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요르단, 정식 명칭 요르단 하심 왕국은 서아시아 레반트 지역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북쪽으로 시리아, 동쪽으로 이라크, 남동쪽과 남쪽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서쪽으로 이스라엘 및 이스라엘이 점령 중인 팔레스타인 영토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국토 서쪽 경계 일부는 요르단강과 사해가 차지하며, 남서쪽 아카바만을 통해 홍해와 짧은 해안선을 공유한다. 수도이자 최대 도시는 암만이다.
요르단 땅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했으며, 철기 시대에는 암몬, 모압, 에돔과 같은 고대 왕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기원전 3세기에는 아랍계 나바테아인이 페트라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명을 꽃피웠다. 이후 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초기 이슬람 칼리파조들(라쉬둔, 우마이야, 아바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아랍 반란(1916년)을 계기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벗어나, 1921년 영국의 보호령인 트란스요르단 토후국이 설립되었으며, 1946년 완전한 독립을 이루어 요르단 하심 왕국이 되었다. 독립 이후 요르단은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서안 지구를 점령했으나 1967년 이스라엘에 빼앗겼고, 1994년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요르단으로 유입되었으며, 이후에도 주변국의 분쟁으로 인해 시리아 난민 등을 수용하며 '난민의 피난처' 역할을 해왔으나, 이는 국가 자원에 상당한 부담을 주고 있다.
면적 약 8.93 만 km2의 반건조 국가인 요르단은 약 1,150만 명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으며, 대다수는 수니파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이다. 기독교인 소수 집단도 공존한다.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으나 국왕이 상당한 정치적 실권을 행사하며, 프리덤 하우스 등의 국제기관은 요르단의 정치적 자유 수준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아랍 연맹과 이슬람 협력 기구의 창립 회원국으로 국제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천연자원이 부족하고 주변 지역의 정치적 불안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숙련된 노동력과 관광 산업, 발달된 의료 부문을 통해 성장을 모색하고 있다. 페트라, 와디럼, 사해 등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 명소이다.
2. 국명
요르단의 정식 국명은 요르단 하심 왕국(المملكة الأردنيّة الهاشميّة알맘라카 알우르두니야 알하시미야아랍어, Hashemite Kingdom of Jordan해시마이트 킹덤 오브 조던영어)이며, 통상 요르단(الأردن알우르둔아랍어)으로 불린다. "하심"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증조부인 하심의 후손을 일컫는 하심가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요르단 왕가가 하심가 혈통임을 나타낸다.
요르단이라는 국명은 국토 서쪽 경계의 상당 부분을 이루는 요르단강에서 유래했다. 요르단강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강의 급격한 경사를 반영하여 "내려가는 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야라드'(ירד야라드히브리어)에서 파생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현대 요르단을 이루는 지역의 상당 부분은 역사적으로 트란스요르단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요르단강 건너편"이라는 의미이다. 구약성서(히브리 성경)에서는 이 지역을 עבר הירדן에베르 하야르덴히브리어("요르단강의 다른 편")이라는 용어로 칭했다.
초기 아랍 연대기에서는 요르단강을 히브리어 '야르덴'과 어원이 같은 '알우르둔'(الاردن알우르둔아랍어)으로 불렀다. 초기 이슬람 시대에는 강 주변 지역을 군사 행정 구역인 '준드 알우르둔'(جند الاردن준드 알우르둔아랍어)으로 칭했다. 이후 2천년기 초 십자군 시대에는 이 지역에 '울트레주르댕'(Oultrejordain울트레주르댕프랑스어, "요르단강 건너편 영지")이라는 이름의 영주령이 세워졌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영국 위임통치령 트란스요르단 토후국이 세워지면서 국명에 "요르단"이 포함되었고, 독립 후 현재의 국명으로 이어졌다.
3. 역사
요르단 지역은 선사 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해 온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고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인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일부로서 지정학적 중요성을 누려왔다. 고대 왕국들의 흥망성쇠, 로마와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 이슬람 제국의 확장, 십자군 전쟁,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거쳐 현대 요르단 하심 왕국으로 발전해왔다.
3.1. 고대
요르단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 거주 증거는 최소 2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요르단은 레반트 지역에 위치하여 아프리카에서 여러 인류 이동 경로가 교차하는 지점이었기 때문에 구석기 시대(최대 2만 년 전) 유물이 풍부하게 발견된다. 홍적세 후기에는 비교적 습윤한 기후로 인해 많은 습지가 형성되어 유물 보존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 과거 호숫가 환경은 다양한 호미니드 집단을 끌어들였으며, 후기 홍적세의 여러 도구 유적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과학자들은 요르단 북동부 사막의 14,500년 전 나투프 문화 유적지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빵 제조 증거를 발견했다.
신석기 시대(기원전 10,000-4,500년)에는 수렵 채집 문화에서 인구가 밀집된 농경 정착 마을 문화로 전환되었다. 현재 암만 동부에 위치한 아인 가잘은 근동에서 가장 큰 선사 시대 정착지 중 하나이다. 이곳에서는 기원전 7250년 또는 그 이전으로 추정되는 수십 개의 석고 인물상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대규모 인물상 중 하나이다. 동기 시대(기원전 4500-3600년)에는 요르단강 계곡의 툴레일라트 엘 가술을 포함한 여러 마을이 트란스요르단 지역에 등장했다. 같은 시기 동부 현무암 사막에 있는 일련의 원형 석조 구조물들은 오랫동안 고고학자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요새화된 도시와 도시 중심지는 청동기 시대(기원전 3600-1200년) 초기에 남부 레반트 지역에서 처음 나타났다. 와디 페이난은 구리 추출의 지역 중심지가 되었으며, 청동 생산을 위해 대규모로 구리가 채굴되었다. 중동 지역의 무역과 인구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문화 혁신과 문명이 전파되었다. 트란스요르단의 마을들은 수자원이 풍부하고 경작 가능한 지역에서 빠르게 확장되었다. 고대 이집트 세력은 레반트 지역으로 확장하여 요르단강 양안을 통제했다.
철기 시대(기원전 1200-332년)에는 이집트 세력이 물러난 후, 트란스요르단 지역에 암몬, 에돔, 모압 왕국이 자리 잡았다. 이들은 가나안어파의 셈어를 사용했으며, 고고학자들은 이들의 정치 체제가 국가보다는 부족 왕국 형태였다고 결론지었다. 암몬은 암만 고원에, 모압은 사해 동쪽 고지대에, 에돔은 남쪽 와디 아라바 주변 지역에 위치했다. 트란스요르단 북서부 지역인 길르앗에는 이스라엘인들이 정착했다. 이 세 왕국은 요르단강 서쪽에 중심을 둔 이웃한 히브리 왕국들인 이스라엘 왕국 및 유다 왕국과 지속적으로 충돌했다. 이에 대한 기록 중 하나가 기원전 840년 모압 왕 메사가 세운 메사 석비이다. 이 석비에서 그는 모압에서의 건축 사업을 찬양하고 이스라엘인들에 대한 승리를 기념했다. 이 석비는 성서 기록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유물 중 하나이다. 동시에 이스라엘과 아람-다마스쿠스 왕국은 길르앗 지역의 통제권을 두고 경쟁했다.
기원전 740-720년경, 이스라엘과 아람-다마스쿠스는 신아시리아 제국에 정복되었다. 암몬, 에돔, 모압 왕국은 복속되었으나 어느 정도의 독립성은 유지할 수 있었다. 기원전 627년, 아시리아 제국이 붕괴한 후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이 지역을 장악했다. 이 왕국들은 기원전 597년 예루살렘 함락 당시 바빌로니아를 지원했으나, 10년 후 바빌론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 왕국들은 페르시아 제국과 헬레니즘 제국 하에서도 속국 지위를 유지했다. 기원전 63년경 로마 제국 통치가 시작될 무렵, 암몬, 에돔, 모압 왕국은 고유의 정체성을 잃고 로마 문화에 동화되었다. 일부 에돔인들은 나바테아인들에게 쫓겨 유대 남부로 이주하여 이두매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하스몬 왕조에 의해 유대교로 개종했다.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제국 정복은 중동 지역에 헬레니즘 문화를 도입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기원전 323년 제국은 그의 장군들 사이에 분할되었고, 결국 트란스요르단의 상당 부분은 이집트에 기반을 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시리아에 기반을 둔 셀레우코스 제국 사이의 분쟁 지역이 되었다. 에돔 남쪽에 기반을 둔 유목 아랍인인 나바테아인은 기원전 169년 두 그리스 세력 간의 투쟁을 이용하여 독립 왕국을 세웠다. 나바테아 왕국은 이 지역의 많은 무역로를 통제했으며, 남쪽으로는 홍해 연안을 따라 헤자즈 사막까지, 북쪽으로는 한때 통치했던(기원전 85-71년) 다마스쿠스까지 뻗어 있었다. 나바테아인들은 무역로 통제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종종 이웃 국가들의 시기를 샀다. 나바테아의 수도인 페트라는 광범위한 수자원 관개 시스템과 농업 덕분에 기원후 1세기에 번영했다. 나바테아인들은 재능 있는 석공이었으며, 기원후 1세기에 가장 정교한 건축물인 알카즈네를 건설했다. 이는 아랍 나바테아 왕 아레타스 4세의 영묘로 여겨진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 휘하의 로마 군단은 레반트의 많은 지역을 정복하여 4세기 동안 지속된 로마 통치 시대를 열었다. 기원후 106년 트라야누스 황제는 저항 없이 나바테아를 합병하고 왕의 대로를 재건하여 비아 트라이아나 노바 도로로 알려지게 되었다. 로마인들은 트란스요르단의 그리스 도시들(필라델피아(암만), 게라사(제라쉬), 게다라(움 카이스), 펠라(타바카트 팔), 아르빌라(이르비드))과 팔레스타인 및 시리아 남부의 다른 헬레니즘 도시들에게 10개 도시 연맹인 데카폴리스를 형성하여 자치권을 부여했다. 제라쉬는 동방에서 가장 잘 보존된 로마 도시 중 하나이며,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팔레스타인 방문 중 들르기도 했다.
3.2. 중세

기원후 324년 로마 제국이 분열되면서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이 636년까지 이 지역을 계속 통치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리키니우스 공동 황제가 관용 칙령에 서명한 후 313년 제국 내에서 기독교가 합법화되었다. 380년 테살로니카 칙령으로 기독교는 국교가 되었다. 트란스요르단은 비잔티움 시대에 번영했으며, 이 지역 전역에 기독교 교회가 세워졌다. 아카바의 아카바 교회는 이 시대에 건설되었으며, 세계 최초의 목적 건축 기독교 교회로 여겨진다. 암만 남부의 움아르라사스에는 최소 16개의 비잔티움 교회가 있다. 한편, 해상 무역로가 등장하면서 페트라의 중요성은 쇠퇴했고, 363년 갈릴리 지진으로 많은 구조물이 파괴된 후 더욱 쇠퇴하여 결국 버려졌다. 동쪽의 사산 제국은 비잔티움의 경쟁자가 되었고, 잦은 충돌로 인해 사산 왕조가 트란스요르단을 포함한 이 지역 일부를 통제하기도 했다.
629년, 현재의 카라크주에서 벌어진 무타 전투에서 비잔티움 제국과 그들의 아랍 기독교 동맹인 가산 왕조는 헤자즈에서 레반트 북쪽으로 진군한 이슬람 라쉬둔 군대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비잔티움은 636년 트란스요르단 바로 북쪽에서 벌어진 결정적인 야르무크 전투에서 이슬람군에게 패배했다. 트란스요르단은 다마스쿠스 정복에 필수적인 영토였다. 라쉬둔 칼리파조에 이어 우마이야 칼리파국(661-750년)이 들어섰다.

우마이야 칼리파조 치하에서 트란스요르단에는 쿠세이르 아므라, 카스르 알-무샤타, 카스르 알-하라나 등 여러 사막성이 건설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를 전복시키려는 아바스 칼리파국의 움직임은 트란스요르단의 후마이마라는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강력한 749년 갈릴리 지진은 우마이야 왕조가 아바스 왕조에게 패배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생각되며, 아바스 왕조는 칼리파조의 수도를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겼다. 아바스 왕조 통치기(750-969년)에는 여러 아랍 부족이 북쪽으로 이동하여 레반트 지역에 정착했다. 로마 시대와 마찬가지로 해상 무역의 성장으로 트란스요르단의 중심적 위치가 약화되었고, 이 지역은 점차 빈곤해졌다. 아바스 왕조 쇠퇴 후 트란스요르단은 파티마 칼리파국(969-1070년)의 지배를 받았고, 그 후 십자군의 예루살렘 왕국(1115-1187년)의 지배를 받았다.
십자군은 울트레주르댕 영주령의 일부로 몬트리올 성과 카라크 성을 포함한 여러 성을 건설했다. 트란스요르단 북쪽 갈릴리 호수 근처에서 벌어진 하틴 전투(1187년)에서 십자군은 아이유브 왕조(1187-1260년)의 창시자인 살라딘에게 패배했다. 아이유브 왕조는 아질룬 성을 건설하고 기존 성들을 재건하여 십자군에 대항하는 군사 전초기지로 사용했다. 아이유브 왕조 치하의 트란스요르단 마을들은 시리아와 헤자즈를 잇는 경로를 따라 메카로 향하는 이슬람 순례자들의 중요한 경유지가 되었다. 아이유브 왕조의 여러 성들은 맘루크 술탄국(1260-1516년)에 의해 사용되고 확장되었으며, 맘루크는 트란스요르단을 카라크와 다마스쿠스 주로 분할했다. 다음 세기 동안 트란스요르단은 몽골 제국의 공격을 경험했지만, 몽골군은 결국 아인잘루트 전투(1260년)에서 맘루크에게 격퇴당했다.
3.3. 근현대
1516년 오스만 제국 군대가 맘루크 영토를 정복했다. 트란스요르단의 농촌 마을들은 16세기에 비교적 번영을 누렸으나 이후 버려졌다. 트란스요르단은 오스만 당국에게 변방의 중요성만을 가졌다. 그 결과 오스만 제국의 존재감은 거의 없었고 연례 세금 징수 방문 정도로 축소되었다.

오스만 통치 초기 3세기 동안 아드완, 바니 사크르, 호웨이타트 등 더 많은 아랍 베두인 부족들이 시리아와 헤자즈에서 트란스요르단으로 이주했다. 이 부족들은 지역의 여러 부분을 차지했으며, 실질적인 오스만 권위가 부재한 상황에서 트란스요르단은 19세기까지 지속된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이는 현대 사우디아라비아의 나지드에서 등장한 극단적인 정통 이슬람 운동인 와하브파 군대에 의한 단기 점령(1803-1812년)으로 이어졌다. 이집트 에얄레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의 아들 이브라힘 파샤는 1818년까지 오스만 술탄의 요청에 따라 와하브파를 뿌리 뽑았다.
1833년 이브라힘 파샤는 오스만 제국에 등을 돌리고 레반트 지역에 자신의 통치를 확립했다. 그의 정책은 1834년 팔레스타인에서의 농민 반란을 실패로 이끌었다. 트란스요르단의 도시인 아스살트와 알카라크는 농민 반란 지도자 카심 알아흐마드를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이브라힘 파샤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집트의 통치는 1841년 강제로 종식되었고, 오스만 통치가 복원되었다. 이브라힘 파샤의 원정 이후에야 오스만 제국은 트란스요르단이 속해 있던 시리아 빌라예트에서의 존재감을 강화하려고 시도했다.
1864년 일련의 세금 및 토지 개혁(탄지마트)은 농업과 버려진 마을에 어느 정도 번영을 가져왔지만, 사실상의 자치 종식은 트란스요르단의 다른 지역에서 반발을 초래했다. 러시아의 박해를 피해 이슬람교를 믿는 체르케스인과 체첸인들은 레반트 지역으로 피신했다. 트란스요르단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체르케스인들이 1867년 오랫동안 버려졌던 암만 인근에 처음 정착했고, 이후 주변 마을에도 정착했다. 오스만 당국의 행정 확립, 징병, 과중한 세금 정책은 그들이 통제하는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특히 트란스요르단의 부족들은 슈바크 반란(1905년)과 카라크 반란(1910년) 동안 반란을 일으켰으나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1908년 트란스요르단을 가로질러 다마스쿠스와 메디나를 연결하는 헤자즈 철도 건설은 순례자들의 경유지가 되면서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었다.

1908년 청년 튀르크당 혁명 이후 오스만 제국이 채택한 튀르크화 및 중앙집권화 정책 강화는 레반트의 아랍인들을 환멸시켰고, 이는 아랍 민족주의 운동 발전에 기여했다. 이러한 변화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6년 아랍 반란의 발발로 이어져 4세기 동안의 오스만 통치하의 침체를 종식시켰다. 반란은 헤자즈의 하심가 후손인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 빈 알리와 그의 아들들인 압둘라 1세, 파이살 1세, 알리 빈 후세인이 이끌었다. 지역적으로 반란은 베두인, 체르케스인, 기독교인을 포함한 트란스요르단 부족들의 지지를 얻었다. 아랍주의 대의와 제국주의적 이해관계가 일치했던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연합국이 지원을 제공했다. 반란은 1916년 6월 5일 메디나에서 시작되어 북쪽으로 진격하여 1917년 7월 6일 아카바 전투에서 트란스요르단에 이르렀다. 반란은 1918년 10월 파이살이 다마스쿠스에 입성하여 OETA 동부에 아랍 주도의 군사 행정을 수립하고, 이후 시리아 아랍 왕국을 선포하면서 절정에 달했으며, 트란스요르단은 두 곳 모두에 속했다. 이 기간 동안 마안과 아카바를 포함한 요르단 최남단 지역은 이웃한 헤자즈 왕국에 의해 점령되기도 했다.
시리아 지역에 대한 신생 하심 왕국은 1920년 7월 24일 마이살룬 전투에서 프랑스 군대에 항복해야 했고, 프랑스는 시리아 북부만 점령하고 트란스요르단은 공백기 상태로 남겨두었다. 아랍의 열망은 주로 지역을 프랑스와 영국의 영향권으로 분할한 비밀 사이크스-피코 협정(1916년)과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의 집" 설립 지원을 발표한 밸푸어 선언(1917년) 때문에 국제적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는 하심가와 아랍인들에게는 영국과의 이전 합의, 특히 영국이 알레포에서 아덴까지 하심가 통치하의 통일 아랍 국가 독립을 인정할 용의가 있다고 명시한 1915년 맥마흔-후세인 서한을 배신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영국 고등판무관 허버트 새뮤얼은 1920년 8월 21일 아스살트 주민들을 만나기 위해 트란스요르단을 방문했다. 그는 그곳에서 600명의 트란스요르단 유지들에게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과 분리될 트란스요르단에 지방 정부 수립을 지원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두 번째 회의는 9월 2일 움 카이스에서 열렸으며, 영국 대표 피츠로이 서머싯 소령은 다음과 같은 요구 사항이 담긴 청원서를 받았다: 아랍 왕자(에미르)가 이끄는 트란스요르단의 독립 아랍 정부 수립, 트란스요르단 내 유대인에게 토지 판매 중단 및 유대인 이민 방지, 영국이 국군을 창설하고 자금을 지원할 것, 트란스요르단과 나머지 지역 간의 자유 무역 유지.
샤리프 후세인의 둘째 아들 압둘라는 1920년 11월 21일 헤자즈에서 기차를 타고 트란스요르단 남부 마안에 도착하여 그의 형제가 잃어버린 대시리아 왕국을 되찾으려 했다. 당시 트란스요르단은 혼란 상태였으며,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지방 정부들로 인해 통치 불능으로 여겨졌다. 압둘라는 트란스요르단 부족 지도자들의 신뢰를 얻은 후 조직적인 정부의 이점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압둘라의 성공은 영국의 이익에 부합함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시기를 샀다. 영국은 압둘라에게 6개월의 시험 기간을 거친 후 마지못해 그를 트란스요르단의 통치자로 받아들였다. 1921년 3월, 영국은 트란스요르단을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 추가하기로 결정했으며, 여기서는 유대인 정착에 관한 위임통치 조항을 적용하지 않고 "샤리프 해결책" 정책을 시행할 것이었다. 1921년 4월 11일 트란스요르단 토후국이 설립되었고 압둘라가 에미르가 되었다.
1922년 9월, 국제 연맹 이사회는 트란스요르단 각서 조건에 따라 트란스요르단을 국가로 인정했다. 트란스요르단은 1946년까지 영국의 위임통치령으로 남아 있었지만, 요르단강 서쪽 지역보다 더 큰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하심 지도부가 이 지역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여러 어려움이 발생했다. 트란스요르단에서는 1921년과 1923년 쿠라에서의 소규모 지방 반란이 영국의 도움을 받아 압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나지드의 와하브파가 세력을 회복하여 그의 영토 남부 지역을 반복적으로 침공하여 에미르의 지위를 심각하게 위협했다. 에미르는 지역 베두인 부족과 암만 근처에 소규모 영국 공군 파견대를 둔 군사 기지를 유지하고 있던 영국의 도움 없이는 이러한 공격을 격퇴할 수 없었다.
3.3.1. 독립 이후

영국 정부와 트란스요르단 에미르가 1946년 3월 22일 체결한 런던 조약은 국가의 독립을 인정했다. 1946년 5월 25일, 트란스요르단 의회에서 조약이 비준된 날, 트란스요르단은 아랍어로 요르단 하심 왕국이라는 이름의 왕국으로 승격되었고 압둘라가 초대 국왕이 되었다. 그러나 영어로는 1949년까지 트란스요르단 하심 왕국으로 계속 불렸다. 5월 25일은 현재 독립기념일이자 공휴일로 기념된다. 요르단은 1955년 12월 14일 유엔에 가입했다.
1948년 5월 15일,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의 일환으로 요르단은 여러 다른 아랍 국가들과 함께 개입했다. 전쟁 후 요르단은 서안 지구를 통제했고, 1950년 4월 24일 예리코 회의 이후 이 지역을 공식적으로 합병했다. 이에 대해 일부 아랍 국가들은 요르단의 아랍 연맹 제명을 요구했다. 1950년 6월 12일, 아랍 연맹은 합병이 일시적이고 실용적인 조치이며 요르단이 향후 해결될 때까지 영토를 "수탁자"로 보유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압둘라 1세 국왕은 1951년 알아크사 모스크에서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려 한다는 소문 속에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 압둘라는 그의 아들 탈랄에게 왕위를 계승했으며, 탈랄은 1952년 현대 요르단 헌법을 제정했다. 병으로 인해 탈랄은 1953년 1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그의 장남 후세인에게 양위했다. 이후 요르단은 큰 정치적 불확실성을 겪었다. 1950년대는 나세르주의와 범아랍주의가 아랍 세계를 휩쓴 정치적 격변기였다. 1956년 3월 1일, 후세인 국왕은 다수의 영국 고위 장교들을 해임함으로써 군 사령부를 아랍화하여 국내에 남아있는 외국 영향력을 제거하는 조치를 취했다. 1958년, 요르단과 이웃한 하심 이라크는 나세르의 이집트와 시리아 간의 경쟁적인 아랍 연합 공화국 형성에 대응하여 아랍 연방을 결성했다. 이 연방은 이라크 국왕 파이살 2세(후세인의 사촌)가 1958년 7월 14일 피비린내 나는 군사 쿠데타로 폐위된 후 해체되어 단 6개월 만에 끝났다.

요르단은 1967년 6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6일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이집트와 군사 협정을 체결했고, 요르단과 시리아도 전쟁에 참전했다. 아랍 국가들은 패배했고, 요르단은 서안 지구의 통제권을 이스라엘에 빼앗겼다. 이후 이스라엘과의 소모전이 이어졌는데, 여기에는 1968년 카라메 전투가 포함된다. 이 전투에서 요르단군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연합군은 서안 지구와 접한 요르단 국경의 카라메 캠프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을 격퇴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이스라엘군에 대한 개입이 제한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라메에서의 사건들은 아랍 세계에서 폭넓은 인정과 찬사를 받았다. 그 결과, 다른 아랍 국가들로부터 요르단 내 팔레스타인 준군사 조직(페다인)에 대한 지지가 급증했다. 페다인 활동은 곧 요르단의 법치에 위협이 되었다. 1970년 9월, 요르단군은 페다인을 공격했고, 그 결과 발생한 전투는 검은 9월로 알려진 분쟁으로 이어져 다양한 PLO 그룹의 팔레스타인 전투원들이 레바논으로 추방되었다.
1973년 이집트와 시리아는 이스라엘에 대한 욤키푸르 전쟁을 일으켰고, 1967년 요르단강 휴전선에서 전투가 발생했다. 요르단은 시리아 영토 내의 이스라엘 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여단을 시리아에 파견했지만, 요르단 영토에서 이스라엘군과 교전하지는 않았다. 욤키푸르 전쟁 이후 1974년 라바트 정상회담에서 요르단과 나머지 아랍 연맹은 PLO가 "팔레스타인 인민의 유일한 합법적 대표"라는 데 동의했다. 이후 요르단은 1988년 서안 지구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했다.
1991년 마드리드 회의에서 요르단은 미국과 소련이 후원하는 평화조약 협상에 동의했다. 이스라엘-요르단 평화조약은 1994년 10월 26일 체결되었다. 1997년, 폭탄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 요원들이 캐나다 여권을 사용하여 요르단에 입국하여 요르단에 거주하던 하마스 고위 지도자 칼레드 마샬을 독살하려 했다. 국제적인 압력에 굴복한 이스라엘은 독극물 해독제를 제공하고, 후세인 국왕이 평화조약을 파기하겠다고 위협하자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을 포함한 수십 명의 정치범을 석방했다.

1999년 2월 7일, 압둘라 2세는 거의 50년간 통치했던 아버지 후세인 국왕의 사망으로 왕위에 올랐다. 압둘라는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과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요르단의 약속을 재확인했다. 그는 첫해에 정부 의제를 경제 개혁에 다시 집중시켰다. 압둘라 2세 국왕의 장남 후세인 왕자가 요르단의 왕세자이다. 압둘라는 의회에서 가장 큰 세력이 정부를 구성하는 의원내각제로 요르단을 전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부족 정체성이 강한 국가에서 정당의 미발달이 이러한 노력을 방해했다.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가 이끄는 알카에다는 2005년 11월 9일 암만의 3개 호텔 로비에서 연쇄 폭탄 테러를 감행하여 60명이 사망하고 115명이 부상했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이 폭탄 테러는 요르단인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분노를 일으켰다. 이 공격은 요르단에서 드문 사건으로 간주되며, 이후 요르단 내부 보안이 극적으로 개선되었다. 그 이후 주요 테러 공격은 발생하지 않았다. 압둘라와 요르단은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 서방과의 관계, 대부분 비종교적인 법률 때문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경멸을 받고 있다.
아랍의 봄은 2011년 아랍 세계에서 경제 및 정치 개혁을 요구하며 발생한 대규모 시위였다. 이러한 시위 중 다수는 일부 아랍 국가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폭력적인 내전으로 끝나는 불안정을 초래했다. 국내 불안에 대응하여 압둘라는 총리를 교체하고 헌법 개혁, 공공 자유 및 선거 관련 법률 개혁을 포함한 개혁을 도입했다. 2016년 요르단 총선에서 비례대표제가 요르단 의회에 다시 도입되었으며, 그는 이것이 궁극적으로 의원내각제 수립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천연자원이 부족한 요르단에 140만 명의 시리아 난민이 유입되고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ISIL)가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요르단은 이 지역을 휩쓴 폭력 사태로부터 대체로 무사했다.
2021년 4월 4일, 요르단 전 왕세자인 함자 빈 후세인 왕자를 포함한 19명이 왕국을 "불안정하게 만들려는" 혐의로 체포되어 가택 연금되었다.
4. 지리

요르단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대륙의 교차로에 전략적으로 위치하며, 문명의 발상지인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레반트 지역에 속한다. 면적은 8.93 만 km2이며, 최북단 지점인 움 카이스와 최남단 지점인 아카바 사이의 길이는 400 km이다. 북위 29도에서 34도, 동경 34도에서 40도 사이에 위치한다. 남쪽과 동쪽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 북동쪽으로는 이라크, 북쪽으로는 시리아, 서쪽으로는 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 (서안 지구)과 국경을 접한다.
동부는 오아시스와 계절 하천으로 관개되는 건조한 고원이다. 주요 도시들은 비옥한 토양과 비교적 풍부한 강우량을 가진 북서부 지역에 압도적으로 집중되어 있다. 여기에는 북서부의 이르비드, 제라쉬, 자르카, 중서부의 수도 암만과 아스살트, 남서부의 마다바, 알카라크, 아카바가 포함된다. 동부의 주요 도시는 오아시스 도시인 아즈라크와 루와이셰드이다.
서부에는 경작 가능한 토지와 지중해성 상록수림이 있는 고지대가 갑자기 요르단 지구대로 이어진다. 지구대에는 요르단강과 사해가 있으며, 이는 요르단과 이스라엘을 분리한다. 요르단은 아카바만의 홍해에 26 km의 해안선을 가지고 있지만, 그 외에는 내륙국이다. 요르단강의 동쪽 지류인 야르무크강은 북쪽으로 요르단과 시리아(이스라엘이 점령한 골란고원 포함) 사이 국경의 일부를 형성한다. 다른 국경들은 여러 국제 및 지역 협정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명확하게 정의된 자연 지형을 따르지 않는다. 가장 높은 지점은 해발 1854 m인 자발 움알다미산이며, 가장 낮은 지점은 해발 -420 m인 사해로,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육지 지점이다.

요르단은 다양한 지형과 환경으로 인해 다양한 서식지, 생태계, 생물군을 보유하고 있다. 요르단 왕립 자연보호협회는 1966년 요르단의 자연 자원을 보호하고 관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요르단의 자연보호구역으로는 다나 생물권보전지역, 아즈라크 습지보호구역, 샤우마리 야생동물보호구역, 무집 자연보호구역 등이 있다.
4.1. 기후
요르단의 기후는 지역에 따라 크게 다르다. 일반적으로 지중해에서 내륙으로 갈수록 기온차가 커지고 강수량이 적다. 평균 해발고도는 812 m이다. 요르단 계곡 위의 고지대, 사해와 와디 아라바 산맥, 그리고 남쪽의 라스 알나카브까지는 지중해성 기후가 우세하며, 동부와 북동부 지역은 건조한 사막 기후이다. 사막 지역은 기온이 높지만, 보통 낮은 습도와 낮 동안의 산들바람으로 인해 더위가 완화되며, 밤에는 시원하다.
5월부터 9월까지 지속되는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평균 기온은 약 32 °C이고 7월과 8월 사이에는 때때로 40 °C를 초과한다. 11월부터 3월까지 지속되는 겨울은 비교적 시원하며, 평균 기온은 약 11.08 °C이다. 겨울에는 서부 일부 고지대에 잦은 소나기와 간헐적인 강설이 있다.
4.2. 주요 지형
요르단의 주요 지형은 국토 서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요르단 지구대(Great Rift Valley의 일부)가 가장 두드러진다. 이 지구대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요르단강이 흐르며, 세계에서 가장 낮은 지점인 사해(해수면 약 -420 m)로 흘러 들어간다. 사해는 높은 염분 농도로 유명하며, 부력이 매우 커서 사람이 쉽게 뜰 수 있다. 요르단강 계곡은 농업에 중요한 지역이지만, 수자원 부족 문제를 겪고 있다.
요르단 지구대 동쪽으로는 요르단 고원이 펼쳐져 있다. 이 고원은 평균 해발 500~1,000m로, 수도 암만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이 이곳에 위치한다. 고원 지대는 비교적 강수량이 많아 농업과 목축업이 이루어진다. 남부에는 요르단 최고봉인 자발 움알다미산(해발 1854 m)과 자발 람산(해발 1754 m)을 포함한 산악 지형이 나타난다.
국토의 약 80%를 차지하는 동부 및 남동부 지역은 광활한 시리아 사막의 일부인 요르단 사막으로 덮여 있다. 이 지역은 매우 건조하며, 와디럼과 같은 독특한 사암 지형과 모래 언덕이 특징이다. 와디럼은 붉은 사막 풍경으로 유명하며, 많은 영화의 촬영지가 되었다. 아카바만에 접한 남서쪽 끝은 요르단의 유일한 해안선으로, 아카바 항구가 위치해 있다.
4.3. 생물 다양성

요르단에서는 2,000종 이상의 식물 종이 기록되었다. 많은 꽃 피는 식물은 겨울비가 내린 후 봄에 피며, 식생 유형은 강수량 수준에 크게 좌우된다. 북서부의 산악 지역은 숲으로 덮여 있는 반면, 남쪽과 동쪽으로 갈수록 식생은 더 관목화되고 스텝 유형의 식생으로 변한다. 숲은 150만 두남(약 1500 km2)을 덮고 있으며, 이는 요르단 면적의 2% 미만으로, 요르단은 세계에서 숲이 가장 적은 국가 중 하나이며, 국제 평균은 15%이다.
식물 종 및 속에는 알레포소나무, 사르코포테리움, 살비아 도미니카, 검은붓꽃, 타마릭스, 아나바시스, 쑥, 아카시아, 지중해사이프러스, 페니키아향나무 등이 있다. 북서부 산악 지역은 소나무, 낙엽성 참나무, 상록 참나무, 피스타치오, 야생 올리브의 자연림으로 덮여 있다. 포유류 및 파충류 종으로는 긴귀고슴도치, 누비아아이벡스, 멧돼지, 다마사슴, 아라비아늑대, 사막왕도마뱀, 벌꿀오소리, 유리뱀, 카라칼, 황금자칼, 노루 등이 있다. 조류에는 두건까마귀, 어치, 주름민목독수리, 바바리매, 후투티, 파라오수리부엉이, 뻐꾸기, 트리스트램찌르레기, 팔레스타인태양새, 시나이되새, 황조롱이, 집까마귀, 흰눈직박구리 등이 있다.
요르단 국경 내에는 시리아 건조 초원 및 관목지, 동지중해 침엽수-경엽수-활엽수림, 메소포타미아 관목 사막, 홍해 누보-신디아 열대 사막 및 반사막 등 4개의 육상 생태 지역이 있다.
5. 정치

요르단은 입헌군주제 하의 단일 국가이다. 1952년에 채택되어 여러 차례 개정된 헌법은 국왕, 정부, 양원제 의회, 사법부를 규율하는 법적 틀이다. 국왕은 정부와 의회로부터 광범위한 행정권과 입법권을 보유한다. 국왕은 자신이 임명하는 4년 임기의 정부를 통해 권한을 행사하며, 정부는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된 의회에 책임을 진다. 헌법에 따르면 사법부는 독립적이지만, 실제로는 독립성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5.1. 정부 구조


국왕은 국가원수이자 요르단군의 최고사령관이다. 국왕은 전쟁과 평화를 선포하고, 법률과 조약을 비준하며, 의회 회기를 소집 및 폐회하고, 선거를 요청 및 연기하며, 정부를 해임하고, 의회를 해산할 수 있다. 임명된 정부는 선출된 하원의 과반수 불신임 투표를 통해 해임될 수도 있다. 정부가 법안을 제안하면 하원과 상원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국왕의 비준을 거쳐 법률이 된다. 법률에 대한 국왕의 거부권은 양원 합동회의에서 3분의 2의 찬성으로 번복될 수 있다. 의회는 또한 정부 질의권을 갖는다.
상원의원 65명은 국왕이 직접 임명하며, 헌법은 이들이 이전에 정부나 하원에서 근무한 원로 정치인, 판사, 장군이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하원의원 130명은 23개 선거구에서 정당 명부 비례대표제를 통해 4년 임기로 선출된다. 하원에는 여성(15석, 2016년 선거에서는 20석 획득), 기독교인(9석), 체르케스인 및 체첸인(3석)을 위한 최소 할당 의석이 있다.

법원은 민사, 종교, 특별 법원으로 나뉜다. 민사 법원은 정부를 상대로 제기된 소송을 포함한 민사 및 형사 사건을 다룬다. 민사 법원에는 치안 법원, 1심 법원, 항소 법원, 행정 문제 관련 사건을 심리하는 고등 행정 법원, 2012년에 법률의 합헌성 관련 사건을 심리하기 위해 설립된 헌법 재판소가 있다. 이슬람교가 국교이지만, 헌법은 종교적 및 개인적 자유를 보장한다. 종교법은 종교 법원에서 이혼 및 상속과 같은 개인 신분 문제에만 적용되며, 부분적으로 이슬람 샤리아 법에 기반한다. 특별 법원은 민사 법원에서 이송된 사건을 다룬다.
현 국왕인 압둘라 2세는 1999년 2월 아버지 후세인 1세 국왕의 서거 후 왕위에 올랐다. 압둘라는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과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요르단의 약속을 재확인했다. 그는 재임 첫해에 정부 의제를 경제 개혁에 다시 집중시켰다. 압둘라 2세 국왕의 장남인 후세인 왕자가 현재 요르단의 왕세자이다. 현 총리는 2024년 9월 15일 임명된 자파르 하산이다. 압둘라는 요르단을 의회에서 가장 큰 세력이 정부를 구성하는 의원내각제로 전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부족 정체성이 강한 국가에서 정당의 미발달이 이러한 노력을 방해하고 있다. 요르단에는 민족주의, 좌파, 이슬람주의, 자유주의 이념을 대표하는 약 50개의 정당이 있다. 2016년 총선에서 정당들은 의석의 5분의 1을 놓고 경쟁했으며, 나머지는 무소속 정치인들이 차지했다. 2016년 이후 선거 제도 개혁이 단속적으로 이루어져 후보자 중심의 자유 명부식 비례대표제(OLPR)와 정당 중심의 폐쇄 명부식 비례대표제(CLPR)로 나누어 선출하며 의회의 탈부족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프리덤 하우스는 2022년 세계의 자유 보고서에서 요르단을 "자유롭지 않음"으로 평가했다. 요르단은 2021년 케이토 연구소의 인간 자유 지수에서 세계 94위를 차지했고, 2021년 국제 투명성 기구가 발표한 부패 인식 지수에서는 58위를 기록했다. 2023년 국경 없는 기자회의 언론 자유 지수에서 요르단은 180개국 중 146위를 차지했다. 요르단의 전체 점수는 0점(가장 자유롭지 않음)에서 105점(가장 자유로움) 사이에서 42.79점이었다. 2015년 보고서는 "아랍의 봄과 시리아 분쟁으로 인해 당국이 시민 사회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언론, 특히 인터넷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고 지적했다. 요르단 언론은 공공 및 민간 기관으로 구성된다. 인기 있는 요르단 신문으로는 알가드와 조던 타임스가 있다. 알맘라카 방송, 로야 TV, 요르단 TV는 요르단의 일부 텔레비전 채널이다. 2015년 요르단의 인터넷 보급률은 76%에 달했다.
5.2. 행정 구역
요르단은 12개의 주(무하파자, محافظة아랍어)로 나뉘며, 이들은 비공식적으로 북부, 중부, 남부의 세 지역으로 분류된다. 주는 다시 리와(지구)로 나뉘고, 리와는 종종 카다(하위 지구)로 더 세분된다. 각 행정 단위의 통제는 나히야로 알려진 "주요 도시"(행정 중심지)에 있다.
번호 | 주 | 주도 | 인구 (2015년) | |
---|---|---|---|---|
북부 지역 | ||||
1 | 이르비드 | 이르비드 | 1,770,158 | |
2 | 마프라크 | 마프라크 | 549,948 | |
3 | 제라시 | 제라시 | 237,059 | |
4 | 아질룬 | 아질룬 | 176,080 | |
중부 지역 | ||||
5 | 암만 | 암만 | 4,007,256 | |
6 | 자르카 | 자르카 | 1,364,878 | |
7 | 발카 | 아스살트 | 491,709 | |
8 | 마다바 | 마다바 | 189,192 | |
남부 지역 | ||||
9 | 카라크 | 알카라크 | 316,629 | |
10 | 아카바 | 아카바 | 188,160 | |
11 | 마안 | 마안 | 144,083 | |
12 | 타필라 | 타필라 | 96,291 |
5.3. 대외 관계

요르단 왕국은 친서방 외교 정책을 추구하며 미국 및 영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1990년 제1차 걸프 전쟁 당시 요르단의 중립 유지와 이라크와의 관계 지속으로 인해 이러한 관계가 손상되기도 했다. 이후 요르단은 UN의 대이라크 제재 이행과 서남아시아 평화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를 회복했다. 1999년 후세인 국왕 서거 이후 요르단과 페르시아만 국가들 간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었다.
요르단은 미국과 영국의 핵심 동맹국이며, 이집트 및 아랍에미리트와 함께 이스라엘과 평화 조약을 체결한 단 세 곳의 아랍 국가 중 하나이다. 요르단은 1967년 국경을 기준으로 한 독립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두 국가 해법의 일부이자 최우선 국가 이익으로 간주한다. 집권 하심 왕조는 1924년부터 예루살렘 성지에 대한 후견인 지위를 가져왔으며, 이는 이스라엘-요르단 평화 조약에서 강화되었다. 예루살렘 알아크사 모스크에서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 간의 혼란은 예루살렘의 이슬람 및 기독교 성지 보호에 있어 요르단의 역할에 관한 요르단과 이스라엘 간의 긴장을 야기했다.
요르단은 이슬람 협력 기구와 아랍 연맹의 창립 회원국이다. 유럽 연합과는 "특별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EU와 주변국 간의 관계 증진을 목표로 하는 유럽 인근 정책의 일부이다. 요르단과 모로코는 2011년 페르시아만 협력회의 가입을 시도했으나, 걸프 국가들은 대신 5년간의 개발 원조 프로그램을 제안했다.
5.3.1. 대한민국과의 관계
요르단은 1962년 대한민국과 수교하였으며, 1974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수교하였다. 그러나 2018년 요르단 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관이 설치되지 않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대한민국은 1975년 주요르단 대한민국 대사관을 설치하였으며, 요르단은 2010년 10월 주한 요르단 대사관을 설치하였다(그 이전까지는 주일 요르단 대사가 주한 대사를 겸임하였다).
5.4. 군사

요르단 최초의 조직화된 군대는 1920년 10월 22일 "아랍 군단"이라는 이름으로 창설되었다. 아랍 군단은 1920년 150명에서 1946년 8,000명으로 성장했다.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중 요르단의 서안 지구 점령은 오늘날 요르단군으로 알려진 아랍 군단이 전쟁에 참여한 아랍 군대 중 가장 효과적이었음을 증명했다. 약 110,000명의 병력을 보유한 요르단 육군은 이 지역에서 가장 전문적인 군대 중 하나로 간주되며 특히 잘 훈련되고 조직되어 있다. 요르단 군대는 중동에서의 중요한 위치 때문에 미국, 영국, 프랑스로부터 강력한 지원과 원조를 받고 있다. 특수작전부대의 발전은 특히 중요했으며, 이는 자국 안보 위협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군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이 지역 및 그 외 지역의 특수부대를 훈련시키는 데 기여했다. 요르단은 여러 아랍 국가의 보안군에 광범위한 훈련을 제공한다.

전 세계적으로 약 50,000명의 요르단 군인이 유엔 평화유지 임무에 참여하고 있다. 요르단은 유엔 평화유지 임무 참여에서 국제적으로 3위를 차지하며, 모든 유엔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의 평화유지군 파견국 중 하나이다. 요르단은 이 지역의 분쟁 지역과 자연재해 피해 지역에 여러 야전병원을 파견했다.
2014년, 요르단은 시리아 내전 개입의 일환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연합군의 이슬람 국가(IS)에 대한 공습 작전에 참여했다. 2015년, 요르단은 2011년 봉기에서 축출된 전 대통령 알리 압둘라 살레에 충성하는 세력과 후티에 대항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주도 예멘 군사 개입에 참여했다.
요르단의 법 집행은 내무부 산하의 공공 보안국(약 50,000명 포함)과 헌병 총국이 담당한다. 최초의 경찰력은 오스만 제국 붕괴 후인 1921년 4월 11일에 조직되었다. 1956년 군 사령부 아랍화 이전까지 경찰 업무는 아랍 군단과 트란스요르단 변경군이 수행했다. 그 해 이후 공공 안전국이 설립되었다. 여성 경찰관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1970년대에는 아랍 국가 최초로 경찰력에 여성을 포함시켰다. 요르단의 법 집행 기관은 2016년 세계 내부 보안 및 경찰 지수에서 경찰 서비스 성과 부문 세계 37위, 중동 3위를 기록했다.
6. 경제
요르단은 세계은행에 의해 중하위 소득 국가로 분류된다. 그러나 2010년까지 인구의 약 14.4%가 국가 빈곤선 이하로 생활했으며, 거의 3분의 1이 일시적 빈곤으로 알려진 국가 빈곤선 아래로 떨어졌다. 2016년 기준 3945.30 억 USD의 GDP를 가진 경제는 2004년에서 2008년 사이에 연평균 8% 성장했으며, 2010년 이후로는 약 2.6% 성장했다. 1인당 GDP는 1970년대에 351% 증가했고, 1980년대에는 30% 감소했으며, 1990년대에는 36% 증가하여 현재 구매력 평가 기준 1인당 9406 USD이다. 요르단 경제는 이 지역에서 가장 작은 경제 중 하나이며, 상대적으로 높은 실업률과 빈곤율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요르단 경제는 비교적 잘 다각화되어 있다. 무역과 금융을 합하면 GDP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운송 및 통신, 공공 시설, 건설이 5분의 1을 차지하며, 광업과 제조업이 거의 또 다른 5분의 1을 차지한다. 2009년 요르단에 대한 순 공적 개발 원조는 총 7.61 억 USD였으며, 정부에 따르면 이 중 약 3분의 2가 보조금으로 할당되었고, 그중 절반이 직접 예산 지원이었다.

공식 통화는 요르단 디나르이며, 이는 국제 통화 기금의 특별인출권(SDR)에 고정되어 있어 환율은 1 미국 달러 = 0.709 디나르, 또는 약 1 디나르 = 1.41044 달러이다. 2000년, 요르단은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고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여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최초의 아랍 국가가 되었다. 요르단은 유럽 연합과 특별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이는 유럽 시장으로의 수출 접근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느린 국내 성장, 높은 에너지 및 식량 보조금, 비대한 공공 부문 인력으로 인해 요르단은 일반적으로 연간 재정 적자를 겪는다.
대침체와 아랍의 봄으로 인한 혼란은 요르단의 GDP 성장을 둔화시켜 무역, 산업, 건설, 관광업에 타격을 입혔다. 관광객 수는 2011년 이후 급격히 감소했다. 2011년 이후 시나이반도에서 이집트로부터 요르단에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아랍 가스 파이프라인이 이슬람 국가 연계 세력에 의해 32차례 공격을 받았다. 요르단은 전기 생산을 위해 더 비싼 중유를 대체해야 했기 때문에 수십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2012년 정부는 연료 보조금을 삭감하여 가격을 인상했다. 이 결정은 나중에 철회되었지만,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다.

2011년 요르단의 외채는 190억 달러로 GDP의 60%에 해당했다. 2016년에는 부채가 351억 달러에 달해 GDP의 93%를 차지했다. 이러한 상당한 증가는 관광 활동 감소, 외국인 투자 감소, 군비 지출 증가, 이집트 파이프라인 공격, 이라크 및 시리아와의 무역 붕괴, 시리아 난민 수용 비용, 대출 누적 이자 등 지역 불안정의 영향 때문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시리아 난민들은 요르단에 연간 25억 달러 이상의 비용을 발생시켰으며, 이는 GDP의 6%이자 정부 연간 수입의 25%에 해당한다. 외국 원조는 이러한 비용의 일부만 충당하며, 총비용의 63%는 요르단이 부담한다. 정부는 2021년까지 요르단의 GDP 대비 부채 비율을 77%로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긴축 프로그램을 채택했다. 이 프로그램은 2018년에 부채가 95% 이상으로 증가하는 것을 막는 데 성공했다.
요르단의 교육 수준이 높고 숙련된 노동자 비율은 ICT 및 산업과 같은 분야에서 이 지역 최고 수준이며, 이는 비교적 현대적인 교육 시스템 덕분이다. 이는 대규모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고 페르시아만 국가에 인력을 수출할 수 있게 해주었다. 요르단으로의 해외송금 흐름은 특히 1970년대 말과 1980년대에 급격히 증가했으며, 여전히 중요한 외부 자금 조달원이다. 2015년 요르단 국외 거주자들의 송금액은 38억 달러로, 2014년 36억 6천만 달러를 넘어선 주목할 만한 증가세를 보이며 이 지역에서 네 번째로 큰 수혜국이 되었다.
6.1. 주요 산업

광업, 제조업, 건설업, 전력 등을 포함하는 산업 부문은 2004년 GDP의 약 26%를 차지했다(제조업 16.2%, 건설업 4.6%, 광업 3.1% 포함). 2002년에는 노동력의 21% 이상이 산업 부문에 고용되었다. 2014년 산업은 GDP의 6%를 차지했다. 주요 산업 제품은 칼륨, 인산염, 시멘트, 의류, 비료이다. 이 부문에서 가장 유망한 분야는 건설업이다. 요르단 산업의 주요 기둥 중 하나로 여겨지는 페트라 엔지니어링 산업 회사는 에어컨 장치가 NASA에 도달하면서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다. 요르단은 현재 힉마 제약이 주도하는 MENA 지역의 주요 제약 제조업체로 간주된다.
군수 산업은 압둘라 2세 국왕이 1999년 요르단군에 과학 기술 서비스를 자체적으로 공급하고 보안 연구 개발의 글로벌 허브가 되기 위해 요르단 설계 개발국(KADDB) 방위 산업체를 설립한 후 번창했다. 이 회사는 모든 종류의 군수품을 제조하며, 그중 다수는 격년으로 개최되는 국제 군사 전시회인 SOFEX에 전시된다. 2015년 이 회사는 42개국 이상에 7,200만 달러 상당의 산업 제품을 수출했다.
6.2. 관광
관광 부문은 요르단 경제의 초석으로 간주되며 고용, 외화벌이, 경제 성장의 큰 원천이다. 2010년에는 800만 명의 관광객이 요르단을 방문했다. 대부분의 관광객은 유럽과 아랍 국가 출신이다. 관광업은 아랍의 봄으로 인한 지역적 혼란의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 요르단은 2010년부터 2016년까지 관광객 수가 70% 감소했으나, 2017년부터 회복되기 시작했다.
관광 유물부에 따르면 요르단에는 약 10만 개의 고고학 및 관광 유적지가 있다. 매우 잘 보존된 역사 도시로는 페트라와 제라쉬가 있으며, 전자는 가장 인기 있는 관광 명소이자 왕국의 상징이다. 성지의 일부로서 알마그타스(예수 세례의 전통적인 장소), 느보산, 움아르라사스, 마다바, 마카이루스 등 수많은 성서 관련 유적지가 있다. 이슬람 유적지로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동료들인 압드 알라 이븐 라와하, 자이드 이븐 하리타, 무아드 이븐 자발 등의 성지가 있다. 십자군과의 전쟁 중 12세기에 이슬람 아이유브 왕조의 지도자 살라딘이 건설한 아질룬 성도 인기 있는 관광 명소이다.

주로 암만에 있는 도시 지역의 현대적인 엔터테인먼트, 레크리에이션, 수크(시장)도 관광객을 끌어들인다. 최근 암만, 아카바, 이르비드의 밤 문화가 부상하기 시작했으며 바, 디스코, 나이트클럽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관광객 식당, 주류 판매점, 일부 슈퍼마켓에서는 주류를 쉽게 구할 수 있다. 와디무집을 포함한 계곡과 전국 여러 지역의 하이킹 코스는 모험가들을 끌어들인다. 하이킹은 관광객과 현지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다나 생물권보전지역과 페트라와 같은 곳은 수많은 표지판이 있는 하이킹 코스를 제공한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전국을 가로지르며 여러 명소를 통과하는 650 km 길이의 하이킹 코스인 요르단 트레일은 2015년에 조성되었다. 이 트레일은 관광 부문을 활성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여러 국제 리조트를 통해 아카바와 사해 연안에서 해변 레크리에이션을 즐길 수 있다.
요르단은 1970년대부터 중동의 의료관광 목적지였다. 요르단 민간병원협회가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2010년 102개국에서 25만 명의 환자가 요르단에서 치료를 받았으며, 이는 2007년 19만 명에 비해 증가한 수치로 10억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렸다. 요르단은 세계은행이 평가한 이 지역 최고의 의료 관광 목적지이며, 세계 전체에서는 5위이다. 대부분의 환자는 해당 국가의 지속적인 내전으로 인해 예멘, 리비아, 시리아에서 온다. 의사와 의료진은 이 지역의 다양한 분쟁 지역에서 이러한 사례를 수년간 받아온 경험을 통해 전쟁 환자 치료 경험을 쌓았다.
마인 온천과 사해 모두에서 자연 치료법을 찾을 수 있다. 사해는 종종 '천연 스파'로 묘사된다. 일반 바다보다 염분이 10배 더 많아 가라앉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해의 높은 염분은 많은 피부 질환에 치료 효과가 있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이 독특한 호수는 요르단 및 외국 휴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으며, 이 지역 호텔 부문에 대한 투자를 촉진했다.
6.3. 교통 및 기반 시설

요르단은 2010년 세계 경제 포럼의 경제 경쟁력 지수에 따르면 세계에서 35번째로 우수한 인프라를 갖춘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이는 개발도상국 중 가장 높은 순위 중 하나이다. 이러한 높은 인프라 발전은 주로 팔레스타인과 이라크로 향하는 상품 및 서비스의 경유 국가로서의 역할에 의해 필요해졌다.
요르단 공공사업주택부의 자료에 따르면, 2011년 현재 도로망은 간선도로 2878 km, 지방도 2592 km, 지선도로 1733 km로 구성되어 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 건설되어 다마스쿠스에서 메카까지 이어졌던 헤자즈 철도는 향후 철도 확장 계획의 기반이 될 것이다. 현재 이 철도는 민간 활동이 거의 없으며 주로 물품 수송에 사용된다. 국가 철도 프로젝트는 현재 연구 중이며 자금 조달원을 찾고 있다. 암만에는 암만 버스와 암만 BRT를 포함한 대중교통 버스망이 있으며, 암만-자르카 BRT를 통해 인근 자르카와 연결된다.
요르단에는 3개의 상업 공항이 있으며, 모두 국제 항공편을 수용하고 발송한다. 2개는 암만에 있고, 세 번째는 아카바의 킹 후세인 국제공항이다. 암만 민간공항은 여러 지역 노선과 전세 항공편을 운항하며, 퀸 알리아 국제공항은 요르단의 주요 국제공항이자 국영 항공사인 로열 요르단 항공의 허브 공항이다. 퀸 알리아 국제공항 확장은 2013년에 7억 달러를 투입한 새 터미널과 함께 완료되어 연간 1,600만 명 이상의 승객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공항은 최첨단 공항으로 간주되며, 세계 최고의 공항 승객 만족도 벤치마크 프로그램인 공항 서비스 품질(ASQ) 조사에서 2014년과 2015년 '지역별 최고 공항: 중동'으로 선정되었다.
아카바항은 요르단의 유일한 항구이다. 2006년, 이 항구는 로이드 리스트에 의해 중동 "최고 컨테이너 터미널"로 선정되었다. 이 항구는 다른 인접 국가들의 항구 역할을 하며, 4개국과 3개 대륙 사이에 위치하고, 국내 시장의 독점적인 관문이며, 최근 개선되었기 때문에 선정되었다.
6.4. 과학 기술

과학 기술은 요르단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 경제 부문이다. 이러한 성장은 정보통신기술(ICT) 및 원자력 기술을 포함한 여러 산업에 걸쳐 일어나고 있다. 요르단은 인터넷상의 아랍어 콘텐츠의 75%를 기여한다. 2014년 ICT 부문은 84,000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했으며 GDP의 12%에 기여했다. 400개 이상의 기업이 통신, 정보 기술, 비디오 게임 개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600개 기업이 활성 기술 분야에서 운영 중이며 300개의 스타트업 기업이 있다. 요르단은 2024년 세계 혁신 지수에서 73위를 차지했다.
원자력 과학 기술도 확장되고 있다. 2016년에 시운전된 요르단 연구 및 훈련 원자로는 아르람타의 요르단 과학기술대학교에 위치한 5 MW급 훈련용 원자로이다. 이 시설은 요르단 최초의 원자로이며, 의료용 방사성 동위원소를 요르단에 공급하고 국가의 계획된 상업용 원자로를 위한 숙련된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학생들을 훈련시킬 것이다.
요르단에는 중동 유일의 입자 가속기이자 전 세계 60개 싱크로트론 방사 시설 중 하나인 중동 싱크로트론 방사광 실험 과학 및 응용 연구소(SESAME) 시설도 있다. 유네스코와 CERN의 지원을 받는 SESAME은 2017년에 개소하여 다양한 경쟁 관계에 있는 중동 국가 과학자들 간의 협력을 가능하게 한다.
6.5. 천연자원 및 에너지
요르단은 지구상에서 물이 가장 부족한 국가 중 하나이다. 1인당 연간 물 사용량이 97입방미터로, 팔켄마크 분류에 따르면 "절대적인 물 부족" 상태에 직면해 있다. 원래 부족했던 자원은 시리아 난민의 대규모 유입으로 더욱 악화되었으며, 이들 중 다수는 비공식 정착촌에서 깨끗한 물 접근 문제에 직면해 있다. 요르단은 주요 지표수 자원인 요르단강과 야르무크강을 이웃 국가들과 공유하고 있어 물 분배 결정에 복잡성을 더한다. 디시 대수층의 물과 10개의 주요 댐이 역사적으로 담수 공급에 큰 역할을 해왔다. 요르단 북동부의 자와 댐은 기원전 4천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댐이다.
천연가스는 1987년에 발견되었지만, 발견된 매장량은 약 2,300억 세제곱피트로 추정되며, 이는 석유가 풍부한 이웃 국가들에 비해 극히 적은 양이다. 이라크 국경 옆 동부 사막에 있는 리샤 유전은 하루에 약 3,500만 세제곱피트의 가스를 생산하며, 이는 인근 발전소로 보내져 요르단 전력 수요의 일부를 충당한다. 이로 인해 요르단은 거의 모든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 석유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다. 수십 년 동안의 지역 불안정으로 인해 다양한 공급원으로부터 왕국으로의 석유 및 가스 공급이 중단되어 수십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했다. 요르단은 2012년 아카바에 액화천연가스 항구를 건설하여 일시적으로 공급을 대체하는 한편, 에너지 소비를 합리화하고 에너지원을 다양화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했다.
요르단은 연간 330일 동안 햇볕을 받으며, 산악 지역에서는 풍속이 초속 7미터 이상에 달하므로 신재생 에너지는 유망한 분야임이 입증되었다. 압둘라 국왕은 2010년대에 117 MW 타필라 풍력 발전소, 53 MW 샴스마안, 103 MW 쿠웨이라 태양광 발전소를 포함한 대규모 신재생 에너지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며, 여러 추가 프로젝트가 계획되어 있다. 2019년 초까지 1090 MW 이상의 신재생 에너지 프로젝트가 완료되어 2011년 3%에서 요르단 전력의 8%에 기여했으며, 92%는 가스로 생산되었다고 보고되었다. 당초 2020년까지 신재생 에너지 발전 비율을 10%로 설정했던 정부는 2018년에 이 수치를 넘어 20%를 목표로 한다고 발표했다.
요르단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오일셰일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중부 및 북서부 지역에서 상업적으로 개발될 수 있다. 공식 수치에 따르면 매장량은 700억 톤 이상이다. 최초의 오일셰일 발전소인 아타라트 발전소는 2023년에 470 MW 용량으로 시운전되었다. 요르단은 또한 막대한 우라늄 매장량을 활용하여 원자력 에너지를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원래 계획은 1,000 MW급 원자로 2기를 건설하는 것이었으나 재정적 제약으로 폐기되었다. 현재 원자력 위원회는 대신 용량이 500 MW 미만이고 담수화를 통해 수자원을 공급할 수 있는 소형 모듈 원자로 건설을 고려하고 있다. 2018년 위원회는 요르단이 최초의 상업용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위해 여러 회사와 협상 중이며, 이는 2025년까지 완공될 예정인 헬륨 냉각 원자로라고 발표했다. 남부의 인광석 광산은 요르단을 세계 최대 생산 및 수출국 중 하나로 만들었다.
7. 사회
요르단 사회는 아랍 문화와 이슬람 전통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동시에 현대적인 변화와 다양한 외부 문화의 영향을 수용하고 있다. 가족 중심적인 가치관이 강하며, 환대 문화가 발달해 있다. 인구 구성, 민족, 언어, 종교, 교육, 보건 등 다양한 측면에서 요르단 사회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7.1. 인구
연도 | 인구 |
---|---|
1920 | 200,000 |
1922 | 225,000 |
1948 | 400,000 |
1952 | 586,200 |
1961 | 900,800 |
1979 | 2,133,000 |
1994 | 4,139,500 |
2004 | 5,100,000 |
2015 | 9,531,712 |
2018 | 10,171,480 |
2015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요르단의 인구는 9,531,712명(여성: 47%, 남성: 53%)이었다. 이 중 약 290만 명(30%)은 난민 및 불법 이민자를 포함한 비시민권자였다. 2015년 요르단의 가구 수는 1,977,534가구였으며, 가구당 평균 인원은 4.8명이었다(1979년 인구 조사에서는 가구당 6.7명). 수도 암만의 인구는 1946년 65,754명이었으나 2015년에는 400만 명을 넘어섰다.
도시화율은 약 84.1%에 달하며, 대부분의 인구가 북서부의 비옥한 지대와 주요 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인구 증가율은 비교적 높은 편이며, 이는 자연 증가와 함께 주변국의 불안정으로 인한 난민 유입의 영향도 크다.
7.2. 민족
요르단의 주요 민족 구성은 아랍인이 약 95%를 차지한다. 이들은 주로 1948년 이전부터 트란스요르단 지역의 주요 도시와 마을에 거주해 온 요르단 아랍인과, 20세기 여러 차례에 걸쳐 (특히 1948년 및 1967년 전쟁 이후) 요르단으로 피난 온 팔레스타인인 후손들로 구성된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특히 푸헤이스, 마다바, 알카라크, 아질룬과 같은 도시의 원주민 후손이거나 베두인 출신이며, 상당수는 1948년과 1967년에 주로 예루살렘, 야파, 로데, 베들레헴 등 팔레스타인 및 이스라엘 도시에서 왔다. 체르케스인과 체첸인을 합쳐 약 3%를, 아르메니아인 및 기타 소수 민족이 약 2%를 차지한다. 드루즈교도는 약 32,000명으로 추산되며, 주로 암만 서쪽과 북쪽의 시골 산악 지역에 거주한다. 아프리카계 요르단인은 약 60,000명 미만으로 대부분 요르단 남서부에 집중되어 있다. 아시리아계 요르단인은 약 10,000~15,000명으로 추산되나, 대부분 이라크 출신 난민이다.
7.2.1. 난민 문제

요르단은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 난민 유입을 경험했다. 2016년 12월 기준, 약 2,175,491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요르단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요르단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첫 번째 팔레스타인 난민 물결은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당시였으며, 1967년 6일 전쟁과 1990년 걸프 전쟁 때 정점을 이루었다. 과거 요르단은 많은 팔레스타인 난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했지만, 최근에는 드문 경우에만 시민권이 부여된다. 이들 중 약 37만 명은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 사업 기구(UNRWA) 난민 캠프에 거주하고 있다. 1967년 이스라엘이 서안 지구를 점령한 후, 요르단은 서안 지구에서 요르단으로 영구적으로 재정착하려는 시도를 막기 위해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인의 시민권을 취소했다. 요르단에 가족이 있거나 요르단 시민권을 가진 서안 지구 팔레스타인인에게는 요청 시 모든 시민권을 보장하는 노란색 카드가 발급되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최대 100만 명의 이라크인이 요르단으로 이주했으며, 대부분은 귀환했다. 2015년 기준 이라크인 수는 130,911명이었다. 그러나 많은 이라크 기독교인(대부분 아시리아인)은 요르단에 일시적 또는 영구적으로 정착했다. 또한 2006년 레바논 전쟁 이후 15,000명의 레바논인이 이주했다. 2010년 이후에는 시리아의 폭력 사태를 피해 140만 명이 넘는 시리아 난민이 요르단으로 피신했으며, 가장 큰 규모는 자타리 난민 캠프에 있다. 요르단은 시리아 난민 유입이 요르단 사회에 상당한 부담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대부분의 시리아 난민은 캠프에 살지 않음) 환대를 계속 보여주고 있다. 난민 위기는 일자리 경쟁, 수자원 및 기타 국가 제공 서비스에 대한 부담, 국가 인프라에 대한 부담 등의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4년 이슬람 국가가 모술을 점령한 후 약 12,000명의 이라크 기독교인이 요르단으로 피신했다. 수천 명의 리비아인, 예멘인, 수단인도 각국의 불안정과 폭력 사태를 피해 망명을 신청했다. 2015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시리아인 1,265,000명, 이집트인 636,270명, 팔레스타인인 634,182명, 이라크인 130,911명, 예멘인 31,163명, 리비아인 22,700명, 기타 국적자 197,385명이 요르단에 거주하고 있다.
요르단에는 약 120만 명의 불법 이주 노동자와 500만 명의 합법 이주 노동자 및 국외 거주자가 있다. 주로 중동과 동유럽 출신의 수천 명의 외국인 여성이 요르단 전역의 나이트클럽, 호텔, 바에서 일하고 있다. 미국 및 유럽 국외 거주자 커뮤니티는 수도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는 많은 국제기구와 외교 공관이 암만에 있기 때문이다.
7.3. 언어
공용어는 현대 표준 아랍어이며, 학교에서 가르치는 문어체이다. 대부분의 요르단인은 비표준 아랍어 방언 중 하나인 요르단 아랍어를 모국어로 사용한다. 요르단 수화는 청각 장애인 공동체의 언어이다. 영어는 공식적인 지위는 없지만 전국적으로 널리 사용되며, 상업 및 금융 분야의 사실상 공용어이자 교육 부문에서도 공동 공식 지위를 갖는다. 거의 모든 대학 수준의 수업이 영어로 진행되며, 거의 모든 공립학교에서 표준 아랍어와 함께 영어를 가르친다. 체첸어, 체르케스어파, 아르메니아어, 타갈로그어, 러시아어는 해당 공동체에서 널리 사용된다. 프랑스어는 많은 학교, 주로 사립학교에서 선택 과목으로 제공된다. 독일어는 점점 더 인기 있는 언어가 되고 있으며, 2005년 독일-요르단 대학교 설립 이후 더 큰 규모로 도입되었다.
7.4. 종교


수니파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종교이다. 이슬람교도는 인구의 약 95%를 차지하며, 이 중 93%가 수니파로 확인된다. 소수의 아흐마디야 이슬람교도와 일부 시아파도 있다. 많은 시아파 교도는 이라크와 레바논 난민이다. 다른 종교로 개종한 이슬람교도와 다른 종교의 선교사들은 사회적, 법적 차별에 직면한다.
요르단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공동체 중 일부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예수의 십자가형 이후인 기원후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날 기독교도는 인구의 약 4%를 차지하며, 1930년의 20%에서 감소했지만 절대적인 수는 증가했다. 이는 요르단으로의 이슬람교도 이민율 증가, 서방으로의 기독교인 이민율 증가, 이슬람교도의 높은 출생률 때문이다. 정교회 추산에 따르면 2014년 기준 기독교인은 약 25만 명이며 모두 아랍어를 사용하지만, 이 연구에는 소수 기독교 그룹과 요르단에 거주하는 수천 명의 서양, 이라크, 시리아 기독교인은 제외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사회에 잘 통합되어 있으며 높은 수준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또한 언론 분야에서 영향력이 있다.
소수 종교로는 드루즈교, 바하이교, 만다야교 등이 있다. 대부분의 드루즈교도들은 아즈라크, 시리아 국경의 일부 마을, 자르카에 거주하며, 대부분의 요르단 바하이교도들은 요르단 계곡과 접한 아다시야에 거주한다. 약 1,400명의 만다야교도들이 암만에 거주하며, 이들은 2003년 침공 이후 이라크에서 박해를 피해 왔다.
7.5. 교육

요르단의 교육 제도는 2년의 유치원 교육, 10년의 의무 기본 교육, 그리고 2년의 중등 학업 또는 직업 교육으로 구성되며, 이후 학생들은 일반 중등 교육 수료 시험(타우지히)을 치른다. 초등 교육은 무상이다. 학생들은 사립 또는 공립학교에 다닐 수 있다. 유네스코에 따르면 2015년 요르단의 문해율은 98.01%로 중동 및 아랍 세계에서 가장 높고 세계적으로도 가장 높은 수준 중 하나로 간주된다. 유네스코는 요르단의 교육 시스템을 교육에서의 성 평등 제공 부문에서 94개국 중 18위로 평가했다. 요르단은 이슬람 협력 기구(OIC) 회원국 57개국 중 인구 100만 명당 연구 개발 연구원 수가 가장 많다. 인구 100만 명당 8,060명의 연구원이 있으며, 세계 평균은 100만 명당 2,532명이다.
요르단에는 10개의 공립 대학교, 19개의 사립 대학교, 54개의 커뮤니티 칼리지가 있으며, 이 중 14개는 공립, 24개는 사립이고 나머지는 요르단군, 민방위국, 보건부, UNRWA 소속이다. 매년 20만 명 이상의 학생이 대학에 등록한다. 추가로 20,000명이 주로 미국과 유럽에서 고등 교육을 받는다. 세계 대학 웹 평가에 따르면 요르단에서 가장 순위가 높은 대학은 요르단 대학교(UJ)(세계 1,220위), 요르단 과학기술대학교(JUST)(1,729위), 하심 대학교(2,176위)이다. UJ와 JUST는 아랍 대학 중 각각 8위와 10위를 차지한다.
7.6. 보건
요르단의 평균 수명은 2017년 기준 약 74.8세였다. 주요 사망 원인은 심혈관 질환이며, 그 다음이 암이다. 지난 15년 동안 아동 예방 접종률은 꾸준히 증가하여 2002년까지 5세 미만 아동의 95% 이상이 예방 접종을 받았다. 1950년에는 상하수도가 인구의 10%에게만 제공되었으나, 2015년에는 요르단인의 98%에게 도달했다.
요르단의 의료 서비스는 이 지역 최고 수준 중 하나이다. 자격을 갖춘 의료진, 유리한 투자 환경, 경제적 안정성이 이 부문의 성공에 기여했다. 의료 시스템은 공공 및 민간 기관으로 나뉜다. 2007년 6월 1일, (최대 민간 병원인) 요르단 병원은 국제 인증 JCAHO를 획득한 최초의 종합 전문 병원이 되었다. 킹 후세인 암센터는 선도적인 암 치료 센터이다. 요르단인의 66%가 의료 보험에 가입되어 있다.
8. 문화
요르단의 문화는 아랍 및 이슬람 요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요르단은 고대 세계 세 대륙의 교차로에 위치하여 지리적 및 인구적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문화의 중요한 측면으로는 전통 요르단 음악과 의상, 스포츠에 대한 관심 등이 있다.
8.1. 예술과 박물관


많은 기관들이 요르단 예술에 대한 문화적 인식을 높이고 회화, 조각, 그래피티, 사진과 같은 분야의 예술 운동을 대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예술계는 지난 몇 년간 발전해 왔으며, 요르단은 주변 국가 예술가들의 안식처가 되어왔다. 2016년 1월, 사상 최초로 디브라는 요르단 영화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가장 큰 박물관은 요르단 박물관이다. 이곳에는 사해 두루마리 일부, 아인 가잘의 신석기 시대 석회암 조각상, 메사 석비 사본 등 요르단의 귀중한 고고학적 발견물 대부분이 소장되어 있다. 대부분의 박물관은 요르단 어린이 박물관, 순교자 기념관 및 박물관, 왕립 자동차 박물관을 포함하여 암만에 위치한다. 암만 외곽의 박물관으로는 아카바 고고학 박물관이 있다. 요르단 국립 미술관은 암만에 위치한 주요 현대 미술관이다.
요르단은 아카바 해안에 최초의 수중 군사 박물관을 공개했다. 탱크, 병력 수송 장갑차, 헬리콥터 등 여러 군용 차량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8.2. 음악과 영화
요르단의 음악계는 중동에서 인기 있는 많은 새로운 밴드와 예술가들을 배출하며 발전하고 있다. 오마르 알압달라트, 토니 카탄, 다이애나 카라존, 하니 미트와시와 같은 예술가들은 요르단 음악의 인기를 높였다. 제라쉬 축제는 인기 있는 아랍 가수들이 참여하는 연례 음악 행사이다.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자드 디라니는 국제적으로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 엘모라바, 오토스트라드, 자달, 아케르 자피르, 아지즈 마라카를 포함한 대안 아랍 록 밴드들도 아랍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성장하고 있다.
요르단 영화 산업은 비교적 작지만 꾸준히 성장하고 있으며, 특히 나지 아부 노와르 감독의 2014년 영화 디브는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오르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 영화는 베두인 문화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아라비아 사막을 배경으로 한 소년의 성장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요르단은 또한 다양한 국제 영화 제작팀에게 매력적인 촬영 장소를 제공하며, 로열 필름 커미션 - 요르단은 이러한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8.3. 요리

세계 8위의 올리브 생산국으로서, 올리브유는 요르단의 주요 식용유이다. 일반적인 애피타이저는 병아리콩을 타히니, 레몬, 마늘과 섞어 퓌레로 만든 후무스이다. 풀 메담메스도 잘 알려진 애피타이저이다. 전형적인 노동자 식사였으나, 지금은 상류층 식탁에도 오른다. 일반적인 메제에는 종종 쿠바 마클리야, 라바네, 바바 가누쉬, 타불레, 올리브, 피클 등이 포함된다. 메제는 일반적으로 포도와 아니스로 만든 레반트 알코올 음료인 아라크와 함께 제공되며, 이는 우조, 라키, 파스티스와 유사하다. 요르단 와인과 맥주도 때때로 사용된다. 알코올 음료 없이 제공되는 동일한 요리는 아랍어로 "무카빌라트"(전채)라고도 불린다.
가장 독특한 요리는 요르단의 국민 요리인 만사프이다. 이 요리는 환대의 상징이며 베두인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만사프는 장례식, 결혼식, 종교 공휴일 등 다양한 경우에 먹는다. 걸쭉한 요구르트에 삶은 고기를 곁들인 밥 한 접시에 잣과 때로는 허브를 뿌려 만든다. 오랜 전통으로 손으로 먹지만, 항상 이 전통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식사 말미에는 종종 간단한 신선한 과일이 제공되지만, 바클라바, 하리세, 카나페, 할바, 카타예프와 같은 디저트도 있으며, 카타예프는 특히 라마단을 위해 만들어지는 요리이다. 나나나 메라미야로 맛을 낸 커피와 차를 마시는 것은 흔한 일이다.
8.4. 스포츠

팀 스포츠와 개인 스포츠 모두 널리 행해지지만, 요르단은 태권도에서 가장 큰 국제적 성과를 거두었다. 하이라이트는 2016년 하계 올림픽에서 아흐마드 아부 가우쉬가 남자 68kg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요르단 최초의 올림픽 메달을 안겨준 순간이었다. 이후 태권도는 축구와 농구와 함께 요르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로 자리매김하며 세계 및 아시아 수준에서 계속해서 메달을 획득하고 있다.
축구는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은 2014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한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했으나 우루과이에 패했다. AFC 아시안컵에서는 2004년과 2011년에 8강에 진출했으며, 2023년에는 결승에서 카타르에 패해 준우승을 차지했다.

요르단은 포괄적인 스포츠 정책을 가지고 있으며 소녀와 여성들이 모든 스포츠에 참여하도록 장려하는 데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도 명성을 얻고 있으며, 2016년 3월에는 세계 랭킹 58위를 기록했다. 2016년 요르단은 6개 대륙을 대표하는 16개 팀이 참가하는 2016년 FIFA U-17 여자 월드컵을 개최했다. 이 대회는 암만, 자르카, 이르비드 세 요르단 도시의 4개 경기장에서 열렸다. 이는 중동 최초의 여자 스포츠 대회였다.
농구는 요르단이 계속해서 두각을 나타내는 또 다른 스포츠로, 2010년 FIBA 세계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으며 최근에는 중국에서 열린 2019년 월드컵에도 진출했다. 요르단은 2010년 아시안컵 결승에서 중국에 70-69로 패하여 2012년 하계 올림픽 본선 진출에 단 한 점 차로 실패하고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남자 농구 국가대표팀은 다양한 국제 및 중동 대회에 참가한다. 국내 농구팀으로는 알오르토독시 클럽, 알리야디, 자인, 알후세인, 알자지라 등이 있다.
권투, 가라테, 킥복싱, 무에타이, 주짓수도 인기가 있다. 덜 일반적인 스포츠도 인기를 얻고 있다. 럭비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으며, 럭비 연맹은 세 개의 국가대표팀을 감독하는 요르단 올림픽 위원회의 인정을 받고 있다. 사이클링은 널리 보급되지는 않았지만,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생활 방식이자 새로운 여행 방법으로 발전하고 있다. 2014년 NGO 메이크 라이프 스케이트 라이프는 암만 시내에 위치한 요르단 최초의 스케이트파크인 7힐스 스케이트파크 건설을 완료했다.
8.5. 주요 관광지 및 유적
요르단은 풍부한 역사 유적과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유명한 관광 대국이다. 대표적인 명소는 다음과 같다.
- 페트라: 붉은 사암 절벽을 깎아 만든 고대 도시로,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였다. 알카즈네 신전, 수도원(알데이르), 원형 극장 등이 유명하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이자 "세계 신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배》의 촬영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 와디럼: "달의 계곡"으로도 불리는 셔라 산맥의 사막 계곡으로, 붉은 모래와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룬다. 베두인 문화 체험, 지프 투어, 낙타 트레킹 등을 즐길 수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 《마션》 등의 배경이 되었다.
- 제라쉬: 고대 로마 시대의 도시 유적으로, "동방의 폼페이"라 불릴 만큼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하드리아누스 개선문, 타원형 광장(포룸), 열주 거리, 원형 극장 등이 남아 있다. 매년 여름 제라쉬 축제가 열린다.
- 암만 성채(جبل القلعة자발 알칼아아랍어): 수도 암만 시내 언덕에 위치한 고대 성터로, 로마 시대 헤라클레스 신전 유적, 우마이야 왕조 시대 궁궐 유적, 비잔티움 시대 교회 유적 등이 남아 있다. 암만 시내 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명소이기도 하다.
- 느보산: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지는 성산이다. 정상에는 모세 기념 교회와 놋뱀 십자가상이 있으며, 맑은 날에는 사해와 예리코, 예루살렘까지 조망할 수 있다.
- 사해: 염분 농도가 매우 높아 생물이 살기 어려운 호수이지만, 부력이 커서 물에 쉽게 뜨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미네랄이 풍부한 진흙은 피부 미용에 좋다고 알려져 있으며, 주변에 고급 리조트들이 발달해 있다.
- 마다바: "모자이크 도시"로 불리며, 특히 성 조지 그리스 정교회 바닥에 있는 6세기경 제작된 마다바 지도는 고대 성지의 모습을 담은 귀중한 유물이다.
- 아질룬 성: 12세기 살라딘이 십자군에 대항하기 위해 건설한 이슬람 성채로, 주변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 움 카이스: 고대 로마 도시 가다라 유적으로, 갈릴리 호수와 골란고원을 조망할 수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8.6. 공휴일
날짜 | 한국어 표기 | 현지어 표기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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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 양력설 | رأس السنة الميلادية아랍어 | 그레고리력 새해 |
1월 30일 | 압둘라 국왕 탄생일 | ذكرى ميلاد الملك عبد الله الثاني아랍어 | |
5월 1일 | 노동절 | عيد العمال아랍어 | |
이동 휴일 (동방 기독교력 기준) | 부활절 | 전국 공휴일은 아니며, 주로 기독교인들이 기념. | |
5월 25일 | 독립기념일 | عيد استقلال المملكة الاردنية الهاشمية아랍어 | |
6월 9일 | 압둘라 국왕 즉위 기념일 | عيد جلوس جلالة الملك عبدالله الثاني بن الحسين المعظم아랍어 | |
6월 10일 | 국군의 날 및 대아랍 반란 기념일 | عيد الجيش والثورة العربية الكبرى아랍어 | |
11월 14일 | 후세인 국왕 탄생일 | ذكرى ميلاد المغفور له الملك الحسين بن طلال طيب الله ثراه아랍어 | 후세인 국왕 서거 후 "후세인 충성의 날"로도 불림. |
12월 25일 | 크리스마스 | عيد الميلاد المجيد아랍어 | |
이동 휴일 (이슬람력 기준) | 이드 알 아드하 (희생제) | عيد الأضحى المبارك아랍어 | 아브라함의 희생을 기념하며, 메카 순례 말에 지냄. |
이동 휴일 (이슬람력 기준) | 라마단 시작일 | بداية الصيام아랍어 | |
이동 휴일 (이슬람력 기준) | 이드 알 피트르 (라마단 종료 축제) | عيد الفطر المبارك아랍어 | 라마단 종료를 기념. |
이동 휴일 (이슬람력 기준) | 이슬람력 새해 | ذكرى الهجرة النبوية الشريفة아랍어 | 헤지라 기념. |
이동 휴일 (이슬람력 기준) | 예언자 승천일 | ||
이동 휴일 (이슬람력 기준) | 예언자 무함마드 탄생일 | عيد المولد النبوي الشريف아랍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