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다카하시 요시노부는 1975년 4월 3일 지바현 지바시 주오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야구에 재능을 보였으나, 정작 본인은 야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아버지와 형의 권유로 야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1.1. 유년기 및 학창 시절
다카하시는 3세 무렵부터 자연스럽게 좌타자가 되었고, 초등학교 4학년 때 지역 소년 야구팀에 입단했다. 당시 6학년 선수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주전으로 발탁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5학년 때는 3번 타자 겸 유격수로 활약하며 팀의 현 대회 첫 우승에 기여했고, 6학년 때는 4번 타자 겸 투수 (에이스)로 팀의 2년 연속 우승을 이끌었다.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버지와 함께 매일 개인 훈련을 했으며, 키의 두 배에 달하는 대나무로 스윙 연습을 하는 것이 일과 중 하나였다. 아버지는 그가 프로의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연습 외에는 야구에 거의 접하지 못하게 했으며, 다카하시 본인도 프로를 지망하거나 동경하는 선수는 없었다고 한다.
중학교 포니 리그 시절에는 4번 타자 겸 투수로 팀을 전국 대회 2년 연속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 시기에도 야구를 그만두고 싶어 했으나, 아버지와 형에게 강제로 끌려가거나 폭력을 당하며 연습에 참여했다고 한다. 중학교 3학년 때 성적은 26경기 출전, 타율 .559, 17홈런, 65타점을 기록했다. 이후 야구를 그만두고 학업에 전념할 생각이었으나, "앞으로 3년만 아버지를 즐겁게 해 달라"는 아버지의 부탁으로 고시엔 대회를 목표로 삼게 되었다. 공부와 병행할 수 있다는 점과 특히 동경했던 게이오기주쿠 대학 입학의 지름길로 판단하여, 여러 프로 구단의 스카우트 제의를 마다하고 가나가와현의 명문 도인가쿠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도인가쿠엔 고등학교 야구부에 투수로 입단했으나, 곧바로 쓰치야 게이자부로 감독의 권유로 타격과 강한 어깨를 살릴 수 있는 우익수로 전향했다.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전향하면 즉시 주전 3번 타자로 기용하겠다는 감독의 말에 결심했다. 1학년 때부터 3번 타자 겸 우익수 주전 자리를 꿰찼으며, 제73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팀이 3회전까지 진출했으나 가고시마 실업고등학교에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 2학년 때인 1992년 제74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도 4번 타자 겸 투수로 출전했다. 오키나와쇼가쿠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홈에서의 크로스 플레이 도중 왼쪽 허벅지 근육 파열을 입었지만, 8회부터 구원 투수로 등판했다. 그러나 연장 12회에 또다시 끝내기 패배를 당하며 1회전에서 탈락했다. 경기 후에는 다리 통증으로 걸을 수 없어 팀 동료에게 업혀 마운드를 내려왔다. 이후 부상과 허리 통증 치료를 위해 2주간 입원했으며, 퇴원 후에는 팀 동료들의 두터운 신뢰를 바탕으로 다음 해 주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을 "팀을 이끌어갈 타입이 아니다"라며 거절했지만, 감독의 명령이라 듣고 수락했다. 선배인 소에지마 고타는 다카하시가 "말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자연스러운 연습 태도와 언행으로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는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3학년 때는 쓰치야 게이자부로 감독의 방침에 따라 강타자인 그가 1번 타자를 맡았으나, 고시엔 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고교 1, 2학년 시절 고시엔 통산 타율은 .400이었고, 고교 통산 30홈런을 기록했다.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등 여러 프로 구단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입학 당시부터의 목표였던 게이오기주쿠 대학 진학을 고수했다. 쓰치야 감독 또한 "비범한 센스를 지녔지만 야구를 근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다카하시에게는 자유롭고 편안한 팀이 좋다"고 조언하며 그의 대학 진학을 지지했다.
1.2. 대학 시절
다카하시는 게이오기주쿠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지정교 추천으로 진학했으며, 게이오기주쿠 대학 야구부에서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활약했다. 춘계 리그전 개막 첫 경기부터 5번 타자 겸 3루수로 출전하여 신인 신기록인 3개의 홈런을 때려냈다. 3학년 때인 1996년 도쿄 6대학 야구 연맹 춘계 리그전에서는 타율 .512, 5홈런을 기록하며 타격 3관왕을 차지했다.
4학년 때인 1997년에는 팀의 주장을 맡았다. 상대 팀들이 승부를 피하며 2경기에서 7개의 볼넷을 내주는 등 고의 사구도 많았지만, 춘계 리그전에서 팀을 9시즌 만에 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크게 기여했다. 추계 리그에서는 호세이 대학의 안도 유야로부터 홈런을 기록하며 다부치 고이치가 보유했던 도쿄 6대학 리그 통산 홈런 기록을 경신, 역대 1위인 통산 23홈런을 달성했다. 리그 통산 102경기에 출전(4년간 전 경기 풀 이닝 출전)하여 타율 .325, 119안타(당시 역대 4위), 23홈런(역대 1위), 62타점(당시 역대 12위), 219루타(역대 1위)라는 기록적인 성적을 남겼다.
미일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일본 대표팀의 4번 타자로 3경기 연속 홈런을 치는 등 맹활약했다. IBAF 인터콘티넨탈컵에서도 대학생 신분으로 일본 대표팀의 4번 타자로 출전하여, 국제 대회 151연승 중이던 쿠바와의 결승전 1회말에 선제점이자 결승점이 되는 3점 홈런을 터뜨렸고, 이후에도 2점 3루타를 치는 등 팀의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같은 해 대학을 졸업했으며, 잘생긴 외모와 주력, 공격, 수비를 겸비한 도쿄 6대학 리그의 스타로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참고로 리그전에서는 한 차례 구원 투수로 등판하여 무실점으로 막았으며, 당시 구속은 149km/h를 기록했다. 당시 게이오 대학의 고토 히사히코 감독은 다카하시에 대해 "경기의 승패에는 매우 집착하지만, 자신의 기록이나 상에 대해서는 욕심을 내지 않았다"고 평했다.
프로 야구 드래프트에서는 주니치 드래건스,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히로시마 도요 카프를 제외한 9개 구단이 그를 영입하기 위해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다카하시의 고향인 지바시를 연고지로 하는 지바 롯데 마린스 팬들은 "다카하시 선수가 지바 롯데에 역지명으로 입단해야 한다"는 서명 운동을 벌여 수만 명의 서명을 모으기도 했다. 다카하시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세 구단으로 지망 구단을 좁혔고, 11월 4일 요미우리를 1순위로 역지명하여 입단했다. 기자회견에서는 미소를 전혀 보이지 않고 눈물을 글썽였다. 요미우리 역지명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 언론에서는 논란이 많았으며, 2012년 3월 아사히 신문은 그의 입단 계약금이 최고 표준액을 크게 초과하는 6.50 억 JPY였다고 보도했고, 요미우리 구단 측도 이를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그는 프로 입단과 동시에 좋은 투수와 스타성 있는 타자에게 주어지는 등번호 24번을 배정받았다.
2. 선수 경력
다카하시 요시노부는 1998년부터 2015년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하며 일본 프로 야구의 간판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선수 경력은 뛰어난 재능과 함께 잦은 부상으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2.1. 프로 입단 및 신인 시절

1998년, 다카하시는 입단 초부터 나가시마 시게오 당시 감독으로부터 '21세기의 스타'로 큰 기대를 받았다. 마쓰이 히데키,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함께 'MKT포'로 불리며 팀의 간판 타자로 홍보되었다.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개막전에서 7번 타자 겸 우익수로 선발 출전하여 데뷔 첫 안타를 기록했다. 4월 7일 도쿄 돔에서 열린 히로시마전에서는 야마우치 야스유키를 상대로 프로 첫 홈런을 터뜨렸다. 오른쪽 다리를 높이 드는 독특한 '한발 타법'으로 타선을 이끌었으며, 후반기에는 5번 타자로 고정되었다. 올스타전 팬 투표에서는 신인 선수 사상 최다 득표인 51만 4,351표를 얻어 선정되었고, 이후 7년 연속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300(리그 8위), 19홈런(리그 9위), 75타점(리그 10위), OPS .852(리그 8위)로 뛰어났다. 프로 1년차에 타율 3할(규정 타석 도달)을 기록한 것은 NPB 역사상 7번째이자, 센트럴 리그에서는 나가시마 시게오 이후 40년 만의 일이었다. 특히 5월 2일 야쿠르트전에서 가와사키 겐지로를 상대로, 7월 2일 야쿠르트전에서 이토 도모히토를 상대로 각각 만루 홈런을 터뜨리며 신인 선수로서 2개의 만루 홈런을 기록한 것은 사상 최초의 기록이었다.
그는 신인왕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주니치 드래건스의 가와카미 겐신에게 돌아갔다. (당시 가와카미와의 맞대결 성적은 22타수 1안타 1홈런이었다.) 비록 신인왕은 놓쳤지만, 신인왕에 준하는 성적을 인정받아 센트럴 리그 특별 표창을 수상했다. 수비에서도 강한 어깨를 활용하여 리그 최다 타이 기록인 12개의 보살을 기록했으며, 신인 외야수로서는 사상 최초로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이후 6년 연속으로 이 상을 받게 된다. 같은 해, 나가시마 감독으로부터 '늑대'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이 별명은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8월 4일 히로시마전에서는 등번호 24번의 좌완 투수 오노 유타카로부터 역전 3점 홈런을 터뜨렸는데, 이 홈런이 오노의 은퇴 결심에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2.2. 전성기 및 주요 성과
1999년, 다카하시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배리 본즈를 참고하여 타격 폼의 중심 이동을 개선했고, 이를 통해 장타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오픈전에서 6개의 홈런을 기록한 기세로 개막전부터 3경기 연속 홈런을 터뜨렸는데, 이는 1993년 아키야마 고지 이후 6년 만의 기록이었다. 4월에는 타율 .433, 8홈런, 29타점을 기록하며 월간 MVP를 수상했다. 5월 5일에는 프로 2년차에 요미우리의 제66대 4번 타자로 지명되었다. 이후 팀 동료 마쓰이 히데키, 야쿠르트의 로베르토 페타지니와 함께 치열한 홈런왕 경쟁을 펼쳤다. 그러나 홈런왕 경쟁에서 선두를 달리던 9월 14일 주니치전(나고야 돔)에서 수비 도중 외야 펜스에 강하게 부딪혀 쇄골 골절이라는 중상을 입고 팀 전력에서 이탈했다. 40개 이상의 홈런 페이스로 순항하던 중의 부상이라 아쉬움이 컸다. 중일과의 치열한 우승 경쟁 중이던 팀에게도 그의 이탈은 큰 타격이 되었고, 결국 홈런왕 타이틀과 팀의 우승을 모두 놓쳤다. 4월 2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개막전에서 후쿠하라 시노부를 상대로, 4월 28일 야쿠르트전에서 가와바타 류를 상대로, 6월 10일 주니치전에서 오가사와라 다카시를 상대로 각각 만루 홈런을 터뜨려 요미우리 선수로는 처음으로 한 시즌 3개의 만루 홈런을 기록했다. 비록 부상으로 시즌 막판을 결장했지만, 타율 .315(리그 5위), 34홈런(리그 6위), 98타점(리그 4위)을 기록하며 전년도보다 대부분의 타격 지표에서 향상된 성적을 보였다. 그 결과 첫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고, 오프 시즌에는 연봉 6100.00 만 JPY가 인상된 1.00 억 JPY에 계약하며 NPB 역사상 가장 빠르게 연봉 1.00 억 JPY를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
2000년, 히로시마에서 FA로 이적해 온 에토 아키라의 합류로 시즌 전반기에는 주로 5, 6번 타자를 맡았다. 전년도 쇄골 골절의 영향으로 프로 데뷔 후 첫 슬럼프를 겪었으나, 후반기에는 회복세를 보였다. 8월 24일 히로시마전에서 부진하던 에토 대신 3번 타자로 나서 구로다 히로키를 상대로 첫 회 20호 홈런을 터뜨리며 팀의 끝내기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 다시 6번 타자로 내려갔지만, 8월 29일 한신전에서 다시 3번 타자로 2안타 1타점을 기록했고, 다음 날 30일에는 2홈런 3타점을 올렸다. 3번 다카하시, 4번 마쓰이, 5번 기요하라로 이어진 강력한 클린업 'MKT포'의 일원으로서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9월 5일 히로시마전에서는 9회말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다카하시 겐을 상대로 구단 통산 1000호 끝내기 홈런을 터뜨렸다.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전 경기 풀 이닝 출전을 달성했으나, 3년 만에 타율 3할을 밑돌았다.
2001년에도 전년과 마찬가지로 시즌 초반 슬럼프에 시달렸지만, 에토와 함께 3번과 6번 타자를 번갈아 맡으며 2년 연속 전 경기 출전을 기록했다. 7월 24일 올스타전(삿포로 돔)에서 개인 통산 첫 올스타전 홈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첫 회 선두 타자 홈런이었다(역사상 7번째, 선공 팀에서는 5번째). 8월 1일 주니치전에서는 가와카미 겐신을 상대로 프로 통산 100호 홈런을 터뜨렸다. 9월 18일 한신전에서는 4회말 2사 만루 상황에서 그레그 핸셀을 상대로 역전 만루 홈런을 쳤다. 타율도 2년 만에 다시 3할을 넘겼다. 시즌 후에는 제34회 IBAF 월드컵 일본 대표팀에 선발되어 주로 4번 타자 겸 우익수로 출전했다. 예선 쿠바전에서 3안타를 기록하며 승리에 기여했다. 일본은 예선 4연승으로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했지만, 준결승에서 다시 쿠바와 만나 연장전 끝에 패했다. 3위 결정전에서도 타이완에 패하며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다카하시는 대회 타점왕과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2002년, 춘계 캠프 전부터 '타이틀 획득'을 목표로 내걸고 개막부터 좋은 컨디션을 유지했다. 5월 4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전에서 2타석 연속 홈런을 터뜨리며 당시 타율 .402를 기록했다. 6월 23일 히로시마전(삿포로 돔)에서는 6회에 구단 통산 7500호 홈런을 기록했는데, 상대 투수는 2000년에도 구단 통산 이정표 홈런을 허용했던 다카하시 겐이었다. 그러나 시즌 중반 슬럼프에 빠지며 7월 말에는 타율이 3할 초반으로 떨어졌다. 8월 3일 히로시마전(구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는 아라이 다카히로가 친 타구를 펜스 근처에서 점프 캐치하려다 왼쪽 발뒤꿈치 족저근막염 부상을 입고 전력에서 이탈했다. 약 1개월 반 만에 복귀한 9월 16일 요코하마전에서는 나카네 히토시가 친 비슷한 펜스 근처 타구를 점프 캐치에 성공했다. 새로운 스트라이크 존과 35경기 결장의 영향으로 홈런과 타점이 전년보다 크게 줄었지만, 2년 연속 타율 3할을 유지했다.
2003년, 다카하시는 선수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마쓰이 히데키의 메이저 리그 이적으로 수비 위치를 우익수에서 중견수로 변경했으며, 마쓰이의 이적으로 'MKT포'는 기요하라와 다카하시만을 지칭하는 'KT포'로 바뀌었다. 기요하라의 결장으로 생애 처음으로 개막전 4번 타자로 나섰다. 허리 통증으로 잠시 전력에서 이탈했으나, 시즌 중반에는 꾸준히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며 11타수 연속 안타와 14타석 연속 출루라는 NPB 타이 기록을 세웠다. 타율은 개인 최고 기록인 .323을 기록했다. 6월 1일 한신전에서는 9회 무사 1루 상황에서 당시 무패를 자랑하던 제프 윌리엄스를 상대로 역전 끝내기 2점 홈런을 터뜨리며 윌리엄스의 시즌 유일한 패전을 안겼다. 7월 6일 주니치전에서는 연장 12회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히사모토 유이치를 상대로 시즌 2번째 끝내기 홈런을 쳤다. 7월 15일 올스타전(오사카 돔)에서는 2타수 2홈런 3타점의 활약으로 개인 첫 올스타전 MVP를 수상했다. 시즌 후에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예선을 겸한 제22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수위타자를 차지했다.
2004년, 다카하시는 시즌 목표로 타율 3할 3푼, 35홈런, 110타점을 제시했다. 전년에 이어 중견수 전환을 시도했으나, 곧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에서 이적해 온 터피 로즈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로베르토 페타지니의 타격 폼을 참고하여 양손을 가슴 옆에 두고 눕혀 있던 배트를 세우는 방식으로 타격 폼을 개조한 결과, 개막 직후 극심한 부진에 빠졌지만 점차 회복되었다. 개막부터 시즌 도중 열린 아테네 올림픽까지 4번 타자로 꾸준히 출전했다. 올림픽에서는 일본 대표팀의 3번 타자 겸 중견수, 그리고 부주장을 맡아 팀 최다인 3개의 홈런을 치는 등 맹활약했다. 특히 타이완전에서는 왕젠민을 상대로 귀중한 동점 2점 적시타를 터뜨렸다. 그러나 올림픽 출전으로 팔꿈치의 유리연골 상태가 악화되어 팔꿈치 통증을 안고 경기에 임하면서 수비에서 송구의 정확성이 떨어졌고,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골든 글러브상 수상이 불발되었다. 하지만 타격에서는 5년 만에 30홈런을 기록했으며, 타율도 4년 연속 3할을 넘겼다. 9월 29일 히로시마전에서는 존 베일을 상대로 프로 850경기 만에 통산 1000안타를 달성했는데, 이는 나가시마 시게오의 849경기 다음으로 역대 8번째로 빠른 기록이었다. 오프 시즌에는 오른쪽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구단 합병 문제 당시 요미우리의 선수회장이자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의 부회장으로서 서명 활동을 주도하는 등 크게 기여했다.
2005년 4월 6일 요코하마전(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연장 11회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기즈카 아쓰시를 상대로 결승 홈런을 터뜨리며 팀의 개막 4연패를 끊었다. 4월 29일 히로시마전(구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는 개인 첫 1경기 3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다음 날인 30일 히로시마전 수비 중 구 히로시마 시민 구장의 펜스에 오르다 오른쪽 어깨 견갑하근 근육 파열 부상을 입고 전력에서 이탈했다. 이후 7월 8일 히로시마전에서도 펜스에 오른쪽 발목을 강타해 다시 이탈했다. 3년 전과 합쳐 같은 구장, 같은 펜스 근처에서 세 차례나 부상을 당하자, 복귀 후 히로시마전에서는 구장 펜스에 소금을 뿌렸다고 한다. 이후에도 오른쪽 발목은 회복되지 않은 채 골극이 형성되어 통증을 안고 경기에 출전했지만, 88경기 출전에 그쳐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했다. 오프 시즌인 12월 9일 오른쪽 발목 수술을 받았고, 12월 20일 계약 갱신에서는 프로 8년 만에 처음으로 연봉이 삭감되어 2000.00 만 JPY 감소한 추정 연봉 3.10 억 JPY에 계약했다.
2006년 1월, 전 니혼 TV 아나운서 오노데라 마이와 결혼했다. 수술로 인해 몸 상태 조절이 늦어져 시범 경기 중반부터 참가했다. 이 해부터 재취임한 하라 다쓰노리 감독의 "수비의 요충지인 센터 라인을 지키며 팀을 이끌어주길 바란다"는 방침에 따라 다시 중견수로 전환했다. 오른쪽 발목 상태가 완전치 않았지만, 개막부터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그러나 4월 12일 히로시마전에서 중견수 수비 중 다이빙 캐치를 시도하다 왼쪽 옆구리 통증으로 4월 15일 출장 선수 등록이 말소되었다. 복귀 후 약 보름 만인 5월 27일 지바 롯데전에서 다시 다이빙 캐치를 시도하다 왼쪽 어깨를 다쳤다. 이후 수비 위치를 중견수로 되돌렸지만, 거듭되는 부상으로 본래의 타격과 수비력을 회복하지 못했고, 후반기부터는 수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처음으로 좌익수로 뛰었다. 전년에 수술한 오른쪽 발목 상태가 좋지 않은 채로 경기를 계속한 탓에 2년 연속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했으며, 타율 .260, 15홈런으로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2007년, 다카하시는 몸과 마음 모두 강한 선수가 되겠다는 의미에서 '강(強)'을 자신의 테마로 내걸었다. 하라 다쓰노리 감독은 개막전부터 그를 1번 타자 겸 우익수로 기용했다. 요코하마와의 개막전(요코하마 스타디움) 첫 타석에서 선발 미우라 다이스케의 초구를 우측 관중석으로 넘기는 홈런을 터뜨렸다. 이는 센트럴 리그 역사상 최초이자 1962년 모로키 스케히로 이후 45년 만의 '개막전 첫 회 선두 타자 초구 홈런'이었다. 이로써 그는 3년 연속 개막전 홈런을 기록하며 나가시마 시게오의 5년 연속에 이어 역대 2위, 현역 1위가 되었다. 또한 개막전 홈런 개수에서도 현역 최다를 기록했다. 4월 28일, FA권을 취득했으나, 일찌감치 FA 선언 없이 요미우리에 잔류하겠다고 밝히며 '평생 자이언츠'를 선언했다. 6월 이후 오른쪽 발목 통증이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에 계속 출전했으며, 6월에는 타율 .408, 8홈런, 18타점, OPS 1.347을 기록하며 4년 만에 월간 MVP를 수상했다. 7월 26일 요코하마전에서는 맷 화이트를 상대로 NPB 신기록인 시즌 9번째 첫 회 선두 타자 홈런을 기록했다. 시즌 막판에는 허리 통증으로 성적이 하락했지만, 1년 내내 큰 부상이나 장기 이탈 없이 뛰며 3년 만에 규정 타석에 도달했고, 리그 6위인 타율 .308을 기록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규정 타석 도달 시즌이 되었다.) 8년 만에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고, 4년 만에 골든 글러브상도 수상했다. 당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노무라 가쓰야 감독은 그의 성적(OPS .982, 득점권 타율 .409로 12개 구단 최고)을 보고 "나 같으면 클린업에 놓겠다"고 평했을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실제로 이 발언 다음 날 경기에서 한 차례 4번 타자로 기용되기도 했다.) 오프 시즌 계약 갱신에서는 FA권을 행사하지 않고, 요미우리 프랜차이즈 선수로는 최고액인 4년 총액 16.00 억 JPY(연봉 3.50 억 JPY + 성과급 5000.00 만 JPY)에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2008년, 전년에 이어 1번 타자 겸 우익수로 개막전 선발 출전했다. 자신의 생일인 4월 3일 주니치전에서는 가와카미 겐신을 상대로 7회말 생일 축하 3점 홈런을 터뜨렸다. 이 홈런은 2번 가메이 요시유키, 3번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의 연속 홈런으로 이어지며 구단 9년 만의 3자 연속 홈런의 시작점이 되었고, 팀의 개막 5연패를 끊는 시즌 첫 승리에 기여했다. 4월 6일 한신전에서는 NPB 역사상 52번째로 통산 250호 홈런을 기록했다. 2년 연속 개막부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며 4월 18일부터는 4번 타자로 기용되었으나, 5월 3일 야쿠르트전에서 허리 통증이 재발하여 등록이 말소되었다. 6월 15일 1군에 복귀했지만 8월 7일 다시 전력에서 이탈했다. 벤치에 있어도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일본 시리즈에는 결장했다. 팀은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그는 91경기 출전에 타율 .236으로 개인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프로 데뷔 후 10년간 3할 이상을 유지했던 통산 타율이 .299로 떨어지며 결국 3할대 밑으로 내려갔다. 오프 시즌에는 허리 정밀 검사를 받았고, 수술도 고려했으나 재활을 통한 개선을 목표로 삼았다.
2009년, 다카하시는 요미우리 야수 중 가장 나이가 많았지만, 허리 통증이 개선되지 않아 춘계 캠프에서 처음으로 2군에서 시작했다. 시즌 막바지인 8월 28일 한신전에서 복귀하여 9회 대타로 등장했지만, 후지카와 규지를 상대로 헛스윙 삼진을 당했다. 다음 날인 29일 출장 선수 등록이 해제되었고, 허리 수술을 받겠다고 밝히며 다음 시즌 개막 복귀를 목표로 9월 15일 수술을 받았다. 단 1타석으로 시즌을 마쳤다. 이 수술은 성공하더라도 허리 통증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보장이 없었고, 재활은 최악의 경우 1년 이상 걸릴 수 있으며, 수술 실패 시에는 휠체어에 의존해야 할 수도 있는 선수 생명을 건 결정이었다. 그는 당시를 "야구를 하는 것을 상상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시기", "이미 무리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2010년, 다카하시는 허리 수술 후 조심스럽게 몸 상태를 조절하며 춘계 캠프에 1군으로 합류했다. 이 해부터 1루수로 출전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훈련을 거듭했으며, 오픈전에서 5할에 가까운 타율을 기록하며 개막전에서 생애 첫 '8번 타자 겸 1루수'로 선발 출전했다. 이 해에는 역시 처음으로 2번 타자도 경험했다. 중반 이후에는 우익수나 대타로 기용되는 경우가 늘었다. 허리 상태를 염려하며 출전했기에 규정 타석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1년 동안 116경기에 출전했다(선발 출전 76경기). 클라이맥스 시리즈를 포함하여 그가 홈런을 친 경기에서는 팀이 모두 승리했다. 전년도 부상에서 복귀한 시즌이었지만, 출루율 .364, 득점권 타율 .325, 클라이맥스 시리즈 타율 .375를 기록하며 선구안과 승부 근성은 여전함을 보여주었다.
2011년, 다카하시는 개막 전 정규 주전 재탈환을 목표로 내걸었고, 개막전에는 5번 타자 겸 우익수로 선발 출전했다. 그러나 4월 26일 야쿠르트전 수비 중 외야 펜스에 부딪혀 부상으로 교체되었고, 29일 등록이 말소되었다. 검사 결과 왼쪽 늑골 골절로 판명되었다. 부상 복귀 후 6월 11일 재등록되었다. 7월 10일에는 NPB 역사상 108번째로 통산 1500안타를 달성했다. 8월 7일 히로시마전에서는 팀을 구하는 다이빙 캐치로 '조지아 혼' 상을 수상했다. 8월 20일에는 3년 만에 4번 타자로 선발 출전했으며, 8월 25일 한신전에서도 공수 양면에서 활약했다. 10월 12일 한신전에서는 8년 만에 끝내기 홈런을 대타로 터뜨렸다. 하지만 시즌 전체적으로는 95경기 출전에 타율 .246, 15홈런, 37타점으로 규정 타석에 미치지 못했다. 한편, OPS는 .829로 규정 타석 도달자 중 리그 선두였던 나가노 히사요시(.847)와 견줄 만한 성적을 기록했다. 계약 갱신에서는 당시 구단 역사상 가장 큰 폭의 삭감액인 1.80 억 JPY가 감소된 추정 연봉 1.70 억 JPY에 계약했다.
2012년, 다카하시는 개막 전 인터뷰에서 "몸의 노쇠화가 기술로 보완되지 않고 있다"고 발언했지만, 개막전에는 6번 타자 겸 우익수로 선발 출전했다. 단 4타석 차이로 5년 만의 규정 타석 도달에는 실패했지만, 큰 부상 없이 1년 내내 1군에 머물렀다. 시즌 타율 .239, 8홈런에 그쳤지만, 출루율은 3할 5푼을 넘겼고, 만루 상황에서는 타율 .538, 2홈런, 21타점으로 승부 근성이 빛났다. 7월 올스타전에는 2007년 이후 약 5년 만에 출전했다. 8월 17일 히로시마전(도쿄 돔)에서는 NPB 역사상 37번째로 통산 300홈런을 달성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전 경기에 선발 출전했으며, 일본 시리즈에서는 3차전에서 아베 신노스케가 부상당하자 4차전에는 4번 타자로 선발 출전했다.
2013년, 춘계 캠프에서는 아베 신노스케가 WBC에 출전하면서 주장 대리를 맡았다. 개막전에는 6번 타자 겸 좌익수로 출전했으며, 4월 4일 요코하마전에서 시즌 첫 안타(2007년 이후 6년 만의 3루타)를 기록했지만, 2루를 돌다가 왼쪽 종아리 부상을 입고 교체되어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 근육 파열로 전치 3개월 진단을 받았으나, 6월 29일 1군에 복귀했다. 7월 4일 한신전에서는 아베의 대타로 4번 타순에 들어서 부상 영향을 느끼지 못하는 과감한 주루 플레이로 결승 득점을 올렸다. 이 해는 앞서 언급한 부상 영향으로 68경기 출전에 그쳤지만, 타율 .303, 10홈런, OPS .950을 기록했다. 2년 만에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으며, 규정 타석 미달에도 불구하고 OPS OPS는 개인 최고치를 기록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6경기에 출전하여 6차전에서 다나카 마사히로를 상대로 결승 적시타를 터뜨렸지만, 타율 .150, OPS .427로 부진했고 팀은 일본 시리즈 우승을 놓쳤다.
2014년, 다카하시는 시즌 전반기 동안 대타의 핵심으로서 팀을 지탱했다. 대타로서 17타점을 기록하며 야나기다 도시로의 구단 기록에 1타점 차이로 다가섰다. 여름부터는 선발 출전이 늘었으며, 클린업 타순에 배치되는 경기도 있었다. 8월 18일, 다카하시에게 타격의 기초를 가르쳐 준 아버지 다카하시 시게에가 심부전으로 75세에 사망했다. 장례식 다음 날에도 경기에 출전하여 솔로 홈런을 터뜨렸고, 베이스를 돌던 중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8월 24일 주니치전에서 스윙 도중 오른쪽 중지 탈구를 당했고, 25일 등록이 말소되어 그대로 시즌을 마쳤다. 출전 경기 수는 많지 않았지만, 전년에 이어 노쇠화를 느끼지 못하는 성적을 거두었다. 10월 25일에는 선수 겸임 1군 타격 코치로 취임이 발표되었다.
2015년 6월 11일 닛폰햄과의 경기에서 NPB 역사상 55번째로 통산 3000루타를 달성했다. 최종적으로 77경기 출전에 타율 .278을 기록했으며, 대타로서 타율 .395를 기록했다. 다음 시즌에도 현역 생활을 이어갈 의향을 보였으나, 클라이맥스 시리즈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용퇴를 표명한 하라 다쓰노리 감독의 후임으로 구단으로부터 감독직 제안을 받았다. 10월 23일, 와타나베 쓰네오 당시 최고 고문, 시라이시 고지로 당시 구단주와 면담 후 2016년 시즌부터 감독직을 수락함과 동시에 2015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겠다고 발표했다. 10월 26일 감독 취임 기자회견을 가졌고, 11월 5일 NPB로부터 임의 은퇴가 공시되었다. 다카하시의 은퇴 및 감독 취임이 갑작스럽게 결정되었기에, 구단은 팬들의 요청에 따라 11월 23일 팬 페스타(도쿄 돔)에서 다카하시의 현역 은퇴식과 감독 취임 세리머니를 개최했다. 현역 시절부터 사용하던 등번호 24번을 계속 사용하게 되었다. 그는 NPB 역사상 최초의 '쇼와 50년대생 감독'이자 '역지명 입단 감독'이 되었으며, 요미우리 감독으로서도 고라쿠엔 구장에서 경기 출전 경험이 없는 첫 감독이 되었다. 현역 시절 그는 천재 타자로 군림하며 입단부터 2004년까지 7년 연속 규정 타석에 도달했지만, 2005년부터 은퇴하는 2015년까지는 허리 통증 등 잦은 부상 이탈로 인해 2007년에 단 한 번만 규정 타석에 도달했으며, 결국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지 못했다.
2.3. 부상과 재기
다카하시 요시노부의 선수 경력은 뛰어난 기량과 함께 잦은 부상으로 점철되었다. 특히 외야 펜스에 부딪히는 적극적인 수비 스타일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지만, 동시에 여러 차례 심각한 부상으로 이어졌다.
- 1999년 9월 14일, 주니치전(나고야 돔)에서 외야 펜스에 격돌하여 쇄골 골절을 당했다. 이는 그가 홈런왕 경쟁에서 선두를 달리던 시점에 발생하여 큰 아쉬움을 남겼다.
- 2002년 8월 3일, 히로시마전(구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펜스 근처에서 다이빙 캐치를 시도하다 왼쪽 발뒤꿈치를 강타하여 전력에서 이탈했다.
- 2005년 4월 30일, 히로시마전(구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수비 중 펜스에 오르다 오른쪽 어깨 견갑하근 근육 파열을 입었다. 이후 7월 8일에도 같은 구장 펜스에 오른쪽 발목을 강타해 다시 이탈했다. 그는 이 구장에서 세 차례나 비슷한 방식으로 부상을 당하자, 복귀 후 히로시마전에서는 구장 펜스에 소금을 뿌렸다는 일화가 있다.
- 2006년 4월 12일, 히로시마전에서 중견수 수비 중 다이빙 캐치를 시도하다 왼쪽 옆구리 통증으로 약 1개월간 이탈했다. 복귀 후 5월 27일 지바 롯데전에서 다시 다이빙 캐치를 시도하다 왼쪽 어깨를 다쳤다. 잦은 부상으로 인해 하라 다쓰노리 감독이 그에게 다이빙 캐치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다카하시 본인은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는 몸이 먼저 날아간다. 그 순간 머릿속은 새하얘진다. 부상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 2009년에는 허리 통증이 심화되어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2군에서 시즌을 시작했으며, 결국 9월 15일 허리 수술을 받았다. 이 수술은 선수 생명을 건 위험한 결정이었으며, 그는 당시를 "야구를 하는 것을 상상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시기", "이미 무리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는 이러한 잦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재활에 매달려 복귀를 이루어냈다. 2010년 허리 수술 후에는 1루수로도 기용되며 수비 부담을 줄였고, 2011년에는 다시 펜스 충돌로 늑골 골절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지아 혼' 상을 수상하는 등 투혼을 보여주었다. 그의 재기는 단순히 부상을 극복하는 것을 넘어, 포지션 전환과 타격 스타일 변화를 통해 선수 생활을 이어가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2.4. 후기 경력 및 은퇴
다카하시 요시노부의 선수 생활 말기는 잦은 부상과 함께 팀 내에서의 역할 변화가 두드러졌다. 2008년 허리 통증 재발로 인해 91경기 출전에 타율 .236이라는 개인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으며, 통산 타율도 3할대 아래로 떨어졌다. 2009년에는 허리 수술로 인해 단 1타석 출전에 그치는 등 선수 생명의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2010년 허리 수술에서 복귀하여 1루수로 포지션을 전환하며 116경기에 출전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비록 규정 타석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클러치 능력을 보여주며 팀에 기여했다. 2011년에는 다시 늑골 골절 부상을 겪었으나, 통산 1500안타를 달성하고 대타 끝내기 홈런을 기록하는 등 여전히 존재감을 과시했다. 하지만 잦은 부상으로 인해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하는 시즌이 늘어났고, 2011년에는 연봉이 크게 삭감되기도 했다.
2012년에는 통산 300홈런을 달성하며 대기록을 세웠고, 2013년에는 부상으로 경기 수가 줄었음에도 타율 .303, OPS .950이라는 뛰어난 효율성을 보여주며 '천재 타자'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2014년에는 대타의 핵심으로 활약하며 구단 기록에 근접하는 대타 타점을 기록했고, 아버지의 사망 다음 날 홈런을 치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 해 그는 선수 겸임 1군 타격 코치로 임명되며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2015년에는 통산 3000루타를 달성하며 꾸준함을 보여주었다. 시즌 종료 후에도 현역 생활을 계속할 의향이 있었으나, 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용퇴를 표명한 하라 다쓰노리 감독의 후임으로 구단으로부터 감독직 제안을 받았다. 그는 고심 끝에 2015년 10월 23일 감독직을 수락함과 동시에 현역 은퇴를 발표했다. 21년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고 뛰었던 그의 선수 생활은 이로써 막을 내렸다. 그의 은퇴는 갑작스러운 결정이었기에, 구단은 팬들을 위해 팬 페스타에서 은퇴식을 열어 그의 마지막을 기렸다.
3. 국제 대회 경력
다카하시 요시노부는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여러 국제 대회에 참가하여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 1997년 제13회 IBAF 인터콘티넨탈컵**: 대학생 신분으로 일본 대표팀의 4번 타자로 출전하여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쿠바와의 결승전 1회말에 선제점이자 결승점이 되는 3점 홈런을 터뜨렸고, 이후에도 2점 3루타를 기록했다.
- 2001년 제34회 IBAF 월드컵**: 일본 대표팀의 4번 타자 겸 우익수로 출전했다. 예선 쿠바전에서 3안타를 기록하며 승리에 기여했으나, 일본은 준결승에서 쿠바에 패하고 3위 결정전에서도 타이완에 패하며 4위에 머물렀다. 다카하시는 이 대회에서 타점왕과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 2003년 제22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아테네 올림픽 예선)**: 아테네 올림픽 예선을 겸한 이 대회에 출전하여 수위타자를 차지했다.
-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3번 타자 겸 중견수, 그리고 부주장을 맡아 활약했다. 팀 최다인 3개의 홈런을 기록했으며, 특히 타이완전에서는 왕젠민을 상대로 귀중한 동점 2점 적시타를 터뜨렸다. 일본은 이 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4. 지도자 경력
다카하시 요시노부는 선수 은퇴 직후인 2016년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제18대 감독으로 부임하여 3년간 팀을 이끌었다.
4.1. 재임 기간 (2016-2018)
다카하시 감독은 2016년 시즌을 앞두고 '일신(一新)'을 그 해의 테마로 내걸었다. 개막 후 4연승을 달성하는 등 시즌 초반에는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으나, 선발 투수들의 잦은 부상 이탈로 5월부터 팀 성적이 하락하며 한때 4위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이후 팀을 재정비하여 다시 상위권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8월 24일 히로시마전에서 패배하며 히로시마의 매직 넘버 점등을 허용했고, 히로시마의 기세가 가속화되면서 요미우리는 하락세를 보였다. 결국 9월 10일 히로시마전에서 패배하며 구단 역사상 두 번째로 도쿄 돔에서 상대 팀의 리그 우승을 지켜보는 굴욕을 맛봤다. 최종적으로 히로시마, DeNA, 주니치 세 팀에 열세를 보였지만 리그 2위로 시즌을 마쳤다.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3위 DeNA와 맞붙어 첫 경기를 내줬으나 2차전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3차전에서 연장전 끝에 패하며 2011년 퍼스트 스테이지 이후 5년 만에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탈락했다.
2017년, 다카하시 감독은 '신화(新化)'를 테마로 삼았다. 전년과 마찬가지로 개막 5연승을 기록하며 시즌 초반에는 좋은 흐름을 보였으나, 5월 중순부터 점차 하락세를 겪었다. 구단 역사상 최악인 13연패를 기록하며 한때 빚이 두 자릿수로 불어나는 등 부진에 빠졌다. (이 13연패는 1975년의 11연패 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케이시 맥게히를 7월 하순부터 2번 타자 겸 2루수로 기용하는 공격적인 라인업을 시도하며 8월에 반등했으나, 9월 들어 주장 사카모토 하야토, 아베 신노스케, 무라타 슈이치 등 베테랑 선수들의 피로와 타격 부진 등으로 다시 하락세를 보였다. 10월 1일 한신전에서 패배하고 3위 DeNA가 승리하면서, 최종적으로 전년보다 높은 승률에도 불구하고 11년 만에 B클래스인 4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2018년, 다카하시 감독은 '분휘(奮輝)'를 테마로 내걸었다. 동갑내기 우에하라 고지가 복귀했지만, 영입 선수들이 전년의 양다이강, 야마구치 슌처럼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사카모토, 스콧 매시슨, 2루수로 두각을 나타내던 요시카와 나오키 등 부상자가 속출하면서 우승 경쟁에서 거의 밀려났고, 8월 이후에는 다시 빚을 지는 등 침체기를 겪었다. 9월 이후 DeNA와의 3위 싸움이 이어졌고,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이 걸린 시즌 최종전에서 한신에 승리하며 정규 시즌 3위를 확보했다. 오카모토 가즈마, 요시카와 나오키 등 젊은 선수들을 성장시키는 등 육성 면에서는 성과를 냈지만,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10월 3일 감독 사임을 표명했다. 우승 없이 요미우리 감독직을 마친 것은 호리우치 쓰네오에 이어 두 번째였다.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를 스가노 도모유키의 노히트 노런 등에 힘입어 2승 무패로 제압하고 파이널 스테이지에 진출했다. 그러나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리그 우승팀 히로시마에게 3경기 연속으로 맥게히의 적시타로 1점만 내는 등 타선이 침묵하며 3연패로 패퇴했다. 감독 사임과 함께 1998년 입단부터 21년간 입었던 유니폼을 이 해를 마지막으로 벗게 되었다. 감독직 사임 후에는 구단 특별 고문에 취임했다.
5. 지도자 은퇴 후 활동
다카하시 요시노부 감독직 은퇴 후에도 야구계와 미디어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2019년부터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 특별 고문 직함을 유지하며, 니혼 TV의 야구 해설가와 스포츠호치의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news zero (니혼 TV)의 스포츠 코멘테이터로도 출연하기 시작했다. 2021년부터는 라디오 일본의 야구 해설가도 겸임하고 있다(2019년과 2020년에도 게스트 해설로 출연한 바 있다).
2023년 12월 19일에는 2024년 1월 1일부로 요미우리 신문 스포츠 어드바이저로 취임할 것이 발표되었다.
6. 선수로서의 특징
다카하시 요시노부는 '천재 타자'로 불릴 만큼 뛰어난 타격 기술과 감각적인 수비 능력을 겸비한 선수였다.
6.1. 타격

다카하시는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높은 타격 기술과 타고난 타이밍 감각을 지녔다. 그는 속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스윙했지만, 오른쪽 다리를 높이 드는 '한발 타법'으로 어떤 공에도 폼이 무너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함을 겸비했다. 다소 볼성 투구에도 안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을 자랑했으며, 파울을 유도하는 기술도 뛰어났다. 바깥쪽 공에도 강했고, 넓은 범위로 타구를 보내는 기술을 가졌다.
주로 1번 타자로 기용된 2007년에는 장타뿐만 아니라 출루도 의식하는 스타일로 변화했으며, 첫 스트라이크 스윙 비율이 전년보다 15% 감소하여 볼넷 수가 증가했다. 잦은 부상으로 타이틀이나 선수 경력에 손해를 본 것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선수 생활 말년에도 그의 타격 재능은 인정받았다. 은퇴 3년 전인 2012년에는 훗날 이도류로 타자로서도 크게 성공한 오타니 쇼헤이를 프로 스카우트들이 "다카하시 요시노부 타입으로 타격 3관왕을 노릴 수 있는 재목"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는 간접적으로 다카하시의 타격 재능을 인정한 발언이었다. 무라카미 무네타카는 '스포츠호치'와의 인터뷰에서 다카하시 본인에게 "어릴 때 다카하시 요시노부 선수를 정말 많이 봤고, 다리 올리는 방식 등을 엄청 따라 했다. 동경심이 있어서 지금 정말 긴장하면서 이야기하고 있다", "호타자이고 어떤 공이든 잘 친다. 선두 타자 홈런 이미지가 강하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6.2. 수비 및 주루
다카하시는 입단 이래 주로 우익수로 뛰었다. 펜스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적극적인 수비를 보여주었으며, 원투 120 m의 강한 어깨와 정확성을 겸비했다. 또한 포구에서 송구까지의 유기적인 동작도 그의 특징이었다. 이러한 우익수 수비에 대한 높은 평가를 바탕으로, 입단 1년차부터 6년 연속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하며 NPB 기록을 세웠다.
2003년에는 마쓰이 히데키의 메이저 리그 이적으로, 2006년에는 하라 다쓰노리 감독의 요청으로 일시적으로 중견수로 전환되었다. 2010년부터는 부상으로 인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1루수로도 기용되기 시작했다. 프로 입단 후 내야 수비 경험은 없었지만 안정적인 수비를 선보였으며, 이 해 골든 글러브상 1루수 부문에서 2위를 차지했다. 2012년 시즌에는 개막 전 춘계 캠프에서 좌익수 주전을 목표로 삼았고, 여름 이후에는 좌익수로 선발 출전하는 경우가 증가했다.
하지만 파인 플레이의 대가로 부상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입단 2년차인 1999년을 비롯하여 2002년, 2005년, 2006년, 그리고 2011년까지, 특히 펜스 근처에서의 수비가 원인이 되어 큰 부상을 당했다. 2006년에는 하라 다쓰노리 감독으로부터 다이빙 캐치 금지령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다카하시 본인은 자신의 수비에 대해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는 뛰어들게 된다. 그 순간 머릿속은 새하얘진다. 부상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2014년 이후에는 선발 출전 시 수비 부담을 고려하여 좌익수로 출전하는 기회가 많았다.
주루 면에서는 프로 입단 초 50미터 달리기 6.0초대, 1루 도달 4.0초대의 빠른 발을 자랑했지만, 젊은 시절부터 도루 수는 적었다. 최다는 2000년의 5도루로, 도루에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7. 수상 및 기록
다카하시 요시노부는 선수 및 지도자 경력 동안 수많은 개인상과 기록을 달성했다.
7.1. 주요 수상 경력
- 베스트 나인: 2회 (1999년, 2007년)
- 골든 글러브상: 7회 (1998년 ~ 2003년, 2007년)
- 월간 MVP: 5회 (1999년 4월, 2000년 8월, 2001년 8월, 2003년 6월, 2007년 6월)
- 센트럴 리그 연맹 특별 표창: 1회 (신인 특별상: 1998년)
- 센트럴 리그 회장 특별 표창: 1회 (1998년)
- 올스타전 MVP: 1회 (2003년 1차전)
- 올스타전 우수 선수상: 1회 (2004년 1차전)
- 도쿄 돔 MVP: 1회 (1998년)
- 우수 JCB·MEP상: 1회 (2003년)
- JA 전농 Go·Go상: 1회 (호주루상: 2007년 3·4월)
- '조지아 혼' 상: 1회 (2011년도 제8회)
- 야나세·자이언츠 MVP상: 2회 (2003년, 2015년)
- 앳홈 히어로 오브 더 이어: 1회 (2014년)
- 월간 앳홈 히어로상: 1회 (2014년 7월)
7.2. 주요 기록
- 첫 기록**
- 첫 출장·첫 선발 출장: 1998년 4월 3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1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7번 우익수로 선발 출장, 2타수 1안타
- 첫 타석: 상동, 2회초 이시이 가즈히사로부터 중견수 뜬공
- 첫 안타: 상동, 7회초 다카기 고지로부터 우전 안타
- 첫 타점: 1998년 4월 5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3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6회초 가와사키 겐지로로부터 좌중간 적시 2루타
- 첫 홈런: 1998년 4월 7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차전(도쿄 돔), 4회말 야마우치 야스유키로부터 우월 솔로 홈런
- 첫 도루: 1998년 4월 15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2차전(도쿄 돔), 2회말 2루 도루 (투수: 가도쿠라 겐, 포수: 미쓰야마 히데카즈)
- 기록 달성 경력**
- 통산 100홈런: 2001년 8월 1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19차전(도쿄 돔), 4회말 가와카미 겐신으로부터 중월 2점 홈런 (역대 214번째)
- 통산 150홈런: 2003년 9월 27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6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6회초 가와우치 다카야로부터 우중간 솔로 홈런 (역대 129번째)
- 통산 1000안타: 2004년 9월 29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7차전(도쿄 돔), 6회말 존 베일로부터 우전 안타 (역대 227번째, 850경기째 달성은 역대 8위)
- 통산 200홈런: 2006년 4월 4일, 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1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4회초 이시이 가즈히사로부터 중월 2점 홈런 (역대 86번째)
- 통산 1000경기 출장: 2006년 8월 18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16차전(도쿄 돔), 3번 우익수로 선발 출장 (역대 412번째)
- 통산 250홈런: 2008년 4월 6일, 대 한신 타이거스 3차전(도쿄 돔), 3회말 후쿠하라 시노부로부터 우중간 2점 홈런 (역대 52번째)
- 통산 1500안타: 2011년 7월 10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9차전(도쿄 돔), 5회말 브라이언 벌링턴으로부터 좌익선상 안타 (역대 108번째)
- 통산 1000삼진: 2012년 4월 8일, 대 한신 타이거스 3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3회초 이와타 미노루에게 헛스윙 삼진 (역대 53번째)
- 통산 1500경기 출장: 2012년 5월 4일, 대 한신 타이거스 7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5번 우익수로 선발 출장 (역대 175번째)
- 통산 몸에 맞는 볼 100개: 2012년 7월 14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11차전(나고야 돔), 6회초 엔옐버트 소토로부터 (역대 19번째)
- 통산 300홈런: 2012년 8월 17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6차전(도쿄 돔), 5회말 브라이언 벌링턴으로부터 좌월 2점 홈런 (역대 37번째)
- 통산 3000루타: 2015년 6월 11일, 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3차전(삿포로 돔), 4회초 우와사와 나오유키로부터 우중간 2루타 (역대 55번째)
- 기타 기록**
- 입단 첫 해부터 2년 연속 타율 3할 이상 (1998년 ~ 1999년) (역대 4번째)
- 입단 첫 해부터 6년 연속 골든 글러브상 수상 (1998년 ~ 2003년) (NPB 기록)
- 11타수 연속 안타 (2003년 6월 7일 ~ 6월 11일, 3볼넷 포함) (NPB 타이 기록)
- 14타석 연속 출루 (2003년 6월 7일 ~ 6월 11일) (NPB 2위 타이 기록)
- 시즌 첫 회 선두 타자 홈런: 9개 (2007년) (NPB 기록)
- 올스타전 출장: 9회 (1998년 ~ 2004년, 2007년, 2012년)
- 등번호**: 24 (1998년 ~ 2018년)
연 도 | 소 속 | 경 기 | 타 석 | 타 수 | 득 점 | 안 타 | 2 루 타 | 3 루 타 | 홈 런 | 루 타 | 타 점 | 도 루 | 도 루 자 | 희 생 번 | 희 생 플 | 볼 넷 | 고 4 | 사 구 | 삼 진 | 병 살 타 | 타 율 | 출 루 율 | 장 타 율 | O P S |
---|---|---|---|---|---|---|---|---|---|---|---|---|---|---|---|---|---|---|---|---|---|---|---|---|
1998 | 요미우리 | 126 | 515 | 466 | 65 | 140 | 32 | 1 | 19 | 231 | 75 | 3 | 2 | 1 | 5 | 36 | 1 | 7 | 85 | 5 | .300 | .356 | .496 | .852 |
1999 | 118 | 505 | 454 | 71 | 143 | 18 | 2 | 34 | 267 | 98 | 3 | 3 | 2 | 2 | 39 | 7 | 8 | 96 | 3 | .315 | .378 | .588 | .966 | |
2000 | 135 | 577 | 519 | 89 | 150 | 29 | 1 | 27 | 262 | 74 | 5 | 3 | 3 | 3 | 46 | 2 | 6 | 87 | 11 | .289 | .352 | .505 | .857 | |
2001 | 140 | 605 | 543 | 88 | 164 | 26 | 0 | 27 | 271 | 85 | 3 | 2 | 1 | 5 | 49 | 4 | 7 | 85 | 14 | .302 | .364 | .499 | .863 | |
2002 | 105 | 454 | 409 | 63 | 125 | 18 | 0 | 17 | 194 | 53 | 1 | 3 | 2 | 3 | 27 | 0 | 13 | 70 | 7 | .306 | .365 | .474 | .839 | |
2003 | 118 | 486 | 443 | 85 | 143 | 31 | 1 | 26 | 254 | 68 | 3 | 1 | 0 | 2 | 38 | 2 | 3 | 59 | 7 | .323 | .379 | .573 | .952 | |
2004 | 109 | 477 | 426 | 83 | 135 | 20 | 1 | 30 | 247 | 79 | 1 | 3 | 1 | 1 | 38 | 1 | 11 | 70 | 12 | .317 | .387 | .580 | .966 | |
2005 | 88 | 360 | 325 | 50 | 97 | 15 | 0 | 17 | 163 | 41 | 1 | 0 | 0 | 0 | 30 | 0 | 5 | 54 | 8 | .298 | .367 | .502 | .868 | |
2006 | 97 | 390 | 350 | 45 | 91 | 14 | 1 | 15 | 152 | 51 | 1 | 0 | 2 | 5 | 25 | 0 | 8 | 64 | 5 | .260 | .320 | .434 | .754 | |
2007 | 133 | 590 | 503 | 76 | 155 | 29 | 1 | 35 | 291 | 88 | 1 | 5 | 3 | 2 | 66 | 6 | 16 | 107 | 3 | .308 | .404 | .579 | .982 | |
2008 | 91 | 311 | 275 | 38 | 65 | 11 | 0 | 17 | 127 | 41 | 1 | 0 | 0 | 1 | 30 | 3 | 5 | 76 | 3 | .236 | .322 | .462 | .783 | |
2009 | 1 | 1 | 1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1 | 0 | .000 | .000 | .000 | .000 | |
2010 | 116 | 332 | 280 | 30 | 75 | 9 | 0 | 13 | 123 | 56 | 2 | 0 | 0 | 6 | 44 | 1 | 2 | 75 | 6 | .268 | .364 | .439 | .804 | |
2011 | 95 | 301 | 256 | 35 | 63 | 13 | 0 | 15 | 121 | 37 | 0 | 1 | 1 | 0 | 40 | 1 | 4 | 64 | 9 | .246 | .357 | .473 | .829 | |
2012 | 130 | 442 | 368 | 30 | 88 | 17 | 0 | 8 | 129 | 56 | 2 | 3 | 1 | 4 | 61 | 4 | 8 | 77 | 14 | .239 | .356 | .351 | .707 | |
2013 | 68 | 197 | 165 | 23 | 50 | 6 | 1 | 10 | 88 | 34 | 0 | 0 | 0 | 0 | 31 | 2 | 1 | 34 | 4 | .303 | .416 | .533 | .950 | |
2014 | 72 | 130 | 112 | 8 | 32 | 4 | 0 | 6 | 54 | 29 | 0 | 0 | 0 | 2 | 14 | 0 | 2 | 30 | 0 | .286 | .369 | .482 | .851 | |
2015 | 77 | 158 | 133 | 11 | 37 | 5 | 0 | 5 | 57 | 21 | 2 | 0 | 0 | 1 | 20 | 0 | 4 | 39 | 3 | .278 | .386 | .429 | .815 | |
통산: 18년 | 1819 | 6831 | 6028 | 890 | 1753 | 297 | 9 | 321 | 3031 | 986 | 29 | 26 | 17 | 42 | 634 | 34 | 110 | 1173 | 114 | .291 | .366 | .503 | .869 |
연 도 | 연 령 | 소속 리그 | 타 율 | 안 타 | 홈 런 | 타 점 |
---|---|---|---|---|---|---|
1998 | 23 | 센트럴 리그 | 8위 | 9위 | 9위 | 10위 |
1999 | 24 | 5위 | - | 6위 | 4위 | |
2000 | 25 | - | 8위 | 6위 | 10위 | |
2001 | 26 | - | 2위 | 8위 | 9위 | |
2002 | 27 | 8위 | - | - | - | |
2003 | 28 | 4위 | - | 8위 | - | |
2004 | 29 | 4위 | - | - | - | |
2005 | 30 | - | - | - | - | |
2006 | 31 | - | - | - | - | |
2007 | 32 | 6위 | 9위 | 2위 | 9위 | |
2008 | 33 | - | - | - | - | |
2009 | 34 | - | - | - | - | |
2010 | 35 | - | - | - | - | |
2011 | 36 | - | - | - | - | |
2012 | 37 | - | - | - | - | |
2013 | 38 | - | - | - | - | |
2014 | 39 | - | - | - | - | |
2015 | 40 | - | - | - | - |
- '-'는 10위 미만(타율, OPS는 규정 타석에 도달하지 않은 경우도 '-'와 표기)
연 도 | 소 속 | 경 기 | 타 석 | 타 수 | 득 점 | 안 타 | 2 루 타 | 3 루 타 | 홈 런 | 루 타 | 타 점 | 도 루 | 도 루 자 | 희 생 번 | 희 생 플 | 볼< br />넷 | 고 4 | 사 구 | 삼 진 | 병 살 타 | 타 율 | 출 루 율 | 장 타 율 | O P S |
---|---|---|---|---|---|---|---|---|---|---|---|---|---|---|---|---|---|---|---|---|---|---|---|---|
2003 | 일본 | 3 | 13 | 12 | 2 | 7 | 1 | 0 | 0 | 8 | 2 | 0 | 0 | 0 | 0 | 1 | 0 | 0 | 1 | 0 | .583 | .615 | .667 | 1.282 |
연 도 | 소 속 | 경 기 | 타 석 | 타 수 | 득 점 | 안 타 | 2 루 타 | 3 루 타 | 홈 런 | 루 타 | 타 점 | 도 루 | 도 루 자 | 희 생 번 | 희 생 플 | 볼 넷 | 고 4 | 사 구 | 삼 진 | 병 살 타 | 타 율 | 출 루 율 | 장 타 율 | O P S |
---|---|---|---|---|---|---|---|---|---|---|---|---|---|---|---|---|---|---|---|---|---|---|---|---|
2004 | 일본 | 9 | 44 | 38 | 9 | 11 | 1 | 0 | 3 | 21 | 8 | 0 | 0 | 1 | 1 | 2 | 0 | 2 | 6 | 1 | .289 | .349 | .553 | .901 |
연도 | 소속 | 외야 | 1루 | ||||||||||
---|---|---|---|---|---|---|---|---|---|---|---|---|---|
경 기 | 척 살 | 보 살 | 실 책 | 병 살 | 수 비 율 | 경 기 | 척 살 | 보 살 | 실 책 | 병 살 | 수 비 율 | ||
1998 | 요미우리 | 124 | 226 | 12 | 7 | 4 | .971 | - | |||||
1999 | 118 | 209 | 3 | 2 | 1 | .991 | - | ||||||
2000 | 135 | 245 | 2 | 4 | 1 | .984 | - | ||||||
2001 | 140 | 255 | 6 | 4 | 0 | .985 | - | ||||||
2002 | 105 | 175 | 6 | 2 | 0 | .989 | - | ||||||
2003 | 111 | 221 | 7 | 3 | 3 | .987 | - | ||||||
2004 | 109 | 185 | 5 | 1 | 0 | .995 | - | ||||||
2005 | 78 | 150 | 5 | 1 | 0 | .994 | - | ||||||
2006 | 96 | 152 | 7 | 1 | 0 | .994 | - | ||||||
2007 | 128 | 210 | 7 | 1 | 0 | .995 | - | ||||||
2008 | 80 | 120 | 2 | 2 | 1 | .984 | - | ||||||
2010 | 45 | 53 | 1 | 0 | 0 | 1.000 | 52 | 344 | 15 | 4 | 23 | .989 | |
2011 | 76 | 89 | 6 | 0 | 1 | 1.000 | 15 | 87 | 2 | 0 | 2 | 1.000 | |
2012 | 110 | 134 | 3 | 1 | 0 | .993 | 6 | 27 | 0 | 0 | 2 | 1.000 | |
2013 | 54 | 47 | 2 | 0 | 0 | 1.000 | - | ||||||
2014 | 30 | 30 | 1 | 2 | 0 | .939 | 1 | 2 | 0 | 0 | 0 | 1.000 | |
2015 | 25 | 33 | 2 | 0 | 1 | 1.000 | - | ||||||
통산: 18년 | 1564 | 2534 | 77 | 31 | 12 | .988 | 74 | 460 | 17 | 4 | 27 | .992 |
연도 | 소속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승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연령 |
---|---|---|---|---|---|---|---|---|---|---|---|---|
2016 | 요미우리 | 2위 | 143 | 71 | 69 | 3 | .507 | 17.5 | 128 | .251 | 3.45 | 41세 |
2017 | 4위 | 143 | 72 | 68 | 3 | .514 | 16.5 | 113 | .249 | 3.31 | 42세 | |
2018 | 3위 | 143 | 67 | 71 | 5 | .486 | 13.5 | 152 | .257 | 3.79 | 43세 | |
통산: 3년 | 429 | 210 | 208 | 11 | .502 | A클래스: 2회, B클래스: 1회 |
연도 | 소속 | 경기명 | 상대팀 | 성적 |
---|---|---|---|---|
2016 | 요미우리 |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센트럴 리그 3위) | 1승 2패 = 패전 |
2018 |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센트럴 리그 2위) | 2승 0패 = 파이널 스테이지 진출 | |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 | 히로시마 도요 카프(센트럴 리그 1위) | 0승 4패 = 패전(※1) |
8. 개인사
다카하시 요시노부는 2006년 1월, 전 니혼 TV 아나운서인 오노데라 마이와 결혼했다. 슬하에 두 딸을 두고 있으며, 2019년에는 '이쿠멘 오브 더 이어' 스포츠 부문을 수상하며 가정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의 처제는 오노데라 유이이다.
9. 평가 및 영향
다카하시 요시노부는 '천재 타자'라는 별명에 걸맞게 뛰어난 타격 기술과 감각적인 수비 능력을 겸비한 선수로 평가받는다. 특히 입단 초부터 6년 연속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하며 수비의 정석을 보여주었고, 2007년에는 시즌 9개의 첫 회 선두 타자 홈런이라는 NPB 신기록을 세우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의 타격은 어떤 공에도 안정적으로 대응하는 유연함과 넓은 범위로 타구를 보내는 기술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그의 적극적인 수비 스타일은 잦은 부상으로 이어져 선수 생활 내내 그를 괴롭혔다. 펜스에 부딪히는 투혼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지만, 쇄골 골절, 발뒤꿈치 부상, 어깨 및 늑골 골절, 허리 통증 등 여러 차례의 심각한 부상은 그의 출전 경기 수를 제한하고 통산 기록 달성에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상에서 끊임없이 재기하며 포지션 전환과 타격 스타일 변화를 통해 선수 생활을 이어가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지도자로서의 경력은 3년간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을 맡았으나, 팀을 우승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오카모토 가즈마 등 젊은 선수들을 성장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선수 시절의 화려한 기록과 잦은 부상에도 굴하지 않는 투혼, 그리고 지도자로서의 노력은 그를 일본 야구계에서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그의 계약금 논란은 당시 일본 프로 야구의 계약 관행에 대한 논의를 촉발하기도 했다.
10. 관련 정보
다카하시 요시노부는 야구 외적으로도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 야구 외적인 수상**
- 일본 주얼리 베스트 드레서상 (남성 부문: 2000년)
- 지바시 시민 영예상 (2004년)
- 이쿠멘 오브 더 이어 (이쿠멘 스포츠 부문: 2019년)
- 출연 방송**
- 근육번개 시리즈 (TBS)
- ZONE (TBS)
- 우치쿠루!? (후지 TV)
- NONFIX 다카하시 요시노부 300일의 초상 ~거인의 이유~ (1998년 1월 27일, 후지 TV)
- 톤네루즈의 생으로 다라다라 이카세테!! (2000년 11월 22일, 니혼 TV)
- SMAPxSMAP (2000년 1월 17일, 후지 TV)
- 꿈 대결! 톤네루즈의 스포츠 왕은 나다! 스페셜 (2001년, TV 아사히)
- 세키구치 히로시의 도쿄 프렌드 파크 II (2001년 2월 10일, TBS)
- 체포하겠어 (2002년 12월 12일, TV 아사히) - 최종화 게스트 출연.
- 톤네루즈의 여러분 덕분이었습니다 식사 싫어하는 왕 결정전 (2002년 12월 12일, 후지 TV)
- 제53회 NHK 홍백가합전 (2002년 12월 31일, NHK 종합·라디오 제1) - 심사위원으로 출연.
- 새해다! 퀴즈 도레미파돈! (2003년 1월 3일, 후지 TV)
- 24시간 TV '사랑은 지구를 구한다' (2003년·2005년, 니혼 TV)
- 제17회 전국 재밌는 뉴스 그랑프리 2004 (2004년 12월 31일, TV 아사히)
- 『풋』스마 스페셜 (2005년 2월 8일, TV 아사히)
- 수요 프리미어 인류 사상 최고의 톱 애슬리트 정상 결전!! 근육 왕국 스페셜 (2005년 2월 9일, TBS)
- 스튜디오 파크에서 안녕하세요 (2006년 1월 10일, NHK 종합)
- 버스데이 (2006년 4월 25일, TBS)
- 닛케이 스페셜 가이아의 새벽 (2008년 7월 29일, TV 도쿄)
- 오하스타 (2010년 9월 1일, TV 도쿄)
- 이시카와 료 스페셜 RESPECT ~골프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2011년 2월 13일 ~ 3월 6일, TV 도쿄)
- Going!Sports&News (2022년 1월 8일 ~, 니혼 TV)
- news zero (2019년 4월 2일 ~, 니혼 TV〈야구 해설가로 불규칙 출연〉)
- 광고 (CM)**
- 산토리
- '펩시콜라'
- '매그넘 드라이〈상쾌 시코미〉'
- 다이하쓰
- '아테라이' - CM송도 직접 불렀다.
- '아테라이 왜건 에어로 다운 빌렛'
- '아테라이 7' - 거인의 별의 호시 휴마와의 대결을 연출했다. '메이저 리그 시트 완성편'과 '감동편' 두 종류가 있다.
- 메이지 제과
- '메이지 아몬드 초콜릿'
- '카루 스틱' - 히로스에 료코와 공동 출연.
- '푸카' - 나인티나인과 공동 출연.
- 산토리
11. 관련 항목
- 올림픽 야구 메달리스트 목록
- 지바현 출신 인물 목록
-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인물 목록
-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선수 목록
-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4번 타자 목록
- [https://sp.baseball.findfriends.jp/player/19750004/ 선수 정보] - 주간 베이스볼ONLINE
- [https://www.1101.com/yoshinobu2016/index.html 거의 일간 이토이 신문 다카하시 요시노부×이토이 시게사토 다카하시 요시노부 신감독의 솔직한 말] (2016년 3월)
- [https://www.1101.com/yoshinobu2017/index.html 거의 일간 이토이 신문 다카하시 요시노부×이토이 시게사토 이기는 건 이렇게 기쁜 거구나] (2017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