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적도 기니 공화국(República de Guinea Ecuatorial레푸블리카 데 기네아 에콰토리알스페인어; République de Guinée équatoriale레퓌블리크 드 기네 에콰토리알프랑스어; República da Guiné Equatorial헤푸블리카 다 기네 이콰투리알포르투갈어), 통칭 적도 기니는 중앙아프리카 서해안에 위치한 공화국이다. 면적은 약 2.80 만 km2이며, 2024년 기준 인구는 약 180만 명이다. 과거 스페인령 기니라는 이름의 스페인 식민지였으며, 독립 후 국명은 적도와 기니만 인근에 위치한 데서 유래했다. 아프리카의 주권 국가 중 유일하게 스페인어를 주요 공용어로 사용한다.
적도 기니는 리오무니(Río Muni)로 불리는 대륙 본토 지역과 기니만에 위치한 비오코섬(Bioko, 구 페르난도포섬) 및 안노본섬 등의 섬으로 구성된 도서 지역으로 나뉜다. 수도인 말라보는 비오코섬에 위치해 있다. 대륙부인 리오무니는 북쪽으로 카메룬, 남쪽과 동쪽으로 가봉과 국경을 접한다. 주요 민족은 팡족이며, 부비족이 그 뒤를 잇는다.
1968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였으나, 초대 대통령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의 폭압적인 독재 통치를 겪었다. 1979년 그의 조카인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가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현재까지 장기 집권하고 있으며, 그의 정권 역시 국제 사회로부터 독재로 평가받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면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주요 산유국 중 하나가 되었고, 1인당 국민 소득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그러나 석유로 인한 부는 극도로 불균등하게 분배되어 소수 엘리트층에게 집중되었으며, 다수 국민은 여전히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2019년 인간 개발 지수(HDI)는 144위로 낮은 편이며, 깨끗한 식수 접근성이 낮고 아동 사망률이 높은 등 사회 발전은 미흡한 실정이다. 적도 기니는 UN, AU, 프랑코포니, OPEC, CPLP의 회원국이다.
2. 역사
적도 기니의 역사는 선사 시대부터 유럽 식민 통치, 독립 후 독재 정권 시기를 거쳐 현재에 이른다. 특히 장기간의 식민 지배와 독립 후 이어진 두 독재 정권은 국가의 정치, 사회, 경제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2.1. 고대 및 유럽인 도래 이전
현재 적도 기니의 대륙 지역에는 피그미족이 초기 거주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오늘날에는 리오무니 남부의 고립된 지역에서만 발견된다. 반투족의 대이동은 기원전 2000년경 현재의 나이지리아 남동부와 카메룬 북서부(그라스필즈) 사이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늦어도 기원전 500년경에는 적도 기니 대륙부에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오코섬의 가장 초기 정착지는 서기 53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안노본섬의 인구는 원래 앙골라 원주민이었으며, 포르투갈인들이 상투메섬을 통해 이주시켰다.
2.2. 유럽 식민 시대
적도 기니는 15세기 후반 포르투갈에 의해 처음 발견된 이후,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 이 기간 동안 주로 노예 무역의 거점으로 이용되었으며, 이후에는 카카오와 커피 플랜테이션 농업이 발달했다.
2.2.1. 포르투갈의 초기 탐험과 지배 (1472년-1778년)

1472년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던 포르투갈 탐험가 페르낭 두 포(Fernando Pó)가 비오코섬을 처음 발견한 유럽인으로 기록된다. 그는 섬을 '포르모사'(Formosa아름다운포르투갈어)라고 불렀으나, 곧 그의 이름을 따서 '페르난도 포섬'으로 불리게 되었다. 페르난도 포섬과 안노본섬은 1474년 포르투갈에 의해 식민지화되었다. 1500년경 포르투갈인들은 섬의 화산성 토양과 질병에 강한 고지대의 이점을 인식하고 최초의 교역소를 설립했다. 그러나 1507년 페르난도 포섬의 현재 콘셉시온 인근에 사탕수수 농장과 마을을 건설하려던 초기 시도는 부비족의 저항과 열병으로 인해 실패했다. 섬의 비가 많은 기후, 극심한 습도, 큰 기온 변화는 초기 유럽 정착민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수 세기가 지난 후에야 정착 시도가 재개되었다.
2.2.2. 스페인으로의 양도와 초기 통치 (1778년-1844년)
1778년 포르투갈의 마리아 1세 여왕과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 국왕은 엘 파르도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비오코섬, 인접 섬들, 그리고 니제르강과 오고웨강 사이 비아프라만의 상업적 권리가 현재의 브라질 서부에 해당하는 남미의 넓은 영토와 교환되어 스페인에게 양도되었다. 펠리페 호세 준장(아르헬레호스 백작)은 1778년 10월 21일 포르투갈로부터 비오코섬을 공식적으로 인수했다. 그러나 안노본섬을 인수하러 항해하던 중 비오코섬에서 걸린 질병으로 사망했고, 열병에 시달리던 선원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대신 상투메섬에 상륙했으나, 병으로 80% 이상의 선원을 잃은 후 포르투갈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 이 재앙으로 인해 스페인은 새로운 영토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주저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인들은 이 섬을 인근 본토에서의 노예 무역 기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778년부터 1810년까지 현재의 적도 기니 영토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기반을 둔 라플라타 부왕령에 의해 관리되었다.
스페인은 페르난도 포섬 개발에 큰 투자를 꺼려, 1827년부터 1843년까지 대서양 노예 무역을 단속하려는 영국의 노력의 일환으로 비오코섬 말라보의 기지를 영국에 임대했다. 스페인의 허가 없이 영국은 1827년 노예 매매 단속을 위한 혼성 위원회 본부를 페르난도 포섬으로 이전했다가, 1843년 스페인과의 협정에 따라 시에라리온으로 다시 옮겼다. 1817년 영국의 압력으로 스페인이 노예제를 폐지하기로 한 결정은 식민지의 가치를 떨어뜨렸고, 따라서 해군 기지 임대는 수익성이 없는 영토에서 효과적인 수입원이었다. 1841년 스페인이 아프리카 식민지를 영국에 매각하려던 합의는 국내 여론과 스페인 의회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2.2.3. 스페인 식민 통치 공고화 (1844년-1900년)

1844년 영국은 섬을 스페인 통제 하에 반환했고, 이 지역은 '기니만 스페인 영토'(Territorios Españoles del Golfo de Guinea테리토리오스 에스파뇰레스 델 골포 데 기네아스페인어)로 알려지게 되었다. 전염병으로 인해 스페인은 식민지에 많은 투자를 하지 않았고, 1862년 황열병 발병으로 섬에 정착했던 많은 백인이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후반까지 개인들에 의해 플랜테이션 농장이 계속 설립되었다.
페르난도 포섬의 플랜테이션은 주로 페르난디노(Fernandinos)로 알려진 흑인 크리올 엘리트에 의해 운영되었다. 영국은 통치 기간 동안 약 2,000명의 시에라리온인과 해방 노예를 이곳에 정착시켰고, 영국이 떠난 후에도 서아프리카와 서인도 제도에서 소규모 이민이 계속되었다. 해방된 앙골라 노예, 포르투갈-아프리카 크리올, 나이지리아 및 라이베리아 이민자들도 식민지에 정착하기 시작하여 빠르게 새로운 그룹에 합류했다. 현지인 외에 쿠바인, 필리핀인, 유대인, 다양한 인종의 스페인인이 추가되었는데, 이들 중 다수는 정치적 또는 기타 범죄로 아프리카로 추방된 사람들이었으며, 정부의 지원을 받는 일부 정착민도 있었다.
1870년까지 섬에 거주하는 백인들의 생존 전망은 고지대에 거주하라는 권고 이후 크게 개선되었으며, 1884년까지 최소한의 행정 기구와 주요 플랜테이션은 해발 수백 미터의 바실레로 이전했다. 헨리 모턴 스탠리는 이러한 정책을 시행하지 않은 스페인을 비판하며 페르난도 포섬을 "스페인이 연마하지 않은 보석"이라고 불렀다. 섬에 거주하는 유럽인의 생존 가능성이 향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섬에 머물던 메리 킹슬리는 여전히 페르난도 포섬을 그곳에 임명된 스페인인들에게 "더 불편한 형태의 처형"이라고 묘사했다.
인근 포르투갈 섬에서 온 이민자, 탈출한 노예, 장래의 플랜테이션 경영자들도 소수 유입되었다. 일부 페르난디노는 가톨릭 신자이고 스페인어를 사용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에는 약 10분의 9가 개신교도였고 영어를 사용했으며, 피진 영어가 섬의 링구아 프랑카였다. 시에라리온인들은 플랜테이션 경영자로서 특히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윈드워드 해안에서의 노동력 모집도 계속되었다. 페르난디노는 원주민과 유럽인 사이의 상인 및 중개인이 되었다. 시에라리온을 거쳐 서인도 제도에서 온 해방 노예인 윌리엄 프랫(William Pratt)은 페르난도 포섬에 코코아 작물을 도입했다.
2.2.4. 20세기 전반기 (1900년-1945년)
스페인은 비아프라만의 광대한 지역을 조약상의 권리에도 불구하고 점령하지 않았고, 프랑스는 스페인이 주장하는 영토를 희생시키면서 점령지를 확장했다. 스페인 정부는 가봉과 카메룬까지 내륙에서 조약을 체결한 마누엘 이라디에르와 같은 인물들의 탐험을 부분적으로만 지원했으며, 이는 1885년 베를린 회의의 조건에 따라 요구된 '효과적인 점령'에서 많은 땅을 제외시켰다. 본토 합병에 대한 최소한의 정부 지원은 여론과 페르난도 포섬의 노동력 필요성 때문에 이루어졌다.
1900년 파리 조약으로 스페인은 리오무니라는 대륙 내 월경지만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스페인이 당초 주장했던 우방기강까지 동쪽으로 뻗어 있는 30.00 만 km2 중 2.60 만 km2에 불과했다. 프랑스-스페인 협상의 굴욕과 쿠바에서의 재앙이 겹쳐 스페인 협상팀 대표였던 페드로 고베르 이 토바르(Pedro Gover y Tovar)는 1901년 10월 21일 귀국길에 자살했다. 이라디에르 자신도 1911년 절망 속에서 사망했으며, 수십 년 후 코고 항구는 그의 공적을 기려 푸에르토 이라디에르로 개명되었다.

1904년-1905년에 발표된 토지 규정은 스페인인에게 유리했으며, 이후 대부분의 대규모 플랜테이션 경영자들은 이 규정 이후 스페인에서 왔다. 1914년 라이베리아와 값싼 노동력을 수입하기 위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부당한 관행으로 인해, 1930년 페르난도 포섬의 라이베리아 노동자 상태에 대한 크리스티 보고서의 폭로 이후 라이베리아 정부는 결국 이 조약을 종료시켰고, 이는 찰스 D. B. 킹 대통령의 실각으로 이어졌다.
19세기 말까지 부비족은 스페인 클라레티안 선교회 선교사들로부터 플랜테이션 경영자들의 요구로부터 보호받았다. 이 선교사들은 식민지에서 매우 영향력이 있었고, 결국 부비족을 파라과이의 유명한 예수회 레둑시온을 연상시키는 작은 선교 신정 체제로 조직했다. 가톨릭의 침투는 플랜테이션을 위한 강제 노동 징집에 항의하는 1898년과 1910년의 두 차례 작은 반란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부비족은 1917년 무장 해제되었고, 선교사들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심각한 노동력 부족은 독일령 카메룬에서 온 대규모 난민 유입과 수년간 섬에 머물렀던 수천 명의 독일 백인 군인들로 일시적으로 해결되었다.

1926년부터 1959년까지 비오코와 리오무니는 스페인령 기니라는 식민지로 통합되었다. 경제는 대규모 카카오와 커피 플랜테이션, 벌목 사업에 기반을 두었고, 노동력은 주로 라이베리아, 나이지리아, 카메룬에서 온 이민 계약 노동자였다. 1914년부터 1930년까지 약 1만 명의 라이베리아인이 노동 조약에 따라 페르난도 포로 갔으나, 이 조약은 1930년에 완전히 중단되었다. 라이베리아 노동자를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되자, 페르난도 포의 플랜테이션 경영자들은 리오무니로 눈을 돌렸다. 1920년대에 팡족을 정복하기 위한 작전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라이베리아가 노동자 모집을 줄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1926년까지 식민지 전역에 식민지 수비대 주둔지가 설치되었고, 1929년까지 식민지 전체가 '평정'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스페인 내전은 식민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리오무니의 총독과 부총독을 포함한 150명의 스페인 백인 그룹은 페르난도 포 플랜테이션 소유주들의 이익에 반대하는 인민 전선이라는 사회주의 정당을 월경지에 창설했다. 내전이 발발하자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카나리아 제도에 주둔한 국민파 군대에 적도 기니의 통제권을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1936년 9월, 페르난도 포의 팔랑헤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은 국민파 군대가 리오무니를 장악했는데, 리오무니는 루이스 산체스 게라 사에스 총독과 그의 대리인 포르셀 하에서 공화국 정부를 지지했었다. 11월까지 인민 전선과 그 지지자들은 패배했고, 적도 기니는 프랑코에게 확보되었다. 점령 책임자인 후안 폰탄 로베는 프랑코에 의해 총독으로 임명되어 내륙 지역에 대한 스페인의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리오무니의 공식 인구는 1930년대에 10만 명을 조금 넘었으며, 카메룬이나 가봉으로의 탈출은 쉬웠다. 따라서 페르난도 포는 계속해서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다. 프랑스는 카메룬에서의 노동자 모집을 잠시만 허용했으며, 주요 노동력 공급원은 나이지리아 칼라바르에서 카누로 밀입국한 이그보족이었다. 이러한 해결책 덕분에 페르난도 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아프리카에서 가장 생산적인 농업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2.2.5. 스페인 통치 말기와 독립 준비 (1945년-1968년)

정치적으로 전후 식민지 역사는 세 가지 뚜렷한 단계를 거친다. 첫째, 1959년까지 식민지에서 포르투갈 제국의 접근 방식을 따라 '주(州)' 지위로 승격된 시기이다. 둘째, 1960년부터 1968년까지 스페인 정부가 영토를 스페인 체제의 일부로 유지하기 위해 부분적인 탈식민지화를 시도한 시기이다. 셋째, 1968년 이후 영토가 독립 공화국이 된 시기이다. 첫 번째 단계는 이전 정책의 지속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는 포르투갈과 프랑스의 정책과 매우 유사했는데, 특히 인구를 '원주민' 또는 비시민으로 통치되는 대다수와, 에만시파도(emancipados에만시파도스스페인어, 수도권 문화로의 문화 동화)라는 시민 지위를 부여받은 극소수(백인과 함께)로 나누는 방식이 두드러졌다.

이 "주" 단계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시작되었으나, 주로 카메룬과 가봉에서 프랑코 총통의 온정주의적 통치를 피해 망명한 소규모 그룹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적도 기니 민족 해방 운동(MONALIGE)과 적도 기니 인민 이념(IPGE)이라는 두 단체를 결성했다. 1960년대 후반까지 아프리카 대륙의 많은 지역이 독립을 쟁취했다. 이러한 추세를 인식한 스페인은 적도 기니의 독립 준비 노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1965년 1인당 국민 총소득은 466달러로, 당시 흑인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았다. 스페인은 산타 이사벨에 국제공항을 건설하고, 텔레비전 방송국을 설립했으며, 식자율을 89%까지 끌어올렸다. 1967년 적도 기니의 1인당 병상 수는 스페인 본토보다 많았으며, 16개 병원에 1637개의 병상이 있었다. 그러나 식민 통치 말기까지 고등 교육을 받은 아프리카인의 수는 두 자릿수에 불과했다.
1963년 8월 9일 결정되어 1963년 12월 15일 국민투표로 승인된 조치로, 영토에 어느 정도의 자치권이 부여되고 온건파 그룹인 적도 기니 민족 연합 운동(MUNGE)이 행정적으로 장려되었다. 이는 성공하지 못했고, UN으로부터의 변화 압력이 커지면서 스페인 정부는 점차 민족주의 흐름에 굴복해야 했다. 1965년 두 차례의 UN 총회 결의안이 통과되어 스페인에 식민지 독립을 명령했고, 1966년 UN 위원회가 현지 시찰 후 동일한 권고를 내렸다. 이에 스페인은 1967년 10월 27일 독립 적도 기니를 위한 새 헌법을 협상하기 위한 제헌 회의를 개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회의에는 41명의 현지 대표와 25명의 스페인인이 참석했다. 아프리카인들은 주로 페르난디노와 부비족(팡족 다수에 의한 특권 상실과 '압도'를 두려워함)과 리오무니 팡족 민족주의자들로 나뉘었다. 회의에서 주요 팡족 인물이자 훗날 초대 대통령이 된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는 아돌프 히틀러가 "아프리카를 구했다"고 주장하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연설을 했다. 9차례의 회의 끝에, 별도의 페르난도 포를 원했던 "연합주의자"와 "분리주의자" 간의 교착 상태로 인해 회의는 중단되었다. 마시아스는 이 문제에 대한 국제적 인식을 높이기 위해 UN으로 가기로 결정했고, 뉴욕에서의 그의 열정적인 연설은 스페인이 독립과 총선 날짜를 정하는 데 기여했다. 1968년 7월 거의 모든 부비족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뉴욕의 UN으로 갔으나, 국제 사회는 식민지 독립의 세부 사항에 대해 논쟁하는 데 무관심했다. 1960년대는 이전 아프리카 식민지의 미래에 대한 큰 낙관론의 시대였고, 부비족과 같이 유럽 통치자들과 가까웠던 그룹들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지 못했다.
2.3. 독립과 마시아스 응게마 정권 (1968년-1979년)

1968년 10월 12일 정오, 수도 말라보에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이 이루어졌다. 새로운 나라는 적도 기니 공화국이 되었으며, 이 날은 독립기념일로 기념된다.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는 적도 기니 역사상 유일하게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러진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은 선거에서 마시아스를 지지했는데, 그의 선거 운동 대부분은 리오무니 농촌 지역을 방문하여 그에게 투표하면 스페인인들의 집과 아내를 갖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는 2차 투표에서 승리했다.
나이지리아 내전 기간 동안 페르난도 포섬에는 비아프라를 지지하는 많은 이보족 이주 노동자들이 거주했고, 분리 독립 국가에서 온 많은 난민들이 섬으로 피신했다. 국제 적십자 위원회는 적도 기니에서 구호 비행을 시작했지만, 마시아스는 곧 트럭용 경유나 의료 수술용 산소 탱크 수송을 거부하며 비행을 중단시켰다. 비아프라 분리주의자들은 국제적 지원 없이 굶주림에 시달리다 항복했다.
정부 관리들의 "과도함과 학대"에 대해 법무장관이 불만을 제기하자, 마시아스는 196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쿠데타 음모 혐의로 150명을 처형했는데, 이들은 모두 정치적 반대파였다. 마시아스 응게마는 1970년 7월 야당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1972년 자신을 종신 대통령으로 선포함으로써 자신의 전체주의적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그는 스페인 및 서방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신식민주의"라고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적도 기니는 중국, 쿠바, 동독, 소련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들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마시아스 응게마는 소련과 특혜 무역 협정 및 해운 조약을 체결했다. 소련 또한 적도 기니에 차관을 제공했다. 해운 조약은 소련에게 시범 어업 개발 프로젝트와 루바의 해군 기지 사용 허가를 부여했다. 그 대가로 소련은 적도 기니에 생선을 공급하기로 했다. 중국과 쿠바 또한 적도 기니에 다양한 형태의 재정적, 군사적, 기술적 지원을 제공하여 그곳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확보했다. 소련에게는 앙골라 내전에서 루바 기지와 나중에는 말라보 국제공항 접근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1974년 세계 교회 협의회는 1968년 이후 계속되는 공포 정치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다고 확인했다.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해외로 도피했으며, '교도소는 넘쳐나 사실상 거대한 강제 수용소를 형성하고 있다'고 밝혔다. 인구 30만 명 중 약 8만 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소수 민족인 부비족에 대한 집단학살을 자행했다는 혐의 외에도, 마시아스 응게마는 수천 명의 반대파 용의자들의 죽음을 명령하고, 교회를 폐쇄했으며, 숙련된 시민과 외국인들이 나라를 떠나면서 경제 붕괴를 초래했다. 그의 통치는 극심한 인권 탄압과 경제적 파탄으로 점철되었으며, 이는 적도 기니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로 기록된다.
2.4.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정권 (1979년-현재)

1979년 8월 3일, 마시아스 응게마의 조카인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는 피비린내 나는 쿠데타로 삼촌을 축출했다. 2주 이상 내전이 계속된 후 마시아스 응게마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곧 처형되었다. 오비앙은 그 뒤를 이어 덜 폭력적이지만 여전히 권위주의적인 대통령이 되었다.
1995년 미국의 석유 회사인 모빌이 적도 기니에서 석유를 발견했다. 이후 국가는 급속한 경제 발전을 경험했지만, 석유 수입으로 얻은 부는 국민들에게 제대로 분배되지 않았고, 유엔 인간 개발 지수에서 낮은 순위를 기록했다. 5세 미만 아동의 7.9%가 사망하고, 인구의 절반 이상이 깨끗한 식수를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 오비앙은 국가의 석유 자원을 이용해 자신과 측근들을 부유하게 만들었다는 의혹을 널리 받고 있다. 2006년 포브스는 그의 개인 재산을 6억 달러로 추정했다.
2011년 정부는 시우다드데라파스(당시 오얄라)라는 새로운 수도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이 도시는 2017년 '평화의 도시'라는 뜻의 시우다드데라파스로 개명되었다. 2016년 2월 기준, 오비앙은 카메룬의 폴 비야에 이어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오래 집권한 독재자였다. 적도 기니는 2018년부터 2019년까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비상임 이사국으로 선출되었다. 2021년 3월 7일 바타 시 인근 군 기지에서 탄약 폭발 사고가 발생하여 98명이 사망하고 600명이 부상당했다. 2022년 11월, 오비앙은 선거에서 99.7%의 득표율로 재선되었으나, 야당으로부터 부정 선거 의혹이 제기되었다. 오비앙 정권 하에서도 인권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으며, 부패와 불평등 문제는 여전히 심각한 과제로 남아 있다.
3. 지리
적도 기니는 중앙아프리카 서해안에 위치하며, 대륙부인 리오무니와 여러 섬으로 구성된다. 다양한 지형과 열대 기후, 풍부한 생태계를 특징으로 한다.
3.1. 지형과 위치

적도 기니는 중앙아프리카 서해안에 위치한다. 국토는 북쪽으로 카메룬, 동쪽과 남쪽으로 가봉과 국경을 접하는 본토 지역인 리오무니와 5개의 작은 섬(비오코섬, 코리스코섬, 안노본섬, 엘로베이 치코섬, 엘로베이 그란데섬)으로 구성된다. 수도인 말라보가 위치한 비오코섬은 카메룬 해안에서 약 40 km 떨어져 있다. 안노본섬은 가봉의 로페스곶에서 남서쪽으로 약 350 km 떨어져 있다. 코리스코섬과 두 엘로베이섬은 리오무니와 가봉 국경의 코리스코만에 위치한다.
적도 기니는 북위 4도와 남위 2도, 서경 5도와 동경 12도 사이에 걸쳐 있다. 국명과 달리 적도 기니 영토의 어떤 부분도 적도에 걸쳐 있지 않다. 적도에서 약 155 km 남쪽에 있는 도서 지역인 안노본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북반구에 위치한다. 비오코섬은 화산섬으로 최고 지점은 해발 3008 m의 바실레산(구 산타이사벨산)이다. 리오무니는 낮은 구릉과 대지가 많으며, 대륙부 최고 지점인 미트라산도 1200 m이다.

3.2. 기후
적도 기니는 뚜렷한 우기와 건기가 있는 열대 기후를 나타낸다. 6월부터 8월까지 리오무니는 건조하고 비오코섬은 습하며, 12월부터 2월까지는 그 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그 사이에는 점진적인 전환기가 있다. 안노본섬에는 매일 비나 안개가 내리며, 구름 한 점 없는 날이 기록된 적이 없다. 비오코섬 말라보의 기온은 16 °C에서 33 °C 사이를 오가지만, 남부 모카 고원의 정상 최고 기온은 21 °C에 불과하다. 리오무니의 평균 기온은 약 27 °C이다. 연간 강수량은 말라보에서 1930 mm, 비오코섬의 우레카에서는 1.09 만 mm에 이르지만, 리오무니는 다소 건조하다. 리오무니의 우기는 2월부터 6월, 9월부터 12월이며 해안가에 비가 더 많이 내린다.
3.3. 생태계와 야생 동물
적도 기니는 여러 생태 지역에 걸쳐 있다. 리오무니 지역은 해안, 특히 무니강 어귀의 중앙아프리카맹그로브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서양연안적도숲 생태 지역 내에 있다.

크로스강-사가강-비오코섬해안숲 생태 지역은 비오코섬 대부분과 아프리카 본토의 카메룬 및 나이지리아 인접 지역을 포함하며, 카메룬산-비오코섬산악숲 생태 지역은 비오코섬과 인근 카메룬산의 고지대를 포함한다. 상투메프린시페-안노본습윤저지대숲 생태 지역은 안노본섬 전체와 상투메 프린시페를 포함한다.

2018년 산림경관보전지수 평균 점수는 7.99/10점으로, 172개국 중 세계 30위를 차지했으며, 이는 국토의 상당 부분이 산림으로 덮여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산림은 다양한 야생 동물의 중요한 서식지가 된다.
적도 기니에는 고릴라, 침팬지, 다양한 원숭이, 표범, 물소, 영양, 코끼리, 하마, 악어, 그리고 비단뱀을 포함한 다양한 뱀이 서식하고 있다.





4. 행정 구역

적도 기니는 8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최근에 신설된 주는 2017년에 만들어진 지블로호이며, 주도는 국가의 미래 수도인 시우다드데라파스이다. 8개의 주는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은 주도):
# 안노본주 (산안토니오데팔레)
# 북비오코주 (말라보)
# 남비오코주 (루바)
# 중남부주 (에비나용)
# 지블로호 (시우다드데라파스)
# 키에은템주 (에베비인)
# 리토랄주 (바타)
# 웰레은사스주 (몽고모)
이 주들은 다시 19개의 구와 37개의 지방 자치체로 나뉜다. 대륙부에 위치한 중남부주, 키에은템주, 리토랄주, 웰레은사스주, 지블로호주를 통칭하여 리오무니라고 부르기도 한다.
4.1. 주요 도시
적도 기니의 주요 도시로는 비오코섬 북부에 위치한 수도 말라보(2014년 기준 인구 약 15만 명)와 리오무니의 중심지이자 항구 도시인 바타(2001년 기준 인구 약 13만 명)가 있다. 바타는 적도 기니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오비앙 대통령은 2012년 수도 이전 계획을 발표했으며, 리오무니 동부 내륙에 새로운 수도인 시우다드데라파스(구 오얄라)가 건설되고 있다.
5. 정치
적도 기니는 명목상 공화제와 대통령제를 채택한 입헌 국가이지만, 실제로는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의 장기 독재 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정부 구조는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한이 집중되어 있으며, 정치 상황은 인권 탄압과 부패 문제로 국제적인 비판을 받고 있다.
5.1. 정부 구조

적도 기니의 현 대통령은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이다. 1982년 제정된 적도 기니 헌법은 대통령에게 내각 구성원의 임명 및 해임, 법령에 의한 법률 제정, 하원 해산, 조약 협상 및 비준, 군 통수권 등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2011년 11월, 일반 대중에게 내용이 공개되지 않은 채 새 헌법이 승인되었다. 새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의 임기는 7년 중임제로 제한되며, 대통령이 국가 원수와 정부 수반을 겸임하여 총리직을 폐지했다. 또한 부통령직을 신설하고 70명의 상원(55명은 국민 선출, 15명은 대통령 지명) 구성을 규정했다. 그러나 이어진 내각 개편에서는 새 헌법 규정을 명백히 위반하여 2명의 부통령이 임명되었다. 2012년 10월 오비앙 대통령은 2임기 제한이 소급 적용되지 않으며 2016년부터 적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내각에 해당하는 각료 평의회는 총리, 수 명의 부총리, 그리고 각료로 구성되지만, 실제 행정권은 대통령이 행사하며 각료 평의회는 그 집행기관에 불과하다. 정부 기관으로 국가 평의회가 있으며, 이는 대통령 사망 또는 직무 수행 불능 시 직무를 일시 대행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의회는 과거 인민 대표원(Camara de Representantes del Pueblo, 정원 80석, 2004년부터 100석)의 단원제였으나, 2012년 정원 75석의 상원이 신설되어 양원제로 전환되었다.
5.2. 정치 상황과 인권

테오도로 오비앙 대통령의 독재 정권은 석유 붐을 이용하여 국가 국민들을 희생시키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부를 축적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1979년 8월 이후 약 12건의 실패한 쿠데타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권 내에서는 오비앙 대통령의 아들인 테오도로 응게마 오비앙 망게와의 긴장이 감돌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2004년에는 사이먼 맨이 주도하고 마크 대처가 자금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진 오비앙 정권 전복 쿠데타 시도가 있었으나 미수에 그쳤다. 영국 MI6, 미국 CIA, 스페인이 암묵적으로 쿠데타를 지원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으나, 국제앰네스티는 관련된 재판에서 쿠데타 시도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제시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사이먼 맨은 2009년 인도주의적 이유로 석방되었다.
2005년부터 미국의 민간 군사 기업인 MPRI가 적도 기니 경찰에게 인권 존중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2006년 당시 미국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오비앙 대통령의 인권 및 시민 자유 기록에 대한 반복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를 "좋은 친구"라고 칭했다. 같은 해 USAID는 보건, 교육, 여성 문제, 환경 분야 프로젝트를 시행하기 위한 사회 개발 기금 설립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오비앙 대통령과 체결했다. 2006년 오비앙 대통령은 모든 형태의 학대와 부적절한 처우를 금지하는 고문 방지령에 서명하고, 2007년에는 수감자들의 인도적 처우를 보장하기 위해 악명 높은 블랙비치 교도소의 개보수를 지시했다. 그러나 휴먼 라이츠 워치와 국제앰네스티 등 비정부기구들은 교도소 내 고문, 구타, 의문사, 불법 구금 등 심각한 인권 유린이 계속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오비앙 대통령은 2009년 선거에서 재선되었으며, 아프리카 연합은 이 선거가 "선거법에 부합한다"고 평가했다. 2010년에는 이그나시오 밀람 탕을 총리로 재임명했다. 2013년 5월 총선은 상원, 하원, 시장 선거가 동시에 치러졌으며, 야당의 비난 속에서 오비앙 대통령의 적도 기니 민주당(PDGE)이 승리했다. 선거 직후 야당인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연대(CPDS)는 평화 시위를 계획했으나 경찰에 의해 저지되었고 지도부가 구금되었다. 2016년 대선에서도 오비앙은 재선되었으나, 프리덤 하우스는 야당에 대한 경찰 폭력, 구금, 고문이 만연했다고 보고했다. 2022년 총선 결과 PDGE는 하원 100석과 상원 전석을 차지했다. 야당은 거의 존재감이 없으며, 대부분의 언론은 국가 통제 하에 있고, 민영 방송(아송가 그룹)은 대통령 일가 소유이다.
2020년 국제투명성기구의 부패인식지수(CPI)에서 적도 기니는 100점 만점에 16점으로 180개국 중 174위를 기록했다. 프리덤 하우스는 오비앙을 "세계에서 가장 도둑정치를 일삼는 현존 독재자 중 한 명"으로 묘사했다. 2023년 V-Dem 민주주의 지수에 따르면 적도 기니는 아프리카에서 7번째로 민주주의가 취약한 국가이다.
5.3. 군사

적도 기니군은 약 2,5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다. 육군은 약 1,400명, 경찰은 400명의 준군사조직원, 해군은 200명, 공군은 약 120명의 대원을 보유하고 있다. 헌병대도 존재하지만, 그 규모는 알려져 있지 않다. 2024년 세계 평화 지수에 따르면 적도 기니는 세계에서 94번째로 평화로운 국가이다.
2021년 3월 7일 바타 시의 군 기지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하여 98명이 사망하고 615명이 부상하는 참사가 있었다. 폭발 원인은 다이너마이트 및 발화 장치 취급 부주의로 발표되었다.
6. 대외 관계
적도 기니는 독립 이후 국제 사회와 다양한 관계를 맺어왔으며, 특히 석유 발견 이후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가 변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인권 문제와 독재 정치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협력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6.1. 일반
적도 기니는 UN, AU, 프랑코포니, OPEC, CPLP의 회원국이다. 1979년 오비앙 대통령 집권 이후 스페인,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스페인과는 경제 및 기술 협력 협정을 체결했으며, 프랑스와는 교육 및 빈곤 감소 프로그램에서 협력했다. 그러나 정치 발전 미흡으로 서방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으나, 석유 발견 이후 경제적 중요성이 커지면서 관계가 다시 개선되었다. 1996년 인권 문제로 폐쇄되었던 주 적도 기니 미국 대사관은 2003년 재개설되었다.
한편, 석유 자원을 둘러싸고 주변국들과 해양 경계 분쟁을 겪기도 했다. 나이지리아와는 해역 구분 문제로, 가봉과는 음바니에섬, 코코티에섬, 콩가섬의 영유권을 두고 갈등이 있었다.
냉전 시기에는 사회주의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1973년 10월 이스라엘, 1976년 3월 미국과 단교하기도 했다. 현재는 모든 국가와 관계를 확대하고 있으며, 서아프리카 주변국 및 구 식민 모국인 스페인과 프랑스와의 관계를 중시한다.
6.2. 대한민국과의 관계
적도 기니는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다. 대한민국과는 1979년 9월, 북한과는 1969년 1월에 각각 국교를 수립했다. 1980년 2월 이후 주 가봉 대한민국 대사관이 적도 기니 관련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1992년 대한 수입액은 2만 7천 달러, 대한 수출액은 9천 달러였으나, 교역이 증가하여 2007년 기준 대한 수출액은 93만 3천 달러를 기록했다. 재한 적도 기니인은 1명(2022년 12월 기준), 재 적도 기니 한국인은 9명(2023년 8월 기준)이다.
7. 경제
적도 기니의 경제는 전통적으로 농업에 의존했으나, 1990년대 석유 발견 이후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석유 산업은 막대한 부를 가져왔지만, 심각한 분배 불균형과 부패 문제를 야기하며 국가 발전에 양면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7.1. 석유 발견 이전

독립 이전 적도 기니는 주로 카카오, 커피, 목재를 당시 식민 통치국이던 스페인을 비롯해 독일, 영국 등에 수출했다. 1960년대 수출액은 카카오 38%, 커피 25%, 목재 10%를 차지했다. 주력 상품인 카카오는 주로 비오코섬에서, 커피와 목재는 리오무니에서 생산되었다. 독립 후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정권의 폭정으로 플랜테이션 생산량이 급감했으나 이후 회복되었고, 1980년대까지 이러한 경제 구조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당시 주요 산업은 카카오 생산이었으며, 페르난도포섬(현 비오코섬)의 커피 및 카카오 농장이 유명했고, 내륙부에서는 목재 자원이 개발되어 주요 수출품이 되었다.
7.2. 석유 및 가스 산업
1996년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면서 적도 기니의 경제는 극적으로 변화했다. 정부 수입이 급증했으며, 2004년 기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산유국이 되었다. 당시 석유 생산량은 일일 36만 배럴로, 불과 2년 전의 일일 22만 배럴에서 크게 증가한 수치였다. 주요 석유 회사로는 엑슨모빌, 마라톤 오일, 코스모스 에너지, 셰브론 등이 활동하고 있다.
1992년 비오코섬 연안의 알바 유전에서 원유 생산이 시작된 이래, 주력 산업은 농림수산업에서 광업 생산으로 전환되었다. 1996년 자피로 유전, 2000년 세이바 유전 등 신규 유전 개발이 잇따르면서, 2011년에는 원유 수출이 전체 수출의 40.3%, 천연가스 수출이 25.3%를 차지하게 되어 완전히 광업 기반 경제가 되었다. 2017년에는 석유 수출국 기구(OPEC)에 가입했다. 정부 예산 또한 원유 수입에 크게 의존하여, 2007년에는 세입의 약 85%가 석유 및 가스 수입으로 충당되었다. 원유 생산 증가에 힘입어 2001년부터 2009년까지 정부 지출은 명목상 13배, 실질적으로도 약 8배 증가했다.
7.3. 경제 구조와 과제

1985년 1월 1일, 적도 기니는 프랑코폰이 아닌 아프리카 국가로는 처음으로 프랑 존에 가입하여 CFA 프랑을 통화로 채택했다. 이전 국가 통화였던 에크웰레는 스페인 페세타에 연동되어 있었다.
석유 생산에 힘입어 적도 기니의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은 한때 세계 최상위권에 도달했으나, 부의 분배는 극도로 불균등하여 대다수 국민의 생활 수준은 향상되지 못했다. 2004년 7월, 미국 상원은 적도 기니 석유 수입금의 대부분이 예치되었던 워싱턴 D.C. 소재 리그스 은행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 은행은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자금도 관리했던 곳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최소 3500.00 만 USD가 오비앙 대통령과 그의 가족, 정권 고위 관리들에게 흘러 들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대통령은 모든 혐의를 부인했으며, 리그스 은행은 피노체트 관련 자금에 대해 900.00 만 USD를 반환했지만 적도 기니 관련 자금에 대해서는 반환하지 않았다.
적도 기니는 아프리카 사업법 조화 기구(OHADA)와 중앙아프리카 경제 통화 공동체(CEMAC)의 회원국이다. 채굴산업 투명성 이행기구(EITI) 인증을 받으려 했으며, 2008년 2월 후보국 지위를 얻었으나 EITI 이사회는 기한 연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적도 기니는 아프리카에서 1인당 국민 총소득(GNI)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이지만(가장 가난한 국가인 부룬디의 83배), 심각한 빈부 격차로 인한 극심한 빈곤을 겪고 있다. 2016년 유엔 인간 개발 보고서에 따르면 1인당 GDP는 2.15 만 USD로 아프리카 최고 수준이었으나, 지니 계수로 볼 때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국가 중 하나이며 인구의 70%가 하루 1달러로 생활하고 있다. 2019년 유엔 인간 개발 지수는 189개국 중 145위를 기록했다.
탄화수소는 국가 수출의 97%를 차지하며, 아프리카 석유 생산국 기구(APPO) 회원국이다. 2020년에는 고질적인 부패 등으로 인해 8년 연속 경기 침체를 겪었다. 2021년 경제는 대형 가스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완료와 세계 경제 회복에 힘입어 약 2.6%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2022년에는 실질 GDP가 약 4.4% 감소하며 다시 침체에 빠질 것으로 전망되었다. 2022년 국가 지니 계수는 58.8이었다. 생활 수준 향상을 위한 투자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아 많은 국민의 생활 수준은 향상되지 않았다.
7.4. 기타 산업
석유 및 가스 산업 외에도 임업, 농업, 어업이 국내 총생산(GDP)의 주요 구성 요소이다. 자급 농업이 주를 이루며, 농업은 국가의 주요 고용원으로 농촌 가구의 57%, 전체 노동력의 52%에게 소득을 제공한다.

전통적으로 카카오, 커피, 목재가 주요 생산물이었으며, 현재도 일부 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석유 발견 이후 농업 부문에 대한 투자가 미흡하여 생산성은 낮은 편이다. 어업 또한 잠재력이 있으나 현대적인 기술 도입과 기반 시설 부족으로 충분히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8. 교통
적도 기니의 교통 인프라는 석유 산업 발달과 함께 일부 개선되었으나, 여전히 발전이 필요한 부분이 많다. 특히 도로망 확충과 대중교통 시스템 개선이 주요 과제로 남아 있다.
8.1. 도로 교통
적도 기니에는 약 2880 km의 도로가 있으며, 이 중 상당 부분은 2002년까지 포장되지 않았으나 최근 점진적으로 개선되고 있다. 최근에는 바타와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 국제공항을 잇는 길이 175 km의 2차선 고속도로가 건설되었으며, 가봉 국경의 몽고모 시까지 연결될 계획이다. 우기에는 사륜구동 차량이 없으면 도로 통행이 어려운 경우가 많아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다.
8.2. 항공 교통

석유 산업으로 인해 국제 항공사들이 말라보 국제공항으로 취항했으며, 2014년 5월 기준 유럽 및 서아프리카와 여러 직항 노선이 있었다. 적도 기니에는 말라보 국제공항, 바타 공항, 안노본섬의 안노본 공항 등 3개의 공항이 있다. 이 중 말라보 국제공항이 유일한 국제공항이다. 또한 새로운 수도 시우다드데라파스 인근 멩고메옌에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 국제공항이 2012년 개항했다. 적도 기니에 등록된 모든 항공사는 EU 내 운항이 금지된 항공사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화물 항공사들은 유럽 도시에서 수도로 서비스를 제공한다.
8.3. 해상 교통

적도 기니의 주요 항구는 수도 말라보와 경제 중심지인 바타에 위치해 있다. 이들 항구는 주로 석유 및 가스 수출입과 일반 화물 처리에 이용된다. 해상 운송은 국가 경제, 특히 자원 수출입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항만 시설의 현대화와 효율성 증대는 지속적인 과제로 남아있다.
9. 사회
적도 기니 사회는 다양한 민족 구성과 다언어 환경을 특징으로 하며, 급격한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사회 발전 지표는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9.1. 인구
적도 기니의 인구는 2024년 기준 약 179만 5,834명으로 추산된다. 1950년에는 약 20만 명이었으나, 2000년에는 60만 명, 2020년에는 140만 명으로 증가했다. 2017년 기준 인구 밀도는 1km2당 45.2명으로, 주변 국가인 가봉에 비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석유 개발 이후 수도 말라보의 인구가 두 배로 증가하는 등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다.
연도 | 백만 명 |
---|---|
1950 | 0.2 |
2000 | 0.6 |
2020 | 1.4 |
9.2. 민족

적도 기니 국민 대다수는 반투족 계통이다. 가장 큰 민족 집단은 팡족으로, 본토가 원주지이나 20세기 이후 비오코섬으로 상당수 이주하여 초기 거주민인 부비족보다 인구가 많아졌다. 팡족은 전체 인구의 약 80%를 차지하며, 약 67개의 씨족으로 구성된다. 리오무니 북부의 팡족은 팡-은투무어를, 남부의 팡족은 팡-오카어를 사용하는데, 두 방언은 차이가 있지만 서로 이해 가능하다. 부비족은 인구의 약 15%를 차지하며 비오코섬의 원주민이다. 전통적으로 팡족과 '해안' 민족(은도웨족 또는 플라예로스) 간의 경계는 바타 동쪽의 니에팡 마을이었다.
해안 민족 집단으로는 본토와 작은 섬들의 콤베족, 부헤바족, 발렝게족, 벵가족 등이 있으며, 비오코섬의 크리올 공동체인 페르난디노족이 있다. 이들은 모두 합쳐 인구의 약 5%를 차지한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계 유럽인(일부는 부분적으로 아프리카계 혈통)도 거주하지만, 대부분의 스페인계 민족은 독립 후 떠났다.
최근에는 인접국인 카메룬, 나이지리아, 가봉에서 온 외국인 이주자가 증가하고 있다. 2002년 '무국적 민족 백과사전'에 따르면 비오코섬 주민의 7%가 이그보족이었다. 적도 기니는 카카오 및 커피 농장 노동자로 다른 나라에서 온 아시아인과 아프리카 원주민을 받아들였다. 다른 흑인 아프리카인들은 라이베리아, 앙골라, 모잠비크에서 왔다. 아시아인 인구 대부분은 중국인이며, 소수의 인도계도 있다.
9.3. 언어

적도 기니의 주요 공용어는 스페인어(현지 변형은 적도 기니 스페인어)로, 다양한 민족 집단 간의 링구아 프랑카 역할을 한다. 1970년 마시아스 정권 시절 스페인어가 팡어로 대체되었으나 1979년 마시아스 실각 후 복원되었다. 스페인어는 1998년까지 유일한 공용어였으나, 중앙아프리카 경제 통화 공동체(CEMAC) 가입을 위해 프랑스어가 추가되었다. 2010년에는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CPLP) 가입을 위해 포르투갈어가 세 번째 공용어로 채택되었다.
스페인어는 1844년부터 공용어였으며, 여전히 교육 및 행정 언어이다. 적도 기니 국민의 67.6%가 스페인어를 구사할 수 있으며, 특히 수도 말라보 거주자들이 그렇다. 프랑스어는 국경 일부 도시를 제외하고는 현지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으며, 포르투갈어 또한 현지에서 널리 사용되지는 않지만 안노본 주민과 현지 가톨릭 신자들은 포르투갈어와 연관이 있다.
토착 언어는 "국가 문화"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인정받는다. 토착 언어(일부는 크리올어)에는 팡어, 부비어, 벵가어, 콤베어(은도웨어), 발렝게어, 부헤바어, 비시오어, 구무어, 이그보어, 피칭글리스, 파 담보어(안노본어), 그리고 거의 사멸된 바세케어 등이 있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민족 집단은 반투어군 언어를 사용한다.

포르투갈어 크리올인 파 담보어는 안노본주, 말라보, 그리고 적도 기니 본토에서 사용된다. 비오코섬의 많은 주민들은 스페인어와 현지 교역어인 피칭글리스(영어 기반 크리올)도 구사할 수 있다. 안노본에서는 스페인어가 많이 사용되지 않는다. 정부 및 교육에서는 스페인어가 사용된다. 비크리올화된 포르투갈어는 현지 가톨릭 신자들이 종교 의례 언어로 사용한다. 역사적, 문화적 유대 관계로 인해 2010년 의회는 헌법 제4조를 개정하여 포르투갈어를 공화국의 공식 언어로 지정했다. 이는 포르투갈어 사용 국가들과의 소통, 무역, 양자 관계 개선을 위한 정부의 노력이었다. CPLP 가입 동기 중 하나는 여러 전문 및 학술 교류 프로그램 접근과 시민들의 국경 간 이동 용이성이었다.
9.4. 종교

적도 기니의 주요 종교는 기독교로, 인구의 93%가 신자이다. 로마 가톨릭 신자가 다수(88%)를 차지하며, 소수의 개신교 신자(5%)가 있다. 인구의 2%는 이슬람교(주로 수니파)를 따른다. 나머지 5%는 애니미즘, 바하이 신앙 및 기타 신앙을 실천하며, 전통적인 애니미즘 신앙은 종종 가톨릭 신앙과 혼합되기도 한다.
종교 | 비율 |
---|---|
로마 가톨릭 | 88% |
개신교 | 5% |
기타 (토착 신앙 / 바하이교) | 5% |
이슬람교 | 2% |
9.5. 교육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 중 적도 기니는 식자율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이다. CIA 월드팩트북에 따르면, 2015년 기준 15세 이상 인구의 95.3%가 읽고 쓸 수 있었다. 마시아스 정권 하에서는 소수의 어린이만이 교육을 받았으나, 오비앙 대통령 하에서는 문맹률이 73%에서 13%로 떨어졌고, 초등학생 수는 1986년 6만 5천 명에서 1994년 10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6세에서 14세 사이의 어린이를 위한 교육은 무상 의무 교육이다.
적도 기니 정부는 헤스 코퍼레이션 및 교육 개발 아카데미(AED)와 협력하여 초등학교 교사들이 현대 아동 발달 기술을 가르칠 수 있도록 2천만 달러 규모의 교육 프로그램을 설립했다. 현재 51개의 시범 학교가 운영되고 있으며, 이들 학교의 능동적 교수법은 국가 개혁의 일환이 될 것이다.
적도 기니에는 적도 기니 국립대학교(UNGE)라는 단일 종합대학이 있으며, 말라보에 캠퍼스가 있고 본토 바타에 의과대학이 있다. 2009년 이 대학은 최초로 110명의 국내 의사를 배출했다. 바타 의과대학은 주로 쿠바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쿠바 의료 교육자 및 의사들로 구성된 교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9.6. 보건
21세기 초 적도 기니의 말라리아 퇴치 프로그램은 말라리아 감염 및 사망률 감소에 성공을 거두었다. 이 프로그램은 연 2회 실내 잔류 분무(IRS), 아르테미시닌 복합 치료(ACTs) 도입, 임산부에 대한 간헐적 예방 치료(IPTp), 그리고 지속성 살충 처리 모기장(LLINs) 도입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5세 미만 아동의 모든 원인 사망률이 1,000명당 152명에서 55명으로 64% 감소했으며, 이는 프로그램 시작과 동시에 나타난 결과이다.
2014년 6월, 4건의 소아마비 사례가 보고되어, 이는 적도 기니 최초의 소아마비 발병 사례였다. 2023년 2월에는 국내 최초로 마르부르크열 환자가 확인되어 9명이 사망하고 16명이 감염 의심자로 분류되었다. 키에은템주에서는 감염 확산 방지를 위해 200명 이상이 격리되고 이동 제한 조치가 취해졌다.
10. 문화
적도 기니의 문화는 스페인 식민 지배의 영향과 아프리카 토착 문화가 혼합된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1984년 6월, 적도 기니의 문화적 정체성을 탐구하기 위한 제1차 히스패닉-아프리카 문화 회의가 개최되기도 했다.
10.1. 언론과 통신

적도 기니 내 주요 통신 수단은 3개의 국영 FM 라디오 방송국이다. BBC 월드 서비스, RFI, 가봉 기반의 아프리카 No 1이 말라보에서 FM으로 방송된다. 독립 라디오 옵션으로는 웹 기반 라디오 및 뉴스 매체로 오비앙 정권을 비판하는 뉴스를 발행하는 것으로 알려진 라디오 마쿠토가 있다. 또한 5개의 단파 라디오 방송국이 있다. 텔레비전 네트워크인 TVGE(Televisión de Guinea Ecuatorial)는 국영이다. 국제 TV 프로그램 RTVGE는 아프리카, 유럽, 아메리카 대륙에서 위성을 통해,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인터넷을 통해 시청 가능하다. 신문 2종과 잡지 2종이 있다.
적도 기니는 2012년 국경 없는 기자회 언론 자유 지수에서 179개국 중 161위를 차지했다. 감시 단체는 국영 방송사가 정보부의 명령에 복종한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언론사는 자체 검열을 하며, 공인을 비판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국영 언론과 주요 민영 라디오 방송국은 대통령의 아들인 테오도로 응게마 오비앙 망게가 운영한다.
유선 전화 보급률은 낮아 100명당 2회선에 불과하다. GSM 이동 전화 사업자는 1개이며, 말라보, 바타, 그리고 일부 본토 도시를 서비스한다. 2009년 기준, 인구의 약 40%가 이동 전화 서비스에 가입했다. 적도 기니의 유일한 전화 사업자는 오렌지 S.A.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22년까지 인터넷 사용자는 100만 명 이상이었다. 스페인에 망명 중인 언론인이 2012년부터 운영하는 디아리오 롬베(Diario Rombe)는 적도 기니 관련 정보를 보도하고 있다.
10.2. 음악
수쿠스나 마코사와 같은 범아프리카 스타일의 음악이 인기가 있으며, 레게톤, 라틴 트랩, 레게, 로큰롤도 인기 있다. 전통 음악은 민족 집단별로 다양하며, 북과 현악기, 성악이 주로 사용된다. 스페인 식민 지배의 영향으로 스페인 풍의 음악도 찾아볼 수 있다. 비오코섬 출신의 부비족 여성 듀오 이하스 델 솔은 스페인에서 활동하며 주목받았다.
10.3. 스포츠

적도 기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이다. 1979년에 축구 리그인 적도 기니 프리메라 디비시온이 창설되었다.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은 아직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적은 없지만,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는 3번 출전하여 2015년 자국 개최 대회에서 4강에 오르는 성과를 거두었다.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은 2008년과 2012년 아프리카 여자 네이션스컵에서 우승했으며, 2011년 FIFA 여자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기도 했다.
적도 기니는 2012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을 가봉과 공동 개최했으며, 2008년 아프리카 여자 네이션스컵과 2015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을 단독 개최했다. 2016년 6월에는 2019년 아프리카 게임 개최지로 선정되기도 했다.
올림픽에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이후 모든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고 있지만 아직 메달 획득 경험은 없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한 수영 선수 에릭 무삼바니는 매우 느린 기록에도 불구하고 완주하여 화제가 되었다. 농구 또한 인기가 증가하고 있다.
10.4. 요리
적도 기니 요리는 주로 스페인 요리와 모로코 요리 등 이슬람 국가 요리의 영향을 받았으며, 토착 부족의 요리법도 혼합되어 독자적인 특징을 지닌다. 고추와 여러 향신료를 사용한 맛을 내는 방식이 특징이다. 주식으로는 카사바, 고구마, 얌 등의 뿌리채소와 함께 쌀, 옥수수가 사용된다. 채소로는 오크라, 양상추, 당근, 토마토 등이 소비되며, 열대 과일도 즐겨 먹는다. 해산물 요리도 발달하여 상어 등을 이용한 요리가 있다.
10.5. 문학
적도 기니 문학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유일하게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스페인어권 문학의 영향을 받았다. 1778년부터 1968년까지의 식민지 시대 동안 스페인어 문학의 전통이 발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이는 아프리카 국가들 사이에서 독특한 문학적 특징을 형성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독재 정권 하에서의 언론 및 표현의 자유 제한은 문학 발전에 어려움을 주기도 했다.
10.6. 영화
201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네덜란드-적도 기니 합작 드라마 영화 길의 끝은 어디인가가 적도 기니에서 촬영되었다. 또한 오비앙 정권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다큐멘터리 서점 없는 나라의 작가가 있다.
10.7. 관광


2020년 기준 적도 기니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나 잠정 목록에 등재된 유산이 없다. 또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프로그램에 등재된 기록유산이나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된 무형 문화유산도 없다.
주요 관광 자원으로는 말라보의 식민지 시대 구역, 하이킹을 통해 일라디 폭포와 바다거북 산란을 관찰할 수 있는 외딴 해변이 있는 비오코섬 남부, 해안 산책로 파세오 마리티모와 자유의 탑이 있는 바타,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큰 가톨릭 교회인 무염시태 대성당이 있는 몽고모, 그리고 새로 계획되어 건설 중인 수도 시우다드데라파스 등이 있다.
10.8. 공휴일
적도 기니의 주요 국경일 및 법정 공휴일은 다음과 같다.
날짜 | 한국어 표기 | 스페인어 표기 | 비고 |
---|---|---|---|
1월 1일 | 새해 첫날 | Año Nuevo아뇨 누에보스페인어 | |
5월 1일 | 노동절 | Día del Trabajo디아 델 트라바호스페인어 | |
6월 5일 | 대통령 생일 | Natalicio del Presidente de la República나탈리시오 델 프레시덴테 데 라 레푸블리카스페인어 |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의 생일 |
8월 3일 | 자유 쿠데타의 날 | Día del Golpe de Libertad디아 델 골페 데 리베르타드스페인어 | 1979년 쿠데타 기념일 |
8월 15일 | 제헌절 | Día de la Constitución디아 데 라 콘스티투시온스페인어 | |
10월 12일 | 독립기념일 | Día de la Independencia디아 데 라 인데펜덴시아스페인어 | 1968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
12월 8일 |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 Festividad de la Inmaculada Concepción페스티비다드 데 라 인마쿨라다 콘셉시온스페인어 | |
12월 10일 | 인권의 날 | Día de los Derechos Humanos디아 데 로스 데레초스 우마노스스페인어 | |
12월 25일 | 크리스마스 | Navidad나비다드스페인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