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기니비사우 공화국은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국가로, 북쪽으로는 세네갈, 남쪽과 동쪽으로는 기니와 국경을 접하며 서쪽으로는 대서양에 면해 있다. 국토 면적은 약 3.61 만 km2이며, 비자고스 제도를 포함한 여러 섬을 포함한다. 수도는 비사우이다. 과거 카부 제국 및 말리 제국의 일부였으며, 15세기부터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여 19세기에는 포르투갈령 기니로 식민지화되었다. 아밀카르 카브랄이 이끈 기니카보베르데 아프리카 독립당(PAIGC)의 오랜 무장 투쟁 끝에 1973년 독립을 선언하고 1974년 국제적 승인을 받았다. 독립 이후 기니비사우는 정치적 불안정, 빈번한 쿠데타, 내전 등으로 어려움을 겪어왔으며, 이는 경제 발전과 사회 안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요 산업은 농업과 어업이며, 특히 캐슈너트 생산이 경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다양한 민족 구성과 함께 포르투갈어가 공식 언어이지만, 크레올어가 널리 사용된다. 이슬람교, 토착 신앙,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 최근에는 민주주의 이행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으나, 여전히 많은 사회경제적 과제를 안고 있다.
2. 국명
기니비사우의 공식 국명은 포르투갈어로 República da Guiné-Bissau헤푸블리카 다 기네비사우포르투갈어이며, 통용되는 명칭은 Guiné-Bissau기네비사우포르투갈어이다. 영어로는 Republic of Guinea-Bissau리퍼블릭 오브 기니비사우영어로 표기하며, 발음은 ˌɡɪni bɪˈsaʊ기니비사우영어이다. 풀라어로는 𞤘𞤭𞤲𞤫 𞤄𞤭𞤧𞤢𞥄𞤱𞤮기네비사워풀라어, 만딩카어로는 ߖߌ߬ߣߍ߫ ߓߌߛߊߥߏ߫기네비사워mnk로 불린다.
'기니'라는 명칭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베르베르어로 '흑인들의 땅'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프리카에는 기니비사우 외에도 기니 공화국(옛 프랑스령 기니)과 적도 기니 공화국 등 '기니'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다른 국가들이 있다. 이러한 국가들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독립 당시 수도인 비사우의 이름을 국가명에 추가하여 '기니비사우'로 정했다. 독립 초기 국명은 '기니비사우국'이었으나, 1977년에 '기니비사우 공화국'으로 변경하였다.
3. 역사
기니비사우의 역사는 선사 시대의 초기 정착부터 시작하여 여러 왕국들의 흥망성쇠, 유럽 세력과의 접촉 및 식민 통치, 독립을 위한 치열한 투쟁, 그리고 독립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정치적 변동의 과정을 포함한다. 이 섹션에서는 이러한 주요 역사적 단계들을 시대순으로 살펴본다.
3.1. 초기 역사 및 주요 왕국
유럽 세력이 도래하기 이전, 현재 기니비사우 지역에는 다양한 원주민 사회가 존재했다. 이 지역의 초기 역사에 대한 기록은 부족하지만, 졸라족, 파펠족, 만자크족, 발란타족, 비아파다족 등이 가장 먼저 정착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3세기에는 만딩카족이, 15세기에는 풀라족이 이주해오면서 기존 원주민들을 해안가나 비자고스 제도로 밀어냈다.
발란타족과 졸라족은 왕권 제도가 미약하거나 부재했고, 권력이 마을과 가족의 우두머리에게 분산된 분권화된 사회 구조를 가졌다. 반면, 만딩카족, 풀라족, 파펠족, 만자크족, 비아파다족의 추장들은 왕에게 종속되었다. 각 민족의 관습, 의례, 의식은 다양했으나, 귀족 계층이 사법 제도를 포함한 모든 주요 직위를 장악했다. 사회 계층화는 의복, 장신구, 주거 자재, 교통수단 등에서 나타났다. 민족 간 교역도 활발했는데, 남부 숲에서는 후추와 콜라 너트, 사바나-숲 지대에서는 콜라 너트, 철, 철제 도구, 해안가에서는 소금과 건어물, 만딩카족의 면직물 등이 거래되었다.
3.1.1. 비사우 왕국
구전 역사에 따르면, 비사우 왕국은 퀴나라(기날라) 왕의 아들이 임신한 누이, 여섯 명의 아내, 그리고 아버지 왕국의 백성들과 함께 이주하여 세운 나라라고 한다. 초기에는 포르투갈 식민주의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 비사우 왕국은 포르투갈의 '평정 작전'에 맞서 강력하게 주권을 방어했으며, 1891년, 1894년, 1904년에 포르투갈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1915년, 포르투갈 장교 주앙 테이셰이라 핀투와 월로프족 용병 압둘 인자이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에 의해 왕국은 완전히 병합되었다.
3.1.2. 비아파다 왕국
비아파다족은 부바강(리오 그란데 데 부바) 유역에 비구바, 기날라, 비세게 등 세 개의 왕국을 이루고 살았다. 비구바와 기날라는 중요한 항구 도시였으며, 상당수의 란사두(포르투갈 정착민과 현지인 사이의 혼혈 후손) 공동체가 존재했다. 이들 왕국은 카부 제국의 만딩카 만사(왕)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3.1.3. 비자고스 제도
비자고스 제도에서는 다양한 민족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각기 다른 정착지에 거주하며 다채로운 문화를 발전시켰다. 비자고 사회는 호전적이었다. 남성들은 배를 만들고 본토를 습격하여 해안 민족들과 다른 섬들을 공격했다. 그들은 바다에서는 왕이 없다고 믿었다. 여성들은 땅을 경작하고 집을 짓고 음식을 모으고 준비했다. 여성들은 남편을 선택할 수 있었고, 명성이 높은 전사들이 존경받는 지위의 정점에 있었다. 성공한 전사들은 많은 아내와 배를 가질 수 있었으며, 그들의 배를 사용하여 원정에 참여한 전사들이 얻은 전리품의 3분의 1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비자고족의 야간 해안 정착지 습격은 공격받은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본토의 포르투갈 상인들은 지역 경제에 해를 끼치기 때문에 이러한 습격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섬 주민들은 습격에서 포로로 잡은 많은 마을 사람들을 유럽인들에게 노예로 팔기도 했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다른 지역에서 식민화가 진행되면서 노동력 수요가 높았고, 유럽인들은 때때로 더 많은 포로를 잡도록 부추겼다. 비자고족은 본토 노예 사냥꾼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노예화로부터 안전했다. 유럽인들은 그들을 노예로 삼는 것을 피했다. 포르투갈 자료에 따르면 아이들은 좋은 노예가 되었지만, 어른들은 노예선에서 자살하거나 반란을 일으키거나 신대륙에 도착하면 탈출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3.1.4. 카부 제국

카부 제국은 13세기 순디아타 케이타 휘하의 장군 티라마칸 트라오레가 세네감비아를 정복하면서 말리 제국의 속주로 처음 세워졌다. 14세기까지 기니비사우의 많은 지역이 말리의 통치하에 있었으며, '파림 카부'(카부의 지휘관)가 다스렸다.
14세기부터 말리 제국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16세기 초에는 콜리 텡겔라의 세력 확장으로 과거 안정적이었던 말리의 영향력이 차단되었다. 카부는 독립된 왕국 연맹체가 되었다. 지배 계층은 '냔초'(Ñaanco)로 알려진 정예 전사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부계 혈통을 티라마칸 트라오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냔초는 전사 문화의 소유자들로, 뛰어난 기병이자 약탈자로 명성이 높았다. 카부 만사바(왕)는 오늘날 가부 지역 동부의 간살라에 자리 잡고 있었다.
노예 무역이 경제를 지배했으며, 전사 계층은 수입된 옷감, 구슬, 금속 제품, 총기 등으로 부유해졌다. 14세기까지는 아랍인 및 북아프리카와의 교역망이 지배적이었으나, 15세기부터 유럽인과의 해안 교역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17세기와 18세기에는 매년 약 700명의 노예가 이 지역에서 수출되었으며, 그중 다수가 카부 출신이었다.
18세기 후반, 동쪽에서 푸타 잘론 이마메이트가 부상하면서 정령숭배를 믿는 카부에 강력한 도전 세력으로 등장했다. 19세기 전반에는 지역 풀라족이 독립을 추구하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이 장기간의 분쟁은 1867년 칸살라 전투로 특징지어지며, 풀라두족은 사실상 카부를 격파하고 이후 이 지역을 지배했다. 그러나 일부 소규모 만딩카족 왕국들은 포르투갈 식민지에 흡수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3.2. 유럽과의 접촉 및 식민 시대
15세기 중반 포르투갈인들이 도래한 이후, 기니비사우 지역은 점차 유럽 세력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초기에는 해안가를 중심으로 교역이 이루어졌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포르투갈의 식민 통치가 강화되었다. 이 시기에는 노예 무역이 성행했으며, 이는 지역 사회에 큰 상처를 남겼다.
3.2.1. 15~16세기
기니비사우에 최초로 도달한 유럽인은 1455년 베네치아 탐험가 알비세 카다모스토, 1456년 포르투갈 탐험가 디오구 고메스, 1480년대 포르투갈 탐험가 두아르테 파셰쿠 페레이라, 그리고 1479년~1480년 플랑드르 탐험가 외스타슈 드 라 포스였다.
포르투갈 당국은 초기에 본토에 유럽인의 정착을 막았지만, 이 금지령은 토착 문화와 관습에 크게 동화된 란사두스와 탕고마우스에 의해 무시되었다. 그들은 왕실 허가 없이 지역에 들어가거나 교역하는 것, 무허가 항구에서 출항하는 것, 원주민 공동체에 동화되는 것을 금지하는 포르투갈 무역 규정을 무시했다.
1520년 이후 포르투갈 및 현지 상인뿐만 아니라 일부 스페인, 제노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인들이 거주하는 본토에서의 교역과 정착이 증가했다. 주요 항구는 카셰우, 비사우, 기날라였다. 각 강에는 하구선, 즉 항해 가능한 가장 먼 지점에 파림의 투바부두구와 같은 교역 중심지가 있었다. 이 교역소들은 내륙의 사람들과 아라비아고무, 상아, 가죽, 사향고양이, 염료, 아프리카 노예, 금과 같은 자원을 직접 거래했다. 현지 아프리카 통치자들은 일반적으로 교역로와 상품에 대한 자신들의 통제를 보장하기 위해 유럽인들이 내륙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했다.
1500년대 후반에는 외국 상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주최 사회에 영향을 미치려 하면서 분쟁이 점점 더 잦고 심각해졌다. 한편, 항상 허술했던 포르투갈의 독점은 점점 더 도전을 받았다. 1580년 이베리아 연합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왕위가 통합되었다. 스페인의 적들은 기니비사우와 카보베르데에 있는 포르투갈 소유지를 공격했다.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선박들이 원주민 및 독립적인 성향의 란사두스와 교역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이 들어왔다.
3.2.2. 17~18세기
17세기 초, 포르투갈 정부는 모든 기니 무역을 산티아구를 통하게 하고 본토에서의 무역과 정착을 장려하는 한편, 현지인에게 무기 판매를 제한하려 했다. 이러한 노력은 대체로 성공하지 못했다.
1640년 이베리아 연합이 끝나자 주앙 4세 국왕은 지난 60년 동안 번성했던 기니에서의 스페인 무역을 제한하려 했다. 그러나 아프리카계 포르투갈 상인과 식민지 주민들은 아프리카 왕들이 요구하는 자유 무역을 거부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들은 유럽 제품과 상품을 필수품으로 의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은 결코 원하는 독점을 유지할 수 없었다. 현지 지도자들과 아프리카-유럽계 상인 및 상인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는 포르투갈의 이해관계와 결코 일치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이 지역에서 말리 제국의 힘은 약해지고 있었다. 카부의 파림, 카사 왕국의 왕, 그리고 다른 현지 통치자들이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1700년대 초, 포르투갈은 현지 왕에게 총독이 붙잡혀 살해된 후 비사우를 버리고 카셰우로 후퇴했다. 그들은 1750년대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한편, 카셰우 카보베르데 회사는 1706년에 문을 닫았다.
1790년대에 잠시 영국이 볼라마섬에 거점을 마련하려 시도했다.
3.2.3. 노예 무역
기니비사우는 대서양 노예 무역에 관여한 최초의 지역 중 하나였다. 수세기 동안 전사들은 포로들을 노예로 북아프리카로 보냈다. 다른 지역만큼 많은 노예를 아메리카로 수출하지는 않았지만, 그 영향은 여전히 상당했다.
카보베르데에서 기니 노예들은 노동 집약적인 플랜테이션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인디고와 목화를 재배하고 가공했으며, 서아프리카에서 표준 통화가 된 파노스 천을 짜기도 했다. 17세기와 18세기 동안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 회사들은 매년 수천 명의 아프리카 포로를 이 지역에서 끌고 갔다. 기날라에서만 매년 평균 3,000명이 수송되었다. 이 포로들 중 다수는 풀라 지하드와 특히 푸타 잘론 이마메이트와 카부 제국 사이의 전쟁 중에 잡혔다.
전쟁은 점차 수입품과 교환하기 위해 유럽인들에게 팔 노예를 포획하는 유일한 목적으로 벌어졌다. 영토나 정치 권력에 대한 분쟁이라기보다는 인간 사냥에 가까웠다. 귀족과 왕들은 이익을 얻었지만, 일반 민중은 약탈과 불안정의 희생양이 되었다. 귀족이 포로로 잡히면 석방될 가능성이 높았다. 포획자들은 누구든 일반적으로 그들을 풀어주는 대가로 몸값을 받았기 때문이다. 왕들과 유럽 상인들의 관계는 파트너십이었으며, 양측은 정기적으로 무역 수행 방식, 누가 노예가 될 수 있고 누가 될 수 없는지, 노예 가격 등을 정하는 거래를 했다. 동시대 연대기 작가들은 여러 왕들에게 노예 무역에서의 역할에 대해 질문했고, 그들이 무역을 악으로 인식했지만 그렇지 않으면 유럽인들이 다른 상품을 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참여했다고 언급했다.
18세기 후반부터 유럽 국가들은 점차 노예 무역을 늦추거나 폐지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1869년에, 브라질은 1888년에 노예제를 폐지했지만, 노동자들에게는 거의 나을 것이 없는 계약 노동 제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3.3. 식민주의

1800년대 후반까지 포르투갈의 요새와 교역소 밖에서의 '식민지' 통제는 허구에 불과했다. 기니비사우는 1860년대부터 유럽 식민 경쟁이 격화되는 현장이 되었다. 볼라마의 지위에 대한 분쟁은 1870년 미국 대통령 율리시스 S. 그랜트의 중재를 통해 포르투갈에게 유리하게 해결되었지만, 포르투갈의 영유권 주장에 대한 프랑스의 침범은 계속되었다. 1886년 현재 세네갈의 카자망스 지역이 프랑스에 할양되었다.
3.4. 독립 투쟁

기니카보베르데 아프리카 독립당(PAIGC)은 1956년 아밀카르 카브랄의 지도 아래 창설되었다. 초기에 평화적인 방법을 추구했던 이 정당은 1959년 피지기티 학살 사건 이후 농촌 지역 농민들의 정치적 동원에 크게 의존하며 더욱 군사적인 전술로 기울었다. 기니의 수도 코나크리에 있는 기지에서 수년간의 계획과 준비 끝에 PAIGC는 1963년 1월 23일 기니비사우 독립 전쟁을 시작했다.
다른 포르투갈 식민지의 게릴라 운동과 달리, PAIGC는 빠르게 영토의 많은 부분을 장악했다. 정글과 같은 지형의 도움을 받아 인접 동맹국과의 국경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쿠바, 중국, 소련, 그리고 좌파 성향의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 대량의 무기를 공급받았다. PAIGC는 심지어 공중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상당한 대공 능력을 확보하기도 했다. 1973년까지 PAIGC는 기니의 많은 지역을 통제했지만, 1973년 1월 창립자이자 지도자인 아밀카르 카브랄이 암살당하면서 운동은 좌절을 겪었다. 카브랄 사후, 당 지도권은 이후 카보베르데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아리스티데스 페레이라에게 넘어갔다.

3.5. 독립 이후

1973년 9월 24일 일방적으로 독립이 선언되었으며, 이날은 현재 기니비사우의 독립기념일이자 공휴일로 기념된다. 1974년 9월 10일 공식적으로 독립 국가로 인정받았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루마니아는 기니비사우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국가였으며, 기니카보베르데 아프리카 독립당과 협정을 체결한 최초의 국가이기도 했다.
독립과 함께 기니비사우는 이것이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을 국가로 제정했다. 1996년까지 이 국가는 카보베르데와 공유되었으며, 카보베르데는 이후 자체 공식 국가인 자유의 노래를 채택했다.
아밀카르의 형제이자 PAIGC 공동 창립자인 루이스 카브랄이 기니비사우의 초대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독립은 최상의 조건에서 시작되었다. 기니비사우 디아스포라가 대거 귀국했다. 모두에게 학교 접근권을 보장하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책은 무료였고 학교에는 충분한 교사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전에는 소홀히 여겨졌던 여아 교육이 장려되었고, 농촌 현실에 더 적합한 새로운 학사 일정이 채택되었다.
1980년 경제 상황이 크게 악화되면서 집권 정부에 대한 전반적인 불만이 커졌다. 1980년 11월 14일, "니누 비에이라"로 알려진 주앙 베르나르두 비에이라가 루이스 카브랄 대통령을 전복시켰다. 헌법은 효력이 정지되었고 비에이라가 의장을 맡은 9인으로 구성된 혁명 군사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후 국가는 자유 경제 체제로 전환했다. 사회 부문과 교육을 희생하여 예산 삭감이 이루어졌다.
국가는 1984년까지 군사위원회에 의해 통제되었다. 최초의 다당제 선거는 1994년에 치러졌다. 1998년 5월 군부 봉기로 기니비사우 내전이 발발했고 1999년 6월 대통령이 축출되었다. 2000년에 다시 선거가 치러졌고 쿰바 이알라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3.5.1. 21세기

2003년 9월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군부는 이알라를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혐의로 체포했다. 여러 차례 연기된 끝에 의회 선거가 2004년 3월에 치러졌다. 2004년 10월에는 임금 체불 문제로 군부 반란이 일어나 군 참모총장이 사망했다.
2005년 6월, 이알라를 축출한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이알라는 PRS 후보로 복귀하여 자신이 합법적인 대통령이라고 주장했지만, 선거는 1999년 쿠데타로 축출된 전 대통령 주앙 베르나르두 비에이라가 승리했다. 비에이라는 결선 투표에서 말람 바카이 사냐를 이겼다. 사냐는 처음에 수도 비사우를 포함한 두 개 선거구에서 조작과 선거 부정이 발생했다고 주장하며 승복을 거부했다. 외국 감시단은 선거 전 무기가 국내로 유입되었다는 일부 보고와 선거 운동 중 신원 미상의 무장 괴한에 의한 정부 청사 공격 등 약간의 "소란"에도 불구하고 선거가 "평온하고 조직적으로" 치러졌다고 평가했다.
3년 후, 사냐의 PAIGC는 2008년 11월에 치러진 의회 선거에서 100석 중 67석을 차지하며 강력한 의회 다수당이 되었다. 2008년 11월, 비에이라 대통령의 관저가 군부 구성원들의 공격을 받아 경비원 1명이 사망했지만 대통령은 무사했다.
그러나 2009년 3월 2일, 비에이라는 전날 폭발로 사망한 바티스타 타그메 나 와이 합동참모본부장의 죽음에 복수하려는 군인 집단으로 추정되는 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 비에이라의 죽음은 광범위한 폭력을 유발하지는 않았지만, 옹호 단체 스위스피스에 따르면 국내에 혼란의 조짐이 있었다. 군 지도자들은 헌법상의 승계 질서를 존중할 것을 약속했다. 라이문두 페레이라 국회의장이 2009년 6월 28일 전국 선거가 치러질 때까지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이 선거에서는 말람 바카이 사냐가 PRS의 대통령 후보인 쿰바 이알라를 누르고 승리했다.
2012년 1월 9일, 사냐 대통령이 당뇨병 합병증으로 사망했고, 페레이라가 다시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2012년 4월 12일 저녁, 군부 구성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임시 대통령과 유력 대선 후보를 체포했다. 전 참모차장 마마두 투레 쿠루마 장군이 과도기 동안 국가를 장악하고 야당과 협상을 시작했다.
2014년 총선에서는 조제 마리우 바스가 기니비사우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바스는 5년 임기를 모두 마친 최초의 선출직 대통령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2019년 대선 1차 투표에서 탈락했고, 결국 우마루 시소쿠 엠발로가 승자로 부상했다. PAIGC의 지지 없이 당선된 최초의 대통령인 엠발로는 2020년 2월에 취임했다.
2022년 2월 1일, 우마루 시소쿠 엠발로 대통령을 전복시키려는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 2022년 2월 2일, 국영 라디오는 이 사건으로 공격자 4명과 대통령 경호원 2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아프리카 연합과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는 모두 쿠데타를 규탄했다. 쿠데타 시도 6일 후인 2022년 2월 7일, 기니비사우 정부에 비판적인 라디오 방송국인 라디오 캐피탈 FM 건물이 공격받았다. 이는 2년도 채 안 되어 이 라디오 방송국이 겪은 두 번째 유사한 공격이었다. 이 방송국에서 일하는 한 기자는 익명을 원하며 공격자들이 탄 차량 중 하나가 대통령궁 소속임을 동료 중 한 명이 알아보았다고 회상했다.
2022년, 엠발로는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최초의 아프리카 지도자가 되었으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회담했다.
2023년, 수도 비사우에서 쿠데타 시도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로 인해 엠발로는 야당이 장악한 의회를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2024년 9월 11일, 우마루 시소쿠 엠발로 대통령은 2025년 11월로 예정된 차기 대선에서 재선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4. 지리
기니비사우는 서아프리카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세네갈, 남쪽과 동쪽으로 기니와 국경을 접하고, 서쪽으로는 대서양에 면해 있다. 국토의 대부분은 저지대 해안 평야와 맹그로브 습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쪽으로 갈수록 기니 숲-사바나 모자이크 지형으로 변한다. 비자고스 제도를 비롯한 여러 섬들이 해안에 분포한다. 이 섹션에서는 기니비사우의 전반적인 지리적 위치와 특징, 기후, 그리고 주요 환경 문제에 대해 상세히 다룬다.

기니비사우는 북위 11도에서 13도 사이(일부 지역은 11도 남쪽), 서경 11도에서 15도 사이에 주로 위치한다. 국토 면적은 3.61 만 km2로, 이는 대만이나 벨기에보다 큰 면적이다. 국토의 가장 높은 지점은 몬테 토린으로 해발 고도는 262 m에 불과할 정도로 전반적으로 지대가 낮다.


지형은 대부분 저지대 해안 평야로 구성되며, 특히 기니 맹그로브 습지가 광범위하게 발달해 있다. 이 습지대는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점차 기니 숲-사바나 모자이크 지대로 이어진다. 몬순의 영향을 받는 우기와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오는 덥고 건조한 하르마탄 바람이 부는 건기가 번갈아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본토에서 떨어진 서쪽 해상에는 비자고스 제도가 군도를 이루고 있다. 기니비사우는 생태학적으로 기니 숲-사바나 모자이크와 기니 맹그로브라는 두 가지 주요 생태 지역을 포함하고 있으며, 해안가는 저습지, 내륙은 밀림과 사바나로 특징지어진다.

기니비사우의 해안 지대는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과 다수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다양한 해양 생태계를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내륙으로 들어가면 강들이 사바나 지대를 가로지르며 흐르고, 이 강들은 지역 주민들의 생활과 농업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4.1. 기후
기니비사우는 일년 내내 따뜻하며 기온 변화가 거의 없다. 평균 기온은 26.3 °C이다. 비사우의 연평균 강수량은 2024 mm이며, 이는 거의 대부분 6월에서 9월 또는 10월 사이의 우기에 집중된다. 12월부터 4월까지는 건기를 겪는다. 고온다습한 열대기후로, 연평균 강수량 1880 mm의 대부분이 5~11월에 집중되어 있다.
4.2. 환경 문제
기니비사우는 삼림 벌채, 토양 침식,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해안 침수, 생물 다양성 감소 등 심각한 환경 문제에 직면해 있다. 과도한 방목과 남획 또한 주요 문제로 지적된다. 2019년 산림경관보전지수 평균 점수는 5.7/10으로, 172개국 중 97위를 기록했다.
5. 정치


기니비사우는 공화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과거에는 정부가 고도로 중앙집권화되어 있었다. 다당제는 1991년 중반에 이르러서야 도입되었다. 대통령은 국가원수이며, 총리는 정부수반이다. 1974년 독립 이후 조제 마리우 바스가 2019년 6월 24일 5년 임기를 마칠 때까지, 5년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친 대통령은 없었다. 정치가 많이 불안정한데, 2023년 11월 30일에도 쿠데타 시도가 있어 빅터 촌고 장군이 대통령이 될 뻔 했다. 이 섹션에서는 기니비사우의 정부 구조, 주요 정당, 대외 관계 및 군사력에 대해 설명한다.
5.1. 정부 구조
입법부는 단원제인 국민의회(Assembleia Nacional Popular)로, 100명의 의원으로 구성된다. 의원들은 다수의석 선거구에서 국민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임기는 4년이다. 사법 체계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9명의 판사로 구성된 최고사법재판소(Tribunal Supremo da Justiça)가 이끌며, 판사들은 대통령의 재량에 따라 복무한다.
5.2. 주요 정당
주요 정당으로는 기니카보베르데 아프리카 독립당(PAIGC)과 사회혁신당(PRS)이 있다. 그 외 20개 이상의 군소 정당이 존재한다. 2019년 의회 선거에서는 신당인 마뎀 G15(Madem G15)가 약진하여 PRS를 제치고 제2당이 되었으며,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동당의 우마루 시소쿠 엠발로 후보가 승리하여 대통령에 취임했다.
5.3. 대외 관계
기니비사우는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CPLP)의 창립 회원국이다. CPLP는 포르투갈어가 공식 언어인 루소포니 국가들의 국제기구이자 정치적 연합체이다. 기니비사우는 비동맹 외교 정책을 추구하며 다양한 국가 및 조직과 우호적이고 협력적인 관계를 모색한다. 프랑스, 포르투갈, 앙골라, 브라질, 이집트, 나이지리아, 리비아, 쿠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가나, 러시아 등이 비사우에 외교 공관을 두고 있다. 중국, 쿠바 및 미국과 유럽 연합, 러시아와의 관계도 중시하고 있다.
5.3.1. 대한민국과의 관계
대한민국과 기니비사우는 1983년 12월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74년 3월에 수교했다. 대한민국은 기니비사우에 상주 대사관을 두고 있지 않으며, 주세네갈 대한민국 대사관이 기니비사우 관련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 체류 한국인 수: 0명 (2022년 2월 기준)
- 재한 기니비사우인 수: 10명 (2020년 12월 말 기준)
5.4. 군사
2019년 추산에 따르면 기니비사우 군대의 규모는 약 4,400명이며, 군비 지출은 GDP의 2% 미만이다. 2018년 기니비사우는 유엔 핵무기금지조약에 서명했다. 군대는 육군, 해군, 공군, 준군사조직으로 구성된다. 세계은행은 군 병력을 약 4,000명으로 추산하며, 군비 지출은 2330.00 만 USD, GDP 대비 군비 지출 비율은 1.7%로 추정한다. CIA 월드팩트북에 따르면 18~25세 남성은 의무적으로 병역을 이행해야 하며, 부모 동의 하에 16세 또는 그 이전부터 자원입대가 가능하다 (2009년 기준).
6. 행정 구역

기니비사우는 8개 주(pt: região, 복수형 regiãos)와 1개 자치구(pt: sector autónomo)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다시 총 37개의 구(sector)로 세분화된다. 수도 비사우는 자치구의 지위를 가진다.
- 바파타주
- 비옴부주
- 비사우 자치구 (수도, 자치구)
- 볼라마주
- 카셰우주
- 가부주
- 오이우주
- 키나라주
- 톰발리주
6.1. 주요 도시

기니비사우의 주요 도시는 다음과 같다. 최대 도시는 수도인 비사우로, 2015년 기준 도시권 인구는 492,004명이다. 비사우는 기니비사우 내에서 두드러진 대도시이다. 다른 주요 도시로는 바파타, 가부, 비소랑, 볼라마 등이 있다.
순위 | 도시 | 2015년 추정 인구 | 주 |
---|---|---|---|
1 | 비사우 | 492,004 | 비사우 |
2 | 가부 | 48,670 | 가부주 |
3 | 바파타 | 37,985 | 바파타주 |
4 | 비소랑 | 29,468 | 오이우주 |
5 | 볼라마 | 16,216 | 볼라마주 |
6 | 카셰우 | 14,320 | 카셰우주 |
7 | 부바케 | 12,922 | 볼라마주 |
8 | 카티오 | 11,498 | 톰발리주 |
9 | 만소아 | 9,198 | 오이우주 |
10 | 부바 | 8,993 | 키나라주 |
7. 경제
기니비사우의 경제는 농업과 어업에 크게 의존하며, 특히 캐슈너트가 주요 수출품목이다. 그러나 장기간의 정치적 불안정, 낮은 개발 수준, 마약 밀매 문제 등으로 인해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남아있다. 이 섹션에서는 기니비사우의 주요 산업 구조,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국제 사회와의 관계 등을 다룬다.
기니비사우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과 인간 개발 지수는 세계 최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인구의 3분의 2 이상이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경제 구조는 주로 농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어류, 캐슈너트, 그리고 밤바라땅콩 등이 주요 수출품목이다. 전체 인구의 약 90%가 농업 부문에 종사하고 있는 실정이다.
장기간 지속된 정치적 불안정은 경제 활동의 심각한 침체를 야기했으며, 사회 환경을 악화시키고 거시경제의 불균형을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기니비사우에서 신규 사업체를 등록하는 데 소요되는 평균 시간은 233일(약 33주)로, 이는 수리남을 제외하고 전 세계에서 가장 긴 시간에 해당한다. 이러한 행정적 비효율성은 경제 발전을 더욱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기니비사우는 주요 정당들이 안정 협약을 체결한 이후 국제 통화 기금(IMF)의 지원을 받는 구조 개혁 프로그램을 통해 일부 경제적 진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수년간의 경제 침체와 정치적 불안정 이후, 1997년 기니비사우는 CFA 프랑 통화 시스템에 편입되어 어느 정도 국내 통화 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이어진 기니비사우 내전과 2003년 9월의 군사 쿠데타는 다시 경제 활동을 심각하게 방해했으며, 경제 및 사회 기반 시설의 상당 부분을 파괴하고 이미 만연해 있던 빈곤을 더욱 심화시켰다. 2004년 3월 의회 선거와 2005년 7월 대통령 선거 이후, 국가는 여전히 취약한 정치 상황에도 불구하고 장기간의 불안정으로부터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5년경부터 라틴 아메리카에 기반을 둔 마약 밀매 조직들이 기니비사우와 인근 서아프리카 국가들을 코카인의 유럽 중계지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유엔 관계자는 이 나라가 "마약 국가"가 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묘사했다. 정부와 군대는 마약 밀매를 막기 위해 거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이는 2012년 쿠데타 이후 더욱 심화되었다. 정부는 불법 마약 유통으로 계속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니비사우는 아프리카 사업법 조화 기구(OHADA)의 회원국이다.
1997년 이전에는 기니비사우 페소가 법정 통화였으나, 1997년부터 서아프리카 CFA 프랑이 도입되었다.
7.1. 주요 산업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노동력의 80% 이상이 종사하며 특히 캐슈너트, 땅콩, 쌀 재배가 중심이다. 해안 저지대에서는 쌀, 내륙에서는 수수와 잡곡이 자급용으로 재배되지만 식량 자급은 이루어지지 않아 2015년 곡물 수입이 총수입의 16.9%를 차지하며 최대 수입품목이 되었다. 주요 수출품은 세계 6위 생산량을 자랑하는 캐슈너트로, 2015년 총수출의 78.7%를 점유했다. 그 외 수출품으로는 밤바라땅콩과 어류가 있다. 캐슈너트 대부분은 인도로 수출되어, 총수출에서 인도가 차지하는 비중은 72.9%에 달한다. 식민지 시대에는 내륙에서 재배되는 땅콩과 해안 저지대에서 재배되는 기름야자에서 생산된 팜유가 수출의 기둥이었으나, 독립 전쟁과 독립 후 사회주의적 농업 정책으로 인해 농업이 쇠퇴하였다. 이로 인해 자급 농업으로 회귀하면서 캐슈너트 외의 상품 작물 재배는 쇠퇴하여, 1986년에는 캐슈너트 수출이 총수출의 50% 이상을 차지한 반면, 땅콩과 팜유 수출은 각각 10% 수준으로 떨어졌다. 어업과 임업도 중요한 산업이며, 보크사이트, 인광석 등 광업 분야도 발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공업과 광업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7.2. 경제 문제
기니비사우는 만성적인 빈곤, 높은 실업률,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한 경제 발전 제약 등 심각한 경제 문제에 직면해 있다. 특히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점과 섬이 많은 지형을 악용한 마약 밀매의 중계지로 전락하여 국가 경제와 사회 안정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기업가층이 부재하고 문해율이 낮아 경제 발전의 기초적인 조건도 미흡한 실정이다.
8. 사회
기니비사우는 다양한 민족 집단, 언어, 종교가 공존하는 다문화 사회이다. 교육 시스템과 보건 의료 현황은 여전히 많은 개선이 필요하며, 정치적 불안정과 빈곤은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 섹션에서는 기니비사우의 인구 구성, 민족, 언어, 종교, 교육, 보건 및 주요 사회 문제에 대해 논한다.
8.1. 인구

유엔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기니비사우의 인구는 약 2,026,778명으로 추정된다. 1950년 518,000명이었던 인구는 1961년 57만 명, 1986년 91만 명, 2017년 186만 명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2010년 기준 15세 미만 인구 비율은 41.3%, 15세에서 65세 사이 인구는 55.4%, 65세 이상 인구는 3.3%였다. 인구 증가율, 출생률 및 사망률, 평균 수명, 연령별 인구 구조, 도시와 농촌 간 인구 분포 등 인구 통계학적 특징은 개발도상국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8.2. 민족


기니비사우의 인구는 민족적으로 다양하며, 각기 다른 언어, 관습,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인구의 약 99%가 아프리카계 민족으로 구성된다. 주요 민족 집단은 다음과 같다:
- 풀라족 및 만딩카어 사용 민족: 인구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며 북부와 북동부에 집중되어 있다. (풀라족 약 28.5%, 만딩카족 약 14.7%)
- 발란타족 및 파펠족: 남부 해안 지역에 거주한다. (발란타족 약 22.5%, 파펠족 약 9.1%)
- 만자크족 및 만칸하족: 중부 및 북부 해안 지역을 차지한다. (만자크족 약 8.3%, 만칸하족 약 3.1%)
그 외 비아파다족(3.5%), 비자고스족(2.1%), 펠루페족(졸라족, 1.7%), 만소안카족(1.4%), 발란타 마네족(1%), 날루족(0.9%), 사라쿨레족(소닝케족, 0.5%), 소소족(0.4%) 등이 있다. 나머지 대부분은 포르투갈인과 아프리카인의 혼혈인 메스티수이다. 포르투갈 원주민은 기니비사우 인구의 극히 일부를 차지하며, 독립 이후 대부분이 본국으로 떠났다. 소수의 화교 인구도 있으며, 이들은 주로 옛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마카오 출신의 포르투갈-광둥 혼혈 상인들이다. 발란테족은 중앙부에서 남부, 풀라니족과 만딩카족은 북부, 만자카족과 파펠족은 해안부에 주로 거주한다. 크레올(물라토)은 주로 카보베르데에서 왔으며, 정치 등을 지배했던 것에 대한 현지 주민들의 불만이 1980년 쿠데타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8.3. 언어

기니비사우는 작은 나라이지만, 각기 고유한 문화와 언어를 가진 여러 민족 집단이 공존한다. 이는 기니비사우가 아프리카 내에서 피난민 및 이주민 영토였기 때문이다. 식민화와 인종 간 혼합으로 인해 포르투갈어와 포르투갈어 기반 크리올어인 기니비사우 크리올어(현지에서는 '크리울루' 또는 '키리올'로 불림)가 생겨났다.
독립 이후 기니비사우의 유일한 공식 언어는 표준 포르투갈어이지만, 주로 제2언어로 사용되며 모국어 화자는 소수이다. 포르투갈어 사용은 종종 지식인 및 정치 엘리트 계층에 한정된다. 포르투갈어는 식민 통치의 유산으로 정부 및 국가 소통 언어로 사용된다. 초등부터 고등 교육까지 학교 교육은 포르투갈어로 진행되지만, 어린이의 67%만이 정규 교육을 받고 있다. 자료에 따르면 포르투갈어 사용자는 인구의 11~15% 범위이다. 2009년 최근 인구 조사에서는 인구의 27.1%가 비크리올 포르투갈어를 사용한다고 응답했다(도시 거주자의 46.3%, 농촌 인구의 14.7%). 기니비사우 크리올어는 인구의 약 90.4%가 사용하며, 사실상 여러 민족 집단 간의 링구아 프랑카 역할을 한다. 크리올어 사용은 여전히 확대되고 있으며, 대다수 인구가 이해한다.
나머지 농촌 인구는 각 민족 고유의 다양한 아프리카 토착어를 사용한다: 풀라어(16%), 발란타어(14%), 만딩카어(7%), 만자크어(5%), 파펠어(3%), 펠루페어(1%), 비아파다어(0.7%), 비자고어(0.3%), 날루어(0.1%) 등이 주요 아프리카 토착어이다. 대부분의 포르투갈어 및 메스티수 사용자는 아프리카 토착어 중 하나와 크리올어를 추가 언어로 구사한다. 아프리카 토착어는 위상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사용이 억제되지 않는다. 이 언어들은 동일 민족 배경을 가진 개인 간의 연결고리이며, 마을, 이웃이나 친구 사이, 전통 및 종교 의식에서 매일 사용되며, 도시와 농촌 인구 간의 접촉에도 사용된다. 그러나 기니비사우에서 지배적인 토착어는 없다.
프랑스어는 주변 국가들이 프랑스어 사용국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외국어로 가르친다. 기니비사우는 프랑코포니 국제 기구(La Francophonie)의 정회원국이다.
8.4. 종교

기니비사우의 종교 구성은 다양한 출처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대체로 이슬람교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그 뒤를 토착 민간 신앙과 기독교가 따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CIA 월드팩트북의 2020년 추산에 따르면, 인구의 46.1%가 이슬람교, 30.6%가 민간 신앙, 18.9%가 기독교, 4.4%가 기타 또는 무교였다. 2010년 퓨 리서치 조사에서는 인구의 45.1%가 이슬람교, 19.7%가 기독교, 30.9%가 민간 신앙, 4.3%가 기타 신앙을 따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 퓨-템플턴 연구에서는 인구의 45.1%가 이슬람교, 30.9%가 민간 신앙, 19.7%가 기독교, 4.3%가 무교로 조사되었다. ARDA는 2020년에 이슬람 인구 비율을 44.7%로 예측했으며, 인구의 41.2%가 민족 종교 신자, 13%가 기독교인으로 추정했다.
이슬람교도 내 종파적 정체성에 관해 퓨 보고서는 기니비사우에는 지배적인 종파적 정체성이 없다고 밝혔다. 이러한 특징은 탄자니아, 우간다, 라이베리아, 나이지리아, 카메룬과 같은 다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과 공유하는 점이다. '세계 종교의 미래'라는 또 다른 퓨 보고서는 2010년부터 2050년까지 기니비사우에서 이슬람교 신자의 인구 비율이 증가할 것으로 예측했다.
많은 주민들이 이슬람교와 기독교 신앙의 혼합적 형태를 따르며, 자신들의 관습을 전통 아프리카 신앙과 결합한다. 이슬람교는 북부와 동부에 우세하며, 기독교는 남부와 해안 지역에 우세하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기독교 공동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2021년 미국 국무부 국제 종교 자유 보고서에 따르면, 여러 종교 공동체 지도자들은 기존 공동체들이 본질적으로 관용적이라고 믿지만, 국내에서 종교적 근본주의가 증가하는 것에 대해 일부 우려를 표명했다. 2022년 7월, 압도적으로 이슬람교도가 많은 가부 지역의 가톨릭 교회가 파손된 사건은 기독교 공동체 사이에서 이슬람 극단주의가 국내로 침투할 수 있다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후 유사한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으며, 이슬람 극단주의자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드러나지 않았다.
8.5. 교육


기니비사우의 교육은 의무 교육이 7세부터 13세까지 시행된다. 3세에서 6세 사이 아동을 위한 유아 교육은 선택 사항이며 초기 단계에 있다. 교육 단계는 유아 교육, 초등 및 보충 기초 교육, 일반 및 보충 중등 교육, 일반 중등 교육, 기술 및 직업 교육, 고등 교육(대학 및 비대학)의 다섯 단계로 나뉜다. 기초 교육은 개혁 중이며, 현재 6년 과정의 단일 주기로 운영된다. 중등 교육은 널리 제공되며 두 개의 주기(7~9학년, 10~11학년)가 있다. 공립 기관의 직업 교육은 운영되지 않지만, 사립 학교에서 제공하는 과정이 개설되었으며, 여기에는 상주앙 보스쿠 직업훈련센터(2004년부터)와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직업훈련센터(2011년부터)가 포함된다.
고등 교육은 제한적이며 대부분 해외 유학을 선호하며, 학생들은 포르투갈에서 수학하는 것을 선호한다. 제도적으로 자율적인 법학부와 쿠바가 유지하며 여러 도시에서 운영되는 의학부를 포함한 여러 대학이 있다.
아동 노동은 매우 흔하다. 남학생의 취학률이 여학생보다 높다. 1998년 초등 총취학률은 53.5%였으며, 남학생(67.7%)이 여학생(40%)보다 높았다.
비정규 교육은 지역사회 학교와 성인 교육에 중점을 둔다. 2011년 문해율은 55.3%(남성 68.9%, 여성 42.1%)로 추정되었다. 식민지 시대였던 1950년의 비문해율은 98.85%에 달했다. 국립 아밀카르 카브랄 대학교와 사립 콜리나스 드 보에 대학교 등의 고등 교육 기관이 존재한다.
8.6. 보건
기니비사우의 주요 보건 지표(영아 사망률, 평균 수명 등)는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의료 서비스 접근성은 매우 제한적이다. 말라리아, 결핵, HIV/AIDS 등 주요 풍토병 및 전염병이 만연해 있으며, 국가 보건 시스템은 만성적인 자원 부족과 인프라 미비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8.7. 사회 문제
기니비사우는 정치적 불안정에서 비롯된 사회 갈등, 토지 소유권 분쟁, 인권 문제, 높은 빈곤율 등 다양한 사회 문제에 직면해 있다. 특히 정치적 불안정은 경제 발전을 저해하고 사회 전반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 마약 밀매의 중계지로 악용되면서 조직 범죄와 부패 문제도 심각한 수준이다.
9. 교통

기니비사우의 교통 인프라는 전반적으로 미흡한 수준이다. 수도 비사우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의 도로는 비포장 상태이며, 정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서아프리카 횡단 고속도로와 연결되는 노선 건설이 진행 중이다. 철도는 존재하지 않으며, 과거 19세기부터 존재했던 작업용 소형 화물 철도는 현재 운영되지 않는다.
수상 교통의 경우, 국내 여러 강이 하천 주운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비사우항은 기니비사우 최대의 항만이다. 항공 교통으로는 비사우에 위치한 오스발두 비에이라 국제공항이 유일한 국제공항으로 기능하고 있다.
10. 문화

기니비사우는 다양한 민족 집단의 전통이 혼합된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음악, 음식, 영화, 스포츠 등 여러 분야에서 고유한 특색을 나타내며, 전통 축제와 공휴일은 국민들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 섹션에서는 기니비사우의 주요 문화적 측면들을 소개한다.
10.1. 음악

기니비사우의 국민 가수
기니비사우의 음악은 주로 다중리듬의 쿰베(gumbe) 장르와 연관되며, 이는 기니비사우의 주요 음악 수출품이다. 그러나 내전과 다른 요인들이 수년간 결합하여 쿰베 및 기타 장르가 주류 청중, 심지어 일반적으로 혼합주의적인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도 멀어지게 만들었다.
카바사는 기니비사우의 주요 악기이며, 매우 빠르고 리듬적으로 복잡한 춤 음악에 사용된다. 가사는 거의 항상 포르투갈어 기반 크리올어인 기니비사우 크리올어로 되어 있으며, 종종 유머러스하고 시사적이며, 현재 사건과 논란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쿰베'라는 단어는 때때로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기니비사우의 모든 음악을 지칭하지만, 가장 구체적으로는 기니비사우의 약 10가지 민속 음악 전통을 융합한 독특한 스타일을 의미한다. 티나(Tina)와 팅가(tinga)는 다른 인기 있는 장르이며, 현존하는 민속 전통에는 장례식, 성인식, 기타 의식에 사용되는 의식 음악뿐만 아니라 발란타족의 브로스카(brosca)와 쿠순데(kussundé), 만딩카족의 잠바돈(djambadon), 그리고 비자고스 제도의 쿤데레(kundere) 사운드가 포함된다.
10.2. 음식
기니비사우 요리는 지역별로 주식으로 하는 곡물 종류가 다른 것이 특징이다. 해안가 주민들의 주식은 쌀이며, 내륙 주민들의 주식은 수수이다. 일반적인 요리로는 수프와 스튜 등 국물 요리와 찜 요리가 있다. 흔히 사용되는 식재료로는 얌, 고구마, 카사바, 양파, 토마토, 플랜틴 등이 있으며, 향신료로는 기니 후추(Aframomum melegueta), 후추, 고추 등이 사용된다.
10.3. 영화
플로라 고메스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영화감독이며, 그의 가장 유명한 영화는 Nha Fala냐 팔라포르투갈어 (My Voice나의 목소리영어)이다. 고메스의 Mortu Nega모르투 네가포르투갈어 (Death Denied죽음은 거부되었다영어) (1988)는 기니비사우에서 제작된 최초의 극영화이자 두 번째 장편 영화였다. (첫 번째 장편 영화는 1987년 움반 우케스트 감독의 N'tturudu은투루두포르투갈어였다.) 1989년 FESPACO에서 Mortu Nega포르투갈어는 권위 있는 우마루 간다 상을 수상했다. 1992년 고메스는 Udju Azul di Yonta우주 아줄 디 욘타포르투갈어를 감독했으며, 이 영화는 1992년 칸 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상영되었다. 고메스는 또한 많은 아프리카 중심 영화제의 이사로도 활동했다. 배우 바베티다 사조는 기니비사우 바파타에서 태어났다.
10.4. 스포츠
기니비사우에서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축구가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기니비사우 축구 국가대표팀은 기니비사우 축구 연맹의 관리를 받으며, 아프리카 축구 연맹(CAF)과 FIFA의 회원이다. FIFA 월드컵 본선 진출 경험은 없지만,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는 세 차례 출전했다. 최근에는 일본 J리그로 이적하는 기니비사우 선수들도 등장했는데, 2019년부터 2020년까지 이스마가 마쓰모토 야마가 FC에 소속되었고, 2021년에는 발데마르가 FC 이마바리에 소속된 바 있다.
10.5. 언론
기니비사우의 언론 환경은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제약이 많다.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국 및 일부 인터넷 매체가 운영되고 있으나, 언론 자유도는 낮은 편이며 정부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많다. 국영 언론 외에 소수의 민간 언론이 활동하고 있지만 재정적 어려움과 검열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10.6. 축제 및 공휴일
기니비사우의 주요 국가 공휴일은 다음과 같다. 이 외에도 각 민족별 전통 축제와 문화 행사가 다양하게 열린다.
날짜 | 한국어 표기 | 현지어(포르투GAL어) 표기 | 비고 |
---|---|---|---|
1월 1일 | 새해 첫날 | Ano Novo | |
1월 20일 | 영웅의 날 | Dia dos Heróis | 아밀카르 카브랄 암살일 |
3월 8일 | 국제 여성의 날 | Dia Internacional da Mulher | |
5월 1일 | 노동절 | Dia Internacional dos Trabalhadores | |
8월 3일 | 식민지 순교자의 날 | Dia dos mártires da colonização | 1959년 피지기티 학살 추모일 |
9월 24일 | 독립기념일 (1973년) | Dia da Independência | 국가적 축제일 |
10월 13일 경 | 이드 알피트르 | Final do Ramadão | 이슬람력에 따라 변동, 무슬림 공휴일 |
12월 20일 경 | 이드 알아드하 | Festa do Cordeiro | 이슬람력에 따라 변동, 무슬림 공휴일 |
12월 25일 | 크리스마스 | Natal | 기독교 공휴일 |
11. 관련 인물
기니비사우의 역사,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이들의 삶과 활동은 기니비사우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 아밀카르 카브랄: 기니비사우와 카보베르데의 독립 운동을 이끈 핵심 지도자이자 이론가. 기니카보베르데 아프리카 독립당(PAIGC)의 창립자로, 아프리카 민족 해방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독립 직전 암살되었다. 그의 사상과 활동은 오늘날까지도 기니비사우 국민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고 있으며, 민주주의와 자결권 옹호에 대한 그의 기여는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 루이스 카브랄: 아밀카르 카브랄의 동생으로, 기니비사우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독립 초기 국가 건설에 힘썼으나, 1980년 쿠데타로 실각했다. 그의 통치는 독립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려 노력했으나, 정치적 기반이 취약하여 장기 집권에는 실패했다.
- 주앙 베르나르두 비에이라: 여러 차례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기니비사우 현대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 중 한 명이다. 그러나 그의 통치 기간은 쿠데타와 정치적 불안정으로 점철되었고, 결국 2009년 암살당했다. 그의 집권은 국가 발전에 긍정적 측면보다는 권위주의적 통치와 민주주의 후퇴라는 부정적 영향을 더 많이 미쳤다는 비판적 시각이 우세하다.
- 쿰바 이알라: 사회혁신당(PRS) 소속으로 대통령을 역임했다. 대중적 지지를 받았으나, 재임 중 정치적 혼란과 경제난이 지속되었고, 2003년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그의 통치는 민주적 절차를 따르려 했으나, 국가 운영 능력 부족과 사회 통합 실패로 비판받는다.
- 카르멘 페레이라: 기니비사우의 여성 정치인으로, 임시 대통령을 역임한 바 있으며, 아프리카 최초의 여성 국가원수 중 한 명으로 기록된다. PAIGC 당원으로 활동하며 여성 인권과 정치 참여 증진에 기여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 플로라 고메스: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영화감독으로, 기니비사우의 사회와 문화를 다룬 작품들을 통해 아프리카 영화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작품은 국제사회에 기니비사우를 알리는 긍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 베리시무 코레이아 세아브라: 군 장성으로, 2003년 쿠데타를 주도하여 쿰바 이알라 대통령을 축출하고 과도 정부를 이끌었다. 민주적 절차 회복을 약속했으나, 이듬해 군부 반란으로 사망했다. 그의 행동은 민주주의 질서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 우마루 시소쿠 엠발로: 현 기니비사우 대통령으로, PAIGC가 아닌 정당(마뎀 G15) 소속으로 당선된 첫 대통령이다. 그의 집권 이후에도 정치적 긴장과 쿠데타 시도 등이 발생하는 등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어, 민주주의 정착과 사회 안정에 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
이 외에도 많은 인물들이 기니비사우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노력했거나, 때로는 국가적 어려움을 야기하는 데 관여하며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들의 활동은 기니비사우의 현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맥락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