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미얀마는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 서북부에 위치한 국가로, 인도, 방글라데시, 중국, 라오스, 태국과 국경을 접하며 남서쪽으로는 벵골만과 안다만해에 면해 있다. 국토 면적은 약 67.66 만 km2로 동남아시아 대륙부에서 가장 넓으며, 수도는 네피도, 최대 도시는 양곤이다.
미얀마의 역사는 고대 쀼족과 몬족의 도시 국가에서 시작되어, 9세기 버마족의 등장과 함께 버간 왕국이 성립되며 불교 문화가 융성하였다. 이후 따웅우 왕조와 꼰바웅 왕조를 거치며 강력한 통일 국가를 이루었으나, 19세기 영국과의 세 차례 전쟁 끝에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에 점령되기도 했으나, 1948년 독립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독립 이후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되었고, 1962년 군부 쿠데타로 장기간 군사 통치가 이어졌다. 2011년 민정 이양으로 민주화 개혁이 추진되었으나, 2021년 다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여 현재까지 정치적 혼란과 내전이 계속되고 있다.
미얀마는 옥, 보석, 석유, 천연가스 등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나, 오랜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 제재 등으로 인해 경제 발전이 더디며 빈부 격차가 심각한 문제로 남아있다. 사회적으로는 버마족을 비롯한 130여 개의 다양한 소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공용어는 미얀마어, 주요 종교는 상좌부 불교이다. 그러나 로힝야족을 비롯한 소수 민족 문제와 인권 탄압은 국제 사회의 지속적인 우려를 낳고 있다. 미얀마 문화는 불교를 중심으로 전통 예술, 건축, 음식, 축제 등 다채로운 면모를 지니고 있다.
2. 국호
미얀마의 국호는 역사적, 정치적 배경에 따라 여러 차례 변경되었으며, 현재 국제적으로 '미얀마'와 '버마'라는 두 가지 명칭이 함께 사용되고 있어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두 명칭 모두 미얀마의 주요 민족인 버마족의 버마어 명칭 '므란마'(မြန်မာ므란마버마어) 또는 '므람마'에서 유래되었다. 이 단어의 정확한 어원은 불확실하지만, 산스크리트어의 '브라흐마 데샤'(ब्रह्मदेशः브라흐마데샤산스크리트어, 브라흐마의 땅)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 당시의 공식 국호는 버마 연방(Union of Burma버마 연방영어)이었다. 이후 1974년에는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Socialist Republic of the Union of Burma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영어)으로 변경되었고, 1988년 군부 쿠데타 이후 다시 버마 연방으로 환원되었다. 1989년, 당시 군사 정부는 '버마'라는 명칭이 영국 식민 시대의 잔재이며 버마족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대외적인 영어 국호를 '미얀마 연방'(Union of Myanmar미얀마 연방영어)으로 공식 변경하였다. 이는 135개에 달하는 소수 민족을 포괄하는 국호라는 명분을 내세운 것이었다. 2011년 신헌법 발효와 함께 현재의 공식 국호는 미얀마 연방 공화국(ပြည်ထောင်စု သမ္မတ မြန်မာနိုင်ငံတော်삐다웅주 땀마다 먄마 나잉안더버마어)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호 변경은 군사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많은 미얀마 민주화 운동 세력과 일부 서방 국가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들은 여전히 '버마'라는 명칭을 고수하고 있으며, 이는 군사 정부에 대한 반대의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다. 미국,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은 한동안 '버마'를 공식 명칭으로 사용했으나, 미얀마의 민주화 이행 과정과 아웅산 수치 정부의 유연한 입장 표명 이후 '미얀마' 사용이 점차 확대되었다. 아웅산 수찌는 2016년 국가고문으로 재직 당시 "헌법에 어느 한쪽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외국인들은 두 이름 중 어느 것을 사용해도 좋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유엔, 아세안(ASEAN), 일본, 중국, 인도 등 다수 국가와 국제기구는 '미얀마'를 공식 국호로 사용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도 1991년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미얀마'를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언론 및 시민 단체에서는 민주화 운동 세력에 대한 지지의 의미로 '버마'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미얀마어 내부에서도 '므란마'는 주로 문어체나 공식적인 상황에서 사용되며, 구어체에서는 '바마'(ဗမာ바마버마어)라는 명칭이 더 흔히 사용된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면전'(緬甸)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3. 역사
미얀마 지역의 역사는 선사 시대 인류의 거주에서 시작되어 다양한 민족의 흥망성쇠와 왕조들의 교체를 거쳐 현대에 이르고 있다. 지리적으로 인도와 중국 사이에 위치하여 양 문명의 영향을 받았으며, 동남아시아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영국의 식민 통치를 겪었고, 독립 이후에는 장기간의 군부 독재와 민족 갈등, 민주화 운동 등 복잡한 현대사를 경험하고 있다.
3.1. 선사 시대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현재의 미얀마 지역에는 약 75만 년 전부터 호모 에렉투스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약 7만 5천 년 전을 기점으로 호모 에렉투스의 흔적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의 최초 증거는 약 2만 5천 년 전의 것으로, 미얀마 중부에서 발견된 석기 도구들을 통해 확인된다.
신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기원전 10,000년에서 6,000년 사이에는 식물 재배와 동물 사육, 그리고 마제석기 사용의 증거가 나타난다. 이는 빠다린 동굴(Padah-Lin Caves)에서 발견된 동굴 벽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1500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이 지역 사람들은 구리를 청동으로 제련하고, 쌀을 재배하며 돼지와 가금류를 사육했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이른 시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시대의 유물과 인골은 사가잉 관구의 모니와군에서 발견되었다. 철기 시대는 기원전 500년경에 시작되었으며, 현재의 만달레이 남쪽 지역에서 철기 제작 관련 정착지들이 나타났다. 또한 기원전 500년에서 서기 200년 사이에는 쌀을 재배하는 큰 마을과 작은 도시들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멀리 중국과도 교역했다는 증거가 있다. 이 시기 미얀마의 철기 문화는 장례 풍습 등에서 인도 및 태국의 영향을 받기도 했는데, 이는 교역을 통한 문화 교류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3.2. 초기 도시 국가
기원전 2세기경 미얀마 중부 지역에 최초의 도시 국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 국가는 현재의 윈난성 지역에서 남하한, 현존하는 기록상 미얀마 최초의 거주민인 티베트-버마어족 계열의 쀼족에 의해 건설되었다. 쀼족의 문화는 인도와의 교역을 통해 불교를 비롯한 문화, 건축, 정치 개념 등을 수입하며 큰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이후 미얀마 문화와 정치 조직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9세기경에는 미얀마 전역에 여러 도시 국가들이 나타났다. 중부 건조 지대에는 쀼족 국가들이, 남부 해안 지대에는 몬족 국가들이, 그리고 서부 해안 지대에는 아라칸족 국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균형은 750년대부터 830년대 사이에 쀼족이 남조의 반복적인 공격을 받으면서 깨지게 되었다. 9세기 중후반에는 버마족이 바간 지역에 작은 정착지를 건설했다. 바간은 10세기 후반까지 여러 경쟁 도시 국가 중 하나였으나, 점차 그 세력과 규모를 확장해 나갔다.
3.3. 버간 왕국

바간은 주변 국가들을 점차 흡수하며 성장하여 1050년대에서 1060년대에 이르러 아노여타왕이 이라와디강 유역과 그 주변 지역을 최초로 통일한 버간 왕국을 건국하였다. 12세기와 13세기에 버간 제국과 크메르 제국은 동남아시아 대륙부의 양대 강국이었다. 버마어와 버마 문화는 점차 이라와디강 상류 계곡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12세기 후반에는 쀼어, 몬어, 팔리어의 영향력을 넘어섰다. 상좌부 불교가 점차 마을 단위로 확산되기 시작했지만, 밀교, 대승 불교, 힌두교, 그리고 토착 민간 신앙 역시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버간의 통치자들과 부유층은 수도인 바간 지역에만 10,000개가 넘는 불교 사원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13세기 후반, 반복된 몽골의 침입으로 4세기 동안 지속된 왕국은 1287년에 멸망하였다.

버간 왕국의 멸망 이후 250년간 정치적 분열기가 이어져 16세기까지 지속되었다. 4세기 전의 버마족과 마찬가지로, 몽골의 침입과 함께 이주해 온 샨족은 미얀마에 정착하였다. 여러 경쟁적인 샨족 국가들이 이라와디 계곡을 둘러싼 북서부에서 동부 지역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라와디 계곡 또한 14세기 후반까지 여러 소규모 국가들로 분열되어 있었으나, 이후 아바 왕국과 한타와디 왕국이라는 두 개의 강력한 세력이 등장하였다. 서부에서는 정치적으로 분열되었던 아라칸 지역이 주변 강대국들의 영향력 다툼 속에 놓여 있다가, 1437년 므락우 왕국이 아라칸 해안 지역을 최초로 통일하였다. 므락우 왕국은 여러 시기에 걸쳐 벵골 술탄국의 보호국이 되기도 하였다.
14세기와 15세기에 아바 왕국은 통일 전쟁을 벌였으나 잃어버린 제국을 완전히 재건하지는 못했다. 아바 왕국의 공세를 막아낸 몬족의 한타와디 왕국은 황금기를 맞이하였고, 아라칸은 이후 350년간 독자적인 세력으로 발전하였다. 반면, 계속된 전쟁으로 아바 왕국은 크게 약화되었고 1481년부터 점차 해체되기 시작했다. 1527년, 샨족 연맹이 아바를 정복하고 1555년까지 상부 미얀마를 통치하였다.
버간 제국과 마찬가지로 아바, 한타와디, 샨족 국가들은 모두 다민족 국가였다. 전쟁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동기화는 계속되었다. 이 시기는 미얀마 문화의 황금기로 간주된다. 미얀마 문학은 "더욱 자신감 있고, 대중적이며, 양식적으로 다양해졌고", 제2세대 미얀마 법전과 최초의 범미얀마 연대기가 등장했다. 한타와디 군주들은 종교 개혁을 도입했고, 이는 나중에 나라 전체로 확산되었다.
3.4. 따웅우 왕조와 꼰바웅 왕조



정치적 통일은 16세기 중반, 과거 아바 왕국의 속국이었던 따웅우 왕조의 노력으로 다시 이루어졌다. 따웅우의 젊고 야심찬 왕 따빈슈웨티는 따웅우-한타와디 전쟁에서 강력한 한타와디를 격파했다. 그의 후계자 바인나웅은 샨족 국가, 란나, 마니푸르, 몽마오, 아유타야 왕국, 란쌍, 남부 아라칸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대륙의 광대한 지역을 정복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이었던 따웅우는 1581년 바인나웅이 사망한 직후부터 빠르게 해체되기 시작하여 1599년에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아유타야는 테나세림과 란나를 장악했고, 포르투갈 용병들은 탄린(시리암)에 포르투갈 통치를 확립했다.
왕조는 세력을 재규합하여 1613년에 포르투갈을, 1614년에 시암을 격파했다. 이를 통해 하부 미얀마, 상부 미얀마, 샨족 국가, 란나, 상부 테나세림을 포함하는 더 작고 관리하기 용이한 왕국을 복원했다. 복원된 따웅우 왕조의 왕들은 19세기까지 그 기본적 특징이 지속된 법적, 정치적 틀을 만들었다. 왕실은 이라와디 계곡 전체에서 세습 추장직을 임명된 총독으로 완전히 대체하고 샨족 추장들의 세습권을 크게 축소했다. 무역 및 세속 행정 개혁은 80년 이상 번영하는 경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1720년대부터 왕국은 상부 미얀마에 대한 메이테이족의 반복적인 습격과 란나에서의 성가신 반란으로 시달렸다. 1740년, 하부 미얀마의 몬족이 복원 한타와디 왕국을 세웠다. 한타와디 군대는 1752년 아바를 약탈하여 266년간 지속된 따웅우 왕조를 종식시켰다.

아바 함락 이후, 꼰바웅-한타와디 전쟁에서 알라웅파야가 이끄는 저항 세력이 복원 한타와디 왕국을 격파했고, 1759년까지 그는 미얀마와 마니푸르 전역을 재통일하고 한타와디에 무기를 제공했던 프랑스와 영국 세력을 몰아냈다. 1770년까지 알라웅파야의 후계자들은 라오스 대부분을 정복하고, 아유타야 왕국에 대항한 미얀마-시암 전쟁과 청나라에 대항한 청-미얀마 전쟁에서 승리했다.
미얀마가 중국의 위협에 몰두하는 동안, 아유타야는 1770년까지 영토를 회복하고 1776년까지 란나를 점령했다. 미얀마와 시암은 1855년까지 전쟁을 벌였으나, 모든 전쟁은 교착 상태로 끝나 테나세림(미얀마령)과 란나(아유타야령)를 교환하는 데 그쳤다. 동쪽으로 강력한 중국과 부활한 아유타야에 직면한 보다우파야왕은 서쪽으로 눈을 돌려 아라칸(1785년), 마니푸르(1814년), 아삼(1817년)을 차지했다. 이는 미얀마 역사상 두 번째로 큰 제국이었지만, 영국령 인도와의 국경이 오랫동안 불분명한 제국이기도 했다.
1826년, 미얀마는 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에서 아라칸, 마니푸르, 아삼, 테나세림을 영국에 빼앗겼다. 1852년, 영국은 제2차 영국-미얀마 전쟁에서 하부 미얀마를 쉽게 점령했다. 민돈 민왕은 왕국을 근대화하려고 노력했고 1875년에는 카렌니족 국가를 할양함으로써 간신히 합병을 피했다. 그러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통합에 놀란 영국은 1885년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에서 나머지 국토를 병합했다.
꼰바웅 왕들은 복원된 따웅우 왕조의 행정 개혁을 확대하여 전례 없는 수준의 내부 통제와 외부 확장을 달성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버마어와 버마 문화가 이라와디 계곡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미얀마 문학과 연극의 발전과 성장은 계속되었으며, 당시로서는 매우 높은 성인 남성 문해율(모든 남성의 절반과 여성의 5%)이 이를 뒷받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의 범위와 속도는 고르지 못했고 궁극적으로 영국 식민주의의 진격을 막기에는 불충분했다.
3.5. 영국 식민 통치 시기


19세기, 미얀마 통치자들은 아삼, 마니푸르, 아라칸 등 서부 지역에서 전통적인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이 지역에 대한 이권을 주장하며 압박해왔다. 이후 60여 년간 외교, 습격, 조약, 타협 등이 반복되었고, 이는 집합적으로 영국-미얀마 전쟁으로 알려져 있으며, 결국 영국이 미얀마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만달레이 함락과 함께 미얀마 전역이 영국 통치하에 들어가 1886년 1월 1일 공식적으로 합병되었다.
식민 통치 기간 동안 많은 인도인들이 군인, 공무원, 건설 노동자, 상인으로 미얀마에 들어왔고, 앵글로-버마인 공동체와 함께 미얀마의 상업 및 시민 생활을 지배했다. 양곤(당시 랑군)은 영국령 버마의 수도가 되었고, 콜카타와 싱가포르를 잇는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미얀마인들의 불만은 매우 컸으며, 이는 1930년대까지 주기적으로 랑군을 마비시키는 폭력적인 폭동으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불만 중 일부는 미얀마 문화와 전통에 대한 영국인들의 무례함에서 비롯되었다. 승려(비구)들은 독립 운동의 선봉장이 되었다. 활동가 승려였던 우 위사라는 166일간의 단식 투쟁 끝에 감옥에서 사망했다.
1937년 4월 1일, 버마는 영국의 독립적인 식민지가 되었고, 바 모가 버마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바 모는 버마 자치에 대한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에 영국, 그리고 그에 따라 버마가 참여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입법 의회에서 사임했고 선동죄로 체포되었다. 1940년, 일본이 공식적으로 전쟁에 참전하기 전에 아웅 산은 일본에서 버마 독립군을 결성했다.
주요 전장이었던 버마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의 침공으로 황폐화되었다. 일본군이 전쟁에 참전한 지 몇 달 만에 랑군으로 진격했고 영국 행정부는 붕괴했다. 1942년 8월, 바 모를 수장으로 하는 버마 행정부가 일본에 의해 수립되었다. 오드 윈게이트가 이끄는 영국의 친디트 부대는 일본군 후방 깊숙이 작전하도록 훈련된 장거리 침투 부대로 편성되었다. 유사한 미군 부대인 메릴의 약탈자들도 1943년 친디트를 따라 버마 정글로 들어갔다.
1944년 말부터 연합군은 일련의 공세를 시작하여 1945년 7월 일본의 통치를 종식시켰다. 전투는 치열했고 버마 대부분이 전투로 황폐화되었다. 일본은 버마에서 약 15만 명의 병력을 잃었고 1,7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많은 버마인들이 처음에는 버마 독립군의 일원으로 일본을 위해 싸웠지만, 대부분 소수 민족 출신의 많은 버마인들은 영국령 버마군에 복무했다. 버마 국민군과 아라칸 국민군은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과 함께 싸웠으나 1945년에 연합군 측으로 돌아섰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17만 명에서 25만 명의 버마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아웅 산은 소수 민족 지도자들과 팡롱 협정을 협상하여 통일된 국가로서 미얀마의 독립을 보장받았다. 아웅 잔 와이, 뻬킨, 보 흐무 아웅, 마웅 기 경, 세인 먀 마웅, 묘마 우 탄 쩌 등은 1947년 버마족 지도자 아웅 산 장군 및 기타 소수 민족 지도자들과 역사적인 팡롱 회의를 협상한 인물들이다. 1947년 아웅 산은 과도 정부인 미얀마 행정위원회 부의장이 되었다. 그러나 1947년 7월, 정치적 경쟁자들에 의해 아웅 산과 여러 각료들이 암살당했다.
3.6. 독립과 초기 민주주의
1948년 1월 4일, 1947년 버마 독립법에 따라 미얀마는 독립 공화국이 되었다. 새로운 나라의 이름은 버마 연방으로 정해졌고, 사오 슈웨 타익이 초대 대통령, 우 누가 초대 총리가 되었다. 대부분의 다른 영국 식민지 및 해외 영토와 달리, 버마는 영연방에 가입하지 않았다. 양원제 의회가 구성되었고, 여기에는 하원과 상원이 포함되었다. 다당제 선거는 1951년~1952년, 1956년, 1960년에 치러졌다.
오늘날 미얀마가 포함하는 지리적 영역은 하부 버마와 상부 버마로 구성된 버마 본토와 영국에 의해 별도로 관리되었던 변경 지역을 결합한 팡롱 협정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961년, 미얀마 연방의 유엔 상임대표이자 전 총리 비서였던 우 딴은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어 10년간 재임했다.
비버마족 소수 민족들이 자치나 연방제를 요구하고 중앙의 민간 정부가 약화되자, 군 지도부는 1962년 쿠데타를 일으켰다. 1947년 헌법에 명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군사 정부들은 '연방제'라는 용어 사용을 반민족적, 반통일적, 분열 조장적으로 해석했다.
3.7. 군부 통치 시기

1962년 3월 2일, 네 윈 장군이 이끄는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버마를 장악했고, 이후 정부는 군부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통제하에 놓였다. 1962년부터 1974년까지 미얀마는 네 윈 장군이 이끄는 혁명위원회에 의해 통치되었다. 사회의 거의 모든 측면(기업, 언론, 생산)이 버마식 사회주의 하에 국유화되거나 정부 통제하에 놓였는데, 이는 소련식 국유화와 중앙 계획을 결합한 것이었다.
1974년 미얀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새 헌법이 채택되었다. 1988년까지 미얀마는 일당제 국가로 통치되었으며, 네 윈 장군과 다른 군 장교들은 사임하고 버마 사회주의 계획당(BSPP)을 통해 통치했다. 이 기간 동안 미얀마는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네 윈 시대에는 군사 통치에 반대하는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고, 이는 거의 항상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 1962년 7월 7일, 정부는 랑군 대학교 시위를 해산시키면서 15명의 학생을 살해했다. 1974년, 군부는 우 딴의 장례식에서 반정부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1975년, 1976년, 1977년의 학생 시위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1988년, 정부의 경제 실정과 정치적 억압에 대한 불만이 8888 항쟁으로 알려진 전국적인 민주화 시위로 이어졌다. 보안군은 수천 명의 시위대를 살해했고, 소 마웅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를 구성했다. 1989년, SLORC는 광범위한 시위 이후 계엄령을 선포했다. 군사 정부는 1989년 5월 31일 인민 의회 선거 계획을 확정했다. SLORC는 1989년 6월 18일 표현법 개정을 통해 국가의 공식 영어 명칭을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에서 "미얀마 연방"으로 변경했다.
1990년 5월, 정부는 거의 30년 만에 처음으로 자유 다당제 선거를 실시했고, 아웅산 수치의 정당인 민족민주연맹(NLD)이 총 492석 중 392석(즉, 의석의 80%)을 얻어 승리했다. 그러나 군부는 권력 이양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국가를 통치했는데, 처음에는 SLORC로, 1997년부터는 2011년 3월 해체될 때까지 국가평화발전평의회(SPDC)로 통치했다. 딴쉐 장군은 1992년 소 마웅 장군으로부터 의장직(사실상 미얀마 최고 통치자 자리)을 물려받아 2011년까지 유지했다.
1997년 6월 23일, 미얀마는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AN)에 가입했다. 2006년 3월 27일, 2005년 11월 수도를 양곤에서 핀마나 인근 지역으로 이전한 군부는 새 수도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왕들의 도시"를 의미하는 네피도로 명명했다.

2007년 8월, 연료 가격 인상은 승려들이 주도한 사프란 혁명으로 이어졌고, 정부는 이를 가혹하게 다루었다. 정부는 2007년 9월 26일 시위대를 탄압했으며, 쉐다곤 파고다에 바리케이드가 쳐지고 승려들이 살해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미얀마 군부 내 불화설도 있었지만 확인된 바는 없었다. 비무장 시위대에 대한 군사적 탄압은 국제 사회의 사프란 혁명에 대한 반응의 일환으로 광범위하게 비난받았고, 미얀마 정부에 대한 경제 제재 강화를 초래했다.
2008년 5월, 사이클론 나르기스가 인구 밀집 지역인 이라와디 삼각주의 쌀농사 지역에 광범위한 피해를 입혔다. 이는 미얀마 역사상 최악의 자연재해로, 약 20만 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고, 피해액은 100.00 억 USD에 달했으며, 최대 100만 명이 집을 잃었다. 이 재난 이후 중요한 시기에 미얀마의 고립주의 정부는 유엔의 복구 노력을 방해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인도주의적 지원이 요청되었지만, 외국 군대나 정보기관의 국내 주둔에 대한 우려로 인해 의약품, 식량, 기타 물품을 전달하는 미군 항공기의 입국이 지연되었다.
2009년 8월 초, 미얀마 북부 샨 주에서 분쟁이 발생했다. 몇 주 동안 군부 군대는 한족, 와족, 징포족을 포함한 소수 민족과 싸웠다. 분쟁 첫날인 8월 8일부터 12일까지 최대 1만 명의 미얀마 민간인이 인접한 중국 윈난성으로 피신했다.
3.8. 민주화 이행기 (2011년 ~ 2021년)

군부 지원 정부는 1993년 "규율이 꽃피는 민주주의를 향한 로드맵"을 공포했지만, 이 과정은 여러 차례 지연되는 듯 보이다가 2008년 정부가 새로운 국가 헌법 초안을 발표하고 (결함이 있는) 국민투표를 조직하여 이를 채택했다. 새 헌법은 대통령을 임명할 권한을 가진 국회 선거를 규정하는 한편, 사실상 모든 수준에서 군부의 통제를 보장했다.
2010년 총선은 20년 만에 처음으로 치러졌으며, 민족민주연맹(NLD)은 이를 보이콧했다. 군부 지원을 받는 연방단결발전당은 80%의 득표율을 얻었다며 승리를 선언했지만, 부정 선거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후 명목상의 민간 정부가 구성되었고, 퇴역 장군인 테인 세인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후 일련의 정치적, 경제적 자유화 조치, 즉 개혁이 이루어졌다. 2011년 말까지 이러한 조치에는 민주화 운동 지도자 아웅산 수치의 가택연금 해제,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200명 이상의 정치범에 대한 일반 사면, 노동조합과 파업을 허용하는 새로운 노동법, 언론 검열 완화, 통화 관행 규제 등이 포함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은 2011년 12월 미얀마를 방문했는데, 이는 50여 년 만에 미국 국무장관의 첫 방문이었다. 그녀는 테인 세인 대통령과 야당 지도자 아웅산 수치를 모두 만났다.
아웅산 수치의 민족민주연맹(NLD)은 정부가 이전에 이를 금지했던 법을 폐지함으로써 2012년 보궐선거에 참여했다. 2012년 4월 보궐선거에서 NLD는 45개 의석 중 43석을 차지했다. 2012년 보궐선거는 또한 국제 대표단이 미얀마의 투표 과정을 감시할 수 있도록 허용된 첫 번째 선거이기도 했다.
미얀마의 국제적 위상 개선은 2014년 아세안 의장국 지위 입찰에 대한 아세안의 승인으로 나타났다.
3.8.1. 2015년 총선
2015년 11월 8일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는 1990년 총선(무효화됨) 이후 미얀마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치러진 선거였다. 선거 결과 NLD는 국회 양원에서 절대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여 NLD 후보가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했지만, NLD 지도자인 아웅산 수치는 헌법상 대통령직에서 배제되었다.
새 국회는 2016년 2월 1일에 소집되었고, 2016년 3월 15일 틴 초가 1962년 군부 쿠데타 이후 최초의 비군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16년 4월 6일, 아웅산 수치는 국가고문이라는 새로 만들어진 직책을 맡았는데, 이는 총리와 유사한 역할이었다.
3.9. 2021년 쿠데타와 내전

2020년 미얀마 총선에서 사실상의 집권당인 민족민주연맹(NLD), 즉 국가고문 아웅산 수치의 정당은 여러 소규모 정당들, 특히 군부와 연계된 연방단결발전당(USDP)과 경쟁했다. 수치의 NLD는 11월 8일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군부의 대리인으로 여겨지는 USDP는 2015년보다 더 심각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여, 선출된 476석 중 단 33석만을 차지했다.
선거 결과가 나오기 시작하자 USDP는 이를 거부하며 군부를 참관인으로 한 재선거를 촉구했다. 90개가 넘는 다른 소규모 정당들이 선거에 참여했으며, 그중 15개 이상이 부정행위를 주장했다. 그러나 선거 참관인들은 중대한 부정행위는 없었다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관리위원회가 NLD의 압도적인 승리를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USDP와 미얀마 군부는 지속적으로 부정행위를 주장했다.
2021년 1월, 새 국회가 개원하기 직전에 NLD는 수치가 다가오는 정부에서도 국가고문직을 유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21년 2월 1일 이른 아침, 국회가 소집될 예정이었던 날, 미얀마 군부인 따머도는 수치와 다른 여당 의원들을 구금했다. 군부는 군 총사령관 민 아웅 흘라잉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1년간의 비상사태를 선포했으며, 국경을 폐쇄하고 전국적으로 여행과 전자 통신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군부는 기존 선거관리위원회를 새 위원회로 교체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군부 언론 매체는 약 1년 안에 새 선거가 치러질 것이라고 밝혔지만, 군부는 이에 대한 공식적인 약속은 피했다. 군부는 NLD 국회의원들을 수도 네피도에서 추방했다. 2021년 3월 15일까지 군 지도부는 양곤의 더 많은 지역으로 계엄령을 확대했고, 보안군은 단 하루 만에 38명의 폭력 사태로 사망했다.
쿠데타 둘째 날까지 수천 명의 시위대가 양곤 거리에서 행진했고, 전국적으로 다른 시위가 발생하여 상업과 교통이 대부분 중단되었다. 군부의 시위대 체포와 살해에도 불구하고, 쿠데타 첫 몇 주 동안 공무원, 교사, 학생, 노동자, 승려, 종교 지도자 등 심지어 평소 불만을 품고 있던 소수 민족까지 포함하여 대중의 참여가 증가했다.
쿠데타는 즉시 유엔 사무총장과 민주 국가 지도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미국은 군부와 그 지도자들에 대한 제재를 위협했으며, 여기에는 미국 내 자산 10억 달러 "동결"이 포함되었다.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러시아, 베트남, 태국, 필리핀, 중국은 군부 쿠데타 비판을 자제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은 아웅산 수치와 다른 구금된 지도자들의 석방을 요구했으며, 이는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도 공유하는 입장이었다.
국제 개발 및 원조 파트너들(기업, 비정부 기구, 정부)은 미얀마와의 파트너십 중단을 암시했다. 은행은 문을 닫았고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포함한 소셜 미디어 통신 플랫폼은 따머도 게시물을 삭제했다. 시위대는 해외 미얀마 대사관에 나타났다. 이후 국민통합정부는 2021년 5월 5일 군부 공격으로부터 지지자들을 보호하고 연방군 창설을 위한 첫 단계로 인민방위군(PDF)이라는 무장 조직 결성을 선언했으며, 이 날짜는 종종 전면적인 내전의 시작으로 인용된다. 내전은 2024년 현재 진행 중이다.
4. 지리
미얀마의 총 면적은 67.85 만 km2이다. 북위 9도에서 29도, 동경 92도에서 102도 사이에 위치한다. 미얀마는 북서쪽으로 방글라데시의 치타공주와 인도의 미조람주, 마니푸르주, 나갈랜드주, 아루나찰프라데시주와 국경을 접한다. 북쪽과 북동쪽 국경은 티베트 자치구와 윈난성과 접하며, 중국-미얀마 국경의 총 길이는 2185 km이다. 남동쪽으로는 라오스와 태국과 국경을 접한다. 미얀마는 남서쪽과 남쪽으로 벵골만과 안다만해를 따라 1930 km의 연속적인 해안선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전체 국경 둘레의 4분의 1을 형성한다.
북쪽으로는 헝돤산맥이 중국과의 국경을 이룬다. 카친주에 위치한 카카보라지산은 해발 5881 m로 미얀마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다. 아라칸산맥, 바고산맥, 샨 고원, 테나세림산맥 등 많은 산맥이 미얀마 내에 존재하며, 이들 모두 히말라야산맥에서 남북으로 뻗어 있다. 이 산맥들은 미얀마의 세 개의 강줄기, 즉 이라와디강, 살윈강(땅륀강), 시탕강을 나눈다. 미얀마에서 가장 긴 강인 이라와디강은 거의 2170 km에 달하며 마르타반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산맥 사이의 계곡에는 비옥한 평야가 존재한다. 미얀마 인구의 대다수는 아라칸산맥과 샨 고원 사이에 위치한 이라와디 계곡에 거주한다.
4.1. 행정 구역
미얀마는 7개의 주(ပြည်နယ်삐내버마어)와 7개의 구(တိုင်းဒေသကြီး따잉데따지버마어)(과거에는 지방(division)으로 불림)로 나뉜다. 구는 주로 버마족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주는 본질적으로 특정 소수 민족이 거주하는 구이다. 행정 구역은 다시 군(district)으로 세분화되고, 군은 다시 면(township), 동(ward), 마을(village)로 세분화된다.
2001년 12월 31일 기준 미얀마 각 구와 주의 군, 면, 시/읍, 동, 마을 그룹, 마을 수는 다음과 같다.
번호 | 주/구 | 군 | 면 | 시/읍 | 동 | 마을 그룹 | 마을 |
---|---|---|---|---|---|---|---|
1 | 카친주 | 4 | 18 | 20 | 116 | 606 | 2630 |
2 | 카야주 | 2 | 7 | 7 | 29 | 79 | 624 |
3 | 카인주 | 3 | 7 | 10 | 46 | 376 | 2092 |
4 | 친주 | 2 | 9 | 9 | 29 | 475 | 1355 |
5 | 사가잉구 | 8 | 37 | 37 | 171 | 1769 | 6095 |
6 | 타닌타리구 | 3 | 10 | 10 | 63 | 265 | 1255 |
7 | 바고구 | 4 | 28 | 33 | 246 | 1424 | 6498 |
8 | 마궤구 | 5 | 25 | 26 | 160 | 1543 | 4774 |
9 | 만달레이구 | 7 | 31 | 29 | 259 | 1611 | 5472 |
10 | 몬주 | 2 | 10 | 11 | 69 | 381 | 1199 |
11 | 라카인주 | 4 | 17 | 17 | 120 | 1041 | 3871 |
12 | 양곤구 | 4 | 45 | 20 | 685 | 634 | 2119 |
13 | 샨주 | 11 | 54 | 54 | 336 | 1626 | 15513 |
14 | 에야와디구 | 6 | 26 | 29 | 219 | 1912 | 11651 |
총계 | 63 | 324 | 312 | 2548 | 13742 | 65148 |
4.2. 기후
미얀마의 대부분 지역은 북회귀선과 적도 사이에 위치하며, 아시아의 몬순 지역에 속한다. 해안 지역은 연간 5000 mm 이상의 비가 내린다. 삼각주 지역의 연간 강수량은 약 2500 mm이며, 미얀마 중부 건조 지대의 연평균 강수량은 1000 mm 미만이다. 미얀마 북부 지역이 가장 시원하며 평균 기온은 21 °C이다. 해안 및 삼각주 지역의 평균 최고 기온은 32 °C이다.
과거 및 현재 분석된 데이터와 기후 변화로 인한 미래 예측은 미얀마의 모든 경제, 생산, 사회, 환경 부문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어려움에 대처하고 기후 변화 완화에 기여하기 위해 미얀마는 재생 에너지 사용을 확대하고 탄소 배출 수준을 낮추는 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미얀마의 전환과 발전을 돕는 단체로는 UN 환경 계획, 미얀마 기후 변화 동맹, 그리고 미얀마 천연자원환경보전부가 있으며, 이 부처는 미얀마 국가 기후 변화 정책 최종안을 작성하여 검토를 위해 미얀마 정부 여러 부처에 제출했다.
2015년 4월, 세계은행과 미얀마가 약 600만 명의 전기 및 기타 기본 서비스 접근성을 개선하고, 개선된 보건 서비스를 통해 300만 명의 임산부와 어린이에게 혜택을 줄 것으로 예상되는 포괄적 파트너십 프레임워크에 들어갈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확보된 자금과 적절한 계획을 통해 미얀마는 기후 변화의 영향에 더 잘 대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새로운 농업 방법을 가르치고, 자연재해에 강한 자재로 기반 시설을 재건하며, 다양한 부문을 온실가스 배출 감소로 전환하는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4.3. 생물 다양성

미얀마는 16,000종 이상의 식물, 314종의 포유류, 1131종의 조류, 293종의 파충류, 139종의 양서류 및 열대 및 아열대 식생, 계절에 따라 침수되는 습지, 해안선 및 조간대 시스템, 고산 생태계를 포함한 64개의 육상 생태계를 보유한 생물 다양성이 풍부한 국가이다. 미얀마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온전한 자연 생태계 일부를 보유하고 있지만, 남아있는 생태계는 토지 이용 집약화와 과도한 착취로 위협받고 있다. IUCN 생태계 적색 목록 범주 및 기준에 따르면, 미얀마 국토의 3분의 1 이상이 지난 2~3세기 동안 인위적인 생태계로 전환되었으며, 생태계의 거의 절반이 위협받고 있다. 일부 생태계에 대한 정보 부족에도 불구하고, 육상 생물 다양성을 보호하는 포괄적인 보호 지역 네트워크를 개발할 잠재력이 크다.
미얀마는 전 세계 환경 성과 지수(EPI)에서 계속해서 낮은 성과를 보이고 있으며, 2016년에는 180개국 중 153위로 남아시아 지역에서 최악의 국가 중 하나였다. 미얀마가 가장 낮은 성과를 보이는 환경 분야(즉, 가장 높은 순위)는 대기 질(174위), 환경 문제의 건강 영향(143위), 생물 다양성 및 서식지(142위)이다. 미얀마는 어업의 환경 영향(21위)에서 가장 좋은 성과를 보이지만(즉, 가장 낮은 순위), 어족 자원은 감소하고 있다. 몇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미얀마는 질소 순환의 우수한 관리 덕분에 농업 산업의 환경 영향에서 64위를 차지하며 매우 좋은 점수(93.73%)를 받았다. 미얀마는 기후 변화에 매우 취약한 국가 중 하나이며, 이는 국가에 여러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외교 정책적 과제를 제기한다.
미얀마의 느린 경제 성장은 많은 환경과 생태계를 보존하는 데 기여했다. 하부 미얀마의 울창한 열대림과 귀중한 티크나무를 포함한 숲이 국토의 49% 이상을 덮고 있으며, 여기에는 아카시아, 대나무, 용뇌향, 목련 지역이 포함된다. 코코넛, 빈랑야자, 고무나무가 도입되었다. 북부 고지대에는 참나무, 소나무, 다양한 진달래가 많은 땅을 덮고 있다.
1995년 새로운 임업법이 발효된 이후 심각한 벌목으로 인해 산림 면적과 야생 동물 서식지가 심각하게 감소했다. 해안을 따라 있는 땅은 모든 종류의 열대 과일을 지탱하며 한때는 넓은 맹그로브 지역이 있었지만, 보호 맹그로브의 대부분이 사라졌다. 미얀마 중부(건조 지대)의 많은 지역에서는 식생이 드물고 발육이 부진하다.
전형적인 정글 동물, 특히 호랑이는 미얀마에서 드물게 발견된다. 상부 미얀마에는 코뿔소, 야생 물소, 구름표범, 멧돼지, 사슴, 영양, 코끼리가 있으며, 코끼리는 특히 목재 산업에서 작업용 동물로 길들여지거나 사육된다. 작은 포유류도 긴팔원숭과 원숭이에서 날여우에 이르기까지 수적으로 많다. 새의 풍부함은 800종 이상으로 주목할 만하며, 장미목도리앵무, 구관조, 공작, 적색야계, 베짜는새, 까마귀, 왜가리, 외양간올빼미 등이 포함된다. 파충류 종에는 악어, 도마뱀붙이, 코브라, 버마비단뱀, 거북이 있다. 수백 종의 민물고기가 광범위하게 분포하며 풍부하고 매우 중요한 식량원이다.
5. 정치
미얀마는 2008년 헌법에 따른 공화국 체제를 기반으로 하지만,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국가행정평의회가 국가 권력을 장악하여 사실상의 군사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쿠데타 이전에는 민족민주연맹(NLD)과 연방단결발전당(USDP)이 주요 정당이었으며, 의회는 양원제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쿠데타로 인해 기존 헌정 질서가 중단되고 시민들의 정치 참여는 극도로 제한된 상황이다.
5.1. 정치 문화
주요 정당은 민족민주연맹과 연방단결발전당이다.
미얀마의 군부 초안 헌법은 2008년 5월 국민투표에서 승인되었다. 2,200만 유권자 중 92.4%가 투표했으며 공식 투표율은 99%였지만, 많은 국제 참관단과 민족민주연맹은 광범위한 부정 선거, 투표함 바꿔치기, 유권자 협박 등의 보고와 함께 이 결과를 의심스럽게 여긴다.
2010년 총선은 군부 지원을 받는 연방단결발전당의 승리로 끝났다. 다양한 외국 참관단은 선거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선거에 대한 비판 중 하나는 정부가 승인한 정당만 참여할 수 있었고 대중적인 민족민주연맹은 불법으로 선언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선거 직후 정부는 민주화 운동가이자 민족민주연맹 지도자인 아웅산 수치의 가택 연금을 해제했으며, 그녀가 전국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된 것은 군부가 더 많은 개방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시험대로 여겨졌다. 미얀마의 정치 문화는 오랜 군부 독재와 민주화 운동 사이의 깊은 갈등으로 특징지어진다. 독립 이후 짧은 기간의 민주주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군부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을 통제해 왔으며, 이는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과 국민의 정치 참여 제한을 고착화시켰다. '버마식 사회주의'와 같은 이념은 국가 통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1988년 8888 항쟁과 2007년 사프란 혁명 등 대규모 민주화 운동은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었으나, 군부의 강경 진압으로 좌절되었다. 2011년 민정 이양 이후 잠시 민주화의 길이 열리는 듯했으나, 2021년 쿠데타로 다시 군부 통치가 강화되면서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시민 사회의 역할은 군부의 억압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해 왔으며, 특히 민주화 운동과 인권 옹호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집회 및 결사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어 시민들의 정치 참여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현재 미얀마는 군부의 통제 강화와 이에 저항하는 시민 불복종 운동 및 무장 투쟁이 혼재하는 복잡한 정치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
5.2. 정부


미얀마는 법적으로는 2008년 헌법에 따라 단일제 독립 공화국으로 운영되지만, 2021년 2월 아웅산 수치가 이끌던 민간 정부는 따머도(미얀마군)에 의해 전복되었다. 2021년 2월, 미얀마군은 1년간의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제1부통령이었던 민쉐가 대통령 대행이 되어 민 아웅 흘라잉 국방군 총사령관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민 아웅 흘라잉은 국가행정평의회(SAC) 의장직을 맡았고, 이후 총리직도 겸하게 되었다. 현재 미얀마 대통령은 법적 국가원수의 역할을 하며, SAC 의장은 사실상의 정부수반 역할을 한다.
내각은 SAC에 의해 임명되며, 각 부처의 장관들로 구성된다. 쿠데타 이전에는 대통령이 행정부의 수반이었으며, 미얀마의 국가고문직이 총리와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며 정부 운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쿠데타로 인해 기존 헌정 질서가 중단되었으며, SAC가 행정, 입법, 사법 전반에 걸쳐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하고 있다. 과도 정부 형태의 국가 운영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민주적 절차에 따른 정부 구성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5.3. 입법

미얀마의 입법부는 미얀마 연방의회로, 민족대표원(상원)과 인민대표원(하원)의 양원제로 구성된다. 2008년 헌법에 따르면, 양원 모두 의석의 25%는 군사령관이 지명하는 군인 의원에게 할당되며, 나머지 75%의 의석만이 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독립 이후 세 번째 헌법인 미얀마 헌법은 군부 통치자들에 의해 초안이 작성되어 2008년 9월에 공포되었다.
연방의회라고 불리는 입법부는 양원제이며 두 개의 원으로 구성된다. 224석의 상원인 민족대표원과 440석의 하원인 국민대표원이다. 상원은 직접 선출되는 168명의 의원과 미얀마군에 의해 임명되는 56명의 의원으로 구성된다. 하원은 직접 선출되는 330명의 의원과 군부에 의해 임명되는 110명의 의원으로 구성된다.
2015년 총선에서 NLD가 압승하여 문민정부가 출범했으나, 2020년 총선 결과에 불복한 군부가 2021년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시키고 입법권을 장악했다. 현재는 미얀마 국가행정평의회(SAC)가 사실상의 입법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민주적인 선거 제도와 의회 기능은 정지된 상태이다. 쿠데타 이후 NLD를 비롯한 다수 정당의 활동이 탄압받고 있으며, 많은 정치인들이 구금되거나 해외로 망명한 상황이다.
5.4. 사법
미얀마의 사법 체계는 대법원을 최고 법원으로 하는 계층적 법원 조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사법부의 독립성은 심각하게 훼손되었으며, 사실상 미얀마 국가행정평의회(SAC)의 통제하에 놓여 있다. 주요 법률은 영국 식민지 시기의 보통법과 미얀마의 전통 관습법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군부 통치 기간 동안 제정된 여러 법령들이 사회 통제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쿠데타 이전에도 법치주의는 확립되지 못한 상태였으며, 특히 소수 민족 지역이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사법적 정의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쿠데타 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화되어, 민주화 운동가 및 반군부 인사들에 대한 자의적인 체포와 불공정한 재판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국제 사회는 미얀마의 사법 시스템과 법치주의 현황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으며, 인권 침해에 대한 책임 규명과 사법 정의 회복을 요구하고 있다.
6. 군사

미얀마의 군대인 따머도는 육군, 해군, 공군으로 구성되며, 총 병력은 약 40만 명에서 50만 명 사이로 추정된다. 미얀마군은 국가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으며, 1962년 쿠데타 이후 오랜 기간 직접 통치하거나 배후에서 정치에 개입해왔다. 2008년 헌법에 따라 국회 의석의 25%를 군부에 할당하고 주요 장관직을 군 출신이 맡는 등 제도적으로 군의 정치적 영향력을 보장하고 있다.
국방 정책은 주로 국내 안보와 소수 민족 반군과의 분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주요 군사 장비는 러시아, 중국, 인도 등으로부터 도입하고 있다. 과거에는 북한과의 군사 협력 의혹도 제기된 바 있다. 최근에는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연구용 핵 원자로를 건설 중인 것으로 알려져 국제적인 우려를 낳기도 했다.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따머도는 다시 국가 권력을 장악했으며, 이에 반발하는 인민방위군(PDF) 및 소수 민족 무장 단체들과의 내전이 격화되고 있다. 군부는 시위대에 대한 무력 진압과 인권 침해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으며, 이는 미얀마의 정치적 불안정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6.1. 소수 민족 무장 단체
미얀마는 130개가 넘는 다양한 소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 다수의 민족은 자치권 확대와 민족적 권익 보호를 위해 무장 단체를 조직하여 중앙 정부와 오랫동안 갈등을 겪어왔다. 이러한 소수 민족 무장 단체(Ethnic Armed Organizations, EAOs)는 주로 국경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일부는 상당한 규모의 병력과 통제 지역을 확보하고 있다.
주요 소수 민족 무장 단체로는 카친 독립군(KIA), 와 연합군(UWSA), 카렌 민족 연합(KNU)의 군사 조직인 카렌 민족 해방군(KNLA), 샨주군-남부(SSA-S) 등이 있다. 이들 단체와 정부군(따머도) 간의 관계는 시기별로 긴장과 협상이 반복되어 왔다. 정부는 과거 일부 단체들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으나, 근본적인 정치적 해결에는 이르지 못하고 산발적인 교전이 지속되었다.
2015년에는 전국적 휴전 협정(Nationwide Ceasefire Agreement, NCA)이 추진되었으나, 모든 주요 단체가 참여하지는 않았다.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많은 소수 민족 무장 단체들이 쿠데타에 반대하며 인민방위군(PDF)과 연대하여 군부에 맞서 싸우고 있으며, 이는 미얀마 내전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평화 협상 노력은 쿠데타로 인해 사실상 중단된 상태이며, 전국적으로 무력 충돌이 격화되고 있다.
7. 대외 관계
미얀마의 대외 관계는 역사적으로 군부 통치와 인권 문제로 인해 서방 국가들과 긴장 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2010년대 민주화 이행기에 일시적으로 개선되기도 했다. 그러나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다시 국제적 고립과 제재에 직면하고 있다. 주요 외교 정책은 주변국과의 관계 안정 및 아세안(ASEAN)을 통한 지역 협력에 중점을 두지만, 내부 정치 상황이 대외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7.1. 주변국과의 관계
미얀마는 중국, 태국, 인도, 방글라데시, 라오스 등 5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이들 국가와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 중국: 역사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 중 하나이다. 경제적으로는 최대 교역국이자 투자국이며, 정치적으로는 군부 정권 시기부터 미얀마를 지지해왔다. 일대일로 구상의 일환으로 차우퓨항 개발 등 인프라 투자를 진행하고 있으나, 미얀마 내 반중 감정과 소수 민족 무장 단체 문제 등으로 인해 양국 관계에 미묘한 긴장감도 존재한다. 2021년 쿠데타 이후에도 중국은 미얀마 군부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을 자제하며 영향력을 유지하려 하고 있다.
- 태국: 오랜 국경을 맞대고 있어 경제, 사회, 안보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수많은 미얀마 노동자들이 태국에서 일하고 있으며, 양국 간 교역도 활발하다. 그러나 국경 지역의 소수 민족 문제, 마약 밀매, 난민 문제 등으로 인해 갈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태국은 아세안 회원국으로서 미얀마 문제에 대한 중재 역할을 시도하기도 한다.
- 인도: '룩 이스트' 정책을 통해 미얀마와의 관계 강화를 추진해왔다. 경제 협력과 함께 국경 지역 안보 문제, 중국의 영향력 견제 등 전략적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다. 도로, 항만 등 인프라 개발에도 참여하고 있다.
- 방글라데시: 로힝야족 문제로 인해 양국 관계가 매우 긴장되어 있다. 2017년 미얀마 군부의 로힝야족 탄압으로 수십만 명의 난민이 방글라데시로 피신하면서 국제적인 인도주의 위기를 초래했고, 방글라데시는 미얀마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을 촉구하고 있다.
- 라오스: 메콩강 유역 국가로서 경제 및 인프라 협력 가능성이 있으나, 다른 주변국에 비해 관계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7.2. 서방 국가와의 관계
미얀마와 서방 국가들의 관계는 인권 문제와 민주주의 부재로 인해 오랫동안 경색되어 왔다. 미국과 유럽 연합(EU) 등은 군부 정권에 대해 경제 제재, 무기 금수 조치 등을 시행하며 압박해왔다.
2011년 민정 이양 이후 정치 개혁이 진행되면서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했다. 2012년 미국은 미얀마에 대한 제재를 일부 완화하고 외교 관계를 복원했으며, 아웅산 수치가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EU 역시 제재를 해제하고 미얀마의 민주화 노력을 지원했다.
그러나 2017년 로힝야족 사태로 인해 인권 문제가 다시 부각되면서 서방 국가들은 미얀마 정부를 비판하고 일부 제재를 재개했다.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에는 미국과 EU를 비롯한 서방 국가들이 쿠데타를 강력히 규탄하고 군부 지도자 및 관련 기업에 대한 전면적인 제재를 부활시켰으며, 미얀마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협력을 중단한 상태이다. 이로 인해 미얀마는 다시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고 있다.
7.3. 국제 기구 활동
미얀마는 유엔(UN)과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AN) 등 주요 국제 기구의 회원국으로 활동하고 있다.
- 유엔(UN): 미얀마는 1948년 독립 직후 유엔에 가입했다. 그러나 오랜 군부 독재와 인권 문제로 인해 유엔 총회와 유엔 인권이사회 등으로부터 지속적인 비판과 결의안 채택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히 로힝야족 문제, 소수 민족 탄압, 민주화 운동가 구금 등에 대해 유엔은 특별 보고관을 파견하고 조사를 진행하는 등 깊은 우려를 표명해왔다. 2021년 쿠데타 이후 유엔은 군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민주주의 회복과 인권 존중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 아세안(ASEAN): 미얀마는 1997년 아세안에 가입했다. 아세안은 '내정 불간섭'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미얀마의 정치 상황에 대해 '건설적 관여' 정책을 펴왔다. 2014년에는 미얀마가 아세안 의장국을 수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1년 쿠데타 이후 아세안은 미얀마 군부의 폭력 자제, 대화 시작 등 5개 합의 사항 이행을 촉구했으나, 군부가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자 아세안 정상회의 등 주요 회의에 미얀마 군부 대표의 참석을 배제하는 등 전례 없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아세안은 미얀마 사태 해결을 위한 중재 노력을 지속하고 있지만, 회원국 간 입장 차이로 인해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외에도 미얀마는 비동맹 운동, 동아시아 정상회의(EAS), BIMSTEC(벵골만 다자 기술 경제 협력체) 등의 회원국으로 활동하고 있다.
8. 경제

미얀마 경제는 2019년 명목 GDP 760.90 억 USD, 2017년 추정 구매력 평가(PPP) 기준 GDP 3276.29 억 USD를 기록하며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외국인은 법적으로 재산을 소유할 수는 없지만 임대는 가능하다. 2014년 12월, 미얀마는 최초의 증권 거래소인 양곤 증권거래소를 설립했다.
그러나 미얀마 경제의 비공식 부문 비중은 세계적으로 매우 높으며, 이는 부패, 밀수, 불법 무역 활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수십 년간의 내전과 불안정은 미얀마의 현재 빈곤 수준과 경제 발전 부진에 기여했다. 미얀마는 적절한 사회 기반 시설이 부족하다. 상품은 주로 태국 국경(대부분의 불법 마약이 수출되는 곳)과 이라와디강을 통해 이동한다. 미얀마의 아편 생산량은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세계 2위이며, 세계 아편의 약 25%를 생산하여 골든 트라이앵글의 일부를 형성한다. 2015년 이후 미얀마의 아편 양귀비 재배는 매년 감소했지만, 2022년 유엔 마약범죄사무소(UNODC) 미얀마 아편 조사 최신 데이터에 따르면 재배 면적은 총 4.01 만 ha로 33% 증가했으며 생산량 잠재력은 790톤으로 88% 증가했다. UNODC는 코로나19와 2021년 2월 1일 군부 쿠데타로 인한 경제 위기가 지속될 경우 미얀마의 아편 생산이 다시 증가하여 아시아 대부분 지역의 공중 보건 및 안보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동시에 골든 트라이앵글, 특히 미얀마 샨 주는 세계 최대의 메스암페타민 생산 지역으로 여겨진다. 골든 트라이앵글 안팎에서 메스암페타민 제조 활동이 강화되고 해당 지역의 다른 지역에서 해체된 생산 시설 수가 감소하는 징후가 증가함에 따라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의 메스암페타민 제조는 이제 메콩강 하류 지역으로 통합되었음을 시사한다. 유엔 마약범죄사무소에 따르면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지난 10년 동안 메스암페타민 압수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2021년에는 총 171톤 이상, 10억 개 이상의 메스암페타민 정제를 기록했으며 이는 세계 어느 지역보다 많은 양이다. 2020년 4월과 5월, 미얀마 당국은 샨 주에서 아시아 최대 규모의 마약 작전을 보고했으며, 이는 1억 9,300만 개의 메스암페타민 정제, 수백 킬로그램의 크리스탈 메스암페타민 및 일부 헤로인, 162,000리터 이상 및 35.5톤의 마약 전구체, 정교한 생산 장비 및 여러 준비 및 보관 시설로 추정된다.
2010년대 초 중국과 인도는 경제적 이익을 위해 미얀마 정부와의 관계 강화를 시도했다. 미국, 캐나다, 유럽 연합 등 많은 서방 국가들은 역사적으로 미얀마에 투자 및 무역 제재를 가했다. 미국과 유럽 연합은 2012년에 대부분의 제재를 완화했다. 2012년 5월부터 2013년 2월까지 미국은 "미얀마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적인 개혁에 대응하여" 미얀마에 대한 경제 제재를 해제하기 시작했다. 외국인 투자는 주로 중국, 싱가포르, 필리핀, 한국, 인도, 태국에서 이루어진다. 군부는 석유 생산 및 소비재에서 운송 및 관광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일부 주요 산업 기업에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미얀마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국제 제재가 강화되고 외국인 투자가 급감했으며, 내전으로 인해 경제 활동이 위축되었다. 생필품 가격 급등, 통화 가치 하락, 실업률 증가 등 국민들의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8.1. 경제사

영국 제국 통치 하에서 미얀마 국민들은 사회 계층의 최하위에 있었고, 유럽인들이 최상층, 인도인, 중국인, 기독교화된 소수 민족들이 중간층, 불교도 버마인들이 최하층을 이루었다. 강제로 세계 경제에 통합되면서 미얀마 경제는 채취 산업과 환금 작물 농업에 참여하며 성장했다. 그러나 부의 대부분은 유럽인들의 손에 집중되었다. 미얀마는 주로 유럽 시장에 쌀을 수출하는 세계 최대의 쌀 수출국이 되었지만, 인도와 같은 다른 식민지들은 대량 기아에 시달렸다. 자유 시장 원칙을 따르던 영국은 미얀마를 대규모 이민에 개방했고, 1920년대 양곤은 세계에서 가장 큰 이민 항구로서 뉴욕시를 능가했다. 역사학자 탄 민우는 "이는 총인구 1,300만 명 중 일부였으며, 오늘날 영국이 매년 200만 명을 받아들이는 것과 맞먹는 규모였다"고 말한다. 그때까지 양곤, 아키야브, 바세인, 몰메인 등 미얀마 최대 도시 대부분에서 인도 이민자들이 인구의 다수를 형성했다. 영국 통치하의 버마인들은 무력감을 느꼈고, "우월감과 공포가 결합된 인종차별주의"로 반응했다.
예낭야웅의 토착 산업이었던 원유 생산은 영국에 의해 인수되어 버마 오일 독점 하에 놓였다. 영국령 버마는 1853년부터 원유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유럽 기업들은 세계 티크의 75%를 생산했다. 그러나 부는 주로 유럽인들의 손에 집중되었다. 1930년대에는 국제 쌀 가격이 하락하면서 농업 생산이 급격히 감소했고 수십 년 동안 회복되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의 버마 침공 당시 영국은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그들은 텅스텐(모치), 주석, 납, 은을 개발했던 주요 정부 건물, 유정, 광산을 파괴하여 일본군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했다. 미얀마는 연합군에 의해 광범위하게 폭격당했다.
독립 후 미얀마는 주요 기반 시설이 완전히 파괴된 폐허 상태였다. 인도를 잃으면서 버마는 중요성을 잃고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었다. 1948년 의회 정부가 구성된 후, 우 누 총리는 국유화 정책에 착수했고 국가는 버마의 모든 토지의 소유자로 선언되었다. 정부는 부분적으로 경제에 돈을 투입하여 8개년 계획을 시행하려 했지만, 이는 인플레이션을 야기했다. 1962년 쿠데타 이후에는 농업을 제외한 모든 산업을 국유화하는 버마식 사회주의라는 경제 계획이 뒤따랐다. 경제는 더 느린 속도로 계속 성장했지만, 국가는 서구 지향적인 개발 모델을 피했고, 1980년대에는 서구 경제와 통합된 싱가포르와 같은 자본주의 강국에 뒤처지게 되었다. 미얀마는 1987년 부채 탕감을 받기 위해 최빈국 지위를 신청했다.
8.2. 주요 산업
미얀마 경제는 농업, 광업, 관광업, 제조업 등 다양한 산업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전반적으로 발전 수준이 낮고 현대화가 더딘 편이다.
8.2.1. 농업

미얀마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산업은 농업이며, 특히 쌀이 가장 중요한 작물이다. 국토의 약 60%가 경작지이며, 쌀은 전체 식량 곡물 생산량의 97%를 차지한다. 국제미작연구소(IRRI)와의 협력을 통해 1966년부터 1997년까지 52개의 현대적인 벼 품종이 보급되어 쌀 생산량 증가에 기여했다. 1987년 1,400만 톤이었던 생산량은 1996년 1,900만 톤으로 증가했으며, 2008년에는 약 5,000만 톤에 달했다. 그러나 관개 시설 부족, 낙후된 농업 기술, 불안정한 시장 상황 등으로 인해 생산성은 여전히 낮은 편이며, 농민들의 소득 수준도 낮다. 쌀 외에도 콩, 땅콩, 참깨, 사탕수수, 면화 등 다양한 작물이 재배된다.
8.2.2. 광업 및 에너지
미얀마는 루비, 사파이어, 진주, 비취(제이드)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석 산지이다. 특히 루비는 전 세계 공급량의 90%를 차지하며, 그 품질과 색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보석 채굴 과정에서의 열악한 노동 조건과 수익이 군부로 흘러 들어간다는 비판으로 인해 일부 국제 보석 회사들은 미얀마산 보석 수입을 거부하고 있다.
석유와 천연가스 또한 미얀마의 중요한 에너지 자원이다. 해상 가스전 개발을 통해 상당량의 천연가스를 생산하여 주로 태국과 중국에 수출하고 있다. 그러나 에너지 인프라가 낙후되어 국내 전력 공급은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이 외에도 주석, 텅스텐, 아연, 구리 등 다양한 광물 자원이 매장되어 있으나, 개발은 미흡한 수준이다. 최근에는 희토류 생산국으로도 주목받고 있으며, 전 세계 공급량의 약 10%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카친주 등 채굴 지역의 분쟁으로 인해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다.
8.2.3. 관광업


미얀마는 풍부한 불교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관광 산업 발전 잠재력이 높은 국가이다. 양곤, 만달레이와 같은 대도시, 바간과 므락우의 고대 도시 유적, 인레호수, 응아빨리 해변 등이 주요 관광 명소로 꼽힌다.
과거 군부 통치 시절에는 국제적 고립으로 인해 관광 산업이 위축되었으나, 2011년 민정 이양 이후 외국인 관광객 수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정부는 관광객 유치를 위해 비자 면제 확대 등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로힝야족 문제와 정치적 불안정은 관광 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특히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에는 관광객 수가 급감하였다. 관광 수입의 상당 부분이 정부로 귀속되는 구조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현재는 안전 문제와 국제 사회의 여행 자제 권고 등으로 인해 관광 산업이 다시 침체된 상황이다.
8.3. 무역 및 투자
미얀마의 주요 수출품은 천연가스, 농산물(쌀, 콩류), 의류, 보석, 목재 등이며, 주요 수입품은 석유제품, 기계류, 운송 장비, 공산품 등이다. 주요 교역 상대국은 중국, 태국, 싱가포르, 인도,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이 중심을 이룬다.
과거 군부 정권 시절에는 서방 국가들의 경제 제재로 인해 무역과 외국인 직접 투자(FDI) 유치가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2011년 민정 이양 이후 경제 개방 정책이 추진되면서 외국인 투자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특히 중국은 일대일로 정책의 일환으로 미얀마의 인프라 개발에 적극적으로 투자해왔다. 일본 또한 미얀마의 경제 개발을 지원하며 투자를 확대했다. 정부는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해 경제특구(SEZ)를 지정하여 운영하고 있으나, 정치적 불안정, 열악한 인프라, 복잡한 규제 등이 투자 환경의 제약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국제 사회의 제재가 강화되면서 미얀마의 무역과 투자 환경은 다시 악화되었다. 많은 외국 기업들이 사업을 축소하거나 철수했으며, 신규 투자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미얀마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으며, 국가 발전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
8.4. 교통
미얀마의 교통 인프라는 전반적으로 매우 열악하며, 경제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도로, 철도, 항공, 수운 등 모든 교통 부문에서 시설 노후화와 부족 문제가 심각하다.
- 도로: 도로망은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포장 상태가 불량하고 산악 지형으로 인해 이동에 어려움이 많다. 양곤-만달레이 고속도로와 같은 일부 간선 도로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도로가 비포장 상태이다. 우기에는 도로 유실로 인해 교통이 마비되는 경우도 잦다.
- 철도: 철도 시스템은 영국 식민지 시대에 건설된 것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매우 노후화되었다. 열차 속도가 느리고 안전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주요 노선은 양곤과 만달레이를 연결하는 남북 축이며, 동서 연결망은 미비하다. 최근 일부 구간에 대한 현대화 사업이 추진되고 있으나, 전반적인 개선에는 많은 시간과 투자가 필요하다.
- 항공: 양곤 국제공항, 만달레이 국제공항, 네피도 국제공항 등 국제공항이 있으나, 국내선 항공망은 취약한 편이다. 국영 항공사인 미얀마 국제항공 외에 몇몇 민간 항공사가 국내선 및 일부 국제선 노선을 운영하고 있다.
- 수운: 이라와디강을 비롯한 여러 강들이 내륙 수운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도로와 철도가 발달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수운이 주요 교통수단으로 이용된다. 그러나 수운 시설 역시 현대화가 미흡한 실정이다.
교통 인프라 부족은 물류 비용 증가, 지역 간 교류 제약, 경제 발전 저해 등 다양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정부는 인프라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재정 부족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8.5. 경제 문제
미얀마 경제는 풍부한 천연자원과 성장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 빈부 격차: 소수의 군부 관련 세력과 사업가들이 경제적 부를 독점하고 있는 반면, 대다수 국민은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소득 불균형이 매우 심각하며, 이는 사회적 불안정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이다.
- 부정부패: 군부 통치 기간 동안 만연해 온 부정부패는 경제 발전을 저해하는 심각한 요인이다. 공공 부문의 투명성이 낮고, 뇌물 수수와 정경유착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외국인 투자를 위축시키고 공정한 경쟁을 저해한다.
- 마약 문제: 미얀마는 골든 트라이앵글의 일부로, 세계적인 아편 및 메스암페타민 생산지이다. 마약 생산과 밀매는 일부 지역 경제를 지탱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국민 건강을 위협하고 사회 불안을 야기하며 국제적인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있다. 정부의 마약 퇴치 노력은 소수 민족 무장 단체의 개입 등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 인프라 부족: 도로, 철도, 항만, 전력 등 기본적인 사회 기반 시설이 매우 열악하다. 이는 물류 비용을 증가시키고 산업 발전을 저해하며, 국민 생활에도 큰 불편을 초래한다. 특히 전력 부족은 제조업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 정치적 불안정: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지속되는 정치적 혼란과 내전은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국제 사회의 제재, 외국인 투자 급감, 국내 경제 활동 위축 등으로 인해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정치적 안정, 부정부패 척결, 인프라 투자 확대, 산업 다각화, 인적 자원 개발 등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지만, 현재의 정치 상황에서는 단기간 내에 개선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9. 사회
미얀마 사회는 다양한 민족, 언어, 종교가 공존하는 다문화적 특징을 지니고 있으나, 오랜 군부 통치와 민족 갈등으로 인해 사회 통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구 구성, 교육, 보건 등 사회 전반의 지표는 주변 동남아 국가들에 비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9.1. 인구

미얀마의 총인구는 2014년 인구 조사 기준으로 약 5,141만 명이었으나, 당시 조사에서 제외된 지역 인구를 포함하면 실제 인구는 이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2023년 현재 추정 인구는 약 5,500만 명이다. 인구 성장률은 점차 둔화되는 추세이며, 출산율은 2021년 기준 여성 1인당 2.15명으로 주변 동남아 국가들에 비해 낮은 편이다. 이는 결혼 연령 상승, 불법 낙태, 미혼 여성 비율 증가 등 복합적인 요인에 기인한다. 평균 수명은 약 67세(2020년 기준)이다.
도시화는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나, 여전히 농촌 인구 비중이 높다. 최대 도시는 과거 수도였던 양곤으로 약 700만 명 이상의 인구가 거주하며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수도인 네피도는 계획도시로 건설되었으며, 그 외 주요 도시로는 만달레이, 바고, 파테인 등이 있다. 태국 등 인접 국가로 일자리를 찾아 이주한 미얀마 노동자 수도 상당수에 이른다.
9.2. 민족
미얀마는 매우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이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135개의 민족 집단을 인정하고 있으나, 실제 분류와 정확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주요 민족 집단은 다음과 같다.
- 버마족: 전체 인구의 약 68%를 차지하는 최대 민족으로, 주로 이라와디강 유역의 중부 평야 지대에 거주하며 미얀마의 정치, 경제, 문화를 주도하고 있다.
- 샨족: 약 9%를 차지하며, 주로 동부의 샨주에 거주한다. 태국, 라오스와 문화적으로 가깝다.
- 카렌족: 약 7%를 차지하며, 주로 동부와 남동부 국경 지역에 거주한다. 기독교 신자가 많다.
- 라카인족: 약 3.5%를 차지하며, 서부의 라카인주에 주로 거주한다.
- 몬족: 약 2%를 차지하며, 남부 해안 지역에 거주하며 고대 몬 왕국의 후예이다.
- 카친족, 친족, 카야족 등: 주로 산악 지대에 거주하며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 기타: 중국계, 인도계, 로힝야족 등이 있다. 로힝야족은 정부로부터 시민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심각한 탄압을 받고 있어 국제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다수 민족인 버마족 중심의 정책과 소수 민족에 대한 차별은 오랜 기간 동안 민족 갈등과 내전의 주요 원인이 되어왔다. 소수 민족들은 자치권 확대와 문화적 정체성 보존을 요구하며 중앙 정부와 대립하고 있으며, 이는 미얀마 사회 통합의 큰 과제로 남아 있다.
9.3. 언어
미얀마의 공용어는 버마어로, 전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버마족의 모국어이다. 버마어는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하며, 둥근 모양의 독특한 버마 문자로 표기된다. 버마 문자는 고대 몬 문자에서 발전하였으며, 11세기부터 사용된 기록이 남아있다.
버마어 외에도 미얀마에는 수많은 소수 민족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민족 집단이 135개에 달하는 만큼, 사용되는 언어 또한 매우 다양하다. 주요 소수 민족 언어로는 샨어(타이카다이어족), 카렌어(중국티베트어족), 몬어(오스트로아시아어족), 카친어(중국티베트어족), 친어(중국티베트어족) 등이 있다. 이들 언어는 각 민족 공동체 내에서 일상생활과 문화 전승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학교 교육은 주로 버마어로 이루어지지만, 일부 소수 민족 지역에서는 해당 민족 언어로 교육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소수 민족 언어에 대한 지원은 부족한 실정이며, 언어적 다양성 보존에 대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식민지 시기의 영향으로 영어도 일부 교육받은 계층과 도시 지역에서 통용되지만, 일상적으로 널리 사용되지는 않는다. 팔리어는 상좌부 불교의 경전 언어로 종교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9.4. 종교

미얀마는 종교가 국민 생활에 깊숙이 관여하는 국가로, 다양한 신앙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특정 종교에 대한 우대와 소수 종교에 대한 차별 문제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 상좌부 불교: 미얀마 인구의 약 87.9%(2014년 기준)가 믿는 가장 지배적인 종교이다. 미얀마의 역사,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수많은 사원과 탑(파고다)이 전국에 산재해 있다. 남성들은 일생에 한 번 이상 단기 출가하여 승려 생활을 경험하는 전통(신쀼)이 있으며, 승려는 사회적으로 높은 존경을 받는다. 불교는 미얀마인들의 일상생활과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 기독교: 전체 인구의 약 6.2%가 믿으며, 주로 카친족, 친족, 카렌족 등 소수 민족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있다. 영국 식민 통치 시기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전파되었으며, 침례교가 가장 큰 교파이다.
- 이슬람교: 전체 인구의 약 4.3%가 믿으며, 주로 인도계 이민자 후손들과 로힝야족이 해당된다. 로힝야족 무슬림은 정부로부터 심각한 박해와 차별을 받고 있어 국제적인 인권 문제로 비화되었다.
- 힌두교: 전체 인구의 약 0.5%가 믿으며, 주로 인도계 미얀마인들이 신봉한다.
- 전통 민간 신앙 (낫 신앙): 불교와 함께 미얀마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토착 신앙이다. '낫(Nat)'이라고 불리는 다양한 정령들을 숭배하며, 일상생활의 길흉화복과 관련된 의례를 행한다. 많은 불교 사원 내에도 낫을 모시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을 정도로 불교와 융합된 모습을 보인다.
- 기타 종교 및 무종교: 약 0.3%를 차지한다.
미얀마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불교가 우대받고 소수 종교, 특히 이슬람교와 기독교에 대한 차별과 탄압이 존재한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종교 갈등은 민족 갈등과 맞물려 사회 불안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9.5. 교육

유네스코 통계 연구소에 따르면, 2000년 기준 미얀마의 공식 문해율은 90%였다. 역사적으로 미얀마는 높은 문해율을 자랑해왔다. 미얀마의 교육 시스템은 정부 기관인 교육부에서 운영한다. 교육 시스템은 거의 한 세기 동안 영국과 기독교의 영향으로 영국의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다. 거의 모든 학교가 정부 운영이지만, 21세기 초에는 민간 자금으로 운영되는 영어 학교가 증가했다. 초등학교 과정까지 의무 교육이며, 대략 9세까지이다. 반면 국제적인 의무 교육 연령은 15세 또는 16세이다.
미얀마에는 101개의 대학교, 12개의 연구소, 9개의 학위 수여 단과대학, 24개의 단과대학이 있으며, 총 146개의 고등 교육 기관이 있다. 기술 훈련 학교 10개, 간호 훈련 학교 23개, 스포츠 아카데미 1개, 조산 학교 20개가 있다. WASC와 칼리지 보드에서 인정한 국제 학교는 4개가 있으며, 양곤에 있는 양곤 국제학교, 미얀마 국제학교, 양곤 인터내셔널 스쿨, 미얀마 국제학교가 그것이다. 미얀마는 2024년 세계 혁신 지수에서 125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오랜 군부 통치와 정치적 불안정, 경제난으로 인해 교육의 질은 전반적으로 낮은 수준이며, 지역 간 교육 격차도 크다. 특히 소수 민족 지역의 교육 환경은 매우 열악하다. 2021년 쿠데타 이후 많은 교사와 학생들이 시민 불복종 운동에 참여하면서 교육 시스템이 마비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9.6. 보건
미얀마의 전반적인 보건 의료 수준은 매우 열악하다. 정부는 국내 총생산(GDP)의 0.5%에서 3%만을 보건 의료에 지출하며, 이는 세계적으로 가장 낮은 수준에 속한다. 명목상으로는 의료가 무료이지만, 실제로는 공공 병원과 진료소에서도 환자가 의약품과 치료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공공 병원은 기본적인 시설과 장비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2010년 미얀마의 10만 명당 산모 사망률은 240명이었다. 이는 2008년의 219.3명, 1990년의 662명과 비교된다. 1,000명당 5세 미만 영아 사망률은 73명이며, 5세 미만 영아 사망률 중 신생아 사망률은 47%이다. 국경 없는 의사회에 따르면, 2007년 미얀마 에이즈 환자 25,000명이 사망했으며, 이들 대부분은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제와 적절한 치료를 통해 예방할 수 있었던 죽음이었다.
미얀마 보건부에서 주요 질병으로 인정한 HIV/AIDS는 성 노동자와 정맥 주사 약물 사용자들 사이에서 가장 유행하고 있다. 2005년 미얀마의 성인 HIV 유병률은 1.3%(20만~57만 명)로 추정되었으며(UNAIDS), HIV 유행에 대한 조기 진전 지표는 일관성이 없다. 그러나 미얀마 국립 에이즈 프로그램은 미얀마 성 노동자의 32%와 정맥 주사 약물 사용자의 43%가 HIV에 감염된 것으로 파악했다.
9.7. 범죄 및 치안
미얀마는 높은 범죄율과 열악한 치안 상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12년 기준 미얀마의 살인율은 인구 10만 명당 15.2명으로 총 8,044건의 살인이 발생했는데, 이는 주로 공동체 폭력과 무력 분쟁의 영향을 받은 수치이다. 국제투명성기구의 2012년 부패인식지수에서 미얀마는 총 176개국 중 171위를 차지할 정도로 부패가 만연한 국가 중 하나이다.
미얀마는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세계 2위의 아편 생산국이며, 전 세계 아편의 약 25%를 생산하고 골든 트라이앵글의 일부를 형성한다. 아편 산업은 식민지 시대에는 독점이었으나 이후 미얀마 군부의 부패한 관리들과 반군에 의해 불법적으로 운영되며 주로 헤로인 제조의 기반이 되었다. 또한 미얀마는 세계 최대의 메스암페타민 생산국으로, 태국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야바는 미얀마, 특히 태국, 라오스,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골든 트라이앵글과 북동부 샨 주에서 생산된다. 미얀마에서 생산된 야바는 일반적으로 라오스를 통해 태국으로 밀매된 후 태국 북동부 이산 지역을 통해 운송된다.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치안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정치적 혼란과 경제난이 심화되면서 절도, 강도 등 생계형 범죄가 증가하고 있으며, 군부와 반군부 세력 간의 무력 충돌로 인해 민간인 피해도 계속되고 있다. 마약 생산 및 밀매 문제 또한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이는 미얀마 사회의 안정과 발전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10. 인권과 내부 갈등
미얀마는 오랜 기간 심각한 인권 문제와 끊이지 않는 내부 갈등으로 국제 사회의 깊은 우려를 받아왔다. 1962년부터 2010년까지 지속된 군부 독재 정권은 세계에서 가장 억압적이고 인권을 유린하는 정권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2011년 민정 이양 이후 잠시 개선의 조짐을 보이기도 했으나, 로힝야족 문제와 2021년 군부 쿠데타로 인해 인권 상황은 다시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유엔과 휴먼 라이츠 워치, 국제앰네스티 등 주요 국제 인권 단체들은 미얀마의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인권 침해를 지속적으로 보고하고 비판해왔다. 유엔 총회는 여러 차례 미얀마 군부에 인권 존중과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2011년 프리덤 하우스 보고서는 "군부는 거의 모든 기본권을 억압했으며, 처벌받지 않고 인권 유린을 자행했다"고 지적했다. 2013년 당시에도 약 100여 명의 정치범이 수감되어 있었으며, 특정 소수 민족에 대한 강제 동화 정책도 자행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국제형사재판소(ICC)는 로힝야족에 대한 군부의 반인도적 범죄 혐의를 조사 중이다.
내부 갈등은 주로 다수 민족인 버마족과 여러 소수 민족 간의 갈등, 그리고 민주화 세력과 군부 간의 정치적 대립에서 비롯된다. 카렌족, 카친족, 샨족 등 다수 소수 민족들은 자치권 확대와 문화적 정체성 보존을 요구하며 오랫동안 무장 투쟁을 벌여왔다. 2021년 쿠데타 이후에는 이러한 소수 민족 무장 단체들이 인민방위군(PDF)과 연대하여 군부에 맞서 싸우면서 내전이 격화되고 있다. 이로 인해 수많은 난민이 발생하고 있으며, 민간인 피해도 극심한 상황이다.
10.1. 로힝야족 문제

로힝야족은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에 주로 거주하는 이슬람계 소수 민족으로, 미얀마 정부로부터 심각하고 지속적인 인권 탄압과 박해를 받아왔다. 미얀마 정부는 1982년 제정된 시민권법을 통해 로힝야족을 자국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방글라데시에서 온 불법 이민자로 간주하며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로힝야족은 사실상 무국적자 상태에 놓여 있으며,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로힝야족은 수 세기 동안 아라칸 지역(현재의 라카인주)에 거주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미얀마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로힝야족은 이동의 자유, 토지 소유, 교육, 의료 서비스 접근 등에서 극심한 차별을 받고 있으며, 두 자녀 이상 출산을 금지하는 강제적인 가족계획 정책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012년 라카인주에서 발생한 대규모 종족 간 폭력 사태 이후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2016년과 2017년 미얀마 군부의 대대적인 소탕 작전 과정에서 살해, 방화, 성폭행 등 심각한 인권 유린이 자행되었으며, 이는 로힝야족 집단 학살로 규정되기도 한다. 이로 인해 수십만 명의 로힝야족이 국경을 넘어 방글라데시 등 인접 국가로 피신하여 대규모 난민 사태가 발생했다.
국제 사회는 미얀마 정부의 로힝야족 탄압을 강력히 규탄하고 있으며, 유엔을 비롯한 여러 국제기구는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미얀마 정부는 이러한 의혹을 부인하거나 축소하며 국제사회의 개입을 거부하고 있어 문제 해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로힝야족 문제는 미얀마의 가장 심각한 인권 문제이자 국제적인 난제로 남아 있다.
10.2. 소년병 문제
미얀마에서는 정부군인 따머도와 여러 소수 민족 무장 단체 양측 모두에 의해 소년병이 징집되고 있다는 보고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2012년까지만 해도 미얀마 군 내 소년병의 수가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제인권단체들의 보고에 따르면, 아이들이 강제로 징집되거나 심지어 헐값에 팔려 군에 넘겨지는 경우도 있었다.
유엔과 국제노동기구(ILO) 등 국제기구들은 미얀마 정부와 소수 민족 무장 단체 양측에 소년병 징집 중단과 석방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2012년 미얀마 정부는 유엔과 소년병 징집 및 사용을 근절하기 위한 공동 행동 계획에 서명했으며, 이후 수차례에 걸쳐 소년병들을 석방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내전이 격화되면서, 다시금 소년병 징집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분쟁 상황에서 아동들이 폭력에 노출되고 교육 기회를 박탈당하며, 강제로 무장 단체에 가담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소년병 문제는 미얀마의 심각한 인권 침해 사례 중 하나로, 아동의 권리 보호와 분쟁 종식을 위한 국제 사회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요구된다.
10.3. 강제 노동 및 인신매매
미얀마에서는 강제노동과 인신매매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지속되어 왔다. 특히 과거 군부 통치 시절에는 정부 프로젝트나 군부대 운영을 위해 민간인들이 강제 노동에 동원되는 사례가 빈번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이러한 강제 노동 실태를 비판하며 미얀마 정부에 개선을 촉구해왔다.
인신매매 또한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으며, 주로 경제적으로 취약한 여성과 아동이 대상이 된다. 이들은 더 나은 일자리를 미끼로 국경 너머 중국, 태국 등지로 팔려가 성매매나 강제 노동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미얀마 내부의 분쟁, 정치적 불안정, 빈곤, 국경 관리 부실 등이 인신매매를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정치적 혼란과 경제난이 심화되면서 강제 노동 및 인신매매 문제에 대한 우려는 더욱 커지고 있다. 특히 국경 지역의 온라인 사기 범죄 조직과 연계된 인신매매 및 강제 노동 사례가 보고되고 있으며, 이들 중 다수는 군부와 연계된 국경수비대의 통제 하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2023년 보고서에서 미얀마 내 최소 12만 명이 이러한 범죄 조직에 의해 온라인 사기 센터 등에 갇혀 있다고 지적했다.
10.4. 기타 인권 문제
미얀마는 로힝야족 문제, 소년병, 강제 노동 및 인신매매 외에도 다양한 인권 문제에 직면해 있다. 오랜 군부 독재와 정치적 불안정은 표현의 자유, 집회 및 결사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 기본적인 인권을 심각하게 제약해왔다.
- 표현의 자유: 언론과 미디어는 엄격한 검열과 통제를 받아왔다.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인이나 활동가들은 탄압의 대상이 되었으며, 자의적인 체포와 구금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2011년 민정 이양 이후 잠시 언론 자유가 확대되는 듯했으나,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다시 언론 탄압이 강화되어 많은 언론인이 체포되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인터넷 접근 또한 제한적이며, 정부 비판적인 온라인 활동은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 집회 및 결사의 자유: 평화적인 집회와 시위는 대부분 불허되거나 강제 해산되었으며, 참여자들은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노동조합 결성이나 시민단체 활동 또한 많은 제약을 받아왔다. 쿠데타 이후 시민 불복종 운동과 반군부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나, 군부는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며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 종교의 자유: 헌법상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불교가 우대받고 소수 종교, 특히 이슬람교와 기독교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존재한다. 로힝야족 무슬림에 대한 탄압은 종교적 박해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 정치범: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 인권 운동가, 정치인들이 정치적 신념을 이유로 투옥되었다. 민정 이양기에 일부 정치범이 석방되기도 했으나, 쿠데타 이후 다시 대규모로 정치범이 발생하고 있다.
- 고문 및 부당한 대우: 구금 시설에서의 고문과 비인도적인 처우 또한 심각한 문제로 지적된다.
국제 사회는 미얀마의 전반적인 인권 상황 개선을 지속적으로 촉구하고 있으나, 군부의 강경한 태도로 인해 실질적인 진전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11. 문화

미얀마는 다양한 토착 문화가 공존하며, 그중에서도 불교와 버마족의 문화가 주를 이룬다. 버마 문화는 주변 국가들의 영향을 받아 언어, 요리, 음악, 춤, 연극 등에서 그 특징이 나타난다. 예술, 특히 문학은 역사적으로 현지 상좌부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미얀마의 국민 서사시로 여겨지는 야마 잣떠는 인도의 라마야나를 각색한 것으로, 태국, 몬족, 인도의 극 형식에 큰 영향을 받았다. 불교는 낫 신앙과 함께 행해지는데, 낫 신앙은 37명의 낫으로 이루어진 신들을 달래기 위한 정교한 의식을 포함한다.
전통 마을에서는 사원이 문화생활의 중심지이다. 승려는 존경받으며 평신도들의 공양을 받는다. 신쀼라는 수계 의식은 소년에게 가장 중요한 성인식으로, 이 기간 동안 소년은 잠시 동안 승려가 된다. 불교 가정의 모든 남자아이는 스무 살 이전에 사미가 되고 스무 살 이후에 비구가 되도록 장려된다. 여자아이들은 같은 시기에 귀를 뚫는 의식(နားသ버마어)을 치른다. 미얀마 문화는 연중 지역 축제가 열리는 마을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파고다 축제이다. 많은 마을에는 수호신인 낫이 있으며, 미신과 금기가 흔하다.

영국 식민 통치는 미얀마에 서양 문화 요소를 도입했다. 미얀마의 교육 제도는 영국의 교육 제도를 모델로 한다. 식민지 건축의 영향은 양곤과 같은 주요 도시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남동부의 카렌족과 북부 및 북동부에 거주하는 카친족 및 친족과 같은 많은 소수 민족은 기독교를 믿는다. 월드 팩트북에 따르면, 버마족 인구는 68%이고 소수 민족은 32%이다. 반면, 망명한 지도자들과 단체들은 소수 민족이 40%라고 주장한다.
11.1. 전통 예술
미얀마의 전통 예술은 불교 문화와 깊은 연관을 맺으며 발전해 왔다. 주요 분야는 다음과 같다.
- 음악: 미얀마 전통 음악은 '사인 와인(Hsaing Waing)'이라 불리는 악단이 중심이 된다. 이 악단은 다양한 크기의 북(파트 와인), 징(마웅 사인), 목금(파탈라), 피리(네), 심벌즈 등으로 구성된다. 음악은 주로 종교 의식, 축제, 연극 공연에 사용되며, 독특한 선율과 리듬을 가지고 있다. 사웅가욱(Saung Gauk)이라는 하프 형태의 현악기는 미얀마를 대표하는 전통 악기이다.
- 춤: 미얀마 전통 춤은 섬세하고 우아한 손동작과 발동작이 특징이다. 주로 종교 설화나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하며,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를 착용한다. 대표적인 춤으로는 '야마 잣떠'와 같은 고전극에 등장하는 춤, 낫(정령)을 달래기 위한 춤, 궁중 춤 등이 있다.
- 연극: '잣 뿌에(Zat Pwe)'라고 불리는 전통 연극은 음악, 춤, 노래, 대사가 어우러진 종합 예술이다. 주로 불교 설화, 역사 이야기, 민담 등을 소재로 하며, 야외 무대에서 밤새도록 공연되기도 한다. 배우들의 화려한 의상과 익살스러운 연기가 특징이다. '아녜인 뿌에(Anyeint Pwe)'는 여성 무용수와 코미디언이 중심이 되는 좀 더 가볍고 대중적인 형태의 연극이다.
- 공예: 미얀마는 칠기, 목각, 금속 세공, 직물 공예 등 다양한 수공예품으로 유명하다. 특히 바간 지역의 칠기는 정교한 문양과 뛰어난 기술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 목각은 사원 건축이나 불상 제작에 많이 사용되며, 금박을 입힌 화려한 장식이 특징이다. 론지(전통 치마)와 같은 전통 직물은 아름다운 문양과 색상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전통 예술은 미얀마 국민들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나타내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계승되고 있다.
11.2. 음식
미얀마 요리는 어장(응안삐야예), 응아삐(발효 해산물), 말린 새우와 같은 생선 제품을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모힝가는 전통적인 아침 식사이며 미얀마의 국민 음식이다. 해산물은 해안 도시에서 흔한 재료인 반면, 육류와 가금류는 만달레이와 같은 내륙 도시에서 더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민물고기와 새우는 내륙 요리에 단백질의 주요 공급원으로 통합되었으며, 신선하거나 소금에 절인 통째 또는 필레, 소금에 절여 말리거나, 짠 페이스트로 만들거나, 시큼하게 발효시켜 압착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된다. 미얀마 요리에는 쌀, 밀, 쌀국수, 당면, 베르미첼리와 같은 전분부터 감자, 생강, 토마토, 카피르라임, 긴 콩, 라페 (절인 찻잎)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주요 재료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샐러드(아톡)도 포함된다.
11.3. 스포츠
미얀마의 전통 스포츠로는 맨손 격투기인 렛웨이, 발과 무릎을 주로 사용하는 구기 종목인 친론, 그리고 다양한 무기술을 포함하는 반도(Bando), 반셰이(Banshay), 뽕이따잉(Pongyi thaing) 등이 있다. 이 중 렛웨이는 미얀마의 국기(國技)로 여겨지며, 글러브 없이 맨주먹과 팔꿈치, 무릎, 머리 등을 모두 사용하는 격렬한 격투기이다. 친론은 여러 명이 원을 이루어 대나무나 등나무로 만든 공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발, 무릎, 머리 등으로 주고받는 팀 스포츠로, 협동심과 기술을 요한다.
현대 스포츠 중에서는 축구가 가장 인기가 높다. 미얀마는 1961년과 1969년에 이어 2013년 동남아시아 경기 대회를 네피도, 양곤, 만달레이, 응웨사웅 해변에서 개최하며 세 번째로 동남아시아 경기 대회를 유치한 바 있다. 미얀마 축구 국가대표팀은 과거 아시아 축구 강호로 평가받았으나, 최근에는 국제 무대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11.4. 미디어와 영화
미얀마의 미디어 환경은 오랜 기간 군부의 엄격한 통제와 검열하에 놓여 있었다. 신문, 방송, 출판 등 모든 매체는 정부의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으며, 비판적인 내용은 허용되지 않았다.
2011년 민정 이양 이후 언론 자유가 다소 확대되는 조짐을 보였다. 2012년에는 사전 검열 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민간 신문의 발행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부 비판적인 보도에 대해서는 다양한 형태의 압력이 존재했으며, 언론인들은 자기 검열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영화 산업 또한 정부의 통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다루거나 정부에 비판적인 내용은 제작 및 상영이 어려웠다. 미얀마 영화는 주로 코미디나 드라마 장르가 주를 이루었으며, 국제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버마 VJ(2009)와 같이 미얀마의 정치 상황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국제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기도 했으나, 이는 예외적인 경우였다.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미디어와 영화에 대한 통제는 다시 극도로 강화되었다. 다수의 언론사가 폐쇄되었고, 많은 언론인과 영화인들이 체포되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인터넷 접속 또한 차단되거나 제한되는 등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위축된 상황이다.
11.5. 건축

미얀마 건축은 불교의 영향을 깊이 받아 파고다(탑), 짜웅(사원), 쩨디(불탑) 등 종교 건축물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건축물들은 화려한 금박 장식, 정교한 목조각, 다층 지붕 구조 등 독특한 양식을 특징으로 한다.
- 파고다: 미얀마 전역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건축 형태로, 부처의 사리나 유물을 봉안하기 위해 세워진다. 대표적인 파고다로는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 바간의 아난다 사원, 짜익티요 파고다(골든락) 등이 있다. 쉐다곤 파고다는 전체가 금으로 덮여 있으며, 수많은 보석으로 장식되어 미얀마 불교 건축의 정수를 보여준다. 바간에는 수천 개의 고대 파고다와 사원이 남아 있어 장관을 이룬다.
- 짜웅 (사원): 승려들이 거주하며 수행하는 공간으로, 법당, 승방, 도서관 등으로 구성된다. 목조 건축이 많으며, 섬세한 조각과 장식으로 꾸며진다. 만달레이의 쉐난도 수도원은 전체가 티크나무로 만들어지고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된 대표적인 목조 사원이다.
- 식민지 시대 건축물: 영국 식민 통치 시기(19세기 말~20세기 초)에 양곤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는 유럽 양식의 관공서, 상업용 건물, 주택 등이 많이 건설되었다. 이 건물들은 빅토리아 양식, 에드워드 양식 등 다양한 서양 건축 양식과 현지 건축 요소가 결합된 독특한 모습을 보여준다. 양곤 시내에는 이러한 식민지 시대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어 도시의 역사적 경관을 이루고 있다.
전통 건축과 식민지 시대 건축물이 공존하는 미얀마의 도시들은 독특한 건축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11.6. 축제 및 공휴일
미얀마는 불교 문화와 전통 민간 신앙이 결합된 다채로운 축제가 연중 이어진다. 대부분의 축제는 불교력을 따르며, 주요 축제와 공휴일은 다음과 같다.
- 띤잔 (Thingyan): 미얀마의 새해맞이 물 축제로, 보통 4월 중순에 열린다. 태국의 송끄란 축제와 유사하게 서로에게 물을 뿌리며 더위를 식히고 묵은해의 안 좋은 기운을 씻어낸다는 의미를 가진다. 미얀마에서 가장 큰 축제 중 하나로, 전국적으로 거리에서 물총 싸움과 춤, 노래가 어우러지는 흥겨운 분위기가 연출된다.
- 까손 보름 축제 (Kason Full Moon Day): 5월경에 열리는 불교 축제로, 부처의 탄생, 깨달음, 열반을 기념한다. 신자들은 사원을 찾아 보리수나무에 물을 뿌리며 공덕을 쌓는다.
- 와소 보름 축제 (Waso Full Moon Day): 7월경에 열리며, 불교의 우안거(雨安居)가 시작되는 날이다. 승려들은 이 기간 동안 사원에 머물며 수행에 정진하고, 신자들은 승려들에게 공양을 올린다.
- 따딘쥿 축제 (Thadingyut Festival of Lights): 10월경에 열리며, 우안거가 끝나는 것을 기념하는 빛의 축제이다. 집과 사원, 거리에 등불을 밝히고 부처에 대한 존경을 표하며, 어른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풍습이 있다.
- 다자웅다잉 축제 (Tazaungdaing Festival of Lights): 11월경에 열리는 또 다른 빛의 축제로, 주로 샨주 따웅지에서 열리는 대규모 열기구 축제가 유명하다.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열기구를 하늘로 띄우며 소원을 빈다.
- 낫 축제 (Nat Pwe): 미얀마 전통 민간 신앙인 낫(정령)을 기리는 축제로, 지역별로 다양한 시기에 열린다. 무당이 낫신으로 분장하여 춤을 추고 노래하며, 사람들은 낫에게 제물을 바치고 복을 기원한다.
- 독립 기념일: 1월 4일.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을 기념하는 국경일이다.
- 연방의 날: 2월 12일. 1947년 팡롱 협정을 통해 여러 민족이 연방 국가 수립에 합의한 것을 기념한다.
- 순교자의 날: 7월 19일. 1947년 아웅 산 장군과 그의 동료들이 암살된 것을 추모하는 날이다.
이 외에도 각 지역별, 민족별로 고유한 축제와 기념일이 다양하게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