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지 프로스트 케넌(George Frost Kennan영어, 1904년 2월 16일 ~ 2005년 3월 17일)은 미국의 저명한 외교관, 정치학자, 역사가이자 국제 관계의 현실주의 학자이다. 그는 냉전 초기 소련의 팽창에 맞서는 미국의 외교 정책인 '봉쇄 정책'의 주요 설계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사상은 1946년 모스크바에서 보낸 '장기전보'와 1947년 'X 논문'으로 알려진 "소련 행동의 근원"이라는 글을 통해 구체화되었으며, 이는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케넌은 자신이 주창한 봉쇄 정책이 과도하게 군사화되고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이후 미국 외교 정책의 주요 비평가로 활동했다. 그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교수로 재직하며 국제 문제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과 저술 활동을 이어갔으며, 베트남 전쟁, 군비 경쟁, NATO 확장 등 미국의 주요 외교 정책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 케넌은 '현실주의'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도덕주의적이고 감정적인 접근보다는 국익과 세력 균형에 기반한 냉철한 판단을 촉구했다. 그는 퓰리처상과 전미 도서상을 두 차례 수상하는 등 학문적으로도 큰 인정을 받았다.
2. 생애
조지 F. 케넌은 냉전 시기 미국의 외교 정책을 형성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며, 평생에 걸쳐 국제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했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조지 F. 케넌은 1904년 2월 16일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변호사인 코슈트 켄트 케넌(Kossuth Kent Kennan영어)과 플로렌스 제임스 케넌(Florence James Kennan영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8세기 코네티컷과 매사추세츠주에서 이주한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 정착민의 후손이었으며, 헝가리 애국자 러요시 코슈트(Lajos Kossuth헝가리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맹장염으로 인한 복막염으로 사망했으며, 케넌은 평생 어머니의 부재를 안타까워했다. 그는 아버지나 계모와는 가깝지 않았지만, 누나들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8세 때 케넌은 계모와 함께 독일로 건너가 6개월간 독일어를 배웠다. 1915년과 1916년 여름에는 위스콘신주 세이너의 캠프 하이랜즈에 다녔다. 그는 세인트 존스 노스웨스턴 군사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프린스턴 대학교에 입학했다. 아이비 리그의 엘리트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았던 내성적인 케넌은 학부 시절을 외롭고 힘겹게 보냈다.
2.2. 외교관으로서의 경력 시작
1925년 역사학 학사 학위를 받은 후, 케넌은 법학대학원 진학을 고려했지만 학비가 너무 비싸 새로 설립된 미국 외무부에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외무고시에 합격하고 워싱턴 D.C.의 외무부 학교에서 7개월간 공부한 뒤 스위스 제네바에서 부영사로 첫 직무를 시작했다. 1년 안에 그는 독일 함부르크로 전근되었다. 1928년, 케넌은 외무부를 그만두고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대신 외무부를 그만두지 않고 3년간 대학원 수준의 공부를 할 수 있는 언어학자 훈련 프로그램에 선발되었다.
1929년, 케넌은 베를린 대학교 동양학 연구소에서 역사, 정치, 문화 및 러시아어 과정을 시작했다. 이를 통해 그는 19세기 러시아 제국 전문가이자 차르 시대의 감옥 시스템에 대한 1891년 저서 『시베리아와 유형 제도』의 저자인 그의 할아버지의 사촌 조지 케넌 (탐험가)의 발자취를 따랐다. 외교관 경력 동안 케넌은 독일어, 프랑스어, 폴란드어, 체코어, 포르투갈어, 노르웨이어 등 여러 언어를 마스터했다.
1931년, 케넌은 라트비아 리가의 공사관에 배치되어 삼등서기관으로 소련 경제 문제를 다루었다. 이 직무를 통해 케넌은 "러시아 문제에 대한 성숙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33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당선 후 미국이 소련 정부와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시작하자, 케넌은 윌리엄 C. 불릿 대사와 함께 모스크바로 갔다. 1930년대 중반까지 케넌은 찰스 E. 볼렌, 로이 W. 헨더슨과 함께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의 전문 훈련을 받은 러시아 전문가 중 한 명이었다. 이 관리들은 국무부 동유럽 담당 부서의 오랜 책임자였던 로버트 F. 켈리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잠재적 적국에 맞서더라도 소련과의 협력 기반이 거의 없다고 믿었다. 한편, 케넌은 스탈린의 대숙청을 연구했는데, 이는 그의 평생 동안 소련 정권의 내부 역학에 대한 그의 견해에 영향을 미쳤다.
2.3. 제2차 세계 대전 중 외교 활동
케넌은 소련 주재 대사로 불릿의 후임자인 조지프 E. 데이비스와 강하게 의견이 달랐다. 데이비스는 대숙청과 스탈린 통치의 다른 측면들을 옹호했다. 케넌은 데이비스의 결정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고, 데이비스 자신도 케넌이 "건강을 위해" 모스크바에서 전근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케넌은 다시 외무부 사임을 고려했지만, 대신 워싱턴 국무부의 러시아 담당 부서에서 일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으며, 34세의 비교적 젊은 외교관 시절에 이미 첫 회고록 초안을 쓰기 시작했다. 1935년 그의 누나 재닛에게 보낸 편지에서 케넌은 미국 생활에 대한 환멸을 표현하며 "우리 정치 생활의 혼란이 싫다. 민주주의가 싫고, 언론이 싫다... '사람들'이 싫고, 나는 분명히 비미국적이 되었다"고 썼다.
1938년 9월, 케넌은 프라하 공사관으로 재배치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 나치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을 점령한 후, 케넌은 베를린으로 발령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미국의 렌드리스 정책을 지지했지만, 자신이 부적합한 동맹국으로 간주했던 소련에 대한 미국의 어떤 지지에도 경고했다. 1941년 12월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한 후 6개월 동안 독일에 억류되었다.
1942년 9월, 케넌은 포르투갈 리스본의 공사관으로 발령받아 정보 및 기지 운영을 관리하는 일을 마지못해 수행했다. 1943년 7월 리스본 주재 미국 대사 베르트 피시가 갑자기 사망하자, 케넌은 대사 대리가 되어 포르투갈 주재 미국 대사관의 수장이 되었다. 리스본에서 케넌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해군 및 공군이 아조레스 제도를 사용하는 데 포르투갈의 승인을 얻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워싱턴의 서투른 지시와 조율 부족에 직면했지만, 케넌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 직접 대화하여 대통령으로부터 포르투갈 총리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에게 아조레스 제도 시설 양보를 이끌어내는 서한을 받아냈다.
1944년 1월, 그는 런던으로 파견되어 유럽 자문 위원회 미국 대표단의 참사관으로 일하며 연합국의 유럽 정책 준비에 참여했다. 그곳에서 케넌은 자신이 훈련된 전문가로서의 자격을 무시한다고 생각하여 국무부에 더욱 환멸을 느꼈다. 그러나 직무를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그는 소련 주재 대사 W. 에버렐 해리먼의 요청으로 모스크바의 부대사로 임명되었다.
2.4. 냉전 정책의 설계: 봉쇄 정책의 형성
케넌은 냉전 시대 미국의 대외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봉쇄 정책'의 핵심 설계자였다. 그의 사상은 '장기전보'와 'X 논문'을 통해 구체화되었으며, 마셜 플랜 수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2.4.1. '장기전보'
모스크바에서 케넌은 자신의 의견이 트루먼 대통령과 워싱턴의 정책 입안자들에게 무시당하고 있다고 다시 느꼈다. 케넌은 정책 입안자들에게 소련 정부와의 협력 계획을 포기하고 유럽에서 소련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세력권 정책을 채택하도록 반복적으로 설득하려 했다. 케넌은 소련의 동유럽 장악에 맞서 서유럽에 연방이 수립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케넌은 1946년 4월까지 모스크바에서 부대사로 재직했다. 임기 말에 미국 재무부는 국무부에 소련이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을 지지하지 않는 등 최근의 행동을 설명해달라고 요청했다. 케넌은 1946년 2월 22일, 모스크바에서 제임스 F. 번즈 국무장관에게 소련과의 새로운 외교 관계 전략을 설명하는 5,363단어(때로는 8,000단어 이상으로 인용되기도 함)의 긴 전문, 즉 '장기전보'를 보내 응답했다. 장기전보에서 케넌이 표현한 아이디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그가 제시한 주장과 생생한 언어는 적절한 시기에 나왔다. 그는 "크렘린의 신경증적인 세계관의 바닥에는 전통적이고 본능적인 러시아의 불안감이 깔려 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이러한 불안감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동양적인 비밀주의와 음모"와 뒤섞였다.
소련의 국제적 행동은 주로 조지프 스탈린 정권의 내부적 필요에 달려 있었다. 케넌에 따르면, 스탈린은 자신의 독재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적대적인 세계가 필요했다. 따라서 스탈린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소련의 외부 세계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 통치 방법을 모르는 독재, 감히 가하지 않을 수 없는 잔혹성, 요구할 수밖에 없다고 느끼는 희생에 대한 정당화... 오늘날 그들은 그것 없이는 지낼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의 도덕적, 지적 존경심의 무화과 잎이다"라고 사용했다.
해결책은 서방 제도를 강화하여 소련의 도전에 취약하지 않게 만들고, 소련 정권의 완화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케넌에게는 선전과 문화의 사용이 매우 중요했으며, 미국이 외국 청중에게 자신을 올바르게 제시하는 것이 중요했고, 소련은 미국과 소련 간의 문화적 상호 오염을 제한할 것이었다.
2.4.2. 'X 논문'
장기전보가 발송되면서 케넌은 미국의 전 전시 동맹국인 소련에 대한 대결 정책의 주요 옹호자인 제임스 포레스트 해군 장관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포레스트는 케넌이 워싱턴으로 돌아오는 것을 도왔고, 그곳에서 그는 국립 전쟁 대학의 초대 외교 담당 부국장을 지냈으며, 이후 'X 논문'을 출판하기로 결정하는 데 강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 1947년 3월, 트루먼 대통령은 트루먼 독트린을 위해 의회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며 그리스에서 공산주의와 싸울 것을 요청했다. "나는 무장 소수자나 외부 압력에 의한 예속 시도에 저항하는 자유로운 사람들을 지원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장기전보와 달리, 1947년 7월호 『포린 어페어스』에 "X"라는 필명으로 실린 케넌의 시기적절한 논문 "소련 행동의 근원"은 "전통적이고 본능적인 러시아의 불안감"을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대신, 이 논문은 스탈린의 정책이 외부 세계의 자본주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혁명을 옹호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와, 스탈린이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소련 사회의 통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본주의적 포위" 개념을 사용하려는 결합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케넌은 스탈린이 서방 정부를 전복하려는 소련의 의지를 완화하지 않을 것이며(더 나아가 그럴 수도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소련에 대한 미국의 모든 정책의 주요 요소는 러시아의 팽창주의적 경향에 대한 장기적이고 인내심 있고 확고하며 경계하는 봉쇄여야 한다.... 서방 세계의 자유로운 제도에 대한 소련의 압력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리적, 정치적 지점에서 소련 정책의 변화와 기동에 상응하는 교묘하고 경계하는 반대 세력의 적용으로 봉쇄될 수 있지만, 매력이나 대화로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그의 정책 목표는 모든 미군을 유럽에서 철수시키는 것이었다. "달성된 합의는 크렘린에게 소련에 적대적인 동유럽 정권 수립에 대한 충분한 안심을 제공하여, 소련 지도자들이 그 지역에 대해 행사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통제 정도를 완화할 것이다."
케넌은 또한 미국이 이 봉쇄를 단독으로 수행해야 하지만, 만약 미국이 자신의 경제적 건강과 정치적 안정성을 훼손하지 않고 이를 수행할 수 있다면, 소련 당 구조는 엄청난 긴장 기간을 겪게 될 것이며 결국 "소련 권력의 붕괴 또는 점진적인 완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X 논문"의 출판은 곧 냉전에서 가장 격렬한 논쟁 중 하나를 촉발했다. 국제 문제에 대한 미국의 주요 논평가인 월터 리프먼은 "X 논문"을 강력히 비판했다. 리프먼은 케넌의 봉쇄 전략이 "전략적 괴물"이며 "이질적인 위성국, 고객, 종속국, 꼭두각시들을 모집, 보조금 지급, 지원함으로써만 실행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리프먼은 외교가 소련과의 관계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미국이 유럽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독일을 재통일하고 비무장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편, "X"가 실제로 케넌이라는 사실이 곧 비공식적으로 밝혀졌다. 이 정보는 "X 논문"에 트루먼 행정부의 새로운 모스크바 정책을 표현하는 공식 문서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였다.
케넌은 "X 논문"을 정책 처방으로 의도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 동안 이 논문이 소련의 "팽창주의"가 발생하는 모든 곳에서, 주요 이익과 부차적 이익을 거의 구별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저항하겠다는 약속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반복해서 강조했다. 이 논문은 케넌이 봉쇄의 주요 수단으로 군사적 방법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방법을 선호한다는 것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 1996년 CNN과의 인터뷰에서 케넌은 "봉쇄에 대한 나의 생각은 물론 그것을 이해하고 오직 군사적 개념으로만 추구했던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다른 어떤 원인보다도 40년간의 불필요하고, 엄청나게 비싸고, 방향을 잃은 냉전 과정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행정부는 소련의 영향력과 국제 공산주의의 구분을 미국 대중에게 설명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역사가 존 루이스 개디스는 "부분적으로 이러한 실패는 워싱턴의 많은 사람들이 '구분되지 않은 전 세계적 위협의 전망만이 미국인들을 그들 사이에 잠재되어 있던 고립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고 믿었음을 반영한다"고 썼다.
1996년 PBS의 데이비드 저겐과의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케넌은 소련을 주로 군사적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다시 한번 강조하며, "그들은 히틀러 같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케넌은 이러한 오해가
"모두 'X 논문'의 한 문장으로 귀결되었다. 그 문장에서 나는 이 사람들, 즉 소련 지도부가 세계 어느 곳에서든 우리에게 위험한 적대감을 보일 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봉쇄하고 더 이상 확장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려는 어떤 욕망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했어야 했다. 이것은 전쟁 직후였고, 그들이 돌아서서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분명히 했어야 했다."
"X 논문"은 케넌에게 갑작스러운 명성을 안겨주었다. 장기전보 이후 그는 회고록에서 "나의 공식적인 고독은 사실상 끝났다... 나의 명성이 확립되었다. 이제 내 목소리는 힘을 얻었다"고 회상했다.
2.4.3. 마셜 국무장관 시절의 영향력
조지 C. 마셜이 국무장관으로 재직했던 1947년 4월부터 1948년 12월까지 케넌은 그의 경력 중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셜은 그의 전략적 감각을 높이 평가하여 국무부의 내부 싱크탱크인 정책 기획 본부를 설립하고 지휘하도록 했다. 케넌은 초대 정책 기획 국장이 되었다. 마셜은 정책 권고를 준비하는 데 그에게 크게 의존했다. 케넌은 마셜 플랜 초안 작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케넌은 소련이 전쟁을 감행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보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황폐화로 인해 사기가 저하된 서유럽에서 공산당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존재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소련이 전복을 통해 서유럽으로 확장할 수 있는 적이라고 여겼다. 소련의 잠재적 영향력에 맞서기 위해 케넌의 해결책은 일본과 서유럽에 경제 원조와 비밀 정치적 지원을 제공하여 서방 정부를 부활시키고 국제 자본주의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미국은 세력 균형을 재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1948년 6월, 케넌은 모스크바와 서유럽 노동 계급 운동 간의 균열을 유도하기 위해 서유럽의 친모스크바적이지 않은 좌파 정당과 노동조합에 비밀 지원을 제안했다. 1947년, 케넌은 공산 게릴라와 내전을 벌이던 그리스 정부에 경제 원조를 확대하려는 트루먼의 결정을 지지했지만, 군사 원조에는 반대했다. 역사가 존 이아트리데스는 케넌이 미국이 그리스에 군사 원조를 제공하면 소련이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 소련이 전쟁을 감행하기에는 너무 약하다는 그의 주장과 일치하지 않으며, 군사 원조에 반대한 진짜 이유는 그리스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이 마셜 플랜을 시작하면서 케넌과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이 마셜 원조를 거부하면 동유럽의 공산주의 동맹국들과의 관계가 긴장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케넌은 소련과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사이의 분열을 이용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을 시작했다. 케넌은 발칸반도에서 비밀 작전을 수행하여 모스크바의 영향력을 더욱 약화시킬 것을 제안했다.
행정부의 새로운 강력한 반소 정책은 케넌의 제안에 따라 미국이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스페인 반공 정권에 대한 적대감을 바꾸어 지중해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보하려 했을 때도 분명해졌다. 케넌은 1947년에 트루먼 독트린이 프랑코에 대한 새로운 고려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의 제안은 곧 미국-스페인 관계의 새로운 단계를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이는 1950년 이후 군사 협력으로 이어졌다. 케넌은 그리스에 대한 미국의 경제 원조 계획을 수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자본주의적 개발 방식과 유럽 나머지 지역과의 경제 통합을 주장했다. 그리스의 경우, 마셜 플랜 원조의 대부분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도 매우 가난했던 전쟁으로 황폐화된 국가를 재건하는 데 사용되었다. 마셜 플랜 원조는 항구, 철도, 포장 도로, 수력 발전 송전 시스템, 전국 전화 시스템을 건설하거나 재건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리스에 "좋은 정부"를 강요하려는 시도는 덜 성공적이었다. 그리스 경제는 역사적으로 소수의 부유한 가문, 고도로 정치화된 장교단, 왕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경제를 통제하는 지대추구 시스템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리스 경제를 개방하라는 케넌의 조언은 그리스 엘리트들에게 완전히 무시되었다. 케넌은 프랑스의 베트남 재장악 전쟁을 지지했는데, 이는 동남아시아의 원자재 통제가 서유럽과 일본의 경제 회복에 중요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9년까지 그는 프랑스가 공산주의 베트민 게릴라를 결코 물리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자신의 견해를 바꾸었다.
1949년, 케넌은 독일 통일을 위한 "프로그램 A" 또는 "계획 A"로 알려진 것을 제안하며 독일 분단이 장기적으로 지속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케넌은 미국 국민이 조만간 독일에 주둔하는 것에 지쳐 미군 철수를 요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는 케넌은 소련이 동독에서 군대를 철수할 것이며, 이는 폴란드의 기지에서 쉽게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도 마찬가지로 철수해야 할 것이지만, 미국은 다른 서유럽 국가에 기지가 없기 때문에 이는 소련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마지막으로, 케넌은 독일 국민이 매우 자존심이 강하며 외국인에 의해 영원히 점령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므로 "독일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케넌의 해결책은 독일의 재통일과 중립화, 대부분의 영국, 미국, 프랑스, 소련군을 독일에서 철수시키고 국경 근처의 작은 고립 지역만 바다로 보급하며, 독일인들이 대부분 스스로 통치하도록 허용하면서 네 점령국으로 구성된 4대 강국 위원회가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이었다.
2.5. 정책 비판과 영향력의 변화
케넌의 영향력은 딘 애치슨이 1949년과 1950년 조지 마셜의 뒤를 이어 국무장관이 되면서 빠르게 감소했다. 애치슨은 소련의 "위협"을 주로 정치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고, 1948년 6월 시작된 베를린 봉쇄, 1949년 8월 소련의 첫 핵무기 실험, 한 달 후 중국 공산당 혁명, 1950년 6월 한국 전쟁의 시작을 그 증거로 보았다. 트루먼과 애치슨은 서방의 세력권을 명확히 하고 동맹 시스템을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케넌은 논문에서 아시아 본토를 "봉쇄" 정책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미국이 아시아에서 "우리가 달성할 수 있고 달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대해 지나치게 확장되어 있다"고 썼다. 대신 그는 일본과 필리핀이 "태평양 안보 시스템의 초석"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애치슨은 국무장관 취임 직후 프로그램 A를 승인하며, 케넌의 논문 여백에 "독일 분단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라고 썼다. 그러나 계획 A는 서독을 소련에 포기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미국 국방부로부터, 그리고 번영하고 민주적인 서독의 존재 자체가 동독, 즉 소련에 불안정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주장한 외교관 로버트 머피를 포함한 국무부 내부로부터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다. 더 중요하게는, 계획 A는 영국과 프랑스 정부의 승인을 필요로 했지만, 어느 쪽도 계획 A에 찬성하지 않았고, 독일 점령을 끝내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불평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여론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불과 4년 만에 연합국이 독일에 대한 통제를 완화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려워했으며, 지리적, 역사적 이유로 재통일된 독일이 소련에게만 어려움을 줄 것이라는 케넌의 확신을 공유하지 않았다. 1949년 5월, 계획 A의 왜곡된 버전이 프랑스 언론에 유출되었는데, 주요 왜곡은 미국이 재통일되고 중립적인 독일을 대가로 유럽 전체에서 철수할 의사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어진 소동 속에서 애치슨은 계획 A를 불허했다.
케넌은 애치슨과의 영향력을 잃었는데, 애치슨은 어쨌든 마셜보다 직원들에게 훨씬 덜 의존했다. 케넌은 1949년 12월 정책 기획 국장직을 사임했지만, 1950년 6월까지 부서에서 고문으로 남았다. 1950년 1월, 애치슨은 케넌을 폴 니체로 교체했는데, 니체는 군사력 계산에 훨씬 더 익숙했다. 이후 케넌은 고등연구소 소장인 온건파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초청을 받아 고등연구소 방문 교수로 임명되었다. 1949년 10월, 마오쩌둥 휘하의 중국 공산당은 중국 국공 내전에서 승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미국에서 "중국의 상실"로 알려진 이 사건은 리처드 닉슨과 조지프 매카시와 같은 공화당 정치인들이 주도하는 격렬한 우익 반발을 촉발시켰고, 이들은 "중국의 상실"을 민주당 트루먼 행정부를 공격하는 편리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트루먼, 애치슨, 그리고 케넌과 같은 다른 고위 관리들은 모두 이른바 상실을 허용한 데 대해 최소한 범죄적 태만으로 비난받았다. 케넌의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한 명인 외교관 존 패튼 데이비스 주니어는 1949년 11월 이 과정에서의 역할로 소련 스파이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경력을 망가뜨렸고 케넌을 경악시켰다. 케넌을 특히 불안하게 만든 것은 패튼 데이비스가 마오쩌둥이 중국 국공 내전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보고서에서 예측한 것에 대해 반역죄로 기소되었다는 점이었다. 이는 "중국의 상실"로 인한 히스테리 분위기 속에서 FBI가 그를 소련 스파이로 조사하기 시작하기에 충분했다. 패튼 데이비스 사건에 대해 케넌은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경고하며, 다음에는 어떤 외교관이 반역죄로 조사받을지 궁금해했다.
케넌은 1950년 3월 만화가 허버트 블록이 "매카시즘"이라고 명명한 히스테리 분위기를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
애치슨의 정책은 1950년 4월 미국 국가안보회의가 발표하고 케넌의 후임 정책 기획 국장인 폴 니체가 작성한 기밀 보고서 NSC 68로 실현되었다. 케넌과 또 다른 국무부 러시아 전문가인 찰스 볼렌은 냉전 정책의 기반이 된 NSC-68의 문구에 대해 논쟁했다. 케넌은 니체의 보고서에 암묵적으로 담긴 스탈린이 세계 정복을 위한 거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며, 스탈린이 실제로는 러시아의 세력을 과도하게 확장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주장했다. 케넌은 심지어 NSC-68이 전혀 작성되지 말았어야 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미국 정책을 너무 경직되고 단순하며 군사적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애치슨은 케넌과 볼렌의 주장을 기각하고 NSC-68이 암시하는 소련 위협의 가정을 지지했다.
케넌은 수소 폭탄 건설과 독일 재무장에 반대했는데, 이는 NSC-68의 가정에 의해 장려된 정책이었다. 한국 전쟁 (1950년 6월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면서 시작됨) 중, 국무부에서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진격하려는 계획이 진행 중이라는 소문이 돌자, 케넌은 이를 위험하다고 여겼고, 애치슨의 한국 강제 통일 목표를 지지하는 듯했던 극동 담당 국무차관 딘 러스크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2.5.1. 덜레스에게 보낸 메모
1950년 8월 21일, 케넌은 당시 미일 평화 조약 작업에 참여하고 있던 존 포스터 덜레스에게 장문의 메모를 제출했는데, 이 메모에서 그는 미일 관계를 넘어 아시아 전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개괄적으로 제시했다. 그는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적 사고를 "별로 유망하지 않고",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고 평했다. 한국 전쟁에 대해 케넌은 미국의 정책이 그가 "감정적, 도덕주의적 태도"라고 부른 것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는 "교정되지 않으면 쉽게 러시아와의 실제 충돌로 이어질 수 있고, 그 지역에 대한 현실적인 합의를 방해할 수 있다"고 썼다. 그는 한국 개입 결정을 지지했지만, "반소 한국 정권이 한반도 전체로 확장되는 것이 우리에게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썼다. 케넌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북아시아와 서태평양 지역에서 우리 정책을 결정하는 데 광범위하고 상대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재량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맥아더의 판단이 좋지 않다고 느껴 문제로 보았다.
2.5.2. 미국 외교에 대한 비판
케넌의 1951년 저서 『미국 외교』는 지난 50년간의 미국 외교 정책을 강력히 비판했다. 그는 유엔과 같은 다자적, 법률주의적, 도덕주의적 조직에 대한 미국의 참여와 의존에 대해 경고했다.
그의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케넌은 정부에서 결코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항상 자신을 아웃사이더로 여겼고 비판자들에게 인내심이 부족했다. 1944년부터 1946년까지 케넌이 부대사로 재직할 때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였던 W. 에버렐 해리먼은 케넌이 "러시아는 이해했지만 미국은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2.6. 주요 대사 활동
케넌은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에서 대사직을 수행하며 냉전 시대의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중요한 외교적 도전에 직면했다.
2.6.1. 소련 대사
1951년 12월, 트루먼 대통령은 케넌을 차기 소련 주재 미국 대사로 지명했고, 그의 임명은 상원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여러 면에서 (케넌의 당혹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행정부의 우선순위는 소련과의 차이점을 협상하는 것보다 소련에 대항하는 동맹을 구축하는 데 더 중점을 두었다. 케넌은 회고록에서 "내가 보기에는 우리는 어떤 양보도 하지 않고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가 정말로 전능하고 그렇게 해도 괜찮을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것이 사실인지 매우 의심스러웠다."고 회상했다.
모스크바에서 케넌은 이전 방문 때보다 분위기가 훨씬 더 엄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찰 경비원들이 그를 어디든 따라다니며 소련 시민들과의 접촉을 막았다. 당시 소련의 선전은 미국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비난했는데, 케넌은 이를 완전히 일축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 정책과 성명의 과도한 군사화로 인해... 모스크바에서 우리가 전쟁을 추구하고 있으며, 전쟁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였고,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라는 믿음에 기여한 것은 아닌지 자문하기 시작했다."
1952년 9월, 케넌은 대사직을 잃게 되는 발언을 했다. 기자회견에서 질문에 답하며 케넌은 모스크바 대사관저에서의 자신의 상황을 미국과 독일 간의 적대 행위가 시작된 지 몇 달 동안 베를린에 억류되어 있을 때 겪었던 상황에 비유했다. 그의 발언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련은 이를 나치 독일과의 암묵적인 비유로 해석했다. 소련은 즉시 케넌을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선언하고 그가 소련에 재입국하는 것을 거부했다. 케넌은 회고록에서 "내가 한 어리석은 말이었다"고 인정했다.
2.6.2. 아이젠하워 행정부 하의 케넌
케넌은 워싱턴으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강경파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와 의견 충돌에 휘말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새 행정부와 건설적으로 협력할 수 있었다. 1953년 여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케넌에게 솔라리움 작전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최고 기밀 팀 중 첫 번째 팀을 관리하도록 요청했다. 이 팀은 트루먼 행정부의 봉쇄 정책을 계속할 경우의 장단점과 기존 소련 영향력 지역을 "롤백"하려는 시도의 장단점을 검토했다. 프로젝트 완료 후, 대통령은 팀의 권고를 묵묵히 지지하는 듯 보였다.
대통령은 케넌의 입장에 자신의 권위를 빌려줌으로써, 미국 공화당 내 일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전임 행정부의 틀 안에서 자신의 행정부 전략을 수립할 의도를 암묵적으로 시사했다. 트루먼과 아이젠하워의 봉쇄 정책의 결정적인 차이는 미국이 막대한 군사비를 무기한 감당할 수 없다는 아이젠하워의 우려와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새 대통령은 소련이 행동하는 모든 곳에서 행동함으로써(위험을 피하기 위한 전략) 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행동할 여유가 있는 곳에서만 행동함으로써 비용을 최소화하려고 했다.
1954년, 케넌은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보안 허가를 취소하려는 정부의 노력 중에 오펜하이머의 인물 증인으로 출석했다. 정부를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케넌은 아이젠하워 행정부 관리들에게 자주 자문을 제공했다. CIA가 1956년 5월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 "비밀 연설" 녹취록을 입수했을 때, 케넌은 비밀 연설의 내용이 처음으로 공개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1956년 10월 11일, 케넌은 하원 외교 위원회에 증언하며 폴란드에서 진행 중인 대규모 시위에 대해 동유럽의 소련 통치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침식되고 있다"고 말했다.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이끄는 폴란드 공산당의 민족주의 파벌이 흐루쇼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바르샤바의 스탈린주의 지도부를 전복시켰고, 흐루쇼프는 마지못해 지도부 교체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케넌으로 하여금 폴란드가 "티토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예측하게 했다. 고무우카는 공산주의에 대한 모든 헌신에도 불구하고 폴란드가 모스크바로부터 더 독립적이기를 원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1957년, 케넌은 옥스퍼드 대학교 볼리올 칼리지의 조지 이스트먼 교수로 일하기 위해 미국을 떠났다. 이사야 벌린은 케넌이 볼리올 칼리지의 펠로우들이 "깊은 전통, 세련됨, 도덕적 자질로 다듬어진"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대신 펠로우들이 "지역 문제, 학문적 직함에 대한 한가한 가십"에 몰두하는 것을 보고 혐오감을 느꼈다고 썼다. "그는 그것에 대해 경악했다. 깊은 실망감. 영국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이상화된 이미지가 산산조각 났다." 케넌은 오펜하이머에게 보낸 편지에서 볼리올 칼리지의 펠로우들에 대해 "평생 이렇게 심한 뒷담화, 분노, 분열은 본 적이 없다"고 썼다. 같은 편지에서 케넌은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펠로우는 벌린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서로에 대한 악의적인 가십을 퍼뜨리는 데 집착했다고 썼다. 그러나 케넌은 볼리올 칼리지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그의 주 2회 국제 관계 강의는 그가 말했듯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 수백 명의 학생들이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줄을 섰기 때문에 더 큰 강의실을 배정받아야 할 정도였다.
1957년 10월, 케넌은 BBC에서 『러시아, 원자 그리고 서방』이라는 제목으로 리스 강연을 진행하며, 독일 분단이 계속된다면 "평화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할 것"이라고 말했다. 케넌은 1945년 독일 분단이 필요했다고 옹호했지만,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이를 영구적인 태도로 굳어지게 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는 유럽 강대국이 아닌 미국에게 너무 많은 것을, 너무 오랫동안 기대한다. 이는 유럽인들 자신의 힘과 능력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하지 않는다. 이는 현재 베를린의 지위를 지배하는 극히 불안정하고 불건전한 조치를 해결하지 못하며, 이 조치에 대한 최소한의 방해조차 쉽게 새로운 세계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이는 위성 지역의 현재 위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 이는 일시적이었던 것을 영구화한다. 이는 유럽의 절반을 암묵적으로 러시아에 할당한다. ... 베를린의 미래는 독일 전체의 미래에 필수적이다. 그 주민들의 필요와 그곳 서방 입장의 극심한 불안정성만으로도 서방의 누구도 현재의 독일 분단을 만족스러운 영구적 해결책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된다. 다른 요소가 관련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독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케넌은 1949년의 "프로그램 A" 버전을 옹호하며 독일 통일의 전제 조건으로 대부분의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군을 독일에서 완전히 철수시키고 독일을 중립화할 것을 요구했다. "독일 문제" 해결 요구 외에도 케넌은 동유럽의 소련 통치가 "흔들리고 있다"고 예측했으며, 서방 강대국이 할 수 있는 최선은 확고하지만 본질적으로 비대결적인 정책을 소련에 대해 추구하여 흐루쇼프가 동유럽을 포기하는 것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설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리스 강연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케넌은 애치슨과 리처드 닉슨 부통령과 "독일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을 놓고 매우 공개적인 설전을 벌였다. 서독 외무장관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는 케넌의 리스 강연에 대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독일 국민의 친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2.6.3. 유고슬라비아 대사
존 F. 케네디의 1960년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케넌은 미래의 대통령에게 행정부가 국가의 외교 문제를 개선해야 하는 방법에 대한 몇 가지 제안을 담은 편지를 썼다. 케넌은 "필요한 것은 일련의... 계산된 조치들이다. 이는 적의 균형을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균형을 잃게 만들도록 시간을 맞추고, 놀라움의 이점을 유지할 수 있도록 충분히 비밀스럽게 준비되어야 한다"고 썼다. 그는 또한 행정부가 "러시아와 중국 간의 관점과 정책의 차이를 확보"하도록 촉구했는데, 이는 공산주의 중국과 거리를 두고 싶어 했던 소련 총리 니키타 흐루쇼프와의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우리는... 흐루쇼프의 정치적 인격에 대해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비현실적인 희망을 품지 않으면서도, 그를 정치적으로 계속 유지하고 그가 구현하는 경향이 모스크바에서 살아남도록 장려해야 한다"고 썼다. 또한 그는 미국이 동유럽에서 소련의 힘을 약화시키고 위성 정부의 독립적인 성향을 장려함으로써 소련 블록 내에서 분열을 일으키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케넌은 케네디의 고문들에게 일자리 후보로 고려되지 않았지만, 대통령 자신이 케넌에게 폴란드 또는 유고슬라비아 대사직을 선택하도록 제안했다. 케넌은 유고슬라비아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케네디의 제안을 수락하고 1961년 5월 유고슬라비아에서 직무를 시작했다.
케넌은 유고슬라비아의 대소 정책을 강화하고 동구권의 다른 국가들이 소련으로부터 자율성을 추구하도록 장려하는 임무를 맡았다. 케넌은 10년 전 모스크바에서의 경험보다 베오그라드에서의 대사직이 훨씬 개선되었다고 느꼈다. 그는 "나는 예외적으로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보조원들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들의 능력을 나 자신이 존경했고, 그들의 판단을 높이 평가했으며, 나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항상... 열정적으로 협력적이었다... 내가 불평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라고 말했다. 케넌은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미국 외교관들을 정중하게 대우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러시아인들이 모스크바에서 자신을 대우했던 방식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는 유고슬라비아인들이 "나를, 옳든 그르든, 미국에서 저명한 인물로 여겼고, 그들이 이전에 들어본 이름의 사람이 베오그라드로 파견되는 것을 기뻐했다"고 썼다.
케넌은 베오그라드에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 대통령과 그의 외무장관 코차 포포비치는 케네디가 임기 동안 반유고슬라비아 정책을 채택할 것이라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티토와 포포비치는 케네디의 피억압 민족 주간 관찰 결정을 미국이 유고슬라비아의 반공 해방 노력을 지원할 것이라는 신호로 해석했다. 티토는 또한 CIA와 미국 국방부가 미국 외교 정책의 진정한 지휘자라고 믿었다. 케넌은 티토의 미국 외교 정책 기관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키려 노력했지만, 그의 노력은 피그스만 침공과 U-2 스파이 사건이라는 두 차례의 외교적 실수로 인해 훼손되었다.
유고슬라비아와 미국 간의 관계는 빠르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1961년 9월, 티토는 비동맹 국가 회의를 개최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미국 정부가 친소련적이라고 해석하는 연설을 했다. 역사가 데이비드 메이어스에 따르면, 케넌은 티토의 친소련적 정책이 사실은 "서방과의 관계 개선에 반대하는 강경파와 주요 소련-미국 대결을 추진하던 중국에 맞서 폴리트뷰로 내에서 흐루쇼프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계략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정책은 또한 티토에게 "크렘린에서 그의 공산주의적 자격에 대한 미래의 중국 공격에 대비하여 사용할 수 있는 신뢰를 얻게 했다." 정치인들과 정부 관리들이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의 관계에 대해 점점 더 우려를 표명했지만, 케넌은 이 나라가 "객관적으로 미국의 목적에 부합하는 냉전에서의 비정상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케넌은 또한 몇 년 안에 유고슬라비아의 사례가 동구권 국가들이 소련으로부터 더 많은 사회적, 경제적 자율성을 요구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었다.
1962년까지 의회는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재정 원조를 거부하고, 유고슬라비아 전투기 예비 부품 판매를 철회하며, 이 나라의 최혜국 대우 지위를 취소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케넌은 이 법안이 유고슬라비아와 미국 간의 관계를 긴장시킬 뿐이라고 주장하며 강력히 항의했다. 케넌은 1962년 여름 워싱턴에 와서 이 법안에 반대하는 로비를 벌였지만, 의회로부터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케넌을 지지했지만, 잠재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에 대해 의회에서 자신의 미미한 다수 지지를 위태롭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공개적으로는 확고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1962년 10월 27일 베오그라드 주재 미국 대사관 직원들에게 한 강연에서 케넌은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한 케네디의 정책을 강력히 지지하며, 쿠바는 여전히 미국의 세력권 내에 있으므로 소련은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그의 연설에서 케넌은 피델 카스트로 정권을 "전후 기간 동안 세계가 본 가장 피비린내 나는 독재 정권 중 하나"라고 부르며, 이는 케네디의 공산 쿠바 정부 전복 노력을 정당화한다고 보았다. 흐루쇼프가 쿠바에서 소련 미사일을 철수하는 대가로 미국 미사일을 튀르키예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한 것에 대해 케넌은 튀르키예는 소련의 세력권 내에 없었지만 쿠바는 미국의 세력권 내에 있었으므로 미국이 튀르키예에 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은 합법적이고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은 불법적이라고 주장했다.
1962년 12월 티토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흐루쇼프를 만났을 때, 케넌은 티토가 1915년부터 1920년까지 러시아에서 살았고, 1917년 러시아 혁명에 대한 감상적인 기억을 여전히 가지고 있어 러시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그러나 케넌은 티토와의 교류를 통해 그가 냉전에서 유고슬라비아를 중립으로 유지하는 데 매우 확고하게 헌신하고 있음을 관찰했으며, 모스크바 방문 중 러시아 문화에 대한 애정 표현이 유고슬라비아가 소련 블록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케넌에게는 중국-소련 분열로 인해 흐루쇼프가 소련이 폭력적인 제국주의 강대국이라는 중국의 비난에 맞서 티토와의 화해를 원하게 되었고, 티토는 서방과의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케넌은 또한 티토가 비동맹 운동을 옹호하는 것을 "비동맹 운동의 본질적 가치"(대부분의 비동맹 국가가 가난한 제3세계 국가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거의 없었다)에 기반하기보다는 중요한 국가 블록을 대변하는 세계 지도자로 자신을 내세워 서방과 동방 모두와의 협상력을 높이는 방법으로 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케넌은 고위 유고슬라비아 관리들이 티토의 비동맹 운동 칭찬 연설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외교적 수사일 뿐이라고 자신에게 말했다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그러나 의회의 많은 사람들은 티토의 연설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유고슬라비아가 반서방 국가라는 결론에 도달하여 케넌을 매우 당혹스럽게 했다. 케넌은 티토가 냉전에서 유고슬라비아가 중립이기를 원했기 때문에 유고슬라비아가 서방과 동맹을 맺을 것이라고 기대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유고슬라비아의 중립은 유고슬라비아의 강력한 군대가 소련의 지휘하에 있지 않고 소련이 나토 회원국인 이탈리아와 그리스를 위협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공군 또는 해군 기지를 유고슬라비아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장했기 때문에 미국의 이익에 부합했다. 더 중요하게는, 케넌은 유고슬라비아의 "시장 사회주의" 정책이 동유럽 다른 지역보다 더 높은 생활 수준을 제공했으며, 다른 공산주의 국가보다 표현의 자유가 더 크고, 크렘린의 통제하에 있지 않은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의 존재 자체가 다른 공산주의 지도자들에게 더 큰 독립에 대한 욕구를 고취시켰기 때문에 소련 블록에 매우 불안정하게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미국-유고슬라비아 관계가 점진적으로 악화되면서 케넌은 1963년 7월 말 대사직을 사임했다.
2.7. 미국 외교 정책에 대한 비판
케넌은 자신의 봉쇄 정책이 군사화되는 것을 비판하며, 이후 미국의 외교 정책 전반에 걸쳐 다양한 비판적 견해를 제시했다.
2.7.1. 베트남 전쟁 반대
1960년대 동안 케넌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비판하며, 미국이 그 지역에 중요한 이해관계가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1966년 2월, 케넌은 상원 외교 위원회 의장인 J. 윌리엄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의 요청으로 상원 외교 위원회에 증언하여, 베트남에 대한 "집착"이 미국의 세계적 리더십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린든 B. 존슨 행정부가 자신의 정책을 순전히 군사적인 접근 방식으로 왜곡했다고 비난했다. 존슨 대통령은 친구에서 적으로 변한 풀브라이트가 소집한 청문회에 너무 화가 나서 1966년 2월 5일 호놀룰루에서 응우옌 반 티에우 국가원수와 응우옌 까오 끼 남베트남 총리와 함께 갑작스럽고 예고 없는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미국이 베트남에서 훌륭한 진전을 이루고 있으며 사회 및 경제 개혁에 전념하고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청문회를 무색하게 만들려 했다.
케넌은 만약 미국이 이미 베트남에서 싸우고 있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렇게 개입하기를 원하는 어떤 이유도 알지 못하며, 그렇게 하지 않기를 원하는 여러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고 증언했다. 그는 베트남에서 즉각적인 철수에는 반대하며 "성급하고 무질서한 철수는 현재 상황에서 우리 자신의 이익, 심지어 세계 평화에도 해를 끼칠 수 있다"고 말했지만, "불건전한 입장을 단호하고 용감하게 청산하는 것이 사치스럽고 비현실적인 목표를 가장 고집스럽게 추구하는 것보다 이 세상의 여론에서 더 많은 존경을 얻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의 증언에서 케넌은 호찌민이 "히틀러가 아니며", 그에 대해 읽은 모든 것이 호찌민이 공산주의자이지만 소련이나 중국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는 베트남 민족주의자임을 시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북베트남을 패배시키는 것은 "이 나라가 책임지고 싶지 않은" 인명 손실을 의미할 것이라고 증언했다. 케넌은 존슨 행정부의 베트남 정책을 "쥐에게 겁먹은 코끼리"에 비유했다.
케넌은 자신의 증언을 존 퀸시 애덤스의 발언을 인용하며 마무리했다. "미국은 파괴할 괴물을 찾아 해외로 나가지 않는다. 미국은 모든 이의 자유와 독립을 바라는 자이다. 미국은 오직 자신의 것을 옹호하고 정당화할 뿐이다." 케넌은 이어서 "신사 여러분, 존 퀸시 애덤스가 이 말을 할 때 정확히 무엇을 염두에 두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직접적이고 적절하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청문회는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고(당시에는 드문 일), 케넌의 "봉쇄의 아버지"라는 명성은 그의 증언이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도록 보장했으며, 존슨 행정부가 베트남에서 "봉쇄" 정책을 수행하고 있다고 공언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따라서 존슨은 주요 텔레비전 방송사들에게 케넌의 증언을 방영하지 말라고 압력을 가했고, 그 결과 CBS는 케넌이 상원 앞에 있을 때 아이 러브 루시 재방송을 방영하여 CBS 텔레비전 프로그램 국장 프레드 프렌들리가 항의하며 사임하게 만들었다. 대조적으로 NBC는 대통령의 압력에 저항하여 상원 외교 위원회 회의를 방영했다. 케넌의 증언에 맞서기 위해 존슨은 딘 러스크 국무장관을 상원 외교 위원회에 보내 "공산주의 세력의 강제적이고 위협적인 확산"을 막기 위한 도덕적으로 정당한 전쟁이라고 증언하게 했다.
예상과 달리 케넌의 상원 증언은 텔레비전에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케넌 자신은 한 달 후 엄청난 양의 편지를 받았다고 회상하며 대중의 반응에 대해 "정말 엄청났다. 이 정도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썼다. 칼럼니스트 아트 부흐발트는 아내와 친구들이 평소의 연속극 대신 케넌의 증언을 시청하며 하루를 보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하며, 미국 주부들이 그런 문제에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다고 했다. 풀브라이트의 전기 작가는 케넌과 제임스 개빈 장군의 증언이 "무책임한 학생이나 과격한 급진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베트남 전쟁에 반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했다고 썼다. 1966년 2월 케넌의 증언은 국무부를 떠난 후 대중의 의견에 영향을 미치려는 그의 여러 시도 중 가장 성공적인 것이었다. 그가 상원 앞에 나타나기 전에는 미국 대중의 63%가 존슨의 베트남 전쟁 처리를 지지했지만, 그의 증언 후에는 49%만이 지지했다.
2.7.2. 군비 경쟁 비판
1967년 회고록 첫 권을 출판했을 때, 봉쇄는 군사적 "반격" 외의 다른 것을 포함했다. 그는 자신이 영향을 미친 정책이 냉전의 군비 증강과 연관되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았다. 회고록에서 케넌은 봉쇄가 군사화된 미국 외교 정책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격"은 유럽 사회에 대한 전쟁의 파괴적인 영향에 맞선 서유럽의 정치적, 경제적 방어를 의미했다. 그에 따르면, 전쟁으로 지친 소련은 냉전 초기에 미국이나 동맹국에 심각한 군사적 위협을 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념적, 정치적 경쟁자였다. 케넌은 소련, 영국, 독일, 일본, 북미가 미국의 핵심 이익 지역으로 남아 있다고 믿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특히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하에서 데탕트가 끝나면서 그는 재개된 군비 경쟁의 주요 비판자가 되었다.
2.7.3. 나토 확장 반대
냉전 시대 미국의 봉쇄 정책에 핵심적인 영감을 주었던 케넌은 나중에 NATO 확장을 "잠재적으로 엄청난 전략적 실수"라고 묘사했다. 케넌은 빌 클린턴 행정부의 코소보 전쟁과 (반세기 전에도 반대했던) NATO 확장에 반대하며, 두 정책 모두 러시아와의 관계를 악화시킬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1998년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상원이 NATO의 1차 확장을 비준한 직후, 그는 "전혀 그럴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것이 러시아에서 "민족주의적, 반서방적, 군사주의적" 의견을 "자극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러시아인들은 점차 매우 부정적으로 반응할 것이고 이는 그들의 정책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케넌은 또한 러시아가 "서유럽을 공격하려고 안달이 났다"는 이야기에 대해 불쾌해하며, 오히려 러시아 국민은 "소련 정권을 제거하기 위해" 봉기했으며, 그들의 "민주주의는 당시 NATO에 가입한 다른 나라들만큼이나 발전해 있었다"고 설명했다.
2.7.4. 말년
케넌은 말년에도 활기차고 총명했지만, 관절염으로 인해 휠체어를 사용했다. 말년에 케넌은 "냉전 극단주의의 전반적인 효과는 소련을 덮친 거대한 변화를 가속화하기보다는 지연시켰다"고 결론지었다. 98세에 그는 이라크 전쟁의 예측 불가능한 결과에 대해 경고했다. 그는 이라크 공격이 "테러와의 첫 번째 전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두 번째 전쟁을 벌이는 것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으며,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알카에다를 사담 후세인과 연관시키려는 노력을 "한심하게도 지지할 수 없고 신뢰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케넌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미국 외교, 특히 군사 외교의 역사를 연구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특정 목적을 가지고 전쟁을 시작할 수 있지만, 결국에는 이전에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완전히 다른 것들을 위해 싸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 전쟁은 그 자체의 추진력을 가지고 있으며, 일단 시작하면 모든 사려 깊은 의도에서 벗어나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대통령이 원하는 대로 이라크에 들어간다면, 어디서 시작하는지는 알지만, 어디서 끝날지는 결코 알 수 없다."
말년에 케넌은 2003년에 설립된 버몬트 제2공화국이라는 분리주의 운동의 이상을 받아들였다. 미국 남서부 지역으로의 대규모 멕시코 이민을 언급하며, 케넌은 2002년에 "이 나라의 남부 및 남서부 대다수 지역의 문화와 일부 북부 지역의 문화 사이에 점점 더 뚜렷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전자의 경우, "이 지역 인구의 대부분의 문화는 초기 미국 전통에서 물려받은 것보다는 주로 라틴 아메리카적 성격을 띠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미국에]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이 없어서 무분별하게 다국어 혼합물로 버려져야 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케넌은 자신의 경력 내내 1850년대의 노 나씽과 유사하거나 심지어 그를 능가하는 "강경한 토착주의 전통"을 대표했다고 주장된다. 케넌은 또한 미국 여성들이 너무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2004년 2월, 학자, 외교관, 프린스턴 동문들이 케넌의 10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대학 캠퍼스에 모였다. 참석자 중에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 국제 관계 이론가 존 미어샤이머, 언론인 크리스 헤지스, 전 대사이자 직업 외무관 잭 F. 매틀록 주니어, 그리고 케넌의 전기 작가 존 루이스 개디스가 있었다.
2.8. 케넌 연구소 설립
러시아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자였던 케넌은 우드로 윌슨의 이름을 딴 학술 기관인 윌슨 센터 소장 제임스 H. 빌링턴과 역사가 S. 프레더릭 스타와 함께 케넌 연구소 설립을 주도했다. 이 연구소는 러시아 제국 학자이자 이 문서의 주제와 친척 관계인 미국인 조지 케넌 (탐험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연구소의 학자들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유라시아 지역을 연구한다.
3. 학문적 경력과 후기
1957년 케넌은 BBC의 초청을 받아 연례 리스 강연을 진행했는데, 이는 "러시아, 원자 그리고 서방"이라는 제목의 6부작 라디오 강연이었다. 이 강연들은 러시아와 서방 관계의 역사, 영향, 그리고 가능한 결과들을 다루었다.
1963년 유고슬라비아 대사직을 마친 후, 케넌은 남은 생애를 학계에서 보냈으며, 미국 외교 정책의 주요 현실주의 비평가가 되었다. 1950년부터 1952년까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18개월간 학자로 지낸 후, 1956년 고등연구소 역사학부 교수로 합류하여 남은 생애를 그곳에서 보냈다.
3.1. 반문화 비판
케넌의 베트남 전쟁 반대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에 대한 어떤 동정심도 의미하지 않았다. 1968년 저서 『민주주의와 학생 좌파』에서 케넌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좌파 대학생 시위자들을 폭력적이고 편협하다고 비난했다. 케넌은 1960년대의 "신좌파" 학생들을 19세기 러시아의 "나로드니키" 학생 급진주의자들과 비교하며, 둘 다 오만하고 엘리트주의적인 집단으로 그들의 사상이 근본적으로 비민주적이고 위험하다고 비난했다. 케넌은 학생 급진주의자들의 대부분의 요구가 "알 수 없는 말"이며, 그들의 정치적 스타일이 유머 감각의 완전한 부재, 극단주의적 경향, 무분별한 파괴적 충동으로 특징지어진다고 비난했다. 케넌은 학생 급진주의자들이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옳았다고 인정했지만, 그들이 정책과 제도를 혼동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그는 단지 어떤 제도가 잘못된 정책을 실행했다고 해서 그것이 사악하고 파괴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케넌은 1960년대 후반의 학생 급진주의를 그가 "병든 세속주의"라고 부른 미국 생활의 원인으로 돌렸는데, 그는 미국 생활이 너무 물질주의적이고 피상적이어서 미국을 위대하게 만든 "유기적 성장의 느리고 강력한 과정"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케넌은 미국 영혼의 병폐가 "감정적, 지적 성장의 극심한 불균형"을 가진 젊은 미국 세대를 만들었다고 썼다. 케넌은 자신의 책을 마무리하며 자신이 젊었을 때의 미국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그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광고에 현혹되어 소비주의적인 생활 방식에 빠져들었으며, 이로 인해 주변의 환경 파괴와 정치인들의 심각한 부패에 무관심해졌다고 불평했다. 케넌은 자신이 진정한 급진주의자라고 주장하며 "그들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나의 우려는 그들의 우려를 능가할 뿐만 아니라,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그들의 것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다"라고 말했다.
1968년 6월 1일 윌리엄스버그에서 행한 연설에서 케넌은 학생 시위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폭동을 다루는 데 있어 당국이 "과도한 관용"을 보였다고 비판했다. 케넌은 신좌파와 블랙 파워 운동을 "다음 선거에서만 유권자에게 책임을 지고, 언론이나 심지어 법원에는 책임을 지지 않는" 방식으로 진압할 것을 요구했다. 케넌은 신좌파와 블랙 파워 운동가들을 재판하기 위해 "특별 정치 법원"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미국을 혼란에서 구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케넌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방문을 바탕으로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 마음 한구석에 부드러운 감정을 가지고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실행되는 방식이 아니라 개념으로서 말이다"라고 말했다. 케넌은 아파르트헤이트의 사소하고 굴욕적인 측면을 싫어했지만, 자신이 공유하는 칼뱅주의 신앙을 가진 아프리카너들의 "깊은 종교적 진정성"에 대해서는 많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흑인들이 나라를 운영할 능력은 없다고 일축했다. 케넌은 1968년에 미국에도 아파르트헤이트와 유사한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그가 평균적인 흑인 미국 남성이 "자신이 이해하지도 존경하지도 않는 시스템"에서 운영할 능력을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반투스탄을 모델로 삼아 미국의 일부 지역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위해 따로 지정할 것을 옹호했다. 케넌은 1960년대의 사회 변화를 승인하지 않았다. 1970년 덴마크를 방문했을 때, 그는 청소년 축제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이를 "히피들로 들끓는 - 오토바이, 여자 친구, 마약, 포르노, 술 취함, 소음"이라고 혐오스럽게 묘사했다. 그는 이 군중을 보고 "건장한 러시아 보병 한 중대가 이들을 도시에서 몰아낼 수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4. 사상과 철학
케넌의 외교 정책 사상은 국제 관계의 '현실주의' 학파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특히 도덕주의적 외교와 대중 여론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통해 독자적인 철학을 구축했다.
4.1. 현실주의 외교
케넌은 냉전 당시 미국의 가장 유명한 책사였던 헨리 키신저와 겹치는 사상을 갖고 있다. 조지 케넌과 키신저 두 사람 모두 "탈감정주의"를 갖고 있었고 늘 강조했었다. 키신저 역시 베트남 전쟁의 빠른 종결을 위해 베트남과 협상 시도도 했고, 조지 케넌도 한국 전쟁에서 미국이 38선 이북까지 수복하기 시작하자 이를 저지하려는 시도를 했었다는 행보까지 똑같다. 한마디로, "선을 넘지 말고 선을 지키며 냉철하게 행동하자"는 주의였다. 두 사람 모두 "머리를 차갑게 하고, 세계 정세를 객관적으로 보며 현실적인 판단을 해 국익을 우선시한다"는 현실주의적인 외교 정책 마인드를 갖고 있었다. 중요한 건 이는 미국이 잘못된 길로 걸어가거나 손해 보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길 걱정하는 시야로 바라보는 애국적인 외교 판단이었다. "파괴할 괴물을 찾기 위해 해외로 나가지 말라"는 말처럼, 눈앞의 보이는 적대세력의 겉모습만 보고 달려들고 보는 태도나 타입의 애국자들에 대한 경고와 충고였다.
러셀은 정치적 현실주의라는 사상 학파가 케넌의 외교관 및 역사가로서의 작업의 기반을 형성했으며, 19세기 이래 미국 외교 정책이 건국의 아버지들의 현실주의 학파에서 국제 관계의 이상주의적 또는 윌슨주의 학파로 전환된 특징을 지닌 논쟁과 여전히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현실주의 전통에 따르면 안보는 권력 균형 원칙에 기반하며, 윌슨주의(현실주의자들에게는 비실용적이라고 간주됨)는 국가 운영에서 도덕성을 유일한 결정 요인으로 삼는다. 윌슨주의자들에 따르면 해외 민주주의 확산은 외교 정책으로서 중요하며 도덕은 보편적으로 유효하다. 빌 클린턴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미국 외교는 윌슨주의 학파를 너무나도 강하게 대변하여 현실주의를 선호하는 이들은 클린턴 대통령의 정책을 사회 사업에 비유했다. 케넌에 따르면, 미국 외교에 대한 그의 개념은 현실주의적 접근 방식에 기반을 두었으며, 권력의 현실과 국익을 고려하지 않는 그러한 도덕주의는 자멸적이며 미국 국력의 감소를 초래할 것이다.
그의 역사적 저술과 회고록에서 케넌은 민주주의 외교 정책 입안자들, 특히 미국의 실패를 자세히 한탄한다. 케넌에 따르면, 미국 정책 입안자들이 갑자기 냉전과 마주했을 때, 그들은 "기대에서는 유토피아적이고, 개념에서는 법률적이며, 타인에게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도덕주의적이고, 우리 자신에게는 고결함과 정직함의 정도에서 자기의적인" 합리화와 수사학 외에는 거의 물려받은 것이 없었다. 문제의 근원은 공공 여론의 힘인데, 이 힘은 필연적으로 불안정하고, 진지하지 못하며, 주관적이고, 감정적이며, 단순하다. 케넌은 미국 대중이 "원시적인 수준의 슬로건과 징고주의적 이념적 영감"을 통해서만 외교 정책 목표를 위해 단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스캠블은 케넌이 트루먼 행정부의 외교 정책 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케넌이 전 세계적 또는 거점 봉쇄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단순히 미국과 소련 간의 세력 균형을 회복하기를 원했다고 말한다. 역사가 존 루이스 개디스와 마찬가지로 미스캠블은 케넌이 개인적으로는 정치적 봉쇄를 선호했지만, 그의 권고는 궁극적으로 전 세계적 봉쇄보다는 거점 봉쇄에 더 초점을 맞춘 정책으로 이어졌음을 인정한다.
4.2. 봉쇄의 아이콘
1947년 '소련 봉쇄'를 주창한 것만큼, 그는 "봉쇄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사의 한 거인이다. 그는 키신저처럼 전쟁이 길어지는 것을 막고자 하는 현실주의자였지만, 그렇다고 적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선을 넘지 말자는 주의이나, 선을 튼튼하게 만들려고 했다. 적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그의 태도가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봉쇄론으로 발전했다.
4.3. 냉전에 대한 시각
그는 중공을 자주적인 국가로서 소련의 동맹이 아니라, 소련의 위성국가로 봤다. 최종 적은 소련이라는 그의 생각을 살펴볼 수 있는 발언이다. 그와 키신저가 생각한 선을 넘지 않는 주의는 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이 서로 선을 넘지 않고 경쟁하는 대결 구도로 이끌어 가게 됐다.
케넌의 외교 정책에 대한 기본 개념은 "5대 산업 지대"였다. 이들 대부분을 통제하면 지배적인 세계 강대국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5대 산업 지대"는 미국, 영국, 라인강 계곡 주변 지역(즉, 독일의 라인란트 및 루르 지역, 프랑스 동부, 저지대 국가), 소련, 그리고 일본이었다. 케넌은 소련을 제외한 "산업 지대"가 미국과 동맹을 맺으면 미국이 세계의 지배적인 강대국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따라서 "봉쇄"는 세계의 "산업 지대" 통제에만 적용되었다. 케넌은 제3세계 민족들을 상당히 경멸했으며, 유럽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부분을 지배하는 것을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1940년대 후반 미국 관리들에게 일반적이었지만, 케넌은 평생 동안 이러한 견해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특이했다. 1950년대에는 덜레스와 같은 많은 관리들이 평균적인 백인 미국인이 비백인 민족을 싫어한다는 인식이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서 미국의 이미지를 해치고 있으며, 이는 결국 소련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케넌은 미국이 제3세계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곳에는 가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몇 가지 예외는 있었는데, 케넌은 라틴 아메리카를 미국의 세력권 내에 있다고 보았으며, 워싱턴이 라틴 아메리카 공화국 지도자들에게 "우리 편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알려야 한다고 느꼈다. 애치슨은 케넌이 1950년 3월에 작성한 보고서에 너무 불쾌해했는데, 이 보고서에서 케넌은 유럽인, 인도인, 아프리카 노예 간의 혼혈이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적 후진성의 근본 원인이라고 제안했기 때문에 국무부의 다른 부서에 배포하는 것을 거부했다. 케넌은 이란의 석유와 수에즈 운하가 서방에 중요하다고 느꼈으며, 미국이 모하마드 모사데그와 무스타파 엘나하스의 요구에 맞서 영국을 지지하여 각각 이란 석유 산업과 수에즈 운하의 통제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케넌은 아바단 (이란 석유 산업의 중심지)과 수에즈 운하가 경제적 이유로 서방에 중요하며, 이는 서방 강대국이 이 지역을 통제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한다고 썼다.
4.3.1. 일본 전체주의화와 미국 책임론에 관한 견해
케넌은 제2차 세계 대전 전간기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이 차지했던 입지와 대륙에 대한 이해관계를 경시한 나머지 일본 국내의 극단주의 세력이 부상하게끔 조장한 측면이 있었고, 그들을 수정주의 노선으로 치닫게 만들었다고 보았다. 그 결과 중일전쟁 및 진주만 사태로 이어지는 역사적 조류가 형성되었으며, 일본을 패망시키긴 했지만, 그로 인해 파생된 세력 균형 구조상의 공백은 소련과 공산화된 중국이 차지해버리는 오히려 더 나쁜 결과만 초래했을 따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 미국이 한국에서 불행한 상황에 처한 건 2차 대전 이전에 일본의 권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또한 아무런 희망적인 대안조차 제시하지 못한 주제에 문호 개방을 빙자해 일본을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무작정 몰아내려고 고집한 끝에 일종의 '얄궂은 벌'을 받은 후과인 셈이다"라고 말했다. 즉, 미국이 일본 입장을 전혀 생각 안 해주고 일본이나 아시아에 무관심했다. 그 탓에 일본을 전쟁할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몰아붙인 미국의 책임도 없지 않다. 그 벌로 중국, 러시아를 상대로 미국 혼자서 싸워야 하는 벌을 달게 받게 생겼다는 논리다. 조지 케넌은 방일할 때에도 더글러스 맥아더와 자주 만났는데, 그를 일본 관리보다는 연합군 최고 사령관이라는 명칭을 써서 불렀다. 이런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 역시 조지 케넌의 사상을 공유했다는 것을 맥아더의 다음 연설에서 알 수 있다.
"일본을 통치한 뒤, 일본의 내부 사정을 알게 됐다. 생각보다 더 가난하고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일본은 자원이 부족한데 대공황으로 세계 무역이 제기능을 하지 않아 상품을 내다 팔 수 없었고 경제위기의 돌파구로 전쟁 밖에 없었다. 미국의 자원 무역제재 조치는 일본에 치명적이었고 일본은 (미국과의 확전으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유럽 민주주의 국가들하고 지역적으로 가까이 있는 독일은 민주주의를 충분히 알고도 파시즘으로 빠졌던 반면, 일본은 그렇지 못하고 주변에 민주주의 국가들이 없어 충분히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일본의 정신연령은 13세의 청소년이다. 명예높은 미국이 13세의 청소년 같은 판단력을 가진 자에게 성인과 똑같은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도쿄 국제군사재판을 겨냥한 발언)"
4.3.2.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언급
케넌은 항상 감정주의 외교정책을 경계할 것을 강조했다. 중국 민족주의 지도자 장제스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대만을 강제로 점령하려는 시도에 반대해야 한다고 믿었다.
1950년 6월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을 때 케넌은 남한을 방어하기 위해 미국의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을 지지했지만, 봉쇄 정책에 따라 정치적 목표는 현상 유지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본질적으로 그는 공산주의 폭정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십자군을 포함하여 십자군에 반대했다. 트루먼 행정부 내에서 그는 미군이 38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권고했다.
1950년 8월, 케넌은 인도차이나에서 미국의 정책이 프랑스에서 정치적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프랑스를 인수하고 미국이 이미 영국의 일부를 맡았던 방식으로 프랑스 제국의 책임을 맡게 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 경고에도 불구하고 조지 케넌은 처음에 인도차이나에서 공산주의를 봉쇄하려는 미국의 노력을 지지했다. 결국 그는 유고슬라비아 주재 미국 대사로서 케네디 행정부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케넌은 점차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미국이 요구하는 이익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그 갈등에 투자하고 있다고 걱정했다. 그는 그 전쟁에서 공산주의의 승리가 세계적 권력 균형을 바꿀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1966년 상원 외교 위원회 증언에서 그는 파괴할 괴물을 찾기 위해 해외로 나가지 말라는 존 퀸시 애덤스의 유명한 경고를 인용했고, 미국은 "불건전한 입장의 청산이... 사치스럽거나 타협하지 않는 목표를 완고하게 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존경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믿었다.
키신저는 세계에 대한 닉슨-키신저의 접근 방식(소련과의 데탕트, 중국 개방, 베트남 전쟁 참전 종료)이 케넌에게 호의적이었다고 평가했다. 한때 키신저는 케넌이 "미국의 어느 누구보다 나의 견해를 더 잘 이해한다"고 말했다. 극동 지역의 사건과 발전에 대한 그의 견해를 포함한 조지 케넌의 지정학적 세계관은 항상 권력 균형에 대한 비감정적인 계산과 인간 본성의 한계와 비극에 대한 감사를 기반에 두고 있었다.
5. 저술 및 출판물

고등연구소 재직 기간 동안 케넌은 국제 관계에 관한 17권의 책과 수십 편의 논문을 저술했다. 그는 1956년에 출판된 『러시아, 전쟁을 떠나다』로 퓰리처상 (역사 부문), 전미 도서상 (논픽션 부문), 밴크로프트 상, 프랜시스 파크먼 상을 수상했다. 그는 1968년 『회고록, 1925-1950』으로 다시 퓰리처상과 전미 도서상을 수상했다. 1963년까지의 회고록을 담은 두 번째 권은 1972년에 출판되었다. 그의 다른 저서로는 『미국 외교, 1900-1950』, 1989년에 출판된 『삶의 스케치』, 1993년의 『험난한 언덕 주위』 등이 있다.
그의 순수 역사 저술은 1875년부터 그의 시대까지의 러시아와 서방 관계에 대한 6권의 기록에 달한다. 1894년부터 1914년까지의 기간은 계획되었지만 완성되지 못했다. 그는 주로 다음 사항에 관심을 가졌다.
- 제1차 세계 대전이 정책 선택으로서의 어리석음: 그는 현대 전쟁의 직간접적 비용이 호엔촐레른가를 제거하는 이점을 예측 가능하게 초과했다고 주장한다.
- 베르사유 회의를 전형적인 사례로 하는 정상 외교의 비효율성: 국가 지도자들은 외교 문제가 요구하는 끊임없고 유연한 관심을 단일 사안에 기울이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다.
- 1918-19년 연합국의 러시아 내전 개입: 그는 세계 최초의 노동자 국가에 대한 거대한 자본주의 음모에 대한 소련의 설명에 분개했으며, 일부는 제1차 세계 대전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비용이 많이 들고 해로운 개입 결정에도 똑같이 분개했다. 그는 개입이 러시아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볼셰비키 국가의 생존을 보장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케넌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 대해 낮은 평가를 내렸으며, 1975년에 "그의 모든 매력, 정치적 기술, 유능한 전시 지도력에도 불구하고 외교 정책에 있어서 루스벨트는 피상적이고 무지한 아마추어였으며, 지적 시야가 매우 제한된 사람이었다"고 주장했다.
연도 | 제목 | 비고 |
---|---|---|
1947 | "소련 행동의 근원" | 'X 논문'으로 알려진 『포린 어페어스』 기고문 |
1948 | Policy Planning Study (PPS) 23 | 정책 기획 연구 보고서 |
1951 | 미국 외교, 1900-1950 | 지난 50년간의 미국 외교 정책 비판 |
1954 | Realities of American Foreign Policy | 미국 외교 정책의 현실 |
1956 | 러시아, 전쟁을 떠나다 | 퓰리처상 (역사 부문) 수상 |
1956 | "The Sisson Documents" | 『Journal of Modern History』 기고문 |
1958 | The Decision to Intervene | 개입 결정 |
1958 | Russia, the Atom, and the West | 리스 강연 내용 |
1961 | Russia and the West under Lenin and Stalin | 레닌과 스탈린 시대의 러시아와 서방 |
1964 | On Dealing with the Communist World | 공산 세계와의 관계에 대하여 |
1967 | Memoirs: 1925-1950 | 퓰리처상 (전기/자서전 부문) 수상 |
1968 | From Prague after Munich: Diplomatic Papers, 1938-1939 | 뮌헨 이후 프라하에서: 외교 문서 |
1968 | Democracy and the Student Left | 민주주의와 학생 좌파 |
1971 | The Marquis de Custine and His 'Russia in 1839' | 마르키 드 퀴스틴과 그의 '1839년의 러시아' |
1972 | Memoirs: 1950-1963 | 회고록 두 번째 권 |
1978 | The Cloud of Danger: Current Realities of American Foreign Policy | 위험의 구름: 미국 외교 정책의 현재 현실 |
1978 | Soviet Foreign Policy, 1917-1941 | 소련 외교 정책 |
1979 | The Decline of Bismarck's European Order: Franco-Russian Relations, 1875-1890 | 비스마르크 유럽 질서의 쇠퇴: 프랑스-러시아 관계 |
1982 | The Nuclear Delusion: Soviet-American Relations in the Atomic Age | 핵 망상: 원자 시대의 소련-미국 관계 |
1984 | The Fateful Alliance: France, Russia, and the Coming of the First World War | 운명적인 동맹: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의 도래 |
1989 | Sketches from a Life | 삶의 스케치 |
1993 | Around the Cragged Hill: A Personal and Political Philosophy | 험난한 언덕 주위: 개인적 및 정치적 철학 |
1996 | At a Century's Ending: Reflections 1982-1995 | 세기의 끝에서: 성찰 |
2000 | An American Family: The Kennans, the First Three Generations | 미국 가족: 케넌 가문, 첫 세 세대 |
2014 | The Kennan Diaries | 케넌 일기 |
6. 평가와 유산
조지 F. 케넌은 냉전 시대 '봉쇄 정책의 아버지'로 평가받으며, 그의 사상은 후대 국제 관계와 미국 외교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6.1. 긍정적 평가
케넌은 자신의 경력 동안 수많은 상과 영예를 받았다. 학자이자 작가로서 케넌은 퓰리처상과 전미 도서상을 두 차례 수상했으며, 프랜시스 파크먼 상, 앰배서더 도서상, 밴크로프트 상도 수상했다.
케넌의 수많은 다른 상과 영예 중에는 미국 철학 학회와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회원 선출(1952년), 국무부의 충성 및 공로 표창(1953년), 프린스턴 대학교의 국가 봉사 공로 우드로 윌슨 상(1976년), 푸르 르 메리트 훈장(1976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평화상(1981년), 독일 서적상 평화상(1982년), 미국 예술 문학 아카데미 금메달(1984년), 아메리칸 휘그 클리오소픽 학회의 제임스 매디슨 공공 봉사 공로상(1985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재단의 공포로부터의 자유 메달(1987년), 대통령 자유 훈장(1989년), 국무부의 공로상(1994년), 그리고 미국 의회도서관 살아있는 전설(2000년)이 있다.
케넌은 또한 29개의 명예 학위를 받았으며, 국립 전쟁 대학에 조지 F. 케넌 국가 안보 전략 석좌 교수직과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조지 F. 케넌 교수직으로 그의 이름이 명예롭게 새겨졌다.

2022년 6월,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의 옛 미국 대사관 부지에 케넌을 기리는 기념 명판이 공개되었다. 케넌은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유고슬라비아의 일부였던 이 나라에서 근무했다.
『뉴욕 타임스』의 부고 기사에서 케넌은 "냉전 기간 동안 미국 정책을 형성하는 데 그 어떤 세대 외교관보다 더 많은 일을 한 미국 외교관"이자 "제2차 세계 대전 후 소련을 이해하려 할 때 백악관과 국방부가 의지했던 인물"로 묘사되었다. 케넌에 대해 역사가 윌슨 D. 미스캠블은 "현재와 미래의 외교 정책 입안자들이 그의 청렴함과 지성을 조금이라도 공유하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말했다. 『포린 폴리시』는 케넌을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외교관"이라고 묘사했으며, 헨리 키신저는 케넌이 "우리 역사상 어떤 외교관보다도 자신의 시대의 외교 독트린을 거의 저술했다"고 말했고, 콜린 파월은 케넌을 21세기 외교 정책 문제를 다루는 데 "우리의 최고의 스승"이라고 불렀다.
6.2. 비판 및 논란
케넌은 자신의 역사적 저술과 회고록에서 민주주의 외교 정책 입안자들, 특히 미국의 실패를 자세히 한탄한다. 케넌에 따르면, 미국 정책 입안자들이 갑자기 냉전과 마주했을 때, 그들은 "기대에서는 유토피아적이고, 개념에서는 법률적이며, 타인에게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도덕주의적이고, 우리 자신에게는 고결함과 정직함의 정도에서 자기의적인" 합리화와 수사학 외에는 거의 물려받은 것이 없었다. 문제의 근원은 공공 여론의 힘인데, 이 힘은 필연적으로 불안정하고, 진지하지 못하며, 주관적이고, 감정적이며, 단순하다. 케넌은 미국 대중이 "원시적인 수준의 슬로건과 징고주의적 이념적 영감"을 통해서만 외교 정책 목표를 위해 단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냉전 극단주의가 소련을 덮친 거대한 변화를 가속화하기보다는 지연시켰다고 보았고, 이라크 전쟁을 "테러와의 첫 번째 전쟁"과는 무관한 전쟁으로 규정하며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알카에다와 사담 후세인을 연관시키려는 노력을 "한심하게도 지지할 수 없고 신뢰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전쟁이 일단 시작되면 "그 자체의 추진력을 가지고 모든 사려 깊은 의도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경고했다.
말년에 케넌은 2003년에 설립된 버몬트 제2공화국이라는 분리주의 운동의 이상을 받아들였다. 미국 남서부 지역으로의 대규모 멕시코 이민을 언급하며, 케넌은 2002년에 "이 나라의 남부 및 남서부 대다수 지역의 문화와 일부 북부 지역의 문화 사이에 점점 더 뚜렷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전자의 경우, "이 지역 인구의 대부분의 문화는 초기 미국 전통에서 물려받은 것보다는 주로 라틴 아메리카적 성격을 띠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미국에]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이 없어서 무분별하게 다국어 혼합물로 버려져야 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케넌은 자신의 경력 내내 1850년대의 노 나씽과 유사하거나 심지어 그를 능가하는 "강경한 토착주의 전통"을 대표했다고 주장된다. 케넌은 또한 미국 여성들이 너무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7. 개인사
케넌은 1931년 노르웨이인 아넬리세(Annelise노르웨이어)와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 여덟 명의 손주, 여섯 명의 증손주를 두었다. 아넬리세는 2008년 9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8. 사망
케넌은 2005년 3월 17일 뉴저지주 프린스턴 자택에서 10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은 전 세계에 보도되었으며, 많은 언론과 학자들이 그의 외교적, 학문적 유산에 대해 평가했다.
9. 관련 항목
- 냉전 (1947년~1953년)
- 조지 F. 케넌: 미국인의 삶 (2011년 전기)
- 매와 비둘기 (책): 폴 니체, 조지 케넌, 그리고 냉전의 역사 (2009년 이중 전기)
- 케넌 연구소
- 냉전의 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