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감비아 공화국, 통칭 감비아는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국가로,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감비아강을 따라 동서로 길게 뻗어 있으며, 서쪽으로 대서양에 면한 하구를 제외하고는 모든 방향이 세네갈에 둘러싸여 있다. 수도는 반줄이며, 최대 도시는 세레쿤다이다. 감비아의 역사는 9세기와 10세기 아랍 무역상들의 기록에서 시작되며, 이후 말리 제국의 일부였다가 15세기 포르투갈인들의 도래와 함께 유럽 세력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17세기부터 영국과 프랑스의 각축장이었으나, 1783년 파리 조약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965년 2월 18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으며, 다우다 자와라가 초대 대통령으로 장기 집권했으나 1994년 야히아 자메의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자메 정권은 권위주의적 통치와 인권 탄압으로 비판받았으며, 2016년 대통령 선거 패배 후 헌정 위기를 초래했으나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의 군사 개입으로 퇴진했다. 이후 아다마 배로 대통령이 취임하여 민주화 개혁을 추진하고 영연방에 재가입하는 등 국제 사회와의 관계 개선에 힘쓰고 있다. 감비아의 경제는 전통적으로 땅콩 재배를 중심으로 한 농업, 어업, 그리고 관광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재수출 무역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사회적으로는 만딩카족, 풀라니족, 월로프족 등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며, 공용어는 영어이지만 각 민족 고유의 언어도 널리 사용된다. 인구의 대다수는 이슬람교를 믿으며, 기독교와 토착 신앙도 존재한다. 감비아는 "미소짓는 해안(The Smiling Coast)"이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2. 국호
감비아의 공식 국명은 감비아 공화국(Republic of The Gambia영어)이며, 통칭 감비아(The Gambia영어)로 불린다. 국명은 감비아강을 뜻하는 만딩카어 단어 '캄브라'(Kambra) 또는 '캄바'(Kambaa)에서 유래했다. 일설에는 세레르족 장로가 사망했을 때 연주하는 특별한 종류의 박 악기인 '감바'(Gamba)에서 유왔다는 주장도 있다.
15세기 이 지역에 도달한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이 현지 명칭의 변형을 채택했고, 이후 영국 식민 통치 기간 동안 '감비아'(Gambia)로 영어화되었다.
1965년 독립 당시 국명은 '더 감비아'(The Gambia영어)였다. 1970년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국가의 정식 명칭은 '감비아 공화국'(Republic of The Gambia영어)이 되었다. 영어 국명에 정관사 'The'를 사용하는 것은 소수의 사례 중 하나로, 이는 감비아강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강조하고, 독립 당시 비슷한 시기에 독립한 잠비아(Zambia)와 혼동을 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당시 총리였던 다우다 자와라는 1964년 영국 지명 상임위원회에 서한을 보내 'The Gambia'라는 국명을 유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The'를 사용하는 것은 감비아 정부와 국제 기구에서도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015년 12월, 당시 대통령이었던 야히아 자메는 국명을 감비아 이슬람 공화국(Islamic Republic of The Gambia영어)으로 변경한다고 선포했다. 이는 식민지 과거와의 단절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헌법은 세속적인 성격을 유지했다. 그러나 2017년 1월 29일, 새로 취임한 아다마 배로 대통령은 "감비아 인구의 90%가 이슬람교도이지만, 기독교도와 토착 신앙인들도 존재하므로 이슬람 공화국이 아니다"라고 밝히며 국명을 다시 '감비아 공화국'으로 환원했다.
3. 역사
감비아 지역의 역사는 고대 제국 시기부터 유럽 열강의 진출, 식민 통치, 독립, 그리고 현대 국가로의 발전에 이르는 다양한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감비아강은 지리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3.1. 초기 역사와 유럽인의 진출

감비아 지역에 대한 최초의 문자 기록은 9세기와 10세기 아랍 상인들에 의해 남겨졌다. 10세기경 무슬림 상인들과 학자들은 서아프리카의 여러 교역 중심지에 공동체를 형성하고 사하라 횡단 교역로를 개척했다. 이들은 현지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 노예로 수출하는 대규모 무역을 벌였으며, 금과 상아도 주요 수출품이었다. 반대로 공산품이 이 지역으로 수입되었다.
11세기 또는 12세기까지 타크루르, 고대 가나, 가오와 같은 왕국들의 통치자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아랍어에 능통한 무슬림들을 궁정에 임명했다. 13세기에는 오늘날 감비아 대부분 지역이 말리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1446년(또는 1455년) 포르투갈인들이 해로를 통해 이 지역에 도달하여 해상 무역을 장악하기 시작했으나, 중요한 교역 거점을 마련하지는 못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수십 년 후 당시 감비아강 유역에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던 내륙의 말리 제국과 접촉했다. 그러나 16세기 말, 말리 제국은 감비아강 유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고, 살룸 등 여러 소규모 왕국들이 이 지역에 들어섰다. 15세기 말 이후 감비아강은 내륙에서 금과 노예를 해안의 유럽 세력에게 수출하는 주요 경로 중 하나가 되었다.
1588년, 포르투갈 왕위 계승을 주장하던 크라투의 안토니우는 감비아강에서의 독점 교역권을 영국 상인들에게 매각했고, 이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특허장에 의해 확인되었다. 1618년, 영국 왕 제임스 1세는 영국 회사에 감비아 및 골드코스트(현재의 가나)와의 교역을 위한 칙허를 부여했다. 1651년부터 1661년 사이에는 감비아강의 세인트 앤드루스섬(현 쿤타킨테섬)과 포트 제이콥, 세인트 메리섬(현 반줄), 포트 질리프리 등 감비아 일부 지역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봉신국이었던 쿠를란트-젬갈레 공국(현재의 라트비아)의 통치하에 들어갔는데, 이는 야코프 케틀러 공작이 매입한 것이었다. 이 식민지들은 1664년 공식적으로 영국에 양도되었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내내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국은 세네갈강과 감비아강 지역의 정치적, 상업적 패권을 두고 지속적으로 다투었다. 대영제국은 1758년 세네갈 점령 이후 오거스터스 케펠 제독이 이끄는 원정대가 감비아에 상륙하면서 이 지역을 점령했다. 1763년(일부 자료는 1783년) 파리 조약은 영국에 감비아강의 소유권을 부여했지만, 프랑스는 강 북안의 알브레다에 작은 고립 영토를 유지했다. 이 지역은 최종적으로 1856년 영국에 할양되었다.
3.1.1. 노예제

대서양 노예 무역이 운영된 3세기 동안 이 지역에서 약 3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노예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대서양 노예 무역이 시작되기 전에 부족 간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노예로 잡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끌려간 사람들 대부분은 다른 아프리카인들에 의해 유럽인들에게 팔렸다. 일부는 부족 간 전쟁의 포로였고, 일부는 빚을 갚지 못해 팔렸으며, 다른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납치의 희생자였다.
상인들은 처음에는 사람들을 유럽으로 보내 하인으로 일하게 했으나, 18세기 서인도 제도와 북아메리카에서 노동 시장이 확대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1807년, 영국은 제국 전역에서 노예 무역을 폐지했다. 또한 감비아에서의 노예 무역을 종식시키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영국 해군의 서아프리카 함대에 의해 대서양에서 나포된 노예선들은 감비아로 돌려보내졌고, 노예로 잡혔던 사람들은 감비아강 상류의 매카시섬에 풀려나 새로운 삶을 개척하도록 장려되었다. 영국은 1816년 바서스트(현 반줄)에 군사 기지를 건설했다.
3.2. 영국 식민 통치 (1821년 ~ 1965년)

그 후 몇 년 동안, 바서스트(현재의 반줄)는 때때로 시에라리온에 있는 영국 총독의 관할하에 있었다. 1888년 감비아는 별도의 식민지가 되었다.
1889년 영국과 프랑스 간의 협정으로 식민지의 경계가 확립되었다. 1891년, 영국-프랑스 공동 국경위원회는 자신들의 땅이 분할될 처지에 놓인 지역 지도자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감비아는 영국령 감비아라는 영국 왕실 식민지가 되었으며, 행정 목적으로 식민지(반줄 시와 주변 지역)와 보호령(나머지 영토)으로 나뉘었다. 감비아는 1901년에 자체적인 행정 및 입법 평의회를 갖게 되었고, 점차 자치 정부로 나아갔다. 노예제는 1906년에 폐지되었고, 영국 식민군과 토착 감비아인들 간의 짧은 분쟁 이후 영국 식민 권위가 확고히 수립되었다. 1919년, 순회 판무관 J. K. 맥컬럼과 월로프족 여성 파투 칸 사이의 연애 사건이 행정부에 물의를 일으켰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부 감비아 군인들은 연합국 편에서 싸웠다. 이들 군인 대부분은 버마 전역에서 싸웠지만, 일부는 고향 근처에서 사망했으며, 영연방 전쟁묘지위원회 묘지가 파자라(반줄 근처)에 있다. 반줄에는 미국 육군 항공대를 위한 비행장과 연합군 해군 수송선단의 기항지가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헌법 개혁의 속도가 빨라졌다. 1960년 보통선거제와 국회가 설치되었고, 통일당(UP)의 피에르 사르 은지에가 초대 총리로 취임했다. 1962년 총선거 이후 영국은 이듬해 완전한 내부 자치권을 부여했다. 1962년 선거에서는 다우다 자와라가 이끄는 인민진보당(PPP)이 승리하여 자와라가 총리가 되었다.
3.3. 독립 이후
1965년 독립 이후 현대 감비아는 정치적 격변과 사회 발전을 겪으며 여러 중요한 시기를 거쳤다. 초기 민주주의 정착 노력부터 장기 집권과 쿠데타, 그리고 최근의 민주화 이행 과정까지 다양한 도전과 변화를 경험했다.
3.3.1. 다우다 자와라 시대 (1965년 ~ 1994년)
감비아는 1965년 2월 18일 독립을 달성하여 영연방 내 입헌군주국이 되었으며, 엘리자베스 2세가 감비아의 여왕으로, 총독이 그를 대리했다. 직후 정부는 공화국 전환을 제안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이 국민투표는 헌법 개정에 필요한 3분의 2 다수표를 얻지 못했지만, 비밀 투표, 공정한 선거, 시민권 및 자유에 대한 감비아의 준수를 보여주는 증거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1970년 4월 24일, 감비아는 두 번째 국민투표에 따라 영연방 내 공화국이 되었다. 다우다 자와라 경 총리는 1962년부터 맡아온 국가원수와 정부수반의 직책을 통합한 행정부 대통령직에 취임했다. 다우다 자와라 경 대통령은 5번 재선되었다.
1981년 7월 29일, 경제 약화와 주요 정치인들의 부패 혐의에 이어 쿠데타 시도가 발생했다. 쿠데타 시도는 자와라 대통령이 런던에서 열린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비의 결혼식에 참석 중일 때 발생했으며, 쿠코이 삼바 사냥의 사회주의혁명노동당(SRLP)과 국가 군대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준군사조직인 야전부대 일부로 구성된 자칭 국가혁명위원회의 좌익 단체에 의해 수행되었다.
자와라 대통령은 세네갈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세네갈은 7월 31일 400명의 군대를 감비아에 파견했다. 8월 6일까지 약 2,700명의 세네갈 군대가 배치되어 반란군을 격퇴했다. 쿠데타와 그에 따른 폭력 사태로 500명에서 800명 사이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1982년, 1981년 쿠데타 시도의 여파로 세네갈과 감비아는 연방 조약을 체결했다. 세네감비아 연방은 양국의 군대를 통합하고 경제와 통화를 통일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감비아는 1989년 연방에서 영구적으로 탈퇴했다. 자와라는 민주주의와 장기 집권을 유지하며 1992년 6선에 성공했으나, 장기 집권으로 인한 부패와 경제 침체로 국내 불만은 고조되고 있었다.
3.3.2. 야히아 자메 시대 (1994년 ~ 2017년)

1994년 7월, 당시 29세의 야히아 자메 육군 중위가 이끄는 무혈 쿠데타로 무장세력 임시 통치 평의회(AFPRC)가 자와라 정부를 전복시키고 야당 정치 활동을 금지했다. AFPRC 의장인 야히아 자메가 국가 원수가 되었다. 자메는 쿠데타 당시 불과 29세였다. AFPRC는 민주적 민간 정부로 복귀하기 위한 과도 계획을 발표했다.
1995년 12월 임시 독립 선거 위원회(PIEC)가 국가 선거를 실시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1997년 초까지 개정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를 감독했다. 1997년에는 PIEC를 대체하여 유권자 등록 및 선거와 국민투표 실시를 담당하는 독립 선거 위원회(IEC)가 설립되었다.
IEC는 2001년 말과 2002년 초에 다음 5년 임기의 선거를 조직했으며, 감비아는 대통령, 입법부, 지방 선거의 전체 주기를 완료했고, 외국 참관인들은 이를 자유롭고 공정하며 투명하다고 간주했다. 쿠데타 기간 동안 맡았던 직책을 계속 수행하기 위해 선출된 야히아 자메 대통령은 2001년 12월 21일 다시 취임 선서를 했다. 자메의 애국 재건 동맹(APRC)은 특히 주요 야당인 통일민주당(UDP)이 입법 선거를 보이콧한 후 국회에서 강력한 다수 의석을 유지했다.
2013년 10월 2일, 감비아 내무장관은 감비아가 즉시 영연방을 탈퇴하여 48년간의 회원 자격을 종료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감비아 정부는 "감비아는 결코 신식민주의 기관의 회원이 되지 않을 것이며 식민주의의 연장을 대표하는 어떤 기관의 당사자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2015년 12월 11일, 자메 대통령은 (법적 권한 없이) 일방적으로 감비아를 이슬람 공화국으로 선포하며, 이는 헌법이 세속적으로 유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식민지 과거와의 단절이라고 불렀다.
201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몇 달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주요 야당인 통일민주당(UDP)의 청년 지도자인 솔로 산뎅이 악명 높은 국가정보국 구금 중 사망했다. UDP의 지도자인 우세누 다르보와 그의 당의 많은 고위 간부들은 솔로 산뎅의 생사 확인 및 석방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 자메 대통령은 정당 연합의 아다마 배로와 감비아 민주회의당의 마마 칸데 등 야당 지도자들과 맞섰다. 2016년 7월 감비아 고등법원은 주요 야당 지도자이자 인권 운동가인 우세누 다르보에게 3년 형을 선고하여 대통령 선거 출마 자격을 박탈했다. 이로 인해 아다마 배로가 UDP 후보로 출마하게 되었다.
2016년 12월 1일 선거 이후 선거관리위원회는 아다마 배로를 승자로 선언했다. 22년간 통치해 온 자메는 처음에는 2016년 선거 패배 후 물러날 것이라고 발표했으나, 이후 결과를 무효로 선언하고 새로운 투표를 요구하여 헌법 위기를 촉발시켰고, 이는 ECOWAS 연합군의 침공으로 이어졌다. 2017년 1월 20일, 자메는 물러나기로 합의하고 출국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3.3.3. 아다마 배로 시대 (2017년 ~ 현재)
2017년 1월, 아다마 배로 대통령은 감비아 국명에서 '이슬람'이라는 칭호를 삭제했다. 2017년 2월 14일, 감비아는 영연방 회원국으로 복귀하는 절차를 시작했으며, 2018년 1월 22일 퍼트리샤 스코틀랜드 사무총장에게 재가입 신청서를 공식 제출했다. 1965년 감비아가 독립한 이래 처음으로 감비아를 방문한 영국 외무장관인 보리스 존슨은 영국 정부가 감비아의 영연방 복귀를 환영한다고 발표했다. 감비아는 2018년 2월 8일 공식적으로 영연방에 재가입했다. 2018년 2월 28일, 여성 인권 운동가인 자하 두쿠레는 여성 할례 반대 운동에 대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되었다.
2021년 12월 4일, 아다마 배로는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2022년 12월 20일, 감비아군에 의한 쿠데타 시도가 저지되었으며, 4명의 군인이 체포되었다. 감비아 국군은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배로 대통령이 자신의 안전과 일부 기반 시설 보호를 위해 외국 군대를 사용하는 것은 그의 인기를 떨어뜨렸다.
4. 지리
감비아는 서아프리카에 위치하며,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다. 국토는 감비아강을 중심으로 동서로 길게 뻗어 있으며, 서쪽으로는 대서양에 면한다.
4.1. 지형 및 국경

감비아는 감비아강의 구불구불한 흐름을 따라 국경이 형성된 매우 작고 좁은 나라이다. 북위 13도에서 14도, 서경 13도에서 17도 사이에 위치한다.
감비아는 가장 넓은 지점의 폭이 50 km 미만이며, 총면적은 1.13 만 km2이다. 감비아 면적의 약 1300 km2(11.5%)는 물로 덮여 있다. 아프리카 본토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다. 비교하자면, 감비아의 총면적은 자메이카 섬보다 약간 더 크다.
세네갈은 감비아를 세 방향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서쪽 끝은 80 km의 대서양 해안선과 접한다.
현재의 국경은 1889년 영국과 프랑스 간의 협정에 따라 확정되었다. 파리에서 프랑스와 영국 간의 협상 중에 프랑스는 처음에 영국에게 감비아강 약 321868 m (200 mile)를 통제하도록 했다. 1891년 국경 표지 설치를 시작으로 파리 회의 이후 감비아의 최종 국경을 결정하는 데 거의 15년이 걸렸다. 그 결과 일련의 직선과 호선으로 영국은 감비아강 북쪽과 남쪽으로 약 16093 m (10 mile) 떨어진 지역을 통제하게 되었다. 국토 전역이 높이 100 m 이하의 저지대로, 해안은 늪지대, 내륙은 초원 지대이다. 국토의 최고점은 해발 73 m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평탄한 지형이다.
감비아에는 기니 산림-사바나 모자이크, 서수단 사바나, 기니 맹그로브 등 3개의 육상 생태 지역이 있다. 2018년 산림 경관 보전 지수 평균 점수는 4.56/10으로, 172개국 중 세계 120위를 기록했다.
4.2. 기후
감비아는 열대 사바나 기후(쾨펜의 기후 구분: Aw)를 가지고 있다. 짧은 우기는 보통 6월부터 9월(일부 자료는 10월)까지 지속되지만, 그 이후부터 5월까지는 기온이 낮아지고 강수량이 적다. 연평균 강수량은 750 mm에서 1000 mm 사이이며, 해안 지역은 1300 mm에서 1500 mm에 이른다. 감비아의 기후는 이웃한 세네갈, 말리 남부, 기니 북부의 기후와 매우 유사하다.
월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연간 |
---|---|---|---|---|---|---|---|---|---|---|---|---|---|
평균 최고 기온 (°C) | 31.7 | 33.5 | 33.9 | 33.0 | 31.9 | 31.9 | 30.8 | 30.2 | 31.0 | 31.8 | 32.7 | 31.9 | 32.0 |
평균 최저 기온 (°C) | 15.7 | 16.6 | 17.9 | 18.8 | 20.3 | 22.9 | 23.6 | 23.3 | 22.6 | 22.2 | 18.8 | 16.2 | 19.9 |
역대 최고 기온 (°C) | 37.2 | 38.9 | 40.6 | 41.1 | 41.1 | 37.8 | 33.9 | 33.3 | 34.4 | 37.2 | 35.6 | 35.6 | 41.1 |
역대 최저 기온 (°C) | 7.2 | 10.0 | 11.7 | 12.2 | 13.9 | 18.3 | 20.0 | 20.0 | 17.2 | 16.1 | 12.2 | 8.9 | 7.2 |
강수량 (mm) | 0.5 | 0.0 | 0.0 | 0.0 | 1.3 | 62.7 | 232.4 | 346.8 | 255.1 | 75.8 | 1.6 | 0.7 | 976.9 |
평균 강수일수 | 0 | 0 | 0 | 0 | 0 | 5 | 14 | 19 | 16 | 6 | 0 | 0 | 60 |
평균 상대 습도 (%) | 47 | 47 | 50 | 58 | 67 | 73 | 81 | 85 | 84 | 80 | 69 | 55 | 67 |
월평균 일조 시간 | 207.7 | 237.3 | 266.6 | 252.0 | 229.4 | 201.0 | 182.9 | 189.1 | 183.0 | 217.0 | 246.0 | 210.8 | 2622.8 |
4.3. 야생 생물
감비아는 다양한 야생 동식물의 서식지이다. 감비아강과 그 주변의 맹그로브 숲, 사바나 지역은 여러 종류의 조류, 포유류, 파충류에게 중요한 환경을 제공한다. 특히 조류 관찰지로 유명하며, 약 540여 종의 새가 기록되어 있다. 주요 포유류로는 원숭이(붉은콜로부스, 초록원숭이 등), 하마, 악어, 다양한 종류의 영양 등이 있다. 감비아에는 여러 국립공원과 자연보호구역이 지정되어 야생 생물 보호에 힘쓰고 있다. 대표적인 곳으로는 아부코 자연보호구역, 키앙 웨스트 국립공원, 니우미 국립공원, 감비아강 국립공원(침팬지 재활 프로젝트로 유명) 등이 있다. 그러나 서식지 파괴, 밀렵, 기후 변화 등은 여전히 감비아 야생 생물에게 위협이 되고 있다.
5. 정치
감비아는 1965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여러 정치적 변화를 겪었다. 초기에는 다당제 민주주의를 표방했으나, 장기 집권과 군사 쿠데타, 권위주의 통치 시기를 거쳐 최근에는 민주화 이행 과정을 밟고 있다.
5.1. 정부 구조


감비아는 공화제이며,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다. 현행 헌법은 1970년 4월 24일 제정되었으며, 여러 차례 개정되었다. 1996년 헌법은 야히아 자메 통치의 기반이 되었고, 2016년 아다마 배로의 승리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행정부는 대통령이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이며, 군대의 총사령관이다. 대통령은 국민 직접 선거로 선출되며 임기는 5년이고, 연임 제한은 없다(2018년 기준 헌법 개정 논의 중). 대통령은 부통령과 각료를 임명하고 내각을 주재한다. 총리직은 1970년에 폐지되었다. 대통령은 국회의원 5명, 고등법원 판사, 지방 주지사, 구청장 등을 임명할 권한도 가진다.
입법부는 단원제인 국민의회(National Assembly)로 구성된다. 총 58석 중 53석은 국민 직접 선거로 선출되며, 나머지 5석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의원의 임기는 5년이다.
사법부는 영국 보통법, 이슬람법, 관습법에 기초한다. 최고 사법기관은 대법원(Supreme Court)이며, 그 외에 항소법원, 고등법원, 하급 법원 등이 있다.
2023년 V-Dem 민주주의 지수에 따르면 감비아는 전 세계 179개국 중 68위, 아프리카 56개국 중 11위를 차지했다.
5.2. 주요 정당 및 선거
자와라 시대 초기에는 인민진보당(PPP), 통일당(UP), 민주당(DP), 이슬람의회당(MCP) 등 4개의 정당이 있었다. 1960년 헌법으로 하원이 설립되었고, 1960년 선거에서는 어떤 정당도 과반수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1961년 영국 총독은 UP의 지도자 피에르 사르 은지에를 감비아 최초의 정부 수반인 총리로 임명했다. 이는 인기 없는 결정이었고, 1962년 선거에서는 정당들이 감비아 전역의 민족적, 종교적 차이에 호소할 수 있었던 점이 주목할 만하다. PPP가 과반수를 차지했고, 민주 의회 동맹(DCA, DP와 MCP의 합병)과 연립 정부를 구성했다. 1963년 UP를 연립 정부에 초대했으나 1965년에 탈퇴했다.
UP는 주요 야당으로 여겨졌으나 1965년부터 1970년까지 세력을 잃었다. 1975년, 국민회의당(NCP)이 셰리프 무스타파 디바에 의해 창당되어 PPP의 지배에 대한 새로운 주요 야당이 되었다. PPP와 NCP는 이념적으로 유사했기 때문에, 1980년대에는 급진 사회주의 정당인 독립사회주의인민민주조직(PDOIS) 형태로 새로운 야당이 등장했다. 그러나 1966년과 1992년 선거 사이에서 PPP는 "압도적으로 우세"하여 각 선거에서 55%에서 70%의 득표율과 대다수의 의석을 지속적으로 확보했다.
원칙적으로 자와라 시대에는 경쟁적인 정치가 존재했지만, 실제로는 "다우다 자와라 경의 지배적인 인격을 중심으로 한 국가 권력의 일당 독점"이 있었다고 평가된다. 독립 이후 시민 사회는 제한적이었고, 야당은 약했으며 전복 세력으로 선언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야당은 자원에 대한 평등한 접근권을 갖지 못했고, 기업가 계층은 야당에 자금 지원을 거부했다. 정부는 야당이 언제 공개 발표와 기자 회견을 할 수 있는지 통제했으며, 선거 부정 및 선거인 명부 작성의 부적절성에 대한 의혹도 제기되었다. 1991년 PDOIS가 반줄의 선거인 명부 부정에 대해 제기한 소송은 기술적인 문제로 기각되었다.
자메 통치 기간 동안 야당은 다시 분열되었다. 2005년에 결성된 민주주의와 발전을 위한 국민동맹(NADD) 구성원들 간의 내분이 한 예이다. 자메는 경찰력을 이용해 야당 구성원과 정당을 탄압했다. 자메는 또한 인권 운동가, 시민 사회 단체, 정치적 반대자, 언론인에 대한 인권 유린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들의 운명에는 망명, 괴롭힘, 자의적 투옥, 살인, 강제 실종 등이 포함되었다. 구체적인 예로는 2004년 언론인 데이다 히다라 살해 사건, 2000년 시위 중 학생 학살 사건, 2009년 인권 옹호자에 대한 공개 살해 위협, 2013년 동성애자에 대한 공개 위협 등이 있다. 또한 자메는 비무슬림의 종교 자유를 위협하고, '용병 판사'를 이용해 사법부를 약화시켰으며, 수많은 선거 조작 혐의에 직면했다.
2016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자메는 야당 연합의 지지를 받은 아다마 배로에게 패배했다. 자메의 처음 사임 동의 후 번복은 헌법 위기를 초래했고, 이는 2017년 1월 ECOWAS 군대의 군사 개입으로 절정에 달했다. 배로는 3년 임기의 과도 정부 수반으로 봉사하겠다고 약속했다. 나이지리아 민주주의 개발 센터는 배로가 직면한 과제를 "공공 부문에 대한 시민의 신뢰 회복"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농민과 더 큰 공동체 사이의 농촌 지역 긴장과 함께 "취약한 평화"를 묘사했다. 또한 민족 집단 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한 예로 2017년 2월, 자메 지지자 51명이 배로 지지자들을 괴롭힌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의 당선은 처음에는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센터는 배로 부통령의 초기 헌법적 실수, 포용의 과제, 자메 이후의 높은 기대감으로 인해 이러한 열기가 식었다고 지적했다.
2021년 12월 5일, 현직 대통령 아다마 배로는 대통령 선거에서 선거관리위원회에 의해 당선자로 선언되었다. 2021년 12월 4일 선거는 전 독재자 야히아 자메가 망명한 이후 처음 치러진 선거로, 젊은 민주주의 국가에 매우 중요한 선거로 여겨졌다.
현재 주요 정당으로는 아다마 배로 대통령의 출신 모체인 여당 통일민주당(UDP)이 있다. 야히아 자메 전 대통령이 창당했던 애국재건동맹(APRC)은 자메 실각 후 세력이 약화되어 야당이 되었다. 다우다 자와라 전 대통령의 인민진보당(PPP)은 1994년 쿠데타 이후 쇠퇴했다.
5.3. 행정 구역

감비아는 8개의 지방 정부 구역(Local Government Area, LGA)으로 나뉘며, 수도인 반줄은 시(city)로 분류된다. 이 지방 정부 구역들은 감비아 헌법 제192조에 따라 독립 선거 위원회에 의해 설정되었다.
명칭 | 면적 (km2) | 인구 조사 | 주도 | 군 (District) 수 | |
---|---|---|---|---|---|
2003년 | 2013년 (잠정) | ||||
반줄 (수도) | 12.2 | 35,061 | 31,301 | 반줄 | 3 |
카니핑 | 75.6 | 322,735 | 382,096 | 카니핑 | 1 |
브리카마 (구 서부) | 1,764.3 | 389,594 | 699,704 | 브리카마 | 9 |
만사 콘코 (구 하류 지방) | 1,628.0 | 72,167 | 82,381 | 만사콘코 | 6 |
케레완 (구 북부 지방) | 2,255.5 | 172,835 | 221,054 | 케레완 | 7 |
쿤타우르 (구 중앙강 지방 서부) | 1,466.5 | 78,491 | 99,108 | 쿤타우르 | 5 |
잔잔부레 (구 중앙강 지방 동부) | 1,427.8 | 107,212 | 126,910 | 잔잔부레 | 5 |
바세 (구 상류 지방) | 2,069.5 | 182,586 | 239,916 | 바세 산타 수 | 7 |
총계 | 10,689 | 1,360,681 | 1,882,450 | 반줄 | 43 |
지방 정부 구역은 2013년 기준으로 43개의 군(District)으로 세분된다. 이 중 카니핑과 콤보 세인트 메리(브리카마 지방 정부 구역과 함께 브리카마를 주도로 공유)는 사실상 그레이터 반줄 지역의 일부이다.
5.4. 인권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감비아 여성 및 소녀의 약 78.3%가 여성 할례를 겪은 것으로 추정된다.
성소수자(LGBT) 활동은 불법이며, 종신형에 처해질 수 있다. 배로 행정부는 합의된 동성 관계를 기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법을 폐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도 밝혔다.
데일리 옵서버 기자 에브리마 마네는 2006년 7월 체포되어 그 이후로 비밀리에 구금된 것으로 인권 단체들은 믿고 있다. 마네는 야히아 자메 대통령을 비판하는 BBC 보도를 재게재하려다 감비아 국가정보국에 체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앰네스티는 그를 양심수로 간주하고 2011년 "우선 처리 대상"으로 지정했다. 2019년 감비아 신문 더 트럼펫은 마네가 2008년 중반 어느 시점에 구금 중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2014년에는 쿠데타 미수 사건 이후 인권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야히아 자메 정권 하에서는 언론인 탄압, 반대파 구금, 고문 등의 인권 침해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아다마 배로 정부 출범 이후 과거 인권 침해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노력이 진행 중이며, 인권 상황 개선을 위한 제도적 개혁도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으며, 국제 사회는 감비아의 인권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6. 대외 관계
감비아는 대부분의 전 대통령 자와라 재임 기간 동안 공식적으로 비동맹 정책을 따랐다. 영국, 세네갈 및 기타 아프리카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94년 7월 쿠데타는 감비아와 서방 강대국, 특히 미국과의 관계를 긴장시켰으며, 미국은 2002년까지 해외원조법 제508조에 따라 대부분의 비인도적 지원을 중단했다. 1995년 이후 자메 대통령은 리비아(2010년 중단), 쿠바 등 여러 추가 국가와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감비아가 대만과 외교 관계를 수립한 후인 1995년에 감비아와 단교했다가 2016년에 관계를 재수립했다.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 회원국으로서 감비아는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의 내전을 해결하려는 조직의 노력에 적극적인 역할을 해왔으며, 1990년에는 공동체의 정전 감시단(ECOMOG)에, 2003년에는 (ECOMIL)에 군대를 파견했다. 2019년 11월 감비아는 헤이그에서 미얀마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미얀마군이 미얀마의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에 대해 집단학살을 자행했다고 비난했다.
야히아 자메 통치하에서 감비아는 세네갈 남부 카자망스 지역의 MFDC 반군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후 악화된 인권 상황은 미국-감비아 관계에 점점 더 큰 부담을 주었다.
감비아는 2013년 10월 3일 영연방에서 탈퇴했으며, 자메 정부는 "감비아는 결코 신식민주의 기관의 회원이 되지 않을 것이며 식민주의의 연장을 대표하는 어떤 기관의 당사자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배로 정부 하에서 감비아는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영연방 공화국으로의 지위를 회복하는 절차를 시작했으며, 2018년 1월 22일 패트리샤 스코틀랜드 사무총장에게 영연방 재가입 신청서를 공식적으로 제출하여 2018년 2월 8일 영연방 공화국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했다.
감비아는 인근 기니비사우와 세네갈의 인접한 카자망스 지역의 분쟁을 중재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감비아 정부는 세네갈이 2006년 3월 실패한 쿠데타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믿었다. 이로 인해 감비아와 이웃 국가 간의 관계가 긴장되었다.
6.1. 세네갈과의 관계

감비아는 지리적으로 세네갈에 둘러싸여 있어 양국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역사적으로 동일한 민족과 문화를 공유하는 경우가 많아 '세네감비아'라는 지역명으로 통칭되기도 한다. 1981년 감비아에서 쿠데타 시도가 발생했을 때 세네갈이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이를 진압했으며, 이를 계기로 1982년 양국은 군사, 경제, 통화 통합을 목표로 하는 세네감비아 연방을 결성했다. 그러나 감비아 측에서 세네갈에 흡수될 것을 우려하여 1989년 연방은 해체되었다.
연방 해체 이후에도 양국은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1994년 야히아 자메 정권 수립 이후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자메 정권은 세네갈 남부 카자망스 지역의 반군을 지원했다는 의혹을 받았으며, 국경 문제 등으로 갈등을 겪었다. 2017년 자메가 대선 결과에 불복하여 헌정 위기가 발생했을 때, 세네갈은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 군대의 주축이 되어 감비아에 군사 개입을 단행, 자메의 퇴진과 아다마 배로의 취임을 이끌어냈다. 이후 양국 관계는 다시 개선되는 추세이다. 경제적으로는 비공식 무역을 포함한 교역이 활발하며, 사회문화적으로도 교류가 깊다. 2019년에는 감비아강을 가로지르는 세네감비아 다리(또는 파라페니 다리)가 개통되어 양국 간 인적, 물적 교류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6.2. 기타 주요국과의 관계
- 영국: 감비아는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1965년 독립 이후에도 영연방의 일원이었다. 야히아 자메 정권 시절인 2013년 영연방을 탈퇴했으나, 아다마 배로 정권 출범 이후 2018년 재가입하여 관계를 회복했다. 영국은 감비아의 주요 개발 협력 파트너 중 하나이다.
- 미국: 미국은 감비아의 민주주의와 인권 상황에 관심을 가져왔다. 자메 정권 시절 인권 문제로 관계가 경색되기도 했으나, 배로 정권 출범 이후 관계 개선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감비아에 인도적 지원 및 개발 원조를 제공하고 있다.
- 중화인민공화국: 감비아는 1995년부터 중화민국(대만)과 수교 관계를 유지했으나, 2013년 11월 단교를 선언했다. 이후 2016년 3월 중화인민공화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중국은 일대일로 구상의 일환으로 감비아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으며, 특히 어분 생산과 관련된 중국 자본의 활동이 논란이 되기도 한다.
- 이란, 시리아, 베네수엘라: 자메 정권 시절, 반미·반이스라엘 노선을 표방하며 이들 국가와 관계를 강화했다.
- 유럽 연합: 유럽 연합은 감비아의 주요 무역 파트너이자 개발 협력 파트너이다. 자메 정권 시절 인권 문제로 원조가 중단되기도 했으나, 배로 정권 이후 관계가 개선되면서 원조가 재개되었다.
6.3. 국제 기구
감비아는 다음과 같은 주요 국제 기구의 회원국이다.
- 영연방: 1965년 독립과 함께 가입했으나 2013년 탈퇴했다. 2018년 2월 8일 재가입했다.
-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 창립 회원국으로, 역내 평화 유지 활동 및 경제 협력에 참여하고 있다.
- 유엔(UN): 1965년 가입. 핵무기금지조약에 서명했다.
- 아프리카 연합(AU): 전신인 아프리카 단결 기구(OAU) 시절부터 회원국이다.
- 이슬람 협력 기구(OIC): 이슬람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 감비아강 유역 개발 기구(OMVG): 1978년 감비아, 세네갈, 기니, 기니비사우 4개국이 감비아강 유역 개발을 위해 설립했으나, 개발 계획은 지지부진한 상태이다.
6.4. 대한민국과의 관계
대한민국과 감비아는 1965년 4월 21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양국은 의료 협정, 어업 협정, 경제기술 협정 등을 체결하며 우호 관계를 유지해왔다. 감비아는 비동맹 중립노선을 표방하면서도 대한민국과의 관계를 중시해왔다. 감비아에 대한민국 대사관은 없으며, 주 세네갈 대한민국 대사관이 감비아를 겸임하고 있다. 반대로 대한민국에도 감비아 대사관은 없으며, 주 일본 감비아 대사관이 대한민국을 겸임하고 있다. 2015년, 나고야에서 감비아 요리점을 운영하는 감비아 출신 여성이 명예총영사로 임명되어 주나고야 감비아 공화국 명예총영사관이 개설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73년 수교하였다.
7. 군사

감비아 국군(Gambia Armed Forces, GAF)은 1985년 감비아와 세네갈 간의 정치적 연합체인 세네감비아 연방 규정에 따라 창설되었다. 원래 영국이 훈련한 감비아 국립군(GNA)과 세네갈이 훈련한 감비아 국립 헌병대(GNG)로 구성되었다. GNG는 1992년 경찰에 통합되었고, 1997년 자메는 감비아 해군(GN)을 창설했다. 2000년대 중반 감비아 공군 창설 시도는 결국 무산되었다. 2008년 자메는 특수부대로 구성된 국가 공화국 수비대를 창설했다. GNA는 약 9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며, 2개의 보병대대와 1개의 공병중대로 이루어져 있다. 페렛 장갑차와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를 운용한다. GN은 순찰선을 장비하고 있으며, 2013년 대만이 다수의 신형 함정을 기증했다.
1985년 창설 이후 GAF는 유엔 및 아프리카 연합 평화유지 임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 GAF는 2급 평화유지 기여국으로 분류되었으며, 국제협력센터(Center on International Cooperation)는 GAF를 평화유지 분야의 지역 선도국으로 평가했다.
1990년부터 1991년까지 라이베리아에 ECOMOG의 일원으로 파병되어 2명의 감비아 군인이 사망했다. 이후 ECOMIL, UNMIL, UNAMID에 병력을 파견했다. 1994년 자메가 무혈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이후 군대에 대한 책임은 대통령에게 직접 귀속되었다. 자메는 또한 감비아 국군의 일상적인 작전을 책임지는 최고 군사령관인 국방참모총장직을 신설했다. 1958년부터 1985년까지 감비아에는 군대가 없었지만, 감비아 야전부대가 경찰의 준군사 조직으로 존재했다. 감비아의 군사 전통은 1901년부터 1958년까지 존재하며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영국 육군의 감비아 연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7년 감비아는 유엔 핵무기금지조약에 서명했다.
감비아 국군은 다른 국가들과 다수의 장비 및 훈련 협정을 체결해왔다. 1992년 나이지리아 군 파견대가 GNA 지휘를 도왔다. 1991년부터 2005년까지 터키군은 감비아 군인 훈련을 지원했다. 또한 왕립 지브롤터 연대와 미국 아프리카 사령부(US AFRICOM)의 영국 및 미국 훈련팀을 유치하기도 했다.
2024년 세계 평화 지수에 따르면 감비아는 세계에서 82번째로 평화로운 나라이다.
8. 경제

감비아는 자유주의적 시장 경제 체제를 가지고 있으며, 전통적인 자급 농업, 수출 수입을 위한 땅콩 의존, 항구를 중심으로 한 재수출 무역, 낮은 수입 관세, 최소한의 행정 절차, 환율 통제 없는 변동 환율, 그리고 중요한 관광 산업을 특징으로 한다. 주요 산물인 땅콩이 수출고의 높은 비중을 차지했으나, 최근에는 그 중요성이 다소 낮아졌다. 그 외에 야자열매, 모피 등이 생산되고 어업이 성하며, 지하자원으로는 보크사이트 등이 있다.
세계은행은 2018년 감비아의 GDP를 16.24 억 USD로 책정했고, 국제통화기금은 2011년 9.77 억 USD로 추산했다.
2006년부터 2012년까지 감비아 경제는 연간 GDP의 5~6% 성장률을 보였다.
농업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30%를 차지하며 노동력의 약 70%를 고용한다. 농업 내에서 땅콩 생산이 GDP의 6.9%, 기타 작물이 8.3%, 축산업 5.3%, 어업 1.8%, 임업 0.5%를 차지한다. 산업은 GDP의 약 8%를, 서비스업은 약 58%를 차지한다. 제한된 제조업은 주로 농업 기반(예: 땅콩 가공, 제빵, 양조장, 제혁소)이다. 기타 제조업 활동에는 비누, 청량음료, 의류 등이 포함된다.
2022년 기준으로 인구의 17.2%가 하루 2.15 USD (2017년 PPP 기준) 미만으로 생활하는 극빈층에 해당한다. 거의 인구의 3분의 1이 하루 1.25 USD 미만의 소득으로 생활하는 빈곤선 이하에 있다.
2024년, 최초의 태양광 발전소가 가동을 시작했다.
8.1. 주요 산업
- 농업: 감비아 경제의 근간을 이루며, 노동력의 약 70%가 종사한다. 전통적으로 땅콩이 주요 환금 작물이었으며, 수출 수입의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 중요성이 다소 감소했다. 쌀, 옥수수 등 자급자족을 위한 작물도 재배된다. 축산업과 임업도 이루어진다.
- 어업: 대서양 연안과 감비아강을 중심으로 어업이 활발하다. 다양한 종류의 어류와 갑각류가 어획되며, 일부는 수출된다. 최근 중국 자본의 유입으로 어분 생산이 증가하고 있으나, 이는 경제적, 환경적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 관광업: 감비아의 주요 외화 수입원 중 하나이다. "미소짓는 해안(The Smiling Coast)"이라는 별명처럼 아름다운 해변과 풍부한 조류 자원,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의 배경이 된 역사 유적지(예: 쿤타킨테섬) 등으로 유럽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관광 시즌은 주로 건기인 겨울철이다.
- 재수출 무역: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재수출 무역이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낮은 수입 관세와 최소한의 행정 절차 덕분에 인접국, 특히 세네갈로 향하는 상품의 중계 무역이 활발하다. 이는 종종 비공식적인 형태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8.2. 무역
과거 영국과 유럽 연합(EU)이 감비아의 주요 수출 시장이었으나, 최근 몇 년간 세네갈, 미국, 일본이 중요한 무역 상대국으로 부상했다. 아프리카에서는 2007년 세네갈이 감비아의 가장 큰 무역 상대국이었으며, 이는 과거 기니비사우와 가나가 동등하게 중요한 무역 상대국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전 세계적으로는 덴마크, 미국, 중국이 감비아 수입품의 중요한 공급국이 되었다. 영국, 독일, 코트디부아르, 네덜란드 또한 감비아 수입품의 상당 부분을 공급한다. 2007년 감비아의 무역 적자는 3.31 억 USD였다.
주요 수출품으로는 과거 땅콩 및 땅콩 제품이 큰 비중을 차지했으나, 현재는 어류, 목재, 재수출품 등이 주를 이룬다. 주요 수입품은 식료품, 공산품, 연료, 기계류 등이다.
2009년 5월 기준, 감비아에는 이슬람 은행 1개를 포함하여 12개의 상업 은행이 있었다. 이 중 가장 오래된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은 1894년 영국령 서아프리카 은행의 전신이 진출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5년 스위스 기반 은행 그룹인 인터내셔널 커머셜 뱅크가 자회사를 설립하여 현재 4개의 지점을 운영하고 있다. 2007년 나이지리아의 액세스 뱅크가 자회사를 설립하여 본점 외에 4개 지점을 운영 중이며, 추가로 4개 지점 개설을 약속했다. 2008년에는 나이지리아 거대 은행인 제니스 뱅크의 자회사인 제니스 뱅크 (감비아) 유한회사가 설립되었다. 2009년 5월 레바논 캐나다 은행이 프라임 뱅크라는 자회사를 개설했다.
8.3. 교통

감비아의 교통 시스템은 공공 및 민간 운영이 혼합되어 있으며, 포장 및 비포장 도로, 수로 및 항공 운송 시스템으로 구성된다. 트랜스-감비아 고속도로는 국토를 양분하는 감비아강 양쪽을 따라 이어진다. 강은 페리나 세네감비아 다리를 통해 건널 수 있다. 철도는 없다.
국내 도로의 총 길이는 3742 km이며, 이 중 포장도로는 723 km, 비포장도로는 3019 km이다.
수로의 총 길이는 390 km이며, 반줄항이 유일한 항구로 감비아 항만청에서 관리한다. 3,000톤급 선박이 내륙의 잔잔부레까지 감비아강을 따라 운항할 수 있다. 그 상류에서도 소형 선박 운항이 가능하여 감비아강은 중요한 수송로 역할을 한다.
유일한 국제공항은 윤둠에 위치한 반줄 국제공항으로, 수도에서 26 km 떨어져 있다. 이 공항 활주로는 길이 3600 m, 폭 45 m로, 우주왕복선의 비상 대체 착륙지로 NASA의 자금 및 기술 지원을 받아 1989년 개보수되었다.
9. 사회
감비아 사회는 다양한 민족 집단이 공존하며 각자의 언어와 전통을 보존하고 있는 다문화적 특징을 지닌다. 전통적인 대가족 중심의 생활 방식이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지지만, 도시화와 현대화의 영향으로 서구적 가치관과의 접촉도 늘고 있다.
9.1. 인구 구성

감비아 인구 | |
---|---|
연도 | 백만 명 |
1950 | 0.27 |
2000 | 1.2 |
2021 | 2.5 |
2024년 추정 인구는 2,769,075명으로, 이는 2013년 대비 2.30% 증가한 수치이다. 2011년 기준 도시화율은 57.3%였다. 2003년 인구 조사 잠정 수치에 따르면 더 많은 지역이 도시로 지정되면서 도시와 농촌 인구 간의 격차가 좁혀지고 있다. 도시 이주, 개발 프로젝트, 현대화로 인해 더 많은 감비아인들이 서구의 습관과 가치관에 접촉하고 있지만, 토착 복장과 축제 형태, 그리고 대가족에 대한 전통적인 강조는 일상생활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남아 있다.
유엔 개발 계획(UNDP)의 2010년 인간 개발 보고서는 감비아를 인간 개발 지수에서 169개국 중 151위로 평가하여 "낮은 인간 개발" 범주에 포함시켰다. 이 지수는 기대수명, 교육 기간, 1인당 국민총소득(GNI) 및 기타 요소를 비교한다.
2013년 합계출산율(TFR)은 여성 1인당 3.98명으로 추정되었다.
9.2. 민족
감비아에는 다양한 민족 집단이 거주하며, 각기 고유한 언어와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주요 민족 집단의 구성비는 만딩카족 (34%), 풀라니족 (31%), 월로프족 (11%), 졸라족/카로닌카족 (9%), 세라훌레족/자항카족 (7%), 세레르족 (3%), 만자고족 (2%), 밤바라족 (1%), 아쿠족 (0.5%), 기타 (1.5%) 등이다. 이 중 시에라리온 크리올인의 후손인 아쿠족은 감비아에서 가장 작은 소수 민족 중 하나로, 전통적으로 수도에 집중 거주해왔다.
약 3,500명의 비아프리카계 거주민에는 유럽인과 레바논계 가족(총인구의 0.23%)이 포함된다. 유럽계 소수 민족의 대부분은 영국인이지만, 많은 영국인이 독립 후 떠났다.
9.3. 언어
영어가 감비아의 공식 언어이며, 공무 및 교육에 사용된다. 그 외에 만딩카어, 월로프어, 풀라어, 세레르어, 소닝케어, 크리오어, 졸라어 등 다양한 토착 언어가 사용된다. 지리적 위치로 인해 서아프리카 대부분 지역의 공식 언어인 프랑스어에 대한 지식도 비교적 널리 퍼져 있다.
인구의 38%가 만딩카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며, 풀라어 21%, 월로프어 18%, 소닝케어 9%, 졸라어 4.5%, 세레르어 2.4%, 만자크어와 바이누크어 각각 1.6%, 기니 크리올어 1%, 영어 0.5% 순이다. 그 외에도 소수의 여러 언어가 사용된다. 청각 장애인은 감비아 수어를 사용한다.
9.4. 종교

인구의 약 96%가 수니파 이슬람교도이며, 대부분 말리키 학파의 수피즘을 따른다. 약 4%는 기독교인이며, 나머지는 토착 신앙 등을 믿는다. 헌법 제25조는 시민이 자신이 선택한 종교를 실천할 권리를 보호하며, 이슬람교도와 기독교인 간의 결혼은 흔하다.
9.4.1. 이슬람교
감비아의 거의 모든 상업 활동은 이드 알아드하와 이드 알피트르를 포함한 주요 이슬람 휴일 동안 중단된다. 감비아의 대부분 무슬림은 말리키 학파를 따른다. 또한 아흐마드파 운동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감비아에는 시아파 무슬림 공동체도 존재하는데, 주로 레바논인 및 기타 아랍인 이민자들로 구성된다. 남아시아 이민자 대다수도 무슬림이다.
9.4.2. 기독교
기독교 공동체는 인구의 약 4%를 차지한다. 감비아 서부와 남부에 거주하는 기독교 공동체의 대부분은 로마 가톨릭 신자로 확인된다. 그러나 성공회, 감리교, 침례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여호와의 증인 및 소규모 복음주의 교단과 같은 소규모 기독교 교파도 존재한다.
9.4.3. 토착 신앙
세레르교와 같은 토착 신앙이 어느 정도까지 실천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세레르교는 우주론과 루그(Roog)라는 최고신에 대한 믿음을 포함한다. 종교 축제로는 소이, 음보세, 란두 란데 등이 있다. 매년 세레르교 신자들은 소이 점술 의식을 위해 세네갈의 신(Sine)으로 연례 순례를 한다. 세레르교는 또한 "토바스키", "가모", "코리테", "웨리 코르"와 같은 세네감비아 이슬람 축제가 고대 세레르 축제였던 세레르 종교에서 차용한 단어를 나타내는 이름이라는 점에서 세네감비아 이슬람 사회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졸라족도 세레르족과 마찬가지로 부쿠트와 같은 주요 종교 의식을 포함한 고유한 종교 관습을 가지고 있다.
9.4.4. 기타 종교
소수의 남아시아 이민자로 인해 힌두교도와 바하이 신앙 신자들도 존재한다.
9.5. 교육

감비아 헌법은 무상 의무 초등 교육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자원 부족과 교육 기반 시설 부족으로 인해 이행이 어려운 실정이다. 1995년 초등 총취학률은 77.1%, 순취학률은 64.7%였다. 오랫동안 학비 때문에 많은 어린이가 학교에 다니지 못했지만, 1998년 2월 야히아 자메 대통령은 첫 6년간의 학비 폐지를 명령했다. 여학생은 초등학생의 약 52%를 차지한다. 농촌 지역 여학생의 경우 문화적 요인과 빈곤으로 인해 부모가 여학생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이 수치는 더 낮을 수 있다. 학령기 아동의 약 20%가 꾸란 학교에 다닌다.
교육 제도는 영국 제도를 기반으로 한다. 초등 교육은 6년 과정으로 8세에 시작한다. 중등 교육은 5년 과정이며, 이후 졸업생들은 2년 과정의 대학 예비 과정에 진학하거나 4년 과정의 기술 중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
9.5.1. 고등 교육
감비아에는 여러 공립 및 사립 고등 교육 기관이 있다. 가장 오래된 고등 교육 기관 중 하나인 감비아 칼리지는 1978년에 설립되었다. 공중 보건, 교육, 간호, 농업 분야에서 수료증 및 디플로마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감비아 대학교는 1999년 감비아 국회법에 의해 설립되었다. 설립 이후 UTG는 여러 학부에서 학부, 대학원 및 박사 과정을 제공하고 있다. 이 대학은 카니핑의 MDI와 브리카마의 감비아 칼리지에 위치했었으나, 2024년 3월 12일 파라바에 새로운 캠퍼스가 개교했다.
전 세계 250개국 이상에서 435,000명 이상의 학생이 등록한 고등 교육 기관인 국제 개방 대학교(2020년 1월까지 이슬람 온라인 대학교로 알려짐)는 감비아에 글로벌 본부를 두고 있다.
9.6. 보건
2024년 세계 기아 지수(GHI)에서 감비아는 127개국 중 88위를 차지했으며, 점수는 19.9점으로 중간 수준의 기아 상태를 나타낸다.
감비아는 수도 반줄과 콤보 지역에 비교적 잘 갖춰진 국립 의료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다. 지방 및 강 상류 지역에는 정부가 여러 보건소를 건설하고 의사를 파견하고 있다. 국민을 위한 예방 접종 확대 사업도 큰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열악한 위생 및 영양 상태로 인해 감비아의 영아 사망률은 여전히 높은 편이다.
2007년 당시 야히아 자메 대통령은 조상이 꿈에서 알려주었다고 주장하는 에이즈 치료제(실제로는 허브와 향신료로 만든 약탕)를 만들었다. 그는 에이즈 환자들에게 항바이러스제 치료를 중단하고 자신이 만든 "치료제"를 복용하도록 명령했는데, 이는 의료 전문가들 사이에서 "환자들에게 잘못된 희망을 안겨준다"는 비판을 받았다.
10. 문화


감비아는 아프리카 본토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지만, 그 문화는 매우 다양한 영향의 산물이다. 국경은 감비아강 양쪽의 좁은 지대를 따라 형성되며, 이 강은 국가의 운명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현지에서는 단순히 "강"이라고 불린다. 자연적인 장벽이 없는 감비아는 서아프리카 전역, 특히 세네갈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민족 집단의 고향이 되었다.
유럽인들 또한 감비아 역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는 감비아강이 대륙 깊숙이 항해 가능하기 때문이며, 이 지리적 특징으로 인해 이 지역은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노예 무역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장소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19세기에 노예 무역이 불법화되자 이를 중단시키는 데 전략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역사의 일부는 감비아를 배경으로 한 알렉스 헤일리의 책과 TV 시리즈 《뿌리》에서 대중화되었다.
10.1. 음악

감비아의 음악은 국경을 완전히 둘러싸고 있는 이웃 나라 세네갈의 음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서양 대중음악과 춤, 그리고 월로프족과 세레르족의 전통 북 연주 및 춤 음악인 사바르가 융합되어 있다. 전통 악기로는 코라(하프와 유사한 현악기), 발라폰(목금과 유사한 타악기), 할람(기타와 유사한 현악기) 등이 있으며, 그리오라고 불리는 전통 이야기꾼이자 음악가들이 이러한 악기를 연주하며 역사와 이야기를 전승한다.
10.2. 요리
감비아 요리는 이웃 세네갈의 요리 전통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현지 재료와 프랑스 식민지 요리를 포함한 역사적 영향이 혼합되어 있다. 특히 인기 있는 요리로는 고기, 땅콩 페이스트, 채소로 만든 고소한 땅콩 스튜인 세네갈의 도모다가 있으며, 이는 감비아 가정식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레몬, 양파, 겨자로 양념한 생선이나 닭고기를 특징으로 하는 세네갈의 야사도 널리 즐겨 먹으며, 이는 다른 많은 요리의 흙내음과 대조되는 톡 쏘는 맛을 제공한다. 감비아 요리에는 일반적으로 땅콩, 쌀, 생선, 고기, 양파, 토마토, 카사바, 고구마, 가지, 양배추, 고추 및 감비아강에서 나는 굴이 포함된다.
10.3. 문학
다른 서아프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감비아에는 전통적인 이야기꾼이자 음악가인 그리오를 포함한 구전 문학 전통이 있다. 1960년대 이후 영어로 된 감비아 문학이 등장했다. 렌리 피터스는 이 문학의 창시자로 여겨지며, 주목할 만한 작가로는 티잔 살라, 나나 그레이-존슨, 마리아마 칸 등이 있다.
10.4. 언론
비평가들은 정부가 언론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비난해왔다. 2002년 법은 언론인에게 면허를 발급하고 투옥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위원회를 만들었다. 2004년에는 명예훼손과 비방에 대한 징역형을 허용하고 모든 인쇄 및 방송 면허를 취소하여 미디어 그룹이 원래 비용의 5배를 내고 재등록하도록 강제하는 추가 법안이 통과되었다.
쿠데타 시도 이후 3명의 감비아 언론인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정부의 경제 정책을 비판하거나 전 내무장관과 보안 책임자가 음모자들 중 하나라고 진술했다는 이유로 투옥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문 편집자 데이다 히다라는 2004년 법안이 발효된 지 며칠 후 의문사했다.
신문과 라디오 방송국의 면허 수수료는 높으며, 유일한 전국 방송국은 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받고 있다.
국경 없는 기자회는 "야히아 자메 대통령의 경찰 국가"가 언론인에 대해 살인, 방화, 불법 체포, 살해 위협을 사용했다고 비난했다.
2010년 12월, 전 인디펜던트 신문 편집장 무사 사이디칸은 나이지리아 아부자에 있는 ECOWAS 법원으로부터 20.00 만 USD를 받았다. 법원은 그가 2006년 실패한 쿠데타에 대해 알고 있다는 혐의로 국가정보국에서 재판 없이 구금되어 있는 동안 감비아 정부가 고문을 자행했다고 판결했다.
10.5. 스포츠


이웃 세네갈과 마찬가지로 감비아의 국가 스포츠이자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레슬링이다. 축구와 농구도 인기가 있다. 감비아의 축구는 감비아 축구 연맹(GFA)에서 관리하며, GFA는 FIFA와 아프리카 축구 연맹(CAF) 모두에 소속되어 있다. GFA는 최상위 디비전인 GFA 리그 퍼스트 디비전을 포함한 감비아 리그 축구를 운영하며, 감비아 국가대표팀도 관리한다. "전갈들(The Scorpions)"이라는 별명을 가진 국가대표팀은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적은 없지만, 2021년 처음으로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본선에 진출하여 8강에 오르는 성과를 거두었다. 2023년에는 코트디부아르에서 열린 AFCON에 연속으로 두 번째 참가했다. 홈 경기장은 인데펜던스 스타디움이다. 감비아는 2005년 자국에서 개최된 CAF U-17 선수권 대회와 2009년 알제리 대회에서 우승하여 각각 페루(2005년)와 나이지리아(2009년)에서 열린 FIFA U-17 월드컵 본선에 자동 진출했다. U-20 대표팀도 2007년 캐나다와 2023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FIFA U-20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여자 U-17 대표팀은 2012년 아제르바이잔에서 열린 FIFA U-17 여자 월드컵에 참가했다.
감비아는 비치발리볼 국가대표팀을 보유하고 있으며, 2018-2020 CAVB 비치발리볼 컨티넨탈컵 여자부와 남자부에 모두 참가했다.
10.6. 세계유산
감비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된 문화유산이 2건 있다.
- 쿤타킨테섬과 관련 유적지 (2003년, 문화유산): 감비아강 하구에 위치한 섬과 주변 유적지로, 노예 무역의 비극적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의 배경이 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 세네감비아 환상열석 (2006년, 문화유산, 세네갈과 공동 등재): 감비아와 세네갈 국경 지역에 분포하는 고대의 거석 기념물군으로, 약 1,000여 개의 환상열석이 있으며, 매장 의식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네스코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큰 규모의 환상열석 집중지"라고 설명한다.

10.7. 공휴일
감비아의 주요 공휴일은 다음과 같다. 이슬람 관련 공휴일은 히즈라력에 따라 날짜가 매년 변경된다.
날짜 | 한국어 표기 | 영어 표기 | 비고 |
---|---|---|---|
1월 1일 | 새해 첫날 | New Year's Day | |
변동 (이슬람력 라비 알아왈 12일) | 예언자 탄생일 | Mawlid al-Nabi | |
2월 18일 | 독립 기념일 | Independence Day | |
변동 (부활절 전 금요일) | 성금요일 | Good Friday | 기독교 휴일 |
변동 (춘분 후 첫 보름달 다음 일요일) | 부활절 월요일 | Easter Monday | 기독교 휴일 |
5월 1일 | 노동절 | Labour Day | |
5월 25일 | 아프리카의 날 | Africa Day | |
변동 (이슬람력 샤왈 1일) | 이드 알피트르 (코리테) | Eid al-Fitr (Koriteh) | 라마단 종료 기념 |
7월 22일 | 혁명 기념일 | Revolution Day | |
8월 15일 | 성모 승천 대축일 | Assumption Day | 기독교 휴일 |
변동 (이슬람력 둘힛자 10일) | 이드 알아드하 (타바스키) | Eid al-Adha (Tobaski) | 희생제 |
12월 25일 | 크리스마스 | Christmas Da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