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바베이도스는 카리브해 동쪽 끝에 위치한 섬나라로, 소앤틸리스 제도의 최동단에 자리 잡고 있다. 수도는 브리지타own이며, 국토 전체가 산호초로 이루어져 비교적 평탄한 지형을 이룬다. 바베이도스는 풍부한 역사와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진 곳으로,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으나 1966년 독립하였고, 2021년 11월 30일에는 공화국으로 전환하여 대통령을 국가원수로 하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했다. 주요 경제 기반은 역사적으로 사탕수수 재배였으나, 현재는 관광업, 금융 서비스업 등으로 다변화되었다. 높은 인간 개발 지수와 평균 수명을 자랑하며, 카리브해 지역에서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발전된 국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크리켓은 국민 스포츠로 매우 인기 있으며, 리한나와 같은 세계적인 예술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2. 국명
바베이도스라는 국명은 포르투갈어 os barbados오스 바르바도스포르투갈어 또는 스페인어 los barbados로스 바르바도스스페인어에서 유래했으며, 두 표현 모두 "턱수염이 난 것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명칭이 붙은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섬에 자생하는 무화과나무의 일종인 bearded fig-tree비어디드 피그트리영어 (Ficus citrifolia)의 길게 늘어진 뿌리가 마치 턱수염처럼 보였기 때문이라는 설, 과거 섬에 거주했던 칼리나고족(카리브족) 원주민들이 턱수염을 길렀기 때문이라는 설, 또는 섬 주변의 산호초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의 거품이 턱수염의 시각적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설 등이 있다. 1519년 제노바의 지도 제작자 비스콘테 마졸로가 제작한 지도에는 바베이도스가 정확한 위치에 표기되어 있었다. 리워드 제도에 있는 바부다섬 역시 바베이도스와 유사한 이름으로, 과거 스페인인들에 의해 Las Barbudas라스 바르부다스스페인어로 불리기도 했다.
콜럼버스 이전 시대에 바베이도스를 부르던 원주민 아라와크어 명칭은 Ichirouganaim이치로우가나임awd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하얀 이빨을 가진 붉은 땅", "바깥쪽에 이빨(산호초)이 있는 붉은 돌 섬", 또는 단순히 "이빨"로 번역될 수 있다. 이는 섬의 붉은 토양과 해안선을 둘러싼 하얀 산호초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현지에서는 바베이도스를 "빔(Bim)" 또는 "빔셔(Bimshire)"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별칭의 기원은 불확실하지만 몇 가지 이론이 있다. 바베이도스 국립문화재단은 "빔"이 노예들이 흔히 사용하던 단어로, 나이지리아 남동부에서 유래한 이보어 bém벰이보어 (bé mụ베 무이보어 - "나의 집, 동족, 친절함"을 의미)에서 파생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는 18세기에 바베이도스로 유입된 이보족 노예의 수가 비교적 많았기 때문일 수 있다. 다른 설로는 1868년 4월 25일자 《농업 보고서》(Agricultural Reporter)에서 그린리지 목사가 "빔셔"를 영국의 한 주로 소개하며 "윌트셔, 햄프셔, 버크셔 그리고 빔셔"라고 명명했다고 언급한 데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다. 또한, 1652년 가이아나의 《데일리 아르고시》(Daily Argosy) 신문에서는 "빔"이 왕당파 지도자 바이암(Byam)의 이름이 변형된 것이며, 그의 추종자들이 "빔스(Bims)"로 불리다가 모든 바베이도스인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는 설도 제기되었다.
3. 역사
바베이도스의 역사는 지질학적 형성부터 원주민 정착, 유럽 식민지 시대를 거쳐 현대 공화국으로 발전하기까지 다양한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다. 초기에는 아라와크족과 칼리나고족이 거주했으며,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섬을 발견했다. 17세기에는 영국이 영구 정착지를 건설하고 설탕 플랜테이션 경제를 발전시켰으며, 이는 아프리카 노예들의 대규모 유입으로 이어졌다. 19세기 노예제 폐지 이후에도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 지속되었으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정치적 자치권을 확대하고 독립을 이루었으며, 2021년에는 공화국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변화를 맞이했다.
3.1. 식민지 시대 이전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이전, 바베이도스 섬에는 남아메리카 기아나 지방에서 건너온 아라와크족 계열의 시보네이족이 거주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기원전 1600년경부터 인간이 섬에 정착하거나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다. 영구적인 아메리카 원주민 정착은 서기 4세기에서 7세기경 살라도이드-바란코이드(Saladoid-Barrancoid) 문화 집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서기 800년경과 12-13세기에는 아라와크족이 남아메리카에서 이주해 왔으며, 이후 호전적인 칼리나고족(스페인인들은 "카리브족"이라 불렀음)이 섬을 정기적으로 방문했으나 영구적인 정착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칼리나고족은 아라와크족을 공격하기도 했다.
3.2. 유럽인의 도착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 어느 유럽 국가가 바베이도스에 가장 먼저 도착했는지는 불확실하다. 스페인 항해사들이 15세기 후반에 카스티야 왕령으로 바베이도스를 주장했으며, 1511년 스페인 지도에 처음으로 섬이 등장했다. 많은 사람들은 브라질로 향하던 포르투갈인들이 이 섬을 처음 발견했다고 믿는다. 포르투갈의 항해사 페드루 아 캄푸스는 1536년 브라질로 가는 길에 이 섬에 들러 "로스 바르바도스(Los Barbados, 턱수염 난 자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포르투갈은 1532년에서 1536년 사이에 섬의 영유권을 주장했지만, 1620년에 이를 포기했다. 그들이 남긴 유일한 흔적은 섬을 방문할 때마다 식량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멧돼지를 들여온 것이었다. 이 시기 유럽인들은 대체로 이 섬을 무시했지만, 스페인인들의 노예 약탈로 인해 원주민 인구가 감소했고 많은 이들이 다른 섬으로 피신한 것으로 추정된다.
3.3. 17세기 영국의 정착
1625년 5월 14일, 존 파월 선장이 이끄는 영국 배 올리브 블러섬(Olive Blossom)호가 바베이도스에 도착했고, 선원들은 제임스 1세 국왕의 이름으로 섬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1627년 2월 17일, 존 파월의 동생인 헨리 파월이 이끄는 80명의 정착민과 10명의 영국인 계약 노동자들이 현재의 홀타운(과거 제임스타운) 근처에 첫 영구 정착지를 건설하며 영국의 식민지화가 시작되었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이 첫 정착민 중에는 아프리카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초기 정착은 런던 시의 상인인 윌리엄 커틴 경이 자금을 지원한 특허 식민지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그는 바베이도스와 다른 여러 섬에 대한 소유권을 획득했다. 초기 식민지 주민들은 사실상 소작인이었고, 그들 노동력의 많은 이익은 커틴과 그의 회사로 돌아갔다. 커틴의 소유권은 나중에 "바베이도스 대강탈(Great Barbados Robbery)"이라고 불리는 사건을 통해 제1대 칼라일 백작 제임스 헤이에게 넘어갔다. 칼라일 백작은 이후 헨리 홀리를 총독으로 임명했고, 홀리 총독은 자신을 임명한 것에 반대할 수 있는 플랜테이션 소유주들을 달래기 위해 1639년 대의회(House of Assembly)를 설립했다.
1640년부터 1660년 사이, 서인도 제도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하는 영국 이민자 총수의 3분의 2 이상을 끌어들였다. 1650년까지 서인도 제도에는 44,000명의 정착민이 있었는데, 이는 체서피크만의 12,000명, 뉴잉글랜드의 23,000명과 비교되는 수치이다. 대부분의 영국인 이민자들은 계약 노동자였으며, 5년간의 노동 후에는 약 10파운드 상당의 "자유 계약 만기 수당"(freedom dues)을 주로 물품으로 받았다. 1630년대 중반 이전에는 5 acre에서 10 acre(약 2 ha에서 4 ha)의 땅도 받았지만, 그 이후에는 섬이 채워져 더 이상 무상 토지가 없었다. 올리버 크롬웰 시대(1650년대)에는 많은 전쟁 포로, 부랑자, 불법적으로 납치된 사람들이 강제로 섬으로 이송되어 하인으로 팔려갔다. 이들 중 후자의 두 그룹은 주로 아일랜드인이었으며, 이 시기에 수천 명의 아일랜드인이 영국 상인들에게 붙잡혀 바베이도스와 다른 카리브해 섬에서 노예로 팔려나갔는데, 이러한 관행은 바베이도스행(Barbadosed)이라는 말로 알려지게 되었다. 초기 식민지 경제의 주축은 담배 재배 및 수출이었으나, 1630년대 체서피크 지역의 생산량이 확대되면서 담배 가격이 하락했다.
3.3.1. 잉글랜드 내전의 영향

같은 시기, 삼왕국 전쟁과 잉글랜드 공위시대 동안의 전투는 바베이도스와 바베이도스 영해로까지 확산되었다. 찰스 1세가 처형된 후 섬 정부가 왕당파의 통제하에 들어가면서 바베이도스는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필립 벨 총독은 잉글랜드 의회에 충성을 유지한 반면, 험프리 월런드의 영향을 받은 바베이도스 대의회는 찰스 2세를 지지했다. 반항적인 식민지를 제압하기 위해 잉글랜드 연방 의회는 1650년 10월 3일 잉글랜드와 바베이도스 간의 교역을 금지하는 법령을 통과시켰고, 바베이도스가 네덜란드와도 교역했기 때문에 영국 선박 외에는 네덜란드 식민지와의 교역을 금지하는 추가적인 항해법이 통과되었다. 이러한 법령들은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전조가 되었다. 잉글랜드 연방은 조지 에이스큐 경이 이끄는 침공군을 파견했고, 이들은 1651년 10월에 도착했다. 에이스큐는 스코틀랜드 포로들을 포함한 소규모 병력으로 더 큰 규모의 왕당파 군대를 기습했지만, 결국 첩보 활동과 외교에 의존해야 했다. 1652년 1月 11일, 제5대 파럼의 윌러비 남작 프랜시스 윌러비가 이끄는 대의회의 왕당파가 항복하면서 왕당파의 사략 행위는 주요 위협으로서 종식되었다. 항복 조건은 1652년 1월 17일 오이스틴스의 머메이드 여관에서 체결된 바베이도스 헌장(오이스틴스 조약)에 포함되었다.
3.3.2. 아일랜드인 이주
올리버 크롬웰 시대부터 백인 노동 인구의 상당수는 아일랜드 출신의 계약 노동자 및 강제 이주자들이었다. 바베이도스의 아일랜드인 하인들은 종종 열악한 대우를 받았으며, 바베이도스 플랜테이션 소유주들은 잔인함으로 악명이 높았다. 바베이도스에서의 계약 노동에 대한 매력이 감소하고 설탕 재배로 인한 막대한 노동 수요가 결합되면서, 범죄 처벌이나 정치범에 대한 처벌로 바베이도스로의 강제 이송이 이루어졌고, 노동자들을 납치하여 바베이도스로 추방하는 일도 발생했다. 아일랜드인 계약 노동자들은 바베이도스에서 백인 하인들이 플랜테이션 노동에 사용되던 기간 동안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으며, 17세기 내내 꾸준히 아일랜드인 하인들이 바베이도스로 유입되었지만, 크롬웰의 아일랜드 평정 노력은 1650년대에 바베이도스로 보내진 아일랜드 노동자들의 "거대한 물결"을 만들어냈다. 역사 기록의 부족으로 바베이도스로 보내진 아일랜드 노동자의 총 수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추정치는 "상당히 논란이 많다". 한 역사 자료에서는 1650년대에 바베이도스나 버지니아로 5만 명에 달하는 아일랜드인이 추방되었다고 추정하지만, 이 추정치는 "상당히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655년까지 12,000명의 아일랜드 포로가 바베이도스에 도착했다는 또 다른 추정치는 역사가 리처드 B. 셰리던에 의해 "아마도 과장된 것"으로 묘사되었다. 역사가 토마스 바틀렛에 따르면, 약 1만 명의 아일랜드인이 서인도 제도로 추방되었고 약 4만 명이 자발적인 계약 노동자로 왔으며, 많은 이들이 자발적인 비계약 이민자로 여행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들 아일랜드인들의 후손 중 일부는 "레드렉스(Redlegs)"라고 불리는 하층 백인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3.3.3. 설탕 혁명
1640년 네덜란드령 브라질에서 사탕수수가 도입되면서 바베이도스의 사회, 경제, 물리적 경관은 완전히 바뀌었다. 바베이도스는 결국 세계에서 가장 큰 설탕 산업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산업의 초기 성공을 보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집단 중 하나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되어 결국 네덜란드령 브라질에 정착했던 세파르딕 유대인들이었다. 새로운 작물의 영향이 커지면서 바베이도스와 주변 섬들의 인종 구성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제대로 운영되는 설탕 플랜테이션은 막대한 투자와 많은 중노동을 필요로 했다. 처음에는 네덜란드 상인들이 장비, 자금, 아프리카 노예를 공급했으며, 대부분의 설탕을 유럽으로 운송했다. 1644년 바베이도스의 인구는 약 3만 명으로 추정되었으며, 그중 약 800명이 아프리카계였고 나머지는 주로 영국계였다. 이러한 영국인 소규모 자영농들은 결국 토지를 매각하게 되었고, 섬은 아프리카 노예들이 일하는 대규모 설탕 플랜테이션으로 채워졌다. 1660년에는 흑인 27,000명, 백인 26,000명으로 거의 동등한 수준이 되었다. 1666년까지 최소 12,000명의 백인 소규모 자영농들이 토지를 매각했거나 사망했거나 섬을 떠났으며, 많은 이들이 자메이카나 13개 식민지(특히 캐롤라이나)로 이주를 선택했다. 그 결과, 바베이도스는 노예화된 흑인 인구를 법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바베이도스 노예법을 제정했다. 이 법의 내용은 다른 식민지의 법률에도 영향을 미쳤다.
1680년에는 자유 백인이 2만 명, 노예화된 아프리카인이 46,000명이었으며, 1724년에는 자유 백인이 18,000명, 노예화된 아프리카인이 55,000명이었다.
3.4. 18세기와 19세기

노예들이 견뎌야 했던 가혹한 조건은 여러 차례 계획된 노예 반란으로 이어졌으며, 그중 가장 큰 규모는 1816년의 부사 반란이었으나 식민 당국에 의해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1819년에는 부활절에 또 다른 노예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은 피로 진압되었고, 반란 주동자들의 머리는 창에 꽂혀 전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탄압의 잔혹성은 영국 본토에까지 충격을 주었고 노예제 폐지 운동을 강화시켰다. 노예제에 대한 반대가 커지면서 1833년 대영제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플랜테이션 소유주 계급(플랜토크라시)은 섬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계속 장악했으며,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상대적인 빈곤 속에서 살았다.
1780년의 대허리케인은 바베이도스에서 4,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1854년에는 콜레라 유행으로 2만 명 이상의 주민이 사망했다.
3.5. 독립 이전 20세기
바베이도스의 상황에 대한 깊은 불만은 많은 사람들을 이민으로 이끌었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이르러 상황은 극에 달했고, 바베이도스인들은 노동자들의 더 나은 조건, 노동조합 합법화, 당시 남성 자산가에게만 제한되었던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1937년에는 흑인들의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 불안이 커지자 영국은 1938년 모인 위원회라고도 불리는 서인도 제도 왕립 위원회를 파견했고, 이 위원회는 섬에서 요청된 많은 개혁을 시행할 것을 권고했다. 그 결과, 아프리카계 바베이도스인들이 식민지 정치에서 훨씬 더 두드러진 역할을 하기 시작했으며, 1950년에는 보통선거권이 도입되었다.
이러한 초기 운동가들 중 두드러진 인물은 그랜틀리 허버트 애덤스로, 그는 1938년 바베이도스 노동당(BLP) 창당을 도왔다. 그는 1953년 바베이도스의 첫 번째 총리가 되었고, 1958년부터 1961년까지는 BLP 공동 창립자인 휴 고든 커민스가 그 뒤를 이었다. 더 신속한 독립을 주장하는 좌파 성향의 정치인 그룹이 BLP에서 분리되어 1955년 민주노동당(DLP)을 창당했다. DLP는 이후 1961년 바베이도스 총선에서 승리했고, 그들의 지도자 에롤 배로가 총리가 되었다.
1961년에는 완전한 내부 자치 정부가 수립되었다. 바베이도스는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단명한 영국령 서인도 연방에 참여했으며, 이후 1966년 11월 30일 완전한 독립을 얻었다. 에롤 배로가 국가의 첫 번째 총리가 되었다. 바베이도스는 영국 연방 내에 남기로 결정했다.
정치적 독립은 영국 정부가 바베이도스에 대한 주권을 중단했음을 의미했으며, 대신 엘리자베스 2세가 바베이도스의 군주로서 통치하게 되었다. 군주는 현지에서 총독에 의해 대표되었다.
3.6. 독립 이후
에롤 배로 정부는 농업 중심 경제에서 벗어나 산업과 관광 부문을 육성하여 경제를 다변화하고자 했다. 바베이도스는 또한 지역 통합 노력의 선두에 서서 카리브 자유 무역 연합(CARIFTA)과 카리브 공동체(CARICOM) 창설을 주도했다. DLP는 1976년 바베이도스 총선에서 톰 애덤스가 이끄는 BLP에게 패배했다. 애덤스는 더욱 보수적이고 강력한 친서방 노선을 채택하여, 1983년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 시 바베이도스를 발판으로 사용하도록 허용했다. 톰 애덤스는 1985년 재임 중 사망했고 해럴드 버나드 세인트존이 그 뒤를 이었으나, 세인트존은 1986년 바베이도스 총선에서 패배하여 미국의 그레나다 개입을 강력히 비판했던 에롤 배로 휘하의 DLP가 다시 집권했다. 배로 역시 재임 중 사망했고, 1994년까지 총리직을 유지한 로이드 어스킨 샌디퍼드가 그를 계승했다.
BLP의 오언 아서는 1994년 바베이도스 총선에서 승리하여 2008년까지 총리직을 유지했다. 아서는 공화주의의 강력한 지지자였지만, 2008년 엘리자베스 여왕을 국가 원수로 교체하려던 국민투표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DLP는 2008년 바베이도스 총선에서 승리했으나, 새로운 총리 데이비드 톰프슨이 2010년 사망하고 프로인델 스튜어트가 그 뒤를 이었다. BLP는 2018년 바베이도스 총선에서 바베이도스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된 미아 모틀리의 지도하에 다시 집권했다.
3.6.1. 공화국으로의 전환
바베이도스 정부는 2020년 9월 15일, 독립 55주년이 되는 2021년 11월 30일까지 공화국이 될 의사를 발표했으며, 이는 선거인단을 통해 선출된 대통령으로 바베이도스 군주제를 대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바베이도스는 영연방 왕국으로서의 지위를 중단하지만, 가이아나나 트리니다드 토바고처럼 영국 연방 회원국 자격은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전환 발표 1년여 만인 2021년 9월 20일, 2021년 헌법 (개정) (제2호) 법안이 바베이도스 의회에 제출되었다. 10월 6일 통과된 이 법안은 바베이도스 헌법을 개정하여 바베이도스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역할을 대체할 바베이도스 대통령직을 도입했다. 그 다음 주 2021년 10월 12일, 현직 바베이до스의 총독 샌드라 메이슨이 총리와 야당 대표의 공동 지명으로 바베이도스 초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10월 20일 선출되었다. 메이슨은 2021년 11월 30일에 취임했다. 당시 바베이도스 왕위 계승자였던 찰스 왕세자(현 찰스 3세)는 바베이도스 정부의 초청으로 브리지타운에서 열린 취임식에 참석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메이슨 대통령과 바베이도스 국민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내 "이 중대한 날을 축하하며, 귀하와 모든 바베이도스 국민의 미래 행복, 평화, 번영을 위한 따뜻한 축원을 보냅니다."라고 말했다.
2021년 10월 23일부터 11월 10일까지 서인도 대학교에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4%가 공화국 전환에 찬성했고, 30%는 무관심했다. 특히, 설문 조사에서 전체 과반수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24%는 선호를 표시하지 않았고 나머지 12%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폐위에 반대했다.
2022년 6월 20일, 바베이도스 헌법을 검토하기 위해 (당시 바베이도스 대통령 대행이었던) 제프리 깁슨에 의해 헌법 검토 위원회가 구성되어 선서했다. 위원회는 새로운 공화국에 대한 대중 협의와 헌법 초안 작성을 포함한 작업을 완료하기 위해 15개월의 기한을 받았으며, 최종 보고서는 2024년 6월 30일에 제출될 예정이었다.
4. 지리 및 기후
바베이도스는 대서양에 위치하며 다른 서인도 제도 섬들의 동쪽에 있다. 소앤틸리스 제도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섬이다. 길이는 약 34 km, 너비는 최대 23 km이며, 면적은 439 km2이다. 세인트루시아와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에서 동쪽으로 약 168 km, 마르티니크에서 남동쪽으로 180 km,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북동쪽으로 400 km 떨어져 있다. 서쪽의 이웃 섬들인 윈드워드 제도에 비해 평탄하다. 섬은 스코틀랜드 지구로 알려진 중앙 고지대로 완만하게 솟아 있으며, 가장 높은 지점은 해발 340 m인 힐라비산이다.
2020년 기준 바베이도스의 산림 면적은 전체 육지 면적의 약 15%로, 6300 ha에 해당하며 이는 1990년과 변동이 없었다. 2020년 자연 재생림은 6300 ha였고 인공림은 없었다. 자연 재생림 중 원시림(토착 수종으로 구성되어 인간 활동의 명확한 징후가 없는 숲)은 0%로 보고되었으며, 산림 면적의 약 5%가 보호 구역 내에 있었다. 2015년 기준 산림 면적의 1%가 공유지, 0%가 사유지였으며 99%는 기타 또는 미상 소유로 등재되었다.
세인트마이클구에는 바베이도스의 수도이자 주요 도시인 브리지타운이 있으며, 국가 인구의 3분의 1이 거주한다. 섬 전체에 흩어져 있는 다른 주요 도시로는 세인트제임스구의 홀타운, 크라이스트처치구의 오이스틴스, 세인트피터구의 스파이츠타운 등이 있다.


4.1. 지질
바베이도스는 남아메리카판과 카리브판의 경계에 위치한다. 카리브판 아래로 남아메리카판이 섭입하면서 남아메리카판의 퇴적물을 긁어모아 섭입대 위에 쌓이면서 부가체를 형성한다. 이러한 물질 퇴적 속도로 인해 바베이도스는 1,000년당 약 30 cm의 비율로 융기하고 있다. 약 70만 년 전, 현재 위치 아래의 맨틀에서 다이어피어(diapir)로 알려진 연약한 암석체가 솟아오르면서 섬이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러한 과정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수십 개의 내륙 해저 암초가 여전히 섬의 단구와 절벽 내 해안 지형을 지배하고 있다.
지질학적으로 이 섬은 약 90 m 두께의 산호로 구성되어 있으며, 퇴적물 위로 암초가 형성되었다. 지형은 서쪽에서는 일련의 "단구" 형태로 경사져 있고 동쪽에서는 경사가 급해진다. 섬의 북동부 스코틀랜드 지구의 석회암 침식으로 다양한 동굴과 협곡이 형성되었다. 대서양 쪽 동해안에는 이 지역의 석회암 구성으로 인해 스택을 포함한 해안 지형이 만들어졌다. 또한 섬에는 피코 테네리페로 알려진 바위곶이 있는데, 이는 스페인의 테네리페섬이 바베이도스 동쪽 첫 번째 육지라는 현지인들의 믿음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4.2. 기후
바베이도스는 일반적으로 두 계절을 경험하며, 그중 하나는 눈에 띄게 강우량이 많다. "우기"로 알려진 이 기간은 6월부터 12월까지이다. 반대로 "건기"는 12월부터 5월까지이다. 연간 강수량은 1000 mm에서 2300 mm 사이이다. 12월부터 5월까지 평균 기온은 21 °C에서 31 °C 사이이며, 6월부터 11월까지는 23 °C에서 31 °C 사이이다.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바베이도스 대부분은 열대 몬순 기후(Am)로 간주된다. 그러나 연중 12 km/h의 산들바람이 불어 바베이도스는 적당히 열대적인 기후를 띤다.
드문 자연재해로는 지진, 산사태, 허리케인이 있다. 바베이도스는 대서양의 열대 저기압 주요 발달 지역 외곽에 위치하여 우기 동안 이 지역 폭풍의 최악의 영향을 종종 피한다. 평균적으로 주요 허리케인이 바베이도스에 상륙하는 것은 약 26년에 한 번이다. 바베이도스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 마지막 중요한 허리케인은 1955년의 허리케인 재닛이었다. 2010년에는 허리케인 토마스가 섬을 강타했지만, 당시 열대성 폭풍의 세력이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경미한 피해만 입혔다.
4.3. 환경 문제

바베이도스는 환경적 압력에 취약하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섬 중 하나로서, 정부는 1990년대에 섬의 성장하는 남쪽 해안을 브리지타운 하수 처리장에 적극적으로 통합하여 연안 산호초 오염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21세기 첫 10년까지 섬의 서해안을 따라 두 번째 처리장이 제안되었다. 인구 밀도가 높기 때문에 바베이도스는 지하 대수층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산호-석회암 섬으로서 바베이도스는 지표수가 지하로 스며들기 매우 쉽다. 정부는 거대한 지하 대수층과 하천망으로 직접 이어지는 집수 지역 보호에 큰 중점을 두었다. 때때로 불법 거주자들이 이러한 지역을 침범했으며, 정부는 섬의 식수를 공급하는 지하 샘의 청결을 보존하기 위해 불법 거주자들을 철거했다.
정부는 환경을 보호하고 섬을 둘러싼 연안 산호초를 보존하기 위해 바베이도스를 깨끗하게 유지하는 데 큰 중점을 두었다. 바베이도스 연안 지역과 바다에 대한 인간의 압력을 완화하기 위한 많은 계획은 연안 지역 관리국(CZMU)에서 나온다. 바베이도스는 연안 바로 바깥에 거의 90 km의 산호초를 보유하고 있으며 서해안에는 두 개의 보호 해양 공원이 지정되어 있다. 남획은 바베이도스가 직면한 또 다른 위협이다.
대서양 반대편, 아프리카에서 서쪽으로 약 4800 km 떨어져 있지만, 바베이도스는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오는 높은 수준의 광물성 먼지를 경험하는 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장소 중 하나이다. 일부 특히 심한 먼지 발생은 바베이도스 주변 산호초의 건강이나 천식 발작에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지만, 전자의 주장을 전적으로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
바베이도스의 생물학적 수용력 접근성은 세계 평균보다 훨씬 낮다. 2016년 바베이도스의 1인당 생물학적 수용력은 0.17 글로벌 헥타르로, 세계 평균인 1인당 1.6 글로벌 헥타르보다 훨씬 적었다. 2016년 바베이도스는 1인당 0.84 글로벌 헥타르의 생물학적 수용력을 사용했는데, 이는 소비의 생태발자국이다. 이는 바베이도스가 보유한 생물학적 수용력보다 약 5배 더 많이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바베이도스는 생물학적 수용력 적자를 겪고 있다.
4.4. 야생 생물
바베이도스는 네 종류의 바다거북(푸른바다거북, 붉은바다거북, 대모거북, 장수거북)의 산란지이며, 카리브해에서 두 번째로 큰 대모거북 번식 개체군을 보유하고 있다. 해변에서 차량을 운전하면 모래 속에 묻힌 알둥지를 짓밟을 수 있으므로 산란 지역에서는 이러한 활동이 권장되지 않는다.
바베이도스는 또한 초록원숭이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초록원숭이는 세네갈에서 볼타강까지의 서아프리카에서 발견된다. 아프리카 북서쪽의 카보베르데 제도와 서인도 제도의 세인트키츠, 네비스, 세인트마틴섬, 바베이도스에 도입되었다. 17세기 후반 서아프리카에서 카리브해로 노예 무역선이 이동하면서 서인도 제도에 도입되었다. 초록원숭이는 현지인들에게 매우 호기심 많고 장난기 많거나 골칫거리인 동물로 여겨진다.
5. 정부와 정치

바베이도스는 1966년 11월 30일부터 독립 국가이다. 영국식 웨스트민스터 체제를 모델로 한 의원내각제 공화국으로 운영된다. 국가 원수는 바베이도스의 대통령으로, 현재 샌드라 메이슨이며, 바베이도스 의회에서 4년 임기로 선출되고, 정부 수반인 바베이도스의 총리(현재 미아 모틀리)로부터 바베이도스 국가 문제에 대해 자문을 받는다. 의회는 하원인 대의회(30석)와 상원인 원로원(21석)으로 구성된다.
바베이도스 헌법은 국가의 최고 법이다. 법률은 바베이도스 의회에서 통과되지만 대통령이 해당 법률에 동의하지 않는 한 법적 효력을 갖지 않는다. 동의를 보류할 권리는 절대적이며 의회에 의해 번복될 수 없다. 법무장관은 독립적인 사법부를 이끈다.
1990년대,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패트릭 매닝의 제안으로 바베이도스는 트리니다드 토바고 및 가이아나와의 정치 연합을 시도했다. 당시 바베이도스 총리였던 로이드 어스킨 샌디퍼드가 병에 걸리고 그의 민주노동당이 다음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이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바베이도스는 트리니다드 토바고 및 가이아나와 긴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으며, 미국, 캐나다, 영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가이아나 이민자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바베이도스는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 규정의 당사국이다.
5.1. 정치 문화
바베이도스는 양당제로 운영된다. 주요 정당은 민주노동당(DLP)과 현 집권당인 바베이도스 노동당(BLP)이다. 1966년 11월 30일 독립 이후, 민주노동당(DLP)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986년부터 1994년까지, 그리고 2008년부터 2018년까지 집권했다. 바베이도스 노동당(BLP)은 1976년부터 1986년까지, 1994년부터 2008년까지, 그리고 2018년부터 현재까지 집권하고 있다. 두 정당 모두 중도 좌파 성향이지만, 바베이도스 노동당은 민주사회주의를, 민주노동당은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여 정치적 입장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5.2. 행정 구역
바베이도스는 11개의 행정교구(parish)로 나뉜다.
- 크라이스트처치구 (Christ Church)
- 세인트앤드루구 (Saint Andrew)
- 세인트조지구 (Saint George)
- 세인트제임스구 (Saint James)
- 세인트존구 (Saint John)
- 세인트조지프구 (Saint Joseph)
- 세인트루시구 (Saint Lucy)
- 세인트마이클구 (Saint Michael)
- 세인트피터구 (Saint Peter)
- 세인트필립구 (Saint Philip)
- 세인트토머스구 (Saint Thomas)
5.3. 대외 관계
바베이도스는 비동맹주의 정책을 따르며 모든 우호 국가와의 협력 관계를 추구한다. 바베이도스는 카리브 공동체(CARICOM), 카리콤 단일 시장 경제(CSME), 카리브 국가 연합(ACS), 미주 기구(OAS), 영국 연방, 카리브 사법 재판소(CCJ)의 완전한 참여 회원국이다. 2005년 바베이도스는 최종 항소 법원으로서 영국 추밀원 사법위원회를 카리브 사법 재판소로 대체했다.
바베이도스는 1992년 창설 이후 소국 포럼(FOSS)의 회원국이다.
세계무역기구(WTO)의 창립 회원국(1995년)이며 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모든 교역 상대국에게 최소한 최혜국 대우를 부여한다. 유럽 연합(EU)과의 관계 및 협력은 양자 및 지역 기반으로 수행된다. 바베이도스는 코토누 협정의 당사국이며, 2007년 12월 현재 유럽 위원회와 경제 동반자 협정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협정에는 아프리카, 카리브해 및 태평양 국가 그룹(ACP)의 카리브 포럼(CARIFORUM) 하위 그룹이 포함된다. CARIFORUM은 EU와 완전한 지역 무역 협정을 체결한 광범위한 ACP 블록의 유일한 부분이다. EU-라틴 아메리카 및 카리브 국가 공동체(CELAC) 및 EU-CARIFORUM 대화도 진행 중이다.
무역 정책은 또한 대부분 식품 생산과 같은 소수의 국내 활동을 외국 경쟁으로부터 보호하는 동시에 대부분의 국내 수요는 수입으로 충족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1994년 이중 과세 경감 (CARICOM) 조약은 1994년 7월 6일 바베이도스 세인트마이클 셰르본 컨퍼런스 센터에서 8개국 대표가 서명했다. 대표된 국가는 앤티가 바부다, 벨리즈, 그레나다, 자메이카, 세인트키츠 네비스, 세인트루시아,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 트리니다드 토바고이다. 가이아나 정부 대표는 1994년 8월 19일 유사한 조약에 서명했다.
바베이도스는 트리니다드 토바고와 영해에 관한 경계 획정 문제를 겪고 있으며 대립하고 있다.
5.4. 군사 및 법 집행
바베이도스 국방군(BDF)은 약 8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다. 그 안에는 14세에서 18세 사이의 군인으로 구성된 바베이도스 사관생도단이 포함된다. 섬나라의 국방 준비는 영국, 미국, 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지역 안보 체제(RSS)와 같은 다른 동카리브 국가들과의 국방 조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바베이도스 경찰청은 바베이도스 섬의 유일한 법 집행 기관이다.
6. 경제

바베이도스는 1인당 국내 총생산(GDP) 기준으로 세계에서 52번째로 부유한 국가이며, 잘 발달된 혼합 경제와 중간 정도의 높은 생활 수준을 가지고 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바베이도스는 세계 83개 고소득 경제 국가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2년 카리브 개발 은행과 공동으로 실시한 자체 연구에 따르면 바베이도스인의 20%가 빈곤 속에 살고 있으며 거의 10%가 기본적인 일일 식량 수요를 충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인권 및 사회 발전 측면에서 중요한 과제를 보여준다. 2024년 세계 혁신 지수에서는 77위를 차지했다.
역사적으로 바베이도스 경제는 사탕수수 재배 및 관련 활동에 의존했지만,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부터 제조업 및 관광업 부문으로 다변화되었다. 역외 금융 및 정보 서비스는 중요한 외화 수입원이 되었다.
2007년 크리켓 월드컵 개최의 영향으로 호텔, 사무실 단지, 주택 개발 및 재개발과 함께 건설 붐이 일었다. 이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의 세계 경제 위기와 경기 침체 동안 둔화되었다.
경제는 1999년에서 2000년 사이에 강세를 보였으나, 관광 및 소비 지출 감소와 미국에서의 9·11 테러 및 영국에서의 2005년 7월 7일 런던 폭탄 테러의 영향으로 2001년과 2002년에 경기 침체에 들어섰다. 경제는 2003년에 반등하여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성장했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다시 경기 침체에 빠졌다가 2014년부터 2017년까지 성장했다. 그 후 세계 경제 위기 동안 2017년부터 2019년까지 또 다른 경기 침체로 하락했다. 2016년, 2017년, 2018년에는 S&P와 무디스로부터 23차례 신용등급이 강등되었다. 2019년에는 S&P와 무디스로부터 3차례 신용등급이 상향 조정되면서 경제 회복의 조짐을 보였다. 2020년 1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 경제는 성장하기 시작했으나, 그 후 코로나19 경제 침체로 인해 다시 하락했다.
전통적인 교역 상대국으로는 캐나다, 카리브 공동체(특히 트리니다드 토바고), 영국, 미국이 있다. 최근 정부 행정부는 실업률 감소, 외국인 직접 투자 장려, 잔존 국영 기업 민영화 노력을 계속해왔다. 실업률은 2003년 10.7%로 떨어졌으나, 2015년 2분기에는 11.9%로 증가했다.
유럽 연합은 바베이도스의 국제 비즈니스 및 금융 서비스 부문 현대화를 위해 1000.00 만 EUR 규모의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바베이도스는 카리브 지역에서 세 번째로 큰 증권거래소를 유지하고 있다. 2009년 현재 증권거래소 관계자들은 현지 거래소를 국제 증권 시장(ISM) 벤처로 확대할 가능성을 조사하고 있었다.
자몽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6.1. 국가 부도 및 구조 조정
2018년 5월까지 바베이도스의 미결제 부채는 75.00 억 USD로 국가 GDP의 1.7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2018년 6월 정부는 2035년 만기 유로본드에 대한 이표 지급에 실패하면서 국가채무를 불이행했다. 바베이도스의 미결제 채권 부채는 44.00 억 USD에 달했다.
2019년 10월, 바베이도스는 이튼 밴스 매니지먼트, 그레이록 캐피털 매니지먼트, 티처스 어드바이저스, 가이아나 무역 산업 은행을 포함한 채권단 그룹과의 구조 조정 협상을 마무리했다. 채권자들은 기존 채권을 2029년 만기 신규 채무 시리즈로 교환할 것이다. 신규 채권은 약 26%의 원금 "헤어컷"을 포함하며, 자연재해 발생 시 원금 상환 유예 및 이자 자본화를 허용하는 조항을 포함한다.
7. 인구


2010년 바베이도스 통계청이 실시한 전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거주 인구는 277,821명으로, 이 중 여성이 144,803명, 남성이 133,018명이었다. 2019년 추정 인구는 약 287,000명이다.
2020년 기준 바베이도스 주민의 평균 수명은 80세이다. 여성의 평균 수명은 83세, 남성은 79세이다.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평균 수명은 79.308세(남성 77.958세, 여성 80.579세)로 세계 41위이다. 바베이도스와 일본은 세계에서 1인당 100세인 발생률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이다.
조출생률은 인구 1,000명당 12.23명, 조사망률은 인구 1,000명당 8.39명이다. 유니세프에 따르면 2021년 영아 사망률은 출생아 1,000명당 11.057명이었다.
7.1. 민족
바베이도스인(구어체로 "바잔(Bajan)"이라고도 함)의 거의 90%가 아프리카계 카리브인(아프로-바잔) 및 혼혈이다. 나머지 인구는 주로 영국, 포르투갈, 아일랜드, 독일, 이탈리아 출신의 유럽인(앵글로-바잔/유로-바잔) 그룹을 포함한다. 다른 유럽인 그룹으로는 프랑스인, 오스트리아인, 스페인인, 러시아인이 있었다. 홍콩과 인도(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모두) 출신의 아시아인은 인구의 1% 미만을 차지한다.
바베이도스의 다른 그룹으로는 미국과 캐나다 출신 사람들이 있다. 미국에서 수년간 거주한 후 귀국한 바베이도스인과 바베이도스인 부모에게서 미국에서 태어난 자녀는 "바잔 양키스(Bajan Yankees)"라고 불리며, 일부에게는 경멸적인 용어로 간주된다.
아프리카계 카리브인 공동체 이외의 가장 큰 공동체는 다음과 같다.
# 인도계 가이아나인: 협력국인 가이아나로부터의 이민자 증가로 인해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1990년경부터 가이아나와 인도에서 유래한 인도계 바베이도스인 디아스포라가 증가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주로 남인도 출신으로, 그 규모는 커지고 있지만 트리니다드 토바고와 가이아나의 동등한 공동체보다는 작다. 인도계 이슬람 바베이도스인은 주로 구자라트 혈통이다. 바베이도스의 많은 소규모 사업체는 이슬람-인도계 바잔이 운영한다.
# 유로-바잔 (인구의 5%): 17세기부터 바베이도스에 정착했으며, 잉글랜드, 아일랜드, 포르투갈, 스코틀랜드에서 유래했다. 1643년에는 바베이도스에 37,200명의 백인이 있었는데(인구의 86%), 이들은 흔히 "화이트 바잔(White Bajans)"으로 알려져 있다. 유로-바잔은 아일랜드 음악과 하이랜드 음악과 같은 민속 음악과 세인트앤드루구의 구릉지대인 "스코틀랜드 지구(Scotland District)"와 같은 특정 지명을 도입했다. 화이트 바잔 중에는 제1대 몬머스 공작 제임스 스콧이 세지무어 전투에서 패배한 후 그의 추종자들과 아일랜드인 계약 노동자 및 섬으로 수입된 죄수들의 후손으로 구성된 레드렉스(Redlegs)로 알려진 하층 계급이 존재한다. 많은 이들이 추가로 이주하여 현재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와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초기 정착민이 되었다. 오늘날 레드렉스는 약 400명에 불과하다.
# 중국계 바베이도스인: 바베이도스의 광범위한 아시아인 인구 중 작은 부분을 차지한다. 중국 음식과 문화는 일상적인 바잔 문화의 일부가 되고 있다.
# 레바논인과 시리아인: 섬의 아랍계 바베이도스인 공동체를 형성한다.
# 유대인: 1627년 첫 정착민 직후 바베이도스에 도착했다. 브리지타운에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유대교 회당 중 하나인 니드헤 이스라엘 유대교 회당이 있으며, 이는 1654년에 건립되었으나 현재의 구조물은 1831년 허리케인으로 파괴된 것을 대체하여 1833년에 세워졌다. 인접한 묘지의 묘비는 1630년대부터 존재한다. 현재 바베이도스 국립 신탁의 관리하에 있으며, 1929년에 버려졌으나 1986년부터 유대인 공동체에 의해 구제되고 복원되었다.
# 17세기에는 롬인(집시)들이 영국에서 바베이도스의 플랜테이션에서 노예로 일하기 위해 보내졌다.
7.2. 언어
영어는 바베이도스의 공식 언어이며, 섬 전체의 의사소통, 행정, 공공 서비스에 사용된다. 국가의 공식 언어로서 영어 표준은 어휘, 발음, 철자, 관습 면에서 영국 영어와 유사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바잔 크리올(Bajan Creole)이 일상생활의 언어이다. 표준화된 문자 형태는 없지만, 인구의 90% 이상이 사용한다.
7.3. 종교

기독교는 바베이도스에서 가장 큰 종교이며, 가장 큰 교파는 성공회(2019년 인구의 23.9%)이다. 바베이도스에서 상당한 신자를 보유한 다른 기독교 교파로는 로마 가톨릭교회(브리지타운 교구에서 관리), 오순절교회(19.5%), 여호와의 증인,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영적 침례교 등이 있다. 잉글랜드 국교회는 독립 후 바베이도스 의회에 의해 법적으로 국교 지위가 폐지될 때까지 공식 국교였다. 2019년 기준으로 바베이도스인의 21%가 무종교라고 보고하여, 무종교인은 성공회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집단이다. 바베이도스의 소수 종교로는 힌두교, 이슬람교, 바하이 신앙, 유대교 등이 있다.
국가는 세속 국가로 간주되며, 모든 사람에게 종교의 자유 또는 신념의 자유를 보장하고 헌법 서문에 더 높은 권력에 대한 상징적인 언급만 포함한다.
8. 교육

바베이도스의 식자율은 거의 100%에 가깝다. 바베이도스의 주류 공교육 시스템은 영국 모델을 따르고 있다. 바베이도스 정부는 GDP의 6.7%를 교육에 지출한다(2008년 기준).
국가의 모든 청소년은 16세까지 학교에 다녀야 한다. 바베이도스에는 섬 전체에 70개 이상의 초등학교와 20개 이상의 중등학교가 있다. 몬테소리 교육 및 국제 바칼로레아 교육을 제공하는 학교를 포함하여 다수의 사립 학교가 있다. 이러한 학교의 학생 등록은 공립학교 총 등록의 5% 미만을 차지한다.
국가 내 자격증, 졸업장 및 학위 수준의 교육은 바베이도스 커뮤니티 칼리지, 새뮤얼 잭맨 프레스콧 기술 연구소, 코드링턴 칼리지, 서인도 대학교(케이브힐 캠퍼스 및 개방 캠퍼스)에서 제공한다. 바베이도스는 또한 로스 의과대학교 및 미국 통합 과학 대학교 의과대학과 같은 여러 해외 의과대학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8.1. 교육 평가
바베이도스 중등학교 입학 시험(BSSEE)은 시험 연도의 8월 31일 기준으로 11세에서 12세 사이의 어린이가 중등학교 배정을 위한 수단으로 치러야 한다.
카리브 중등 교육 수료 시험(CSEC)은 일반적으로 학생들이 5년간의 중등학교 교육을 마친 후 치르며 표준 중등 교육의 종료를 의미한다. CSEC 시험은 일반 수준(O-Levels) 시험과 동등하며 16세 이상의 학생을 대상으로 한다.
카리브 상급능력 시험(CAPE)은 중등 교육을 마치고 학업을 계속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치른다. CAPE를 치르는 학생들은 일반적으로 CSEC 또는 동등한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다. CAPE는 대학 입학을 위한 자발적인 자격인 영국 고급 수준(A-Levels)과 동등하다.
9. 보건
섬의 주요 병원은 퀸 엘리자베스 병원이다. 그러나 바베이도스에는 5개 행정교구에 걸쳐 8개의 종합진료소(polyclinics)가 있다. 또한 베이뷰 병원(Bayview Hospital), 샌디 크레스트 메디컬 센터(Sandy Crest Medical Centre), FMH 응급 의료 클리닉(FMH Emergency Medical Clinic)과 같은 유명한 의료 센터도 바베이도스에 있다.
10. 문화
바베이도스 문화는 서아프리카, 포르투갈, 크리올, 인도, 영국 문화가 혼합된 형태이다. 시민들은 공식적으로 바베이도스인(Barbadians)이라고 불리지만, 구어체로는 "바잔(Bajans)"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용어는 19세기 동안 "바베이도스인(Barbadian)"의 축약형인 "바디안(Badian)"에서 발전했다. 바베이도스는 "리틀 잉글랜드"라고 불릴 정도로 역사적으로 영국과의 관계가 깊었으며, 독립 후에도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여 다른 카리브해 국가들보다 영국의 문화적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섬에서 열리는 가장 큰 카니발과 유사한 문화 행사는 1974년에 시작된 크롭 오버 축제이다. 다른 많은 카리브해 및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크롭 오버는 섬 주민들뿐만 아니라 연례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몰려드는 수천 명의 관광객들에게도 중요한 행사이다. 이 축제에는 음악 경연 대회와 기타 전통 활동이 포함되며, 그해 섬에서 생산된 대부분의 칼립소 및 소카 음악이 선보여진다. 가장 많은 사탕수수를 수확한 남성과 여성 바베이도스인이 작물의 왕과 여왕으로 선정된다. 크롭 오버는 7월 초에 시작되어 8월 첫째 월요일에 열리는 카두먼트 데이(Kadooment Day)의 가장 행렬로 끝난다. 새로운 칼립소/소카 음악은 일반적으로 축제 시작과 함께 5월 초부터 더 자주 발표되고 연주된다.
10.1. 예술
바베이도스 예술은 원주민 문화, 식민지 시대, 그리고 이후 활기찬 탈식민지 정체성의 출현을 포함하는 섬의 복잡한 역사에 영향을 받아 수세기에 걸쳐 발전해 왔다. 아프리카, 유럽, 카리브해 문화의 상호 작용은 현대 예술가들에게 계속 영감을 주는 독특한 예술적 유산을 낳았다.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에 걸쳐 바베이도스 예술은 문화적 르네상스를 맞이했으며, 이는 라스칼 매거진(Raskal Magazine)에 의해 기록되었다. 예술가들은 전통적인 관행과 현대적인 표현을 혼합하여 다양한 매체와 기법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실험 기간은 바베이도스 예술의 역동적이고 다면적인 특성에 기여했으며, 이는 문화 교류와 적응에 대한 섬의 개방성을 반영한다.
바베이도스 예술가들은 세계 예술계 내에서의 자신들의 위치를 인식하고 국제적인 예술 동향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세계적인 관점은 예술가들이 다양한 원천에서 영감을 얻는 동시에 카리브해 및 디아스포라 예술에 대한 광범위한 담론에 기여하면서 아이디어의 상호 수정을 이끌었다.
10.2. 대중 매체
바베이도스의 주요 대중 매체로는 국영 방송사인 카리브 방송 공사(CBC)가 있다.
10.3. 요리

바잔 요리는 아프리카, 인도, 아일랜드, 크리올, 영국의 영향이 혼합된 것이다. 일반적인 식사는 허브와 향신료 혼합물로 절인 고기나 생선 메인 요리, 뜨거운 사이드 디쉬, 하나 이상의 샐러드로 구성된다. 일반적인 바잔 사이드 디쉬로는 절인 오이, 어묵, 베이크 등이 있다. 식사는 보통 하나 이상의 소스와 함께 제공된다. 바베이도스의 국민 음식은 매콤한 그레이비를 곁들인 쿠쿠와 날치이다. 또 다른 전통 음식은 매콤한 고구마를 곁들인 절인 돼지고기 요리인 푸딩 앤 사우스(pudding and souse)이다. 다양한 해산물과 육류도 맛볼 수 있다.
주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라임을 많이 사용하며, 라임 수플레가 있다. 날치는 바베이도스에서 인기 있는 생선으로, 날치 튀김 샌드위치나, 바잔 시즈닝이라는 진한 향신료 맛의 그레이비 소스로 조리하여 옥수수 가루와 오크라, 또는 빵나무 열매와 녹색 바나나로 만든 "쿠쿠"와 함께 먹는 요리가 있다. 바베이도스에서 날치는 요리뿐만 아니라 바베이도스 1달러 동전, 국가 문장, 여권에도 그려져 있을 정도로 널리 사용되는 생선이다.
바베이도스의 마운트 게이 럼 방문자 센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럼 회사라고 주장하며, 1703년의 가장 오래된 확인된 증서를 보유하고 있다. 콕스퍼 럼과 말리부도 이 섬에서 생산된다. 바베이도스는 페일 라거인 뱅크스 비어(Banks Beer)와 뱅크스 앰버 에일(Banks Amber Ale)을 양조하는 뱅크스 바베이도스 양조장의 본거지이다. 뱅크스는 또한 무알코올 맥아 음료인 타이거 몰트(Tiger Malt)도 양조한다. 텐 세인츠(10 Saints) 맥주는 바베이도스 세인트피터구 스파이츠타운에서 양조되며 마운트 게이 '스페셜 리저브' 럼 통에서 90일간 숙성된다. 2009년에 처음 양조되었으며 일부 카리콤 국가에서 판매된다.
10.4. 음악

2009년, 리한나는 당시 총리였던 데이비드 톰프슨에 의해 바베이도스의 청소년 및 문화 명예 대사로 임명되었다. 리한나는 전 세계적으로 2억 장 이상의 음반을 판매한 역대 베스트셀링 음악가 중 한 명이다. 2021년 11월 30일, 바베이도스가 공화국으로 전환되는 기념식에서 초대 대통령 샌드라 메이슨으로부터 바베이도스 국가 영웅 칭호를 받았다.
11. 스포츠


영국 식민 유산을 가진 다른 카리브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크리켓은 섬에서 매우 인기가 높다. 서인도 제도 크리켓 대표팀에는 보통 여러 명의 바베이도스 선수들이 포함된다. 여러 차례의 연습 경기, 조별 예선, 일부 "슈퍼 에이트" 경기 외에도, 바베이도스는 2007년 크리켓 월드컵 및 2024년 ICC 남자 T20 월드컵 결승전을 개최했다. 바베이도스는 가필드 소버스 경, 프랭크 워렐 경, 클라이드 월콧 경, 에버턴 위크스 경, 고든 그리니지, 웨스 홀, 찰리 그리피스, 조엘 가너, 데즈먼드 헤인스, 맬컴 마셜 등 많은 위대한 크리켓 선수들을 배출했다. 소버스와 마셜은 역대 최고의 크리켓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히며, 2013년에는 크리켓의 바이블로 알려진 《위즈든 크리켓 선수 연감》에 의해 150년간의 역대 월드 XI에 선정되기도 했다. 2013년에는 카리브해 지역 6개국이 연합한 트웬티20 형식의 프로 리그인 캐리비안 프리미어 리그가 개막했으며, 바베이도스 로열스가 참가하고 있다.
육상 경기에서는 단거리 선수 오바델레 톰슨이 2000년 하계 올림픽 100m에서 동메달을 획득하여 바베이도스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었다. 라이언 브래스웨이트는 2009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110m 허들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바베이도스는 특히 110m 허들 종목에서 강세를 보인다.
럭비 또한 바베이도스에서 인기가 있다.
경마는 브리지타운 근처의 역사적인 개리슨 사바나 경마장에서 열린다. 관중들은 스탠드 입장료(2.5 USD에서 5 USD 사이)를 지불하고 관람할 수 있다.
농구는 학교나 대학에서 즐겨 하는 스포츠로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바베이도스 남자 농구 국가대표팀은 2006년 코먼웰스 게임에서 5위를 차지하는 등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폴로는 섬의 부유층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있으며, "하이골(High-Goal)" 에이프스 힐(Apes Hill) 팀은 세인트 제임스 클럽에 기반을 두고 있다.
골프에서는 로열 웨스트모어랜드 골프 클럽에서 열리는 바베이도스 오픈이 2000년부터 2009년까지 유러피언 시니어 투어의 연례 대회였다. 2006년 12월에는 WGC-월드컵이 톰 파지오가 설계한 18홀 코스인 샌디 레인 리조트의 컨트리 클럽 코스에서 개최되었다. 바베이도스 골프 클럽도 섬에 있는 또 다른 코스이다.
배구 또한 인기가 있으며 주로 실내에서 진행된다.
테니스도 인기를 얻고 있으며, 바베이도스 출신의 다리안 킹은 2017년 5월 세계 랭킹 106위를 기록했고, 2016년 하계 올림픽과 2017년 US 오픈에 출전했다.
모터스포츠도 한몫을 하며, 랠리 바베이도스가 매년 여름에 열리고 FIA NACAM 일정에 등재되어 있다. 또한 부시 파크 서킷은 2014년 레이스 오브 챔피언스를 개최했다.
무역풍과 유리한 파도 덕분에 섬의 남쪽 끝은 웨이브 세일링(윈드서핑의 극한 형태)에 이상적인 장소이다. 바베이도스는 또한 여러 국제 서핑 대회를 개최한다.
넷볼은 바베이도스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다.
NFL에는 로버트 베일리, 로저 파머, 엘비스 조셉, 라몬 헤어우드, 샘 실 등 바베이도스 출신 선수들이 여럿 있다.
축구 또한 바베이도스에서 인기가 있으며, 1947년에 프로 축구 리그인 바베이도스 프리미어 리그가 창설되었다. 바베이도스 축구 국가대표팀은 아직 FIFA 월드컵이나 CONCACAF 골드컵 본선에 진출한 적은 없지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고 위건 소속으로 FA컵 우승을 경험한 에머슨 보이스와 같은 유명 선수를 배출했다.
12. 교통

바베이도스는 가장 넓은 지점이 약 34 km에 불과하지만, 세인트필립구의 식스 크로스 로즈에서 세인트루시구의 노스 포인트까지 자동차로 이동하는 데 교통 체증으로 인해 1시간 반 이상이 걸릴 수 있다. 바베이도스에는 시민 수의 절반에 해당하는 등록 차량이 있다. 바베이도스에서는 운전자가 도로의 왼쪽으로 운전한다.
바베이도스는 많은 회전 교차로로 유명하다. 유명한 회전 교차로 중 하나는 브리지타운 동쪽에 있으며, 노예 부사의 해방 동상이 세워져 있다.
섬 내 교통은 "ZR"이라고 불리는 "루트 택시"로 비교적 편리하며, 섬 대부분 지역으로 운행한다. 이 작은 버스들은 승객 수에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승객을 거부하지 않기 때문에 때때로 붐빌 수 있다. 이들은 보통 목적지까지 더 경치가 좋은 경로를 이용한다. 일반적으로 수도 브리지타운이나 섬 북부의 스파이츠타운에서 출발한다.
ZR을 포함하여 일주일 내내(일요일에는 운행 빈도가 낮음) 운행하는 세 가지 버스 시스템이 있다. ZR, 노란색 미니버스, 파란색 바베이도스 교통위원회 버스가 있다. 어느 것을 타든 요금은 3.5 BBD이다. 두 개의 민간 소유 시스템("ZR" 및 "미니버스")의 소형 버스는 잔돈을 거슬러 줄 수 있지만, 정부 운영 바베이도스 교통위원회 시스템의 대형 파란색 버스는 잔돈을 거슬러 주지 않지만 영수증은 발급한다. 바베이도스 교통위원회 버스는 바베이도스 전역의 정규 버스 노선과 예정된 시간표에 따라 운행한다. 일부 중등학교를 포함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정부 버스를 무료로 이용하고 ZR은 2.5 BBD에 이용할 수 있다. 대부분의 노선은 브리지타운에서 환승해야 한다. 바베이도스 교통위원회 본부는 세인트마이클구 로벅 스트리트에 있는 케이스 하우스에 있으며, 버스 차고지 및 터미널은 페어차일드 스트리트 버스 터미널과 프린세스 앨리스 버스 터미널(과거 브리지타운 주빌리 가든의 로어 그린 버스 터미널), 세인트피터구 스파이츠타운의 스파이츠타운 버스 터미널, 크라이스트처치구 오이스틴스의 오이스틴스 버스 차고지, 세인트필립구 맹그로브의 맹그로브 버스 차고지에 위치해 있다. 2020년 7월, 바베이도스 교통위원회는 2030년까지 화석 연료 사용을 중단하려는 정부 목표를 지원하고 노후된 디젤 버스 차량을 보강하기 위해 BYD 전기 버스 33대를 도입했다.
일부 호텔에서는 호텔 로비 외부에서 섬의 주요 지점까지 방문객을 위한 셔틀을 제공한다. 바베이도스에는 현지 소유 및 운영 차량 렌트 업체가 여러 곳 있지만 다국적 기업은 없다.
섬의 유일한 공항은 그랜틀리 애덤스 국제공항이다. 이 공항은 전 세계 여러 주요 항공사의 일일 항공편뿐만 아니라 여러 소규모 지역 상업 항공사 및 전세기를 수용한다. 이 공항은 카리브해 남부 항공 교통 허브 역할을 한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1.00 억 USD 규모의 업그레이드 및 확장을 거쳤다. 2023년에는 이전 콩코드 터미널 및 박물관을 새로운 출발 터미널로 전환하기 시작했으며, 2023년 12월 미아 모틀리 총리는 추가 공항 개발을 위해 3.00 억 USD 규모의 협상을 발표했다.
브리지타운 항구는 상업용 컨테이너 및 크루즈 교통의 주요 기항지이다.
과거에는 섬 주변 여러 지역, 주로 서해안 관광 벨트에 항공 택시 서비스를 제공하는 헬리콥터 셔틀 서비스도 있었다. 항공 및 해상 교통은 바베이도스 항만청에서 규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