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동유럽에 위치한 우크라이나(Украї나우크라이나우크라이나어)는 러시아와 벨라루스,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몰도바와 국경을 접하며, 남쪽으로는 흑해와 아조프해에 맞닿아 있다. 국토 면적은 60.36 만 km2로, 러시아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국가이다. 수도는 키이우이며, 하르키우, 드니프로, 오데사 등이 주요 도시에 해당한다. 우크라이나의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이며, 국민 대부분이 사용하지만, 동부와 남동부 지역에서는 러시아어도 널리 통용된다.
우크라이나 지역은 기원전 32,000년부터 인류가 거주한 흔적이 있으며, 중세 시대에는 키이우 루스의 중요한 중심지로서 동슬라브족 문화와 국가 정체성 형성에 기여했다. 그러나 몽골 제국의 침입 이후 여러 세력에 의해 분열되고 지배를 받았다. 17세기에는 코사크 헤트만국이 수립되기도 했으나, 결국 18세기에는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의 혼란 속에서 잠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으로 독립을 시도했으나, 소비에트 연방의 일부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편입되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와 함께 마침내 독립국가로 거듭났다.
독립 후 우크라이나는 자유 시장 경제로의 전환을 추진했으나, 심각한 부패와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2004년 오렌지 혁명과 2014년 유로마이단 시위 등 민주주의와 친서방 노선을 위한 사회 변혁을 겪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 병합과 돈바스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와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으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으로 전면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우크라이나의 막대한 인명 피해와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으며, 국제 사회의 광범위한 비난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대규모 지원을 이끌어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유럽 연합 가입과 NATO 가입을 추진하며 서방과의 통합을 목표로 하고 있다.
2. 어원
'우크라이나'라는 국명은 고대 동슬라브어 표현인 '오우크라이나(Оукраина)'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는 '우(Оу)'라는 전치사, '크라이(краи)'라는 '땅' 또는 '경계/변경'을 의미하는 단어, 그리고 '나(на)'라는 접미사가 합쳐진 형태이다. '크라이나(країна)'는 러시아어의 '크라이(край)'와 비슷한 어원을 가지며, 그 뜻을 풀이하면 "변방의 지대", "변방의 땅"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과거 동슬라브어에서는 국가, 땅, 영토, 변방, 끝자락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우크라이나'라는 지명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187년 《원초연대기》 이파티예프 사본의 '키이우 연대기'로, 키이우 루스의 역사적 중심지 중 하나인 페레야슬라우 공국의 영역을 지칭했다. 이후 다른 루스 연대기에서도 1189년, 1213년, 1280년 기록에 '우크라이나' 또는 '브크라이나'의 형태로 등장하며, 갈리치아, 볼히니아, 폴리샤 지역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13세기에 키이우 루스가 멸망하고 그 영토가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 왕국에 병합되면서, '우크라이나'는 병합된 지역의 지명으로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연대기와 공식 문서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광의의 '우크라이나'는 루스인이 거주하는 갈리치아, 볼히니아, 포딜리아, 브라츠라프, 키이우 지역을 포괄했으며, 협의로는 키이우 중심의 드니프로강 중류 지역을 지칭했다. 17세기 중반 코사크 헤트만국이 탄생한 이후에도 '우크라이나'라는 지명의 양의성은 동유럽 고문서에서 계속 나타났다. 그러나 헤트만국이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면서 '우크라이나'는 드니프로강 중류 지역만을 의미하게 되었고, 17세기 이후에는 루스 본토를 의미하는 '소러시아(小Russja)'와 동의어가 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 루스계 지식인들의 민족 운동이 발전하면서 '우크라이나'는 루스인이 거주하는 민족 영역을 의미하는 명칭으로 자리 잡았고, '루스인'은 '우크라이나인'이라는 민족명으로 대체되었다. 1917년 수립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에서 '우크라이나'라는 명칭이 공식적인 국명으로 처음 사용되었다.
한편, 영어권에서는 20세기 대부분 동안 우크라이나를 'the Ukraine'로 지칭했다. 이는 'ukraina'라는 단어가 '변방'을 의미하기 때문에, 마치 'the Netherlands'처럼 정관사 'the'가 자연스럽게 붙는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 선언 이후 'the Ukraine'라는 표현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표현이 되었고, 현재는 사용이 줄어들었다. 공식적인 우크라이나의 입장은 'the Ukraine'가 문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 대사인 윌리엄 테일러는 'the Ukraine'를 사용하는 것이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무시하는 함의를 내포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3. 역사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동유럽의 비옥한 스텝 지대와 흑해로 이어지는 주요 강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민족과 문명이 번성하고 교류하며 형성되었다. 이 지역은 초기 인류의 거주지이자 인도유럽어족의 발상지 중 하나로 여겨지며, 끊임없이 외세의 영향을 받아왔다.
3.1. 고대와 중세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는 고대부터 다양한 문화와 민족들의 활동 무대였다.
3.1.1. 초기 문명과 민족 이동

현 우크라이나 영토 내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류 거주 흔적은 서부 코롤레보(Korolevo)에서 발견된 140만 년 전의 석기들로, 이는 유럽 내 가장 오래된 인류 정착지 중 하나이다. 크림반도 산악 지역에서 기원전 32,000년의 그라베트 문화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4500년경에는 쿠쿠테니-트리필리아 문화가 드니프로-드니에스테르(Dnieper-Dniester) 지역을 포함한 광범위한 현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번성했다. 우크라이나는 말의 최초 길들이기 장소 중 하나로도 추정된다.
쿠르간 가설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볼가-드니프로 지역과 러시아 남부 지역은 원시 인도유럽어의 발상지로 여겨진다. 기원전 3천년기 폰토스 스텝 지역에서 시작된 초기 인도유럽 이주로 얌나야 문화 유목민의 혈통과 인도유럽어족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철기 시대에는 이란어군 계열의 키메르족, 스키타이족, 사르마티아족이 이 땅에 거주했다. 특히 기원전 700년에서 200년 사이에는 스키타이 왕국의 일부였다. 기원전 6세기부터 고대 그리스, 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의 식민 도시들이 흑해 북동부 해안을 따라 티라스, 올비아, 헤르소네소스 등지에 건설되어 서기 6세기까지 번성했다. 이후 고트족이 이 지역에 머물렀으나, 370년대부터 훈족의 지배를 받았다. 7세기에는 현재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이 고대 대불가리아의 중심지였으며, 세기 말에는 대부분의 불가르 부족이 흩어지고 하자르족이 이 지역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다.
5세기에서 6세기에는 안테스족이 우크라이나에 거주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들을 초기 슬라브족으로 보기도 한다. 현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시작된 민족 이동은 발칸반도를 거쳐 수많은 남슬라브족 국가들을 형성했다. 북쪽으로의 이동은 일리멘 호수까지 이르러 일리멘 슬라브족과 크리비치족의 등장을 이끌었다. 602년 아바르족의 침입과 안테스 연합의 붕괴 이후, 이들 대부분은 2천년기 초까지 독립된 부족으로 살아남았다.
3.1.2. 키이우 루스

키이우 루스의 건국에 대한 정확한 역사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이 국가는 현재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그리고 러시아 서부 지역의 상당 부분을 포함했다. 《원초연대기》에 따르면, 초기 루스인은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바랑기아인으로 구성되었다. 882년, 이교도 공작 올레크 베시는 키이우를 정복하고 이를 새로운 루스의 수도로 선포했다. 그러나 반노르만주의 학자들은 드니프로강 남부 지역에 거주하던 동슬라브 부족들이 이미 독립적으로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류리크 왕조를 포함한 바랑기아 엘리트는 훗날 슬라브족에 동화되었다. 키이우 루스는 서로 관련된 류리크 가문의 '크냐지'(공작)들이 통치하는 여러 공국들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종종 키이우의 소유권을 놓고 서로 다퉜다.
10세기와 11세기 동안 키이우 루스는 유럽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으며, 이 시기는 '황금기'로 알려져 있다. 이는 블라디미르 대공(980-1015)의 통치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기독교를 도입했다. 그의 아들 야로슬라우 현공(1019-1054)의 통치 기간 동안 키이우 루스는 문화적 발전과 군사력의 정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이 국가는 곧 지역 세력의 상대적 중요성이 다시 커지면서 분열되기 시작했다. 블라디미르 모노마흐(1113-1125)와 그의 아들 므스티슬라프 1세(1125-1132)의 통치 하에서 마지막 부흥기를 맞았으나, 므스티슬라프 사후 키이우 루스는 결국 독립적인 공국들로 분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이우의 소유는 수십 년 동안 큰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11세기와 12세기에는 흑해 북쪽의 폰토스 스텝 지역에서 튀르크어족을 사용하는 쿠만족과 킵차크족 유목 연합이 지배적인 세력이었다.
3.1.3. 할리치-볼히니아 대공국과 몽골 침입
13세기 중반의 몽골 침입은 키이우 루스를 황폐화시켰다. 특히 1240년 키이우 공성전 이후 키이우는 몽골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서부 영토에서는 이전에 할리치 공국과 볼히니아 공국이 성장했으며, 이들이 합쳐져 갈리치아-볼히니아 대공국을 형성했다. 로만 대공의 아들인 다닐로는 볼히니아, 갈리치아, 그리고 키이우를 포함한 남서부 루스의 대부분을 재통합했다. 그는 1253년 교황 특사에 의해 최초의 루테니아 국왕으로 즉위했다.
3.1.4. 외세 지배의 시작

1349년, 갈리치아-볼히니아 전쟁 이후 이 지역은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 사이에 분할되었다. 13세기 중반부터 15세기 후반까지 제노바 공화국은 흑해 북부 해안에 수많은 식민지를 건설하고 이를 공화국 대표인 영사가 이끄는 대규모 상업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1430년, 포딜리아 지역은 폴란드에 편입되었으며, 현대 우크라이나의 영토는 폴란드인들에 의해 점점 더 많이 정착되었다. 1441년, 칭기스 칸의 후손인 하치 1세 기라이는 크림반도와 주변 스텝 지역에 크림 칸국을 세웠다. 칸국은 타타르족의 노예 사냥을 조직했다. 다음 세기 동안 크림 노예 무역은 이 지역에서 약 200만 명을 노예로 만들었다.
1569년, 루블린 연합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수립되었고, 우크라이나 영토의 대부분은 리투아니아에서 폴란드 왕국으로 편입되어 사실상 폴란드 영토가 되었다. 폴란드화의 압력으로 인해 많은 루테니아 귀족들이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폴란드 귀족 사회에 편입되었으며, 다른 이들은 새로 창설된 루테니아 연합 가톨릭교회에 가입했다.
3.2. 근세
코사크 시대부터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기까지의 역사는 우크라이나 민족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시기였다.
3.2.1. 코사크와 헤트만 국가

루테니아 귀족들 중 토착 보호자를 잃은 농민들과 도시민들은 점차 성장하는 자포리자 코사크에게 보호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17세기 중반, 드니프로 코사크와 루테니아 농민들에 의해 코사크 군사 준국가인 자포리자 시치가 형성되었다. 폴란드는 이 인구에 대해 거의 실질적인 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했지만, 코사크를 튀르크인과 타타르족에 대항하는 데 유용하게 여겼고, 때로는 양자가 군사 작전에서 동맹을 맺기도 했다. 그러나 폴란드 귀족들(그중 다수는 폴란드화된 루테니아 귀족)에 의한 루테니아 농민들의 가혹한 농노화 지속과 정교회 탄압은 코사크를 소외시켰다. 코사크는 스스로를 적이자 점령자로 인식하는 자들, 특히 지역 대표를 포함한 가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주저하지 않고 무기를 들었다.
1648년,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폴란드 국왕에 대항하여 흐멜니츠키 봉기를 이끌었으며, 이는 지역 주민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흐멜니츠키는 코사크 헤트만국을 세웠고, 이 국가는 1764년(일부 자료에 따르면 1782년까지)까지 존속했다. 1651년 베레스테치코 전투에서 흐멜니츠키가 대패한 후, 그는 러시아 차르에게 도움을 청했다. 1654년, 흐멜니츠키는 페레야슬라프 조약을 통해 러시아 군주에 대한 충성을 인정하며 러시아와의 군사적, 정치적 동맹을 맺었다.
그의 죽음 이후, 헤트만국은 러시아, 폴란드, 크림 칸국, 오스만 제국, 그리고 코사크들 사이에서 헤트만국 통제권을 놓고 "폐허(1657-1686)"로 알려진 참혹한 30년 전쟁을 겪었다. 1686년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의 영원 평화 조약은 헤트만국의 영토를 양국 간에 분할했으며, 폴란드가 주권을 주장했던 부분은 드니프로 강 서쪽의 우크라이나로 축소되었다. 1686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디오니시오스 4세의 공의회 서한을 통해 키이우 수도권은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에 편입되어 키이우 수도권은 모스크바의 권한 아래 놓이게 되었다. 코사크 헤트만 이반 마제파(1639-1709)는 러시아의 종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북방 전쟁(1700-1721)에서 스웨덴에 합류하며 쇠퇴를 되돌리려 했으나, 헤트만국의 수도 바투린은 1708년에 약탈당하고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패배했다.
폴타바 전투 이후 헤트만국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제한되었다. 1764년에서 1781년 사이, 예카테리나 2세는 중앙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을 러시아 제국에 편입시키고 코사크 헤트만국과 자포리자 시치를 폐지했으며, 마지막 대규모 코사크 봉기인 콜리이우쉬치나를 진압하는 데 관여했다. 1783년 러시아에 의한 크림반도 병합 이후, 새로 획득한 영토인 노보로시야는 러시아인 정착에 개방되었다. 차르 전제정은 러시아화 정책을 수립하여 우크라이나어 사용을 억압하고 우크라이나 민족 정체성을 억제했다. 현 우크라이나의 서부 지역은 1795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멸망한 후 러시아와 합스부르크가가 통치하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의해 분할되었다.
3.2.2.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하의 우크라이나
19세기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부흥하는 시기였다. 도시화와 현대화가 진행되고 낭만주의 민족주의 경향이 확산되면서 민족 부흥과 사회 정의를 위한 우크라이나 지식인들이 등장했다. 농노 출신의 시인 타라스 셰우첸코(1814-1861)와 정치 이론가 미하일로 드라호마노프(1841-1895)가 성장하는 민족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받는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에서는 민족주의 발전 조건이 비교적 관대했지만, 러시아령 우크라이나(역사적으로 "소러시아" 또는 "남러시아"로 알려짐)에서는 심각한 제약을 받았다. 1876년에는 엠스 칙령으로 우크라이나어 출판이 거의 전면적으로 금지되기까지 했다.
우크라이나는 다른 러시아 제국 지역과 마찬가지로 1861년까지 농노제가 유지되면서 서유럽 대부분의 지역보다 늦게 산업혁명에 합류했다. 새로 발견된 돈바스 지역의 탄광 주변이나 오데사, 키이우와 같은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우크라이나는 주로 농업 및 자원 채취 경제에 머물렀다. 오스트리아령 우크라이나 지역은 특히 빈곤하여 수십만 명의 농민들이 캐나다, 미국, 브라질과 같은 나라로 이주하여 광범위한 우크라이나 디아스포라를 형성했다. 일부 우크라이나인들은 극동 지역에도 정착했다. 189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시베리아에 223,000명, 중앙아시아에 102,000명의 우크라이나계 주민이 있었다. 1906년 시베리아 횡단 철도 개통 이후 10년 동안 추가로 160만 명이 동부로 이주했다. 우크라이나계 주민이 거주하는 극동 지역은 "녹색 우크라이나"로 알려지게 되었다.
3.3. 근현대
20세기 초 독립 시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현대사를 다룬다.
3.3.1. 제1차 세계 대전과 독립 운동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우크라이나는 혼란에 빠졌고, 우크라이나 영토 내에서의 전투는 1921년 말까지 지속되었다. 처음에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중앙 동맹국을 위해 싸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삼국 협상의 일원인 러시아 제국군에 속하여 분열되었다. 러시아 제국이 붕괴하면서 갈등은 우크라이나 독립 전쟁으로 발전했으며, 우크라이나인들은 붉은 군대, 백군, 흑군, 녹색 군대와 함께 또는 그들에 대항하여 싸웠고, 폴란드, 헝가리(자카르파탸에서), 독일도 여러 차례 개입했다.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가 처음으로 선포한 좌파 성향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UNR)의 독립 국가 수립 시도는 극도로 불안정한 정치 및 군사적 환경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이 공화국은 파울로 스코로파드스키가 주도한 쿠데타로 인해 처음으로 전복되어 독일의 보호 아래 우크라이나 국가를 형성했고, 우크라이나 디렉토리 하의 UNR 복원 시도는 결국 우크라이나군이 다른 세력에 의해 정기적으로 압도당하면서 실패했다. 단명했던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 후추리 공화국도 나머지 우크라이나와 합류하지 못했다.
분쟁의 결과는 서부 우크라이나 지방을 병합한 폴란드 제2공화국의 부분적인 승리와, 나머지 세력을 축출하고 결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을 수립하는 데 성공한 친소련 세력의 광범위한 승리였다. 한편, 현대의 부코비나는 루마니아 왕국에 점령되었고, 자카르파탸는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에 자치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분쟁은 광범위한 러시아 내전의 일부로, 동부 및 중앙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구 러시아 제국 전체를 황폐화시켰다. 이 전투로 인해 1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하고 수십만 명이 난민이 되었으며, 1921년의 기근은 동부 지방을 더욱 강타했다.
3.3.2. 전간기 (소비에트 시대 초기)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이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성립과 초기 소비에트 통치 정책을 다룬다.
3.3.3.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 이후,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군은 폴란드 영토를 분할했다. 이에 따라 동부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는 우크라이나 인구를 포함하여 우크라이나에 편입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우크라이나 민족은 통일되었다. 추가적인 영토 획득은 1940년에 이루어졌는데, 이때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비에트 연방이 루마니아로부터 할양을 강요한 베사라비아의 북부 및 남부 지역, 북부 부코비나, 그리고 헤르차 지역을 편입했다. 다만, 몰도바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서부 지역은 새로 창설된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넘겨졌다. 이러한 소련의 영토 획득은 파리 평화 조약 (1947)에 의해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다.
독일 국방군은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며 소비에트 연방을 침공했고, 거의 4년간의 총력전이 시작되었다. 추축국은 초기에 붉은 군대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격했다. 1941년 키이우 전투에서는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키이우는 "영웅 도시"로 불렸다. 이 전투에서 60만 명이 넘는 소련군 병사(또는 소련 서부 전선의 4분의 1)가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으며, 많은 이들이 심한 학대를 겪었다. 키이우 점령 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부분은 자원 착취와 궁극적인 독일인 정착을 목표로 우크라이네 국가판무관부 내에 조직되었다. 1939년에야 소련에 편입된 일부 서부 우크라이나인들은 처음에는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지만, 나치가 스탈린주의 정책에 대한 불만을 활용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으면서 환영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신, 나치는 집단농장 체제를 유지하고, 유대인에 대한 대량 학살 정책을 시행했으며, 수백만 명을 독일로 강제 이주시켰고, 독일의 식민지화를 위해 인구 감소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들은 드니프로강을 통한 식량 운송을 봉쇄했다.
대다수의 우크라이나인들이 붉은 군대 또는 소련 저항 세력과 함께 싸웠지만, 서부 우크라이나에서는 독립적인 우크라이나 봉기군(UPA, 1942) 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지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의 무장 조직으로 창설되었다. OUN과 UPA는 모두 우크라이나 민족이 다수를 이루는 영토 내에서 독립된 우크라이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비록 이것이 나치 독일과의 갈등을 초래했지만, 때로는 OUN의 멜니크 파가 나치 세력과 동맹을 맺기도 했다. 1943년 중반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UPA는 볼히니아와 동부 갈리치아 지역에서 폴란드인들을 집단 학살하여 약 10만 명의 폴란드 민간인을 살해했으며, 이는 보복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조직적인 학살은 OUN이 국경 내에 폴란드 소수 민족이 없는 동질적인 우크라이나 국가를 건설하고, 전후 폴란드 국가가 전쟁 전 폴란드 영토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는 것을 막기 위한 시도였다. 전쟁 후 UPA는 1950년대까지 소련과 계속 싸웠다. 동시에 또 다른 민족주의 운동인 우크라이나 해방군은 나치와 함께 싸웠다.
총 450만 명에서 700만 명에 달하는 우크라이나계 민족이 소련군에 참전한 것으로 추정되며, 1944년에는 최대 50만 명에 달했던 친소 파르티잔 유격대의 절반도 우크라이나인이었다. 우크라이나 봉기군의 병력은 불확실하며, 15,000명에서 1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대부분의 전투는 동부 전선에서 일어났다. 전쟁 중 우크라이나 인구가 입은 총 손실은 600만 명으로 추정되며, 여기에는 아인자츠그루펜에 의해 학살된 150만 명의 유대인(때로는 현지 협력자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이 포함된다. 소련군 총 사망자 860만 명 중 140만 명이 우크라이나인이었다. 나치즘에 대한 승리의 날은 11개의 우크라이나 국경일 중 하나로 기념된다.
3.3.4. 냉전기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비에트 연방 내 우크라이나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과 러시아화 정책 지속, 반체제 운동 등을 다룬다.
공화국은 전쟁으로 심하게 파괴되었고, 복구에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700개 이상의 도시와 마을, 28,000개의 마을이 파괴되었다. 상황은 1946년에서 1947년 사이의 기근으로 더욱 악화되었는데, 이는 가뭄과 전쟁으로 인한 인프라 파괴로 발생했으며, 최소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1945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얄타 회담의 특별 협정에 따라 유엔의 창립 회원국이 되었으며, 벨라루스와 함께 독립국이 아니었음에도 유엔에서 투표권을 가졌다. 더욱이 우크라이나는 자카르파탸주를 병합하면서 다시 국경을 확장했으며, 전후 인구 이동으로 인해 인구가 훨씬 더 동질화되었다. 대부분의 인구 이동은 독일인 강제 추방 (1944-1950)이나 크림 타타르족의 추방과 같이 강제적인 것이었다. 1953년 1월 1일 기준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은 성인 "특별 추방자" 중 러시아인 다음으로 많아 전체의 20%를 차지했다.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니키타 흐루쇼프가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고, 탈스탈린화와 흐루쇼프 해빙 정책을 시작했다. 그의 소련 지도자 재임 기간 동안 크림주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이양되었는데, 공식적으로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우호적인 선물과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다. 이는 우크라이나 영토의 최종 확장으로, 오늘날까지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우크라이나 국경의 기초가 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에서 가장 중요한 공화국 중 하나였으며, 이는 1964년부터 1982년까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을 지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비롯한 많은 소련 고위직을 우크라이나인이 차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그와 그의 우크라이나 주재 임명자인 볼로디미르 시체르비츠키는 광범위한 우크라이나의 러시아화를 주도했으며, "60년대 인물들"로 알려진 새로운 세대의 우크라이나 지식인들을 탄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0년까지 공화국은 전전 수준의 산업 및 생산량을 완전히 초과했다.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는 곧 산업 생산에서 유럽의 선두 주자가 되었으며, 소련의 군수 산업과 첨단 기술 연구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지만, 중공업은 여전히 과도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발전에 따른 에너지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력 및 원자력 프로젝트에 투자했다. 그러나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원자로가 폭발하여 역사상 최악의 원자로 사고인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발생했다.
3.3.5. 독립과 국가 재건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로 알려진 제한적인 공공 생활 자유화 정책을 추진했으며, 침체된 경제를 개혁하려고 시도했다. 후자의 노력은 실패했지만, 소련의 민주화는 우크라이나인들을 포함한 소수 민족들 사이에서 민족주의적, 분리주의적 경향을 부추겼다. 이른바 '주권의 대행진'의 일환으로, 1990년 7월 16일 새로 선출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 소비에트는 우크라이나 국가 주권 선언을 채택했다. 모스크바에서 일부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고르바초프를 축출하려는 1991년 소련 쿠데타 시도가 실패한 후, 1991년 8월 24일 완전한 독립이 선포되었다. 이는 12월 1일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투표에서 우크라이나 유권자의 92%의 찬성으로 승인되었다.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대통령인 레오니드 크라우추크는 벨라베자 합의에 서명하고 우크라이나를 훨씬 더 느슨한 형태의 독립국가연합(CIS)의 창립 회원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CIS 창립 협정에 비준하지 않아 정식 회원국이 되지 않았다. 이 문서들은 12월 26일 공식적으로 해체된 소련의 운명을 확정했다.
우크라이나는 초기에 다른 소련 공화국들과 비교하여 유리한 경제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지만, 해체 당시에는 더 가난한 소련 공화국 중 하나였다. 그러나 시장 경제로의 전환 과정에서, 다른 거의 모든 구 소련 공화국들보다 더 깊은 경제 침체를 겪었다. 1991년에서 1999년 사이의 경기 침체 동안, 우크라이나는 GDP의 60%를 잃었고, 1993년에는 10,000%에 달하는 초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은 그해 말에 새로운 통화인 흐리우냐의 가치가 급락하면서 비로소 안정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의 경제 정책 유산은 국가 자산의 대규모 민영화로, "과두정치인"으로 알려진 매우 강력하고 부유한 개인 계층을 탄생시켰다. 이후 우크라이나 경제는 대침체, 2014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그리고 2022년 2월 24일부터 시작된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으로 인해 일련의 급격한 경기 침체를 겪었다. 독립 이후 전반적으로 우크라이나 경제는 만연한 부패와 부실 경영으로 인해 저조한 성과를 보였으며, 특히 1990년대에는 시위와 조직적인 파업으로 이어졌다. 2010년대에는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의미 있는 경제 회복이 저해되었고, 2020년에 시작된 우크라이나의 코로나19 범유행에 대한 노력은 낮은 백신 접종률과 이후 진행 중인 침공으로 인해 훨씬 더 어려워졌다.
3.3.6. 21세기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현재까지 우크라이나의 주요 정치, 사회적 변화와 도전 과제들을 설명한다.
정치적 관점에서 우크라이나의 정치를 정의하는 특징 중 하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크라이나와 서방 및 러시아 간의 관계, 그리고 고전적인 좌우 정치 스펙트럼이라는 두 가지 문제로 나뉘어 있었다는 것이다. 초대 대통령인 레오니드 크라우추크와 레오니드 쿠치마는 우크라이나의 경쟁적인 비전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경향을 보였지만, 빅토르 유셴코는 친서방적이었고,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친러시아적이었다. 야누코비치에 대한 두 번의 주요 시위가 있었다. 2004년 오렌지 혁명은 그에게 유리하게 조작된 선거 결과에 항의하여 수만 명의 사람들이 시위를 벌였으며 (결국 유셴코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013-2014년 겨울에는 야누코비치가 유럽 연합-우크라이나 연합 협정 서명을 거부한 것에 반대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유로마이단에 모였다. 2014년 2월 21일 시위가 끝날 무렵, 그는 우크라이나를 떠났고, '존엄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사건으로 의회에 의해 해임되었지만, 러시아는 임시 친서방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이를 '군사 정권'이라고 부르며 미국이 후원한 쿠데타로 규탄했다.
3.4. 크림반도 강제 병합과 돈바스 전쟁 (2014년~2022년)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에도 불구하고, 2014년 2월 말부터 3월 초까지 러시아는 세바스토폴 해군 기지에 주둔한 해군 병력과 소위 "리틀 그린 맨"을 이용해 크림반도를 병합했다. 이후, 친러시아 소요 사태는 돈바스 전쟁으로 이어져 분리주의 세력과 러시아 간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한스크 인민공화국이라는 분리주의 세력의 지원을 받는 러시아와의 갈등은 유동적이었으나, 2014년 8월 24일부터 러시아군이 돈바스 지역에 직접적으로 침공을 시작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군을 2015년 2월에 확정된 전선으로 밀어붙였다. 즉, 우크라이나군이 데발체베에서 철수한 이후였다. 분쟁은 2022년 2월 24일 이른 아침까지 일종의 동결 분쟁 상태로 남아있었다.
3.5. 2022년 러시아의 전면 침공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하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역에 미사일 공격을 감행하고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즉시 러시아와의 단교를 발표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러시아의 침공은 국제 사회의 강력한 규탄과 광범위한 제재를 불러왔다.
전쟁 발발 1년 후,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의 국제적으로 인정된 영토 중 약 17%를 통제하게 되었다. 이는 루한스크주의 94%, 헤르손주의 73%, 자포리자주의 72%, 도네츠크주의 54% 및 크림반도 전체를 포함한다. 그러나 러시아는 초기 계획에 실패했으며, 우크라이나군은 역공을 통해 일부 영토를 탈환하기도 했다.
이 전쟁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엄청난 인도주의적 위기를 초래했다. 수백만 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이 국내외로 피난했으며, 도시와 인프라가 대규모로 파괴되었다. 국제 사회는 우크라이나에 대규모 군사 및 인도적 지원을 제공했으며, 국제형사재판소는 러시아의 전쟁 범죄 혐의를 조사하고 있다.
군사적 갈등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정부의 정책은 서방 지향으로 바뀌었다. 야누코비치가 우크라이나를 떠난 직후, 우크라이나는 2014년 6월에 유럽 연합 연합 협정에 서명했고, 3년 후에는 국민들에게 유럽 연합 국가로의 무비자 여행이 허용되었다. 2019년 1월에는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모스크바로부터 독립된 교회로 인정받았는데, 이는 1686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결정을 뒤집고 우크라이나 내 모스크바의 영향력에 또 다른 타격을 주었다. 마침내 러시아와의 전면전 와중에 우크라이나는 2022년 6월 23일 유럽 연합의 후보국 지위를 획득했다. 2023년 초에는 정부 개편 과정에서 여러 차관 및 지역 수장이 사임하면서 광범위한 반부패 운동이 시작되었다.
4. 지리
우크라이나는 동유럽 평원에 주로 위치하며, 지형, 기후, 자연환경 등이 다양하다.
4.1. 지형과 수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다음으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국가이며, 유럽 전체에 걸쳐 있는 국가 중 가장 크다. 북위 44°에서 53°, 동경 22°에서 41° 사이에 위치하며, 면적은 60.36 만 km2이고 해안선 길이는 2782 km이다.
우크라이나의 지형은 대부분 비옥한 스텝(나무가 거의 없는 평원)과 고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드니프로강, 도네츠강, 드니에스테르강, 남부 부흐강과 같은 강들이 흑해와 더 작은 아조프해로 남쪽으로 흐른다. 남서쪽으로는 다뉴브강 삼각주가 루마니아와의 국경을 이룬다. 우크라이나의 지역들은 고지대부터 저지대까지 다양한 지리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국내 유일한 산맥은 서부의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최고봉인 호베를라산은 2061 m 높이이며, 남쪽 해안을 따라서는 크림 산맥이 있다.
우크라이나에는 볼히니아-포딜리아 고원(서부) 및 드니프로 강 서안의 드니프로 고원과 같은 고지대도 여러 곳 있다. 동쪽에는 중앙 러시아 고원의 남서부 산맥이 있으며, 이곳을 따라 러시아와의 국경이 이어진다. 아조프해 근처에는 도네츠 능선과 아조프 고원이 있다. 산에서 녹은 눈은 강을 따라 흘러 우크라이나의 폭포를 형성한다.
우크라이나의 주요 자연 자원으로는 리튬, 천연가스, 고령토, 목재, 그리고 풍부한 경작지가 있다. 우크라이나는 여러 환경 문제에도 직면해 있다. 일부 지역은 충분한 식수 공급이 부족하며, 대기 및 수질 오염, 삼림 벌채, 그리고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한 북동부 지역의 방사능 오염이 발생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환경 피해는 '생태학살'로 묘사되고 있으며, 카호우카 댐의 파괴, 심각한 오염, 수백만 톤의 오염된 잔해 복구에는 500.00 억 USD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
4.2. 기후
우크라이나는 중위도에 위치하며, 남부 해안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대륙성 기후를 보인다. 남부 해안은 냉대 반건조 기후와 온난 습윤 기후의 특징을 나타낸다. 연평균 기온은 북부에서 5.5 °C~7 °C, 남부에서 11 °C~13 °C이다. 강수량은 서부와 북부에서 가장 많고, 동부와 남동부에서 가장 적다. 서부 우크라이나, 특히 카르파티아 산맥에서는 연간 약 120 cm의 강수량이 관측되며, 크림반도와 흑해 연안 지역은 약 40 cm의 강수량을 보인다.
주요 강 유역의 물 가용성은 기후 변화로 인해 특히 여름철에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농업 부문에 위험을 초래한다. 농업에 대한 기후 변화의 영향은 주로 스텝 기후를 가진 남부 지역에서 가장 크게 느껴진다. 북부 지역에서는 일부 작물이 더 긴 생장 기간의 혜택을 볼 수도 있다. 세계은행은 우크라이나가 기후 변화에 매우 취약하다고 밝혔다.
4.3. 생물 다양성

우크라이나는 6개의 육상 생태구인 중앙 유럽 혼합림, 크림 반자연림, 동유럽 삼림 스텝, 판노니아 혼합림, 카르파티아 산지 침엽수림, 폰토스 스텝을 포함한다. 침엽수림이 활엽수림보다 다소 많다. 가장 숲이 우거진 지역은 북서부 폴리샤이며, 소나무, 참나무, 자작나무가 있다.
약 45,000종의 동물(대부분 무척추동물)이 서식하며, 약 385종의 멸종 위기종이 우크라이나 레드 데이터 북에 등재되어 있다.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는 7000 sqkm 이상을 차지하며, 다뉴브 삼각주는 보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4.4. 주요 도시
우크라이나에는 457개의 도시가 있으며, 이 중 176개는 주급 도시, 279개는 더 작은 구급 도시, 그리고 2개는 특별시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886개의 도시형 정착지와 28,552개의 마을이 있다.
순위 | 도시 | 행정 구역 | 인구 |
---|---|---|---|
1 | 키이우 | 키이우 (특별시) | 2,952,301 |
2 | 하르키우 | 하르키우주 | 1,421,125 |
3 | 오데사 | 오데사주 | 1,010,537 |
4 | 드니프로 |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주 | 968,502 |
5 | 도네츠크 | 도네츠크주 | 901,645 |
6 | 르비우 | 르비우주 | 717,273 |
7 | 자포리자 | 자포리자주 | 710,052 |
8 | 크리비리흐 |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주 | 603,904 |
9 | 세바스토폴 | 세바스토폴 (특별시) | 479,394 |
10 | 미콜라이우 | 미콜라이우주 | 470,011 |
11 | 마리우폴 | 도네츠크주 | 425,681 |
12 | 루한스크 | 루한스크주 | 397,677 |
13 | 빈니차 | 빈니차주 | 369,739 |
14 | 심페로폴 | 크림 자치 공화국 | 340,540 |
15 | 마키이우카 | 도네츠크주 | 338,968 |
16 | 체르니히우 | 체르니히우주 | 282,747 |
17 | 폴타바 | 폴타바주 | 279,593 |
18 | 헤르손 | 헤르손주 | 279,131 |
19 | 흐멜니츠키 | 흐멜니츠키주 | 274,452 |
20 | 체르카시 | 체르카시주 | 269,836 |
5. 정치
우크라이나는 의원 내각제와 대통령제가 혼합된 이원집정부제 공화국으로, 입법, 행정, 사법부가 분리되어 있다.
5.1. 정부 구조
우크라이나의 통치 구조인 대통령 중심의 공화제와 삼권분립(입법, 행정, 사법)의 원칙을 설명한다.
5.1.1. 대통령과 행정부

대통령은 직접 선거로 5년 임기로 선출되며, 국가의 공식적인 수반이다.
대통령은 국방부 장관과 외교부 장관을 의회의 승인을 받아 지명할 권한을 보유하며, 또한 검찰총장과 우크라이나 보안원 원장을 임명할 권한도 가진다.
5.1.2. 입법부 (최고 라다)
우크라이나의 입법부는 450석 규모의 단원제 의회인 최고 라다로 구성된다. 최고 라다는 주로 행정부와 우크라이나 내각의 구성을 책임지며, 우크라이나의 총리가 수장이다.
5.1.3. 사법부

우크라이나 법에 따라 2002년부터 법원은 법적, 재정적, 헌법적 자유를 누리고 있다. 판사는 해임으로부터 대체로 잘 보호된다(중대한 위법 행위 제외). 법원 판사는 초기에 5년 임기로 대통령령에 의해 임명되며, 이후 우크라이나 최고회의가 종신직으로 그들의 직위를 확정한다. 아직 문제는 남아있지만, 이 시스템은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크게 개선된 것으로 평가된다. 우크라이나 대법원은 독립적이고 공정한 기관으로 간주되며, 여러 차례 우크라이나 정부에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월드 저스티스 프로젝트는 연례 법치주의 지수에서 우크라이나를 조사 대상 99개국 중 66위로 평가했다.
우크라이나의 검사들은 대부분의 유럽 국가보다 더 큰 권한을 가지며, 법치를 통한 민주주의를 위한 유럽 위원회에 따르면 "검찰청의 역할과 기능은 유럽 평의회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 유죄 판결률은 99%를 초과하며, 이는 소련의 유죄 판결률과 비슷하고, 피고들은 종종 재판 전에 장기간 구금된다.
2010년,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현재의 혼란을 정리하고 법원 조직에 관한 법률을 채택하는" 방법에 대한 권고를 할 전문가 그룹을 구성했다. 하루 뒤 그는 "더 이상 이런 사법 시스템으로 우리나라를 망신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의 형사 사법 시스템과 교도소 시스템은 여전히 상당히 징벌적이다.
2010년 이후, 당사자들의 상호 동의에 따라 재판은 러시아어로 진행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어나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없는 시민들은 자신의 모국어나 통역 서비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전에는 모든 재판 절차가 우크라이나어로 진행되어야 했다.
사법 집행 기관은 우크라이나 내무부의 통제를 받는다. 이들은 주로 우크라이나 국가 경찰과 우크라이나 국경 수비대, 우크라이나 해상 경비대와 같은 다양한 특수 부대 및 기관으로 구성된다. 사법 집행 기관, 특히 경찰은 2004년 오렌지 혁명 당시 시위 진압에 있어 과도한 대응으로 비판을 받았다. 수천 명의 경찰관이 수도 전역에 배치되어 주로 시위대가 국가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막고 필요한 경우 신속 대응군을 제공했지만, 대부분의 경찰관은 무장하고 있었다.
5.2. 헌법
우크라이나 헌법은 1996년 6월 28일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제5차 회의에서 채택 및 비준되었다. 헌법은 가능한 450표 중 315표(최소 300표)로 통과되었다. 우크라이나의 모든 다른 법률 및 기타 규범적 법률 행위는 헌법에 부합해야 한다. 특별한 입법 절차를 통해 헌법을 개정할 권한은 오로지 의회에만 있다. 헌법을 해석하고 법률이 헌법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은 우크라이나 헌법재판소이다. 1996년 이후, 헌법의 날은 6월 28일에 공휴일로 기념된다. 2019년 2월 7일, 최고 라다는 우크라이나의 전략적 목표를 유럽 연합 및 NATO 가입으로 명시하도록 헌법을 개정하는 데 투표했다.
5.3. 행정 구역
우크라이나의 행정 구역 체계는 국가가 단일 국가임을 반영하며 (국가 헌법에 명시), 각 단위에 대해 통일된 법률 및 행정 제도를 적용한다.
2014년 러시아가 병합한 세바스토폴과 크림 자치 공화국을 포함하여, 우크라이나는 27개의 지역으로 구성된다. 이 중 24개는 주(область)이며, 1개는 자치 공화국(크림 자치 공화국), 그리고 2개는 특별시인 수도 키이우와 세바스토폴이다. 24개 주와 크림 자치 공화국은 136개의 구(raion우크라이나어 (라틴문자))와 지역적 중요성을 지닌 도시 자치체, 즉 2단계 행정 단위로 세분된다.
우크라이나의 거주지는 도시와 농촌의 두 가지 범주로 나뉜다. 도시 거주지는 다시 도시와 도시형 정착지(소련의 행정적 발명품)로 세분되며, 농촌 거주지는 마을과 정착지(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로 구성된다. 모든 도시는 그 중요성(예: 키이우와 세바스토폴과 같은 국가적 중요성, 각 주 또는 자치 공화국 내의 지역적 중요성, 또는 나머지 도시들의 구급 중요성)에 따라 일정 수준의 자치권을 가진다. 도시의 중요성은 인구, 사회경제적 및 역사적 중요성, 인프라 등 여러 요인에 따라 결정된다.
주 | ||||||||||||||||||||||||||||||||||||||||||||
---|---|---|---|---|---|---|---|---|---|---|---|---|---|---|---|---|---|---|---|---|---|---|---|---|---|---|---|---|---|---|---|---|---|---|---|---|---|---|---|---|---|---|---|---|
|- | 자치 공화국 | 특별시 | ||||||||||||||||||||||||||||||||||||||||||
| style="vertical-align:top;"|
|} |
날짜 | 명칭 | 현지 명칭 | 비고 |
---|---|---|---|
1월 1일 | 새해 | Новий рік우크라이나어 | |
3월 8일 | 국제 여성의 날 | Міжнародний жіночий День우크라이나어 | |
5월 1일 | 노동절 | День міжнародної солідарності трудящих우크라이나어 | |
이동 축일 | 부활절 | Великдень우크라이나어 | |
5월 8일 | 나치즘에 대한 승리의 날 | День пам'ᑎДень пам'яті та перемоги над нацизмом у Другій світовій війні우크라이나어 | 2023년부터 5월 9일에서 변경 |
이동 축일 | 삼위일체 대축일 | Трійця우크라이나어 | |
6월 28일 | 헌법의 날 | День Конституції우크라이나어 | |
8월 24일 | 우크라이나 독립 기념일 | День Незалежності우크라이나어 | |
12월 25일 | 크리스마스 | Різдво우크라이나어 | 2023년부터 1월 7일에서 변경 |
크리스마스는 러시아와 동일하게 1월 7일(율리우스력)에 지켜졌으나, 2023년 7월 28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서명으로 12월 25일(수정 율리우스력)로 변경하는 법률이 발효되었다. 크리스마스의 '탈러시아화'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으로 가속화되었고,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2022년 12월 24일 다른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을 결정하는 교회력 개혁을 위한 실무 그룹 설치에 합의했다. 독소전 승리의 날인 5월 9일은 2022년부터 공휴일이 아니게 되었다. 다른 나라의 유럽 전승 기념일인 5월 8일은 우크라이나에서 "추모와 화해의 날"로 지정되어 있다. 2024년 이후 5월 8일은 대독일 전승 기념일로 공휴일이 되며, 5월 9일은 유럽의 날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