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Amateur Career
배리 본즈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운동 재능을 보이며 야구 선수로서 성장했다.
1.1. Childhood and Education
본즈는 1964년 7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에서 메이저리그 선수였던 아버지 바비 본즈와 어머니 패트리샤 하워드(Patricia Howard)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캘리포니아주 샌칼로스에서 성장했으며, 산마테오에 위치한 주니페로 세라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야구뿐만 아니라 농구, 미식축구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주니어 대표팀에서 뛰었고, 이후 고등학교 선수 생활 내내 대표팀에서 활약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타율 .467을 기록하며 전국 고등학교 올아메리칸 선수로 선정되었다. 1982년 메이저리그 드래프트에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2라운드 전체 39순위로 본즈를 지명했으나, 당시 자이언츠의 최고 제안액인 7.00 만 USD와 본즈의 최소 요구액인 7.50 만 USD 사이에서 계약 조건에 합의하지 못해 프로 계약 대신 대학 진학을 선택했다.
1.2. College Career
본즈는 애리조나 주립대학교에 진학하여 대학 야구 선수로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대학 3년 동안 그는 타율 .347, 45홈런, 175타점을 기록했다. 1984년에는 타율 .360과 30도루를 기록했으며, 1985년에는 23홈런, 66타점, 타율 .368을 기록하며 그 해 스포팅 뉴스 올아메리칸 선수로 선정되었다. 2학년 때는 칼리지 월드 시리즈에서 7타수 연속 안타로 NCAA 기록과 동률을 이루었으며, 1996년에는 올타임 칼리지 월드 시리즈 팀에 이름을 올렸다.
1986년에는 범죄학 학위를 취득하며 애리조나 주립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ASU 온 데크 서클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는데, 이 상의 역대 수상자 중에는 더스틴 페드로이아, 윌리 블룸퀴스트, 폴 로 두카, 아이크 데이비스 등이 있다. 대학 재학 중 그는 아마추어 알래스카 야구 리그의 알래스카 골드패너스에서 여름 한 시즌 동안 뛰기도 했다.
그러나 대학 시절 본즈는 팀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지 않았다. 오랜 감독 짐 브록의 말에 따르면 그는 "무례하고, 배려심 없으며, 자기중심적"이었다. 통금 위반으로 정지 처분을 받았을 때, 팀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선수들은 처음에는 그의 복귀에 반대 투표를 하기도 했다.
1.3. Draft and Minor Leagues
1985년 메이저리그 드래프트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는 전체 6순위로 본즈를 지명하며 그를 영입했다. 그는 캐롤라이나 리그의 프린스 윌리엄 파이리츠에 합류했고, 1985년 7월에는 리그 이달의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1986년에는 퍼시픽 코스트 리그의 하와이 아일랜더스에서 44경기 동안 타율 .311, 7홈런, 37타점을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데뷔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2. Professional Career
배리 본즈의 메이저리그 경력은 그를 역대 최고의 선수 반열에 올린 동시에 수많은 논란을 낳았다.
2.1. Pittsburgh Pirates (1986-1992)
본즈가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기 전, 피츠버그 파이리츠는 1980년대 초 서부 펜실베이니아의 철강 위기로 인한 경제 문제와 피츠버그 약물 재판의 영향으로 관중 수가 저조했다. 1984년과 1985년 홈 경기당 관중 수는 1만 명 미만이었고, 한때는 덴버로의 연고지 이전까지 고려될 정도였다.
본즈는 1986년 5월 30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의 경기에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으나, 5타수 무안타 1볼넷을 기록하며 6대4 패배에 기여했다. 그러나 6월 4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는 첫 메이저리그 홈런을 기록하며 4타점을 올려 파이리츠의 12대3 승리를 이끌었다. 1986년, 본즈는 16홈런, 48타점, 36도루, 65볼넷을 기록하며 내셔널 리그 신인 중 최고 성적을 거두었으나, 올해의 신인상 투표에서는 6위에 그쳤다. 1986년에는 중견수로 뛰었지만, 1987년 중견수 앤디 밴 슬라이크의 합류로 좌익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초창기 본즈는 주로 1번 타자로 출전했다. 밴 슬라이크와 함께 외야를 지키며, 경기장 밖에서는 친분이 없었지만, 넓은 수비 범위를 커버하며 견고한 수비 콤비를 형성했다. 본즈의 합류로 파이리츠는 팬들의 열기가 다시 살아나, 1987년 홈 개막전에서 52,119명의 구단 역대 최다 관중 기록을 세웠고, 이 기록은 1988년 홈 개막전에서 54,089명으로 다시 깨졌다. 1987년에 본즈는 타율 .261, 25홈런, 32도루, 59타점을 기록했다. 1988년에는 타율 .283, 24홈런, 58타점으로 향상된 모습을 보였다. 당시 파이리츠는 바비 보니야, 밴 슬라이크, 제이 벨 등과 함께 강력한 타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1989년에는 19홈런, 58타점, 그리고 내셔널 리그 2위인 14개의 외야 보살을 기록했다. 시즌 후 다저스의 제프 해밀턴과 존 웨트랜드와의 트레이드 루머가 돌았으나, 구단은 이를 부인했고 트레이드는 성사되지 않았다.
1990년, 본즈는 타율 .301, 33홈런, 114타점을 기록하며 첫 MVP를 수상했다. 또한 52도루로 리그 3위를 기록하며 30-30 클럽과 20-50 클럽에 처음으로 가입했다. 그는 첫 골드 글러브 어워드와 실버 슬러거 어워드도 수상했다. 그 해 파이리츠는 11년 만에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우승을 차지하며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으나, 1979년 월드 시리즈에서 파이리츠에게 패했던 신시내티 레즈에게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2승 4패로 패하며 1990년 월드 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1991년에도 본즈는 153경기에서 타율 .292, 25홈런, 116타점을 기록하며 또 다른 골드 글러브와 실버 슬러거를 수상했다. 그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테리 펜들턴(내셔널 리그 타격왕)에 이어 MVP 투표 2위를 차지했다. 1990년, 1992년, 1993년에 MVP급 활약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1991년 MVP를 놓친 것은 기자들과의 대립으로 인해 투표에서 불리했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당시 MVP를 차지한 테리 펜들턴은 타율 .319, 22홈런, 86타점, 10도루를 기록했지만, 전년도 최하위 팀으로 이적하여 핵심 선수로 1991년 월드 시리즈 진출에 기여한 점도 높이 평가되었다.
1992년 3월, 파이리츠 단장 테드 시몬스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단장 존 슈어홀츠와 본즈를 알레한드로 페냐, 키스 미첼, 그리고 추후 지명 선수와 트레이드하는 데 합의했으나, 파이리츠 감독 짐 레이랜드가 이 트레이드를 격렬히 반대하여 철회되었다. 본즈는 파이리츠에 남아 그 시즌 두 번째 MVP를 수상했다. 타율 .311, 34홈런, 103타점을 기록하며 파이리츠를 3년 연속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피츠버그는 7전 4선승제의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브레이브스에게 패했다. 본즈는 NLCS 7차전의 마지막 플레이에 참여했는데, 프란시스코 카브레라의 적시타를 받아 홈 플레이트에서 시드 브림을 아웃시키려 했으나, 파이리츠 포수 마이크 라발리에르에게 던진 공이 늦어 브림이 결승 득점을 올렸다. 이로써 NL 동부 챔피언 파이리츠는 3년 연속 월드 시리즈 진출이 좌절되었다. 패배 후, 본즈와 동료 스타 더그 드래벡은 피츠버그가 재계약하기에는 너무 높은 연봉을 요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피츠버그에서 뛰는 동안 본즈는 두 번의 MVP를 수상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이나 팬들에게 인기가 많지 않았다. 한 신문은 심지어 그에게 "MDP"(가장 혐오스러운 해적)라는 "상"을 주기도 했다.
2.2. San Francisco Giants (1993-2007)
2.2.1. Early Giants Years and All-Around Play (1993-1999)
1993년, 본즈는 파이리츠를 떠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당시 역대 최고액인 6년 4375.00 만 USD에 달하는 거액의 자유계약선수 계약을 맺었다. 그의 아버지 바비 본즈가 선수 생활의 첫 7년을 보냈고, 그의 대부 윌리 메이스가 24시즌 중 22시즌을 뛰었던 팀이었다. 이 계약은 당시 총액과 연평균 연봉 면에서 야구 역사상 가장 큰 규모였다.

자이언츠와 계약한 본즈는 파이리츠 시절 주로 사용했던 등번호 24번을 착용할 예정이었다. 메이스의 승인까지 받았고 자이언츠 구단도 은퇴 번호를 해제할 의향이 있었으나, 팬들과 미디어의 격렬한 반응으로 인해 너무 큰 소동이 일어났다. 결국 본즈는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아버지 바비의 등번호였던 25번으로 바꾸었다. 계약 발표 기자회견에서 본즈는 자이언츠에 합류하는 것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자 아버지와 대부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 "믿을 수 없고", "어린 시절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표현하며 감격에 겨워했다. 같은 해 그의 아버지도 팀의 코치로 합류했다. 1993년 5월 12일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경기에서 본즈는 아버지 바비와 함께 로키스 선수들과의 난투극에 연루되어 퇴장당하기도 했다.
1993년 본즈는 타율 .336, 46홈런, 123타점으로 내셔널 리그를 이끌며 2년 연속이자 통산 세 번째 MVP를 수상했다. 자이언츠는 103승을 거두며 뛰어난 시즌을 보냈지만, 와일드카드 제도가 도입되기 전 마지막 위대한 페넌트 레이스라고 불리는 경쟁에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104승을 거두어 지구 우승을 내주었다. 1993년 시즌 45홈런과 25도루는 매우 드문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파업으로 단축된 1994년 시즌에 본즈는 타율 .312, 37홈런, 81타점, 그리고 리그 최다인 74볼넷을 기록했다. 그는 MVP 투표에서 4위를 차지했다. 1994년 그는 제임스 우즈와 앤 아처 주연의 TV 영화 제인스 하우스에 본인 역으로 카메오 출연했다.
1995년, 본즈는 144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94, 33홈런, 104타점을 기록했으나, MVP 투표에서는 12위에 그쳤다.
1996년, 본즈는 내셔널 리그 최초이자 메이저리그 역사상 두 번째로 단일 시즌 40홈런 40도루를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 40-40 클럽의 다른 멤버로는 호세 칸세코(1988), 알렉스 로드리게스(1998), 알폰소 소리아노(2006), 로널드 아쿠냐 주니어(2023), 오타니 쇼헤이(2024)가 있다. 그의 아버지 바비 본즈는 1973년에 39홈런 43도루를 기록하여 아쉽게 40-40 클럽 가입에 실패한 바 있다.
4월 27일 플로리다 말린스의 존 버켓을 상대로 개인 통산 300호, 301호 홈런을 기록했다. 이로써 그는 윌리 메이스, 앙드레 도슨, 그리고 그의 아버지에 이어 통산 300도루-300홈런을 기록한 역사상 네 번째 선수가 되었다. 이 시즌 본즈는 129타점, 타율 .308, 그리고 당시 내셔널 리그 신기록인 151볼넷을 기록했다. 그는 MVP 투표에서 5위를 차지했다.
1997년, 본즈는 타율 .291을 기록했는데, 이는 1989년 이후 가장 낮은 타율이었다. 그는 2년 연속 40홈런을 기록하고 101타점을 올렸으며, 145볼넷으로 다시 리그 최다 볼넷을 기록했다. 또한 37도루를 기록하여 아버지와 함께 최다 30-30 시즌(5회) 기록을 세웠고, MVP 투표에서도 다시 5위를 차지했다.
1998년 5월 28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경기에서 9회 2아웃 만루 상황에서 고의 사구를 얻어내며 야구 역사상 다섯 번째로 만루 고의 사구를 얻은 선수가 되었다. 20세기에 이러한 기록을 달성한 다른 선수로는 냅 라조이(1901), 델 비소네트(1928), 빌 니컬슨(1944)이 있으며, 최초의 기록은 1881년 애브너 달림플이었다. 당시 다이아몬드백스의 감독 벅 쇼월터는 이 결정에 대해 "항상 비어있는 베이스가 있었고, 그날 밤은 홈 베이스가 비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 만루 고의 사구는 야구 팬들 사이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8월 23일 본즈는 통산 400호 홈런을 기록했다. 이로써 그는 통산 400홈런과 400도루를 기록한 최초의 선수가 되어 400-400 클럽에 가입했으며, 현재까지도 이 위업을 달성한 유일한 선수이다. 이 역사적인 홈런은 당시 말린스에서 뛰던 커트 오잘라를 상대로 나왔다. 이 시즌 그는 타율 .303, 37홈런, 122타점을 기록했으며, 8번째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다. 그는 MVP 투표에서 8위를 차지했다.
1999년은 본즈의 선수 생활에서 최소 출장 시간을 기록한 해였다. 그는 4월 한 달 동안 타율 .366, 4홈런, 12타점을 기록하며 좋은 출발을 보였으나, 4월 18일 이두근 힘줄 파열과 팔꿈치 뼛조각으로 인해 선수 생활 두 번째로 15일 부상자 명단에 올랐고, 4월과 5월 전체를 결장하게 되었다.
6월 9일 복귀 후, 본즈는 1999년 시즌 남은 기간 동안 타석에서 다소 고전했다. 팔꿈치 통증, 무릎 염증, 사타구니 문제 등 연이은 부상에 시달렸다. 부상자 명단에서 복귀 후 타율 .248에 그쳤지만, 두 달 가까이 결장하고 102경기만 뛰었음에도 34홈런, 83타점, .617의 장타율을 기록했다.
빌 제임스는 본즈를 1990년대 최고의 선수로 평가했다. 그는 1990년대 두 번째로 좋은 선수인 크레이그 비지오가 10번째 선수보다 본즈의 생산성에 더 가까웠다고 덧붙였다. 1999년, 1997년까지의 통계를 기준으로, 본즈는 스포팅 뉴스의 100대 야구 선수 목록에서 34위에 올라 현역 선수 중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이후 2005년 재조정된 스포팅 뉴스 목록에서는 베이브 루스, 윌리 메이스, 타이 콥, 월터 존슨, 행크 애런에 이어 6위에 올랐다.) 본즈는 1999년 메이저리그 올 센추리 팀에서 제외되었고, 켄 그리피 주니어가 대신 선정되었다. 제임스는 본즈에 대해 "내 평생 가장 저평가된 슈퍼스타"라며 "그리피는 항상 더 인기가 많았지만, 본즈는 훨씬, 훨씬 더 위대한 선수였다"고 썼다. 1999년 그는 본즈를 역대 16번째로 좋은 선수로 평가하며, "사람들이 그의 모든 업적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본즈는 아마도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5인 중 한 명으로 평가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2.2.2. Record-Breaking Offensive Peak (2000-2004)
2000년, 본즈는 143경기에서 타율 .306, 당시 개인 최고 장타율인 .688, 그리고 49홈런을 기록했다。 그는 또한 리그 최다인 117볼넷을 얻어냈다.
다음 해, 본즈의 공격력은 더욱 높아져 개인 기록뿐만 아니라 여러 메이저리그 기록을 갈아치웠다. 2001년 자이언츠의 첫 50경기에서 그는 28홈런을 쳤는데, 그 중 17개는 5월에 나왔으며 이는 개인 월간 최다 홈런 기록이었다. 이 시기에는 4월 17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테리 애덤스를 상대로 500호 홈런을 기록한 것도 포함된다. 그는 또한 올스타 브레이크까지 39홈런(메이저리그 기록)을 쳤고, 메이저리그 신기록인 177볼넷을 얻었으며, 40여 년 전 미키 맨틀과 테드 윌리엄스 이후 볼 수 없었던 .515의 출루율을 기록했다. 본즈의 장타율은 메이저리그 신기록인 .863(476타수 411루타)이었고, 시즌을 메이저리그 신기록인 73홈런으로 마쳤다.
10월 4일, 시즌 159번째 경기에서 윌프레도 로드리게스를 상대로 홈런을 치며 마크 맥과이어가 1998년 162경기에서 세운 70홈런 기록과 동률을 이루었다. 그는 다음 날 박찬호를 상대로 71호, 72호 홈런을 치며 기록을 경신했다. 본즈는 10월 7일 데니스 스프링어를 상대로 73호 홈런을 추가했다. 이 공은 나중에 장난감 제조업체 토드 맥팔레인에게 45.00 만 USD에 팔렸다. 그는 이전에 1998년 마크 맥과이어의 70호 홈런 공도 구매한 바 있다. 본즈는 그 시즌 메이저리그 홈런 선두를 차지하며 베이브 루스 홈런상을 수상했다.
2002년 1월 15일, 본즈는 자이언츠와 5년, 9000.00 만 USD 계약에 재계약했다. 그는 시즌 첫 4경기에서 5홈런을 치며 루 브록이 35년 전에 세운 4경기 최다 홈런 기록과 동률을 이루었다. 그는 개인 최고 타율인 .370으로 내셔널 리그 타격왕을 차지했으며, 46홈런, 110타점, 403타수에서 단 47삼진을 기록했다.
전 시즌보다 9경기 적게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메이저리그 신기록인 198볼넷을 얻어냈고, 이 중 68개는 고의 사구였다. 이는 윌리 맥코비가 1969년에 세운 45개를 넘어선 또 다른 메이저리그 기록이었다. 그는 .799의 장타율을 기록했는데, 이는 역대 4번째로 높은 기록이었다. 본즈는 테드 윌리엄스의 메이저리그 출루율 기록인 .582를 넘어섰다. 본즈는 또한 500호 홈런을 친 지 1년 반도 채 되지 않아 600호 홈런을 기록했다. 이 홈런은 8월 9일 홈 경기에서 파이리츠의 킵 웰스를 상대로 나왔다.
본즈는 포스트시즌에서 타율 .322, 8홈런, 16타점, 27볼넷을 기록하며 2002년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으나, 자이언츠는 7차전에서 애너하임 에인절스에게 패했다.
2003년, 본즈는 130경기만 뛰었다. 그는 390타수에서 45홈런을 기록했으며, 타율 .341을 기록했다. 그는 .749의 장타율, 148볼넷, 그리고 3년 연속 .500을 훨씬 넘는 출루율(.529)을 기록했다. 그는 또한 6월 23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의 동점 상황 11회에서 투수 에리크 가녜를 상대로 2루를 훔쳐 통산 500홈런/500도루 클럽의 유일한 멤버가 되었다. 본즈는 그 이닝에 결승 득점을 올렸다.
2004년, 본즈는 아마도 그의 최고의 시즌을 보냈을 것이다. 그는 타율 .362를 기록하며 두 번째 내셔널 리그 타격왕을 차지했고, 232볼넷(메이저리그 신기록 120고의사구 포함)으로 자신의 기록을 경신했다. 그는 .812의 장타율을 기록했는데, 이는 역대 4번째로 높은 기록이었고, .609의 출루율로 자신의 출루율 기록을 경신했다. 본즈는 4월 13일 벤 포드를 상대로 661호 홈런을 치며 메이스를 통산 홈런 목록에서 추월했다. 그는 9월 17일 제이크 피비를 상대로 700호 홈런을 기록했다. 본즈는 373타수에서 45홈런을 기록하고 삼진은 단 41개에 불과하여, 한 시즌에 삼진보다 홈런이 더 많은 메이저리그 선수라는 엘리트 그룹에 합류했다. 본즈는 4년 연속 MVP를 수상하며 통산 7번째 MVP를 차지했다. 그의 7번의 MVP 수상은 역사상 다른 어떤 선수보다 4번 더 많은 기록이다. 또한, 다른 어떤 리그에서도 4년 연속 MVP를 수상한 선수는 없다. (MVP는 1931년에 처음 수여되었다.) 40세의 본즈는 또한 윌리 스타젤이 세운 최연장 MVP 수상 기록(스타젤은 39세 8개월로 1979년 키스 헤르난데스와 공동 내셔널 리그 MVP였다)을 25년 만에 경신했다. 7월 4일, 그는 리키 헨더슨의 통산 볼넷 기록을 2,190번째와 2,191번째 볼넷으로 넘어섰다.
본즈가 행크 애런의 기록에 다가가면서, 애런은 본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묻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본즈의 팬이자 찬미자라고 분명히 밝혔고, 본즈의 스테로이드 사용 의혹으로 인해 기록에 별표를 달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은 피했다. 그는 기록에 대한 인정과 존경은 팬들이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2005년 시즌을 앞두고 스테로이드 논란이 언론의 더 큰 주목을 받으면서, 애런은 본즈가 이 문제에 대해 내놓은 발언에 대해 일부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애런은 경기력 향상을 위한 약물과 스테로이드 사용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애런은 언론이 경기장에서 일어난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피트 로즈와 관련된 약물이나 도박 의혹에 덜 집중하는 것에 좌절감을 표했다. 2007년, 애런은 스테로이드 사용 문제 전체가 매우 논란이 많다고 느꼈고, 가능한 기록 경신 경기에는 참석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본즈가 2007년 8월에 애런의 기록을 결국 깼을 때, 애런은 전광판에 재생된 비디오를 포함한 언론을 통해 본즈에게 축하를 보냈다.
2.2.3. Final Seasons and All-Time Home Run Record (2005-2007)
2005년 시즌 본즈의 연봉은 2200.00 만 USD로, 메이저리그에서 두 번째로 높은 연봉이었다(뉴욕 양키스의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2520.00 만 USD로 가장 높았다).
본즈는 무릎 부상, 여러 차례의 수술, 재활을 견뎌냈다. 그는 9월 12일 복귀하여 좌익수로 선발 출전했다.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와의 복귀전에서 그는 첫 타석에서 홈런을 칠 뻔했다. 본즈는 이날 4타수 1안타로 경기를 마쳤다. 복귀 후 본즈는 9월 18일부터 21일까지 4경기 연속 홈런을 치는 등 타석에서 높은 수준의 경기력을 다시 선보였다. 그는 단 14경기에서 타율 .286, 5홈런, 10타점을 기록하며 시즌을 마쳤다.

2006년 본즈는 2000.00 만 USD를 벌어들여(보너스 제외) 야구에서 네 번째로 높은 연봉을 기록했다. 2006년 시즌까지 그는 21년의 선수 경력 동안 약 1.72 억 USD를 벌어들여 야구 역사상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가 되었다. 본즈는 시즌 첫 10경기에서 타율 .200 미만을 기록했고, 4월 22일까지 홈런을 치지 못했다. 이 10경기 연속 홈런 침묵은 1998년 시즌 이후 가장 긴 기간이었다. 5월 7일, 본즈는 필라델피아 시티즌스 뱅크 파크에서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투수 존 리버를 상대로 통산 713호 홈런을 치며 베이브 루스의 통산 홈런 기록 2위에 단 1개 차이로 다가섰다. 이 홈런은 시티즌스 뱅크 파크 개장 후 두 시즌 동안 가장 긴 홈런 중 하나로, 약 140 m를 날아가 우측 외야 3층 관중석 외벽을 맞췄다.
5월 20일, 본즈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좌완 투수 브래드 해리스를 상대로 좌월 깊숙한 곳으로 통산 714호 홈런을 치며 루스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 경기는 오클랜드에서 열린 인터리그 경기였기 때문에, 본즈는 자이언츠의 지명타자로 출전했다. 본즈는 경기 후 "끝나서 다행이다"라고 말하며, 2006년 초반 매우 빠른 홈런 페이스를 보이던 앨버트 푸홀스에게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언급했다.

5월 28일, 본즈는 콜로라도 로키스의 투수 김병현을 상대로 중견수 방면으로 통산 715호 홈런을 치며 루스를 넘어섰다. 이 공은 약 140 m를 날아 중견수 방면으로 떨어졌고, 여러 팬들의 손을 스치다 중앙 외야의 높은 플랫폼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플랫폼에서 굴러떨어져 38세의 샌프란시스코 주민 앤드루 모비처가 매점 줄에 서 있다가 공을 잡았다. 미스터리하게도, 라디오 캐스터 데이브 플레밍의 홈런 중계는 공이 맞는 순간 침묵에 빠졌는데, 마이크 고장으로 보였다. 그러나 자이언츠 방송인 듀안 퀴퍼가 중계한 TV 버전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9월 22일, 본즈는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고득점 경기 6회 초, 위스콘신 밀워키의 밀러 파크에서 행크 애런의 내셔널 리그 통산 홈런 기록인 733개와 동률을 이루었다. 이 업적은 애런이 선수 생활을 시작(밀워키 브레이브스)하고 마쳤던(당시 아메리칸 리그 소속인 브루어스) 바로 그 도시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했다. 자이언츠가 10대8로 뒤진 상황에서 본즈는 주자 1, 2루 1아웃에 브루어스의 크리스 스퍼링을 상대로 2볼 0스트라이크에서 중견수 깊숙한 곳으로 한 방을 날렸다. 당시 자이언츠는 포스트시즌 진출 가능성이 희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즈의 홈런은 페넌트 레이스 막바지 중요한 경기에서 자이언츠에게 11대10 리드를 안겨주는 추가적인 드라마를 선사했다. 브루어스는 결국 13대12로 경기를 이겼지만, 본즈는 3타수 3안타(2루타 2개, 동점 홈런, 6타점)를 기록했다.
9월 23일, 본즈는 애런을 넘어 내셔널 리그 통산 홈런 기록을 경신했다. 이전 홈런과 마찬가지로 밀워키에서 터진 이 홈런은 브루어스의 크리스 카푸아노를 상대로 나온 솔로 홈런이었다. 이것이 본즈가 2006년에 친 마지막 홈런이었다. 2006년에 본즈는 1991년 피츠버그 파이리츠 시절 이후 가장 낮은 장타율(그가 시즌마다 리그 선두권을 다투던 통계)을 기록했다.
2007년 1월, 뉴욕 데일리 뉴스는 본즈가 암페타민 양성 반응을 보였다고 보도했다. 한 시즌 동안 시행된 야구의 암페타민 정책에 따르면, 양성 반응을 보인 선수는 6번의 추가 테스트를 받고 치료와 상담을 받아야 했다. 이 정책은 또한 첫 양성 반응에 대해 선수의 신원을 공개하지 않도록 명시했지만, 뉴욕 데일리 뉴스가 테스트 결과를 유출했다. 선수 협회가 본즈에게 테스트 결과를 통보했을 때, 그는 처음에 이를 자이언츠 팀 동료 마크 스위니의 라커에서 가져간 물질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이 주장을 철회하고 스위니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2007년 1월 29일, 자이언츠는 2007년 시즌 본즈와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커미셔너 사무실이 개인 출연 조항이 포함된 본즈의 1년, 1580.00 만 USD 계약을 거부한 후, 팀은 수정된 서류를 그의 에이전트 제프 보리스에게 보냈고, 보리스는 "현재 배리는 새로운 서류에 서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본즈는 2월 15일 수정된 1년, 1580.00 만 USD 계약에 서명하고 자이언츠의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에 제때 합류했다.
본즈는 2007년 시즌 초반부터 역대 기록 경신을 향한 행진을 재개했다. 4월 3일 시즌 개막전에서 그는 내야 시프트된 3루를 지나 1회 초에 단타를 쳤고, 이어서 도루를 성공시켰으나 주루 실수로 홈에서 아웃되었다. 경기 막바지에는 좌측 외야 깊숙한 플라이 아웃으로 물러났다. 본즈는 다음 날 자이언츠의 AT&T 파크에서 시즌 두 번째 경기 첫 타석에서 만회했다. 본즈는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의 크리스 영의 공을 중앙 담장을 살짝 넘기는 비거리로 날려 통산 735호 홈런을 기록했다. 이 홈런으로 본즈는 루스와 애런 기록 사이의 중간 지점을 넘어섰다.
본즈는 4월 13일까지 홈런을 치지 못하다가, 이날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상대로 3타수 3안타 4타점을 기록하며 2홈런(736호, 737호)을 추가했다. 4월 18일, 본즈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투수 라이언 프랭클린의 공을 맥코비 코브에 빠뜨리며 738호 홈런을 기록했다. 739호와 740호 홈런은 4월 21일과 22일 이틀 연속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를 상대로 나왔다.
2007년 5월 14일 본즈의 홈런 기록 추격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이날 댈러스에 본사를 둔 경매 업체인 헤리티지 스포츠 옥션은 본즈의 기록 경신 756호 홈런볼을 잡는 팬에게 100.00 만 USD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100만 달러 제안은 팬들의 안전을 우려하여 6월 11일 철회되었다. 6월 17일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3연전 마지막 경기에서 본즈는 이전에 단 한 번도 뛰어보지 못했던 펜웨이 파크에서 748호 홈런을 기록했다. 이 홈런으로 펜웨이 파크는 본즈가 홈런을 친 36번째 메이저리그 야구장이 되었다. 그는 전 피츠버그 파이리츠 팀 동료인 팀 웨이크필드의 너클볼을 우측 외야의 낮은 담장을 넘어 자이언츠의 불펜으로 날려 보냈다. 이 홈런은 본즈에게 홈런을 내준 441번째 다른 투수였다. 6월 29일 터진 통산 750호 홈런 역시 전 팀 동료인 리반 에르난데스를 상대로 나왔다. 8회에 터진 이 홈런은 경기를 3대3 동점으로 만들었다.
7월 19일, 21타수 무안타 기록을 깨고 본즈는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752호와 753호 홈런 두 개를 쳤다. 그는 이날 3타수 3안타 2홈런, 6타점, 1볼넷을 기록했다. 그러나 당시 최하위권이던 자이언츠는 9대8로 경기를 패했다. 7월 27일 본즈는 플로리다 말린스의 투수 릭 반덴훌크를 상대로 754호 홈런을 쳤다. 본즈는 그 경기에서 다음 네 타석 모두 볼넷을 얻었지만, 2점 홈런은 자이언츠가 12대10으로 승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는 본즈가 747호 홈런을 친 이후 처음으로 자이언츠가 승리한 경기에서 홈런을 친 것이었다. 8월 4일 본즈는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의 클레이 헨슬리를 상대로 통산 755호 홈런을 쳤고, 이는 행크 애런의 통산 홈런 기록과 동률을 이루는 것이었다. 본즈는 홈 플레이트를 밟은 후 아들 니콜라이와 길게 포옹하며 기쁨을 나누었다. 본즈는 팀원들과 인사를 나눈 후, 백스탑 뒤에서 아내 리즈 왓슨과 딸 아이샤 린을 만났다. 헨슬리는 본즈에게 홈런을 내준 445번째 다른 투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본즈를 둘러싼 의혹의 그림자를 고려할 때, 동점 홈런은 2005년 스테로이드 사용으로 야구계에서 정지 처분을 받았던 투수를 상대로 나왔다. 그는 다음 타석에서 볼넷을 얻어 출루했고, 이후 야수 선택으로 득점했다.
2007년 8월 7일 태평양 표준시 오후 8시 51분, 샌프란시스코의 AT&T 파크에서 본즈는 워싱턴 내셔널스의 마이크 배식 투수를 상대로 통산 756호 홈런을 치며 행크 애런이 보유하고 있던 역대 통산 홈런 기록을 경신했다. 우연히도, 배식의 아버지는 애런이 755호 홈런을 친 후 애런을 상대한 적이 있었다. 1976년 8월 23일, 마이클 J. 배식은 애런을 단타와 우익수 플라이 아웃으로 막아냈다. 어린 배식은 나중에 "만약 우리 아버지가 행크 애런에게 친절하게 홈런을 허용했다면, 우리는 둘 다 756개를 내줬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홈런을 친 후, 본즈는 배식에게 친필 사인 배트를 선물했다.
7번째 공이었던 3볼 2스트라이크 상황에서 본즈가 우중간 관중석으로 날린 공은 뉴욕시 퀸스 출신의 22세 뉴욕 메츠 팬 맷 머피가 잡았다. 그는 즉시 샌프란시스코 경찰관들의 보호를 받으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났다. 본즈가 홈런 세리머니를 마친 후 10분간의 지연이 이어졌는데, 여기에는 애런이 33년 동안 보유했던 기록을 깬 본즈에게 축하를 보내는 짧은 비디오가 포함되어 있었고, 애런은 "이 기록의 달성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꿈을 쫓도록 영감을 주기를 바란다"고 희망을 표현했다. 본즈는 윌리 메이스, 그의 대부가 옆에 있는 가운데 즉석에서 감격적인 발언을 하며 팀 동료, 가족,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감사를 표했다. 본즈는 남은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

당시 커미셔너 버드 셀릭은 이 경기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야구 운영 부문 부사장 지미 리 솔로몬이 그를 대표했다. 셀릭은 그날 밤 본즈에게 전화하여 기록 경신을 축하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또한 다음 날 본즈에게 전화하여 축하를 보냈다. 8월 24일, 샌프란시스코시는 저스틴 허먼 플라자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어 본즈의 경력 성과와 홈런 기록 경신을 기리고 축하했다. 이 집회에는 루 브록, 어니 뱅크스, 오지 스미스, 조 몬태나, 웨인 그레츠키, 마이클 조던의 영상 축하 메시지가 포함되었다. 윌리 메이스, 자이언츠 팀 동료 오마 비스켈과 리치 오릴리아, 자이언츠 구단주 피터 매고완이 연설을 했다。 게빈 뉴섬 시장은 본즈에게 샌프란시스코시의 열쇠를 전달했고, 자이언츠 부사장 래리 베어는 본즈에게 756호 홈런을 치고 밟았던 홈 플레이트를 증정했다.
기록을 세운 공은 8월 21일 경매업체에 위탁되었다. 8월 28일 입찰이 시작되어 9월 15일 3단계 온라인 경매 후 75.25 만 USD의 낙찰가로 마감되었다. 최고 입찰자인 패션 디자이너 마크 에코는 팬들이 공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이후 본즈의 기록 동점 755호 홈런 공에 대해 18.68 만 USD의 낙찰가를 제시한 벤 파드노스도 팬들이 공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웹사이트(www.endthedebate.com)를 개설했다. 천만 명의 유권자들이 에코의 결정을 도왔고, 공에 별표를 찍어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보내기로 했다. 에코의 계획에 대해 본즈는 "그는 공에 75.00 만 USD를 썼는데 그렇게 한다고? 그가 하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했다. 반면 파드노스는 웹사이트에 5년간 광고를 팔았고, 그곳에서 사람들은 2대1의 비율로 공을 부숴버리기로 투표했다.
본즈는 2007년 시즌을 126경기 340타석에서 타율 .276, 28홈런, 66타점으로 마쳤다. 43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132볼넷으로 양대 리그 선두를 기록했다.
3. Post-Playing Career
선수 생활 은퇴 후 배리 본즈는 야구계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었으나, 명예의 전당 입성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었다.
3.1. Baseball Involvement and Coaching
2007년 9월 21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2008년 시즌 본즈와 재계약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했다. 이 소식은 당일 본즈의 개인 웹사이트에 먼저 발표되었다. 본즈는 2007년 10월 29일 공식적으로 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신청했다. 그의 에이전트 제프 보리스는 "모든 메이저리그 팀으로부터 광범위한 관심을 예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2008년과 2009년 시즌 동안 아무도 그와 계약하지 않았다. 2008년 시즌을 앞두고 본즈가 어디에서 뛸지에 대한 많은 추측이 있었지만, 그를 영입한 팀은 없었다. 2015년 5월, 본즈는 선수 노조를 통해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2007년 시즌 이후 자신과 계약하지 않은 것에 대해 담합 혐의로 이의를 제기했다. 2015년 8월, 중재자는 본즈의 담합 소송에서 MLB의 손을 들어주었다. 만약 그가 메이저리그로 복귀했다면, 그는 3,000안타에 65안타, 2,000타점에 4타점, 800홈런에 38홈런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또한 리키 헨더슨을 넘어 역대 최다 득점자가 되기 위해 69득점, 행크 애런을 넘어 역대 최다 장타자가 되기 위해 37장타가 필요했다.
2009년 11월 13일 기준으로, 보리스는 본즈가 여전히 은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2월 9일, 보리스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본즈가 마지막 메이저리그 경기를 치렀다고 말했다. 본즈는 2010년 4월 11일, 마크 맥과이어가 스테로이드 사용을 인정한 것에 대해 자랑스럽다고 발표했다. 본즈는 은퇴할 때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관심 있는 구단이 자신에게 연락해도 당장 뛸 몸 상태는 아니라고 언급했다.
2011년 12월 15일, 본즈는 2003년 대배심 출두와 관련하여 사법 방해 유죄 판결로 인해 30일간의 가택 연금, 2년의 보호 관찰, 250시간의 사회 봉사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 지방법원 판사 수잔 일스턴은 항소 심사 동안 형 집행을 연기했다. 2013년 그의 유죄 판결은 미국 제9항소법원의 세 명의 판사로 구성된 패널에 의해 항소심에서 유지되었다. 그러나 전체 법원은 나중에 본즈에게 재심을 허용했고, 2015년 4월 22일, 9순회 항소법원 11명의 판사로 구성된 패널은 10대1로 그의 증언이 사법 방해가 아니라고 판결했다.
2014년 3월 10일, 본즈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순회 스프링 트레이닝 인스트럭터로 7일간 활동하기 시작했다. 2015년 12월 4일, 그는 마이애미 말린스의 새로운 타격 코치로 발표되었으나, 한 시즌 만인 2016년 10월 3일 해임되었다. 그는 구단주 제프리 로리아와 기회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공개 감사 편지를 보냈으며, 이 경험을 "야구 경력에서 가장 보람 있는 경험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 2017년 본즈는 공식적으로 자이언츠 구단에 CEO 특별 고문으로 재합류했다. 2017년 7월 8일, 본즈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명예의 벽에 헌액되었다.

2018년 2월 6일, 자이언츠는 그의 등번호 25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할 의사를 발표했으며, 이는 2018년 8월 11일에 실행되었다. 그의 파이리츠 시절 등번호 24번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데,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브라이언 자일스, 2011년부터 2015년까지 페드로 알바레스가 가장 눈에 띄게 착용했다.
3.2. National Baseball Hall of Fame Consideration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후보 자격을 얻은 지 10년이 지났지만, 본즈는 미국 야구 작가 협회(BBWAA) 투표에서 헌액에 필요한 75%의 득표율을 얻지 못했다. 2013년부터 2022년까지 그의 득표율은 다음과 같았다. 36.2%(2013년), 34.7%(2014년), 36.8%(2015년), 44.3%(2016년), 53.8%(2017년), 56.4%(2018년), 59.1%(2019년), 60.7%(2020년), 61.8%(2021년), 66%(2022년). 마지막 해에는 394표 중 260표를 얻는 데 그쳤다.
투표에서 탈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즈는 명예의 전당의 투데이스 게임 위원회(Today's Game Committee)를 통해 여전히 입성 가능성이 남아있었다. 이 위원회는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멤버, 임원진, 베테랑 언론인 16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로, 1986년부터 2016년까지 야구에 주목할 만한 기여를 했음에도 투표 자격을 잃은 은퇴 선수들을 심사한다. 투표는 2022년 12월에 실시되었으며, 헌액에는 16표 중 12표가 필요했지만, 본즈는 4표 미만을 얻는 데 그쳤다.
BBWAA의 일부 투표자들은 본즈가 경기력 향상 약물을 사용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에게 투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러한 약물 사용 의혹은 그의 명예의 전당 입성 가능성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4. Controversies and Public Image
배리 본즈의 경력은 뛰어난 성과만큼이나 다양한 논란과 대중의 상반된 평가로 점철되어 있다.
4.1. Public Persona and Media Relations
선수 생활 동안 본즈는 종종 까다롭고, 무뚝뚝하며, 냉담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2016년 테런스 무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대중적 이미지에 대해 후회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파이리츠의 젊은 선수로서 느꼈던 경기력에 대한 압박에 대한 반응으로 돌렸다. 본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젠장, 이제 와서 후회해. 지금은 (더 협조적이 된 이후로) 좋은 언론 보도를 받고 있고, 수조 배 더 많은 광고 계약을 맺을 수 있었을 텐데, 그게 내 원동력은 아니었어. 문제는, 내가 조금 양보하려 할 때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그냥 말했어. '내 주변에 이런 불을 지폈으니, 이 불꽃 속에서 그냥 살아가야겠다.'"
본즈는 자이언츠 시절 잠시 팀 동료들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태도를 바꾸어 훨씬 더 자주 미소 짓고 타인과 더 즐거운 태도로 교류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본즈가 슬럼프에 빠지자 같은 팀 동료들은 그가 경쟁심을 잃고 팀이 더 많은 경기를 패하게 된다며 예전으로 돌아가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본즈는 그들이 결과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항의했음에도 불구하고, 팀 동료들은 고집했고, 본즈는 남은 선수 생활 동안 그 익숙한 냉담한 태도를 유지했다고 말했다.
1996년 5월 9일, 본즈는 팀 클럽하우스에서 USA 투데이 기자 로드 비턴을 밀쳤다. 비턴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경기 한 시간 전에 로비 톰슨을 인터뷰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때, 본즈는 비턴에게 나가라고 말했다. 기자가 메이저리그 규정상 선수들과 이야기할 시간이 15분 더 남았다고 답하자, 본즈는 비턴의 얼굴에 손가락을 흔들고 가슴을 밀쳤고, 그 후 팀 코칭 스태프와 프런트 직원들이 개입했다. 본즈와 비턴은 경기 후 다시 이야기했다. 비턴은 나중에 "그는 내가 불손한 태도를 보였다고 비난했다"며 "내가 그에게 나를 밀친 것은 선을 넘는 행동이라고 말했지만, 사과는 없었다"고 말했다. 본즈는 이 사건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문제가 없다. 우리는 서로 좋아한다. 그냥 큰 농담이었다. 그가 너무 흥분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비턴은 이 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지만, USA 투데이는 구단에 불만을 제기했다.
4.2. Personality and Interactions
대학 시절부터 팀원들을 가려 사귀었고, 싱글A 시절 룸메이트는 그의 불손한 태도에 화를 내며 동거를 거부했으며, 다른 팀원들도 그를 뒤에서 험담했다. 마이너리그 시절, 파이리츠에 1라운드 지명으로 입단한 후 싱글A 팀에 합류한 첫날, 그는 감독실에 노크도 없이 들어와 '나는 배리 본즈, 드래프트 1위 선수다'라고 무례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당시 싱글A 감독 에드 오토(Ed Otto)는 본즈를 노려보며 '나는 에드 오토, 네 감독이다. 알았으면 당장 이 방에서 나가라. 그리고 노크할 생각도 없다면 다시는 여기 들어오지 마라!'고 소리쳤다. 오토의 엄격한 신인 교육 방식은 본즈의 존경을 얻어냈고, 시즌 후반에는 오토와 20분 예정이던 면담이 2시간으로 늘어날 정도로 가까워졌다. 오토는 또한 본즈에게 클럽하우스 예절과 언론 응대법을 가르쳤다.
피츠버그 파이리츠 시절 좌익수-중견수 콤비를 이뤘던 앤디 밴 슬라이크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이적 당시 3루수였던 맷 윌리엄스는 베테랑 선수들에게도 가볍게 말을 던지는 본즈를 팀 동료들 앞에서 꾸짖기도 했다. 1997년부터 2002년까지 3번-4번 타자로 함께 뛰었던 제프 케ント와는 서로 경기력은 인정했지만, 공공연히 언쟁을 벌이고 2001년에는 덕아웃에서 몸싸움을 벌이는 모습이 포착될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라커룸에서는 본인 라커 외에도 전담 트레이너에게 라커를 배정하고 샤워실과 가장 가까운 벽 쪽 라커를 전부 혼자 차지했다. 또한 자신 전용 소파와 대형 TV를 두었으며, 한 팀원이 이 소파에 마음대로 앉자 그를 심하게 꾸짖은 적도 있었다.
본즈는 또한 언론을 싫어했다. 부진할 때 라커룸에서 기자들을 얼어붙게 할 정도로 긴장된 분위기를 만들었고, 질문에 대한 대답에 비속어를 섞기도 했다. 미국 언론에서는 그를 부정적으로 보도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는 '죽어서야 인정받을 수 있는 건가'라며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때로는 유머러스한 농담을 던지는 일면도 있었다. 2007년 기록 경신이 주목받을 때 기자들이 질문하자, 그는 '번트를 더 많이 쳐야겠군(I've got to bunt more)'이라고 툭 던지기도 했다. 또한, 신인 프레드 루이스가 독립기념일에 만루 홈런을 치고 어머니의 날에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하자, '너는 휴일에만 치는 거야?'라며 놀리기도 했다.
친구를 생각하는 다정한 면모도 있었다. 2001년 9월 28일, 마크 맥과이어의 시즌 70홈런 기록을 넘어서려던 본즈는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전에서 68호 홈런을 치고 다이아몬드를 한 바퀴 돌았다. 홈런을 친 후 하늘을 가리키는 퍼포먼스로 유명하지만, 이때는 평소보다 유난히 오래 하늘을 가리켰다. 이후 더그아웃으로 돌아와서는 눈물을 흘렸다.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그는 '오늘 홈런을 최근 세상을 떠난 친구 프랭클린 브래들리에게 바친다'고 말했다. 브래들리는 10년간 본즈의 보디가드를 맡았던 절친한 친구였으며, 전날 '흔한' 외과 수술 후 합병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여기서 '흔한' 수술은 비만 치료를 위한 소화기관 수술을 의미하는데, 본즈가 수술 비용을 지원했다고 전해진다.
4.3. BALCO Scandal and Steroid Allegations
2000년대 이후 그의 체격이 갑자기 거대해지고, 30대 후반의 나이에 경기력이 급격히 향상되면서(연간 45홈런 이상을 기록한 지난 6시즌 중 5번이 36세 이후에 나왔으며, 1998년까지 16.2였던 홈런률(타수÷홈런수)이 1999년부터 2007년까지 9.2로 급상승했다) 근육 강화제인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나 인간 성장 호르몬(HGH) 등 경기력 향상 약물을 사용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프로 입단 당시 체중은 84 kg였고, 1998년까지 86 kg로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도핑을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던 1999년부터 매년 증가하여 93 kg, 95 kg, 103 kg으로 늘어났고, 2007년 MLB 공식 웹사이트에는 109 kg로 기록되었다.
본즈는 1998년 시즌 이후부터 약물 사용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이전 경력은 철저히 조사되어 1998년 시즌까지는 거의 확실히 약물 사용이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본즈가 약물에 손을 댄 계기는 1998년 마크 맥과이어와 새미 소사의 홈런 경쟁이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1998년, 로저 마리스의 기존 시즌 61홈런 기록을 훨씬 뛰어넘는 두 선수의 치열한 경쟁에 미국 전역이 열광했다. 반면, 이 해 타율 .303, 37홈런, 122타점, 28도루, OPS 1.047을 기록하며 사상 최초로 '400홈런-400도루'를 달성했던 본즈는 이 두 선수의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졌다. 자존심이 강했던 본즈는 '이대로는 최고가 될 수 없다, 홈런을 치지 않으면 아무도 주목해주지 않을 것'이라며 기존의 스피드를 버리고 홈런을 위한 파워를 얻으려 했다고 한다. 1998년 오프시즌, 친구인 켄 그리피 주니어와 식사 자리에서 본즈가 그렇게 말하며 스테로이드 사용을 시작했음을 시사했다고 그리피는 증언했다.
그것이 대중 앞에 처음 드러난 것은 1999년 스프링 트레이닝에서였다. 전년도 시즌 종료 시점과는 확연히 달라진 체격의 본즈에게 지역 기자들이 질문하자, 그는 '늘 하던 것과 똑같이 했지만, 조금 일찍 시작했을 뿐이다'라고만 답했다. 약물 투여에 관여한 것으로 지목된 곳은 미국의 영양 보조 식품 회사인 BALCO(Bay Area Laboratory Co-operative)였으며, 본즈는 1998년 중반부터 소꿉친구인 그레그 앤더슨을 웨이트 트레이닝 코치로 고용했다. 당시 앤더슨은 이미 훗날 기소될 BALCO사의 창업자 빅터 콘테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육상 경기 등에서 금지되었던 화학 약품을 본즈에게 제공했다고 한다.
2003년부터 본즈는 BALCO 스캔들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었다. BALCO는 도핑 테스트로 감지할 수 없는 경기력 향상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인 테트라하이드로제스트리논("The Clear")을 유통했다. 2003년, 본즈의 2000년부터 개인 트레이너였던 BALCO의 그레그 앤더슨은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 지방법원의 연방 대배심에 의해 기소되었고, 수많은 야구 선수들을 포함한 선수들에게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를 공급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는 본즈가 메이저리그에 의무적인 약물 검사가 없던 시기에 경기력 향상 약물을 사용했다는 추측으로 이어졌다. 본즈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변화된 체격과 향상된 파워는 엄격한 보디빌딩, 식단, 그리고 합법적인 보조제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2003년 12월 4일 대배심 증언에서 본즈는 개인 트레이너 그레그 앤더슨으로부터 받은 투명한 물질과 크림을 사용했다고 진술했으며, 앤더슨은 그것들이 영양 보조제인 아마씨유와 관절염용 연고라고 말했다. 이후 본즈의 유출된 대배심 증언에 대한 보고서들은 그가 "크림"과 "클리어"를 자신도 모르게 사용했음을 인정했다고 주장한다. 2005년 7월, 앤더슨을 포함한 BALCO 스테로이드 스캔들 재판의 네 명의 피고인 모두 연방 검찰과 선수들이 금지 약물을 사용했는지 여부를 밝히지 않아도 되는 거래를 성사시켰다.
2006년 3월, 랜스 윌리엄스와 마크 파이나루-와다가 쓴 책 게임 오브 섀도우즈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표지를 장식하는 등 언론의 큰 주목을 받으며 출간되었다. 처음에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에 저자들이 책의 짧은 발췌문을 공개했다. 이 책은 본즈가 스타노졸롤과 다른 여러 스테로이드를 사용했다고 주장하며, 본즈의 스테로이드 사용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바꾸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책에는 법적으로 봉인되고 기밀이어야 할 대배심 증언의 발췌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저자들은 자신들의 출처를 밝히기를 단호히 거부했으며, 한때는 감옥에 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2007년 2월 14일, 빅터 콘테의 변호사 중 한 명인 트로이 엘러먼은 대배심 증언 유출 혐의를 인정했다. 그는 유죄 인정 합의를 통해 2년 반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2006년 5월, 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작가 제프 펄먼은 본즈에 대한 폭로적인 전기 러브 미, 헤이트 미: 배리 본즈와 안티히어로의 탄생을 출간했다. 이 책 또한 본즈에 대한 많은 주장을 담고 있었다. 본즈를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참을 수 없는 허풍쟁이이자 전설적인 자아와 놀라운 재능을 가진 인물로 묘사하는 이 책은 500개 이상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했지만, 본즈 자신과의 인터뷰는 없었다.
2006년 4월과 5월, ESPN은 본즈가 출연하는 10부작 리얼리티 TV (대본 없는 다큐멘터리 스타일) 시리즈의 몇몇 에피소드를 방영했다. 본즈 온 본즈라는 제목의 이 쇼는 본즈의 베이브 루스와 행크 애런의 홈런 기록 추격에 초점을 맞추었다. 일부에서는 야구계가 본즈의 스테로이드 사용 의혹을 조사할 때까지 쇼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시리즈는 2006년 6월 취소되었는데, ESPN과 제작사인 톨린/로빈스 프로덕션은 본즈와 그의 대리인과의 "창의적 통제" 문제를 이유로 들었다.
2007년 1월, 뉴욕 데일리 뉴스는 본즈가 암페타민 양성 반응을 보였다고 보도했다. 한 시즌 동안 시행된 야구의 암페타민 정책에 따르면, 양성 반응을 보인 선수는 6번의 추가 테스트를 받고 치료와 상담을 받아야 했다. 이 정책은 또한 첫 양성 반응에 대해 선수의 신원을 공개하지 않도록 명시했지만, 뉴욕 데일리 뉴스가 테스트 결과를 유출했다. 선수 협회가 본즈에게 테스트 결과를 통보했을 때, 그는 처음에 이를 자이언츠 팀 동료 마크 스위니의 라커에서 가져간 물질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이 주장을 철회하고 스위니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본즈 본인은 언젠가 "1999년까지 스테로이드(라는 존재)조차 몰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2003년 BALCO사의 금지 약물 판매 관련 대배심에서 금지 약물을 고의로 사용한 적이 없다고 증언한 것에 대해, 미국 연방 대배심은 2007년 11월 15일 위증 혐의로 본즈를 기소했다. 본즈와 마찬가지로 BALCO사로부터 도핑 약물 투여 의혹을 받았던 여자 육상 선수 매리언 존스는 도핑을 인정하고 금메달을 반환한 후 은퇴했다. 위증죄의 직접적인 소인은 '약물 사용 여부'가 아니라 '약물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짓 증언을 했다'는 것이다. 본즈는 이에 대해 "모른다"로 일관했지만 그에게는 '약물로 성적을 끌어올린 선수'라는 딱지가 영구히 붙게 됐다. 이 비공개 법정 증언을 입수해 보도한 두 기자는 기소되었지만, 2008년 2월 기소가 취소되었다. 같은 해 12월 13일 발표된 미첼 보고서에도 실명으로 언급되었으며, 본즈는 보고서 작성 시 관련 조사에 대한 청취와 금지 약물 사용 의혹에 대한 답변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4.4. Legal Proceedings
2007년 11월 15일, 연방 대배심은 본즈를 BALCO에 대한 정부 조사와 관련하여 4건의 위증 혐의와 1건의 사법 방해 혐의로 기소했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2008년 2월 14일, 연방 검찰이 제출한 법원 서류의 오타로 인해 본즈가 기록적인 73호 홈런을 친 지 한 달 후인 2001년 11월에 스테로이드 양성 반응을 보였다는 잘못된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내용은 이전에 공개되고 보도되었던 2000년 11월 테스트를 언급하려던 것이었다. 이 오타는 잠시 동안 언론의 광란을 일으켰다. 그의 사법 방해 혐의 재판은 2009년 3월 2일에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검찰의 긴급 항소로 배심원 선정이 연기되었다. 재판은 2011년 3월 21일 수잔 일스턴 판사의 주재로 시작되었다. 그는 2011년 4월 13일, 선서 하에 모호한 답변을 한 사법 방해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11년 12월 15일, 본즈는 2003년 대배심 출두와 관련된 사법 방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 지방법원 판사 수잔 일스턴은 그의 항소 심사를 기다리며 형 집행을 연기했다. 그는 30일간의 가택 연금을 선고받았다. 그는 또한 2년의 보호 관찰과 250시간의 사회 봉사를 명령받았다.
본즈는 자신의 유죄 판결에 대해 미국 제9항소법원에 항소했다. 2013년, 제9항소법원의 3명의 판사로 구성된 패널은 그의 유죄 판결을 확정했으나, 2015년 그의 항소는 전체 법원의 재심을 거쳐 11명의 판사로 구성된 패널이 10대1로 그의 증언이 사법 방해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리며 유죄 판결이 뒤집혔다.
4.5. Licensing and Related Media
2003년, 본즈는 개인 마케팅 거래가 자신에게 더 큰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판단하여 MLB 선수 협회(MLBPA) 라이선스 계약에서 탈퇴했다. 본즈는 30년 라이선스 프로그램 역사상 계약에 서명하지 않은 최초의 선수이다. 이 탈퇴로 인해 그의 이름과 초상권은 MLBPA의 라이선스를 받은 어떤 상품에도 사용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이름이나 초상권을 사용하려면 회사는 본즈와 직접 거래해야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일부 야구 비디오 게임에 등장하지 않았고, 게임 제작자들은 그를 대체할 가상의 선수를 만들어야 했다. 이러한 가상의 비디오 게임 대체 선수들은 종종 백인이었고 때로는 다른 투타를 가졌는데, 이는 본즈로부터의 잠재적인 선수 초상권 소송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5. Personal Life
배리 본즈의 사생활은 결혼 생활의 부침과 개인적인 관심사를 포함한다.
5.1. Marriages and Family
본즈는 1987년 8월 몬트리올에서 첫 두 자녀(니콜라이와 시카리)의 어머니인 수잔("선") 마그레트 브랑코를 만났다. 그들은 1988년 2월 5일 라스베이거스에서 도피했다. 이 부부는 1994년 6월에 별거하고 1994년 12월에 이혼했으며, 1997년 가톨릭 교회에 의해 결혼이 무효화되었다. 이혼은 본즈가 스웨덴인 배우자에게 "현재 및 미래 수입에 대한 권리 포기"를 내용으로 하는 혼전 계약서에 서명하게 했고, 이 계약서가 유효하다고 판결이 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판결 당시 본즈는 아내에게 월 2.00 만 USD의 자녀 양육비와 월 1.00 만 USD의 배우자 부양비를 지급하고 있었다. 영구 부양비 수준을 정하는 심리 과정에서 양측 모두로부터 학대 주장이 제기되었다. 재판은 몇 달 동안 이어졌지만, 본즈는 두 채의 집을 소유하게 되었고 부양비도 줄어들었다. 2000년 8월 21일, 캘리포니아 대법원은 로널드 M. 조지 대법원장이 서명한 의견서에서 "본 사건의 혼전 계약이 자발적으로 체결되었다는 재판 법원의 결정은 실질적인 증거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만장일치로 판결했다. 이 판결에 대한 반응으로 캘리포니아 법률에서 혼전 계약의 유효성과 집행 가능성에 대한 중요한 변화가 뒤따랐다.
2010년, 본즈의 아들 니콜라이는 아버지의 샌프란시스코 시절 자이언츠의 배트 보이로 일했으며 경기 중 항상 아버지 옆 덕아웃에 앉아 있었다. 니콜라이는 어머니 선 본즈와의 대립으로 인해 5건의 경범죄 혐의로 기소되었고, 선 본즈는 니콜라이에 대한 접근 금지 명령을 받았다.
1994년, 본즈는 그래픽 디자이너 킴벌리 벨과 관계를 시작했으며, 이 관계는 1994년부터 2003년 5월까지 지속되었다. 본즈는 킴벌리를 위해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에 집을 구매해주었다.
1998년 1월 10일, 본즈는 샌프란시스코 리츠 칼튼 호텔에서 240명의 하객 앞에서 두 번째 아내 리즈 왓슨과 결혼했다. 이 부부는 딸 아이샤와 함께 캘리포니아주 로스알토스힐스에 거주하며 10년 반 동안 결혼 생활을 유지하다가 2009년 6월 9일 왓슨이 "조정 불능의 불화"를 이유로 별거를 신청했다. 불과 6주 후인 2009년 7월 21일, 왓슨은 별거 소송을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이 부부는 7개월 동안 화해했지만, 2010년 2월 26일 왓슨은 로스앤젤레스에서 공식적으로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2011년 6월 6일, 본즈와 왓슨은 이혼 소송을 재판으로 가져가지 않고 "비쟁점 방식으로" 합의하여 추후 명시되지 않은 날짜에 더 이상의 법원 개입 없이 사적으로 결혼을 끝내기로 합의했다.
본즈의 여러 가족 및 친척들은 직업이나 주목할 만한 취미로서 스포츠에 참여해 왔다. 본즈에게는 또한 프로 야구 선수였던 남동생 바비 본즈 주니어가 있다. 그의 친고모인 로지 본즈는 전 미국 80미터 허들 기록 보유자이며, 1964년 올림픽에 출전했다。 또한 그는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레지 잭슨과도 먼 친척 관계이다. 본즈가 소유한 많은 부동산 중에는 캘리포니아주 베벌리힐스의 고급 게이트 커뮤니티인 베벌리 파크에 있는 집이 있다.
5.2. Other Interests and Activities
열렬한 사이클링 애호가인 본즈는 선수 생활 이후에도 사이클링을 주된 운동 수단이자 큰 열정으로 선택했다. 무릎 수술, 허리 수술, 고관절 수술로 인해 달리기가 훨씬 어려워졌기 때문에 사이클링은 그가 몸매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심혈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사이클링 덕분에 그는 선수 시절 최종 체중인 109 kg (240 lb)에서 11 kg (25 lb)를 감량했다.
본즈는 브라질리언 주짓수를 적극적으로 수련하고 있으며, 2023년에는 이 무술에서 블루 벨트로 승급했다.
6. Legacy and Impact
배리 본즈는 야구 역사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지만, 그의 유산은 논란의 그림자 속에서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6.1. Career Achievements and Records Overview
메이저리그 통산 홈런(762개), 볼넷(2,558개), 고의 사구(688개) 기록을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은퇴 당시 본즈는 현역 선수 중 타점(1,996개), 출루율(.444), 득점(2,227점), 경기 출장(2,986경기), 장타(1,440개), 홈런당 타석 수(12.92), 총 루타(5,976개)에서 선두를 달렸다. 그는 2루타(601개), 장타율(.607), 도루(514개), 타석(9,847타석), 안타(2,935개)에서 2위를 기록했으며, 3루타(77개)에서 6위, 희생 플라이(91개)에서 8위, 삼진(1,539개)에서 9위를 기록했다(2007년 9월 26일 기준).
본즈는 500홈런(762개)과 500도루(514개)를 동시에 달성한 유일한 500-500 클럽 멤버이다. 다른 어떤 선수도 400홈런-400도루조차 달성하지 못했다. 그는 또한 단일 시즌에 40홈런(42개)과 40도루(40개)를 기록한 40-40 클럽의 여섯 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다른 멤버는 호세 칸세코, 알렉스 로드리게스, 알폰소 소리아노, 로널드 아쿠냐 주니어, 오타니 쇼헤이). 베이스볼 레퍼런스에 따르면 본즈는 모든 메이저리그 포지션 플레이어 중 WAR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팬그래프에서는 베이브 루스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 보유 기록
- 단일 시즌 홈런 (73개), 2001년
- 통산 홈런 (762개)
- 40세 이후 홈런 (74개)
- 43세에 친 홈런 (28개)
- 30홈런 이상 연속 시즌 (13회), 1992년-2004년
- 단일 시즌 장타율 (.863), 2001년
- 월드 시리즈 장타율 (1.294), 2002년
- .600 이상 장타율 연속 시즌 (8회), 1998년-2005년
- 단일 시즌 출루율 (.609), 2004년
- 통산 볼넷 (2,558개)
- 단일 시즌 볼넷 (232개), 2004년
- 볼넷 연속 경기 (18경기)
- 통산 고의 사구 (688개)
- 단일 시즌 고의 사구 (120개), 2004년
- 고의 사구 연속 경기 (6경기)
- MVP 수상 (7회)
- MVP 연속 수상 (4회), 2001년-2004년
- 내셔널 리그 이달의 선수 선정 (13회)
- 38세에 처음으로 내셔널 리그 타격왕을 차지한 최고령 선수 (타율 .370), 2002년
- 좌익수로서의 푸터웃 (5,226개)
- 한 경기에서 홈런과 도루를 모두 기록한 통산 경기 수 (102경기)
- 공동 기록
- 볼넷 연속 타석 (7타석)
- 내셔널 리그 근대 시대 연속 출루 (15회)
- 아버지 바비와 함께 30홈런 30도루 시즌 최다 기록 (5회)를 달성한 유일한 부자 30-30 클럽 멤버
- 기타 업적
내셔널 리그 통계 선두 카테고리 횟수 시즌 조정 OPS+ 선두 9 1990년-1993년, 2000년-2004년 볼넷 선두 12 1992년, 1994년-1997년, 2000년-2004년, 2006년, 2007년 타격왕 2 2002년, 2004년 장타 선두 3 1992년, 1993년, 2001년 경기 출장 선두 1 1995년 홈런 선두 2 1993년, 2001년 고의 사구 선두 12 1992년-1998년, 2002년-2004년, 2006년, 2007년 출루율 선두 10 1991년-1993년, 1995년, 2001년-2004년, 2006년, 2007년 OPS 선두 9 1990년-1993년, 1995년, 2001년-2004년 타점 선두 1 1993년 득점 선두 1 1992년 장타율 선두 7 1990년, 1992년, 1993년, 2001년-2004년 총 루타 선두 1 1993년 - 수상 및 영예
수상 내역 상 횟수 수상 연도 베이브 루스 홈런상 1 2001년 베이스볼 아메리카 올스타 7 1993년, 1998년, 2000년-2004년 베이스볼 아메리카 메이저리그 올해의 선수 3 2001년, 2003년, 2004년 MLB 올스타 14 1990년, 1992년-1998년, 2000년-2004년, 2007년 메이저리그 올해의 선수 3 1990년, 2001년, 2004년 롤링스 골드 글러브 어워드 외야수 부문 8 1990년-1994년, 1996년-1998년 실버 슬러거 어워드 외야수 부문 12 1990년-1994년, 1996년-1997년, 2000년-2004년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올해의 선수 5회 (1998년, 2001년-2004년)
- 내셔널 리그 행크 애런상 수상 3회 (2001년-2002년, 2004년)
- 2005년 스포팅 뉴스의 100대 야구 선수 목록에서 6위에 올랐으며, 이는 현역 선수 중 가장 높은 순위였다.
- 1999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 센추리 팀 최종 후보에 올랐으나, 팬 투표에서 팀에 선정되지 못했다.
- 빌 제임스의 명예의 전당 모니터(100점은 좋은 명예의 전당 후보)에서 340점을 기록하며, 모든 타자 중 10위, 명예의 전당에 아직 헌액되지 않은 타자 중 2위를 차지했다.
- 2001년 .863, 2004년 .812로 두 번의 단일 시즌 장타율 .800 이상을 기록한 두 번째 선수이다 (다른 한 명은 베이브 루스).
- 2004년에는 공식 타수(373)보다 출루 횟수(376)가 더 많은 역사상 첫 번째 선수가 되었다. 이는 볼넷이 기록적인 수치를 기록했기 때문이며, 볼넷은 출루와 타석 수에는 포함되지만 타수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는 135안타, 232볼넷, 9몸에 맞는 공으로 376개의 출루 횟수를 기록했다.
- 통산 타석 수 12,606개로 역대 10위에 올랐다. 그는 이 부문 상위 10명 중 3,000안타를 달성하지 못한 유일한 선수이며, 12,000타석 이상에서 3,000안타를 달성하지 못한 두 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다른 한 명은 오마 비스켈이다).
- 아버지 바비 본즈 (332홈런, 461도루)와 함께 2007년 9월 26일 기준으로 통산 합산 홈런(1,094개)과 도루(975개)에서 모든 부자 조합 중 선두를 달리고 있다.
- 마이너리그 야구를 알래스카와 하와이에서 뛰었다. 1983년에는 알래스카 골드패너스에서, 1986년에는 하와이 아일랜더스에서 뛰었다.
-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표지 모델로 총 8번 등장했다. 자이언츠 소속으로 7번, 파이리츠 소속으로 1번이었다. 또한 표지 인셋에 두 번 등장했다. 그는 2013년 제이슨 그릴리가 등장하기 전까지 가장 최근에 파이리츠 선수로서 표지에 등장한 선수였다.
6.2. Enduring Influence and Reception
2007년 말, 시카고 래퍼 칸예 웨스트는 자신의 앨범 졸업에 본즈의 이름을 딴 "배리 본즈"라는 곡을 수록했다.
선수로서 본즈는 초기부터 중기까지, 즉 1990년대에는 5툴 플레이어로서 주루, 공격, 수비 모두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는 30홈런 30도루를 5번, 3할 30홈런 30도루를 3번, 3할 40홈런 40도루를 1번 기록했다. 이 중 40홈런 40도루는 호세 칸세코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로 달성한 선수였다. 수비에서는 골드 글러브 어워드를 8번 수상했다. 특히 1997년 올스타전에서 데이비드 콘과 이반 로드리게스의 황금 배터리를 상대로 도루를 성공시키기도 했다.
ESPN과 스포팅 뉴스는 모두 본즈를 1990년대 최고의 선수로 선정했다. (역대 수상 선수로는 타이 콥, 지미 폭스, 테드 윌리엄스, 스탠 뮤지얼, 윌리 메이스, 피트 로즈, 마이크 슈미트 등이 있다.) 통산 7번의 MVP 중 3번은 1990년대에 수상했다. 2001년 시즌 73홈런을 시작으로, 2001년부터 4년 연속으로 출루율 .500 이상, 장타율 .700 이상을 기록했다. 이 두 수치를 합한 OPS도 1.200 이상을 기록했으며, 2004년에는 출루율 .609, 장타율 .812를 기록하여 MLB 기록인 1.422 OPS를 달성했다. 볼넷 기록은 본즈 자신이 3번 경신했으며, 고의 사구는 2번, 출루율도 2번 경신했다.
한 시즌 100삼진에 달한 것은 선수 생활 첫 해의 102삼진뿐이었으며, 2001년에 73홈런을 기록한 이후 홈런율이 크게 상승했지만, 2004년에는 삼진보다 홈런이 더 많은(45홈런 41삼진) 기록을 남겼다.
무주자 상황에서 고의 사구를 얻은 것은 41회(이 중 무사 무주자 상황에서 고의 사구는 5회), 2스트라이크 상황에서 고의 사구를 얻은 것은 5회(이 중 0볼 2스트라이크에서 풀카운트가 되어 고의 사구를 얻은 것은 3회) 있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1998년 5월 28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경기에서는 9회 2아웃 만루 상황에서 고의 사구를 얻어냈다. 2001년 73홈런을 기록한 시즌의 홈런 내역은 좌익수 방향 4개, 좌중간 4개, 중견수 방향 15개, 우중간 21개, 우익수 방향 29개였다. 73개 중 50개가 당겨친 방향이었고, 밀어친 방향은 단 8개에 불과하여 전형적인 풀 히터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본즈의 경우, 타격이 워낙 뛰어나 밀어칠 필요가 없었다고 평가된다.
타격 능력을 보여주는 일화로, 신인 시절 이런 이야기가 있다. 파이리츠에 1라운드 지명(전체 6위)을 받은 그 주, 피츠버그로 초청되어 당시 홈 구장이던 쓰리 리버스 스타디움에서 타격 연습을 했다. 이때 당겨쳐서 15구 중 11구를 스탠드에 넘기자, 이를 지켜보던 코치 중 한 명이 "그 정도는 왼손 타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럼 이걸 보라"며 좌익수 방향으로 담장을 넘기는 홈런을 연발했다고 한다.
야구에 대한 감각도 매우 뛰어났다. 어느 경기에서 자이언츠 타선이 상대 투수에게 고전하고 있을 때, 본즈는 "글러브 각도가 바뀌면 슬라이더, 일직선이면 직구야"라고 툭 내뱉었다. 팀 동료들은 차이를 알지 못했지만, 본즈는 그 후 몇 개의 공의 구종을 정확히 예측했다.
젊은 시절의 강점이었던 수비와 주루는 스테로이드 사용으로 인한 체중 증가 때문에 해마다 쇠퇴했고, 현역 말년에는 일본 언론에서도 "수비와 주루는 팀에 민폐를 끼칠 정도"라고 혹평받을 정도였다. 타격 능력에 대해서는 후술할 약물 의혹이 있었음에도 "본즈는 약물과 상관없이 초일류"라는 평을 들었으며, 은퇴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2021년 이후에도 여러 구단 감독들로부터 높이 평가받고 있다. 오타니 쇼헤이가 성공적인 시즌 기록을 남기면서 "배리 본즈 같다"는 비유가 나오기도 했다.
본즈의 상징 중 하나인 AT&T 파크 우측 외야 담장 밖 바다(샌프란시스코만, 자이언츠의 명선수 윌리 맥코비의 이름을 따서 맥코비 코브라고도 불린다)로 직접 날아가는 홈런은 "스플래시 히트(Splash Hit)"라고 불린다. 본즈는 이 스플래시 히트를 역대 최다인 35번 기록했다. (역대 2위인 파블로 산도발, 브랜던 벨트조차 통산 7번에 불과하다.) 본즈가 이 기록을 많이 세워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실제로 본즈가 기록한 스플래시 히트를 제외하면 방문팀 선수들이 친 홈런을 포함해도 연간 약 3개밖에 나오지 않는다. 비거리 자체는 113 m 정도면 가능하지만, 우익수 담장은 7.6 m로 높고 항상 강한 해풍이 불어 MLB에서 왼손 타자에게 가장 불리한 구장 중 하나로 꼽힌다.
2007년부터 SSK사(社) 배트를 사용했다. 그전에는 샘 배트를 사용했다.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SSK 배트를 시타해 본 본즈는 마음에 들어 담당자에게 자신의 사용하던 배트를 건네며 "이것과 똑같이 만들어달라"며 즉석에서 3더즌을 주문했다고 한다. 이 배트는 일본 도야마현의 SSK 배트 협력 공장에서 생산되었고, 50년 이상의 배트 제작 경험을 가진 사장 본쿄 가즈요시(本居和義) 등 배트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길이는 86.6 cm, 평균 무게는 915 g, 재질은 단풍나무였다.
대부분의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배트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본즈는 건조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항상 타구음으로 탄력을 확인하는 등 고집이 있었다. 또한 2007년부터 배트의 건조도를 유지하는 두랄루민 케이스도 사용했다. 또한 배트 그립 부분에 테이핑을 엇갈리게 칭칭 감는 것을 좋아하여, 종종 경기 중에도 배트에 감겨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바비 본즈는 알코올 중독에 걸려 술로 인해 여러 문제를 일으켰고, 점차 배리와 바비는 멀어졌다. 하지만 바비는 치료를 통해 알코올 중독을 극복했다. 1993년, 배리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입단하고 바비가 자이언츠의 타격 코치로 부임하면서 둘은 화해했다. 이후 둘은 함께 야구 인생을 걸었지만, 배리는 "그 분야의 1인자가 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월드 챔피언이 되지 못했다. 2002년 바비는 폐암과 뇌종양 진단을 받고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바비가 살아있는 동안 챔피언 반지를 손에 넣고 싶었던 배리는 2002년 필사적으로 플레이하여 MVP를 수상하는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자이언츠는 그 해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으나 애너하임 에인절스에 패하며 월드 챔피언이 되지 못했다. 2003년, 배리는 경기 외의 시간을 바비의 병간호에 전념했다. 이 해에도 배리는 필사적으로 플레이하여 6월 23일 역사상 최초로 "500홈런-500도루"를 달성했다. 8월 20일에는 바비가 자이언츠 경기를 관전하러 왔고, 이 날도 배리는 홈런을 쳤다. 그러나 사흘 뒤인 8월 23일, 바비는 영면했다. 배리는 이후 일주일 동안 방망이조차 잡지 못할 정도로 상심했다. 하지만 바비의 사망 일주일 후 복귀전에서는 랜디 존슨을 상대로 홈런을 쳤다. 이 해 MVP를 수상한 배리는 눈물을 흘리며 "이 MVP를 아버지께 바친다. 아버지께 정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2007년 8월 7일, 756호 홈런을 친 후, 10분간의 신기록 축하 세리머니에서 배리는 마이크를 잡고 인사를 했다. 자신의 가족, 관중, 팀 동료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마지막에는 "아빠...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라고 덧붙였다.
본즈는 일본 및 일본인 선수들과도 다양한 교류를 가졌다. 그는 일미 야구로 4번 일본을 방문했으며, 오랜 선수 생활 동안 일본 야구와 일본인 선수들과 다양한 형태로 관계를 맺었다. 본국에서는 늘 약물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일본인 기자들에게는 스스럼없이 응대하는 등 미국인 기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였다. 일본인 선수들과 언론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며, 각 선수를 높이 평가했다.
2002년 시즌 동안, 자이언츠의 전 팀 동료 신조 쓰요시는 고립되기 쉬운 본즈와 대화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신조는 수비 연습 시 글러브를 건네는 등 적극적으로 소통했다고 한다. 또한 신조에 따르면, 그는 "본즈의 왼쪽으로 날아온 타구는 모두 내가 잡겠다"고 말하며 본즈의 수비 부담과 피로를 줄여 타격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본즈도 타격 연습 중 자신이 사용하는 마스코트 배트를 신조에게 빌려주기도 했다. 다음 해인 2003년 신조가 뉴욕 메츠로 복귀했을 때나 은퇴 후에도 본즈는 신조에게 호의적인 언급을 남겼다.
2007년 올스타전에서는 같은 지구 라이벌 구단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마무리 투수 사이토 다카시와 라커가 옆자리였다. 본즈는 사이토에게 배트 한 자루를 선물했다. 사이토는 "배리는 지금 여러 말이 많아 처음에는 경계심을 가졌지만, 제가 직접 대화해 본 배리는 매우 스스럼없는 사람이었다. 배트의 스위트 스폿을 조금 더 넓히고 싶다든지 하는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회상했다. 또한 오카지마 히데키와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마쓰이 히데키에게도 높은 평가를 했으며, 마쓰이가 2002년 자유계약선수 자격 행사를 망설일 때 일본에서 열린 일미 야구에서 "메이저리그에서도 성공할 거야. 일본처럼 자이언츠로 와줬으면 좋겠다"고 응원했다. 또한 마쓰이와는 같은 해 일미 야구 경기 전에 1974년 "왕 대 행크 애런" 이후의 "일미 홈런 더비"가 열렸는데, 긴장해서 홈런을 치지 못하는 마쓰이에게 "어깨에 힘을 빼라"고 제스처를 취하고 어깨를 주무르며 긴장을 풀어주는 등 스스럼없이 대해주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마쓰이 가즈오에게는 2006년 비시즌 훈련 기간에 직접 말을 걸어 타격에 대해 여러 조언을 해주었다.
이치로에 대해서도 높은 평가를 내렸으며, "피트 로즈의 안타 기록을 넘는 것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있겠지만, 나는 로즈보다 뛰어난 실력자라고 인정한다"고 극찬했다.
오 사다하루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근육 증강제 사용은 나쁜 일"이라고 전제하면서도 "그러나 예전에는 금지되지 않았던 것이고, 무엇보다 스테로이드를 사용했다고 해서 누구나 홈런을 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본즈의 타격 기술을 높이 평가했다.
오타니 쇼헤이에 대해서도 "오타니는 유례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투수로서도 타자로서도 엘리트급이다. 그와 같은 선수는 앞으로도 나타나지 않을 것 같다"고 칭찬하며, "만약 내가 감독이라면, 잘 되고 있는 것을 고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오타니가 행복한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능력을 최대한으로 이끌어내주고 싶고, 지금의 이도류를 계속 유지시킬 것이다"라고 이도류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의견을 표명했다.
약물 사용이 기정사실화되는 가운데 기록 달성이 이루어지자 주변의 반응이 주목받았다. 애런의 기록을 깬 경기의 시청률은 단 1.1%에 불과하여, NFL의 프리시즌 경기에도 참패할 정도였다. 이는 대다수의 팬들이 무관심하거나 냉담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결과였다. 참고로, 행크 애런이 베이브 루스의 기록을 깼을 때 NBC가 방송한 경기의 시청률은 22.3%였다.
커미셔너 버드 셀릭 또한 야구계 최고 권력자라는 입장상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애런과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감출 수 없는 듯 대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기록 경신 순간 최대한 함께할 것이며, 경기와 기록의 위대함, 그리고 유죄 판결 전까지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다음 경기에 참석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755호 홈런을 친 경기에도 셀릭은 관전했지만, 다른 관중들과 달리 박수도 치지 않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심각한 표정이었다. 756호 홈런을 친 경기에는 결국 셀릭은 조지 J. 미첼을 만난다는 명목으로 경기장에 나타나지 않고 대리인을 보냈다.
또한 이 의혹이 짙어지면서 다른 선수 기록의 정당성에도 의혹이 제기되었고, 실제 시즌 홈런 기록은 로저 마리스의 61개 그대로가 아닌가 하는 논의도 일어났다. 2005년에는 노스다코타주 의회가 메이저리그 기구에 마리스의 기록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명예의 전당 논쟁
은퇴 후 5시즌이 지나 2013년에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스테로이드 사용이 확정된 본즈의 명예의 전당 헌액을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투표 전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로저 클레멘스, 새미 소사 등 약물 사용 의혹이 있는 선수들도 동시에 명예의 전당 자격을 얻었기 때문에, "스테로이드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는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선 중요한 논쟁이 되었다. 2012년 12월 AP통신이 투표 자격을 가진 100명 이상의 기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사전 조사에서는 명예의 전당 헌액을 인정하겠다고 답한 기자는 45%에 불과하여, 헌액에 필요한 75%에 미치지 못했다. (클레멘스는 43%, 소사는 18%가 헌액을 인정하겠다고 답했다.) 뉴욕 타임스도 비슷한 조사를 실시하여 43%가 본즈와 클레멘스의 명예의 전당 헌액을 인정하겠다고 답했다 (소사는 12%). 이로써 첫 해 명예의 전당 헌액은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다. 반대파 중에도 앞으로 생각이 바뀔 가능성이 있다고 답한 기자들이 많아, 논쟁이 종결된 상황은 아니었다.
2013년 1월 9일, 명예의 전당 투표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사전 조사보다 적은 36.2%만을 득표하여 명예의 전당 헌액에 실패했다 (클레멘스는 37.6%, 소사는 12.5%). 유효 투표 마지막 해인 2022년에는 66%의 득표율로 규정인 75%에 미치지 못해 명예의 전당 자격을 상실했다.
명예의 전당 헌액을 찬성하는 주장으로는 "도핑을 시작하기 전부터 오랫동안 훌륭한 성적을 남겼다", "당시에는 스테로이드가 금지되지 않았고, 도핑이 만연하여 누가 금지 약물을 사용했는지 명확히 특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나 명예의 전당 후보 선수 중에도 발각되지 않았을 뿐 약물을 사용했던 선수가 확실히 존재한다", "순수하게 기록만으로 판단해야 한다", "야구 명예의 전당은 부정적인 역사도 받아들여야 한다" 등이 있다.
반면, 명예의 전당 헌액에 반대하는 측은 "어떤 사정이 있더라도 약물 사용이 드러난 선수의 명예의 전당 헌액은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또한 미국 야구 작가 협회가 정한 명예의 전당 선정 기준인 "선수의 기록, 경기 능력, 성실성, 스포츠맨십, 인성, 소속팀에 대한 기여(the player's record, playing ability, integrity, sportsmanship, character and contributions to the team[s] on which the player played)" 중 성실성, 스포츠맨십, 인성 세 가지를 충족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6.3. Notable Quotes Regarding His Public Image
본즈는 때때로 다음과 같은 논란이 되는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 "'투수가 MVP가 되는 것은 야수에게 모욕이다. 월드 시리즈에서 MVP를 차지하면 되지 않느냐.'"
- "'베이브 루스 시절에는 백인밖에 없었으니 기본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MLB 역사상 최강의 타자는 나다.'"
- "자이언츠로 자유계약 이적한 첫해 스프링 트레이닝 첫날, 그는 클럽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투수들을 향해 '너한테도, 너한테도 빚이 있다'고 계속 말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빚'이란 피츠버그 시절 자신이 쳤던 홈런을 의미하며, 이는 본즈 특유의 이색적인 자기소개 방식이었다."
- "피츠버그 시절 단장이었던 시드 스리프트에게 축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당신이 나를 더 일찍 메이저리그에 올려줬더라면, (500호에) 더 빨리 도달했을 텐데 말이지'라고 쏘아붙였다고 한다."
- "1998년 마크 맥과이어와 새미 소사의 시즌 최다 홈런 기록 경쟁 당시, 소사에게 언론의 관심이 적고 신기록 세리머니에서도 차이가 있었던 것에 대해 곳곳에서 논란이 일었으며, 본즈 또한 이를 인종차별이라고 지적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6.4. Player Reactions to Steroid Allegations
약물 사용이 기정사실화되는 가운데 기록 달성이 이루어지자 주변의 반응이 주목받았다. 2007년 5월 USA 투데이(USA Today)가 493명의 현역 메이저리그 선수와 469명의 팬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홈런 타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팬들은 행크 애런(36%)과 베이브 루스(33%)를 가장 많이 꼽았지만, 본즈는 8%에 불과했다. 그러나 현역 선수들의 72%는 본즈를 선택하며 팬들과 대조적인 반응을 보였다.
현역 선수들의 일부 반응은 다음과 같다.
- "그는 정말 쉽게 공을 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매우 어렵다. 어떻게 그렇게 안정적인 스윙을 계속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스테로이드를 사용한 선수들은 많지만, 본즈에 필적하는 선수는 아무도 없다. 그가 스테로이드 사용을 인정하더라도, 홈런의 가치가 훼손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데이비드 오르티스
- "반복되는 약물 검사 속에서도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스윙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을 보면 그는 진정한 선수다. 뛰어난 동체 시력과 타이밍으로 공을 계속해서 잡아낸다. 단순히 그는 다른 타자들보다 더 뛰어나다." - 배리 지토
- "모두처럼 스테로이드 사용에 대해서는 의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 타자로서 그의 위대함은 별개다. 한 경기에 칠 수 있는 공이 두 개 정도밖에 없는데도 그는 그것을 홈런으로 만든다. 내가 상대했을 때도 두 개뿐이었는데, 그중 하나를 담장 밖으로 넘겼다." - 톰 글래빈
6.5. Public and MLB Reactions to Record Breaking
약물 사용이 기정사실화되는 가운데 기록 달성이 이루어지자 주변의 반응이 주목받았다. 애런의 기록을 깬 경기의 시청률은 단 1.1%에 불과하여, NFL의 프리시즌 경기에도 참패할 정도였다. 이는 대다수의 팬들이 무관심하거나 냉담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결과였다. 참고로, 행크 애런이 베이브 루스의 기록을 깼을 때 NBC가 방송한 경기의 시청률은 22.3%였다.
커미셔너 버드 셀릭 또한 야구계 최고 권력자라는 입장상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애런과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감출 수 없는 듯 대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기록 경신 순간 최대한 함께할 것이며, 경기와 기록의 위대함, 그리고 유죄 판결 전까지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다음 경기에 참석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755호 홈런을 친 경기에도 셀릭은 관전했지만, 다른 관중들과 달리 박수도 치지 않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심각한 표정이었다. 756호 홈런을 친 경기에는 결국 셀릭은 조지 J. 미첼을 만난다는 명목으로 경기장에 나타나지 않고 대리인을 보냈다.
또한 이 의혹이 짙어지면서 다른 선수 기록의 정당성에도 의혹이 제기되었고, 실제 시즌 홈런 기록은 로저 마리스의 61개 그대로가 아닌가 하는 논의도 일어났다. 2005년에는 노스다코타주 의회가 메이저리그 기구에 마리스의 기록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명예의 전당 논쟁
은퇴 후 5시즌이 지나 2013년에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스테로이드 사용이 확정된 본즈의 명예의 전당 헌액을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투표 전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로저 클레멘스, 새미 소사 등 약물 사용 의혹이 있는 선수들도 동시에 명예의 전당 자격을 얻었기 때문에, "스테로이드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는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선 중요한 논쟁이 되었다. 2012년 12월 AP통신이 투표 자격을 가진 100명 이상의 기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사전 조사에서는 명예의 전당 헌액을 인정하겠다고 답한 기자는 45%에 불과하여, 헌액에 필요한 75%에 미치지 못했다. (클레멘스는 43%, 소사는 18%가 헌액을 인정하겠다고 답했다.) 뉴욕 타임스도 비슷한 조사를 실시하여 43%가 본즈와 클레멘스의 명예의 전당 헌액을 인정하겠다고 답했다 (소사는 12%). 이로써 첫 해 명예의 전당 헌액은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다. 반대파 중에도 앞으로 생각이 바뀔 가능성이 있다고 답한 기자들이 많아, 논쟁이 종결된 상황은 아니었다.
2013년 1월 9일, 명예의 전당 투표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사전 조사보다 적은 36.2%만을 득표하여 명예의 전당 헌액에 실패했다 (클레멘스는 37.6%, 소사는 12.5%). 유효 투표 마지막 해인 2022년에는 66%의 득표율로 규정인 75%에 미치지 못해 명예의 전당 자격을 상실했다.
명예의 전당 헌액을 찬성하는 주장으로는 "도핑을 시작하기 전부터 오랫동안 훌륭한 성적을 남겼다", "당시에는 스테로이드가 금지되지 않았고, 도핑이 만연하여 누가 금지 약물을 사용했는지 명확히 특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나 명예의 전당 후보 선수 중에도 발각되지 않았을 뿐 약물을 사용했던 선수가 확실히 존재한다", "순수하게 기록만으로 판단해야 한다", "야구 명예의 전당은 부정적인 역사도 받아들여야 한다" 등이 있다.
반면, 명예의 전당 헌액에 반대하는 측은 "어떤 사정이 있더라도 약물 사용이 드러난 선수의 명예의 전당 헌액은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또한 미국 야구 작가 협회가 정한 명예의 전당 선정 기준인 "선수의 기록, 경기 능력, 성실성, 스포츠맨십, 인성, 소속팀에 대한 기여(the player's record, playing ability, integrity, sportsmanship, character and contributions to the team[s] on which the player played)" 중 성실성, 스포츠맨십, 인성 세 가지를 충족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7. Personal Life
배리 본즈의 사생활은 결혼 생활의 부침과 개인적인 관심사를 포함한다.
7.1. Marriages and Family
본즈는 1987년 8월 몬트리올에서 첫 두 자녀(니콜라이와 시카리)의 어머니인 수잔("선") 마그레트 브랑코를 만났다. 그들은 1988년 2월 5일 라스베이거스에서 도피했다. 이 부부는 1994년 6월에 별거하고 1994년 12월에 이혼했으며, 1997년 가톨릭 교회에 의해 결혼이 무효화되었다. 이혼은 본즈가 스웨덴인 배우자에게 "현재 및 미래 수입에 대한 권리 포기"를 내용으로 하는 혼전 계약서에 서명하게 했고, 이 계약서가 유효하다고 판결이 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판결 당시 본즈는 아내에게 월 2.00 만 USD의 자녀 양육비와 월 1.00 만 USD의 배우자 부양비를 지급하고 있었다. 영구 부양비 수준을 정하는 심리 과정에서 양측 모두로부터 학대 주장이 제기되었다. 재판은 몇 달 동안 이어졌지만, 본즈는 두 채의 집을 소유하게 되었고 부양비도 줄어들었다。 2000년 8월 21일, 캘리포니아 대법원은 로널드 M. 조지 대법원장이 서명한 의견서에서 "본 사건의 혼전 계약이 자발적으로 체결되었다는 재판 법원의 결정은 실질적인 증거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만장일치로 판결했다. 이 판결에 대한 반응으로 캘리포니아 법률에서 혼전 계약의 유효성과 집행 가능성에 대한 중요한 변화가 뒤따랐다.
2010년, 본즈의 아들 니콜라이는 아버지의 샌프란시스코 시절 자이언츠의 배트 보이로 일했으며 경기 중 항상 아버지 옆 덕아웃에 앉아 있었다. 니콜라이는 어머니 선 본즈와의 대립으로 인해 5건의 경범죄 혐의로 기소되었고, 선 본즈는 니콜라이에 대한 접근 금지 명령을 받았다.
1994년, 본즈는 그래픽 디자이너 킴벌리 벨과 관계를 시작했으며, 이 관계는 1994년부터 2003년 5월까지 지속되었다. 본즈는 킴벌리를 위해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에 집을 구매해주었다.
1998년 1월 10일, 본즈는 샌프란시스코 리츠 칼튼 호텔에서 240명의 하객 앞에서 두 번째 아내 리즈 왓슨과 결혼했다. 이 부부는 딸 아이샤와 함께 캘리포니아주 로스알토스힐스에 거주하며 10년 반 동안 결혼 생활을 유지하다가 2009년 6월 9일 왓슨이 "조정 불능의 불화"를 이유로 별거를 신청했다. 불과 6주 후인 2009년 7월 21일, 왓슨은 별거 소송을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이 부부는 7개월 동안 화해했지만, 2010년 2월 26일 왓슨은 로스앤젤레스에서 공식적으로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2011년 6월 6일, 본즈와 왓슨은 이혼 소송을 재판으로 가져가지 않고 "비쟁점 방식으로" 합의하여 추후 명시되지 않은 날짜에 더 이상의 법원 개입 없이 사적으로 결혼을 끝내기로 합의했다.
본즈의 여러 가족 및 친척들은 직업이나 주목할 만한 취미로서 스포츠에 참여해 왔다. 본즈에게는 또한 프로 야구 선수였던 남동생 바비 본즈 주니어가 있다. 그의 친고모인 로지 본즈는 전 미국 80미터 허들 기록 보유자이며, 1964년 올림픽에 출전했다. 또한 그는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레지 잭슨과도 먼 친척 관계이다. 본즈가 소유한 많은 부동산 중에는 캘리포니아주 베벌리힐스의 고급 게이트 커뮤니티인 베벌리 파크에 있는 집이 있다.
7.2. Other Interests and Activities
열렬한 사이클링 애호가인 본즈는 선수 생활 이후에도 사이클링을 주된 운동 수단이자 큰 열정으로 선택했다. 무릎 수술, 허리 수술, 고관절 수술로 인해 달리기가 훨씬 어려워졌기 때문에 사이클링은 그가 몸매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심혈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사이클링 덕분에 그는 선수 시절 최종 체중인 109 kg (240 lb)에서 11 kg (25 lb)를 감량했다.
본즈는 브라질리언 주짓수를 적극적으로 수련하고 있으며, 2023년에는 이 무술에서 블루 벨트로 승급했다.
8. Legacy and Impact
배리 본즈는 야구 역사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지만, 그의 유산은 논란의 그림자 속에서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8.1. Career Achievements and Records Overview
메이저리그 통산 홈런(762개), 볼넷(2,558개), 고의 사구(688개) 기록을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은퇴 당시 본즈는 현역 선수 중 타점(1,996개), 출루율(.444), 득점(2,227점), 경기 출장(2,986경기), 장타(1,440개), 홈런당 타석 수(12.92), 총 루타(5,976개)에서 선두를 달렸다. 그는 2루타(601개), 장타율(.607), 도루(514개), 타석(9,847타석), 안타(2,935개)에서 2위를 기록했으며, 3루타(77개)에서 6위, 희생 플라이(91개)에서 8위, 삼진(1,539개)에서 9위를 기록했다(2007년 9월 26일 기준).
본즈는 500홈런(762개)과 500도루(514개)를 동시에 달성한 유일한 500-500 클럽 멤버이다. 다른 어떤 선수도 400홈런-400도루조차 달성하지 못했다. 그는 또한 단일 시즌에 40홈런(42개)과 40도루(40개)를 기록한 40-40 클럽의 여섯 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다른 멤버는 호세 칸세코, 알렉스 로드리게스, 알폰소 소리아노, 로널드 아쿠냐 주니어, 오타니 쇼헤이). 베이스볼 레퍼런스에 따르면 본즈는 모든 메이저리그 포지션 플레이어 중 WAR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팬그래프에서는 베이브 루스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 보유 기록
- 단일 시즌 홈런 (73개), 2001년
- 통산 홈런 (762개)
- 40세 이후 홈런 (74개)
- 43세에 친 홈런 (28개)
- 30홈런 이상 연속 시즌 (13회), 1992년-2004년
- 단일 시즌 장타율 (.863), 2001년
- 월드 시리즈 장타율 (1.294), 2002년
- .600 이상 장타율 연속 시즌 (8회), 1998년-2005년
- 단일 시즌 출루율 (.609), 2004년
- 통산 볼넷 (2,558개)
- 단일 시즌 볼넷 (232개), 2004년
- 볼넷 연속 경기 (18경기)
- 통산 고의 사구 (688개)
- 단일 시즌 고의 사구 (120개), 2004년
- 고의 사구 연속 경기 (6경기)
- MVP 수상 (7회)
- MVP 연속 수상 (4회), 2001년-2004년
- 내셔널 리그 이달의 선수 선정 (13회)
- 38세에 처음으로 내셔널 리그 타격왕을 차지한 최고령 선수 (타율 .370), 2002년
- 좌익수로서의 푸터웃 (5,226개)
- 한 경기에서 홈런과 도루를 모두 기록한 통산 경기 수 (102경기)
- 공동 기록
- 볼넷 연속 타석 (7타석)
- 내셔널 리그 근대 시대 연속 출루 (15회)
- 아버지 바비와 함께 30홈런 30도루 시즌 최다 기록 (5회)를 달성한 유일한 부자 30-30 클럽 멤버
- 기타 업적
내셔널 리그 통계 선두 카테고리 횟수 시즌 조정 OPS+ 선두 9 1990년-1993년, 2000년-2004년 볼넷 선두 12 1992년, 1994년-1997년, 2000년-2004년, 2006년, 2007년 타격왕 2 2002년, 2004년 장타 선두 3 1992년, 1993년, 2001년 경기 출장 선두 1 1995년 홈런 선두 2 1993년, 2001년 고의 사구 선두 12 1992년-1998년, 2002년-2004년, 2006년, 2007년 출루율 선두 10 1991년-1993년, 1995년, 2001년-2004년, 2006년, 2007년 OPS 선두 9 1990년-1993년, 1995년, 2001년-2004년 타점 선두 1 1993년 득점 선두 1 1992년 장타율 선두 7 1990년, 1992년, 1993년, 2001년-2004년 총 루타 선두 1 1993년 - 수상 및 영예
수상 내역 상 횟수 수상 연도 베이브 루스 홈런상 1 2001년 베이스볼 아메리카 올스타 7 1993년, 1998년, 2000년-2004년 베이스볼 아메리카 메이저리그 올해의 선수 3 2001년, 2003년, 2004년 MLB 올스타 14 1990년, 1992년-1998년, 2000년-2004년, 2007년 메이저리그 올해의 선수 3 1990년, 2001년, 2004년 롤링스 골드 글러브 어워드 외야수 부문 8 1990년-1994년, 1996년-1998년 실버 슬러거 어워드 외야수 부문 12 1990년-1994년, 1996년-1997년, 2000년-2004년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올해의 선수 5회 (1998년, 2001년-2004년)
- 내셔널 리그 행크 애런상 수상 3회 (2001년-2002년, 2004년)
- 2005년 스포팅 뉴스의 100대 야구 선수 목록에서 6위에 올랐으며, 이는 현역 선수 중 가장 높은 순위였다.
- 1999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 센추리 팀 최종 후보에 올랐으나, 팬 투표에서 팀에 선정되지 못했다.
- 빌 제임스의 명예의 전당 모니터(100점은 좋은 명예의 전당 후보)에서 340점을 기록하며, 모든 타자 중 10위, 명예의 전당에 아직 헌액되지 않은 타자 중 2위를 차지했다.
- 2001년 .863, 2004년 .812로 두 번의 단일 시즌 장타율 .800 이상을 기록한 두 번째 선수이다 (다른 한 명은 베이브 루스).
- 2004년에는 공식 타수(373)보다 출루 횟수(376)가 더 많은 역사상 첫 번째 선수가 되었다. 이는 볼넷이 기록적인 수치를 기록했기 때문이며, 볼넷은 출루와 타석 수에는 포함되지만 타수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는 135안타, 232볼넷, 9몸에 맞는 공으로 376개의 출루 횟수를 기록했다.
- 통산 타석 수 12,606개로 역대 10위에 올랐다. 그는 이 부문 상위 10명 중 3,000안타를 달성하지 못한 유일한 선수이며, 12,000타석 이상에서 3,000안타를 달성하지 못한 두 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다른 한 명은 오마 비스켈이다).
- 아버지 바비 본즈 (332홈런, 461도루)와 함께 2007년 9월 26일 기준으로 통산 합산 홈런(1,094개)과 도루(975개)에서 모든 부자 조합 중 선두를 달리고 있다.
- 마이너리그 야구를 알래스카와 하와이에서 뛰었다. 1983년에는 알래스카 골드패너스에서, 1986년에는 하와이 아일랜더스에서 뛰었다.
-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표지 모델로 총 8번 등장했다. 자이언츠 소속으로 7번, 파이리츠 소속으로 1번이었다. 또한 표지 인셋에 두 번 등장했다. 그는 2013년 제이슨 그릴리가 등장하기 전까지 가장 최근에 파이리츠 선수로서 표지에 등장한 선수였다.
8.2. Enduring Influence and Reception
2007년 말, 시카고 래퍼 칸예 웨스트는 자신의 앨범 졸업에 본즈의 이름을 딴 "배리 본즈"라는 곡을 수록했다.
선수로서 본즈는 초기부터 중기까지, 즉 1990년대에는 5툴 플레이어로서 주루, 공격, 수비 모두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는 30홈런 30도루를 5번, 3할 30홈런 30도루를 3번, 3할 40홈런 40도루를 1번 기록했다. 이 중 40홈런 40도루는 호세 칸세코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로 달성한 선수였다. 수비에서는 골드 글러브 어워드를 8번 수상했다. 특히 1997년 올스타전에서 데이비드 콘과 이반 로드리게스의 황금 배터리를 상대로 도루를 성공시키기도 했다.
ESPN과 스포팅 뉴스는 모두 본즈를 1990년대 최고의 선수로 선정했다. (역대 수상 선수로는 타이 콥, 지미 폭스, 테드 윌리엄스, 스탠 뮤지얼, 윌리 메이스, 피트 로즈, 마이크 슈미트 등이 있다.) 통산 7번의 MVP 중 3번은 1990년대에 수상했다. 2001년 시즌 73홈런을 시작으로, 2001년부터 4년 연속으로 출루율 .500 이상, 장타율 .700 이상을 기록했다. 이 두 수치를 합한 OPS도 1.200 이상을 기록했으며, 2004년에는 출루율 .609, 장타율 .812를 기록하여 MLB 기록인 1.422 OPS를 달성했다. 볼넷 기록은 본즈 자신이 3번 경신했으며, 고의 사구는 2번, 출루율도 2번 경신했다.
한 시즌 100삼진에 달한 것은 선수 생활 첫 해의 102삼진뿐이었으며, 2001년에 73홈런을 기록한 이후 홈런율이 크게 상승했지만, 2004년에는 삼진보다 홈런이 더 많은(45홈런 41삼진) 기록을 남겼다.
무주자 상황에서 고의 사구를 얻은 것은 41회(이 중 무사 무주자 상황에서 고의 사구는 5회), 2스트라이크 상황에서 고의 사구를 얻은 것은 5회(이 중 0볼 2스트라이크에서 풀카운트가 되어 고의 사구를 얻은 것은 3회) 있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1998년 5월 28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경기에서는 9회 2아웃 만루 상황에서 고의 사구를 얻어냈다. 2001년 73홈런을 기록한 시즌의 홈런 내역은 좌익수 방향 4개, 좌중간 4개, 중견수 방향 15개, 우중간 21개, 우익수 방향 29개였다. 73개 중 50개가 당겨친 방향이었고, 밀어친 방향은 단 8개에 불과하여 전형적인 풀 히터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본즈의 경우, 타격이 워낙 뛰어나 밀어칠 필요가 없었다고 평가된다.
타격 능력을 보여주는 일화로, 신인 시절 이런 이야기가 있다. 파이리츠에 1라운드 지명(전체 6위)을 받은 그 주, 피츠버그로 초청되어 당시 홈 구장이던 쓰리 리버스 스타디움에서 타격 연습을 했다. 이때 당겨쳐서 15구 중 11구를 스탠드에 넘기자, 이를 지켜보던 코치 중 한 명이 "그 정도는 왼손 타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럼 이걸 보라"며 좌익수 방향으로 담장을 넘기는 홈런을 연발했다고 한다.
야구에 대한 감각도 매우 뛰어났다. 어느 경기에서 자이언츠 타선이 상대 투수에게 고전하고 있을 때, 본즈는 "글러브 각도가 바뀌면 슬라이더, 일직선이면 직구야"라고 툭 내뱉었다. 팀 동료들은 차이를 알지 못했지만, 본즈는 그 후 몇 개의 공의 구종을 정확히 예측했다.
젊은 시절의 강점이었던 수비와 주루는 스테로이드 사용으로 인한 체중 증가 때문에 해마다 쇠퇴했고, 현역 말년에는 일본 언론에서도 "수비와 주루는 팀에 민폐를 끼칠 정도"라고 혹평받을 정도였다. 타격 능력에 대해서는 후술할 약물 의혹이 있었음에도 "본즈는 약물과 상관없이 초일류"라는 평을 들었으며, 은퇴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2021년 이후에도 여러 구단 감독들로부터 높이 평가받고 있다. 오타니 쇼헤이가 성공적인 시즌 기록을 남기면서 "배리 본즈 같다"는 비유가 나오기도 했다.
본즈의 상징 중 하나인 AT&T 파크 우측 외야 담장 밖 바다(샌프란시스코만, 자이언츠의 명선수 윌리 맥코비의 이름을 따서 맥코비 코브라고도 불린다)로 직접 날아가는 홈런은 "스플래시 히트(Splash Hit)"라고 불린다. 본즈는 이 스플래시 히트를 역대 최다인 35번 기록했다. (역대 2위인 파블로 산도발, 브랜던 벨트조차 통산 7번에 불과하다.) 본즈가 이 기록을 많이 세워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실제로 본즈가 기록한 스플래시 히트를 제외하면 방문팀 선수들이 친 홈런을 포함해도 연간 약 3개밖에 나오지 않는다. 비거리 자체는 113 m 정도면 가능하지만, 우익수 담장은 7.6 m로 높고 항상 강한 해풍이 불어 MLB에서 왼손 타자에게 가장 불리한 구장 중 하나로 꼽힌다.
2007년부터 SSK사(社) 배트를 사용했다. 그전에는 샘 배트를 사용했다.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SSK 배트를 시타해 본 본즈는 마음에 들어 담당자에게 자신의 사용하던 배트를 건네며 "이것과 똑같이 만들어달라"며 즉석에서 3더즌을 주문했다고 한다. 이 배트는 일본 도야마현의 SSK 배트 협력 공장에서 생산되었고, 50년 이상의 배트 제작 경험을 가진 사장 본쿄 가즈요시(本居和義) 등 배트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길이는 86.6 cm, 평균 무게는 915 g, 재질은 단풍나무였다.
대부분의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배트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본즈는 건조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항상 타구음으로 탄력을 확인하는 등 고집이 있었다. 또한 2007년부터 배트의 건조도를 유지하는 두랄루민 케이스도 사용했다. 또한 배트 그립 부분에 테이핑을 엇갈리게 칭칭 감는 것을 좋아하여, 종종 경기 중에도 배트에 감겨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바비 본즈는 알코올 중독에 걸려 술로 인해 여러 문제를 일으켰고, 점차 배리와 바비는 멀어졌다. 하지만 바비는 치료를 통해 알코올 중독을 극복했다. 1993년, 배리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입단하고 바비가 자이언츠의 타격 코치로 부임하면서 둘은 화해했다. 이후 둘은 함께 야구 인생을 걸었지만, 배리는 "그 분야의 1인자가 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월드 챔피언이 되지 못했다. 2002년 바비는 폐암과 뇌종양 진단을 받고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바비가 살아있는 동안 챔피언 반지를 손에 넣고 싶었던 배리는 2002년 필사적으로 플레이하여 MVP를 수상하는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자이언츠는 그 해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으나 애너하임 에인절스에 패하며 월드 챔피언이 되지 못했다. 2003년, 배리는 경기 외의 시간을 바비의 병간호에 전념했다. 이 해에도 배리는 필사적으로 플레이하여 6월 23일 역사상 최초로 "500홈런-500도루"를 달성했다. 8월 20일에는 바비가 자이언츠 경기를 관전하러 왔고, 이 날도 배리는 홈런을 쳤다. 그러나 사흘 뒤인 8월 23일, 바비는 영면했다. 배리는 이후 일주일 동안 방망이조차 잡지 못할 정도로 상심했다. 하지만 바비의 사망 일주일 후 복귀전에서는 랜디 존슨을 상대로 홈런을 쳤다. 이 해 MVP를 수상한 배리는 눈물을 흘리며 "이 MVP를 아버지께 바친다. 아버지께 정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2007년 8월 7일, 756호 홈런을 친 후, 10분간의 신기록 축하 세리머니에서 배리는 마이크를 잡고 인사를 했다. 자신의 가족, 관중, 팀 동료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마지막에는 "아빠...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라고 덧붙였다.
본즈는 일본 및 일본인 선수들과도 다양한 교류를 가졌다. 그는 일미 야구로 4번 일본을 방문했으며, 오랜 선수 생활 동안 일본 야구와 일본인 선수들과 다양한 형태로 관계를 맺었다. 본국에서는 늘 약물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일본인 기자들에게는 스스럼없이 응대하는 등 미국인 기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였다. 일본인 선수들과 언론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며, 각 선수를 높이 평가했다.
2002년 시즌 동안, 자이언츠의 전 팀 동료 신조 쓰요시는 고립되기 쉬운 본즈와 대화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신조는 수비 연습 시 글러브를 건네는 등 적극적으로 소통했다고 한다. 또한 신조에 따르면, 그는 "본즈의 왼쪽으로 날아온 타구는 모두 내가 잡겠다"고 말하며 본즈의 수비 부담과 피로를 줄여 타격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본즈도 타격 연습 중 자신이 사용하는 마스코트 배트를 신조에게 빌려주기도 했다. 다음 해인 2003년 신조가 뉴욕 메츠로 복귀했을 때나 은퇴 후에도 본즈는 신조에게 호의적인 언급을 남겼다.
2007년 올스타전에서는 같은 지구 라이벌 구단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마무리 투수 사이토 다카시와 라커가 옆자리였다. 본즈는 사이토에게 배트 한 자루를 선물했다. 사이토는 "배리는 지금 여러 말이 많아 처음에는 경계심을 가졌지만, 제가 직접 대화해 본 배리는 매우 스스럼없는 사람이었다. 배트의 스위트 스폿을 조금 더 넓히고 싶다든지 하는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회상했다. 또한 오카지마 히데키와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마쓰이 히데키에게도 높은 평가를 했으며, 마쓰이가 2002년 자유계약선수 자격 행사를 망설일 때 일본에서 열린 일미 야구에서 "메이저리그에서도 성공할 거야. 일본처럼 자이언츠로 와줬으면 좋겠다"고 응원했다. 또한 마쓰이와는 같은 해 일미 야구 경기 전에 1974년 "왕 대 행크 애런" 이후의 "일미 홈런 더비"가 열렸는데, 긴장해서 홈런을 치지 못하는 마쓰이에게 "어깨에 힘을 빼라"고 제스처를 취하고 어깨를 주무르며 긴장을 풀어주는 등 스스럼없이 대해주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마쓰이 가즈오에게는 2006년 비시즌 훈련 기간에 직접 말을 걸어 타격에 대해 여러 조언을 해주었다.
이치로에 대해서도 높은 평가를 내렸으며, "피트 로즈의 안타 기록을 넘는 것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있겠지만, 나는 로즈보다 뛰어난 실력자라고 인정한다"고 극찬했다.
오 사다하루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근육 증강제 사용은 나쁜 일"이라고 전제하면서도 "그러나 예전에는 금지되지 않았던 것이고, 무엇보다 스테로이드를 사용했다고 해서 누구나 홈런을 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본즈의 타격 기술을 높이 평가했다.
오타니 쇼헤이에 대해서도 "오타니는 유례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투수로서도 타자로서도 엘리트급이다. 그와 같은 선수는 앞으로도 나타나지 않을 것 같다"고 칭찬하며, "만약 내가 감독이라면, 잘 되고 있는 것을 고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오타니가 행복한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능력을 최대한으로 이끌어내주고 싶고, 지금의 이도류를 계속 유지시킬 것이다"라고 이도류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의견을 표명했다.
9. 연도별 타격 성적
연도 | 소속 | 나이 | 출장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도루 | 도루실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루타 | 병살타 | 몸맞 | 희타 | 희플 | 고4 |
---|---|---|---|---|---|---|---|---|---|---|---|---|---|---|---|---|---|---|---|---|---|---|---|---|---|
1986 | PIT | 22 | 113 | 484 | 413 | 72 | 92 | 26 | 3 | 16 | 48 | 36 | 7 | 65 | 102 | .223 | .330 | .416 | .746 | 172 | 4 | 2 | 2 | 2 | 2 |
1987 | 23 | 150 | 611 | 551 | 99 | 144 | 34 | 9 | 25 | 59 | 32 | 10 | 54 | 88 | .261 | .329 | .492 | .821 | 271 | 4 | 3 | 0 | 3 | 3 | |
1988 | 24 | 144 | 614 | 538 | 97 | 152 | 30 | 5 | 24 | 58 | 17 | 11 | 72 | 82 | .283 | .368 | .491 | .859 | 264 | 3 | 2 | 0 | 2 | 14 | |
1989 | 25 | 159 | 679 | 580 | 96 | 144 | 34 | 6 | 19 | 58 | 32 | 10 | 93 | 93 | .248 | .351 | .426 | .777 | 247 | 9 | 1 | 1 | 4 | 22 | |
1990 | 26 | 151 | 621 | 519 | 104 | 156 | 32 | 3 | 33 | 114 | 52 | 13 | 93 | 83 | .301 | .406 | .565 | .970 | 293 | 8 | 3 | 0 | 6 | 15 | |
1991 | 27 | 153 | 634 | 510 | 95 | 149 | 28 | 5 | 25 | 116 | 43 | 13 | 107 | 73 | .292 | .410 | .514 | .924 | 262 | 8 | 4 | 0 | 13 | 25 | |
1992 | 28 | 140 | 612 | 473 | 109 | 147 | 36 | 5 | 34 | 103 | 39 | 8 | 127 | 69 | .311 | .456 | .624 | 1.080 | 295 | 9 | 5 | 0 | 7 | 32 | |
1993 | SFG | 29 | 159 | 674 | 539 | 129 | 181 | 38 | 4 | 46 | 123 | 29 | 12 | 126 | 79 | .336 | .458 | .677 | 1.136 | 365 | 11 | 2 | 0 | 7 | 43 |
1994 | 30 | 112 | 474 | 391 | 89 | 122 | 18 | 1 | 37 | 81 | 29 | 9 | 74 | 43 | .312 | .426 | .647 | 1.073 | 253 | 3 | 6 | 0 | 3 | 18 | |
1995 | 31 | 144 | 635 | 506 | 109 | 149 | 30 | 7 | 33 | 104 | 31 | 10 | 120 | 83 | .294 | .431 | .577 | 1.009 | 292 | 12 | 5 | 0 | 4 | 22 | |
1996 | 32 | 158 | 675 | 517 | 122 | 159 | 27 | 3 | 42 | 129 | 40 | 7 | 151 | 76 | .308 | .461 | .615 | 1.076 | 318 | 11 | 1 | 0 | 6 | 30 | |
1997 | 33 | 159 | 690 | 532 | 123 | 155 | 26 | 5 | 40 | 101 | 37 | 8 | 145 | 87 | .291 | .446 | .585 | 1.031 | 311 | 13 | 8 | 0 | 5 | 34 | |
1998 | 34 | 156 | 697 | 552 | 120 | 167 | 44 | 7 | 37 | 122 | 28 | 12 | 130 | 92 | .303 | .438 | .609 | 1.047 | 336 | 15 | 8 | 1 | 6 | 29 | |
1999 | 35 | 102 | 434 | 355 | 91 | 93 | 20 | 2 | 34 | 83 | 15 | 2 | 73 | 62 | .262 | .389 | .617 | 1.006 | 219 | 6 | 3 | 0 | 3 | 9 | |
2000 | 36 | 143 | 607 | 480 | 129 | 147 | 28 | 4 | 49 | 106 | 11 | 3 | 117 | 77 | .306 | .440 | .688 | 1.127 | 330 | 6 | 3 | 0 | 7 | 22 | |
2001 | 37 | 153 | 664 | 476 | 129 | 156 | 32 | 2 | 73 | 137 | 13 | 3 | 177 | 93 | .328 | .515 | .863 | 1.379 | 411 | 5 | 9 | 0 | 2 | 35 | |
2002 | 38 | 143 | 612 | 403 | 117 | 149 | 31 | 2 | 46 | 110 | 9 | 2 | 198 | 47 | .370 | .582 | .799 | 1.381 | 322 | 4 | 9 | 0 | 2 | 68 | |
2003 | 39 | 130 | 550 | 390 | 111 | 133 | 22 | 1 | 45 | 90 | 7 | 0 | 148 | 58 | .341 | .529 | .749 | 1.278 | 292 | 7 | 10 | 0 | 2 | 61 | |
2004 | 40 | 147 | 617 | 373 | 129 | 135 | 27 | 3 | 45 | 101 | 6 | 1 | 232 | 41 | .362 | .609 | .812 | 1.422 | 303 | 5 | 9 | 0 | 3 | 120 | |
2005 | 41 | 14 | 52 | 42 | 8 | 12 | 1 | 0 | 5 | 10 | 0 | 0 | 9 | 6 | .286 | .404 | .667 | 1.071 | 28 | 0 | 0 | 0 | 1 | 3 | |
2006 | 42 | 130 | 493 | 367 | 74 | 99 | 23 | 0 | 26 | 77 | 3 | 0 | 115 | 51 | .270 | .454 | .545 | .999 | 200 | 9 | 10 | 0 | 1 | 38 | |
2007 | 43 | 126 | 477 | 340 | 75 | 94 | 14 | 0 | 28 | 66 | 5 | 0 | 132 | 54 | .276 | .480 | .565 | 1.045 | 192 | 13 | 3 | 0 | 2 | 43 | |
MLB 통산 : 22년 | 2986 | 12606 | 9847 | 2227 | 2935 | 601 | 77 | 762 | 1996 | 514 | 141 | 2558 | 1539 | .298 | .444 | .607 | 1.051 | 5976 | 165 | 106 | 4 | 91 | 68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