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마우문 압둘 가윰(މައުމޫނު އަބްދުލް ގައްޔޫމް디베히어, Maumoon Abdul Gayoom영어, 1937년 12월 29일 출생)은 몰디브의 정치인이자 외교관, 학자로서 1978년부터 2008년까지 제3대 몰디브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이전에는 1977년부터 1978년까지 교통부 장관, 1976년부터 1977년까지 유엔 주재 몰디브 상임대표를 지냈다. 몰디브 역사상 최장기 집권 대통령인 가윰은 아시아에서 가장 오랫동안 재임한 지도자 중 한 명이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경제 정책은 관광 및 인프라 개발을 우선시하여 국가의 경제 성장을 크게 촉진했다. 또한 교육 및 의료 개혁을 도입하여 전국적인 접근성을 확대하고 새로운 시설을 설립했다. 정치적 불안정과 민주화 요구에 대응하여 가윰은 헌법 개혁을 시작하여 대통령제에서 다당제를 기반으로 하는 준대통령제로 전환하여 정치 참여와 투명성을 높이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재임은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고 반대 세력을 억압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재임 기간 중 그는 1980년 암살 시도, 1987년 대규모 해일, 1988년 쿠데타 시도 등 여러 도전에 직면했다. 특히 1988년 쿠데타는 인도의 신속한 군사 개입으로 저지되었다. 2004년 인도양 쓰나미는 그의 행정부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 GDP의 62%가 손실되는 등 광범위한 파괴를 초래했고, 이는 그의 정책을 재편하고 대규모 재건 노력을 요구했다.
2008년 몰디브 최초의 다당제 선거에서 모하메드 나시드에게 패배한 후, 가윰은 한동안 낮은 대외 활동을 유지했다. 2018년에는 이복형제인 압둘라 야민 정부를 전복하려 한 혐의로 체포되었고, 사법 방해 혐의로 19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건강 문제로 가택 연금되었다가 그 해 10월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가윰의 집권은 인권 침해와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몰디브의 현대화와 안정에 기여했다는 엇갈린 평가를 받는다.
2. 유년기와 교육
마우문 압둘 가윰의 본명은 압둘라 마우문 카이리이며, 그의 어린 시절은 이집트에서 주로 보냈다. 그는 몰디브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2.1. 출생 및 가족 배경
마우문 압둘 가윰은 1937년 12월 29일 말레의 마찬고알히에 있는 그의 아버지 집에서 압둘라 마우문 카이리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는 압둘 가윰 이브라힘과 카디자 무사의 첫째 자녀이자, 압둘 가윰의 열 번째 자녀였다.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이자 1950년부터 1951년까지 몰디브의 법무장관을 지냈다. 가윰은 아랍 및 아프리카 혈통을 가진 힐랄리 왕조와 디야미길리 왕조의 후손이다. 그의 아버지는 8명의 다른 아내에게서 25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어머니는 가윰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공부하던 중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 압둘 가윰은 1982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아들의 첫 번째 대통령 임기를 지켜보았다.
가윰은 어린 시절을 부모님의 가족 거주지인 카미니게에서 보냈다. 그의 본명은 압둘라 마우문 카이리였으며, 집에서는 라세디(Lhaseedi)로 불렸고 학교에서는 압둘라 마우문으로 불렸다. 1947년 해외 유학을 위한 여권 발급 과정에서 사무적인 실수로 그의 이름이 마우문 압둘 가윰으로 바뀌게 되었다. 여권 신청서를 작성할 때, 보조원이 그가 흔히 사용하던 이름인 "마우문"과 아버지의 이름을 실수로 합쳐 마우문 압둘 가윰이 되었다.
2.2. 교육 과정
가윰은 어린 시절 교육을 교사이자 학자인 그의 아버지에게 홈스쿨링으로 받았다. 이후 그는 당시 산이야 학교에서 종교, 디베히어, 수학, 몰디브 역사를 공부했다. 1947년, 그는 정부 장학금을 받아 해외 유학을 떠났다. 그는 이집트로 가려 했으나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발발로 인해 실론에 머물게 되었다. 콜롬보에 있는 동안 그는 개인 교사와 함께 홈스쿨링을 계속하며 영어를 배웠다.
그 후 가윰은 갈레의 부오나 비스타 대학에 다녔으나, 나중에 로열 칼리지, 콜롬보로 전학했다. 실론에서 2년을 보낸 후 1950년 3월 이집트 카이로로 건너가 알아즈하르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대학에서 6개월 동안 아랍어를 배우고 이슬람 샤리아 및 법학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샤리아 및 법학 석사 학위를 추가로 취득했으며, 나중에 샤리아 및 법학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몰디브가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를 수립한 후 이집트 정부가 몰디브 학생들에 대한 재정 지원을 중단하면서 그의 계획은 중단되었다. 가윰은 당시 총리였던 이브라힘 나시르에게 서한을 보내 항의했고, 이로 인해 그는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몰디브 입국이 금지되었다. 이 금지는 나중에 해제되었다. 1956년 수에즈 위기 동안 가윰은 이집트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 시 팔레스타인 방어를 위해 자원하기도 했다. 그는 1966년 알아즈하르 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가윰은 또한 카이로 아메리칸 대학교에 다니면서 이슬람 샤리아 및 법학을 더 깊이 공부하고 나중에 영어 중등 과정 수료증을 취득했다. 그는 또한 알 아즈하르 대학교 법학 및 이슬람 연구 학부를 졸업했으며, 가말 압델 나세르로부터 졸업 증명서를 받았다. 몰디브 정부는 당시 총리였던 이브라힘 나시르가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몰디브 학생들이 개입하려 하자 알 아즈하르 대학교의 몰디브 학생들에 대한 재정 지원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가윰 자신을 포함한 14명의 몰디브 학생들은 나시르에게 이 결정 재고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 결과 그들의 자금은 중단되었지만, 이후 이집트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가윰이 석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에도 이집트 정부의 지원이 중단되었고, 몰디브 정부에 의해 블랙리스트에 올라 몰디브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박사 학위를 마칠 수 없었으며, 결혼 후에는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3. 초기 경력 및 정치 시작
마우문 압둘 가윰의 초기 경력은 학자와 교육자로서의 역할에서 시작하여 정부 관료 및 외교관으로 확장되었다. 그는 대통령 재임 이전에도 당시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여러 차례 투옥되거나 유배되는 등 정치적 투쟁을 겪었다.
3.1. 전문 및 외교적 역할
1969년부터 1971년까지 가윰은 나이지리아 아흐마두 벨로 대학교의 일부였던 압둘라히 바예로 칼리지에서 이슬람 연구 강사로 재직했다. 아흐마두 벨로 대학교에서 근무한 후 1971년 초 몰디브로 돌아왔다. 1971년부터 1972년까지 그는 말레의 아미니야 학교에서 영어, 산수, 이슬람교를 가르치며 학부모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1972년 그는 정부 해운부서로 전근되어 매니저로 근무했다.
1974년 가윰은 차관보로 임명된 후 정부 전기통신부서 국장이 되었다. 그 해 말, 그는 당시 총리였던 아흐메드 자키 총리실의 특별 차관보로 임명되었다. 이 직책은 자키가 1975년 3월 해임되고 총리직이 폐지되면서 종료되었다. 가윰은 이후 콜롬보에서 시간을 보낸 후 몰디브로 돌아와 스리랑카 주재 몰디브 부대사로 임명되었다. 1975년 그는 대외부서 차관보가 되었다.
1976년 가윰은 교통부 차관으로 임명되었고, 9월에는 유엔 주재 몰디브 상임대표가 되었다. 그는 1977년 3월 몰디브로 돌아와 1978년 11월까지 교통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3.2. 투옥 및 정치 활동
1970년대 초, 당시 이브라힘 나시르 대통령의 주도 아래 몰디브에서 관광산업을 확장하려는 노력이 진행 중이었다. 이전에 이집트에서 유학하던 시절부터 가윰과 당국 사이의 갈등이 계속 심화되었다. 그의 술과 마약에 대한 발언은 광범위한 관심을 끌었고 말레 전역에서 논의를 촉발했다. 정부는 이 문제를 조사하여 1973년 3월 12일 그를 가택 연금에 처했다. 재판 후 가윰은 1973년 5월 14일 4년간의 유배형을 선고받았고, 5월 21일 하 달라 환초의 마쿠누두 섬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나시르 대통령의 재선 후 사면 조치의 일환으로 5개월을 복역한 후 1973년 10월 13일 석방되었다.
1974년 7월 28일, 가윰은 정부 정책을 계속 비판했다는 이유로 다시 체포되어 말레의 한 교도소에 독방 감금되었다. "중국 정원"이라는 별칭이 붙은 이 감옥은 이전에 중국 어부들이 수감되었던 곳에서 유래한 이름이었다. 이 감옥은 나중에 가윰의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이슬람 연구 센터가 건설되었다. 50일 동안 수감된 후 그는 1974년 9월에 석방되었고, 더 이상 공개적인 비판을 중단했다. 6주 후, 그는 당시 총리였던 아흐메드 자키 총리실의 특별 차관보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975년 3월 6일 아흐메드 자키가 해임되고 총리직이 폐지되면서 총리실 특별 차관보로서의 가윰의 직책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그는 콜롬보에 있을 때 공식적으로 더 이상 정부에서 필요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콜롬보에서 돌아오자마자 스리랑카 주재 몰디브 부대사로 임명되었다. 1975년 그는 몰디브 대표단의 일원으로 2개월 동안 유엔에 파견되었다. 돌아온 후 그는 외무부 차관보로 임명되었다。 9주 후 그는 교통부 차관으로 임명되었고, 1년 뒤인 1976년 9월부터 1977년 1월까지 유엔에서 근무하다가 나시르가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3.3. 교통부 장관
유엔에서 근무한 후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 가윰은 나시르 대통령의 요청을 수락하여 교통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당시 이 직책은 공석이었으며, 나시르는 1977년 3월 가윰을 교통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가윰은 몰디브의 교통 인프라 개선에 중점을 두었다.
장관 재임 기간 동안 가윰은 몰디브의 교통 및 항공 부문 발전을 감독했다. 그는 당시 대중에게 널리 인기가 없었던 기관 구동 보트의 사용을 장려했다. 또한 훌훌레 공항의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여 개선에 기여했다. 가윰은 몰디브와 국제 목적지 간의 항공편을 늘려 항공 부문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는 관광 산업의 성장을 지원하고 몰디브인들의 여행 선택지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의 임기는 1978년 11월 몰디브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종료되었다.
4. 대통령으로 가는 길
마우문 압둘 가윰이 처음 대통령으로 선출된 과정은 단일 후보 국민투표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그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여러 차례 재선되었다。그러나 임기 말에는 다당제 선거가 도입되면서 경쟁을 통해 정권 이양이 이루어졌다.
4.1. 대통령 선거 (1978-2003)

가윰은 1978년 대통령 선거에서 두 명의 처남에 의해 의회에 추천되었다. 당시 이브라힘 나시르 대통령과 가윰 모두 단일 대통령 후보로 선정되기 위해 후보로 지명되었으며, 나시르는 41표, 가윰은 5표를 얻었다. 그러나 나시르는 건강상의 이유로 3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에 국민의회는 교육부 장관이자 전 부통령인 압둘 사타르 무사 디디, 보건부 장관 무미나 할림, 그리고 교통부 장관인 가윰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1978년 7월, 국민의회는 헌법에 따라 가윰을 선거의 단일 후보로 선정했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가윰은 당선되면 취임 후 5년 이내에 몰디브의 모든 유인도를 방문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그는 관광 부문을 발전시키고 전국적으로 교육을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1978년 7월 28일,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가윰은 92.96%의 득표율로 대통령 당선자가 되었다. 당선 후 가윰은 대중 야당으로부터 대통령으로서 부적합하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1983년 대선에서 가윰은 단일 후보로 선정되어 1983년 9월 30일 57,913표, 즉 95.62%를 얻어 재선되었다. 1988년 대선에서는 69,373표, 96.47%를 얻었으며, 반대 표는 2,537표였다. 1993년 대선에서는 가윰과 그의 처남 일리아스 이브라힘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국민의회는 가윰을 단일 후보로 선택했다. 그는 92.8%의 득표율로 1993년 10월 1일 4선에 당선되었다. 가윰은 1998년 10월 16일 86,504표, 즉 90.90%를 얻어 5선에 당선되었다.
2003년 대선에서는 국민의회 50명 전원의 만장일치로 가윰이 대통령 국민투표 후보로 선정되었다. 그는 102,909표, 즉 90.28%를 득표하며 6선에 성공했다. 가윰에 대한 높은 시위에도 불구하고, 그의 승리는 널리 예상되었으며, 정부는 그 결과를 강력한 대중 지지의 증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단일 후보만이 국민의 지지를 구할 수 있었고 정당이 금지되었다는 점에서 절차의 공정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선거 이후 언론에서는 가윰의 6선 임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는 더욱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정치 체제에 대한 대중의 압력이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
| 1978년 몰디브 대통령 선거 | 몰디브의 대통령 | 3대 | 무소속 | 92.96% | -표 | 1위 |
| 1983년 몰디브 대통령 선거 | 몰디브의 대통령 | 3대 | 무소속 | 95.62% | 57,913표 | 1위 |
| 1988년 몰디브 대통령 선거 | 몰디브의 대통령 | 3대 | 무소속 | 96.47% | 69,373표 | 1위 |
| 1993년 몰디브 대통령 선거 | 몰디브의 대통령 | 3대 | 무소속 | 92.8% | -표 | 1위 |
| 1998년 몰디브 대통령 선거 | 몰디브의 대통령 | 3대 | 무소속 | 90.90% | 86,504표 | 1위 |
| 2003년 몰디브 대통령 선거 | 몰디브의 대통령 | 3대 | 무소속 | 90.28% | 102,909표 | 1위 |
4.2. 2008년 대통령 선거
2007년 8월, 가윰은 라아무 환초 방문 중 디베히 인민당 소속으로 2008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했다. DRP의 규정에 따르면 당 대표는 자동으로 대통령 선거 후보로 지명되므로 그는 이미 공식 후보였다. 그의 출마는 몰디브 대법원에서 이의가 제기되었다. 새로운 헌법은 대통령 임기를 2기로 제한했지만, 가윰은 7번째 임기를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전 임기는 구 헌법에 따라 재임했으므로 계산에 포함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임기 제한은 "새 헌법에 따른" 임기에만 적용된다고 판결하여 가윰의 출마를 허용했다.
2008년 8월 5일, 가윰은 환초부 장관인 아흐메드 타스민 알리를 자신의 러닝메이트로 선택했다. 3일 후 대통령 선거 운동이 시작되었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가윰은 자신의 재임 기간 동안 교육 및 의료 분야의 개혁에 중점을 두었고, 이를 자신의 리더십 하에 국가 발전의 주요 기둥으로 묘사했다. 그는 몰디브를 발전시키기 위한 경제 및 사회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을 약속했다. 주요 야당 후보인 모하메드 나시드를 비판하며 가윰은 나시드의 통치 능력에 의문을 제기했고, 그의 정책이 몰디브 사회와 통치의 기반을 이루는 이슬람적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가윰의 나이에 대한 우려도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제기되었다. 선거 운동 기간 중 몰디브 민주당은 가윰이 선거를 조작하여 1차 투표에서 승리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여러 언론은 가윰과 나시드가 결선 투표에서 맞붙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선거는 가윰이 야당 후보들과 처음으로 경쟁하는 것이었으며, 몰디브 최초의 다당제 선거였다. 가윰은 2008년 몰디브 대통령 선거 1차 투표에서 40.63%의 득표율로 승리했다。그러나 결선 투표에서는 상대 후보인 모하메드 나시드에게 패배했다. 가윰은 다음날 연설에서 선거 결과를 수용하고 평화적인 정권 이양을 약속하며 패배를 인정했다.
|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
| 2008년 몰디브 대통령 선거 | 몰디브의 대통령 | 3대 | 디베히 인민당 | 45.79% | 82,121표 | 2위 |
5. 대통령 재임 (1978-2008)

가윰은 1978년 11월 11일 오전 12시 몰디브 공화국의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의 선서는 무사 파티 판사에 의해 집행되었다. 가윰이 행정부 초기에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몰디브의 교육 및 의료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었다.
5.1. 대통령 재임 기간 주요 사건
가윰은 재임 기간 동안 여러 중요한 사건과 도전에 직면했으며, 이는 그의 통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5.1.1. 1980년 암살 시도
1980년 2월, 전 대통령 이브라힘 나시르는 그의 처남 아흐메드 나심, 보건부 장관 모하메드 무스타파 후세인, 사업가 모하메드 유수프와 함께 영국 특수항공대 (SAS)의 전직 요원 9명을 고용하여 가윰에 대한 암살 및 쿠데타를 시도했다. 용병들은 스리랑카의 한 기지에서 작전을 수행하며 임무 준비를 위해 여러 차례 정찰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무기를 제공받았고 서비스에 대한 대가로 각각 6.00 만 USD를 받기로 약속되었다. 그러나 작전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면서 SAS 요원들에 의해 암살 시도는 결국 취소되었다.
5.1.2. 1987년 대규모 해일
1987년 4월 11일, "대규모 해일"이라고 불리는 파괴적인 해일이 말레를 강타하여 13개 환초에 걸쳐 16개 섬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약 9000.00 만 KRW의 피해액이 발생했다. 이 재해는 몰디브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자연 재해 중 하나로 평가된다.
2000년대 초 인터뷰에서 가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말레 주변을 운전하며 피해를 입은 여러 곳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매우 높은 파도가 말레로 밀려왔고, 제가 운전하던 차량을 휩쓸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차량을 붙잡아주어 사실상 저를 구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바다로 휩쓸려 갔을 것입니다."
이 파도는 말레의 외곽 및 내부 방파제 모두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에 대응하여 몰디브 정부는 일본에 지원을 요청했고, 일본은 상황을 평가하기 위해 과학자 팀을 파견했다. 일본 정부는 나중에 손상된 방파제 재건을 지원하여 국가가 재해에서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사건은 소도서 국가의 취약성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가윰은 1987년 영연방 정부수반 회의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고, 기후 변화가 소도서 국가 및 저지대 국가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할 전문가 그룹 구성을 제안했다. 그의 제안은 회의에서 채택되었다. 그는 또한 이 문제를 유엔 총회에 제기하여 기후 변화에 대해 전 세계 무대에서 연설한 최초의 세계 지도자가 되었다.
5.1.3. 1988년 쿠데타 시도
1988년 11월 3일, 몰디브인 그룹과 스리랑카 타밀 무장 단체인 타밀 이람 인민 해방 기구 (PLOTE) 소속의 무장 용병들이 가윰에 대한 쿠데타를 시도했다. 이 쿠데타는 가윰 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던 몰디브 사업가 압둘라 루투피에 의해 기획되었다.
가윰의 대통령 재임 기간은 정치적 환경에 대한 불만과 반대 의견 표출 기회의 부족으로 인해 루투피와 같은 주요 인물들이 그를 권좌에서 제거하려는 등 심각한 반대에 직면했다. 루투피는 현지 선거 절차가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하여 변화를 촉진하기 위해 외부 세력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PLOTE와 긴밀한 관계를 통해 80명 규모의 습격 부대 형태의 군사 지원을 협상할 수 있었다. 해상 습격에 대한 전략적 논의는 1987년 인도 평화유지군이 스리랑카에 배치된 이후 시작되었다. 또한 루투피는 몰디브 군부 내 동조하는 구성원들로부터 지지를 확보하여 가윰 통치 기간 동안의 복잡한 정치 상황을 보여주었다.
가윰은 지원을 위해 이웃 국가들과 인도, 영국, 미국, 싱가포르에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인도 총리 라지브 간디는 즉시 응답했으며, 몇 시간 이내에 인도는 선인장 작전을 개시했다. 인도 공수부대는 같은 날 몰디브로 공수되어 말레에 착륙하여 주요 거점을 확보하고 질서를 회복했다. 인도군의 개입은 결정적이었으며, 외국군이 도착하자 쿠데타 지도자들은 저항할 수 없었다. PLOTE 용병들 중 상당수는 붙잡혔고, 나머지는 국외로 도피했다.
쿠데타 시도는 인도군이 도착한 지 몇 시간 만에 효과적으로 진압되었다. 쿠데타 시도가 신속하게 해결되면서 가윰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고, 그는 인도 정부의 시기적절한 개입에 대해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했다. 쿠데타 시도 후, 주범인 압둘라 루투피와 그의 조수 사가르 나시르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가윰에 따르면 이 형벌은 25년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쿠데타 시도 후 소수의 인도 병사들이 가윰을 추가적인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1년 동안 말레에 남아 있었다.
5.1.4. 2004년 인도양 쓰나미
2004년 인도양 쓰나미는 가윰 대통령 행정부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2004년 인도양 쓰나미에 대한 대응으로 가윰 대통령은 재난 당일 저녁 국민들에게 연설하며, 시민들이 손실로부터 회복하기 위해 정부와 협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쓰나미는 광범위한 파괴를 일으켜 30년 이상의 발전과 국가 GDP의 약 62%에 해당하는 피해를 초래했으며, 피해액은 약 4.60 억 USD로 추정되었다. 세계은행 추정에 따르면, 몰디브는 2003년에 13.75%의 GDP 성장률을 기록했으나, 쓰나미의 직접적인 결과로 2004년에는 -11.223%로 급락했다. 다양한 복구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윰의 대통령 임기 말까지 많은 피해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가윰은 같은 날 국가 재난 이후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으며, 원조 및 물품을 전달하기 위한 특별 태스크포스가 설립되었다. 몰디브의 1,000개가 넘는 섬과의 통신 두절과 충분한 재난 대비 계획의 부재로 인해 구조 노력이 방해받았다.
5.1.5. 2007년 말레 폭탄 테러 및 2008년 암살 시도
2007년 9월 29일, 말레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첫 폭탄 폭발 이후, 가윰 대통령 휘하의 정부는 이슬람 극단주의의 증가하는 위협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이에 대응하여 정부는 종교 근본주의 및 군사 활동을 다루기 위한 조치를 시작했다. 당국은 수염을 기른 성직자나 물라(이슬람 종교학자)는 정부의 특별 초청이 없으면 입국이 금지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08년 1월 8일, 가윰은 하 알리프 환초의 호아라푸시를 방문 중이었다. 모하메드 무르시드는 가윰의 복부를 칼로 찌르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쿠다후바두 출신의 16세 모하메드 자이샴 이브라힘이라는 보이스카우트 학생이 자신의 손으로 공격을 막아내면서 저지되었다. 자이샴은 이 행동으로 부상을 입었고 의료 치료를 받았으며, 나중에 인디라 간디 기념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사건 후 가윰은 "전능하신 알라의 은총으로 저는 안전하고 무사하지만, 이 섬 출신의 용감한 청년 모하메드 자이샴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영웅입니다. 저는 그와 그의 가족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전능하신 알라께 그의 빠른 회복을 기도합니다"라고 말했다.
5.2. 국내 정책
가윰 행정부는 몰디브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국내 정책과 개혁을 시행했다.
5.2.1. 보건 및 교육 개혁

교육과 보건 정책은 가윰 대통령 행정부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하게 중점적으로 다루어진 주제 중 하나였다. 1978년 가윰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몰디브는 수도 말레를 제외하고는 정규 교육 시스템이 부족했으며, 단 두 개의 중등 학교와 기본적인 교육 인프라만 존재했다. 1979년 초, 그의 정부는 인구의 24.77%가 문맹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대응하여 정부는 1980년 1월 문맹 퇴치를 목표로 하는 "기초 교육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다음 달부터 기초 교육 수업을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계획은 문맹률을 낮추어 1999년에는 1.06%로 감소시켰다. 가윰은 교육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전국적인 교육 접근성 확대를 목표로 했다。그의 정부는 1979년 3월 취임 몇 달 만에 바 환초(Baa Atoll)의 남부 밀라둔마둘루 환초에 첫 초등학교를 개교하면서 전국적으로 초등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국가 교육 과정이 도입되었고, 몰디브 어린이들에게 7년간의 초등 교육을 제공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또한 두 개의 중등 학교가 환초에 설립되어 학생들이 고등 교육을 위해 말레로 이동할 필요성을 줄였다. 일반 교육 수료증 (GCE) 보통 수준 시험 응시자 수는 1978년 102명에서 2002년 6,495명으로 증가했다. 총 학생 등록 수는 1978년 약 15,000명에서 1998년 97,323명으로 증가했으며, 문맹률은 같은 해 70%에서 98.82%로 향상되었다. 1999년까지 254개의 학교에서 2,646명의 교사가 10학년까지 교육을 제공했다.
가윰 행정부는 1970년대 후반에 많은 의료 개혁을 도입했다. 당시 몰디브는 단 하나의 작은 병원과 기본적인 의료 서비스만을 포함하는 제한적인 의료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정부는 모자 보건 및 아동 보건 개선을 우선시했으며, 이는 1978년 48세였던 기대 수명을 1998년 71세로 증가시키는 데 기여했다. 1990년까지 전국민 예방접종이 달성되었고, 정부는 전염병 퇴치를 위한 조치를 시행했다. 가윰 행정부는 또한 건강한 생활, 균형 잡힌 식단, 담배 소비의 위험성을 홍보하는 공중 보건 캠페인을 시작했다. 1998년까지 의사 대 인구 비율은 1978년 20,700명당 1명에서 1,300명당 1명으로 개선되었고, 병원 침대 수용 능력은 거의 10배 증가했다.
5.2.2. 경제 발전

가윰 행정부 기간 동안 관광업은 몰디브의 가장 큰 산업이 되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980년대까지 관광업은 국가 GDP의 28%와 외환 수입의 60% 이상을 차지했다. 이 부문은 경제 성장을 견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인당 GDP는 1980년대에 265% 성장했고 1990년대에는 추가로 115% 성장했다. 관광 산업의 급속한 발전은 몰디브의 경제적 성공을 뒷받침했으며, 이러한 확장은 꾸준한 수입원과 외화를 제공하여 가윰 통치 기간 동안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가윰의 지도 아래 1979년 관광법 도입과 함께 관광 산업이 재편되었으며, 이는 수용 능력 통제를 통해 해당 부문 진입을 관리하는 규정을 확립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기존 리조트의 표준을 개선하고 수익성을 높였다. 20세기 말까지 관광업은 몰디브 경제의 핵심 부분이 되었으며, GDP에 기여하고 중요한 외화 공급원이 되었다.
가윰 정부는 1989년 경제 자유화를 목표로 경제 개혁을 시작했다. 이러한 개혁에는 수입 할당량 폐지 및 특정 부문의 민간 기업 수출 개방이 포함되었다. 자유화는 외국인 직접 투자 규정으로도 확대되어 몰디브 경제에 더 많은 국제적 참여를 장려했다. 국제 통화 기금 추정에 따르면 국가의 GDP는 빠르게 성장하여 1980년 4.40 억 MVR에서 2005년 104.58 억 MVR으로 증가했다.
1980년대 내내 몰디브 경제는 상대적으로 낮은 인플레이션을 경험했으며, 실질 GDP 성장률은 평균 약 10%를 기록했다. 1990년에는 예외적으로 16.2%의 GDP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이 수치는 1993년 4%로 감소했다. 경기 둔화에도 불구하고 경제는 1995년부터 2004년까지 연평균 7.5% 이상의 실질 GDP 성장률을 보이며 강세를 유지했다. 이 기간 동안의 지속적인 성장은 주로 관광, 어업, 외국인 투자 증가의 조합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이는 국가가 지역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2004년 인도양 쓰나미는 경제에 급격한 위축을 가져왔으며, GDP 손실은 약 62%에 달했다. 하지만 몰디브 경제는 회복력을 보여주며 2006년에는 13%의 성장률로 강하게 반등했다. 이러한 회복은 국제 원조와 투자의 지원을 받아 관광 및 인프라 개발 노력이 다시 활성화되면서 이루어졌다. 가윰 행정부 하에서 몰디브는 외부 충격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경제 성장을 유지하며 더욱 개방적이고 다각화된 경제를 육성했다.
5.2.3. 환경 옹호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가윰은 국내외적으로 환경 보호와 기후 외교의 강력한 옹호자였다. 그의 행정부는 저지대 국가들에 대한 기후 변화의 잠재적 결과를 국제적으로 처음으로 알린 행정부 중 하나가 되었다. 1987년, 수도 말레의 상당 부분을 침수시킨 심각한 홍수 이후, 가윰은 해수면 상승과 환경 악화가 초래하는 임박한 위협을 인지했다. 그는 1987년 유엔 총회에서 기후 변화의 위험성에 대해 연설한 최초의 세계 지도자가 되었으며, 당시만 해도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문제에 대한 긴급한 국제적 행동을 촉구했다.
가윰의 획기적인 유엔 총회 연설 "한 국가의 죽음(Death of a Nation)"은 기후 변화 퇴치를 위한 세계적 협력에 대한 가장 초기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호소 중 하나로 종종 평가된다. 몰디브와 같은 소도서 개발국의 취약성에 대한 그의 경고는 당시 널리 인식되지 않았던 지구 온난화 및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위험을 강조했다. 이 개입은 몰디브가 세계 기후 외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작점이 되었으며, 국제 무대에서 환경적으로 취약한 국가들의 보호를 옹호하려는 국가의 약속을 강화했다.
몰디브 내에서의 노력 외에도 가윰은 지역 환경 협력도 주도했다. 그의 리더십 아래 몰디브는 남아시아 지역 협력 연합 (SAARC)의 자연 재해의 원인과 결과 및 환경 보호 및 보존에 대한 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특히 자연 재해 및 장기적인 환경 악화와 관련하여 환경 위험에 대한 지역적 인식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가윰이 지역 협력에 중점을 둔 것은 몰디브가 기후 관련 도전에 대한 대비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1989년 몰디브는 해수면 상승에 관한 제1차 소국 회의를 주최했으며, 해수면 상승을 세계 안보 위협으로 인식하고 그 영향을 완화하기 위한 긴급 조치를 촉구하는 조약인 "지구 온난화 및 해수면 상승에 관한 말레 선언"에 서명했다. 2007년에는 소도서 개발국 대표들이 기후 변화와 인권 간의 중요한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한 조약인 "전 지구적 기후 변화의 인간적 차원에 관한 말레 선언"에 서명했다.
또한 가윰 정부는 SAARC의 온실 효과 및 지역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1989년 가윰은 영연방 기후 변화 연구를 시작했으며, 이는 지구 온난화가 영연방 국가, 특히 소도서 국가에 미치는 영향에 중점을 두었다. 1991년에 검토된 이 연구는 해수면 상승 및 기타 환경 위협으로 인한 문제에 대한 국제 협력의 시급한 필요성을 강조했다. 가윰의 기후 변화 및 환경 주제에 대한 선제적인 위임 및 참여는 몰디브를 기후 외교 및 소도서 국가 옹호의 세계적인 리더로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5.2.4. 정치 개혁

가윰이 대통령직을 맡은 지 한 달 후, 국민의회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1980년까지 가윰은 내각 구성원과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특별 헌법 제정 회의를 구성하여 헌법을 개정하겠다고 선언했다. 18년의 과정을 거쳐 개정된 헌법이 완성되었고, 1997년 11월 가윰은 헌법을 비준했다. 1998년 새로운 헌법이 발효되면서 몰디브는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했다(비록 완전히 민주적 원칙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2004년 6월, 가윰은 정치 자유화와 시민 자유에 대한 요구가 증가함에 따라 "민주 개혁 의제"를 출범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국제 표준을 준수하는 국가 인권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2005년에는 처음으로 정당이 도입되었으며, 언론의 자유가 부여되었고, 형사사법 시스템이 현대화되는 등 주목할 만한 진전이 이루어졌다.
2007년, 야당, 특히 몰디브 민주당 (MDP)과의 여러 차례 협상 끝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MDP는 폭력에 가담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고, 정부는 정치범 석방과 개혁 과정 가속화를 약속했다. 개혁 속도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남아 있었으며, 일부는 정부의 변화에 대한 완전한 의지를 의심했다.
2008년까지 가윰은 자신의 개혁 의제를 통해 달성한 진전을 강조했다. 완전한 자유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촉진하기 위한 새 헌법 초안 작성이 거의 완료되었다. 새 헌법은 권력 분립을 명확히 하고, 더욱 강력한 인권 보호를 도입했으며, 자율적인 선거 위원회와 대법원을 포함한 독립 기관을 설립했다.
2008년 말에 확정된 이 헌법은 몰디브 정치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는 다당제를 도입하고 대통령 임기를 5년으로 두 번으로 제한하며, 더 큰 투명성과 책임의 틀을 마련했다. 가윰 행정부는 또한 국가의 첫 다당제 대통령 선거를 준비했으며, 선거가 국제 표준을 충족하도록 보장하기 위한 입법 개혁을 제안했다.
5.2.5. 인권 정책 및 논란
가윰의 대통령 재임 기간은 특히 인권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많았다. 국제 인권 단체와 외국 정부는 그의 행정부가 임의 체포 및 구금, 고문, 강제 자백, 정치적 동기의 살인 등 반대 세력에 대한 전술을 사용했다고 비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보안군이 때때로 야당 인사들을 위협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가윰의 통치에 대한 비판은 유럽 연합 및 영연방 내 국가들을 포함한 다양한 곳에서 제기되었으며, 이들은 그의 장기 집권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이를 독재적이라고 묘사했다. 비판론자들은 권력 남용과 관련된 문제를 지적했으며, 일부는 그의 리더십 스타일을 독재적이라고 특징지으면서 정치적 자유에 대한 제한을 강조했다. 그의 유산의 복잡한 성격은 계속해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지지자들은 개발 성과를 언급하는 반면, 비판론자들은 인권 침해를 강조한다.
대통령 임기 말에 가윰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제가 시행한 정책, 제가 내린 결정, 또는 제가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몰디브 시민이 부당한 고통이나 어려움을 겪었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만약 어떤 시민이 그러한 상황을 경험했다면, 저는 그 시민에게 관대한 용서를 겸손히 구합니다."
5.3. 외교 정책 및 국제 관계
마우문 압둘 가윰은 외교적 노력을 통해 몰디브가 다양한 국가 및 국제 기구와 관계를 맺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5.3.1. 중동 및 아시아 국가와의 관계


가윰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그의 남아시아 및 동아시아 외교 정책은 특히 인도, 중국, 일본과 같은 주요 지역 행위자들과의 관계 강화에 중점을 두었다.
가윰은 인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는 1988년 몰디브 쿠데타 시도 당시 인도가 그의 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선인장 작전"으로 대응하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가윰은 중국과의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몰디브의 외교 정책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했다. 특히 중국이 일대일로 구상과 인프라 투자를 통해 인도양에서 영향력을 확대함에 따라 더욱 그러했다. 이러한 관계는 가윰의 실용적인 외교 정책 접근 방식을 보여주었으며, 몰디브가 한 지역 강대국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고 양쪽으로부터 이점을 얻도록 했다. 중국의 증대되는 존재는 공항 및 교량과 같은 인프라 프로젝트에서 분명했지만, 행정부는 인도에 경각심을 줄 수 있는 베이징에 군사적 거점을 제공하는 것을 신중히 피했다.
1984년 10월, 가윰은 1972년 양국 간의 외교 관계 수립 이후 몰디브 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이 방문은 중국 주석의 초청으로 이루어졌다. 착륙 시 가윰은 중국 주석 리셴녠의 영접을 받았다. 이 방문 기간 동안 중국과 몰디브 정부 간에 경제 및 기술 협력 협정이 체결되었다.
5.3.2. 아프리카, 유럽 및 미국과의 관계

가윰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몰디브는 영연방 및 유엔과 같은 다자 기구를 통해 아프리카 국가들과 관계를 강화했으며, 기후 변화 및 개발 계획과 같은 공통 과제에 대한 협력을 모색했다. 그는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아프리카 대륙 내 25개 이상의 국가와 관계를 수립했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의 완전하고 신속한 철폐를 강력히 옹호했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민의 민족자결권을 지지했다.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그의 목소리 높은 반대는 몰디브가 국제 포럼에서 입지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그는 인종 억압 종식과 아프리카 해방 운동 지지를 일관되게 촉구했다.
중동에서 가윰은 사우디아라비아 및 기타 걸프 국가들과의 관계를 우선시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중요한 동맹국으로서 재정 지원, 종교 장학금, 그리고 몰디브의 발전을 지원하는 투자를 제공했다. 양국 간의 외교 교류는 빈번했으며, 관계는 이슬람 연대에 기반을 두었다. 가윰 정부는 또한 쿠웨이트 및 아랍에미리트와 같은 다른 걸프 국가들과의 관계를 심화시키려 노력했다. 이러한 파트너십은 경제 협력에 중점을 두었으며, 걸프 국가들은 몰디브의 다양한 인프라 프로젝트에 기여했다. 1981년 가윰은 몰디브 역사상 처음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안보 분야에서 몰디브는 자체 국가 안보 및 지역 안정을 강화하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 강화를 모색했다. 인도양 내 전략적 위치를 고려할 때, 몰디브는 역내 해적 행위 및 테러 퇴치에 대한 미국의 노력에 중요한 파트너로 간주되었다. 가윰 정부는 미국과 해양 안보 이니셔티브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으며, 안보 문제에 대한 국제 논의에 참여했다. 이러한 협력은 몰디브에게 국제 무대에서의 가시성을 높이는 동시에 안전한 해양 환경을 보장하려는 미국의 이익과도 부합했기에 상호 이익이 되었다.
가윰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몰디브와 미국 간의 관계는 협력과 경제 지원으로 특징지어졌다. 미국은 주로 국제 기구 프로그램을 통해 몰디브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2004년 12월 인도양 쓰나미 이후 양국은 재건 노력을 위해 860.00 만 USD를 제공하는 양자 지원 협정을 체결했다. 이 원조는 항만, 하수 시스템, 전력 생산 시설 재건에 사용되었으며, 재무부가 국제 지원을 관리하고 흡수하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몰디브는 특히 무역, 관광, 개발 협력 분야에서 다양한 유럽 국가들과 강력한 관계를 구축하고 육성했다. 몰디브는 유럽 관광객들에게 매력적인 목적지가 되어 경제를 활성화하고 국가의 수입원을 다각화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영국, 독일, 이탈리아와 같은 유럽 국가들은 몰디브 관광을 홍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환대 산업 및 인프라 개발 성장에 기여했다.
5.3.3. 국제 참여 및 방문
가윰은 30년간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35개국 이상을 방문했다. 첫 취임 후 그의 첫 방문은 리비아의 1969년 리비아 혁명 기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리비아, 세네갈,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한 최초의 몰디브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 임기 말까지 가윰은 다양한 자격으로 인도를 16번 이상 방문했으며, 이는 인도를 가장 많이 방문한 몰디브 대통령이 되었다.
6. 퇴임 이후 (2008년-현재)

2008년 11월 11일 모하메드 나시드의 취임 이후, 가윰은 말레의 사저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2018년 투옥되기 전까지 말레 시내의 여러 행사에 정기적으로 참석했으며, 그 이후로는 대외 활동을 줄였다.
2010년 가윰은 자신의 비영리 단체인 "마우문 재단"을 설립하여 자신의 자원, 인맥, 경험을 활용하여 몰디브 국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이니셔티브를 지원했다.
2010년 1월, 가윰은 몰디브 정치에서 은퇴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자신이 설립했던 디베히 인민당에서 탈당한 후 2011년 정계에 복귀했는데, 당시 당 대표였던 아흐메드 타스민 알리와의 갈등과 당 지도부 내 부패를 주요 이유로 들었다. 2011년 초, 가윰은 DRP 내에서 Z-DRP라는 정치 파벌을 결성했으며, 이는 당의 방향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음을 반영했다. 2011년 9월 4일, 가윰은 DRP에서 공식적으로 사임하고, Z-DRP가 DRP의 영향에서 벗어나 청렴을 우선시하는 새로운 정당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2011년 9월, 가윰은 몰디브 진보당 (PPM)을 설립할 계획을 밝혔다. PPM은 2011년 10월 몰디브 선거위원회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았다.
2016년, 압둘라 야민과 가윰 사이에 지도부 분쟁이 발생하여 몰디브 진보당 내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가윰이 당 내에서 자신의 권위에 도전받으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2017년, PPM 회원들은 가윰을 당 대표직에서 해임하기로 투표했다. 두 명의 국회의원인 아흐메드 시얌과 모하메드 샤히드는 민사 법원에 가윰을 그의 지도부직에서 공식적으로 해임하기 위한 소송을 제기했다.
2019년 가윰은 새로운 정당인 몰디브 개혁 운동을 설립할 의사를 발표했다. 설립 이후 그는 임시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가윰의 아들 아흐메드 파리스 마우문은 나중에 몰디브 개혁 운동의 의장 겸 대표로 선출되었다. 2021년 MRM 예비 선거에서 가윰은 당 대표직에 출마했다. 그는 당 대표로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6.1. 후임 대통령들에 대한 견해

가윰은 모하메드 나시드 행정부의 정책과 통치 방식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며 종종 반대했다. 그와 그의 지지자들은 나시드 정부가 경제를 잘못 운영했다고 비난했다. 가윰은 또한 나시드의 종교 및 민주주의 접근 방식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며, 그것이 전통적인 가치를 훼손할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2011년에서 2012년 사이에 가윰과 지지자들은 시위를 벌였고, 나시드 대통령과 정부는 이를 "폭력적"이며 "쿠데타"라고 묘사했다. 이후 2011-2013년 몰디브 정치 위기가 발생하여 모하메드 나시드 대통령이 사임하게 되었다.
비록 그의 재임 초기에는 압둘라 야민 대통령을 칭찬했지만, 2015년 이후 가윰과 그의 이복형제 압둘라 야민 사이의 관계는 정치적 의견 불일치와 가윰의 몰디브 진보당 내 지도부 분쟁으로 인해 악화되기 시작했다. 2017년 가윰은 2013년 대통령 선거에서 압둘라 야민을 지지한 것에 대해 사과하며, 야민의 집권에 자신이 기여한 역할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이브라힘 모하메드 솔리 행정부 기간 동안 가윰은 행정부를 크게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특정 문제에 대해 불만을 표명하는 등 언급을 했다.
6.2. 대통령 정치 활동
가윰이 2008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고 모하메드 나시드가 취임한 후, 가윰은 첫 몇 년 동안 나시드 행정부에 대해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2013년 대통령 선거에서 많은 몰디브 시민들은 가윰이 선거에 출마하기를 바랐지만, 그는 2013년 2월 더 이상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몰디브 진보당은 예비 선거를 치렀고, 가윰의 이복형제인 압둘라 야민이 승리했으며, 가윰은 야민을 지지했다.
2018년 대선에서 가윰은 이브라힘 모하메드 솔리를 지지했으며, 야민이 출마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결정은 2018년 야민에 의해 가윰이 투옥된 후에 이루어졌다. 2023년 대선에서 가윰의 장남 아흐메드 파리스 마우문은 몰디브 선거위원회가 당원 부족으로 인해 그의 몰디브 개혁 운동 후보 자격을 거부한 후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다. 가윰은 선거에서 파리스와 그의 러닝메이트 압둘 사타르 유수프를 지지했다.
6.3. 체포 및 투옥 (2018)
2018년 2월 5일, 가윰은 이복형제 압둘라 야민 압둘 가윰 정부를 전복하려 한 혐의로 사위 모하메드 나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의 체포는 당시 압둘라 야민 대통령이 음모와 쿠데타 시도를 주장하며 선포한 계엄령 가운데 이루어졌다. 국제적, 전국적인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타났으며, 정부가 비상사태를 선포하자 몰디브인들은 다음날부터 시위를 시작했다.
체포 직전, 가윰은 트위터에 동영상 메시지를 올려 "저는 체포될 만한 어떤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굳건히 결의를 지켜주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개혁 작업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언론은 가윰과 그의 아들 파리스가 의료 치료를 받지 못하는 등 고문을 당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2018년 6월 13일, 가윰은 체포 후 몰디브 경찰과 사법부에 협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사법 방해" 혐의로 19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2018년 9월, 그는 건강 문제로 가택 연금되었다. 가윰은 2018년 9월 30일 보석으로 석방되었고, 2018년 10월 18일 무죄를 선고받았다.
6.3.1. 체포에 대한 반응
유엔을 포함한 국제 기구들은 정치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며, 이 체포를 몰디브 내 "민주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의 일부라고 비난했다. 유엔은 몰디브 정부에 사법 독립과 기본적 자유를 존중하고, 반대 의견 억압과 정치적 반대파 탄압을 비판할 것을 촉구했다. 인권 단체들도 가윰의 구금에 반대하며 즉각적인 석방과 정부의 민주적 규범 준수를 요구했다.
국내적으로는 가윰의 체포가 국가 내 정치적 분열을 심화시켰다. 전 대통령 모하메드 나시드를 포함한 야당 지도자들은 체포를 비난하고 국제적 개입을 촉구했다. 나시드는 야민의 행동이 몰디브의 법치주의와 민주적 통치를 위협한다고 주장하며 인도와 미국에 개입을 호소했다. 이 위기는 2018년 몰디브 대통령 선거에서 야민의 패배로 이어졌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7. 대중적 이미지 및 유산

가윰은 몰디브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현재 생존하는 전직 대통령 중 가장 나이가 많으며, 2008년 이브라힘 나시르가 사망한 이후 가장 먼저 재임한 생존 전직 대통령이다. 가윰의 리더십은 국가의 정치적 지형에 중요한 흔적을 남겼다.
7.1. 성과 및 긍정적 평가
가윰은 몰디브의 근대화를 이끈 인물이자 안정화 세력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리더십은 인프라, 교육, 의료 분야에서 놀라운 발전을 가져왔으며, 몰디브 국민들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많은 이들은 그를 몰디브를 현대 시대로 이끌고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선구적인 지도자로 보았다. 그의 재임 기간은 종종 국가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시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은 종종 "황금 30년"이라고 불린다.
2024년 마아드하아4(Maahdhaa4) 조직의 여론조사에서는 그가 최고 성과를 낸 대통령으로 평가되었다. 그의 대통령직 이후에도 가윰의 정치적 역할은 대중적 인식을 계속해서 형성했다. 그는 종종 원로 정치인으로 간주되며, 정치 영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의 지지자들은 계속해서 그를 "현대 몰디브의 아버지"로 여기는 반면, 언론인, 정치인, 단체들은 그를 독재자, 전제군주, 권위주의자, 그리고 실력자로 묘사했다. 재임 기간 동안 야당은 그의 리더십을 비판하기 위해 그를 "골하아보아(Golhaaboa)"라고 불렀지만, 지지자들은 그를 "자임(Zaeem)", 즉 "지도자"라고 불렀다.
7.2. 비판 및 논란 (상세)
그러나 가윰의 장기 집권은 그의 행정부가 정치적 반대와 인권을 다룬 방식에 대해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비판론자들은 그의 정부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제한하는 등 권위주의적 관행을 취했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리더십에 대한 상반된 시각을 초래했으며, 일부는 그를 안정을 유지한 자비로운 통치자로 보는 반면, 다른 이들은 그를 민주적 개혁에 저항하는 독재적인 지도자로 보았다.
권위주의적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가윰은 자신이 권위주의자가 아니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저는 몰디브에서 강제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직책도 강제로 차지하려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는 강제로 대통령직에 오르지 않은 사람이며, 이 직책을 무력으로 유지하려는 사람도 아닙니다. 저는 항상 국민이 원하는 대로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만약 국민이 이 직책을 포기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면, 저는 즉시 포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기를 사용하거나 강제로 저를 이 직책에서 제거하려는 자와는 싸울 것입니다."
8. 개인 생활 및 관심사
마우문 압둘 가윰은 다양한 개인적인 관심사와 취미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건강 상태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8.1. 건강 문제

가윰의 건강은 최근 몇 년간, 특히 투옥 기간 동안 우려 사항이었다. 그는 양성 발작성 위치성 현기증 진단을 받았다. 2018년 9월 13일, 그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 건강이 악화되어 마푸시 교도소의 의사를 방문하여 치료를 받았다. 주치의는 가윰이 필수 활동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가택 연금될 것을 권고했다. 이비인후과 의사는 양성 발작성 위치성 현기증으로 인한 추가 합병증을 막기 위해 머리 움직임을 피할 것을 권고했다. 의료 전문가들은 그의 건강이 언제든지 악화될 수 있음을 지적하며, 그의 수감 중 건강 상태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2020년 8월, 가윰은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다. 이후 그는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8.2. 취미 및 지적 활동
열렬한 독서가인 가윰은 특히 은퇴 후 종교, 과학, 역사 분야의 문학에 깊이 몰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문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의 개인적인 관심사 중 눈에 띄는 부분이었으며, 그는 달과 천체를 연구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사진과 서예에 대한 그의 열정 또한 돋보이며, 가윰은 아랍 문자 작업으로 유명한 숙련된 서예가이다. 그의 서예 작품은 1984년부터 이슬람 센터에 전시되어 왔다. 가윰은 또한 시인이자 작가이기도 하다.
가윰은 배드민턴과 크리켓에 특히 관심이 많은 열정적인 스포츠맨이다. 그는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에도 두 스포츠를 적극적으로 즐겼으며, 신체 활동과의 강한 유대 관계를 유지했다. 이슬람 학자로서의 그의 역할은 그의 다양한 관심사를 더욱 보완하며, 그는 여가 시간에 종종 종교 문제에 대한 토론과 강연에 참여한다.
가윰의 천문학에 대한 관심은 1969년 나이지리아에서 가르치던 시절 시작되었다. 맑은 밤하늘 덕분에 그는 달의 지는 방향이 한 달 동안 계속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이전에 달이 일정한 경로를 따른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였다. 이 관찰은 그가 작은 천문학 서적들을 찾아보게 만들었고, 기본적인 이해를 제공했지만 사용 가능한 정보의 한계를 깨닫게 했다.
8.3. 종교적 신념
가윰은 수니파 무슬림이다. 몰디브 헌법은 모든 몰디브 시민이 수니파 무슬림이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가윰이 수니파 무슬림이 아니라 시아파 무슬림이거나 아예 무슬림이 아니라고 비난했다.
2008년 몰디브 대통령 선거 당시 아다알라트 당은 가윰이 몰디브 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며 헌법적 문제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이 제기한 이유는 그의 과거 발언이 그가 수니파 무슬림이 아님을 시사할 수 있으며, 이는 대통령은 수니파 무슬림이어야 한다는 헌법적 요건에 따라 그를 대통령 출마 자격에서 박탈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대법원은 이 사건을 기각하며 아다알라트 당이 가윰이 수니파 무슬림이 아니라고 판단할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9. 수상 및 영예

가윰은 경력 전반에 걸쳐 여러 주목할 만한 상과 영예를 받았다. 1988년 그는 유엔 환경 계획이 선정한 "글로벌 500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1991년에는 이탈리아 해군 연맹으로부터 1990년 "바다의 남자 상"을 받았고, 1998년에는 독일 국제협력공사로부터 "국제 환경상"을 받았다. 가윰은 또한 2008년 에너지 및 자원 연구소의 "지속 가능한 개발 리더십 상"을 수상했다.
국제 관계에 대한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가윰은 1984년 대한민국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무궁화대훈장을 받았고, 1997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세인트마이클 앤드 세인트조지 훈장의 나이트 그랜드 크로스 작위를 받았다. 그의 공중 보건 노력은 1998년 세계보건기구 "모두를 위한 건강 금메달"로 인정받았다.
그 외 주목할 만한 수상 경력으로는 2002년 알아즈하르 대학교 "방패 상", 2008년 스리랑카 미트라 비부샤나, 그리고 2013년 몰디브가 수여하는 최고 국가 영예인 가지 룰 오브 아너 훈장이 있다. 2015년 가윰은 지난 50년간 몰디브의 완전한 독립을 보호하고 수호하며 강화하는 데 기여한 뛰어난 국가 공로를 인정받아 "황금 희년 명예 방패 상"을 수상했다. 2022년 가윰은 "대통령 관광 금상"을 수상했다. 그는 같은 해 공로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