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리베르타드 라마르케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 재능을 보였으며, 일찍이 연예계에 입문하여 아르헨티나와 멕시코 영화 및 음악계의 상징적인 인물로 성장했다.
1.1. 출생 및 가족
리베르타드 라마르케는 1908년 11월 24일 아르헨티나 산타페주 로사리오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리베르타드 라마르케 보우사이다. 아버지 가우덴시오 라마르케(1874~1947)는 프랑스계 우루과이인이었고, 무정부주의자였던 그는 라마르케가 태어날 당시 투옥되어 석방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그의 이름은 스페인어로 '자유'를 의미하는 리베르타드(Libertad)로 지어졌다. 어머니 호세파 보우사(1863~1932)는 스페인인 출신의 과부였다.
1.2. 어린 시절과 교육
라마르케는 7세에 무대 경연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으며, 인근 도시를 순회하는 거리 가수 그룹에 참여했다. 1923년에는 연극 '어머니의 땅'(Madre Tierra스페인어)에서 첫 전문적인 역할을 맡았다. 로사리오에서의 성공은 가족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하도록 설득했고, 1926년 국립극장 주인에게 받은 추천서를 통해 라마르케는 합창단 가수로 고용되어 1년 계약을 맺었다.
2. 경력의 시작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한 라마르케는 연극 무대와 라디오를 통해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후 탱고 가수로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2.1. 연극 및 초기 활동
1926년 호세 A. 살디아스의 연극 '몽마르트의 소녀'(La muchacha de Montmartre스페인어)에서 올린다 보잔 및 안토니아 볼페와 함께 트리오로 데뷔하여 라파엘 이리아르테의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몇 달 만에 라디오 프리에토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빅터 레코드와 음반 계약을 체결했다. 1926년 9월 26일 첫 앨범 '가우초 솔'(Gaucho Sol스페인어)과 싱글 '칠레니토'(Chilenito스페인어)를 발매했다. 1929년에는 알베르토 바카레사의 연극 '팔로마의 집'(El conventillo de la Paloma스페인어)에 출연하여 2년 동안 1,000회 공연을 이어갔다.
2.2. 탱고 가수 데뷔 및 명성
2년 동안 이어진 연극 활동 이후, 라마르케는 음악 경력에 집중하기 위해 연극을 그만두었다. 그는 3인조 그룹과 함께 아르헨티나의 여러 주와 인근 파라과이를 순회했다. 193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론 극장에서 열린 대회에 참가하여 탱고 '라 쿰파르시타'(La cumparsita스페인어)와 '토카네안도'(Tocaneando스페인어)를 불러 1등을 차지하고 '탱고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후 오스카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를 각색한 '세 개의 왈츠'(Tres valses스페인어)를 칠레 가수 촐리 무르와 함께 공연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 라마르케는 반도네온 연주자 엑토르 마리아 아르톨라, 바이올리니스트 안토니오 로디오, 그리고 그의 두 번째 남편이 될 피아니스트 알프레도 말레르바를 포함한 3인조 음악가들의 반주를 받았다. 그는 '이 회색빛 오후에'(En esta tarde gris스페인어), '그저 그림자일 뿐'(Sombras, nada más스페인어), '코리엔테스 거리의 슬픔'(Tristezas de la calle Corrientes스페인어), '기와 저택'(Caserón de tejas스페인어), '절망적인 노래'(Canción desesperada스페인어), '말없이'(Sin palabras스페인어)와 같은 비극적이고 낭만적인 작품들에서 빛을 발했다. 그의 최고의 노래들 중 상당수는 작곡가 엔리케 산토스 디세폴로의 작품으로, 라마르케의 스타일에 특히 잘 어울렸다.
3. 아르헨티나에서의 활동
리베르타드 라마르케는 아르헨티나에서 영화배우이자 탱고 가수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당시 아르헨티나 문화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3.1. 영화 경력
라마르케는 1929년 이탈리아인 마리오 파르파뇰리가 감독한 영화 '안녕, 아르헨티나'(Adiós, Argentina스페인어)를 촬영했으며, 이 영화는 이듬해 개봉되었다. 1932년에는 아르헨티나 최초의 유성 영화인 '탱고!'(¡Tango!스페인어)에 출연하며 아르헨티나 유성 영화에 목소리를 녹음한 최초의 가수가 되었다. 그는 약 가온다(middle C영어)에서 high A하이 라영어까지의 성역을 가진 밝은 소프라노였다. '탱고!'가 1933년에 개봉된 후, 라마르케는 '반도네온의 영혼'(El alma del bandoneon스페인어, 1935), '나를 살게 해줘'(Ayúdame a vivir스페인어, 1936), '마법의 키스'(Besos brujos스페인어, 1937), '그들이 잊은 법'(La ley que olvidaron스페인어, 1937), '마드레셀바'(Madreselva스페인어, 1938), '닫힌 문'(Puerta cerrada스페인어, 1939), '영광의 작은 길'(Caminito de la gloria스페인어, 1939), '추억의 집'(La casa del recuerdo스페인어, 1940), '국경에서의 약속'(Cita en la frontera스페인어, 1940), '생애 한 번'(Una vez en la vida스페인어, 1941), '나는 그 여자를 알았다'(Yo conocí a esa mujer스페인어, 1942), '오래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En el viejo Buenos Aires스페인어, 1942), '일식'(Eclipse de sol스페인어, 1942), '밤의 끝'(El fin de la noche스페인어, 1944), '서커스 기마대'(La cabalgata del circo스페인어, 1945) 등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3.2. 음악 경력
라마르케는 빅터 레코드에서 '가우초 솔'(Gaucho Sol스페인어, LP, 1926)과 '칠레니토'(Chilenito스페인어, 싱글, 1926)를 시작으로 음반을 발매했다. 그의 유명한 탱고 녹음으로는 프란시스코 카나로 악단과 함께한 '가우초의 탄식'(Sentimiento Gaucho스페인어)과 '마드레셀바'(Madreselva스페인어) 등이 있다. 이외에도 '보텔레로/나의 헤레스 말'(Botellero / Mi Caballo Jerezano스페인어, 싱글, 1927), '쓰디쓴 마테/꺾인 사랑'(Mate Amargo / Idilio Trunco스페인어, 싱글, 1928), '라 돌로레스/선창의 타니타'(La Dolores / Tanita De La Proa스페인어, 싱글, 1929), '내 땅의 태양/그러지 마'(Sol De Mi Tierra / No Seas Así스페인어, 싱글, 1929), '수녀들의 아들/도냐 니카노라'(El Niño De Las Monjas / Doña Nicanora스페인어, 싱글, 1930), '뻔뻔함을 잃지 않았어/고야'(No Has Perdido La Vergüenza / Goya스페인어, 싱글, 1930), '꿈 그리고 그뿐'(Soñar Y Nada Más / Tristeza Marina스페인어, 싱글, 1943) 등의 싱글을 발표했다.
4. 에바 페론과의 관계 및 멕시코 이주
리베르타드 라마르케의 멕시코 이주는 에바 페론과의 불화설과 연관된 전설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당시 아르헨티나의 사회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4.1. 갈등설과 이주 배경

라마르케가 아르헨티나를 떠난 것은 당시 퍼스트 레이디였던 에바 페론에 의해 블랙리스트에 올랐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러나 '에비타: 에바 페론의 실제 삶'의 저자 마리사 나바로와 니콜라스 프레이저는 이러한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은 라마르케가 멕시코로 이주한 것은 당시 멕시코 영화 산업이 아르헨티나 영화 산업보다 더 나은 상태였기 때문이며, 라마르케는 에바 페론의 생전에도 아르헨티나와 멕시코를 자유롭게 오갔다는 점을 들어 블랙리스트 전설을 반박한다.
라마르케 자신도 생전에 이 전설의 특정 부분, 특히 영화 '서커스 기마대'(La cabalgata del circo스페인어) 촬영장에서 에바를 때렸다는 보도를 부인했다. 그는 1986년 자서전에서 이러한 주장을 단호히 부인하며, 에바의 촬영 중 규율 부족에 단순히 당황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라마르케에 따르면, 에바는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항상 늦게 도착하거나 사소하거나 개인적인 이유로 촬영을 지연시켰다고 한다. 후안 페론의 여자친구였던 에바가 제작자와 감독으로부터 특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떤 불만도 소용이 없었다.
1946년, 에바와 후안 페론이 대통령궁에 입성하자, 에비타가 라마르케의 음악을 라디오 방송국과 영화 스튜디오에서 틀거나 그를 고용하는 것을 금지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로 라마르케의 아르헨티나에서의 영화, 음악, 홍보 활동은 중단된 것처럼 보였다.
5. 멕시코에서의 경력
멕시코로 이주한 리베르타드 라마르케는 그곳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영화와 텔레노벨라, 음악 활동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5.1. 영화 및 텔레노벨라
라마르케는 1946년 1월부터 2월까지 첫 쿠바 순회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 공연은 시즌 최고의 예술 행사로 기록되었으며, 쿠바 언론은 그를 '아메리카의 연인'으로 처음 칭했다. 쿠바 순회 직전, 할리우드는 라마르케에게 7년 계약을 제안했지만,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고 불이익을 받을까 봐 거절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활동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라마르케는 1947년 카네기 홀 공연을 매진시켰다.

이후 멕시코에서 전설적인 스페인 영화 제작자 루이스 부뉴엘과 함께 영화에 출연하라는 제안을 수락하고 1946년 멕시코로 이주했다. 호르헤 네그레테와 공동 주연을 맡은 영화 '그랑 카지노'(Gran Casino스페인어)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고독'(Soledad스페인어, 1947), '베일의 여인'(La dama del velo스페인어, 1948), '과거의 흔적'(Huellas de un pasado스페인어, 1950), '눈물 없는 여인들'(Mujeres sin lágrimas스페인어, 1951), '사랑하기에 너무 늦은 적은 없다'(Nunca es tarde para amar스페인어, 1952), '불안'(Ansiedad스페인어, 1952), '잊혀진 얼굴들'(Rostros olvidados스페인어, 1952) 등 다른 역할들이 이어졌다. 이 시기 그의 최고의 작품 중 일부는 1949년 촬영된 '또 다른 봄'(Otra primavera스페인어), 1951년의 '미친 여자'(La loca스페인어), 1953년의 '내가 떠날 때'(Cuando me vaya스페인어)였다. 그는 이들 작품으로 1951년, 1953년, 1955년에 각각 아리엘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의 마지막 영화 중 일부는 '결혼 50주년'(Bodas de oro스페인어, 1955), '그림자의 사랑'(Amor de sombra스페인어, 1959), '나는 죄인'(Yo pecador스페인어, 1959), '내 흑인 자매를 위한 흰 장미'(Rosas blancas para mi hermana negra스페인어, 1969) 등이 있으며, 마지막 두 편의 아르헨티나 영화는 '엄마의 미소'(La sonrisa de mamá스페인어, 1972)와 '신부의 엄마'(La mamá de la novia스페인어, 1978)였다.
5.2. 음악 및 공연 활동
라마르케는 영화 활동을 줄여나가면서 다시 음악 투어를 시작했다. 1950년대 후반에는 푸에르토리코 가수 헤수스 키뇨네스 레데스마와 함께 콘서트 투어를 진행했으며, 칠레, 푸에르토리코, 베네수엘라, 도미니카 공화국,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에서 활동했고, 쿠바로 돌아가 연극 무대에 서고 여러 앨범을 녹음했다.
라마르케는 에비타 사후 아르헨티나로 돌아왔으며, 1967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국립극장에서 헬로 돌리!의 스페인어 버전을 라틴 관객들에게 처음 선보였다. 이 공연은 1968년 멕시코에서도 마놀로 파브레가스에 의해 연출되어 무대에 올랐다. 1982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롤라 멤브리베스 극장에서 뮤지컬 레뷔 '리베르타드 라마르케, 운 좋은 여자일까?'(Libertad Lamarque, ¿es una mujer de suerte?스페인어)의 주연을 맡았다. 그는 대본을 직접 쓰고 니콜라스 카레라스가 각색했으며 오스카르 카르도소 오캄포가 음악 감독을 맡았다. 1988년에는 마르 델 플라타의 오페라 극장에서 호세 콜랑헬로 감독의 뮤지컬 '탱고 전곡 II'(A todo tango II스페인어)에 참여했다.
6. 후기 활동 및 경력
리베르타드 라마르케는 전성기 이후에도 꾸준히 활동하며 다양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말년에 미국에 정착하여 여전히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1960년대에는 니콜라스 만세라와 함께 텔레비전 쇼 '토요일 서큘러'(Saturday Circular영어)의 여러 에피소드에 출연했으며, 1961년에는 그의 유일한 스페인 영화인 '내 어머니는 그러셨다'(Así era mi madre스페인어)를 촬영했다. 그의 첫 텔레노벨라 출연은 1972년 베네수엘라에서 '에스메랄다'(Esmeralda스페인어)의 역할 제안을 수락하면서 시작되었고, 이어서 또 다른 베네수엘라 작품인 '엄마'(Mamá스페인어)에 출연했다.

1980년, 그는 첫 멕시코 텔레노벨라 '고독'(Soledad스페인어)에 출연했으며, 91세의 나이로 '천사의 얼굴'(Carita de Angel스페인어)에서 수녀원장 역할을 맡았다. 그의 마지막 TV 역할은 사망 2년 전인 1998년 '침략자'(La Usurpadora스페인어)에서 할머니 피에다드 역이었다.
1996년 리베르타드 라마르케는 미국 플로리다주 코럴게이블스의 자택에 정착했다. 그는 직업적인 약속을 위해 멕시코시티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자주 오갔다. 그의 딸과 손자, 증손자들은 아르헨티나에 거주했다. 1998년, 라마르케는 멕시코와 많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서 큰 성공을 거둔 텔레노벨라 '침략자'에 출연했다. 그의 마지막 TV 역할은 텔레노벨라 '천사의 얼굴'에서 수녀원장 역이었다.
7. 개인사
리베르타드 라마르케의 개인사는 두 번의 결혼과 가족 관계, 그리고 딸의 납치 사건과 자살 시도 등 여러 위기를 겪으면서 복잡하고 드라마틱한 삶을 반영한다.
7.1. 결혼 및 가족 관계
1926년, 라마르케는 에밀리오 로메로와 결혼하여 딸 미르타를 낳았다. 이들은 1945년에 이혼했는데, 당시 아르헨티나에서는 이혼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결혼 생활은 일찍이 파탄 났지만 공식적으로 관계를 끝내는 데 12년이 걸렸다. 그의 두 번째 남편은 알프레도 말레르바로, 그는 사망할 때까지 약 50년 동안 라마르케와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라마르케의 딸 미르타 리베르타드 라마르케 로메로 델루카는 2014년 10월 19일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7.2. 개인적 위기
1935년, 라마르케는 여러 개인적인 위기를 겪었고, 이는 칠레에서의 자살 시도로 이어졌다. 그는 호텔 창문에서 뛰어내리려 했으나 차양에 의해 추락이 저지되었다. 그 직후, 별거 중이던 남편이 딸을 납치하여 우루과이로 데려갔다. 알프레도 말레르바를 포함한 친구들과 변호사의 도움으로 그는 딸의 양육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8. 수상 및 평가
리베르타드 라마르케는 '아메리카의 연인'이라는 별명처럼 전 라틴 아메리카에 걸쳐 깊은 문화적 영향력을 미쳤으며, 수많은 상과 영예를 통해 그의 예술적 업적과 상징성을 인정받았다.
8.1. 주요 수상 경력
- 1940년 자그레브에서 영화 '닫힌 문'으로 최우수 외국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 1951년, 1953년, 1955년에 각각 영화 '또 다른 봄', '미친 여자', '내가 떠날 때'로 아리엘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 1978년 베네수엘라 대통령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로부터 라틴 아메리카 문화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상을 받았다.
- 1980년 마리아 펠릭스와 함께 비평가 초이스상을 공동 수상했다.
- 1985년 아르헨티나에서 최우수 탱고 가수로 코넥스 플래티넘상을 수상했다.
- 1988년 에르미타주 호텔의 '명예의 거리'에 그의 손 도장을 남겼다.
- 1989년 스페인 산 세바스티안 국제 영화제에서 영화 업적을 인정받아 영예를 얻었으며, 로스앤젤레스의 미국 연극 협회가 라틴 아메리카 예술가들에게 수여하는 시저상을 통해 인정받았다. 같은 해, 마이애미의 '라틴 스타들의 인도'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타일이 놓였고, 파리의 가을 축제에서 그를 기리는 헌정식이 열렸다.
- 1990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의 저명한 시민'으로 임명되었고, 1991년 11월 15일, 그의 생일 며칠 전 로사리오 시의회로부터 유사한 표창을 받았다.
- 1993년 미국에서 전국적으로 배포되는 스페인어 출판물 '셀레브란도 매거진'으로부터 영화, 연극, 음악 분야에서 70년간의 활동과 자선 활동을 인정받아 헌정되었다.
- 1998년에는 '명예 문화 고문'으로 임명되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문화 전설'로 지정되었다.
- 2000년 아리엘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8.2. 영향력 및 평가
리베르타드 라마르케는 아르헨티나와 멕시코 영화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스타로 자리매김했으며, '아메리카의 연인'이라는 별명처럼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 걸쳐 깊은 문화적 영향력을 미쳤다. 그의 노래와 연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으며, 특히 탱고 음악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작품은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대중에게 위로와 기쁨을 선사하며 시대를 초월한 예술가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9. 사망
2000년 12월 초, 리베르타드 라마르케는 몸이 좋지 않고 호흡 곤란을 겪어 멕시코시티의 산타 엘레나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다. 그는 2000년 12월 12일 멕시코시티에서 92세의 나이로 폐렴으로 사망했다.
10. 작품 목록
리베르타드 라마르케는 배우로서 수많은 영화와 텔레노벨라에 출연했으며, 탱고 가수로서 방대한 음반을 남겼다. 그의 작품들은 아르헨티나, 멕시코, 스페인 등 다양한 국가에서 제작되었다.
10.1. 영화
- '안녕, 아르헨티나'(Adiós, Argentina스페인어, 1929)
- '탱고!'(¡Tango!스페인어, 1933)
- '반도네온의 영혼'(El alma del bandoneon스페인어, 1935)
- '나를 살게 해줘'(Ayúdame a vivir스페인어, 1936)
- '마법의 키스'(Besos brujos스페인어, 1937)
- '그들이 잊은 법'(La ley que olvidaron스페인어, 1937)
- '마드레셀바'(Madreselva스페인어, 1938)
- '닫힌 문'(Puerta cerrada스페인어, 1939)
- '영광의 작은 길'(Caminito de la gloria스페인어, 1939)
- '추억의 집'(La casa del recuerdo스페인어, 1940)
- '국경에서의 약속'(Cita en la frontera스페인어, 1940)
- '생애 한 번'(Una vez en la vida스페인어, 1941)
- '나는 그 여자를 알았다'(Yo conocí a esa mujer스페인어, 1942)
- '오래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En el viejo Buenos Aires스페인어, 1942)
- '일식'(Eclipse de sol스페인어, 1942)
- '밤의 끝'(El fin de la noche스페인어, 1944)
- '서커스 기마대'(La cabalgata del circo스페인어, 1945)
- '뮤지컬 로맨스'(Musical Romance영어, 1947)
- '그랑 카지노'(Gran Casino스페인어, 1946)
- '고독'(Soledad스페인어, 1947)
- '베일의 여인'(La dama del velo스페인어, 1948)
- '또 다른 봄'(Otra primavera스페인어, 1949)
- '마르케사 델 바리오'(La marquesa del barrio스페인어, 1950)
- '과거의 흔적'(Huellas de un pasado스페인어, 1950)
- '계속 기다릴게요'(Te sigo esperando스페인어, 1951)
- '미친 여자'(La loca스페인어, 1951)
- '눈물 없는 여인들'(Mujeres sin lágrimas스페인어, 1951)
- '불안'(Ansiedad스페인어, 1952)
- '사랑하기에 너무 늦은 적은 없다'(Nunca es tarde para amar스페인어, 1952)
- '기억하고 살아라'(Acuérdate de vivir스페인어, 1952)
- '잊혀진 얼굴들'(Rostros olvidados스페인어, 1952)
- '만약 당신이 내게 돌아온다면'(If You Came Back to Me스페인어, 1953)
- '내가 떠날 때'(Cuando me vaya스페인어, 1953)
- '악명 높은 여자'(La Infame스페인어, 1953)
- '불안'(Anxiety스페인어, 1953)
- '르포르타헤'(Reportaje스페인어, 1953)
- '엑스 여인'(La mujer X스페인어, 1954)
- '결혼 50주년'(Bodas de oro스페인어, 1955)
- '언제나 음악'(Música de siempre스페인어, 1955)
- '사랑 이야기'(Historia de un amor스페인어, 1955)
- '음악 학교'(Escuela de música스페인어, 1955)
- '밤발리나스'(Bambalinas스페인어, 1956)
- '부모님은 이혼하셨다'(Mis padres se divorcian스페인어, 1957)
- '몇 잔'(A Few Drinks스페인어, 1957)
- '유년기가 없었던 여인'(The Woman Who Had No Childhood스페인어, 1957)
- '당신을 사랑할 것을 알게 될 거예요'(Sabrás que te quiero스페인어, 1958)
- '그림자의 사랑'(Love in the Shadows스페인어, 1959)
- '나는 죄인'(Yo, pecador스페인어, 1959)
- '어머니의 죄'(El pecado de una madre스페인어, 1960)
- '황새가 그렇다고 말했다'(La cigüeña dijo sí스페인어, 1960)
- '아름다운 추억'(Lovely Memory영어, 1961)
- '하늘과 땅'(El cielo y la tierra스페인어, 1962)
- '영혼의 노래'(Canción del alma스페인어, 1963)
- '내가 꿈꾸던 아이들'(Los hijos que yo soñé스페인어, 1964)
- '내 마음을 노래해줘'(Canta mi corazón스페인어, 1964)
- '신의 자장가'(Arrullo de Dios스페인어, 1966)
- '탕아'(El hijo pródigo스페인어, 1968)
- '내 흑인 자매를 위한 흰 장미'(Rosas blancas para mi hermana negra스페인어, 1969)
- '오늘 나는 신을 꿈꿨다'(Hoy he soñado con Dios스페인어, 1971)
- '엄마의 미소'(La sonrisa de mamá스페인어, 1972)
- '기적을 행하는 미친 여자'(La loca de los milagros스페인어, 1973)
- '검은색은 아름다운 색'(Negro es un bello color스페인어, 1973)
- '신부의 엄마'(La mamá de la novia스페인어, 1978)
10.2. 음반
- '가우초 솔'(Gaucho sol스페인어, LP, 1926)
- '칠레니토'(Chilenito스페인어, 싱글, 1926)
- '보텔레로 / 나의 헤레스 말'(Botellero / Mi Caballo Jerezano스페인어, 싱글, 1927)
- '쓰디쓴 마테 / 꺾인 사랑'(Mate Amargo / Idilio Trunco스페인어, 싱글, 1928)
- '라 돌로레스 / 선창의 타니타'(La Dolores / Tanita De La Proa스페인어, 싱글, 1929)
- '내 땅의 태양 / 그러지 마'(Sol De Mi Tierra / No Seas Así스페인어, 싱글, 1929)
- '수녀들의 아들 / 도냐 니카노라'(El Niño De Las Monjas / Doña Nicanora스페인어, 싱글, 1930)
- '뻔뻔함을 잃지 않았어 / 고야'(No Has Perdido La Vergüenza / Goya스페인어, 싱글, 1930)
- '꿈 그리고 그뿐 / 슬픈 바다'(Soñar Y Nada Más / Tristeza Marina스페인어, 싱글, 1943)
- '음악적 즐거움'(Delicias Musicales스페인어, LP, 연도 미상)
- '음악적 즐거움 (볼륨 II)'(Delicias Musicales (Volumen II)스페인어, LP, 1958)
- '내 친구 호셀리토 영화 노래들'(Chansons Du Film Mon Ami Joselito프랑스어, EP, 1962)
- '날 살게 해줘 / 카미니토 / 마법의 키스 / 마드레셀바'(Ayúdame A Vivir / Caminito / Besos Brujos / Madreselva스페인어, EP, 1969)
- '리베르타드 라마르케가 아구스틴 라라의 탱고를 부르다'(Libertad Lamarque Canta Los Tangos De Agustín Lara스페인어, LP, 1969)
- '우리는 연인'(Somos Novios스페인어, LP, 1973)
- '아구스틴 라라의 탱고들'(Los Tangos de Agustin Lara스페인어, LP, 1977)
- '음악적 즐거움'(Delicias Musicales스페인어, LP, 1985)
- '리베르타드 라마르케가 마리아 그레베르의 노래를 부르다'(Libertad Lamarque Sings Songs Of Maria Grever스페인어, LP, 1986)
- '1988년! 그녀는 이렇게 노래한다!'(En 1988 !Canta Así!스페인어, LP, 1990)
10.3. 텔레노벨라
- '에스메랄다'(Esmeralda스페인어, 1970)
- '엄마'(Mamá스페인어, 1975)
- '고독'(Soledad스페인어, 1980)
- '아마다'(Amada스페인어, 1983)
- '침략자'(La Usurpadora스페인어, 1998)
- '천사의 얼굴'(Carita de Ángel스페인어,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