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도미니카 공화국은 카리브해의 이스파니올라섬 동부에 위치한 국가로, 서쪽으로는 아이티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수도는 미주 최초의 유럽인 정착지인 산토도밍고이며, 카리브해에서 쿠바 다음으로 넓은 면적과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선주민인 타이노족의 문화유산 위에 스페인 식민 통치, 아이티의 점령, 수차례의 독립 투쟁과 미국의 군사 개입 등 복잡한 역사를 거쳐 오늘날의 민주 공화국으로 발전했다. 경제는 전통적인 농업 중심에서 벗어나 관광업, 제조업, 광업, 서비스업이 다각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특히 관광업은 국가 경제의 중요한 축을 담당한다. 사회적으로는 다양한 인종이 혼합된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으며, 메렝게와 바차타 음악, 그리고 야구는 도미니카 공화국을 대표하는 문화적 상징이다. 열대성 기후와 다양한 지형을 바탕으로 풍부한 자연환경을 자랑하지만, 동시에 허리케인과 같은 자연재해의 위협과 환경 문제에도 직면해 있다.
2. 국명
도미니카 공화국의 공식 국명은 스페인어로 República Dominicana레푸블리카 도미니카나스페인어이며, 한국어로는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표기한다. 국명은 수도인 산토도밍고에서 유래했다. 산토도밍고라는 이름은 1496년 8월 4일 일요일에 바르톨로메 콜럼버스가 도시를 건설하면서, 그날이 일요일(스페인어로 Domingo도밍고스페인어)이었던 것과 도미니코 수도회의 창시자인 성 도미니코 데 구스만(Domingo de Guzmán)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고 전해진다. 도미니코 수도회는 신대륙 최초의 대학인 산토도밍고 자치 대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독립 이전까지 이 지역은 단순히 '산토도밍고'로 알려졌으며, 주민들은 스스로를 '도미니카노스'(Dominicanos도미니카인스페인어)라고 불렀다. 1844년 아이티로부터 독립하면서 혁명가들은 새로운 국가의 이름을 '도미니카 공화국'(la República Dominicana라 레푸블리카 도미니카나스페인어)으로 정했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국가(himno nacional de la República Dominicana이름노 나시오날 데 라 레푸블리카 도미니카나스페인어)에서는 '도미니카인' 대신 시적인 표현인 '키스케야노스'(Quisqueyanos키스케야 사람들스페인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키스케야'(Quisqueya키스케야스페인어)는 이스파니올라섬 원주민인 타이노족의 한 갈래인 시과요족 언어로 "땅의 어머니"를 의미하며, 종종 노래 등에서 도미니카 공화국을 지칭하는 또 다른 이름으로 사용된다. 영어권에서는 종종 "the D.R."로 축약되기도 하지만, 스페인어권에서는 "la R.D."라는 축약형이 드물게 사용된다.
참고로, 소앤틸리스 제도에 위치한 도미니카 연방(Commonwealth of Dominica)과는 국명이 유사하지만 역사적, 지리적으로 다른 국가이다. 도미니카 연방의 국명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일요일에 섬을 발견한 것에서 유래했다.
3. 역사
도미니카 공화국의 역사는 콜럼버스 이전 시대의 원주민 문화에서 시작하여 스페인의 식민 지배, 아이티의 점령과 독립, 반복되는 내전과 독재, 그리고 미국의 개입을 거쳐 현대의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해 온 과정을 포함한다. 각 시대는 국가의 정체성과 사회 구조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3.1. 콜럼버스 이전 시대


카리브해의 섬들에는 약 6,000년 전 중앙아메리카 또는 남아메리카 북부에서 온 수렵채집인들이 처음 정착했다. 아라와크어족 계열의 언어를 사용하던 타이노족의 조상들은 기원전 1천년 경 남아메리카에서 카리브해로 이주하여 서기 600년경에는 이스파니올라섬에 도달했다. 이들은 농업, 어업, 사냥, 채집 생활을 영위했으며, 광범위하게 도자기를 생산했다. 1492년 유럽인들이 도착했을 당시 이스파니올라섬의 타이노족 인구 추정치는 수만 명에서 최대 200만 명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당시 섬은 다섯 개의 타이노족 카시카azgo(추장 영토)로 나뉘어 있었다. 섬 전체를 부르는 타이노족의 이름은 '아이티(Ayiti)' 또는 '키스케야(Quisqueya)'였다.
산 크리스토발 북쪽에 위치한 포미에 동굴군은 55개의 동굴로 이루어져 있으며, 카리브해에서 가장 많은 2,000년 된 암각화를 소장하고 있어 타이노족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여겨진다. 이 외에도 라스 마라비야스 동굴이나 로스 트레스 오호스 국립공원의 동굴 등에서 타이노족의 암각화를 찾아볼 수 있다.

3.2. 유럽의 식민 통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92년 12월 5일,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첫 번째 항해 중 이스파니올라섬에 도착했다. 그는 섬의 다양한 기후와 지형이 스페인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하여 이 섬을 '라 에스파뇰라'(La Española)라고 명명하고 스페인 왕실령으로 선포했다. 1496년, 콜럼버스의 동생 바르톨로메 콜럼버스는 '신세계' 최초의 유럽인 영구 정착지인 산토도밍고를 건설했다. 스페인인들은 이 섬에 플랜테이션 경제를 구축했다.
초기에는 우호적인 관계도 있었으나, 타이노족은 스페인의 정복에 저항했다. 하라과(Xaragua)의 여성 추장 아나카오나와 그녀의 전 남편인 마과나(Maguana)의 추장 카오나보, 그리고 추장 과카나가릭스, 과마, 아투에이, 엔리키요 등이 저항을 이끌었다. 특히 엔리키요는 투쟁을 통해 섬의 일부 지역에 자치권을 얻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1492년 이후 몇 년 만에 천연두, 홍역 등 유럽인들이 가져온 질병으로 인해 타이노족 인구는 급격히 감소했다. 줄어드는 타이노족 노동력을 대체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이 수입되었다.
순수 혈통의 타이노족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1864년이지만, 타이노족의 생물학적 유산은 혼혈을 통해 지속되었다. 1514년의 인구 조사 기록에 따르면 산토도밍고에 거주하던 스페인 남성의 40%가 타이노족 여성과 결혼했으며, 오늘날 일부 도미니카인들은 타이노족의 혈통을 가지고 있다.
1697년 레이스베이크 조약으로 섬의 서쪽 3분의 1이 프랑스에 할양될 무렵, 산토도밍고의 인구는 소수의 백인, 약 3만 명의 흑인 노예, 그리고 소수의 타이노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789년경에는 인구가 12만 5천 명으로 증가했지만, 산토도밍고는 여전히 신세계에서 스페인의 식민지 중 상대적으로 부유하지도 전략적으로 중요하지도 않은 지역이었다. 이러한 산토도밍고의 인구 구성은 이웃한 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카리브해에서 가장 부유한 식민지였으며, 50만 명의 인구 중 90%가 노예였고 산토도밍고보다 4배나 인구가 많았다)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1795년, 피레네 전쟁에서 패배한 스페인은 바젤 조약에 따라 산토도밍고를 프랑스에 할양했다. 생도맹그는 1804년 1월 1일 아이티로 독립했다. 1809년, 프랑스인들은 섬에서 추방되었고 산토도밍고는 다시 스페인의 통치 하에 놓였다.
3.3. 아이티의 점령과 독립
프랑스 식민지였던 생도맹그가 아이티로 독립하면서, 그 영향은 도미니카 지역에도 미쳤다. 잠시 동안의 독립 시도 이후, 도미니카 지역은 아이티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오랜 투쟁이 이어졌다.
3.3.1. 단기간의 독립 시도
12년간의 불만과 여러 반대 세력에 의한 실패한 독립 계획들(1812년 자유민들이 주도한 반란 포함) 끝에, 산토도밍고의 전 부총독(최고 행정관)이었던 호세 누녜스 데 카세레스는 1821년 11월 30일,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식민지의 독립을 선언하고 스페인령 아이티 공화국(República del Haití Español레푸블리카 델 아이티 에스파뇰스페인어)을 수립했다. 이 시기는 '덧없는 독립'(Ephemeral independence)으로도 알려져 있다.
3.3.2. 아이티의 통일 통치와 독립 전쟁
새롭게 독립한 공화국은 두 달 만에 아이티의 장피에르 부아예 대통령에 의해 점령되고 병합되었다. 22년 동안 아이티는 산토도밍고를 '동부 지역'(Partie de l'Est프랑스어)이라 부르며 식민 영토로 취급했다. 보수를 받지 못한 아이티 군대는 보상 없이 도미니카 주민과 토지에서 자원을 탈취하며 유지되었다.
1838년, 후안 파블로 두아르테는 어떠한 외세의 개입도 없이 산토도밍고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는 비밀결사 조직인 라 트리니타리아를 창설했다. 프란시스코 델 로사리오 산체스와 라몬 마티아스 메야는 라 트리니타리아의 창립 멤버는 아니었지만, 독립 투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두아르테, 메야, 산체스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1844년 2월 27일, 라 트리니타리아의 구성원들은 아이티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들은 부유한 목장주였던 페드로 산타나의 지원을 받았고, 산타나는 신생 공화국 군대의 장군이 되었다. 1844년 3월, 아이티는 침공했지만 도미니카인들은 강력히 저항하며 아이티군에 막대한 사상자를 입혔다. 4월 15일까지 도미니카군은 육지와 해상 모두에서 아이티군을 격퇴했다. 1844년 7월 초, 두아르테는 지지자들로부터 공화국 대통령직을 맡으라는 권유를 받았다. 두아르테는 자유 선거가 치러진다면 동의하겠다고 했지만, 산타나의 군대가 7월 12일 산토도밍고를 장악하고 산타나를 도미니카 공화국의 통치자로 선언했다. 산타나는 이후 메야, 두아르테, 산체스를 투옥했다. 1845년 2월 27일, 산타나는 라 트리니타리아의 여성 영웅인 마리아 트리니다드 산체스와 다른 이들을 음모 혐의로 처형했다.
3.4. 제1공화국


1844년 아이티로부터 독립 후 수립된 도미니카 제1공화국은 정치적 불안정, 경제적 어려움, 반복되는 내전과 독재로 점철된 시기였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첫 번째 헌법은 1844년 11월 6일에 채택되었으며, 1845년 인구는 약 23만 명(백인 10만 명, 흑인 4만 명, 물라토 9만 명)이었다.
독립 이후 수십 년 동안 폭정, 당파주의, 경제적 어려움, 급격한 정권 교체, 정치적 반대파의 망명이 이어졌다. 최대의 정적이자 경쟁자였던 산타나와 부에나벤투라 바에스가 대부분의 기간 동안 권력을 장악했으며, 둘 다 독단적으로 통치했다. 그들은 신생 국가를 주요 강대국에 병합하려는 상반된 계획을 추진했다.
1849년 4월 라스 카레라스 전투에서 아이티의 세 번째 침공을 물리친 후, 산타나는 산토도밍고로 진군하여 마누엘 히메네스 대통령(산타나를 대통령직에서 축출했던)을 쿠데타로 몰아냈다. 그의 지시에 따라 의회는 부에나벤투라 바에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했지만, 바에스는 산타나의 꼭두각시가 되기를 거부했다. 1849년 11월부터 12월까지 도미니카 선원들은 아이티 해안을 습격하여 담마리까지 해안 마을을 약탈하고 나포된 적선 승무원들을 학살했다. 1855년 11월 아이티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침공은 1856년 1월 27일까지 도미니카 군대에 의해 격퇴되었고, 수천 명의 아이티 사상자가 발생했다. 다시 산타나와 바에스는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음모를 꾸몄고, 바에스가 첫 번째 대결에서 승리하여 1857년 산타나를 추방했으며, 산타나는 두 번째 대결에서 승리하여 1859년 바에스를 추방했다.
3.5. 스페인의 재병합과 공화국 복고

1861년, 페드로 산타나는 수많은 반대파를 투옥, 추방, 처형한 후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스페인의 이사벨 2세 여왕에게 도미니카 공화국을 다시 통치해 줄 것을 요청했다. 40년 전 아메리카 본토 식민지를 상실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스페인은 도미니카 공화국을 다시 식민지로 만들었다. 섬은 3만 명의 스페인 군대와 쿠바 및 푸에르토리코 자원병 대대, 그리고 스페인군에 합류한 1만 2천 명의 도미니카인으로 점령되었다. 스페인이 다시 식민 세력으로 부상하는 것을 두려워한 아이티 반군 지도자 실뱅 살나브는 독립 국가 재건을 추구하는 혁명가들에게 피난처와 물자를 제공했다. 이어진 내전, 즉 '복고 전쟁'(Guerra de la Restauración게라 데 라 레스타우라시온스페인어)으로 5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전쟁은 1863년 8월 16일에 시작되었다. 산티아고의 스페인 수비대는 9월 중순까지 푸에르토플라타로 후퇴해야 했다. 도미니카인들은 푸에르토플라타 항구를 포격하여 도시의 많은 부분을 파괴했다. 남부에서는 스페인군이 반군을 여러 도시에서 몰아내 아이티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수아 점령은 스페인에게 두 달간의 전투와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힌 값비싼 대가였다. 쿠바에서 온 스페인군은 북부 해안의 몬테크리스티를 공격하여 점령했지만,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1865년까지 도미니카 군대는 스페인 군대를 산토도밍고에 국한시켰고, 스페인인들은 수도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거의 2년간의 전투 끝에 스페인은 1865년 7월 섬을 포기했다. 한 군사 역사가는 스페인 사상자를 전사 또는 부상 10,888명과 황열병으로 인한 수천 명의 사망자로 추정하는 반면, 스페인을 위해 싸운 도미니카 군대는 1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다른 군사 역사가는 스페인이 1만 8천 명의 사망자를 냈다고 추정하며, 이 수치에는 그들과 함께 싸운 도미니카인, 쿠바인, 푸에르토리코인은 포함되지 않는다. 스페인에 맞서 독립을 위해 싸운 도미니카인들은 4천 명 이상 사망했다.
이후 몇 년 동안 다시 정치적 갈등이 만연했다. 군벌들이 통치했고, 군사 반란이 극도로 빈번했으며, 국가는 빚더미에 앉았다. 이번에는 바에스가 미국에 국가를 병합하려는 계획을 실행할 차례였고, 두 명의 연속적인 미국 대통령이 이를 지지했다. 미국 대통령 율리시스 S. 그랜트는 사마나만에 해군 기지를 원했고, 또한 새로 해방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재정착시킬 장소를 원했다. 이 조약은 1870년 미국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바에스는 1874년에 전복되었다가 복귀했지만, 1878년에 완전히 축출되었다.
1880년대에는 울리세스 외로 장군이 집권하면서 비교적 평화가 찾아왔다. "릴리스"라는 별명으로 불린 새 대통령은 국가를 심각한 부채에 빠뜨리면서 수익의 많은 부분을 개인적인 용도와 경찰 국가 유지를 위해 사용했다. 1899년 그는 암살당했다. 그러나 그가 주재했던 비교적 평온한 시기는 도미니카 경제의 개선을 가능하게 했다. 설탕 산업이 현대화되었고, 국가는 외국인 노동자와 이민자들을 유치했다. 19세기 후반 레바논인, 시리아인, 터키인, 팔레스타인인들이 이 나라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1916년부터 1924년까지의 미국 점령 기간 동안, 가비예로스(Gavilleros)라고 불리는 시골 농민들은 미 해병대를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시골을 여행하는 아랍 상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기도 했다.
3.6. 20세기 초
20세기 초반은 정치적 불안정과 외세의 간섭,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이 지속된 시기였다. 미국의 영향력이 증대되었으며, 결국 미국의 군사 점령으로 이어졌다.
3.6.1. 미국의 점령


1902년부터 단명 정부가 다시 표준이 되었고, 그들의 권력은 국가 일부 지역의 카우디요(군벌)들에 의해 찬탈되었다. 더욱이, 국가 정부는 파산 상태였고 유럽 채권국들에 대한 부채를 상환할 수 없게 되자 프랑스, 독일 제국, 이탈리아 왕국의 군사 개입 위협에 직면했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주로 미래의 파나마 운하로 가는 경로를 보호하기 위해 유럽의 개입을 막으려 했다. 그는 유럽 열강을 막기 위해 소규모 군사 개입을 했고, 먼로 독트린에 대한 유명한 루스벨트 계론을 선포했으며, 또한 도미니카 정부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도미니카 관세에 대한 미국 행정권을 확보하기 위한 1905년 도미니카 협정을 체결했다. 1906년 협정은 이 협정이 50년간 지속되도록 규정했다. 미국은 관세 수입의 일부를 도미니카 공화국의 막대한 외채를 줄이는 데 사용하기로 합의하고 해당 부채에 대한 책임을 맡았다.
6년간 집권한 라몬 카세레스 대통령(외로를 암살했던)은 1911년에 암살당했다. 그 결과 몇 년간 극심한 정치적 불안정과 내전이 이어졌다.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우드로 윌슨 행정부의 미국 중재는 매번 짧은 휴전만을 가져왔을 뿐이다. 1914년의 정치적 교착 상태는 윌슨이 도미니카인들에게 대통령을 선택하거나 미국이 대통령을 강요하는 것을 보라고 최후통첩을 보낸 후 타개되었다. 임시 대통령이 선출되었고, 같은 해 말 비교적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전 대통령(1899년~1902년) 후안 이시드로 히메네스 페레이라가 다시 집권했다. 그의 전 국방장관 데시데리오 아리아스가 그를 축출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아리아스에 대항한 미국의 군사 지원 제안에도 불구하고 히메네스는 1916년 5월 7일 사임했다. 이에 윌슨은 도미니카 공화국에 대한 미국 점령을 명령했다.


미 해병대는 1916년 5월 16일 상륙하여 수도와 다른 항구들을 점령했고, 아리아스 장군은 내륙의 산티아고 요새로 후퇴했다. 미 해병대와 아리아스 군대 사이의 상당한 무기 격차는 후자의 패배로 이어졌다. 미 해병대와의 충돌은 도미니카인들이 기관총을 처음 접한 사건이었다. 산티아고의 평화 대표단은 7월 5일 도시를 항복했고, 이는 아리아스 장군이 도미니카 총독에게 항복한 것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11월 29일 해리 셰퍼드 냅 부제독이 이끄는 해군 및 해병대 하에 미국이 수립한 군사 정부는 도미니카인들로부터 광범위하게 거부당했지만, 조직적인 저항은 중단되었다.
점령 정권은 대부분의 도미니카 법률과 제도를 유지했으며 일반 대중을 대체로 진정시켰다. 점령 정부는 또한 도미니카 경제를 부흥시키고, 국가 부채를 줄였으며, 마침내 국가의 모든 지역을 상호 연결하는 도로망을 건설하고, 전쟁 중인 당파 부대를 대체할 전문적인 방위군을 창설했다. 또한, 지역 사회의 풀뿌리 지원과 도미니카 및 미국 관리들의 지원으로 도미니카 교육 시스템은 미국 점령 기간 동안 크게 확장되었다. 1918년에서 1920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300개 이상의 학교가 설립되었다. 아이티의 미국 점령 당시 해병대가 사용했던 강제 노동 시스템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는 거의 없었다.
미국 정부의 통치는 1922년 10월에 끝났고, 1924년 3월에 선거가 치러졌다. 승자는 전 대통령(1902년~1903년) 오라시오 바스케스였다. 그는 1924년 7월 13일에 취임했고, 마지막 미군은 9월에 철수했다. 1930년, 점령 기간 동안 미 해병대로부터 훈련을 받은 라파엘 트루히요 장군은 바스케스 정부에 대한 군사 반란 이후 권력을 장악했다.
트루히요는 1930년 9월 산토도밍고를 황폐화시켜 8,000명의 사망자를 낸 산 세논 허리케인 이후 권력을 공고히 했다. 몇몇 전직 카우디요들은 처음에 새로운 독재자에게 반대했다. 시프리아노 벤코스메 장군은 봉기를 이끌었지만 1930년 11월 푸에르토플라타 근처에서 군대와의 교전 중 패배하고 사망했다. 데시데리오 아리아스 장군도 실패했고, 다음 해 6월 마오 근처에서 전투 중 사망했다.
3.7. 트루히요 시대

라파엘 트루히요의 장기간에 걸친 철권 통치 기간 동안 상당한 경제 성장이 있었지만, 부의 상당 부분은 독재자와 다른 정권 요소들에 의해 착취되었다. 병원, 진료소, 학교, 도로, 항구 건설과 함께 의료, 교육, 교통 분야에서 발전이 있었다. 트루히요는 또한 중요한 주택 건설 프로그램을 수행하고 연금 제도를 도입했다. 그는 마침내 1935년 아이티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국경을 협상했고, 1941년에는 1956년에 만료될 예정이었던 50년간의 관세 협정을 종료시켰다. 그는 1947년에 국가를 부채 없는 상태로 만들었다. 이러한 성과는 절대적인 탄압과 반대파에 대한 살인, 고문, 테러 방식의 남용과 함께 이루어졌다.
트루히요에 반대하는 활동에 참여한 후 뉴욕에서 몇몇 도미니카인들이 암살당했다. 1937년 10월, 트루히요의 명령에 따라 도미니카 군대는 아이티-도미니카 국경을 따라 1만 명에서 1만 5천 명의 아이티 남성, 여성, 어린이를 대부분 마체테로 살해했다. 이 사건은 파슬리 학살로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트루히요는 상징적으로 연합국 편에 섰다. 전쟁 기간 동안 독일 유보트가 도미니카 상선 두 척(자메이카 해안의 '산 라파엘'호와 포르드프랑스 해안의 '프레시덴테 트루히요'호)과 카리브해에서 다른 네 척의 도미니카인이 탑승한 선박을 어뢰로 격침시켰다. 도미니카 공화국은 전쟁에 군사적으로 기여하지는 않았지만, 도미니카 설탕과 기타 농산물은 연합국의 전쟁 노력을 지원했으며, 나치 박해를 피해 온 유대인 난민들도 받아들였다.
트루히요 정권 하에 운영된 산크리스토발주의 무기고는 소총, 기관총, 탄약을 생산했다. 트루히요는 또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를 전복시키기 위해 3,000명의 용병으로 구성된 외인부대를 조직했다. 윌리엄 알렉산더 모건 소령은 100만 달러를 받고 공격을 이끌기로 동의했지만, 카스트로는 음모를 알게 되었고 모건에게 협조하며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트루히요는 모건이 트리니다드를 점령했다고 믿도록 속았다. 1959년 8월 13일, 군사 고문과 보급품을 실은 C-47 수송기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출발하여 트리니다드 공항에 착륙했다. 카스트로는 항공기와 탑승자 10명을 압수하고 쿠바 전역에서 약 4,000명의 용의자를 체포했다.

1960년 11월 25일, 트루히요의 부하들은 '나비들'(Las Mariposas라스 마리포사스스페인어)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미라발 자매 네 명 중 세 명을 살해했다. 남편들과 함께 미라발 자매들은 폭력적인 반란으로 트루히요를 전복시키려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은 그들의 사망 기념일에 맞춰 제정되었다.
오랫동안 미국과 도미니카 엘리트들은 트루히요 정부를 지지했다. 이러한 지지는 정치적 반대파 암살, 아이티인 학살, 다른 나라에 대한 트루히요의 음모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다. 미국은 1960년 트루히요의 요원들이 트루히요를 맹렬히 비판했던 베네수엘라 대통령 로물로 베탕쿠르를 차량 폭탄으로 암살하려 한 후 마침내 트루히요와 결별했다. 베탕쿠르가 이전에 쿠바에 망명해 있을 때, 트루히요의 요원들은 하바나 거리에서 대낮에 그에게 독약을 주사하려 시도했다.
미주 기구(OAS)는 트루히요가 거의 성공할 뻔했던 암살 시도에 연루되었음을 확인한 후, 역사상 처음으로 회원국에 대한 제재를 명령했다. 미국은 1960년 8월 26일 도미니카 공화국과 외교 관계를 단절했고, 1961년 1월에는 트럭, 부품, 원유, 휘발유 및 기타 석유 제품의 수출을 중단했다.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또한 OAS 제재를 이용하여 도미니카의 주요 수출품인 도미니카 설탕 구매를 대폭 삭감했다. 이 조치로 인해 도미니카 공화국은 경제가 급격히 쇠퇴하던 시기에 거의 2200.00 만 USD의 수익 손실을 입었다. 트루히요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고, 도미니카 공화국 내부의 반체제 인사들은 암살만이 그를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확실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1961년 5월 31일, 베네수엘라는 정부 전복을 음모한 몇몇 개인들을 체포했는데, 이들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추적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1961년 5月 30일, 트루히요는 도미니카 반체제 인사들에 의해 총에 맞아 살해되었다.
3.8. 트루히요 이후 시대
트루히요 암살 이후 도미니카 공화국은 정치적 혼란과 민주화 시도, 그리고 경제적 변화의 시기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내전과 외세의 개입이 발생하기도 했다.
3.8.1. 1965년 내전과 미국의 개입

트루히요 암살 후, 독재자의 아들인 람피스 트루히요는 군 총사령관으로서 다음 6개월 동안 사실상 정부를 통제했다. 트루히요의 형제들인 엑토르 비엔베니도와 호세 아리스멘디 트루히요는 귀국하여 발라게르 대통령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몄다. 1961년 11월 18일, 계획된 쿠데타가 더욱 명백해지자 미국 국무장관 딘 러스크는 트루히요 가문이 "독재 지배를 재확립"하려 한다면 미국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경고와 산토도밍고 시야에 14척의 미 해군 기동 부대가 도착한 후, 람피스와 그의 삼촌들은 11월 19일 국외로 도피했다. 미주 기구(OAS)는 1962년 1월 4일 제재를 해제했다.
1963년 2월, 좌파 성향의 후안 보쉬가 이끄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집권했지만, 9월에 군사 쿠데타로 전복되었다. 1965년 4월 24일, 두 번째 군사 쿠데타가 군부가 세운 대통령 도널드 레이드 카브랄을 축출했다. 탱크 공격, 기총소사, 반대파 충성파의 공중 폭격에도 불구하고, 친보쉬 헌정파는 수도 대부분을 장악했다. 4월 26일까지 5,000명의 무장 민간인이 원래의 반군 정규군 1,500명을 압도했다. 이제 완전히 반군 통제하에 들어간 라디오 산토도밍고는 더 폭력적인 행동과 모든 경찰관 살해를 촉구하기 시작했다.
4월 28일,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은 미국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미 해병대를 산토도밍고에 파견했고, 미군은 이후 24,000명으로 증원되었다. 4월 30일, 제82공수사단의 두 개 대대가 산 이시드로 공군기지에 상륙했다. 몇 시간 후, 미군은 두아르테 다리를 건너 미 대사관을 지키는 해병대를 위한 통로를 확보하기로 되어 있던 충성파와 합류했다. 그러나 충성파는 대신 산 이시드로 공군기지로 철수했다. 5월 2일, 미군은 합류를 승인받았고, 무기가 열세였던 헌정파는 도시 남동부로 후퇴했다. 5월 6일, 미국 외교관들은 OAS가 미군을 지원하기 위한 미주 평화군을 창설하도록 설득했다. 브라질(군인 1,250명), 코스타리카(경찰 25명), 온두라스(군인 250명), 니카라과(군인 164명), 파라과이(군인 286명)가 자원했다.
미국과 OAS 평화유지군은 1년 이상 국내에 머물렀고, 1966년 호아킨 발라게르가 승리한 선거를 감독한 후 철수했다. 발라게르는 트루히요의 마지막 꼭두각시 대통령이었다. 발라게르는 12년 동안 대통령으로 집권했다. 그의 재임 기간은 인권과 시민 자유가 억압된 시기였다. 그의 통치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격차가 커진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대규모 주택 프로젝트, 스포츠 단지, 극장, 박물관, 수로, 도로, 고속도로 건설과 1992년 후기 재임 기간 동안 완공된 거대한 콜럼버스 등대를 포함한 야심찬 기반 시설 프로그램으로 찬사를 받았다.
1978년, 발라게르는 도미니카 혁명당(PRD)의 야당 후보 안토니오 구스만 페르난데스에게 대통령직을 계승했다. 1979년 8월 허리케인 데이비드가 도미니카 공화국을 강타하여 2,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20만 명이 집을 잃었다. 허리케인은 10.00 억 USD 이상의 피해를 입혔다. 1982년에는 살바도르 호르헤 블랑코 하에서 또 다른 PRD 승리가 이어졌다. 발라게르는 1986년에 대통령직을 되찾았고 1990년과 1994년에 재선되었으며, 후자에서는 산토도밍고의 전 시장이었던 PRD 후보 호세 프란시스코 페냐 고메스를 물리쳤다. 1994년 선거는 결함이 있었고 국제적인 압력을 받았으며, 이에 발라게르는 1996년에 또 다른 대통령 선거를 예정함으로써 대응했다. 발라게르는 후보가 아니었다. PSRC 후보는 그의 부통령 하신토 페이나도 가리고사였다.
3.9. 1996년 이후 민주화 과정

1996년, 호아킨 발라게르와 사회기독교개혁당(PRSC)이 애국전선이라는 연합으로 지지한 가운데, 도미니카 해방당(PLD)의 레오넬 페르난데스가 처음으로 승리했다. PLD는 1973년 보쉬가 PRD를 탈당한 후 창당한 정당이다. 페르난데스는 급성장하는 경제를 이끌었다. 연평균 성장률은 7.7%였고, 실업률은 하락했으며, 환율과 물가상승률은 안정적이었다.
2000년에는 PRD의 이폴리토 메히아가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 시기는 경제적 어려움이 많았던 때였다. 메히아 정권 하에서 도미니카 공화국은 2003년 이라크 침공 당시 미국 주도 연합군의 일원으로 다국적 플러스 울트라 여단에 참여했으며, 사상자는 없었다. 2008년 페르난데스는 세 번째 임기로 당선되었다. 페르난데스와 PLD는 국가를 기술적으로 발전시킨 계획들로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의 행정부는 부패 혐의로 고발되기도 했다.
PLD의 다닐로 메디나는 2012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2016년에 재선되었다. 범죄의 현저한 증가, 정부 부패, 취약한 사법 시스템은 그들의 행정 기간을 무색하게 할 위협이 되었다. 그는 2020년 도미니카 공화국 총선에서 야당 후보 루이스 아비나데르에게 패배했으며(메디나 정부에 대한 시위가 국내에서 발생한 지 몇 주 후), 이로써 중도좌파 도미니카 해방당(PLD)의 16년간의 집권이 막을 내렸다. 2024년 5월, 루이스 아비나데르 대통령은 2024년 도미니카 공화국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이웃 아이티로부터의 이주에 대한 그의 강경한 정책은 유권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4. 지리

도미니카 공화국은 대앤틸리스 제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이스파니올라섬의 동쪽 5/8를 차지하며, 북쪽으로는 대서양, 남쪽으로는 카리브해와 접한다. 아이티와는 약 2:1의 비율로 섬을 공유하며, 두 나라 사이의 국경선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다소 불규칙하지만) 약 376 km에 이른다. 북쪽과 북서쪽에는 바하마와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가 있으며, 동쪽으로는 모나 해협을 사이에 두고 미국의 자치령인 푸에르토리코가 있다. 국토 면적은 출처에 따라 4.84 만 km2 또는 4.87 만 km2로 보고되며, 이는 앤틸리스 제도에서 쿠바 다음으로 큰 면적이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는 남쪽 해안에 위치한 산토도밍고이다. 도미니카 공화국은 카리브해의 단층 활동 지역 근처에 위치해 있다.
도미니카 공화국에는 4개의 중요한 산맥이 있다. 가장 북쪽에 있는 것은 '코르디예라 셉텐트리오날'('북부 산맥')으로, 아이티 국경 근처의 북서부 해안 도시인 몬테크리스티에서 시작하여 동쪽의 사마나반도까지 뻗어 있으며 대서양 해안과 평행하게 이어진다. 도미니카 공화국, 나아가 서인도 제도 전체에서 가장 높은 산맥은 '코르디예라 센트랄'('중앙 산맥')이다. 코르디예라 센트랄에는 카리브해에서 가장 높은 4개의 봉우리가 있다: 피코 두아르테 (해발 3098 m), 라 펠로나 (3094 m), 라 루시야 (3049 m), 피코 야케 (2760 m). 국토 남서쪽 모퉁이, 코르디예라 센트랄 남쪽에는 다른 두 개의 산맥이 있다: 두 산맥 중 북쪽에 있는 것은 '시에라 데 네이바'이고, 남쪽에는 아이티의 마시프 드 라 셀 산맥의 연장선인 '시에라 데 바오루코'가 있다. '코르디예라 오리엔탈'('동부 산맥'), '시에라 마르틴 가르시아', '시에라 데 야마사', '시에라 데 사마나'와 같은 다른 작은 산맥들도 있다.
중앙 산맥과 북부 산맥 사이에는 비옥한 시바오 계곡이 있다. 이 주요 계곡에는 산티아고와 라베가 시가 있으며, 국토의 대부분의 농업 지역이 이곳에 있다. 중앙 코르디예라 남쪽의 반건조한 산후안 계곡과 시에라 데 네이바와 시에라 데 바오루코 사이에 자리 잡은 네이바 계곡은 생산성이 다소 낮다. 엔리키요 호수 분지 주변의 많은 땅은 해수면보다 낮으며, 덥고 건조한 사막과 같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 콘스탄사, 하라바코아, 비야알타그라시아, 보나오 계곡과 같은 다른 작은 계곡들도 산지에 있다.
'야노 코스테로 델 카리베'('카리브해 연안 평야')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가장 큰 평야이다. 산토도밍고의 북쪽과 동쪽으로 뻗어 있으며, 그곳에 흔한 사바나에 많은 설탕 농장이 있다. 산토도밍고 서쪽에서는 너비가 10 km로 줄어들어 해안을 따라 이어지다가 오코아 강 하구에서 끝난다. 또 다른 큰 평야는 아수아주의 매우 건조한 지역인 '플레나 데 아수아'('아수아 평야')이다. 북부 해안과 페데르날레스주 반도에는 몇몇 다른 작은 해안 평야가 있다.

4개의 주요 강이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많은 산에서 발원하여 흐른다. 야케델노르테강은 도미니카에서 가장 길고 중요한 강이다. 이 강은 시바오 계곡에서 넘치는 물을 운반하여 북서쪽의 몬테크리스티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마찬가지로, 유나강은 베가 레알 지역을 흐르며 북동쪽의 사마나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산후안 계곡의 배수는 야케델수르강의 지류인 산후안강이 담당하며, 이 강은 남쪽의 카리브해로 흘러 들어간다. 아르티보니토강은 이스파니올라섬에서 가장 긴 강으로 서쪽으로 흘러 아이티로 들어간다. 많은 호수와 해안 석호가 있다. 가장 큰 호수는 엔리키요 호수로, 해수면 -45 m에 위치한 염호이며 카리브해에서 가장 낮은 지점이다.
도미니카 영토의 일부를 구성하는 많은 작은 연안 섬과 암초가 있다. 해안 근처의 두 개의 가장 큰 섬은 남동쪽의 사오나섬과 남서쪽의 베아타섬이다. 더 작은 섬으로는 카요스 시에테 에르마노스, 이슬라 카브라, 카요 잭슨, 카요 리몬, 카요 레반타도, 카요 라 보카이나, 카탈라니타, 카요 피사헤, 이슬라 알토 벨로 등이 있다. 북쪽으로는 100 km에서 200 km 거리에 세 개의 넓고 대부분 물에 잠긴 해저융기가 있으며, 지리적으로는 바하마의 남동쪽 연장선이다: 나비다드 해저융기, 실버 해저융기, 무슈아르 해저융기. 나비다드 해저융기와 실버 해저융기는 도미니카 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슬라 카브리토스는 엔리키요 호수 내에 있다.
이 나라는 이스파니올라 습윤림, 이스파니올라 건조림, 이스파니올라 소나무숲, 엔리키요 습지, 대앤틸리스 맹그로브 등 5개의 육상 생태 지역의 본고장이다.
4.1. 기후

도미니카 공화국은 해안 및 저지대 지역에서는 열대 우림 기후를 나타낸다. 시바오 지역 대부분과 같은 일부 지역은 열대 사바나 기후를 보인다. 다양한 지형으로 인해 도미니카 공화국의 기후는 짧은 거리에서도 상당한 변화를 보이며 앤틸리스 제도 전체에서 가장 다양한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 기온은 25 °C이다. 고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평균 기온이 18 °C인 반면, 해수면 근처에서는 평균 기온이 28 °C이다. 산악 지역에서는 0 °C의 낮은 기온이 나타날 수 있으며, 보호된 계곡에서는 40 °C의 높은 기온이 나타날 수 있다. 1월과 2월은 연중 가장 시원한 달이며, 8월은 가장 더운 달이다. 피코 두아르테 정상에서는 드물게 눈이 관측될 수 있다.

북부 해안의 우기는 11월부터 1월까지 지속된다. 그 외 지역에서는 우기가 5월부터 11월까지 이어지며, 5월이 가장 비가 많이 오는 달이다. 전국 연평균 강수량은 1500 mm이며, 바예 데 네이바의 특정 지역은 평균 강수량이 350 mm로 낮은 반면, 코르디예라 오리엔탈은 평균 2740 mm이다. 국토의 가장 건조한 부분은 서부에 있다.
열대 저기압은 몇 년에 한 번씩 도미니카 공화국을 강타하며, 피해의 65%는 남부 해안을 따라 발생한다. 허리케인은 6월에서 10월 사이에 발생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 나라를 강타한 마지막 주요 허리케인은 1998년의 허리케인 조르주였다.
4.2. 동식물
도미니카 공화국에 서식하는 고유 육상 포유류 종의 90%는 박쥐이다. 도미니카 공화국 남서부에 위치한 엔리키요 호수는 미국악어의 가장 큰 서식지이다.
4.3. 환경 문제
도미니카 공화국은 삼림 벌채, 수질 오염, 토양 침식 등 여러 가지 주요 환경 문제에 직면해 있다. 특히 아이티와의 국경 지역에서는 아이티 측의 심각한 삼림 파괴로 인해 환경 문제가 더욱 악화되고 있으며, 이는 도미니카 공화국 측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불법적인 숯 생산을 위한 벌목도 문제로 지적된다. 바호스 데 아이나 지역은 과거 배터리 재활용 공장으로 인한 납 오염으로 심각한 환경 문제를 겪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염된 지역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정부와 여러 환경 단체들은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지속적인 관심과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다.
5. 정부와 정치

도미니카 공화국은 대의 민주주의 또는 민주 공화국 체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삼권 분립을 기반으로 한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도미니카 공화국 의회가 통과시킨 법률을 집행하고, 내각을 임명하며, 도미니카 공화국군의 총사령관이다. 대통령과 부통령은 같은 후보 조로 출마하며, 직접 선거를 통해 4년 임기로 선출된다. 입법부는 양원제로, 32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도미니카 공화국 상원과 178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도미니카 공화국 하원으로 이루어진다.
사법 권한은 16명의 판사로 구성된 도미니카 공화국 대법원에 있다. 대법원은 "대통령, 대통령이 지명한 내각 구성원, 그리고 의회 회기 중인 의회 의원에 대한 소송을 단독으로 심리한다." 대법원 판사는 대통령, 상하원 지도자, 대법원장, 그리고 야당 또는 비여당 소속 의원으로 구성된 도미니카 공화국 국가 사법위원회에 의해 임명된다.
도미니카 공화국은 다당제 정치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선거는 2년마다 번갈아 치러지며, 4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에는 대통령 선거가, 4로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 짝수 해에는 의회 및 지방 선거가 열린다. "국제 참관단은 1996년 이후의 대통령 및 의회 선거가 대체로 자유롭고 공정했다고 평가했다." 2016년부터는 헌법 개정 이후 선거가 동시에 치러진다.

주요 정당으로는 보수 성향의 사회기독교개혁당(PRSC, Partido Reformista Social Cristiano스페인어),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도미니카 혁명당(PRD, Partido Revolucionario Dominicano스페인어), 그리고 도미니카 해방당(PLD, Partido de la Liberación Dominicana스페인어)이 있다. 2020년에는 PLD의 통치에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야당인 현대혁명당(PRM, Partido Revolucionario Moderno스페인어)의 대통령 후보 루이스 아비나데르가 2020년 선거에서 PLD를 누르고 승리했다.
5.1. 행정 구역
도미니카 공화국은 31개의 주(provincia)로 구성된다. 수도인 산토도밍고는 국가 지구(Distrito Nacional)로 지정되어 있다. 주는 다시 시(municipio)로 나뉜다. 시는 국가의 2차 정치 및 행정 구역 단위이다. 대통령은 31개 주의 주지사를 임명한다. 시장과 시의회는 124개의 시 지구와 국가 지구(산토도밍고)를 관리한다. 이들은 의회 대표와 동시에 선출된다.
주는 국가의 1차 행정 구역 단위이다. 중앙 정부 지역 사무소의 본부는 일반적으로 주의 주도에 위치한다. 대통령은 각 주에 행정 주지사(Gobernador Civil스페인어)를 임명하지만, 국가 지구에는 임명하지 않는다.
국가 지구는 1936년에 만들어졌다. 이전에는 국가 지구가 1844년 국가 독립 이후 존재했던 옛 산토도밍고 주였다. 이는 2001년에 분리된 새로운 산토도밍고 주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여러 면에서 주와 유사하지만, 국가 지구는 행정 주지사가 없고 산토도밍고 시라는 단 하나의 시로만 구성된다는 점에서 다르며, 시의회(ayuntamiento스페인어)와 시장(síndico스페인어)이 행정을 담당한다.
문장 | 주 | 주도 |
---|---|---|
![]() | 아수아 | 아수아데콤포스텔라 |
바오루코 | 네이바 | |
바라오나 | 산타크루스데바라오나 | |
![]() | 다하본 | 다하본 |
국가 지구 | 산토도밍고 | |
두아르테 | 산프란시스코데마코리스 | |
![]() | 엘리아스피냐 | 코멘다도르 |
엘세이보 | 산타크루스데엘세이보 | |
![]() | 에스파이야트 | 모카 |
![]() | 아토마요르 | 아토마요르델레이 |
![]() | 에르마나스미라발 | 살세도 |
![]() | 인데펜덴시아 | 히마니 |
![]() | 라알타그라시아 | 살발레온데이궤이 |
라로마나 | 라로마나 | |
![]() | 라베가 | 콘셉시온데라베가 |
![]() | 마리아트리니다드산체스 | 나과 |
![]() | 몬세뇨르노우엘 | 보나오 |
![]() | 몬테크리스티 | 산페르난도데몬테크리스티 |
![]() | 몬테플라타 | 몬테플라타 |
![]() | 페데르날레스 | 페데르날레스 |
![]() | 페라비아 | 바니 |
푸에르토플라타 | 산펠리페데푸에르토플라타 | |
사마나 | 사마나 | |
![]() | 산크리스토발 | 산크리스토발 |
![]() | 산호세데오코아 | 산호세데오코아 |
산후안 | 산후안데라마과나 | |
산페드로데마코리스 | 산페드로데마코리스 | |
![]() | 산체스라미레스 | 코투이 |
산티아고 | 산티아고데로스카바예로스 | |
![]() | 산티아고로드리게스 | 산이그나시오데사바네타 |
![]() | 산토도밍고 | 산토도밍고에스테 |
발베르데 | 산타크루스데마오 |
5.2. 대외 관계
도미니카 공화국은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푸에르토리코 연방 및 미국의 다른 주 및 관할 구역과도 긴밀한 문화적 유대를 가지고 있다. 2018년에는 중화민국(대만)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였다.
도미니카 공화국은 프랑코포니 국제 기구프랑스어의 정회원국이다. 도미니카 공화국-중앙아메리카 자유 무역 협정을 통해 미국,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 니카라과와 자유 무역 협정을 맺고 있으며, 카리브 포럼(CARIFORUM)을 통해 유럽 연합 및 카리브 공동체와 경제 동반자 협정을 체결하고 있다.
2024년 세계 평화 지수에 따르면 도미니카 공화국은 세계에서 97번째로 평화로운 국가이다.
5.2.1. 아이티와의 관계
이웃 국가인 아이티와의 관계는 아이티인의 도미니카 공화국으로의 대규모 이주로 인해 긴장 상태에 있으며, 도미니카 공화국 시민들은 아이티인들을 증가하는 범죄 및 기타 사회 문제의 원인으로 비난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파슬리 학살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도 있었으며, 국경 문제와 불법 이민자 처우, 아이티계 도미니카인의 국적 문제 등은 여전히 양국 관계의 주요 현안으로 남아 있다. 아이티의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심각한 환경 문제(특히 삼림 파괴)는 이러한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티 지진 발생 시 도미니카 공화국이 구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인도주의적 협력도 이루어지고 있다. 아이티 출신 이민자들은 도미니카 공화국 경제, 특히 농업과 건설업 분야에서 중요한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으나, 열악한 노동 조건과 인권 침해 문제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5.2.2. 미국과의 관계
도미니카 공화국은 역사적으로 미국과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20세기 초 미국의 관세 관리 및 군사 점령을 경험했으며, 냉전 시기에는 미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1965년 내전 당시 미국의 군사 개입은 도미니카 공화국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 양국은 도미니카 공화국-중앙아메리카 자유 무역 협정(CAFTA-DR)을 통해 강력한 경제적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으며, 미국은 도미니카 공화국의 주요 교역 상대국이자 투자국이다. 또한, 많은 도미니카인이 미국에 거주하며 송금하는 금액은 도미니카 공화국 경제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마약 밀매 방지, 안보 협력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과거 미국의 내정 간섭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5.3. 군사

도미니카 공화국군은 도미니카 공화국의 군사력을 의미한다. 약 56,000명의 현역 군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미니카 공화국 대통령은 도미니카 공화국군의 최고사령관이며, 국방부는 군대의 최고 관리 기관이다.
도미니카 육군은 28,750명의 현역 군인으로 구성되며, 6개의 보병 여단, 공중 기병대대, 전투 지원 여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미니카 공군은 남부 지역의 산토도밍고 근처와 북부 지역에 두 개의 주요 기지를 운영하며, 헬리콥터를 포함하여 약 75대의 항공기를 운용한다. 도미니카 해군은 산토도밍고와 남서부 해안의 라스 칼데라스에 두 개의 주요 해군 기지를 운영한다.
군은 이러한 지역의 국제 안보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전문 공항 보안 부대(CESA)와 전문 항만 보안 부대(CESEP)를 조직했다. 국방장관은 또한 전문 국경 부대(CESEF)를 창설할 계획을 발표했다. 군대는 국가수사국(DNI)과 마약단속국(DNCD) 인력의 75%를 제공한다.
2018년, 도미니카 공화국은 유엔 핵무기금지조약에 서명했다.
6. 경제
과거 설탕, 코코아, 커피 등 농산물 수출에 의존했던 도미니카 경제는 지난 30년 동안 서비스, 제조업, 농업, 광업, 무역이 혼합된 다각화된 경제로 전환되었다. 서비스 부문은 GDP의 거의 60%를 차지하며, 제조업은 22%를 차지한다. 관광, 통신, 금융이 서비스 부문의 주요 구성 요소이지만, 그중 어느 것도 전체의 10% 이상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도미니카 공화국에는 증권 거래소인 도미니카 공화국 증권거래소(BVRD)가 있으며, 선진적인 통신 시스템과 교통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높은 실업률과 소득 불평등은 장기적인 과제이다. 국제 이주는 도미니카 공화국에 큰 영향을 미치며, 대규모 이민자 유입과 유출이 모두 발생한다. 아이티인의 대규모 불법 이민과 아이티계 도미니카인의 통합은 주요 문제이다. 대규모 도미니카인 디아스포라가 존재하며, 주로 미국에 거주하며, 이들은 송금을 통해 도미니카 가족에게 수십억 달러를 보내 개발에 기여한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송금액은 2013년 33.33 억 USD에서 2014년 45.71 억 USD로 증가했다(미주개발은행 보고 자료 기준). 만성적인 에너지 부족에도 불구하고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잦은 정전과 매우 높은 전기 요금이 발생한다. 상품 무역수지 적자가 확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광 수입과 송금은 외환보유고 구축에 도움이 되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의 경제 혼란기(국내총생산(GDP)이 최대 5%까지 하락하고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전례 없는 100%에 도달) 이후, 도미니카 공화국은 2002년까지 성장과 인플레이션 하락의 시기에 접어들었으나, 그 이후 경제는 경기 침체에 빠졌다.
이러한 경기 침체는 국내에서 두 번째로 큰 상업은행인 반인테르(Baninter)의 붕괴에 따른 것으로, 이는 35.00 억 USD 규모의 대규모 사기 사건과 관련이 있었다. 반인테르 사기는 도미니카 경제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2003년 GDP는 1% 하락하고 인플레이션은 27% 이상 급등했다. 재판의 핵심 인물이었던 라몬 바에스 피게로아(부에나벤투라 바에스 대통령의 증손자)를 포함한 모든 피고인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유엔 인간개발 소위원회 2005년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도미니카 공화국은 자원 가용성에서 세계 71위, 인간 개발에서 79위, 자원 관리 부실에서 14위를 차지했다. 이러한 통계는 국가 정부 부패, 국가에 대한 외국의 경제적 간섭, 빈부 격차를 강조한다.
도미니카 공화국은 커피, 쌀, 사탕수수, 토마토 산업에서 아동 노동 문제가 두드러진다. 사탕수수 산업의 노동 착취는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강제 노동으로까지 이어진다. 3개의 대규모 그룹이 토지의 75%를 소유하고 있다: 국영 설탕 위원회(Consejo Estatal del Azúcar, CEA), 비시니 그룹, 센트럴 로마나 코퍼레이션.
2016년 세계 노예 지수에 따르면, 현대 도미니카 공화국에는 약 104,800명, 즉 인구의 1.00%가 노예 상태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6.1. 경제 구조 및 주요 산업
도미니카 공화국의 경제는 전통적으로 농업에 크게 의존했으나, 최근 수십 년간 서비스업, 제조업, 광업 등으로 다각화되었다.
- 관광업: 국가 경제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로, 아름다운 해변, 역사 유적, 자연공원 등을 바탕으로 카리브해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국가 중 하나이다. 푼타카나, 바바로, 푸에르토플라타, 사마나 등이 주요 관광지이다.
- 농업: 여전히 중요한 산업으로, 주요 생산물은 사탕수수, 커피, 카카오, 담배, 쌀, 과일 등이다. 그러나 아동 노동 및 강제 노동 문제가 일부 농업 분야에서 지적되기도 한다.
- 광업: 금, 은, 니켈, 보크사이트 등의 광물 자원이 풍부하다. 특히 푸에블로 비에호 광산은 세계에서 가장 큰 금광 중 하나이다. 2015년 금 생산량은 31톤에 달했다.
- 제조업: 자유무역지대를 중심으로 의류, 신발, 전자 부품, 의료 기기 등의 경공업이 발달해 있다.
- 서비스업: 금융, 통신, 무역 등이 성장하고 있으며, GDP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6.2. 통화
도미니카 공화국의 공식 통화는 도미니카 페소(Dominican Peso, ISO 4217 코드: DOP)이며, 기호로는 $ 또는 RD$로 표기한다. 대부분의 관광지에서는 미국 달러(USD), 유로(EUR), 캐나다 달러(CAD), 스위스 프랑(CHF)도 통용된다. 페소화는 1985년에 환율이 자유화되었으며, 이후 변동을 거듭해왔다. 1986년 8월 미국 달러 대비 페소 환율은 1달러당 2.70페소였으나, 1993년에는 14.00페소, 2000년에는 16.00페소로 상승했다. 2018년 9월 기준으로는 1달러당 50.08페소였다.
6.3. 관광

관광업은 도미니카 공화국 경제 성장의 핵심 동력 중 하나이다. 도미니카 공화국은 카리브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 목적지이다. 카프카나, 산토도밍고의 산수시 항구, 카사데캄포, 푼타카나의 하드록 호텔 & 카지노(구 문 팰리스 리조트)와 같은 프로젝트 건설로 도미니카 공화국은 향후 몇 년 동안 관광 활동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생태관광 또한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는 주제로, 하라바코아와 인근 콘스탄사와 같은 도시, 그리고 피코 두아르테, 바히아 데 라스 아길라스와 같은 장소들이 관광으로부터의 직접적인 혜택을 늘리기 위한 노력에서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다른 나라 대부분의 거주자는 거주 국가에 따라 관광 카드를 받아야 한다. 지난 10년 동안 도미니카 공화국은 재활용 및 폐기물 처리 측면에서 세계적으로 주목할 만한 진보적인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6.4. 교통


도미니카 공화국에는 모든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3개의 국가 간선도로가 있다. 이들은 각각 북부(시바오), 남서부(수르), 동부(엘 에스테) 지역으로 산토도밍고에서 출발하는 DR-1, DR-2, DR-3이다. 이 고속도로들은 많은 구간의 확장 및 재건축을 통해 지속적으로 개선되어 왔다. 다른 두 개의 국도는 지선(DR-5) 또는 대체 경로(DR-4) 역할을 한다.
국가 간선도로 외에도 정부는 작은 마을과 간선 경로를 연결하는 지선 보조 도로의 광범위한 재건축에 착수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정부는 산토도밍고와 국가 북동부 반도를 연결하는 106 km 유료 도로를 건설했다. 여행자들은 이제 2시간 이내에 사마나 반도에 도착할 수 있다. 다른 추가 사항으로는 DR-28(하라바코아 - 콘스탄사) 및 DR-12(콘스탄사 - 보나오)의 재건축이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보조 도로는 여전히 비포장 상태이거나 유지 보수가 필요한 상태이다. 현재 이러한 도로 및 기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도로를 포장하기 위한 전국적인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다. 또한, 산티아고 경전철 시스템은 계획 단계에 있지만 현재 보류 중이다.
6.4.1. 산토도밍고 지하철

도미니카 공화국은 수도인 산토도밍고에 도시철도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이는 길이와 역 수 면에서 도서 카리브해 및 중앙아메리카 지역에서 가장 광범위한 지하철 시스템이다. 산토도밍고 지하철은 산토도밍고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의 교통을 개선하기 위한 주요 "국가 기본 계획"의 일부이다. 첫 번째 노선은 막시모 고메스 거리와 에르마나스 미라발 거리의 교통 혼잡을 완화하기 위해 계획되었다. 2013년 4월에 개통된 두 번째 노선은 도시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두아르테-케네디-센테나리오 회랑의 혼잡을 완화하기 위한 것이다. 2013년 8월 현재 개통된 두 노선의 총 길이는 27.35 km이다. 두 번째 노선 개통 전인 2012년에는 30,856,515명의 승객이 산토도밍고 지하철을 이용했다. 두 노선이 모두 개통되면서 2014년 승객 수는 61,270,054명으로 증가했다.
6.5. 통신
도미니카 공화국은 잘 발달된 통신 인프라를 갖추고 있으며, 광범위한 휴대 전화 및 유선 전화 서비스를 제공한다. 케이블 인터넷 및 DSL은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이용 가능하며, 많은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가 3G 무선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한다. 산토도밍고에서는 Wi-Fi 핫스팟 확장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국내 통신 규제 기관은 INDOTEL(Instituto Dominicano de Telecomunicaciones인스티투토 도미니카노 데 텔레코무니카시오네스스페인어)이다. 가장 큰 통신 회사는 카를로스 슬림의 아메리카 모빌 계열사인 클라로(Claro)로, 무선, 유선, 광대역 및 IPTV 서비스를 제공한다. 2009년 6월 현재 도미니카 공화국에는 800만 명 이상의 전화 가입자(유선 및 휴대폰 사용자)가 있었으며, 이는 전국 인구의 81%에 해당하고 2000년 160만 명이었던 것에 비해 5배 증가한 수치이다. 통신 부문은 GDP의 약 3.0%를 차지한다. 2009년 3월 기준 인터넷 사용자 수는 2,439,997명이었다.
2009년 11월, 도미니카 공화국은 정부가 개발한 모든 정보 통신 기술(ICT) 계획 및 정책에 "성인지 관점"을 포함시키기로 약속한 최초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가 되었다. 이는 지역 eLAC2010 계획의 일부이다. 도미니카인들이 모든 공공 정책을 설계하고 평가하기 위해 선택한 도구는 APC 성별 평가 방법론(GEM)이다.
6.6. 전력
도미니카 공화국의 전력 서비스는 트루히요 시대부터 불안정했으며, 장비의 75%가 그 당시의 것이다. 국가의 노후화된 전력망은 발전기에서 청구된 전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송전 손실을 야기한다. 이전 레오넬 페르난데스 행정부에서 부문 민영화가 시작되었다. 최근 345kV "산토도밍고-산티아고 전력 고속도로"에 대한 투자는 송전 손실을 줄여 1960년대 중반 이후 국가 전력망의 주요 자본 개선으로 평가받고 있다.
트루히요 정권 동안 많은 도시에 전력 서비스가 도입되었다. 사용량의 거의 95%가 전혀 청구되지 않았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210만 가구 중 약 절반에는 계량기가 없으며 대부분은 전기 요금을 내지 않거나 고정된 월 요금을 지불한다.
가정용 및 일반 전력 서비스는 110볼트, 60Hz 교류로 제공된다. 미국산 전기 제품은 별도의 변환 없이 작동한다. 도미니카 공화국 대부분 지역에서 전기를 이용할 수 있다. 관광 지역은 기업, 여행, 의료 및 중요 기반 시설과 마찬가지로 전력 공급이 더 안정적인 경향이 있다. 징수율이 70%에 도달한 지역으로의 공급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집중적인 노력이 발표되었다. 전력 부문은 정치색이 매우 강하다. 일부 발전 회사는 자본이 부족하여 때때로 적절한 연료 공급을 구매할 수 없다.
7. 사회와 인구

2023년 유엔 추산에 따르면 도미니카 공화국의 인구는 약 1,133만 명이며, 1950년의 238만 명에 비해 크게 증가했다. 2010년 기준 인구의 31.2%가 15세 미만이었고, 65세 이상 인구는 6%였다. 2020년 추정 성비는 여성 100명당 남성 102.3명이었다. 2006-2007년 연간 인구 성장률은 1.5%였으며, 2015년 예상 인구는 1,012만 1천 명이었다.
2007년 인구 밀도는 km2당 192명(평방 마일당 498명)이었고, 인구의 63%가 도시 지역에 거주했다. 남부 해안 평야와 시바오 계곡은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다. 수도인 산토도밍고의 인구는 2010년 기준 2,907,100명이었다.
유엔에 따르면 2000-2005년 도시 인구 성장률은 2.3%였다.
7.1. 주요 도시
도시 | 주 | 인구 | 이미지 |
---|---|---|---|
산토도밍고 | 국가 지구 | 4,274,651 | |
산티아고 | 산티아고주 | 771,748 | ![]() |
라베가 | 라베가주 | 282,055 | ![]() |
라로마나 | 라로마나주 | 270,686 | ![]() |
이궤이 | 라알타그라시아주 | 266,091 | |
산프란시스코데마코리스 | 두아르테주 | 217,523 | |
산페드로데마코리스 | 산페드로데마코리스주 | 202,716 | |
푸에르토플라타 | 푸에르토플라타주 | 162,093 | |
바니 | 페라비아주 | 158,019 | |
푼타카나 | 라알타그라시아주 | 148,993 |
7.2. 민족

2022년 인구 조사에서 응답자의 71.7%가 혼혈이라고 밝혔는데, 세부적으로는 인디오(Indio) 34.2%, 모레노(Moreno) 26.1%, 메스티소(Mestizo) 7.7%, 물라토(Mulatto) 3.8%였다. 백인은 18.7%, 흑인은 7.4%, 기타는 0.3%로 나타났다.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인디오"라는 용어는 토착 원주민 혈통과는 관련이 없으며, 밝은 피부와 어두운 피부 사이의 혼혈 또는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한다. 최근 도미니카 인구에 대한 유전학적 DNA 연구에 따르면, 유전적 구성은 주로 유럽인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이며, 아메리카 원주민 혈통은 그보다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설립 인구의 평균 도미니카인 DNA는 유럽인 73%, 원주민 10%, 아프리카인 17%로 추정된다. 아이티 및 아프리카계 카리브해 이주 이후 전체 비율은 유럽인 57%, 원주민 8%, 아프리카인 35%로 변경되었다. 혼혈 도미니카인(그리고 대부분의 도미니카인)은 주로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의 혼합이며, 소량의 토착 혈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물라토' 또는 '삼인종'으로 묘사될 수 있다. 도미니카 공화국에는 사람의 인종적 혼합 정도를 느슨하게 설명하는 여러 비공식 용어가 있다. 메스티소는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와 달리 유럽인/원주민 혼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유형의 혼혈을 의미하며, '인디오'는 백인과 흑인 사이의 피부색을 가진 혼혈인을 설명한다.
도미니카 인구의 대다수는 삼인종이며, 거의 모든 혼혈인은 타이노족 아메리카 원주민 혈통과 함께 유럽인(주로 스페인인) 및 아프리카인 혈통을 가지고 있다. 혼혈 인구의 유럽인 혈통은 평균적으로 50%에서 60% 사이이며, 아프리카인 혈통은 30%에서 40% 사이이고, 원주민 혈통은 보통 5%에서 10% 사이이다. 유럽인 및 원주민 혈통은 북중부 시바오 지역의 도시와 마을, 그리고 일반적으로 국가 내륙 산악 지역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 아프리카인 혈통은 해안 지역, 남동부 평야 및 국경 지역에서 가장 강하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인종은 수백 년 동안 도미니카 공화국과 스페인령 카리브해 지역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인종 간 혼합으로 인해 백인-물라토-흑인의 연속체로 작용하여 높은 수준의 유전적 다양성을 허용한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시민권은 속지주의가 아닌 속혈주의(출생혈통주의)에 따라 부여되므로, 부모가 불법 이민자인 경우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시민권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도미니카 혈통을 증명할 수 있다면 해외에서 태어난 사람에게도 시민권이 비교적 쉽게 부여된다. 이는 '도미니카 시민'과 '도미니카 민족'이 항상 같은 의미는 아님을 의미한다. 전자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이주하여 받을 수 있는 시민권을 의미하는 반면, 후자는 조상과 문화로 연결된 민족을 의미한다. 도미니카 민족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태어나 합법적인 지위를 가졌거나 해외에서 태어나 국가에 조상 뿌리를 둔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여러 세대에 걸쳐 국가에 가족 뿌리를 두고 있으며 스페인, 타이노, 아프리카라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세 가지 주요 foundational 뿌리에서 다양한 정도로 혼합된 후손이다. 거의 모든 도미니카인은 혼혈이며, 75%는 "눈에 띄게" 그리고 "균등하게" 혼혈이며, 나머지 25%는 주로 아프리카 또는 유럽 혈통이지만 여전히 상당한 혼혈이다. 2017년 도미니카 정부 추산에 따르면, 도미니카 공화국 인구는 10,189,895명이었으며, 그중 847,979명은 이민자 또는 최근 이민자의 후손이었고 9,341,916명은 '도미니카 민족'이었다. 대부분의 도미니카인은 자신의 혼혈 유산의 모든 측면을 포용하지만, 종종 자신의 국적을 가장 먼저 정체성으로 삼는다. 현재 미국에서 태어난 많은 도미니카인이 도미니카 공화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약 25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일종의 국외 거주자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영향력이 커지고 도미니카 공화국의 경제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아이티인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가장 큰 이민자 집단이며, 대다수가 불법 체류자이다. 그 다음으로는 베네수엘라인이 많다. 다른 민족 집단으로는 서아시아 출신(주로 레바논인, 시리아인, 팔레스타인인)의 후손들이 있다. 소수이지만 중요한 존재감을 가진 동아시아인(주로 화교와 일본인)도 인구 전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도미니카인은 1492년과 1497년 스페인과 지중해 지역에서 추방된 세파르딤 유대인과 1700년대 및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다른 이주로 구성되어 도미니카 혈통에 기여한다.
7.3. 언어
도미니카 공화국 인구의 대부분은 스페인어를 사용하며, 일부 이민자를 제외하고는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현지 스페인어 변종은 도미니카 스페인어라고 불리며, 이는 카리브해의 다른 스페인어 방언과 매우 유사하고 카나리아 스페인어와도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아프리카 언어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스파니올라섬 고유의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에서 차용한 단어들도 있다. 학교는 스페인 교육 모델을 기반으로 하며, 사립 및 공립학교 모두에서 영어와 프랑스어가 필수 외국어이지만, 외국어 교육의 질은 낮은 편이다.
아이티 크레올어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가장 큰 소수 언어이며, 아이티인 이민자들과 그 후손들이 사용한다. 사마나반도에는 조상들이 사마나 영어를 사용했던 수천 명의 공동체가 있다. 이들은 19세기에 도착한 과거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의 후손들이지만, 현재는 소수의 노인들만이 이 언어를 구사한다. 관광, 미국 대중문화, 도미니카계 미국인의 영향, 그리고 미국과의 경제적 유대 관계는 다른 도미니카인들이 영어를 배우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도미니카 공화국은 제2언어로서의 영어 능숙도에서 라틴 아메리카 2위, 세계 23위를 차지하고 있다.
언어 | 전체 % | 도시 % | 농촌 % |
---|---|---|---|
스페인어 | 98.00 | 97.82 | 98.06 |
프랑스어 | 1.19 | 0.39 | 1.44 |
영어 | 0.57 | 0.96 | 0.45 |
아랍어 | 0.09 | 0.35 | 0.01 |
이탈리아어 | 0.03 | 0.10 | 0.006 |
기타 언어 | 0.12 | 0.35 | 0.04 |
7.4. 종교

- 95.0% 기독교
- 2.6% 무종교
- 2.2% 기타 종교
기독교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가장 널리 신봉되는 종교이다. 역사적으로 가톨릭교가 국가의 종교 관습을 지배했으며, 국교로서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다. 2014년 현재 인구의 57%(570만 명)가 로마 가톨릭 신자, 23%(230만 명)가 개신교 신자로 확인되었다(라틴 아메리카 국가에서 개신교도는 개인 및 공공 전도를 강조하기 때문에 종종 '에반젤리코스(Evangelicos)'라고 불리며, 다수가 복음주의 또는 오순절교회 그룹에 속한다). 1896년부터 1907년까지 성공회, 자유감리교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모라비아 형제회 교회 선교사들이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도미니카 공화국 인구 1,063만 명 중 3%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신자이다. 최근 이민과 전도 노력으로 다른 종교 단체들이 유입되었으며, 인구 비율은 다음과 같다: 심령술: 2.2%,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1.3%, 불교: 0.1%, 바하이교: 0.1%, 중국 민간 신앙: 0.1%, 이슬람교: 0.02%, 유대교: 0.01%.
가톨릭 교회는 19세기 후반에 강력한 지배력을 잃기 시작했다. 이는 자금, 사제, 지원 프로그램 부족 때문이었다. 같은 시기에 개신교 복음주의는 "개인의 책임과 가족 재활, 경제적 기업가 정신, 성서 근본주의 강조"로 더 넓은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도미니카 공화국에는 두 명의 가톨릭 수호성인이 있다: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라 알타그라시아'(높은 은총의 성모)와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라스 메르세데스'(자비의 성모)이다.
도미니카 공화국은 역사적으로 광범위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해왔다. 미국 국무부에 따르면, "헌법은 국교가 없음을 명시하고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규정한다. 바티칸과의 협약은 가톨릭을 공식 종교로 지정하고 다른 종교 단체에는 부여되지 않는 특별한 특권을 가톨릭 교회에 부여한다. 여기에는 교회법의 법적 인정, 일부 교회 비용을 지원하기 위한 공적 자금 사용, 관세 완전 면제 등이 포함된다." 1950년대에는 트루히요 정부에 의해 교회에 대한 제한이 가해졌다. 정부 반대자들의 대량 체포에 항의하는 서한이 보내졌다. 트루히요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캠페인을 시작했고 정부에 반대하는 설교를 한 사제와 주교들을 체포할 계획이었다. 이 캠페인은 실행되기 전에 그의 암살로 끝났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을 탈출한 한 무리의 유대인들이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피신하여 소수아 시를 세웠다. 그 이후로 이곳은 유대인 인구의 중심지로 남아있다.
7.5. 이민

20세기에는 많은 아랍인(주로 레바논, 시리아, 팔레스타인 출신), 일본인, 그리고 소수의 한국인이 농업 노동자 및 상인으로 이 나라에 정착했다. 중국 기업들은 통신, 광업, 철도 분야에서 사업을 벌였다. 아랍 공동체는 점증적으로 성장하여 약 8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 나라의 이민자 집단에는 서남아시아인(주로 레바논인, 시리아인, 팔레스타인인)이 포함된다. 현 대통령인 루이스 아비나데르는 레바논 혈통이다. 동아시아인으로는 한국인, 화교, 일본인도 찾아볼 수 있다. 유럽인은 주로 스페인인 백인이지만, 소수의 독일인, 이탈리아인, 프랑스인, 영국인, 네덜란드인, 스위스인, 러시아인, 헝가리인도 있다.
또한, 세인트키츠 네비스, 앤티가, 세인트빈센트, 몬트세랫, 토르톨라, 세인트크로이, 세인트토머스, 과들루프 등 다른 카리브해 섬에서 온 이민자들의 후손들이 있다. 이들은 현지에서 '코콜로'라고 불린다. 그들은 사탕수수 농장과 부두에서 일했으며 주로 산페드로데마코리스와 푸에르토플라타 시에 정착했다. 푸에르토리코인과 그보다 적은 수의 쿠바인 이민자들은 1800년대 중반부터 1940년경까지 자국의 열악한 경제와 사회 불안으로 인해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피신했다. 많은 푸에르토리코 이민자들이 이궤이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정착했으며, 유사한 문화로 인해 빠르게 동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과 전쟁 중에 800명의 유대인 난민이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이주했다.
많은 이민자들이 경제적 기회를 제공하는 이 나라로 다른 카리브해 국가에서 왔다. 도미니카 공화국에는 많은 아이티인과 베네수엘라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은 현재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이민자 집단이며, 두 집단 모두 많은 수가 불법적으로 체류하고 있다. 부유한 푸에르토리코인 이민자 수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들은 이 나라에서 사업체를 소유하고 휴가용 주택을 보유하고 있으며, 많은 수가 그곳에서 은퇴하고 있으며, 약 1만 명으로 추산된다. 많은 유럽인과 미국인(푸에르토리코인이 아닌)도 이 나라에서 은퇴하고 있다. 약 30만 명의 미국 시민이 도미니카 공화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중 25만 명은 귀국한 도미니카계 미국인이고, 5만 명은 미국 본토와 미국령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비도미니카계 미국인이다.
2010년 인구 조사에서는 아이티인 311,969명, 미국인 24,457명, 스페인인 6,691명, 푸에르토리코인 5,763명, 베네수엘라인 5,132명이 등록되었다. 2012년 도미니카 정부는 국내 이민자 조사를 실시하여 아이티 태생 329,281명, 미국 태생(푸에르토리코 태생 제외) 25,814명, 스페인 태생 7,062명, 푸에르토리코 태생 6,083명, 베네수엘라 태생 5,417명, 쿠바 태생 3,841명, 이탈리아 태생 3,795명, 콜롬비아 태생 3,606명, 프랑스 태생 2,043명, 독일 태생 1,661명, 중국 태생 1,484명 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7년 하반기에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외국인 인구에 대한 두 번째 조사가 실시되었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총인구는 10,189,895명으로 추산되었으며, 그중 9,341,916명은 외국 배경이 없는 도미니카인이었다. 조사에 따르면 외국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대다수는 아이티 출신(847,979명 중 751,080명, 즉 88.6%)이었으며,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아이티에서 태어난 아이티인 497,825명,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태어난 아이티인 171,859명, 아이티인 부모를 둔 도미니카인 81,590명. 외국 태생 인구의 다른 주요 출처는 베네수엘라(25,872명), 미국(10,016명), 스페인(7,592명), 이탈리아(3,713명), 중국(3,069명), 콜롬비아(2,642명), 푸에르토리코(2,356명), 쿠바(2,024명)였다.
7.5.1. 아이티 이민


휴먼 라이츠 워치는 서류를 갖춘 아이티 이민자 7만 명과 서류 미비 이민자 193만 명이 도미니카 공화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아이티로부터의 불법 이민은 정부 조치로 이어졌다. 아이티로부터의 이민은 도미니카인과 아이티인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도미니카 공화국에는 또한 베네수엘라 출신 불법 이민자 114,050명이 거주하고 있다.


아이티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이웃 국가이며 훨씬 가난하고 덜 발달했으며 서반구에서 가장 저개발된 국가이다. 2003년 모든 아이티인의 80%가 가난했고(54%는 극빈층), 47.1%가 문맹이었다. 9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이 나라는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노동력의 3분의 2 이상이 정규직이 없다. 아이티의 1인당 GDP(PPP)는 2017년에 1800 USD로 도미니카 수치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수십만 명의 아이티인이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이주했으며, 일부 추산에 따르면 도미니카 공화국에 80만 명의 아이티인이 거주하고 있는 반면, 다른 추산에서는 아이티 태생 인구를 100만 명까지로 보고 있다. 그들은 주로 건설 및 가사 청소, 사탕수수 농장에서 저임금 및 비숙련 노동을 한다. 일부 아이티 이민자들이 노예와 같은 조건에서 일하며 심하게 착취당하고 있다는 비난이 있었다.
아이티의 기본적인 편의 시설과 의료 시설 부족으로 인해 많은 아이티 여성들이 종종 여러 가지 건강 문제를 안고 도미니카 땅으로 국경을 넘는다. 그들은 출산을 위한 의료 지원을 받기 위해 임신 마지막 주에 의도적으로 오는데, 이는 도미니카 공립 병원이 국적이나 법적 지위에 따라 의료 서비스를 거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토도밍고의 한 병원 통계에 따르면 출산의 22% 이상이 아이티 산모에 의한 것이다.
아이티는 또한 심각한 환경 파괴로 고통받고 있다. 아이티에서는 삼림 벌채가 만연하다. 오늘날 아이티 숲의 4% 미만이 남아 있으며, 많은 곳에서 토양이 기반암까지 침식되었다. 아이티인들은 국내 에너지 생산의 60%를 목탄을 태워 얻는다. 아이티에서 태울 식물 재료가 고갈됨에 따라 일부 아이티 밀수업자들은 도미니카 측에서 불법 숯 시장을 만들었다. 보수적인 추산에 따르면 매주 115톤의 숯이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아이티로 불법적으로 이동한다. 도미니카 관리들은 매주 최소 10대의 트럭이 숯을 싣고 국경을 넘는 것으로 추정한다.
2005년 레오넬 페르난데스 도미니카 대통령은 아이티인 집단 추방이 "학대적이고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비판했다. 유엔 대표단이 아이티 출신에 대한 심각한 인종차별과 차별 문제를 발견했다는 예비 보고서를 발표한 후, 카를로스 모랄레스 트론코소 도미니카 외무장관은 이를 비난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며 "아이티와의 국경에는 문제가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며 이해되어야 한다. 국가 주권을 무관심과 혼동하지 않고, 안보를 외국인 혐오와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아이티 국민들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아이티로 매년 총 5억 달러를 송금한다.
도미니카 공화국 정부는 공식 자료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16년까지 외국인 환자에게 제공된 의료 서비스에 총 160억 페소를 투자했으며, 여기에는 수혈, 임상 분석, 수술 및 기타 치료에 대한 의료비가 포함된다.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이 나라는 출산을 위해 국경을 넘는 임산부를 돌보는 데 매년 50억 도미니카 페소 이상을 지출한다.
아이티 이민자들의 자녀는 아이티 국적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적절한 서류나 증인이 부족하여 아이티로부터 국적을 거부당할 수 있다.
7.6. 해외 이주

20세기 후반 세 차례의 이민 물결 중 첫 번째는 1961년 독재자 트루히요 암살 이후 트루히요 동맹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과 전반적인 정치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1965년 미국은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도미니카 공화국을 군사 점령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여행 제한을 완화하여 도미니카인들이 미국 비자를 더 쉽게 받을 수 있도록 했다. 1966년부터 1978년까지 높은 실업률과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탈출은 계속되었다. 미국으로 이주한 첫 번째 이민 물결이 형성한 공동체는 후속 이주자들을 돕는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1980년대 초, 불완전 고용, 인플레이션, 달러 가치 상승은 모두 도미니카 공화국으로부터의 세 번째 이민 물결에 기여했다. 오늘날 도미니카 공화국으로부터의 이민은 여전히 높다. 2012년 현재 미국에는 약 170만 명의 도미니카계 미국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는 원주민과 외국 태생을 모두 포함한 수치이다. 푸에르토리코로의 도미니카 공화국 이민도 증가하여 2010년 현재 거의 7만 명의 도미니카인이 그곳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푸에르토리코의 경제 위기로 인해 2016년 현재 그 수는 서서히 감소하고 있으며 이민 추세는 역전되었다.
스페인에도 상당수의 도미니카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7.7. 교육

초등 교육은 교육부에 의해 규제되며, 교육은 모든 시민과 도미니카 공화국의 청소년의 권리이다.
유치원 교육은 여러 주기로 구성되며 2-4세 그룹과 4-6세 그룹을 대상으로 한다. 유치원 교육은 마지막 해를 제외하고는 의무가 아니다. 기초 교육은 의무이며 6-14세 인구를 대상으로 한다. 중등 교육은 의무는 아니지만 국가가 무료로 제공할 의무가 있다. 14-18세 인구를 대상으로 하며, 4년 과정의 공통 핵심 과정과 2년 과정의 세 가지 방식(일반 또는 학문, 직업(산업, 농업, 서비스), 예술)으로 구성된다.
고등 교육 시스템은 기관과 대학으로 구성된다. 기관은 더 높은 기술 수준의 과정을 제공한다. 대학은 기술 경력, 학부 및 대학원 과정을 제공하며, 이는 고등 교육, 과학 기술부에 의해 규제된다. 도미니카 공화국은 2024년 세계 혁신 지수에서 97위를 차지했으며, 2019년 87위에서 하락했다.
7.8. 보건
2020년 도미니카 공화국의 추정 출생률은 1000명당 18.5명, 사망률은 1000명당 6.3명이었다.
2024년 세계 기아 지수(GHI)에서 도미니카 공화국은 충분한 데이터가 있는 127개국 중 41위를 차지했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GHI 점수는 7.8로, 기아 수준이 낮음을 나타낸다.
7.9. 범죄 및 치안
2012년 도미니카 공화국의 살인율은 인구 10만 명당 22.1명이었다. 2012년 도미니카 공화국에서는 총 2,268건의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도미니카 공화국은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로 향하는 콜롬비아 마약의 환적 지점이 되었다. 도미니카 공화국을 통한 자금 세탁은 불법 금융 거래의 용이성 때문에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이 선호한다. 2004년에는 미국으로 밀반입된 모든 코카인의 8%가 도미니카 공화국을 거쳐 온 것으로 추정되었다. 도미니카 공화국은 마약 밀수 단속, 관련자 체포 및 인도, 자금 세탁 방지 노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폭력 범죄자에 대한 가벼운 처벌은 종종 지역 사회에서 지속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2010년 4월, 15세에서 17세 사이의 10대 5명이 택시 운전사 2명을 총으로 쏴 살해하고, 다른 5명에게 배수구 세척제를 마시게 하여 살해했다. 2010년 9월 24일, 택시 운전사 가족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 10대들은 3년에서 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8. 문화

문화적 혼합주의로 인해 도미니카 사람들의 문화와 관습은 유럽 문화를 기반으로 하며, 아프리카 문화와 원주민 타이노족 요소의 영향을 받았지만, 도미니카 문화 내에서 고유한 요소도 등장했다. 문화적으로 도미니카 공화국은 푸에르토리코, 쿠바, 중부 칠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와 함께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 가장 유럽적인 국가 중 하나이다. 식민 시대의 스페인 기관들은 도미니카 문화 형성에 우세한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며, 아프리카 노예들의 문화 변용과 문화 동화가 상대적으로 성공하면서 다른 카리브해 국가들에 비해 아프리카 문화의 영향력이 다소 약화되었다.
8.1. 건축


도미니카 공화국의 건축은 다양한 문화가 복잡하게 혼합된 모습을 보여준다. 유럽 식민주의자들의 깊은 영향은 전국적으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화려한 디자인과 바로크 건축 양식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스타일은 수도인 산토도밍고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는데, 이곳에는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대성당, 궁전, 수도원, 요새가 있으며, 이들 모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식민 구역에 위치해 있다. 이러한 디자인은 전국의 빌라와 건물에도 이어진다. 또한 치장 벽토 외관, 아치형 문과 창문, 붉은 기와 지붕을 가진 건물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원주민들도 이 나라 건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타이노족은 마호가니와 구아노(건조된 야자수 잎)를 주로 이용하여 공예품, 예술품, 가구, 집을 만들었다. 진흙, 초가 지붕, 마호가니 나무를 활용하여 건물과 내부 가구에 자연스러운 느낌을 부여하여 섬의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최근 관광업의 성장과 카리브해 휴양지로서의 인기 증가로 인해 도미니카 공화국의 건축가들은 이제 고급스러움을 강조하는 최첨단 디자인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여러 면에서 건축의 놀이터라고 할 수 있는 빌라와 호텔들은 새로운 스타일을 구현하는 동시에 기존 스타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공한다. 이 새로운 스타일은 단순화된 각진 모서리와 실외 및 실내 공간을 혼합하는 대형 창문으로 특징지어진다.
8.2. 미술
도미니카 미술은 전국 모든 관광 기념품 가게에서 판매되는 밝고 생생한 색상과 이미지와 가장 흔히 연관된다. 그러나 이 나라는 1800년대 중반 독립하고 국가 미술계가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순수 미술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 시기의 회화는 국가 독립, 역사적 장면, 초상화와 관련된 이미지뿐만 아니라 풍경화와 정물화 이미지에 중점을 두었다. 회화 양식은 신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1920년에서 1940년 사이 미술계는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도미니카 예술가들은 이전의 학문적 양식에서 벗어나 보다 독립적이고 개성적인 양식을 개발하는 데 집중했다.
8.3. 문학
도미니카의 정치인, 학장, 작가인 안드레스 로페스 데 메드라노(1780년 - 1856년 5월 6일)는 도미니카 공화국 최초의 계몽 철학자가 되었으며 도미니카 독립을 지지했다. 메드라노는 19세기 가장 중요한 철학 저작 중 하나인 논리학, 근대 철학의 요소(1814)라는 논문 또는 안내서를 저술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는 도미니카 철학 최초의 책이자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인쇄된 최초의 책이 되었다.
20세기는 많은 저명한 도미니카 작가들을 배출했고, 도미니카 문학에 대한 인식이 전반적으로 높아졌다. 후안 보쉬, 페드로 미르(도미니카 공화국의 국민 시인), 아이다 카르타헤나 포르탈라틴, 에밀리오 로드리게스 데모리시(1000편 이상의 저작을 남긴 가장 중요한 도미니카 역사가), 마누엘 델 카브랄(흑인 시에 등장하는 주요 도미니카 시인), 엑토르 인차우스테기 카브랄(20세기 카리브해 사회 시의 가장 두드러진 목소리 중 하나로 간주됨), 미겔 알폰세카(60년대 세대에 속하는 시인), 레네 델 리스코(6월 14일 운동에 참여한 저명한 시인), 마테오 모리슨 등 많은 다작 작가들이 20세기 문학에서 이 섬을 가장 중요한 곳 중 하나로 만들었다.
새로운 도미니카 작가들은 아직 20세기 작가들만큼의 명성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프랭크 바에스(2006년 산토도밍고 도서전 대상 수상)와 후노트 디아스(그의 소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으로 2008년 퓰리처상 픽션 부문 수상)와 같은 작가들이 21세기 도미니카 문학을 이끌고 있다.
8.4. 음악과 춤

음악적으로 도미니카 공화국은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대중문화 음악 양식이자 장르인 메렝게로 유명하다. 메렝게는 분당 약 120~160박자(다양하지만)의 빠르고 활기찬 리듬과 춤 음악으로, 드럼, 금관악기, 화음악기, 아코디언과 같은 음악적 요소뿐만 아니라 탐보라와 귀라와 같은 스페인어권 카리브해 고유의 요소들을 기반으로 한다.

그 당김음 박자는 라틴 타악기, 금관악기, 베이스, 피아노 또는 키보드를 사용한다. 1937년에서 1950년 사이에 메렝게 음악은 비요스 카라카스 보이스, 차푸소와 다미론 "로스 레예스 델 메렝게", 호세이토 마테오 등과 같은 도미니카 그룹에 의해 국제적으로 홍보되었다. 라디오, 텔레비전, 국제 미디어는 이를 더욱 대중화했다. 잘 알려진 메렝게 연주자로는 윌프리도 바르가스, 조니 벤투라, 싱어송라이터 로스 에르마노스 로사리오, 후안 루이스 게라, 페르난도 비얄로나, 에디 에레라, 세르히오 바르가스, 토뇨 로사리오, 밀리 케사다, 치치 페랄타가 있다.
바차타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시골과 농촌 변두리 지역에서 유래한 음악과 춤의 한 형태로, 최근 몇 년 동안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그 주제는 종종 낭만적이며, 특히 실연과 슬픔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실제로 이 장르의 원래 이름은 '아마르게'(amargue스페인어, '쓰라림' 또는 '씁쓸한 음악')였으나, 다소 모호하고(분위기 중립적인) '바차타'라는 용어가 대중화되었다. 바차타는 '볼레로'라고 불리는 판라틴아메리카 낭만 스타일에서 파생되었으며 여전히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메렝게와 다양한 라틴 아메리카 기타 스타일의 영향을 받았다.
팔로는 섬 전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아프리카계 도미니카인의 신성한 음악이다. 드럼과 사람의 목소리가 주요 악기이다. 팔로는 종교 의식(보통 성인들의 종교적 축일과 일치)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파티와 특별한 행사에서도 연주된다. 그 뿌리는 중앙 서부 아프리카의 콩고 지역에 있지만, 멜로디에는 유럽의 영향이 혼합되어 있다.
살사 음악은 이 나라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려왔다. 1960년대 후반, 파니아 올스타즈의 창시자인 조니 파체코와 같은 도미니카 음악가들이 이 장르의 발전과 대중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도미니카 록과 레게톤 또한 인기가 있다. 그 연주자들의 다수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이 산토도밍고와 산티아고에 기반을 두고 있다.
8.5. 패션
도미니카 공화국은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10대 디자인 학교 중 하나인 라 에스쿠엘라 데 디세뇨 데 알토스 데 차본(La Escuela de Diseño de Altos de Chavón)을 자랑하며, 이는 이 나라를 패션 및 디자인 세계의 핵심 플레이어로 만들고 있다. 저명한 패션 디자이너 오스카르 데라렌타는 1932년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태어나 1971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다. 1963년까지 그는 자신의 레이블이 붙은 디자인을 선보였다. 미국에서 자리를 잡은 후, 데라렌타는 전국에 부티크를 열었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와 스페인 패션에 미국 스타일을 혼합한 것이다. 뉴욕에 정착했지만, 데라렌타는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자신의 작품을 마케팅하여 큰 인기를 얻었으며, 자선 활동과 개인적인 업적으로 후안 파블로 두아르테 공로 훈장과 크리스토발 콜론 훈장을 받은 고국 도미니카 공화국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데라렌타는 2014년 10월 20일 암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8.6. 요리
도미니카 요리는 주로 스페인, 타이노족,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유래했다. 일반적인 요리는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하다. 아침 식사 한 가지는 계란과 '망구'(으깬 삶은 플랜틴)로 구성된다. 더 푸짐한 망구에는 튀긴 고기(일반적으로 도미니카 살라미), 치즈 또는 둘 다가 곁들여진다. 점심은 일반적으로 하루 중 가장 크고 중요한 식사이며, 보통 쌀, 고기, 콩, 샐러드로 구성된다. "라 반데라"(문자 그대로 "깃발")는 가장 인기 있는 점심 요리이며, 흰 쌀밥에 고기와 붉은 콩으로 구성된다. '상코초'는 종종 일곱 가지 종류의 고기로 만드는 스튜이다.
식사는 유제품과 채소보다 고기와 전분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요리가 '소프리토'로 만들어지는데, 이는 고기에 바르는 양념으로 사용되거나 요리의 모든 풍미를 끌어내기 위해 볶는 현지 허브 믹스이다. 남중부 해안 전역에서는 불구르 밀 또는 통밀이 '키페스' 또는 '티필리'(불구르 샐러드)의 주요 재료이다. 다른 인기 있는 도미니카 음식으로는 '치차론', '유카', '카사베', '파스텔리토스'(엠파나다), '바타타', '냐메', '파스텔레스 엔 오하', '치미추리스', '토스토네스'가 있다.
도미니카인들이 즐기는 간식으로는 '아로스 콘 레체'(또는 '아로스 콘 둘세'), '비스코초 도미니카노'(문자 그대로 "도미니카 케이크"), '아비추엘라스 콘 둘세', 플란, '프리오 프리오'(빙수), 둘세데레체, '카냐'(사탕수수)가 있다. 도미니카인들이 즐기는 음료로는 '모리르 소냔도', 럼, 맥주, '마마 후아나', '바티다스'(스무디), '후고스 나투랄레스'(갓 짜낸 과일 주스), '마비', 커피, 그리고 '차카'(또는 '마이스 카케아오/카스케아도', '마이스 콘 둘세', '마이스 콘 레체')가 있으며, 마지막 항목은 산후안과 같은 남부 지방에서만 볼 수 있다.
8.7. 국가 상징
도미니카 공화국의 중요한 상징물로는 국기, 국장, 그리고 '힘노 나시오날'(Himno Nacional스페인어)이라는 제목의 국가가 있다. 국기에는 네 개의 사분면으로 나누는 커다란 흰색 십자가가 있다. 두 개의 사분면은 빨간색이고 두 개는 파란색이다. 빨간색은 해방자들이 흘린 피를 나타낸다. 파란색은 국가에 대한 신의 보호를 표현한다. 흰색 십자가는 미래 세대에게 자유로운 국가를 물려주기 위한 해방자들의 투쟁을 상징한다. 다른 해석으로는 파란색은 진보와 자유의 이상을 나타내는 반면, 흰색은 도미니카인들 사이의 평화와 단결을 상징한다.
십자가 중앙에는 국기와 같은 색상의 도미니카 국장이 있다. 국장에는 성경, 황금 십자가, 화살이 있는 빨간색, 흰색, 파란색 깃발로 장식된 방패가 그려져 있다. 방패는 올리브 가지(왼쪽)와 야자수 가지(오른쪽)로 둘러싸여 있다. 성경은 전통적으로 진리와 빛을 나타낸다. 황금 십자가는 노예 해방을 상징하고, 화살은 고귀한 군인들과 그들의 자랑스러운 군대를 상징한다. 방패 위의 파란색 리본에는 "Dios, Patria, Libertad"(신, 조국, 자유를 의미)라고 적혀 있다. 방패 아래의 빨간색 리본에는 "República Dominicana"(도미니카 공화국을 의미)라고 적혀 있다. 전 세계 모든 국기 중에서 성경 묘사는 도미니카 국기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국화는 고유종인 바야이베 장미(Leuenbergeria quisqueyana라틴어)이고, 국수는 서인도 마호가니(Swietenia mahagoni라틴어)이다. 국조는 또 다른 고유종인 '시과 팔메라' 또는 야자떠들썩새(Dulus dominicus라틴어)이다.
도미니카 공화국은 수호성인을 기리는 1월 21일 알타그라시아의 날, 국부 중 한 명을 기리는 1월 26일 두아르테의 날, 2월 27일 독립기념일, 8월 16일 복고의 날, 9월 24일 메르세데스의 성모 축일, 11월 6일 헌법의 날을 기념한다.
8.8. 스포츠

야구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단연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도미니카 프로 야구 리그는 6개 팀으로 구성된다. 시즌은 보통 10월에 시작하여 1월에 끝난다. 미국 다음으로 도미니카 공화국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 선수를 가장 많이 배출한 국가이다. 오지 버질 시니어는 1956년 9월 23일 MLB 최초의 도미니카 출신 선수가 되었다. 2024년 현재, 도미니카 출신 선수 5명(아드리안 벨트레, 블라디미르 게레로, 후안 마리찰, 페드로 마르티네스, 데이비드 오티스)이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의 다른 주목할 만한 야구 선수로는 호세 바티스타, 로빈슨 카노, 리코 카티, 바톨로 콜론, 넬슨 크루스, 에드윈 엔카나시온, 크리스티안 하비에르, 우발도 히메네스, 프란시스코 리리아노, 플라시도 폴랑코, 알버트 푸홀스, 핸리 라미레스, 매니 라미레스, 호세 레예스, 알폰소 소리아노, 새미 소사, 후안 소토, 페르난도 타티스 주니어, 미겔 테하다, 프람버 발데스, 엘리 데 라 크루스가 있다. 펠리페 알루는 감독으로도 성공을 거두었고 오마르 미나야는 단장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2013년 도미니카 대표팀은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무패 우승을 차지했다.
권투에서는 이 나라에서 수많은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여러 세계 챔피언을 배출했다. 예를 들어 카를로스 크루스, 그의 형제 레오, 후안 구스만, 호안 구스만 등이 있다.
농구 또한 비교적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티토 호포드, 그의 아들 알, 펠리페 로페스, 프란시스코 가르시아는 현재 또는 이전에 NBA에서 활약한 도미니카 출신 선수들이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세계 선수권 허들 챔피언인 펠릭스 산체스는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이며, 전 NFL 수비 엔드 루이스 카스티요와 2020년 세계 및 유럽 사이클로크로스 챔피언 세일린 델 카르멘 알바라도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중요한 스포츠로는 1916년 미 해병대에 의해 도입되어 도미니카 배구 연맹이 관리하는 배구, 가브리엘 메르세데스가 2008년 올림픽 은메달을 딴 태권도, 그리고 유도가 있다.
8.9. 공휴일
도미니카 공화국은 다양한 국경일과 종교적, 문화적 의미를 지닌 공휴일을 기념한다.
날짜 | 한국어 명칭 | 스페인어 명칭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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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 신년 | Año Nuevo | |
1월 6일 | 주님 공현 대축일 (세 왕의 날) | Día de los Santos Reyes Magos | |
1월 21일 | 알타그라시아 성모의 날 | Nuestra Señora de la Altagracia | 국가 수호성인 |
1월 26일 | 후안 파블로 두아르테의 날 | Día de Juan Pablo Duarte | 국부 탄생일 |
2월 27일 | 독립기념일 | Día de la Independencia Nacional | 1844년 아이티로부터 독립 |
3월/4월 중 금요일 | 성금요일 | Viernes Santo | 부활절 전 금요일 |
5월 1일 | 노동절 | Día del Trabajo | |
5월/6월 중 목요일 |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 Corpus Christi | |
8월 16일 | 복원 기념일 | Día de la Restauración | 1865년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회복 |
9월 24일 | 메르세데스 성모의 날 | Nuestra Señora de las Mercedes | 국가 수호성인 |
11월 6일 | 제헌절 | Día de la Constitución | |
12월 25일 | 크리스마스 (성탄절) | Navidad |
- 주: 일부 공휴일은 주말로 이어지도록 날짜가 변경될 수 있다.
9. 자연재해
도미니카 공화국은 지리적 위치로 인해 다양한 자연재해에 취약하다. 가장 큰 위협은 매년 6월부터 11월까지 지속되는 허리케인 시즌이다. 허리케인은 강력한 바람, 폭우, 폭풍 해일을 동반하여 광범위한 홍수, 산사태, 기반 시설 파괴 및 인명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과거 주요 허리케인으로는 1930년의 산 세논 허리케인, 1979년의 허리케인 데이비드, 1998년의 허리케인 조르주 등이 큰 피해를 남겼다.
또한, 도미니카 공화국은 카리브판과 북아메리카판의 경계에 위치하여 지진 발생 위험도 안고 있다. 역사적으로 파괴적인 지진이 기록된 바 있으며, 1946년에는 규모 8.1의 강진과 함께 쓰나미가 발생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2010년 이웃 국가 아이티에서 발생한 대지진으로 인해 도미니카 공화국 일부 지역에서도 진동이 감지되고 간접적인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 외에도 가뭄, 홍수, 산불 등의 자연재해가 발생할 수 있다. 정부는 재난 대비 및 대응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으나, 기후 변화로 인한 재해 빈도 및 강도 증가에 대한 우려가 지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