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는 리투아니아의 독립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의 학문적, 예술적 배경은 이러한 정치적 행보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음악학자로서의 전문성과 함께 리투아니아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1.1. 유년기 및 학문적 배경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는 1932년 10월 18일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젬칼니스는 유명한 건축가였고, 어머니인 오나 야블론스키테-란츠베르기에네(Ona Jablonskytė-Landsbergienė리투아니아어)는 안과 의사였다. 란츠베르기스의 어머니는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언니 가족이 유대인 아이 아비비트 키신을 숨기는 것을 도왔고, 벨라 구르비치(이후 로젠버그)라는 16세 유대인 소녀를 숨겨준 공로로 나중에 의로운 사람들로 선정되었다.
그는 1952년 리투아니아 체스 선수권 대회에서 라트미르 홀모프와 블라다스 미케나스에 이어 3위를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955년에는 리투아니아 음악 학교(현재의 리투아니아 음악 연극 아카데미)를 졸업하며 음악 교육을 마쳤다. 이 시기에 그는 플럭서스 운동에도 참여하며 예술적 활동의 폭을 넓혔다. 1968년에는 음악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969년에는 박사 학위 논문을 작성했다.
1.2. 초기 학문 경력
음악 교육을 마친 후,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는 학문적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는 1952년부터 1990년까지 음악 이론과 작곡을 가르쳤으며, 1978년에는 리투아니아 음악원 교수가 되었다. 1978년부터 1990년까지는 리투아니아 음악원과 빌뉴스 교육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94년에는 하빌리타치온 학위를 위한 논문을 작성하는 등 학문적 탐구를 꾸준히 이어갔다. 그는 특히 근대 리투아니아의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화가인 미칼로유스 콘스탄티나스 치울리오니스의 연구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2. 가족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는 저명한 음악가이자 교수였던 그라지나 루치테-란츠베르기엔에(Gražina Ručytė-Landsbergienė리투아니아어, 1930년 ~ 2020년)와 결혼했다. 그녀는 리투아니아의 유명한 피아노 연주자이자 리투아니아 음악 연극 아카데미의 부교수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세 명의 자녀가 있다. 딸인 유라테 란츠베르기테(Jūratė Landsbergytė리투아니아어)와 비루테 란츠베르기테-체하나비치에네(Birutė Landsbergytė-Cechanavičienė리투아니아어)는 모두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다. 아들인 비타우타스 V. 란츠베르기스는 작가이자 영화 감독으로 이름을 알렸다.
또한, 그의 손자인 가브리엘류스 란츠베르기스는 1982년에 태어났으며, 보수 정당의 전 대표이자 리투아니아 의회의 전 의원이며, 전 리투아니아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는 등 정치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3. 정치 경력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는 1980년대 후반 리투아니아의 독립 운동에 투신하면서 정치 경력을 시작했으며, 독립 선언 이후에도 리투아니아의 주요 정치적 역할을 맡아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리더십은 리투아니아의 역사적 전환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3.1. 리투아니아 독립에서의 역할
란츠베르기스는 1988년 리투아니아의 독립 지지 정치 운동인 사유디스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1989년 소련 인민대표대회 선거에서 리투아니아 SSR의 인민 대표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사유디스가 1990년 선거에서 승리한 후, 그는 리투아니아 최고평의회의 의장이 되었다.
1990년 3월 11일, 그는 리투아니아 국가 재건법을 통해 소련으로부터의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을 주도하는 의회 회의를 이끌었다. 이로써 리투아니아는 소련 공화국 중 최초로 독립을 선언한 국가가 되었다. 리투아니아의 잠정 헌법에 따라, 란츠베르기스는 국가의 최고 책임자이자 의회 의장으로서 1990년 3월부터 1992년 11월 다음 선거까지 이 직책을 수행했다.
소련은 1990년 경제 봉쇄를 통해 이러한 독립 활동을 억압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다른 소련 공화국들도 곧이어 모스크바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는 또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을 자유화시키려 한다는 견해와 리투아니아가 이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란츠베르기스는 1991년 1월 리투아니아 독립 운동과 소련군 간의 대치 상황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아이슬란드가 리투아니아 독립 회복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국가였으며, 란츠베르기스는 40년 이상의 소련 점령 이후 리투아니아의 독립 회복 시도에 충분한 지지를 보이지 않은 특정 서방 강대국들(예: 미국 및 영국)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새로 독립한 리투아니아가 영국 및 미국과 즉시 완전한 외교 관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정부의 권고를 수용했다.
3.2. 독립 후 정치적 역할
1993년, 란츠베르기스는 사유디스 세력의 상당 부분을 이끌고 새로운 정치 정당인 조국연합(Tėvynės Sąjunga리투아니아어)을 창당했다. 이 정당은 1996년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란츠베르기스는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세이마스 의장을 역임했다.
그는 1997년 리투아니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1차 투표에서 15.9%의 득표율로 3위에 그쳐 낙선했다. 결선 투표에서는 1차에서 2위를 차지한 발다스 아담쿠스 후보를 지지했고, 아담쿠스는 결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00년 총선에서 조국연합은 8.6%의 득표율로 9석을 얻는 데 그쳤다.
2004년, 란츠베르기스는 리투아니아 유권자들에 의해 브뤼셀의 유럽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리투아니아에서 총 13명의 유럽 의회 의원이 선출됨), 2014년까지 매 선거에서 재선되었다.
2005년 란츠베르기스는 새로 설립된 헨리 잭슨 소사이어티의 국제 후원자가 되었다. 2015년부터 그는 로즈비타 페슬러-케텔러, 유럽 의회 의원 하이디 하우탈라, 알렉시 말름베르그, 프랑크 슈발바-호트와 함께 코카시안 챔버 오케스트라 협회 및 독일 "Förderverein"의 자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4. 주요 정치적 입장 및 활동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는 자신의 정치 경력 동안 민주주의와 인권을 수호하고 전체주의의 위협에 단호히 맞서 싸우는 중요한 정치적 입장을 견지했다. 특히 과거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리투아니아의 경험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영향력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했다.

4.1. 전체주의 상징물 금지 주장
2005년 1월, 유럽 의회 의원이었던 란츠베르기스는 헝가리 출신 유럽 의회 의원 요제프 시아예르의 지지를 받아 유럽 연합 내에서 나치즘 상징물과 더불어 공산주의 상징물도 금지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프랑코 프라티니 유럽 위원회 사법 및 내무 담당 위원에게 서한을 보내, EU가 나치 상징물을 금지하기로 결정한다면 공산주의 상징물도 함께 금지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프라티니 위원은 이 제안에 관심을 보이며 "공산주의 독재정권 역시 나치 정권 못지않게 수천만 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상징물을 금지해야 할지에 대한 합의가 부족했기 때문에 이후 어떠한 상징물도 금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란츠베르기스의 제안은 이탈리아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이탈리아의 좌파들은 이러한 움직임에 강력히 항의했다. 공산주의 재건당과 이탈리아 공산당은 이 제안에 분노를 표출했다. 이 문제는 이탈리아 언론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일간지 중 하나인 《라 레푸블리카》는 란츠베르기스의 제안에 대한 인터뷰를 한 면 전체에 걸쳐 게재했는데, 이는 이 일간지가 리투아니아 정치인에게 한 면 전체를 할애한 최초의 사례였다.
란츠베르기스의 제안은 이탈리아 정치인들 사이에서 거의 지지받지 못했다. 다만, 이탈리아의 전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손녀인 알레산드라 무솔리니만이 "유럽 의회 의원들의 공산주의 상징물에 대한 제안을 이행하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 의무"라고 언급하며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이 제안은 러시아 의회의 반대에도 부딪혔다. 러시아 국가 두마의 제1부의장은 이 제안을 "비정상적"이라고 비난했다. 한 러시아 공산주의 의원은 "유럽의 누군가가 건방져져서 자신들을 파시스트로부터 누가 구했는지 잊어버렸다"고 언급했다.
이 논쟁은 2005년 2월 초 유럽 위원회가 제안된 유럽 전역의 나치 상징물 금지 범위를 공산당 상징물까지 확대하라는 요구를 거부하면서 마무리되었다. 프라티니는 붉은 별과 낫과 망치를 인종차별에 관한 EU 법안 초안에 포함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2005년 2월 말 유럽 연합은 25개 회원국 전체에 걸쳐 나치 상징물 금지 제안을 철회했다. 회원국들이 어떤 상징물을 금지해야 할지에 대한 합의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지자 룩셈부르크가 계획을 철회했다. 또한, 제안된 금지가 표현의 자유를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었다. 현재 헝가리, 폴란드, 발트 3국(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우크라이나는 나치즘과 공산주의 상징물을 모두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4.2. 러시아의 영향력에 대한 비판
란츠베르기스는 발트 3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 행사 의도를 강력히 비판하는 인물이다. 그는 국내외 언론과 유럽 의회에서 러시아의 발트 3국 관련 행동에 대해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며, 러시아가 전 KGB 요원 네트워크와 기타 비밀 활동을 통해 리투아니아와 다른 발트 국가들을 경제적, 정치적으로 통제하려는 의도를 가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란츠베르기스는 러시아가 리투아니아와 다른 구소련 공화국들에 대한 점령 기간 동안 입힌 피해에 대해 보상할 것을 촉구하는 가장 적극적인 정치인 중 한 명이다.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을 포함한 KGB 잔당들이 러시아 정치계에서 활개 치고 소련 국가가 부활하는 등 러시아에서 소련 시대로의 "역코스"가 진행되고 있음을 경계한다. 이러한 이유로 란츠베르기스는 리투아니아와 다른 유럽 연합 신규 가입국들에게 "동방으로부터의 위협은 끝나지 않았다"고 강조하며 러시아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5. 음악 및 학술적 기여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는 정치인으로서의 명성 외에도 뛰어난 음악학자로서 중요한 학문적, 예술적 기여를 했다.
그는 1955년 리투아니아 음악 학교를 졸업했으며, 1952년부터 1990년까지 음악 이론과 작곡을 가르쳤다. 1978년에는 리투아니아 음악원의 교수가 되었고, 1978년부터 1990년까지 빌뉴스 교육 대학교에서도 교수로 재직했다.
란츠베르기스는 특히 리투아니아의 유명한 작곡가이자 화가인 미칼로유스 콘스탄티나스 치울리오니스의 권위 있는 연구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치울리오니스에 대한 여러 저작을 남겼으며, 그의 음악과 예술 세계를 대중에게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도 음악학 분야의 연구 성과였다. 이러한 학문적 배경은 그의 폭넓은 사고와 리투아니아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6. 저술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는 정치와 음악을 비롯한 다양한 주제에 걸쳐 약 20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의 저서들은 리투아니아의 역사적 전환기, 음악적 유산, 그리고 개인적인 성찰을 담고 있다.
주요 저작은 다음과 같다:
- 《Visas Čiurlionis》 (2008년)
- 《Karaliaučius ir Lietuva : nuostatos ir idėjos》 (칼리아우치우스와 리투아니아: 태도와 사상, 2003년)
- 《Pusbrolis Motiejus : knyga apie Stasį Lozoraitį iš jo laiškų ir pasisakymų》 (사촌 마티유: 그의 편지와 연설을 통한 스타시스 로조라이티에 관한 책, 2002년)
- 《Sunki laisvė : 1991 m. ruduo - 1992 m. ruduo》 (힘든 자유: 1991년 가을 - 1992년 가을, 2000년)
- 《Landsbergis aria》 (란츠베르기스 경작, 1997년)
- 《Lūžis prie Baltijos : politinė autobiografija》 (발트해의 단절: 정치적 자서전, 1997년)
- 《Čiurlionio muzika》 (치울리오니스의 음악, 1996년)
- 《Tėvynės valanda》 (조국의 시간, 1993년)
- 《Atgavę viltį : pertvarkos tekstų knygelė》 (희망을 되찾다: 개혁 텍스트 소책자, 1990년)
- 《Sonatos ir fugos / M.K. 치울리오니스》 (소나타와 푸가 / M.K. 치울리오니스, 편집자, 1980년)
- 《Čiurlionio dailė》 (치울리오니스의 예술, 1976년)
이 중 특히 미칼로유스 콘스탄티나스 치울리오니스에 대한 연구서는 음악학자로서 그의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Čiurlionis's Time》이라는 제목으로 2009년 일본에서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
7. 수상 및 영예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는 리투아니아의 독립과 민주주의에 기여한 공로로 국내외에서 수많은 훈장과 상, 그리고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7.1. 영예
7.1.1. 국가 영예
7.1.2. 해외 영예
7.2. 수상
7.3. 명예 박사 학위
란츠베르기스는 다음 기관들로부터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8. 대중의 인식 및 논란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는 리투아니아 독립의 상징적 인물이지만, 그의 정치적 행보와 국가원수 지위 인정 여부를 둘러싸고 대중의 평가와 논란이 존재한다.
8.1. 국가원수 인정 논쟁
1990년부터 1992년까지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가 리투아니아의 국가원수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오랫동안 리투아니아 대중을 양극화시켜 왔다. 2022년 6월 25일, 리투아니아 의회는 란츠베르기스를 국가원수로 인정하는 법안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빅토리야 치밀리테-닐센 세이마스 의장은 "이 법안은 리투아니아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에 대한 존경과 인정의 상징"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야당은 이러한 조치가 "역사 왜곡"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임시 헌법과 기타 역사 기록에 "과도기 동안의 국가원수 기능은 리투아니아 최고평의회 상임간부회라는 집단 의회 기관에 남아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 상임간부회는 11명의 동등한 권한을 가진 의원들로 구성된 집단 정치 단체였으며, 1992년 11월 22일 현재의 리투아니아 헌법이 채택되면서 해체되었다.
의회의 결정은 대중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리에투보스 리타스》의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8%가 이러한 이니셔티브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이 중 42%는 근거가 없다고, 26%는 그 유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2022년 6월 30일,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는 공식적으로 독립 후 리투아니아의 첫 국가원수로 인정되었다. 란츠베르기스는 이에 대해 "축하받아야 할 사람은 저인지 모르겠습니다... 에스토니아가 1990년 3월부터 아르놀드 뤼텔이 대통령이었던 방식으로 이미 정리했듯이, 리투아니아도 마침내 동등한 위치에 있게 되었으므로 오히려 리투아니아를 더 축하해야 합니다"라고 언급했다. 야당은 다음 총선에서 란츠베르기스의 국가원수 지위를 철회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8.2. 기타 논란
2019년, 빌뉴스 시장 레미기유스 시마시우스는 카지스 스키르파(리투아니아 전역에서 유대인을 학살한 리투아니아 행동 전선을 결성한 인물)의 이름을 딴 거리의 이름을 변경하고, 플룽게 학살 당시 리투아니아 유대인 살해를 지시하고 감독한 요나스 노레이카 기념비를 제거했다. 이에 대해 란츠베르기스는 소셜 미디어에 성모 마리아를 "žydelka"(유대인 소녀)라고 지칭하는 시를 올렸고, 리투아니아 유대인 공동체 의장인 파이나 쿠클리안스키는 이를 비난했다. 란츠베르기스는 이 시가 리투아니아 반유대주의자들의 무지를 보여주려는 시도였다고 말하며, "시마시우스에 동의하지 않는 적어도 한 명의 똑똑하고 용감한 유대인"의 지지를 요청했다.
9. 유산 및 영향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는 리투아니아의 독립과 민주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그의 유산을 남겼다.
9.1. 국제적 활동
그는 1992년 일본을 처음 방문하여 미칼로유스 콘스탄티나스 치울리오니스에 대한 강연을 진행했다. 2009년 일본 방문 시에는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에서 열린 냉전 종식 20주년 기념 강연회 '철의 장막 해체부터 베를린 장벽 붕괴까지'에 참석하여 '1988~1989년 EU 통합: 리투아니아의 기여'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또한, 란츠베르기스는 2008년 6월 3일 공산주의 희생자 기념재단의 자문 위원으로서 《유럽의 양심과 공산주의에 관한 프라하 선언》에 서명했다. 이 선언은 공산주의 범죄를 규탄하고 민주주의 가치를 옹호하는 중요한 국제적 성명이었다. 이러한 활동들은 그가 국제 사회에서 인권과 민주주의 수호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준 사례이다.
9.2. 대중문화에서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의 삶과 업적은 대중문화에서도 조명되었다. 그의 정치적 투쟁과 리더십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미스터 란츠베르기스》가 제작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총 4시간에 달하는 분량으로 그의 생애와 독립 운동에서의 역할을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