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이라크 공화국은 서아시아에 위치한 연방 공화국으로, 수도는 바그다드이다. 남쪽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와 접경하며 페르시아만과도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터키, 동쪽으로는 이란, 서쪽으로는 요르단, 북서쪽으로는 시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흐르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을 비롯하여 아카드,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등 고대 문명이 발흥한 곳으로 '문명의 요람'으로 불린다. 7세기 이슬람 제국의 등장 이후 바그다드는 아바스 칼리파국의 수도로서 이슬람 황금기의 중심지였으나, 몽골의 침입 등으로 쇠퇴하였다. 16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가 1932년 이라크 왕국으로 독립했다. 1958년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1968년부터 바트당이 집권, 1979년부터는 사담 후세인이 장기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 전쟁 등을 겪으며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었고,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었다. 이후 민주 정부 수립 과정에서 내전과 ISIL의 발흥 등 극심한 혼란을 겪었으나, 현재는 재건 노력이 진행 중이다.
이라크는 풍부한 석유 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국가 경제의 핵심이다. 그러나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경제 발전이 저해되었고, 석유 외 다른 산업 분야의 발전은 미흡한 실정이다. 인구는 약 4,600만 명(2024년 추정)이며, 아랍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쿠르드인, 투르크멘인, 아시리아인 등 다양한 소수 민족이 공존한다. 공용어는 아랍어와 쿠르드어이며, 이슬람교가 주요 종교로 시아파와 수니파가 공존하고 있다. 이라크는 유구한 역사적 유산과 다양한 문화, 복잡한 정치 및 사회 구조를 지닌 국가로서,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현재 부패, 기후 변화로 인한 물 부족 및 사막화, 전력난 등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으며, 국가 재건과 안정을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2. 국명
이라크라는 국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그중 하나는 고대 수메르 도시인 우루크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으로, 이는 궁극적으로 수메르어에 기원을 둔다. 또 다른 유력한 어원으로는 "저지대"를 의미하는 중세 페르시아어 단어 에라그(ērāg에라그팔레비어)가 있다. 아랍어에서의 민간 어원 해석으로는 "깊이 뿌리내린, 물이 잘 드는, 비옥한"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이는 사막의 아랍인들이 이 비옥한 강변 지역에 대해 가졌던 인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중세 시대에는 메소포타미아 하부를 가리키는 '아랍인의 이라크'(ʿIrāq ʿArabī이라크 아라비아랍어)와 현재 이란 중서부 지역을 가리키는 '페르시아인의 이라크'(ʿIrāq ʿAjamī이라크 아자미아랍어)라는 용어가 구분되어 사용되었다. 역사적으로 '이라크'라는 용어는 함린 산맥 남쪽의 평야를 포함했으며, 현대 이라크 영토의 최북단 및 최서단 지역은 포함하지 않았다. 19세기 중반 이전에는 이라크를 지칭하는 용어로 '에이라카 아라비카'(Eyraca Arabica에이라카 아라비카라틴어)가 흔히 사용되었다.
초기 이슬람 시대에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충적 평야 지역을 '사와드'(Sawād사와드아랍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경작지의 비옥한 토양 색깔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아랍어 단어로서 '이라크'(عراق이르크아랍어)는 "가장자리", "해안", "강둑" 또는 "절벽"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민간 어원에서는 '알자지라 고원'의 남쪽과 동쪽에 있는 "낭떠러지" 또는 경계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이 지역은 '이라크 아라비' 지역의 북쪽 및 서쪽 가장자리를 형성한다.
아랍어 발음은 /ʕiˈrɑːq/이며, 영어에서는 /ɪˈrɑːk/ 또는 /ɪˈræk/로 발음된다.
1921년 8월 23일 영국이 하심 왕가의 파이살 1세를 이라크 국왕으로 세우면서, 국가의 공식 영어 명칭은 '메소포타미아'에서 현지 명칭인 '이라크'로 변경되었다. 1992년 1월부터 국가의 공식 명칭은 '이라크 공화국'(Jumhūriyyat al-ʿIrāq줌후리야트 알이라크아랍어)이 되었으며, 이는 2005년 이라크 헌법에서도 재확인되었다.
3. 역사
이라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대체로 일치하며, 종종 "문명의 요람"으로 불린다.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는 구석기 시대 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서기 7세기 후반 칼리파조가 수립되어 이 지역이 이라크로 알려지게 된 이후까지 중요한 발전이 계속되었다.
이후의 역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및 그리스계 왕조 시대, 이슬람 제국 시대, 오스만 제국 시대를 거쳐 근현대에 이르는 과정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각 시대는 이라크의 정치, 사회, 문화적 지형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 이라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을 제공한다.
3.1. 고대 메소포타미아

이라크 국경 내에는 기원전 6000년에서 5000년 사이 신석기 시대 우바이드기에 등장한 고대 수메르 땅이 포함된다. 수메르는 도시 개발, 문자 언어, 기념비적 건축의 시작을 알린 세계 최초의 문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라크 영토에는 또한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에 메소포타미아와 고대 근동의 많은 부분을 지배했던 아카드 제국, 우르 제3왕조(신수메르), 바빌로니아, 신아시리아 제국,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중심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라크는 고대에 혁신의 중심지였으며, 초기 문자 언어, 문학 작품, 그리고 천문학, 수학, 법률, 철학 분야에서 중요한 발전을 이루었다. 이러한 토착 통치 시대는 기원전 539년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키루스 2세 휘하의 아케메네스 제국에 의해 정복되면서 끝났다. 키루스는 자신을 "바빌론의 왕"으로 선언했다. 고대 바빌로니아 권력의 중심지였던 바빌론 시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주요 수도 중 하나가 되었다. 고대 이라크, 즉 메소포타미아는 바빌론 유수 기간 동안 형성된 세계 최초의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메소포타미아의 유리 제조 기술 또한 주목할 만하다. 그 이전에도 유리 구슬과 같은 우연히 생성된 유리가 유물로 남아 있지만, 유리 용기 제작에서는 메소포타미아가 먼저였고 그 뒤를 이집트가 따랐다. 현재 이라크 니나와주의 텔 알 리마에 해당하는 카타라 유적지에서는 기원전 16세기의 유리 용기, 특히 네 가지 색상의 지그재그 무늬를 가진 모자이크 유리 용기가 출토되었다. 고온에 견디는 점토로 틀을 만들고 색유리 덩어리를 배열한 후, 열을 가하면서 압력을 가해 서로 녹여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5세기에는 우르의 왕릉과 아슈르에서 서양 배 모양의 병이, 누지 유적지에서는 고블릿 파편이 발견되었다.
이라크 북부 자그로스 산맥의 샤니다르 동굴에서는 약 65,000년에서 35,000년 전으로 추정되는 네안데르탈인 성인 8구와 유아 2구의 유해가 발견되어 이 지역의 오랜 인류 거주 역사를 보여준다.
3.2. 페르시아 및 그리스계 왕조 시대

신바빌로니아인들은 키루스 2세가 이끄는 아케메네스 제국에 의해 패배했다. 바빌론 함락 이후, 아케메네스 제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장악했다. 바빌론 유수로 노예가 되었던 유대인들은 해방되었지만, 많은 이들이 그 땅에 남아 유대인 공동체는 이 지역에서 성장했다. 이라크는 수많은 유대교 유적지의 위치이며, 이 유적지들은 무슬림과 기독교인들에게도 존경받는다.
기원전 4세기 후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케메네스 제국을 정복하면서 이 지역은 마케도니아 왕국의 지배 하에 들어갔고, 그의 사후에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수세기에 걸쳐 현대 이라크를 구성하는 지역들은 파르티아 제국, 로마 제국 등 여러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셀레우키아, 크테시폰과 같은 새로운 중심지들이 건설되었다. 서기 3세기경, 이 지역은 사산 제국을 통해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놓였으며, 이 기간 동안 남아라비아에서 온 아랍 부족들이 메소포타미아 하류로 이주하여 사산 제국과 동맹을 맺은 라خم 왕국을 형성했다.
3.3. 이슬람 제국 시대

아랍어 명칭 '알이라크'(al-ʿIrāq알이라크아랍어)는 이 시기에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산 제국은 결국 7세기에 라시둔 칼리파국에 의해 정복되었고, 636년 알카디시야 전투 이후 이라크는 이슬람 통치하에 들어갔다. 그 직후 건설된 쿠파 시는 661년 우마이야 왕조에 의해 전복될 때까지 라시둔 왕조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카르발라는 680년 카르발라 전투 이후 시아파 이슬람에서 가장 성스러운 도시 중 하나로 여겨진다.
8세기 중반 아바스 칼리파국이 부상하면서 이라크는 이슬람 통치의 중심지가 되었고, 762년에 건설된 바그다드가 수도 역할을 했다. 바그다드는 이슬람의 황금기 동안 번성하여 문화, 과학, 지성의 세계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지혜의 집과 같은 기관들이 이곳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10세기 부와이흐 왕조와 셀주크 투르크의 침입 이후 도시의 번영은 쇠퇴하였고, 1258년 몽골 제국의 침공으로 더욱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이 지역은 전염병과 연이은 제국들의 지배로 장기간 쇠퇴를 겪었다.
또한 이라크는 기독교, 유대교, 야지디교, 만다야교에서도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라크는 깊은 성서적 역사를 가지고 있다.
3.4. 오스만 제국 시대

이라크는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509년 오스만은 바그다드를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에게 빼앗겼다가 1535년 쉴레이만 1세가 바그다드를 정복하면서 되찾았다. 그러나 1624년 사파비 왕조의 아바스 1세가 다시 바그다드를 점령하였고, 오스만 제국은 1638년에야 바그다드를 최종적으로 재탈환하여 이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확립했다.
1747년부터 1831년까지 이라크는 조지아 출신의 맘루크 왕조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이들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831년 오스만 제국은 맘루크 정권을 전복시키고 이라크에 대한 직접 통치를 다시 강화했다.
19세기 오스만 제국은 동방 문제라는 외교적 어려움을 겪었으나, 크림 전쟁(1853년) 이후 1878년 베를린 회의를 통해 비스마르크 체제가 구축되면서 일시적으로 안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1890년 비스마르크 퇴임 후 두 차례의 발칸 전쟁이 발발하며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19세기 오스만 제국은 현재의 이라크 지역을 바그다드주, 바스라주, 모술주의 3개 주로 나누어 통치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의 바스라주에 속해 있었으나 사바 가문의 무바라크 알사바흐 대수장 하에 자치를 누리던 페르시아만 연안의 쿠웨이트는 1899년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1901년 이웃 카자르 왕조 이란의 마스제데 술레이만에서 중동 최초의 석유 시추가 이루어졌고, 모자파르 앗딘 샤와 윌리엄 녹스 다르시 간에 60년간의 석유 채굴에 관한 다르시 조약이 체결되었다. 1908년 이 조약에 따라 앵글로-페르시아 석유 회사(APOC)가 설립되었다. 1912년 칼루스트 굴벤키안은 APOC 등의 출자로 터키 석유 회사(TPC, 이후 이라크 석유 회사의 전신)를 설립했다. 오스만 제국의 이라크 통치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독일 제국 및 동맹국 편에 서면서 종식되었다.
3.5. 근현대
이라크의 근현대사는 오스만 제국의 붕괴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 속에서 시작되었다. 독립 약속에 고무된 아랍 군대는 중동에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해체하는 데 기여했지만, 통일된 주권 아랍 국가의 꿈은 곧 좌절되었다. 메카의 샤리프였던 후세인 빈 알리와 맺은 협정에도 불구하고, 유럽 열강들은 이 지역에 대해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이 통일 아랍 국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후, 후세인의 아들 파이살 1세는 1920년 잠시 시리아 왕국을 선포했는데, 이 왕국에는 현재의 레바논, 팔레스타인, 요르단, 시리아 일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왕국은 현지 반발과 시리아에 대한 위임통치권을 부여받은 프랑스의 군사력에 의해 단명으로 끝났다.
영국 위임통치령이던 이라크에서는 현지 세력들이 외세 통제에 점점 더 저항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반란이 발발하여 영국의 권위에 도전했고, 새로운 전략의 필요성이 분명해졌다.
이후의 역사는 영국 위임통치와 왕국 시대, 공화국 수립과 정권 변동, 바트당 집권과 사담 후세인 시대, 그리고 2003년 이후의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3.5.1. 영국 위임통치와 왕국 시대

1921년, 윈스턴 처칠과 T. E. 로런스를 포함한 영국 관리들이 주도한 카이로 회의에서는 당시 런던에 망명 중이던 파이살을 이라크의 국왕으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지역의 지도력에 대한 요구를 달래면서 영국이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여겨졌다. 대관식에서 그는 이전에 모술, 바그다드, 바스라의 세 오스만 주로 나뉘었던 땅을 통합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수니파와 시아파를 포함한 이라크의 다양한 인구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으며, 특히 시아파 공동체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대관식 날짜를 시아파 무슬림에게 중요한 날인 이드 알가디르와 일치하도록 상징적으로 선택했다. 그의 통치는 현대 이라크의 기초를 마련했다. 파이살은 주요 국가 기관을 설립하고 국가 정체성을 육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교육 개혁에는 바그다드에 알 알바이트 대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포함되었으며, 시리아 망명자들이 의사와 교육자로 봉사하도록 이라크로 이주하는 것을 장려했다. 파이살은 또한 이라크, 시리아, 요르단 간의 철도와 지중해로 향하는 키르쿠크-하이파 송유관 계획을 포함한 기반 시설 연결을 구상했다.
파이살이 이라크의 더 큰 자치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지만, 특히 국가의 석유 산업에서 영국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했다. 1930년, 이라크는 영국과 조약을 체결하여 군사 주둔과 석유 권리를 포함한 주요 측면에 대한 영국의 통제를 유지하면서 국가에 어느 정도 정치적 독립을 부여했다. 1932년까지 이라크는 공식적인 독립을 얻어 국제 연맹의 회원이 되었다. 파이살의 통치는 외부 영향력의 압력과 주권에 대한 내부 요구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으로 특징지어졌다. 그는 외교적 기술과 이라크를 자결로 이끌려는 헌신으로 존경받았다. 안타깝게도 그는 1933년 9월 8일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그의 아들 가지가 왕위를 계승했다. 가지 국왕의 통치는 짧고 격동적이었으며, 이라크는 수많은 쿠데타 시도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39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고, 왕위는 그의 어린 아들 파이살 2세에게 넘어갔는데, 그는 불과 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파이살 2세의 삼촌인 압드 알일라흐 왕세자가 어린 국왕이 성년이 될 때까지 섭정을 맡았다.
1941년 4월 1일, 라시드 알리 알가일라니와 황금 광장 조직 회원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친독일 및 친이탈리아 정부를 수립했다. 이어진 영국-이라크 전쟁에서 영국은 이라크 정부가 추축국과의 연계로 인해 서방 국가들에 대한 석유 공급을 차단할 것을 우려하여 이라크를 침공했다. 전쟁은 5월 2일에 시작되었고, 영국군은 충성스러운 아시리아인 레비와 함께 알가일라니의 군대를 격파하여 5월 31일에 휴전을 강요했다. 파이살 2세 국왕의 섭정은 1953년에 시작되었다. 파이살 2세 하의 이라크의 미래에 대한 희망은 높았지만, 국가는 여전히 분열되어 있었다. 이라크의 수니파 중심 군주제는 다양한 민족 및 종교 집단, 특히 소외감을 느끼는 시아파, 아시리아인, 유대인, 쿠르드인 인구를 화해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958년, 이러한 긴장은 군사 쿠데타로 절정에 달했는데, 이는 특히 1952년 이집트 혁명과 같이 아랍 세계를 휩쓴 혁명의 물결에서 영감을 받았다.
제1차 중동 전쟁(1948년~1949년)에 참전했으며, 1955년에는 중앙 조약 기구(METO)에 가입했다. 제2차 중동 전쟁(1956년~1957년) 시기에는 압둘 카림 카심 등 자유장교단이 참전하기도 했다. 1958년에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결성한 아랍 연합 공화국에 대항하여 같은 하심가가 통치하는 요르단과 아랍 연방을 결성했다.
3.5.2. 공화국 수립과 정권 변동
1958년 7월 14일, 준장이자 민족주의자인 압둘 카림 카심이 이끄는 7·14 혁명으로 알려진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반란은 강력한 반제국주의 및 반군주제 성격을 띠었으며 사회주의적 요소가 강했다. 파이살 2세 국왕, 압둘 알일라흐 왕자, 누리 알사이드 총리를 비롯한 왕가는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카심은 군사 통치를 통해 이라크를 장악했고, 1958년 소수의 시민이 소유한 잉여 토지를 강제로 줄이고 국가가 토지를 재분배하는 과정을 시작했다. 1959년 압둘 와하브 알샤와프는 모술에서 카심에 대항하는 봉기를 이끌었으나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는 1961년 쿠웨이트가 독립하자 쿠웨이트를 이라크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영국은 이라크-쿠웨이트 국경에 군대를 배치하여 카심을 물러나게 했다.
그는 1963년 2월 라마단 혁명(2월 쿠데타)에서 바트당에 의해 축출되었다. 그러나 바트당 내 분파 간의 내부 분열로 인해 11월에 또 다른 쿠데타가 발생하여 압둘 살람 아리프 대령이 집권했다. 새 정권은 쿠웨이트의 독립을 인정했다. 1966년 그가 사망한 후, 그의 동생 압둘 라흐만 아리프가 그 뒤를 이었다. 그의 통치하에 이라크는 1967년 6일 전쟁에 참전했다.
3.5.3. 바트당 집권과 사담 후세인 시대

아리프는 1968년 7·17 혁명으로 축출되었다. 바트당이 집권했고,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가 이라크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점차 당시 이라크 부통령이었던 사담 후세인의 통제하에 놓였고, 사담은 이라크의 민족 및 종교 집단 간의 안정을 명분으로 철권 통치를 강화했다. 제1차 이라크-쿠르드 전쟁은 1970년에 끝났고, 그 후 사담과 바르자니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어 쿠르드인에게 자치권이 부여되었으나 이는 제한적이었다. 그는 무상 의료 및 교육을 도입하고, 석유를 국유화했으며, 여성의 권리를 증진하고 기반 시설을 개발하기도 했으나, 그의 통치는 반민주주의적이고 인권을 탄압하는 양상을 보였다.
1974년, 제2차 이라크-쿠르드 전쟁이 시작되었고 샤트알아랍강에서 이란과의 국경 충돌이 발생했다. 이란은 쿠르드 반군을 지원했다. 1975년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와 사담이 서명한 1975년 알제 협정은 분쟁을 해결했고, 이란은 쿠르드족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여 전쟁에서 쿠르드족이 패배했다. 1973년, 이라크는 시리아, 이집트와 함께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욤키푸르 전쟁에 참전했다. 카르발라로의 연례 순례를 금지하려는 시도는 이라크 전역의 시아파 무슬림 봉기를 야기했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의 후속 조치로 1979년부터 1980년까지 또 다른 시아파 봉기가 일어났다. 1979년 7월 16일, 사담은 대통령직과 최고 행정 기구 의장직에 올랐다.
이란과의 수개월간의 국경 침범 이후, 사담은 1980년 9월 이란에 전쟁을 선포하여 이란-이라크 전쟁(또는 제1차 페르시아만 전쟁)을 시작했다. 이란의 이란 혁명 이후 혼란을 틈타 이라크는 이란 남서부 일부 영토를 점령했지만, 이란은 2년 이내에 모든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했고, 이후 6년 동안 이란은 공세에 나섰다. 수니파 주도 아랍 국가들과 미국은 전쟁 내내 이라크를 지원했다. 1981년, 이스라엘은 이라크의 핵 원자로를 파괴했다. 전쟁 중인 1983년부터 1986년 사이에 쿠르드족은 정권에 대항하는 반란을 이끌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정부가 조정한 안팔 작전은 5만~10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심각한 인권 유린을 자행했다. 전쟁 중 사담은 이란인에 대해 화학무기를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1988년 교착 상태로 끝난 이 전쟁으로 50만에서 150만 명 사이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쿠웨이트가 이라크의 부채 탕감을 거부하고 유가를 인하하자 사담은 쿠웨이트에 대한 군사 행동을 감행했다. 1990년 8월 2일, 이라크군은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19번째 주로 합병함으로써 걸프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는 미국 주도 동맹의 군사 개입을 초래했다. 연합군은 군사 목표물을 겨냥한 폭격 작전을 진행한 후 이라크 남부와 쿠웨이트의 이라크군에 대한 100시간 동안의 지상 공격을 감행했다. 이라크는 또한 사우디아라비아를 침공하려 했고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이라크군은 전쟁 중 황폐화되었다. 쿠웨이트 침공 이후 이라크에 제재가 가해져 경제가 쇠퇴했다. 1991년 전쟁이 끝난 후, 이라크 북부와 남부의 이라크 쿠르드족과 시아파 무슬림들은 사담 정권에 대항하는 여러 봉기를 이끌었지만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많은 민간인을 포함하여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봉기 기간 동안 미국, 영국, 터키, 프랑스는 유엔 안보리 결의 688호에 따른 권한을 주장하며 쿠르드족 인구를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이라크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고 쿠르드족에게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라크는 또한 1994년부터 1997년까지 이라크 쿠르드 내전의 영향을 받았다. 약 4만 명의 전투원과 민간인이 사망했다. 2001년에서 2003년 사이에 쿠르드 자치 정부와 안사르 알이슬람은 다가오는 전쟁과 합쳐질 분쟁에 휘말렸다.
3.5.4. 2003년 이후
9·11 테러 이후,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대량살상무기 보유 및 테러 지원 의혹을 제기하며 이라크 전쟁을 통해 사담 후세인 축출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명분은 후에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사담의 이라크는 부시의 "악의 축"에 포함되었다. 미국 의회는 이라크에 대한 무력 사용을 승인하는 합동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2002년 11월, 유엔 안보리는 결의안 1441호를 통과시켰다. 2003년 3월 20일, 미국 주도 연합군은 테러와의 전쟁의 일환으로 이라크를 침공했다. 몇 주 만에 연합군은 이라크의 많은 부분을 점령했고, 이라크군은 연합군에 맞서기 위해 게릴라 전술을 채택했다. 4월 첫째 주 바그다드 함락 이후, 사담 정권은 이라크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사담의 동상이 바그다드에서 무너지면서 그의 통치 종식을 상징했다.
연합군 임시 행정처(CPA)는 바트당 군대를 해산하고 바트당원을 새 정부에서 추방하기 시작했다. 이는 이후 반란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반군은 연합군과 새로 설치된 정부에 맞서 싸웠다. 사담은 체포되어 재판 끝에 처형되었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시아파-수니파 내전이 발생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연합군은 아부그라이브 고문, 팔루자 학살, 마흐무디야 강간 및 살해 사건, 무카라디브 결혼식 학살 사건과 같은 전쟁 범죄로 비판을 받았으며, 이는 이라크 국민들의 반미 감정을 고조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2011년 미군 철수 이후 점령은 중단되었고 전쟁은 끝났다. 이라크 전쟁으로 최소 15만 명에서 많게는 120만 명 사이의 이라크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 이후 종파 간 폭력과 이슬람 국가(ISIL)의 부상 속에서 국가를 재건하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이라크는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더욱 불안정해졌다. 누리 알말리키 정부의 종파주의적 정책과 부패에 대한 계속되는 불만은 시위로 이어졌고, 그 후 바트주의자와 수니파 무장세력 연합은 정부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여 이라크에서 전면전을 시작했다. 작전의 절정은 이슬람 국가(ISIS)에 의한 북부 이라크 공세였으며, 이는 이 단체에 의한 급속한 영토 확장의 시작을 알렸고, 미국 주도 개입을 촉발했다. 2017년 말까지 ISIS는 이라크 내 모든 영토를 잃었다. 이란 또한 개입하여 종파적 호메이니주의 민병대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했다.
2014년, 이슬람 국가 소속 수니파 반군은 티크리트, 팔루자, 모술 등 여러 주요 도시를 포함한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여, ISIL 전투원들의 잔학 행위 보고 속에서 수십만 명의 국내 실향민을 발생시켰다. 모술에서 약 50만 명의 민간인이 피난했다. 전쟁의 일환으로 ISIS에 의한 야지디 학살로 약 5,000명의 야지디인이 사망했으며, 이는 국제 사회의 큰 비판을 받았다. 미국 주도 개입의 도움으로 이라크군은 ISIS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전쟁은 2017년 공식적으로 끝났고, 이라크 정부는 ISIS에 대한 승리를 선언했다. 2022년 10월, 압둘 라티프 라시드는 의회 선거에서 승리한 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22년, 모함메드 시아 알수다니가 총리가 되었다.
전력망은 기후 변화, 연료 부족, 수요 증가로 인해 시스템적인 압박에 직면해 있다. 부패는 이라크 통치 전반에 만연해 있으며, 미국이 지지하는 종파적 정치 체제는 폭력적인 테러리즘과 종파 갈등을 심화시켰다는 비판도 있다. 기후 변화는 광범위한 가뭄을 야기하고 있으며 물 보유량은 급격히 고갈되고 있다. 이라크는 2020년부터 장기간 가뭄을 겪고 있으며 2021년에는 지난 40년 중 두 번째로 건조한 계절을 경험했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유량은 30~40% 감소했다. 국토의 절반이 사막화 위험에 처해 있다. 이라크의 거의 40%가 "매년 수만 에이커의 경작지를 앗아가는 날리는 사막 모래에 뒤덮였다." 그러나 2023년, 모함메드 시아 알수다니는 정부가 더 넓은 "기후 행동을 위한 이라크 비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 계획에는 청정 및 재생 에너지 촉진, 새로운 관개 및 수처리 프로젝트, 산업 가스 플레어링 감소 등이 포함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수다니는 이라크가 "2030년까지 전력 수요의 3분의 1을 공급하기 위해 재생 에너지 발전소 건설 계약을 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이라크는 전국에 500만 그루의 나무를 심고 도시 주변에 녹지대를 조성하여 먼지 폭풍에 대한 방풍림 역할을 할 것이다. 같은 해, 이라크와 토탈에너지스는 석유 생산을 늘리고 4개의 석유, 가스 및 재생 에너지 프로젝트를 통해 국가의 에너지 생산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270.00 억 USD 규모의 에너지 계약을 체결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프로젝트는 "이라크의 에너지 자급자족 경로를 가속화하고 이라크의 집단적 기후 변화 목표를 진전시킬 것"이다.
4. 지리

이라크는 북위 29도에서 38도, 동경 39도에서 49도 사이에 위치한다 (작은 지역은 39도 서쪽에 놓여 있다). 면적은 113208380 만 m2 (43.71 만 mile2)로 세계에서 58번째로 큰 나라이다. 북쪽으로는 터키, 남쪽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 동쪽으로는 이란, 서쪽으로는 시리아, 남동쪽으로는 페르시아만과 쿠웨이트, 남서쪽으로는 요르단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이라크는 북부 페르시아만에 93342 m (58 mile)의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 더 북쪽으로, 주요 수원지 아래에는 메소포타미아 충적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두 개의 주요 강인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은 이라크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흘러 샤트알아랍강으로 합류한 후 페르시아만으로 흘러든다. 이란인들 사이에서 '아르반드루드'(اروندرود아르반드루드페르시아어)로 알려진 이 강어귀 주변에는 습지대와 반농경지가 넓게 분포한다. 두 주요 강 주변과 사이에는 비옥한 충적 평야가 있으며, 강물은 매년 약 4587 만 m3 (6000.00 만 yd3)의 실트를 삼각주로 운반한다.
남부 중앙부는 다른 나라에 비해 약간 좁아지는 지형으로, 자연 습지 식생과 논이 혼합되어 있으며 나머지 평야에 비해 습하다. 이라크에는 자그로스 산맥의 북서쪽 끝부분과 시리아 사막의 동쪽 부분이 포함된다.
암석 사막이 이라크 면적의 약 40%를 차지한다. 또 다른 30%는 겨울이 혹독하게 추운 산악 지대이다. 국토 북부는 대부분 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최고 지점은 1101 m (3611 ft)이다. 이라크에는 자그로스 산맥 삼림 스텝, 중동 스텝, 메소포타미아 습지, 동지중해 침엽수-경엽수-활엽수림, 아라비아 사막, 메소포타미아 관목 사막, 남이란 누보-신디아 사막 및 반사막 등 7개의 육상 생태 지역이 있다.

4.1. 지형
이라크의 지형은 크게 네 가지 주요 지역으로 나뉜다. 국토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형성한 메소포타미아 평원이다. 이 평원은 다시 북부의 자지라 평원과 남부의 충적 평야로 구분되며, 특히 남부 평원은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농경지 중 하나이다. 두 강은 쿠르나 남쪽에서 합류하여 샤트알아랍강을 이루며 페르시아만으로 흘러든다.
국토 북동부는 이란과의 국경을 따라 자그로스 산맥이 뻗어 있으며, 이라크 최고봉인 체카 다르 산(Cheekha Dar, 1101 m (3611 ft))이 이 지역에 위치한다. 이 산맥은 아라비아판이 유라시아판과 충돌하면서 형성된 습곡 산맥이다.
국토의 서부와 남서부는 광대한 시리아 사막과 네푸드 사막의 일부로, 건조하고 불모한 지형이 특징이다. 이 지역에는 [[와디}}(건천)와 간헐적인 오아시스가 분포한다. 과거 메소포타미아 남부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습지대 중 하나였던 함마르호를 포함한 메소포타미아 습지가 있었으나, 20세기 후반 사담 후세인 정권의 대규모 배수 및 관개 사업으로 인해 대부분 사라졌다가 최근 일부 복원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외에도 밀흐호와 같은 염호와 다수의 와디가 존재한다.
4.2. 기후

이라크의 대부분 지역은 아열대성 기후의 영향을 받는 고온 건조 기후를 나타낸다. 여름철 평균 기온은 대부분 지역에서 40 °C를 넘으며, 종종 48 °C를 초과하기도 한다. 겨울철 기온은 드물게 15 °C를 넘으며, 최고 기온은 대략 5 °C에서 10 °C, 야간 최저 기온은 1 °C에서 5 °C 정도이다. 일반적으로 강수량은 적어 대부분 지역이 연간 6.3 m (250 in) 미만이며, 최대 강우량은 겨울철에 발생한다. 여름철 강우는 국토 북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드물다.
북부 산악 지역은 겨울이 춥고 때때로 폭설이 내려 광범위한 홍수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라크는 기후 변화에 매우 취약하다. 국가는 기온 상승과 강수량 감소에 직면해 있으며, 1890년에서 2010년 사이에 10배 증가했고 계속 증가하는 인구로 인해 물 부족이 심화되고 있다.
이라크의 전력망은 기후 변화, 연료 부족, 수요 증가로 인해 시스템적인 압박에 직면해 있다. 부패는 이라크 정부 모든 수준에 만연해 있으며, 정치 시스템은 종파 갈등을 악화시켰다. 기후 변화는 전국적으로 광범위한 가뭄을 유발하고 있으며, 물 보유량은 급격히 고갈되고 있다. 이라크는 2020년부터 장기간 가뭄을 겪고 있으며, 2021년에는 지난 40년 중 두 번째로 건조한 계절을 경험했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유량은 30~40% 감소했다. 국토의 절반이 사막화 위험에 처해 있다. 이라크의 거의 40%가 "매년 수만 에이커의 경작지를 앗아가는 사막 모래에 뒤덮였다."
그러나 2023년, 모함메드 시아 알수다니 총리는 정부가 더 넓은 "기후 행동을 위한 이라크 비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 계획에는 청정 및 재생 에너지 촉진, 새로운 관개 및 수처리 프로젝트, 산업 가스 플레어링 감소 등이 포함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수다니 총리는 이라크가 "2030년까지 전력 수요의 3분의 1을 공급하기 위해 재생 에너지 발전소 건설 계약을 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이라크는 전국에 500만 그루의 나무를 심고 도시 주변에 녹지대를 조성하여 먼지 폭풍에 대한 방풍림 역할을 할 것이다. 같은 해, 이라크와 토탈에너지스는 석유 생산을 늘리고 4개의 석유, 가스 및 재생 에너지 프로젝트를 통해 국가의 에너지 생산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270.00 억 USD 규모의 에너지 계약을 체결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프로젝트는 "이라크의 에너지 자급자족 경로를 가속화하고 이라크의 집단적 기후 변화 목표를 진전시킬 것"이다.

4.3. 생태계와 야생 동식물

이라크의 야생 동식물에는 식물상과 동물상 및 그들의 자연 서식지가 포함된다. 이라크에는 북부의 산악 지역에서부터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을 따라 펼쳐진 습한 습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다채로운 생물 군계가 있으며, 국토 서부 지역은 주로 사막과 일부 반건조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라크의 많은 조류 종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으며, 이라크의 포유류 7종과 조류 12종이 이에 해당한다. 중부와 남부의 메소포타미아 습지는 약 50종의 조류와 희귀 어종의 서식지이다. 습지에 서식하는 전 세계 흰뺨오리 개체수의 약 50%와 전 세계 이라크개개비 개체수의 60%가 위험에 처해 있다.
현재 이 지역에서는 멸종된 아시아사자는 역사적으로 이 나라의 중요한 상징으로 남아 있다. 사담 후세인 정부 시절 메소포타미아 습지 고갈로 인해 생물학적 생명력이 크게 감소했다. 2003년~2011년 이후 유량이 복원되어 생태계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라크 산호는 이 지역 해수 온도가 14 °C에서 34 °C 사이이기 때문에 가장 극심한 내열성을 가진 산호 중 하나이다. 수생 또는 반수생 야생 동물은 주요 호수인 하바니야호, 밀흐호, 카디시야호, 타르타르호 안팎에서 서식한다.
5. 정치



이라크 연방 정부는 현행 이라크 헌법에 따라 민주적, 연방적 의회제 공화국으로 규정된다. 연방 정부는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및 다수의 독립 위원회로 구성된다. 연방 정부 외에도 이라크에는 법률에 따라 다양한 문제에 대한 관할권을 가진 지역(하나 이상의 주로 구성), 주, 구가 있다. 대통령은 국가 원수, 총리는 정부 수반이며, 헌법은 대표의회와 연합의회라는 두 개의 심의 기관을 규정하고 있다. 사법부는 행정부와 입법부로부터 자유롭고 독립적이다.
국가 연합은 주요 시아파 의회 블록으로, 누리 알말리키 총리의 법치국가연합과 이라크 국가 연합의 합병 결과로 설립되었다. 이라크 국민 운동은 수니파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세속적 시아파인 이야드 알라위가 이끌고 있다. 이 정당은 대부분의 경쟁 정당보다 일관된 반종파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쿠르디스탄 연맹은 마수드 바르자니가 이끄는 쿠르디스탄 민주당과 잘랄 탈라바니가 이끄는 쿠르디스탄 애국 연합이라는 두 정당이 지배하고 있다. 바그다드는 정부 소재지인 이라크의 수도이다. 그린 존에 위치하며, 정부 본부와 군대, 그리고 미국 대사관 본부와 다른 나라의 외국 기관 및 기구 본부가 있다.
2023년 V-Dem 민주주의 지수에 따르면 이라크는 중동에서 세 번째로 선거 민주주의적인 국가였다. 사담 후세인 치하에서 정부는 100만 명의 직원을 고용했지만, 2016년에는 약 700만 명으로 증가했다. 유가 하락과 맞물려 정부 예산 적자는 2016년 현재 GDP의 거의 25%에 달한다.
5.1. 정부 구조
이라크는 연방 의원 내각제 공화국이다. 국가 원수는 대통령이며, 2명의 부통령과 함께 대통령 평의회를 구성한다. 대통령과 부통령은 각각 이라크의 주요 3대 세력인 수니파, 시아파, 쿠르드족에서 1명씩 입법부에 의해 선출되며, 임기는 4년이다. 대통령은 국가 통합의 상징으로서 의례적인 직무를 수행한다.
행정부의 수반은 총리이며, 의회에서 의원 중에서 선출된다. 총리는 2명의 부총리를 두며, 다른 각료들은 대통령 평의회와 총리, 부총리가 협의하여 임명한다. 현재 내각은 총리, 부총리를 제외하고 37명의 각료로 구성되어 있다. 입법부는 단원제인 국민의회로, 임기는 4년이며 의원 정수는 329명(2018년 기준)이다.
5.2. 주요 정당 및 정치 세력
이라크의 주요 정당 및 정치 세력은 주로 종파 및 민족 기반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복잡한 연합과 경쟁 관계를 보인다.
2018년 총선 결과 주요 정당 연합 및 획득 의석 수는 다음과 같다.
- 사이룬** (54석): 종교 지도자 무크타다 알사드르가 이끄는 사드르파 정치 세력.
- 파타 연합** (48석): 주로 시아파 인민동원군을 모태로 하는 정당.
- 승리 동맹** (42석): 하이데르 알아바디 전 총리가 이끄는 정당 연합으로, 주로 시아파 기반.
- 쿠르디스탄 민주당** (KDP, 25석): 쿠르드족 민족주의 정당으로, 아르빌과 도훅 등을 주요 기반으로 한다.
- 법치국가연합** (25석): 누리 알말리키 전 총리의 파벌.
- 알와타니야** (21석): 이야드 알라위 부통령이 이끄는 세속 정당으로, 다수의 수니파 정당을 포함한다.
- 국가 지혜 운동** (19석): 이라크 이슬람 최고 위원회(ISCI) 당수였던 암마르 알하킴이 2017년 창당.
- 쿠르디스탄 애국 연합** (PUK, 18석): 술라이마니야주와 키르쿠크주를 기반으로 하는 정당.
이 외에도 다수의 군소 정당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정당 간 이합집산이 잦은 편이다. 최근 반정부 시위로 인해 조기 총선 요구가 제기되기도 했다.
5.3. 법률 및 사법 제도
2005년 10월, 새로운 이라크 헌법이 국민투표에서 전체 78%의 찬성으로 승인되었으나, 지지율은 지역별로 큰 차이를 보였다. 새 헌법은 시아파와 쿠르드 공동체의 지지를 받았지만, 아랍 수니파에게는 거부되었다. 헌법 조항에 따라, 이라크는 2005년 12월 15일 전국적인 의회 선거를 실시했다. 세 주요 민족 집단 모두 민족적 성향에 따라 투표했으며, 아시리아인과 투르크멘 소수 민족도 마찬가지였다.
1959년 제정된 개인 신분법(제188호)은 일부다처제를 극히 어렵게 만들고, 이혼 시 자녀 양육권을 어머니에게 부여하며, 일방적 이혼 선언과 16세 미만 결혼을 금지했다. 민법 제1조는 또한 이슬람법을 공식적인 법원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라크에는 샤리아 법원이 없었지만, 민사 법원은 결혼 및 이혼을 포함한 개인 신분 문제에 샤리아를 사용했다. 1995년 이라크는 특정 유형의 형사 범죄에 대해 샤리아 처벌을 도입했다. 이 법규는 프랑스 민법과 수니파 및 자파리파(시아파)의 샤리아 해석에 기반을 두고 있다.
2004년, 연합군 임시 행정처(CPA) 최고 행정관 L. 폴 브레머는 샤리아가 법의 주요 기초라고 명시한 어떠한 헌법 초안에도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선언은 많은 지역 시아파 성직자들을 격분시켰고, 2005년까지 미국은 헌법 초안에 대한 교착 상태를 끝내기 위해 샤리아의 역할을 헌법에 포함시키는 것을 허용했다. 이라크 형법은 이라크의 성문법이다.
5.4. 인권
이라크와 쿠르드족 인구 간의 관계는 최근 역사, 특히 1980년대 사담 후세인의 쿠르드족에 대한 대량 학살 작전으로 인해 극도로 악화되었다. 1990년대 초 봉기 이후 많은 쿠르드족이 고향을 떠났고, 더 이상의 분쟁을 막기 위해 이라크 북부에 비행금지구역이 설정되었다. 역사적으로 열악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진전이 이루어져, 2005년 이라크는 최초의 쿠르드족 대통령인 잘랄 탈라바니를 선출했다. 또한, 헌법 제4조에 따라 쿠르드어는 현재 아랍어와 함께 이라크의 공식 언어이다. 그러나 쿠르드 자치 문제, 키르쿠크 유전 문제 등은 여전히 갈등의 소지로 남아 있다.
이라크에서 성소수자(LGBT)의 권리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비범죄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성애는 이라크 사회에서 여전히 낙인찍혀 있으며,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차별이 보고되고 있다. 이슬람 국가(ISIL) 점령지에서의 인권은 극도로 심각하게 침해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여기에는 ISIL 점령 모술에서의 대량 학살과 이라크 북부 신자르의 야지디 인구에 대한 야지디족 대량 학살이 포함되며, 이는 국제 사회의 큰 규탄을 받았다.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 이후에도 여성, 아동, 소수 민족 및 종교 집단에 대한 인권 침해 사례가 지속적으로 보고되고 있으며, 정부의 인권 보호 노력은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6. 행정 구역

이라크는 18개 주(또는 현)(محافظات무하파자트아랍어, 단수형 محافظة무하파자아랍어)로 구성되어 있다. 주는 다시 구(قضاء카다아랍어)로, 구는 다시 하위 구(ناحية나히야아랍어)로 세분된다. 19번째 주인 할라브자주는 2014년 쿠르드 자치정부에 의해 술라이마니야주에서 분리되었으나, 이라크 중앙 정부는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 바그다드주
- 살라딘주
- 디얄라주
- 와시트주
- 마이산주
- 바스라주
- 디카르주
- 무탄나주
- 카디시야주
- 바빌주
- 카르발라주
- 나자프주
- 안바르주
- 니나와주
- 다후크주
- 아르빌주
- 키르쿠크주
- 술라이마니야주
- 할라브자주 (쿠르드 자치정부 관할, 이라크 중앙 정부 미승인)
아르빌주, 다후크주, 술라이마니야주는 쿠르드 자치구에 속하며, 이 지역은 헌법에 따라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다.
7. 국제 관계
이라크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정권 하에서 각기 다른 외교 정책을 추구해왔다. 왕정 시대에는 친서방 노선을 따르며 냉전 시기 소련에 대항하는 동맹인 바그다드 조약의 일원이었다. 카심 정권 시기에는 이 조약에서 탈퇴하고 동구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쿠웨이트를 이라크 영토라고 주장했다. 이후 정권은 쿠웨이트의 독립을 인정했다. 사담 후세인 치하에서는 비동맹 운동의 일원이면서도 소련과의 우호조약 등을 통해 친소련 성향을 보이기도 했으며,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에 재정 지원을 하고 베트남 재건을 도왔다. 이 시기 이라크는 인도, 요르단과 긴밀한 무역 관계를 맺었다. 프랑스, 독일, 벨라루스, 러시아, 중국 등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했다. 전쟁 이후 이라크는 지역 경제 협력을 강화하고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했다. 2009년 2월에는 화학 무기 금지 조약에 공식 가입했다.
전쟁 종식 후 이라크는 주변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동시에 이란과의 관계도 유지하며, 이웃 국가들의 안보 우려를 심화시키지 않고 실용적인 균형 외교를 추구하는 국가로 자리매김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란의 영향력 확대, 터키와의 쿠르드 문제 및 물 분쟁, ISIL 잔존 세력 문제 등은 여전히 역내 불안 요인으로 남아있다.
7.1. 주요 국가와의 관계

- 이란: 이란과의 관계는 2005년 이후 고위급 방문 교환을 통해 활발해졌다. 그러나 2009년 12월에는 이라크가 이란이 국경의 유정을 장악했다고 비난하면서 분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2014년부터 이란은 ISIL 격퇴를 명분으로 이라크에 개입하여 종파 정당과 호메이니주의 민병대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해왔다. 이러한 개입은 2003년 이라크 침공 이후 형성된 권력 공백과 시아파 정치 세력의 부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03년 이후 이라크에서 등장한 다양한 민병대 그룹들은 이란과 연계되어 있다. 이라크 이슬람 저항군과 인민동원군 내 그룹들은 이란의 대리 세력인 저항의 축의 일부이며, 여기에는 레바논, 팔레스타인, 예멘, 바레인, 아프가니스탄, 시리아의 다른 대리 세력들도 포함된다. 이들 이라크 민병대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동안 저항의 축의 다른 그룹들과 함께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 이란의 영향력 확대는 이라크의 주권과 국내 정치 안정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다.
- 터키: 터키와의 관계는 주로 쿠르디스탄 자치 정부 문제와 터키와 쿠르디스탄 노동자당(PKK) 간의 충돌이 계속되면서 긴장 상태에 있다. 터키는 PKK를 테러 조직으로 규정하고 이라크 북부에서 군사 작전을 벌여왔으며, 이는 이라크의 주권 침해 논란을 야기했다. 2011년 10월 터키 의회는 터키군이 이라크 국경 너머 반군을 추격할 수 있는 법안을 갱신했다. 터키의 동남아나톨리아 프로젝트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수량을 감소시켜 이라크의 물 부족 문제를 심화시키고 농업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양국 간의 주요 갈등 요인이다.
- 시리아: 모함메드 시아 알수다니 총리는 협력 확대를 위해 시리아와의 관계 정상화를 모색해왔다. 양국은 ISIL 공동 대응, 국경 안보 강화, 경제 협력 등에서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으나, 시리아 내전의 장기화와 알아사드 정권의 국제적 고립은 관계 개선의 제약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 걸프 협력 회의(GCC) 국가: 이라크는 GCC 국가들과의 관계 심화를 추구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과의 관계 개선은 역내 안정과 경제 협력 증진에 중요하다. 최근 이라크와 쿠웨이트 외무 장관은 국경 획정에 관한 최종 합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발표했으며, 이는 과거 걸프 전쟁으로 인해 손상되었던 양국 관계 회복의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된다.
- 미국: 2008년 11월, 미국과 이라크는 광범위한 전략적 기본 협정의 일환으로 주둔군 지위 협정(SOFA)에 합의했다. 2020년 1월, 이라크 의회는 카셈 솔레이마니 이란 소장 살해 사건 이틀 후 미군 철수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가결했다. 이 결의안은 특히 2014년 워싱턴이 이슬람 국가에 대항하여 이라크를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할 수 있도록 허용한 협정의 종료를 요구했다. 2020년 9월, 미국은 이란 지원 민병대의 바그다드 주재 미국 대사관 로켓 공격으로 인해 이라크에서 외교관 철수를 준비했다. 미국은 ISIL 격퇴 후 이라크 주둔 미군을 대폭 감축했으나, 여전히 군사 고문단 및 특수부대가 주둔하며 이라크군 훈련과 대테러 작전을 지원하고 있다. 이라크 내에서는 미군 주둔에 대한 찬반 논란이 계속되고 있으며, 이는 이라크의 정치적 불안정 요인 중 하나이다.
이라크는 신흥 중견국으로 부상했으며,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간의 회담을 중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21년 바그다드는 이란과 사우디 관리들 간의 회담을 주최했으며, 이집트, 요르단, 이란 간의 회담도 주최했다. 이는 이라크가 역내 갈등 완화와 안정 증진에 기여하려는 외교적 노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7.2. 국제기구 회원 활동
이라크는 국제 연합(UN), 아랍 연맹, 석유 수출국 기구(OPEC), 이슬람 협력 기구(OIC), 비동맹 운동, 국제 통화 기금(IMF) 등의 창립 회원국이다. 이러한 국제기구에서의 활동을 통해 이라크는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다양한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협력에 참여하고 있다.
특히 OPEC 회원국으로서 이라크는 국제 석유 시장의 안정과 유가 정책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아랍 연맹 및 이슬람 협력 기구에서는 아랍 및 이슬람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적 연대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유엔에서는 국제 평화와 안보 유지, 인권 증진, 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 달성을 위한 노력에 동참하고 있다.
전쟁과 내전으로 인해 국제 사회에서의 역할이 위축되기도 했으나, 국가 재건과 안정화 노력을 통해 점차 국제 무대에서의 입지를 회복하고 있다. 최근에는 기후 변화 대응, 테러리즘 방지, 경제 개발 등 글로벌 이슈에 대한 국제적 논의와 협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8. 군사


이라크 보안군은 내무부(MOI)와 국방부(MOD) 산하 부대, 그리고 이라크 특수작전부대를 감독하는 이라크 대테러국(CTB) 및 인민동원위원회(PMC)로 구성된다. CTB와 PMC는 모두 총리에게 직접 보고한다. 국방부 산하 부대로는 이라크 육군, 이라크 공군, 이라크 해군, 이라크 방공사령부가 있다. 국방부는 또한 NATO 훈련단-이라크의 지원을 받아 육군, 해군, 공군 장교를 훈련시키는 합동참모대학을 운영한다. 이 대학은 2005년 9월 27일 아르 루스타미야에 설립되었다. 이 센터는 소위부터 소령까지의 장교를 대상으로 하는 초급 및 고급 참모 장교 과정을 운영한다.
8.1. 이라크군
현재 이라크군은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재건되었다. 육군은 13개의 보병 사단과 1개의 차량화보병 사단으로 구성된다. 각 사단은 4개의 여단으로 구성되며 14,000명의 병력을 보유한다. 2003년 이전에는 주로 소련제 군사 장비를 갖추고 있었으나, 이후 서방 공급업체로 전환했다. 공군은 정찰, 수색 및 병력 수송을 통해 지상군을 지원하도록 설계되었다. 2개의 정찰 비행대대는 경비행기를 사용하고, 3개의 헬리콥터 비행대대는 병력 이동에 사용되며, 1개의 공수 비행대대는 C-130 수송기를 사용하여 병력, 장비 및 보급품을 이동시킨다. 공군 병력은 현재 5,000명이다.
2011년 2월 기준, 해군은 약 5,000명의 수병(해병 800명 포함)을 보유하고 있다. 해군은 작전 사령부, 5개의 해상 편대, 그리고 반군의 침투로부터 해안선과 내륙 수로를 보호하도록 설계된 2개의 해병 대대로 구성된다.
이라크 특수부대로는 이라크 특수작전부대(ISOF, 병력 10,000명), 이라크 육군 제36코만도대대, 블랙스콜피온 대테러부대, 이라크 국가대테러부대(INCTF) 등이 있다.
주요 장비로는 M1A1M 전차 140대, T-72 전차 120대, T-55 전차 76대, BMP-1 보병전투차 434대, M113 궤도형 장갑차 283대, F-16IQ Block 52 다목적 전투기 36기, T-50IQ 고등훈련기 겸 경공격기 24기, Su-25 공격기 12기, Su-30K 전폭기 등이 있다. 400톤급 OPV(원양초계함) Saettia MK4급 4척 등 다수의 함정을 보유하고 있다.
8.2. 국방 정책 및 대외 군사 협력
이라크의 국방 정책은 국가 안보 위협에 대응하고 영토를 보전하며, 테러리즘과 내부 불안정에 대처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 이후, 이라크군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재건되었으며, 군 현대화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주요 목표는 자국 방위 능력을 강화하고 외부의 군사적 지원 의존도를 줄이는 것이다.
대외 군사 협력은 이라크 국방 정책의 중요한 부분이다. 이라크는 미국과 가장 긴밀한 군사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훈련, 장비 지원, 정보 공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하고 있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또한 이라크 보안군 훈련 및 자문 역할을 수행하며 이라크의 국방 역량 강화에 기여하고 있다.
2019년 11월 4일, 100명 이상의 오스트레일리아 방위군 인력이 바그다드 북쪽에 위치한 타지 태스크 그룹의 10번째 교대 임무를 위해 다윈을 떠났다. 오스트레일리아 파견대는 이라크 보안군(ISF)이 훈련받는 이라크 보병학교를 지도한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의 기여는 250명에서 120명의 ADF 인력으로 축소되었으며, 이들은 뉴질랜드와 함께 그 이전에 45,000명 이상의 ISF 대원을 훈련시켰다.
최근 이라크는 러시아로부터도 무기를 도입하는 등 군사 협력 다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2013년에는 러시아와 Mi-28 공격헬기 30대 및 판치르-S1 대공 시스템 42대 도입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이는 역내 안보 환경 변화와 자체 방위력 증강 필요성에 따른 전략으로 풀이된다.
9. 경제

국제 농업 개발 기금(IFAD)에 따르면, 이라크는 석유가 풍부한 중상위 소득 국가이다. 이라크 경제는 전통적으로 외환 수입의 약 95%를 제공해 온 석유 부문이 지배하고 있다. 다른 부문의 발전 부족으로 인해 실업률은 18~30%에 달하며, 1인당 GDP는 4812 USD이다. 2011년 공공 부문 고용은 전체 정규직 고용의 거의 60%를 차지했다. 석유 수출 산업은 이라크 경제를 지배하지만 고용 창출은 미미하다. 현재 여성 노동력 참여율은 낮은 수준(2011년 최고 추정치 22%)이다.
미국 점령 이전, 이라크의 중앙 계획 경제는 이라크 기업의 외국인 소유를 금지하고, 대부분의 대규모 산업을 국영 기업으로 운영했으며, 외국 상품 유입을 막기 위해 높은 관세를 부과했다. 사담 후세인 시대에 이라크는 한때 중동에서 가장 발전된 국가 중 하나였으나, 전쟁과 독재로 인해 경제는 피폐해졌다. 2003년 이후, 연합군 임시 행정처(CPA)는 이라크 경제를 민영화하고 외국인 투자에 개방하는 다수의 구속력 있는 명령을 신속하게 발표하기 시작했다. 2004년 11월 20일, 채권국 파리 클럽은 이라크의 클럽 회원국에 대한 부채 420억 달러 중 80%(330억 달러)를 탕감하기로 합의했다. 침공 당시 이라크의 총 외채는 약 1200억 달러였으며, 2004년까지 50억 달러가 더 늘었다. 부채 탕감은 3단계(각각 30% 두 번, 20% 한 번)로 시행될 예정이었다. 이라크의 공식 통화는 이라크 디나르이다. CPA는 새로운 디나르 동전과 지폐를 발행했으며, 지폐는 데라루가 현대적인 위조 방지 기술을 사용하여 인쇄했다.
침공 5년 후, 약 240만 명이 국내 실향민이었고(이라크 외부에는 추가로 200만 명의 난민이 있었음), 400만 명의 이라크인이 식량 불안정 상태(어린이의 4분의 1이 만성 영양실조)에 처했으며, 이라크 어린이의 3분의 1만이 안전한 식수를 이용할 수 있었다. 2022년, 유엔 보상 위원회가 1990년 침공 이후 쿠웨이트에 대한 배상을 보장하기 위해 설립된 지 30여 년 만에, 이 배상 기관은 이라크가 쿠웨이트에 총 524.00 억 USD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했다고 발표했다. 해외 개발 연구소(ODI)에 따르면, 국제 NGO들은 임무 수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들의 지원은 "단편적이고 대체로 비밀리에 수행되며, 불안정, 조정된 자금 부족, 제한된 운영 능력, 불충분한 정보로 인해 방해받고 있다." 국제 NGO들은 표적이 되었으며, 첫 5년 동안 구호 활동가 94명이 사망하고, 248명이 부상당했으며, 24명이 체포 또는 구금되었고, 89명이 납치 또는 유괴되었다.
전쟁은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지만, 아랍 뉴스 보고서에 따르면 이라크는 긍정적인 회복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라크의 쿠르드족 및 시아파 인구 밀집 지역은 2003년~2011년 전쟁 종식 이후 경제 호황을 경험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이라크의 수니파 인구 밀집 지역도 수많은 신규 건설 프로젝트에서 알 수 있듯이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또한 이라크는 농업 국가이다. 이라크 관광은 고고학 관광과 종교 관광을 포함하여 주요 성장 부문이 될 것이며, 생태관광의 잠재적 장소로도 여겨진다.
9.1. 경제 구조 및 현황
이라크 경제는 석유 산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석유 수출이 국가 재정 수입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국제 통화 기금(IMF)에 따르면 2020년 이라크의 국내 총생산(GDP)은 약 1.70 조 USD이며, 1인당 GDP는 약 4223 USD 수준이다. 이는 중동 지역 산유국 중에서는 다소 낮은 수치에 해당한다.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 이라크는 한때 중동에서 가장 높은 1인당 GDP를 기록하며 발전된 국가로 평가받기도 했으나,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 전쟁 및 이어진 국제 사회의 경제 제재, 그리고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경제 기반이 크게 손상되었다. 전쟁 이후 국가 재건 노력이 진행 중이지만, 정치적 불안정, 부패, 기반 시설 부족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는 석유 의존적인 경제 구조에서 벗어나 산업 다변화를 추진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가시적인 성과가 미흡한 실정이다. 높은 실업률, 특히 청년 실업 문제도 심각한 사회 문제로 남아있다. 최근 국제 유가 상승과 정세 안정화 노력에 힘입어 경제 회복의 조짐을 보이고 있으나,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는 구조 개혁과 투자 환경 개선이 시급한 과제로 지적된다.
9.2. 석유 및 에너지 산업

이라크는 베네수엘라와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3위의 석유 매장량(약 1431억 배럴)을 보유하고 있다. 석유 생산량은 2012년 12월 기준 하루 340만 배럴에 달했으며, 2014년에는 하루 500만 배럴로 생산량을 늘릴 계획이었다. 이라크에는 약 2,000개의 유정만이 시추되었는데, 이는 텍사스 한 곳에만 약 100만 개의 유정이 있는 것과 비교된다. 이라크는 석유 수출국 기구(OPEC) 창립 회원국 중 하나이다.
1970년대 이라크는 하루 최대 350만 배럴을 생산했지만, 1990년 쿠웨이트 침공 이후 이라크에 가해진 제재로 인해 석유 부문이 마비되었다. 이 제재는 1996년까지 이라크의 석유 수출을 금지했고, 제1차 걸프 전쟁 이후 몇 년 동안 이라크의 생산량은 85% 감소했다. 2003년 미국 주도 침공으로 사담 후세인이 권좌에서 물러난 후 제재는 해제되었지만, 이라크의 석유 자원 개발은 계속되는 분쟁으로 인해 방해를 받았다.
2010년 현재, 안보 상황 개선과 수십억 달러의 석유 수입에도 불구하고 이라크는 여전히 고객 수요의 약 절반 정도의 전력만 생산하고 있어 더운 여름철에 시위를 초래하고 있다. 2007년 이라크 대표의회에 제출된 이라크 석유법은 이라크의 여러 정치 블록 간의 의견 불일치로 인해 승인을 얻지 못했다. 알바스라 석유 터미널은 파이프라인에서 유조선으로 환적하는 시설이며 초대형 유조선을 사용한다.
2007년 5월 미국 연구에 따르면, 지난 4년간 이라크가 신고한 석유 생산량 중 하루 10만 배럴에서 30만 배럴이 부패나 밀수를 통해 빼돌려졌을 수 있다. 2008년 알자지라는 미국의 관리하에 있던 이라크 석유 수입 130억 달러가 부적절하게 회계 처리되었으며, 그중 26억 달러는 완전히 행방불명이라고 보도했다. 정부가 석유 공공 조달 부패를 줄였다는 보고도 있지만, 정부 관리들에 대한 뇌물 및 리베이트에 대한 신뢰할 만한 보고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2009년 6월 30일과 12월 11일, 석유부는 이라크의 여러 유전에 대해 국제 석유 회사들과 서비스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된 유전에는 "초거대" 마즈눈 유전, 할파야 유전, 서쿠르나 유전, 루마일라 유전 등이 포함된다. BP와 중국석유천연가스공사는 이라크 최대 유전인 루마일라 개발 계약을 따냈다. 2014년 3월 14일, 국제 에너지 기구(IEA)는 이라크의 석유 생산량이 2월에 하루 50만 배럴 증가하여 평균 360만 배럴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는 사담 후세인이 집권한 1979년 이후 최대 생산량이었다. 그러나 2014년 7월 14일, 종파 분쟁이 격화되면서 쿠르드 자치 정부 군대가 북부의 바이 하산 유전과 키르쿠크 유전을 장악하여 이라크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바그다드는 이 장악을 비난하고 유전이 반환되지 않으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2018년 유엔은 석유가 이라크 수입의 99%를 차지한다고 추정했다. 2021년 기준, 석유 부문은 외환 수입의 약 92%를 제공했다.
9.3. 농업

국제 연합 세계 식량 계획(WFP)의 2003년 통계에 따르면, 이라크의 농지는 국토의 13.8%를 차지한다. 강우량만으로는 농업을 지속할 수 없지만,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및 관개망을 통해 농지를 유지하고 있다. 농업 종사자 비율은 낮아 전국민의 2.2%인 62만 명에 불과하다. 농업 종사자가 적기 때문에 1인당 경지 면적은 16.2헥타르로 아시아에서 몽골, 사우디아라비아, 카자흐스탄에 이어 네 번째로 넓다.
2005년 통계에 따르면 주요 곡물로는 밀(220만 톤)과 보리(130만 톤) 재배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는 건조한 기후에 강하기 때문이다. 반면, 쌀 생산량은 13만 톤으로 적다. 채소 및 과일로는 토마토(100만 톤)와 포도(33만 톤)가 두드러진다. 상품 작물로는 대추야자(87만 톤)가 특히 중요하며,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이란에 이어 세계 4위의 생산량을 자랑하며 세계 시장 점유율의 12.6%를 차지한다. 축산업에서는 염소(165만 마리)와 소(150만 마리)가 주력이다.
대추야자는 페르시아만과 메소포타미아 사막 지대가 원산지로, 최소 5,000년 이상 재배되어 왔으며 이라크 지역의 농업, 경제, 식문화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특히 바스라와 바그다드의 대추야자가 유명하며, 바스라에는 800만 그루의 대추야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수출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과 걸프 전쟁으로 많은 야자수가 피해를 입어 수출액에서 대추야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으로 줄어들기도 했다. 바그다드산 대추야자는 국내 최고 품질로 알려져 있다. 이라크에서 재배되는 주요 대추야자 품종으로는 칼라세, 할라위, 카그라위, 자히디 등이 있으며, 할라위 품종이 가장 많이 생산된다.
9.4. 주요 산업 및 무역
이라크의 공업은 자급자족적 성격이 강하며, 식품 공업과 화학 공업이 중심이다. 식품 공업은 대추야자를 원료로 하는 식물성 기름 정제, 제분업, 정육업, 피혁 제조업 등이 주를 이룬다. 섬유 산업도 자리 잡고 있다. 화학 공업은 자급에 필요한 원유 정제 및 비료 생산이 핵심이다. 중유 정제량은 세계 생산량의 1~2%에 달한다(2002년 기준 1.6%). 반면, 건축 자재로 사용되는 햇볕에 말린 벽돌과 일반 벽돌은 아직 수공업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조직화되지 않은 개인 생산에 의존하고 있다. 제철, 약품, 전기 기기 등의 제조 시설도 존재하지만 국내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농기구, 공작 기계, 차량 등과 함께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이라크의 무역 구조는 원유 및 석유 정제물을 수출하고 공업 제품을 수입하는 형태이다. 2003년 기준 수출액에서 석유 관련 품목이 차지하는 비중은 91.9%였으며, 수입액에서 공업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93.1%였다. 같은 해 무역 수지는 수출입 모두 101억 달러로 균형을 이루었다.
주요 수출 품목은 원유(83.9%), 석유 원료(8.0%), 식품(5.0%, 주로 대추야자), 석유화학 제품(1.0%)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기계류(73.1%), 기초 공업 제품(16.1%), 식품(5.0%), 화학 공업 제품(1.0%)이다.
주요 교역 상대국은 수출의 경우 미국(18.6%), 러시아 및 CIS 국가, 터키, 브라질, 프랑스 등이며, 수입의 경우 미국(13.6%),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등이다. 이란-이라크 전쟁 중이던 1986년의 무역 구조는 2003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당시에는 인프라 파괴로 원유 수출이 부진하여 12억 달러의 무역 적자를 기록했고, 제철업 미발달로 철강 수입 비중(5.9%)이 높았다. 당시 주요 교역 상대국은 수출의 경우 브라질, 일본, 스페인, 터키, 유고슬라비아였고, 수입의 경우 일본, 터키, 영국, 서독, 이탈리아였다.
9.5. 교통 및 기반 시설

이라크는 현대적인 고속도로망을 갖추고 있으며, 도로 총연장은 약 4.56 만 km에 달한다. 도로는 이란, 터키, 시리아,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 인접 국가와 연결되어 있다. 700만 대 이상의 승용차와 100만 대 이상의 상업용 택시, 버스, 트럭이 운행 중이며, 주요 고속도로의 최고 제한 속도는 시속 110 km/h이다. 많은 도로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에 건설되어 설계 수명이 20년이었으나, 지속적인 전쟁으로 대부분 손상되었다. 이후 특히 바그다드에서는 교통 체증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이라크 공화국 철도는 이라크의 철도 운송을 담당하며, 철도 기반 시설은 총연장 3870463 m (2405 mile)의 선로, 109개의 역, 31대의 기관차, 1,685량의 철도 차량으로 구성된다. 정부는 터키,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철도 연결을 통해 유럽-걸프 간 연속 철도 노선을 완성하려 하고 있으며, 현재 카르발라와 나자프를 연결하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2014년에는 바그다드와 바스라를 잇는 노선에 중국 중처칭다오쓰팡기차차량에서 제작한 시속 160 km/h의 고속 열차가 도입되었다.
이라크 석유 수출의 대부분은 항구를 통해 이루어진다. 바스라는 이라크의 유일한 해안 주로, 아부 플루스항, 알바스라 석유 터미널, 그랜드 포항, 코르 알 아마야 석유 터미널, 코르 알 주바이르항, 움 카스르항 등 이라크의 6개 항구가 모두 이곳에 위치한다. 2012년 기준 이라크에는 약 104개의 공항이 있으며, 주요 공항으로는 바그다드 국제공항, 바스라 국제공항, 아르빌 국제공항, 술라이마니야 국제공항, 키르쿠크 국제공항, 알나자프 국제공항 등이 있다. 정부는 카르발라와 나시리야에 국제공항을 건설 중이며(나시리야는 중국과 협력), 2013년~2017년 내전 중 폐쇄되었던 모술 공항 재개방도 추진하고 있다.
이라크는 수자원 관리 시스템이 수십 년간의 전쟁으로 큰 타격을 받아 주요 도시들의 상수도 및 위생 시설 부족과 수질 악화 문제를 겪고 있다. 그러나 넓은 호수들이 가뭄에 시달리는 서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물 공급을 완화해주고 있다. 인구의 91%가 식수 사용이 가능하며, 농촌 지역은 77%, 도시 지역은 98%이다. 오래된 장비로 인해 처리 과정에서 많은 물이 버려져 에너지 부담을 가중시키고 공급을 감소시킨다.
2013년 말 이라크는 주택 위기에 직면했다. 당시 전쟁으로 피폐해진 이라크는 수요를 맞추기 위해 2016년까지 건설해야 할 250만 채의 주택 중 5%만 완공할 예정이었다고 건설주택부 장관이 확인했다. 2009년 이라크-영국 사업 협의회가 결성되었다. 2013년 중반, 한국 기업 대우건설은 약 60만 명의 주민이 거주할 10만 채 규모의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 2020년 12월, 알수다니 총리는 그랜드 포항 2단계 공사를 시작했으며, 대우건설이 27.00 억 USD에 수주했다. 2023년 말, 정부는 지속적인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라크 전역에 총 15개의 신도시를 건설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첫 5개 신도시는 바그다드, 바빌론, 니네베, 안바르, 카르발라에 위치하며, 다른 10개 신도시는 다른 주에 건설될 예정이다. 주택 계획의 첫 단계는 2023년 말 알수다니 총리가 알자와히리 시의 기공식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수도 서쪽에 위치한 이 신도시는 3만 채의 주택을 공급하며 20.00 억 USD가 소요될 예정이다. 완공까지는 4~5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며, 정부 재정은 투입되지 않는다고 관리들은 밝혔다.
2024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바그다드 방문 중 이라크, 터키,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간에 이라크 개발 도로 프로젝트 협력에 관한 4자 양해각서가 체결되었다. 중동 최대 항구를 목표로 하는 그랜드 포항과 터키 국경을 연결하는 1200 km의 철도 및 고속도로 프로젝트는 2025년까지 170.00 억 USD의 예상 비용으로 완공될 예정이다. 관리들에 따르면 이는 이라크의 전략적 국가 프로젝트이며, 중동 최대의 항구가 되어 이라크의 지정학적 위상을 강화할 것이다.

9.6. 재정, 금융 및 재건
2003년 이후 설립된 이라크의 "달러 경매" 시스템은 대규모 금융 사기의 통로가 되었다. 이 시스템은 이라크 은행들이 연방준비은행에 보관된 이라크 석유 수입으로 미국 달러를 구매할 수 있도록 허용하지만, 사기꾼, 테러리스트, 자금 세탁업자들에 의해 수십억 달러가 이라크에서 유출되는 데 악용되었다. 사기 경고와 증거에도 불구하고 미국 관리들은 수년간 중요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2015년 이라크 의회 위원회는 알후다 은행에 의한 65.00 억 USD 사기 취득을 포함한 광범위한 사기를 적발했다. 일반적인 사기는 이라크 은행들이 달러를 얻기 위해 가짜 송장과 문서를 제출한 후, 합법적인 수출업자가 아닌 환전소나 개인에게 송금하는 방식이었다. 이 잘못 사용된 자금은 이란 지원 민병대, 이슬람 국가, 시리아 정권 등 다양한 미국의 적대 세력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미국의 조치에는 사기에 연루된 일부 이라크 은행과 개인에 대한 제재가 포함되었지만, 비평가들은 이러한 조치가 너무 늦었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인 사기 거래 사례로는 연합투자은행(UBI)과 그 회장인 파딜 알다바스가 연루된 사례가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무대응이 이라크 디나르 안정 유지에 대한 집중과 이슬람 국가와의 전쟁으로 인한 주의 분산 등 다양한 요인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오랜 금융 남용은 이라크와 이 지역의 미국 이익 모두에 광범위한 결과를 초래했으며, 분쟁 후 환경에서 금융 감독의 복잡성을 강조한다.
10. 사회
이라크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는 다층적인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인구 구성, 민족 분포, 언어 사용 현황, 종교적 다양성, 교육 및 보건 시스템, 주요 도시의 특징, 그리고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한 디아스포라 및 난민 문제는 이라크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들이다.
10.1. 인구
연도 | 인구 (백만 명) |
---|---|
1878 | 2.0 |
1947 | 4.8 |
1957 | 6.3 |
1977 | 12.0 |
1987 | 16.3 |
1997 | 22.0 |
2009 | 31.6 |
2016 | 37.2 |
2021 | 41.3 |
2024년 추산 이라크의 총인구는 약 4,652만 명이다. 1878년 200만 명에 불과했던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특히 이라크 전쟁 이후 인구 급증 현상을 보이며 2013년에는 3,500만 명에 이르렀다. 인구 성장률은 비교적 높은 편이며, 연령 구조는 젊은 층의 비중이 높은 피라미드 형태를 보인다. 인구 밀도는 지역별로 차이가 크며, 주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비옥한 평야 지대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모술, 바그다드, 바스라의 세 빌라예트(주)가 서로 다른 민족 집단의 집중지로 지정되기도 했다.
10.2. 민족
이라크의 토착 인구는 주로 아랍인이지만, 쿠르드족, 투르크멘인, 아시리아인, 야지디인, 샤바크인, 아르메니아인, 만다야인, 체르케스인, 카울리야인과 같은 다른 민족 집단도 포함한다.
유럽 의회 조사국(European Parliamentary Research Service)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아랍인은 2,400만 명(시아파 1,400만 명, 수니파 900만 명), 수니파 쿠르드인은 470만 명(파일리 쿠르드인 50만 명, 카카이인 20만 명 추가), (대부분 수니파인) 이라크 투르크멘인은 300만 명, 이라크 흑인은 100만 명, 기독교인(아시리아인 및 아르메니아인 포함)은 50만 명, 야지디인은 50만 명, 샤바크인은 25만 명, 롬인(집시)은 5만 명, 만다야인은 3,000명, 체르케스인은 2,000명, 바하이교 신자는 1,000명, 그리고 수백 명의 유대인이 있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월드 팩트북에 따르면, 1987년 이라크 정부 추정치를 인용하여 이라크 인구의 75~80%가 아랍인이고, 15~20%가 쿠르드인이다. 또한 이 추정치는 투르크멘인, 아시리아인, 야지디인, 샤바크인, 카카이인, 베두인, 롬인, 체르케스인, 만다야인, 페르시아인을 포함한 다른 소수 민족이 인구의 5%를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제위기감시기구(International Crisis Group)는 1987년 인구 조사 수치와 1967년, 1977년, 1997년 인구 조사 수치 모두 "정권 조작 혐의로 인해 매우 문제가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지적하는데, 이는 이라크 시민들이 아랍 또는 쿠르드 민족에 속한다고만 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이라크에서 세 번째로 큰 민족 집단인 투르크멘인과 같은 다른 소수 민족의 수를 왜곡했다.
바그다드의 역사적인 아시리아인 거주지에는 2003년에 15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했다. 그들 대부분은 전쟁 격화 이후 피난했으며, 오늘날에는 1,500명의 아르메니아인만이 도시에 남아 있다. 약 2만 명의 늪지 아랍인이 이라크 남부에 거주한다. 이라크에는 2,500명의 체첸인 공동체와 약 2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있다. 이라크 남부에는 노예제의 유산과 9세기 잔즈 반란 이전부터 시작된 이슬람 칼리파국에서의 노예제 관행, 그리고 주요 항구로서의 바스라의 역할로 인해 아프리카계 이라크인 공동체가 있다. 이라크는 아라비아판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10.3. 언어

이라크에서 주로 사용되는 언어는 메소포타미아 아랍어와 쿠르드어이며, 그 다음으로는 터키어의 이라크 투르크멘/투르코만 방언과 신아람어(특히 칼데아어와 아시리아어 방언)이다. 아랍어와 쿠르드어는 아랍 문자의 변형된 형태로 표기된다. 2005년부터 투르크멘/투르코만인들은 아랍 문자에서 터키어 알파벳으로 전환했다. 그 외 소수 언어로는 만다야어, 샤바크어, 아르메니아어, 체르케스어, 페르시아어 등이 있다.
2003년 침공 이전에는 아랍어가 유일한 공식 언어였다. 2005년 새로운 이라크 헌법이 승인된 이후, 아랍어와 쿠르드어 모두 이라크의 공식 언어로 인정되었으며(제4조), 투르크멘어, 시리아어, 아르메니아어 세 가지 다른 언어도 소수 언어로 인정되었다. 또한, 어떤 지역이나 주든지 일반 국민투표에서 인구 과반수가 승인하면 다른 언어를 공식 언어로 선언할 수 있다.
이라크 헌법(제4조)에 따르면: 아랍어와 쿠르드어는 이라크의 두 공식 언어이다. 이라크인이 자녀를 모국어(투르크멘어, 시리아어, 아르메니아어 등)로 교육받을 권리는 교육 지침에 따라 정부 교육 기관에서 보장되거나, 사립 교육 기관에서는 다른 언어로 보장된다.
10.4. 종교

이라크의 종교는 주로 아브라함 종교가 지배적이다. CIA 월드 팩트북은 2015년에 이라크인의 90~95%가 이슬람교를 따르며, 그중 61~64%가 시아파이고 29~34%가 수니파라고 추정했다. 기독교는 1%를 차지했고, 나머지(1~4%)는 야지디교, 만다야교 및 기타 종교를 신봉했다. 2011년 퓨 연구센터의 이전 추정치에 따르면 이라크 무슬림의 51%가 자신을 시아파로, 42%가 수니파로, 5%가 "단지 무슬림"으로 여겼다. 이라크는 시아파에게 가장 성스러운 두 곳인 나자프와 카르발라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시아파 무슬림은 주로 이라크 남부와 북부 일부 지역 및 바그다드에 집중되어 있다. 수니파 무슬림은 수니파 삼각지대로 알려진 라마디, 티크리트, 팔루자와 같은 도시에서 발견되며, 이곳에서는 수니파가 다수를 차지한다.
이라크의 기독교는 서기 5세기 동방 교회의 탄생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라크 지역에 이슬람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있었다. 이라크 기독교인은 주로 고대 동방 교회, 아시리아 동방 교회, 칼데아 가톨릭교회, 시리아 가톨릭교회, 시리아 정교회에 속한 토착 아시리아인이다. 또한 아르메니아 학살 당시 터키에서 피난 온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도 상당수 존재한다. 기독교인은 1987년에 140만 명 이상(추정 인구 1,630만 명의 8%)이었고, 1947년에는 55만 명(인구 460만 명의 12%)이었다. 2003년 이라크 침공 이후 기독교인에 대한 폭력이 증가하여 납치, 고문, 폭탄 테러, 살해 사건이 보고되었다. 2003년 이후 전쟁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민족적, 종교적 박해의 결과로 남아있던 기독교 공동체 대부분을 고향에서 몰아냈다.
이라크는 중동에서 가장 오래된 유대인 공동체 중 하나이자 최초의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본거지이다. 1948년 유대인 인구는 20만 명으로 추산되었지만, 일부 자료에 따르면 인구가 훨씬 더 많았을 수도 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유대인들은 이라크에서의 박해를 피해 이주했으며, 그중 10만 명이 남아 있었다. 사담 후세인이 집권할 무렵에는 그들의 인구가 15,000명으로 줄었다. 그의 통치하에서 인구는 박해 때문이 아니라 정부가 여행 제한을 해제하여 많은 유대인이 해외로 이주하고 가끔 이라크를 방문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감소했다. 이 시점에서 약 1,500명의 유대인이 남아 있었다. 2003년 이후 유대인 공동체 사이에서 공포가 증가하여 더욱 감소했다. 오늘날 이라크에는 약 400명의 유대인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라크에는 250개 이상의 유대인 유적지가 있다.
또한 만다야인, 샤바크인, 야르산교, 야지디교와 같은 소수 민족-종교 공동체가 남아 있다. 2003년 이전에는 이들의 수를 합하면 200만 명에 달했을 수 있으며, 대다수는 이슬람 이전 및 기독교 이전 종교에 뿌리를 둔 비이슬람 종교인 야르산교도였다. 야지디교도는 주로 신자르 산맥 주변에 집중되어 있다. 만다야교도는 주로 바그다드, 팔루자, 바스라, 힐라 주변에 거주한다.
10.5. 교육

1990년 이전과 이후 2003년 이전에 이라크는 이미 선진적이고 성공적인 교육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교육적 성공에서 "퇴보"하고 있다. 사담 후세인은 통치 기간 동안 이라크를 고등 교육의 선도적인 중심지로 만들었다. 새천년 개발 목표(MDG) 시행 이후 이라크의 교육은 개선을 보였다. 등록 학생 수는 2000년에서 2012년 사이에 거의 두 배로 증가하여 600만 명에 달했다. 2015년~2016년까지 약 920만 명의 어린이가 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며, 등록률은 연간 4.1%씩 꾸준히 증가했다.
그러나 초등 교육 학생 수의 급격한 증가는 시스템에 부담을 주었다. 교육은 정부 지출의 5.7%만을 차지하여 학교 투자 부족과 지역 내 교육 순위 저조로 이어졌다. 유니세프(UNICEF)는 자금 낭비로 인해 중퇴율과 유급률이 증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퇴율은 1.5%에서 2.5%에 이르며, 경제적 또는 가족적 이유로 여학생들이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유급률은 거의 17%에 달하여 2014년~2015년 교육 자금의 약 20% 손실을 야기했다.
이라크의 초등 교육 아동 등록률은 지역적 격차가 크게 영향을 미친다. 살라딘주와 같은 분쟁 지역에서는 학교가 대피소나 군사 기지로 전환되어 학령기 아동의 90% 이상이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다. 제한된 자원은 교육 시스템에 부담을 주어 교육 접근성을 저해한다. 그러나 폐쇄된 학교를 다시 열려는 노력이 이루어졌으며, 모술에서는 38만 명 이상의 어린이가 학교로 돌아가는 성공을 거두었다. 교육 접근성은 지역에 따라 다르며, 남학생과 여학생 간의 격차도 존재한다.
2024년, 정부는 이라크-중국 기본 협정에 따라 전국에 790개의 새로운 학교를 개교했다. 이 계획은 수년간의 분쟁으로 인한 파괴로 악화된 학교 과밀화와 3부제 수업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많은 학교가 여러 부제로 운영되어야 했으며, 때로는 학생들에게 하루 4시간의 학습 시간만 제공하여 교육 성과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학교 건설 프로젝트는 2021년 이라크와 중국 정부 간의 1,000개 학교 건설 협정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이라크 총리는 이라크 개발 기금(DFI)이 곧 민간 부문과 협력하여 현재 8,000개 이상의 학교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400개의 학교를 추가로 건설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전통적인 꾸란 학교에서 시작된 이라크의 교육 제도는 영국 위임통치령 시대에 서구형 초등 교육이 도입되었고, 독립 이전인 1929년부터 여성 중등 교육도 시작되었다. 현재의 교육 제도는 1978년에 개정되어 의무 교육이 6년제로 되었다. 초등 교육부터 고등 교육까지 무상으로 제공되며, 국립 학교 외의 학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1990년 통계에 따르면 초등학교는 8,917개교였으며, 3년제 중학교 진학은 시험을 통해 결정되어 3명 중 1명이 진학했다. 대학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은 중학교 졸업 후 2년간의 예비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수도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8개의 대학이 있으며, 대학 졸업 후에는 19개의 과학 기술 연구소로 진학할 수도 있다.
10.6. 보건 의료

2010년 이라크의 보건 의료 지출은 국가 GDP의 6.84%를 차지했다. 2008년에는 인구 1만 명당 의사 6.96명, 간호사 13.92명이 있었다. 2010년 출생 시 기대 수명은 68.49세(남성 65.13세, 여성 72.01세)로, 1996년 최고치였던 71.31세보다 낮아졌다.
이라크는 1970년대에 병원 중심의 자본 집약적인 치료 중심 의료 모델을 사용하여 중앙 집중식 무상 의료 시스템을 개발했다. 2003년 7월 유니세프(UNICEF)와 세계 보건 기구(WHO)가 공동으로 발표한 "감시 보고서"에 따르면, 이라크는 석유 수출 수입으로 지불되는 의약품, 의료 장비, 심지어 간호사까지 대규모 수입에 의존했다. 일차 진료 의사를 활용한 대중 보건에 중점을 둔 다른 가난한 나라들과 달리, 이라크는 전문 의사가 제공하는 첨단 의료 절차를 갖춘 서구화된 정교한 병원 시스템을 개발했다. 유니세프/WHO 보고서는 1990년 이전에 도시 거주자의 97%와 농촌 인구의 71%가 무상 일차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으며, 병상 중 단 2%만이 민간에서 관리되었다고 지적했다.
2024년, 모함메드 시아 알수다니 총리는 바그다드에서 거의 40년 만에 처음으로 새로운 종합 병원인 샤브 종합병원을 공식 개원했다. 오랫동안 지연되었던 이 246병상 규모의 시설은 협력 관리 모델하에 완공되었으며, 수다니 총리에 따르면 최첨단 기반 시설, 첨단 의료 장비, 모든 범위의 의료 서비스를 갖추고 있다. 살리흐 하스나위 보건부 장관은 지난 2년간 13개의 신규 병원, 3개의 전문 센터, 2개의 화상 병동, 여러 주에 25개의 신장 치료 센터 건설 등 보건부의 성과를 강조했으며, 자격을 갖춘 기업이 관리할 100병상 규모의 신규 병원 16개를 건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같은 해 정부는 새로 개원한 나자프 교육 병원에서 현대 병원의 공동 운영 및 관리 프로그램 시행을 시작했다.
10.7. 주요 도시
이라크의 수도는 바그다드이며, 인구 약 800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국내 최대 도시이자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티그리스강 연안에 위치하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북부의 주요 도시로는 모술과 아르빌이 있다. 모술은 니나와주의 주도로, 티그리스강 서안에 위치하며 고대 니네베 유적과 가깝다.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는 역사적인 도시이지만, 최근 ISIL 점령과 전투로 큰 피해를 입었다. 아르빌은 쿠르드 자치구의 수도이자 경제 중심지로, 오랜 역사를 지닌 아르빌 성채가 유명하다. 남부의 주요 도시로는 바스라가 있다. 샤트알아랍강 연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로, 이라크 석유 산업의 중심지이자 대외 무역의 관문 역할을 한다. 시아파 무슬림의 성지인 나자프와 카르발라도 중요한 도시로, 매년 수많은 순례객이 방문한다. 이 외에도 키르쿠크, 술라이마니야, 나시리야, 팔루자, 라마디 등이 각 지역의 주요 도시로 기능하고 있다.
순위 | 도시 | 주 | 인구 |
---|---|---|---|
1 | 바그다드 | 바그다드주 | 8,126,755 |
2 | 모술 | 니나와주 | 3,729,998 |
3 | 바스라 | 바스라주 | 2,908,491 |
4 | 나시리야 | 디카르주 | 2,095,172 |
5 | 힐라 | 바빌주 | 2,065,042 |
6 | 아르빌 | 아르빌주 | 1,854,778 |
7 | 술라이마니야 | 술라이마니야주 | 2,053,305 |
8 | 라마디 | 안바르주 | 1,771,000 |
9 | 바쿠바 | 디얄라주 | 1,637,226 |
10 | 키르쿠크 | 키르쿠크주 | 1,597,876 |
10.8. 디아스포라 및 난민
이라크 원주민이 다른 나라로 흩어져 사는 것을 이라크 디아스포라라고 한다. 2003년 다국적군의 이라크 침공 이후 약 200만 명의 이라크인이 고국을 떠나 주로 요르단과 시리아로 피난했다고 유엔 난민 기구(UNHCR)는 추산했다. 2021년 유엔은 국내에 110만 명의 실향민이 있다고 추산했다. 2007년 유엔은 이라크 중산층의 약 40%가 피난한 것으로 보이며, 대부분은 조직적인 박해를 피해 떠났고 돌아올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안보 상황이 개선되면서 디아스포라가 돌아오는 것처럼 보였고, 이라크 정부는 2007년 10월에만 46,000명의 난민이 집으로 돌아왔다고 주장했다.
2011년에는 거의 300만 명의 이라크인이 실향민이 되었으며, 이 중 130만 명은 이라크 내에, 160만 명은 주로 요르단과 시리아 등 인접 국가에 있었다. 이라크 기독교인의 절반 이상이 미국 주도 침공 이후 고국을 떠났다. 미국 시민권 및 이민 서비스 공식 통계에 따르면 2011년 5월 25일까지 58,811명의 이라크인이 난민 지위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2011년 시리아 내전 발발 이후 시리아에 있던 많은 이라크인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시리아 내전을 피해 2012년 이후 다양한 민족의 시리아 난민 252,000명 이상이 이라크로 피난했다.
11. 문화
이라크의 문화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화로 거슬러 올라가는 깊은 유산을 가지고 있다. 이라크는 건축, 문학, 음악, 무용, 회화, 직조, 도예, 서예, 석조, 금속 공예를 포함하여 세계에서 가장 긴 문자 기록 전통 중 하나를 가지고 있다. 이라크 또는 메소포타미아의 문화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사 중 하나이며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 중 하나로 간주된다.
메소포타미아 유산은 문자 체계, 수학, 시간, 달력, 점성술, 법전을 발명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구세계 문명에 영향을 미치고 형성했다. 이라크는 다양한 민족 집단의 본거지이며, 각 민족은 국가의 길고 풍부한 유산에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했다. 이 나라는 시인, 건축가, 화가, 조각가로 유명하며, 이들 중 일부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이라크는 깔개와 카펫을 포함한 훌륭한 수공예품 생산으로 유명하다.
11.1. 역사적 유산

이라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로서 풍부한 고고학적 유적과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다. 인류 최초의 도시, 문자, 법전 등이 이 지역에서 탄생했으며, 수메르, 아카드,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등 강력한 고대 국가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인류 문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라크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다수의 유적지가 있다. 대표적으로 하트라는 파르티아 제국 시대의 잘 보존된 도시 유적으로, 로마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아슈르는 아시리아 제국의 첫 번째 수도이자 종교 중심지였으며, 광대한 도시 유적과 지구라트 등이 남아있다. 바빌론은 고대 세계의 중심 도시 중 하나로, 함무라비 법전과 공중정원으로 유명하며, 최근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다. 우르는 수메르 시대의 주요 도시 국가로, 잘 보존된 지구라트가 상징적이다. 사마라 고고 유적 도시는 아바스 칼리파국 시대의 수도였으며, 독특한 나선형 미나렛을 가진 사마라 대모스크가 유명하다.
이러한 유적들은 이라크의 찬란한 과거를 증명하는 동시에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으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그러나 오랜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 ISIL과 같은 극단주의 세력에 의한 파괴와 약탈로 인해 많은 유산이 심각한 위협에 직면해 있으며, 이의 보존과 복원을 위한 국제적인 관심과 노력이 절실한 상황이다.
11.2. 예술 및 건축


고대 이라크에는 여러 상호 연결된 예술 전통이 있었다. 아바스 왕조는 750년에서 945년 사이에 주로 그 중심지인 메소포타미아에서 발전했다. 아바스 왕조는 주로 메소포타미아 예술 전통의 영향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페르시아 및 중앙아시아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8세기에서 13세기 아바스 시대 동안 도자기는 높은 수준의 정교함에 도달했고, 서예는 장식품 표면을 장식하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꾸란 텍스트와 같은 채색 필사본은 더욱 복잡하고 양식화되었다. 이라크 최초의 미술 학교가 이 시기에 설립되어 장인과 공예가 번창할 수 있었다.
아바스 시대의 절정기인 12세기 후반에는 필사본 삽화와 서예의 양식적 운동이 등장했다. 현재 바그다드파로 알려진 이 이슬람 예술 운동은 일상생활의 표현과 과거에 사용되었던 전형적인 인물 대신 매우 표현력이 풍부한 얼굴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라크의 건축은 기원전 10천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메소포타미아와 아바스 건축을 모두 포함한다. 바그다드와 모술에는 수많은 문화 및 유산 건물이 있다. 바그다드와 바스라에는 역사적인 모스크가 많고, 모술에는 오래된 교회가 있으며, 바그다드에는 시나고그가 있다. 현대의 저명한 건축가로는 자하 하디드, 바실 알바야티, 리파트 차디르지, 히샴 N. 아시쿠리 등이 있다.
수도였던 니누스 또는 니네베는 키악사레스 휘하의 메디아인들에게 함락되었고, 약 200년 후 크세노폰이 그 유적지를 지나갔을 때는 단순한 흙더미에 불과했다. 그곳은 1845년 보타와 레이어드가 아시리아 도시들의 유적을 발견할 때까지 묻혀 있었다. 주요 유적은 모술 북동쪽 10 km 지점의 코르사바드, 고대 칼라로 추정되는 님루드, 그리고 고대 니네베일 가능성이 높은 쿠윤지크 유적이다. 이 도시들에서는 궁전-사원으로 보이는 여러 대형 건물의 파편이 발견된다. 이 건물들은 주로 햇볕에 말린 벽돌로 지어졌으며, 남아 있는 것은 조각과 그림으로 장식된 벽의 아랫부분, 포장도로의 일부, 높이에 대한 약간의 표시, 그리고 배수 관련 시설 일부뿐이다. 최근 몇 년 동안 현대 건물에는 쇼핑몰과 고층 타워가 포함된다.
수도의 중요한 문화 기관으로는 이라크 국립 교향악단이 있으며, 이라크 점령 기간 동안 리허설과 공연이 잠시 중단되었지만 이후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라크 국립 극장은 2003년 침공 당시 약탈당했지만 복원 노력이 진행 중이다. 라이브 극장계는 1990년대 유엔 제재로 외국 영화 수입이 제한되면서 활기를 띠었다. 약 30개의 영화관이 라이브 무대로 전환되어 다양한 코미디와 드라마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바그다드의 문화 교육 기관으로는 음악 아카데미, 미술 연구소, 바그다드 음악 발레 학교가 있다. 바그다드에는 또한 이라크 국립 박물관을 포함한 여러 박물관이 있으며, 이곳에는 고대 이라크 문명의 유물과 유적이 세계에서 가장 크고 훌륭하게 소장되어 있다. 그중 일부는 이라크 점령 기간 동안 도난당했다. 2021년, 이라크는 약 17,000점의 약탈된 유물을 회수했다고 발표했는데, 이는 사상 최대 규모의 반환으로 간주되었다.
11.3. 문학

이라크 문학은 종종 "메소포타미아 문학"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이들 문화가 혼합된 결과 다양한 문명이 번성했기 때문이며, 이러한 문화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 사이의 중동 지리적 영역을 차지했던 것을 암시하여 메소포타미아 또는 바빌로니아 문학이라고 불려왔다.
수메르 문학은 알려진 어떠한 언어 뿌리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독특했다. 그 출현은 그것을 나타내는 사물의 상징으로 시작되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토판 위의 쐐기 문자로 바뀌었다. 이 시기의 문학은 주로 창조 문제, 세계의 출현, 신들, 하늘에 대한 묘사, 유목민과 도시인 사이에서 발발한 전쟁에서의 영웅들의 삶을 다루는 신화적이고 서사적인 텍스트에 관한 것이었다. 또한 종교적 가르침, 도덕적 조언, 점성술, 입법, 역사도 다루었다. 그중 하나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주목할 만한 문학으로 간주되는 길가메시 서사시이다.
아바스 칼리파국 시대에 바그다드의 지혜의 집은 공공 학술원이자 지적 중심지로서 수많은 학자와 작가들을 유치했다. 천일야화의 여러 이야기에 유명한 아바스 시대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라크에는 중세 시인들이 많았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바스라의 하리리, 알무타나비, 아부 누와스, 알자히즈이다. 현대에는 아랍어, 신아람어, 쿠르드어, 터키어 등 다양한 언어가 이라크 문학에서 사용되지만, 아랍 문학이 여전히 가장 영향력 있는 문학으로 남아 있다. 주목할 만한 시인으로는 자와히리, 사파 쿨루시, 두냐 미하일 등이 있다.
11.4. 음악

이라크는 주로 풍부한 마캄 유산으로 유명하며, 이는 마캄의 대가들에 의해 현재까지 끊이지 않는 구전 전승으로 이어져 왔다. 이라크 마캄은 마캄의 가장 고귀하고 완벽한 형태로 간주된다. 알마캄 알이라키는 고전 아랍어의 16개 운율 중 하나 또는 이라크 방언(주하이리)으로 쓰인 노래 시 모음집이다. 이 예술 형식은 유네스코에 의해 "인류 무형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았다.
20세기 초, 이라크에서 가장 저명한 음악가 중 다수가 유대인이었다. 1936년, 이라크 라디오는 타악기 연주자를 제외하고는 전원이 유대인으로 구성된 악단을 설립했다. 바그다드의 나이트클럽에서는 악단이 우드, 카눈, 두 명의 타악기 연주자로 구성되었고, 라디오에서는 네이와 첼로가 추가된 동일한 형식이 사용되었다.
1930년대~1940년대 가장 유명한 가수는 아마도 살리마 파샤(후에 살리마 무라드)였을 것이다. 파샤에 대한 존경과 숭배는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이는 여성의 공개 공연이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라크 출신의 가장 유명한 초기 작곡가는 우드 연주자인 에즈라 아하론이었고, 가장 뛰어난 기악 연주자는 유수프 자루르였다. 자루르는 이라크 라디오 방송국의 공식 악단을 결성했으며 전통 악단에 첼로와 네이를 도입한 책임자였다.
이라크 전통 악기로는 류트와 유사한 우드, 바이올린과 유사한 레바브, 치터와 비슷한 카눈, 갈대 피리 나이, 술잔 모양의 단면 북 다라부카 등이 알려져 있다. 이라크의 우드 연주자로는 자밀 바시르, 나시르 샴마, 아흐메드 무크타르 등이 유명하다.
11.5. 음식

이라크 요리는 약 1만 년 전, 즉 수메르, 아카드,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고대 페르시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라크의 고대 유적에서 발견된 점토판에는 종교 축제 기간 동안 사원에서 준비된 조리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세계 최초의 요리책이다. 고대 이라크, 즉 메소포타미아는 요리 예술을 포함한 모든 지식 분야에서 정교하고 고도로 발전된 여러 문명의 본거지였다. 그러나 바그다드가 아바스 칼리파국의 수도였던 중세 시대에 이라크 요리는 절정에 달했다. 오늘날 이라크 요리는 이러한 풍부한 유산뿐만 아니라 이웃한 터키, 이란, 대시리아 지역의 요리 전통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반영한다.
이라크 요리의 특징적인 재료로는 가지, 토마토, 오크라, 양파, 감자, 주키니, 마늘, 피망, 고추와 같은 채소, 쌀, 불구르 밀, 보리와 같은 곡물, 렌틸콩, 병아리콩, 칸넬리니콩과 같은 두류, 대추, 건포도, 살구, 무화과, 포도, 멜론, 석류, 감귤류 과일, 특히 레몬과 라임과 같은 과일이 있다.
서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닭고기와 특히 양고기가 가장 인기 있는 육류이다. 대부분의 요리는 쌀과 함께 제공되는데, 보통 이라크 남부의 습지에서 재배되는 바스마티이다. 불구르 밀은 고대 아시리아 시대부터 이 나라의 주식이었기 때문에 많은 요리에 사용된다.
이라크 국민들이 가장 많이 소비하는 기호품은 차이다. 유엔 통계에 따르면 1983년부터 1985년까지 3년간 국민 1인당 평균 2.63 kg의 차를 소비했는데, 이는 카타르, 아일랜드, 영국에 이어 세계 4위였다. 국가가 부유해짐에 따라 차 소비량은 증가하여 2000년부터 2002년까지는 1인당 2.77 kg을 소비하여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전쟁의 영향으로 소비량이 감소했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11.6. 스포츠
이라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이다. 농구, 수영, 역도, 보디빌딩, 권투, 킥복싱, 테니스 또한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이라크 축구 협회는 이라크의 축구 관리 기구로, 이라크 축구 국가대표팀과 이라크 스타스 리그를 관장한다. 1948년에 설립되었으며, 1950년부터 FIFA 회원국, 1971년부터 AFC 회원국이다. 이라크는 2007년 AFC 아시안컵 우승팀이며, 1986년 FIFA 월드컵과 2009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 참가했다.
이라크 프로 축구 리그인 이라크 스타스 리그는 1974년에 창설되었다. 알자우라 SC가 리그 최다인 14회 우승을 차지했으며, 이라크 FA컵에서도 대회 최다인 16회 우승을 기록했다. 국가적 영웅으로는 유니스 마흐무드가 있으며, 그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U-23 대표팀을 4강으로 이끌었고, 2007년 AFC 아시안컵에서는 팀의 첫 우승을 이끌며 득점왕과 MVP를 동시에 수상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2007년 발롱도르 후보에 올라 29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11.7. 언론
이라크는 중동에서 두 번째로 텔레비전 방송국을 보유한 국가로, 1950년대에 시작되었다. 이라크 현대화 계획의 일환으로 영국 통신 회사 파이 유한회사가 수도 바그다드에 텔레비전 방송국을 건설하고 위탁 운영했다.
2003년 완전한 국가 통제가 끝난 후, 이라크의 방송 매체는 상당한 성장기를 맞았다. 2003년 중반, BBC 보고서에 따르면 이라크인이 소유한 라디오 방송국 20개, 텔레비전 방송국 17개, 그리고 이라크인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신문 200개가 있었다.
이라크 미디어 전문가이자 이 주제에 관한 다수의 보고서를 저술한 이브라힘 알 마라시는 2003년 미국 주도의 이라크 침공을 4단계로 구분하며, 각 단계가 이후 이라크 미디어의 방식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이 단계들은 침공 전 준비, 전쟁 및 실제 목표물 선택, 전후 초기, 그리고 반란 확산 및 이라크 임시 정부(IIG)와 이야드 알라위 총리에게 권력 이양 시기이다.
11.8. 세계유산
이라크는 1974년 3월 5일 세계유산 협약을 비준했다. 주요 세계유산으로는 다음과 같은 곳들이 있다.
- 하트라: (1985년 등재) 바그다드 북서쪽 290 km에 위치한 평원 도시 유적으로, 파르티아 제국의 통상 및 종교 중심지였다. 로마 제국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되었다. 원형 극장, 신전 등 잘 보존된 건축물은 헬레니즘과 로마, 동방의 건축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특징을 보여준다.
- 아슈르: (2003년 등재) 하트라 남동쪽 50 km, 티그리스강변에 위치한 도시 유적으로, 아시리아 제국의 첫 번째 수도이자 종교 중심지였다. 기원전 3000년경 수메르 도시로 시작하여 여러 시대를 거치며 번영했으나,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후 파르티아 시대에 재건되었으나 다시 파괴되었다.
- 사마라 고고 유적 도시: (2007년 등재) 9세기 아바스 칼리파국의 수도였으며, 독특한 나선형 미나렛을 가진 사마라 대모스크로 유명하다. 이슬람 도시 계획과 건축 예술의 중요한 사례를 보여준다.
- 아르빌 성채: (2014년 등재) 수천 년 동안 지속적으로 사람이 거주해 온 고대 도시로, 언덕 위에 세워진 독특한 성채 도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 아흐와르: (2016년 등재) 이라크 남부의 메소포타미아 습지 지역으로, 함마르호, 하위자호, 중앙 습지와 함께 고대 수메르 도시인 우루크, 우르, 에리두 유적지를 포함하는 복합유산이다. 생물 다양성이 풍부하며, 인류 문명 초기 정주 생활의 증거를 보여준다.
- 바빌론: (2019년 등재) 고대 세계의 중심 도시 중 하나로, 함무라비 법전, 이슈타르 문, 공중정원(전설) 등으로 유명하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였으며,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정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이러한 세계유산들은 이라크의 풍부한 역사와 문화를 증명하지만, 동시에 분쟁과 약탈로 인해 지속적인 보존의 위협에 놓여 있다.
11.9. 관광

이라크는 수년 동안 중요한 관광지였으나, 이란-이라크 전쟁과 미국 및 동맹국의 침공 이후 극적으로 변화했다. 이라크가 계속 발전하고 안정되면서 관광 산업은 여전히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으며, 주로 분쟁으로 인해 세계적인 관광지로서의 엄청난 잠재력을 발휘하고 관련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정부의 노력은 미미했다.
이라크의 고대 유적지는 수없이 많으며, 대도시 근처의 많은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바빌론은 최근 대대적인 복원 작업을 거쳤으며, 유명한 지구라트(성서의 바벨탑에 영감을 준 건축물), 공중 정원(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 이슈타르의 문으로 유명하여 최고의 관광지이다. 바빌론의 경쟁자였던 니네베 또한 상당한 복원 및 재건 작업을 거쳤다. 최초의 수메르 도시 중 하나로 나시리야 근처에 있는 우르는 부분적으로 복원되었다.
이라크는 생태관광의 잠재적 장소로도 여겨진다. 관광에는 카르발라와 나자프 근처의 시아파 이슬람 성지 순례도 포함된다. 2003년 이후 나자프와 카르발라는 종교 관광으로 인해 경제 호황을 누렸다. 모술 박물관은 바그다드의 이라크 박물관 다음으로 이라크에서 두 번째로 큰 박물관으로, 고대 메소포타미아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사담 후세인은 전국에 수백 개의 궁전과 기념물을 건설했다. 그중 일부는 알포 궁전, 아스살람 궁전, 라드와니야 궁전이다. 알포 궁전은 현재 이라크 미국 대학교 바그다드 캠퍼스가 사용하고 있다. 사담 축출 이후 궁전들은 관광객에게 개방되었지만 공식적으로 운영되지는 않으며, 이라크 정부는 유용한 목적으로 매각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이 구조물들 대부분은 이라크가 유엔의 제재를 받던 1991년 걸프 전쟁 이후에 건설되었다. 사담은 세계 최초의 도시 중 하나인 바빌론 일부를 재건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새긴 벽돌을 사용하여 자신을 이 지역 과거의 영광과 연관 지으려 했다. 바스라에 있는 그의 궁전 중 하나는 박물관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