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후지카와 규지는 고치현 고치시에서 태어나 야구 선수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1.1. 출생과 가족
후지카와 규지는 1980년 고치현 고치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 '규지'(球児일본어)는 일본어로 '야구 소년'을 뜻하며, 고교 야구 선수를 지칭하는 '고교 규지'(高校球児일본어)라는 표현의 일부로 자주 사용된다. 이는 그의 아버지가 후지카와가 태어나기 전날 동네 야구 경기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편모 가정에서 성장했다. 자신과 형이 야구를 하면서 많은 돈이 들었고, 어머니는 이로 인해 상당한 빚을 지게 되었다. 후지카와는 훗날 "그대로 프로에 가지 못했다면 빚만 떠안았을 것"이라고 회고하며, 야구에 대한 강한 동기를 부여받았다.
1.2. 어린 시절과 야구 입문
후지카와는 소년 야구팀 '고다카사 화이트 울프'에서 야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유격수로 뛰었으나, 이후 투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어린 시절 천식을 앓았을 정도로 몸이 튼튼하지는 않았지만, 야구에 대한 열정으로 이를 극복해나갔다.
중학교 시절에는 히로스에 료코와 동창이었다. 1995년 9월 10일, 중학교 3학년이던 후지카와는 고치시 가가미가와 강에 추락한 남성을 동급생 3명과 함께 구조하여 고치 경찰서로부터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당시 고치 경찰서 교통과장이었던 경찰관은 후지카와를 "키가 훌쩍 큰 소년이었다"고 회상했다.
1.3. 고교 시절
후지카와는 고치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야구 활동을 이어갔다. 2학년이던 1997년, 그는 제79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우익수 겸 예비 투수로 형 후지카와 준이치(당시 팀의 주전 포수)와 함께 배터리로 출전했다. 팀은 2회전에서 가와구치 도모야가 이끄는 헤이안 고등학교에 패했지만, 후지카와는 고치 지역 대회에서 144 km/h의 구속을 기록하며 현 내 유망주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도요타 오타니 고등학교의 후루키 가쓰아키와 함께 2학년임에도 불구하고 고교 일본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고치 상업고등학교 재학 시절, 그는 데라모토 시로, 도이 료타로와 함께 '고치 삼총사'로 불리며 주목받았다.
2. 프로 경력
후지카와 규지는 NPB와 MLB를 오가며 다채로운 프로 야구 선수 경력을 쌓았다.
2.1. 드래프트 및 입단
1998년 NPB 드래프트에서 한신 타이거스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았다. 당시 고졸 투수 중 1라운드에 지명된 선수는 마쓰자카 다이스케, 아라카키 나기사, 이시도 가쓰토시와 함께 후지카와를 포함해 단 4명뿐이었다(아라카키는 그 해 계약하지 않았다). 그는 계약금 1.00 억 JPY, 연봉 700.00 만 JPY(추정치)의 조건으로 한신에 입단했다. 입단 당시 등번호는 30번이었다.
입단 발표 기자회견에서 후지카와는 "10년 후에는 한신에서 센트럴 리그 우승을 3번 경험하고, 그중 한 번은 우승의 마지막 투수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당시 1군 감독으로 회견에 동석했던 노무라 가쓰야는 후지카와의 화술을 "야구 외에 다른 재능을 가진 것 같다"고 칭찬했다. 그의 담당 스카우트는 기리토오시 다케시였다.
2.2. 한신 타이거스 (1차)
후지카와는 한신 타이거스에서 구원 투수로서 전성기를 맞이하며 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2.2.1. 초기 경력 (1999-2003)
프로 1년 차인 1999년, 후지카와는 체력 강화에 집중하며 웨스턴 리그에서 3경기 등판에 그쳤다. 훈련 기간 중에는 성적이 좋지 않아 고등학교 보충 수업에 참여해야 했고, 이 때문에 팀 훈련 일부를 빠지기도 했다. 한신의 스프링캠프 장소인 고치현 아키시가 그의 고향인 고치시와 가까웠기에 가능한 독특한 상황이었다.
이듬해인 2000년, 그는 처음으로 1군에 등록되어 3월 31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의 시즌 개막전에서 구원 등판하며 프로 데뷔 경기를 치렀다. 같은 해 고교 시절부터 교제하던 여성과 결혼하며 동세대 프로 야구 선수 중 최초의 기혼자가 되었다. 그러나 1군에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며 코칭스태프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2002년, 감독이 호시노 센이치로 바뀌면서 등번호를 이름 '규지'와 발음이 비슷한 92번으로 변경했다. 그는 선발 투수로 적극 기용되어 12경기에 등판했고, 9월 11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8이닝 1실점으로 막아내며 프로 데뷔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 해 프레시 올스타전에서는 웨스턴 리그 선발 투수로도 나섰다. 그러나 이 1승 외에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하지 못했고, 2003년까지도 눈에 띄는 성적을 기록하지 못했다. 2003년 4월 11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는 9회 4점 차 리드 상황에서 2아웃을 잡고 등판했으나 동점을 허용하며 아쉬움을 남겼다(경기는 무승부). 팀은 이 경기 이후 연승을 거두며 우승을 달성했지만, 후지카와의 그 시즌 등판은 17경기(1승 1패)에 그쳤다.
2003년 팜 일본 선수권에서는 세이브를 기록하며 우승의 마지막 투수가 되었지만, 2003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등판 기회가 없었다. 당시 감독이었던 오카다 아키노부는 후지카와가 방출 통보 직전이었으며, 다른 구단과의 트레이드 논의도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고 훗날 밝혔다. 고졸 입단 선수에게 5년이나 유예 기간을 주는 구단은 많지 않았던 시기였다.
2.2.2. 구원 투수로의 전환
2004년 5월, 어깨 부상으로 2군에 머물던 후지카와는 당시 2군 투수 코치였던 야마구치 다카시의 조언을 받아 투구폼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기로 결심했다. 또한, 고등학교 선배이자 1군 투수 코치였던 나카니시 기요오키의 조언에 따라 중간 계투로 전향했다. 이러한 폼 개조와 포지션 전환은 그의 경기력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시즌 후반에는 1군에 복귀하여 26경기에 등판, 31이닝 동안 35탈삼진을 잡으며 2.61의 방어율을 기록하는 등 구원 투수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2.2.3. 전성기와 'JFK' 시대
2005년은 후지카와에게 있어 모든 면에서 비약적인 해였다. 등번호를 22번으로 변경한 그는 "사사키 가즈히로 선수, 다카쓰 신고 선수와 같은 등번호를 갖게 되어 영광입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제프 윌리엄스와 구보타 도모유키와 함께 한신 타이거스의 강력한 승리 방정식인 JFK를 형성하며 셋업맨으로 자리매김했다. 6월 14일부터 7월 20일까지 프로 야구 기록인 17경기 연속 홀드를 기록했으며, 6월에는 월간 MVP를 수상했다. 올스타전 팬 투표에서는 중간 계투 부문 1위로 선정되어 첫 출전을 기록했다. 9월 9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는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
후지카와는 그 해 한신 타이거스의 리그 우승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92.1이닝 동안 139탈삼진을 잡으며 13.55%의 탈삼진율과 1.36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9월 29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는 당시 시즌 최다 등판 기록인 79경기째 등판을 기록하며 이나오 가즈히사와 기쿠치하라 쓰요시가 보유했던 78경기 기록을 경신했고, 시즌 마지막 등판인 10월 2일에는 80경기까지 등판 수를 늘렸다(현재 NPB 기록은 구보타가 2007년에 세운 90경기). 그는 또한 리그 최다인 46홀드를 기록하며 최우수 중간 계투 타이틀을 획득했고, MVP 후보로도 거론되었다(결국 팀 동료인 가네모토 도모아키가 수상).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2005년 일본 시리즈 3차전에서는 등판했으나 하시모토 다스쿠에게 적시 2루타를 허용하며 강판되었고, 팀은 4연패로 시리즈를 마쳤다.
2.2.4. 국가대표 참가
2006년, 후지카와는 제1회 WBC에 참가하는 일본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다. 그는 같은 등번호 22번을 사용하는 사토자키 도모야를 배려하여 등번호 24번을 달았다. 2006년 WBC 미국전에서는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배트를 직구로 부러뜨리는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3월 16일 본선 대한민국전에서는 이종범에게 결승 2루타를 허용하기도 했다.
2008년, 후지카와는 베이징 올림픽 야구 일본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구상한 7, 8, 9회를 담당하는 '트리플 마무리'의 일원(이와세 히토키, 우에하라 고지와 함께)으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준결승 대한민국전에서 2대 1로 앞선 7회에 등판하여 동점타를 허용하며 팀의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2009년, 그는 두 번째 WBC에 참가하는 일본 대표팀에 발탁되어 등번호 22번을 달았다. 1차 및 2차 예선 4경기에서 0.00의 방어율을 기록했지만, 직구 구속이 떨어지고 주자를 자주 내보내는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이에 하라 다쓰노리 감독은 준결승과 결승에서 다르빗슈 유를 마무리 투수로 기용했고, 후지카와는 이 두 경기에서 등판하지 못했다. 당시 마무리 경험이 없던 다르빗슈에게 정신적, 신체적 준비 방법에 대해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대회 종료 후, 일부 언론에서는 그가 기용 방식에 불만을 품고 국가대표 은퇴를 시사했다고 보도했으나, 후지카와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이를 전면 부인하며 "후회가 남는다거나 준결승·결승에서 연투해 우승 투수가 되고 싶다는 발언은 일절 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2.2.5. 마무리 투수로서의 활약
2006년 시즌, 후지카와는 중간 계투로 시작했으나 6월에 마무리 투수 구보타 도모유키의 부상 이탈로 인해 마무리 투수 역할을 맡게 되었다. 7월 4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전에서 35경기 연속 무실점 기록을 세워 도요다 기요시의 일본 기록을 경신했다. 7월 11일에는 고야마 마사아키가 보유한 47이닝 연속 무실점 구단 기록을 경신했으나, 다음날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실점하며 연속 무실점 경기는 38경기,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은 47.2이닝에서 중단되었다.
7월 21일 올스타전 1차전에서는 등판 전 "야구 만화 같은 세계를 만들고 싶다"고 말하며, 선두 타자 알렉스 카브레라에게 모든 공을 직구로 던지겠다고 예고한 뒤 실제로 모든 공을 직구로 던져 헛스윙 삼진을 잡았다. 이어서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에게도 직구로 헛스윙 삼진을 유도했다. 7월 23일 2차전에서는 오릭스 버펄로스로 이적한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다시 맞붙어 모든 공을 직구로 던져 헛스윙 삼진을 잡았고, 기요하라는 경기 후 "졌다... 불덩이를 던지더라"고 감탄했다.
당시 한신은 주니치 드래건스와 리그 우승 경쟁을 벌였지만, 올스타전 이후 부진에 빠지며 8월 말에는 주니치에 9경기 차로 뒤처졌다. 8월 12일부터 목 부상으로 2군에 내려갔던 후지카와는 8월 27일 요미우리전에서 복귀해 8회에 등판하여 승리 투수가 되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그는 팬들의 비난에 대해 "선수들도 필사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며 눈물을 흘렸다. 비록 팀은 우승을 놓쳤지만, 후지카와는 2년 연속 최우수 중간 계투 타이틀을 획득했다.
2007년 시즌부터는 팀의 공식 마무리 투수로 임명되어 안정적인 투구를 선보였다. 7월 20일 올스타전 1차전에서 센트럴 리그의 마지막 투수로 등판하여 "제 변화구는 아무도 보고 싶지 않겠죠?"라고 말하며 모든 공을 직구로 던져 2개의 삼진을 잡고 경기를 마무리했다. 9월 7일 요미우리전에서는 구원 투수로서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3년 연속 100탈삼진을 달성했다. 시즌 막판에는 센트럴 리그 기록인 10경기 연속 등판을 기록하며 2승 7세이브, 1.80의 방어율을 기록했고, 팀은 10연승을 달성했다. 10월 3일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일본 타이 기록(이와세 히토키와 동률, 우완 투수로는 신기록)인 46세이브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최다 세이브 투수 타이틀을 차지했다. 시즌 후 포스팅 시스템을 통한 MLB 진출을 희망했으나, 구단에 의해 거부되었다.
2008년에도 후지카와는 타자들을 압도했다. 시즌 초 11경기 연속 세이브 성공으로 구단 기록을 세웠고, 올스타전 직전까지 30세이브를 쌓았다. 9월 25일 요코하마전에서 개인 통산 100세이브를 달성했다. 그러나 주니치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3차전에서 9회에 타이론 우즈에게 결승타를 허용하며 팀은 패했다. 시즌 후 연봉 4.00 억 JPY에 계약을 갱신하며 "메이저리그 도전 의지는 계속 가져가겠지만, 한신에 들어온 지 10년이 되었다. 내년에는 다시 한신에서 거인을 꺾고 싶다"고 말했다.
2009년 정규 시즌에서는 5월 중순까지 3패를 기록하는 등 부진했으나, 6월 이후 무패 행진을 이어가며 5승 3패 25세이브로 시즌을 마쳤고, 3년 연속 20세이브를 달성했다. 이 해 오프 시즌에도 MLB 진출을 위해 포스팅 시스템을 신청했으나, 구단은 "사업 이전에 구계의 보물"이라며 이를 거부했다.
2010년에는 개막 이후 16경기 연속 무실점을 기록하며 뛰어난 컨디션을 보여주었다. 다른 중간 계투 투수들의 부진으로 교류전과 여름철에는 셋업맨 역할까지 겸임하게 되었고, 1이닝 이상 등판한 경기가 시즌 전체 12경기에 달했다. 4월 13일 도쿄 돔에서 열린 요미우리전에서 야마모토 가즈유키를 넘어 통산 세이브 부문 구단 기록을 달성했다. 올스타전 팬 투표(센트럴 리그 마무리 부문 1위)로 6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7월 23일 1차전 9회에 등판하여 사토자키 도모야, 가타오카 야스유키, 나카지마 히로유키를 상대로 던진 16개의 공을 모두 직구로 던져 3타자 연속 삼진을 잡았다. 9월 5일 히로시마전에서 개인 통산 150세이브를 달성했다. 그러나 이 해 피홈런은 프로 데뷔 후 최다인 7개를 기록했고, 2.01의 방어율, WHIP 1.08로 2005년 1군 정착 이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2011년에도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며 전반기 26경기에서 0.76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7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되어 1차전에서 2007년과 마찬가지로 센트럴 리그의 마지막 투수로 등판하여 경기를 마무리했다. 8월 25일 요미우리전에서 동점 상황에 등판하여 3타자 연속 삼진으로 1이닝을 막아내며 통산 100홀드를 기록,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통산 100홀드와 100세이브를 모두 달성한 투수가 되었다. 10월 21일 요코하마전에서 4년 만에 40세이브를 달성했고, 최종적으로 41세이브를 기록하며 두 번째 최다 세이브 투수 타이틀을 차지했다. 시즌 후 취득한 국내 FA권을 행사하지 않고 한신에 잔류했으며, 다음 해 해외 FA권 취득을 고려하여 단년 계약에 연봉 4.00 억 JPY + 성과급 조건으로 계약을 갱신했다.
2012년에는 팀에 도입된 주장 제도에 따라 야수 주장 도리타니 다카시와 함께 투수 주장으로 지명되었다. 개막전에서 구원 실패를 기록했지만, 4월 11일 히로시마전에서 개인 통산 200세이브를 달성했다. 시즌 후 해외 FA권을 행사하며 MLB 진출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2.2.6. 주요 마일스톤 및 수상
후지카와는 NPB와 MLB에서 수많은 주요 기록을 달성하고 여러 상을 수상하며 뛰어난 경력을 인정받았다.
- 최우수 중간 계투:** 2005년, 2006년 (2년 연속 수상은 최장 타이 기록)
- 최다 세이브 투수:** 2007년, 2011년 (2회 수상)
- 월간 MVP:** 2005년 6월, 2008년 9월 (투수 부문)
- 최우수 배터리상:** 2005년 (포수 야노 아키히로와 함께 수상), 2008년 (특별상)
- JA 전농 Go·Go상:** 2008년 6월 (구원상)
- 올스타전 우수 선수상:** 2005년 2차전 (베스트 피처상 동시 수상)
- 골든 스피릿상:** 2012년
- 와카바야시 다다시상:** 2012년 (제2회)
- 야나세·한신 타이거스 MVP상:** 2005년
- 산케이 스포츠 MVP 대상:** 2006년, 2011년 (2회 수상)
- 산케이 스포츠 MVP 특별 공로상:** 2012년
- 베스트 파더 옐로 리본상:** 2008년 (프로 야구 부문)
- 주요 기록 달성:**
- 첫 등판:** 2000년 3월 31일, 요코하마 스타디움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 첫 선발 승리:** 2002년 9월 11일, 메이지 진구 야구장 (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 첫 홀드:** 2005년 4월 6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 첫 세이브:** 2005년 9월 9일, 한신 고시엔 구장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 통산 100세이브:** 2008년 9월 25일, 한신 고시엔 구장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 역대 21번째
- 통산 150세이브:** 2010년 9월 5일,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 히로시마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 역대 10번째
- 통산 500경기 등판:** 2011년 8월 28일, 한신 고시엔 구장 (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 역대 87번째
- 통산 100홀드:** 2011년 8월 25일, 한신 고시엔 구장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 NPB 사상 최초로 통산 100홀드·100세이브 동시 달성
- 통산 200세이브:** 2012년 4월 11일,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 히로시마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 역대 5번째
- 통산 600경기 등판:** 2016년 8월 28일, 한신 고시엔 구장 (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 역대 39번째
- NPB 통산 1000탈삼진:** 2017년 5월 30일, ZOZO 마린 스타디움 (대 지바 롯데 마린스) - 역대 146번째, 771.2이닝으로 노모 히데오의 최단 기록(871이닝)을 크게 단축한 NPB 사상 최단 기록
- NPB 통산 150홀드:** 2019년 6월 11일, 후쿠오카 돔 (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역대 7번째
- NPB 사상 최초 150홀드 150세이브 동시 달성:** 2019년 6월 11일
- 시즌 46세이브:** 2007년 - 센트럴 리그 기록 (당시 NPB 타이 기록)
- 17경기 연속 홀드:** 2005년 - NPB 타이 기록
- 47.2이닝 연속 무실점:** 한신 타이거스 구단 기록
- 개막 이후 11경기 연속 세이브:** 한신 타이거스 구단 기록
- 38경기 연속 무실점:** 센트럴 리그 기록
- 10경기 연속 등판:** 2007년 8월 30일 ~ 9월 9일 - 센트럴 리그 기록
- 시즌 11무승부:** 2012년 - 에나쓰 유타카, 우시지마 가즈히코와 함께 센트럴 리그 타이 기록
- 올스타전 출장:** 9회 (2005년 ~ 2012년, 2019년)
2.3. 메이저 리그 경력
후지카와는 일본에서의 성공을 뒤로하고 메이저 리그 무대에 도전했다.
2.3.1. 시카고 컵스
2012년 12월 2일, 후지카와는 시카고 컵스와 2년 총액 950.00 만 USD에 계약 합의했다. 3년차에는 연봉 550.00 만 USD의 구단 옵션이 있었으며, 특정 세이브 수를 달성할 경우 연봉 600.00 만 USD로 자동 갱신되는 조건이었다. 등번호는 11번을 받았다. 입단 기자회견에서 그는 "모든 것이 도전이다. 확실히 결과를 내기 위해 노력을 거듭하고 싶다"고 말했다.
2013년 4월 1일, 피츠버그 파이리츠와의 개막전 9회 2사 상황에서 MLB 데뷔전을 치렀고, 2구 만에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 4월 7일에는 부진한 카를로스 마몰을 대신해 마무리 투수로 기용될 것이 발표되었다. 4월 12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전에서는 2점 리드 상황에서 등판하여 3안타 1사구 1폭투로 3실점하며 역전을 허용했으나, 팀이 9회 말 역전에 성공하면서 행운의 MLB 첫 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4월 13일 오른쪽 전완부 통증으로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5월 10일 워싱턴 내셔널스전에서 복귀한 후 7경기에서 1.17의 방어율과 WHIP 0.55로 호투했으나, 5월 26일 신시내티 레즈전에서 다시 오른쪽 전완부 통증을 재발하며 강판되었다. 5월 29일 구단은 그의 팔꿈치 척골측부인대 파열 진단과 함께 토미 존 수술을 받을 것이라고 발표했고, 6월 11일 수술을 받으며 시즌을 마감했다. 이로 인해 2014년 시즌 초반도 결장했다.
2014년 3월 30일, 전년도 수술의 영향으로 15일짜리 부상자 명단에 올랐고, 5월 3일에는 60일짜리 부상자 명단으로 이동했다. 7월 16일에는 재활을 위해 A급 팀으로 이동했다. 8월 6일 부상자 명단에서 복귀한 그는 컵스에서 총 15경기에 등판하여 4.85의 방어율과 17탈삼진을 기록했다. 10월 30일, 컵스는 2015년 구단 옵션을 거부하면서 그를 자유 계약 신분으로 만들었다.
2.3.2. 텍사스 레인저스
2014년 12월 12일, 후지카와는 텍사스 레인저스와 1년 계약(연봉 100.00 만 USD + 성과급, 다음 해는 연봉 200.00 만 USD + 성과급의 구단 옵션)에 합의했다. 등번호는 21번을 받았다. 2015년 시즌은 오른쪽 다리 사타구니 통증으로 부상자 명단에 오르며 시작했다. 5월 14일 복귀하여 이적 후 첫 등판을 가졌으나, 2경기 등판에서 3실점을 기록하며 부진했다. 5월 17일 DFA되어 40인 로스터에서 제외되었고, 5월 22일 자유 계약 신분으로 풀리면서 그의 메이저리그 경력은 막을 내렸다.
2.4. 독립 리그 및 한신 복귀
메이저리그에서의 선수 생활을 마친 후, 후지카와는 일본으로 돌아와 다시 야구에 도전했다.
2.4.1. 고치 파이팅 독스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방출된 후, 그의 친정팀인 한신 타이거스가 선발 투수로서 그를 영입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후지카와는 "고향 아이들에게 꿈을 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고향인 고치에서 야구 인생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한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의 고치 파이팅 독스에 입단했다.
2015년 6월 8일 고치시에서 열린 입단 기자회견에서, 그는 등판하는 경기마다 고치와 계약을 맺는 형태로, 자신은 무보수로 뛰며, 등판 경기 티켓 매출의 10%를 아동 양육 시설에 기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동시에 NPB 복귀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고치 구단과 후지카와 사이에는 계약 문서가 없었으며, 경기 외 활동은 구단이 아닌 후지카와의 소속사 에이벡스 스포츠가 관리하는 이례적인 형태였다.
6월 20일 고치시 야구장에서 열린 가가와 올리브 가이너스·도쿠시마 인디고삭스 연합팀과의 시범 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4이닝 1실점을 기록했다. 2015년 시즌 NPB 복귀 기한인 7월 31일까지 시범 경기 3경기에 등판했으나, NPB 구단과의 계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고치 구단은 8월 4일 후지카와와 후기 시즌 계약을 체결했으나, 여전히 무보수 조건이었고 팀에 상시 동행하지 않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8월 6일 도쿠시마전에서 리그 공식 경기에 첫 등판했으나, 선두 타자에게 던진 공이 머리에 맞아 '위험구'로 퇴장당했다. 다음날인 8월 7일 에히메 만다린 파이렛츠전에서는 팀이 6대2로 앞선 5회부터 등판하여 5이닝 무실점 12탈삼진을 기록하며 아이랜드 리그 공식 경기 첫 승을 거두었다. 9월 7일 고치에서 열린 가가와전에서는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3피안타 완봉승으로 2승째를 기록했다. 공식 경기 완봉승은 한신 투수 시절 웨스턴 리그에서 2완봉승을 거둔 2000년 이후 15년 만이었다.
구단은 9월 10일, 후지카와와의 계약을 2015년 시즌을 끝으로 종료한다고 발표했다. 당초 9월 16일 도쿠시마전 선발이 마지막 등판으로 예정되었으나, 발표 직후 왼쪽 발목 부상으로 등판을 피했다. 팀의 시즌 최종전(9월 17일 가가와전)에서는 벤치에 있었지만, 등판 기회 없이 시즌을 마쳤다. 재적 기간 동안 한신을 포함한 여러 NPB 구단이 후지카와의 투구를 시찰했으며, 고치와의 계약 기간 만료 직후에는 주니치와 야쿠르트가 그를 영입하기 위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2.4.2. 한신 타이거스 (2차)
2015년 11월 14일, 후지카와는 2년 총액 3.00 억 JPY에 한신 타이거스로 복귀하는 계약에 합의했다. 가네모토 도모아키 감독이 2015년 오프 시즌에 1군 감독으로 취임한 직후 후지카와에게 직접 접촉하여 영입을 제안했다. 야쿠르트도 물밑에서 후지카와 영입을 시도했으나 조건이 맞지 않아 철수했고, 결국 후지카와는 한신 복귀를 결정했다. 11월 24일 공식 계약을 맺은 후 입단 기자회견에서 등번호 18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선보였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언제 쓰러져도 좋다"고 각오를 다졌다.
한신은 후지카와의 복귀 시점에서 2014년부터 그의 이전 등번호 22번을 사용하던 마무리 투수 오승환의 잔류를 전제로 후지카와를 선발 투수로 기용할 계획이었다. 당시 1군 투수 코치였던 고다 이사오도 후지카와에게 선발 투수로서의 조정을 요구했다. 가네모토 감독은 후지카와의 역할에 대해 "선발 준비를 해두면 중간부터 중간 계투로 갈 수 있다. 중간 계투 준비만 해두면 선발 전환은 힘들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2015년 12월, 한신 구단은 오승환과의 잔류 협상이 결렬되었다. 후지카와는 이 시점에서 선발 외의 역할도 기꺼이 맡을 자세를 보였고, 구단은 이후 마르코스 마테오와 컵스 시절 팀 동료였던 라파엘 도리스를 새로운 마무리 후보로 영입했다.
2016년, 후지카와는 스프링캠프 이후에도 선발 투수로서의 조정을 계속했다. 3월 6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시범 경기에서 NPB 복귀 후 첫 등판을 가졌고, 선발로 팀 내 최다인 2승을 올렸다. 정규 시즌에서는 3월 27일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열린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개막 3차전에서 선발 투수로 NPB 복귀 후 첫 공식 경기에 등판했다. 4월 3일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전에서는 선발 등판하여 6이닝 2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하며 NPB 복귀 후 첫 승을 거두었다. 이는 2003년 9월 19일 요미우리전 이후 4580일 만의 선발 승리였다. 그러나 14년 만의 고시엔 선발 등판이었던 4월 10일 히로시마전에서는 개인 최다인 7실점을 기록하며 복귀 후 첫 패배를 안았다. 결국 5경기 선발 등판에서 1승 2패, 6.12의 방어율로 부진하여 5월 중순부터 다시 구원 투수로 전향했다. 5월 18일 고시엔에서 열린 주니치전에서는 마테오와 도리스가 컨디션 문제로 결장하면서 1점 리드 상황인 9회 초에 복귀 후 처음으로 마무리 투수로 등판,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2012년 9월 15일 요미우리전 이후 4년 만에 세이브를 기록했다. 5월 19일 주니치전에서도 동점 상황인 9회 초에 등판하여 복귀 후 첫 연투를 했고, 팀이 9회 말 끝내기 승리를 거두면서 복귀 후 첫 구원승을 기록했다. 7월 26일 고시엔에서 열린 야쿠르트전에서는 8회 초에 등판하여 오비키 게이지를 삼진으로 잡으며 NPB/MLB 통산 1000탈삼진을 달성했다. 그는 구원 투수로서 38경기에 등판하여 팀 상황에 따라 셋업맨과 마무리 투수를 오가며 고시엔에서 16경기 연속 무실점을 기록했고, 4승 4패 3세이브 10홀드, 구원 방어율 3.58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2016년 시즌 총 43경기에 출전하여 선발 5경기 포함 5승 6패 10홀드 3세이브, 4.60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2017년에는 등번호를 복귀 전의 22번으로 되돌리고 셋업맨으로 정규 시즌을 시작했다. 4월 6일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열린 야쿠르트전에서는 연장 10회 초부터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고, 하라구치 후미히토의 끝내기 홈런으로 시즌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 구원승으로 NPB 공식 경기 통산 홀드 포인트가 155에 달하며 제프 윌리엄스가 보유했던 구단 기록(154홀드 포인트)을 경신했다. 4월 중순 이후 구와하라 겐타로가 셋업맨으로 자리 잡으면서 점수 차가 큰 상황이나 비하인드 상황에서의 등판 기회가 늘어났다. 5월 30일 ZOZO 마린 스타디움에서 열린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교류전 첫 경기에서는 8점 리드 상황인 9회 말에 등판하여 선두 타자 가쿠나카 가쓰야를 삼진으로 잡으며 NPB 사상 146번째로 NPB 1군 공식 경기 통산 1000탈삼진을 달성했다. 이 기록은 771.2이닝 만에 달성된 것으로, 노모 히데오의 종전 최단 기록(871이닝)을 크게 단축한 NPB 사상 최단 기록이었다. 정규 시즌에서는 1군 공식 경기 52경기에 등판하여 3승 무패 6홀드를 기록했다. 앞서 언급된 기용 방식의 영향으로 2004년 이후 13년 만에 세이브를 기록하지 못했지만, 2.22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WHIP도 전년보다 크게 향상되었다.
2018년에는 정규 시즌 개막부터 주로 중간 계투로 등판하며 안정적인 투구를 이어갔다. 교류전 기간부터는 1군 구원진의 이탈자가 속출하면서 셋업맨과 마무리 투수 역할도 다시 맡았다. 6월 16일 라쿠텐 생명 파크 미야기에서 열린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전에서는 1점 리드 상황인 9회 말에 긴급 마무리 투수로 등판하여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공식 경기 2년 만에 세이브를 기록했다. 7월 21일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열린 DeNA전 7회 초에는 미야자키 도시로를 삼진으로 잡으며 구원 등판만으로 구단 사상 최초로 NPB 1군 공식 경기 통산 1000탈삼진(선발 등판 포함 1093탈삼진)을 달성했다. 9월 5일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 히로시마에서 열린 히로시마전에서는 구단 사상 최다인 1군 공식 경기 통산 701경기 등판 기록을 달성했다. 9월 하순에는 오른쪽 팔꿈치 통증으로 전선에서 이탈했다. 시즌 전체적으로는 자책점이 기록되지 않는 상황에서의 구원 실패도 많아 '승리 방정식'에 다시 정착하지는 못했지만, 전년보다 많은 53경기에 등판했다. 150 km/h대의 구속을 다시 연발하는 직구를 주무기로 5승 3패 2세이브 21홀드, 2.32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시즌 종료 후 계약 갱신에서는 이 해 2군 감독을 맡았던 야노 아키히로가 1군 감독으로 취임한 것을 계기로 마무리 투수 복귀에 도전할 의향을 밝혔다.
2019년에는 시범 경기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은 채 중간 계투진의 일원으로 개막을 맞았다. 개막 후에도 부진이 이어져 4월 6일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 히로시마에서 열린 히로시마전에서 1이닝 2피홈런을 허용하는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 다음날 7일 본인의 희망으로 2군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4월 27일 1군에 재승격한 후 나고야 돔에서 열린 주니치 드래건스전부터 6월 11일 후쿠오카 돔에서 열린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전까지 18경기 연속 무실점을 기록했다. 이 기간 중 5월 8일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열린 야쿠르트전에서 통산 142홀드로 구단 기록을 경신했다. 6월 11일 소프트뱅크전에서는 통산 홀드 수가 150에 달하면서 NPB 사상 최초로 '동일 투수 150세이브·150홀드'라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올스타전에도 센트럴 리그 감독 추천 선수로 7년 만에 출전했다. 7월 13일 고시엔에서 열린 2차전 9회 초에 등판하여 모든 공을 직구로 던져 3타자 연속 범퇴로 막아냈다. 얀거비스 솔라테 내야수가 입단한 7월에는 당시 부진했던 도리스가 외국인 선수 쿼터 문제로 등록 말소되면서 7월 26일부터 마무리 투수로 재전환되었다. 처음에는 도리스가 1군으로 복귀할 때까지의 임시 조치였으나, 실제로는 전환 후 호투를 이어가면서 도리스 복귀 후에도 시즌 종료까지 마무리 투수 역할을 맡았다. 8월 31일 고시엔에서 열린 요미우리전에서는 통산 235세이브(당시 NPB 현역 투수 최다 기록)를 달성했다. 정규 시즌 전체적으로는 4승 1패 16세이브 23홀드, 1.77의 방어율, 세이브율 100%, 탈삼진율 13.34%라는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며 시즌 막판 6연승과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 기여했다. 또한 (컵스 시절 2세이브 포함) 통산 세이브 수가 243개에 달하며 명구회 입회 기준 중 하나인 'MLB 포함 공식 경기 통산 250세이브' 달성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도 DeNA와의 퍼스트 스테이지와 요미우리와의 파이널 스테이지에 각각 2경기씩 등판하여 모두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2.4.3. 은퇴 발표
2019년 4월, 2군 등록 말소 기간 중 현역 은퇴 의사를 구단에 전달했다. 당시 구단은 시즌 중 그의 결정을 보류했고, 후지카와 자신도 1군 복귀 후 마무리 투수 자리를 되찾으면서 시즌 종료 후(12월 10일) 계약 협상에서 구단과 논의 끝에 다음 해에도 현역 생활을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이때 추정 연봉 2.00 억 JPY(전년 대비 6000.00 만 JPY 인상)의 조건으로 1년 계약을 갱신했으며, 기자회견에서 "2년 이상 현역을 이어갈 생각은 더 이상 없으므로 단년 계약을 맺었다"고 밝혔다.
2020년 시즌에는 도리스의 퇴단(토론토 블루제이스로 이적) 등으로 인해 마무리 투수 역할을 맡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실제로는 전년과 마찬가지로 시범 경기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정규 시즌 개막 후 2세이브를 올렸지만 구원 실패가 잇따르자 오른쪽 상지 컨디션 불량을 이유로 두 차례 2군 등록 말소되었다. 두 번째 말소 기간 중, 그는 올해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할 의향을 다시 구단에 신청했다. 구단은 이 제의를 수락하며 8월 31일 후지카와의 은퇴를 발표했다. 발표 시에는 전년도 은퇴 신청부터 현역 속행까지의 경위와 함께, 후지카와로부터 "오른쪽 어깨 컨디션이 수술을 요할 정도로 악화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음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그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구장에 5,000명까지만 관객을 들일 수 있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으므로, 자신도 가능한 한 빨리 발표하고 싶다"는 의사에 따라 팀이 시즌을 반환점을 돈 9월 1일에 은퇴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27세 무렵부터 은퇴를 의식했음을 밝힌 그는, 은퇴를 결심한 이유로 "1년 내내 몸 컨디션을 조절하기 어려워져 '프로로서 실격'이라고 깨달은 것"을 꼽았다. 또한 통산 250세이브 달성에 연연하지 않는 자세를 보이면서도, "한신에 입단할 때 '3번 우승하겠다'고 말했지만, 22년째 시즌에도 아직 2번밖에 경험하지 못했다. 올해는 3번째 기회가 왔으니 한 번 더 노력하고 싶다"는 표현으로 후반기 1군 복귀를 다짐했다.
그는 2020년 11월 10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시즌 최종전(고시엔)에서 은퇴 경기를 치렀다. 팀이 4점 뒤진 9회 초에 등판하여 선두 타자 사카모토 하야토와 다음 타자 나카지마 히로유키를 연속으로 헛스윙 삼진으로 잡았고, 마지막으로 시게노부 신노스케를 2루수 플라이로 처리한 후 마운드를 내려왔다. 모든 공을 직구로 승부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경기 후 은퇴 세리머니가 진행되었고, 그는 팬들과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며 22년간의 현역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3. 투구 스타일 및 능력
후지카와 규지는 독특하고 강력한 투구 스타일과 구종으로 일본 야구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3.1. 투구폼 및 구종 구성
후지카와는 키 0.2 m (6 in)에 몸무게 86 kg (190 lb)의 날씬한 체형을 가진 우완 투수로, 전통적인 오버핸드 투구폼을 사용했다. 그는 왼 다리를 들어 올리고 엉덩이를 로딩한 후 잠시 멈칫하는 동작을 취했는데, 이는 많은 일본 투수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그의 투구폼은 2004년 어깨 부상 이후 2군 투수 코치 야마구치 다카시의 조언을 받아 개조되었다. 야마구치는 그에게 "위에서 내리찍듯이 공을 때려 던지는 감각으로 던져라"고 조언했고, 이를 계기로 후지카와는 하체를 사용하여 유연성을 유지하면서도 오른쪽 무릎을 크게 굽히지 않고 힘을 모아 던지는 폼으로 변화시켰다. 축을 잘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면서 구속이 급격히 증가했다.
주무기는 포심 직구였지만, 최근 몇 년간은 변화구 구사 비율을 늘렸다. 직구 외에 효과적인 포크볼과 커브를 주로 사용하며 타자들의 타이밍을 빼앗았다. (그는 커터와 체인지업도 가지고 있었지만 경기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구원 투수로 이름을 알릴 당시에는 직구가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여 한 이닝 전체를 변화구 없이 직구만으로 던지는 경우도 많았지만, 이후 피로와 부상 위험을 줄이기 위해 포크볼과 커브의 비중을 늘렸다.
3.2. '화구 직구' (Fireball Fastball)
후지카와의 직구는 일본에서 '히노타마 스트레이트'(火の玉ストレート일본어, '불덩이 직구' 또는 '화구 직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의 직구는 일반적으로 148 km/h를 기록하며 최고 156 km/h에 달했다. 전성기에는 평균 구속이 약 149 km/h에 이르렀다.
절대적인 구속 면에서는 마크 크룬이나 구보타 도모유키 등 그보다 더 빠르게 던지는 투수들이 있었지만, 후지카와의 직구는 궤적의 끝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움직임'으로 유명했다. 마치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마무리 투수 조너선 파펠본의 공처럼 타자 앞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주어, 스피드건 측정치보다 훨씬 빠르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타자들이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난 높은 직구에 방망이를 두세 개 정도의 거리로 헛스윙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이는 공이 홈 플레이트 앞에서 얼마나 '도약'하는 것처럼 보였는지를 증명한다.
2008년 3월 23일 도쿄 돔에서 열린 한신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시범 경기에서 후지카와에게 삼진을 당한 당시 오클랜드 외야수 제프 피오렌티노는 후지카와의 직구가 (당시 팀 동료였던) 리치 하든의 직구와 유사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 과학적 분석:**
2006년 11월 23일, 일본의 주요 방송사인 TV 아사히는 인기 뉴스 프로그램 '호도 스테이션'(報道ステーション일본어)에서 후지카와의 직구에 대한 짧은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이 프로그램은 특수 고속 카메라를 사용하여 일반적인 포심 직구가 홈 플레이트까지의 궤적 동안 초당 37회(2,220rpm) 회전하는 반면, 후지카와의 직구는 초당 45회(2,700rpm) 회전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는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37회나 마크 크룬의 41회보다 높은 수치였다. 또한, 일반적인 포심 직구의 회전축은 공의 진행 방향에 대해 약 30도 기울어져 있지만, 후지카와의 회전축은 단 5도에 불과했다(마쓰자카와 크룬은 10도).
마그누스 효과의 원리에 따르면, 물체가 더 빠르게 회전하고 수직축에 대한 기울기가 적을수록 더 많은 양력이 발생하여 공이 일반적인 직구보다 직선에 가까운 궤적으로 날아간다. 프로그램은 후지카와의 직구가 동일한 릴리스 포인트에서 정확히 같은 목표를 향해 던져질 경우, 일반적인 직구보다 30 cm 더 높게 홈 플레이트를 통과할 것이라고 가설을 세웠다. 이는 타자들이 후지카와의 직구가 플레이트에 접근할 때 '솟아오르는' 것처럼 느끼는 이유에 대한 가능한 설명으로 결론지어졌다.
직구를 던질 때 후지카와는 검지와 중지를 완전히 밀착시킨 독특한 그립을 사용했다. 릴리스 시에는 탁구공처럼 띄우는 것을 의식하며 공을 찌그러뜨리는 듯한 느낌으로 던졌다. 또한, 최대한 앞에서 공을 릴리스하기 위해 투수판에서 밟고 나간 왼발까지의 거리가 7발에 달하는 넓은 스트라이드를 만들었다. 그는 타이밍을 흐트러뜨리기 위해 타자가 스윙을 시작하는 타이밍과 공이 포수 미트에 도달하는 시간을 몸으로 느끼면서 몸의 열림, 팔의 스윙, 릴리스 포인트를 미묘하게 조절했다.
기요하라 가즈히로는 후지카와의 직구를 "20년간 본 것 중 최고(의 직구). 불덩이다"라고 극찬했다. 2006년 WBC에서 후지카와와 대결했던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그런 직구는 본 적이 없다. 아래에서 위로 솟아오른다"고 증언했다. 후지카와의 직구를 자주 받았던 포수 야노 아키히로는 "과장해서 말하면 '마구'에 가깝다. 프로 선수들이 직구를 기다리고 있음에도 그 직구로 헛스윙을 잡을 수 있다. 그런 투수는 지금 프로 야구계에 없다. 틀림없이 최고의 직구"라고 평가했다.
알렉스 라미레스와의 통산 맞대결 성적은 49타수 17안타로 타율 0.347%로 좋지 않았지만, 라미레스는 후지카와를 자신이 대결했던 마무리 투수 중 최고라고 언급했다.
3.3. 투구 관련 주요 기록
NPB에서 주전 구원 투수로 활약한 2005년부터 2012년까지 후지카와는 통산 탈삼진율 12.81%라는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2010년까지는 직구의 헛스윙율이 약 30%(리그 평균 약 8%)에 달했다. 그러나 2011년 평균 구속이 약 147 km/h까지 떨어지면서 헛스윙율도 20% 미만으로 하락했다. 토미 존 수술에서 복귀한 2014년에는 평균 구속이 약 145 km/h로 더 미미하게 감소했다.
이처럼 직구의 평균 구속은 해마다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지만, 그는 매년 투구 이닝을 상회하는 탈삼진 수를 기록했다. 2011년에는 변화구를 많이 사용하여 특히 포크볼의 헛스윙을 늘려 탈삼진율 12.59%라는 높은 수치를 유지했다. 2018년에는 40경기 이상 등판한 센트럴 리그 구원 투수 중 최고인 피안타율 0.159%를 기록하는 등 뛰어난 투구 기술을 가진 구원 투수로서 오랫동안 활약했다. 고치 파이팅 독스 입단부터 한신 복귀 직후까지 선발로 재전환했을 때는 슬라이더나 커브 등도 많이 사용했다.
한신 복귀 후인 2016년에는 통산 767.1이닝 만에 NPB/MLB 통산 1000탈삼진을 달성했다. 2017년에는 통산 771.2이닝 만에 NPB 통산 1000탈삼진을 달성했는데, 이는 NPB 재적 기간 동안 1000탈삼진을 달성한 투수 중 노모 히데오의 최단 기록(871이닝)을 크게 앞서는 기록이었다.
후지카와는 마무리 투수로서 삼진이나 플라이로 아웃을 잡는 것에 집착했는데, 이는 야수의 수비력이라는 외부 요소를 배제하고 싶었기 때문이며, 그 생각의 근저에는 FIP의 존재가 있었다.
4. 은퇴 후 경력
선수 생활 은퇴 후, 후지카와 규지는 야구계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4.1. 방송 활동 및 해설
2021년부터 NHK의 야구 해설가, 스포츠 호치의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며 야구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을 공유하고 있다. 또한 오사카 지역 민방 야구 중계에도 게스트 해설자로 출연했다.
4.2. 한신 타이거스 특별 보좌
2021년부터 한신 타이거스 구단 본부 소속의 'Special Assistant(SA, 특별 보좌)'로 취임했다. 그는 팀 운영, 선수, 스태프 지원 외에도 소년 야구 및 여자 야구 지원을 포함한 폭넓은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24년에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진행된 한신 입단 테스트에 동행하여 스카우트 활동을 하기도 했다.
4.3. 유튜버 활동
은퇴 직후인 2020년 12월 7일 유튜브 채널 '후지카와 규지의 진검승부'(藤川球児の真向勝負일본어)를 개설하며 유튜버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10월 14일 현재 구독자 수는 35.4K명, 총 조회수는 53.03M회를 기록했다. 그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팬들과 소통하고 야구에 대한 다양한 콘텐츠를 공유했다. 그러나 2024년 10월 14일, 한신 타이거스 감독 취임 발표와 동시에 유튜브를 비롯한 모든 SNS 계정의 업데이트 중단을 발표했다.
5. 감독 경력
선수 은퇴 후, 후지카와 규지는 야구계에서의 새로운 도전인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5.1. 한신 타이거스 감독 취임
2024년 10월 14일,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의 사임 후 후지카와 규지가 한신 타이거스의 제36대 1군 감독으로 공식 발표되었다. 그는 감독 취임 발표와 동시에 자신의 유튜브, X(구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모든 SNS 계정 업데이트 중단을 알렸다. 다음 날인 10월 15일 취임 기자회견이 열렸으며, 등번호는 한신에서 현역 시절에도 사용했던 22번을 받았다.
6. 개인적인 삶과 인물됨
후지카와 규지는 선수로서의 면모 외에도 강인한 정신력과 인간적인 가치관을 보여주었다.
6.1. 가족 배경과 회복력
그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으로 편모 가정에서 자랐으며, 야구를 하면서 어머니가 빚을 지게 되는 등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을 겪었다. 이러한 배경은 그에게 강한 정신력과 회복력을 길러주었다. 프로 입단 전 어렸을 때 천식을 앓았고, 프로 생활 중에도 어깨와 팔꿈치 부상(척골측부인대 파열, 토미 존 수술)을 겪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다시 마운드에 서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의 강인한 의지를 입증했다.
6.2. 개인적인 철학과 가치관
후지카와는 야구에 대한 깊은 헌신과 '화구 직구'에 대한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직구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으며, 타자를 압도하는 직구를 던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2005년 4월 21일 도쿄 돔에서 열린 요미우리전에서 한신이 크게 앞선 7회 말 2사 만루 상황에서, 통산 500홈런에 1개만을 남겨둔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타석에 들어섰다. 후지카와는 풀카운트에서 포크볼을 던져 기요하라를 헛스윙 삼진으로 잡았다. 경기 후 기요하라는 풀카운트 2사 만루 상황에서 포크볼을 던진 후지카와의 투구를 겁쟁이의 투구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후지카와는 이에 발분하여 "그 사건 덕분에 나는 직구에 집착하게 되었다. 항상 자신을 갈고닦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6월 25일 다시 기요하라와 대결했을 때는 직구로 삼진을 잡았고, 기요하라는 "완패. 내가 20년간 본 것 중 최고의 직구다"라고 후지카와를 극찬했다. 은퇴 후 2021년, 후지카와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기요하라와 대담하며 당시 기요하라의 발언이 "조직에 휩쓸려 있던 자신"을 돌아보고 "야구 선수로서 어떻게 존재해야 할지"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팬들과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특히 그의 등장곡인 린드버그의 'every little thing every precious thing'은 그의 아내와 결혼 전부터 두 사람의 추억이 담긴 곡이었다. 그는 관객과 팬들에게 자신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했고,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자 자신도 가사와 노래에 감동받은 이 곡을 등장곡으로 정했다. 그는 불펜에서 마운드로 나갈 때 노래가 시작되는 타이밍을 정해두고, 가사의 한 부분에서 순간적으로 기력을 끌어올렸다고 한다. 2007년 3월 14일, 요미우리 TV 방송의 'HERO들의 음색' 기획으로 린드버그의 보컬 와타세 마키와 고시엔에서 처음 만나 대담하기도 했다. 2016년 한신 복귀 후에도 팬들의 요청에 따라 이 곡을 계속 사용했으며, 2020년 은퇴 세리머니에는 와타세 마키가 직접 참석하여 꽃다발을 증정하고 기념 영상의 내레이션을 맡기도 했다.
6.3. 주요 개인적 사건
1995년 9월 10일, 중학교 3학년이던 후지카와는 고치시 가가미가와 강에 추락한 남성을 동급생 3명과 함께 구조하여 고치 경찰서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이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로 남아있다.
7. 유산 및 평가
후지카와 규지는 일본 야구계와 팬들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으며, 그의 경력 전반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7.1. 일본 야구계에 미친 영향
후지카와의 독특한 투구 스타일, 특히 '화구 직구'는 일본 야구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직구는 타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이는 후대 투수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구원 투수로서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으며, JFK 트리오의 일원으로서 팀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꾸준한 활약과 부상 극복 과정은 많은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그는 NPB에서 통산 1000탈삼진을 최단 이닝으로 달성하고, 사상 최초로 150세이브와 150홀드를 동시에 달성하는 등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이는 그의 투수로서의 능력이 단순히 구속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뛰어난 투구 기술과 전략적인 사고를 겸비했음을 보여준다. 은퇴 후에도 해설가, 특별 보좌, 그리고 감독으로서 야구 발전에 기여하고 있으며, 특히 유소년 야구와 여자 야구 지원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7.2. 수상 및 영예
후지카와는 선수 경력 동안 수많은 공식적인 인정과 영예를 얻었다. 그는 최우수 중간 계투 2회, 최다 세이브 투수 2회 등 주요 타이틀을 획득했다. 또한 월간 MVP, 최우수 배터리상, 골든 스피릿상 등 다양한 상을 수상했다.
2022년 12월 9일, 후지카와는 명구회에 특례 입회했다. 명구회 입회 기준은 투수의 경우 통산 200승 또는 250세이브인데, 후지카와는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뛰어난 업적과 일본 야구계에 미친 지대한 영향을 인정받아 이사회 추천과 회원 4분의 3 이상의 찬성을 통해 특별 자격으로 명구회에 이름을 올렸다. 이는 그의 경력이 단순한 기록을 넘어선 상징적인 가치를 지녔음을 보여준다.
8. 상세 정보
8.1. 연도별 투수 성적
연도 | 소속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무4구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투구회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4구 | 몸맞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방어율 | WHIP |
---|---|---|---|---|---|---|---|---|---|---|---|---|---|---|---|---|---|---|---|---|---|---|---|---|---|
2000 | 한신 타이거스 | 19 | 0 | 0 | 0 | 0 | 0 | 0 | 0 | -- | ---- | 113 | 22.2 | 25 | 1 | 18 | 3 | 4 | 25 | 4 | 0 | 15 | 12 | 4.76 | 1.90 |
2002 | 12 | 12 | 0 | 0 | 0 | 1 | 5 | 0 | -- | .167 | 285 | 68.0 | 56 | 6 | 30 | 0 | 2 | 64 | 4 | 0 | 33 | 28 | 3.71 | 1.26 | |
2003 | 17 | 2 | 0 | 0 | 0 | 1 | 1 | 0 | -- | .500 | 126 | 29.1 | 28 | 4 | 12 | 1 | 1 | 19 | 2 | 0 | 12 | 11 | 3.38 | 1.36 | |
2004 | 26 | 0 | 0 | 0 | 0 | 2 | 0 | 0 | -- | 1.000 | 129 | 31.0 | 26 | 3 | 11 | 0 | 2 | 35 | 0 | 0 | 10 | 9 | 2.61 | 1.19 | |
2005 | 80 | 0 | 0 | 0 | 0 | 7 | 1 | 1 | 46 | .875 | 349 | 92.1 | 57 | 5 | 20 | 1 | 1 | 139 | 5 | 0 | 20 | 14 | 1.36 | 0.83 | |
2006 | 63 | 0 | 0 | 0 | 0 | 5 | 0 | 17 | 30 | 1.000 | 306 | 79.1 | 46 | 3 | 22 | 2 | 0 | 122 | 5 | 0 | 6 | 6 | 0.68 | 0.86 | |
2007 | 71 | 0 | 0 | 0 | 0 | 5 | 5 | 46 | 6 | .500 | 313 | 83.0 | 50 | 2 | 18 | 4 | 1 | 115 | 2 | 0 | 15 | 15 | 1.63 | 0.82 | |
2008 | 63 | 0 | 0 | 0 | 0 | 8 | 1 | 38 | 5 | .889 | 249 | 67.2 | 34 | 2 | 13 | 3 | 3 | 90 | 3 | 0 | 6 | 5 | 0.67 | 0.69 | |
2009 | 49 | 0 | 0 | 0 | 0 | 5 | 3 | 25 | 3 | .625 | 217 | 57.2 | 32 | 4 | 15 | 2 | 1 | 86 | 0 | 0 | 9 | 8 | 1.25 | 0.82 | |
2010 | 58 | 0 | 0 | 0 | 0 | 3 | 4 | 28 | 5 | .429 | 257 | 62.2 | 47 | 7 | 20 | 2 | 5 | 81 | 1 | 0 | 14 | 14 | 2.01 | 1.08 | |
2011 | 56 | 0 | 0 | 0 | 0 | 3 | 3 | 41 | 5 | .500 | 193 | 51.0 | 25 | 2 | 13 | 1 | 1 | 80 | 3 | 0 | 9 | 7 | 1.24 | 0.75 | |
2012 | 48 | 0 | 0 | 0 | 0 | 2 | 2 | 24 | 2 | .500 | 189 | 47.2 | 34 | 1 | 15 | 1 | 2 | 58 | 2 | 0 | 7 | 7 | 1.32 | 1.03 | |
2013 | 시카고 컵스 | 12 | 0 | 0 | 0 | 0 | 1 | 1 | 2 | 1 | .500 | 50 | 12.0 | 11 | 1 | 2 | 0 | 2 | 14 | 2 | 0 | 7 | 7 | 5.25 | 1.08 |
2014 | 15 | 0 | 0 | 0 | 0 | 0 | 0 | 0 | 0 | ---- | 64 | 13.0 | 18 | 2 | 6 | 2 | 2 | 17 | 2 | 0 | 8 | 7 | 4.85 | 1.85 | |
2015 | 텍사스 레인저스 | 2 | 0 | 0 | 0 | 0 | 0 | 0 | 0 | 0 | ---- | 8 | 1.2 | 2 | 1 | 0 | 0 | 1 | 1 | 0 | 0 | 3 | 3 | 16.20 | 1.20 |
2016 | 한신 | 43 | 5 | 0 | 0 | 0 | 5 | 6 | 3 | 10 | .455 | 275 | 62.2 | 58 | 7 | 30 | 2 | 3 | 70 | 4 | 0 | 34 | 32 | 4.60 | 1.40 |
2017 | 52 | 0 | 0 | 0 | 0 | 3 | 0 | 0 | 6 | 1.000 | 232 | 56.2 | 41 | 3 | 24 | 1 | 5 | 71 | 2 | 0 | 15 | 14 | 2.22 | 1.15 | |
2018 | 53 | 0 | 0 | 0 | 0 | 5 | 3 | 2 | 21 | .625 | 229 | 54.1 | 29 | 3 | 37 | 4 | 1 | 67 | 2 | 0 | 20 | 14 | 2.32 | 1.22 | |
2019 | 56 | 0 | 0 | 0 | 0 | 4 | 1 | 16 | 23 | .800 | 226 | 56.0 | 29 | 3 | 32 | 2 | 0 | 83 | 4 | 0 | 11 | 11 | 1.77 | 1.09 | |
2020 | 16 | 0 | 0 | 0 | 0 | 1 | 3 | 2 | 1 | .250 | 65 | 13.1 | 16 | 3 | 9 | 0 | 1 | 15 | 1 | 0 | 11 | 9 | 6.08 | 1.88 | |
NPB: 17년 | 782 | 19 | 0 | 0 | 0 | 60 | 38 | 243 | 163 | .612 | 3753 | 935.1 | 633 | 59 | 339 | 30 | 32 | 1220 | 44 | 0 | 247 | 216 | 2.08 | 1.04 | |
MLB: 3년 | 29 | 0 | 0 | 0 | 0 | 1 | 1 | 2 | 1 | .500 | 122 | 26.2 | 31 | 4 | 8 | 2 | 5 | 32 | 4 | 0 | 18 | 17 | 5.74 | 1.46 |
8.2. WBC에서의 투수 성적
연도 | 대표 | 등판 | 선발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타자 | 투구회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4구 | 몸맞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방어율 |
---|---|---|---|---|---|---|---|---|---|---|---|---|---|---|---|---|---|---|---|
2006 | 일본 | 4 | 0 | 0 | 1 | 0 | 13 | 2.2 | 4 | 0 | 0 | 0 | 1 | 3 | 0 | 0 | 1 | 0 | 0.00 |
2009 | 4 | 0 | 0 | 0 | 0 | 15 | 4.0 | 3 | 0 | 1 | 0 | 0 | 3 | 0 | 0 | 0 | 0 | 0.00 |
8.3. 독립 리그에서의 투수 성적
연도 | 구단 | 방어율 | 등판 | 승리 | 패전 | 세이브 | 완투 | 완봉 | 무4구 | 투구회 | 타자 | 피안타 | 피홈런 | 탈삼진 | 볼넷 | 몸맞 | 실점 | 자책점 |
---|---|---|---|---|---|---|---|---|---|---|---|---|---|---|---|---|---|---|
2015 | 고치 파이팅 독스 | 0.82 | 6 | 2 | 1 | 0 | 2 | 1 | 0 | 33.0 | 124 | 21 | 1 | 47 | 3 | 3 | 5 | 3 |
통산: 1년 | 0.82 | 6 | 2 | 1 | 0 | 2 | 1 | 0 | 33.0 | 124 | 21 | 1 | 47 | 3 | 3 | 5 | 3 |
8.4. 등번호
- 30 (1999년 ~ 2001년)
- 92 (2002년 ~ 2004년)
- 22 (2005년 ~ 2012년, 2017년 ~ 2020년, 2025년 ~ )
- 24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 28 (2008년 베이징 올림픽)
- 22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 11 (2013년 ~ 2014년, 2015년 6월 ~ 2015년 말)
- 21 (2015년 ~ 2015년 5월)
- 18 (2016년)
8.5. 등장곡
- 'every little thing every precious thing' (every little thing every precious thing영어) - 린드버그
- 'Don't leave me' (Don't leave me영어) - 사토다 마이 with 고다 가족
8.6. 대표 경력
-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 일본 대표팀
-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
9. 관련 항목
- 고치현 출신 인물 목록
- 마쓰자카 세대
- 형제 스포츠 선수 목록
- 한신 타이거스의 선수 목록
- 일본 출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 목록
- 고치 파이팅 독스의 선수 목록
- 일본의 프로 야구 감독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