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코트디부아르는 서아프리카 남부 해안에 위치한 공화국이다. 북쪽으로 말리와 부르키나파소, 동쪽으로 가나, 서쪽으로 기니와 라이베리아에 접하며 남쪽으로는 기니만에 면한다. 법적 수도는 야무수크로이지만, 실제 경제 및 행정 중심지는 최대 도시인 아비장이다. 프랑스어가 공용어이며, 그 외에도 줄라어, 바울레어, 베테어 등 약 78개의 토착 언어가 사용된다. 인구는 약 3,150만 명(2024년 추산)이며, 이슬람교와 기독교 신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토착 신앙도 존재한다.
선사 시대부터 여러 왕국이 존재했던 코트디부아르 지역은 19세기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1960년 펠릭스 우푸에부아니의 주도로 독립을 달성한 후, 그의 장기 집권 하에 정치적 안정과 경제 성장을 이루어 "이부아르의 기적"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1993년 우푸에부아니 사망 이후 정치적 불안정이 시작되었고, 1999년 쿠데타와 두 차례의 내전(2002년~2007년, 2010년~2011년)을 겪으며 큰 혼란에 빠졌다. 내전은 알라산 와타라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종식되었고, 이후 경제 회복과 정치적 안정을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코트디부아르는 대통령 중심제 공화국으로, 행정부, 입법부(상원, 국민의회), 사법부의 삼권 분립 체제를 갖추고 있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특히 카카오 생산량은 세계 1위이며 커피, 고무, 야자유 등도 주요 수출품이다. 과거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빈곤, 실업, 아동 노동 문제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있다.
다양한 민족 구성과 풍부한 문화유산을 지닌 코트디부아르는 줄루글루 (Zouglou줄루글루프랑스어), 쿠페데칼레 (Coupé-Décalé쿠페데칼레프랑스어) 등의 독특한 음악 장르와 알파 블론디, 디디에 드로그바와 같은 세계적인 음악가 및 스포츠 스타를 배출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는 타이 국립공원, 코모에 국립공원, 그랑바상 역사 도시 등이 있다.
2. 국명
코트디부아르의 공식 국명은 République de Côte d'Ivoire레퓌블리크 드 코트디부아르프랑스어이며, 통칭은 Côte d'Ivoire코트디부아르프랑스어이다. 프랑스어로 "Côte"는 해안, "d'"는 "~의"를 의미하는 전치사 "de"의 축약형, "Ivoire"는 상아를 뜻하므로, 국명은 상아 해안(象牙海岸)을 의미한다. 이 이름은 15세기부터 유럽 상인들이 이 지역에서 상아를 주로 교역한 데서 유래했다. 과거에는 다른 언어로 의역되어 사용되기도 했는데, 영어로는 Ivory Coast아이보리 코스트영어, 독일어로는 Elfenbeinküste엘펜바인퀴스테독일어, 스페인어로는 Costa de Marfil코스타 데 마르필스페인어, 포르투갈어로는 Costa do Marfim코스타 두 마르핑포르투갈어 등으로 불렸다.
프랑스어에서는 둘 이상의 단어로 이루어진 고유명사를 하이픈으로 연결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Côte-d'Ivoire코트디부아르프랑스어로 표기되기도 하지만, 코트디부아르 정부는 하이픈이 없는 형태를 정식 국명으로 채택하고 있다.
1960년 독립 이후에도 여러 국가에서는 이러한 의역된 명칭을 사용하였으나, 코트디부아르 정부는 국제 관계에서 자국의 프랑스어 국명이 일관성 없이 번역되어 사용되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따라 1985년 10월 프랑코포니 국제 기구에서 프랑스어 국명인 "Côte d'Ivoire"를 다른 언어로 의역하지 않도록 요청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고, 1986년 4월 코트디부아르 정부는 모든 국가와 국제기구에 외교 의전상 공식 국명으로 프랑스어 명칭만을 사용해 줄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코트디부아르", 일본에서는 "코토지보와루"(コートジボワール),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커터디와"(科特迪瓦)와 같이 프랑스어 발음을 음역한 표기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영어권에서는 여전히 "Ivory Coast"라는 명칭이 언론 등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으며, 중화민국(타이완)에서는 "상아해안"(象牙海岸)이라는 의역 명칭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3. 역사
코트디부아르의 역사는 선사 시대부터 시작하여 여러 왕국의 흥망성쇠를 거쳐 프랑스 식민 통치, 독립, 그리고 현대의 정치적 격변과 발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단계를 포함한다. 이 과정에서 코트디부아르는 경제적 번영과 심각한 내홍을 모두 경험했다.
3.1. 초기 역사
코트디부아르 지역의 초기 인류 거주 시기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습한 기후로 인해 인류 유적이 잘 보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발견된 무기와 도구 파편들, 특히 셰일을 갈아 만든 석부(돌도끼)와 조리 및 어로 흔적들은 후기 구석기 시대(기원전 15,000년 ~ 기원전 10,000년) 또는 최소한 신석기 시대에 상당 규모의 인류가 거주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코트디부아르 최초의 거주민들은 영토 전역에 흔적을 남겼다. 역사학자들은 이들이 16세기 이전에 남쪽으로 이주해 온 현재 토착민들의 조상에 의해 대체되거나 흡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초기 집단에는 에호틸레족(아부아소), 코트로우족(프레스코), 제히리족(그랑라후), 에가족, 디에스족(디보) 등이 포함된다.
북아프리카 베르베르족 상인들의 연대기에서 처음으로 기록된 역사가 나타난다. 이들은 초기 고대 로마 시대부터 사하라 사막을 가로질러 소금, 노예, 금 등을 거래하는 캐러밴 무역을 수행했다. 사하라 횡단 무역로의 남쪽 종착지는 사막 가장자리에 위치했고, 여기서부터 보충적인 무역이 남쪽으로 열대 우림 가장자리까지 확장되었다. 가장 중요한 교역 중심지였던 젠네, 가오, 팀북투는 거대한 수단 제국들이 발전하는 중심지로 성장했다. 이들 제국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교역로를 통제하며 주변 국가들을 지배했고,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이슬람은 무슬림 베르베르인들에 의해 서부 수단 지역에 전파되었으며, 많은 주요 통치자들이 개종한 후 빠르게 확산되었다. 11세기경 수단 제국의 통치자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면서, 이슬람은 남쪽으로 현재의 코트디부아르 북부 지역까지 전파되었다.
가장 오래된 수단 제국인 가나 제국은 4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현재의 남동부 모리타니와 남부 말리를 아우르는 지역에서 번성했다. 11세기에 전성기를 맞았을 때, 그 영역은 대서양에서 팀북투까지 확장되었다. 가나 제국 쇠퇴 후, 말리 제국이 강력한 무슬림 국가로 성장하여 14세기 초에 절정을 이루었다. 코트디부아르 내에서 말리 제국의 영토는 오디엔네 주변의 북서쪽 모퉁이에 국한되었다. 14세기 말부터 시작된 말리 제국의 느린 쇠퇴는 내부 분열과 속국들의 반란으로 이어졌으며, 그중 하나인 송가이 제국은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제국으로 번성했다. 송가이 제국 또한 내부 분열로 약화되어 파벌 간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혼란은 대부분의 민족 이동을 남쪽의 삼림 지대로 촉발했다. 국토 남반부를 덮고 있는 울창한 열대 우림은 북부에서 발생했던 대규모 정치 조직의 형성에 장벽으로 작용했다. 주민들은 마을이나 마을 군집 단위로 생활했으며, 외부 세계와의 접촉은 장거리 상인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주민들은 농업과 수렵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유럽인 도래 이전 근대 초기 코트디부아르에는 다섯 개의 중요한 국가가 번성했다. 이슬람교를 믿는 콩 제국은 18세기 초 줄라족에 의해 북중부 지역에 세워졌는데, 이 지역에는 말리 제국 하의 이슬람화를 피해 온 세누포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콩은 농업, 무역, 공예의 번영하는 중심지가 되었지만, 민족적 다양성과 종교적 불화로 인해 점차 왕국이 약화되었다. 1895년 콩 시는 와술루 제국의 사모리 투레에게 약탈당하고 정복되었다.
갸아만 왕국은 17세기 아칸족의 일파인 아브롱족에 의해 세워졌는데, 이들은 현재의 가나 지역에서 발전하고 있던 아샨티 연맹을 피해 온 사람들이었다. 봉두쿠 남쪽에 정착한 아브롱족은 점차 베고 시장 도시에서 최근에 도착한 봉두쿠의 줄라족에 대한 헤게모니를 확장했다. 봉두쿠는 상업과 이슬람의 주요 중심지로 발전했다. 왕국의 쿠란 학자들은 서아프리카 전역에서 학생들을 끌어들였다. 17세기 중반 코트디부아르 중동부에서는 아샨티를 피해 온 다른 아칸족 집단이 사카수에 바울레 왕국을 세우고, 인데니에 왕국과 산위 왕국이라는 두 개의 아니인 왕국을 건설했다.
바울레족은 아샨티족과 마찬가지로 세 명의 연속적인 통치자 아래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정치 및 행정 구조를 발전시켰으나, 결국 더 작은 추장국으로 분열되었다. 왕국이 해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레족은 프랑스의 정복에 강력히 저항했다. 아니인 왕국의 통치자 후손들은 코트디부아르 독립 이후에도 오랫동안 분리된 정체성을 유지하려 했으며, 1969년에는 산위가 코트디부아르에서 분리되어 독립 왕국을 형성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3.2. 프랑스 식민 시대

인접한 가나에 비해 코트디부아르는 노예무역과 노예 습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서양 노예 무역으로 인한 고통은 적었다. 유럽의 노예선과 상선들은 해안가의 다른 지역을 선호했다. 최초의 기록된 유럽인의 서아프리카 항해는 1482년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서아프리카 최초의 프랑스 정착지인 생루이는 17세기 중반 세네갈에 세워졌고, 거의 같은 시기에 네덜란드는 다카르 앞바다의 고레섬에 있는 정착지를 프랑스에 할양했다. 1687년 골드 코스트(현재 가나)와의 국경 근처 아시니마피아에 프랑스 선교부가 설립되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현지 노예 관행을 억압하고 상인들에게 노예 거래를 금지했다.
그러나 아시니의 생존은 위태로웠고, 프랑스는 19세기 중반까지 코트디부아르에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했다. 1843년~1844년, 프랑스 제독 루이 에두아르 부에윌로메즈는 그랑바상과 아시니 지역의 왕들과 조약을 체결하여 그들의 영토를 프랑스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프랑스 탐험가, 선교사, 무역 회사, 군인들은 점차 석호 지역에서 내륙으로 프랑스 통제 지역을 확장해 나갔다. 완전한 평정은 1915년에야 이루어졌다.
해안 지역 활동은 특히 세네갈강과 니제르강이라는 두 개의 큰 강을 따라 내륙에 대한 유럽의 관심을 자극했다. 서아프리카에 대한 프랑스의 본격적인 탐험은 19세기 중반에 시작되었지만, 정부 정책보다는 개인의 주도에 더 의존하여 느리게 진행되었다. 1840년대에 프랑스는 현지 서아프리카 추장들과 일련의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가 기니만 연안에 영구적인 교역 중심지로 사용할 요새화된 전초 기지를 건설할 수 있도록 했다. 코트디부아르 최초의 전초 기지에는 아시니와 식민지 최초의 수도가 된 그랑바상이 포함되었다. 조약은 전초 기지 내 프랑스 주권과 토지 사용에 대해 현지 추장들에게 매년 지불되는 수수료 또는 쿠툼(coutume)과 교환하여 교역 특권을 규정했다. 이 협정은 무역이 제한적이고 조약 의무에 대한 오해가 자주 발생했기 때문에 프랑스에게 완전히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정부는 무역 확대를 희망하며 조약을 유지했다. 프랑스는 또한 기니만 연안에서 영국의 영향력 증대를 막기 위해 이 지역에 주둔을 유지하고자 했다.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독일이 프랑스의 알자스로렌 지방을 합병하자, 프랑스 정부는 처음에는 식민지 야심을 포기하고 서아프리카 교역소에서 군사 주둔군을 철수시켜 현지 상인들에게 맡겼다. 그랑바상의 교역소는 마르세유 출신의 선주 아르튀르 베르디에에게 맡겨졌고, 그는 1878년 코트디부아르 설립지의 상주 관리관으로 임명되었다.
1886년, 프랑스는 유효 점령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서아프리카 해안 교역소에 대한 직접 통제를 다시 맡고 내륙 탐험 프로그램을 가속화했다. 1887년, 루이귀스타브 빙어 중위는 코트디부아르 내륙 일부를 횡단하는 2년간의 여정을 시작했다. 여정이 끝날 무렵, 그는 코트디부아르에 프랑스 보호령을 설립하는 4개의 조약을 체결했다. 또한 1887년, 베르디에의 대리인 마르셀 트레슈라플렌은 니제르강 분지 상류에서 코트디부아르를 거쳐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5개의 추가 협정을 협상했다.

1880년대 말까지 프랑스는 해안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했고, 1889년 영국은 이 지역에서 프랑스의 주권을 인정했다. 같은 해 프랑스는 트레슈라플렌을 이 지역의 명목상 총독으로 임명했다. 1893년 코트디부아르는 그랑바상을 수도로 하는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고, 빙어 대위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892년 라이베리아와의 협정과 1893년 영국과의 협정으로 식민지의 동쪽과 서쪽 경계가 결정되었지만, 북쪽 경계는 프랑스 정부가 경제 및 행정적 이유로 어퍼볼타(현재의 부르키나파소)와 프랑스령 수단(현재의 말리) 일부를 코트디부아르에 편입하려는 노력 때문에 1947년까지 확정되지 않았다.
프랑스의 주요 목표는 수출품 생산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커피, 코코아, 야자유 작물이 곧 해안을 따라 심어졌다. 코트디부아르는 유럽인 정착민 인구가 상당한 유일한 서아프리카 국가로 두드러졌다. 서부 및 중앙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에서는 식민지로 이주한 유럽인들이 주로 관료였다. 결과적으로 프랑스 시민들은 코코아, 커피, 바나나 플랜테이션의 3분의 1을 소유하고 현지 강제 노동 제도를 채택했다.

프랑스 통치 초기에는 프랑스 군대가 내륙으로 파견되어 새로운 초소를 건설했다. 아프리카인들은 보호 조약이 발효된 지역에서조차 프랑스의 침투와 정착에 저항했다. 가장 큰 저항을 보인 인물 중에는 사모리 투레가 있었는데, 그는 1880년대와 1890년대에 현재의 기니, 말리, 부르키나파소, 코트디부아르의 넓은 지역에 걸쳐 와술루 제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자체적으로 총기를 제조하고 수리할 수 있는 투레의 대규모 정예군은 이 지역 전역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프랑스는 투레의 확장과 정복에 군사적 압력으로 대응했다.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투레에 대한 프랑스의 군사 작전은 1890년대 중반에 격화되어 1898년 그가 체포되고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00년 프랑스가 식민지의 공공 사업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위해 인두세를 부과하자 항의가 일어났다. 많은 이부아르인들은 프랑스가 현지 왕들에게 쿠툼(관습적 공물)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고 느꼈기 때문에 이 세금을 보호령 조약 위반으로 보았다. 내륙의 많은 사람들은 또한 이 세금을 굴욕적인 복종의 상징으로 여겼다. 1905년 프랑스는 대부분의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에서 공식적으로 아프리카의 노예제를 폐지했다. 1904년부터 1958년까지 코트디부아르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연방의 일부였다. 프랑스 제3공화국 하에서 식민지이자 해외 영토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는 코트디부아르에서 연대를 조직하여 프랑스에서 싸우게 했고, 식민지 자원은 1917년부터 1919년까지 배급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까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정부 업무는 파리에서 관리되었다. 서아프리카에서의 프랑스 정책은 주로 "연합" 철학에 반영되었는데, 이는 코트디부아르의 모든 아프리카인이 공식적으로 프랑스 "신민"이었지만 아프리카나 프랑스에서 대표권을 가질 권리는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프랑스 식민 정책은 문화 동화와 연합의 개념을 통합했다. 프랑스 문화의 우월성을 가정하여, 실제로 동화 정책은 프랑스 언어, 제도, 법률, 관습을 식민지로 확장하는 것을 의미했다. 연합 정책 또한 식민지에서 프랑스인의 우월성을 확인했지만, 식민자와 피식민자에 대해 서로 다른 제도와 법률 체계를 수반했다. 이 정책 하에서 코트디부아르의 아프리카인들은 프랑스의 이익과 양립하는 한 자신들의 관습을 보존할 수 있었다.
프랑스 행정 실무 교육을 받은 토착 엘리트들은 프랑스인과 아프리카인 사이의 중개 집단을 형성했다. 1930년 이후 소수의 서구화된 이부아르인들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신청할 권리가 주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부아르인들은 프랑스 신민으로 분류되어 연합 원칙에 따라 통치되었다. 프랑스의 신민으로서 문명화된 엘리트 이외의 원주민들은 정치적 권리가 없었다. 그들은 세금 책임의 일환으로 광산, 농장, 짐꾼, 공공 사업에 징집되었다. 그들은 군 복무를 해야 했고, 별도의 법률 제도인 앵디제나(indigénat, 원주민법)의 적용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비시 정권은 1943년까지 통제권을 유지했으며, 그 후 샤를 드골 장군의 임시 정부 구성원들이 모든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통제권을 장악했다. 1944년 브라자빌 회의, 1946년 프랑스 제4공화국의 제1차 제헌 의회,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프리카인들의 충성에 대한 프랑스의 감사는 1946년 광범위한 정부 개혁으로 이어졌다. 모든 아프리카 "신민"에게 프랑스 시민권이 부여되었고, 정치적으로 조직할 권리가 인정되었으며, 다양한 형태의 강제 노동이 폐지되었다. 1944년에서 1946년 사이에 프랑스 정부와 코트디부아르 임시 정부 간에 많은 전국 회의와 제헌 의회가 열렸다. 정부 개혁은 1946년 말에 수립되어 프랑스의 식민 통치 하에 있는 모든 아프리카 "신민"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했다.
1958년까지 파리에서 임명된 총독들은 직접적이고 중앙집권적인 행정 체제를 사용하여 코트디부아르 식민지를 관리했으며, 이부아르인들이 정책 결정에 참여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프랑스 식민 행정부는 또한 분할 통치 정책을 채택하여 교육받은 엘리트들에게만 동화 사상을 적용했다. 프랑스인들은 또한 소수이지만 영향력 있는 이부아르 엘리트들이 현상 유지에 충분히 만족하여 반프랑스 감정과 독립 요구를 발전시키지 않도록 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연합 관행에 강력히 반대했지만, 교육받은 이부아르인들은 프랑스로부터의 완전한 독립보다는 동화를 통해 프랑스 식민 체제에서 평등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전후 개혁을 통해 동화 교리가 시행된 후, 이부아르 지도자들은 동화조차도 이부아르인에 대한 프랑스인의 우월성을 의미하며 차별과 불평등은 독립을 통해서만 끝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3.3. 독립과 초기 발전

바울레족 추장의 아들인 펠릭스 우푸에부아니는 코트디부아르 독립의 아버지가 되었다. 1944년, 그는 자신과 같은 아프리카 코코아 농부들을 위해 국내 최초의 농업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식민 정책이 프랑스 농장주들을 우대하는 것에 분노한 조합원들은 자신들의 농장을 위한 이주 노동자들을 모집하기 위해 단결했다. 우푸에부아니는 곧 두각을 나타내었고 1년 안에 파리의 프랑스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년 후 프랑스는 강제노동을 폐지했다. 우푸에부아니는 프랑스 정부와 강력한 관계를 구축했으며, 코트디부아르가 이 관계로부터 이익을 얻을 것이라는 신념을 표명했고, 실제로 여러 해 동안 그러했다. 프랑스는 그를 장관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아프리카인 최초로 유럽 정부의 장관이 된 사례였다.
프랑스와의 관계에서 전환점은 1956년 해외개혁법(루아 카드르)으로, 이 법은 파리에서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선출된 영토 정부로 여러 권한을 이양하고 남아있는 투표 불평등을 제거했다. 1958년 12월 4일, 코트디부아르는 프랑스 연합을 대체한 프랑스 공동체의 자치 회원이 되었다.
1960년까지 코트디부아르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번영하는 국가였으며, 이 지역 총수출의 40% 이상을 차지했다. 우푸에부아니가 초대 대통령이 되자, 그의 정부는 농산물 생산을 더욱 촉진하기 위해 농부들에게 좋은 가격을 제시했고, 주변 국가로부터의 상당한 노동자 이민으로 생산량이 더욱 증대되었다. 커피 생산량은 크게 증가하여 코트디부아르를 브라질과 콜롬비아에 이어 세계 3위 생산국으로 만들었다. 1979년까지 코트디부아르는 세계 최대 코코아 생산국이 되었다. 또한 아프리카 최대의 파인애플 및 야자유 수출국이 되었다. 프랑스 기술자들이 "이부아르의 기적"에 기여했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독립 후 유럽인들을 몰아냈지만, 코트디부아르에서는 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프랑스 공동체는 독립 전 3만 명에서 1980년 6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대부분 교사, 관리자, 고문이었다. 20년 동안 경제는 거의 10%에 달하는 연간 성장률을 유지했는데, 이는 아프리카의 비석유 수출국 중 가장 높은 수치였다.
우푸에부아니의 일당 통치는 정치적 경쟁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2000년에 코트디부아르 대통령이 된 로랑 그바그보는 이부아르 인민 전선을 창설하여 우푸에부아니의 분노를 산 후 1980년대에 국외로 도피해야 했다. 우푸에부아니는 계속해서 자신을 선출한 국민들의 광범위한 지지에 의존했다. 그는 대규모 프로젝트 개발에 중점을 둔다는 비판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고향 마을인 야무수크로를 새로운 정치 수도로 바꾸는 데 수백만 달러를 쓴 것이 낭비라고 느꼈지만, 다른 사람들은 국가 중심부에 평화, 교육, 종교의 중심지를 개발하려는 그의 비전을 지지했다. 1980년대 초, 세계 경기 침체와 지역 가뭄은 이부아르 경제에 충격파를 던졌다. 목재 과잉 벌채와 설탕 가격 폭락으로 국가의 대외 부채는 3배로 증가했다. 경기 침체로 인한 실업률 악화와 함께 마을 주민들의 유입으로 아비장의 범죄율이 급격히 증가했다. 1990년, 수백 명의 공무원들이 파업에 돌입했고, 제도적 부패에 항의하는 학생들이 합류했다. 이러한 불안은 정부가 다당제 민주주의를 지지하도록 강요했다. 우푸에부아니는 점점 쇠약해져 1993년에 사망했다. 그는 앙리 코낭 베디에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3.4. 정치적 불안정과 내전
우푸에부아니 대통령 사후 코트디부아르는 정치적 불안정, 쿠데타, 그리고 두 차례의 내전을 겪으며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 이러한 사건들은 국가의 사회 경제적 발전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으며, 국제사회의 개입을 초래하기도 했다.
3.4.1. 베디에 정권과 1999년 쿠데타
앙리 코낭 베디에는 우푸에부아니 대통령 사후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1995년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야당 지지자 수백 명을 투옥하는 등 정치적 장악력을 강화했다. 반대로 경제 전망은 표면적으로나마 개선되어 인플레이션이 감소하고 외채를 청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우푸에부아니가 민족 갈등을 피하기 위해 매우 신중했고 이웃 국가 출신 이민자들에게 행정직을 개방했던 것과는 달리, 베디에는 그의 경쟁자인 알라산 와타라(와타라는 북부 이부아르 출신 부모를 두었음)가 향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부아리테'(Ivoirité, 이부아르인다움)라는 개념을 강조했다. 외국 출신자들이 이부아르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에 이 정책은 많은 이부아르 국적자들을 배제했다. 다양한 민족 집단 간의 관계는 긴장되었고, 이는 이후 수십 년 동안 두 차례의 내전으로 이어졌다.
마찬가지로 베디에는 군대에서 많은 잠재적 반대자들을 배제했다. 1999년 말, 불만을 품은 장교 그룹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로베르 게이 장군을 권좌에 앉혔다. 베디에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새로운 지도부는 범죄와 부패를 줄였고, 장군들은 긴축 정책을 강요하며 낭비 없는 사회를 위해 거리에서 캠페인을 벌였다.
3.4.2. 제1차 코트디부아르 내전
2000년 10월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는데, 이 선거에서 로랑 그바그보가 게이와 경쟁했지만 평화롭지 못했다. 선거를 앞두고 군사적, 시민적 불안이 팽배했다. 약 180명의 사망자를 낸 대중 봉기 이후 게이는 신속하게 그바그보로 교체되었다. 와타라는 그의 부르키나파소 국적 의혹으로 인해 대법원에서 자격이 박탈되었다. 헌법은 비시민권자의 대통령 출마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는 그의 지지자들이 수도 야무수크로에서 폭동 진압 경찰과 충돌하는 격렬한 시위를 촉발시켰는데, 그의 지지자들은 주로 북부 출신이었다.
2002년 9월 19일 새벽, 그바그보가 이탈리아에 있는 동안 무장 봉기가 발생했다. 제대될 예정이었던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여러 도시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아비장의 주요 헌병대 막사 전투는 오전 중반까지 지속되었지만, 점심시간까지 정부군은 아비장을 확보했다. 그러나 그들은 북부 지역의 통제권을 잃었고, 반군은 북부 도시 부아케에 거점을 마련했다. 반군이 다시 아비장으로 진격하겠다고 위협하자, 프랑스는 자국 기지에서 군대를 배치하여 그들의 진격을 막았다. 프랑스는 자국민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그들의 배치는 정부군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프랑스가 어느 한쪽을 돕고 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각 진영은 프랑스가 상대방을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프랑스의 조치가 장기적으로 상황을 개선했는지 악화시켰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날 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논란의 대상이다. 정부는 로베르 게이 전 대통령이 쿠데타 시도를 주도했다고 주장했고, 국영 TV는 거리에서 그의 시신 사진을 보여주었다. 반면, 그와 15명이 자택에서 살해당했고 그의 시신이 그를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 거리로 옮겨졌다는 반박 주장이 제기되었다. 와타라는 독일 대사관으로 피신했고, 그의 집은 불탔다. 그바그보 대통령은 이탈리아 방문을 중단하고 귀국 후 TV 연설에서 일부 반군이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이 사는 빈민가에 숨어 있다고 밝혔다. 헌병과 자경단은 수천 채의 집을 불도저로 밀고 불태웠으며 주민들을 공격했다. 북부 주민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던 반군과의 초기 휴전은 단명했고, 주요 코코아 재배 지역을 둘러싼 전투가 재개되었다. 프랑스는 휴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 출신의 군벌과 전투원을 포함한 민병대들은 위기를 틈타 서부 지역 일부를 장악했다.
2003년 1월, 그바그보와 반군 지도자들은 "거국 정부"를 구성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통금 시간이 해제되었고 프랑스 군대가 서부 국경을 순찰했다. 거국 정부는 불안정했고, 양측 모두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핵심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2004년 3월, 야당 집회에서 120명이 사망했고, 이후 폭력 사태로 외국인들이 대피했다. 한 보고서는 이 살해가 계획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유엔 평화유지군이 "신뢰 지대"를 유지하기 위해 배치되었지만, 그바그보와 야당 간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다.
2004년 11월 초, 반군이 무장 해제를 거부하여 평화 협정이 사실상 붕괴된 후, 그바그보는 반군에 대한 공습을 명령했다. 2004년 11월 6일 부아케에서 이러한 공습 중 하나가 프랑스 군인들을 강타하여 9명이 사망했다. 이부아르 정부는 실수라고 밝혔지만, 프랑스는 고의적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는 대부분의 이부아르 군용기(Su-25기 2대와 헬리콥터 5대)를 파괴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아비장에서는 프랑스에 대한 격렬한 보복 폭동이 발생했다.
그바그보의 원래 대통령 임기는 2005년 10월 30일에 만료되었지만, 평화로운 선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그의 임기는 아프리카 연합이 마련하고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가 승인한 계획에 따라 최대 1년 연장되었다. 2006년 10월 말 마감일이 다가오면서, 그 시점까지 선거가 치러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여겨졌고, 야당과 반군은 그바그보의 임기 추가 연장 가능성을 거부했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2006년 11월 1일 그바그보의 임기를 1년 더 연장하는 것을 승인했지만, 결의안은 샤를 코낭 바니 총리의 권한 강화를 규정했다. 그바그보는 다음날 결의안 중 헌법 위반으로 간주되는 요소는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7년 3월 4일 정부와 반군, 즉 코트디부아르 신군 사이에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고, 이후 신군의 지도자인 기욤 소로가 총리가 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일부 관찰자들에게 그바그보의 입지를 실질적으로 강화시킨 것으로 여겨졌다. 유니세프에 따르면, 내전이 끝날 무렵 물과 위생 기반 시설이 크게 손상되었다. 전국 지역 사회는 상수도 수리가 필요했다.
3.4.3. 제2차 코트디부아르 내전


2005년에 치러졌어야 할 대통령 선거는 2010년 11월까지 연기되었다. 예비 결과는 그바그보가 전 총리 와타라에게 패배했음을 보여주었다. 집권 여당인 이부아르 인민 전선(FPI)은 신군 반군이 장악한 북부 주에서 대규모 부정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헌법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러한 주장은 (아프리카 연합 참관단과는 달리) 유엔 참관단에 의해 반박되었다. 결과 보고서는 심각한 긴장과 폭력 사건을 초래했다. 그바그보 지지자들로 구성된 헌법위원회는 북부 7개 주의 결과를 불법으로 선언하고, 선거관리위원회가 보고한 와타라의 54% 득표 대신 그바그보가 51%의 득표율로 선거에서 승리했다고 발표했다. 그바그보 취임 후, 대부분의 국가와 유엔이 승자로 인정한 와타라는 별도의 취임식을 조직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내전 재발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켰고, 수천 명의 난민이 국외로 탈출했다. 아프리카 연합은 분쟁 중재를 위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전 대통령 타보 음베키를 파견했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의 입장에 근거하여 와타라를 선거 승자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했고, ECOWAS는 코트디부아르의 모든 의사 결정 기구에서 자격을 정지시켰으며, 아프리카 연합 또한 코트디부아르의 회원 자격을 정지시켰다.
2010년, 코트디부아르 군 대령 은게산 야오는 미국 이민세관단속국의 1년간의 작전 끝에 뉴욕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유엔 금수 조치를 위반하여 무기와 군수품(권총 4,000정, 탄약 20만 발, 최루탄 5만 발)을 조달하고 불법 수출한 혐의를 받았다. 다른 여러 코트디부아르 장교들은 외교 여권을 소지하고 있어 석방되었다. 그의 공범인 국제 무역상 마이클 배리 쇼어는 버지니아에 거주하고 있었다.

2010년 대통령 선거는 2010-2011년 코트디부아르 위기와 제2차 코트디부아르 내전으로 이어졌다. 국제기구들은 양측 모두에 의한 수많은 인권 침해를 보고했다. 두에쿠에에서는 수백 명이 사망했다. 인근 블롤레캥에서는 수십 명이 사망했다. 유엔군과 프랑스군은 그바그보에 대한 군사 행동을 취했다. 그바그보는 2011년 4월 11일 그의 관저에 대한 급습 후 구금되었다. 코트디부아르는 전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와타라 대통령이 경제를 재건하고 이부아르인들을 재통합하는 엄청난 도전에 직면한 것으로 관찰되었다. 그바그보는 2016년 1월 국제형사재판소(ICC)로 이송되었다. 그는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2019년 1월 조건부 석방되었다. 벨기에가 수용국으로 지정되었다.
3.5. 와타라 정권과 현대
알라산 와타라는 2010년부터 코트디부아르를 통치하고 있다. 와타라 대통령은 2015년 코트디부아르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2020년 11월, 그는 야당이 보이콧한 선거에서 3선에 성공했다. 그의 반대자들은 와타라가 3선에 출마하는 것이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코트디부아르 헌법위원회는 2020년 11월 와타라 대통령의 3선 연임을 공식적으로 비준했다.
2022년 12월, 코트디부아르의 전력 생산 회사인 Compagnie ivoirienne d'électricité콤파니 이부아리엔 드일렉트리시테프랑스어(CIE)는 분디알리에 37.5 MW 규모의 첫 태양광 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한 위원회를 출범시켰으며, 이는 10 MW 리튬 배터리 에너지 저장 시스템으로 뒷받침된다.
2023년 10월 6일, 와타라 대통령은 정부를 해산하고 파트리크 아치 총리를 해임했다. 이후 로베르 부그레 망베가 2023년 10월 17일 신임 총리로 임명되었다.
2025년 1월 1일, 코트디부아르는 프랑스군이 자국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했으며, 이는 이 지역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조치가 될 것이다. 2025년 2월 20일, 프랑스는 코트디부아르 내 유일한 군사 기지를 현지 당국에 공식적으로 이양하며 양국 관계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 결정은 차드, 세네갈, 말리, 니제르, 부르키나파소 등지에서의 유사한 철수에 이어 서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의 군사 주둔을 줄이려는 광범위한 전략과 일치한다. 이전에 제43해병보병대대(43rd BIMA)가 주둔했던 이 기지는 이부아르 통제 하에 이전되었으며, 국가 초대 육군 참모총장을 기리기 위해 토마스 다캥 와타라 캠프로 개명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코트디부아르의 국가 주권에 대한 강조와 군 현대화 노력을 반영한다.
4. 지리
코트디부아르는 서아프리카의 사하라 이남 지역에 위치한 국가이다. 서쪽으로는 라이베리아와 기니, 북쪽으로는 말리와 부르키나파소, 동쪽으로는 가나, 남쪽으로는 기니만(대서양)과 접한다. 국토는 북위 4도에서 11도, 서경 2도에서 9도 사이에 위치한다. 국토의 약 64.8%가 농경지이며, 경작 가능지는 9.1%, 영구 목초지는 41.5%, 영구 작물 재배지는 14.2%이다. 수질 오염은 현재 코트디부아르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이다. 국토 총면적은 32.25 만 km2이며, 총 해안선 길이는 515 km이다. 코트디부아르는 아프리카에서 28번째, 세계에서 69번째로 큰 나라이다. 지형은 비교적 낮으며 평균 해발고도는 250 m이다. 가장 높은 산봉우리인 리처드-몰라르산(몽 니바)은 해발 1752 m이다. 약 30개의 섬이 있다.
4.1. 지형과 국경
코트디부아르는 남쪽의 해안 저지대, 내륙으로 갈수록 점차 고도가 높아지는 고원 지대, 그리고 서부 국경 지역의 산악 지대로 구성된다. 해안 저지대는 석호와 열대 우림이 발달해 있으며, 주요 도시인 아비장이 이 지역에 위치한다. 내륙 고원은 사바나 지형이 주를 이루며, 북쪽으로 갈수록 건조해진다. 서부의 님바산맥은 기니, 라이베리아와의 국경을 이루며, 코트디부아르 최고봉인 리처드-몰라르산(해발 1752 m)이 이곳에 있다. 주요 강으로는 코모에강, 방다마강, 사산드라강, 카발리강 등이 있으며, 대부분 남쪽 기니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국경은 동쪽으로 가나, 북쪽으로 부르키나파소와 말리, 서쪽으로 기니와 라이베리아와 접한다.
4.2. 기후
코트디부아르의 기후는 대체로 따뜻하고 습하며, 남부 해안의 적도 기후에서 중부의 열대 몬순 기후, 북부 끝의 반건조 사바나 기후까지 다양하다. 주요 계절은 세 가지로 나뉜다: 따뜻하고 건조한 시기(11월~3월), 덥고 건조한 시기(3월~5월), 덥고 습한 시기(6월~10월). 평균 기온은 25 °C에서 32 °C 사이이며, 최저 10 °C에서 최고 40 °C까지 분포한다. 연간 강수량은 남부 해안 지역에서 2000 mm 이상에 달하지만, 북부로 갈수록 감소하여 1000 mm 내외를 기록한다.
4.3. 생물 다양성
코트디부아르는 서아프리카에서 생물 다양성이 가장 풍부한 국가 중 하나이다. 223종의 포유류, 702종의 조류, 161종의 파충류, 85종의 양서류, 111종의 어류를 포함하여 1,200종 이상의 동물과 4,700종 이상의 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야생동물의 대부분은 국가의 험준한 내륙 지역에 서식한다. 코트디부아르에는 9개의 국립공원이 있으며, 그중 가장 큰 곳은 아사니 국립공원으로 약 1.70 만 ha의 면적을 차지한다.
코트디부아르에는 동기니 숲, 기니 산지림, 서기니 저지대숲, 기니 숲-사바나 모자이크, 서수단 사바나, 기니 맹그로브 등 6개의 육상 생태 지역이 있다. 2018년 산림경관보전지수 (Forest Landscape Integrity Index포레스트 랜드스케이프 인테그리티 인덱스영어) 평균 점수는 3.64/10으로, 전 세계 172개국 중 143위를 기록했다. 주요 국립공원으로는 타이 국립공원, 코모에 국립공원, 마라후에 국립공원 등이 있으며, 이들 지역은 다양한 동식물의 중요한 서식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삼림 벌채, 농경지 확장, 밀렵 등으로 인해 생물 다양성이 위협받고 있어 보전 노력이 시급한 상황이다.
5. 정치
코트디부아르의 정치는 대통령 중심제 공화국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며, 코트디부아르의 대통령이 국가 원수이자 정부 수반이다. 다당제를 채택하고 있으나, 역사적으로 특정 정당이 장기간 집권하거나 정치적 불안정을 겪기도 했다. 행정권은 대통령과 정부에 있으며, 입법권은 정부와 코트디부아르 의회가 공유한다.
5.1. 정부 구조
코트디부아르는 삼권분립에 기초한 대통령 중심 공화제 국가이다.
행정부는 코트디부아르의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며, 대통령은 국민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되고 임기는 5년이다. 대통령은 총리와 각료를 임명한다. 현재 대통령은 알라산 와타라이다. 총리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정부를 운영하고 국정을 총괄한다. 내각은 각 부처의 장관들로 구성되어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한다.
입법부는 2016년 신헌법에 따라 양원제로 전환되었다. 상원(Sénat)은 간접 선거로 선출된 의원과 대통령이 임명한 전문가로 구성되며, 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는 국민 직접 선거로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된다. 국민의회 의원의 임기는 5년이며, 현재 255석이다. 상원 의원의 임기도 5년이며, 총 99석 중 3분의 2는 간접선거로, 3분의 1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의회는 법률 제정, 예산 심의, 정부 감독 등의 기능을 수행한다.
사법부는 대법원(Cour Suprême)을 최고 법원으로 하며, 그 아래에 항소 법원과 지방 법원 등이 있다. 헌법위원회(Conseil Constitutionnel)는 법률의 위헌 여부 심사, 선거 관련 분쟁 처리 등의 기능을 담당한다. 사법부의 독립은 헌법으로 보장되지만, 실제 운영에서는 행정부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평가도 있다.
1983년부터 코트디부아르의 수도는 야무수크로이지만, 아비장이 행정 중심지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대사관을 아비장에 두고 있다.
5.2. 주요 정당 및 선거
코트디부아르는 다당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여러 정당이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정당으로는 다음과 같은 정당들이 있다:
- 우푸에주의자 민주 평화 연합 (RHDP): 현재 집권당으로, 알라산 와타라 대통령이 이끌고 있다. 중도우파 성향으로 평가받는다.
- 코트디부아르 민주당 (PDCI):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초대 대통령이 창당한 역사 깊은 정당으로, 오랫동안 집권했다. 현재는 주요 야당 중 하나이다.
- 이부아르 인민 전선 (FPI): 로랑 그바그보 전 대통령이 창당한 정당으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회원이다. 내전 이후 세력이 약화되었으나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최근 주요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다:
- 2020년 대통령 선거: 알라산 와타라 대통령이 야당의 보이콧 속에서 3선에 성공했다. 야당은 와타라 대통령의 3선 출마가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선거 결과에 불복했으나, 헌법위원회는 선거 결과를 확정했다.
- 2021년 총선: 집권당인 RHDP가 과반수를 확보했으나, PDCI와 FPI를 중심으로 한 야당 연합도 상당수 의석을 차지하며 정치적 균형을 이루었다.
코트디부아르의 정치 지형은 과거 민족 갈등과 내전의 영향으로 복잡한 양상을 보여왔다. '이부아리테'(Ivoirité) 정책으로 인한 갈등, 선거 결과 불복, 쿠데타 등 정치적 불안정이 반복되었으나, 최근에는 점진적인 안정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정치적 긴장 요소는 남아 있으며, 민주주의 발전과 국민 통합이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5.3. 대외 관계

코트디부아르는 독립 이후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이는 외교 정책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냉전 시대에는 친서방 정책을 펼쳤고, 주변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경제 및 정치 협력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주요 외교 관계는 다음과 같다:
- 프랑스: 역사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프랑스는 코트디부아르의 주요 교역 상대국이자 투자국이며, 정치적 위기 시 군사적 개입을 하기도 했다. 최근 프랑스군의 철수가 발표되었으나, 여전히 중요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 서아프리카 국가 경제 공동체 (ECOWAS): 창립 회원국으로, 역내 평화 유지, 경제 통합, 정치적 안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ECOWAS는 코트디부아르 내전 당시 중재 및 평화 유지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아프리카 연합 (AU): 창립 회원국으로, 아프리카 대륙의 평화, 안보, 발전을 위한 노력에 동참하고 있다.
- 국제 연합 (UN): 1960년 독립과 함께 가입했으며, 유엔의 다양한 기구 및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내전 당시 유엔 평화유지군(ONUCI)이 파견되어 평화 정착에 기여했다.
- 미국 및 유럽 연합 국가: 경제 협력, 민주주의 및 인권 증진 분야에서 관계를 맺고 있다.
- 중국: 최근 경제 협력이 확대되고 있으며, 인프라 투자 등을 중심으로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코트디부아르는 농산물 공정 무역, 국제 평화 유지, 난민 문제 해결 등 국제 사회의 다양한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이슬람 협력 기구, 프랑코포니 국제 기구, 라틴 연합, 남대서양 평화 협력 지대 등 여러 국제기구의 회원국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수자원 및 위생 인프라 강화를 위해 유니세프 등 국제기구 및 기업들과 협력하고 있으며, 유엔의 지속가능 개발 목표(SDGs) 달성을 위한 노력에도 참여하고 있다.
5.3.1. 대한민국과의 관계
대한민국과 코트디부아르는 1961년 7월 23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1966년 대한민국은 코트디부아르의 당시 수도였던 아비장에 주코트디부아르 대한민국 대사관을 설치했다. 코트디부아르는 일본 도쿄에 주일 코트디부아르 대사관을 두고 있으며, 이 대사관에서 대한민국 관련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양국은 의료기술협정, 문화협정, 경제기술협력협정 등을 체결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발전시켜 왔다.
정치적으로는 국제 무대에서 상호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으며, 경제적으로는 코트디부아르의 풍부한 자원과 대한민국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협력 잠재력이 크다. 주요 교역 품목으로는 한국이 코트디부아르에서 카카오, 커피, 고무 등을 수입하고, 코트디부아르는 한국에서 자동차, 전자제품, 기계류 등을 수입한다. 대한민국 국제협력단(KOICA)을 통해 공적개발원조(ODA) 사업도 진행되고 있으며, 교육, 보건, 농업 분야 등에서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문화 교류 또한 점진적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태권도 보급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2023년 10월 기준 코트디부아르에는 154명의 한국 교민이 체류하고 있으며, 2023년 6월 기준 대한민국에는 184명의 코트디부아르인이 거주하고 있다.
5.4. 군사
코트디부아르 군대, 공식 명칭은 코트디부아르 국군(Forces Armées de Côte d'Ivoire포르스 아르메 드 코트디부아르프랑스어, FACI)이며, 육군, 해군, 공군, 그리고 국가 헌병대와 공화국 수비대로 구성된다. 병역 제도는 선발 징병제이다. 2017년 기준 총병력은 약 22,000명으로 추산된다.
역사적으로 코트디부아르 군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식민지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많은 이부아르인들이 프랑스를 위해 싸웠다. 독립 이후 프랑스와의 군사 기술 지원 협정에 따라 군 창설에 도움을 받았으며, 초기에는 프랑스로부터 구식 장비를 공여받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군 현대화가 이루어졌으나, 1999년 쿠데타와 이후 두 차례의 내전을 겪으며 군 조직과 장비에 큰 변화와 손실이 있었다.
2012년 기준, 코트디부아르 육군의 주요 장비로는 10대의 T-55 전차(일부는 운용 불가 상태일 가능성 있음), 5대의 AMX-13 경전차, 34대의 정찰 차량, 10대의 BMP-1/BMP-2 장갑보병전투차, 41대의 차륜형 장갑수송차, 그리고 36문 이상의 야포를 보유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같은 해 공군은 1대의 Mi-24 공격헬기와 3대의 SA330 퓨마 수송헬기(일부는 운용 불가 상태일 가능성 있음)를 운용하고 있었다. 내전 이후 군 재건과 현대화 노력이 진행 중이다.
코트디부아르는 2017년 유엔 핵무기금지조약에 서명했다. 국방 정책은 국가 방위, 국경 수호, 그리고 국내 안보 유지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서아프리카 국가 경제 공동체(ECOWAS) 및 아프리카 연합(AU)의 평화 유지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최근에는 프랑스군의 철수가 예정되어 있어, 자체 국방력 강화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5.5. 행정 구역

2011년 행정 구역 개편 이후, 코트디부아르는 12개의 구(프: district)와 2개의 자치구(프: district autonome)로 구성된다. 이들 구는 다시 31개의 주(프: région)로 나뉘며, 주는 총 108개의 도(프: département)로, 도는 다시 510개의 준주(프: sous-préfecture)로 세분화된다. 일부 지역에서는 여러 마을이 모여 코뮌(프: commune)을 형성하기도 한다. 자치구는 주(région)로 나뉘지 않지만, 도, 준주, 코뮌을 포함한다. 2011년 이후 12개 비자치구의 주지사가 임명되지 않아, 이들 구는 아직 정부 기관으로서 완전히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다음은 각 구와 자치구, 그리고 그 하위 행정 단위인 주의 목록이다 (인구는 2014년 기준).
지도 번호 | 구 / 자치구 명칭 | 구청 소재지 / 자치구 중심지 | 주 (Régions) | 주도 | 인구 |
---|---|---|---|---|---|
1 | 아비장 자치구 (District Autonome d'Abidjan) | 4,707,404 | |||
2 | 바사산드라구 (District du Bas-Sassandra) | 산페드로 | 그보클레주 | 사산드라 | 400,798 |
나와주 | 수브레 | 1,053,084 | |||
산페드로주 | 산페드로 | 826,666 | |||
3 | 코모에구 (District du Comoé) | 아방구루 | 인데니에쥐아블랭주 | 아방구루 | 560,432 |
쉬드코모에주 | 아부아소 | 642,620 | |||
4 | 뎅겔레구 (District du Denguélé) | 오디엔네 | 폴롱주 | 미니냥 | 96,415 |
카바두구주 | 오디엔네 | 193,364 | |||
5 | 고지부아구 (District du Gôh-Djiboua) | 가뇨아 | 고주 | 가뇨아 | 876,117 |
로지부아주 | 디보 | 729,169 | |||
6 | 라크구 (District des Lacs) | 딤보크로 | 벨리에주 | 야무수크로 | 346,768 |
이푸주 | 다우크로 | 311,642 | |||
모로누주 | 봉구아누 | 352,616 | |||
은지주 | 딤보크로 | 247,578 | |||
7 | 라귄구 (District des Lagunes) | 다부 | 아녜비티아사주 | 아그보빌 | 606,852 |
그랑퐁주 | 다부 | 356,495 | |||
라메주 | 아조페 | 514,700 | |||
8 | 몽타뉴구 (District des Montagnes) | 만 | 카발리주 | 기글로 | 459,964 |
게몽주 | 두에쿠에 | 919,392 | |||
통크피주 | 만 | 992,564 | |||
9 | 사산드라마라우에구 (District du Sassandra-Marahoué) | 달로아 | 오트사산드라주 | 달로아 | 1,430,960 |
마라우에주 | 부아플레 | 862,344 | |||
10 | 사반구 (District des Savanes) | 코로고 | 바구에주 | 분디알리 | 375,687 |
포로주 | 코로고 | 763,852 | |||
촐로고주 | 페르케세두구 | 467,958 | |||
11 | 발레뒤방다마구 (District de la Vallée du Bandama) | 부아케 | 그베케주 | 부아케 | 1,010,849 |
암볼주 | 카티올라 | 429,977 | |||
12 | 워로바구 (District du Woroba) | 세겔라 | 베레주 | 만코노 | 389,758 |
바핑주 | 투바 | 183,047 | |||
워로두구주 | 세겔라 | 272,334 | |||
13 | 야무수크로 자치구 (District Autonome du Yamoussoukro) | 355,573 | |||
14 | 잔잔구 (District du Zanzan) | 봉두쿠 | 분카니주 | 부나 | 267,167 |
공투고주 | 봉두쿠 | 667,185 |
주요 도시로는 경제 중심지인 아비장, 법적 수도인 야무수크로, 북부 중심 도시인 부아케, 서부의 카카오 집산지인 달로아, 남서부의 항구 도시 산페드로, 북부의 코로고 등이 있다.
6. 경제
코트디부아르는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비교적 1인당 소득이 높은 국가(1662 USD (2017년 기준))이며, 주변 내륙국의 통과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2016년 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46.1%가 다차원적 빈곤 상태에 놓여 있다. 서아프리카 경제 통화 동맹(UEMOA) 내에서 가장 큰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통화 동맹 전체 GDP의 40%를 차지한다. 코트디부아르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나이지리아, 앙골라에 이어 네 번째로 큰 일반 상품 수출국이다.
6.1. 경제 구조 및 주요 산업
코트디부아르 경제는 농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특히 카카오와 커피 생산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서비스업 또한 GDP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금융, 통신, 교통 등이 주요 분야이다. 제조업은 주로 농산물 가공, 석유 정제, 소비재 생산에 집중되어 있다. 광업 부문에서는 석유와 천연가스가 생산되며, 금, 다이아몬드, 망간 등도 채굴된다.
2023년 기준 국내 총생산(GDP) 성장률은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는 내전 종식 이후 지속적인 경제 회복 노력과 외국인 투자 유치에 힘입은 바 크다. 2012년부터 2023년까지 실질 GDP는 연평균 7.1% 성장하여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 세계에서 네 번째로 빠른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2020년 기준 코트디부아르는 세계 최대의 코코아콩 수출국이었으며, 해당 지역에서 높은 소득 수준을 보였다.
6.2. 농업
농업은 코트디부아르 경제의 근간이며, 전체 노동 인구의 상당수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다음과 같다:
- 카카오: 세계 1위의 생산국이자 수출국이다. 2009년 코코아콩 농부들은 코코아 수출로 25.30 억 USD를 벌었으며, 2013년에는 63.00 만 t을 생산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카카오 농업은 아동 노동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국제적인 비판을 받고 있으며, 가격 변동성 또한 농가 소득에 불안정성을 야기한다. 코트디부아르 정부는 가나와 함께 카카오 가격 안정을 위한 국제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 커피: 카카오와 함께 주요 수출 작물 중 하나이다.
- 고무: 2012년 기준 약 10만 명의 고무 농가가 총 1.05 억 USD의 수입을 올렸다.
- 야자유, 면화, 파인애플, 바나나 등도 중요한 농산물이다.
소규모 가족농 중심의 생산 구조가 일반적이며, 기후 변화와 병충해, 낙후된 농업 기술, 인프라 부족 등이 농업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아동 노동 문제는 심각하여, 미국 노동부는 2009년 이후 매년 발간하는 '아동 노동 또는 강제 노동으로 생산된 상품 목록'에 코트디부아르의 코코아 및 커피 생산을 포함시키고 있다. 정부는 농업 생산성 향상과 농가 소득 증대, 지속 가능한 농업 발전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6.3. 무역 및 투자
코트디부아르의 주요 수출품은 카카오, 석유제품, 목재, 커피, 고무, 면화 등이며, 주요 수입품은 원유, 기계류, 장비, 식품(특히 쌀) 등이다. 주요 교역 상대국으로는 네덜란드, 프랑스, 미국, 독일, 나이지리아, 가나, 중국 등이 있다.
외국인 직접 투자(FDI)는 내전 이후 경제 회복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정부는 투자 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주요 투자 분야는 농업, 광업(석유, 가스), 제조업, 서비스업 등이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주요 투자국이었으나, 최근에는 중국, 터키 등 다른 국가들의 투자도 증가하고 있다.
코트디부아르는 서아프리카 국가 경제 공동체(ECOWAS) 회원국으로 역내 무역 활성화에 힘쓰고 있으며, 아프리카 대륙 자유 무역 지대(AfCFTA) 참여를 통해 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경제 통합에도 기여하고자 한다.
6.4. 경제 발전과 과제
코트디부아르는 1960년 독립 이후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의 지도 하에 농업 수출을 기반으로 연평균 10%에 가까운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며 "이부아르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시기를 경험했다. 이 시기에는 커피와 카카오 생산이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렀고, 외국인 투자 유치와 프랑스의 기술 지원이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세계 경기 침체, 가뭄, 국제 농산물 가격 하락 등으로 경제 위기를 맞았고, 이는 정치적, 사회적 불안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 CFA 프랑 평가 절하와 농산물 가격 상승으로 일시적인 회복세를 보이기도 했으나, 1999년 쿠데타와 이후 두 차례의 내전(2002~2007년, 2010~2011년)은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2011년 내전 종식 이후, 알라산 와타라 정부는 정치적 안정 회복과 함께 경제 재건에 주력했다. 국제 사회의 지원과 외국인 투자 유치, 인프라 개발 등을 통해 2012년부터 2021년까지 연평균 7.4%의 높은 경제 성장률을 달성했다. 이는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 세계에서 네 번째로 빠른 성장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트디부아르 경제는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다. 높은 빈곤율(2016년 다차원 빈곤 지수 46.1%)과 실업률은 주요 사회 문제이다. 특히 청년 실업 문제가 심각하다. 농업에 대한 과도한 의존, 카카오 등 주요 수출품의 국제 가격 변동성, 아동 노동 문제, 부패, 그리고 기후 변화로 인한 농업 생산의 불안정성도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정부는 경제 다각화, 제조업 육성, 인프라 개선, 교육 및 기술 개발 투자를 통해 지속 가능한 경제 발전을 추구하고 있다.
7. 사회
코트디부아르의 사회는 다양한 민족 구성, 언어, 종교가 공존하는 다문화적 특징을 지닌다. 역사적으로 이민이 활발했으며, 이는 사회 구조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 불안정과 내전을 겪으며 사회적 갈등과 인권 문제가 대두되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점진적인 안정과 발전을 모색하고 있다.
7.1. 인구

2024년 추산 코트디부아르의 총인구는 약 3,150만 명이다. 2021년 12월 14일 실시된 인구 조사에서는 29,389,150명으로 집계되었으며, 이는 2014년 인구 조사 당시의 22,671,331명보다 증가한 수치이다. 1975년 첫 전국 인구 조사에서는 670만 명이었다. 인구 증가율은 비교적 높은 편이며, 이는 높은 출산율과 평균 수명 증가에 기인한다.
2021년 인구 통계 및 건강 조사(DHS)에 따르면, 여성 1인당 합계출산율은 4.3명(도시 지역 3.6명, 농촌 지역 5.3명)으로, 2012년의 5.0명에서 감소했다. 2010년 기준 15세 미만 인구 비율은 40.9%, 15세에서 65세 사이 인구는 55.3%, 65세 이상 인구는 3.8%였다. 인구 밀도는 전국적으로 고르지 않으며, 경제 중심지인 아비장과 남부 해안 지역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다. 도시화율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많은 농촌 인구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동하고 있다.
7.2. 민족

코트디부아르는 약 60여 개의 다양한 민족 집단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이다. 이들은 크게 다음과 같은 주요 민족 그룹으로 분류될 수 있다:
- 아칸족 (약 42.1%): 코트디부아르에서 가장 큰 민족 집단으로, 주로 중부 및 동부 지역에 분포한다. 바울레족, 아니인족, 아브롱족 등이 여기에 속한다. 바울레족은 특히 정치, 경제적으로 영향력이 크다.
- 구르족 (볼타족) (약 17.6%): 주로 북부 지역에 거주하며, 세누포족, 로비족, 쿨랑고족 등이 포함된다. 세누포족은 전통 조각과 농경 문화로 유명하다.
- 북부 만데족 (약 16.5%): 북서부 지역에 주로 분포하며, 줄라족, 만딩카족 등이 속한다. 줄라족은 상업에 능하며 이슬람교를 믿는 경우가 많다.
- 크루족 (약 11%): 남서부 해안 지역과 내륙에 거주하며, 베테족, 디다족, 게레족 등이 포함된다.
- 남부 만데족 (약 10%): 서부 지역에 주로 분포하며, 단족(야쿠바족), 구로족 등이 속한다.
이 외에도 소수 민족 집단들이 존재한다. 인구의 약 77%가 코트디부아르 국적자로 간주되며, 주변국인 라이베리아, 부르키나파소, 기니 등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도 상당수 거주하고 있다 (약 20%, 약 340만 명). 이들은 주로 농업 부문에 종사한다. 또한, 프랑스인, 레바논인(약 10만 명), 베트남인, 스페인인 등 비아프리카계 인구도 소수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민족 간 관계는 비교적 평화로웠으나, '이부아리테'(Ivoirité) 정책과 정치적 불안정 시기에 민족 갈등이 표출되기도 했다. 현재는 국민 통합과 민족 간 화합이 중요한 사회적 과제로 남아 있다.
7.3. 언어
코트디부아르에서는 약 78개의 다양한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프랑스어가 헌법상 유일한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으며, 교육, 행정, 언론 등 공식적인 분야에서 널리 사용된다. 프랑스어는 또한 서로 다른 민족 집단 간의 링구아 프랑카 역할을 한다. 아비장 등 도시 지역에서는 젊은층을 중심으로 누시(Nouchi)라고 불리는 프랑스어 기반의 크리올화된 구어체가 사용되기도 한다.
주요 토착어로는 다음과 같은 언어들이 있다:
- 줄라어: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널리 사용되는 만데어파 언어로, 상업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주변 국가의 다른 만딩어파 언어와 상호 이해가 가능하다.
- 바울레어: 아칸어파에 속하며, 중부 지역에서 주로 사용된다.
- 베테어: 크루어파에 속하며, 남서부 지역에서 사용된다.
- 단어 (야쿠바어): 남부 만데어파에 속하며, 서부 지역에서 사용된다.
- 아니인어: 아칸어파에 속하며, 동부 지역에서 사용된다.
- 세누포어: 구르어파에 속하며, 북부 지역에서 사용된다.
이 외에도 수많은 소수 민족 언어들이 각 지역 공동체 내에서 사용되고 있다. 정부는 프랑스어 교육을 강화하는 한편, 토착 언어의 보존과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7.4. 종교


코트디부아르는 종교적으로 다양한 국가이다. 2021년 최근 인구 조사 자료에 따르면, 이슬람교(주로 수니파) 신자가 전체 인구의 42.5%를 차지했으며, 기독교(주로 가톨릭 및 복음주의) 신자가 인구의 39.8%를 구성했다. 추가로 인구의 12.6%는 무종교로 확인되었고, 2.2%는 애니미즘(아프리카 토착 신앙)을 따른다고 보고했으며, 0.7%는 기타 종교, 2.2%는 인구 조사에서 종교를 밝히지 않았다. 종교를 밝히지 않은 사람들을 제외하면, 인구는 이슬람교 43.5%, 기독교 40.7%, 무종교 12.9%, 애니미즘 2.2%, 기타 종교 0.7%였다.
1998년과 2021년 인구 조사 사이에 코트디부아르의 이슬람 인구는 110% 증가(즉, 2021년 이슬람 인구는 1998년에 비해 2.1배 증가)한 반면, 기독교 인구는 150% 증가(즉, 2021년 기독교 인구는 1998년에 비해 2.5배 증가)했고, 애니미즘 인구는 65.5% 감소했다.
2020년 퓨 연구센터의 추정에 따르면,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44%를 차지하고, 이슬람교인이 인구의 37.2%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또한, 8.1%는 종교적으로 소속되지 않은 것으로, 10.5%는 전통 아프리카 종교(애니미즘)의 추종자로 추정되었다. 2009년 미국 국무부 추정에 따르면, 기독교인과 이슬람교인이 각각 인구의 35%에서 40%를 차지했으며, 약 25%의 인구가 전통(애니미즘) 종교를 신봉했다.
이슬람교는 주로 북부 지역에, 기독교는 남부 지역에 신자가 많다. 토착 신앙은 여러 민족 집단 사이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종종 이슬람교나 기독교와 혼합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야무수크로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건물 중 하나인 평화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 있다. 코트디부아르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며, 종교 간 갈등은 비교적 적은 편이지만, 정치적 상황에 따라 종교적 정체성이 이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clr}}
종교 | 1975년 | 1998년 | 2021년 | |||
---|---|---|---|---|---|---|
애니미즘 | 30.2% | 12.0% | 2.2% | |||
기독교 | 29.0% | 30.6% | 40.7% | |||
가톨릭: 22.2% | 기타 기독교: 6.8% | 가톨릭: 19.5% | 기타 기독교: 11.1% | 가톨릭: 17.4% | 기타 기독교: 23.3% | |
이슬람교 | 33.5% | 38.9% | 43.5% | |||
무종교 | 6.2% | 16.8% | 12.9% | |||
기타 종교 | 1.1% | 1.7% | 0.7% |
7.5. 교육
코트디부아르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서 문해율이 비교적 높은 편에 속한다. 2019년 월드 팩트북에 따르면, 15세 이상 인구의 89.9%가 읽고 쓸 수 있다. 교육 제도는 프랑스 모델을 기반으로 하며, 초등 교육(6년), 중등 교육(중학교 4년, 고등학교 3년), 고등 교육으로 구성된다. 초등 교육은 의무 교육이지만, 실제 취학률은 지역별, 성별 격차가 존재한다. 특히 농촌 지역 여아들의 교육 기회가 제한적인 경우가 많다.
주요 교육 과제로는 교육 시설 부족, 교사 부족 및 자질 문제, 높은 중퇴율, 교육의 질적 향상 등이 있다. 정부는 교육 접근성 확대와 교육의 질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특히 직업 기술 교육 강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주요 고등 교육 기관으로는 아비장의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대학교(구 코코디 대학교), 부아케의 알라산 와타라 대학교 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여러 국립 및 사립 대학과 전문 학교가 있다. 중등 교육을 마친 학생들은 바칼로레아(baccalauréat) 시험을 통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7.6. 보건
코트디부아르의 보건 상황은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다. 2004년 기준 출생 시 기대 수명은 남성 42세, 여성 47세였으나, 최근에는 다소 개선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영아 사망률과 산모 사망률이 높은 편이다(2010년 추정 세계 27위). 인구 10만 명당 의사 수는 12명으로 의료 인력이 부족하다. 인구의 약 4분의 1이 국제 빈곤선(하루 1.25 USD) 이하로 생활하고 있다.
주요 질병으로는 말라리아, 호흡기 감염, 설사병 등이 있으며, HIV/AIDS 유병률도 비교적 높아 2012년 기준 15~49세 성인 인구의 3.20%로 세계 19위 수준이었다.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은 도시와 농촌 간 격차가 크며,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기 어려운 지역이 많다. 여성의 약 36%가 여성 성기 절제(FGM)를 경험한 것으로 보고되어, 여성 건강 및 인권 문제도 중요한 과제이다. 정부와 국제기구들은 보건 시스템 강화, 질병 예방 및 관리, 의료 서비스 접근성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7.7. 과학 기술
코트디부아르의 과학 기술 분야는 아직 발전 초기 단계에 있으며, 연구 개발(R&D) 투자는 GDP 대비 낮은 수준이다. 고등교육과학연구부에 따르면, 코트디부아르는 GDP의 약 0.13%를 연구 개발에 투자하고 있다. 낮은 투자 외에도 과학 장비 부족, 연구 기관의 분절화, 연구 결과 활용 및 보호 미흡 등이 주요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2024년 세계 혁신 지수(Global Innovation Index)에서는 112위를 기록하여 2019년의 103위보다 하락했다.
2012-2015년 국가 개발 계획에서 과학 연구에 할당된 예산은 전체 예산의 63.8%를 차지하는 '부 창출 및 사회적 형평성 증대' 부문 내에서 1.2%에 불과했다. 정부는 24개의 국가 연구 프로그램을 통해 공공 및 민간 연구 교육 기관을 특정 연구 주제 중심으로 묶어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들은 2012-2015년의 8개 우선 분야(보건, 원자재, 농업, 문화, 환경, 거버넌스, 광업 및 에너지, 기술)와 연계되어 있다.
주요 연구 기관으로는 농업 연구 중심의 국립농업연구센터(CNRA), 열대 질병 연구를 수행하는 파스퇴르 연구소 코트디부아르 지부 등이 있다. 최근에는 정보 통신 기술(ICT) 분야의 성장 잠재력이 주목받고 있으며, 정부는 디지털 경제 전환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과학 기술 발전은 국가 경제 다각화와 경쟁력 강화에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되고 있으나, 지속적인 투자 확대와 인력 양성, 연구 환경 개선이 필요하다.
7.8. 치안 및 인권
코트디부아르는 2011년 내전 종식 이후 치안 상황이 점진적으로 개선되고 있으나,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있다. 과거 내전 중 확산된 무기로 인한 강도, 무장 강도 등 강력 범죄가 발생하고 있으며, 특히 아비장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주택 침입 강도, 은행 이용객 대상 강도 등의 범죄가 보고된다. 지방에서는 도로 차단 강도와 같은 범죄도 발생하고 있다. 정부는 경찰력 강화와 사법 시스템 개선을 통해 치안 확보에 노력하고 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치안 공백이 존재한다. 서아프리카 지역의 테러리즘 위협도 증가하여, 2016년에는 그랑바상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에 의한 테러 공격이 발생하기도 했다.
인권 상황은 과거 정치적 불안정과 내전 시기에 심각한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탄압, 표현의 자유 제한, 집회의 자유 제한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아동 노동, 특히 카카오 농장에서의 아동 노동은 국제적인 비판을 받고 있으며, 정부도 이를 근절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 여성 성기 절제(FGM) 등 여성 인권 문제도 심각하다. 사법 시스템의 독립성과 효율성 부족, 교도소 환경 열악 등도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다. 와타라 정부 이후 인권 상황 개선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완전한 정착에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국제 인권 단체들은 코트디부아르 정부에 인권 보호 강화와 과거 인권 침해에 대한 책임 규명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7.9. 대중 매체
코트디부아르의 대중 매체는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인터넷 등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1991년 언론 관련법 제정 이후 민영 언론이 등장하며 다원화되었으나, 여전히 국영 매체의 영향력이 크다.
신문은 주로 아비장에 집중되어 있으며, 국영 일간지인 『프라테르니테 마탱 (Fraternité Matin프라테르니테 마탱프랑스어)』이 가장 발행 부수가 많다. 그 외 다수의 민영 신문들이 발행되고 있으나, 정치적 성향이 뚜렷한 경우가 많다.
방송은 국영 방송사인 코트디부아르 라디오텔레비전(RTI)이 지배적이다. RTI는 여러 개의 텔레비전 채널(La Première, TV2 등)과 라디오 채널(Radio Côte d'Ivoire, Fréquence 2 등)을 운영한다. 민영 라디오 방송국도 다수 존재하며, Radio Jam은 코트디부아르 최초의 민영 라디오 방송국이다. 최근에는 아프리카 음악 전문 채널인 Africahit Music TV 등 위성 및 케이블 채널도 등장하고 있다.
인터넷 사용은 점차 확대되고 있으며, 온라인 뉴스 매체와 소셜 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 접근성은 도시와 농촌 간 격차가 존재한다.
언론의 자유는 헌법으로 보장되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압력이나 자기 검열이 존재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내전과 정치적 불안정 시기에는 언론 통제가 강화되기도 했다. 국가언론위원회(CNP), 국가시청각위원회(CNCA)와 같은 규제 기관이 있으며, 언론 윤리 및 언론 자유 감시를 위한 자율 기구(OLPED)도 운영되고 있다. 미디어는 사회 여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때로는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8. 문화
코트디부아르는 다양한 민족 집단의 고유한 전통과 현대적 요소가 어우러진 풍부하고 다채로운 문화를 자랑한다. 음악, 미술, 문학, 음식, 스포츠 등 여러 분야에서 독특한 특성을 나타낸다.
8.1. 음악과 미술

코트디부아르의 각 민족은 고유한 음악 장르를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 강력한 다성 음악적 특징을 보인다. 토킹 드럼은 특히 아폴로족(은제마족) 사이에서 흔히 사용되며, 아프리카 음악의 특징인 폴리리듬은 코트디부아르 전역에서 발견되며 특히 남서부 지역에서 두드러진다.
현대 대중음악으로는 줄루글루 (Zouglou줄루글루프랑스어), 쿠페데칼레 (Coupé-Décalé쿠페데칼레프랑스어), 조블라조(Zoblazo) 등이 있으며, 이들은 젊은층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코트디부아르 출신의 세계적인 음악가로는 레게 가수 알파 블론디(Alpha Blondy), 티켄 자 파콜리(Tiken Jah Fakoly) 등이 있으며, 매직 시스템(Magic System), 메이웨이(Meiway), 도베 냐오레(Dobet Gnahoré), DJ 아라파트(DJ Arafat), 아프로비(AfroB), 세르주 베노(Serge Beynaud), 크리스티나 고(Christina Goh) 등도 국제적으로 알려져 있다.
미술 분야에서는 다양한 민족의 전통 조각, 특히 가면이 유명하다. 바울레족, 세누포족, 단족, 구로족, 게레족, 베테족 등은 각각 독특한 양식의 목조 가면을 제작하며, 이는 종교 의식이나 축제에 사용된다. 가면은 정령의 힘을 지닌다고 여겨지며, 특별히 훈련된 사람만이 착용할 수 있다. 직물 공예 또한 발달하여, 바울레족과 세누포족의 전통 직물은 아름다운 문양과 색채로 유명하다. 그 외에도 청동 조각, 도자기, 구슬 공예 등 다양한 공예품이 제작된다. 이러한 전통 미술품들은 그랑바상이나 아시니 같은 관광지에서 판매되거나 아비장의 미술관 및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현대 미술가로는 질베르 G. 그루, 미셸 코조 등이 활동하고 있다.
8.2. 문학 및 영화
코트디부아르 문학은 구전 전통과 프랑스어 문학의 영향을 받아 발전해왔다. 20세기 가장 뛰어난 아프리카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베르나르 다디에는 시, 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며 코트디부아르 문학을 이끌었다. 아마두 쿠루마는 그의 소설 『독립의 태양』(Les Soleils des indépendances레 솔레유 데 장데팡당스프랑스어), 『야수들의 투표를 기다리며』(En attendant le vote des bêtes sauvages앙 아탕당 르 보트 데 베트 소바주프랑스어) 등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후자는 아프리카의 정치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다른 주요 작가로는 아케 로바, 장마리 아디아피, 이사이 비통 쿨리발리, 제구아 그베시 노칸, 아마두 코네 등이 있다. 여성 작가로는 시몬 카야가 자전적 소설로 알려져 있다.
코트디부아르 영화 산업은 1960년대부터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파디카 크라모랑시네, 로제 뇨안 음발라 등이 초기 감독으로 활동했다. 최근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더 많은 영화가 제작되고 있으며, 알렉스 쿠아시, 알랭 기쿠, 마리루이즈 아쇠 등이 활동하고 있다. 아비장에서는 아프리카 공연 예술 시장(MASA)이 2년마다 열려 아프리카의 다양한 공연 예술을 소개하고 교류하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8.3. 음식
코트디부아르의 전통 음식은 서아프리카 이웃 국가들과 유사하게 곡물과 덩이줄기 작물에 크게 의존한다. 카사바와 플랜틴은 이부아르 요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아이티우"(aitiu아이티우프랑스어)라고 불리는 옥수수 반죽은 옥수수 볼을 만드는 데 사용되며, 땅콩은 많은 요리에 널리 사용된다. "attiéké아체케프랑스어"는 잘게 간 카사바로 만든 인기 있는 반찬으로, 채소 기반의 쿠스쿠스와 유사하다. 흔한 길거리 음식은 "alloco알로코프랑스어"로, 야자유에 튀긴 플랜틴에 찐 양파와 고추로 양념하고 구운 생선이나 삶은 달걀과 함께 먹는다. 닭고기는 흔히 소비되며, 이 지역의 지방이 적은 살코기 때문에 독특한 풍미를 지닌다. 해산물로는 참치, 정어리, 새우, 가다랑어(참치와 유사) 등이 있다. "Mafé마페프랑스어"는 땅콩 소스에 고기를 넣어 만든 흔한 요리이다.
다양한 재료를 넣어 천천히 끓인 스튜도 흔한 주식이다. "Kedjenou케제누프랑스어"는 닭고기와 채소를 밀봉된 냄비에 물을 거의 넣지 않고 천천히 익힌 요리로, 닭고기와 채소의 풍미를 농축시키고 닭고기를 부드럽게 만든다. 보통 카나리(canary)라고 불리는 토기 항아리에서 약한 불로 조리하거나 오븐에서 조리한다. "Bangui방기프랑스어"는 현지 야자술이다.
이부아르인들에게는 "maquis마키프랑스어"라고 불리는 이 지역 특유의 작은 야외 식당이 있다. 마키에서는 보통 양파와 토마토를 곁들여 찐 닭고기와 생선 요리를 아체케나 케제누와 함께 제공한다.
8.4. 스포츠

코트디부아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이다. 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은 "코끼리 군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FIFA 월드컵에 3회 출전(2006년 독일, 201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2014년 브라질)했고,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는 3번 우승(1992년, 2015년, 2023년-개최국)했다. 코트디부아르는 디디에 드로그바, 야야 투레, 콜로 투레, 에마뉘엘 에부에, 살로몽 칼루, 윌프리드 보니, 제르비뉴, 세르주 오리에, 에리크 바이와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구 선수들을 배출했다. 코트디부아르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은 2015년 캐나다 FIFA 여자 월드컵에 출전했다.
코트디부아르는 여러 주요 아프리카 스포츠 행사를 개최했으며, 가장 최근에는 아프로바스켓 2013을 개최했다. 과거에는 1984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5위)과 FIBA 아프리카 챔피언십 1985(남자 농구 대표팀 금메달)를 개최했다. 1984년 하계 올림픽 육상 남자 400m에서 가브리엘 티아코가 은메달을 획득했다. 2017년에는 제8회 프랑코포니 경기 대회를 개최했다. 육상 분야에서는 마리조제 타 루, 뮈리엘 아우레 등이 유명하다.
럭비 유니언도 인기가 있으며, 코트디부아르 럭비 유니언 국가대표팀은 1995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열린 럭비 월드컵에 출전했다. 태권도 또한 인기 있는 스포츠로, 셰이크 살라 시세, 뤼트 그바그비, 피르맹 조쿠와 같은 유명 선수들이 있다. 그 외 농구, 육상 등도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8.5. 세계유산
코트디부아르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유산이 총 5건 있다.

자연유산으로는 님바산맥 자연보호구역 (1981년 등재, 기니와 공동 등재)이 있으며, 이는 독특한 생태계와 다양한 고유종으로 유명하다. 또한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열대 우림 중 하나이자 피그미하마를 비롯한 멸종 위기종의 서식지인 타이 국립공원 (1982년 등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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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자연유산인 코모에 국립공원 (1983년 등재)은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보호 구역 중 하나로, 다양한 식생과 동물상을 자랑한다. 한때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 올랐으나, 보전 노력으로 해제되었다. 문화유산으로는 그랑바상 역사 도시 (2012년 등재)가 있는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초기 수도였으며 당시의 건축 양식과 도시 계획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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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문화유산으로 코트디부아르 북부의 수단 양식 모스크 (2021년 등재)가 있으며, 이는 텡그레라, 쿠토, 소로방고, 사마티길라/미시리바, 나미아소, 카우아라, 콩, 도우소로에 있는 8개의 작은 진흙 벽돌 모스크를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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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유산으로는 타그바나족의 아파운카하 그보페(횡적 트럼펫 음악, 2008년), 구로족의 자울리(대중음악과 춤, 2017년), 그리고 말리, 부르키나파소와 공동으로 등재된 세누포족의 발라폰 관련 문화 관습(2012년) 등이 있다.
8.6. 공휴일
코트디부아르의 주요 공휴일은 다음과 같다. 일부 공휴일은 특정 종교와 관련되어 있으며, 특히 이슬람 관련 공휴일은 이슬람력에 따라 날짜가 매년 변경된다.
날짜 | 한국어 명칭 | 현지어 명칭 (프랑스어) | 비고 |
---|---|---|---|
1월 1일 | 새해 첫날 | Jour de l'An | |
부활절 다음날 월요일 | 부활절 월요일 | Lundi de Pâques | 기독교 관련 (날짜 변동) |
5월 1일 | 노동절 | Fête du Travail | |
부활절 39일 후 목요일 | 주님 승천 대축일 | Ascension | 기독교 관련 (날짜 변동) |
부활절 50일 후 월요일 | 성령 강림 대축일 월요일 | Lundi de Pentecôte | 기독교 관련 (날짜 변동) |
8월 7일 | 독립기념일 | Fête Nationale de l'Indépendance | 1960년 독립 |
8월 15일 | 성모 승천 대축일 | Assomption | 기독교 관련 |
11월 1일 | 모든 성인 대축일 | Toussaint | 기독교 관련 |
11월 15일 | 평화의 날 | Journée Nationale de la Paix | |
12월 25일 | 크리스마스 | Noël | 기독교 관련 |
이슬람력 둘하즈월 10일 | 이드 알아드하 (희생제) | Tabaski / Aïd el-Kébir | 이슬람교 관련 (날짜 변동) |
이슬람력 라비 알아왈월 12일 | 마울리드 (예언자 무함마드 탄생일) | Maouloud / Anniversaire de la naissance de Mohamed | 이슬람교 관련 (날짜 변동) |
이슬람력 라마단월 27일경 | 라마단의 밤 (권능의 밤) | Laylat al-Qadr / La Nuit du Destin | 이슬람교 관련 (날짜 변동) |
이슬람력 샤왈월 1일 | 이드 알피트르 (라마단 종료 축제) | Aïd el-Fitr / Ramadan (Fin du jeûne) | 이슬람교 관련 (날짜 변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