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Mankombu Sambasivan Swaminathan망콤부 삼바시반 스와미나탄영어, 즉 M. S. 스와미나탄(M. S. Swaminathan엠. 에스. 스와미나탄영어, 1925년 8월 7일 ~ 2023년 9월 28일)은 인도의 저명한 농학자, 유전학자, 식물학자, 행정가이자 인도주의자로, '녹색 혁명'의 세계적 지도자이자 '인도 녹색 혁명의 주요 설계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인도의 녹색 혁명에는 치담바람 수브라마니암과 딜바그 싱 아트왈 등 여러 인물이 기여했으며, 특히 수브라마니암은 '인도 녹색 혁명의 정치적 아버지'로, 아트왈은 '밀 혁명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했다. 스와미나탄은 이 가운데 고수확 품종의 밀과 쌀을 인도에 도입하고 발전시키는 데 핵심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는 1960년대 인도의 식량 생산 증대에 크게 기여했으며, 그 공로로 1987년 제1회 세계 식량상을 수상했다. 특히 그는 과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식량 안보를 넘어 환경 보호와 농민 복지를 아우르는 '상록 혁명' 개념을 주창하며 지속 가능한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스와미나탄의 협력적인 과학적 노력은 노먼 볼로그와의 협력 아래 농민들과 다른 과학자들과의 대중 운동으로 이어졌고, 정부의 정책적 지원을 받아 1960년대 인도가 겪던 기근과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유엔 환경 계획은 그를 "경제 생태학의 아버지"라고 칭했으며, 1999년에는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아시아인 20인' 명단에 마하트마 간디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함께 이름을 올렸다. 그는 감자, 밀, 쌀의 세포유전학, 전리방사선, 방사선 감수성 등 기초 연구에 기여했으며, 퍼그워시 회의와 국제 자연 보전 연맹의 회장을 역임하는 등 국제 사회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2007년부터 2013년까지는 라지야 사바 의원으로 재임하며 여성 농민의 권리 증진을 위한 법안을 발의하는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치적 기여에도 힘썼다.
2. 생애 및 교육
M. S. 스와미나탄은 인도 제국 마드라스 관구 (타밀나두주 쿰바코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농업과 농민들과 교류하며 농작물 가격 변동과 기후, 해충의 피해가 가족 소득에 미치는 영향을 직접 목격했다. 그의 부모는 그가 의학을 공부하기를 바랐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3년 벵골 기근과 인도 아대륙의 쌀 부족 사태를 겪으며 식량 문제 해결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이로 인해 그는 당시 의학이나 공학에 비해 덜 권위적으로 여겨지던 농업을 전공하게 된다.
2.1. 어린 시절과 초기 교육
스와미나탄은 1925년 8월 7일, 타밀나두주 쿰바코남에서 일반 외과 의사인 M. K. 삼바시반과 파르바티 탕가말 삼바시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케랄라주 알라푸자의 망콤부 출신 이주민의 2세였으며, 그의 이름 '망콤부'는 여기서 유래했다. 11세에 아버지를 여읜 후에는 아버지의 동생이 그를 보살폈다. 그의 대가족은 쌀, 망고, 코코넛을 재배했으며, 나중에는 커피 재배로도 확장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날씨와 해충으로 인한 농작물 피해가 가계에 미치는 영향을 보며 농업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스와미나탄은 지역 고등학교와 쿰바코남의 가톨릭 리틀 플라워 고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15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부모님의 바람대로 동물학을 전공하며 고등 교육을 시작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3년 벵골 기근을 목격하고 인도 아대륙 전역에서 쌀 부족 사태를 경험하면서, 인도의 식량 안보에 기여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농업을 선택했다.
그는 케랄라주 티루바난타푸람에 위치한 마하라자 칼리지(현 케랄라 대학교 산하 유니버시티 칼리지 티루바난타푸람)에서 동물학 학사 학위를 마쳤다. 이후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마드라스 대학교 마드라스 농업대학(현 타밀나두 농업대학교)에서 농업과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이 기간 동안 농업학 교수인 코타 라마스와미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947년에는 뉴델리에 위치한 인도 농업 연구소(IARI)에 합류하여 유전학과 식물 육종을 연구했다. 1949년에는 세포유전학 분야에서 최우수 성적으로 대학원 학위를 취득했으며, 그의 연구는 특히 감자속 식물에 초점을 맞추었다. 사회적 압력으로 인도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인도 경찰청에 선발되기도 했으나, 같은 시기 유네스코 유전학 연구원 자격으로 네덜란드에서 농업 연구 기회를 얻게 되면서 유전학자의 길을 선택했다.
2.2. 해외 유학 및 연구
스와미나탄은 8개월 동안 네덜란드 바헤닝언 대학교 산하 유전학 연구소에서 유네스코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감자 수요 증가가 야기한 작물 윤작의 변화로 인해 발생한 감자시스트선충 감염 문제에 초점을 맞춰, 기생충과 추운 날씨에 강한 유전자를 개발하는 연구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바헤닝언 대학교는 그의 식량 생산 관련 과학적 추구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에 그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독일의 막스 플랑크 협회 산하 식물 육종 연구소를 방문했으며, 10년 후 방문했을 때 독일이 인프라와 에너지 분야에서 혁신적인 변화를 이룬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50년에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농업학교 산하 식물사육연구소로 옮겨 학업을 이어갔다. 1952년에는 "감자속 특정 종의 종 분화 및 다배체의 특성"에 대한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듬해 12월에는 인도에서 공무원으로 재직했던 프랭크 러가드 브레인과 일주일간 함께 지내면서 그의 인도 농촌 경험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후 스와미나탄은 15개월 동안 미국에 머물렀다. 그는 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 산하 유전학 연구소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미국 농무부의 감자 연구소 설립을 돕는 역할을 맡았다. 당시 이 연구소에는 노벨상 수상자인 조슈아 레더버그가 교수진으로 재직 중이었다. 1953년 12월에 연구원 계약이 만료되었을 때, 레더버그는 그에게 교수직을 제안했지만, 스와미나탄은 고국 인도에서 변화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이를 거절했다.
3. 인도 농업 발전 기여
M. S. 스와미나탄은 1954년 인도로 귀국한 후, 인도의 식량 자급을 목표로 농업 연구와 행정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그는 인도 농업 연구소에서 밀과 쌀의 품종 개량에 매진하여 녹색 혁명을 주도했으며, 정부 고위직으로서 농업 정책 수립과 농촌 개발에 기여했다. 그는 농업의 양적 성장뿐 아니라 농민들의 삶의 질 향상과 환경 지속 가능성을 중시하는 비전을 제시하며 인도의 농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1. 인도 농업 연구소 (IARI)에서의 활동
1954년 초 인도로 돌아온 스와미나탄은 처음에 그의 전문 분야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했으나, 3개월 후 오디샤주 쿠타크에 위치한 중앙 쌀 연구소에서 임시 보조 식물학자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이곳에서 그는 크리슈나스와미 라미아가 시작한 인디카-자포니카 쌀 잡종화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며, 이 경험은 훗날 그의 밀 연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같은 해 10월, 그는 뉴델리의 인도 농업 연구소(IARI)에 세포유전학자 보조로 입사하여 1972년까지 근무했다. 스와미나탄은 인구의 70%가 농업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인도가 식량을 수입하는 현실에 비판적이었으며, 가뭄과 기근이 심화되는 인도에 식량 자급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스와미나탄은 노먼 볼로그와 협력하여 멕시코의 왜소 밀 품종을 인도에 들여와 일본 품종과 교배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초기 실험 결과는 매우 긍정적이었으며, 개발된 품종은 높은 수확량, 우수한 품질, 질병 저항성을 보였다. 처음에는 농부들이 새로운 고수확 품종에 대한 불안감으로 채택을 주저했지만, 스와미나탄의 끈질긴 요청으로 1964년 1헥타르 규모의 시범 재배지에 총 150개의 시범 구역을 조성하는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시범 재배의 성공적인 결과는 농부들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이후에도 인도 환경에 더 적합하도록 품종을 개선하기 위한 연구가 계속되었고, 그 결과 1968년에는 밀 생산량이 1,700만 톤에 달하여 직전 수확량보다 500.00 만 t나 증가하는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1970년 노벨상을 수상하기 직전, 노먼 볼로그는 스와미나탄에게 "녹색 혁명은 팀의 노력이며 그 눈부신 발전에 대한 많은 공로는 인도의 공무원, 단체, 과학자, 그리고 농부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스와미나탄 박사님, 멕시코 왜소 품종의 잠재적인 가치를 가장 먼저 인정한 것은 큰 공로가 되어야 한다. 만약 이것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시아에 녹색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찬사를 보냈다. 인도의 농업학자이자 유전학자인 구르데브 쿠시와 딜바그 싱 아트왈 또한 인도의 녹색 혁명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인도 정부는 1971년에 인도가 식량 생산에서 자급자족을 달성했다고 선언했다.
3.2. 행정가 및 교육자로서의 역할
1972년, 스와미나탄은 인도 농업 연구 위원회(ICAR)의 사무총장이자 인도 정부의 비서로 임명되었다. 1979년에는 과학자로서는 이례적으로 정부의 고위직인 수석 비서관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인도 기획위원회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ICAR 사무총장으로서 기술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위해 인도 전역에 여러 센터를 설립했다. 이 시기 발생한 가뭄에 대응하여 빈곤층을 영양실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기상 및 작물 패턴을 관찰하는 그룹을 조직하기도 했다. 기획위원회에서의 2년 동안, 그는 인도의 인도의 5개년 계획에 처음으로 여성과 개발 관련 환경 요소를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
1982년, 스와미나탄은 필리핀의 국제 쌀 연구소(IRRI)에서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총국장에 취임하여 1988년까지 재직했다. 그의 재임 기간 중 주요 업적 중 하나는 "쌀 농사 시스템의 여성들"이라는 주제로 국제 회의를 개최한 것이었다. 이 공로로 그는 미국에 본부를 둔 '여성 개발 협회'로부터 "여성 개발 통합에 대한 탁월한 기여"로 첫 상을 수상했다. 그는 총국장으로서 쌀 농사를 짓는 가족들에게 쌀 작물의 모든 부분의 가치를 인식시키는 데 힘썼으며, IRRI에서의 이러한 리더십은 그가 1987년 제1회 세계 식량상을 수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84년에는 국제 자연 보전 연맹의 회장과 세계야생생물기금의 부회장직을 겸임했다.
1987년 제1회 세계 식량상 수상 당시, 스와미나탄은 상금을 활용하여 자신의 이름을 딴 M. S. 스와미나탄 연구 재단을 설립했다. 수상 연설에서 그는 식량 생산 증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하는 기아 문제에 대해 언급하며, "힘과 자원"의 공유에 대한 두려움과 기아 없는 세상이라는 목표가 아직 미완성임을 강조했다. 당시 하비에르 페레스 데 케야르 유엔 사무총장, 프랭크 프레스 미국 국립 과학원장,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등 세계 주요 인사들이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스와미나탄은 이후 노먼 볼로그의 뒤를 이어 세계 식량상 선정 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기도 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그는 인도 농업 연구 위원회에서 세포유전학, 방사선 유전학, 돌연변이 육종을 가르치며 수많은 박사후 연구생들과 볼로그-루언 국제 인턴십 참가자들을 지도했다.
3.3. 국가 농민 위원회 위원장
2004년, 스와미나탄은 인도 정부가 구성한 국가 농민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이 위원회는 인도의 농업 시스템을 개선하고 농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광범위한 권고안을 제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리더십 아래 위원회는 농민들이 적정 소득을 얻고, 지속 가능한 농업 관행을 도입하며, 농촌 개발을 촉진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제안했다. 이는 인도 농업 정책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3.4. 라지야 사바 (상원) 의원 활동
2007년, 압둘 칼람 인도 대통령은 스와미나탄을 라지야 사바(인도 상원) 의원으로 지명했다. 그는 2007년부터 2013년까지 한 차례 임기 동안 상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재임 기간 중 그는 《2011년 여성 농민 권리 법안》을 발의했는데, 이 법안은 여성 농부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들의 권리를 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안타깝게도 부결되었다. 이 법안은 인도 농촌 사회에서 여성 농민의 기여를 조명하고 이들에게 토지 소유권, 금융 지원, 기술 접근성 등의 권리를 보장하려는 스와미나탄의 사회적 형평성 추구 노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활동이었다.
4. 국제적 활동과 리더십
M. S. 스와미나탄은 인도의 식량 안보에 기여하는 것을 넘어, 국제 무대에서 글로벌 식량 안보, 환경 보전, 그리고 과학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국제 쌀 연구소 총국장으로서 아시아 농업 발전에 기여했으며, 퍼그워시 회의와 유엔 밀레니엄 프로젝트 등 주요 국제기구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인류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비전을 제시했다.
4.1. 국제 쌀 연구소 (IRRI) 소장
1982년, 스와미나탄은 필리핀에 위치한 국제 쌀 연구소(IRRI)의 초대 아시아인 총국장으로 취임하여 1988년까지 재직했다. 그는 IRRI에서 쌀 연구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으며, 특히 쌀 농업 시스템 내에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고 증진하기 위한 국제 회의 "쌀 농사 시스템의 여성들"을 개최했다. 이 회의는 여성의 농업 참여 증진의 중요성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 여성의 권리를 신장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미국에 본부를 둔 '여성 개발 협회'로부터 "여성 개발 통합에 대한 탁월한 기여"로 첫 상을 수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총국장으로서 그는 쌀 재배 농가들에게 쌀 작물의 각 부분의 가치를 알리는 데 힘썼으며, 이는 쌀 자원의 효율적인 활용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
4.2. 국제기구 및 평화 활동
스와미나탄은 여러 국제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과학의 평화적 이용과 환경 보전에 대한 그의 신념을 실천했다. 그는 2002년부터 2007년까지 퍼그워시 회의의 의장을 역임하며 핵무기 폐기와 국제 안보 증진을 위한 과학자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또한 2002년부터 2005년까지 기아 퇴치를 위한 유엔 밀레니엄 프로젝트의 공동 의장을 맡아 전 세계 기아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1984년 국제 자연 보전 연맹의 회장과 세계야생생물기금의 부회장을 역임하며 생물 다양성 보전과 환경 지속 가능성에 대한 국제적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2005년 브루스 앨버트 미국 국립 과학 아카데미 회장은 스와미나탄에 대해 "80세가 된 M. S. 스와미나탄은 젊은 시절의 모든 에너지와 이상주의를 유지하고 있으며, 지구상의 수백만 명의 동료 인간들로부터 계속해서 좋은 행동과 더 많은 이상주의를 영감을 주고 있다. 그것에 대해 우리 모두는 감사함을 느낀다."고 찬사를 보냈다.
5. 과학 연구 및 혁신
M. S. 스와미나탄은 세포유전학과 식물 육종 분야에서 선구적인 연구를 수행하며 농업 생산성 향상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의 연구는 감자, 밀, 쌀과 같은 주요 작물의 품종 개량뿐만 아니라, 방사선 식물학을 통한 기초 과학 연구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이루어졌다. 그는 과학적 지식을 실제 농업 문제 해결에 적용하는 데 주력했으며, 이는 인도의 식량 자급 달성 및 글로벌 식량 안보 증진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5.1. 감자 및 곡물 연구
1950년대에 스와미나탄의 감자 기원 및 진화 과정에 대한 설명과 분석은 이 분야에 큰 기여를 했다. 그는 감자의 기원을 자동 4배체로, 그리고 그 세포 분열 행동을 명확히 설명했으며, 배수체와 관련된 그의 발견 또한 매우 중요했다. 1952년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감자속 특정 종의 종 분화 및 다배체의 특성"에 대한 기초 연구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는데, 이는 야생 종으로부터 재배 감자로 유전자를 이전하는 능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의 감자 연구가 가치 있었던 이유는 새로운 감자 품종 개발에 실제적으로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에서 박사후 과정을 이수하는 동안 그는 서리에 강한 감자를 개발하는 데 일조했다. 수확량과 성장을 결정하는 유전적 특성을 포함한 감자에 대한 그의 유전자 분석은 생산성 증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체계 이론에 기반한 다학제적인 접근 방식은 다양한 유전적 측면들을 통합하는 데 기여했다.
스와미나탄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사이에 육배체 밀의 세포유전학에 대한 기초 연구를 수행했다. 그와 노먼 볼로그가 개발한 밀과 쌀 품종은 녹색 혁명의 초석이 되었다. 그는 또한 국제 쌀 연구소에서 더 나은 광합성 및 물 사용 능력을 가능하게 하는 C4 식물 형태의 쌀 재배 노력을 주도했다. 스와미나탄은 세계 최초의 고수확 바스마티 품종 개발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5.2. 방사선 식물학 및 돌연변이 연구
M. S. 스와미나탄이 이끌던 인도 농업 연구소(IARI) 유전학과는 돌연변이원 연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방사선 돌연변이를 연구하기 위해 '코발트-60 감마 정원'을 설치했다. 스와미나탄은 호미 J. 바바, 비크람 사라바이, 라자 라마나, M. R. 스리니바산 등 인도의 핵과학자들과의 협력을 통해 농업 과학자들이 뭄바이 교외 트롬베이에 위치한 원자력 시설(훗날 바바 원자력 연구 센터가 됨)을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의 첫 박사 과정 학생인 A. T. 나타라잔은 이 방향으로 논문을 집필했다.
이러한 연구의 목표 중 하나는 식물의 비료 반응성을 높이고 작물 돌연변이의 실제 적용 가능성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방사선이 세포와 유기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스와미나탄의 초기 기초 연구는 미래 산화환원 생물학의 기반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루디 라빙게는 1966년 미국에서 열린 국제 원자력 기구 회의에서 발표된 농업 분야 중성자선에 관한 스와미나탄의 논문을 "시대를 초월한(epoch-making)" 연구로 평가했다. 스와미나탄과 그의 동료들의 연구는 식품 조사 분야와도 관련이 있었다.
6. 이념과 비전: 상록 혁명
M. S. 스와미나탄은 1990년에 '상록 혁명'이라는 개념을 창안하여 그의 농업 및 지속 가능성 비전을 집약적으로 표현했다. 이 용어는 기존의 녹색 혁명이 식량 생산 증대에 기여했으나, 환경 파괴나 사회적 불균형을 야기할 수 있다는 비판적 시각에서 출발했다. 그는 상록 혁명을 "관련 생태학적 해악 없이 영구적인 생산성" 또는 "영구적인 생산성"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며, 농업 생산성을 지속적으로 증가시키면서도 환경을 보전하고 생물 다양성을 유지하며 사회적 형평성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비전은 단순히 식량 생산량 증대를 넘어, 농업 생태계의 건강을 지키고, 물과 토양 같은 자연 자원을 지속 가능하게 관리하며, 특히 소농과 여성 농민의 권리 및 복지 향상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접근 방식을 강조한다. 그는 기아 퇴치와 식량 안보를 위한 노력에서 기술적 혁신과 사회적 정의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상록 혁명을 통해 미래 세대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현재의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
7. 기관 설립 및 사회 공헌
스와미나탄은 그의 생애 동안 여러 중요한 기관의 설립과 발전에 기여하며 과학적 지식을 사회 공헌으로 연결했다. 특히 1987년 세계 식량상 수상으로 받은 상금을 종잣돈으로 M. S. 스와미나탄 연구 재단을 설립한 것은 그의 사회적 비전을 실현하는 핵심적인 발판이 되었다.
그는 인도 농업 연구소에 원자력 연구소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인도의 국제 반건조 열대 작물 연구소(ICRISAT), 이탈리아의 국제 식물 유전 자원 위원회(현 Bioversity International), 케냐의 국제 농림 연구 위원회(ICRAF) 등 다수의 국제 농업 연구 기관의 설립과 홍보에 기여했다.
스와미나탄은 중국, 베트남, 미얀마, 태국, 스리랑카, 파키스탄, 이란, 캄보디아 등 여러 국가에서 농업 기관의 건설과 발전을 지원하며 해당 지역의 식량 안보 증진에 기여했다. 말년에는 정보 격차 해소와 기아 및 영양 분야의 연구 결과를 정책 결정자들에게 전달하는 이니셔티브에 참여하는 등, 과학적 성과가 실제 사회 문제 해결에 활용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농업 기술의 발전뿐만 아니라 농촌 공동체의 역량 강화와 사회적 약자 보호로 이어지며 광범위한 사회 공헌을 이룩했다.
8. 개인 생활
M. S. 스와미나탄의 개인적인 삶은 그의 전문적인 업적과 마찬가지로 헌신과 윤리적 가치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가족과 사회적 의무에 깊은 책임감을 가졌으며,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있어 철학적, 종교적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51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학업 중 미나 스와미나탄을 만나 결혼했다. 부부는 타밀나두주 첸나이에 거주했으며, 세 명의 딸을 두었다. 첫째 딸 수미아 스와미나탄은 소아과 의사이자 국제 보건 전문가로 활동했고, 둘째 딸 마두라 스와미나탄은 경제학자이며, 셋째 딸 니티아 스와미나탄은 젠더 및 농촌 개발 연구자이다.
스와미나탄의 삶에는 마하트마 간디와 라마나 마하르시의 철학이 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간디의 비폭력과 자립 사상은 그의 농민 중심적 접근 방식과 일맥상통했다. 그의 가족은 소유했던 2000 acre의 농지 가운데 3분의 1을 인도 독립 운동가이자 영적 스승인 비노바 바베의 부단 운동(Bhoodan movement, 토지 기증 운동)에 기부하여 사회적 평등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2011년 한 인터뷰에서는 젊은 시절 스와미 비베카난다의 사상을 따랐다고 밝히며 그의 영적, 철학적 기반을 엿볼 수 있게 했다.
9. 사망
M. S. 스와미나탄은 2023년 9월 28일, 향년 98세를 일기로 타밀나두주 첸나이에 위치한 자택에서 평화롭게 영면했다. 그의 사망 소식은 인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 농업계와 과학계에 깊은 애도를 표하게 했다.
10. 수상 및 명예
M. S. 스와미나탄은 그의 평생에 걸친 인류와 농업 발전에 대한 지대한 공헌으로 인도 국내외에서 수많은 상과 명예를 받았다. 이는 그가 과학자, 인도주의자, 그리고 정책 입안자로서 쌓은 탁월한 업적을 반영한다.
10.1. 주요 수상 내역

스와미나탄은 인류의 식량 안보와 농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다음과 같은 주요 상들을 수상했다.
- 1965년: 체코슬로바키아 과학 아카데미로부터 그레고어 멘델 기념 메달을 받았다.
- 1971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수상 당시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의 "배고픈 사람은 이성과 종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어떤 기도에도 굽히지 않는다."는 말을 인용하며 기아 문제 해결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 1986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세계 과학상을 수상했다.
- 1987년: 농업 분야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제1회 세계 식량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 상금을 바탕으로 M. S. 스와미나탄 연구 재단을 설립하여 기아 없는 세상을 위한 연구와 활동을 지속했다.
- 1991년: 타일러 환경성취상을 수상하며 환경 보전에 대한 그의 기여를 인정받았다.
- 2000년: 4개의 자유상과 국제지리연합 지구인류메달을 수상했다.
국제적으로 그는 필리핀 황금심장훈장, 프랑스 농업훈장, 네덜란드 황금방주훈장, 캄보디아 사하메트레이 왕실 훈장을 받았다. 중국은 그에게 "환경과 개발에 관한 국제 협력상"을 수여했다. 미국 아이오와주 디모인에 위치한 노먼 볼로그 홀에는 250,000개의 유리 조각으로 만든 스와미나탄의 예술 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국제 쌀 연구소(IRRI)는 그의 이름을 딴 건축물과 장학 기금을 조성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인도 국내에서는 1961년 샨티 스와루프 바트나가르상을 시작으로, 인도의 최고 민간인 훈장인 파드마 슈리, 파드마 부샨, 파드마 비부샨을 차례로 수상했다. 또한 H K 피로디아상,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 국가상, 인디라 간디상 등을 받았다. 2016년 기준으로 그는 총 33개의 국내상과 32개의 국제상을 수상했다. 2004년에는 인도의 한 농업 싱크탱크가 그의 이름을 따서 매년 수여하는 상인 '농업 리더십에 대한 M. S. 스와미나탄 박사상'을 제정하여 그의 리더십을 기리고 있다.
2024년 2월 9일, 그는 인도 공화국의 최고 민간인 훈장인 바라트 라트나를 사후에 추서받았다. 당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인도 정부가 농업과 농민 복지 분야에서 우리 국가에 기념비적인 공헌을 한 M. S. 스와미나탄 박사님에게 바라트 라트나를 수여하게 되어 무한한 기쁨이다. 그는 어려운 시기에 인도가 농업 자급자족을 달성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며, 인도 농업을 현대화하는 데 탁월한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는 또한 혁신가이자 멘토로서, 그리고 여러 학생들 사이에서 학습과 연구를 장려하는 그의 귀중한 업적을 인정한다. 스와미나탄 박사님의 선구적인 리더십은 인도 농업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식량 안보와 번영을 보장했다. 그는 내가 가까이 알았던 분이며, 나는 항상 그의 통찰력과 조언을 소중히 여겼다."고 언급했다.
10.2. 명예 학위 및 학회 회원
스와미나탄은 세계 유수 대학으로부터 84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수많은 박사 학위 연구자들의 지도교수 역할을 했다. 1970년 사르다르 파텔 대학교를 시작으로 델리 대학교, 바나라스 힌두 대학교 등 인도 국내 여러 대학에서 명예 학위를 수여했다. 국제적으로는 1981년 베를린 공과대학교와 1985년 아시아 공과대학교에서 그를 기렸다. 1983년에는 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매사추세츠 대학교 보스턴은 그에게 명예 과학 박사 학위를 수여하며 "국가별, 사회·경제적 집단별, 성별, 세대 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 환경 모두를 포함한 (스와미나탄의) 관심사에 대한 엄청난 포괄성"을 높이 평가했다. 그의 모교인 케임브리지 대학교 피츠윌리엄 칼리지는 2014년에 그를 명예교수로 추대했다.
스와미나탄은 인도 내 여러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미국, 영국, 러시아, 스웨덴, 이탈리아, 중국, 방글라데시 및 유럽 예술 과학 아카데미를 포함한 전 세계 30개 과학 아카데미 및 학회로부터 회원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세계과학아카데미의 창립 회원이기도 하다. 페루 국립 농경대학교는 그에게 명예 교수직을 수여하여 그의 학문적 위상을 드높였다.
11. 저술 활동
M. S. 스와미나탄은 농업 과학 분야의 연구자로서 뿐만 아니라, 그의 생애 업적인 생물 다양성, 지속 가능한 농업, 기아 퇴치에 대한 광범위한 주제로 다수의 저서와 과학 논문을 발표하며 학문적, 사회적 기여를 조명했다.

그는 1950년부터 1980년까지 46편의 단독 저자 논문을 포함하여 총 254편의 논문을 저술했으며, 이 중 155편은 그가 단독 또는 제1저자였다. 그의 과학 논문은 주로 작물 개선(95편), 세포유전학 및 유전학(87편), 계통발생학(72편) 분야에 집중되었다. 그의 논문은 주로 《인도 유전학 저널》(46편), 《커런트 사이언스》(36편), 《네이처》(12편), 《방사선 식물학》(12편) 등 권위 있는 과학 학술지에 게재되었다.
또한 그는 그의 인생의 주요 주제인 생물 다양성, 지속 가능한 농업, 기아 완화를 위한 노력에 대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녹색에서 상록 혁명으로: 인도 농업의 성과와 과제》(From Green to Evergreen Revolution - Indian Agriculture Performance and Challenges녹색에서 상록 혁명으로: 인도 농업의 성과와 과제영어, 2010), 《바이오해피니스 추구: 생물 다양성과 식량, 건강, 생계 보장》(In Search Of Biohappiness: Biodiversity And Food, Health And Livelihood Security바이오해피니스 추구: 생물 다양성과 식량, 건강, 생계 보장영어, 2011), 그리고 다이사쿠 이케다와의 대화록인 《환경을 푸르게 하고 인간의 마음을 성장시키는 혁명: M. S. 스와미나탄 상록 혁명의 리더와 이케다 다이사쿠 인간 혁명의 주창자 간의 대화》(Revolutions to Green the Environment, to Grow the Human Heart: A Dialogue Between M.S. Swaminathan, Leader of the Ever-green Revolution and Daisaku Ikeda, Proponent of the Human Revolution환경을 푸르게 하고 인간의 마음을 성장시키는 혁명: M. S. 스와미나탄 상록 혁명의 리더와 이케다 다이사쿠 인간 혁명의 주창자 간의 대화영어, 2005) 등이 있다. 그는 유엔 밀레니엄 프로젝트 기아 태스크 포스의 공동 코디네이터로서 《기아를 절반으로 줄이는 것: 우리는 할 수 있다》(Halving Hunger: It Can Be Done기아를 절반으로 줄이는 것: 우리는 할 수 있다영어, 2005) 보고서 작성에도 참여했다.
- M. S. 스와미나탄, S. L. 코차르, 《Major Flowering Trees of Tropical Gardens》(2019)
- M. S. 스와미나탄, 《50 Years of Green Revolution: An Anthology of Research Papers》(2017)
- M. S. 스와미나탄, "EDITORIAL: Zero hunger"(2014)
- M. S. 스와미나탄, 《In Search Of Biohappiness: Biodiversity And Food, Health And Livelihood Security》(2011)
- M. S. 스와미나탄, 《Science and Sustainable Food Security: Selected Papers of M S Swaminathan》(2010)
- M. S. 스와미나탄, "An Evergreen Revolution"(2006)
- M. S. 스와미나탄, 다이사쿠 이케다, 《Revolutions to Green the Environment, to Grow the Human Heart: A Dialogue Between M.S. Swaminathan, Leader of the Ever-green Revolution and Daisaku Ikeda, Proponent of the Human Revolution》(2005)
- 《Halving Hunger: It Can Be Done》(2005)
- M. S. 스와미나탄 (편집), 《Gender Dimensions in Biodiversity Management》(1998)
- M. S. 스와미나탄, "Implementing the benefit-sharing provisions of the Convention on Biological Diversity: Challenges and opportunities"(1997)
- M. S. 스와미나탄 (편집), 《Wheat Revolution-A dialogue.》(1993)
12. 논란
M. S. 스와미나탄의 경력 중에는 일부 과학적, 윤리적 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당시 인도의 과학 연구 환경과 유전자 변형 작물에 대한 사회적 논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1970년대에 스와미나탄과 그의 연구팀이 멕시코 품종인 '소노라 64'에 감마선을 조사하여 리신 함량이 매우 높은 돌연변이 밀 품종인 '샤르바티 소노라'를 생산했다고 주장한 과학 논문은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실험실 조수의 실수로 인해 데이터 오류가 발생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더욱 심화되었고, 한 농업 과학자의 자살 사건까지 겹치며 파장이 커졌다. 이 사건은 이후 인도 농업 연구의 체계적인 문제의 일부로 연구되기도 했다.
2018년 11월 25일자 《커런트 사이언스》 저널에 '지속 가능한 식품 및 영양 보안을 위한 현대 기술'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논문에서 스와미나탄이 공동 저자로 표기되면서 또 다른 논란이 불거졌다. 이 논문은 K. 비자이 라가반 인도 정부 수석 과학 고문을 비롯한 많은 과학 전문가들로부터 "심각한 결함이 있고 오류로 가득 차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논란이 커지자 스와미나탄은 해당 논문에서 자신의 역할이 "극도로 제한적"이었으며 공동 저자로 지명되지 말았어야 했다고 해명하면서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다. 이 사건은 유전자 변형 작물에 대한 찬반 논쟁과 관련하여 스와미나탄의 입장에 대한 혼란을 야기했다.
13. 평가 및 영향
M. S. 스와미나탄은 20세기 인도의 식량 안보와 농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선구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노먼 볼로그와 협력하여 인도에 고수확성 밀과 쌀 품종을 도입하고 보급하여 '녹색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이는 1960년대 인도가 겪던 심각한 식량 위기를 극복하고 식량 자급을 달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볼로그는 스와미나탄이 멕시코 왜소 품종의 잠재력을 가장 먼저 인식한 것이 아시아 녹색 혁명의 성공에 결정적이었다고 극찬했다.
유엔 환경 계획이 그를 "경제 생태학의 아버지"라고 칭했듯이, 스와미나탄은 단순한 생산량 증대를 넘어 환경 지속 가능성과 사회적 형평성을 강조하는 '상록 혁명' 개념을 주창했다. 이는 농업 생산성을 영구적으로 유지하면서도 생태학적 피해를 최소화하고, 농민 특히 여성 농민의 권리를 증진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을 보여준다. 그는 국가 농민 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농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정책 제안에 힘썼고, 라지야 사바 의원 시절 여성 농민 권리 법안을 발의하는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실천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영향은 인도 국내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국제 쌀 연구소(IRRI) 총국장으로서 아시아 전역의 쌀 연구와 개발에 기여했으며, 퍼그워시 회의 의장과 유엔 밀레니엄 프로젝트 공동 의장을 맡아 글로벌 식량 안보와 평화 증진에 헌신했다. 그는 M. S. 스와미나탄 연구 재단을 설립하여 지속 가능한 농업 연구와 농촌 개발에 대한 후속 세대의 노력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스와미나탄은 과학적 엄밀함과 인도주의적 사명을 겸비한 인물로, 그의 삶과 업적은 과학 기술이 어떻게 인류의 가장 시급한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로 남아있다. 그는 수많은 상과 명예 학위를 통해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으며,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아시아인 20인'에 이름을 올린 것은 그의 역사적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비전과 철학, 특히 '상록 혁명'은 오늘날 기후 변화와 생물 다양성 위기 속에서 지속 가능한 농업과 식량 시스템을 모색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함의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