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나이지리아 연방 공화국은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국가로,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인구 순위 6위에 해당한다. 북쪽으로는 니제르, 북동쪽으로는 차드, 동쪽으로는 카메룬, 서쪽으로는 베냉과 국경을 접하며, 남쪽으로는 대서양의 기니만과 맞닿아 있다. 수도는 아부자이며, 최대 도시는 라고스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대도시권 중 하나이다. 나이지리아는 36개 주와 1개의 연방 수도 지구로 구성된 연방제 공화국이다.
나이지리아의 역사는 기원전 15세기경의 노크 문화를 시작으로 다양한 고대 및 중세 왕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15세기 이후 유럽 세력의 도래와 함께 대서양 노예 무역이 전개되었으며, 19세기에는 영국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어 1914년 남부 및 북부 보호령이 통합되었다. 196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제1공화국 시대를 맞았으나, 곧이어 군부 쿠데타와 비아프라 전쟁(1967년-1970년)이라는 참혹한 내전을 겪었다. 이후에도 반복되는 군부 통치와 민주화 시도가 이어지다가 1999년 제4공화국이 출범하며 현재까지 민주주의 시대가 이어지고 있다.
나이지리아는 250개가 넘는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이며, 500개 이상의 언어가 사용된다. 주요 민족으로는 북부의 하우사족과 풀라니족, 서부의 요루바족, 동부의 이보족이 있으며, 이들이 전체 인구의 약 60%를 차지한다. 공용어는 영어이며, 종교적으로는 북부의 이슬람교와 남부의 기독교가 주를 이루고, 소수의 토착 신앙도 존재한다.
경제적으로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최대 경제 대국 중 하나이며, 석유와 천연가스 생산이 국가 경제의 핵심을 이룬다. 그러나 석유 의존도가 높아 국제 유가 변동에 취약하며, 농업, 제조업, 서비스업 등 다양한 산업 발전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풍부한 천연자원과 젊은 인구 구조를 바탕으로 높은 성장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나, 빈곤, 부정부패, 사회 기반 시설 부족, 부족 및 종교 갈등, 보코 하람과 같은 무장 단체의 위협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산적해 있다.
나이지리아 문화는 문학, 음악, 영화(놀리우드)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월레 소잉카,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의 작가 치누아 아체베 등이 대표적인 문학가이며, 아프로비트 음악은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놀리우드는 인도 발리우드에 이어 세계 2위 규모의 영화 산업으로 성장했다. 축구를 비롯한 스포츠 또한 국민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2. 국명
나이지리아라는 국가 명칭은 이 나라를 관통하는 주요 강인 나이저강(Niger River나이저강영어)에서 유래했다. 이 이름은 1897년 1월 8일, 영국의 언론인 플로라 쇼( Flora Shaw, Lady Lugard플로라 쇼, 레이디 루가드영어)에 의해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접 국가인 니제르 공화국( Republic of Niger리퍼블릭 오브 나이저영어) 역시 동일한 강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나이저(Niger나이저영어)'라는 단어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으나, 원래는 나이저강 중류 지역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19세기 유럽의 식민주의가 도래하기 이전, 팀북투 주변의 나이저강 중류에 거주하던 투아레그족이 사용하던 'egerew n-igerewen에게레우 느-이게레웬타마셰크어'이라는 명칭이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투아레그어 명칭은 '강 중의 강' 또는 '큰 강'을 의미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랍어 문헌에서는 이 지역을 'nahr al-anhur나흐르 알-안후르아랍어'로 기록했는데, 이는 투아레그어 명칭을 직역한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나이저'라는 이름이 라틴어 'niger니게르라틴어', 즉 '검은색'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으나, 이는 민간 어원설로 여겨지며 직접적인 관련성은 부족하다. 다만, 철자법에는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플로라 쇼가 '나이지리아'라는 이름을 제안하기 전에는 'Royal Niger Company Territories왕립 나이저 회사령영어', 'Central Sudan중앙 수단영어', 'Niger Empire나이저 제국영어', 'Niger Sudan나이저 수단영어', 'Hausa Territories하우사 영토영어' 등 다양한 명칭이 거론되었다.
3. 역사
나이지리아의 역사는 기원전 1500년경의 노크 문화에서 시작하여 다양한 고대 및 중세 왕국들의 흥망성쇠를 거쳤다. 15세기 이후 유럽인들의 도래와 함께 비극적인 대서양 노예 무역이 전개되었으며, 19세기에는 영국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어 1914년 남북 보호령이 통합되었다. 1960년 독립 이후 제1공화국 시기를 맞았으나, 군부 쿠데타와 비아프라 전쟁이라는 시련을 겪었으며, 이후에도 군부 통치가 지속되다가 1999년 제4공화국 출범과 함께 민주주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3.1. 고대 및 중세 왕국

나이지리아 지역의 선사 시대는 매우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카인니댐 발굴을 통해 기원전 2세기경에 이미 철기 문화가 존재했음이 밝혀졌다. 나이지리아의 신석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의 전환은 중간 단계인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이루어졌다는 특징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철기 기술이 나일강 유역에서 서쪽으로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으나, 나이저강 유역과 삼림 지역의 철기 시대는 상류 사바나 지역이나 나일강 유역보다 800년 이상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연구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철기 야금술이 독자적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노크 문화는 기원전 1500년경부터 서기 200년경까지 번성했던 고대 문명으로, 현재의 나이지리아 중부 조스 고원 일대에 중심을 두었다. 노크 문화는 실물 크기의 정교한 테라코타 인물상으로 유명하며, 이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조각 예술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들은 기원전 550년경, 혹은 그보다 수 세기 전부터 철을 제련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이지리아 남동부 은수카 지역에서도 철 제련 증거가 발굴되었는데, 레자(Lejja레자영어) 유적에서는 기원전 2000년, 오피(Opi오피영어) 유적에서는 기원전 7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카노 연대기는 하우사 왕국의 카노 도시 국가가 서기 999년경부터 시작된 고대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며, 다우라, 하데이자(Hadejia하데이자하우사어), 카치나(Katsina카치나하우사어), 자자우, 라노(Rano라노하우사어), 고비르(Gobir고비르하우사어) 등 다른 주요 하우사 도시 국가(하우사 바콰이)들도 1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기록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서기 7세기부터 이슬람교가 전파되면서 이 지역은 '수단' 또는 '빌라드 알 수단'(Bilad Al Sudan빌라드 알 수단아랍어, 검은 땅이라는 뜻)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부분적으로 북아프리카의 아랍-무슬림 문화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하라 종단 무역을 시작했고, 아랍어 사용자들은 이들을 '알-수단'(Al-Sudan알-수단아랍어, 검은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불렀다. 중세 아랍 및 무슬림 역사가와 지리학자들의 초기 역사 기록에는 카넴-보르누 제국이 이 지역 이슬람 문명의 주요 중심지였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보족의 은리 왕국은 10세기에 통합되어 1911년 영국에 주권을 잃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은리 왕국은 Eze Nri에제 느리이보어가 통치했으며, 수도인 은리는 이보 문화의 발상지로 여겨진다. 이보족 창조 신화의 기원지인 은리와 아굴레리(Aguleri아굴레리이보어)는 우메우리(Umeuri우메우리이보어) 씨족의 영역에 속하며, 이 씨족 구성원들은 그들의 혈통을 시조인 Eri에리이보어 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아프리카에서 로스트 왁스 기법으로 제작된 가장 오래된 청동 유물은 은리 왕국의 영향력 하에 있던 이보-우쿠에서 출토되었다.
나이지리아 남서부의 요루바족 왕국인 이페와 오요 제국은 각각 12세기와 14세기에 두각을 나타냈다. 이페 지역의 현 위치에서 가장 오래된 인간 정착의 흔적은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 유물 문화에는 테라코타와 청동 인물상이 포함된다.
3.2. 유럽인의 도래와 노예 무역
16세기,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남부 나이지리아의 사람들과 직접적인 주요 교역을 시작한 최초의 유럽인들이었다. 이들은 라고스(과거 에코(Eko에코비니어))와 노예 해안 지역의 칼라바르 항구를 이용했다. 유럽인들은 해안 지역 주민들과 상품을 교역했으며, 이는 대서양 노예 무역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역사적인 비아프라만(현재는 보니만(Bight of Bonny보니만영어)으로 흔히 불림)에 위치한 칼라바르 항구는 이 시기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노예 무역 거점 중 하나가 되었다. 다른 주요 노예 무역항으로는 바다그리, 라고스(베냉만), 보니섬(비아프라만) 등이 있었다. 이 항구들로 끌려온 대다수의 사람들은 습격과 전쟁을 통해 포로로 잡힌 이들이었다. 일반적으로 포로들은 정복자의 영토로 끌려가 강제 노동에 시달렸으며, 때로는 점차 정복자 사회에 동화되거나 흡수되기도 했다. 나이지리아 전역에는 내륙 지역과 주요 해안 항구를 연결하는 노예 교역로가 구축되었다. 대서양 노예 무역에 참여했던 주요 노예 무역 왕국 중 일부는 남부의 에도족의 베닌 제국, 남서부의 오요 제국, 남동부의 아로 연맹과 연관되어 있었다. 베닌 제국의 세력은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오요 제국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에 영토가 가장 넓었으며, 그 영향력은 서부 나이지리아에서 오늘날의 토고까지 미쳤다.
북부에서는 하우사 도시 국가들 간의 끊임없는 싸움과 카넴-보르누 제국의 쇠퇴로 인해 풀라니족이 이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때까지 풀라니족은 주로 수단 북쪽의 반사막 사헬 지역을 소떼와 함께 이동하며 수단 지역 민족들과의 교역이나 혼합을 피하던 유목 민족이었다. 19세기 초, 우스만 단 포디오는 하우사 왕국에 대항하여 성공적인 지하드(풀라니 전쟁)를 이끌었고, 중앙집권화된 소코토 칼리파국을 세웠다. 아랍어를 공용어로 사용했던 이 제국은 그의 통치와 그의 후손들 아래 빠르게 성장했으며, 이들은 모든 방향으로 침략군을 파견했다. 광대한 내륙 제국은 동쪽과 서부 수단 지역을 연결했으며, 남쪽으로 진격하여 오요 제국의 일부(오늘날의 콰라주)를 정복하고 요루바랜드의 심장부인 이바단으로 진격하여 대서양에 도달하려 했다. 제국이 통제하는 영토에는 오늘날 북부 및 중부 나이지리아의 많은 부분이 포함되었다. 술탄은 정복된 영토에 대한 종주권을 확립하고 이슬람 문명을 장려하기 위해 에미르들을 파견했고, 에미르들은 교역과 노예제를 통해 점점 더 부유해지고 강력해졌다. 1890년대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예 인구(약 200만 명)가 소코토 칼리파국 영토에 집중되어 있었다. 노예 노동은 특히 농업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1903년 여러 유럽 식민지로 분할될 당시, 소코토 칼리파국은 식민지 이전 아프리카 국가 중 가장 큰 국가 중 하나였다.
법적 당위성(1807년 대서양 노예 무역 금지)과 경제적 당위성(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위한 열망)의 변화로 인해 대부분의 유럽 강대국들은 유럽 산업에 사용될 야자유와 같은 농산물의 광범위한 경작을 지원하게 되었다. 노예 무역은 금지 이후에도 불법 밀수꾼들이 현지 노예 상인들로부터 해안을 따라 노예를 구매하면서 계속되었다. 영국의 서아프리카 함대는 해상에서 밀수꾼들을 차단하려 했다. 구조된 노예들은 서아프리카의 프리타운으로 보내졌는데, 이곳은 원래 미국 독립 전쟁 이후 북아메리카에서 영국에 의해 해방된 노예들을 재정착시키기 위해 존 클락슨 중위가 설립한 식민지였다.
3.3. 영국 식민 통치
영국은 1851년 라고스를 포격하여 라고스 왕위 계승 분쟁에 개입했고, 노예 무역에 우호적이었던 코소코 오바를 폐위시키고 우호적인 오바 아키토예를 즉위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1852년 1월 1일 영국과 라고스 간 조약을 체결했다. 영국은 1861년 8월 라고스 할양 조약으로 라고스를 왕령식민지로 병합했다. 영국 선교사들은 활동을 확장하여 내륙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1864년, 새뮤얼 아자이 크라우더는 성공회 최초의 아프리카인 주교가 되었다.
1885년, 베를린 회담에서 영국의 서아프리카 세력권 주장이 다른 유럽 국가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이듬해 영국은 조지 타웁만 골디 경의 지도 하에 왕립 나이저 회사를 설립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까지 이 회사는 나이저강 연안의 독립적인 남부 왕국들을 정복하는 데 크게 성공했다. 영국은 1897년 베닌 제국을 정복했고, 앵글로-아로 전쟁(1901년-1902년)에서 다른 반대 세력을 격파했다. 이들 국가의 패배는 나이저 지역을 영국의 지배하에 두게 만들었다. 1900년, 회사의 영토는 영국 정부의 직접 통제하에 들어갔고, 남나이지리아 보호령이 영국의 보호령이자 대영 제국의 일부로 설립되었다.

1902년까지 영국은 소코토 칼리파국 북부로 진출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영국 식민지부는 프레더릭 루가드 장군에게 이 계획을 실행하도록 임무를 부여했다. 루가드는 칼리파국 남부 지역의 많은 에미르들과 중앙 소코토 행정부 사이의 경쟁 관계를 이용하여 수도로 진격하는 동안 방어를 막았다. 영국군이 소코토 시에 접근하자 술탄 무함마두 아타히루 1세는 도시 방어를 신속하게 조직하고 진격하는 영국 주도군과 싸웠다. 영국군은 빠르게 승리했고, 아타히루 1세와 수천 명의 추종자들은 마흐디주의적 헤지라를 떠났다. 북동부에서는 카넴-보르누 제국의 쇠퇴로 영국이 통제하는 보르노 에미르국이 등장했고, 아부바카르 가르바이 오브 보르노를 통치자로 세웠다.

1903년, 카노 전투에서의 영국 승리는 소코토 칼리파국 중심부와 구 보르누 제국의 일부를 평정하는 데 있어 영국에게 유리한 전략적 이점을 제공했다. 1903년 3월 13일, 소코토의 대시장 광장에서 칼리파국의 마지막 재상이 공식적으로 영국의 통치에 항복했다. 영국은 무함마두 아타히루 2세를 새로운 칼리프로 임명했다. 루가드는 칼리파국을 폐지했지만, 새롭게 조직된 북나이지리아 보호령에서 술탄이라는 칭호는 상징적인 지위로 유지했다. 이 잔존 세력은 "소코토 술탄 평의회"로 알려지게 되었다. 1903년 6월, 영국은 아타히루의 잔존 북부 세력을 격파했다. 1906년까지 영국의 통치에 대한 모든 저항은 끝났다.
1914년 1월 1일, 영국은 남나이지리아 보호령과 북나이지리아 보호령을 나이지리아 식민지 및 보호령으로 공식 통합했다. 행정적으로 나이지리아는 북부 및 남부 보호령과 라고스 식민지로 계속 분할되었다. 남부 지역 주민들은 해안 경제로 인해 영국인 및 다른 유럽인들과 더 많은 경제적, 문화적 교류를 유지했다. 기독교 선교단은 보호령에 서구식 교육 기관을 설립했다. 영국의 간접 통치 정책과 이슬람 정통 전통의 인정 하에, 영국 정부는 북부 이슬람 지역에서의 기독교 선교 활동을 장려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독립의 물결이 아프리카 전역을 휩쓸면서 나이지리아 민족주의의 성장과 독립 요구에 부응하여 영국 정부가 제정한 연속적인 헌법들은 나이지리아를 대의제적이고 점증적으로 연방적인 자치 정부로 이끌었다. 1960년 독립 직전, 현대 교육 접근성에 있어 지역적 차이는 두드러졌다. 그 유산은 덜 뚜렷하지만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북부와 남부 간의 균형은 나이지리아의 정치 생활에서도 표현되었다. 예를 들어, 북부 나이지리아는 1936년까지 노예제를 불법화하지 않았지만, 나이지리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식민지화 직후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3.4. 독립과 제1공화국


나이지리아는 1954년에 어느 정도 자치권을 획득했고, 1960년 10월 1일 영국으로부터 나이지리아 연방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아부바카르 타파와 발레와가 총리를 맡았고, 영국 군주인 엘리자베스 2세는 명목상의 국가원수이자 나이지리아의 여왕으로 남아 있었다. 은남디 아지키웨는 1960년 11월 식민지 총독을 대체했다. 독립 당시 나이지리아의 주요 민족인 북부의 하우사족, 동부의 이보족, 서부의 요루바족 사이에는 문화적, 정치적 차이가 뚜렷했다. 웨스트민스터 체제 정부가 유지되었으므로, 대통령의 권한은 대체로 의례적이었다. 창립 정부는 보수 정당들의 연립 정부였다. 즉, 아마두 벨로 경이 이끄는 북부인민회의(북부 무슬림이 주도하는 정당)와 은남디 아지키웨가 이끄는 이보족 및 기독교인이 주도하는 나이지리아 카메룬 국민평의회의 연립이었다. 야당은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행동단체로, 주로 요루바족이 장악하고 오바페미 아월로워가 이끌었다. 1961년 국민투표 결과로 정치에 불균형이 초래되었다. 남카메룬은 카메룬 공화국에 합류하기로 결정한 반면, 북카메룬은 나이지리아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국가의 북부 지역이 남부 지역보다 커지게 되었다.
3.5. 군정과 내전 (비아프라 전쟁)

선거 및 정치 과정의 불균형과 부패 혐의로 인해 1966년에 두 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다. 첫 번째 쿠데타는 1966년 1월에 일어났으며, 주로 이매뉴얼 이페아주나(이보족 출신), 추쿠마 카두나 은제오구(동부 출신의 북부인) 및 아데왈레 아데모예가(서부 출신의 요루바인) 소령 휘하의 군인들이 주도했다. 쿠데타 음모자들은 아마두 벨로 경과 아부바카르 타파와 발레와 경, 그리고 북부 지역의 저명한 지도자들과 서부 지역의 총리 사무엘 아킨톨라를 암살하는 데 성공했지만, 중앙 정부를 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상원의장 은와포르 오리주는 정부 통제권을 다른 이보족 장교인 존슨 아그이이론시 소장 휘하의 육군에 넘겨주었다. 이후 1966년 반쿠데타는 주로 북부 군 장교들의 지원을 받아 야쿠부 고원이 군부 국가원수로 부상하는 것을 용이하게 했다. 북부와 남부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고, 북부 도시의 이보족들은 박해를 받았으며 많은 이들이 동부 지역으로 피신했다.
1967년 5월, 동부 지역 주지사인 C. 오두메구 오주쿠 중령은 1966년 포그롬으로 알려진 이보족 및 동부 출신에 대한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계획된 공격의 결과로, 이 지역을 비아프라 공화국이라는 이름의 국가로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이 선언은 나이지리아 내전을 촉발시켰으며, 1967년 7월 6일 나이지리아 정부군이 가르켐에서 비아프라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장기간의 비아프라 봉쇄와 무역 및 국제 구호로부터의 고립을 동반한 30개월간의 전쟁은 1970년 1월에 끝났다. 30개월간의 내전 기간 동안 구 동부 지역에서 사망한 사람의 수는 100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영국과 소련은 나이지리아 정부의 주요 군사 지원국이었으며, 나이지리아는 가말 압델 나세르가 제공한 이집트 조종사들의 공중 지원을 활용했다. 반면 프랑스와 이스라엘은 비아프라인들을 지원했다. 모부투 세세 세코 대통령 하의 콩고 민주 공화국 정부는 비아프라 분리 독립에 대해 조기에 입장을 취하여 나이지리아 연방 정부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표명하고 분리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 수천 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전쟁 이후 나이지리아는 1970년대 석유 붐을 누렸으며, 이 기간 동안 OPEC에 가입하고 막대한 석유 수입을 얻었다. 이러한 수입에도 불구하고 군사 정부는 생활 수준을 개선하거나 중소기업을 돕거나 기반 시설에 투자하는 데 거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석유 수입이 주에 대한 연방 보조금 증가를 부추기면서 연방 정부는 정치 투쟁의 중심이자 국가 권력의 문턱이 되었다. 석유 생산과 수입이 증가함에 따라 나이지리아 정부는 예산 및 경제 문제에 있어 석유 수입과 국제 상품 시장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1975년 7월 셰후 무사 야르아두아 장군과 조지프 난벤 가르바 장군이 이끈 1975년 나이지리아 쿠데타는 고원을 축출했고, 그는 영국으로 도피했다. 쿠데타 음모자들은 고원의 독재 통치를 최고군사회의의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세 명의 준장으로 구성된 삼두정치로 대체하기를 원했다. 이 삼두정치를 위해 그들은 무르탈라 모하메드 장군을 군부 국가원수로, 올루세군 오바산조 장군을 그의 부사령관으로, 테오필루스 단주마 장군을 세 번째 인물로 설득했다. 세 사람은 함께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한 긴축 조치를 도입하고, 부패행위조사국을 설립했으며, 모든 군정 장관을 새로운 장교로 교체하고, "고목 작전(Operation Deadwood오퍼레이션 데드우드영어)"을 시작하여 공무원 11,000명을 해고했다.
부카 수카 딤카 대령은 1976년 나이지리아 쿠데타 시도를 감행했고, 이 기간 동안 무르탈라 모하메드 장군이 암살되었다. 딤카는 군부 내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했고 그의 쿠데타는 실패하여 도주해야 했다. 쿠데타 시도 이후 올루세군 오바산조 장군이 군부 국가원수로 임명되었다. 오바산조는 무르탈라의 정책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맹세했다. 북부 나이지리아인들을 소외시키는 위험을 인지한 오바산조는 셰후 야르아두아 장군을 그의 후임이자 부사령관인 최고 사령부 참모총장으로 임명하여 군부 삼두정치를 완성했다. 오바산조가 국가원수, 테오필루스 단주마 장군이 육군참모총장을 맡았으며, 세 사람은 군사 정권에 대한 통제권을 재확립하고 군부의 권력 이양 프로그램인 주 창설 및 국가 경계 획정, 지방 정부 개혁, 새로운 공화국을 위한 헌법 기초 위원회를 조직했다.
3.6. 제2, 3공화국과 군부 통치 지속

군은 제1공화국보다 더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정당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를 마련하며 신중하게 민간 통치로의 복귀를 계획했다. 1979년, 5개의 정당이 일련의 선거에서 경쟁했고, 그 결과 나이지리아 국민당(NPN)의 알하지 셰후 샤가리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5개 정당 모두 국회에서 의석을 확보했다. 1979년 10월 1일, 셰후 샤가리는 나이지리아 연방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겸 총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오바산조는 샤가리에게 평화적으로 권력을 이양하여 나이지리아 역사상 자진해서 물러난 최초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샤가리 정부는 사실상 나이지리아 사회의 모든 부문으로부터 부패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1983년, 국영 나이지리아 국영석유공사의 조사관들은 "이 나라 물의 느린 중독"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1983년 8월, 샤가리와 NPN은 국회 과반수 의석과 12개 주 정부 통제권을 확보하며 압도적인 승리로 재집권했다. 그러나 선거는 폭력으로 얼룩졌고, 광범위한 투표 조작과 선거 부정 혐의로 인해 결과에 대한 법적 다툼이 벌어졌다. 제1공화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 지도자들이 제대로 통치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불확실성도 있었다.
1983년 나이지리아 쿠데타는 나이지리아 군 주요 장교들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정부 전복과 모하마두 부하리 소장의 국가원수 취임으로 이어졌다. 1984년 정권 재선거 직후 모하마두 부하리의 군사 쿠데타는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발전으로 간주되었다. 1985년, 이브라힘 바방기다는 쿠데타로 부하리를 축출했다. 1986년, 바방기다는 1986년 나이지리아 정치국을 설립하여 제3 나이지리아 공화국으로의 전환을 위한 권고안을 마련했다. 1989년, 바방기다는 제3 나이지리아 공화국으로의 전환 계획을 시작했다. 바방기다는 1990년 나이지리아 쿠데타 시도에서 살아남았고, 약속했던 민주주의로의 복귀를 1992년으로 연기했다.
1993년 6월 12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1983년 군사 쿠데타 이후 처음이었다. 국가선거관리위원회가 공식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결과는 사회민주당의 모슈드 아비올라와 바바 가나 킹기베 조가 국민공화협의회의 바시르 토파와 실베스터 우고 조를 230만 표 이상 차이로 물리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바방기다는 선거를 무효화했고, 이로 인해 대규모 민간 시위가 발생하여 몇 주 동안 사실상 국가가 마비되었다. 1993년 8월, 바방기다는 마침내 민간 정부에 권력을 이양하겠다는 약속을 지켰지만, 그 전에 어니스트 쇼네칸을 임시 국가 정부 수반으로 임명했다. 바방기다 정권은 가장 부패했으며 나이지리아에 부패 문화를 조성한 책임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쇼네칸의 임시 정부는 나이지리아 정치사상 가장 짧았으며, 사니 아바차 장군이 이끄는 1993년 나이지리아 쿠데타로 전복되었다. 아바차는 계속되는 민간 불안을 진압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군사력을 사용했다. 1995년, 정부는 오고니족 장로 4명의 사망에 대한 날조된 혐의로 환경운동가 켄 사로위와를 교수형에 처했고, 이로 인해 나이지리아는 영연방에서 제명되었다. 미국의 외국인 불법행위법에 따라 로열 더치 셸과 셸의 나이지리아 사업부 책임자인 브라이언 앤더슨을 상대로 제기된 소송은 셸이 계속 책임을 부인하는 가운데 법정 밖에서 합의되었다. 1999년에는 아바차에게서 추적된 수억 달러의 계좌가 발견되었다. 이 정권은 1998년 독재자가 관저에서 사망하면서 끝났다. 그는 서유럽 은행의 해외 계좌로 돈을 약탈했으며, 장군과 정치인들을 체포하고 뇌물을 주어 쿠데타 음모를 막았다. 그의 후임자인 압둘살라미 아부바카르 장군은 1999년 5월 5일 다당제 선거를 규정한 새 헌법을 채택했다.
3.7. 제4공화국 (민주주의 시대)

1999년 5월 29일, 아부바카르는 1999년 나이지리아 대통령 선거 승자인 전 군부 통치자 올루세군 오바산조 장군에게 나이지리아 대통령으로서 권력을 이양했다. 오바산조는 아바차 독재 정권 하에서 수감되어 있었다. 오바산조의 취임은 단명한 민주주의, 내전, 군부 독재의 39년 기간을 끝내고 제4 나이지리아 공화국의 시작을 알렸다. 오바산조를 집권시키고 2003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을 허용한 선거가 자유롭지 못하고 불공정하다는 비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이지리아는 오바산조 통치 하에 민주화에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2007년 나이지리아 총선에서 인민민주당의 우마루 무사 야르아두아가 집권했다. 자유롭고 공정한 절차를 촉진하기 위해 나이지리아 선거를 관찰했던 국제 사회는 이 선거를 심각하게 결함이 있는 것으로 비난했다. 야르아두아는 2010년 5월 5일에 사망했고, 부통령 굿럭 조너선은 3개월 전 상원에서 야르아두아를 계승할 대통령 대행으로 선서했었다. 조너선은 2011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투표는 비교적 폭력이나 선거 부정이 거의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조너선 재임 기간 동안 나이지리아가 아프리카의 주요 경제 강국이 되는 경제 회복을 목격했다. 조너선 행정부는 또한 전례 없는 부패 증가를 목격했으며, 국영 석유 회사를 통해 나이지리아 국가에 200.00 억 USD나 손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너선 재임 기간에는 2014년 그워자 학살과 치복 여학생 납치 사건과 같은 보코 하람 반란에 의한 테러 물결이 나타났다.
2015년 나이지리아 총선을 앞두고 나이지리아 최대 야당들인 나이지리아 행동의회, 진보변혁회의, 범나이지리아인민당, 범진보대연합 일부 분파, 그리고 신 PDP(집권 인민민주당 소속 주지사 분파)가 합병하여 현 대통령 볼라 아흐메드 티누부가 이끄는 범진보의회당을 결성했다. 당시 이 선거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치러진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선거였다(2019년 나이지리아 총선과 2023년 선거만이 이를 능가했다). 이 거대 야당은 전 군부 독재자 모하마두 부하리를 대선 후보로 선택했다. 2015년 부하리의 선거 운동은 인기가 있었고 확고한 반부패 투사라는 그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구축되었으며, 그는 200만 표 이상 차이로 선거에서 승리했다. 관찰자들은 대체로 선거가 공정했다고 칭찬했다. 이 선거는 현직 대통령이 나이지리아에서 재선에 실패한 첫 번째 사례였다. 2019년 나이지리아 총선에서 부하리는 재선되었다.
2023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다른 덜 인기 있는 후보들 중에서 4명의 주요 후보가 대통령직을 놓고 경쟁했다. 민주주의 복귀 이후 처음으로 전직 군부 통치자가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아 민주주의 강화와 다당제 헌법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이 선거에서는 또한 새로운 후보들의 환유적 지지자들, 즉 이전에 아남브라주 지사였던 피터 오비의 오비디언트 운동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젊고 도시적인 유권자들에게 널리 호소력을 발휘했으며 남동부에 핵심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북서부 카노 주 전 주지사였던 라비우 콴콰소의 Kwankwasiyya콴콰시야영어 운동도 있었다.

집권당의 볼라 티누부는 논란이 된 선거에서 36.61%의 득표율로 승리했지만, 두 차점자 모두 승리를 주장했고 선거 재판소에서 소송이 진행 중이다. 볼라 티누부의 취임식은 2023년 5월 29일에 열렸다. 나이지리아의 납치 문제는 계속되었다. 2024년 5월 29일, 티누부는 1960년부터 1978년까지 국가였던 나이지리아, 우리가 당신을 환호하네를 국가로 다시 채택하고 동포들이여, 일어나라를 대체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4. 지리

나이지리아는 서아프리카 기니만에 위치하며 총면적은 92.38 만 km2로 세계에서 32번째로 큰 나라이다. 국경선은 4047 km에 달하며, 베냉( 773 km ), 니제르( 1497 km ), 차드( 87 km ), 그리고 분리주의 암바조니아를 포함한 카메룬( 1690 km )과 국경을 접한다. 해안선 길이는 최소 853 km이다. 나이지리아는 북위 4도에서 14도, 동경 2도에서 15도 사이에 위치한다. 나이지리아에서 가장 높은 지점은 차팔 와디로 해발 2419 m이다. 주요 강은 나이저강과 베누에강으로, 이 두 강은 합류하여 나이저 삼각주로 흘러든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큰 강 삼각주 중 하나이며, 중앙아프리카 맹그로브 숲의 넓은 지역이기도 하다.
나이지리아의 가장 광활한 지형 지역은 나이저강과 베누에강 계곡(이들은 합쳐져 Y자 모양을 이룸)이다. 나이저강 남서쪽에는 "험준한" 고원이 있다. 베누에강 남동쪽에는 언덕과 산들이 있으며, 이는 나이지리아에서 가장 높은 고원인 맘빌라 고원을 형성한다. 이 고원은 카메룬과의 국경을 넘어 확장되며, 이곳의 산지 지형은 카메룬의 바멘다 고원의 일부이다.
4.1. 지형과 기후
나이지리아는 다양한 지형을 가지고 있다. 남쪽 끝 지역은 열대 우림 기후로 정의되며, 연간 강우량은 1.5 m (60 in)에서 2.0 m (80 in) 사이이다. 남동쪽에는 오부두 고원이 있다. 해안 평야는 남서부와 남동부 모두에서 발견된다. 해안을 따라 맹그로브 습지가 발견된다.
카메룬 국경 근처 해안에 가까운 지역은 풍부한 열대 우림이며 크로스-사나가-비오코 해안림 생태 지역의 일부로, 생물 다양성의 중요한 중심지이다. 이곳은 오직 이 지역과 국경 너머 카메룬에서만 야생으로 발견되는 드릴 원숭이의 서식지이다. 이 숲에 있는 크로스리버주 칼라바르 주변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나비가 서식하는 곳으로 여겨진다. 나이저강과 크로스강 사이의 남부 나이지리아 지역은 인구 증가로 인한 개발과 벌목으로 인해 대부분의 숲을 잃었고, 초원으로 대체되었다.
남쪽 끝과 북쪽 끝 사이의 모든 지역은 사바나(나무가 거의 없고 나무 사이에 풀과 꽃이 있는 지역)이다. 강우량은 연간 0.5 m (20 in)에서 1.5 m (60 in) 사이로 더 제한적이다. 사바나 지대는 기니 산림-사바나 모자이크, 수단 사바나, 사헬 사바나의 세 가지 범주로 나뉜다. 기니 산림-사바나 모자이크는 나무가 드문드문 있는 키 큰 풀밭 평원이다. 수단 사바나는 비슷하지만 풀과 나무가 더 짧다. 사헬 사바나는 북동쪽에서 발견되는 풀과 모래가 섞인 지역으로 구성된다. 사헬 지역의 연간 강우량은 0.5 m (20 in) 미만이며, 사하라 사막이 잠식하고 있다. 국가의 건조한 북동쪽 모퉁이에는 차드호가 있으며, 니제르, 차드, 카메룬과 공동 수역 경계를 이루고 있다.
4.2. 수자원
나이지리아는 차드호와 나이저강의 두 주요 집수 지역으로 나뉜다. 나이저강 집수 지역은 국토의 약 63%를 차지한다. 나이저강의 주요 지류는 베누에강이며, 그 지류는 카메룬을 넘어 차드와 샤리강 집수 지역까지 확장된다.
차드 분지는 나이지리아 북동부 지역에서 물을 공급받는다. 바우치고원은 나이저/베누에강 수계와 코마두구 요베강 수계 사이의 분수계를 형성한다. 나이지리아 북동부의 평평한 평원은 지리적으로 차드 분지의 일부이며, 이곳에서 엘 베이드강의 흐름은 만다라산맥에서 차드호까지 카메룬과의 국경을 형성한다. 코마두구 요베강 수계는 국제적으로 중요한 하데지아-응구루 습지와 우기에는 응구루호 주변의 우각호를 형성한다. 북동부의 다른 강으로는 응가다강과 예드세람강이 있으며, 두 강 모두 삼비사숲을 통과하여 강 수계를 형성한다. 북동부의 강 수계 또한 주요 강 수계이다. 또한 나이지리아에는 수많은 해안 강이 있다.

지난 백만 년 동안 나이지리아 북동쪽 끝에 있는 차드호는 수천 년 동안 여러 차례 말라붙었다가 현재 크기의 몇 배로 커지기를 반복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그 표면적이 상당히 줄어들었는데, 이는 농업용지 관개를 위해 사람들이 유입구에서 물을 가져가는 것도 원인이 될 수 있다.
4.3. 식생과 환경 문제

나이지리아는 세 가지 유형의 식생으로 덮여 있다: 숲(나무가 상당히 우거진 곳), 사바나(나무가 거의 없고 나무 사이에 풀과 꽃이 있는 곳), 산지 지형(가장 드물고 주로 카메룬 국경 근처 산에서 발견됨). 숲 지대와 사바나 지대는 모두 세 부분으로 나뉜다.
숲 지대의 가장 남쪽 부분, 특히 나이저강과 크로스강 삼각주 주변은 중앙아프리카 맹그로브 숲이다. 이 북쪽에는 담수 습지가 있으며, 염수 맹그로브 습지와는 다른 식생을 포함하고, 그 북쪽에는 열대 우림이 있다.
사바나 지대의 세 가지 범주는 키 큰 풀밭 평원으로 나무가 드문드문 있는 기니 산림-사바나 모자이크(전국적으로 가장 흔함), 짧은 풀과 짧은 나무가 있는 수단 사바나, 그리고 북동쪽에서 발견되는 풀과 모래가 섞인 사헬 사바나로 나뉜다.
나이지리아의 주요 환경 문제는 폐기물 관리(하수 처리 포함), 삼림 벌채와 토양 악화의 연쇄 과정, 그리고 기후 변화 또는 지구 온난화이다. 폐기물 관리는 라고스와 같은 거대도시와 경제 발전, 인구 증가, 그리고 그로 인한 산업 및 생활 폐기물 증가를 관리할 수 없는 지방 자치 단체의 무능력과 관련된 다른 주요 나이지리아 도시에서 문제를 야기한다. 이러한 폐기물 관리 문제는 또한 연방 수도 지구의 쿠바(Kubwa쿠바영어) 지역 사회의 지속 불가능한 환경 관리 생활 방식에도 기인하며, 이곳에서는 무분별한 폐기물 처리, 운하, 수로인 하수 시스템을 따라 또는 그 안으로 폐기물을 버리는 습관 등이 있다. 무계획적인 산업 계획, 증가하는 도시화, 빈곤, 지방 자치 단체의 역량 부족이 국가 주요 도시의 높은 폐기물 오염 수준의 주요 원인으로 간주된다. 일부 해결책은 환경에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하여 처리되지 않은 폐기물이 수로와 지하수를 오염시킬 수 있는 장소에 버려지게 되었다.

2005년 유엔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나이지리아는 세계에서 삼림 벌채 비율이 가장 높았다. 그해 국토의 12.2%에 해당하는 1108.90 만 ha가 삼림으로 덮여 있었다. 1990년에서 2000년 사이에 나이지리아는 매년 평균 40.97 만 ha의 숲을 잃었으며, 이는 연평균 삼림 벌채율 2.4%에 해당한다. 1990년에서 2005년 사이에 나이지리아는 전체 삼림 면적의 35.7% 또는 약 614.50 만 ha를 잃었다. 나이지리아는 2019년 산림경관보전지수 평균 점수가 6.2/10으로, 172개국 중 전 세계 82위를 차지했다.
2010년, 북부 잠파라주에서 비공식적인 금 채굴로 인해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의도치 않게 납 함유 토양에 노출되었다. 추정치는 다양하지만, 400명 이상의 어린이가 급성 납 중독으로 사망한 것으로 생각되며, 이는 아마도 지금까지 발생한 가장 큰 납 중독 사망 사건일 것이다.
나이지리아의 델타 지역은 심각한 기름 유출과 석유 산업으로 인한 기타 환경 문제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오염된 지역 중 하나이다. 공기, 토양, 물의 독성 오염 물질로 인한 심각한 오염은 종종 생태학살의 예로 사용된다. 환경 피해 외에도 나이저델타 분쟁을 야기했다.
현지 운영자들이 훔친 원유를 휘발유와 경유로 전환하는 불법 정유소는 특히 "더럽고 위험하며 수익성이 높은" 것으로 간주된다. 안전 및 환경 측면은 일반적으로 무시된다. 석유 정제는 필연적으로 중유를 생산하는데, 일반 공장에서는 막대한 기술 비용을 들여 더 가벼운 연료 성분으로 "분해"한다. 불법 정유소에는 이러한 기술적 가능성이 없으며 중유가 쌓이는 곳에 "처리"한다. 원유의 가벼운 성분(메테인에서 뷰테인, 아이소뷰테인)은 특정 폭발 위험을 야기하며, 이는 종종 불법 공장에서 재해로 이어진다. 2022년, 나이지리아는 현지 불법 정유소 폭발로 125명의 사망자를 냈다.
5. 정치
나이지리아의 정치 체제는 대통령 중심의 연방 공화국으로,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 분립을 기반으로 한다. 주요 정치적 사안으로는 민주주의 공고화, 경제 개혁, 부족 및 종교 갈등 해결, 부정부패 척결 등이 있으며, 대외적으로는 아프리카 내에서의 주도적 역할과 국제 사회와의 협력을 중시한다.
5.1. 정부 구조
나이지리아는 미국을 모델로 한 연방 공화국으로, 36개 주와 수도 아부자를 독립 단위로 한다. 행정권은 대통령이 행사한다. 대통령은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이며, 국민투표를 통해 선출되어 최대 2번의 4년 임기를 수행할 수 있다. 주지사 역시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4년 임기로 선출되며 최대 2번의 임기를 수행할 수 있다. 대통령의 권력은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된 양원제 국민의회에 의해 견제받는다. 상원은 각 주에서 3명씩, 수도 아부자에서 1명씩 선출된 109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4년이다. 하원은 360석으로 구성되며, 각 주의 의석수는 인구에 따라 결정된다.
나이지리아 대통령은 수정된 2단계 선거 제도로 선출된다. 1차 투표에서 당선되기 위해서는 후보자가 상대적 다수표를 얻고, 36개 주 중 최소 24개 주에서 25%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해야 한다. 이 기준을 충족하는 후보가 없을 경우, 최다 득표자와 그 다음으로 많은 주에서 다수표를 얻은 후보자 간에 2차 투표가 진행된다. 관례적으로 대통령 후보는 자신과 민족적, 종교적으로 반대되는 성향의 인물을 부통령 후보(러닝메이트)로 지명한다. 이를 규정하는 법은 없지만, 제4공화국 이후 2023년까지 모든 대통령 후보가 이 관례를 따랐다. 그러나 2023년 총선에서는 이 종교적, 민족적 다양성 원칙이 무시되었는데, 범진보의회당 후보인 볼라 티누부(무슬림)가 또 다른 무슬림인 카심 셰티마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5.2. 행정 구역
나이지리아는 36개의 주와 1개의 연방 수도 지구로 구성되며, 이는 다시 774개의 지방 정부 구역( Local Government Areas로컬 거버먼트 에어리어스영어, LGAs)으로 세분화된다. 일부 맥락에서는 주들이 6개의 지정학적 구역으로 통합되기도 한다: 북서부, 북동부, 중북부, 남서부, 남동부, 그리고 남남부.
나이지리아에는 인구 100만 명이 넘는 도시가 5개 있다(큰 순서대로): 라고스, 카노, 이바단, 베닌시티, 포트하커트. 라고스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도시로, 도시 지역 인구는 1,200만 명이 넘는다.
특히 남부 지역은 도시화가 매우 활발하며 상대적으로 많은 도시가 분포한다. 2015년 추정에 따르면 나이지리아에는 인구 50만 명 이상의 도시가 20개 있으며, 그중 10개 도시는 인구가 100만 명에 달한다.
5.2.1. 주요 도시
나이지리아의 주요 도시들은 국가의 경제, 정치, 문화 중심지 역할을 한다.
- 라고스: 나이지리아 최대 도시이자 경제 수도로,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거대 도시이다. 과거 수도였으며, 주요 항구 도시로서 상업과 금융, 기술 산업의 중심지이다.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공존하며 활기찬 분위기를 자랑한다. 인구는 약 1,5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 아부자: 나이지리아의 계획된 수도로, 1991년 라고스에서 수도를 이전했다. 국가의 정치 및 행정 중심지이며, 주요 정부 기관과 외국 대사관이 위치해 있다. 잘 정비된 도시 기반 시설과 현대적인 건축물이 특징이다.
- 카노: 북부 나이지리아의 역사적, 상업적 중심지로, 과거 하우사 왕국의 중요한 도시 국가였다. 사하라 횡단 무역의 요충지였으며, 현재도 가죽 제품, 직물 등 전통 산업과 상업이 발달해 있다. 이슬람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도시이다.
- 이바단: 남서부 요루바족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로, 나이지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이바단 대학교가 위치해 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으며, 현재도 교육과 농산물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이 외에도 포트하커트, 카두나, 베닌시티 등 여러 주요 도시들이 각 지역의 경제와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5.3. 사법 제도
나이지리아의 법률 시스템은 영미법, 관습법, 그리고 북부 주를 중심으로 적용되는 이슬람법(샤리아)이 혼합된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헌법이 국가 최고법이다.
- 영미법: 영국의 식민 통치 시기에 도입되어 현재 나이지리아 법체계의 근간을 이룬다. 민사 및 형사 소송 절차, 계약법, 불법행위법 등 많은 분야에서 영미법 원칙이 적용된다.
- 관습법: 각 민족 공동체의 전통적인 규범과 관행에서 유래한 법으로, 주로 가족, 상속, 토지 소유권 등과 관련된 분쟁 해결에 활용된다. 250개가 넘는 민족만큼 다양한 관습법이 존재한다.
- 이슬람법 (샤리아): 주로 북부 12개 주에서 무슬림 주민들의 개인사(결혼, 이혼, 상속 등) 및 일부 형사 사건에 적용된다. 샤리아 법원의 운영과 적용 범위는 주마다 차이가 있으며, 때로는 인권 문제와 관련된 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사법부의 최고 기관은 나이지리아 대법원이며, 그 아래로 항소 법원, 연방 고등 법원, 주 고등 법원 등이 있다. 사법부의 독립성과 공정성은 나이지리아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5.4. 대외 관계

나이지리아는 1960년 독립 이후 아프리카 중심의 외교 정책을 표방하며 아프리카 대륙의 평화와 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해왔다. 아프리카 연합(AU),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 등 역내 기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특히 서아프리카 지역의 분쟁 해결 및 평화 유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 라이베리아 내전과 시에라리온 내전 당시 ECOMOG(ECOWAS 평화유지군) 파병을 통해 지역 안정에 기여한 바 있다.
나이지리아는 국제 연합(UN), 영연방, 비동맹 운동, 석유 수출국 기구(OPEC), 이슬람 협력 기구(OIC) 등 다양한 국제기구의 회원국으로 활동하며 국제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OPEC 회원국으로서 국제 석유 시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나이지리아의 대외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주요 강대국과의 관계에서는 미국, 영국 등 서방 국가들과 전통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으나, 최근에는 중국과의 경제 협력이 급증하면서 관계 다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중국은 나이지리아의 주요 교역 상대국이자 투자국으로 부상했지만, 무역 불균형과 중국산 저가 제품 유입으로 인한 국내 산업 피해 등의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주변국들과는 국경 문제, 자원 문제 등으로 때때로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대체로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한다.
나이지리아의 외교 정책은 아프리카의 단결과 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삼으면서도, 자국의 경제적 이익과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5.4.1. 대한민국과의 관계
나이지리아와 대한민국은 1980년 2월 22일 공식적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수교 이후 양국은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호 협력 관계를 발전시켜왔다. 대한민국은 1980년 라고스에 주나이지리아 대한민국 대사관을 개설했으며, 나이지리아는 1987년 서울에 주한 나이지리아 대사관을 설치했다.
경제 분야에서 양국 간 교역은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이다. 대한민국의 주요 수출품은 자동차, 전자제품, 기계류 등이며, 나이지리아로부터는 주로 원유, 천연가스, 농산물 등을 수입한다.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등 한국 기업들이 나이지리아 시장에 진출해 있으며, 최근에는 건설, 플랜트 분야에서의 협력도 확대되고 있다.
문화 교류 또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K-pop, 한국 드라마 등 한류 콘텐츠가 나이지리아 젊은 층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으며, 태권도는 나이지리아에서 인기 있는 스포츠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양국 정부는 교육, 문화,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교류를 장려하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은 코이카(KOICA)를 통해 나이지리아에 대한 공적 개발 원조(ODA) 사업을 진행하며 나이지리아의 경제 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주요 지원 분야는 교육, 보건 의료, 농업 개발 등이다. 양국은 국제 무대에서도 상호 지지하며 협력 관계를 강화해나가고 있다.
5.5. 군사

나이지리아군은 나이지리아의 군사력을 총칭하며, 나이지리아 육군, 나이지리아 해군, 나이지리아 공군의 3군으로 구성된다. 나이지리아의 대통령이 군대의 총사령관으로서의 헌법적 권한을 국방부를 통해 행사하며, 국방부는 군대 및 군 인력 관리를 책임진다. 군대의 작전상 최고 지휘관은 국방참모총장이며, 국방장관의 지휘를 받는다. 223,000명 이상의 현역 병력을 보유한 나이지리아군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정규 전투 부대 중 하나이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나이지리아는 육군 100,000명, 해군 25,000명, 공군 18,000명 등 총 143,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헌병 및 준군사조직" 인력도 80,000명에 달한다. 나이지리아는 2017년 GDP의 0.4% 미만, 즉 16.00 억 USD를 국방비로 지출했다. 2022년에는 22.60 억 USD가 나이지리아군 예산으로 책정되었으며, 이는 벨기에 국방 예산(59.90 억 USD)의 3분의 1을 약간 넘는 수준이다.
나이지리아군은 독립 이후 국가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으며, 국내 안보 유지, 국경 방위, 대테러 작전(특히 보코 하람 대응) 등을 주요 임무로 한다. 또한, 아프리카 연합(AU) 및 국제 연합(UN) 평화 유지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수단 다르푸르 등지에 파병한 경험이 있다. 그러나 군 내부의 부정부패, 장비 노후화, 인권 침해 논란 등은 해결해야 할 과제로 지적된다.
6. 경제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손꼽히는 경제 대국으로, 풍부한 천연자원과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성장 잠재력이 높은 국가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석유 의존적인 경제 구조, 부정부패, 사회 기반 시설 부족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안고 있다.
6.1. 경제 구조와 현황
나이지리아 경제는 아프리카에서 네 번째로 크며, 명목 GDP 기준으로는 세계 31위, PPP 기준으로는 세계 30위이다. 2022년 1인당 GDP(PPP)는 9148 USD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집트, 모로코보다는 낮지만 가나와 코트디부아르보다는 약간 높다. 2023년 현재 나이지리아 경제는 저중소득 국가로 분류된다.
1999년 이전에는 수년간의 군부 통치, 부정부패, 경영 부실로 경제 발전이 저해되었다. 그러나 이후 민주주의 회복과 경제 개혁으로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2011년 시티그룹은 나이지리아가 2010년부터 2050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평균 GDP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나이지리아는 에너지, 금융 시장, 의약품, 엔터테인먼트 산업 등 여러 산업에서 아프리카의 경제 선도국이다. 금융 서비스 부문은 현지 및 국제 은행, 자산 관리 회사, 증권 회사, 보험 회사 및 중개인, 사모펀드, 투자 은행 등이 혼합되어 잘 발달되어 있다. 석유 다음으로 나이지리아의 가장 큰 외화 수입원은 해외 거주 나이지리아인들이 본국으로 보내는 송금이다.
나이지리아는 또한 석탄, 보크사이트, 탄탈라이트, 금, 주석, 철광석, 석회암, 나이오븀, 납, 아연 등 개발되지 않은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2015년 금 생산량은 8톤이었다. 이러한 천연자원의 막대한 매장량에도 불구하고 나이지리아의 광업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다.
6.2. 주요 산업
나이지리아 경제는 석유 및 천연가스, 농업, 서비스업, 제조업 등 다양한 산업 분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석유 산업이 국가 경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정부는 경제 다각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6.2.1. 농업

2021년 나이지리아 GDP의 약 23.4%는 농업, 임업, 어업을 합친 분야에서 기여했다. 나이지리아는 세계 최대의 카사바 생산국이다. 주요 작물로는 옥수수, 쌀, 기장, 얌, 수수 (기니 옥수수) 등이 있다. 코코아는 주요 농업 수출품이며, 국가의 가장 중요한 비석유 제품 중 하나이다. 나이지리아는 또한 세계 20대 천연 고무 수출국 중 하나로, 2019년에 2090.00 만 USD를 창출했다.
나이지리아 내전과 석유 붐 이전에는 나이지리아가 식량 자급자족 국가였다. 농업은 과거 나이지리아의 주요 외환 수입원이었다. 그러나 농업은 나이지리아의 급격한 인구 증가에 발맞추지 못했고, 현재 나이지리아는 식량 자급을 위해 식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연간 67.00 억 USD를 식량 수입에 지출하며, 이는 식량 수출로 인한 수입보다 4배 많은 금액이다. 나이지리아 정부는 1970년대에 무기질 비료 사용을 장려했다.
나이지리아의 쌀 생산량은 2017/18년에서 2021/22년까지 연간 500만 톤으로 10% 증가했지만, 증가하는 수요를 거의 따라잡지 못했다. 따라서 쌀 수입량은 연간 200만 톤으로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2019년 8월, 나이지리아는 국내 생산 증대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베냉 및 기타 인접 국가와의 국경을 폐쇄하여 쌀 밀수를 막았다.
지금까지 나이지리아는 껍질을 벗기지 않은 쌀을 수출했지만, 국가의 주식인 껍질을 벗긴 쌀을 수입해야 했다. 라고스 인근 이모타 제미소는 국내에서 해당 가공을 처리하고, 무역 수지를 개선하며, 노동 시장을 개선하고, 운송 및 중개인에 대한 불필요한 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것이다. 2022년 말 완전 가동되면 사하라 이남에서 가장 큰 이 공장은 25만 명을 고용하고 연간 2.5 M포대의 50kg 쌀을 생산할 것으로 예상된다.
6.2.2. 석유 및 천연가스

나이지리아는 세계 15위의 석유 생산국이자 6위의 수출국이며, 확인된 매장량은 9번째로 많다. 석유는 나이지리아 경제와 정치에서 큰 역할을 하며, 정부 수입의 약 80%를 차지한다. 나이지리아는 또한 OPEC이 추정한 확인된 천연가스 매장량 9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정부는 약 206조 5300억 입방피트의 가치를 803.40 조 USD로 평가했다. 천연가스는 나이저강에서 경제 기적을 일으킬 잠재력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나이지리아는 매년 가스 플레어링으로 약 25.00 억 USD를 손실하고 있으며, 주요 석유 생산 지역인 나이저 삼각주에서 원유 절도로 하루 12만 배럴 이상을 잃고 있다. 이로 인해 기니만 해적 및 지역 통제권을 위한 분쟁이 발생했으며, 생산 차질을 초래하여 국가가 OPEC 할당량을 충족하고 석유를 최대한 수출하는 것을 막고 있다.
석유자원부에 따르면 나이지리아에는 총 159개의 유층과 1,481개의 유정이 가동 중이다. 국가에서 가장 생산적인 지역은 "남남" 지역의 나이저 삼각주 분지로, 159개 유전 중 78개가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나이지리아의 대부분 유전은 작고 흩어져 있으며, 1990년 기준으로 이러한 소규모 유전이 나이지리아 전체 생산량의 62.1%를 차지했다. 이는 당시 나이지리아 석유의 37.9%를 생산했던 16개의 대규모 유전과 대조적이다. 휘발유는 2021년까지 나이지리아의 주요 수입품이었으며, 수입량의 24%를 차지했다.
나이저 델타 넴베 크릭(Nembe Creek넴베 크릭영어) 유전은 1973년에 발견되었으며, 중기 마이오세 삼각주 사암-셰일에서 2 km에서 4 km 깊이의 배사 구조 구조 트랩에서 생산된다. 2013년 6월, 셸은 나이지리아 사업에 대한 전략적 검토를 발표하며 자산 매각 가능성을 시사했다. 많은 국제 석유 회사가 수십 년 동안 이곳에서 운영해 왔지만, 2014년까지 대부분은 석유 절도 등 다양한 문제를 이유로 지분 매각 움직임을 보였다. 2014년 8월, 셸은 나이지리아 유전 4곳에 대한 지분 정리를 마무리하고 있다고 밝혔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위협받는 유럽으로의 천연가스 공급은 나이지리아 천연가스를 파이프라인을 통해 모로코나 알제리로 수송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2022년 5월 현재 이에 대한 결과는 아직 없다.
6.2.3. 제조업 및 기술

나이지리아는 카노, 아베오쿠타, 오니차, 라고스를 중심으로 한 가죽 및 섬유, 플라스틱 및 가공 식품을 포함하는 제조업을 보유하고 있다. 오군주는 대부분의 공장이 오군에 위치하고 더 많은 회사가 그곳으로 이전함에 따라 현재 나이지리아의 산업 허브로 간주되며, 라고스가 그 뒤를 잇고 있다. 남동부 지역의 아바 시는 수공예품과 "아바 메이드(Aba made아바 메이드영어)"로 알려진 신발로 잘 알려져 있다. 나이지리아는 연간 72만 대의 자동차 시장을 보유하고 있지만, 이 중 국내 생산은 20% 미만이다.
2016년 나이지리아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제치고 사하라 이남 지역의 선도적인 시멘트 생산국이었다. 나이지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알리코 단고테는 시멘트 생산과 농산물을 기반으로 부를 쌓았다. 아자오쿠타 제철회사는 자체 정보에 따르면 연간 130만 톤의 강철을 생산한다. 그러나 카치나, 조스, 오쇼그보의 제철소는 더 이상 가동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2019년 6월, 나이지리아 EduSat-1이 국제우주정거장에서 배치되었다. 이는 다른 나라에서 제작된 많은 나이지리아 위성에 이어 나이지리아에서 제작된 최초의 위성이다. 2021년 기준,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제약 생산 능력의 약 60%를 차지하며, 대형 제약 회사는 라고스에 위치해 있다. 나이지리아에서 가장 많은 직원을 보유한 제약 생산 업체는 엠조르 제약 산업이다. 나이지리아에는 최초의 브랜드 나이지리아 컴퓨터인 지녹스와 태블릿 PC와 같은 전자 기기 제조업체와 같은 몇몇 전자 제조업체가 있다. 2022년 1월 기준,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7개 유니콘 기업 중 5개를 보유하고 있다.
6.3. 에너지
나이지리아의 에너지 소비량은 발전 용량을 훨씬 초과한다. 대부분의 에너지는 전통적인 화석 연료에서 나오며, 이는 전체 1차 생산량의 73%를 차지한다. 나머지는 수력 발전(27%)에서 나온다. 독립 이후 나이지리아는 에너지용 국내 원자력 산업을 개발하려고 노력해 왔다. 나이지리아는 2004년 아마두 벨로 대학교에 중국산 연구용 원자로를 개설했으며, 전력 생산을 위한 원자력 발전 배치 국가 프로그램에 따라 2027년까지 최대 4,000 MWe의 원자력 용량 계획을 개발하기 위해 국제 원자력 기구의 지원을 모색해 왔다. 2007년 우마루 무사 야르아두아 대통령은 증가하는 에너지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원자력 발전을 수용할 것을 국가에 촉구했다. 2017년 나이지리아는 유엔 핵무기금지조약에 서명했다. 2015년 4월, 나이지리아는 러시아 국영 로사톰과 2035년까지 4기의 원자력 발전소를 설계, 건설 및 운영하는 데 협력하기 위한 회담을 시작했으며, 그중 첫 번째는 2025년까지 가동될 예정이다. 2015년 6월, 나이지리아는 계획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위해 두 곳의 부지를 선정했다. 나이지리아 정부와 로사톰 모두 부지의 구체적인 위치를 공개하지 않았지만, 원자력 발전소는 아콰이봄주와 코기주에 위치할 것으로 예상된다. 각 부지에는 2기의 발전소가 들어설 계획이다. 2017년에는 이투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6.3.1. 전력
조사에 따르면 나이지리아인의 94%가 국가 전력망에 연결되어 있지만, 전력 소비량이 전력량계로 기록되는 경우는 57%에 불과하다. 조사 대상 나이지리아인 중 단 1%만이 하루 24시간 전기를 공급받는다고 보고했다. 68%는 하루 1~9시간 전기를 공급받는다. 나이지리아인의 3분의 2, 즉 66%는 전기 요금으로 월 최대 10,000 나이라(13 USD)를 지불하며, 이는 나이지리아 평균 소득의 거의 3%에 해당한다. 응답자의 3분의 2 이상, 즉 67%는 중단 없는 전기 공급을 위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나이지리아인의 21%가 발전기를 소유하고 있으며, 14%는 태양 에너지를 사용한다.
6.4. 정보통신

나이지리아 통신 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 중 하나이며, 주요 신흥 시장 사업자(MTN, 9모바일, 에어텔, 글로바콤)들이 가장 크고 수익성이 높은 센터를 나이지리아에 두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ICT 부문은 많은 성장을 경험했으며, 2001년 단 1%에 불과했던 국가 GDP 기여율이 2018년에는 10%를 차지했다. 라고스는 번성하는 기술 생태계를 갖춘 아프리카 최대 기술 허브 중 하나로 간주된다. GSM 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나이지리아 성인 남성의 92%와 여성의 88%가 휴대폰을 소유하고 있다. 불법 체포, 웹사이트 폐쇄, 여권 압수, 은행 계좌 접근 제한 등 다양한 수단을 사용하여 나이지리아 정부는 인터넷에서 자신을 표현한 시민들을 처벌하고 인터넷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6.5. 관광업

나이지리아의 관광업은 주로 행사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이는 국가의 풍부한 민족 집단 때문이지만 열대 우림, 사바나, 폭포 및 기타 자연 명소도 포함한다.
아부자에는 여러 공원과 녹지가 있다. 가장 큰 공원인 밀레니엄 파크는 건축가 만프레디 니콜레티가 설계했으며 2003년 12월에 공식적으로 개장했다. 라지 바바툰데 파숄라 주지사 행정부가 달성한 재현대화 프로젝트 이후 라고스는 점차 주요 관광지가 되고 있다. 라고스는 현재 국제 도시가 되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2009년 에요 카니발(Eyo festival에요 축제요루바어, 오군주 이페루 레모에서 유래한 연례 축제)은 세계 도시 지위를 향한 발걸음이었다. 현재 라고스는 주로 비즈니스 중심의 빠르게 변화하는 공동체로 알려져 있다. 라고스는 아프리카 및 흑인 문화 정체성의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라고스에는 엘레구시 해변과 알파 해변을 포함한 대서양 연안의 모래 해변이 있다. 라고스에는 또한 이나그베 그랜드 비치 리조트를 포함한 많은 개인 해변 리조트와 외곽에 여러 다른 리조트가 있다. 라고스에는 3성급에서 5성급 호텔에 이르는 다양한 호텔이 있으며, 에코 호텔 앤 스위트, 페더럴 팰리스 호텔과 같은 현지 호텔과 인터콘티넨털, 쉐라톤, 포 포인츠 바이 쉐라톤과 같은 다국적 체인의 프랜차이즈가 혼합되어 있다. 다른 명소로는 타파와 발레와 광장, 페스탁 타운, 나이키 아트 갤러리, 프리덤 파크, 그리스도 대성당 등이 있다.
6.6. 교통
나이지리아의 서아프리카 중심부 위치로 인해, 교통은 국가 서비스 부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부 투자는 광범위한 도로 보수 증가를 보였고, 특히 주들이 증가된 정부 할당액을 지출함에 따라 새로운 건설이 점진적으로 수행되었다. 이러한 개선의 대표적인 예는 2022년에 대부분 완공된 오니차 근처의 제2 나이저 대교이다. 2017년 세계은행의 아프리카 물류 허브에 대한 보고서는 나이지리아를 코트디부아르, 세네갈, 상투메에 이어 4위로 평가했지만, 2021년 나이지리아는 글로벌 무역 효율성 증대를 위해 노력하는 민간 부문 그룹인 세계 물류 여권에 가입했다.
6.6.1. 도로

4개의 아프리카 횡단 자동차 도로가 나이지리아를 통과한다:
- 라고스-몸바사 고속도로
- 알제-라고스 고속도로
- 다카르-라고스 고속도로
- 다카르-은자메나 고속도로
나이지리아는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도로망을 보유하고 있다. 약 20.00 만 km에 달하며, 그중 6.00 만 km가 포장도로이다. 나이지리아의 도로와 고속도로는 모든 여객 및 화물 교통량의 90%를 처리한다. 2020년에는 GDP에 2.40 조 NGN ( 64.00 억 USD )를 기여했다. 연방 정부는 3.50 만 km의 도로망을 책임지고 있다. 라고스-이바단, 라고스-바다그리, 에누구-오니차와 같은 중요한 경제 중심지의 고속도로 연결망이 개보수되었다.
나머지 도로망은 주 정부의 문제이므로 어느 주에 있느냐에 따라 상태가 매우 다르다. 라고스, 아남브라주, 리버스주와 같이 경제적으로 강력한 주는 특히 열악한 평가를 받는다. 대부분의 도로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건설되었다. 열악한 유지 관리와 열등한 자재로 인해 도로 상태가 악화되었다. 여행은 매우 어렵다. 특히 우기에는 움푹 들어간 곳 때문에 이면 도로 이용이 거의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도로 강도들은 종종 이러한 상황을 범죄 목적으로 악용한다.
6.6.2. 철도 교통

철도는 라고스-카노 표준궤 철도와 같은 프로젝트가 완료되면서 대대적인 개편을 거쳤으며, 북부 도시인 카노, 카두나, 아부자, 이바단, 라고스를 연결한다.
6.6.3. 항공 교통

나이지리아 항공 산업은 2019년에 1986.20 억 NGN (4억 유로)를 창출하여 GDP에 0.14% 기여했다. 이는 2019년 나이지리아 경제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부문이었다. 여객 수송량은 2020년 9,358,166명에서 2021년 15,886,955명으로 69% 이상 크게 증가했다. 항공기 이동량은 2020년에서 2021년까지 46% 이상 증가했다. 총 화물량은 2020년 191톤이었으나 2021년에는 391톤으로 증가했다. 2021년 12월, 아남브라 국제 화물 공항이 운영을 시작했다. 2022년 4월, 무르탈라 무함마드 국제공항의 제2터미널이 개장했다. 이는 공항 수용 능력을 연간 1,400만 명으로 증가시킬 것이다.

나이지리아에는 54개의 공항이 있으며, 주요 공항은 다음과 같다:
- 라고스의 무르탈라 무함마드 국제공항
- 아부자의 은남디 아지키웨 국제공항
- 카노의 말람 아미누 카노 국제공항
- 에누구의 아카누 이비암 국제공항
- 포트하커트의 포트하커트 국제공항
나이지리아는 과거 국영 항공사인 나이지리아 항공을 운영했으나 2003년 과도한 부채로 영국 버진 그룹에 인수되었으며, 2005년 6월 28일부터 버진 나이지리아 항공이라는 이름으로 운항했다. 2008년 말, 버진 그룹은 항공사에서 철수한다고 발표했으며, 2009년 9월부터 이 항공사는 나이지리아 이글 항공으로 운영되고 있다. 나이지리아에서 가장 큰 항공사는 2012년에 설립된 민간 소유의 에어 피스이다.
7. 사회
나이지리아는 급격한 인구 증가와 함께 다양한 사회적 과제에 직면해 있다. 민족 및 종교적 다양성은 문화적 풍요로움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교육 및 보건 의료 시스템 개선, 빈곤 퇴치, 치안 확립 등은 나이지리아 사회의 주요 과제로 남아 있다.
7.1. 인구

유엔은 2023년 나이지리아 인구를 223,804,632명으로 추정하며, 농촌 인구 51.7%, 도시 인구 48.3%로 분포하고 인구 밀도는 제곱킬로미터당 167.5명이다. 인구의 약 42.5%가 14세 이하, 19.6%가 15~24세, 30.7%가 25~54세, 4.0%가 55~64세, 3.1%가 65세 이상이다. 2017년 중위 연령은 18.4세였다. 나이지리아는 세계에서 6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2017년 기준 출생률은 인구 1,000명당 35.2명, 사망률은 인구 1,000명당 9.6명이며, 합계출산율은 여성 1명당 5.07명이다. 나이지리아 인구는 1990년부터 2008년까지 5,700만 명이 증가하여 20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60%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이며, 2017년 기준 아프리카 전체 인구의 약 17%를 차지한다. 그러나 정확한 인구 규모는 여전히 추측의 대상이다.
수백만 명의 나이지리아인이 경제적 어려움 시기에 주로 유럽, 북미, 호주로 이주했다. 100만 명 이상의 나이지리아인이 미국으로 이주하여 나이지리아계 미국인 인구를 구성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많은 개인들은 북미 요루바 후손 전국 협회인 "에그베 오모 요루바(Egbe Omo Yoruba에그베 오모 요루바요루바어)"에 가입했다. 나이지리아 최대 도시는 라고스이다. 라고스는 1950년 약 30만 명에서 2017년 약 1,340만 명으로 성장했다.
7.1.1. 민족 구성
나이지리아는 250개가 넘는 민족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양한 언어와 관습을 가지고 있어 풍부한 민족적 다양성을 지닌 국가이다. 3대 주요 민족 집단은 하우사족, 요루바족, 이보족으로, 이들이 전체 인구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그 외 에도족, 이조족, 풀라족, 카누리족, 우르호보-이소코족, 이비비오족, 에비라족, 누페족, 그바기족, 주쿤족, 이갈라족, 이도마족, 오고니족, 티부족 등이 35~40%를 차지하며, 나머지 5%는 기타 소수 민족으로 구성된다. 나이지리아의 중부 벨트는 아티압족, 베롬족, 고에마이족(Goemai people고에마이족영어), 이갈라족, 코퍄르족, 피엠족(Pyem people피엠족영어), 티부족 등 다양한 민족 집단으로 유명하다. 영국인, 미국인, 인도인, 중국인(약 50,000명 추정), 백인 짐바브웨인, 일본인, 그리스인, 시리아인, 레바논인 이민자 등 소수 집단도 존재한다. 이민자에는 다른 서아프리카 또는 동아프리카 국가 출신도 포함된다.
7.2. 언어
나이지리아에서는 525개의 언어가 사용되었으며, 이 중 8개 언어는 현재 사멸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여러 민족 집단이 하나 이상의 언어를 사용한다. 영국의 식민 지배가 1960년에 끝난 영향으로, 나이지리아의 공용어인 영어는 국가의 문화적, 언어적 통합을 촉진하기 위해 선택되었다. 17세기 후반 영국과 아프리카 노예 상인들이 대서양 노예 무역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처음 사용했던 나이지리아 피진은 많은 나이지리아인들에게 모국어를 대체했다. 주변 국가에서 온 많은 프랑스어 사용자들이 나이지리아 국경 지역에서 사용되는 영어에 영향을 미쳤으며, 일부 나이지리아 시민들은 주변 국가에서 일할 수 있을 만큼 프랑스어에 능통해졌다. 나이지리아에서 사용되는 프랑스어는 일부 토착 언어 및 영어와 혼합될 수 있다.
나이지리아에서 주로 사용되는 언어는 아프리카의 언어의 세 가지 주요 어족을 대표한다. 대다수는 이보어, 요루바어, 이비비오어, 이조어군, 풀풀데어, 오고니어군, 에도어와 같은 니제르콩고어족 언어이다. 주로 보르노주와 요베주의 북동부에서 사용되는 카누리어는 나일사하라어족에 속하며, 하우사어는 아프리카아시아어족 언어이다. 대부분의 민족 집단이 자신들의 언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을 선호하지만, 공용어인 영어는 교육, 비즈니스 거래 및 공식적인 목적을 위해 널리 사용된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은 소수의 도시 엘리트층에 불과하며, 일부 농촌 지역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하우사어는 나이지리아에서 사용되는 세 가지 주요 언어 중 가장 널리 사용된다.
나이지리아 인구의 대다수가 농촌 지역에 거주하므로, 국가의 주요 의사소통 언어는 여전히 토착 언어이다. 이 중 가장 큰 언어인 요루바어와 이보어는 여러 다른 방언에서 표준화된 언어를 파생시켰으며 해당 민족 집단에서 널리 사용된다. 종종 단순히 "피진" 또는 "브로큰"(Broken English브로큰 잉글리시영어)으로 알려진 나이지리아 피진 영어도 인기 있는 링구아 프랑카이지만, 방언과 속어에 다양한 지역적 영향을 미친다. 피진 영어 또는 나이지리아 영어는 나이저 삼각주 지역 내에서 널리 사용된다.
7.3. 종교
2018년 CIA 월드 팩트북 추정치에 따르면, 나이지리아의 종교 분포는 이슬람교 53.5%, 개신교 35.3%, 로마 가톨릭 10.6%, 기타 0.6%이다.


나이지리아는 종교적으로 다양한 사회로, 나이지리아인들은 거의 동등하게 무슬림과 기독교인으로 나뉘며, 아프리카 전통 종교 및 기타 종교 신봉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나이지리아 인구 중 기독교인의 비율은 국내 무슬림에 비해 총출산율이 낮아 감소하고 있다.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지배적인 다른 아프리카 지역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전통 종교와의 종교적 습합이 흔하다.
2012년 퓨 연구소의 종교 및 공공 생활에 관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나이지리아 인구의 49.3%가 기독교인, 48.8%가 무슬림이었으며, 1.9%는 토착 종교 및 기타 종교(북부의 보리교 등) 신자이거나 무종교였다. 그러나 2015년 퓨 연구소 보고서에서는 무슬림 인구가 50%로 추정되었으며, 보고서에 따르면 2060년까지 무슬림이 전체 인구의 약 60%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종교 데이터 아카이브 협회의 2010년 인구 조사에서도 총인구의 48.8%가 기독교인으로, 무슬림 인구 43.4%보다 약간 많았고, 7.5%는 기타 종교 신자였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치는 주로 기독교인이 우세한 남부 주요 도시 지역에서 표본 데이터가 수집되기 때문에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슬람교는 나이지리아 북서부와 북동부(카누리족, 풀라니족 및 기타 그룹)를 지배한다. 서부에서는 요루바족이 주로 무슬림이며, 상당수의 기독교 소수 집단과 소수의 전통 종교 신자가 있다. 개신교와 현지에서 발전한 기독교는 서부 지역에서 널리 행해지는 반면, 로마 가톨릭교는 나이지리아 남동부에서 더 두드러진 기독교 특징이다. 로마 가톨릭교와 개신교는 모두 남부의 이비비오족, 에픽족, 이조족, 오고니족 땅에서 관찰된다. 동부에 주로 거주하는 이보족과 남부의 이비비오족은 98%가 기독교인이며, 2%는 전통 종교를 믿는다. 나이지리아의 중부 벨트에는 나이지리아 소수 민족 집단이 가장 많이 거주하며, 이들은 대다수가 기독교인과 전통 종교 신자이며, 상당수의 무슬림 소수 집단도 있다.
7.4. 교육

나이지리아의 교육은 교육부가 감독한다. 지방 자치 단체는 지역 수준에서 국가 통제 공교육 및 주립 학교 정책 시행을 책임진다. 교육 시스템은 유치원, 초등 교육, 중등 교육, 고등 교육으로 나뉜다. 1970년대 석유 붐 이후, 고등 교육은 나이지리아의 모든 하위 지역에 도달하도록 개선되었다. 나이지리아 인구의 68%가 글을 읽고 쓸 줄 알며, 남성(75.7%)의 비율이 여성(60.6%)보다 높다.
나이지리아는 무료 정부 지원 교육을 제공하지만, 어느 수준에서도 출석은 의무가 아니며, 유목민이나 장애인과 같은 특정 집단은 충분한 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있다. 5~14세의 나이지리아 어린이 약 1,050만 명이 학교에 다니지 않고 있다. 6~11세 어린이 중 단 61%만이 정기적으로 초등학교에 다닌다. 교육 시스템은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그리고 학사 학위를 위한 4년, 5년 또는 6년의 대학 교육으로 구성된다. 정부는 대학 교육의 대부분을 통제한다. 나이지리아의 고등 교육은 대학교(공립 및 사립), 폴리테크닉, 모노테크닉, 교육 대학으로 구성된다. 전국에는 총 138개의 대학교가 있으며, 연방 소유 40개, 주 소유 39개, 사립 소유 59개이다. 나이지리아는 2024년 세계 혁신 지수에서 113위를 차지했다.
7.5. 보건 의료

나이지리아의 보건 의료 서비스 제공은 국가의 세 가지 정부 계층과 민간 부문의 공동 책임이다. 나이지리아는 1987년 바마코 이니셔티브 이후 보건 시스템을 재편해 왔으며, 이는 부분적으로 사용자 수수료를 시행함으로써 인구에 대한 의약품 및 보건 의료 서비스 접근성을 높이는 지역사회 기반 방법을 공식적으로 장려했다. 새로운 전략은 지역사회 기반 보건 의료 개혁을 통해 접근성을 극적으로 향상시켜 보다 효율적이고 공평한 서비스 제공을 가져왔다. 포괄적인 접근 전략은 보건 의료의 모든 분야로 확장되었으며, 이후 보건 의료 지표 개선과 보건 의료 효율성 및 비용 개선으로 이어졌다.
나이지리아인 중 거의 절반(48%)이 지난 3개월 동안 자신이나 가족 구성원이 아팠다고 보고했다. 말라리아는 사례의 88%에서 진단되었고 장티푸스는 32%에서 진단되었다. 고혈압은 8%로 3위를 차지했다. 말라리아 증상이 나타나면 나이지리아인의 41%는 병원을 찾고, 22%는 약국, 21%는 조제 약국을 찾으며, 11%는 약초를 통해 치료를 모색한다.
나이지리아의 HIV/AIDS 감염률은 보츠와나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같이 유병률(백분율)이 두 자릿수인 다른 아프리카 국가보다 훨씬 낮다. 2019년 기준, 15~49세 성인의 HIV 유병률은 1.5%였다. 나이지리아의 기대수명은 평균 54.7세이며, 인구의 71%와 39%가 각각 개선된 수원과 개선된 위생 시설을 이용하고 있다. 2019년 기준, 영아 사망률은 생존 출생 1,000명당 74.2명이다.
2012년, 나이지리아 대학교에서 백혈병, 림프종, 겸상 적혈구 빈혈증 환자들이 생명을 구하는 조혈모세포 이식에 적합한 기증자를 찾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새로운 골수 기증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나이지리아는 이 수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두 번째 아프리카 국가가 되었다. 2014년 에볼라 발생 당시, 나이지리아는 서아프리카 지역의 다른 세 나라를 황폐화시키던 에볼라 위협을 효과적으로 억제하고 제거한 최초의 국가였다. 나이지리아가 사용한 독특한 접촉자 추적 방법은 나중에 미국과 같은 국가에서 에볼라 위협이 발견되었을 때 효과적인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나이지리아 보건 의료 시스템은 숙련된 나이지리아 의사들이 북미와 유럽으로 이주하는 "두뇌 유출"로 알려진 의사 부족 현상에 지속적으로 직면해 있다. 1995년, 약 21,000명의 나이지리아 의사가 미국에서만 진료하고 있었으며, 이는 나이지리아 공공 서비스에서 일하는 의사 수와 거의 같다. 값비싸게 훈련된 이 전문가들을 유지하는 것이 정부의 목표 중 하나로 확인되었다.
7.6. 빈곤
국제 통화 기금(IMF)에 따르면, 나이지리아 인구의 32%(2017년 기준)가 극빈층으로, 하루 2.15 USD 미만으로 생활하고 있다. 세계 은행은 2022년 3월, 코로나19 기간 동안 나이지리아의 빈곤층 수가 500만 명 증가하여 9,510만 명에 달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나이지리아인의 40%가 세계 은행이 정한 빈곤선인 하루 1.9 USD 이하로 생활하고 있다.
IMF와 세계 은행이 국제적으로 사용하는 기준 금액은 현지 미국 달러 구매력을 고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방법론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이지리아에 슬럼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예를 들어 나이지리아 남성의 92%와 여성의 88%가 휴대폰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IMF와 세계 은행이 발표한 빈곤율과 조화시키기 어렵다.
7.7. 범죄와 치안

나이지리아의 치안 상황은 정치적 안정에도 불구하고 미흡한 것으로 간주된다. 나이지리아인의 68%는 자국에서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며, 77%는 비상 상황 시 경보 번호("헬프라인")를 알지 못한다.
위 조사에 따르면 나이지리아인들은 강도(24%)나 납치(24%)를 당하거나, 무장 강도나 좀도둑의 희생자가 되거나(각각 8%), 목축민-농민 갈등(8%)으로 피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한다. 그 다음으로는 "의식 살인"(4%)과 "보코 하람"(3.5%)이 뒤를 잇는다. 응답자들은 유망한 대응책으로 "보안 인력 증원 및 훈련 강화"(37%), "실업률 감소"(13%), "기도/신의 개입"(8%)을 꼽았다.

나이지리아의 살인 사건 수는 주에 따라 크게 다르다. 라고스, 카노, 이바단과 같은 대도시는 농촌 지역보다 훨씬 안전해 보인다. 카노는 연간 100만 명당 살인 사건 발생 건수가 1.5건으로 영국보다 통계가 더 좋으며, 이는 이 지역의 종교 및 도덕 경찰이 주민들의 도덕성을 감시하고 마약 사용자를 단속할 뿐만 아니라 살인 및 과실치사에 대한 억제 효과도 있기 때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는 이슬람 도시이기도 한 마이두구리나 카두나와 같이 살인 사건에 대한 우려스러운 통계를 보이는 다른 도시들과 대조적이다.
기니만에서의 해적 행위가 일부 있으며, 모든 종류의 선박을 대상으로 공격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최근 선박 내 보안 조치로 인해 해적들은 이제 어촌을 공격할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국제적으로 나이지리아는 일종의 선금 사기와 신용 사기 형태로 악명이 높다. 사기꾼은 피해자에게 더 많은 돈을 송금해 줄 것이라는 전제로 돈이나 은행 계좌 정보를 보내도록 유도한다. 실제로는 사기꾼이 피해자로부터 돈을 갈취하고 지급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2003년, 나이지리아 경제금융범죄위원회는 이러한 형태의 조직 금융 범죄 및 기타 형태의 조직 금융 범죄와 싸우기 위해 창설되었다. EFCC는 상당히 활동적이다.
7.8. 인권

나이지리아의 인권 기록은 여전히 열악하다. 미국 국무부에 따르면, 가장 심각한 인권 문제는 보안군의 과도한 무력 사용, 보안군 학대에 대한 처벌 면제, 자의적 체포, 장기 미결 구금, 사법부 부패 및 행정부의 사법부 영향력 행사, 강간, 고문 및 기타 수감자, 구금자, 용의자에 대한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거나 모욕적인 처우, 가혹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교도소 및 구금 시설 환경, 인신매매(성매매 및 강제 노동 목적), 사회적 폭력 및 자경단 살해, 아동 노동, 아동 학대 및 아동 성적 착취, 가정 폭력, 민족, 지역, 종교에 기반한 차별 등이다.
나이지리아는 여성차별철폐협약 당사국이다. 또한 여성의 권리에 관한 국제 조약인 마푸토 의정서와 아프리카 연합 여성 권리 기본 틀에도 서명했다. 성별에 기반한 차별은 중요한 인권 문제이다. 강제 결혼이 흔하다. 아동 결혼은 북부 나이지리아에서 여전히 흔하며, 2008년 연방 차원에서 18세 미만 소녀의 결혼을 금지하는 결혼 권리법이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39%가 15세 이전에 결혼한다. 북부 나이지리아에서는 일부다처제가 만연하다. 가정 폭력이 흔하다. 여성은 토지 권리가 적다. 산모 사망률은 2015년 생존 출생 10만 명당 814명이었다. 여성 할례는 2015년에 금지되었지만 여전히 흔하다. 최소 50만 명이 의료 부족으로 인해 주로 질 누공으로 고통받고 있다.
여성들은 나이지리아에서 상당한 불평등에 직면해 있다. 정치적으로 여성들은 성차별적 편견에 종속되어 있으며, 이는 사회문화적, 경제적, 억압적인 방식으로 강화된다. 전국적으로 여성들은 1979년에야 정치적으로 해방되었다. 그러나 남편들은 여전히 많은 여성들의 투표를 좌우하며, 이는 가부장제를 유지시킨다. 비공식 경제 노동자의 대부분은 여성이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정부에서 여성의 대표성은 매우 미미했다. 여성들은 모든 정부 차원에서 임명직에서 부수적인 역할로 축소되었으며, 여전히 선출직 공무원 중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대중에게 더 많은 교육 기회가 제공됨에 따라 나이지리아 여성들은 공공 부문에서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있으며, 다양한 이니셔티브의 도움으로 더 많은 사업이 여성들에 의해 시작되고 있다.
12개 북부 주에서 무슬림에게 적용되는 샤리아 형법에 따라 알코올 소비, 동성애, 불륜, 절도와 같은 범죄는 절단, 태형, 투석형, 장기 징역형 등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 나이지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동성애 혐오적인 국가 중 하나로 간주된다. 2022년 9월까지 23년 동안 나이지리아의 대학 노동자들은 총 57개월 동안 17번 파업했다. 그 결과 2022년 여름 학기는 전국적으로 취소되었다.
7.9. 부족 및 종교 갈등
나이지리아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부족과 종교 집단 간의 갈등을 경험해왔다. 이러한 갈등의 주요 원인으로는 자원(특히 토지와 물)을 둘러싼 경쟁, 정치적 영향력 다툼, 종교적 극단주의, 역사적 갈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 보코 하람 문제: 나이지리아 북동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인 보코 하람은 2000년대 초반부터 테러, 납치, 학살 등을 자행하며 심각한 인도주의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이들의 목표는 샤리아에 기반한 이슬람 국가 건설이며, 세속 정부와 서구식 교육을 반대한다. 보코 하람의 폭력 사태로 인해 수만 명이 사망하고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지역 경제와 사회 안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 목축민-농경민 갈등: 주로 풀라니족 유목민과 다른 민족 농경민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으로, 가축 방목지와 농경지 부족, 물 부족, 기후 변화로 인한 자원 경쟁 심화 등이 주요 원인이다. 이 갈등은 중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빈번하게 발생하며, 종종 유혈 사태로 번져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다. 종교적, 민족적 갈등 양상과 결부되어 더욱 복잡해지기도 한다.
- 나이저델타 분쟁: 석유 자원이 풍부한 나이저델타 지역에서는 석유 개발로 인한 환경 오염, 지역 주민에 대한 이익 분배 불균형 등으로 인해 정부 및 석유 회사에 대한 불만이 지속되어 왔다. 나이저델타 해방운동(MEND)과 같은 무장 단체들이 석유 시설 공격, 외국인 노동자 납치 등을 감행하며 지역 불안정을 야기했다. 정부의 사면 프로그램과 개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내부 갈등은 나이지리아의 사회 통합과 국가 발전에 큰 장애 요인이 되고 있으며, 정부는 군사적 대응과 함께 대화와 협상, 경제 개발 등 다각적인 노력을 통해 문제 해결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갈등의 뿌리가 깊고 복잡하여 단기간 내 해결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8. 문화
나이지리아는 다양한 민족과 언어, 종교가 공존하는 만큼 풍부하고 다채로운 문화를 자랑한다. 전통적인 가치와 현대적인 요소가 어우러져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으며, 문학, 음악, 영화, 음식, 축제, 스포츠 등 여러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8.1. 문학

대부분의 나이지리아 문학은 영어로 쓰여지는데, 이는 영어가 대부분의 나이지리아인들에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요루바어, 하우사어, 이보어(나이지리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세 언어 그룹)로 된 문학도 존재하며, 예를 들어 하우사어의 경우 수백 년 된 전통을 자랑한다. 나이지리아는 월레 소잉카라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벤 오크리는 1991년에 권위 있는 부커상을 수상했고, 치누아 아체베는 2007년에 같은 상을 받았다. 아체베는 또한 2002년에 독일 출판 평화상을 수상했다. 롤라 쇼네인은 그녀의 책 《바바 세기의 아내들의 비밀스러운 삶》으로 여러 상을 수상했다.
8.2. 음악
나이지리아에서 가장 초기에 알려진 대중음악 형태는 1920년대 음악계를 지배했던 팜와인 음악이었다. 툰데 킹은 이 장르에서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1930년대에는 오니차 토착 오케스트라가 등장했다. 그들은 토착 노래 스타일로 다양한 사회적 주제와 경향을 탐구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하일라이프 음악이 이보 하일라이프와 같은 지역 장르와 함께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 장르의 주목할 만한 대표자로는 나이지리아 최초의 보이 밴드인 오리엔탈 브라더스 인터내셔널, 바비 벤슨, 오시타 오사데베, 빅터 올라이야, 렉스 로슨, 워리어 경, 올리버 데 코크 등이 있었다.
1970년대는 하일라이프, 재즈, 요루바 음악을 융합한 아프로비트 장르의 선구자인 펠라 쿠티의 시대였다. 펠라 쿠티는 나중에 사회 운동과 흑인 의식으로 발전했다.
1980년대에는 킹 써니 아데가 주주 음악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대의 저명한 가수로는 펑크 음악과 디스코를 융합한 것으로 알려진 윌리엄 오니예보르가 있다.
1990년대에는 레게 음악이 음악계로 전환되었다. 이 시대의 저명한 레게 예술가로는 마젝 파셱이 있었다. 1990년대 중반에는 레미디스, 트라이브스멘, JJC 등과 같은 그룹이 이끄는 힙합 음악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수년 동안 하일라이프 음악은 국내에서 인기를 유지했다.
세기가 바뀌면서 P-스퀘어, 투페이스, 디반지와 같은 2000년대 유명 그룹들은 아프로비츠의 진화와 국제 무대에서의 대중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2008년 11월, MTV가 아부자에서 아프리카 대륙 최초의 아프리카 음악 시상식을 개최하면서 나이지리아의 음악계(그리고 아프리카의 음악계)는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아프로비트 장르는 다비도, 위즈키드, 버나 보이와 같은 아티스트들과 함께 널리 확산되었다.
8.3. 영화 (놀리우드)
순위 | 영화 제목 | 개봉 연도 | 수익 (나이라) |
---|---|---|---|
1 | Everybody Loves Jenifa | 2024 | 17.00 억 NGN |
2 | A Tribe Called Judah | 2023 | 14.00 억 NGN |
3 | Battle on Buka Street | 2022 | 6.68 억 NGN |
4 | Omo Ghetto: The Saga | 2020 | 6.36 억 NGN |
5 | Alakada: Bad and Boujee | 2024 | 4.60 억 NGN |
나이지리아 영화 산업은 놀리우드(나이지리아와 할리우드의 합성어)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할리우드를 제치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영화 제작국이다. 인도의 볼리우드만이 더 크다. 나이지리아 영화 스튜디오는 라고스, 카노, 에누구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들 도시 지역 경제의 주요 부분을 차지한다. 나이지리아 영화는 가치와 연간 제작 영화 수 모두에서 아프리카 최대 영화 산업이다. 나이지리아 영화는 1960년대부터 제작되었지만, 저렴한 디지털 촬영 및 편집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국가 영화 산업이 발전했다.
2009년 스릴러 영화 피겨린은 새로운 나이지리아 영화 혁명에 대한 언론의 관심을 고조시켰다. 이 영화는 나이지리아에서 비평적, 상업적으로 성공했으며, 국제 영화제에서도 상영되었다. 치네제 아냐에네의 2010년 영화 이제는 피겨린을 제치고 나이지리아 역대 최고 흥행 영화가 되었으며, 2014년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2013)에 의해 기록이 깨질 때까지 4년 동안 그 기록을 유지했다. 2016년에는 케미 아데티바의 웨딩 파티가 이 기록을 보유했다.
2013년 말, 영화 산업은 기록적인 수입인 1.72 조 NGN ( 41.00 억 USD )을 달성했다고 보고되었다. 2014년 기준, 이 산업의 가치는 8539.00 억 NGN ( 51.00 억 USD )으로, 미국과 인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가치 있는 영화 산업이 되었다. 이는 나이지리아 경제에 약 1.4% 기여했으며, 양질의 영화 제작 편수 증가와 보다 공식적인 배급 방식 덕분이었다.
나이지리아에서 시작된 T.B. 조슈아의 임마누엘 TV는 아프리카 전역에서 가장 많이 시청되는 텔레비전 방송국 중 하나이다.
8.4. 음식


나이지리아 요리는 일반적으로 서아프리카 요리와 마찬가지로 풍부함과 다양성으로 유명하다. 다양한 향신료, 허브, 조미료가 팜유나 땅콩 기름과 함께 사용되어 깊은 맛의 소스와 수프를 만드는데, 종종 고추로 매우 맵게 만든다.


나이지리아 잔치는 화려하고 호화로우며, 시장과 길가에서 바비큐로 요리하거나 기름에 튀긴 향기로운 간식은 풍부하고 다양하다.


수야는 주로 도시 지역, 특히 야간에 판매된다.


8.5. 축제


나이지리아에는 많은 축제가 있으며, 그중 일부는 이 민족적, 문화적으로 다양한 사회에 주요 종교가 도래하기 이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요 이슬람 및 기독교 축제는 종종 나이지리아 고유의 방식이나 특정 지역 사람들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기념된다. 나이지리아 관광 개발 공사는 전통 축제를 현대화하기 위해 주 정부와 협력해 왔으며, 이는 중요한 관광 수입원이 될 수 있다.
8.6. 스포츠

축구는 대체로 나이지리아의 국민 스포츠로 간주되며, 나이지리아에는 자체적인 프로 축구 리그가 있다. "수퍼 이글스(Super Eagles수퍼 이글스영어)"로 알려진 나이지리아 국가대표 축구팀은 FIFA 월드컵에 6번 출전했다(1994년, 1998년, 2002년, 2010년, 2014년, 2018년). 1994년 4월, 수퍼 이글스는 FIFA 세계 랭킹 5위를 기록했으며, 이는 아프리카 팀이 달성한 최고 순위이다. 그들은 1980년, 1994년, 2013년에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우승했으며, U-17 및 U-20 FIFA 월드컵을 모두 개최했다. 1996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축구 금메달을 획득하여(아르헨티나를 꺾고) 올림픽 축구에서 금메달을 딴 최초의 아프리카 축구팀이 되었다.
나이지리아는 농구, 크리켓, 육상 경기와 같은 다른 스포츠에도 참여하고 있다. 나이지리아 국가대표 농구팀은 미국 남자 국가대표팀을 꺾은 최초의 아프리카 팀이 되면서 국제적으로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이전에는 나이지리아가 2012년 하계 올림픽에 출전 자격을 얻었는데, 이는 그리스와 리투아니아와 같은 강력한 세계 정상급 팀들을 물리쳤기 때문이다. 나이지리아는 미국, 유럽, 아시아의 세계 최고 리그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수많은 농구 선수들의 본고장이었다. 이 선수들에는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하킴 올라주원과 이후 NBA 선수들이 포함된다. 나이지리아 프리미어 리그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크고 가장 많이 시청되는 농구 대회 중 하나가 되었다. 경기는 Kwese TV퀘세 TV영어에서 방영되었으며 평균 시청자 수는 100만 명 이상이었다.
나이지리아는 여자 2인승 팀이 제23회 동계 올림픽 봅슬레이 경기에 출전 자격을 얻으면서 아프리카에서 동계 올림픽에 최초로 봅슬레이 팀을 출전시킨 역사를 만들었다. 1990년대 초, 스크래블은 나이지리아의 공식 스포츠가 되었다. 2017년 말까지 전국 100개 이상의 클럽에 약 4,000명의 선수가 있었다. 2018년, 나이지리아 컬링 연맹은 초등, 중등, 대학 수준의 교육 과정에 이 게임을 포함시키기 위해 새로운 스포츠를 국내에 도입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노르웨이에서 열린 2019년 세계 혼성 복식 컬링 선수권 대회에서 나이지리아는 프랑스를 8-5로 꺾고 첫 국제 경기에서 승리했다.
나이지리아 여자 및 남자 국가대표팀은 비치발리볼에서 2018-2020 CAVB 비치발리볼 컨티넨털컵에 참가했다. 국가 U21 대표팀은 2019년 FIVB 비치발리볼 U21 세계 선수권 대회에 출전 자격을 얻었다.
나이지리아는 루프볼 스포츠의 발상지이다.
8.7. 세계유산
나이지리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문화 및 자연유산이 있다. 이들 유산은 나이지리아의 풍부한 역사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 수쿠르 문화경관 (Sukur Cultural Landscape수쿠르 문화경관영어): 1999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아다마와주에 위치하며, 독특한 부족 공동체의 전통적인 건축 양식, 토지 이용 방식, 사회 구조를 잘 보존하고 있다. 특히 철기 시대부터 이어져 온 제철 기술과 관련된 유적이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 오순-오소그보 성스러운 숲 (Osun-Osogbo Sacred Grove오순-오소그보 성스러운 숲영어): 2005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오순주에 위치하며, 요루바족의 풍요와 다산의 여신인 오순을 모시는 성스러운 숲이다. 숲 안에는 다양한 신전, 조각상, 예술 작품들이 있으며, 매년 열리는 오순-오소그보 축제는 많은 순례자와 관광객을 끌어들인다. 이 숲은 요루바족의 전통 신앙과 문화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장소이다.
이 외에도 나이지리아 정부는 여러 잠정 목록 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추가적인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