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키릴 총대주교는 유년기와 청년기를 레닌그라드에서 보냈으며, 신학 교육을 통해 성직자의 길을 걸었다.
1.1. 가족 배경
키릴 총대주교는 1946년 11월 20일 당시 소련 레닌그라드 (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군댜예프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미하일 군댜예프 신부는 1974년에 사망했으며, 어머니인 독일어 교사 라이사 군댜예바는 1984년에 사망했다. 그의 형인 니콜라이 군댜예프 대사제는 레닌그라드 신학 아카데미의 교수이자 상트페테르부르크 성 변모 대성당의 주임 사제이다. 키릴의 할아버지인 바실리 군댜예프 신부는 솔로프키 감옥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인물로, 1920년대, 1930년대, 1940년대에 걸쳐 교회 활동과 쇄신주의에 대항한 투쟁으로 인해 투옥 및 유배를 겪었다.
1.2. 학업 및 초기 활동
블라디미르 군댜예프는 8학년(9년 차)을 마친 후 1962년부터 1965년까지 레닌그라드 지질 탐사대에서 지도 제작자로 일하며 학업과 병행했다。학교 졸업 후 그는 레닌그라드 신학교에 입학했으며,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 아카데미를 1970년에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1970년부터 1971년까지 그는 레닌그라드 신학학교에서 교의학을 가르쳤으며, 학생들의 학과장 보조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니코딤 관구장 주교의 개인 비서이자 1학년 신학생들의 지도 강사로 일했다. 1987년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신학대학에서 명예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3. 서품
1969년 4월 3일, 레닌그라드와 노브고로드의 니코딤 관구장 주교는 그를 성 키릴로스 철학자의 이름을 따 키릴이라는 이름으로 삭발례를 주었으며, 4월 7일에는 수도 부제, 6월 1일에는 수도 사제로 서품했다.
2. 교계 활동
키릴 총대주교는 대주교 및 총대주교가 되기 전 다양한 교회 직책을 역임하며 러시아 정교회와 국제 교회 관계에 크게 기여했다.
2.1. 수도 사제 및 대주교 직분
1971년 9월 12일, 키릴은 대수도 사제로 승격되었고, 제네바 세계 교회 협의회(WCC) 주재 러시아 정교회 대표로 파견되었다. 1971년부터 그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의 WCC 대표로 임명되어 러시아 정교회의 에큐메니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74년 12월 26일, 그는 레닌그라드 아카데미 및 신학교의 학장으로 임명되어 1984년 12월 26일까지 재임했다. 1975년 12월부터 그는 WCC 중앙 위원회 및 집행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76년 3월 14일, 키릴 대수도 사제는 비보르그의 주교이자 레닌그라드 교구의 보좌 주교로 서품되었다. 1977년 9월 2일에는 대주교로 승격되었다. 1984년 12월 26일부터 그는 스몰렌스크와 뱌지마의 대주교를 지냈다. 1986년부터는 칼리닌그라드 주 교구들의 관리자를 맡았고, 1988년부터는 스몰렌스크와 칼리닌그라드의 대주교가 되었다.
1989년 11월 13일, 그는 대외 교회 관계 부서의 의장과 성 시노드의 종신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91년 2월 25일에는 관구장 주교로 승격되었다.
재임 기간 | 직책 | 주요 활동 |
---|---|---|
1975-1982 | 레닌그라드 교구 위원회 의장 | 교구 행정 및 운영 총괄 |
1975-1998 | 세계 교회 협의회 중앙 및 집행 위원회 위원 | 국제 에큐메니컬 활동 참여 |
1976-1978 | 서유럽 총대주교 대리 부관 | 서유럽 지역 교구 관리 |
1976-1984 | 성 시노드 기독교 일치 위원회 위원 | 기독교 교파 간 대화 및 협력 증진 |
1978-1984 | 핀란드 총대주교 교구 관리자 | 핀란드 내 정교회 교구 운영 |
1978-1988 | 러시아 세례 1000주년 기념 준비 위원회 위원 | 기념 행사 준비 및 기획 참여 |
1989-1996 | 헝가리 정교회 교구 관리자 | 헝가리 내 정교회 교구 관리 |
1990 | 러시아 정교회 지역 공의회 준비 위원회 위원 | 교회 최고 의사 결정 기구 준비 |
1990 | 체르노빌 사고 피해 극복 지원 위원회 위원 | 재난 구호 활동 및 피해자 지원 |
1990-1991 | 헤이그 및 네덜란드 교구 임시 관리자 | 네덜란드 지역 교구 임시 운영 |
1990-1993 | 코르순 교구 임시 관리자 | 코르순 지역 교구 임시 운영 |
1990-1993 | 성 시노드 종교 및 도덕 부흥 위원회 의장 | 종교 및 도덕적 가치 회복 운동 주도 |
2.2. 대외 교회 관계 및 언론 활동

1994년부터 키릴 총대주교는 러시아의 ORT/채널 원에서 주간 정교회 TV 프로그램 "Слово пастыря"(목자의 말씀)를 진행했다.
2008년 10월 20일, 라틴 아메리카 순방 중이던 그는 쿠바 공산당 제1비서 피델 카스트로를 만났다. 카스트로는 키릴 관구장 주교를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는 자신의 동맹자로 평가했다. 키릴은 아바나에 러시아 디아스포라를 위한 첫 러시아 정교회 성당 건설을 결정한 공로를 인정하여 알렉세이 2세 총대주교를 대신해 피델과 라울 카스트로 형제에게 모스크바 성 다니엘 훈장을 수여했다.
그는 수로우지 교구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실패에 대해 일부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01년에는 태국을 공식 방문했으며, 이는 성 니콜라스 대성당이 태국 내 러시아 정교회의 대표 성당으로 지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방문 이후, 올렉 체레파닌 신부는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방문하여 15년 이상 정교회 공동체에 영적 지도를 제공하며 태국 국민들이 정교회를 받아들이도록 노력했다.
그는 총 8번의 일본 방문 경험이 있으며, 1969년 첫 방문 이후 일본 요리를 매우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다. 2008년 9월 중순에는 러시아 정교회 주일 포드보리에의 새 성당 봉헌식을 위해 일본을 방문했고, 2012년 9월 14일부터 18일까지는 초대 일본 대주교인 니콜라이 가사트킨 성인의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일본을 재방문했다. 이 기간 중 9월 15일에는 센다이시를 방문하여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들을 위로했다.
3. 모스크바 총대주교 직분
키릴은 2009년 모스크바 및 전 루스 총대주교로 선출된 이후 러시아 정교회의 행정 구조를 개혁하고, 다른 기독교 교파와의 관계를 모색하며, 러시아 연방 정부와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중요한 활동을 펼쳐왔다.
3.1. 선출 및 착좌
2008년 12월 6일, 알렉세이 2세 총대주교 서거 다음 날, 러시아 정교회 성 시노드는 그를 총대주교좌의 총대주교 대행으로 선출했다. 12월 9일,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에서 거행된 알렉세이 2세의 장례식 중 잠시 실신하는 모습이 러시아 국영 TV를 통해 생중계되기도 했다.
2009년 1월 27일, 러시아 정교회 지역 공의회(2009년 포메스트니 소보르)는 키릴을 모스크바 및 전 루스 총대주교로 선출했다. 그는 700표 중 508표를 얻었다. 정식으로 '총대주교' 직함을 사용하기 전까지는 '선출 총대주교' 또는 '관구장 주교'로 불렸다. 그는 2009년 2월 1일 모스크바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에서 착좌식을 거행했다. 이 착좌식에는 당시 러시아의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와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을 비롯해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테오도로스 2세, 폴란드 정교회 수좌 주교 사바 관구장 주교, 알바니아 정교회 수좌 주교 아나스타시오스 대주교, 일본 정교회 수좌 주교 다니일 이케마쓰 후시로 관구장 주교 등 전 세계의 많은 주교와 사절단이 참석했다.
3.2. 교회 행정 개혁
키릴 총대주교는 교회 행정 구조에 상당한 변화를 도입했다. 2009년 3월 31일, 새로 선출된 키릴 총대주교가 주재하는 첫 성 시노드 회의에서 대외 교회 관계 부서(DECR)를 개혁하여, 이전에 DECR이 담당했던 특정 활동 영역들을 전담하는 새로운 시노드 기관들을 설립했다.
새롭게 설립된 기관들은 다음과 같다.
- 교회-사회 관계 시노드 부서: DECR과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러시아 정교회 관할 지역 내에서 입법 기관, 정당, 직업 및 창조적 연합, 기타 시민 사회 기관들과의 관계를 담당한다.
-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해외 기관 사무국: 이전에 DECR 관할이던 해외 교구, 대표부, 메토키온(총대주교 직속 거점), 수도원, 총대주교 직속 본당 등을 직접 총대주교에 예속시키고 이들을 관리한다. 2010년부터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해외 기관 관리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 시노드 정보 부서: 교회의 정보 및 미디어 관련 업무를 담당한다.
- 모스크바 신학 아카데미의 대학원 과정은 성 사도 대등자 키릴과 메토디우스 전교회 대학원 및 박사원으로 전환되었다.
2011년 7월 27일, 교회 성 시노드는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의 교회 구조를 재편하여 중앙아시아 관구장 주교 관구를 설립했다. 2011년 10월 6일부터는 총대주교의 요청에 따라 교구 개혁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하나의 지역에 2~3개의 교구를 신설하고 인접한 교구들을 묶어 관구장 주교 관구를 형성하는 방식이다.
3.3. 에큐메니즘 및 타 교파 관계
키릴 총대주교는 1990년대 내내 에큐메니즘을 실천한 것에 대해 러시아 정교회 내 보수 세력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2008년에는 아나디르와 추코트카의 디오미드 주교가 그가 가톨릭 교회와 연계된 것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9년 성명에서 키릴은 가톨릭 교회와의 교리적 타협은 있을 수 없으며, 그들과의 논의는 통합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2016년 2월 12일, 키릴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쿠바 아바나 인근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에서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다. 이는 교황과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 간의 첫 만남이었다. 이들은 사전에 준비된 30개 조항의 공동 선언에 서명했으며, 여기에는 완전한 일치 재건에 대한 희망, 중동 기독교인 박해, 시리아 내전, 우크라이나 내 교회 조직 등 국제적 문제들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만남은 동서 교회 대분열 이후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 간의 화해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되었다.
2019년 9월 3일, 키릴 총대주교는 모스크바 다닐로프 수도원에 있는 총대주교 및 시노드 관저에서 말랑카라 정교회 시리아 교회의 수장인 파울로세 2세와 만났다. 이 만남에서 키릴은 성상화, 교회 성가대, 수도주의, 순례, 여름 학교, 학술 회의 등 학술 분야 협력에 대한 파울로세 2세의 제안을 지지했다.
3.4. 러시아 국가와의 관계
키릴 총대주교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오랜 동맹자이다. 그는 푸틴의 통치를 "하느님의 기적"이라고 묘사했으며, 푸틴에 따르면 키릴의 아버지가 푸틴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총대주교 재임 기간 동안 키릴은 러시아 정교회를 러시아 국가에 더욱 밀접하게 만들었다.

2009년 2월 1일 착좌식 다음 날, 당시 러시아 대통령 메드베데프가 크렘린 대궁전에서 러시아 정교회 주교들을 위한 만찬을 주최했을 때, 키릴 총대주교는 교회와 국가 관계의 이상적인 비전으로 비잔티움의 심포니아 개념을 언급했다. 그는 현대 러시아에서는 이 개념을 완전히 실현하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했다. 2012년 2월 8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종교 지도자 회의에서 키릴은 1990년대의 경제적, 사회적 혼란과 2000년대의 안정을 비교하며 "하느님의 기적과 국가 지도부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우리는 이 끔찍한, 체계적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반정부 시위자들의 "요구"를 "귀청을 찢는 비명"에 비유하며 시위자들이 러시아인의 소수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1970년부터 스위스 연방 경찰은 그를 '미하일로프'라는 이름으로 KGB 요원으로 분류했다. 키릴 총대주교 치하의 교회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치하의 러시아 국가와 문화 및 사회 문제에서 긴밀하게 협력해왔다. 푸틴은 전 KGB 요원으로서 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자신을 "기독교적 가치"의 확고한 수호자로 자처하며, 그 대가로 정교회는 크렘린의 정책에 대한 지지 성명을 자주 발표한다. 가장 최근에는 교회 대변인이 시리아 내전에 대한 러시아의 군사 작전을 국제 테러리즘에 맞선 "성전"의 일부로 묘사했다.
키릴 총대주교는 크림반도와 우크라이나 동부로의 러시아 세력 확장을 지지했다. 그는 "모스크바와 모든 루스의 총대주교"라는 그의 공식 직함이 현대 러시아의 뿌리가 되는 키이우의 중세 국가를 언급한다는 점을 들어 러시아의 영토적 주장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그는 푸틴의 행동이 우크라이나에서 자신의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크림반도 교구들을 러시아 정교회에 흡수시키지 않고 크렘린의 합병 기념식에도 불참했다.
그는 "제국주의적 성향이 강한 헌신적인 민족주의자"로 묘사되며, 신앙의 익숙한 단어들을 극단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개의치 않는 인물로 평가된다.
4. 논란 및 비판
키릴 총대주교는 그의 행동, 발언, 정책 결정과 관련하여 여러 논란과 비판에 직면해왔다. 특히 인권, 민주주의, 사회적 약자와 관련된 문제에서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입장을 보여왔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4.1. KGB 연루 의혹
1990년대 초반부터 키릴은 소련 시대 KGB와의 연루 의혹을 받아왔다. 그는 '미하일로프'라는 KGB 요원 코드네임을 사용했다는 의혹을 받았으며, 1970년부터 스위스 연방 경찰에 의해 KGB 요원으로 분류되었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다. 포브스는 2009년 보도에서 키릴이 단순한 정보원이 아닌 KGB의 현역 장교였으며, 자신이나 알렉세이 2세 총대주교 모두 보안 기관과의 연관성을 인정하거나 사과한 적이 없다고 전했다.
소련 해체 후 잠시 공개되었던 KGB 기록 보관소의 전 책임자 바실리 미트로힌은 영국으로 망명 후 키릴(본명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군댜예프)이 간첩이었다고 확인했다. 22세의 키릴은 레닌그라드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사제로 서품되기도 전에 서방 국가들을 여행하도록 파견되었다. '미하일로프'라는 암호명을 가진 25세의 요원은 제네바의 세계 교회 협의회(WCC)에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대표로 임명되었다. 이는 그가 사제 서품을 받기 1년 전인 1969년의 일이었다. KGB의 임무는 WCC가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 '해방 신학'(가톨릭-마르크스주의 혼합주의)을 확산시키는 데 관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은 키릴이 KGB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그에 대한 비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모든 공격을 지지한다고 본다. 한 우크라이나인은 그를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망나니"라고 비난했다.
4.2. 재정 관련 논란
키릴 총대주교는 재정적 투명성 문제로 여러 논란에 휩싸였다.

1990년대 중반, 코메르산트와 모스콥스키 콤소몰레츠 등의 언론은 키릴이 교회에 부여된 담배 무관세 수입 특권을 남용하여 폭리를 취했다고 고발하며 그를 "담배 관구장 주교"라고 비난했다. 대외 교회 관계 부서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외국 담배 공급책으로 지목되었다. 사회학자 니콜라이 미트로힌은 2004년에 이 작전을 통해 얻은 이익이 15억 USD에 달한다고 추산했으며, 모스크바 뉴스는 2006년에 40억 USD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나다니엘 데이비스는 키릴 관구장 주교가 자금을 횡령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담배 수입으로 얻은 이익이 교회의 긴급한 경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언급했다. 담배 무관세 수입은 1997년에 종료되었다. 2002년 이즈베스티아와의 인터뷰에서 키릴 관구장 주교는 자신에 대한 폭리 의혹을 정치적 캠페인이라고 일축했다. 전 국세청장 알렉산더 포치노크는 2009년 키릴이 위반 행위에 연루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2012년 3월, 전 러시아 보건부 장관 유리 셰프첸코는 법원 판결에 따라 키릴 총대주교가 개인적으로 소유한 최고급 아파트에 발생한 먼지 피해에 대해 약 2000.00 만 RUB (약 67.60 만 USD)를 배상했다. 이 아파트는 키릴의 오랜 친구인 사업가 리디아 레오노바가 거주하고 있었다. 소송에 따르면 셰프첸코의 아파트 리모델링 공사로 인해 발생한 먼지가 키릴 소유의 귀중한 서적 컬렉션에 쌓였다고 한다. 총대주교는 언론인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와의 사적인 대화에서 먼지로 뒤덮인 아파트의 소유권을 확인했다. 대부분의 언론 보도는 키릴 총대주교에게 비판적이었으며, 먼지가 해롭다는 주장을 비웃으며 단순히 모래일 뿐이며 청소부를 고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총대주교 자신은 셰프첸코를 용서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12년, 키릴은 2.00 만 GBP (3.00 만 USD)가 넘는 스위스 브레게 시계를 착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와의 인터뷰에서 키릴은 선물 받은 시계 중 브레게가 있지만, 한 번도 착용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전례 중 브레게 시계를 착용한 것처럼 보이는 사진에 대해 "합성 사진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공식 웹사이트에 게시된 사진들 중 하나는 그가 왼쪽 손목에 비싼 시계를 착용한 것처럼 보였고, 나중에는 그 시계가 포토샵으로 지워졌지만, 테이블의 광택 있는 표면에 시계의 반사된 모습이 여전히 보이는 사진이 공개되어 논란이 가중되었다. 이후 러시아 교회 관계자들은 24세 직원이 사진을 "어리석고, 정당화될 수 없으며, 권한 없는 주도로" 편집했다고 해명했다. 또한 "이미지 조작에 책임이 있는 자들은 엄중히 처벌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교회 대변인은 키릴의 사생활을 논의하는 것은 "비윤리적"이라고 덧붙였고, 러시아 정교회는 2012년 4월 4일 외국 세력들이 푸틴을 지지하는 교회에 보복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공격은 선거 전후 기간 동안 더욱 두드러졌으며, 이는 그들의 정치적이고 반러시아적인 동기를 보여준다"고 밝혔다. 2012년 6월, 키릴은 "팔꿈치까지의 기적" 부문에서 "시계의 완벽한 사라짐"으로 2011년 실버 슈 어워드를 수상했으며, 이는 러시아 정교회 대표자들로부터 고통스러운 반응을 얻었다.
2006년 포브스 기사에 따르면 키릴의 재산은 40억 USD에 달했으며, 2019년 노바야 가제타 보도는 그의 순자산을 40억~80억 USD로 추정했으나, 이 수치들은 확인되지 않았다. 2020년 프로옉트의 조사에 따르면 키릴과 그의 사촌 두 명은 모스크바 주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총 287.00 만 USD 상당의 부동산 9채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취리히 인근에 샬레를 소유하고 있으며, 모스크바, 스몰렌스크, 칼리닌그라드 등 각 지역에 다수의 부동산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 소속의 다양한 종교 단체들이 소유한 20개 이상의 거주지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고 알려졌다. 그는 담배, 자동차, 석유, 보석 등 여러 사업에도 관여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4.3. 정치적 개입 및 특정 사안 지지
키릴 총대주교는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는 여러 발언과 행동으로 논란을 빚었다.

2010년, 그는 비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벨라루스 대통령에 재선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에게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2018년 10월 15일, 우크라이나 정교회 자치 논란 동안 그는 러시아 정교회 성 시노드 의장으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과의 성찬적 교류 단절을 결정했다.
2015년, 키릴의 특사는 시리아 흐메이밈 공군 기지에 주둔한 러시아 군인들에게 그의 서한을 전달했다. 이 서한은 시리아 주둔 러시아 군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해 사랑과 평화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키릴은 또한 시리아 내전에 대한 러시아의 개입이 정당하다고 말했다.
2018년 키릴이 불가리아 해방 140주년 기념을 위해 불가리아를 방문했을 때, 불가리아 대통령 루멘 라데프는 러시아 제국군 소속으로 불가리아의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모든 민족(러시아인, 루마니아인, 핀란드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세르비아인, 몬테네그로인)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에 키릴은 불가리아인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러시아에게만 감사해야 한다며, "역사에 대한 잘못된 해석"의 여지가 없다고 비판했다. 또한 키릴은 불가리아인들이 소련 시대부터 종이 쪽지 없이는 연설하지 못하는 "형편없는 연설가"로 알려져 왔다고 덧붙였다. 이에 불가리아 부총리 발레리 시메오노프는 키릴을 "2류 KGB 요원", "담배 관구장 주교", "성인이 아니다"라고 비난했다. 친러시아 성향의 불가리아 활동가가 제기한 소송에도 불구하고, 지역 법원은 시메오노프의 발언에 명예훼손이 없다고 판결했다.
2019년 5월, 키릴 총대주교는 2014년 오데사 충돌에서 오데사 무역 연합 회관에 불을 지른 사람들이 "악마에 사로잡혔다"고 주장했지만, 같은 날 이전에 마이단 활동가 두 명(이고르 이바노프, 안드레이 비류코프)을 살해한 오데사 반마이단 활동가들을 비난하지는 않았다. 러시아 헌법 개정안 투표 기간 동안 키릴은 러시아인들에게 개정안을 지지해 달라고 촉구했으며, 특히 하느님에 대한 언급을 추가하는 단일 개정안에 대해서는 무신론자라도 투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 투표는 각 개정안에 개별적으로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개정안에 대한 일괄 투표였으며, 여기에는 러시아 영토의 이전을 금지하는 내용의 영토 보전 관련 개정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2021년 10월 15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7차 재외 러시아 동포 세계 대회 개회식에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거짓 서사"를 강요하려는 서방을 비난하며, 전 세계에 흩어진 동포와 러시아인을 "보호"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의 교구들이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들을 종교뿐만 아니라 러시아어를 통해 하나로 묶는다고 말하며, 이 민족들의 가족들이 자녀들에게 "역사적인 조국" 러시아를 사랑하고 러시아어 사용자로 키우도록 촉구했다.
4.4.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입장
키릴 총대주교는 동성 결혼이나 여호와의 증인 금지와 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 강경한 보수적 입장을 표명하여 비판을 받아왔다.
동성 결혼 문제에 대해 2016년 키릴은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사제들을 침묵시키는 것은 소련 전체주의 시대의 검열과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2017년 5월, 그는 키르기스스탄 방문 중 다시 한번 이러한 사제들을 침묵시키는 것을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에 비유하며, 동성 결혼을 "가족 가치에 대한 위협"이라고 지칭했다.
여호와의 증인 문제에 있어서는 1990년대부터 여호와의 증인 금지를 주장해왔다. 키릴의 지도 하에 러시아는 2017년 17만 명에 달하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에 대한 금지 조치를 시행하는 데 주요 역할을 했다. 2017년 5월 2일,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 내 여호와의 증인 금지를 지지한다"는 보도 자료를 발표했으며, 2019년 2월 13일에도 이 금지 조치를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재차 밝혔다. 국제 종교 자유를 위한 미국 특사인 샘 브라운백은 "여호와의 증인의 이데올로기에 동의하거나 반대할 수 있지만, 그들은 평화적인 신앙 실천자들이며, 자신들의 신앙을 실천할 권리가 있다"고 언급했다. 이후 국제 연합을 비롯한 여러 국제 기구들은 러시아가 인권 침해를 저지르고 있다고 비난했다.
4.5. 푸시 라이엇 사건

2012년 3월, 페미니스트 음악 그룹 푸시 라이엇의 여성 멤버 세 명이 모스크바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에서 성모 마리아에게 "푸틴을 쫓아내 달라"는 내용의 노래를 공연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 노래는 욕설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성전의 제단 앞에서 공연되어 많은 러시아 정교회 신자들에게 신성모독이자 모욕으로 여겨졌다. 이 여성들은 불량 행위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이후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에 대해 키릴 총대주교는 그들이 "사탄의 일을 하고 있다"며 처벌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루넷에서 러시아 정교회가 "자비"를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을 촉발했으며, 국제 앰네스티는 이 여성들을 "양심수"로 규정했다. 푸시 라이엇 멤버들은 최후 진술에서 키릴 총대주교가 교회를 이용하여 푸틴 정부의 문화적 입장을 지지했다고 비난했다. 레바다 센터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은 이 펑크 그룹에 대한 처벌이 과도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룹에 동정적인 러시아인은 6%에 불과했다. 당시 가톨릭 교회의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이 문제에 대한 러시아 정교회의 입장을 지지했다.
4.6. 우크라이나 전쟁 지지 및 관련 발언
키릴 총대주교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이를 '성전(聖戰)'으로 규정하는 등 논란이 되는 발언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2014년 7월 18일, 러시아의 돈바스 개입과 크림반도 점령(이 기간 동안 푸틴은 러시아에 대한 저항 시 핵무기 사용을 위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언급)에도 불구하고, 키릴은 러시아가 누구에게도 군사적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같은 날 푸틴은 우크라이나 평화 과정에 키릴 총대주교를 협상가로 참여시키고 싶다고 밝혔다. 2014년 8월 14일, 다른 정교회 수좌 주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키릴 총대주교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대테러 작전이 정교회를 말살하기 위한 전쟁이며, 가톨릭 교도들과 그가 "분리주의자"라고 칭한 우크라이나 정교회 자동 독립 교회(Autocephalist)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2017년 12월 25일, 키릴 총대주교는 자신의 칙령으로 크림 공화국의 러시아 행정 수반인 세르게이 악쇼노프와 러시아 "크림 국가평의회" 수장인 블라디미르 콘스탄티노프에게 교회 훈장을 수여했다. (이들은 모두 크림반도 점령에 기여했으며, 우크라이나에서는 강제 권력 장악, 헌법 질서 및 우크라이나 영토 보전 훼손, 국가 반역 및 범죄 조직 결성 혐의로 수배 중이다.)
2019년 5월, 키릴 총대주교는 2014년 오데사 충돌에서 오데사 무역 연합 회관에 불을 지른 사람들이 "악마에 사로잡혔다"고 말했지만, 같은 날 이전에 마이단 활동가 두 명을 살해한 오데사 반마이단 활동가들을 비난하지는 않았다. 러시아 헌법 개정안 투표 기간 동안 키릴은 러시아인들에게 개정안을 지지해 달라고 촉구했다. 그는 특히 하느님에 대한 언급을 추가하는 개정안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며 무신론자라도 이에 투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투표는 사실상 전체 개정안에 대한 일괄 투표였으며, 여기에는 러시아 영토 보전을 보호하고 러시아 영토의 이전을 금지하는 개정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2021년 10월 15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7차 재외 러시아 동포 세계 대회 개회식에서 키릴은 서방이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거짓 서사"를 강요하려 한다고 비난하며, 전 세계에 흩어진 동포와 러시아인을 "보호"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의 교구들이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들을 종교뿐만 아니라 러시아어를 통해 하나로 묶는다고 말하며, 이 민족들의 가족들이 자녀들에게 "역사적인 조국" 러시아를 사랑하고 러시아어 사용자로 키우도록 촉구했다.
키릴 총대주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현재의 사건들"이라고 부르며 '전쟁'이나 '침공'과 같은 용어 사용을 회피함으로써 러시아의 검열법을 준수하고 있다. 그는 침공을 승인하고 참전 중인 러시아 군인들을 축복했으며, 이는 우크라이나 정교회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의 일부 사제들이 전례에서 키릴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중단하는 결과를 낳았다.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은 우크라이나를 자신들의 "교구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키릴은 러시아군이 "매우 올바른 길"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는 게이 프라이드 행진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의 한 원인이라고 주장했으며, 전쟁이 육체적으로가 아닌 형이상학적으로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부차 학살에 대한 소식이 전해진 며칠 후, 키릴은 신자들이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의 고향을 보호"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2022년 3월 6일 (용서의 주일 휴일),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에서 열린 전례 중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을 정당화했다. 그는 돈바스 지역에서 8년간 진행된 "대량 학살"이 있었으며, 우크라이나가 현지 주민들에게 게이 프라이드 행사를 강요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용서를 위한 날임에도 불구하고, 키릴은 먼저 "정의"가 구현되지 않으면 용서는 항복이자 약함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국제적인 비판을 받았는데, 키릴이 푸틴 대통령의 주장을 되풀이하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파시즘"과 싸우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연설 내내 키릴은 "우크라이나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모두를 단순히 "성스러운 러시아인"이라고 지칭했으며, 우크라이나에 있는 러시아 군인들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있다"며 요한 복음서 15장 13절을 인용하기도 했다.
2022년 3월 9일, 전례 후 그는 러시아가 안보를 위해 우크라이나에 무력을 사용할 권리가 있으며,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은 한 민족이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한 국가라고 선언했다. 또한 서방이 우크라이나인들을 선동하여 러시아인들을 죽이게 하고 이러한 목적을 위해 무기를 제공하고 있으므로, 서방은 러시아와 하느님의 적이라고 주장했다.
2022년 3월에 세계 교회 협의회(WCC)에 보낸 서한에서 키릴은 NATO의 확장, 러시아어 보호, 그리고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설립을 우크라이나 공격의 정당한 이유로 제시했다. 이 서한에서 그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사망에 대해 애도를 표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침공은 우크라이나 전역의 종교 시설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이 파괴되거나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이러한 파괴는 종교적, 문화적 유산을 넘어 민간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2022년 3월 16일, 키릴은 프란치스코 교황과 줌 화상 통화를 했는데, 교황은 인터뷰에서 키릴이 "손에 들고 있던 종이에서 러시아 침공을 정당화하는 모든 이유를 읽었다"고 언급했다. 2022년 3월 27일, 키릴은 우크라이나에서 국민위병의 활동에 지지를 표명하며, 그 전사들이 군사적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칭찬하고 하느님의 도움을 기원했다. 4월 3일 부차 학살 이후, 키릴은 러시아 국군 주성당에서 연설하며 군대의 "위업"을 칭찬하고 러시아가 "평화롭다"고 말했다.
2022년 5월 23일, 키릴은 러시아 학생들이 우크라이나와 싸우는 러시아 군인들을 영웅적인 행동의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정교회 (모스크바 총대주교청)가 2022년 5월 27일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에서 분리되었을 때, 키릴은 "악의 영혼들"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민족을 분리시키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교회는 "우크라이나 정교회 관리 규정에 관련 추가 및 변경 사항을 채택했으며, 이는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완전한 자율성과 독립성을 증명한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회는 이를 무시하고 우크라이나 정교회(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성직자들을 여전히 자신들의 다양한 위원회나 실무 그룹에 포함시키고 있다.
교황청의 그리스도인 일치 촉진을 위한 교황청 평의회 의장 쿠르트 코흐 추기경은 키릴 총대주교의 "잔인하고 터무니없는 전쟁" 정당화는 "이단"이라고 비판했다. 키릴은 우크라이나 전선으로의 시민 동원을 지지했으며, 시민들에게 군사적 의무를 다하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면 하느님의 왕국에 함께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2023년 1월 5일, 키릴 총대주교는 교회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나, 모스크바 및 전 루스의 총대주교 키릴은 동족상잔의 분쟁에 연루된 모든 당사자들에게 1월 6일 12시부터 1월 7일 00시까지 휴전하고 성탄 휴전을 설정하여 정교회 신자들이 성탄 전야와 성탄절에 예배에 참석할 수 있도록 호소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2023년 2월 26일, 그는 돈바스를 러시아의 일부라고 주장하며 합병을 지지한다고 선포했다. 2024년 3월 27일, 키릴이 이끄는 세계 러시아인 민족 평의회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지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는 분쟁을 "성전"으로 규정하며 "영적, 도덕적 관점에서 특별 군사 작전은 러시아와 그 국민이 성스러운 러시아의 단일 영적 공간을 수호하는 성전이다"라고 명시했다. 군사 작전의 목표는 "세계주의의 공세로부터 세상을 보호하고, 사탄주의에 빠진 서방의 승리"라고 주장했다. 이 문서는 우크라이나 전체 영토가 "러시아의 배타적 영향력 지역"이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4.6.1. 제재 및 국제적 비난

바티칸 대표들은 키릴이 우크라이나에서 평화를 추구할 의지가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2022년 4월 3일, 전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엄스는 러시아 정교회가 침략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전시 윤리 규범을 노골적으로 위반하는 것을 비난하지 않는다면 세계 교회 협의회(WCC)에서 러시아 정교회를 축출해야 할 강력한 근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암스테르담의 러시아 정교회 성 니콜라스 성당은 키릴이 러시아 침공에 대해 취한 태도 때문에 더 이상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내에서 기능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대신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에 합류할 것을 요청했다. 리투아니아의 러시아 정교회는 자신들이 키릴의 정치적 견해와 인식을 공유하지 않으며, 따라서 모스크바로부터 독립을 추구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2022년 4월 10일, 우크라이나 정교회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소속 사제 200명은 다른 동방 정교회 자치 교회들의 수좌 주교들에게 공개적으로 서한을 보내, 범정교회 차원에서 고대 동방 교회 수좌 주교 공의회를 소집하여 키릴을 "러시아 세계" 교리 설교의 이단 혐의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축복하고 우크라이나 영토 내 러시아군의 공격적인 본성을 전적으로 지지"한 도덕적 범죄 혐의로 재판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들은 더 이상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에 어떤 형태의 교회법적 종속 상태로 남아있을 수 없다"고 언급하며, 공의회가 "키릴 총대주교를 재판하고 총대주교좌를 가질 권리를 박탈"해 줄 것을 요청했다.
2015년 4월 9일, 그리스 총리 알렉시스 치프라스와의 회담에서 키릴 총대주교는 러시아에 대한 그의 지정학적 지지에 감사하며 크림반도 점령과 돈바스 지역 침공으로 러시아에 부과된 제재를 "불법적이고 불공정하다"고 비판했다. 2022년 5월 4일, 프랑스 통신사에 따르면 키릴은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하여 유럽 연합 집행위원회가 제안한 58개 제재 대상 명단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후 보도에 따르면 헝가리 정부의 개입으로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키릴은 2022년 캐나다, 우크라이나, 영국에 의해 제재를 받았다. 영국은 "키릴 총대주교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하는 여러 공개 성명을 발표했다. 따라서 그는 우크라이나를 불안정하게 만들거나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전, 주권 또는 독립을 훼손하거나 위협하는 정책이나 행동에 관여하고, 지원하며, 또는 이를 조장한다"고 밝혔다. 키릴은 또한 2023년 5월 체코에 의해 제재를 받았다.
5. 개인 생활
총대주교의 개인적인 생활은 비교적 알려진 바가 적지만, 그의 재산 규모와 취향에 대한 일부 정보가 공개되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06년 포브스 기사에 따르면 키릴의 재산은 40억 USD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2019년 노바야 가제타는 그의 순자산이 40억에서 80억 USD에 이를 것으로 보도했으나, 이 수치들은 검증되지 않았다. 2020년 프로옉트의 조사에 따르면 키릴과 그의 사촌 두 명은 모스크바 주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총 287.00 만 USD 상당의 부동산 9채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취리히 인근에 샬레를 소유하고 있으며, 모스크바, 스몰렌스크, 칼리닌그라드 등 각 지역에 다수의 부동산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 소속의 다양한 종교 단체들이 소유한 20개 이상의 거주지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고 알려졌다. 그는 담배, 자동차, 석유, 보석 등 여러 사업에도 관여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일부 언론은 그가 크렘린 궁전 안에 거주하고 있다고 보도하며, 성직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호화로운 생활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키릴 총대주교는 일본을 8차례 방문했으며, 1969년 첫 방문 이후 일본 요리를 매우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세계의 수많은 요리 중에서 저는 여전히 일본 요리를 압도적으로 좋아합니다"라고 언급했다.
6. 수상 및 영예
키릴 총대주교는 생애 동안 러시아 정교회 및 다른 정교회, 러시아 연방 정부, 그리고 해외 국가들로부터 다양한 훈장, 메달, 명예 시민권 등을 수상했다.
6.1. 교회 표창
훈장 및 메달 | 수여 날짜 / 연도 | 비고 |
---|---|---|
성 블라디미르 대공 훈장 2급 | 1973년 9월 16일 | |
라돈즈의 성 세르기우스 훈장 1급 및 2급 | ||
모스크바 성 다니엘 훈장 1급 | ||
모스크바와 콜롬나의 성 인노켄티우스 훈장 2급 | ||
모스크바와 전 루스의 성 알렉시스 훈장 2급 | ||
파나기아 호칭 | 1988년 | 러시아 기독교 1000주년 기념 행사 준비 및 진행에 기여 |
키예프 동굴 수도원 성 안토니오와 테오도시우스 훈장 1급 | 2006년 | (우크라이나 정교회 -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
경건한 통치자 대 스테판 성인 훈장 2급 | 2006년 | 몰도바 정교회의 헌신적인 봉사와 영광을 기림 |
성 사도 베드로 은 기념 메달 | 2003년 | (상트페테르부르크 교구) |
포차이우 볼린 성상 봉헌 450주년 기념 훈장 | 2009년 | (우크라이나 정교회 -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
체르니히우의 성 테오도시우스 훈장 | 2011년 | (우크라이나 정교회) |
안티오키아 정교회 성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훈장 1급 | 2011년 | |
미국 정교회 성 인노켄티우스 금메달 | 2009년 | |
말랑카라 정교회 시리아 교회 성 파루말라의 그레고리오 훈장 | 2006년 | (인도) |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성 그레고리오 조명자 훈장 | 2010년 | (아르메니아) |
코카서스 무슬림 사무국 셰이크 울-이슬람 훈장 | 2011년 |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조지아 정교회, 세르비아 정교회, 불가리아 정교회, 그리스 정교회, 폴란드 정교회, 체코와 슬로바키아 정교회, 핀란드 정교회 및 미국 정교회의 훈장들을 받았다.
6.2. 러시아 연방 표창
훈장 및 메달 | 수여 날짜 / 연도 | 비고 |
---|---|---|
조국 공로 훈장 2급 | 2006년 11월 20일 | 영적, 문화적 전통 보존 및 민족 간 우호 증진 기여 |
조국 공로 훈장 3급 | 2000년 8월 11일 | 시민 평화 강화 및 영적, 도덕적 전통 부흥에 기여 |
알렉산드르 넵스키 훈장 | 2011년 1월 7일 | 조국의 영적, 문화적 전통 보존에 기여 |
우정 훈장 | 1995년 12월 28일 | 국가에 대한 공로, 모스크바 역사 및 문화 유적지 건설, 재건, 복원 사업에 기여 |
민족 우호 훈장 | 1988년 | |
1941-1945년 대조국전쟁 승리 50주년 기념 메달 | ||
러시아 해군 300주년 기념 메달 | 1996년 | |
모스크바 850주년 기념 메달 | 1997년 | |
러시아 연방 대통령 감사장 | 1995년 8월 14일 | 1941-1945년 대조국전쟁 승리 50주년 기념 행사 준비 및 진행에 적극 참여 |
러시아 연방 국가두마 감사장 | 2001년 |

6.3. 외국 표창
6.4. 명예 시민권
- 니즈니노브고로드주 루코야노프스키 군 (2000)
- 스몰렌스크주 (2009년 2월 5일)
- 칼리닌그라드주 (2009년 3월 5일)
- 케메로보주 (2010)
- 스몰렌스크 (2003)
- 스몰렌스크주 리즈스코예 셀로 (2004)
- 네만 (칼리닌그라드주) (2006)
- 스몰렌스크주 뱌젬스키 군 (2006)
- 칼리닌그라드 (2006)
- 모스크바 호로쇼보-므뇨브니키 지구 (2006)
- 모르도비야 공화국 (2011) - 국내 영적, 도덕적 전통 보존 및 발전, 교회와 국가 간의 상호 작용 강화에 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