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모리타니는 아프리카 북서부에 위치한 이슬람 공화국으로, 서쪽으로는 대서양, 북서쪽으로는 서사하라, 북동쪽으로는 알제리, 동쪽과 남동쪽으로는 말리, 남서쪽으로는 세네갈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국토의 약 90%가 사하라 사막 지대에 속하며, 인구 약 430만 명의 대부분은 비교적 온화한 남부 지역과 대서양 연안의 수도 누악쇼트에 집중되어 있다. 국명은 고대 마우레타니아 왕국에서 유래했으나, 지리적으로는 일치하지 않는다.
고대 베르베르인이 거주했던 이 지역은 7세기 후반 아랍인의 이주와 함께 이슬람교, 아랍 문화 및 아랍어가 전파되었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1960년 독립을 달성했다. 그러나 독립 이후 반복적인 쿠데타와 군부 독재를 경험했으며, 특히 2008년 모하메드 울드 압델 아지즈 장군이 주도한 쿠데타 이후 그의 장기 집권이 이어졌다. 2019년 모하메드 울드 가즈와니 대통령이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받았으나, 여전히 인권 상황, 특히 현대적 노예제의 지속 문제로 국제적인 비판을 받고 있다. 2018년 세계 노예 지수에 따르면 약 9만 명(인구의 2.1%)이 노예 상태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모리타니는 철광석, 석유 등 풍부한 천연자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빈곤한 국가로 남아 있으며, 경제는 주로 농업, 목축업, 어업에 기반을 두고 있다.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아랍 세계의 일원으로, 아랍 연맹 회원국이며 아랍어가 공용어이다. 국교는 이슬람교이며 거의 모든 주민이 수니파 무슬림이다. 아랍 정체성이 우세함에도 불구하고, 모리타니 사회는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랍-베르베르계인 베이단(백인 무어인)이 인구의 약 30%, 하라틴(흑인 무어인)이 약 40%를 차지하며, 나머지 30%는 다양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계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2. 어원
모리타니라는 국명은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까지 번성했던 고대 베르베르인 왕국이자 이후 로마의 속주였던 마우레타니아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두 영토는 지리적으로 겹치지 않는다. 역사적인 마우레타니아는 현대 모리타니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하여, 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의 서쪽 절반 전체에 걸쳐 있었다. '마우레타니아'라는 용어 자체는 해당 왕국의 베르베르 민족을 지칭하는 그리스어와 로마어의 외래 지명인 마우리족에서 파생되었다. '마우리'라는 단어는 무어인이라는 명칭의 어원이기도 하다.
아랍 지리학자들에게는 '신게티의 땅'이라는 의미의 بلاد شنقيط빌라드 신키트아랍어로 더 흔하게 알려져 있었다. '모리타니 옥시덴탈'(Mauritanie occidentale모리타니 옥시덴탈프랑스어, 서부 모리타니)이라는 용어는 프랑스의 군인이자 식민지 지도자였던 자비에 코폴라니의 제안에 기초하여 1899년 장관 회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현대 모리타니의 식민 점령과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스인들이 사용한 이 용어는 점차 이전에 국가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던 다른 명칭들을 대체하게 되었다.
3. 역사
모리타니의 역사는 고대 문명의 발흥, 이슬람의 전파, 유럽 열강의 식민 지배, 그리고 독립 이후 반복되는 정치적 격변과 민주화 노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고대에는 베르베르계 민족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계 민족이 거주했으며, 가나 왕국과 같은 강력한 국가가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이슬람 세력의 확장과 함께 무라비트 왕조와 같은 이슬람 제국이 이 지역을 지배했다. 19세기 말부터 프랑스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었고, 이는 1960년 독립으로 이어졌다. 독립 이후 모리타니는 초대 대통령 모크타르 울드 다다의 통치, 연이은 군사 쿠데타, 서사하라 분쟁 개입과 철수, 그리고 최근까지 이어지는 정치적 불안정과 민주화 시도 등 복잡한 현대사를 겪어왔다.
3.1. 고대 및 중세

모리타니 고대 부족은 베르베르인, 니제르콩고어족 계열 민족, 그리고 바푸르인이었다. 바푸르인은 유목 생활을 버리고 주로 농업 생활을 채택한 최초의 사하라 민족 중 하나였다. 사하라의 점진적인 건조화에 대응하여 그들은 결국 남쪽으로 이주했다. 많은 베르베르 부족들은 예멘(때로는 다른 아랍 지역) 기원을 주장해왔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거의 없다. 다만 2000년 예멘인에 대한 DNA 연구에서 일부 고대 연관성이 존재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우마이야 왕조는 모리타니에 진입한 최초의 아랍인 무슬림이었다. 초기 이슬람 정복 기간 동안 그들은 모리타니로 침입하여 7세기 말까지 이 지역에 존재했다. 모리타니의 많은 베르베르 부족들은 아랍인의 도착을 피해 말리의 가오 지역으로 도피했다.
다른 민족들도 사하라를 넘어 남쪽으로 서아프리카로 이주했다. 11세기에는 오늘날 모리타니와 겹치는 사막 지역의 여러 유목 베르베르 연합체가 연합하여 무라비트 왕조 운동을 형성했다. 그들은 북쪽과 남쪽으로 확장하여 사하라에서 유럽의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는 중요한 제국을 건설했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아랍 전통에 따르면, 무라비트 왕조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1076년경 고대 가나 제국을 정복했다고 한다.
1644년부터 1674년까지 현대 모리타니 지역의 토착민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침략하는 예멘계 마킬 아랍인들을 격퇴하기 위한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다. 이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으며, 샤르 부바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침략자들은 베니 하산 부족이 이끌었다. 베니 하산 전사들의 후손들은 무어인 사회의 상류층을 형성했다. 베니 하산을 따서 명명된 베두인 아랍어 방언인 하사니아 아랍어는 주로 유목민이었던 인구 사이에서 지배적인 언어가 되었다.
3.2. 프랑스 식민 시대


19세기 말부터 프랑스는 현재 모리타니 영토, 즉 세네갈강 지역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1901년, 자비에 코폴라니가 제국 임무를 맡았다. 자와야 부족과의 전략적 동맹과 하산 전사 유목민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결합하여 그는 모리타니 토후국들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를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1903년과 1904년부터 프랑스군은 트라르자, 브라크나, 타간트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북부의 아드라르 토후국은 셰이크 마알아이나인의 반식민 봉기(또는 지하드)와 타간트 및 다른 점령 지역의 반란군들의 도움으로 더 오래 저항했다. 1904년, 프랑스는 모리타니 영토를 조직하여 처음에는 보호령으로, 나중에는 식민지로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일부가 되었다. 1912년, 프랑스군은 아드라르를 격파하고 모리타니 영토에 편입시켰다.
프랑스 통치는 노예제에 대한 법적 금지와 부족 간 전쟁의 종식을 가져왔다. 식민지 기간 동안 인구의 90%는 유목민으로 남아 있었다. 점차적으로 수세기 전에 추방되었던 조상을 둔 정착민들이 모리타니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902년까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수도는 현대 세네갈에 있었다. 처음에는 생루이에 설립되었고, 나중에는 1902년부터 1960년까지 다카르에 있었다. 그해 세네갈이 독립하자 프랑스는 누악쇼트를 모리타니의 새로운 수도로 선택했다. 당시 누악쇼트는 요새화된 마을(또는 크사르)에 지나지 않았다.
모리타니 독립 후, 더 많은 수의 토착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민족들(할풀라르인, 소닝케인, 월로프인)이 이주해 왔으며, 대부분은 세네갈강 북쪽 지역에 정착했다. 이 새로운 이주민들 중 다수는 프랑스어와 프랑스 관습 교육을 받았으며, 신생 국가에서 서기, 군인, 행정가가 되었다. 동시에 프랑스는 북부의 가장 완고한 하산 부족들을 군사적으로 진압하고 있었다. 이들 부족에 대한 프랑스의 압력은 기존의 힘의 균형을 바꾸었고, 남부 인구와 무어인들 사이에 새로운 갈등이 발생했다.
1970년대 초의 대규모 사헬 가뭄은 모리타니에 막대한 황폐화를 야기하여 빈곤과 갈등 문제를 악화시켰다. 아랍화된 지배 엘리트들은 변화하는 상황과 해외의 아랍 민족주의 요구에 대응하여 법률 및 교육 시스템과 같은 모리타니 생활의 여러 측면을 아랍화하려는 압력을 강화했다. 이는 또한 식민 통치하 프랑스 지배의 결과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했다. 국가의 문화적 다양성을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모델이 제안되었지만 성공적으로 구현된 것은 없었다.
이러한 민족적 불화는 1989년 4월에 발생한 공동체 간 폭력 사태(모리타니-세네갈 국경 전쟁)에서 분명하게 드러났지만, 그 이후로는 가라앉았다. 모리타니는 1980년대 후반에 약 7만 명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계 모리타니인을 추방했다. 민족적 긴장과 과거, 그리고 일부 지역에서는 현재에도 존재하는 민감한 노예제 문제는 여전히 국가 정치 논쟁에서 강력한 주제이다. 모든 집단에서 상당수가 더 다양하고 다원적인 사회를 추구하고 있다.
3.3. 독립 이후
1960년 독립 이후 모리타니는 복잡한 정치적 여정을 거쳤다. 초대 대통령 모크타르 울드 다다의 장기 집권은 1978년 군사 쿠데타로 막을 내렸고, 이후 여러 차례 군사 정권이 들어섰다. 마우야 울드 시드아메드 타야는 1984년부터 2005년까지 장기 집권하며 다당제 도입 시도와 경제 정책을 추진했으나, 사회적 갈등 또한 심화되었다. 2005년과 2008년의 군사 쿠데타 이후 민주적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가 시도되었으며, 모하메드 울드 압델 아지즈와 모하메드 울드 가즈와니 대통령 시기를 거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서사하라 분쟁 개입과 철수, 그리고 지속적인 민주화 요구와 인권 문제는 모리타니 현대사의 주요 과제로 남아있다.
3.3.1. 모크타르 울드 다다 시대 (1960년~1978년)

1960년, 모리타니는 독립 국가가 되었다. 1964년, 원래 프랑스에 의해 임명된 모크타르 울드 다다 대통령은 새로운 헌법으로 모리타니를 일당제 국가로 공식화하여 권위주의적인 대통령제를 수립했다. 다다 자신의 모리타니 인민당은 일당제 체제에서 집권 조직이 되었다. 대통령은 모리타니가 서구식 다당제 민주주의에 준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정당화했다. 이 일당제 헌법 하에서 다다는 1976년과 1978년 무투표 선거에서 재선되었다.
다다는 1978년 7월 10일 무혈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그는 서사하라 전쟁에서 서사하라 남부(티리스알가르비야 주)를 합병하려는 재앙적인 전쟁을 통해 국가를 거의 붕괴 직전으로 몰고 갔으며, 이는 "대모리타니"를 건설하려는 시도로 포장되었다.
3.3.2. 군사 정권 시대 (1978년~1984년)
무스타파 울드 살렉 대령의 국가 회복 군사위원회 군정은 강력한 권력 기반을 구축하거나 사하라 저항 운동인 폴리사리오 전선과의 불안정한 갈등에서 국가를 벗어나게 하는 데 무능함을 드러냈다. 이 군정은 곧 무너지고 국가 구제 군사위원회라는 또 다른 군사 정부로 대체되었다.
활동적인 모하메드 쿠나 울드 하이달라 대령이 곧 강력한 지도자로 부상했다. 서사하라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함으로써 그는 폴리사리오와 평화를 찾고 주요 후원국인 알제리와의 관계를 개선했지만, 분쟁의 다른 당사자인 모로코와 그 유럽 동맹국인 프랑스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불안정은 계속되었고, 하이달라의 야심찬 개혁 시도는 실패했다. 그의 정권은 군부 내 쿠데타 시도와 음모로 시달렸다. 반대파에 대한 가혹하고 타협하지 않는 조치로 인해 그의 정권은 점점 더 많은 도전을 받았으며, 많은 반체제 인사들이 투옥되고 일부는 처형되었다.
모리타니의 노예제는 1905년, 1981년, 그리고 2007년 8월에 공식적으로 세 번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한다. 반노예제 활동가들은 박해, 투옥, 고문을 당하고 있다.
3.3.3. 마우야 울드 시드아메드 타야 시대 (1984년~2005년)
1984년 12월, 하이달라는 마우야 울드 시드아메드 타야 대령에 의해 축출되었는데, 그는 군사 통제를 강화하면서도 정치 분위기를 완화했다. 울드 타야는 모리타니의 이전 친알제리 입장을 완화하고 1980년대 후반 모로코와의 관계를 재정립했다. 그는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서방 국가 및 서방 동맹 아랍 국가들의 지원을 얻기 위한 모리타니의 노력의 일환으로 이러한 관계를 심화시켰다. 서사하라 분쟁에 대한 모리타니의 입장은 1980년대 이후 엄격한 중립을 유지해왔다.
모리타니-세네갈 국경 전쟁은 디아와라에서 무어인 모리타니 목축민과 세네갈 농민들 사이의 방목권 갈등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1989년 4월 9일, 모리타니 경비대가 세네갈인 2명을 살해했다. 이 사건 이후, 바켈, 다카르 및 세네갈의 다른 도시들에서 주로 지역 소매업을 장악하고 있던 아랍화된 모리타니인들을 대상으로 한 여러 폭동이 발생했다. 이 폭동은 이미 존재하던 긴장을 더욱 악화시켜, 종종 국적에 관계없이 베이단(백인 무어인)들에게 '세네갈인'으로 여겨지는 흑인 모리타니인들에 대한 테러 캠페인으로 이어졌다. 1990/91년까지 세네갈과의 소규모 분쟁이 계속되자, 모리타니 정부는 할풀라렌 민족 집단에 대한 폭력 행위와 재산 압류에 가담하고 이를 조장했다. 이 긴장은 세네갈과 모리타니가 국제적 압력 하에 추가 폭력을 막기 위해 합의한 국제 공수 작전으로 절정에 달했다. 모리타니 정부는 수천 명의 흑인 모리타니인을 추방했다. 이른바 '세네갈인'으로 불린 이들 대부분은 세네갈과 거의 또는 전혀 관계가 없었으며, 2007년 이후 세네갈과 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송환되었다. 추방된 정확한 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유엔 난민 기구(UNHCR)는 1991년 6월 현재 52,995명의 모리타니 난민이 세네갈에, 최소 13,000명이 말리에 거주하고 있다고 추정했다.
야당이 합법화되었고, 1991년에는 공식적인 군사 통치를 종식시키는 새로운 헌법이 승인되었다. 그러나 울드 타야 대통령의 선거 승리는 일부 야당 단체들에 의해 부정선거로 치부되었다.
1980년대 후반, 울드 타야는 이라크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강력한 아랍 민족주의 노선을 추구했다. 모리타니는 국제적으로 점점 더 고립되었고, 1991년 걸프 전쟁 당시 친이라크 입장을 취한 후 서방 국가들과의 긴장이 극적으로 고조되었다. 1990년대 중후반에 모리타니는 미국 및 유럽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외교 정책을 전환했다. 이는 외교 관계 정상화와 원조 프로젝트로 보상받았다. 1999년 10월 28일, 모리타니는 이집트, 팔레스타인, 요르단과 함께 이스라엘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유일한 아랍 연맹 회원국이 되었다. 울드 타야는 또한 대테러 활동에서 미국과 협력하기 시작했는데, 이 정책은 일부 인권 단체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울드 타야 대통령 정권 하에서 모리타니는 경제적으로 발전했으며, 2001년 우드사이드 에너지 회사가 석유를 발견했다.
3.3.4. 2005년 이후의 정치 변동


2005년 8월 군사 쿠데타
2005년 8월 3일, 엘리 울드 모하메드 발 대령이 이끄는 군사 쿠데타로 마우야 울드 시드아메드 타야 대통령의 21년간의 통치가 종식되었다. 타야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 파흐드 국왕의 장례식에 참석한 틈을 타, 대통령 경호대(BASEP) 대원들을 포함한 군대가 수도 누악쇼트의 주요 지점을 장악했다. 쿠데타는 인명 피해 없이 진행되었다. 자신들을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한 군사위원회라고 칭한 장교들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국군과 보안군은 지난 몇 년간 우리 국민이 겪어온 고(故) defunct 권위의 억압적인 활동을 결정적으로 종식시키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했습니다." 군사위원회는 나중에 울드 모하메드 발 대령을 대통령 겸 국가경찰청장(Sûreté Nationale)으로 지명하는 또 다른 성명을 발표했다. 한때 축출된 대통령의 확고한 동맹자로 여겨졌던 발은 원래 타야를 권좌에 앉힌 쿠데타에서 그를 도왔으며, 나중에는 그의 보안 책임자로 일했다. 다른 16명의 장교들이 위원회 위원으로 명단에 올랐다.
국제 사회의 조심스러운 주시 속에서도 쿠데타는 대체로 수용되었으며, 군사 정권은 약속된 2년 이내에 선거를 조직했다. 2006년 6월 26일 국민투표에서 모리타니인 97%가 대통령 임기를 제한하는 새 헌법을 승인했다. 정권 지도자인 발 대령은 국민투표를 준수하고 평화적으로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약속했다. 야당의 광범위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의 관계 수립(이스라엘을 인정한 세 아랍 국가 중 하나)은 새 정권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들은 그 입장을 서방의 환심을 사려는 타야 정권 시도의 유산으로 간주했다. 모리타니 의회 및 지방 선거는 2006년 11월 19일과 12월 3일에 치러졌다.
2007년 대통령 선거
모리타니 최초의 완전 민주적인 대통령 선거가 2007년 3월 11일에 치러졌다. 이 선거는 2005년 군사 쿠데타 이후 군사 통치에서 민간 통치로의 최종 이양을 가져왔다. 이는 모리타니가 1960년 독립한 이후 다자 후보 선거에서 대통령을 선출한 최초의 사례였다. 선거는 시디 울드 셰이크 압달라히가 아흐메드 울드 다다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2차 투표에서 승리했다.
2008년 군사 쿠데타
2008년 8월 6일, 대통령 경호대장이 누악쇼트의 대통령궁을 장악했다. 이는 집권당 의원 48명이 압달라히 대통령의 정책에 항의하여 사임한 다음 날이었다. 대통령이 대통령 경호대장을 포함한 고위 장교들을 해임한 후, 군대는 국영 텔레비전 건물을 포함한 주요 정부 시설을 포위했다. 대통령, 야흐야 울드 아흐메드 엘 와게프 총리, 모하메드 울드 르제짐 내무부 장관이 체포되었다.
쿠데타는 최근 해임된 모리타니 육군 참모총장이자 대통령 경호대장이었던 모하메드 울드 압델 아지즈 장군이 조정한 것이었다. 압둘라예 마마두바 모리타니 대통령 대변인은 대통령, 총리, 내무부 장관이 반란군 고위 장교들에게 체포되어 수도의 대통령궁에 가택 연금되었다고 말했다. 명백히 성공적이고 무혈 쿠데타에서 압달라히의 딸 아말 민트 셰이크 압달라히는 "BASEP(대통령 보안 대대) 보안 요원들이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를 데려갔다"고 말했다. 쿠데타 음모자들은 모두 직전에 대통령령으로 해임되었으며, 울드 압델 아지즈, 모하메드 울드 가즈와니 장군, 필립 스위크리 장군, 아흐메드 울드 바크리 준장(아키드) 등이 포함되었다.
2008년-2018년
모리타니 국회의원 모하메드 알 무크타르는 "대통령이 의회 다수를 소외시킨 권위주의 정권"이 된 정부의 장악을 많은 국민이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압델 아지즈 정권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고, 외교적 제재와 일부 원조 프로젝트 취소의 대상이 되었다. 국내에서는 압달라히를 중심으로 한 정당들이 쿠데타에 계속 항의하기 위해 연합했고, 이로 인해 군정은 시위를 금지하고 야당 활동가들을 탄압했다. 국제적 및 국내적 압력으로 결국 압달라히는 석방되었지만, 대신 고향 마을에 가택 연금되었다. 새 정부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쿠데타 이후 압델 아지즈는 압달라히를 대체할 새로운 대통령 선거를 주장했지만, 국내외 반대로 인해 연기해야 했다. 2009년 봄, 군정은 일부 야당 인사 및 국제 당사자들과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일부 야당 세력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고 프랑스와 알제리를 포함한 대부분의 국제 행위자들이 이제 압델 아지즈와 연대했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압달라히는 항의 속에 공식적으로 사임했다. 미국은 쿠데타를 계속 비판했지만 선거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압달라히의 사임으로 2009년 7월 18일 대통령 선거에서 압델 아지즈가 52%의 과반수로 민간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압달라HI의 많은 전 지지자들은 이를 정치적 술책이라고 비판하고 결과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불만에도 불구하고 선거는 서방, 아랍, 아프리카 국가들에 의해 거의 만장일치로 수용되었으며, 이들은 제재를 해제하고 모리타니와의 관계를 재개했다. 늦여름까지 압델 아지즈는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고 광범위한 국제적 및 국내적 지지를 얻은 것으로 보였다. 메사우드 울드 불케이르 상원의장과 같은 일부 인물들은 새로운 질서를 계속 거부하고 압델 아지즈의 사임을 요구했다.
2011년 2월, 아랍의 봄 물결이 모리타니로 확산되어 수천 명의 사람들이 수도 거리로 나왔다. 2014년 11월, 모리타니는 브리즈번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 비회원 초청국으로 초대되었다. 모리타니 국기는 2017년 8월 5일에 변경되었다. 국가의 희생과 국방의 상징으로 두 개의 붉은 줄무늬가 추가되었다. 2018년 말, 모리타니는 유럽 의회 의원(안토니오 판체리)에게 "모리타니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않도록" 뇌물을 주었고, 이는 카타르 유럽 의회 부패 스캔들로 알려지게 되었다.
2019년-현재
2019년 8월, 2019년 선거 이후 모하메드 울드 가즈와니가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이는 모리타니 독립 이후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로 간주되었다. 2021년 6월, 전 대통령 모하메드 울드 압델 아지즈는 횡령 혐의에 대한 부패 수사 중에 체포되었다. 2023년 12월, 아지즈는 부패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2024년 1월과 2월에는 배를 타고 카나리아 제도에 도착하는 난민이 2,000명에서 12,000명으로 급증했다. 이에 2024년 3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과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가 방문했고, 유럽 연합(EU)은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자국 영토를 통해 카나리아 제도, 즉 유럽으로 이동하는 것을 줄이기 위해 모리타니와 2.10 억 EUR 규모의 협정을 체결했다. 유엔(UN)은 말리에서 15만 명이 모리타니로 피신한 것으로 추정했다. 2024년 6월, 가즈와니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하여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3.4. 서사하라 분쟁과의 관계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스페인 식민 통치 이전 모로코와 모리타니 양측의 법적 유대 관계에 대한 일부 증거에도 불구하고, 어느 쪽의 유대 관계도 유엔 총회 식민지 국가 및 인민에 대한 독립 부여 선언의 서사하라 적용에 영향을 미칠 만큼 충분하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1976년, 모리타니는 모로코와 함께 서사하라 영토를 병합했다. 알제리(지역 강국이자 모로코의 경쟁국)의 강력한 무장 지원을 받는 폴리사리오 전선에 여러 차례 군사적 패배를 겪은 후, 모리타니는 1979년에 철수했다. 모리타니의 주장은 모로코가 인수했다. 경제적 약점 때문에 모리타니는 영토 분쟁에서 미미한 역할을 해왔으며, 공식 입장은 모든 당사자가 상호 합의할 수 있는 신속한 해결책을 원한다는 것이다. 서사하라 대부분이 모로코에 의해 점령되었지만, 유엔은 여전히 서사하라를 국가 지위에 대한 의사를 표명해야 하는 영토로 간주하고 있다. 원래 1992년에 예정되었던 국민투표는 유엔 주관 하에 언젠가 미래에 실시되어 토착 사하라위인들이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으로서 독립을 원하는지, 아니면 모로코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는지를 결정할 예정이다.
4. 지리
모리타니는 국토 대부분이 사하라 사막에 속하여 광활한 평원과 건조 기후가 특징이며, 이에 적응한 독특한 동식물군이 분포한다. 그러나 사막화, 가뭄, 메뚜기떼와 같은 심각한 환경 문제에 직면하고 있어 국가적 대응이 요구된다.

모리타니는 아프리카 대륙 서부 지역에 위치하며, 대체로 평탄하며 면적은 103.07 만 km2로 광활하고 건조한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간헐적인 능선과 절벽 같은 노두로 나뉜다. 북대서양, 세네갈과 서사하라, 말리와 알제리 사이에 국경을 접하고 있다. 사헬과 마그레브 지역의 일부로 간주된다. 모리타니의 약 4분의 3은 사막 또는 반사막이다. 장기간의 심각한 가뭄으로 인해 사막은 1960년대 중반부터 확장되고 있다.

일련의 단층애(scarp)가 남서쪽을 향하고 있으며, 국토 중앙부에서 이 평원들을 세로로 양분한다. 이 단층애들은 또한 일련의 사암 고원을 분리하는데, 그중 가장 높은 곳은 아드라르 고원으로 해발 500 m에 이른다. 일부 단층애 기슭에는 샘물이 솟는 오아시스가 있다. 광물이 풍부한 고립된 봉우리들이 고원 위로 솟아 있으며, 작은 봉우리는 '겔브'(guelb), 큰 봉우리는 '케디아'(kedia)라고 불린다. 동심원 구조의 리샤트 구조는 중북부 지역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주에라트 시 근처의 케디에트 에즈 질은 해발 915 m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고원들은 북동쪽으로 점차 낮아져 불모의 엘 주프(El Djouf) 또는 "빈 사막"(Empty Quarter)으로 이어지는데, 이곳은 거대한 모래 언덕 지역으로 사하라 사막과 합쳐진다. 서쪽으로는 대서양과 고원 사이에 점토 평야(reg)와 모래 언덕(erg)이 번갈아 나타나며, 일부 모래 언덕은 강풍에 의해 점차 이동한다. 모래 언덕은 일반적으로 북쪽으로 갈수록 크기와 이동성이 증가한다.
강우 패턴에 따른 자연 식생대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뻗어 있으며, 세네갈강을 따라 열대림의 흔적에서부터 남동부의 관목지와 사바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국토 중앙과 북부에는 모래사막만 발견된다. 모리타니는 사헬 아카시아 사바나, 서수단 사바나, 사하라 염생 식물 지대, 대서양 연안 사막, 북사하라 스텝 및 삼림 지대, 남사하라 스텝 및 삼림 지대, 서사하라 산지 건조 삼림 지대 등 7개의 육상 생태지역이 있다. "사하라의 눈"이라고 불리는 리샤트 구조는 모리타니 중서부 와단 근처 아드라르 고원에 있는 동심원 모양의 암석층이다.
4.1. 지형 및 기후
모리타니는 국토의 대부분이 사하라 사막으로 덮여 있으며, 이는 광활한 평원과 간헐적인 능선, 절벽 같은 지형으로 특징지어진다. 중앙부에는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단층애가 있으며, 이 단층애들은 사암 고원들을 분리한다. 가장 높은 아드라르 고원은 해발 약 500 m에 달하며, 일부 단층애 아래에는 오아시스가 형성되어 있다. 북동쪽으로는 모래 언덕이 광대하게 펼쳐진 엘 주프 지역이 사하라 사막과 연결된다. 서부 해안과 고원 사이에는 점토 평야와 이동하는 모래 언덕이 번갈아 나타난다. 최고봉은 북부의 케디에트 에즈 질(해발 915 m)이다.
모리타니의 기후는 전반적으로 매우 건조한 사막 기후(BWh)이다. 연 강수량은 극히 적으며, 특히 북부와 중앙부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다. 남부 사헬 지대는 여름철에 약간의 강우가 있으나 변동성이 크다. 기온은 연중 높으며, 여름에는 극심한 고온 현상이 나타난다. 해안 지역은 카나리아 해류의 영향으로 내륙보다 다소 온화하지만 여전히 건조하다. 겨울에는 북동쪽에서 하르마탄이라는 건조하고 먼지가 많은 바람이 불어온다.
4.2. 야생 생물
모리타니의 야생 동물은 두 가지 주요 생물 지리적 영역의 영향을 받는데, 북부는 사하라 사막에서 남쪽으로 약 19°N까지 확장되는 구북구에 속하고, 남부는 아프리카 열대구에 속한다. 또한 모리타니는 구북구에서 월동하기 위해 이동하는 수많은 조류에게 중요한 서식지이다.
북부 대부분은 구북구에 속하며, 주로 사하라 사막과 인접한 연안 서식지로 구성된다. 이 남쪽은 아프리카 열대 생물 지리구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이는 아프리카 열대 분포를 주로 하는 종들이 동물상을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하라 남쪽에는 남사하라 스텝 및 삼림 지대 생태 지역이 있으며, 이는 사헬 아카시아 사바나 생태 지역으로 통합된다. 국가의 최남단 부분은 서수단 사바나 생태 지역에 속한다.
습지는 중요하며 두 개의 주요 보호 구역은 건조한 사하라 사막과 통합된 풍부하고 얕은 연안 및 해양 생태계를 보호하는 방 다르긴 국립공원과 세네갈강 삼각주의 북쪽 부분을 형성하는 디아울링 국립공원이다. 모리타니의 다른 지역에서는 습지가 일반적으로 일시적이며 계절 강우에 의존한다.
4.3. 환경 문제
모리타니는 심각한 환경 문제에 직면해 있으며,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사막화의 확산이다. 과도한 방목, 삼림 벌채, 그리고 기후 변화로 인한 강수량 감소는 토지 황폐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이로 인해 경작지와 목초지가 줄어들고 있으며, 이는 농업과 목축업에 의존하는 지역 사회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주기적인 가뭄 또한 모리타니의 주요 환경 문제 중 하나이다. 가뭄은 물 부족을 심화시키고 식량 생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이는 식량 안보 문제로 이어진다.
또한, 메뚜기떼의 대규모 발생은 농작물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주요 재앙이다. 메뚜기떼는 광범위한 지역의 식생을 단시간 내에 파괴하여 식량 부족을 야기하고 경제적 손실을 초래한다.
수도 누악쇼트를 포함한 도시 지역에서는 부적절한 폐기물 관리와 수질 오염 문제도 나타나고 있다. 해안 지역에서는 과도한 어업으로 인한 해양 생태계 파괴도 우려되고 있다. 이러한 환경 문제들은 모리타니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저해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5. 정치

모리타니는 공화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 국가이다. 대통령은 국가 원수이자 행정부의 수반이며,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그러나 독립 이후 잦은 쿠데타와 군부의 정치 개입으로 인해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되어 왔다. 1991년 다당제 헌법이 도입되었으나, 실질적인 민주주의 정착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 몇 차례의 선거를 통해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군부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주요 정치 세력으로는 전현직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정당들이 있으며, 이슬람주의 세력과 소수 민족 기반 정당들도 활동하고 있다. 최근 정치 동향은 민주주의 제도 강화, 인권 개선, 경제 발전, 그리고 현대 노예제 문제 해결과 같은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5.1. 정부 구조
모리타니의 정부 구조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를 기반으로 하며, 권력은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있다.
- 대통령: 국가 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이며, 군대의 총사령관이다. 국민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임기는 5년이고 한 차례 연임이 가능하다. 총리를 비롯한 각료 임명권, 법률 공포권, 국회 해산권 등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한다.
- 총리 및 내각: 대통령이 임명하는 총리는 정부를 구성하고 대통령의 정책을 보좌하며 실행한다. 각료들로 구성된 내각은 대통령과 총리의 지휘를 받아 각 부처의 행정을 담당한다.
- 의회: 과거에는 상원과 국민의회(하원)의 양원제였으나, 2017년 국민투표를 통해 상원이 폐지되어 현재는 단원제인 국민의회만 존재한다. 국민의회 의원은 국민 직접 선거로 선출되며 임기는 5년이다. 입법권, 예산 심의 및 승인권, 정부 감독권 등을 가진다.
- 사법부: 사법권은 이론적으로 독립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행정부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다는 비판이 있다. 최고 사법기관은 대법원이며, 그 외에 항소 법원, 하급 법원 등이 있다. 이슬람법(샤리아)이 법체계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5.2. 군사
모리타니 군대(아랍어: الجيش الوطني الموريتاني, 프랑스어: Armée Nationale Mauritanienne)는 육군, 해군, 공군, 헌병대, 대통령 경호대로 구성된 모리타니 이슬람 공화국의 국방력이다. 기타 조직으로는 국가 방위대와 국가 경찰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내무부 소속이다. 2018년 기준 모리타니 군대의 국방 예산은 국가 GDP의 3.9%를 차지했다.
현재 국방부 장관은 하네나 울드 시디이며, 현재 국가 육군 참모총장은 모크타르 울드 볼라 차반 장군이다.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과거 서사하라 전쟁과 모리타니-세네갈 국경 전쟁 등 수많은 분쟁에 참여했으며, 현재는 항구적 자유 작전 - 트랜스 사하라에 참여하고 있다.
모리타니는 2024년 세계 평화 지수에 따르면 세계 163개국 중 95번째로 평화로운 국가로 평가되었다.
6. 행정 구역
모리타니의 정부 관료 체제는 전통적인 부처, 특별 기관, 그리고 국영 기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무부는 프랑스의 지방 행정 체제를 본뜬 지역 주지사와 도지사 제도를 총괄한다. 이 체제 하에서 모리타니는 15개 주(윌라야 또는 레지옹)로 나뉜다.
권력은 중앙 정부의 행정부에 집중되어 있지만, 1992년 이후 일련의 전국 및 지방 선거를 통해 제한적인 지방 분권화가 이루어졌다. 이들 주는 44개 군(무가타)으로 세분화된다.
각 주와 수도 구역 및 그 주도는 다음과 같다:
주 | 주도 | 지도 번호 |
---|---|---|
아드라르주 | 아타르 | 1 |
아사바주 | 키파 | 2 |
브라크나주 | 알레그 | 3 |
다클레트누아디부주 | 누아디부 | 4 |
고르골주 | 카에디 | 5 |
기디마카주 | 셀리바비 | 6 |
호드에슈샤르기주 | 네마 | 7 |
호드엘가르비주 | 아윤엘아트루스 | 8 |
인시리주 | 악주즈트 | 9 |
누악쇼트 북부주 | 다르나임 | 10 |
누악쇼트 서부주 | 테브라그제이나 | 10 |
누악쇼트 남부주 | 아라파트 | 10 |
타간트주 | 티지크자 | 11 |
티리스젬무르주 | 주에라트 | 12 |
트라르자주 | 로소 | 13 |
6.1. 주요 도시
모리타니의 주요 도시는 대부분 인구 밀집 지역인 남부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하며, 행정,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 누악쇼트: 모리타니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로,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다. 독립 이후 건설된 계획도시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인구는 약 140만 명(2023년 추정)으로, 국내 총인구의 약 3분의 1이 거주한다. 주요 항구와 국제공항이 있으며, 급격한 도시화와 함께 인프라 부족, 빈민가 형성 등의 문제도 안고 있다.
- 누아디부: 북서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제2의 도시이자 주요 항구 도시이다. 철광석 수출항으로서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수산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인구는 약 17만 명(2023년 추정)이다. 서사하라와의 국경에 가깝다.
- 키파: 남동부 아사바주의 주도로, 내륙 교통의 요지이다. 농업 및 목축업이 주요 산업이며, 지역 상업 중심지 역할을 한다. 인구는 약 8만 4천 명(2023년 추정)이다.
- 카에디: 남부 세네갈강 연안에 위치하며, 고르골주의 주도이다. 농업이 발달했으며, 지역 행정 및 교육의 중심지이다. 인구는 약 6만 3천 명(2023년 추정)이다.
- 주에라트: 북부 티리스젬무르주에 위치한 광산 도시로, 모리타니 철광석 생산의 중심지이다. 모리타니 철도를 통해 누아디부 항구로 철광석이 운송된다. 인구는 약 6만 2천 명(2023년 추정)이다.
- 로소: 남서부 세네갈강 연안에 위치하며, 트라르자주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이다. 세네갈과의 국경 도시로 교역이 활발하며, 농업이 발달했다. 인구는 약 6만 1천 명(2023년 추정)이다.
이 외에도 각 주의 주도들이 지역 행정 및 경제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7. 대외 관계
모리타니는 전통적으로 비동맹 중립 노선을 외교 정책의 기본 기조로 삼고 있다. 아랍 연맹, 아프리카 연합의 회원국으로서 아랍 및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연대를 중시한다. 과거 식민 모국이었던 프랑스와는 여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경제 및 군사적 지원을 받고 있다. 주변국인 모로코, 알제리, 말리, 세네갈과의 관계는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요인에 따라 복잡한 양상을 보여왔으며, 특히 서사하라 문제와 국경 안보 문제가 주요 현안이다. 최근에는 테러리즘 대응과 경제 개발을 위해 미국, 중국, 유럽 연합 및 기타 걸프 아랍국과의 협력도 강화하고 있다.
7.1. 대한민국과의 관계
모리타니와 대한민국은 1963년 7월 외교 관계 수립에 합의하였으나, 모리타니가 1964년 11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승인하고 이듬해 단독 수교하자 대한민국과의 관계는 실질적인 진전을 보지 못했다. 이후 대한민국은 주로 주프랑스 대사관을 통해 모리타니 관련 업무를 겸임해왔다. 양국 간 주요 교류 분야는 경제 협력, 특히 수산물 교역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모리타니는 대한민국에 문어 등 수산물을 수출하는 주요 국가 중 하나이다. 인도적 지원 및 개발 협력도 간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까지 양국은 상주 대사관을 두고 있지 않으며, 대한민국은 주모로코 대사관이 모리타니를 겸임하고 있다.
7.2. 주변 국가와의 관계
모리타니는 지리적으로 마그레브 지역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접경에 위치하여 주변 국가들과 복잡하고 다층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 모로코: 북쪽으로 서사하라를 사이에 두고 모로코와 접하고 있다. 과거 서사하라 분쟁 당시 모리타니는 모로코와 함께 서사하라를 분할 점령했으나, 이후 폴리사리오 전선과의 전투에서 어려움을 겪고 영유권을 포기했다. 이 과정에서 모로코와의 관계가 긴장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대체로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경제 및 안보 분야에서 협력하고 있다. 서사하라 문제는 여전히 양국 관계에 민감한 요소로 남아 있다.
- 알제리: 북동쪽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서사하라 문제에서 폴리사리오 전선을 지지하는 알제리와는 과거 모리타니의 서사하라 정책에 따라 관계가 변화했다. 현재는 테러리즘 공동 대응 등 안보 협력을 중심으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 말리: 동쪽과 남동쪽으로 긴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문화 및 민족 교류가 활발했다. 최근 말리의 정치적 불안정과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확산은 모리타니의 안보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양국은 국경 관리 및 테러 방지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말리 난민 문제도 주요 현안이다.
- 세네갈: 남서쪽으로 세네갈강을 국경으로 하여 접하고 있다. 1989년에는 양국 간 국경 분쟁(모리타니-세네갈 국경 전쟁)으로 인해 심각한 갈등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양국 국민 수만 명이 추방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후 관계는 개선되었으나, 어업권 문제, 국경 지역 자원 문제 등으로 인해 간헐적인 긴장이 발생하기도 한다. 경제적으로는 교역이 활발하다.
7.3. 기타 주요국과의 관계
- 프랑스: 과거 식민 모국으로서 모리타니와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는 모리타니의 주요 개발 협력 파트너이자 군사적 지원국이며, 프랑스어는 모리타니에서 널리 사용된다. 그러나 식민 지배의 역사로 인해 때로는 복잡한 감정이 교차하기도 한다.
- 미국: 미국은 모리타니의 대테러 전쟁 파트너로서 안보 및 군사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또한,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 개선을 위한 지원도 제공하고 있으나, 모리타니의 인권 상황, 특히 노예제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 중국: 중국은 최근 모리타니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인프라 건설, 자원 개발, 어업 분야 등에서 투자를 늘리고 있으며, 모리타니의 주요 경제 협력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 아랍 국가들: 모리타니는 아랍 연맹 회원국으로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등 걸프 국가들과 종교적, 경제적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이들 국가로부터 경제 원조와 투자를 받고 있으며, 정치적으로도 협력하고 있다. 과거 한때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도 했으나, 2009년 가자 지구 분쟁에 반발하여 단교했다.
8. 경제


모리타니 경제는 풍부한 천연자원에도 불구하고 낮은 국내총생산(GDP)과 높은 빈곤율을 특징으로 한다. 경제 구조는 전통적으로 1차 산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최근 광업과 석유 부문의 성장이 주목받고 있으나 국가 전체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데는 한계가 있다. 반복되는 가뭄과 정치적 불안정, 취약한 인프라, 그리고 높은 대외 부채가 경제 성장의 주요 제약 요인으로 작용한다. 정부는 외국인 투자 유치와 산업 다변화를 추진하고 있으나, 거버넌스 문제와 인권 문제, 특히 현대적 노예제의 잔존은 국제 사회의 투자와 지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8.1. 주요 산업
모리타니 경제는 주로 1차 산업과 광업에 의존하고 있다.
- 광업: 모리타니 경제의 가장 중요한 부문이다. 특히 철광석은 총수출의 약 50%를 차지하는 핵심 자원이다. 북부 주에라트 지역에 대규모 철광산이 있으며, 모리타니 철도를 통해 누아디부 항구로 운반되어 수출된다. 최근에는 금과 구리 채굴도 활발해지고 있으며, 이들 광물 역시 주요 수출품으로 부상하고 있다. 2015년 금 생산량은 9톤에 달했다.
- 수산업: 대서양 연안의 풍부한 어장은 모리타니의 중요한 외화 수입원이다. 문어, 오징어, 각종 어류가 주요 어획물이며, 이들은 주로 유럽 연합과 아시아 국가로 수출된다. 그러나 외국 어선의 불법 조업과 남획으로 인해 어족 자원 고갈 문제가 심각하며, 지속 가능한 어업 관리가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 농업 및 목축업: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이기 때문에 농업은 주로 남부 세네갈강 유역과 오아시스 지역에 국한된다. 주요 작물은 조, 수수, 쌀, 옥수수, 땅콩, 대추야자 등이다. 목축업은 전통적으로 중요한 산업으로, 소, 양, 염소, 낙타 등을 사육하지만, 잦은 가뭄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부분의 식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식량 안보가 취약하다.
- 석유 및 가스: 2000년대 초반 해상에서 석유가 발견되었으나, 생산량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해상 가스전 개발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으며, 이는 장기적으로 모리타니 경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관광업은 아직 미미한 수준이며, 서비스업은 주로 수도 누악쇼트를 중심으로 발달해 있다. 제조업 기반은 매우 취약하다.
8.2. 천연자원
모리타니는 다양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국가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철광석: 모리타니의 가장 중요한 천연자원이자 주요 수출품이다. 북부 주에라트 지역을 중심으로 대규모 고품질 철광석이 매장되어 있으며, 모리타니 철도를 통해 누아디부 항구로 운송되어 주로 중국과 유럽으로 수출된다. 철광석 수출은 국가 재정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 석유 및 천연가스: 2001년 해상 신게티 유전에서 석유가 처음 발견되었으며, 상업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매장량이나 생산 규모는 제한적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대규모 해상 천연가스전(예: Greater Tortue Ahmeyim 프로젝트)이 발견되어 개발이 진행 중이며, 이는 향후 모리타니 경제의 중요한 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 금: 최근 몇 년간 금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여 주요 수출품으로 부상했다. 여러 국제 광산 회사들이 내륙 지역에서 금광을 개발하고 있으며, 금 수출은 철광석에 이어 중요한 외화 수입원이 되고 있다.
- 구리: 금과 함께 채굴되는 주요 광물 중 하나로, 수출을 통해 경제에 기여하고 있다. 악주즈트 인근에 주요 구리 광산이 있다.
- 어족 자원: 대서양 연안의 모리타니 배타적 경제 수역(EEZ)은 세계적으로 풍부한 어장 중 하나로 꼽힌다. 다양한 종류의 어류, 문어, 오징어 등이 풍부하여 수산업 발달의 기반이 된다.
- 기타 광물: 인광석, 석고, 암염 등 다른 광물 자원도 부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직 대규모 상업적 개발은 미미한 수준이다.
이러한 천연자원의 효율적이고 투명한 관리, 그리고 이를 통한 국가 발전과 국민 복지 향상은 모리타니 정부의 중요한 과제이다.
8.3. 교통

모리타니의 교통 인프라는 아직 발달이 미흡한 편이며, 광대한 국토와 척박한 자연환경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 도로: 주요 도시와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망이 있으나, 대부분의 도로는 포장 상태가 좋지 않거나 비포장도로이다. 특히 사막 지역에서는 도로 유지가 어렵다. 수도 누악쇼트와 주요 경제 중심지인 누아디부를 연결하는 해안 고속도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차량은 우측 통행이다.
- 철도: 가장 중요한 철도 노선은 모리타니 철도로, 북부 주에라트의 철광산에서 누아디부 항구까지 약 700 km에 걸쳐 철광석을 운반한다. 이 철도는 세계에서 가장 긴 열차 중 하나로도 알려져 있으며, 화물 운송 외에 제한적으로 여객 운송도 이루어진다. 이 외의 철도망은 거의 없다.
- 항만: 주요 항구로는 수도 누악쇼트에 위치한 누악쇼트 자치항(Port Autonome de Nouakchott, 우정의 항구라고도 불림)과 북부의 누아디부 항이 있다. 누아디부 항은 주로 철광석 수출에 특화되어 있으며, 누악쇼트 항은 일반 화물과 컨테이너, 그리고 최근에는 석유 및 가스 관련 물류도 처리한다. 어항들도 연안에 분포해 있다.
- 공항: 주요 국제공항은 누악쇼트 움툰시 국제공항(Nouakchott-Oumtounsy International Airport)으로, 이전의 누악쇼트 국제공항을 대체하여 2016년에 개항했다. 누아디부에도 국제공항이 있으며, 일부 지방 도시에도 소규모 공항이나 활주로가 있다. 항공편은 주로 프랑스, 북아프리카, 서아프리카 국가들과 연결된다.
대중교통 시스템은 도시 지역에서도 미비하며, 비공식적인 택시나 미니버스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사막 지역에서는 여전히 낙타가 중요한 이동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9. 사회
모리타니 사회는 아랍-베르베르 문화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문화가 혼재된 다민족, 다언어 사회이다. 전통적인 계층 구조와 부족주의가 여전히 사회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슬람교는 국민 대다수의 생활 규범이자 사회 통합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러나 민족 간의 사회경제적 불균형, 특히 하라틴(흑인 무어인) 및 기타 흑인 아프리카계 주민들에 대한 차별과 현대적 노예제의 잔존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남아있다. 교육 및 보건 시스템은 취약하며, 높은 문맹률과 열악한 공중 보건 지표가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다. 급격한 도시화와 함께 전통적인 생활 양식이 변화하고 있으며, 청년층의 실업 문제도 중요한 사회적 과제이다.
9.1. 인구
인구 변화 | |
---|---|
연도 | 인구 (백만 명) |
1950 | 0.7 |
2000 | 2.7 |
2023 (추정) | 4.3 |
2023년 기준, 모리타니의 총인구는 약 4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인구 증가율은 비교적 높은 편이며, 출산율 또한 높다. 인구 밀도는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이기 때문에 매우 낮지만, 인구 분포는 매우 불균등하다. 대다수의 인구는 상대적으로 강수량이 있는 남부 세네갈강 유역과 대서양 연안 지역, 특히 수도 누악쇼트에 집중되어 있다. 누악쇼트에는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 가량이 거주하고 있다.
연령 구조는 젊은 층의 비율이 매우 높은 전형적인 개발도상국의 피라미드 형태를 보인다. 이는 높은 부양비 부담과 함께 향후 노동 시장 진입 인구의 급증을 예고한다.
도시화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반복적인 가뭄으로 인해 많은 유목민과 농촌 주민들이 도시로 이주했다. 이러한 급격한 도시화는 주택 부족, 실업, 사회 기반 시설 부족 등 다양한 도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평균 수명은 남녀 모두 60대 중반으로, 다른 개발도상국에 비해 낮은 편이다.
9.2. 민족
모리타니는 다양한 민족 집단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이다. 주요 민족 집단은 다음과 같다.
- 베이단 (Bidhan, 또는 백인 무어인): 인구의 약 30%를 차지하며, 주로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의 혼혈 후손이다. 전통적으로 사회의 지배 계층을 형성해왔으며, 하사니아 아랍어를 사용한다. 주로 유목 생활을 하거나 도시에서 상업 및 정치 분야에 종사한다.
- 하라틴 (Haratin, 또는 흑인 무어인): 인구의 약 40%를 차지하며, 역사적으로 베이단 계층에 의해 노예화되었던 사람들의 후손이 다수이다. 피부색은 검지만 문화적으로는 아랍화되어 하사니아 아랍어를 사용한다. 현재 법적으로는 노예제가 폐지되었으나, 여전히 사회경제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으며 차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주로 농업, 오아시스 경작, 도시의 저임금 노동에 종사한다.
-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계 흑인: 인구의 나머지 약 30%를 차지하며, 주로 남부 세네갈강 유역에 거주한다. 주요 민족으로는 풀라니인(Halpulaar 또는 Fulbe), 소닝케인, 밤바라인, 월로프인 등이 있다. 이들은 각각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주로 농업과 어업에 종사한다. 과거 민족 갈등, 특히 1980년대 후반에 이들 민족에 대한 탄압과 추방이 있었던 아픈 역사가 있다.
이러한 민족 구성은 모리타니 사회의 복잡한 계층 구조와 정체성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민족 간의 평등과 통합은 국가의 중요한 과제이다.
9.3. 언어
모리타니의 공용어이자 국어는 아랍어이다. 일상생활에서 주로 사용되는 아랍어는 하사니아 방언으로, 이는 마그레브 아랍어의 일종이며 베르베르어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언어의 영향을 받았다. 현대 표준 아랍어는 공식 문서, 교육, 미디어에서 사용된다.
프랑스어는 공식적인 지위는 없지만, 행정, 교육(특히 고등 교육 및 과학 분야), 상업, 미디어에서 널리 사용되는 중요한 언어이다. 이는 프랑스 식민 통치의 유산이다.
이 외에도 모리타니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니제르콩고어족 계열의 민족 언어들이 사용된다. 주요 민족 언어로는 풀라어(풀라니인), 소닝케어(소닝케인), 월로프어(월로프인) 등이 있으며, 이들 언어는 1991년 헌법에 의해 국민 언어로 인정받았다.
소수의 베르베르어 방언(예: 제나가어)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으나, 사용자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영어의 사용도 교육 및 국제 교류 분야에서 점차 증가하고 있다.
9.4. 종교

모리타니는 거의 100%가 이슬람교를 믿는 국가이며, 이슬람교는 국교이다. 대부분의 주민은 수니파 이슬람의 말리키 학파를 따른다. CIA 월드 팩트북에 따르면, 인구의 99.9%가 이슬람교도이며, 0.1%가 기독교인이다. 수피즘(이슬람 신비주의) 또한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티자니야와 카디리야와 같은 수피 교단이 널리 퍼져 있다. 이들 교단은 모리타니뿐만 아니라 모로코, 알제리, 세네갈 등 주변 국가에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1991년 헌법은 이슬람법(샤리아)을 국가 법률의 주요 원천으로 규정하고 있다. 종교는 모리타니 사회생활의 모든 측면에 깊숙이 관여하며, 공공생활과 개인의 윤리 규범에 중요한 지침을 제공한다.
기독교 인구는 극소수이며, 대부분 서아프리카나 유럽에서 온 외국인 거주자들이다. 2020년 추산에 따르면 약 1만 명의 기독교인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누악쇼트 로마 가톨릭 교구는 1965년에 설립되어 주로 외국인 가톨릭 신자들을 대상으로 사목 활동을 하고 있다.
종교의 자유는 극도로 제한되어 있으며, 특히 이슬람교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고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무신론 또한 사형으로 처벌될 수 있는 13개국 중 하나이다. 2018년에는 "신성모독적 발언" 및 "신성모독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에게 의무적으로 사형을 선고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또한 "공공 음란 및 이슬람 가치 모독", "알라의 금지 사항 위반" 또는 위반 조장에 대해 최대 2년의 징역과 벌금을 규정하고 있다.
9.5. 교육

모리타니의 교육 시스템은 프랑스 모델의 영향을 받았으며, 초등, 중등, 고등 교육 단계로 구성된다. 6세부터 12세까지의 초등 교육은 의무 무상 교육으로 규정되어 있으나, 실제 취학률과 교육의 질은 지역별, 성별,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라 차이가 크다.
1999년부터 초등학교 1학년의 모든 수업은 현대 표준 아랍어로 진행되며, 2학년부터 프랑스어가 도입되어 모든 과학 과목을 가르치는 데 사용된다. 영어의 사용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전통적인 이슬람 교육기관인 마드라사(꾸란 학교)도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중등 교육은 일반 중등 교육과 기술 및 직업 교육으로 나뉜다. 고등 교육 기관으로는 수도 누악쇼트에 있는 누악쇼트 대학교(공식 명칭: University of Nouakchott Al Aasriya)를 비롯한 몇몇 대학과 전문학교가 있다. 그러나 많은 우수한 학생들은 해외, 특히 프랑스나 다른 아랍 국가로 유학을 간다.
모리타니 교육 시스템이 직면한 주요 과제로는 낮은 식자율(2021년 추정 약 57%), 높은 중퇴율, 교육 시설 및 교사 부족, 교육의 질 저하, 그리고 교육 내용과 노동 시장 수요 간의 불일치 등이 있다. 특히 여아 교육과 농촌 지역 교육 접근성 개선이 시급한 문제로 지적된다. 정부는 교육 부문에 대한 지출을 늘리고 교육 개혁을 추진하고 있으나,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기까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2024년 세계 혁신 지수에서 모리타니는 139개국 중 126위를 차지했다.
9.6. 보건
모리타니의 보건 지표는 전반적으로 낮은 수준이며,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평균과 비슷하거나 다소 열악하다. 2011년 기준 출생 시 기대수명은 61.14세였다. 영아 사망률은 2011년 추정치로 출생아 1,000명당 60.42명으로 높은 편이다. 2004년 1인당 보건 지출은 미국 달러 PPP 기준 43달러였으며, 공공 지출은 GDP의 2%, 민간 지출은 GDP의 0.9%를 차지했다. 21세기 초, 인구 10만 명당 의사 수는 11명으로 의료 인력 부족이 심각하다.
주요 사망 원인으로는 말라리아, 호흡기 감염, 설사병 등 감염성 질환과 영양실조가 꼽힌다. 최근에는 고혈압, 당뇨병 등 비감염성 질환도 증가하는 추세이다.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은 도시와 농촌 간 격차가 크며, 특히 농촌 지역과 유목민들은 기본적인 의료 혜택을 받기 어렵다. 여성과 아동의 건강 문제는 특히 심각하여, 높은 모성사망률과 아동 영양실조율을 보이고 있다.
특이한 사회적 관습 중 하나인 르블루(gavage가바주프랑스어)는 어린 소녀들에게 강제로 음식을 먹여 살을 찌우는 전통으로, 비만을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여기는 일부 지역의 풍습이다. 이로 인해 비만, 심혈관 질환, 당뇨병 등 건강 문제가 발생하며, 정부와 국제기구는 이러한 관습을 근절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위생 시설 부족과 깨끗한 식수 접근성 부족도 공중 보건을 위협하는 주요 요인이다.
10. 인권

모리타니의 인권 상황은 국제 사회로부터 지속적인 우려와 비판을 받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현대 노예제의 잔존이다. 또한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및 결사의 자유가 제한되며, 언론인과 인권 운동가에 대한 탄압이 발생하기도 한다. 여성과 아동의 권리 보호도 미흡하여, 여성 성기 절제(FGM), 조혼, 가정 폭력 등이 문제로 지적된다.
소수 민족, 특히 남부의 아프리카계 흑인과 하라틴(흑인 무어인)에 대한 차별과 정치적 소외도 여전하다. 사법 시스템은 독립성과 공정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으며, 구금 시설의 환경이 열악하고 수감자에 대한 처우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고문 및 기타 비인도적인 처우에 대한 보고도 있다.
동성애는 불법이며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중범죄이다. 종교의 자유 또한 극도로 제한되어, 이슬람교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무신론을 표방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며 처벌 대상이 된다.
압달라히 정부는 부패하고 정부 정보 접근을 제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성차별, 인종차별, 여성 성기 절제, 아동 노동, 인신매매, 그리고 주로 남부에 기반을 둔 소수 민족의 정치적 소외는 계속해서 문제점으로 남아 있었다.
2008년 쿠데타 이후, 모리타니 군사 정부는 심각한 국제 제재와 내부 불안에 직면했다. 국제앰네스티는 군사 정부가 형사 및 정치범에 대해 조직적인 고문을 자행했다고 비난했다. 국제앰네스티는 2008년 쿠데타 전후 모리타니 사법 시스템이 법적 절차, 공정한 재판, 인도적인 수감 환경을 완전히 무시한 채 운영되었다고 비판했다. 이 단체는 모리타니 정부가 독립 이후 모든 지도자 하에서 제도화되고 지속적인 고문을 자행해왔다고 밝혔다.
미국 국무부의 2010년 인권 보고서에 따르면, 모리타니의 인권 침해 사례는 다음과 같다:
"구금자 및 수감자에 대한 학대; 보안군의 면책; 장기적인 재판 전 구금; 열악한 교도소 환경; 자의적인 체포 및 구금; 언론 및 집회의 자유 제한; 부패; 여성 차별; 여성 성기 절제(FGM); 조혼; 남부 기반 소수 민족의 정치적 소외; 인종 및 민족 차별; 노예제 및 노예제 관련 관행; 그리고 아동 노동."
유엔 개발 계획(UNDP)과 같은 국제기구는 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SDGs)에 따라 이러한 인권 침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블루 이코노미와 재생 가능 에너지 전환 개선을 통해 UNDP는 특히 모리타니 고용 시장에서 소외된 청년과 여성을 위한 고용 기회 창출을 목표로 한다.
정부는 인권 상황 개선을 위한 일부 법적 조치를 취하기도 했으나, 실제 이행과 사회적 인식 변화는 더딘 상황이다. 국제 인권 단체들은 모리타니 정부에 보다 적극적인 인권 보호 노력과 가해자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10.1. 현대 노예제
모리타니에서는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노예제가 존재해왔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현대적 노예제의 형태로 지속되고 있어 심각한 인권 문제로 지적된다. 노예제는 주로 혈통에 기반하여 세습되며, 피부색이 어두운 하라틴(흑인 무어인)이 주로 노예가 되고 피부색이 밝은 베이단(백인 무어인)이 주인이 되는 구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계 민족 집단 내에서도 노예 관행이 존재하며, 일부 보고에 따르면 남부 지역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노예제가 더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는 주장도 있다.
프랑스 식민 행정부는 1905년 모리타니에서 노예제 종식을 선언했으나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모리타니는 1961년 강제 노동 금지 협약을 비준했으며, 이미 1959년 헌법에서 노예제 폐지를 암묵적으로 명시했다. 1981년 대통령령으로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나, 노예 소유를 처벌하는 형법은 2007년에야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법적 조치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노예제가 근절되지 않고 있으며, 정부의 단속 의지와 처벌이 미흡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2012년 CNN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모리타니 인구의 10~20%(약 34만~68만 명)가 노예 상태에 놓여있다고 추정되었으나, 일부 학자들은 이 추정치가 과장되었다고 본다. 2018년 워크프리 재단의 세계 노예 지수(Global Slavery Index)에 따르면 모리타니에는 약 9만 명(인구의 약 2%)의 노예가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피해자들은 강제 노동, 가사 노동, 성적 착취 등에 시달리며, 교육과 기본적인 권리로부터 소외된다.
모리타니에서 노예제 종식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는 다음이 있다:
- 광대한 사막 지역에서 법을 시행하기 어려운 점.
- 노예들이 해방되더라도 자립할 기회가 제한적인 빈곤 문제.
- 노예제가 사회의 자연스러운 질서의 일부라는 일부의 잘못된 믿음.
정부는 노예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국내외 인권 단체들은 노예제의 실태를 고발하고 정부의 적극적인 해결 노력을 촉구하고 있다. 노예제 철폐 운동가들에 대한 탄압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11. 문화

모리타니 문화는 아랍-베르베르 유목 문화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정착 농경 문화가 혼합된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이슬람교는 사회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치며, 전통적인 관습과 가치관이 현대 생활에도 남아 있다. 문학, 음악, 공예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고유한 예술 형식을 발전시켜 왔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고대 도시들은 풍부한 역사적 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11.1. 전통과 생활 양식
모리타니의 전통적인 사회 관습은 유목 문화와 이슬람 전통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베이단(백인 무어인) 사회에서는 씨족과 부족 중심의 계층 구조가 여전히 중요하며, 장로에 대한 존경과 공동체적 가치가 강조된다. 하라틴(흑인 무어인)과 남부 아프리카계 민족들은 각기 고유한 전통과 관습을 유지하고 있다.
전통 의복으로는 남성들이 주로 입는 넓고 푸른색이나 흰색의 긴 옷인 '드라'(درّاعة다라아아랍어)와 여성들이 몸 전체를 감싸는 화려한 천인 '무라파'(ملحفة말라파아랍어)가 대표적이다. 주거 형태는 전통적으로 유목민들의 천막('카이마')이 있었으나,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현대적인 주택이 늘고 있다.
가족 제도는 가부장제적 특징이 강하며, 대가족 중심의 생활이 일반적이다. 결혼과 장례 등 주요 의례는 이슬람 관습에 따라 치러진다. 손님에 대한 환대는 매우 중요한 미덕으로 여겨진다. 차를 마시는 문화, 특히 여러 번 우려내어 마시는 '아타이'(민트 차)는 사교 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11.2. 음식 문화
모리타니 음식 문화는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의 영향을 받았으며, 주로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한다. 주식은 쿠스쿠스, 쌀, 수수, 기장 등이며, 양고기, 염소고기, 낙타고기, 닭고기가 주요 단백질 공급원이다. 이슬람 국가이므로 돼지고기는 먹지 않는다.
대표적인 전통 음식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쿠스쿠스: 잘게 빻은 밀가루(세몰리나)를 쪄서 고기나 채소 스튜와 함께 먹는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즐겨 먹는 음식이다. 모리타니에서는 양고기나 낙타고기를 곁들여 먹는 경우가 많다.
- 티부디엔 (Thieboudienne): 생선과 밥, 토마토소스, 다양한 채소를 함께 찐 음식으로, 세네갈에서 유래했지만 모리타니에서도 매우 인기 있다.
- 마페 (Maafe): 땅콩버터 소스에 고기(주로 양고기나 닭고기)와 채소를 넣어 끓인 스튜로, 밥이나 쿠스쿠스와 함께 제공된다.
- 야사 (Yassa): 양파와 레몬(또는 식초)으로 양념한 소스에 닭고기나 생선을 재워 구운 요리이다.
- 대추야자: 사막 지역에서 중요한 식량 자원으로, 간식이나 디저트로 즐겨 먹는다.
- 낙타젖: 유목민들에게 중요한 영양 공급원이며, 신선하게 마시거나 발효시켜 먹는다.
- 아타이 (Atay): 녹차에 설탕과 신선한 박하 잎을 넣어 진하게 끓여 마시는 전통차이다. 여러 번에 걸쳐 작은 잔에 따라 마시며, 손님 접대와 사교 활동에 빠지지 않는 중요한 문화이다.
해안 지역에서는 생선 요리가 발달했으며, 내륙에서는 육류와 유제품 중심의 식생활이 이루어진다. 채소는 구하기 어려운 편이며, 수입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11.3. 음악과 예술
모리타니의 음악과 예술은 아랍-베르베르 문화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문화의 영향을 받아 독특하게 발전했다.
- 음악: 전통 음악은 '무어 음악'으로 알려져 있으며, 시적인 가사와 복잡한 리듬, 독특한 선율이 특징이다. 주요 악기로는 여성들이 연주하는 하프의 일종인 '아르딘'(آردين아르딘아랍어), 남성들이 연주하는 류트의 일종인 '티디니트'(تيدينيت티디니트아랍어), 그리고 북인 '타블'(طبل타블아랍어) 등이 있다. 음악은 결혼식, 축제 등 사회적 행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가윈'(إيغاون이가윈아랍어)이라고 불리는 전문 음악가 계층이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 춤: 음악과 함께 다양한 전통 춤이 있으며, 행사나 의식의 성격에 따라 다른 형태의 춤을 춘다.
- 구전 문학: 시와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승되는 전통이 강하다. 특히 베이단 사회에서는 '트헤이딘'(التهيدين트헤이딘아랍어)이라는 영웅 서사시가 유명하며, 이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 시는 사랑, 용기, 사회 비판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 수공예품: 전통적인 수공예품으로는 가죽 제품, 목공예품, 도자기, 그리고 특히 은세공품이 유명하다. 정교한 문양의 장신구, 칼, 그릇 등이 제작된다. 여성들은 종종 화려한 문양의 직물을 짜거나 바구니를 만든다.
현대에는 서양 음악과 예술의 영향도 받고 있으나, 전통 예술의 보존과 계승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
11.4. 스포츠
모리타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이다. 국내에는 모리타니 프리미어 리그라는 프로 축구 리그가 있으며, 모리타니 축구 국가대표팀은 "알무라비툰"(무라비트 왕조의 전사들을 의미)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2012년 세계 최하위권 팀 중 하나로 평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리타니는 2019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 처음으로 본선 진출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후에도 꾸준히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 참가하고 있다. 누악쇼트 올림픽 스타디움과 누아디부 시립 경기장 등이 주요 축구 경기장이다.
축구 외에는 육상, 농구 등도 일부 즐겨 하는 스포츠이다. 사막 지역의 특성을 살린 전통적인 경주(낙타 경주 등)도 간혹 열린다. 국제 대회에서의 성과는 아직 미미한 편이지만, 스포츠 인프라 확충과 선수 육성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모로코는 모리타니에 스포츠 단지 건설을 약속하기도 했다.
11.5. 세계유산
모리타니에는 2건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등재되어 있다.
- 고대 크수르 우아단, 신게티, 티시트, 우알라타 (Ancient Ksour of Ouadane, Chinguetti, Tichitt and Oualata): 1996년에 등재된 문화유산이다. 이들 고대 도시는 11세기에서 12세기에 사하라 종단 무역로를 따라 건설된 요새화된 정착지(크수르)로, 이슬람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잘 보존된 전통 건축물, 모스크, 도서관 등이 남아 있어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높다. 특히 신게티는 한때 메카 순례의 중요한 경유지이자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로 명성이 높았다.
- 방 다르긴 국립공원 (Banc d'Arguin National Park): 1989년에 등재된 자연유산이다.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이 국립공원은 광대한 갯벌, 섬, 얕은 바다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다양한 철새 도래지 중 하나이다. 매년 수백만 마리의 철새가 이곳에서 월동하거나 번식하며, 다양한 어류와 해양 포유류(예: 지중해몽크물범)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생물 다양성 보존에 있어 국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다.
이들 세계유산은 모리타니의 풍부한 역사와 자연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산이다.
11.6. 공휴일
모리타니의 공휴일은 주로 이슬람 종교 관련 기념일과 국가적인 기념일로 구성된다. 이슬람 관련 공휴일은 히즈라력(이슬람력)을 따르므로 매년 날짜가 변경된다.
날짜 | 한국어 명칭 | 현지어 명칭 (아랍어)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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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 새해 첫날 | رأس السنة الميلادية | |
5월 1일 | 노동절 | عيد الشغل | |
5월 25일 | 아프리카의 날 | يوم افريقيا | 아프리카 연합 창설 기념 |
11월 28일 | 독립기념일 | عيد الإستقلال الوطني |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 |
히즈라력 제1월(무하람) 1일 | 이슬람 새해 | رأس السنة الهجرية | 이동 축일 |
히즈라력 제3월(라비 알 아왈) 12일 | 예언자 마호메트 탄생일 | عيد المولد النبوي الشريف | 이동 축일 |
히즈라력 제10월(샤왈) 1일 ~ 2일 (또는 3일) | 이드 알피트르 (라마단 종료 축제) | عيد الفطر المبارك | 이동 축일, 라마단 종료 후 |
히즈라력 제12월(둘 히자) 10일 ~ 11일 (또는 12일) | 이드 알아드하 (희생제) | عيد الأضحى المبارك | 이동 축일, 성지순례(하지) 기간 중 |
이 외에도 정부의 결정에 따라 임시 공휴일이 지정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