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사사카와 요헤이의 어린 시절과 교육 과정, 그리고 그의 가족 관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다룬다. 특히 그의 아버지 사사카와 료이치의 영향과 가족 구성에 대해 설명한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사사카와 요헤이는 1939년 1월 8일에 태어났다. 1945년 6세의 나이에 어머니(오가와 성)와 함께 아사쿠사 고토부키초에 거주하던 중 3월 10일 도쿄 대공습을 겪었다. 당시 그는 수영을 잘하지 못해 스미다강으로 피난하는 대신 다른 방향으로 이동했고, 이로 인해 마을 주민 대부분이 사망한 가운데 기적적으로 생존하는 전쟁 경험을 했다.
그는 메이지 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사춘기 시절을 아버지 사사카와 료이치의 엄격한 교육 아래 보냈다. 당시 도쿄도 분쿄구 고이시카와에 있던 부친의 집은 손님과 식객이 많아 '사사카와 료칸'이라 불릴 정도로 늘 북적였다. 료이치는 "학문은 할 필요 없다. 사회 공부는 내가 가르쳐주겠다"는 교육 방침을 가지고 있었고, 요헤이는 매일 이른 아침부터 청소, 세탁, 신발 닦기를 마친 후 등교하고, 오후 4시에는 귀가하여 장보기, 요리, 목욕탕 청소 등 밤늦게까지 집안일을 도왔다. 이러한 엄격한 환경 속에서도 요헤이는 아버지를 "일절 반항하지 않았고, 아버지이자 동시에 내 인생의 스승이었다"고 회고한다.
1.2. 가족 관계
사사카와 요헤이의 아버지는 일본재단의 전신인 일본선박진흥회를 설립한 사사카와 료이치이다. 료이치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던 인물로, 그의 경정 사업은 일본재단의 주요 자금원이 되었다. 요헤이의 둘째 형은 자유민주당 소속의 전 중의원 의원인 사사카와 다카시이며, 정치인 사사카와 히로요시는 사사카와 다카시의 아들로 요헤이의 조카이다. 사사카와 요헤이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다. 장남은 1972년 11월 23일생의 다카오로, 이와이 증권의 이사를 맡고 있다. 차남은 1975년 2월 28일생의 준페이, 삼남은 1976년 8월 17일생의 고헤이, 사남은 1980년 9월 2일생의 쇼헤이이다.
2. 경력 및 리더십
사사카와 요헤이가 일본재단의 회장으로서 수행한 역할과 그 외의 주요 직책들을 상세히 설명한다. 그의 리더십 스타일과 사회적 기업가로서의 면모를 조명한다.
2.1. 일본재단 회장
사사카와 요헤이는 경정 사업의 운영 단체인 전국모터보트경주회 연합회 회장(2008년 3월 31일 퇴임)과 재단법인 일본조선진흥재단(현 해양정책연구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한 후, 1989년 일본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2005년 7월, 전 회장 소노 아야코의 퇴임에 따라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사회적 기업가로서 기획력과 리더십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일본재단은 부친 사사카와 료이치가 설립한 경정 사업에서 얻은 수입을 주요 재원으로 하며, 이를 통해 다양한 사회 공헌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사카와 요헤이는 재단의 활동을 통해 자원봉사 및 복지 등 여러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자선 활동의 최전선에서 직접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전 세계의 정치, 정부, 학계, 민간 부문에 걸쳐 폭넓은 인맥을 구축하고 있으며, 특히 체코의 고(故) 바츨라프 하벨 전 대통령과 함께 11년간 이어온 '포럼 2000'은 세계 저명인사들이 모여 국제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사사카와는 공익 활동의 투명성을 강조하며, 자신의 일상 활동과 생각을 담은 블로그([http://blog.canpan.info/sasakawa/archive/5259 사사카와 요헤이 블로그의 '사회공헌지원재단' 관련 글])를 매일 공개하고 있다. 또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활동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기업이 사회 공헌 활동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웹사이트 'CANPAN CSR 플러스'를 개설했다. 그는 국가, 지방자치단체, 비영리단체(NPO), 그리고 기업의 CSR 활동이 하나로 통합되어 사회 전체가 공공의 이익을 창출하는 데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2. 기타 주요 직책
사사카와 요헤이는 일본재단 회장 외에도 여러 중요한 직책을 맡아 국제 사회와 일본 국내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는 2001년 5월부터 세계보건기구(WHO) 한센병 퇴치 특별대사를 맡고 있으며, 2007년부터는 일본 외무대신이 임명하는 한센병 환자 인권 계발 대사로서 한센병 퇴치와 인권 외교에 기여하고 있다.
2012년 6월 11일에는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미얀마 소수민족 복지 향상 대사로 임명되었고, 2013년 2월에는 미얀마 국민 화해 담당 일본 정부 대표로 취임하여 미얀마의 평화 프로세스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그는 또한 프랑스-일본 사사카와 재단, 미국-일본 재단, 스칸디나비아-일본 사사카와 재단, 영국 사사카와 재단의 이사로 활동하며 국제 교류 증진에 기여하고 있다. 이 외에도 도쿄재단 고문, 사사카와 일중 우호기금 고문 등 다양한 자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국제법조협회의 '법의 지배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는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부인인 아베 아키에에게 사회 공헌 지원 재단 이사장직을 요청하는 등 일본 정계 및 사회 지도층과도 폭넓은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그의 블로그에는 매일 면담한 인물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보수 논픽션 작가 구도 미요코는 자신의 저서에서 사사카와를 '완벽한 신사'로 평가하기도 했다.
3. 주요 활동 및 업적
사사카와 요헤이가 추진한 주요 활동과 그를 통해 달성한 업적들을 상세히 기술한다. 특히 한센병 퇴치, 해양 정책, 국제 원조, 국내 사회 공헌, 미얀마 평화 지원, 동일본 대지진 복구, 문화 및 사회적 기여, 중국과의 관계, 그리고 보트 경주 사업 관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그의 역할을 조명한다.
3.1. 한센병 퇴치 활동
사사카와 요헤이는 한센병 퇴치를 자신의 평생 사명으로 여기고 있다. 그의 아버지 사사카와 료이치 또한 한센병 퇴치에 헌신했으며, 1965년 요헤이는 아버지를 따라 대한민국의 한센병 요양소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한센병 환자와 회복자들이 겪는 차별을 직접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아 한센병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이후 이 분야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한센병은 완치될 수 있다"는 정확한 지식을 보급하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한센병이 풍토병으로 만연한 국가들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한센병 환자 및 회복자, 정부 지도자, 언론 기관 등과의 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2001년 5월부터 WHO 한센병 퇴치 특별대사로 활동하며 국제적인 리더십을 발휘해왔다.
1990년대에는 다제병용요법(MDT)이라는 치료법의 보급을 위해 노력하여 전 세계 한센병 환자 수를 급격히 줄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는 한센병 환자들이 완치된 후에도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취업이나 자녀 교육에서 가족까지도 차별받는 현실을 문제 삼았다. 이에 한센병을 단순히 의학적 문제를 넘어 인권 문제를 포함하는 사회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2003년 7월 국제 연합 인권 고등 판무관 사무소를 방문하여 이 문제를 국제 연합 인권 이사회 (당시 유엔인권위원회)에서 다루어 줄 것을 요청했다. 2004년 3월 유엔인권위원회 본회의에서 한센병으로 인한 차별 문제를 호소했고, 그 결과 인권증진보호소위원회는 같은 해 8월 한센병과 차별 문제를 공식적으로 인권 문제로 다루기 위한 조사를 시작했다. 이어서 2005년 8월과 2006년 8월 두 차례에 걸쳐 동 소위원회에서 각국 정부와 유엔 기관 등에 현 상황 개선을 권고하는 결의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2008년 6월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일본 정부와 58개국이 공동으로 제안한 한센병으로 인한 차별 철폐를 호소하는 결의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그는 이후에도 한센병으로 인한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며, 2006년에는 인도에서 한센병 회복자와 그 가족의 자립을 지원하는 '사사카와-인도 한센병 재단'을 설립하고 인도 재계로부터 기부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펼쳤다. 일본 정부는 그를 한센병 인권 계발 대사로 위촉하여 일본을 대표하는 한센병 퇴치 및 인권 외교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2016년 6월에는 로마 교황청과 공동으로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하여 한센병에 대한 낙인과 차별 종식을 촉구하는 결론 및 권고안을 채택했다. 2018년에는 뉴델리에서 세계장애인연맹(DPI)의 지지를 받아 한센병 환자에 대한 낙인과 차별을 종식하기 위한 제13차 글로벌 호소를 발표했으며, 아웅산수찌 국가고문이 참석한 미얀마 전국 한센병 회의를 개최하여 한센병 환자에 대한 차별 종식을 촉구했다.
그는 또한 한센병에 대한 차별적 묘사에 적극적으로 항의했다. 2012년 1월, 미국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영화 '더 파이러츠! 밴드 오브 미스핏츠(The Pirates! Band of Misfits)'의 본편과 예고편에 한센병에 대한 차별적 표현이 포함된 것을 확인하고, 즉시 제작사와 모회사에 해당 부분의 수정 및 삭제를 요구하는 항의문을 보냈다. 그 결과 소니 픽처스 엔터테인먼트 부회장은 해당 차별적 표현을 삭제했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베이징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한센병 환자의 입국을 금지하는 지침을 공표하자, 사사카와는 즉시 후진타오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와 자크 로게 IOC 위원장에게 지침 철회를 요구했고, 올림픽 개최 전에 해당 지침이 철회되었다. 이는 같은 해 6월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일본 정부가 제안한 '한센병 환자, 회복자, 가족에 대한 차별 철폐 결의'가 중국 정부를 포함한 58개국이 공동 제안국으로 참여하여 만장일치로 채택된 배경이 작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3.2. 해양 정책 및 활동
사사카와는 해양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통행량이 많은 해상 교통로 중 하나인 말라카 해협의 해양 안전 확보를 위한 새로운 기금 설립을 제안했다. 이는 '해양 이용은 무료'라는 전통적인 개념을 뒤집고, 현재의 국제 정세를 고려하여 항해자 부담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바다가 지켜준 일본에서 바다를 지키는 일본으로'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2007년 해양기본법 제정을 비롯한 일본의 새로운 해양 문제 해결 노력을 주도했다.
2004년에는 새로운 세대의 해양 리더와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유엔과 일본재단이 공동으로 '유엔-일본재단 펠로우십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2016년에는 해양 개발 분야의 인력 양성을 목표로 산업계, 학계, 공공 및 민간 부문이 참여하는 전국적인 이니셔티브인 '일본재단 해양 혁신 컨소시엄'을 설립했다. 같은 해에는 2030년까지 전 세계 해저 지도를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Seabed 2030' 이니셔티브를 시작했다. 2015년에는 일본 국제협력기구(JICA), 정책연구대학원대학(GRIPS), 일본 해상보안청과의 협력을 통해 해양 안전 및 보안 분야의 전문가를 양성하는 '해양 안전 및 보안 정책 프로그램(MSP)'을 시작했는데, 이는 이 분야에서 석사 학위를 제공하는 몇 안 되는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또한 2000년에는 국제 해사 대학 네트워크를 구축했으며, 1967년부터 말라카-싱가포르 해협의 항해 안전 프로그램을 지원해왔다.
3.3. 국제 원조 및 사회적 기업 활동
사사카와 요헤이는 광범위한 국제 원조 및 사회적 기업 활동을 펼쳐왔다. 그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10년에 걸쳐 20만 명에 이르는 피해 아동들을 위한 건강 검진 활동을 지원했으며, 1999년부터는 소아과 의료 지원을 제공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노먼 볼로그 박사(노벨 평화상 수상자)와 함께 1986년부터 '사사카와 글로벌 2000 프로그램'을 시작하여 아프리카 국가들이 주요 작물 생산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운동을 20년간 진행했다.
1987년에는 전 세계 69개 주요 대학에 장학금 네트워크인 '사사카와 젊은 리더 펠로우십 기금(SYLFF)'을 설립하여 차세대 리더를 육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국제해사대학(IMU)과 국제해사법연구소(IMLI)의 사사카와 펠로우 수가 2014년에는 1,000명을 넘어섰다. 또한 1987년에는 2,000명의 중국인 의사를 훈련시키기 위한 '사사카와 의료 장학금 프로그램'을 설립했다.
2000년에는 아시아 5개국에서 '일본재단 아시아 공공 지식인 펠로우십(API 펠로우십)'을 시작했다. 그는 또한 체코의 고(故) 바츨라프 하벨 전 대통령과 함께 11년간 '포럼 2000'을 이끌며 전 세계의 전문가와 저명인사들이 모여 국제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장을 마련했다.
3.4. 국내 사회 공헌 활동
사사카와 요헤이는 일본 내에서도 정부 정책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 중점을 두고 다양한 사회 공헌 활동을 펼쳤다. 그는 NGO 및 자원봉사자 육성에 힘썼으며, 장애인 및 고령자에 대한 복지 서비스 확충을 위해 전국적으로 2만 대에 이르는 복지 차량을 지원했다.
그의 국내 활동은 광범위하며, 해적 대책 마련, 북한 공작선의 일반 공개, 호스피스 간호사 육성, 범죄 피해자 지원 네트워크 구축 등을 포함한다. 또한 2007년 해양기본법 제정에 적극적으로 노력했으며, 도쿄 마라톤 개최를 실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2009년 6월 1일부터는 일본치과의사협회와 협력하여 CSR 활동의 일환으로 '투스 페어리(Tooth Fairy)'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전국 치과 병원에서 치료 후 버려지는 금니 등 치과 철거 금속을 일본재단에 제공하고, 이를 재활용하여 얻은 자금을 미얀마 초등학교 건설과 소아암 병동 건설에 사용한다.
2008년 3월 4일 산케이 신문 '정론' 칼럼에서 담배 한 갑 가격을 1,000엔으로 인상할 것을 제안하여 논쟁을 촉발시켰다. 그는 담배 가격이 1,000엔이 되면 90% 이상의 흡연자가 금연할 것이라는 보고를 인용하며, 건강, 방화, 청소년 건전 육성 등의 관점에서 담배 가격 인상을 주장했다. 이 논쟁은 '현대 용어의 기초 지식 2009'에도 '담배 한 갑 1,000엔 논쟁'으로 기록되었다.
2010년 2월 23일 산케이 신문 '정론'을 통해 관광 입국 일본의 핵심으로서 관민 협력으로 에도성을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에도성이 도쿠가와 쇼군 가문의 위신을 걸고 완성된 건축, 공예, 장식 등 모든 분야의 일본 최고 기술의 결정체라고 강조했다. 파리의 베르사유궁전, 런던의 버킹엄 궁전,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과 같이 세계를 대표하는 대도시에는 그 나라의 얼굴이 되는 역사적 건축물이 있음을 지적하며, 일본의 상징으로서 에도성 천수각을 재건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또한 에도성 재건이 가족, 지역사회, 그리고 일본인으로서의 유대감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3.5. 미얀마 평화 및 재건 지원
사사카와 요헤이는 미얀마의 평화 및 재건 지원에 깊이 관여해왔다. 2012년 6월 11일, 일본 외무성은 미얀마 국내에서 다양한 활동을 해온 사사카와를 미얀마 소수민족 복지 향상 대사로 위촉했다. 이는 군사 정권 시절부터 미얀마에서 한센병 대책, 전통 의료품 보급, 초등학교 건설 등을 지원해 온 그의 실적이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변방 지역인 샨주에 초등학교 건설을 계획했을 때 전문가들은 소수민족이 대립하는 지역에서 학교 건설이 성공할 리 없다고 비웃었지만, 그는 200개 학교를 완성시켰다. 그는 향후 종교적 대립이 심한 라카인주에도 200개 학교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
미얀마의 민주화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가운데, 일본 외무성은 사사카와의 폭넓은 인맥을 활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군사 정권 시절 당시 대통령이었던 딴 쉐와 양곤에서 여러 차례 회담을 가졌으며, 2011년 12월에는 국민민주연맹(NLD) 사무실에서 오랜 지인이자 같은 달 사망한 고(故)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의 친서를 아웅산수찌에게 직접 전달했다. 또한 떼인 세인 대통령과는 2012년 4월 일본 방문 시 도쿄에서 만찬을 함께 하는 등, 정부나 외무성에 의존하지 않고 민간 차원에서 독자적인 사업을 통해 요인들과 신뢰 관계를 구축해왔다.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은 2013년 2월 19일 각의에서 사사카와를 미얀마 국민 화해 담당 일본 정부 대표로 임명하기로 결정했고, 2월 25일 외무성에서 내각 사령장을 교부했다. 사사카와는 2016년 3월 30일 아웅산수찌를 사실상의 최고 지도자로 하는 국민민주연맹(NLD)의 틴 쩌 대통령 정권이 수립된 이후에도 미얀마군 최고사령관 민 아웅 흘라잉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2021년 미얀마 쿠데타로 민 아웅 흘라잉이 전권을 장악한 이후에도, 같은 해 11월 13일 그와 회담을 가졌다.
2015년에는 미얀마 정부와 8개 소수민족 무장 단체 간의 미얀마 전국 휴전 협정(NCA)에 일본 정부 특사 자격으로 증인으로 서명했다. 일본은 이 서명식에 인접국이 아닌 유일한 국가로 초대되었으며, 평화 프로세스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2018년에도 미얀마 정부와 2개 소수민족 무장 단체 간의 NCA에 증인으로 서명하며 평화 프로세스 지원을 이어갔다.
2002년부터 시작된 미얀마 학교 건설 프로그램은 샨주에 300개, 라카인주에 100개, 에야와디구에 60개 등 총 460개의 학교 건설을 2018년에 완료했다. 2012년에는 소수민족 무장 단체의 영향력 아래 접근이 어려운 미얀마 분쟁 지역 주민들에게 300.00 만 USD 상당의 식량과 의약품을 배포하는 활동을 주도했다. 2016년에는 일본 외무성의 지원과 미얀마 정부의 동의를 받아 분쟁 피해 주민들을 위한 주택, 학교, 보건소 등 시설을 건설하는 재건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2015년 전국 휴전 협정에 서명한 소수민족 무장 단체의 영향권 내 지역을 대상으로 한다. 그는 5년간 총 약 50만 명에게 식량 및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는 배급 프로그램을 2016년에 완료했다. 2015년 미얀마 총선에서는 일본 정부 선거 감시단 대표로 참여하여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졌음을 확인했으며, 이를 민주화 진전의 중요한 첫걸음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2021년 미얀마 쿠데타 이후 사사카와의 활동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중국, 싱가포르, 한국에 비해 진출이 늦었던 일본 경제계에서는 '아시아 최후의 미개척 경제 시장'으로 불리던 미얀마에 사사카와의 인맥을 통해 진출한 기업이나 사업체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쿠데타와 이후의 무력 탄압에 대한 국제적 비판이 커지면서, 군부와 연계하여 진출한 기업이나 사업체들은 인권상의 이유로 철수를 강요받았다. 쿠데타 정권 하에서의 사사카와의 활동에 대해 TV 아사히 '보도 스테이션'과 같이 문제가 복잡하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보도하는 언론도 있는 반면, 사사카와가 미얀마에 깊이 관여하는 것이 개인으로서인지, 공익 재단으로서인지, 아니면 아베 내각 시절의 미얀마 국민 화해 담당 일본 정부 대표로서인지 모호하다는 점과 그 위험성을 지적하는 의견으로 나뉜다. [https://web.archive.org/web/20220214064228/https://www.jiji.com/jc/article?k=2022021400732&g=eco 키린, 미얀마 철수 (시사통신)] [https://www.nikkei.com/article/DGKKZO80305920Y2A210C2EA5000/ 미쓰비시 상사의 미얀마 철수 (닛케이 신문)] [https://tvablog.tv-asahi.co.jp/reading/hst-postscript/52/ TV 아사히 '보도 스테이션'의 미얀마 관련 보도 후기] [https://president.jp/articles/-/52926?page=1 미얀마 국군과의 관계 유지에 대한 비판적 시각 (프레지던트 온라인)]
3.6. 동일본 대지진 복구 지원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 당시, 일본재단은 사사카와가 진두지휘하여 가장 피해가 심했던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에 재난 지원 센터를 설치하고 직원을 파견했다. 재단은 현장에서 활동하는 자원봉사자들의 수용 및 조정을 담당했으며, NPO 및 자원봉사 단체에 활동비로 최대 100.00 만 JPY를 지원했다.
4월 4일에는 사사카와 자신이 이시노마키시와 오나가와정을 방문하여 사망자 및 실종자 가족들에게 위로금과 조의금을 현금(1인 5.00 만 JPY)으로 직접 전달했다. 4월 중순에는 대학생들을 모집하여 현지 자원봉사대를 조직하고 파견했으며, 이 활동은 현재까지도 지속되어 파견된 인원은 연인원 5,000명을 넘어섰다. 또한 재난 FM 방송국 22곳을 지원하고 4만 2,000대의 라디오를 배포하는 등의 지원을 실시했다. 이러한 대응은 1995년 1월 발생한 한신·아와지 대진재 이후 일본 국내에서 발생한 28차례의 재난 자원봉사 지원 실적이 바탕이 되었다.
2011년 6월에는 일본재단과 필립 모리스가 공동으로 18세 이상 아동 지원 프로젝트인 "Doorway to Smiles"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필립 모리스는 초기 비용으로 3000.00 만 JPY를 기부했다. 당시 사사카와는 평소 금연 활동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담배 회사로부터 기부금을 받은 것에 대한 비판이 있을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이는 변절이 아니라 재난 지역에 대한 선의는 누구에게서든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http://www.pmi.com/ja_jp/media_center/press_releases/Pages/20110609.aspx 일본재단과 필립 모리스의 동일본 대지진 피해 아동 지원 프로젝트 개시 발표] [http://blog.canpan.info/sasakawa/archive/3085 사사카와 요헤이 블로그 (2011년 6월 9일자)] 2012년 11월에는 이 프로젝트의 성과로 이시노마키시청 1층에 공모를 통해 선발된 고등학생 50명과 함께 '이시노마키 카페 「 」(카기캇코)'를 개설한다고 발표되었다. [http://www.pmi.com/ja_jp/media_center/press_releases/Pages/20121024.aspx 필립 모리스와 일본재단의 피해 지역 어린이 지원 공동 발표 (2012년)]
또한 사사카와는 일본재단이 소유한 세계 최고 수준의 현악기 중 하나인 스트라디바리우스 '레이디 블런트(Lady Blunt)'를 매각하여 동일본 대지진 복구에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2011년 6월, 이 악기는 런던 경매에서 당시 최고가인 1589.00 만 USD (약 12.70 억 JPY)에 낙찰되었다. 매각 대금 전액은 재단 내에 설치된 '동일본 대지진 전통문화 복구 지원 기금'에 충당되어 피해 지역의 전통 예능 및 축제에 사용되는 도구(수레, 북 등)에 활용되었다.
3.7. 문화 및 사회적 기여
사사카와 요헤이는 문화 및 사회적 분야에서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의 제안에 따라 공영 경기인 경정으로 얻은 풍부한 재원을 가진 일본재단의 지원으로 자매 재단인 일본음악재단은 1994년부터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과르네리 델 제수가 제작한 세계 최고 수준의 현악기들을 수집해왔다. 이 악기들은 국내외 일류 연주가나 젊고 유망한 연주가들에게 무상으로 대여되고 있다. 현재 일본음악재단은 스트라디바리우스 19점, 과르네리 델 제수 2점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2008년 3월 4일 산케이 신문 '정론' 칼럼에서 담배 한 갑 가격을 1,000엔으로 인상할 것을 제안하여 논쟁을 촉발시켰다. 그는 담배 가격이 1,000엔이 되면 90% 이상의 흡연자가 금연할 것이라는 보고를 인용하며, 건강, 방화, 청소년 건전 육성 등의 관점에서 담배 가격 인상을 주장했다. 이 논쟁은 '현대 용어의 기초 지식 2009'에도 '담배 한 갑 1,000엔 논쟁'으로 기록되었다.
2010년 2월 23일 산케이 신문 '정론'을 통해 관광 입국 일본의 핵심으로서 관민 협력으로 에도성을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에도성이 도쿠가와 쇼군 가문의 위신을 걸고 완성된 건축, 공예, 장식 등 모든 분야의 일본 최고 기술의 결정체라고 강조했다. 파리의 베르사유궁전, 런던의 버킹엄 궁전,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과 같이 세계를 대표하는 대도시에는 그 나라의 얼굴이 되는 역사적 건축물이 있음을 지적하며, 일본의 상징으로서 에도성 천수각을 재건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또한 에도성 재건이 가족, 지역사회, 그리고 일본인으로서의 유대감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3.8. 중국과의 관계
사사카와 요헤이는 25년 이상 지속된 중국인 의료 관계자 연수 제도와 중국 대학에 일본어 도서를 기증하는 교육·연구 도서 프로젝트를 통해 중국과의 관계 발전에 기여했다. 전 세계 69개 대학에 설치된 젊은 리더 장학 기금 중 10개 학교가 중국에 있다. 또한 사사카와 일중 우호기금은 101.00 억 JPY 규모의 기금을 보유하고 있으며, 일중 간 민간 교류 기금으로는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이 기금은 1989년 톈안먼 사건으로 중국이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정치적 수준에서 일중 관계가 냉각되었을 때, 민간 수준에서 양국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설립되었다.
그는 1985년 10월 중국 최고 실력자였던 덩샤오핑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1986년 후야오방 총서기, 1990년 양상쿤 국가주석, 1997년 주룽지 총리 등 중국의 주요 인사들과 회담을 가졌다. 현재의 후진타오 총서기와는 1994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시절에 만난 적이 있다. 사사카와는 이들 요인들에게 아첨하지 않고 언제나 직설적으로 의견을 피력했다. 그의 저서 '이천 년의 역사를 거울 삼아'나 2005년 11월 5일 난징 대학에서의 연설(내용은 '일본재단 회장 사사카와 요헤이 블로그' 2005년 11월 9일에 전문 게재)에서 일중 관계의 역사적 배경과 역할, 미래의 바람직한 관계 등에 대해 중국인들을 상대로 결코 영합하지 않고 사실과 현황, 역사를 언급하며, 중국인들에게는 듣기 거북할 수 있는 내용을 포함하여 거리낌 없이 의견을 주장하는 자세를 일관되게 유지했다.
또한 2004년, 젊은 리더 장학 기금 설치 학교 중 하나인 란저우 대학이 기금 100.00 만 USD (당시 약 1.20 억 JPY)를 대학 측이 임의로 현지 투자 신탁 회사에서 운용하다 실패하여 회수 불능이 되었을 때, 그는 즉시 후진타오 총서기, 왕이 당시 주일 대사 등에게 서한을 보내 설명을 요구하고, 중국 정부를 통해 란저우 대학의 장학금을 원상 복구하도록 협력을 요청했다. 또한 기자회견을 개최하여 언론에 사실을 설명했다. 2006년 11월, 왕이 대사로부터의 회신 서한에서 "교육부에서 전액 원상 복구가 확인되었다. 이 문제로 인해 발생한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명시되었고, 이후 일본재단에 대학 측으로부터 입금 확인 연락이 있었다. (현재는 경영진이 일신되어 종전대로 장학금 프로그램이 실시되고 있다.)
3.9. 보트 경주 사업 관리
사사카와 요헤이는 1981년 전국모터보트경주회 연합회 부회장에 취임한 후, 매출 확대를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1985년 전화 투표를 시작했으며, 1986년에는 경정계의 숙원이었던 전용 장외 발매장 '보트피아'가 개장했다. 1994년에는 동 연합회 회장에 취임했다. 레저의 다양화와 라이프스타일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일찍이 야간 경주에 주목한 사사카와는 1984년 하마나코 보트장에서 공영 경기계 최초의 야간 경주 실험을 실시했다. 비록 1986년 오이 경마장, 1989년 이세자키 오토레이스장에서 야간 경주가 개최되어 다른 공영 경기에 선수를 빼앗겼지만, 1997년 키류 보트장에서 처음으로 야간 경주가 정식 개최되었다.
2000년에는 연합회 회장직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10월, 사사카와의 지휘 아래 진행되던 공영 경기계 최초의 3연승식 투표법 발매가 스미노에 보트장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경마, 경륜도 이를 따랐다. 보트 경정의 매출액은 거품 경제 붕괴와 함께 1991년 2.20 조 JPY를 정점으로 감소세를 보였지만, 사사카와는 연합회 부회장에 취임한 1981년부터 이미 현재의 어려운 시대를 대비하고 당시 경직된 보트 경정계에 새로운 발상에 기반한 획기적인 정책들을 추진했다.
매년 12월에 개최되는 상금왕 결정전 경주(SG 경주)는 보트 경정의 화제성과 선수 및 레이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1997년부터 우승자 상금액을 1.00 억 JPY로 책정한 것도 사사카와의 발안이며, 당시 프로 스포츠계에서 단일 대회 최고 상금으로 화제가 되었다. 그는 2009년 3월 동 연합회 명예회장직에서 퇴임했다.
2002년 3월, 전국모터보트경주회 연합회에서 기자회견이 열려 성 동일성 장애로 고민하던 여성 선수 안도 지나쓰를 앞으로 남성 선수로 등록하여 경주에 출전시키는 것을 발표했다. 동 연합회는 당초 성 동일성 장애자의 성별 변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굳혔으나, 해당 선수의 인권을 중시한 사사카와가 본인의 희망을 받아들여 등록 변경을 결정했다. 스포츠계에서 성별 변경이 인정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2002년 3월 29일자 요미우리 신문은 당시의 대응에 대해 일본정신신경학회 '성 동일성 장애' 특별위원장인 나카지마 도요지 오카야마 현립 오카야마 병원장이 "경기 스포츠 세계에서 이러한 사례는 들어본 적이 없다. 성별 호적 변경이 인정되지 않는 등 성 동일성 장애에 대한 사회적 이해와 인식이 진전되지 않는 현 상황에서 이 결정은 매우 훌륭하다"고 평가한 내용을 보도했다.
4. 사상 및 철학
사사카와 요헤이의 활동 전반에는 현대 사회의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협력적 접근 방식이 깊이 내재되어 있다. 그는 정치, 정부, 학계, 민간 부문 간의 광범위한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신념은 체코의 고(故) 바츨라프 하벨 전 대통령과 함께 11년간 이끌어온 '포럼 2000'에서 세계 각국의 지식인과 저명인사들이 모여 국제적 이슈를 논의하는 형태로 구현되었다.
그는 자신을 '사회적 기업가'로 정의하며, 단순한 자선 활동을 넘어 사회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혁신적인 접근 방식을 추구한다. 특히 한센병 퇴치 활동에서 이러한 철학이 두드러진다. 그는 한센병을 단순히 의학적 질병이 아닌, 환자와 가족들이 겪는 차별과 인권 문제를 포함하는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고, 유엔에서의 결의 채택을 이끌어내는 등 인권 존중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실현했다. 성 동일성 장애 선수에 대한 성별 등록 변경을 승인한 결정 또한 그의 인권 존중 사상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사카와는 공익 활동의 투명성을 강조하며,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매일의 활동과 생각을 공개하는 등 정보 공개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또한 CSR 활동을 통해 기업의 사회 공헌 참여를 독려하고, 국가, 지방자치단체, NPO, 기업의 CSR 활동이 통합되어 공동선을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일본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목소리를 냈다. '바다가 지켜준 일본에서 바다를 지키는 일본으로'라는 개념을 통해 해양기본법 제정을 추진하고 해양 안전에 대한 이용자 부담 원칙을 제안하는 등 해양 국가로서 일본의 책임과 역할을 강조했다. 동일본 대지진 복구 지원 과정에서 필립 모리스로부터 기부금을 수락한 것에 대한 논란에 대해, 그는 '재난 지역에 대한 선의는 누구에게서든 받아들여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입장을 표명했다. 또한 에도성 재건을 제안하며 일본인의 자긍심 회복과 관광 입국으로서의 잠재력을 강조하는 등 문화적 유산의 가치와 국가적 상징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아첨하지 않고 사실과 현황, 역사에 대해 직설적으로 의견을 피력하는 등 소신 있는 태도를 유지했다.
5. 수상 및 영예
사사카와 요헤이는 국내외에서 그의 업적을 인정받아 수많은 상과 훈장, 명예 학위를 받았다.
- 2019년: 문화공로자, 욱일대수장 (일본), 간디 평화상 (인도, 2019년 수상), 문화청 장관 표창, 제35회 정론대상
- 2018년: 팔라우 공화국 명예 시민, 캄보디아 왕국 로얄 모니사라폰 훈장 대십자장, 제47회 오쿠라 기시치로상
- 2017년: 유네스코 정부간해양학위원회 오션스 에이트상, 국제간호협회 보건 인권 대상, 야기엘론스키 대학교 Plus ratio quam vis 메달 (폴란드), WHO 헬스 포 올 금상
- 2016년: 불가리아 과학 아카데미 명예 메달
- 2015년: IMO 국제 해사상 (2014년 수상)
- 2014년: 국제법조협회 법의 지배상
- 2013년: 세르비아 공화국 공로 금상,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우호 훈장
- 2011년: 캄보디아 왕국 로얄 사하메트레이 훈장 대십자상,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공로 훈장 코망되르상
- 2010년: 덴마크 다네브로크 훈장 기사, 동티모르 동티모르 훈장, 에티오피아 밀레니엄 금메달, 핀란드 백장미 훈장 코망되르장, 아이슬란드 팔콘 훈장 사령관성십자장, 말레이시아 왕실 훈장 탄 스리, 노르웨이 왕실 공로 훈장 코망되르장, 스웨덴 왕실 북극성 훈장 일등 코망되르, 노먼 E. 볼로그 메달, 러시아 자연 과학 아카데미 명예 회원, 모스크바 및 전 러시아 총대주교 키릴의 총대주교 훈위
- 2007년: 몽골 북극성 훈장, 필리핀 연안 경비대 명예상
- 2006년: 말리 국가 훈장 코망되르상, 국제 간디상 (인도)
- 2004년: 요미우리 신문 요미우리 국제 협력상 (일본)
- 2003년: 캄보디아 로얄 모니사라폰 훈장 코망되르상, 캄보디아 국가 건설 훈장, 마다가스카르 공화국 국가 훈장 오피서상, 세계해사대학 특별상 (스웨덴)
- 2001년: 바츨라프 하벨 기념 메달 (체코 공화국), 밀레니엄 간디상 (국제 한센병 연합)
- 2000년: 메네르브 명예 훈장 (프랑스), 국제 그린 펜 어워드 (피지), 루마니아 공로 훈장 그랜드 오피서
- 1998년: 요르단 알 후세인 빈 알리 성취 훈장 1등급, WHO 헬스 포 올 금상
- 1997년: 중국 위생상 (중국)
- 1996년: 벨라루스 프란체스카 스카리나 메달, 페루 공로 훈장 코망되르, 페루 킨 잉카 쇼, 러시아 연방 우호 훈장, 우크라이나 공로 훈장 3등급
- 1995년: 지부티 공화국 그랜드 스타 훈장
- 1989년: 토고 모노 훈장 그랜드 오피서
- 2021년: 에콰도르 공화국 국가 훈장 그란 오피시알 장
명예 학위
- 2023년: 베오그라드 대학교 명예 박사 (세르비아)
- 2019년: 아테네오 데 마닐라 대학교 인문학 명예 박사 (필리핀)
- 2018년: 몽골 공업기술대학 명예 박사, 지린 대학 고문 교수 (중국)
- 2017년: 미네소타 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미국)
- 2016년: 소피아 대학교 명예 박사 (불가리아)
- 2013년: 요크 대학교 명예 박사 (영국)
- 2012년: 말라야 대학교 인문학 명예 박사 (말레이시아), 하와사 대학교 농업 개발 명예 박사
- 2010년: 러시아 자연 과학 아카데미 명예 회원
- 2009년: 윈난 대학 명예 교수 (중국)
- 2008년: 평화 대학교 인문학 명예 박사, 다롄 외국어 대학 명예 교수 (중국)
- 2007년: 캄보디아 대학교 인문학 명예 박사, 구이저우 대학 명예 교수 (중국), 로체스터 공과대학교 인문학 명예 박사 (미국)
- 2006년: 다롄 해사대학 명예 교수 (중국)
- 2005년: 자다브푸르 대학교 명예 박사 (인도), 국제해사대학연합 명예 회장
- 2004년: 상하이 해사대학 명예 교수 (중국), 세계해사대학 명예 박사 (스웨덴), 헤이룽장 대학교 명예 교수 (중국), 하얼빈 의과대학교 명예 교수 (중국)
- 2003년: 중국 의과대학 명예 교수 (중국), 몽골 경제 아카데미 명예 박사
- 2000년: 부쿠레슈티 대학교 명예 박사 (루마니아), 케이프 코스트 대학교 명예 박사 (가나), 옌볜 대학 명예 교수 (중국)
6. 저술 활동
사사카와 요헤이는 자신의 경험과 철학을 담은 여러 저서를 출간했다.
- No Matter Where the Journey Takes Me노 매터 웨어 더 저니 테이크스 미영어 (2019년, 허스트 & 컴퍼니)
- My Struggle against Leprosy마이 스트러글 어게인스트 레프러시영어 (2019년, 페스티나 렌테)
- 地球を駆ける-世界のハンセン病の現場から지큐오 카케루: 세카이노 한센뵤노 겐바카라일본어 (지구를 달리다: 세계 한센병 현장에서) (2021년, 고사쿠샤)
- 愛する祖国へ아이스루 소코쿠에일본어 (사랑하는 조국으로) (2016년, 산케이 신문 출판)
- 紳士の「品格」2신시노 힌카쿠 2일본어 (신사의 '품격' 2) (2015년, PHP 연구소)
- 残心잔신일본어 (잔심) (2014년, 겐토샤)
- 紳士の「品格」신시노 힌카쿠일본어 (신사의 '품격') (2012년, PHP 연구소)
- 隣人・中国人に言っておきたいこと린진 추고쿠진니 이테오키타이 코토일본어 (이웃 중국인에게 하고 싶은 말) (2010년, PHP 연구소)
- 不可能を可能に 世界のハンセン病との闘い후카노오 카노니: 세카이노 한센뵤토노 타타카이일본어 (불가능을 가능하게: 세계 한센병과의 싸움) (2010년, 아카시 쇼텐)
- 若者よ、世界に翔(はばた)け!와카모노요, 세카이니 하바타케!일본어 (젊은이여, 세계로 날아라!) (2009년, PHP 연구소)
- 人間として生きてほしいから닌겐토시테 이키테 호시이카라일본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를 바라기에) (2008년, 카이류샤)
- この国、あの国코노 쿠니, 아노 쿠니일본어 (이 나라, 저 나라) (2004년, 산케이 신문 출판)
- 世界のハンセン病がなくなる日세카이노 한센뵤가 나쿠나루 히일본어 (세계 한센병이 사라지는 날) (2004년, 아카시 쇼텐)
- 二千年の歴史を鑑として니센넨노 레키시오 카가미토시테일본어 (이천 년의 역사를 거울 삼아) (2003년, 일본교보사)
- 外務省の知らない世界の"素顔"가이무쇼노 시라나이 세카이노 스가오일본어 (외무성이 모르는 세계의 '진면목') (1998년, 산케이 신문 출판)
7. 평가 및 영향
사사카와 요헤이는 일본재단의 회장으로서 광범위한 사회 공헌 활동을 통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사회적 기업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한센병 퇴치를 개인적인 사명으로 삼아 질병의 의학적 치료를 넘어 환자들의 인권 보장과 사회적 차별 철폐를 위한 노력을 주도하며, WHO 특별대사로서 국제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다. 특히 유엔에서 한센병 관련 차별 철폐 결의를 이끌어낸 것은 그의 중요한 업적으로 꼽힌다. 또한 말라카 해협 해양 안전 증진, 아프리카 식량 증산 지원, 글로벌 장학금 네트워크 구축 등 인도주의적 지원과 교육 분야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 국내에서는 동일본 대지진 복구 지원에 앞장서고, 장애인 및 고령자 복지, 범죄 피해자 지원, 도쿄 마라톤 개최 기여 등 행정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중점을 둔 활동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성 동일성 장애 선수의 성별 등록 변경을 승인한 결정은 그의 인권 존중 사상을 보여주는 사례로 높이 평가되었다.
그러나 그의 활동과 배경에는 비판과 논란도 존재한다. 일본재단의 주요 자금원이 A급 전범이었던 그의 아버지 사사카와 료이치가 설립한 경정 사업에서 비롯된 '검은 돈'이라는 지적은 그의 사회 공헌 활동에 대한 윤리적 의문을 제기한다. 특히 대한민국 원본 문서에서는 이러한 자금 출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미얀마 평화 및 재건 지원 활동과 관련하여서는 복잡한 평가가 엇갈린다. 그는 일본 정부의 특별 대표로서 미얀마의 평화 프로세스에 깊이 관여하며 학교 건설, 인도적 지원, 휴전 협정 증인 참여 등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2021년 미얀마 쿠데타 이후에도 군부 최고사령관 민 아웅 흘라잉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활동을 이어가는 것에 대해 국제 사회와 일본 내에서 비판적인 시각이 제기되었다. 일부 언론은 그의 역할을 '침묵의 외교'로 평가하며 복잡한 상황을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의 역할의 모호성(개인, 재단, 정부 대표로서의 역할 혼재)과 군부와의 지속적인 관계가 인권 문제를 간과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쿠데타 이후 인권 문제로 인해 일본 기업들이 미얀마에서 철수하는 상황에서도 그의 군부와의 관계 유지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동일본 대지진 복구 지원 과정에서 필립 모리스와 같은 담배 회사로부터 기부금을 받은 것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다. 사사카와는 평소 금연 활동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기부금을 수락했으며, 이는 재난 지역에 대한 선의는 누구에게서든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며 정당화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그의 활동이 때로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복잡한 균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논쟁의 여지를 남겼음을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사사카와 요헤이는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한 혁신적인 접근과 광범위한 국제적 협력을 통해 인류 복지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그의 배경과 특정 활동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정치적 논란 또한 그의 평가에 중요한 부분으로 작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