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왕젠민은 1980년 3월 31일 대만 타이난시 관먀오구에서 태어났다. 2006년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이전에 삼촌으로 알고 있던 사람의 친자식임을 밝혔다. 이로 인해 대만 언론에서 큰 소동이 일자 그는 잠시 대만 언론과의 인터뷰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는 기본적인 영어를 배웠으며, 뉴저지주 포트리와 에지워터에 거주했다. 왕젠민은 우자링(Chia-Ling Wu)과 결혼했으며, 슬하에 2009년생 아들 JJ와 2013년생 아들 웰링턴(Wellington)을 두었다. 2012년 4월 23일, 그는 2009년 어깨 부상에서 회복 중이던 시기에 혼외정사를 가졌음을 인정했다. 2011년 여름, 왕젠민의 친외할아버지인 황(Huang) 씨(82세)가 대만 타이난의 한 공원에서 전선으로 목을 매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왕젠민은 대만에 돌아올 때마다 이 외할아버지를 자주 방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왕젠민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인 《레이트 라이프: 더 왕젠민 스토리》(Late Life: The Chien-Ming Wang Story)는 2018년 10월 극장에서 개봉했다.
2. 선수 경력
왕젠민은 프로 야구 선수로서 뉴욕 양키스, 워싱턴 내셔널스, 토론토 블루제이스, 캔자스시티 로열스에서 활약하며 메이저 리그 경력을 쌓았다. 또한 여러 마이너 리그 및 독립 리그 팀에서도 뛰었다.
2.1. 마이너 리그 경력
왕젠민은 뉴욕 양키스의 마이너 리그 시스템을 거쳐 성장했다. 그는 싱글A 팀인 스태튼아일랜드 양키스에서 활약했으며, 2006년 스태튼아일랜드 양키스는 그의 등번호 41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왕젠민은 스태튼아일랜드에서 1.7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구단 역사상 두 번째로 낮은 평균자책점이었다. 2003년에는 올스타 퓨처스 게임에 월드 팀 소속으로 출전하기도 했다. 2005년에는 양키스의 트리플A 산하 팀인 콜럼버스 클리퍼스에서 메이저 리그로 승격되었다. 2013년에는 다시 양키스의 트리플A 산하 팀인 스크랜턴/윌크스-배러 레일라이더스에서 뛰었다.
2.2. 메이저 리그 경력
왕젠민은 2005년 뉴욕 양키스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한 이후 여러 팀에서 활약하며 부상과 재활을 반복하는 힘든 시기를 겪었다.
2.2.1. 뉴욕 양키스 (2005-2009)

왕젠민은 2005년 4월 30일 토론토 블루제이스를 상대로 메이저 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이 경기에서 그는 7이닝 동안 단 2실점만을 허용하는 인상적인 투구를 선보였으나, 팀이 4대3으로 승리했음에도 승패를 기록하지 못했다. 시즌 중 부상으로 잠시 이탈했지만, 총 18경기에 등판하여 8승 5패, 4.02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2005년 9월 19일에는 한 경기에서 9개의 보살을 기록하며 투수 단일 경기 보살 최다 타이 기록을 세웠다. 2005년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는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를 상대로 6과 2/3이닝 동안 4실점(1자책점)을 기록했지만, 팀은 패배하며 시리즈에서 탈락했다.
2006년, 왕젠민은 양키스의 에이스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그는 19승을 기록하며 요한 산타나와 함께 메이저 리그 전체 다승 공동 1위에 올랐고, 3.63의 평균자책점과 218이닝을 소화하며 34경기(33선발)에 등판했다. 6월 3일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상대로 유일한 비선발 등판에서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 두 차례의 완투 경기를 기록했는데, 6월 18일 워싱턴 내셔널스를 상대로는 라이언 짐머맨에게 끝내기 투런 홈런을 허용하며 2대3으로 패배했다. 첫 완투승은 2006년 7월 28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를 상대로 2안타 6대0 완봉승을 거둔 경기였다. 다음 등판에서는 토론토 블루제이스를 상대로 8이닝 무실점을 기록하며 16개의 땅볼 아웃을 잡아냈다. 시즌 후반기에는 특히 강한 모습을 보이며 14번의 선발 등판 중 10승을 거두고 92이닝 동안 3.13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2006년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1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팀의 8대4 승리를 이끌며 승리 투수가 되었다.
2006년 전반적으로 왕젠민은 동점 상황에서 타자들을 .211의 타율로, 경기 후반 접전 상황에서는 .205의 타율로 묶었다. 특히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는 그를 상대로 단 .159의 타율만을 기록했으며, 왕젠민이 등판한 양키스와의 4경기 중 3경기에서 패했다. 그는 메이저 리그에서 가장 낮은 탈삼진률(9이닝당 3.14개의 탈삼진, 총 76탈삼진)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인 투구를 펼쳤는데, 이는 9이닝당 가장 적은 홈런(0.5개, 총 12개)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리그에서 가장 높은 땅볼 유도율(62.8%)을 기록했으며, 플라이볼 아웃 하나당 2.84개의 땅볼 아웃을 잡아냈다. 시즌 종료 후, 왕젠민은 사이 영 상 투표에서 요한 산타나에 이어 2위를 차지했으며, 15개의 2위표와 51점을 얻었다. 그는 또한 아메리칸 리그 최우수선수 투표에서 9위(2점)를 기록했다. MLB.com의 '올해의 야구상'에서는 팬 투표의 47% 이상을 얻어 2006년 최고의 선발 투수로 선정되었다.
2007년 시즌은 햄스트링 부상으로 부상자 명단에서 시작했으며, 4월 24일 탬파베이와의 경기를 통해 복귀했다. 2007년 5월 5일, 시애틀 매리너스를 상대로 7과 1/3이닝 동안 퍼펙트 게임을 이어갔으나, 벤 브루사드에게 홈런을 허용하며 대기록 달성에 5아웃을 남기고 무산되었다. 6월 17일 뉴욕 메츠와의 경기에서는 8과 2/3이닝 동안 113개의 공을 던져 개인 최다인 10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6안타 2실점으로 호투했다. 8월 30일에는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 7회까지 노히트를 이어갔으나, 마이크 로웰에게 안타를 허용했다. 이 경기에서 양키스는 조바 챔벌레인과 에드워 라미레스의 뒤를 이어 5대0으로 승리했다. 2007년 왕젠민은 아메리칸 리그 다승 2위(19승), 2년 연속 승률 3위(.731), 폭투 9위(9개), 몸에 맞는 볼 10위(8개)를 기록했다. 수비율은 1.000으로 완벽했다. 또한 9이닝당 홈런 허용률이 아메리칸 리그에서 가장 낮았고(0.41개, 199와 1/3이닝 동안 단 9개 허용), 땅볼 유도율 3위(58.5%), 땅볼/플라이볼 비율 3위(2.51)를 기록했으며, 9이닝당 탈삼진은 5번째로 낮았다(4.70개의 탈삼진, 총 104탈삼진). 정규 시즌의 뛰어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왕젠민은 2007년 포스트시즌에서 부진했다. 2007년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상대로 두 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모두 패전 투수가 되었고, 총 5와 2/3이닝 동안 12자책점을 허용하며 19.06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양키스는 이 시리즈에서 4경기 만에 탈락했다.
2008년 시즌 초, 왕젠민은 마이크 무시나, 앤디 페티트와 함께 양키스 선발 로테이션의 선두이자 에이스로 활약했다.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마지막 개막전에서 7이닝 2실점 호투로 시즌 첫 승을 기록했다. 2008년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첫 등판에서는 1실점 2안타 완투승을 거두었다. 4월 22일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85번째 선발 등판 만에 50승을 달성했다. 이는 드와이트 구든 이후 가장 빠르게 50승을 달성한 메이저 리그 선발 투수 기록이며, 양키스 선수로는 론 기드리 이후 가장 빠른 기록이었다. 왕젠민은 4월을 5승 무패로 마치며 아메리칸 리그 다승 공동 1위에 올랐다. 5월 2일 시애틀 매리너스를 상대로 6이닝 1자책점 호투로 시즌 6승을 거두며 아메리칸 리그에서 가장 먼저 6승 고지를 밟았다. 5월 8일 클리프 리가 이끄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게 3대0으로 패하며 시즌 첫 패를 기록했다. 6월 10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상대로 3대1 승리를 거두며 개인 통산 최장 기간 승리 가뭄을 끝냈다. 2008년까지 왕젠민은 지난 3년간 모든 선발 투수 중 세 번째로 높은 승률(.754, 46승 15패)을 기록했다. 6월 15일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인터리그 경기 중 주루 플레이 도중 오른발 부상을 입고 교체되었다. 아메리칸 리그에서는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진단 결과 오른발 리스프랑 인대 파열과 장비골근 부분 파열로 밝혀졌다. 수술은 필요 없었지만 목발을 짚고 보호 부츠를 착용해야 했다. 7월 29일 깁스를 제거했지만, 광범위한 재활 과정으로 인해 시즌 잔여 경기 등판이 불가능했다. 양키스의 공동 구단주 행크 스타인브레너는 내셔널 리그에서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야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하며 리그가 "현대 시대에 합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8년 12월 22일, 왕젠민과 뉴욕 양키스는 연봉 조정을 피하고 500.00 만 USD의 1년 계약에 합의했다. 그는 2008년 시즌에 연봉 조정에서 패한 후 400.00 만 USD를 받았으며, 460.00 만 USD를 요구했었다.
2009년 4월 3일, 왕젠민은 신 양키 스타디움 개장 시범 경기에서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새 구장의 첫 선발 투수이자 첫 승리 투수가 되었다. 그러나 정규 시즌은 매우 부진한 시작을 보였다. 시즌 첫 등판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상대로 3과 2/3이닝 동안 7자책점 9안타를 허용했다. 이어서 탬파베이 레이스와의 경기에서는 단 1이닝 동안 8자책점을 내주었다. 세 번째 등판인 4월 18일 뉴욕에서 열린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경기에서는 1과 1/3이닝 동안 8자책점을 추가로 기록했으며, 클리블랜드는 이 경기에서 22대4로 승리했다. 첫 세 등판 후 왕젠민은 0승 3패, 무려 34.5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2008년 발 부상으로 인해 투구 동작에 보상 작용이 발생하여 2009년 부진으로 이어졌다는 추측이 제기되었다. 4월 18일 경기 후 조 지라디 감독은 "시간이 있다. 목요일에 하루 쉬는 날이 있으니, 왕젠민과 팀을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4월 22일, 브라이언 캐시먼 단장은 서던 코네티컷 주립 대학교에서 열린 질의응답에서 왕젠민의 릴리스 포인트가 전년도 같은 시기보다 5인치 높았음을 확인했다. 로테이션에서 제외되어 탬파로 내려가 투구 메커니즘 문제를 해결하려 한 후, 왕젠민은 양쪽 고관절 근육 약화 진단을 받고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2009년 5월 22일 부상자 명단에서 복귀했으며, 복귀 첫날 불펜 투수로 등판했다. 두 차례 더 구원 등판한 후 다시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했지만, 복귀 후 첫 두 선발 등판에서도 다시 부진했다. 6월 28일, 뉴욕 메츠를 상대로 5와 1/3이닝 동안 2실점을 허용하며 시즌 첫 승이자 2008년 6월 15일 이후 첫 승을 기록했다. 왕젠민은 2009년 7월 15일 어깨 통증으로 부상자 명단에 올랐고, 2009년 7월 30일 어깨 수술을 받으며 시즌 잔여 경기에서 제외되었다. 양키스가 2009년 월드 시리즈에서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꺾고 우승한 후, 왕젠민은 영웅의 협곡을 따라 진행된 우승 퍼레이드에 참여했지만, 건강했다면 "더 즐거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9년 12월 12일, 양키스는 그와 재계약하지 않기로 결정하며 그를 자유 계약 선수로 만들었다.
2.2.2. 워싱턴 내셔널스 (2010-2012)

2010년 2월 19일, 워싱턴 내셔널스는 왕젠민과 200.00 만 USD (최대 300.00 만 USD의 인센티브 포함) 계약을 맺었다고 발표했다. 6월에는 7월 말 또는 8월 초에 메이저 리그에 복귀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왕젠민의 재활은 일관적이지 못했고 메이저 리그 복귀 시점은 불투명했다. 9월에는 내셔널스 구단이 왕젠민이 시즌 동안 메이저 리그에 등판하지 않을 것이며, 대신 가을 교육 리그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2010년 시즌 후 왕젠민은 논텐더 방출되었다. 2010년 12월 16일, 왕젠민은 내셔널스와 1년 100.00 만 USD 계약 (최대 400.00 만 USD의 성과 인센티브 포함)에 재계약했다. 부상 재활을 계속한 후, 6월 27일 내셔널스의 싱글A 산하 팀인 헤이거스타운 선즈에서 공식 재활 등판을 시작했다. 이 경기에서 그는 3이닝 동안 2자책점을 허용하고 3탈삼진 무볼넷을 기록했다. 구속은 최고 145 km/h (90 mph)를 기록했지만, 대부분 138 km/h (86 mph)에서 142 km/h (88 mph) 사이였다. 7월 2일 하이-A 팀인 포토맥 내셔널스와의 두 번째 등판에서는 4이닝 무실점을 기록하며 2볼넷 2탈삼진을 기록했다. 38개의 투구 중 63%가 스트라이크였으며, 마지막 이닝에는 구속이 146 km/h (91 mph)에 달했다.
7월 24일 트리플A 팀인 시러큐스 치프스에서 등판한 후, 왕젠민은 7월 29일 내셔널스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11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4승 3패, 4.04의 평균자책점으로 시즌을 마쳤다. 또한 9월 24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선발 투수 브랜든 비치를 상대로 시즌 마지막 등판에서 메이저 리그 첫 안타와 첫 타점을 기록했다.
2011년 10월 30일, 왕젠민은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닷새 후인 11월 4일, 왕젠민은 내셔널스와 1년 400.00 만 USD 계약에 재계약했다. 2012년 3월 15일, 왕젠민은 왼쪽 햄스트링 부상으로 다시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5월 25일, 부상자 명단에서 복귀한 후 처음으로 메이저 리그에 등판하여 3이닝을 던지고 시즌 첫 승을 기록했다. 이후 로스 데트윌러를 대신하여 팀의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했다. 그러나 단 4번의 선발 등판에서 1승 3패, 6.1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으며 11개의 탈삼진을 잡았다. 9월 23일에는 밀워키 브루어스의 선발 투수 요바니 가야르도를 상대로 개인 통산 첫 2루타를 기록했다.
2.2.3. 토론토 블루제이스 (2013)

2013년 3월 22일, 왕젠민은 뉴욕 양키스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고 스프링 트레이닝에 초청되었다. 그의 에이전트와 대만의 EETV에 따르면, 그의 마이너 리그 계약은 월 3.50 만 USD의 가치였으나, 연간 최대 250.00 만 USD까지 받을 수 있었고, 추가로 220.00 만 USD의 보너스도 있었다. 그러나 4월 말까지 메이저 리그 계약을 확보하지 못하면 자유 계약 선수로 돌아갈 수 있는 옵션이 있었다. 왕젠민은 2013년 6월 7일 계약 옵트아웃을 선언했다.
왕젠민은 2013년 6월 9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1년 50.00 만 USD 계약을 맺었다. 그는 6월 11일 블루제이스 로스터에 합류했으며,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상대로 선발 등판하여 첫 투구를 선보였다.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알렉스 안토풀로스 단장은 왕젠민에게 한 번의 선발 등판을 보장했으며, 첫 등판 결과에 따라 추가 등판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왕젠민은 6월 16일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경기에서 7이닝 무실점 투구로 블루제이스 소속으로 첫 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는 블루제이스가 2013년 시즌 첫 4연전을 스윕하는 데 기여했으며, 알링턴 레인저스 볼파크에서 레인저스를 상대로 4연전을 스윕한 블루제이스 구단 역사상 첫 기록이었다.
왕젠민이 로스터에 합류한 6월 11일부터 6월 23일까지 블루제이스는 11연승을 달렸다. 왕젠민은 이 연승 기간 동안 세 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각 경기에서 최소 6이닝을 소화했고, 2.1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후 두 경기에서는 2이닝을 채우지 못하고 강판당하며 부진했다. 6월 27일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 1과 2/3이닝 동안 6안타 7자책점을 허용했다. 7월 2일에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상대로도 1과 2/3이닝 동안 8안타 6자책점을 내주었다. 타이거스전 이후 존 기븐스 블루제이스 감독은 왕젠민이 지명 할당되었다고 발표했다. 왕젠민은 트리플A 팀인 버펄로 바이슨스로의 이적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고 보도되었고, 7월 5일 버펄로로 웨이버 공시되었다. 8월 24일 다시 블루제이스 로스터에 합류했지만, 8월 26일 다시 지명 할당되었다. 웨이버를 통과한 후 다시 버펄로 바이슨스로 웨이버 공시되었다. 그는 10월 1일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2.2.4. 캔자스시티 로열스 (2016)

2016년 1월 7일, 왕젠민은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었다. 강한 스프링 트레이닝을 보낸 후, 그는 2016년 시즌 로열스의 개막전 로스터에 구원 투수로 합류했다. 2016년 4월 9일, 왕젠민은 미네소타 트윈스를 상대로 7대0 승리 경기에서 9회 무실점을 기록했다. 이는 2013년 8월 25일 이후 그의 첫 메이저 리그 경기였다. 왕젠민은 그해 로열스 소속으로 38경기에 등판하여 53과 1/3이닝을 소화했고, 6승 무패, 4.22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8월 31일 오른팔 이두박근 건염으로 부상자 명단에 올랐고, 9월 17일 지명 할당되었다. 그는 9월 22일 방출되었다.
2.2.5. 기타 마이너 리그 및 독립 리그 경력
2013년 12월 19일, 왕젠민은 신시내티 레즈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고 스프링 트레이닝에 초청되었다. 그는 2014년 시즌을 인터내셔널 리그의 루이빌 배츠에서 시작했지만, 7월 13일 계약 옵트아웃을 선언했다. 왕젠민은 7월 17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고 인터내셔널 리그의 샬럿 나이츠에서 뛰었다.
2014-15년 오프시즌 동안 왕젠민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었다. 브레이브스는 왕젠민을 인터내셔널 리그의 귀넷 브레이브스로 배정했다. 10번의 선발 등판과 1번의 구원 등판에서 왕젠민은 2승 6패, 6.1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으며, 6월까지 트리플A에서 가장 많은 안타를 허용했다. 그는 6월 19일 방출되었다.
왕젠민은 6월 24일 독립 야구 리그인 애틀랜틱 리그 오브 프로페셔널 베이스볼의 서던 메릴랜드 블루 크랩스와 계약했다. 그는 블루 크랩스에서 세 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모두 승리했고, 2.4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2015년 7월 12일, 왕젠민은 시애틀 매리너스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었다. 매리너스는 그를 트리플A 퍼시픽 코스트 리그의 타코마 레이니어스로 배정했다.
2.3. 국제 대회 경력
왕젠민은 대만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여러 주요 국제 대회에서 활약했다.
2.3.1. 대만 국가대표팀

왕젠민은 2002년 아시안 게임에서 중화 타이베이 야구 국가대표팀의 투수로 활약하며 은메달을 획득했다. 2004년에는 팀의 에이스로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대만 야구 대표팀이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 호주를 상대로 3안타 무볼넷으로 호투하며 승리 투수가 되었고, 한때 9명의 타자를 연속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일본을 상대로 첫 6이닝 동안 5안타만을 허용했다.
메이저 리그에 진출한 후 왕젠민은 대만에서 우상화되었으며, 그의 모든 경기는 전국에 생중계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공공 대형 스크린을 통해 경기를 시청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그는 2007년 타임지 선정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이름을 올렸다.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왕젠민은 대만 대표팀의 개막전인 호주전에서 선발 등판하여 6이닝 무실점 호투로 승리를 거두었다. 2라운드에서는 일본을 상대로 6이닝 동안 인상적인 무실점 투구를 펼쳤지만, 일본이 10회에 역전승을 거두면서 승패를 기록하지 못했다.
3. 코치 경력
왕젠민은 2018년 6월 대만의 푸본 가디언즈에 객원 코치로 합류했다. 그는 2019년 시즌까지 팀에 머물렀다. 2020년에는 CTBC 브라더스의 투수 코치가 되었으며, 특히 브라더스 퓨처스 팀의 투수 유망주 육성에 집중했다. 2021년 오프시즌 동안 브라더스는 왕젠민이 새로운 계약을 맺고 3년간 코치로 팀에 남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2023년 5월 10일, 왕젠민은 퓨처스 팀 투수 코치에서 1군 팀 투수 코치로 보직을 변경했다.
4. 투구 스타일 및 스카우팅 리포트
왕젠민은 전성기 시절 강속구 투수의 구속을 가지면서도 기교파 투수의 면모를 보였다. 이 시기에 그는 주로 강력한 싱커를 던졌으며, 가끔 포심 패스트볼, 슬라이더, 체인지업, 스플리터를 섞어 던졌다. 그의 싱커는 발 부상 전 그를 에이스 반열에 올려놓은 주무기로, 매우 인상적인 횡 움직임을 보였으며 평균 이상의 구속인 146 km/h (91 mph)에서 151 km/h (94 mph) 사이에서 형성되었다. 첫 어깨 부상 전에는 커브볼도 던졌으나, 싱커를 선택하도록 권유받았다. 2016년, 긴 재활 과정을 거친 후 왕젠민의 싱커 구속은 143 km/h (89 mph)에서 150 km/h (93 mph) 범위로 돌아왔으며, 최고 구속은 153 km/h (95 mph)에 달했다.
그의 탈삼진 유도 구질은 평균적인 슬라이더로, 손에서 떠날 때 직구와 매우 유사하여 타자들이 타이밍을 뺏기게 만든다. 왕젠민은 또한 스플리터를 던지기도 하지만, 탈삼진이나 병살타가 필요할 때만 드물게 사용한다. 왕젠민의 투구 스타일은 효율성, 스트라이크 존 제구력, 적은 볼넷과 홈런 허용, 그리고 적은 탈삼진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는 빠르게 투구하고 땅볼을 유도하는 싱커를 사용하여 많은 병살타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효율성 덕분에 왕젠민은 경기 후반까지도 적은 투구수를 유지할 수 있었다.
대만과 마이너 리그에서 뛰던 시절, 왕젠민은 더 전통적인 구종 조합을 던졌다. 여기에는 포심 패스트볼, 체인지업, 그리고 훨씬 더 많은 스플리터가 포함되었다. 현재 왕젠민의 시그니처 구종이 된 싱커는 마이너 리그 시절 트리플A 투수 코치였던 닐 앨런과 트리플A 포수였던 살 파사노의 조언을 받아 개발되었다.
2008년 시즌 전까지 왕젠민은 투구의 약 90%를 싱킹 패스트볼에 의존했다. 그러나 2007년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를 포함한 몇몇 좋지 않은 등판 이후, 왕젠민은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자신의 레퍼토리에 완전히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2008년 첫 세 등판에서 왕젠민은 슬라이더를 약 20%, 체인지업을 약 8% 정도 사용했다.
5. 개인사
2006년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왕젠민은 자신이 이전에 삼촌으로 알고 있던 사람의 친자식임을 밝혔다. 이로 인해 대만 언론에서 큰 소동이 일자 그는 잠시 대만 언론과의 인터뷰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는 기본적인 영어를 배웠으며, 뉴저지주 포트리와 에지워터에 거주했다. 왕젠민은 우자링(Chia-Ling Wu)과 결혼했으며, 슬하에 2009년생 아들 JJ와 2013년생 아들 웰링턴(Wellington)을 두었다. 2012년 4월 23일, 그는 2009년 어깨 부상에서 회복 중이던 시기에 혼외정사를 가졌음을 인정했다. 2011년 여름, 왕젠민의 친외할아버지인 황(Huang) 씨(82세)가 대만 타이난의 한 공원에서 전선으로 목을 매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왕젠민은 대만에 돌아올 때마다 이 외할아버지를 자주 방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왕젠민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인 《레이트 라이프: 더 왕젠민 스토리》(Late Life: The Chien-Ming Wang Story)는 2018년 10월 극장에서 개봉했다.
6. 통산 기록
연도 | 소속 | 나이 | 승리 | 패전 | 승률 | 평자책 | 출장 | 선발 | 완투 | 완봉 | 세이브 | 홀드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4 | 탈삼진 | 몸맞 | 보크 | 폭투 | 실점 | 자책 | 타자수 | WHIP |
---|---|---|---|---|---|---|---|---|---|---|---|---|---|---|---|---|---|---|---|---|---|---|---|---|---|
2005 | NYY | 25 | 8 | 5 | .615 | 4.02 | 18 | 17 | 0 | 0 | 0 | 0 | 116.1 | 113 | 9 | 32 | 3 | 47 | 6 | 0 | 3 | 58 | 52 | 486 | 1.25 |
2006 | 26 | 19 | 6 | .760 | 3.63 | 34 | 33 | 2 | 1 | 1 | 0 | 218.0 | 233 | 12 | 52 | 4 | 76 | 2 | 1 | 6 | 92 | 88 | 900 | 1.31 | |
2007 | 27 | 19 | 7 | .731 | 3.70 | 30 | 30 | 1 | 0 | 0 | 0 | 199.1 | 199 | 9 | 59 | 1 | 104 | 8 | 1 | 9 | 84 | 82 | 823 | 1.29 | |
2008 | 28 | 8 | 2 | .800 | 4.07 | 15 | 15 | 1 | 0 | 0 | 0 | 95.0 | 90 | 4 | 35 | 1 | 54 | 3 | 0 | 0 | 44 | 43 | 402 | 1.32 | |
2009 | 29 | 1 | 6 | .143 | 9.64 | 12 | 9 | 0 | 0 | 0 | 0 | 42.0 | 66 | 7 | 19 | 1 | 29 | 2 | 0 | 3 | 46 | 45 | 206 | 2.02 | |
2011 | WSN | 31 | 4 | 3 | .571 | 4.04 | 11 | 11 | 0 | 0 | 0 | 0 | 62.1 | 67 | 8 | 13 | 0 | 25 | 1 | 0 | 2 | 35 | 28 | 264 | 1.28 |
2012 | 32 | 2 | 3 | .400 | 6.68 | 10 | 5 | 0 | 0 | 0 | 0 | 32.1 | 50 | 5 | 15 | 0 | 15 | 3 | 0 | 5 | 24 | 24 | 158 | 2.01 | |
2013 | TOR | 33 | 1 | 2 | .333 | 7.67 | 6 | 6 | 0 | 0 | 0 | 0 | 27.0 | 40 | 5 | 9 | 0 | 14 | 0 | 0 | 2 | 24 | 23 | 123 | 1.82 |
2016 | KC | 36 | 6 | 0 | 1.000 | 4.22 | 38 | 0 | 0 | 0 | 0 | 0 | 53.1 | 60 | 6 | 18 | 0 | 30 | 2 | 0 | 1 | 27 | 25 | 231 | 1.46 |
MLB 통산 : 9년 | 68 | 34 | .667 | 4.36 | 174 | 126 | 4 | 1 | 1 | 0 | 845.2 | 918 | 65 | 252 | 10 | 394 | 27 | 2 | 31 | 434 | 410 | 3593 | 1.38 |
- 시즌 기록 중 굵은 글씨는 해당 시즌 최고 기록
7. 수상 경력
- 아메리칸 리그 다승 1위 (2006)
- 사이 영 상 투표 2위 (2006)
- 아메리칸 리그 최우수선수 투표 9위 (2006)
- MLB.com '올해의 투수' 선정 (2006)
- 아시안 게임 은메달 (2002)
- 타임지 선정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2007)
8. 평가 및 영향
메이저 리그 진출 후 왕젠민은 대만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의 선발 등판 경기는 대만 전역에 실시간으로 중계되었고, 많은 대중들이 공공 대형 스크린을 통해 경기를 함께 시청했다. 이러한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그는 2007년 타임지 선정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이름을 올리며 사회적 영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천진펑, 차오진후이에 이어 대만 출신으로는 세 번째로 메이저 리그 무대를 밟은 선수로서, 대만 야구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