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 및 교육
다우다 카이라바 자와라는 감비아의 중앙 강 지역(당시 매카시 섬 지역)에 위치한 바라잘리 텐다 마을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는 수의학을 전공하며 정치적 관심을 키웠다.
1.1. 출생 및 가족 배경
자와라는 1924년 감비아의 수도 반줄(당시 바서스트)에서 약 241 km 떨어진 중앙 강 지역의 바라잘리 텐다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알마미 자와라와 맘마 패티이다. 알마미 자와라는 여러 명의 아내를 둔 부유한 상인이었으며, 바라잘리 텐다에서 월리 쿤다에 있는 자신의 교역소를 오갔다. 자와라 가문은 한때 말리 제국의 그바라 구성원으로 봉사했던 귀족 가문 출신이다. 다우다는 6형제 중 한 명으로, 어머니 쪽으로는 막내였으며 누나인 나 시세이와 형제인 바사디, 셰리포 자와라의 남동생이었다.
1.2. 초기 교육
자와라는 어린 시절부터 많은 감비아 어린이들이 거치는 통과의례인 쿠란 암송을 위해 지역 아랍 학교에 다녔다. 당시 바라잘리 텐다에는 초등학교가 없었으며, 가장 가까운 학교는 지방 수도인 조지타운(현 잔잔부레)에 있었으나 이 기숙학교는 족장들의 아들들을 위한 곳이었다. 1933년경, 어린 자와라의 정규 교육은 그의 아버지의 친구이자 월리 쿤다에 교역소가 있던 상인 에브리마 유마 잘로우의 후원을 받았다. 다우다는 모하메단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I.M. 가르바-자훔파에게 배웠다. 모하메단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자와라는 전 남자 고등학교 장학금을 받아 모든 수업을 즐겼지만, 특히 과학과 수학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945년 대학 입학 자격을 얻은 후, 그는 1947년까지 바서스트(현 반줄)의 빅토리아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다. 식민지 감비아의 제한된 직업 및 교육 기회로 인해 그는 1년간 당시 영국령 골드코스트의 아크라에 있는 아치모타 칼리지에서 과학을 공부했다. 아치모타 칼리지 재학 중, 자와라는 당시 가나와 아프리카의 많은 식민지들이 정치적 독립이나 내부 자치에 대한 열망을 키우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가나의 건국 아버지인 콰메 은크루마를 만난 것을 기쁘게 생각했지만, 당시에는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1.3. 고등 교육 및 정치적 각성
아치모타 칼리지에 다닌 후, 자와라는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수의학을 공부하기 위한 장학금을 받았다. 당시 식민지 교육은 아프리카인들을 공무원의 가장 하찮은 사무직 업무에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감비아인들이 과학 분야에서 장학금을 받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1940년대 후반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자와라의 정치적 관심이 시작되었다. 1948년 그는 아프리카 학생 협회에 가입했으며, 이후 사무총장과 회장으로 각각 선출되었다. 또한 글래스고에 있는 동안 자와라는 학생 노동당 조직인 포워드 그룹에 가입하고 당시 노동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정치적 관심과 기술을 연마했다. 비록 "좌파"는 아니었지만, 자와라는 영국 노동당의 사회주의 정치와 이념에 몰두했다. 글래스고에서 자와라는 나중에 영국령 기아나(현 가이아나)의 총리가 된 체디 재건을 만났다. 자와라는 이 시기를 "정치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시기라고 평가했다. 이는 범아프리카주의 열풍과 개인적인 정치적 성장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그는 1953년에 학업을 마쳤다. 이후 1957년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열대 수의학 추가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다시 돌아갔다.
2. 감비아 복귀 및 정치 입문
자와라는 고등 교육을 마치고 감비아로 돌아와 수의사로서 경력을 시작했으며, 이를 통해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그는 인민진보당의 창당에 참여하고 당의 지도자가 되면서 감비아 정치의 중심 인물로 부상했다.
2.1. 수의사 경력 및 결혼
1953년 수의사로서 학업을 마친 후 감비아로 돌아온 자와라는 처음에는 수의관으로 근무했다. 1955년 그는 바서스트의 저명한 아쿠족 출신인 존 마호니 경의 딸인 아우구스타 마호니와 결혼했다. 아쿠족은 해방 노예의 후손들로, 비록 소수였지만 식민지의 사회, 정치, 경제 생활을 지배하게 되었다. 일부 반대자들은 자와라가 부유한 성공회 여인과 결혼하려던 실용적인 바람을 이례적으로 이룬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의관으로서 자와라는 수개월 동안 감비아 전역을 여행하며 소들에게 예방 접종을 했다。이 과정에서 그는 보호령 지역의 비교적 부유한 소유주들과 귀중한 사회적 접촉과 관계를 맺었다. 이 집단은 지역 족장 및 마을 이장들과 함께 훗날 그의 초기 정치적 지지의 대부분을 형성했다. 당시 영국 식민 정책은 감비아를 식민지와 보호령의 두 지역으로 나누었다. 바서스트와 콤보 세인트 메리 하위 지역을 포함하는 식민지 지역의 성인들은 선거권을 가졌지만, 보호령 지역의 주민들은 그렇지 않았다. 입법회에서의 정치 활동과 대표성은 식민지에 한정되었다.
2.2. 인민진보당(PPP) 창당 및 지도력
자와라가 감비아로 돌아왔을 당시, 식민지 내 정치는 바서스트와 콤보 세인트 메리 지역 출신의 도시 엘리트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1959년, 감비아강 하류에 위치한 주요 상업 도시인 바세에서 열린 회의에서 인민진보사회의 지도부는 도시 기반 정당과 그 지도자들에게 도전하기 위해 당명을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보호령 인민당이 탄생했다. 같은 해, 산잘리 보장(새 당의 부유한 후원자이자 창립 멤버), 보카르 포파나, 마디바 잔네로 구성된 대표단이 아부코에 도착하여 자와라에게 당의 비서직 지명을 통보했다. 자와라는 1960년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수석 수의관 직을 사임했다. 보호령 인민당은 일반적으로 만딩카족 기반 정당이라는 인식을 불식시키고 포괄적인 정당이 되기 위해 인민진보당(PPP)으로 개명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PPP와 자와라는 도시 기반 정당과 그 지도자들을 능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아놀드 휴즈는 "녹색 혁명"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농촌 엘리트가 등장하여 도시 기반의 정치적 소부르주아지에 도전하고 승리하는 정치적 과정이었다. 자와라가 당 지도부로 부상하는 것은 거의 이견이 없었다. 보호령 출신 몇 안 되는 대학 졸업자 중 한 명이었던 그 외에 유일한 잠재적 후보는 쿠당 출신의 라민 마레나 박사였다. 1960년 선거에서 하원에 선출된 그는 PPP의 지도자가 되었고, 1962년에는 피에르 사르 은지에 이어 두 번째로 정부 수반이자 감비아의 첫 총리가 되었다.
3. 정치 경력 및 통치
자와라는 1962년 감비아의 총리로 취임한 후, 1965년 평화적인 독립을 이끌었다. 1970년에는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장기 집권하며 국가 발전에 기여했으나, 재임 중 여러 도전에 직면했다.

3.1. 총리 재임 및 독립
1962년 자와라가 총리가 되면서 인민진보당과 자와라의 감비아 정치 지배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1962년 선거 후 자와라가 집권하면서 식민 행정부는 감비아에서 점진적으로 철수하기 시작했고, 1963년에는 자치권이 부여되었다. 자와라는 같은 해 총리로 임명되었고, 1965년 2월 18일 독립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감비아는 식민 통치로부터 평화로운 전환을 완료했다. 독립 당시 감비아의 국가 원수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었다.
대부분 아쿠족과 도시 월로프족으로 구성된 소규모 공무원 조직을 통해 자와라와 인민진보당은 국가를 건설하고 농민과 도시 거주자 모두를 부양할 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했다. 많은 농촌 지역 주민들은 정치적 독립이 즉각적인 생활 개선을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러한 높은 기대는 다른 신생 독립 식민지들과 마찬가지로 일부 정치 지도자들의 과장된 약속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지도자들이 모든 약속을 이행할 수 없다는 것을 빠르게 깨달으면서 어느 정도 실망감이 생겼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의 자치 기간 동안 자와라는 세네갈에 유망한 제안을 했다. 1962년 11월, 자와라는 유엔에 세네갈과 감비아의 미래를 함께 평가할 전문가를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고, 우 딴 사무총장은 이에 동의했다. 영국은 "우호적인 격려"의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1964년 3월,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의 방문 이후, 감비아와 세네갈의 경제 프로그램을 조정할 의사가 발표되었다. 특히 농업 분야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3.2. 초대 대통령 재임 및 국가 발전
1970년 감비아는 공화국이 되었고, 자와라는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94년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했다. 자와라의 통치 기간 동안 감비아는 독립 후 다른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과 비교하여 민주적인 국가로 발전했다.
감비아는 땅콩 농업과 관광업을 중심으로 세계 경제에 편입되었다. 독립 이후에도 경제 구조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며, 여전히 땅콩 생산에 크게 의존했다. 농업과 관광업은 지배적인 부문이며, 국가의 외화, 고용, 소득의 주요 원천이었다. 경제 성장에 힘입어 정부는 1970년대에 '감비아화(Gambianisation)' 정책을 도입하여 경제에서 국가의 역할을 확대했다.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전체 정부 고용은 75% 증가했다. 자와라 정부는 감비아의 안정, 발전 및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다양한 경제 개혁에 중점을 두었다.
- 농업 발전 특히 땅콩 농업은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감비아 경제의 중추였다.
- 무역 및 수출 촉진 감비아 경제에서 무역의 중요성을 인식한 자와라 정부는 특히 농산물 분야에서 국가의 무역 관계를 개선하고 수출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 사회 기반 시설 개발 도로망, 에너지, 통신에 대한 투자는 특히 농촌 인구의 무역 촉진 및 시장 접근성 확대를 위해 중요했다.
- 관광 촉진 자와라의 지시 아래 감비아의 관광 부문은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의 정부는 외화와 일자리의 잠재적 원천으로 관광업을 보고 감비아를 특히 유럽 관광객을 위한 여행지로 홍보했다.
자와라의 낮은 카스트 지위는 감비아 독립 당시 그의 취약한 권력 기반에 심각한 장애물이었고, 그의 강점(특히 대학 교육)을 가릴 위협이 되었다. 독립 이전 자와라의 지위에 대한 두 가지 도전은 그의 취약성을 보여주었고, 그가 당 창립 멤버들의 전적인 충성심에 의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독립 당시 자와라의 측근들은 그를 자신들의 대표, 거의 명목상의 지도자로 여겼으며, 분명히 그가 자신들의 개인적 발전을 촉진하기를 의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와라의 과제는 낮은 카스트 지위를 극복하고, 당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며, 당의 정치적 방향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하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동기 부여된 "실종"은 인민진보당 통치의 요소가 아니었으며, 반대자나 지지자 모두 조작된 혐의로 괴롭힘을 당하거나 구금되지 않았다. 자와라가 강압적인 기술을 피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의 요소도 있었지만, 그의 능숙한 정치적 리더십 또한 결정적이었다. 자신의 당 내에서 자와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폭력을 자제하려는 개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이러한 자제의 많은 부분은 자와라의 공로였다. 그는 후원 자원의 능숙한 조작, 정서적 유대 관계 형성, 인민진보당 내 파벌의 현명한 균형을 통해 이를 이루었다. 강압적인 선택지가 부족하고, 획득해야 하는 정서적 유대가 중장기적인 자원이었음을 감안할 때, 자와라는 초기에는 도구적 유대와 후원 분배에 크게 의존했다. 그의 제한된 자원 기반은 명백하지만 극복할 수 없는 문제는 아니었다.
집권층 내에서 장관직은 후원의 가장 인기 있는 형태였으며, 이는 후한 봉급, 특전, 그리고 일부에게는 불법적인 부에 대한 접근을 제공했지만, 1970년 이전에는 장관직 수가 7개를 넘지 않았다. 1992년까지 그 수는 비교적 적은 14개에 머물렀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와라는 후원 분배의 다양한 순열(임명, 승진, 해고, 강등, 복권)을 능숙하게 사용하여 부하들의 정치적 미래에 대한 자신의 권력을 극대화하고 지도자로서 자신을 공고히 했다.
1965년 이전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에 대응하여 자와라는 창립 멤버 그룹의 규모, 결속력, 권위를 줄이기 위해 움직였다. 당의 초기 지지자들 중 상당수(겉으로는 불충성스러운 징후를 보이지 않은 이들도 포함)는 인민진보당 통치 초기 몇 년 동안 장관직을 잃었다. 자와라는 무력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감정에 얽매이지도 않았다. 자신의 개인적인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이전 지지자들을 강등하거나 심지어 배제하려는 그의 실용주의와 의지는 분명했다. 자와라는 집권층 내에서 새로운 지지 기반을 통합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강화했다.
정치적 화합에 대한 그의 열정은 인민진보당 원년 멤버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정치적 고립을 피하려는 밀접하게 관련된 필요성에서 비롯되었다. 원년 그룹은 신참들이 초기 권력 투쟁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자신들의 노력의 결실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민족-지역적 고려라는 부차적인 요인이 이러한 분개를 심화시켰다. 공동 통치에 참여한 인사들은 이전 식민지와 보호령의 모든 민족 집단 출신이었다.
자와라의 대중적 지지와 정서적 유대 관계 형성은 부족한 후원 자원에 대한 압력을 완화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비록 후원의 능숙한 분배와 그에 따른 부패 용인(나중에 논의될)이 인민진보당의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자와라는 일부 다른 지도자들만큼 엘리트 수준의 자원 분배에 크게 의존하지 않았다.
3.3. 통치에 대한 도전
자와라의 장기 집권은 여러 도전에 직면했다. 특히 1981년의 쿠데타 시도는 그의 통치에 큰 위협이 되었고, 이후 세네갈과의 연합 시도와 경제 개혁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 문제들은 그의 리더십에 대한 비판을 야기했다.
3.3.1. 1981년 쿠데타 시도
다우다 자와라의 통치에 대한 가장 큰 도전(1994년에 그의 권력을 종식시킨 쿠데타를 제외하고)은 1981년에 불만을 품은 전직 정치인이었던 쿠코이 삼바 사냥이 주도한 쿠데타 시도였다. 경제 약화와 주요 정치인들에 대한 부패 의혹이 제기된 후 1981년 7월 29일에 발생한 이 쿠데타는 쿠코이 삼바 사냥의 감비아 사회주의 혁명당과 "야전군"(국가 무장력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준군사 조직)의 일부 요소들로 구성된 좌파 국가혁명평의회에 의해 실행되었다.
자와라 대통령은 즉시 세네갈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세네갈은 7월 31일에 감비아에 40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8월 6일까지 2,700명의 세네갈군이 배치되어 쿠데타 지도자들의 병력을 격파했다. 이 쿠데타와 그로 인한 폭력 사태로 500명에서 800명 사이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쿠데타 시도는 적어도 일부 민간인과 야전군 내 동맹국들의 변화에 대한 열망을 반영했다. 쿠코이의 집권 실패에도 불구하고, 쿠데타 시도는 집권 인민진보당과 사회 전체의 주요 약점을 드러냈다. 인민진보당의 헤게모니, 당내 경쟁의 위축, 그리고 증가하는 사회적 불평등은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또한 실패한 쿠데타의 원인 중 결정적인 것은 특히 도시 청년들이 주요 피해자였던 경제 악화였다. 1981년 신년 메시지에서 자와라는 감비아의 경제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거대한 경제 문제로 고통받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경제 상황은 일반적으로 만연한 인플레이션, 과도한 통화 불안정 기간, 신용 경색... 치솟는 유가 및 상품 투기로 특징지어졌습니다. 이러한 전 세계적인 문제들은 감비아와 같은 경제에 극심한 제약을 가했습니다."
실패한 쿠데타의 가장 두드러진 결과는 1965년 양국 간에 체결된 방위 조약에 따라 자와라의 요청으로 세네갈군이 개입한 것이었다. 쿠데타 시도 당시 자와라는 런던에서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결혼식에 참석 중이었으며, 즉시 다카르로 날아가 압두 디우프 대통령과 협의했다. 세네갈의 개입은 표면적으로는 자와라 대통령의 정권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감비아인들과 특히 자와라가 질투할 정도로 지켜왔던 감비아의 주권을 훼손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는 편리하게 포기되었다. 반줄에 세네갈군이 주둔한 것은 자와라가 세네갈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많은 불만의 원인이 되었다.
자와라는 아프리카 대부분의 지역에서 쿠데타 이후 뒤따르는 권위주의적이고 종종 징벌적인 반격에 의존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며, 800명 이상의 구금자들을 신중하고 신속하게 재판하고 석방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개인들은 대신 종신형에 처해졌고, 많은 죄수들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더 심각한 범죄자들은 영국 연방 국가 출신의 공정한 판사단에 의해 재판을 받았다. 정권에 대한 국제적인 호의는 즉각적이고 관대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자와라는 국가의 정치적, 경제적 재건 과정을 시작했다.
3.3.2. 세네감비아 연합
쿠데타 시도와 세네갈군에 의한 자와라의 성공적인 복권 후 3주 만에 디우프 대통령과 자와라 대통령은 공동 기자회견에서 세네감비아 연합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실패한 쿠데타 5개월 후인 1981년 12월, 연합 조약이 다카르에서 체결되었다. 조약이 체결된 속도와 감비아 인구 대다수의 의견 수렴 부족은 많은 이들에게 이 협정이 정치적 편의주의의 산물임을 시사했다. 자와라 대통령은 실패한 쿠데타의 여파와 세네갈 정부의 압력으로 인해 큰 압박을 받고 있었다. 세네갈과의 조약에 따라 디우프는 대통령을, 자와라는 부통령을 맡았다. 연방 의회와 내각이 구성되었고, 여러 장관직이 감비아에 할당되었다. 또한, 새로운 감비아군이 새로운 연방군으로 창설되었다.
새로운 감비아군 창설은 많은 관찰자들에게 우려의 원인이었다. 그러한 기관이 1981년 7월 30일 사건의 재발을 줄이지도, 정권의 안정을 보장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군대 창설에 동의함으로써 자와라는 결국 자신의 정치적 몰락의 씨앗을 뿌린 셈이었다. 군대는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적 권력을 위한 심각한 경쟁자가 될 것이며, 이는 폭력 수단에 대한 통제력에서만 정당과 다를 뿐이었다. 그러나 1994년 사건이 보여주듯이, 그러한 분위기는 쿠데타와 반쿠데타의 비옥한 토양이었다. 아마도 더 중요하게는, 새로운 군대 창설은 인민진보당 정부의 강력한 농촌 개발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던 제한된 자원을 낭비하게 했다. 세네감비아 연합은 1989년에 붕괴되었다.
3.3.3. 경제 개혁 및 사회적 과제
1985년 중반, 자와라 통치하의 감비아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이 고안한 가장 포괄적인 경제 조정 프로그램 중 하나인 경제 회복 프로그램(ERP)을 시작했다. 하버드 국제 개발 연구소와 국제 통화 기금의 경제학자 팀의 도움을 받아 감비아는 국가의 경제 구조를 크게 개혁했다. ERP 하에서 1985-86년 재정 적자는 7200.00 만 GMD였고, 1990-91년에는 1.69 억 GMD로 증가했다. 그러나 ERP가 수립된 지 불과 1년 만인 1986년 중반에는 감비아 경제의 회복이 시작되었다. 정부는 재정 적자를 줄이고, 외환 보유고를 늘렸으며, 채무 상환 연체금을 청산했다.
ERP 하에서 경제적 기회가 더욱 풍부해졌고, 많은 개인 사업가와 공무원들이 불법적인 수단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 했다. 부패는 인민진보당에 심각한 정당성 위기를 초래했다. 여러 부패 사건이 드러났고, 이는 인민진보당 정권을 심각하게 비난했다. 감비아 상업 개발 은행은 대출 회수 실패로 인해 붕괴되었다. 자산 관리 및 회수 공사(AMRC)는 1992년 의회법에 따라 설립되었지만, 인민진보당 정부는 AMRC의 회수 활동을 돕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지 않았다. 이는 특히 가장 많은 대출을 받은 사람들과 조직이 인민진보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감비아 협동조합 연합(GCU)의 횡령 사건에서는 사기가 드러났고, 세관에서도 사기가 밝혀졌다. 또한 민영화 과정을 통해 GCDB에서 잘 연결된 개인들에게 많은 가짜 대출이 제공되었음이 드러났다.
인민진보당과 밀접하게 관련된 일단의 준국영 기업 수장들과 대기업가들(별명 "반줄 마피아")은 공공 부문의 부패를 책임지는 주범으로 여겨졌다. 이익을 추구하는 많은 엘리트들은 부와 특권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 권력을 조작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부패는 감비아에서 심각한 문제였으며, 특히 인민진보당 통치 마지막 2년 동안 더욱 심각했다.
1992년까지 감비아는 아프리카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으며, 출생 시 기대 수명은 45세, 영아 사망률은 출생아 1,000명당 130명, 아동 사망률은 1,000명당 292명, 5세 미만 사망률은 1,000명당 227명이었다. 당시 출생아 1,000명당 120명이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감비아는 또한 75%의 문맹률을 보였고, 인구의 40%만이 식수 공급을 이용할 수 있었으며, 인구의 75% 이상이 절대 빈곤 속에 살고 있었다.
경제 위기에 대응하여 시행된 구조 조정 프로그램은 정부의 분열, 민영화, 다양한 집단을 포섭하는 후원의 감소, 그리고 부패의 증가를 초래했다. 인민진보당 정권은 30년 동안 자원이 감소한 상태에서 운영되었으므로 더 이상 이전처럼 통치할 수 없었다. 자와라의 인민진보당이 좋은 경제 관리가 사회 대다수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음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경쟁적인 정당 시스템의 신뢰성은 심각하게 도전받았다.
오랫동안 관찰자들은 감비아의 부패가 다른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훨씬 덜 만연하다고 보았다. 돌이켜보면 이러한 견해는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부패가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자와라 자신도 과도한 사익 추구를 자제했으며, 그의 많은 측근들도 마찬가지였다. 상충되는 생존의 필요성, 특히 외국의 원조와 대중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점은 (완전히 부패한 정권 하에서는 얻기 어려웠을) 자와라로 하여금 "허용 가능한" 부패에 일정한 한계를 설정하도록 설득했다. 의회나 언론에 의한 폭로 가능성도 추가적인 제약으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진보당 통치 말년의 사건들과 쿠데타 이후의 폭로 및 조사들은 부패가 중요한 현상이었으며, 인민진보당의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시사한다. 자와라는 부패의 정치적 이점을 이해했다. 근본적으로 부패는 후원 네트워크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으며, 엘리트의 부 축적을 용이하게 했다. 이는 인민진보당 정치인(자와라가 이끄는), 고위 공무원, 감비아 사업가들 간의 상호 이익적이고 지지적인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수단을 제공했다.
따라서 초기에는 부패가 인민진보당의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정치적, 관료적, 사업적 이해관계를 일련의 상호 이익적이고 지지적인 관계로 통합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정권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아마도 이러한 첫 징후는 1981년에 발생했는데, 그 해의 쿠데타 시도에서 쿠코이 삼바 사냥은 "부패와 공공 자금 낭비"를 개입의 주요 동기로 언급했다. 사냥의 행동에는 분명히 강한 기회주의적 요소가 있었지만, 그가 부패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적절한 정당화로 삼았다는 사실은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증가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쿠데타 한 달 전, 이안 로치 목사는 공개적으로 부패에 대해 비판했고, 지역 언론은 저수준 관료들의 절도 사례를 수없이 보도했으며, 더 높은 곳에서는 1970년대 말 자와라의 장관들과 공무원들에 대한 관용이 널리 불만을 샀다. 부패에 대한 대중의 인식 증가는 인민진보당 정권을 약화시켰고, 1994년 공모자들에게 개입의 적절한 구실을 제공했다. 많은 군인들이 자신들의 불만족스러운 생활 조건을 부패의 발현으로 여겼다고 보고되었기 때문에, 이는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도 했다. 자와라는 새로운 군대가 자신과 국가에 가할 실제 위험을 과소평가했을 수 있으며, 사실상 부패 문제를 적절히 처리하는 데 지지부진했을 수 있다. 이 비난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저는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믿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질투가 존재하는 가난한 나라입니다. 누군가 차를 사거나 집을 지으면 부패한 것이고, 자와라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동시에 판사와 경찰관 역할을 하기를 기대받고 있습니다. 협동조합 연합에서는 제기된 부패를 조사하기 위해 대통령 위원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조치가 취해졌고, 그 후 쿠데타가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법이 그 과정을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법치주의에 따라 정부를 운영하는 데 진지했으며, 이 때문에 우리는 높은 평가와 존경을 받았습니다."
많은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대중의 지지와 엘리트의 묵인 사이의 긍정적인 관계를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자원 부족은 지도자들이 엘리트에게 우선순위를 두도록 설득했을 가능성이 높다. 감비아에서는 두 가지 추가적인 요인이 자와라가 정치적 생존을 위해 다소 다른 길을 추구하도록 설득했다. 한편으로 인민진보당은 연속적인 다당제 선거에서 승리해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 자와라가 강압을 생존 기술로 거부했다는 것은 공개적인 도전을 단순히 억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정 사회 집단이 제기하는 잠재적 위협이 잠복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 중요했다. 다행히 자와라는 많은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었다.
4. 1994년 쿠데타 및 망명
자와라는 1994년 야히야 자메 중위가 주도한 쿠데타로 실각하여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2002년에 감비아로 귀국하여 말년을 보냈다.
4.1. 실각 및 망명
1991년 12월, 자와라는 1992년 감비아 총선에 재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30년간 국가를 이끈 후 은퇴를 결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발표는 공황 상태를 야기했고, 결국 그는 다시 재선에 출마하기로 동의했다. 하지만 그의 은퇴 문제는 감비아의 정치적 미래에 계속 그림자를 드리웠고, 반대 의견이 확산되었다. 그는 56%의 득표율로 재선되었다.
1994년 7월 22일, 야히야 자메 중위가 이끄는 일단의 군인들이 수도를 급습했다. 쿠데타는 성공했고, 자와라는 2002년까지 망명 생활을 했다. 이전의 자와라 전복 시도와 비교할 때, 이 쿠데타는 "무혈"로 간주되었다. 자와라는 무사히 탈출했으며, 쿠데타가 시작되었을 때 그 지역에 있던 미국 군함에 의해 세네갈로 옮겨졌다. 자와라는 자신의 노력이 민주주의, 단결, 개인적 차이에 대한 관용을 바탕으로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사회를 만들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새로 자칭된 5인 통치 위원회는 헌법을 해산하고 민주주의가 복원될 때까지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전국적인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4.2. 귀국 및 말년
그는 2002년 원로 정치인으로서 감비아로 귀국했지만, 남은 생애 동안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2007년에는 나이지리아의 2007년 4월 대통령 선거 준비 상태를 평가하기 위한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 서아프리카 팀을 이끌도록 선정된 후 나이지리아로 갔다. 이후 그는 파자라 마을에 거주했으며, 그곳에서 사망했다. 2017년 2월 3일, 새로 선출된 아다마 배로 대통령이 그의 자택을 방문했고, 자와라는 배로 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5. 유산 및 평가
다우다 카이라바 자와라의 통치는 감비아의 민주주의와 정치 안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나, 후반기에는 부패와 사회적 불평등 문제로 비판을 받았다.
5.1. 업적 및 영향
자와라는 감비아의 평화적인 독립과 공화국 수립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감비아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민주적인 체제를 유지했다. 그는 강압적인 통치 방식을 지양하고, 정치적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 대신 화해를 추구했다. 1981년 쿠데타 시도 이후에도 그는 신중하고 신속한 재판을 통해 800명 이상의 구금자를 석방하고, 사형 선고를 종신형으로 감형하는 등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한 영국 연방 국가 출신 판사들로 구성된 공정한 재판부를 통해 심각한 범죄자들을 재판하며 국제 사회의 신뢰를 얻었다. 이러한 노력은 감비아의 정치적, 경제적 재건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정부는 농업 발전, 무역 및 수출 촉진, 사회 기반 시설 확충, 관광 산업 육성 등 다양한 경제 개혁을 추진하며 국가 발전을 도모했다.
5.2. 비판 및 논란
자와라의 통치 후반기에는 여러 비판과 논란이 제기되었다. 1981년 쿠데타 시도는 경제 약화와 정치인들의 부패 의혹 속에서 발생했으며, 이는 인민진보당 내부의 헤게모니, 당내 경쟁 위축, 그리고 심화되는 사회적 불평등을 드러냈다. 특히 도시 청년층이 경제 악화의 주요 피해자였다. 1981년 쿠데타 진압을 위한 세네갈군의 개입은 감비아의 주권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자와라가 세네갈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어 많은 불만을 야기했다.
이후 추진된 세네감비아 연합은 정치적 편의주의의 산물로 인식되었고, 새로운 감비아군 창설은 그의 정치적 몰락의 씨앗을 뿌린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이는 제한된 자원을 농촌 개발 대신 군대 창설에 전용하게 만들었다. 1985년 시작된 경제 회복 프로그램(ERP) 하에서는 경제적 기회가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업가와 공무원들이 불법적인 수단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면서 부패 문제가 심화되었다. 감비아 상업 개발 은행의 붕괴, 협동조합 연합 및 세관에서의 사기, 그리고 민영화를 통한 특혜 대출 등 여러 부패 사건이 인민진보당 정권의 정당성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 특히 "반줄 마피아"로 불리던 인민진보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집단이 공공 부문 부패의 주범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1992년에는 감비아가 아프리카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전락했으며, 출생 시 기대 수명은 45세, 영아 사망률은 출생아 1,000명당 130명, 아동 사망률은 1,000명당 292명, 5세 미만 사망률은 1,000명당 227명이었다. 당시 출생아 1,000명당 120명이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감비아는 또한 75%의 문맹률을 보였고, 인구의 40%만이 식수 공급을 이용할 수 있었으며, 인구의 75% 이상이 절대 빈곤 속에 살고 있었다.
경제 위기에 대응하여 시행된 구조 조정 프로그램은 정부의 분열, 민영화, 다양한 집단을 포섭하는 후원의 감소, 그리고 부패의 증가를 초래했다. 인민진보당 정권은 30년 동안 자원이 감소한 상태에서 운영되었으므로 더 이상 이전처럼 통치할 수 없었다. 자와라의 인민진보당이 좋은 경제 관리가 사회 대다수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음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경쟁적인 정당 시스템의 신뢰성은 심각하게 도전받았다.
오랫동안 관찰자들은 감비아의 부패가 다른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훨씬 덜 만연하다고 보았다. 돌이켜보면 이러한 견해는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부패가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자와라 자신도 과도한 사익 추구를 자제했으며, 그의 많은 측근들도 마찬가지였다. 상충되는 생존의 필요성, 특히 외국의 원조와 대중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점은 (완전히 부패한 정권 하에서는 얻기 어려웠을) 자와라로 하여금 "허용 가능한" 부패에 일정한 한계를 설정하도록 설득했다. 의회나 언론에 의한 폭로 가능성도 추가적인 제약으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진보당 통치 말년의 사건들과 쿠데타 이후의 폭로 및 조사들은 부패가 중요한 현상이었으며, 인민진보당의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시사한다. 자와라는 부패의 정치적 이점을 이해했다. 근본적으로 부패는 후원 네트워크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으며, 엘리트의 부 축적을 용이하게 했다. 이는 인민진보당 정치인(자와라가 이끄는), 고위 공무원, 감비아 사업가들 간의 상호 이익적이고 지지적인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수단을 제공했다.
따라서 초기에는 부패가 인민진보당의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정치적, 관료적, 사업적 이해관계를 일련의 상호 이익적이고 지지적인 관계로 통합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정권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다。아마도 이러한 첫 징후는 1981년에 발생했는데, 그 해의 쿠데타 시도에서 쿠코이 삼바 사냥은 "부패와 공공 자금 낭비"를 개입의 주요 동기로 언급했다. 사냥의 행동에는 분명히 강한 기회주의적 요소가 있었지만, 그가 부패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적절한 정당화로 삼았다는 사실은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증가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쿠데타 한 달 전, 이안 로치 목사는 공개적으로 부패에 대해 비판했고, 지역 언론은 저수준 관료들의 절도 사례를 수없이 보도했으며, 더 높은 곳에서는 1970년대 말 자와라의 장관들과 공무원들에 대한 관용이 널리 불만을 샀다. 부패에 대한 대중의 인식 증가는 인민진보당 정권을 약화시켰고, 1994년 공모자들에게 개입의 적절한 구실을 제공했다. 많은 군인들이 자신들의 불만족스러운 생활 조건을 부패의 발현으로 여겼다고 보고되었기 때문에, 이는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도 했다. 자와라는 새로운 군대가 자신과 국가에 가할 실제 위험을 과소평가했을 수 있으며, 사실상 부패 문제를 적절히 처리하는 데 지지부진했을 수 있다. 이 비난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저는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믿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질투가 존재하는 가난한 나라입니다. 누군가 차를 사거나 집을 지으면 부패한 것이고, 자와라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동시에 판사와 경찰관 역할을 하기를 기대받고 있습니다. 협동조합 연합에서는 제기된 부패를 조사하기 위해 대통령 위원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조치가 취해졌고, 그 후 쿠데타가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법이 그 과정을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법치주의에 따라 정부를 운영하는 데 진지했으며, 이 때문에 우리는 높은 평가와 존경을 받았습니다."
많은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대중의 지지와 엘리트의 묵인 사이의 긍정적인 관계를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자원 부족은 지도자들이 엘리트에게 우선순위를 두도록 설득했을 가능성이 높다. 감비아에서는 두 가지 추가적인 요인이 자와라가 정치적 생존을 위해 다소 다른 길을 추구하도록 설득했다. 한편으로 인민진보당은 연속적인 다당제 선거에서 승리해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 자와라가 강압을 생존 기술로 거부했다는 것은 공개적인 도전을 단순히 억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정 사회 집단이 제기하는 잠재적 위협이 잠복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 중요했다. 다행히 자와라는 많은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었다.
6. 1994년 쿠데타 및 망명
자와라는 1994년 야히야 자메 중위가 주도한 쿠데타로 실각하여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2002년에 감비아로 귀국하여 말년을 보냈다.
6.1. 실각 및 망명
1991년 12월, 자와라는 1992년 감비아 총선에 재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30년간 국가를 이끈 후 은퇴를 결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발표는 공황 상태를 야기했고, 결국 그는 다시 재선에 출마하기로 동의했다. 하지만 그의 은퇴 문제는 감비아의 정치적 미래에 계속 그림자를 드리웠고, 반대 의견이 확산되었다. 그는 56%의 득표율로 재선되었다.
1994년 7월 22일, 야히야 자메 중위가 이끄는 일단의 군인들이 수도를 급습했다. 쿠데타는 성공했고, 자와라는 2002년까지 망명 생활을 했다. 이전의 자와라 전복 시도와 비교할 때, 이 쿠데타는 "무혈"로 간주되었다. 자와라는 무사히 탈출했으며, 쿠데타가 시작되었을 때 그 지역에 있던 미국 군함에 의해 세네갈로 옮겨졌다. 자와라는 자신의 노력이 민주주의, 단결, 개인적 차이에 대한 관용을 바탕으로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사회를 만들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새로 자칭된 5인 통치 위원회는 헌법을 해산하고 민주주의가 복원될 때까지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전국적인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6.2. 귀국 및 말년
그는 2002년 원로 정치인으로서 감비아로 귀국했지만, 남은 생애 동안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2007년에는 나이지리아의 2007년 4월 대통령 선거 준비 상태를 평가하기 위한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 서아프리카 팀을 이끌도록 선정된 후 나이지리아로 갔다. 이후 그는 파자라 마을에 거주했으며, 그곳에서 사망했다. 2017년 2월 3일, 새로 선출된 아다마 배로 대통령이 그의 자택을 방문했고, 자와라는 배로 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7. 유산 및 평가
다우다 카이라바 자와라의 통치는 감비아의 민주주의와 정치 안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나, 후반기에는 부패와 사회적 불평등 문제로 비판을 받았다.
7.1. 업적 및 영향
자와라는 감비아의 평화적인 독립과 공화국 수립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감비아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민주적인 체제를 유지했다. 그는 강압적인 통치 방식을 지양하고, 정치적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 대신 화해를 추구했다. 1981년 쿠데타 시도 이후에도 그는 신중하고 신속한 재판을 통해 800명 이상의 구금자를 석방하고, 사형 선고를 종신형으로 감형하는 등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한 영국 연방 국가 출신 판사들로 구성된 공정한 재판부를 통해 심각한 범죄자들을 재판하며 국제 사회의 신뢰를 얻었다. 이러한 노력은 감비아의 정치적, 경제적 재건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정부는 농업 발전, 무역 및 수출 촉진, 사회 기반 시설 확충, 관광 산업 육성 등 다양한 경제 개혁을 추진하며 국가 발전을 도모했다.
7.2. 비판 및 논란
자와라의 통치 후반기에는 여러 비판과 논란이 제기되었다. 1981년 쿠데타 시도는 경제 약화와 정치인들의 부패 의혹 속에서 발생했으며, 이는 인민진보당 내부의 헤게모니, 당내 경쟁 위축, 그리고 심화되는 사회적 불평등을 드러냈다. 특히 도시 청년층이 경제 악화의 주요 피해자였다. 1981년 쿠데타 진압을 위한 세네갈군의 개입은 감비아의 주권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자와라가 세네갈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어 많은 불만을 야기했다.
이후 추진된 세네감비아 연합은 정치적 편의주의의 산물로 인식되었고, 새로운 감비아군 창설은 그의 정치적 몰락의 씨앗을 뿌린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이는 제한된 자원을 농촌 개발 대신 군대 창설에 전용하게 만들었다. 1985년 시작된 경제 회복 프로그램(ERP) 하에서는 경제적 기회가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업가와 공무원들이 불법적인 수단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면서 부패 문제가 심화되었다. 감비아 상업 개발 은행의 붕괴, 협동조합 연합 및 세관에서의 사기, 그리고 민영화를 통한 특혜 대출 등 여러 부패 사건이 인민진보당 정권의 정당성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 특히 "반줄 마피아"로 불리던 인민진보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집단이 공공 부문 부패의 주범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1992년에는 감비아가 아프리카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전락했으며, 출생 시 기대 수명은 45세, 영아 사망률은 출생아 1,000명당 130명, 아동 사망률은 1,000명당 292명, 5세 미만 사망률은 1,000명당 227명이었다. 당시 출생아 1,000명당 120명이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감비아는 또한 75%의 문맹률을 보였고, 인구의 40%만이 식수 공급을 이용할 수 있었으며, 인구의 75% 이상이 절대 빈곤 속에 살고 있었다.
경제 위기에 대응하여 시행된 구조 조정 프로그램은 정부의 분열, 민영화, 다양한 집단을 포섭하는 후원의 감소, 그리고 부패의 증가를 초래했다. 인민진보당 정권은 30년 동안 자원이 감소한 상태에서 운영되었으므로 더 이상 이전처럼 통치할 수 없었다. 자와라의 인민진보당이 좋은 경제 관리가 사회 대다수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음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경쟁적인 정당 시스템의 신뢰성은 심각하게 도전받았다.
오랫동안 관찰자들은 감비아의 부패가 다른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훨씬 덜 만연하다고 보았다. 돌이켜보면 이러한 견해는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부패가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자와라 자신도 과도한 사익 추구를 자제했으며, 그의 많은 측근들도 마찬가지였다. 상충되는 생존의 필요성, 특히 외국의 원조와 대중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점은 (완전히 부패한 정권 하에서는 얻기 어려웠을) 자와라로 하여금 "허용 가능한" 부패에 일정한 한계를 설정하도록 설득했다. 의회나 언론에 의한 폭로 가능성도 추가적인 제약으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진보당 통치 말년의 사건들과 쿠데타 이후의 폭로 및 조사들은 부패가 중요한 현상이었으며, 인민진보당의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시사한다. 자와라는 부패의 정치적 이점을 이해했다. 근본적으로 부패는 후원 네트워크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으며, 엘리트의 부 축적을 용이하게 했다. 이는 인민진보당 정치인(자와라가 이끄는), 고위 공무원, 감비아 사업가들 간의 상호 이익적이고 지지적인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수단을 제공했다.
따라서 초기에는 부패가 인민진보당의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정치적, 관료적, 사업적 이해관계를 일련의 상호 이익적이고 지지적인 관계로 통합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정권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아마도 이러한 첫 징후는 1981년에 발생했는데, 그 해의 쿠데타 시도에서 쿠코이 삼바 사냥은 "부패와 공공 자금 낭비"를 개입의 주요 동기로 언급했다. 사냥의 행동에는 분명히 강한 기회주의적 요소가 있었지만, 그가 부패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적절한 정당화로 삼았다는 사실은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증가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쿠데타 한 달 전, 이안 로치 목사는 공개적으로 부패에 대해 비판했고, 지역 언론은 저수준 관료들의 절도 사례를 수없이 보도했으며, 더 높은 곳에서는 1970년대 말 자와라의 장관들과 공무원들에 대한 관용이 널리 불만을 샀다. 부패에 대한 대중의 인식 증가는 인민진보당 정권을 약화시켰고, 1994년 공모자들에게 개입의 적절한 구실을 제공했다. 많은 군인들이 자신들의 불만족스러운 생활 조건을 부패의 발현으로 여겼다고 보고되었기 때문에, 이는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도 했다。자와라는 새로운 군대가 자신과 국가에 가할 실제 위험을 과소평가했을 수 있으며, 사실상 부패 문제를 적절히 처리하는 데 지지부진했을 수 있다. 이 비난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저는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믿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질투가 존재하는 가난한 나라입니다. 누군가 차를 사거나 집을 지으면 부패한 것이고, 자와라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동시에 판사와 경찰관 역할을 하기를 기대받고 있습니다. 협동조합 연합에서는 제기된 부패를 조사하기 위해 대통령 위원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조치가 취해졌고, 그 후 쿠데타가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법이 그 과정을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법치주의에 따라 정부를 운영하는 데 진지했으며, 이 때문에 우리는 높은 평가와 존경을 받았습니다."
많은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대중의 지지와 엘리트의 묵인 사이의 긍정적인 관계를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자원 부족은 지도자들이 엘리트에게 우선순위를 두도록 설득했을 가능성이 높다. 감비아에서는 두 가지 추가적인 요인이 자와라가 정치적 생존을 위해 다소 다른 길을 추구하도록 설득했다. 한편으로 인민진보당은 연속적인 다당제 선거에서 승리해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 자와라가 강압을 생존 기술로 거부했다는 것은 공개적인 도전을 단순히 억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정 사회 집단이 제기하는 잠재적 위협이 잠복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 중요했다. 다행히 자와라는 많은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었다.
8. 1994년 쿠데타 및 망명
자와라는 1994년 야히야 자메 중위가 주도한 쿠데타로 실각하여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2002년에 감비아로 귀국하여 말년을 보냈다.
8.1. 실각 및 망명
1991년 12월, 자와라는 1992년 감비아 총선에 재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30년간 국가를 이끈 후 은퇴를 결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발표는 공황 상태를 야기했고, 결국 그는 다시 재선에 출마하기로 동의했다. 하지만 그의 은퇴 문제는 감비아의 정치적 미래에 계속 그림자를 드리웠고, 반대 의견이 확산되었다. 그는 56%의 득표율로 재선되었다.
1994년 7월 22일, 야히야 자메 중위가 이끄는 일단의 군인들이 수도를 급습했다. 쿠데타는 성공했고, 자와라는 2002년까지 망명 생활을 했다. 이전의 자와라 전복 시도와 비교할 때, 이 쿠데타는 "무혈"로 간주되었다. 자와라는 무사히 탈출했으며, 쿠데타가 시작되었을 때 그 지역에 있던 미국 군함에 의해 세네갈로 옮겨졌다. 자와라는 자신의 노력이 민주주의, 단결, 개인적 차이에 대한 관용을 바탕으로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사회를 만들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새로 자칭된 5인 통치 위원회는 헌법을 해산하고 민주주의가 복원될 때까지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전국적인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8.2. 귀국 및 말년
그는 2002년 원로 정치인으로서 감비아로 귀국했지만, 남은 생애 동안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2007년에는 나이지리아의 2007년 4월 대통령 선거 준비 상태를 평가하기 위한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 서아프리카 팀을 이끌도록 선정된 후 나이지리아로 갔다. 이후 그는 파자라 마을에 거주했으며, 그곳에서 사망했다. 2017년 2월 3일, 새로 선출된 아다마 배로 대통령이 그의 자택을 방문했고, 자와라는 배로 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9. 유산 및 평가
다우다 카이라바 자와라의 통치는 감비아의 민주주의와 정치 안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나, 후반기에는 부패와 사회적 불평등 문제로 비판을 받았다.
9.1. 업적 및 영향
자와라는 감비아의 평화적인 독립과 공화국 수립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감비아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민주적인 체제를 유지했다. 그는 강압적인 통치 방식을 지양하고, 정치적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 대신 화해를 추구했다. 1981년 쿠데타 시도 이후에도 그는 신중하고 신속한 재판을 통해 800명 이상의 구금자를 석방하고, 사형 선고를 종신형으로 감형하는 등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한 영국 연방 국가 출신 판사들로 구성된 공정한 재판부를 통해 심각한 범죄자들을 재판하며 국제 사회의 신뢰를 얻었다. 이러한 노력은 감비아의 정치적, 경제적 재건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정부는 농업 발전, 무역 및 수출 촉진, 사회 기반 시설 확충, 관광 산업 육성 등 다양한 경제 개혁을 추진하며 국가 발전을 도모했다.
9.2. 비판 및 논란
자와라의 통치 후반기에는 여러 비판과 논란이 제기되었다. 1981년 쿠데타 시도는 경제 약화와 정치인들의 부패 의혹 속에서 발생했으며, 이는 인민진보당 내부의 헤게모니, 당내 경쟁 위축, 그리고 심화되는 사회적 불평등을 드러냈다. 특히 도시 청년층이 경제 악화의 주요 피해자였다. 1981년 쿠데타 진압을 위한 세네갈군의 개입은 감비아의 주권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자와라가 세네갈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어 많은 불만을 야기했다.
이후 추진된 세네감비아 연합은 정치적 편의주의의 산물로 인식되었고, 새로운 감비아군 창설은 그의 정치적 몰락의 씨앗을 뿌린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이는 제한된 자원을 농촌 개발 대신 군대 창설에 전용하게 만들었다. 1985년 시작된 경제 회복 프로그램(ERP) 하에서는 경제적 기회가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업가와 공무원들이 불법적인 수단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면서 부패 문제가 심화되었다. 감비아 상업 개발 은행의 붕괴, 협동조합 연합 및 세관에서의 사기, 그리고 민영화를 통한 특혜 대출 등 여러 부패 사건이 인민진보당 정권의 정당성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 특히 "반줄 마피아"로 불리던 인민진보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집단이 공공 부문 부패의 주범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1992년에는 감비아가 아프리카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전락했으며, 출생 시 기대 수명은 45세, 영아 사망률은 출생아 1,000명당 130명, 아동 사망률은 1,000명당 292명, 5세 미만 사망률은 1,000명당 227명이었다. 당시 출생아 1,000명당 120명이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감비아는 또한 75%의 문맹률을 보였고, 인구의 40%만이 식수 공급을 이용할 수 있었으며, 인구의 75% 이상이 절대 빈곤 속에 살고 있었다.
경제 위기에 대응하여 시행된 구조 조정 프로그램은 정부의 분열, 민영화, 다양한 집단을 포섭하는 후원의 감소, 그리고 부패의 증가를 초래했다. 인민진보당 정권은 30년 동안 자원이 감소한 상태에서 운영되었으므로 더 이상 이전처럼 통치할 수 없었다. 자와라의 인민진보당이 좋은 경제 관리가 사회 대다수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음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경쟁적인 정당 시스템의 신뢰성은 심각하게 도전받았다.
오랫동안 관찰자들은 감비아의 부패가 다른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훨씬 덜 만연하다고 보았다. 돌이켜보면 이러한 견해는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부패가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자와라 자신도 과도한 사익 추구를 자제했으며, 그의 많은 측근들도 마찬가지였다. 상충되는 생존의 필요성, 특히 외국의 원조와 대중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점은 (완전히 부패한 정권 하에서는 얻기 어려웠을) 자와라로 하여금 "허용 가능한" 부패에 일정한 한계를 설정하도록 설득했다. 의회나 언론에 의한 폭로 가능성도 추가적인 제약으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진보당 통치 말년의 사건들과 쿠데타 이후의 폭로 및 조사들은 부패가 중요한 현상이었으며, 인민진보당의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시사한다. 자와라는 부패의 정치적 이점을 이해했다. 근본적으로 부패는 후원 네트워크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으며, 엘리트의 부 축적을 용이하게 했다. 이는 인민진보당 정치인(자와라가 이끄는), 고위 공무원, 감비아 사업가들 간의 상호 이익적이고 지지적인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수단을 제공했다.
따라서 초기에는 부패가 인민진보당의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정치적, 관료적, 사업적 이해관계를 일련의 상호 이익적이고 지지적인 관계로 통합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정권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아마도 이러한 첫 징후는 1981년에 발생했는데, 그 해의 쿠데타 시도에서 쿠코이 삼바 사냥은 "부패와 공공 자금 낭비"를 개입의 주요 동기로 언급했다. 사냥의 행동에는 분명히 강한 기회주의적 요소가 있었지만, 그가 부패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적절한 정당화로 삼았다는 사실은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증가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쿠데타 한 달 전, 이안 로치 목사는 공개적으로 부패에 대해 비판했고, 지역 언론은 저수준 관료들의 절도 사례를 수없이 보도했으며, 더 높은 곳에서는 1970년대 말 자와라의 장관들과 공무원들에 대한 관용이 널리 불만을 샀다. 부패에 대한 대중의 인식 증가는 인민진보당 정권을 약화시켰고, 1994년 공모자들에게 개입의 적절한 구실을 제공했다. 많은 군인들이 자신들의 불만족스러운 생활 조건을 부패의 발현으로 여겼다고 보고되었기 때문에, 이는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도 했다. 자와라는 새로운 군대가 자신과 국가에 가할 실제 위험을 과소평가했을 수 있으며, 사실상 부패 문제를 적절히 처리하는 데 지지부진했을 수 있다. 이 비난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저는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믿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질투가 존재하는 가난한 나라입니다. 누군가 차를 사거나 집을 지으면 부패한 것이고, 자와라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동시에 판사와 경찰관 역할을 하기를 기대받고 있습니다. 협동조합 연합에서는 제기된 부패를 조사하기 위해 대통령 위원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조치가 취해졌고, 그 후 쿠데타가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법이 그 과정을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법치주의에 따라 정부를 운영하는 데 진지했으며, 이 때문에 우리는 높은 평가와 존경을 받았습니다."
많은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대중의 지지와 엘리트의 묵인 사이의 긍정적인 관계를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자원 부족은 지도자들이 엘리트에게 우선순위를 두도록 설득했을 가능성이 높다. 감비아에서는 두 가지 추가적인 요인이 자와라가 정치적 생존을 위해 다소 다른 길을 추구하도록 설득했다. 한편으로 인민진보당은 연속적인 다당제 선거에서 승리해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 자와라가 강압을 생존 기술로 거부했다는 것은 공개적인 도전을 단순히 억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정 사회 집단이 제기하는 잠재적 위협이 잠복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 중요했다. 다행히 자와라는 많은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었다.
10. 1994년 쿠데타 및 망명
자와라는 1994년 야히야 자메 중위가 주도한 쿠데타로 실각하여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2002년에 감비아로 귀국하여 말년을 보냈다.
10.1. 실각 및 망명
1991년 12월, 자와라는 1992년 감비아 총선에 재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30년간 국가를 이끈 후 은퇴를 결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발표는 공황 상태를 야기했고, 결국 그는 다시 재선에 출마하기로 동의했다. 하지만 그의 은퇴 문제는 감비아의 정치적 미래에 계속 그림자를 드리웠고, 반대 의견이 확산되었다. 그는 56%의 득표율로 재선되었다.
1994년 7월 22일, 야히야 자메 중위가 이끄는 일단의 군인들이 수도를 급습했다. 쿠데타는 성공했고, 자와라는 2002년까지 망명 생활을 했다. 이전의 자와라 전복 시도와 비교할 때, 이 쿠데타는 "무혈"로 간주되었다. 자와라는 무사히 탈출했으며, 쿠데타가 시작되었을 때 그 지역에 있던 미국 군함에 의해 세네갈로 옮겨졌다. 자와라는 자신의 노력이 민주주의, 단결, 개인적 차이에 대한 관용을 바탕으로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사회를 만들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새로 자칭된 5인 통치 위원회는 헌법을 해산하고 민주주의가 복원될 때까지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전국적인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10.2. 귀국 및 말년
그는 2002년 원로 정치인으로서 감비아로 귀국했지만, 남은 생애 동안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2007년에는 나이지리아의 2007년 4월 대통령 선거 준비 상태를 평가하기 위한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 서아프리카 팀을 이끌도록 선정된 후 나이지리아로 갔다. 이후 그는 파자라 마을에 거주했으며, 그곳에서 사망했다. 2017년 2월 3일, 새로 선출된 아다마 배로 대통령이 그의 자택을 방문했고, 자와라는 배로 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11. 유산 및 평가
다우다 카이라바 자와라의 통치는 감비아의 민주주의와 정치 안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나, 후반기에는 부패와 사회적 불평등 문제로 비판을 받았다.
11.1. 업적 및 영향
자와라는 감비아의 평화적인 독립과 공화국 수립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감비아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민주적인 체제를 유지했다. 그는 강압적인 통치 방식을 지양하고, 정치적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 대신 화해를 추구했다. 1981년 쿠데타 시도 이후에도 그는 신중하고 신속한 재판을 통해 800명 이상의 구금자를 석방하고, 사형 선고를 종신형으로 감형하는 등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한 영국 연방 국가 출신 판사들로 구성된 공정한 재판부를 통해 심각한 범죄자들을 재판하며 국제 사회의 신뢰를 얻었다. 이러한 노력은 감비아의 정치적, 경제적 재건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정부는 농업 발전, 무역 및 수출 촉진, 사회 기반 시설 확충, 관광 산업 육성 등 다양한 경제 개혁을 추진하며 국가 발전을 도모했다.
11.2. 비판 및 논란
자와라의 통치 후반기에는 여러 비판과 논란이 제기되었다. 1981년 쿠데타 시도는 경제 약화와 정치인들의 부패 의혹 속에서 발생했으며, 이는 인민진보당 내부의 헤게모니, 당내 경쟁 위축, 그리고 심화되는 사회적 불평등을 드러냈다. 특히 도시 청년층이 경제 악화의 주요 피해자였다. 1981년 쿠데타 진압을 위한 세네갈군의 개입은 감비아의 주권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자와라가 세네갈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어 많은 불만을 야기했다.
이후 추진된 세네감비아 연합은 정치적 편의주의의 산물로 인식되었고, 새로운 감비아군 창설은 그의 정치적 몰락의 씨앗을 뿌린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이는 제한된 자원을 농촌 개발 대신 군대 창설에 전용하게 만들었다. 1985년 시작된 경제 회복 프로그램(ERP) 하에서는 경제적 기회가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업가와 공무원들이 불법적인 수단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면서 부패 문제가 심화되었다. 감비아 상업 개발 은행의 붕괴, 협동조합 연합 및 세관에서의 사기, 그리고 민영화를 통한 특혜 대출 등 여러 부패 사건이 인민진보당 정권의 정당성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 특히 "반줄 마피아"로 불리던 인민진보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집단이 공공 부문 부패의 주범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1992년에는 감비아가 아프리카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전락했으며, 출생 시 기대 수명은 45세, 영아 사망률은 출생아 1,000명당 130명, 아동 사망률은 1,000명당 292명, 5세 미만 사망률은 1,000명당 227명이었다. 당시 출생아 1,000명당 120명이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감비아는 또한 75%의 문맹률을 보였고, 인구의 40%만이 식수 공급을 이용할 수 있었으며, 인구의 75% 이상이 절대 빈곤 속에 살고 있었다.
경제 위기에 대응하여 시행된 구조 조정 프로그램은 정부의 분열, 민영화, 다양한 집단을 포섭하는 후원의 감소, 그리고 부패의 증가를 초래했다. 인민진보당 정권은 30년 동안 자원이 감소한 상태에서 운영되었으므로 더 이상 이전처럼 통치할 수 없었다. 자와라의 인민진보당이 좋은 경제 관리가 사회 대다수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음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경쟁적인 정당 시스템의 신뢰성은 심각하게 도전받았다.
오랫동안 관찰자들은 감비아의 부패가 다른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훨씬 덜 만연하다고 보았다. 돌이켜보면 이러한 견해는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부패가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자와라 자신도 과도한 사익 추구를 자제했으며, 그의 많은 측근들도 마찬가지였다. 상충되는 생존의 필요성, 특히 외국의 원조와 대중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점은 (완전히 부패한 정권 하에서는 얻기 어려웠을) 자와라로 하여금 "허용 가능한" 부패에 일정한 한계를 설정하도록 설득했다. 의회나 언론에 의한 폭로 가능성도 추가적인 제약으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진보당 통치 말년의 사건들과 쿠데타 이후의 폭로 및 조사들은 부패가 중요한 현상이었으며, 인민진보당의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시사한다. 자와라는 부패의 정치적 이점을 이해했다. 근본적으로 부패는 후원 네트워크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으며, 엘리트의 부 축적을 용이하게 했다. 이는 인민진보당 정치인(자와라가 이끄는), 고위 공무원, 감비아 사업가들 간의 상호 이익적이고 지지적인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수단을 제공했다.
따라서 초기에는 부패가 인민진보당의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정치적, 관료적, 사업적 이해관계를 일련의 상호 이익적이고 지지적인 관계로 통합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정권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아마도 이러한 첫 징후는 1981년에 발생했는데, 그 해의 쿠데타 시도에서 쿠코이 삼바 사냥은 "부패와 공공 자금 낭비"를 개입의 주요 동기로 언급했다. 사냥의 행동에는 분명히 강한 기회주의적 요소가 있었지만, 그가 부패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적절한 정당화로 삼았다는 사실은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증가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쿠데타 한 달 전, 이안 로치 목사는 공개적으로 부패에 대해 비판했고, 지역 언론은 저수준 관료들의 절도 사례를 수없이 보도했으며, 더 높은 곳에서는 1970년대 말 자와라의 장관들과 공무원들에 대한 관용이 널리 불만을 샀다. 부패에 대한 대중의 인식 증가는 인민진보당 정권을 약화시켰고, 1994년 공모자들에게 개입의 적절한 구실을 제공했다. 많은 군인들이 자신들의 불만족스러운 생활 조건을 부패의 발현으로 여겼다고 보고되었기 때문에, 이는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도 했다. 자와라는 새로운 군대가 자신과 국가에 가할 실제 위험을 과소평가했을 수 있으며, 사실상 부패 문제를 적절히 처리하는 데 지지부진했을 수 있다. 이 비난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저는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믿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질투가 존재하는 가난한 나라입니다. 누군가 차를 사거나 집을 지으면 부패한 것이고, 자와라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동시에 판사와 경찰관 역할을 하기를 기대받고 있습니다. 협동조합 연합에서는 제기된 부패를 조사하기 위해 대통령 위원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조치가 취해졌고, 그 후 쿠데타가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법이 그 과정을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법치주의에 따라 정부를 운영하는 데 진지했으며, 이 때문에 우리는 높은 평가와 존경을 받았습니다."
많은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대중의 지지와 엘리트의 묵인 사이의 긍정적인 관계를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자원 부족은 지도자들이 엘리트에게 우선순위를 두도록 설득했을 가능성이 높다. 감비아에서는 두 가지 추가적인 요인이 자와라가 정치적 생존을 위해 다소 다른 길을 추구하도록 설득했다. 한편으로 인민진보당은 연속적인 다당제 선거에서 승리해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 자와라가 강압을 생존 기술로 거부했다는 것은 공개적인 도전을 단순히 억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정 사회 집단이 제기하는 잠재적 위협이 잠복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 중요했다. 다행히 자와라는 많은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었다.
12. 개인적인 삶
다우다 카이라바 자와라는 1955년 아우구스타 마호니와 결혼했다. 그의 가족 배경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어린 시절 및 교육 섹션에 포함되어 있다.
13. 사망
다우다 카이라바 자와라 경은 2019년 8월 27일 95세의 나이로 파자라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는 사망 당시 감비아 군주제 하에서 기사 작위를 받은 마지막 생존 인물이었다.
14. 훈장 및 기념
다우다 카이라바 자와라는 국내외에서 여러 훈장과 작위를 받았으며, 감비아의 화폐에도 그의 초상이 등장했다.
그는 1966년 3월 9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1971년부터 1994년까지 발행된 감비아 달라시의 다양한 지폐와 동전에는 그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