, 뇨키, 라비올리, 쌀, 채소 등이 있다.
우루과이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스프레드 중 하나는 둘세데레체(설탕과 우유를 천천히 가열하여 만든 라틴 아메리카의 캐러멜 과자)이다. 가장 대표적인 단 음식은 알파호르로, 둘세데레체로 속을 채우고 초콜릿이나 머랭으로 덮은 작은 케이크이다. 다른 대표적인 디저트로는 파스타프롤라(모과 젤리로 속을 채운 케이크의 일종)와 차하(머랭, 스펀지 케이크, 휘핑크림, 과일, 일반적으로 복숭아와 딸기를 첨가함)가 있다. 허브 음료인 마테는 우루과이에서 가장 대표적인 음료이다.
8.4. 문학

모더니즘 작가인 호세 엔리케 로도(1871-1917)는 우루과이의 가장 중요한 문학적 인물로 간주된다. 그의 저서 아리엘(1900)은 물질적, 기술적 진보를 추구하면서 정신적 가치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다룬다. 또한 유럽과 미국의 문화적 지배에 저항할 것을 강조한다. 라틴 아메리카 극작가 중 주목할 만한 인물은 플로렌시오 산체스(1875-1910)로, 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연되는 현대 사회 문제를 다룬 희곡을 썼다.
거의 같은 시기에 우루과이 역사에 관한 서사시를 쓴 후안 소리야 데 산 마르틴(1855-1931)의 낭만주의 시가 나왔다. 또한 후아나 데 이바르보로우(1895-1979), 델미라 아구스티니(1866-1914), 이데아 빌라리뇨(1920-2009), 그리고 오라시오 키로가와 후안 호세 모로솔리(1899-1959)의 단편 소설도 주목할 만하다. 후안 카를로스 오네티의 심리 소설("아무도 없는 땅", "조선소")과 마리오 베네데티의 저술은 널리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우루과이에서 가장 잘 알려진 현대 작가는 라틴아메리카의 절개된 혈관(1971)과 3부작 불의 기억(1982-87)의 저자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이다. 다른 현대 우루과이 작가로는 실비아 라고, 호르헤 마푸드, 헤수스 모라에스가 있다.
8.5. 미디어
국경 없는 기자회의 2019년 전 세계 언론 자유 지수에서 우루과이는 보고된 180개국 중 19위를 차지했다. 언론의 자유는 폭력 선동이나 "국가 모독"에 대한 단서 조항과 함께 헌법에 의해 보장된다. 군사 독재 기간 동안 우루과이의 언론 자유는 심각하게 제한되었다. 1985년 3월 취임 첫날, 상기네티는 완전한 언론 자유를 회복시켰다. 그 결과 몬테비데오 신문들의 발행 부수가 확대되었다. 우루과이인들은 100개 이상의 민간 일간지 및 주간 신문, 100개 이상의 라디오 방송국, 약 20개의 지상파 텔레비전 채널을 이용할 수 있으며, 케이블 TV도 널리 보급되어 있다.
국영 라디오 및 TV는 공식 방송 서비스인 SODRE에서 운영한다. 일부 신문은 주요 정당이 소유하거나 연계되어 있다. 엘 디아는 1990년대 초 폐간될 때까지 우루과이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신문이었으며, 1886년 콜로라도당 지도자이자 (후에) 대통령이 된 호세 바트예 이 오르도녜스가 창간했다. 경쟁 관계인 블랑코당의 신문인 엘 파이스스페인어가 가장 많은 발행 부수를 기록하고 있다. 부스케다는 정치 및 경제 분석을 위한 포럼 역할을 한다. 주당 약 16,000부만 판매되지만, 예상 독자 수는 5만 명을 초과한다.
9. 스포츠
우루과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이며, 국가대표팀은 FIFA 월드컵에서 2회 우승(1930년, 1950년)하고 코파 아메리카에서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하는 등 국제 대회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그 외 농구 등 다른 스포츠도 인기를 얻고 있다.
9.1. 축구

축구는 우루과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영국 제도 이외의 지역에서 열린 최초의 국제 경기는 1902년 7월 몬테비데오에서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간에 치러졌다. 축구는 19세기 후반 영국 선원들과 노동자들에 의해 우루과이에 전해졌다. 그들은 럭비와 크리켓을 덜 성공적으로 도입했다. 우루과이는 1924년 파리 올림픽과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은 FIFA 월드컵에서 두 차례 우승했다. 우루과이는 1930년 자국에서 열린 첫 대회에서 우승했고, 1950년에는 결승전에서 홈팀 브라질을 꺾고 유명한 승리를 거두었다. 우루과이는 코파 아메리카(남미 국가 및 초청팀을 위한 국제 대회)에서 아르헨티나와 마찬가지로 15회 우승했으며, 마지막 우승은 2011년이다. 우루과이는 월드컵 우승 국가 중 인구가 가장 적은 나라이다. 초기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1994년부터 2006년까지 네 번의 시도 중 세 번의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했다. 우루과이는 2010년 FIFA 월드컵에서 40년 만에 처음으로 준결승에 진출했다. 디에고 포를란은 2010년 대회 최우수 선수에게 수여되는 골든볼을 수상했다.
우루과이는 2000년대에 1,414명의 축구 선수를 수출했으며, 이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만큼 많은 수치이다. 2010년 우루과이 정부는 선수들을 국내에 유지하기 위한 조치를 제정했다. 몬테비데오를 연고로 하는 두 개의 축구 클럽인 나시오날과 페냐롤이 있으며, 각각 인터콘티넨털컵에서 3번 우승했다. 두 클럽이 맞붙는 경기는 우루과이 클라시코로 알려져 있다. 2012년 6월 순위에서 우루과이는 FIFA 세계 랭킹에 따라 세계에서 두 번째로 좋은 팀으로 평가되었으며, 이는 축구 역사상 가장 높은 순위로,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에 이어 1위 자리를 놓쳤다.
9.2. 기타 스포츠
축구 외에 우루과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농구이다. 국가대표팀은 농구 월드컵에 7번 출전했는데, 이는 남아메리카에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제외하고 다른 어떤 나라보다 많은 횟수이다. 우루과이는 1967년 FIBA 세계 선수권 대회 공식 농구 월드컵과 1988년 및 1997년 공식 아메리카 농구 선수권 대회를 개최했으며, 2017년 FIBA 아메리컵의 개최국이다. 그 외에도 럭비, 사이클링, 육상, 권투 등 다양한 스포츠가 즐겨지며, 국내 리그와 국제 대회에서 꾸준히 성과를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