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시에라리온 공화국, 통칭 시에라리온은 서아프리카 남서부 해안에 위치한 공화국이다. 북쪽과 동쪽으로 기니, 남동쪽으로 라이베리아와 국경을 접하며, 남서쪽으로는 대서양에 면한다. 국토 면적은 7.33 만 km2이며, 2023년 인구 조사 기준으로 약 890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수도이자 최대 도시는 프리타운이다. 시에라리온은 열대 기후 지역으로, 사바나에서부터 열대 우림에 이르는 다양한 자연 환경을 지니고 있다. 행정 구역은 5개의 주와 16개의 구로 나뉜다.
시에라리온은 대통령제 공화국으로, 단원제 의회와 직접 선거로 선출되는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권력분립 체제를 갖추고 있다. 세속 국가로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며, 인구의 약 4분의 3이 이슬람교를 믿고 상당수의 기독교 신자도 존재한다. 높은 수준의 종교적 관용은 사회 규범이자 국가 정체성의 일부로 여겨진다. 영어가 공용어이지만, 인구의 약 97%가 사용하는 크리오어가 링구아 프랑카 역할을 한다.
시에라리온의 역사는 1462년 포르투갈 탐험가 페드루 드 신트라가 현재의 프리타운 인근 산맥을 Serra Leoa세하 레오아포르투갈어('암사자 산맥')라고 명명한 것에서 시작된다. 이후 이 지역은 노예 무역의 중요한 거점이었으나, 18세기 말 노예제 폐지 운동의 영향으로 해방된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카리브해 출신 노예들이 정착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1792년 시에라리온 회사에 의해 프리타운이 건설되었고, 1808년에는 영국의 왕령 식민지가 되었다. 1896년에는 내륙 지역이 영국 보호령으로 편입되었다. 1961년 밀턴 마르가이 경의 지도 아래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으나, 이후 정치적 불안정과 쿠데타, 시아카 스티븐스 대통령 하에서의 일당제 전환 등을 겪었다. 1991년부터 2002년까지 혁명연합전선(RUF)과의 참혹한 내전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 기간 동안 다이아몬드 불법 채굴과 거래(일명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전쟁 자금으로 사용되어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다. ECOMOG, 영국군, 유엔 평화유지군 등의 국제 사회 개입으로 내전은 종식되었고, 이후 민주주의 회복과 경제 재건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2014년부터 2016년까지 발생한 에볼라 유행은 국가에 또 다른 시련을 안겼다.
시에라리온은 다이아몬드, 금, 보크사이트, 루틸 등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나,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로 남아 있으며, 다차원적 빈곤 문제가 심각하다. 주요 민족으로는 템네족과 멘데족이 있으며, 이 외에도 약 18개의 다양한 민족 집단이 공존하고 있다.
2. 어원
시에라리온이라는 국명은 수도 프리타운 인근의 산맥에서 유래했다. 1462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페드루 드 신트라는 이 지역의 산맥을 보고 Serra Leoa세하 레오아포르투갈어라고 이름 지었는데, 이는 포르투갈어로 '암사자 산맥'을 의미한다. 이 이름이 붙여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당시 산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가 사자의 포효와 같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산에서 바다로 불어 내리는 바람 소리가 사자의 울음소리와 비슷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후 베네치아의 탐험가 알비세 카다모스토가 이 지역을 방문하면서 포르투갈어 이름을 베네치아어 방식으로 표기했고, 이것이 다른 유럽 지도 제작자들에게 채택되면서 철자가 점차 변형되었다. 스페인어 번역인 "Sierra León"을 거쳐 현대의 영어식 국명인 "Sierra Leone"으로 정착되었다. 일각에서는 1462년 페드루 드 신트라의 도착 이전에도 유럽인들이 이 지역을 알고 있었으며, "Serra Lyoa"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주장도 있어 국명의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크리오어로는 Salone살론kri이라고 불린다.
3. 역사
시에라리온의 역사는 고대 인류의 정착에서부터 유럽과의 교역, 해방 노예 정착촌 건설, 영국의 식민 통치, 독립, 그리고 참혹한 내전과 그 이후의 재건 과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다. 각 시대는 시에라리온의 정치, 사회,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3.1. 초기 역사

시에라리온 지역에는 최소 2,500년 전부터 인류가 지속적으로 거주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의 초기 역사는 아프리카 대륙 내 여러 민족의 이주와 정착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기원후 9세기경에는 철기 사용 기술이 도입되었으며, 1000년경에는 해안가를 중심으로 농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시에라리온의 지리적 특징인 빽빽한 열대 우림과 습지, 그리고 체체파리의 존재는 외부 세력의 침입을 막는 자연 방어선 역할을 했다. 체체파리는 말이나 만데족이 사용하던 제부 소에게 치명적인 질병을 옮겼기 때문에, 강력했던 만딩카 제국이나 말리 제국과 같은 아프리카 제국들의 영향력이 이 지역까지 깊숙이 미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시에라리온 고유의 문화가 외부의 지배로부터 상대적으로 잘 보존될 수 있었다.
18세기에는 북쪽과 동쪽으로부터 온 수수족 상인, 교역상, 이주민들을 통해 이슬람이 전파되기 시작하여 점차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 이후 북동부 지역에서 사모리 투레의 정복 활동은 얄룽카족, 쿠랑코족, 림바족 사이에서 이슬람의 확산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세기에 걸친 기후 변화는 생태 구역의 변화를 가져왔고, 이는 다시 이주와 정복의 역학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3.2. 유럽과의 교역


15세기부터 시에라리온은 유럽 세계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1462년 포르투갈 탐험가 페드루 드 신트라가 이 지역의 지도를 제작하고, 프리타운 인근의 산맥을 '사자 산맥'이라는 의미의 Serra Leoa세하 레오아포르투갈어라고 명명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페드루 드 신트라의 탐험 이후, 포르투갈 상인들이 시에라리온 항구에 도착하기 시작했으며, 1495년경에는 해안 지역에 요새화된 교역소를 건설했다.
곧이어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유럽 국가의 상인들도 시에라리온에 도착하여 교역소를 설립했다. 이들 교역소는 점차 내륙 지역에서 영토 분쟁을 겪던 원주민 상인들이 해안으로 데려온 노예를 주로 거래하는 장소가 되었다. 유럽인들은 특정 지역의 왕에게 임대료, 공물, 교역권의 대가로 '콜(Cole)'이라고 불리는 지불금을 지급했다. 현지 아프리카-유럽 혼혈 상인들이 종종 중개인 역할을 했으며, 유럽인들은 이들에게 상품을 미리 제공하여 원주민 상인들과 교역하도록 했는데, 주요 교역품은 노예와 상아였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특히 현지 사피족의 상아 공예품에 매료되어 상아로 만든 뿔, 정교한 소금 그릇(사피족 소금 그릇), 숟가락 등의 교역이 활발했다. 사피족은 현대 시에라리온 지역에 거주하던 서대서양어군 계열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 집단에 속했다. 포르투갈인과의 접촉 이전부터 이 지역에는 이미 상아 조각 문화가 확립되어 있었으며, 시에라리온을 방문한 많은 여행자들이 그들의 조각 기술에 감탄하여 현지 상아 뿔을 유럽으로 가져갔다. 16세기 초 파셰쿠는 "이 나라[시에라리온]에서는 야자잎으로 아름다운 매트를 만들고 상아 목걸이를 만든다... 이곳에서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섬세하게 조각된 상아 목걸이와 '비카스'라 불리는 매우 아름답고 좋은 야자잎 매트를 만든다"고 기록했다.

3.3. 해방 노예 정착과 식민지 건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 노예제 폐지 운동의 영향으로 영국에서 해방된 아프리카계 미국인, 카리브해 출신 노예 및 아프리카인들이 시에라리온에 정착하여 프리타운을 건설하는 과정은 시에라리온 현대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과정은 여러 단계로 진행되었으며, 각 정착민 집단은 고유한 배경과 경험을 가지고 새로운 사회 건설에 기여했다.
3.3.1. 런던의 흑인 빈민과 자유주 설립

18세기 말 영국 런던에서는 '흑인 빈민(Black Poor)' 문제가 사회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들 중 다수는 미국 독립 전쟁 당시 영국을 위해 싸웠던 흑인 왕당파들로, 전쟁 후 영국으로 건너왔으나 빈곤에 시달렸다. 노예제 옹호론자들은 런던 범죄의 상당 부분이 흑인 빈민들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곤충학자 헨리 스미스만은 이들을 시에라리온으로 이주시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자는 '시에라리온 재정착 계획'을 제안했고, 그랜빌 샤프와 같은 인도주의자들은 이 계획이 흑인들이 새로운 식민지 운영에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줄 기회로 여겨 지지했다. 영국 정부 관리들 또한 많은 빈민 시민들을 다른 곳으로 재정착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이 계획에 관여하게 되었다. 당시 총리였던 윌리엄 피트는 이 계획을 통해 흑인 빈민들을 아프리카로 송환하여 "런던 거리를 더 이상 배회하며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할 수단으로 보았다.
1787년 1월, 애틀랜틱(Atlantic)호와 벨리사리우스(Belisarius)호가 시에라리온으로 출항했으나 악천후로 플리머스로 회항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약 50명의 승객이 사망했다. 이후 추가 모집을 거쳐 1787년 4월, 결국 411명의 승객이 시에라리온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플리머스와 시에라리온 사이의 항해 중 96명의 승객이 사망했다.
1787년 5월 15일, 약 400명의 흑인과 60명의 백인 정착민이 시에라리온에 도착하여 '자유주(Province of Freedom)'라는 이름의 정착지를 건설했다. 그들은 그랜빌 타운을 세웠으나, 질병과 그들의 토지 잠식에 저항하는 현지 아프리카 민족(템네족)과의 전쟁으로 인해 첫 번째 정착민 그룹 대부분이 사망했다. 9월에 배들이 그들을 떠났을 때, 정착민은 "흑인 남성 212명, 흑인 여성 30명, 백인 남성 5명, 백인 여성 29명 등 총 276명"으로 줄어 있었다.
남아있던 정착민들은 현지 아프리카 추장으로부터 강제로 토지를 점령했지만, 추장은 보복 공격을 감행했고, 정착촌은 흑인 남성 39명, 흑인 여성 19명, 백인 여성 6명 등 총 64명으로 더욱 축소되었다. 흑인 정착민들은 비양심적인 상인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렸고, 나머지 정착민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장해야 했다. 살아남은 64명의 정착민은 두 번째 그랜빌 타운을 건설했다.
3.3.2. 노바스코샤 정착민과 프리타운 건설
미국 독립 전쟁 이후, 영국 왕실의 보호를 약속받았던 3,000명 이상의 흑인 왕당파들이 캐나다의 노바스코샤에 정착하여 땅을 부여받았다. 그들은 버치타운을 건설했지만, 혹독한 겨울과 인근 셸번의 백인들로부터 인종 차별에 직면했다. 흑인 지도자 토머스 피터스는 영국 당국에 구제와 추가 지원을 요청했고, 영국인 노예제 폐지론자 존 클락슨과 함께 시에라리온 회사가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서아프리카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고자 하는 흑인 왕당파들을 이주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1792년, 노바스코샤 출신 약 1,200명의 사람들이 대서양을 건너 3월 11일 시에라리온의 두 번째이자 유일하게 영구적인 식민지인 프리타운을 건설했다. 시에라리온에서 이들은 '노바스코샤 정착민', '노바스코샤인' 또는 '정착민(Settlers)'으로 불렸다. 클락슨은 초기에 그랜빌 타운의 생존자들이 새로운 정착지에 합류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그랜빌 타운의 몰락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돌렸기 때문이다. 정착민들은 미국 남부에서의 삶에서 익숙했던 양식으로 프리타운을 건설했으며, 미국식 패션과 예절을 유지했다. 또한 많은 이들이 프리타운에서 감리교 신앙을 이어갔다.
1790년대에 성인 여성을 포함한 정착민들은 처음으로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했다. 1792년, 영국에서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예고하는 움직임으로, 가구주의 3분의 1이 여성이었던 모든 가구의 가장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시에라리온의 흑인 정착민들은 유럽 국가의 백인 정착민들보다 훨씬 더 많은 자치권을 누렸다. 흑인 이주민들은 각기 다른 수준의 정치 대표자들, 즉 12명의 정착민을 대표하는 '십일조 담당관(tithingmen)'과 더 많은 수를 대표하는 '백인조 담당관(hundreders)'을 선출했다. 이러한 종류의 대표 제도는 노바스코샤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프리타운 초기 사회 건설 과정은 매우 힘겨웠다. 영국 왕실은 충분한 기본 물품과 식량을 공급하지 않았으며, 정착민들은 불법적인 노예 거래와 재노예화의 위험에 끊임없이 위협받았다.
3.3.3. 자메이카 마룬족과 해방 아프리카인
시에라리온 회사는 런던 투자자들에 의해 통제되었으며, 정착민들이 토지를 완전 소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1799년 일부 정착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영국 왕실은 1800년에 500명 이상의 자메이카 마룬족 병력을 커조스 타운 (트렐로니 타운)에서 노바스코샤를 거쳐 수송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몬태규 제임스 대령이 이끄는 마룬족은 식민지 군대가 반란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그 과정에서 자메이카 마룬족은 가장 좋은 집과 농장을 확보했다.
1808년 1월 1일, 시에라리온 회사의 총독이자 주요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토머스 러들럼은 회사의 헌장을 반납했다. 이로써 16년간의 식민지 운영이 종료되었다. 영국 왕실은 시에라리온 회사를 아프리카 협회로 재편성하여 지역 경제 개선을 지시했다. 이 협회 회원들은 지역 기업가를 육성하려는 영국인들과 시에라리온 무역에 대한 (영국) 독점권을 가진 매콜리 & 바빙턴 회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같은 시기(1807년 노예 무역법으로 노예 무역이 폐지된 후), 영국 해군은 불법 노예선에서 구출한 수천 명의 과거 노예였던 아프리카인들을 프리타운으로 이송했다. 이들 '해방 아프리카인' 또는 '재탈환자(recaptives)'들은 백인 정착민, 노바스코샤 정착민, 자메이카 마룬족에게 두당 20달러에 도제로 팔렸다. 많은 해방 아프리카인들은 일부 초기 정착민들이 그들을 자신들의 재산으로 여겼기 때문에 열악한 대우를 받거나 학대당하기도 했다. 다양한 고향과 전통으로부터 단절된 해방 아프리카인들은 정착민과 마룬족의 서구식 생활 방식에 동화되도록 강요받았다. 예를 들어, 일부 해방 아프리카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더 서구적인 이름으로 바꾸도록 강요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여겨 기꺼이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였지만, 일부는 이러한 변화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기를 원했다. 많은 해방 아프리카인들은 너무 불행하여 시에라리온을 떠나 원래 마을로 돌아감으로써 다시 노예로 팔릴 위험을 감수하기도 했다. 해방 아프리카인들은 결국 노바스코샤인, 마룬족, 유럽인들의 관습을 채택하도록 자신들의 관습을 수정했지만, 일부 민족적 전통은 유지했다. 이들이 성공적인 상인이 되고 서아프리카 전역에 기독교를 전파하면서, 노바스코샤인 및 마룬족과 통혼했고, 두 집단은 결국 아프리카와 서구 사회의 융합체가 되었다.
이들 시에라리온의 해방 아프리카인들은 아프리카 여러 지역, 주로 서해안 출신이었다. 18세기와 19세기 사이에 해방된 아프리카계 미국인, 일부 아메리코-라이베리아인 "난민", 그리고 특히 자메이카 마룬족을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계 카리브인들도 프리타운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이들 민족들이 함께 크리올/크리오 민족과 영어 기반의 크레올어인 크리오어를 형성했는데, 이 언어는 현재 시에라리온 내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링구아 프랑카이자 사실상의 국어이다.
3.4. 영국 식민 통치기 (1808년 ~ 1961년)
1800년대 시에라리온 정착은 1807년 영국이 노예 무역을 폐지한 후 식민지로 끌려온 이주 아프리카인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독특했다. 시에라리온에 도착하자마자 각 '재탈환자'에게는 등록 번호가 부여되었고, 그들의 신체적 특징에 대한 정보가 해방 아프리카인 등록부에 기입되었다. 그러나 종종 문서 기록이 주관적이었고 부정확한 기재로 이어져 추적이 어려웠다. 1808년 해방 아프리카인 등록부와 이를 모방한 1812년 포획 흑인 목록 사이에는 특히 이름 기재에서 차이가 드러났는데, 많은 재탈환자들이 주어진 이름을 영어화된 이름으로 바꾸기로 결정하여 도착 후 추적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최초의 선교사인 교회선교회(CMS) 소속 피터 하트윅과 멜키오르 레너는 1804년 시에라리온에 도착했다. CMS 선교사들은 서구식 교육과 의료 서비스 도입을 포함한 서구적 이상을 소개하고자 했다. 이 지역에 대한 그들의 가장 중요한 공헌 중 하나는 서아프리카 아동들을 위한 학교 설립이었다. 최초의 CMS 학교는 노예 상인들과 수수족이 거주하던 리오 퐁고 강변에 세워졌다. 점차 학교는 확장되어 프리타운과 불롬 해안 근처에 더 많은 학교가 세워졌다. 그러나 그들의 서구적 이상 통합은 개인적 신념의 강요를 동반했다. 유럽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을 자신들의 종교로 개종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 학교들을 설립했다. 성경을 읽는 능력이 진보와 학습의 척도가 되었다. 더욱이, 교육적 노력은 지역적 필요와는 관련이 없었다.
19세기 초, 프리타운은 이 지역 영국 식민지 총독의 거주지였으며, 그는 현재의 가나인 골드코스트와 감비아 정착지도 관리했다. 시에라리온은 영국령 서아프리카의 교육 중심지로 발전했다. 영국은 1827년 푸라 베이 칼리지를 설립했는데, 이곳은 서해안의 영어 사용 아프리카인들에게 매력적인 곳이 되었다. 100년 이상 동안 이곳은 서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유일한 유럽식 대학이었다. 새뮤얼 아자이 크라우더가 최초의 입학생이었다. 푸라 베이 칼리지는 곧 크리올/크리오인들과 영국령 서아프리카에서 고등 교육을 받고자 하는 다른 아프리카인들을 끌어들였다. 여기에는 나이지리아인, 가나인, 코트디부아르인 등이 포함되었으며, 특히 신학과 교육 분야에서 두드러졌다. 프리타운은 프리타운과 주변 지역의 우수한 학교들 덕분에 "아프리카의 아테네"로 알려졌다.

영국인들은 주로 프리타운의 크리오인들과 교류했으며, 크리오인들은 내륙의 원주민들과 대부분의 교역을 담당했다. 교육받은 크리오인들은 식민 정부에서 수많은 직책을 맡아 지위와 고임금 직위를 얻었다. 1884년~1885년 베를린 회담 이후, 영국은 유럽 열강들이 "실효적 점령"이라고 묘사한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내륙 지역에 대한 더 많은 지배권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고 결정했다. 1896년 영국은 이 지역들을 합병하여 시에라리온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영국은 이 지역에서 행정을 확장하기 시작하여 영국 시민들을 직책에 채용하고 크리오인들을 정부 직책은 물론 프리타운의 바람직한 주거 지역에서도 밀어냈다.
영국이 시에라리온을 합병하는 동안, 북부와 남부의 추장들은 식민 행정관들이 부과한 "오두막세"에 저항했다. 북부에서는 자신의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싸우던 림바족 추장 알마미 술루쿠가 있었는데, 그는 외교술을 사용하여 보호령 행정관들을 속이고, "오두막세"에 맞서 싸우던 카세의 저명한 템네족 추장 바이 부레를 돕기 위해 전사들을 보냈다. 이 전쟁은 나중에 오두막세 전쟁으로 알려졌다.
마담 요코(1849년경~1906년)는 교양과 야망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녀는 우호적인 소통 능력을 발휘하여 영국인들을 설득해 크파 멘데 추장령의 통제권을 얻었다. 그녀는 영국과의 우호 관계를 신뢰하지 않는 지역 추장들과 소통하기 위해 외교술을 사용했다. 마담 요코가 영국을 지지했기 때문에 일부 하위 추장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요코는 경찰 막사로 피신해야 했다. 그녀의 충성심에 대해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은메달을 받았다. 1906년까지 마담 요코는 새로운 영국 보호령에서 최고 추장으로 통치했다.

영국이 보호령을 합병하면서 원주민 추장들의 주권이 침해되었다. 영국은 이전처럼 개별적으로 추장들을 대하는 대신, 그들을 지방 정부 단위로 지정했다. 그들은 오랜 동맹이었던 바이 부레와 같은 추장들과도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고, 바이 부레는 나중에 오두막세 전쟁의 주요 선동자로 부당하게 묘사되었다.

보호령의 군정 총독이었던 프레더릭 카드 대령은 1898년 주택에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고 추장들에게 주민들을 동원하여 도로를 유지하도록 요구했다. 세금은 종종 주택 가치보다 높았으며, 24명의 추장이 카드에게 이것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명시한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들의 주민들은 생계형 농업에서 시간을 낼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세금 납부를 거부했고, 새로운 식민 요구 사항에 대한 긴장과 행정부의 추장들에 대한 의심이 오두막세 전쟁으로 이어졌다. 영국이 먼저 발포했다. 주로 템네족으로 구성된 북부 전선은 바이 부레가 이끌었다. 주로 멘데족으로 구성된 남부 전선은 다른 이유로 다소 늦게 분쟁에 참여했다.
몇 달 동안 부레의 전사들은 훨씬 강력한 영국군에 비해 우위를 점했지만 양측 모두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다. 부레는 1898년 11월 11일 자신의 민족 영토와 주택 파괴를 막기 위해 항복했다. 영국 정부는 관용을 권고했지만, 카드는 추장과 두 동맹국을 골드코스트로 추방할 것을 주장했고, 그의 정부는 추장의 전사 96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부레는 1905년에 귀국이 허용되어 카세의 추장직을 다시 맡았다. 오두막세 전쟁에서 템네족과 멘데족의 패배는 보호령과 식민 정부에 대한 대규모 저항을 종식시켰지만, 식민 기간 내내 간헐적인 폭동과 노동 불안이 계속되었다. 1955년과 1956년의 폭동에는 보호령의 "수만 명"의 시에라리온인이 참여했다.

지역 아프리카 엘리트들에 의해 계속 자행되던 국내 노예제는 1928년에 폐지되었다. 1935년의 주목할 만한 사건은 드비어스가 운영하는 시에라리온 셀렉션 트러스트에 광물 채굴 독점권을 부여한 것이었다. 이 독점권은 98년간 지속될 예정이었다. 동부의 다이아몬드 채굴과 기타 광물 채굴이 확대되면서 다른 지역에서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1924년 영국 정부는 시에라리온 행정을 식민지와 보호령으로 나누고 각각 다른 정치 체제를 적용했다. 식민지는 프리타운과 그 해안 지역이었고, 보호령은 지역 추장들이 지배하는 내륙 지역으로 정의되었다. 두 실체 간의 적대감은 1947년 식민지와 보호령 모두에 단일 정치 체제를 제공하려는 제안이 도입되면서 격렬한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대부분의 제안은 식민지보다 인구가 훨씬 많았던 보호령 지도자들로부터 나왔다. 이삭 월리스-존슨이 이끄는 크리오인들은 이 제안이 식민지에서 크리오인들의 정치력을 약화시킬 것이라며 반대했다.
1951년, 라미나 산코(본명: 에셀드레드 존스)는 밀턴 마르가이 경, 시아카 스티븐스, 모하메드 사누시 무스타파, 존 카레파-스마트, 칸데 부레, 알버트 마르가이 경, 아마두 우리, 반자 테잔-시 경을 포함한 여러 집단의 교육받은 보호령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보호령의 강력한 최고 추장들과 함께 시에라리온 인민당(SLPP)을 보호령의 정당으로 결성했다. 밀턴 마르가이 경이 이끄는 SLPP 지도부는 영국 및 프리타운에 기반을 둔 교육받은 크리오인 지배의 식민지와 협상하여 독립을 달성했다. 밀턴 마르가이의 능숙한 정치 덕분에 교육받은 보호령 엘리트들은 크리오인들의 비타협적인 태도에 맞서 최고 추장들과 힘을 합칠 수 있었다. 나중에 마르가이는 동일한 기술을 사용하여 반대파 지도자들과 온건한 크리오 세력들을 설득하여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획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