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쿠바 공화국, 약칭 쿠바는 카리브해 북부에 위치한 섬나라로, 쿠바섬 본섬과 후벤투드섬 및 여러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수도는 아바나이며, 카리브해 지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 중 하나로 약 1,100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북아메리카 대륙에 속하며, 주변에는 미국 플로리다주, 바하마, 멕시코, 케이맨 제도, 자메이카, 아이티, 도미니카 공화국 등이 위치한다.
쿠바의 역사는 유럽인 도착 이전 과나하타베이족과 타이노족 원주민의 거주로 시작되어, 15세기 스페인의 식민 통치를 거쳤다. 19세기 말 미국-스페인 전쟁 이후 명목상 독립했으나 사실상 미국의 보호국 상태에 놓였으며, 풀헨시오 바티스타의 독재 정권을 거쳐 1959년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 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가 수립되었다. 이후 쿠바는 쿠바 공산당의 일당 독재 체제하에 있으며, 냉전 시기에는 쿠바 미사일 위기와 같은 국제적 긴장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소련 해체 후 심각한 경제난(특별시기)을 겪었으며, 2000년대 들어 라울 카스트로, 미겔 디아스카넬로 지도부가 이어졌다.
쿠바는 사회주의 정치 체제를 유지하며, 헌법에 따라 쿠바 공산당이 사회와 국가의 지도적 역할을 수행한다. 경제는 중앙 계획 경제를 기본으로 하며, 주요 산업은 관광, 설탕, 담배, 니켈 수출 등이다. 미국과의 관계는 혁명 이후 적대적이었으며, 미국의 강력한 경제 봉쇄 조치가 이어져 왔으나, 2014년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쿠바는 높은 수준의 무상 교육과 무상 의료 시스템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동시에 인권 문제, 언론 통제,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기도 한다. 문화적으로 쿠바는 스페인, 아프리카, 원주민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특성을 지니며, 특히 음악(손, 룸바, 살사 등)과 춤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2. 어원
쿠바라는 국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타이노어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그 정확한 어원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름의 정확한 의미는 불분명하지만, '비옥한 땅이 풍부한 곳'을 의미하는 '쿠바오'cubao쿠바오스페인어 또는 '위대한 장소'를 의미하는 '코아바나'coabana코아바나스페인어로 번역될 수 있다고 추정된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처음 이 섬에 상륙했을 때, 당시 아스투리아스 공작 후안의 이름을 따서 '후아나 섬'Isla Juana이슬라 후아나스페인어이라고 명명했으나,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쿠바'라는 이름이 점차 널리 쓰이게 되었다.
3. 역사
쿠바의 역사는 유럽인들의 도착 이전 원주민 시대부터 시작하여 스페인의 오랜 식민 통치, 독립을 위한 투쟁, 공화국 시대의 정치적 불안정과 미국의 영향력,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가 이끈 쿠바 혁명 이후 사회주의 국가 건설과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사다난한 과정을 거쳐왔다. 각 시대는 쿠바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치며 오늘날 쿠바의 모습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3.1. 콜럼버스 이전 시대
유럽인이 도착하기 전, 현재의 쿠바 영토에는 최소 기원전 4000년부터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북아메리카 또는 중앙아메리카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주요 원주민 집단으로는 과나하타베이족과 타이노족이 있었다. 이들은 신석기 시대 수준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일부 학자들은 청동기 문화의 흔적도 있었을 것으로 본다. 과나하타베이족은 주로 섬의 서쪽 끝에서 수렵과 채집 생활을 했으며, 타이노족은 남아메리카에서 이주해 온 아라와크어족 계열로, 섬의 나머지 지역에 거주하며 농경 중심의 생활을 영위했다. 타이노족은 도기 제작 기술을 보유했으며, 카사바, 고구마, 옥수수 등을 재배했다. 이들은 카누를 이용해 섬 간 교류를 했으며, '보히오'bohío보이오스페인어라고 불리는 원형 또는 사각형의 나무집에서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 종교적으로는 제미라고 불리는 신들을 숭배했으며, 의식에서는 담배를 사용하기도 했다. 타이노족 사회는 카시케(추장)를 중심으로 한 계층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콜럼버스 도착 당시 쿠바에는 약 16,000명에서 60,000명, 혹은 그 이상의 원주민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3.2. 스페인 식민 통치 (1492년-1898년)

1492년 10월 27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그의 첫 번째 항해 중 쿠바 섬 북동쪽 해안에 상륙하며 유럽인 최초로 쿠바를 발견했다. 그는 이 섬을 당시 스페인 왕자 후안의 이름을 따 '후아나 섬'Isla Juana이슬라 후아나스페인어이라 명명하고 스페인 영토로 선포했다. 본격적인 식민지화는 1511년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쿠에야르가 이끄는 원정대가 바라코아에 첫 번째 정착지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아바나(1514년 남쪽 해안에 건설 후 1519년 현재 위치로 이전)를 비롯한 여러 도시들이 세워졌고, 아바나는 1607년 식민지의 수도가 되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원주민 타이노족에게 엔코미엔다 제도를 강요하여 강제 노동을 시켰다. 이 제도는 중세 유럽의 봉건 제도와 유사한 착취 구조였다. 원주민들은 가혹한 노동 조건과 더불어 유럽인들이 옮겨온 홍역,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이 없어 대규모로 사망했다. 1529년에는 홍역이 발생하여 천연두에서 살아남았던 원주민의 3분의 2가 사망하는 등, 한 세기 안에 원주민 인구는 급격히 감소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원주민 여성을 아내나 첩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고, 그 자녀들은 메스티소로 불렸다.
16세기 중반 쿠바는 아메리카 대륙 정복을 위한 스페인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으며, 멕시코나 페루에서 약탈한 금, 은 등의 귀중품을 스페인으로 운반하는 스페인 보물선단의 중요한 경유지였다. 이로 인해 쿠바는 해적들의 주요 공격 목표가 되었고, 스페인은 해안 방어를 위해 아바나에 모로 성과 같은 강력한 요새들을 건설했다. 1762년 7년 전쟁 중 영국이 일시적으로 아바나를 점령했으나, 이듬해 플로리다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스페인에 반환되었다. 이 짧은 영국 점령 기간 동안 아바나는 자유 무역을 경험하며 경제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18세기 후반, 이웃 섬 생도맹그(현 아이티)에서 아이티 혁명이 발발하자 프랑스인 농장주들이 노예와 설탕 및 커피 재배 기술을 가지고 쿠바로 피난해 왔다. 이로 인해 쿠바의 설탕 산업은 급격히 발전하여 19세기 중반에는 세계 최대의 설탕 생산지가 되었다. 설탕 산업의 팽창은 더 많은 아프리카 노예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1790년에서 1820년 사이에 약 325,000명의 아프리카인이 노예로 끌려왔다. 1812년에는 아프리카계 자유인 호세 안토니오 아폰테가 주도한 대규모 노예 봉기(아폰테의 난)가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쿠바의 노예제는 1886년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스페인 식민 통치 기간 동안 쿠바 사회는 소수의 스페인 출신 관료와 지주, 다수의 크리게요(식민지 태생 백인), 혼혈인, 그리고 아프리카계 노예 및 자유인으로 구성된 계층 구조를 이루었다. 다른 중남미 식민지들이 19세기 초 독립을 쟁취한 것과 달리, 쿠바는 스페인의 마지막 중요 식민지로 남아 있었다. 이는 스페인 본국의 강력한 통제, 크리게요 지배층의 경제적 이해관계, 그리고 미국의 잠재적 팽창에 대한 우려 등 복합적인 요인 때문이었다.

1539년 5월 18일, 정복자 에르난도 데 소토는 약 60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아바나를 출발하여 금, 보물, 명성, 권력을 찾아 미국 남동부를 탐험하는 광대한 원정을 떠났다. 1548년 9월 1일, 곤살로 페레스 데 앙굴로가 쿠바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549년 11월 4일 쿠바 산티아고에 도착하여 즉시 모든 원주민의 자유를 선언했다. 그는 산티아고 대신 아바나에 거주한 최초의 쿠바 영구 총독이 되었고, 아바나 최초의 석조 교회를 건설했다. 1570년까지 쿠바 주민 대부분은 스페인, 아프리카, 타이노 혈통이 혼합된 상태였다. 쿠바는 카리브해의 플랜테이션 섬들과 달리 농업이 다변화되어 천천히 발전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식민지가 주로 스페인 식민 제국을 지원하는 도시화된 사회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18세기 중반에는 섬에 50,000명의 노예가 있었다. 1790년에서 1820년 사이에 약 325,000명의 아프리카인이 노예로 쿠바에 수입되었는데, 이는 1760년에서 1790년 사이에 도착한 수의 4배에 달했다.
1817년 쿠바의 인구는 630,980명으로, 이 중 백인이 291,021명, 유색인 자유민(혼혈)이 115,691명, 흑인 노예가 224,268명이었다. 쿠바 노예들이 주로 도시 환경에서 일했기 때문에, 19세기에는 코아르타시온coartación코아르타시온스페인어(노예 신분에서 자기를 사서 벗어나는 것, "쿠바 고유의 발전") 관행이 발전했다고 허버트 S. 클라인 역사학자는 말한다. 백인 노동력 부족으로 인해 흑인들이 도시 산업을 지배하여, 19세기 중반 백인들이 대거 쿠바로 이주했을 때도 흑인 노동자들을 대체할 수 없었다. 소규모 농장과 적은 수의 노예를 가진 다변화된 농업 시스템은 도시에 농산물과 기타 상품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182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나머지 스페인 제국이 반란을 일으켜 독립 국가를 형성했을 때, 쿠바는 스페인에 충성을 유지했다. 쿠바 경제는 제국에 봉사하는 것을 기반으로 했다. 1860년까지 쿠바에는 213,167명의 유색인 자유민이 있었는데, 이는 550,000명의 비백인 인구 중 39%에 해당했다.
3.3. 독립 운동

스페인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은 1868년 농장주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가 이끈 반란의 목표였다. 설탕 농장주였던 세스페데스는 자신과 함께 독립된 쿠바를 위해 싸우도록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1868년 12월 27일, 그는 이론적으로는 노예제를 비난하지만 실제로는 용인하며, 주인이 군 복무를 위해 제공하는 모든 노예를 해방한다고 선언하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1868년의 반란은 10년 전쟁으로 알려진 장기간의 분쟁으로 이어졌다.
한 군사 역사학자에 따르면, "1868년 10월 9일 독립 요구에 응답한 38명은 군사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들과 군사 기술에 무지했던 다른 쿠바인들은 곧 산토도밍고에서 온 소수의 정치 난민들과 합류했다. 이들 중 다수는 스페인이 산토도밍고를 재병합(1861년-65년)한 후 스페인을 위해 싸웠다. 스페인이 두 번째로 산토도밍고를 떠나자 일부 도미니카 식민지 장교들이 쿠바로 이주했다. 대부분은 쿠바의 스페인 군대에서 복무할 자리를 찾지 못했다. 이 전직 군인들 중 일부는 새로운 혁명군에 합류하여 초기 훈련과 지휘를 제공했다." 캐나다, 콜롬비아, 프랑스, 멕시코, 미국 출신의 용병들도 쿠바 혁명군에 합류했다. 계약 노동자로 쿠바에 온 중국인들도 이 대의를 위해 싸웠다.
1876년까지 쿠바 혁명 운동은 주로 인종적 긴장으로 인한 내부 갈등에 직면했다. 막시모 고메스 장군은 도미니카인이라는 이유로 장교들이 그의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하자 지휘권을 포기했다. 동시에, 물라토 지도자인 안토니오 마세오에 대한 반대 운동은 백인 파벌들이 그의 인종 때문에 그의 지도력을 약화시키려 하면서 더욱 거세졌다. 이러한 인종적 분열은 혁명군 내 사기 저하에 기여했다.

미국은 새로운 쿠바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많은 유럽 및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인정했다. 1878년, 산혼 조약으로 분쟁이 종식되었고, 스페인은 쿠바에 더 큰 자치권을 약속했다. 1879년-80년, 쿠바 애국자 칼릭스토 가르시아는 소전쟁으로 알려진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하려 했지만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 쿠바의 노예제는 1875년에 폐지되었지만 그 과정은 1886년에야 완료되었다.
호세 마르티라는 망명 반체제 인사는 1892년 뉴욕시에서 쿠바 혁명당을 창설했다. 당의 목표는 스페인으로부터 쿠바의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1895년 1월, 마르티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몬테크리스티와 산토도밍고로 가서 막시모 고메스의 노력에 합류했다. 마르티는 그의 정치적 견해를 몬테크리스티 선언문에 기록했다. 1895년 2월 24일 쿠바에서 스페인 군대에 대항하는 전투가 시작되었지만, 마르티는 1895년 4월 11일까지 쿠바에 도착하지 못했다. 마르티는 1895년 5월 19일 도스리오스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그를 쿠바의 국민 영웅으로 불멸하게 만들었다.

약 20만 명의 스페인 군대는 훨씬 작은 규모의 반란군을 압도했으며, 반란군은 주로 게릴라전과 사보타주 전술에 의존했다. 스페인인들은 탄압 작전을 시작했다. 쿠바의 군정 총독이었던 발레리아노 웨일레르 장군은 농촌 인구를 그가 reconcentrados레콘센트라도스스페인어(재집결촌)라고 부르는 곳으로 몰아넣었는데, 국제 관찰자들은 이를 "요새화된 마을"로 묘사했다. 이는 종종 20세기 강제 수용소의 원형으로 간주된다. 스페인 강제 수용소에서는 20만 명에서 40만 명 사이의 쿠바 민간인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으며, 이 수치는 적십자사와 전 전쟁부 장관이었던 미국 상원의원 레드필드 프록터에 의해 확인되었다. 이후 섬에서 스페인의 행위에 대한 미국과 유럽의 항의가 이어졌다.
미국 전함 USS 메인 호는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도착 직후 아바나 항구에서 폭발하여 빠르게 침몰하여 승무원의 거의 4분의 3이 사망했다. 함선 침몰의 원인과 책임은 조사 위원회 이후에도 불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적극적인 황색 언론에 의해 부추겨진 미국의 여론은 스페인에게 책임이 있다고 결론짓고 조치를 요구했다. 스페인과 미국은 1898년 4월 말 서로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3.4. 공화국 (1902년-1959년)
스페인-미국 전쟁 이후, 스페인과 미국은 1898년 파리 조약에 서명하여 스페인이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괌을 미국에 미화 2,000만 달러에 할양하고 쿠바는 미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쿠바는 1902년 5월 20일 쿠바 공화국으로서 미국으로부터 공식적인 독립을 얻었다. 쿠바의 새 헌법에 따라 미국은 쿠바 문제에 개입하고 재정 및 외교 관계를 감독할 권리를 유지했다. 플랫 수정안에 따라 미국은 쿠바로부터 관타나모만 해군 기지를 임대했다.
3.4.1. 초기 (1902년-1925년)

1906년 분쟁이 발생한 선거 이후, 초대 대통령 토마스 에스트라다 팔마는 독립 전쟁 참전 용사들의 무장 반란에 직면했고, 이들은 미약한 정부군을 물리쳤다. 미국은 쿠바를 점령하여 개입했고, 찰스 에드워드 마군을 3년간 총독으로 임명했다. 쿠바 역사학자들은 마군의 총독 통치가 정치적, 사회적 부패를 초래했다고 평가했다. 1908년, 호세 미겔 고메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자치 정부가 복원되었지만, 미국은 계속해서 쿠바 문제에 개입했다. 1912년, 유색인 독립당(Partido Independiente de Color)은 오리엔테 주에 별도의 흑인 공화국을 세우려 했으나, 몬테아구도 장군에 의해 상당한 유혈 사태와 함께 진압되었다.
1924년, 헤라르도 마차도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행정부 동안 관광업이 현저하게 증가했고, 관광객 유입을 수용하기 위해 미국 소유의 호텔과 레스토랑이 건설되었다. 관광객 증가는 도박과 성매매 증가로 이어졌다.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은 설탕 가격 폭락, 정치적 불안, 탄압으로 이어졌다. 1930년대 세대로 알려진 항의 학생들은 점점 인기를 잃어가는 마차도에 반대하여 폭력으로 전환했다. 총파업(공산당이 마차도 편을 들었던), 설탕 노동자들의 봉기, 군부 반란으로 인해 마차도는 1933년 8월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 이 케사다로 대체되었다.
3.4.2. 1933년 혁명과 1940년 헌법

1933년 9월, 풀헨시오 바티스타 상사가 이끈 상사들의 반란은 세스페데스를 전복시켰다. 5인 집행위원회(1933년 5인 위원회)가 임시 정부를 이끌도록 선택되었다. 이후 라몬 그라우 산 마르틴이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라우는 1934년에 사임하여, 이후 25년 동안 쿠바 정치를 지배한 바티스타에게 길을 열어주었는데, 처음에는 일련의 꼭두각시 대통령들을 통해 지배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의 기간은 "사실상 끊임없는 사회적, 정치적 전쟁"의 시기였다. 전반적으로 1933년-1940년 기간 동안 쿠바는 취약한 정치 구조로 고통받았는데, 이는 2년 동안 세 명의 대통령(1935년-1936년)이 교체된 사실과 육군 총사령관으로서 바티스타의 군사적이고 억압적인 정책에 반영되었다.
새로운 헌법이 1940년에 채택되었는데, 이는 노동권과 건강 관리를 포함한 급진적인 진보적 사상을 설계했다. 바티스타는 같은 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44년까지 재임했다. 그는 지금까지 쿠바 최고 정치직을 획득한 유일한 비백인이다. 그의 정부는 주요 사회 개혁을 단행했다. 공산당의 여러 구성원이 그의 행정부에서 관직을 맡았다. 쿠바 군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전투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지만, 바티스타 대통령은 권위주의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프랑코주의 스페인에 대한 미국-라틴 아메리카 공동 공격을 제안했다. 쿠바는 전쟁 중 상선 6척을 잃었고, 쿠바 해군은 독일 잠수함 U-176을 격침시킨 공로를 인정받았다.
바티스타는 재선을 금지하는 1940년 헌법의 규정을 준수했다. 라몬 그라우 산 마르틴은 1944년 다음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라우는 이미 흔들리고 있던 쿠바 정치 체제의 정당성 기반을 더욱 약화시켰는데, 특히 그다지 효과적이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무력하지도 않았던 의회와 대법원을 약화시킴으로써 그렇게 했다. 그라우의 후계자인 카를로스 프리오 소카라스는 1948년에 대통령이 되었다. 아우텐티코당의 두 임기 동안 투자가 유입되어 경제 호황을 촉진하고 사회 모든 계층의 생활 수준을 높였으며 대부분의 도시 지역에 중산층을 형성했다.
3.4.3. 바티스타 정권과 쿠바 혁명

1944년 임기를 마친 후 바티스타는 플로리다에서 살다가 195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쿠바로 돌아왔다. 확실한 선거 패배에 직면하자 그는 선거를 선점하는 군사 쿠데타를 주도했다. 다시 권력을 잡고 미국 정부로부터 재정적, 군사적, 병참적 지원을 받은 바티스타는 1940년 헌법을 정지시키고 파업권을 포함한 대부분의 정치적 자유를 철회했다. 그 후 그는 가장 큰 설탕 농장을 소유한 가장 부유한 지주들과 제휴하고, 부유한 쿠바인과 가난한 쿠바인 사이의 격차를 넓힌 정체된 경제를 주재했다. 바티스타는 1952년에 쿠바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쿠데타 이후 쿠바는 육류, 채소, 곡물, 자동차, 전화, 라디오의 1인당 소비율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았지만, 인구의 약 3분의 1은 가난하다고 여겨졌고 이러한 소비를 거의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역사는 나를 무죄로 하리라" 연설에서 피델 카스트로는 토지, 산업화, 주택, 실업, 교육, 건강과 관련된 국가적 문제가 당대의 문제라고 언급했다.
1958년 쿠바는 다른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 비해 상당히 발전된 국가였다. 쿠바는 또한 해고와 기계화 금지를 포함하여 라틴 아메리카에서 아마도 가장 큰 노동조합 특권의 영향을 받았다. 이는 주로 "실업자와 농민을 희생시켜" 얻어졌으며, 이는 격차로 이어졌다. 1933년에서 1958년 사이에 쿠바는 경제 규제를 엄청나게 확대하여 경제 문제를 야기했다. 졸업생들이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서 실업이 문제가 되었다. 미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던 중산층은 실업과 정치적 박해에 점점 더 불만을 갖게 되었다. 1948년 이후 이전 정부에 의해 조종된 노동조합은 마지막까지 바티스타를 지지했다. 바티스타는 미국 대사관의 압력과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군이 군사적으로 승리하면서(국가 중앙의 전략적 요충지인 산타클라라 시가 12월 31일 산타클라라 전투로 알려진 분쟁에서 반란군의 손에 넘어갔다) 1958년 12월 사임할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1950년대에는 무장 봉기를 옹호하는 조직을 포함한 다양한 조직들이 정치적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했다. 1956년 피델 카스트로와 약 80명의 지지자들은 바티스타 정부에 대한 반란을 시작하기 위해 요트 그란마에서 상륙했다. 1958년 카스트로의 7월 26일 운동이 주요 혁명 단체로 부상했다. 미국은 바티스타 정부에 대한 1958년 무기 금수 조치를 부과함으로써 카스트로를 지원했다. 바티스타는 미국의 금수 조치를 피하고 도미니카 공화국으로부터 무기를 획득했다.
1958년 말, 반란군은 시에라 마에스트라를 벗어나 대중 봉기를 일으켰다. 카스트로의 전투원들이 산타클라라를 점령한 후, 바티스타는 1959년 1월 1일 가족과 함께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도피했다. 나중에 그는 포르투갈 마데이라 섬으로 망명했고 마침내 리스본 근처의 에스토릴에 정착했다. 피델 카스트로의 군대는 1959년 1월 8일 수도에 입성했다. 자유주의자 마누엘 우루티아 예오가 임시 대통령이 되었다. 카스트로 혁명의 목표 중 하나는 경제적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었지만, 쿠바는 대신 소련의 보조금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고, 코메콘을 통해 동유럽 국가들로부터 추가적인 경제 지원을 받았다.
중앙정보국(CIA)과 라파엘 트루히요의 자금 지원을 받는 무장 반카스트로 단체들은 무장 공격을 감행하고 쿠바 산악 지역에 게릴라 기지를 세웠다. 이는 실패한 에스캄브라이 반란(1959년-65년)으로 이어졌는데, 이 반란은 쿠바 혁명보다 더 오래 지속되었고 더 많은 군인이 참여했다.
3.5. 혁명 정부 (1959년-현재)
1959년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으로 쿠바는 사회주의 국가로 전환했다. 이후 미국과의 관계 악화, 피그스만 침공, 쿠바 미사일 위기 등 냉전의 주요 사건들을 겪었으며,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아프리카 등지에서의 국제 분쟁에 개입했다. 소련 해체 후 '특별시기'라는 경제난을 겪었으며, 21세기 들어 라울 카스트로와 미겔 디아스카넬로 권력이 이양되면서 일부 개혁 조치가 이루어졌다.
3.5.1. 체제 공고화 및 국유화 (1959년-1970년)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1959년부터 1987년까지 공식적인 사형 선고는 237건이었으며, 이 중 21건을 제외하고 모두 집행되었다. 1959년 혁명 직후 처형된 대다수는 바티스타 정권의 경찰관, 정치인, 정보원들로 고문과 살인 등의 범죄로 기소되었으며, 이들의 공개 재판과 처형은 쿠바 민중 사이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미국 정부는 처음에 쿠바 혁명을 라틴 아메리카에 민주주의를 가져오려는 운동의 일환으로 보고 호의적으로 반응했다. 카스트로의 공산당 합법화와 그에 따른 수백 명의 바티스타 요원, 경찰, 군인 처형은 양국 관계를 악화시켰다. (미국 대지주를 포함한) 수천 에이커의 농지를 몰수하는 농지개혁법 공포는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에 대응하여 1960년에서 1964년 사이에 미국은 양국 간 무역 전면 금지와 미국 내 모든 쿠바 소유 자산 동결을 포함한 일련의 제재를 가했다. 1960년 2월, 카스트로는 소련 부총리 아나스타스 미코얀과 상업 협정을 체결했다.

1960년 3월,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쿠바 난민 그룹을 무장시키고 훈련시켜 카스트로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중앙정보국(CIA) 계획을 승인했다. CIA는 침공을 위해 B-26 경폭격기와 함선을 반군에게 제공했다. 1961년 4월 15일 새벽, 2506여단은 니카라과의 푸에르토 카베사스에서 출격하여 산 안토니오 데 로스 바뇨스, 시우다드 리베르타드, 피나르 델 리오, 산티아고 데 쿠바의 쿠바 군사 비행장에 선제 공습을 감행하여 항공기 5대를 파괴하고 정확히 알 수 없는 수의 항공기에 피해를 입혔다. 피그스만 침공으로 알려진 이 침공은 존 F. 케네디 대통령 재임 중인 1961년 4월 17일에 발생했다. 약 1,400명의 쿠바 망명객이 피그스만에 상륙했다. 쿠바 군대와 지역 민병대는 4월 19일까지 침공군을 격퇴하여 100명 이상의 침략자를 사살하고 나머지를 포로로 잡았다. 반군 B-26기 5대가 쿠바 공군에 의해 격추되었고, 1대는 대공포에 의해 격추되었다. 1962년 1월, 쿠바는 미주 기구(OAS)에서 제명되었고, 같은 해 말 OAS는 미국 제재와 유사한 성격의 대쿠바 제재를 시작했다. 쿠바에 대한 실패한 상륙 작전은 소련이 그곳에 미사일을 배치하기로 결정하는 데 기여했으며, 그에 따른 1962년 10월의 쿠바 미사일 위기는 거의 제3차 세계 대전을 촉발할 뻔했다. 1962년, 미국 장군들은 노스우즈 작전을 제안했는데, 이는 미국 도시와 난민에 대한 테러 공격을 감행하고 이를 쿠바 정부의 소행으로 허위로 비난하여 미국이 쿠바를 침공할 명분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거부되었다. 1963년까지 쿠바는 소련 모델을 기반으로 한 본격적인 공산주의 체제로 나아가고 있었다.
엘로이 구티에레스 메뇨요는 1960년대 초 반카스트로 단체 알파 66을 창설했는데, 이 단체는 소형 선박을 이용해 쿠바와 소련 상선을 공격하여 선원들을 살해하거나 부상을 입혔다. 1964년 메뇨요는 도미니카 공화국에 게릴라 훈련 캠프를 세웠고, 1965년 쿠바에 입국한 후 체포되었지만, 알파 66은 새로운 지도부 하에 습격을 계속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소련의 원조는 쿠바 공군과 해군을 강화시켜 쿠바 반체제 인사들의 섬 습격은 상당한 미국의 지원 없이는 비용이 많이 들게 되었다.
1963년 쿠바는 알제리가 모로코와 벌인 모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탱크 22대와 기타 군사 장비와 함께 686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쿠바군은 1년 이상 알제리에 머물면서 알제리군을 훈련시켰다. 피델 카스트로의 승인을 받은 체 게바라는 아프리카에서 심바 반란 게릴라 활동에 참여했으며, 1967년 볼리비아에서 냔카와수 게릴라 혁명을 시작하려다 사망했다. 1965년 중반까지 쿠바는 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에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1966년에는 쿠바의 원조가 기니비사우-카보베르데 아프리카 독립당에도 전달되었다. 더욱이 1960년대 말까지 쿠바 교관들은 모잠비크 해방전선 대원들에게 군사 훈련을 제공하고 있었다. 쿠바군은 1966년 콩고 공화국 쿠데타 시도를 막았다. 쿠데타는 콩고군이 쿠바군과의 교전을 거부하면서 무너졌다. 1967년 2월, 쿠바 고문단은 기니비사우 독립 전쟁에서 게릴라들과 함께 작전을 시작했으며, 1969년 11월 포르투갈은 쿠바 대위 페드로 로드리게스 페랄타를 체포했다.
1968년부터 "혁명 공세"라는 이름의 캠페인이 시작되어 당시 약 58,000개의 소규모 기업이었던 남아있는 모든 민간 소기업을 국유화했다. 이 캠페인은 쿠바의 산업화를 촉진하고 경제를 설탕 생산, 특히 1970년까지 연간 1,000만 톤의 설탕 수확 목표에 집중시켰다. 설탕 생산에 대한 경제적 집중은 국제 자원봉사자들과 쿠바 경제 모든 부문의 노동자 동원을 포함했다. 경제 동원은 쿠바 정치 구조와 사회 전반의 군사화 강화와 동시에 이루어졌다. 1,000만 톤 수확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다. 대규모 도시 노동력이 농촌으로 동원되면서 경제의 많은 부문이 방치된 후 쿠바 경제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1970년대 생활 수준은 "극도로 궁핍"했고 불만은 만연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1970년 연설에서 경제 정책의 실패를 인정했다. 1975년 OAS는 미국을 포함한 16개 회원국의 승인을 받아 쿠바에 대한 제재를 해제했다. 그러나 미국은 자체 제재를 유지했다.
3.5.2. 대외 개입 (1971년-1991년)

냉전 기간 동안 쿠바는 소련으로부터 330억 달러의 원조를 받았으며, 쿠바군은 군사 고문이나 전투원으로 아프리카 전역에 파견되었다. 소련 조종사와 기술자들은 쿠바에서 국방 임무를 맡아 쿠바 인력이 아프리카에 배치될 수 있도록 했다. 1979년 미국은 섬에 소련 전투 부대가 주둔하는 것에 반대했다.

쿠바의 군사적 대외 개입은 냉전 시기 아프리카 대륙에서 두드러졌다. 특히 앙골라 내전에서는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여 MPLA를 지원했고, 에티오피아-소말리아 전쟁(오가덴 전쟁)에서도 에티오피아를 도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개입은 쿠바 혁명군에게 실전 경험을 제공하는 한편, 국제 정치 무대에서 쿠바의 독자적인 행보를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1975년 11월, 쿠바는 역사상 가장 빠른 군사 동원 중 하나로 앙골라에 65,000명 이상의 병력과 400대의 소련제 탱크를 배치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앙골라에 대규모 쿠바군이 주둔함으로써 안보에 위협을 느껴 핵무기를 개발했다. 1975년-76년과 1988년 쿠이토 쿠아나발레 전투에서 쿠바군은 MPLA 동맹군과 함께 UNITA 반군 및 아파르트헤이트 남아프리카 공화국 군대와 싸웠다. 1977년 12월, 쿠바는 소말리아 침공을 격퇴하기 위해 앙골라, 콩고 인민 공화국, 카리브해에서 전투 부대를 에티오피아로 파견했으며, 기계화된 소련 대대의 지원을 받았다. 1978년 1월 24일, 에티오피아와 쿠바군은 반격하여 소말리아군에 3,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2월, 쿠바군은 대규모 공세를 시작하여 소말리아군을 자국 영토로 밀어냈다. 쿠바군은 1989년 9월까지 에티오피아에 남아 있었다.
쿠바의 작은 규모와 중동과의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카스트로의 쿠바는 냉전 기간 동안 이 지역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1972년, 탱크, 항공, 포병 전문가로 구성된 주요 쿠바 군사 사절단이 남예멘에 파견되었다. 쿠바 군사 고문단은 1970년대 중반 이라크에 파견되었지만, 1980년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한 후 임무가 취소되었다. 쿠바군은 또한 욤키푸르 전쟁(1973년 10월) 이후 시리아-이스라엘 분쟁(1973년 11월-1974년 5월)에도 관여했다. 이스라엘 소식통은 골란고원에 쿠바 탱크 여단이 주둔하고 있으며, 두 개 여단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스라엘군과 쿠바-시리아 탱크 부대는 골란 전선에서 교전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후, 카스트로는 무기, 탄약, 훈련을 제공함으로써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콜롬비아의 마르크스주의 반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레나다 총리 모리스 비숍 처형과 허드슨 오스틴이 이끄는 군사 정부 수립으로 이어진 1983년 쿠데타 이후, 미군이 그레나다를 침공하여 친카스트로 정부를 전복시켰다. 며칠간의 전투에서 6,000명의 미군 전투 부대가 784명의 쿠바인(군사 훈련을 받은 건설 노동자 636명, 군사 고문 43명, 외교관 18명)을 물리쳤다.
쿠바는 1989년-91년에 점진적으로 앙골라에서 군대를 철수했다. 아프리카에서의 쿠바 군사 개입의 중요한 심리적, 정치적 측면은 쿠바군 내 흑인 또는 혼혈 군인의 상당한 존재였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30만 명 이상의 쿠바 군인과 민간 전문가가 아프리카에 배치되었다. 이 소식통은 또한 앙골라에 파견된 5만 명의 쿠바인 중 절반이 AIDS에 감염되었고, 1만 명의 쿠바인이 아프리카에서의 군사 행동의 결과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3.5.3. 정치적 재조정과 특별시기 (1991년-현재)
1991년 9월 소련군이 쿠바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카스트로의 통치는 1991년 12월 소련 붕괴(쿠바에서는 특별시기로 알려짐) 이후 심각한 시험대에 올랐다. 쿠바는 연간 40억 달러에서 60억 달러에 달하는 소련 보조금 철회 이후 식량 및 연료 부족과 같은 영향으로 심각한 경제 침체에 직면했다. 정부는 1993년까지 미국의 식량, 의약품, 현금 기부를 수용하지 않았다. 1994년 8월 5일, 국가 안보국은 아바나에서 발생한 말레코나소 자발적 시위에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위기 시작부터 1995년까지 쿠바의 국내총생산(GDP)은 35% 감소했다. GDP가 위기 이전 수준에 도달하는 데는 5년이 더 걸렸다.
이후 쿠바는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새로운 원조와 지원을 받았다. 또한, 당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었던 우고 차베스와 전 볼리비아 대통령이었던 에보 모랄레스가 동맹국이 되었으며, 두 나라 모두 주요 석유 및 가스 수출국이다. 2003년, 정부는 다수의 시민 운동가를 체포하고 투옥했는데, 이 시기는 "검은 봄"으로 알려져 있다.
2008년 2월, 피델 카스트로는 2006년 7월부터 앓아온 심각한 위장 질환으로 인해 국가평의회 의장직에서 사임했다. 2월 24일, 인민권력국가회의는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를 새 의장으로 선출했다. 라울은 취임 연설에서 쿠바의 자유에 대한 일부 제한이 해제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2009년 3월, 라울 카스트로는 형의 임명자 중 일부를 해임했다.
2009년 6월 3일, 미주 기구는 쿠바의 기구 회원 자격에 대한 47년간의 금지를 해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결의안은 쿠바가 "OAS의 관행, 목적, 원칙에 부합"할 때까지 정회원 자격이 지연될 것이라고 명시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가 OAS에 재가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썼는데, 그는 OAS가 "미국의 트로이 목마"이며 쿠바와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조치에 "공모"했다고 말했다.

2013년 1월 14일부로 쿠바는 1961년에 제정된, 해외여행을 원하는 모든 시민이 값비싼 정부 허가와 초청장을 받아야 했던 요건을 폐지했다. 1961년 쿠바 정부는 1959년 혁명 이후 대규모 인구 유출을 막기 위해 여행에 광범위한 제한을 가했으며, 극히 드문 경우에만 출국 비자를 승인했다. 요건은 간소화되었다. 쿠바인들은 출국을 위해 여권과 국민 ID 카드만 있으면 되었고, 처음으로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권 비용은 평균 5개월치 월급에 달했다. 관찰자들은 해외에 돈을 지불하는 친척이 있는 쿠바인들이 새로운 정책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프로그램 첫해에 18만 명 이상이 쿠바를 떠났다가 돌아왔다.
2014년 12월 현재, 쿠바 관리들과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를 포함한 미국 관리들과의 회담 결과, 미국에 수감된 쿠바 요원 3명의 석방과 교환하여 앨런 그로스, 정치범 52명,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미국의 비시민권 요원이 석방되었다. 또한, 미국과 쿠바 간의 금수 조치가 즉시 해제되지는 않았지만, 수입, 수출 및 일부 제한된 상거래를 허용하도록 완화되었다.
라울 카스트로는 2018년 4월 19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의회 선거에 이어 국회에서 미겔 디아스카넬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라울 카스트로는 공산당 제1서기직을 유지하며 대통령에 대한 감독을 포함한 광범위한 권한을 유지했다.
쿠바는 2019년에 새 헌법을 승인했다. 선택적 투표에는 유권자의 84.4%가 참여했다. 투표한 사람 중 90%가 새 헌법을 승인했고 9%가 반대했다. 새 헌법은 공산당이 유일한 합법 정당이라고 명시하고, 건강과 교육에 대한 접근을 기본권으로 기술하며, 대통령 임기 제한을 부과하고, 체포 시 법적 대리권을 보장하며, 사유 재산을 인정하고, 국가와 투자하는 다국적 기업의 권리를 강화한다. 새 헌법에 따라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모든 형태의 차별은 금지된다.
라울 카스트로는 2021년 4월 16일에 시작된 제8차 쿠바 공산당 대회에서 공산당 서기직에서 은퇴한다고 발표했다. 그의 후임자인 미겔 디아스카넬은 4월 19일에 선출되었다.
2021년 7월, 생명과 조국이라는 구호 아래 정부에 반대하는 몇 차례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쿠바 망명자들도 해외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 운동과 관련된 노래는 라틴 그래미상을 포함하여 국제적인 찬사를 받았다.
2022년 9월 25일, 쿠바는 가족법을 개정하여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고 대리 임신 및 동성 입양을 허용하는 국민투표를 승인했다. 성전환 수술과 트랜스젠더 호르몬 치료는 쿠바의 국가 의료 시스템 하에 무료로 제공된다. 제안된 변경 사항은 정부의 지지를 받았지만 보수주의자들과 야당 일부의 반대에 부딪혔다. 1959년부터 1990년대까지 쿠바 정부의 공식 정책은 동성애에 적대적이었으며, 성소수자 공동체는 이성애 규범성, 전통적인 성 역할, 엄격한 도덕주의 기준으로 인해 소외되었다.
4. 지리

쿠바는 멕시코만과 대서양이 만나는 북부 카리브해에 위치한 4,195개의 섬, 산호초, 암초로 이루어진 군도이다. 북위 19도에서 24도, 서경 74도에서 85도 사이에 위치한다. 플로리다(키웨스트)는 플로리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북쪽과 북서쪽으로 약 150 km 떨어져 있으며, 바하마(케이 로보스)는 북쪽으로 22.5 km 떨어져 있다. 멕시코는 유카탄 해협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210 km 떨어져 있다(킨타나로오주의 카보 카토체 가장 가까운 지점까지). 아이티는 동쪽으로 77 km, 자메이카는 남쪽으로 140 km 떨어져 있다. 쿠바는 본섬과 주변의 네 개의 작은 섬 그룹으로 둘러싸여 있다. 북서 해안의 콜로라도스 군도, 북중부 대서양 연안의 사바나-카마궤이 군도, 남중부 해안의 하르디네스 데 라 레이나 군도, 남서 해안의 카나레오스 군도이다.

쿠바라고 불리는 본섬은 길이가 1250 km로, 국토 면적의 대부분(10.43 만 km2)을 차지하며 카리브해에서 가장 큰 섬이자 세계에서 육지 면적으로 17번째로 큰 섬이다. 본섬은 남동쪽의 시에라마에스트라산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평탄하거나 완만한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최고봉은 투르키노산(피코 투르키노, 1974 m)이다.
두 번째로 큰 섬은 카나레오스 군도에 있는 후벤투드섬(청년의 섬)으로 면적은 2204 km2이다. 쿠바의 공식 면적은 10.99 만 km2이다. 해안 및 영해를 포함한 면적은 11.09 만 sigfig=5이다.
4.1. 기후
섬 전체가 북회귀선 남쪽에 위치하여 현지 기후는 열대성이며, 일 년 내내 부는 북동 무역풍에 의해 완화된다. 기온은 또한 적도에서 따뜻한 물을 가져오는 카리브 해류에 의해 형성된다. 이로 인해 쿠바의 기후는 쿠바와 거의 같은 위도에 있지만 열대 기후가 아닌 아열대 기후를 가진 홍콩보다 따뜻하다. 일반적으로 (지역적 차이는 있지만) 11월부터 4월까지는 건기이고, 5월부터 10월까지는 우기이다. 평균 기온은 1월에 21 °C이고 7월에 27 °C이다. 카리브해의 따뜻한 기온과 쿠바가 멕시코만 입구에 위치한다는 사실이 결합되어 이 나라는 잦은 허리케인에 취약하다. 허리케인은 9월과 10월에 가장 흔하다.
허리케인 어마는 2017년 9월 8일 시속 260 km/h의 바람과 함께 카마궤이 군도에 상륙했다. 폭풍은 자정 무렵 시에고 데 아빌라 주에 도달하여 다음날까지 쿠바를 강타했다. 가장 큰 피해는 본섬 북쪽의 산호초 지대에서 발생했다. 병원, 창고, 공장이 파손되었고 북부 해안 대부분이 정전되었다. 그때까지 관광객을 포함한 거의 백만 명이 대피했다. 바라데로 휴양지에서도 광범위한 피해가 보고되었다. 정부는 주요 관광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수리가 완료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후 보고에 따르면 폭풍으로 인해 아바나에서 7명을 포함하여 10명이 사망했으며, 대부분 건물 붕괴로 인한 것이었다. 수도의 일부 지역은 침수되었다.
4.2. 생물 다양성

쿠바는 1992년 6월 12일 리우 생물 다양성 협약에 서명했으며, 1994년 3월 8일 협약 당사국이 되었다. 이후 국가 생물 다양성 전략 및 실행 계획을 수립하여 한 차례 개정했으며, 협약은 2008년 1월 24일에 이를 접수했다.
CBD에 제출된 쿠바의 제4차 국가 보고서에는 쿠바에서 기록된 각 생물계 종의 수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포함되어 있으며, 주요 그룹은 동물(17,801종), 박테리아(270종), 색조류(707종), 지의류 형성 종을 포함한 균류(5,844종), 식물(9,107종), 원생동물(1,440종)이다. 토종 벌새 또는 순순시토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새로 알려져 있으며 길이는 55 frac=8이다. 쿠바 토곤 또는 토코로로는 쿠바의 국조이자 고유종이다. 다른 고유종으로는 쿠바 악어, 쿠바 후티아, 쿠바 솔레노돈, 쿠바 가아, 쿠바 보아, 폴리미타 픽타가 있다. 쿠바에서 마리포사라고 불리는 헤디키움 코로나리움은 국화이다.
쿠바에는 쿠바 습윤림, 쿠바 건조림, 쿠바 소나무숲, 쿠바 습지, 쿠바 선인장 관목림, 대앤틸리스 맹그로브 등 6개의 육상 생태 지역이 있다. 2019년 산림 경관 보전 지수 평균 점수는 5.4/10으로, 172개국 중 세계 102위를 차지했다.
2012년 연구에 따르면, 쿠바는 세계 자연 기금(WWF)이 제시한 지속 가능한 발전 조건을 충족하는 세계 유일의 국가이다.
5. 정치

공산당 제1서기 겸 대통령

총리

부통령

국회 의장
쿠바 공화국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을 따르는 몇 안 되는 사회주의 국가 중 하나이다. 쿠바를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정의한 1976년 헌법은 1992년 헌법으로 대체되었는데, 이 헌법은 "호세 마르티의 사상과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정치 및 사회 사상에 의해 인도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헌법은 쿠바 공산당을 "사회와 국가의 지도적 세력"으로 규정한다. 쿠바의 정치 체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민주집중제 개념을 반영한다.
공산당 제1서기는 일당제 국가에서 가장 높은 직위이다. 제1서기는 정치국과 서기국을 이끌며, 이 직책을 맡은 사람은 쿠바 정부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 된다. 두 평의회의 구성원은 인민권력국가회의에서 선출된다. 국회에서 선출되는 쿠바 대통령은 5년 임기로 복무하며, 2019년 헌법 비준 이후 연속 5년 임기 2회로 제한된다.

인민대법원은 쿠바 정부의 최고 사법 기관 역할을 한다. 또한 지방 법원의 결정에 대한 모든 항소의 최종 심급 법원이기도 하다.
쿠바의 국가 입법부인 인민권력국가회의(Asamblea Nacional de Poder Popular)는 최고 권력 기관이며, 474명의 의원이 5년 임기로 활동한다. 국회는 1년에 두 번 회의를 열며, 회기 사이에는 31명의 각료회의가 입법권을 행사한다. 국회 의원 후보는 국민투표로 승인된다.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지 않은 16세 이상의 모든 쿠바 시민은 투표할 수 있다. 헌법 제131조는 투표가 "자유롭고 평등하며 비밀투표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제136조는 "대의원 또는 대표자가 선출된 것으로 간주되려면 선거구에서 유효 투표수의 과반수를 얻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쿠바의 선거는 있지만 민주적이라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인민권력국가회의 선거에서는 각 의석에 대해 단 한 명의 후보만 있으며, 후보는 공산당이 확고하게 통제하는 위원회에서 지명된다. 대부분의 입법 구역은 국회에 여러 명의 대표를 선출한다. 유권자는 투표 용지에서 개별 후보를 선택하거나 모든 후보를 선택하거나 모든 질문을 공란으로 남길 수 있으며, 후보에 반대하는 투표를 할 선택권은 없다.
정당은 공산당을 포함하여 쿠바 내에서 후보를 지명하거나 유세를 벌이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쿠바 공산당은 1975년 이후 6번의 당 대회를 개최했다. 2011년 당은 80만 명의 당원이 있다고 밝혔으며, 대표자들은 일반적으로 국가평의회와 국회의 절반 이상을 구성한다. 나머지 직위는 명목상 당적 없는 후보들로 채워진다. 다른 정당들은 국제적으로 유세하고 자금을 모금하는 반면, 반정부 단체의 쿠바 내 활동은 미미하다.
쿠바는 이코노미스트의 민주주의 지수와 세계의 자유 보고서에 따르면 권위주의 정권으로 간주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쿠바는 민주주의-독재 지수에서 군사 독재로 간주되며, 군대가 오랫동안 국가에서 가장 강력한 기관이었던 "군사화된 사회"로 묘사되어 왔다.
2013년 2월, 국가평의회 의장 라울 카스트로는 5년 임기를 마치고 2018년에 사임할 것이며, 연령 제한을 포함하여 향후 쿠바 대통령에 대한 영구적인 임기 제한을 시행하기를 희망한다고 발표했다.
피델 카스트로가 2016년 11월 25일 사망한 후, 쿠바 정부는 9일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애도 기간 동안 쿠바 시민들은 시끄러운 음악을 틀거나 파티를 열거나 술을 마시는 것이 금지되었다.
미겔 디아스카넬은 라울 카스트로의 사임 후 2018년 4월 18일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21년 4월 19일, 디아스카넬은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다. 그는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카스트로 가문이 아닌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최고위직에 올랐다.
5.1. 행정 구역
쿠바는 15개 주(provincia)와 1개 특별 자치구(후벤투드섬)로 구성된다. 이들은 이전에는 피나르델리오, 아바나, 마탄사스, 라스비야스, 카마궤이, 오리엔테 등 6개의 더 큰 역사적 지방의 일부였다. 현재의 행정 구역은 쿠바 독립 전쟁 당시 가장 문제가 많았던 지역들이 세분화되었던 스페인 군관구와 매우 유사하다. 각 주는 여러 개의 시군(municipio)으로 나뉜다.

5.2. 대외 관계

쿠바는 작고 발전 중인 국가로서는 이례적인 외교 정책을 수행해 왔다. 카스트로 치하에서 쿠바는 아프리카, 중앙아메리카, 아시아의 전쟁에 깊이 관여했다. 쿠바는 1961년-1965년 알제리를 지원했으며, 앙골라 내전 기간 동안 수만 명의 병력을 앙골라에 파견했다. 쿠바가 개입한 다른 국가로는 에티오피아, 기니,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예멘 등이 있다. 덜 알려진 활동으로는 1959년 도미니카 공화국에 대한 임무가 있다. 이 원정은 실패했지만, 도미니카 정부는 산토도밍고에 그 구성원들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고, 이들은 국가 저항 기념 박물관에 두드러지게 전시되어 있다.
2008년, 유럽 연합(EU)과 쿠바는 완전한 관계 및 협력 활동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쿠바는 미주를 위한 볼리바르 동맹의 창립 회원국이다. 2012년 말 현재, 수만 명의 쿠바 의료 인력이 해외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두 나라의 석유-의사 교환 프로그램을 통해 베네수엘라에만 3만 명의 의사가 파견되어 있다.


1996년,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 치하의 미국은 쿠바 자유와 민주 연대법(일명 헬름스-버튼법)을 제정했다. 2009년 4월 17일,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미국은 쿠바와의 새로운 시작을 추구한다"고 밝혔으며, 부시 행정부의 미국에서 쿠바로의 쿠바계 미국인의 여행 및 송금 금지를 철회했다. 5년 후, 캐나다와 프란치스코 교황이 일부 중재한 미국과 쿠바 간의 협정(일명 "쿠바 해빙")은 양국 간 국제 관계 복원 과정을 시작했다. 그들은 정치범 석방에 합의했고 미국은 아바나에 대사관을 설치하는 절차를 시작했다. 이는 2015년 6월 30일 쿠바와 미국이 각자의 수도에 2015년 7월 20일 대사관을 재개설하고 외교 관계를 재수립하기로 합의하면서 실현되었다. 같은 해 초, 백악관은 오바마 대통령이 쿠바를 미국의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쿠바는 이를 "공정하다"고 환영했다고 전해진다. 2017년 9월 17일, 미국은 직원들이 겪은 의문의 의학적 증상 이후 쿠바 대사관 폐쇄를 고려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러시아의 지속적인 국제적 고립 속에서 쿠바는 러시아 연방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로 부상했다. 쿠바 대통령 미겔 디아스카넬은 2022년 11월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을 방문하여 두 지도자는 피델 카스트로 기념비를 제막하고 러시아와 쿠바에 대한 미국의 제재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5.2.1. 미국과의 관계 및 금수 조치
1960년 이래로 미국의 대쿠바 금수 조치는 양자 관계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무역 및 경제 조치 중 하나로, 거의 60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 조치는 당시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미국 재산 10억 달러 이상에 영향을 미친 국유화 물결에 대응하여 시작한 것으로, 의약품과 특정 식품을 제외한 모든 대쿠바 수출을 금지했다. 이 조치는 1962년 존 F. 케네디 행정부 하에서 강화되어 1961년 의회가 승인한 해외원조법에 따라 쿠바 수입품에 대한 제한을 확대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은 쿠바에 대한 해상 봉쇄까지 단행했지만, 위기 해결 후 해제되었다. 그러나 금수 조치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수년에 걸쳐 여러 차례 수정되었다.
1992년 쿠바 민주주의법은 "민주화와 인권 존중을 향한 움직임을 계속 거부하는 한" 제재가 계속될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미국 외교관 레스터 D. 맬러리는 1960년 4월 6일 내부 메모에서 금수 조치를 지지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내부 지원을 소외시키는 유일하게 예측 가능한 수단은 경제적 불만과 어려움에 근거한 환멸과 불만을 통해서이다. [...] 화폐 및 실질 임금을 줄이고, 기아, 절망, 정부 전복을 초래하기 위함이다." 유엔 총회는 1992년 이래 매년 금수 조치를 비난하고 이것이 유엔 헌장과 국제법을 위반한다고 명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쿠바는 금수 조치를 인권 침해로 간주한다.
금수 조치의 영향과 효과는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일부는 이것이 "엄청나게 허술"하며 쿠바 경제난의 주요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이를 쿠바 정부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압력 메커니즘으로 본다. 국제 관계학 교수인 아르투로 로페스 레비에 따르면, 이 조치는 단순한 무역 제한을 넘어선 것이므로 "봉쇄" 또는 "포위"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쿠바 정부의 다른 비판가들은 금수 조치가 정부 자신의 경제적, 정치적 단점을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2014년 12월 17일,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쿠바와의 외교 관계 재수립을 발표하고 의회에 금수 조치 종료를 촉구했으며, 미국이 운영하는 관타나모만 수용소 폐쇄도 추진했다. 이러한 외교적 개선은 나중에 트럼프 행정부에 의해 뒤집혔는데, 트럼프 행정부는 새로운 규정을 제정하고 오바마 행정부가 완화했던 사업 및 여행 제한을 재강화했다. 이러한 제재는 바이든 행정부에 의해 계승되고 강화되었다.
금수 조치에도 불구하고 쿠바는 다른 국가들과 무역 관계를 유지해 왔다. 2019년 자료에 따르면, 중국이 쿠바의 주요 교역 상대국이며, 스페인, 네덜란드, 독일, 키프로스 등이 그 뒤를 잇는다. 쿠바의 주요 수출품은 담배, 설탕, 주류이며, 주로 닭고기, 밀, 옥수수, 연유를 수입한다.
5.3. 군사
2018년 현재, 쿠바는 군대에 약 9,180만 달러, 즉 GDP의 2.9%를 지출했다. 1985년 쿠바는 GDP의 10% 이상을 군사비에 투입했다. 냉전 기간 동안 쿠바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브라질 다음으로 큰 군대 중 하나를 구축했다.
1975년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소련의 군사 지원은 쿠바가 군사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게 해주었다. 소련 보조금 손실 이후 쿠바는 군인 수를 1994년 235,000명에서 2021년 약 49,000명으로 줄였다.
2017년 쿠바는 유엔 핵무기금지조약에 서명했다.
쿠바는 2024년 세계 평화 지수에 따르면 세계에서 98번째로 평화로운 나라이다.
5.4. 법치와 치안
모든 법 집행 기관은 혁명군이 감독하는 쿠바 내무부 산하에 유지된다. 쿠바에서는 시민들이 전화로 "106"번을 눌러 경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Policía Nacional Revolucionaria" 또는 PNR로 불리는 경찰력이 도움을 제공할 것으로 예상된다. 쿠바 정부에는 정보 작전을 수행하고 러시아 연방보안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정보국이라는 기관도 있다. 미국 법무부는 쿠바를 중대한 방첩 위협으로 간주한다.
민간인들도 제한된 범위 내에서 법 집행에 관여한다. 혁명수호위원회는 헌신적인 시민들로 구성된 공식적인 자율방범대 조직으로, 이웃을 감시한다. 회원은 선별적이지 않지만 지도급 회원은 쿠바 공산당의 승인을 받는다.
5.5. 인권

2003년, 유럽 연합(EU)은 쿠바 정부가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계속해서 노골적으로 침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2009년 현재, EU는 모든 정치범의 무조건 석방과 함께 쿠바의 사회 경제적 개혁을 정기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2021년 현재, 언론인 보호 위원회와 휴먼 라이츠 워치를 포함한 여러 소식통에 따르면 쿠바는 수감된 언론인 수에서 세계 19위를 차지했다. 쿠바는 2020년 세계 언론 자유 지수에서 180개국 중 171위를 차지했다.
2010년 7월, 비공식 쿠바 인권 위원회는 쿠바에 167명의 정치범이 있으며, 이는 연초 201명에서 감소한 수치라고 밝혔다. 위원회 위원장은 장기 징역형이 괴롭힘과 협박으로 대체되고 있다고 말했다.
6. 경제
쿠바 국가는 대체로 국가가 통제하는 계획 경제를 조직하는 데 있어 사회주의 원칙을 고수한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생산 수단은 정부가 소유하고 운영하며, 대부분의 노동력은 국가에 고용되어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민간 부문 고용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2006년 공공 부문 고용은 78%, 민간 부문은 22%로, 1981년의 91.8% 대 8.2%와 비교된다. 정부 지출은 GDP의 78.1%이다. 2010년대 초반 초기 시장 개혁 이후, 경제가 시장사회주의로 나아가고 있거나 그렇게 묘사되는 것이 일반적이 되었다. 쿠바인을 고용하는 모든 회사는 쿠바 정부에 급여를 지불해야 하며, 정부는 다시 쿠바 페소로 직원에게 급여를 지급한다. 2013년 7월 기준 평균 월급은 466 쿠바 페소(미화 약 19달러)였다. 그러나 2021년 1월 개혁 이후 최저 임금은 약 2100 CUP(미화 18달러), 중간 임금은 약 4000 CUP(미화 33달러)이다.
쿠바는 1959년 이전에 쿠바 페소(CUP)를 미국 달러와 동등하게 설정했다. 모든 쿠바 가정에는 리브레타로 알려진 배급 장부가 있어 명목상의 비용으로 식량 및 기타 생필품을 매월 공급받을 수 있다.
아바나 컨설팅 그룹에 따르면, 2014년 쿠바 송금액은 미화 31억 2,900만 달러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7번째로 높았다. 2019년 송금액은 미화 66억 1,600만 달러로 증가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2020년에는 미화 19억 6,700만 달러로 급감했다. 팬데믹은 또한 쿠바 관광 산업을 황폐화시켰으며, 이는 미국의 제재 강화와 함께 젊은 노동 연령 쿠바인들 사이에서 대규모 이민 증가로 이어졌다. 이는 "쿠바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위기로 묘사되었으며, 쿠바는 "이미 반구에서 가장 오래된 인구 중 하나를 보유하고 있다". 쿠바 인권 관측소(OCDH)의 논란의 여지가 있는 2023년 보고서에 따르면, 쿠바 시민의 88%가 극심한 빈곤 속에서 살고 있다. 이 보고서는 쿠바인들이 식량 안보와 기본 물품 확보의 어려움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쿠바의 1인당 GDP는 2020년 기준 9,500달러였다. 그러나 CIA 월드 팩트북에 따르면 2016년 기준 12,300달러였다. 유엔 개발 계획은 2021년 쿠바에 인간 개발 지수(HDI) 0.764점을 부여했다. 같은 유엔 기관은 2023년 쿠바의 다차원 빈곤 지수를 0.003으로 추정했다.
2005년 쿠바는 수출액 미화 24억 달러로 세계 226개국 중 114위, 수입액 미화 69억 달러로 226개국 중 87위를 기록했다. 주요 수출 상대국은 캐나다 17.7%, 중국 16.9%, 베네수엘라 12.5%, 네덜란드 9%, 스페인 5.9%(2012년)이다. 쿠바의 주요 수출품은 설탕, 니켈, 담배, 생선, 의료 제품, 감귤류, 커피이며, 수입품에는 식량, 연료, 의류, 기계류가 포함된다. 쿠바는 현재 약 미화 130억 달러의 부채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GDP의 약 38%에 해당한다.
헤리티지 재단에 따르면, 쿠바는 국가 간 순환하는 신용 계정에 의존하고 있다. 쿠바의 이전 세계 설탕 수출 시장 점유율 35%는 세계 설탕 상품 가격 하락으로 쿠바의 세계 시장 경쟁력이 약화되는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10%로 감소했다. 2008년에는 국가 생산성 향상을 위해 임금 상한선이 폐지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쿠바 지도부는 농업 시스템 개혁을 요구했다. 2008년 라울 카스트로는 당시 식량의 80%를 수입했기 때문에 식량 생산을 늘리기 위한 농업 개혁을 시작했다. 이 개혁은 토지 이용 확대와 효율성 증대를 목표로 한다. 베네수엘라는 쿠바에 하루 약 11.00 만 oilbbl의 석유를 돈과 약 44,000명의 쿠바인(대부분 의료 인력)의 베네수엘라 내 서비스와 교환하여 공급한다.

2010년 현재 쿠바인들은 자신의 집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라울 카스트로에 따르면, 그들은 이제 집을 개선할 수 있지만 정부는 이러한 새 집이나 개선 사항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 쿠바에는 사실상 노숙자가 없으며, 쿠바인의 85%가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재산세나 담보 대출 이자를 내지 않는다. 담보 대출 상환액은 가계 총소득의 10%를 초과할 수 없다.
2011년 8월 2일, 뉴욕 타임스는 쿠바가 연말 이전에 사유 재산 "매매"를 합법화하려는 의사를 재확인했다고 보도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사유 재산의 개인 매각은 "라울 카스트로 대통령 정부가 발표한 어떤 경제 개혁보다 쿠바를 더 많이 변화시킬 수 있다". 이는 변화에 저항하는 당 관료를 포함하여 백만 개 이상의 국영 일자리를 줄일 것이다. 이 개혁은 일부 사람들이 "신 쿠바 경제"라고 부르는 것을 창출했다. 2013년 10월, 라울은 두 통화를 통합할 의사가 있다고 말했지만, 2016년 8월 현재 이중 통화 시스템은 여전히 시행 중이다.

2016년, 마이애미 헤럴드는 "...쿠바인의 약 27%가 월 50달러 미만을 벌고, 34%가 월 50달러에서 100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을 벌며, 20%가 101달러에서 200달러를 번다. 12%는 월 201달러에서 500달러를 번다고 보고했으며, 거의 4%는 월 소득이 500달러를 넘는다고 말했고, 이 중 1.5%는 1,000달러 이상을 번다고 말했다."고 썼다.
2019년 5월, 쿠바는 닭고기, 계란, 쌀, 콩, 비누 및 기타 기본 물품과 같은 생필품 배급을 시행했다. (쿠바 식량의 약 3분의 2는 수입된다.) 한 대변인은 미국의 무역 금수 조치 강화를 비난했지만, 경제학자들은 베네수엘라로부터의 원조 대폭 감소와 연료 비용을 보조해 온 쿠바 국영 석유 회사의 실패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문제라고 믿는다.
2019년 6월, 정부는 특히 교사와 의료 인력을 대상으로 공공 부문 임금을 약 300%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10월, 정부는 상점에서 주택 장비 및 유사 품목을 국제 통화로 구매하여 이민을 통해 쿠바로 보낼 수 있도록 허용했다. 정부 지도자들은 새로운 조치가 인기가 없지만 파나마와 같이 쿠바 시민들이 여행하여 섬에서 재판매할 물품을 수입하는 다른 나라로의 자본 유출을 억제하는 데 필요하다고 인정했다. 다른 조치에는 민간 기업이 쿠바에서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한 자원을 국영 기업을 통해 수출입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2021년 1월 1일, 쿠바의 이중 통화 시스템이 공식적으로 종료되었고, 태환 페소(CUC)가 단계적으로 폐지되어 쿠바 페소(CUP)가 국가의 유일한 통화 단위가 되었다. 쿠바 시민들은 2021년 6월까지 CUC를 교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쿠바 페소의 가치를 하락시켰고, 특히 관광 산업 노동자들을 포함하여 이전에 CUC로 급여를 받았던 사람들에게 경제적 문제를 야기했다. 또한 2월에는 정부가 민간 부문에 대한 새로운 조치를 지시했으며, 국가 안보, 보건 및 교육 서비스와 같은 분야에서 단 124개의 활동만 금지되었다. 모든 부문의 임금도 4배에서 9배 사이로 다시 인상되었다. 또한 국영 기업에도 새로운 시설이 허용되어 훨씬 더 많은 자율성이 부여되었다.
새로운 개혁의 첫 번째 문제점은 여론 측면에서 전기 요금이었지만, 이는 신속하게 수정되었다. 다른 수정된 조치는 민간 농민을 위한 가격이었다. 2020년 7월, 쿠바는 미국 달러에 대한 특별세를 동시에 철폐하면서 외화만 받는 새로운 상점을 열었다. 이는 처음에는 트럼프 행정부가 부과한 경제 제재로 인해 발생한 경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나중에는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 기간 동안 관광객 부족으로 악화되었다. 이러한 경제 제재는 이후 바이든 행정부에 의해 유지되었다.
6.1. 자원
쿠바의 천연자원에는 설탕, 담배, 어류, 감귤류, 커피, 콩, 쌀, 감자, 가축 등이 있다. 쿠바의 가장 중요한 광물 자원은 니켈로, 2011년 총 수출의 21%를 차지했다. 그해 쿠바 니켈 광산의 생산량은 71,000톤으로 세계 생산량의 약 4%에 달했다. 2013년 현재 매장량은 550만 톤으로 추정되며, 이는 세계 총 매장량의 7% 이상이다. 캐나다의 셰릿 인터내셔널은 모아에서 대규모 니켈 채굴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쿠바는 또한 니켈 채굴의 부산물인 정제된 코발트의 주요 생산국이다.
2005년 미국 지질조사국의 석유 탐사 결과 북부 쿠바 분지에서 약 46.00 억 oilbbl에서 93.00 억 oilbbl의 석유를 생산할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2006년 쿠바는 가능한 개발을 위해 이 지역들에 대한 시추 시험을 시작했다.
6.2. 관광


관광은 초기에 관광객들이 쿠바 사회와 분리되는 고립된 리조트로 제한되었으며, 이를 "엔클레이브 관광" 및 "관광 아파르트헤이트"라고 불렀다. 외국인 방문객과 일반 쿠바인 간의 접촉은 1992년에서 1997년 사이에 사실상 불법이었다. 특별 기간 동안 관광 산업의 급속한 성장은 쿠바에 광범위한 사회적, 경제적 파급 효과를 가져왔으며, 이중 경제의 출현에 대한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190만 명의 관광객이 2003년 쿠바를 방문했으며, 주로 캐나다와 유럽 연합 출신으로 미화 21억 달러의 수익을 창출했다. 쿠바는 2011년에 268만 8천 명의 국제 관광객을 기록하여 카리브해에서 세 번째로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도미니카 공화국과 푸에르토리코 다음).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인해 미국인 관광은 극도로 제한되었으나, 2016년 대부분의 제한이 완화되었지만 일부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의료 관광 부문은 매년 수천 명의 유럽, 라틴 아메리카, 캐나다, 미국 소비자를 유치한다.
2018년 연구에 따르면 쿠바는 등산 활동에 대한 잠재력이 있으며, 등산은 자전거 타기, 다이빙, 동굴 탐험과 같은 다른 활동과 함께 관광의 핵심 기여자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자원을 홍보하면 지역 개발, 번영 및 복지에 기여할 수 있다.
쿠바 법무부 장관은 광범위한 성 관광 혐의를 경시한다. 캐나다 정부 여행 정보 웹사이트에 따르면, "쿠바는 아동 성 관광을 방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으며, 캐나다인을 포함한 다수의 관광객이 16세 미만 미성년자 부패와 관련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징역형은 7년에서 25년이다."
2017년 9월 8일 허리케인 어마가 섬을 강타했을 때 일부 관광 시설이 광범위하게 손상되었다. 폭풍은 카마궤이 군도에 상륙했으며, 가장 큰 피해는 본섬 북쪽의 산호초 지대에서 발생했고 가장 중요한 관광 지역은 아니었다.
6.3. 교통
철도는 설탕 운송의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며, 국토 중앙을 동서로 관통하는 고속도로가 건설되어 있다. 수도 아바나에서는 국영 항공사인 쿠바나 항공이 여러 국내선 및 멕시코, 스페인, 러시아 등지로 향하는 정기 국제 항공편을 운항하고 있으며, 다수의 외국 항공사도 취항하고 있다.
7. 사회
7.1. 인구
2010년 공식 인구 조사에 따르면 쿠바의 인구는 11,241,161명으로 남성 5,628,996명, 여성 5,612,165명이었다. 2006년 출생률(인구 1,000명당 9.88명)은 서반구에서 가장 낮은 수준 중 하나이다. 1961년 이후 쿠바 인구는 약 400만 명 증가했지만, 그 기간 동안 성장률은 둔화되었고, 2006년부터는 낮은 출산율(여성 1인당 1.43명)과 이민으로 인해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주요 도시로는 아바나(수도), 산티아고데쿠바, 카마궤이, 올긴 등이 있다.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상당수의 쿠바인이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이로 인해 크고 영향력 있는 재외동포 사회가 형성되었다. 특히 1980년 마리엘 보트리프트와 1994년 쿠바 뗏목 위기 때 대규모 이주가 발생했다. 2013년 쿠바 정부는 시민들의 해외여행 제한을 완화했으나, 최근 몇 년간 경제난 심화로 다시 이민이 급증하여 2022-2023년에는 인구의 2%에 달하는 약 25만 명이 미국으로 이주하는 등 기록적인 수준을 보이고 있다.
7.2. 민족

쿠바의 인구는 복잡한 식민지 기원을 반영하여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양한 집단 간의 결혼이 널리 퍼져 있으며, 결과적으로 국가의 인종 구성에 대한 보고서에는 약간의 불일치가 있다. 마이애미 대학교 쿠바 및 쿠바계 미국인 연구소는 단일 혈통 규칙을 사용하여 쿠바인의 62%가 흑인이라고 판단한 반면, 2002년 쿠바 인구 조사에서는 인구의 비슷한 비율인 65.05%가 백인인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소수자 권리 단체 인터내셔널은 "아프리카계 쿠바인의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기록 부족과 혁명 전후의 체계적인 연구 부족으로 인해 여전히 문제가 있다. 쿠바 인구에서 아프리카계 후손의 비율 추정치는 34%에서 62%까지 매우 다양하다"고 밝혔다.
2014년 연구에 따르면, 조상 정보 표지자(AIM)를 기준으로 쿠바의 상염색체 유전적 조상은 유럽인 72%, 아프리카인 20%, 원주민 8%이다.
아시아인은 인구의 약 1%를 차지하며, 주로 중국계이고, 그 다음이 일본계와 필리핀계이다. 다수는 19세기와 20세기 초 스페인과 미국 계약업자들이 섬으로 데려온 농장 노동자들의 후손이다. 현재 기록된 중국계 쿠바인 수는 114,240명이다.
아프리카계 쿠바인은 주로 요루바족, 콩고 분지의 반투족, 칼라바리족과 다호메이의 아라라족, 그리고 서사하라의 사하라위 아랍인을 포함한 수천 명의 북아프리카 난민의 후손이다.
7.3. 언어
쿠바의 공용어는 스페인어이며 대다수의 쿠바인이 사용한다. 쿠바에서 사용되는 스페인어는 쿠바 스페인어로 알려져 있으며 카리브 스페인어의 한 형태이다. 서아프리카 언어인 요루바어의 방언인 루쿠미어는 산테리아 신자들이 전례 언어로도 사용하며, 따라서 제2언어로만 사용된다. 아이티 크레올어는 쿠바에서 두 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언어이며, 아이티인 이민자와 그 후손들이 사용한다. 이민자들이 사용하는 다른 언어로는 갈리시아어와 코르시카어가 있다.
7.4. 종교

2010년 퓨 포럼은 쿠바의 종교 분포를 기독교 59.2%, 무교 23%, 민간 신앙(산테리아 등) 17.4%, 기타 종교 0.4%로 추정했다. 2015년 유니비전이 후원한 조사에서는 쿠바인의 44%가 비종교적이라고 답했고 9%는 답변을 하지 않았으며, 단 34%만이 기독교인이라고 답했다.
쿠바는 공식적으로 세속 국가이다. 종교의 자유는 1980년대를 거치면서 증가했으며, 정부는 1992년 헌법을 개정하여 국가의 무신론적 성격을 삭제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기원을 둔 가장 큰 종교이다. 2006년 인구의 절반 미만이 가톨릭 신자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배적인 신앙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각각 1998년과 2011년에 쿠바를 방문했으며, 교황 프란치스코는 2015년 9월에 쿠바를 방문했다. 각 교황 방문 전에 쿠바 정부는 인도주의적 제스처로 수감자들을 사면했다.
1990년대 정부의 가정 교회에 대한 규제 완화는 오순절주의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이어졌으며, 일부 단체는 최대 10만 명의 신도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산 조직인 쿠바 교회 협의회로 조직된 복음주의 개신교 교단들은 훨씬 더 활기차고 강력하게 남아 있다.
쿠바의 종교 지형은 또한 다양한 종류의 혼합주의로 강력하게 정의된다. 기독교는 종종 산테리아와 함께 실천되는데, 이는 가톨릭과 주로 아프리카 신앙이 혼합된 것으로 여러 컬트를 포함한다. 코브레의 성모(La Virgen de la Caridad del Cobre)는 쿠바의 가톨릭 수호 성인이자 쿠바 문화의 상징이다. 산테리아에서는 오슌 여신과 혼합되었다. 아프리카-쿠바 종교 신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팔로 마욤베 신자 대부분은 흑인과 어두운 갈색 피부였고, 보두 신자 대부분은 중간 갈색과 밝은 갈색 피부였으며, 산테리아 신자 대부분은 밝은 갈색과 흰색 피부였다.
쿠바에는 또한 소수의 유대인(2012년 500명), 무슬림(2011년 6,000명), 바하이 신앙 신자 공동체가 있다.
7.5. 교육

아바나 대학교는 1728년에 설립되었으며, 그 외에도 여러 명문 단과대학 및 종합대학이 있다. 카스트로가 집권하기 직전인 1957년, 유엔에 따르면 쿠바의 식자율은 이 지역에서 거의 80%로 스페인보다 높았지만 네 번째로 낮았다. 카스트로는 전적으로 국가가 운영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사립 기관을 금지했다. 학교 출석은 6세부터 기초 중등 교육(보통 15세)이 끝날 때까지 의무이며, 모든 학생은 연령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학년 수준을 나타내는 색상의 교복을 착용한다. 초등 교육은 6년, 중등 교육은 기초 교육과 예비 대학 교육으로 나뉜다. 쿠바의 식자율은 99.8%로 세계에서 10번째로 높으며, 이는 모든 단계에서 무상 교육을 제공한 덕분이다. 쿠바의 고등학교 졸업률은 94%이다.
고등 교육은 대학교, 고등 전문학교, 고등 교육학 전문학교, 고등 기술 전문학교에서 제공된다. 쿠바 고등 교육부는 농업 노동자를 위해 농촌 지역에서 정규 오후 및 저녁 과정을 제공하는 원격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교육은 정치적, 이념적 강조가 강하며, 고등 교육으로 진학하는 학생들은 쿠바의 목표에 대한 헌신을 기대받는다. 쿠바는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에서 불우한 배경의 외국인들에게 무상 교육을 제공해 왔다.
세계 대학 순위 웹메트릭스에 따르면 쿠바의 최고 순위 대학은 아바나 대학교(세계 1680위), 호세 안토니오 에체베리아 고등 기술 전문학교(2893위), 산티아고데쿠바 대학교(3831위)이다.
7.6. 보건
혁명 이후 쿠바는 무상 공공 의료 시스템을 구축했다.
쿠바의 출생 시 기대 수명은 79.87세(남성 77.53세, 여성 82.35세)이다. 이는 쿠바를 세계 59위,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캐나다, 칠레, 미국에 이어 4위에 해당한다. 영아 사망률은 1957년 생존 출생 1,000명당 32명에서 1990년~95년에는 10명으로 감소했으며, 2000년~2005년에는 6.1명, 2009년에는 5.13명으로 감소했다. 역사적으로 쿠바는 의료 인력 수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했으며 19세기 이래 세계 보건에 상당한 기여를 해왔다. 오늘날 쿠바는 보편적 건강보장을 시행하고 있으며 의료 물품 부족이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료 인력 부족은 없다. 1차 진료는 섬 전체에서 이용 가능하며 영아 및 산모 사망률은 선진국과 비교할 만하다. 쿠바와 같은 가난한 나라가 선진국에 버금가는 보건 성과를 내는 것을 연구자들은 쿠바 보건 역설이라고 부른다. 쿠바는 2019년 블룸버그 가장 건강한 국가 지수에서 30위를 차지하여 개발도상국 중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의료 서비스로 유명한 쿠바 의료 시스템은 국제 임무를 통해 의료 전문가 수출을 강조하여 세계 보건 노력에 기여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임무는 상당한 수입을 창출하고 정치적 영향력의 도구로 사용되지만, 국내적으로 쿠바는 약물 부족과 현지인과 외국인 간의 의료 서비스 격차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임무에서 얻는 수입에도 불구하고 국가 예산의 극히 일부만이 공중 보건에 할당되어 국가 의료 전략 내 우선순위의 대조를 강조한다.
1960년대 혁명 직후 쿠바 의사 6,000명 중 절반이 나라를 떠나면서 질병과 영아 사망률이 증가했다. 1980년대에는 회복되었고, 쿠바의 의료 서비스는 널리 찬사를 받았다. 공산주의 정부는 보편적 의료 서비스가 국가 계획의 우선순위라고 밝혔으며 농촌 지역에서 진전이 이루어졌다. 혁명 후 정부는 농촌 병원을 1개에서 62개로 늘렸다. 쿠바 경제의 나머지 부분과 마찬가지로 의료 서비스는 1991년 소련 보조금 종료와 1992년 미국 금수 조치 강화 이후 심각한 물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문제점으로는 의사들의 낮은 급여, 열악한 시설, 장비 부족, 필수 의약품의 잦은 부재 등이 있다.
쿠바는 세계에서 인구 대비 의사 비율이 가장 높으며 전 세계 40개국 이상에 수천 명의 의사를 파견했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쿠바는 "필요한 다른 나라들을 도울 수 있는 훌륭한 의사와 간호사를 훈련시키는 능력으로 전 세계에 알려져 있다". 2014년 9월 현재 약 5만 명의 쿠바 훈련을 받은 의료 종사자들이 66개국을 지원하고 있다. 쿠바 의사들은 서아프리카 에볼라 바이러스 유행 퇴치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예방 의학은 쿠바 의료 시스템 내에서 매우 중요하며, 시민들에게 정기 건강 검진을 쉽게 받을 수 있도록 제공한다.
의약품 수입 및 수출은 기초 산업부(MINBAS) 산하의 퀴메파 제약 사업 그룹(FARMACUBA)에서 담당한다. 이 그룹은 또한 이러한 의약품 생산을 위한 기술 정보도 제공한다. 미국의 금수 조치로 서방과 단절된 쿠바는 성공적인 폐암 백신인 시마박스를 개발했으며, 이는 다른 새로운 쿠바 암 치료법과 함께 처음으로 미국 연구자들에게 제공되고 있다. 이 백신은 2011년부터 쿠바 국민에게 무료로 제공되고 있다. 로스웰 파크 종합 암센터 CEO 캔디스 존슨에 따르면, "그들은 적은 것으로 더 많은 것을 해야 했기 때문에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더욱 혁신적이어야 했다. 40년 이상 동안 그들은 뛰어난 면역학 공동체를 보유해 왔다." 오바마 행정부 하에서 2014년 12월부터 시작된 쿠바-미국 관계 해빙 기간 동안, 백신 치료를 받기 위해 쿠바로 여행하는 미국 폐암 환자 수가 증가했다.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 해빙이 끝나면서 여행 제한이 강화되어 미국 시민들이 치료를 위해 쿠바로 여행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2015년 쿠바는 HIV와 매독의 모자간 수직감염을 근절한 최초의 국가가 되었으며, 이는 세계보건기구로부터 "가능한 가장 위대한 공중 보건 성과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았다.
7.6.1. 쿠바 가정의 식단과 영양
쿠바 가정의 전통적인 식단은 미량 영양소와 다양성 부족으로 국제적인 우려를 낳고 있다. 유엔 산하 기구인 세계 식량 계획(WFP)에 따르면, 쿠바의 평균 식단은 적절한 영양 품질이 부족하다. 이는 영양이 풍부한 식품의 제한된 가용성, 사회경제적 문제, 열악한 식습관 등 다양한 요인에 기인한다. WFP의 쿠바 연례 보고서는 이전의 증언과 증거를 뒷받침하며 우려스러운 상황을 지적한다. 쿠바가 WFP의 지원을 받는 등 식량 보조 프로그램을 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식단은 여전히 영양적으로 불충분하다. 구체적으로, 배급되는 식량은 14세에서 60세 사이 인구의 일일 에너지, 단백질, 지방 요구량의 극히 일부만 충족시킨다.
이러한 결핍은 설탕과 염분 함량이 높은 식단으로 인해 과체중과 비만과 같은 건강 문제로 이어졌다. 또한, 적절한 영양 섭취에 있어 상당한 불균형이 존재한다. 외화와 송금에 접근할 수 없는 개인들이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권장 영양 요구량을 충족시키기에 최저 임금이 불충분하다는 점도 보고서에서 강조된 또 다른 우려 사항이다. 정치적, 사회경제적 상황이 이러한 시나리오에 영향을 미쳤다. 많은 식량 보조금을 없앤 경제 개혁인 "타레아 오르데나미엔토" 시행은 놀라운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여 곡물, 채소, 유제품, 육류와 같은 기본 식품 부족을 심화시켰다. 결과적으로 쿠바 가정은 소득의 55%에서 65%를 식비에 지출하며, 이는 국제 기준에 비해 불균형적인 비율로 간주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보고서는 사회 보호 및 기본 서비스에 대한 보편적 접근과 같은 분야에서 쿠바 정부의 노력을 인정한다. 2021년-2022년 인간 개발 보고서에서 쿠바의 위치와 광범위한 코로나19 예방 접종 범위를 강조한다. 식량 안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WFP는 쿠바 당국과의 협력을 강화했다. 2022년, 이 기구는 유아 빈혈 유병률에 대한 놀라운 수치에 대응하여 1,070만 달러 상당의 필수 식품과 다량 영양소를 조달했다.
이러한 영양 위기 속에서, 쿠바 국민을 괴롭히는 식량 및 영양 문제를 완화하기 위한 국제적 개입과 협력이 기대된다.
8. 문화

쿠바 문화는 주로 스페인, 서아프리카, 그리고 원주민인 과나하타베이족과 타이노족의 문화가 융합된 영향을 받았다. 1959년 혁명 이후 정부는 전국적인 문맹 퇴치 운동을 시작했고, 모든 사람에게 무상 교육을 제공했으며, 엄격한 스포츠, 발레, 음악 프로그램을 설립했다.
8.1. 건축

쿠바의 건축은 주로 식민지 시대에 나타났다. 바로크 양식의 영향을 받은 스페인 문화를 들여왔다. 최초의 빌라(정착촌)는 여러 채의 집으로 둘러싸인 교회로 구성되었다. 이 집들은 내부 또는 중앙 안뜰이 있었고 격자로 덮여 있었다. 아바나의 산프란시스코 대성당과 같은 웅장한 종교 건물이 있다. 또한 해적과 해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방어를 위한 대규모 요새가 건설되었다. 쿠바에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건설된 여러 오래된 역사 지구가 있으며, 가장 주목할 만한 곳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네 도시인 아바나, 카마궤이, 시엔푸에고스, 트리니다드로, 바로크, 신고전주의에서 절충주의 예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흐름과 경향의 훌륭한 건축적 요새와 산티아고데쿠바, 마탄사스, 레메디오스와 같은 기타 보존된 식민 도시가 있다.
공화국 시대에는 워싱턴 D.C.의 국회의사당을 모델로 한 국회의사당과 같은 대형 건물과 폭사 빌딩, 아바나 힐튼(나중에 아바나 리브레)과 같은 기타 대형 건물이 건설되었다. 20세기 후반의 가장 뛰어난 쿠바 건축가 중 한 명은 안토니오 킨타나 시모네티였다.
혁명 승리 후 건축은 대칭과 공간 절약에 대한 열망과 함께 소련의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모스크바나 민스크의 노동자 계급 구역 스타일로 완전히 새로운 동네가 건설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건축은 더욱 다양한 흐름을 받아들였고, 맨해튼이나 멕시코시티 또는 카라카스와 같은 다른 라틴 아메리카 대도시의 현대적인 마천루 스타일로 인상적인 유리와 강철 외관을 갖춘 5성급 호텔이 붐을 이루었다.
8.2. 문학
쿠바 문학은 19세기 초에 그 목소리를 찾기 시작했다. 독립과 자유라는 지배적인 주제는 쿠바 문학에서 모더니즘 운동을 이끈 호세 마르티에 의해 예시되었다. 니콜라스 기옌과 호세 Z. 타예트와 같은 작가들은 사회적 저항으로서의 문학에 집중했다. 둘세 마리아 로이나스와 호세 레사마 리마의 시와 소설은 영향력이 컸다. '모두가 쿠바를 꿈꿨다'를 쓴 낭만주의자 미겔 바르네트는 더 우울한 쿠바를 반영한다.
알레호 카르펜티에르는 마술적 사실주의 운동에서 중요했다. 레이날도 아레나스, 기예르모 카브레라 인판테, 다이나 차비아노, 페드로 후안 구티에레스, 소에 발데스, 기예르모 로살레스, 레오나르도 파두라와 같은 작가들은 혁명 이후 시대에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지만, 이들 중 다수는 쿠바 당국의 언론에 대한 이념적 통제로 인해 망명지에서 작업을 계속해야 했다. 그러나 낸시 모레혼을 포함한 일부 쿠바 작가들은 쿠바에서 계속 생활하며 글을 쓰고 있다.
8.3. 음악


쿠바 음악은 매우 풍부하며 쿠바 문화의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표현이다. 이 음악의 중심 형태는 손으로, "단손 데 누에보 리트모", 맘보, 차차차, 살사 음악과 같은 많은 다른 음악 스타일의 기초가 되었다. 룸바("데 카혼 오 데 솔라르") 음악은 초기 아프리카-쿠바 문화에서 시작되어 스페인 스타일 요소와 혼합되었다. 트레스는 스페인 현악기 모델(이 악기는 실제로 스페인 기타와 류트의 요소가 융합된 것)에서 쿠바에서 발명되었다. 다른 전통적인 쿠바 악기는 아프리카 기원, 타이노족 기원 또는 둘 다이며, 마라카스, 귀로, 마림불라 및 마요우아칸을 포함한 다양한 나무 드럼이 있다.
모든 스타일의 인기 있는 쿠바 음악은 전 세계적으로 널리 즐겨지고 찬사를 받아왔다. 강력한 아프리카 및 유럽 영향을 포함하고 교향곡 작품과 독주자를 위한 음악을 특징으로 하는 쿠바 클래식 음악은 에르네스토 레쿠오나와 같은 작곡가 덕분에 국제적인 찬사를 받았다. 아바나는 1990년대에 시작된 쿠바의 랩 현장의 중심지였다. 2012년 12월, 쿠바 음악 연구소 소장 올랜도 비스텔은 성적으로 노골적인 노래와 뮤직 비디오를 공영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금지하겠다고 위협했다.
8.4. 무용
쿠바 문화는 광범위한 춤 형식을 포함한다. 단손은 쿠바의 공식적인 음악 장르이자 춤이었다. 맘보 음악과 춤은 원래 쿠바에서 발전했으며, 멕시코와 미국의 쿠바 음악가들에 의해 더욱 중요한 발전을 이루었다. 차차차는 쿠바에서 유래한 또 다른 춤이며, 쿠바 볼레로는 19세기 말 산티아고데쿠바에서 시작되었다. 공연 무용은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쿠바 국립 발레단과 같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단체를 포함한다.
살사 춤은 쿠바에서 시작되었으며 쿠바 살사는 전 세계적으로 춤춰진다.
8.5. 대중 매체
ETECSA는 2013년 전국에 118개의 PC방을 열었다. 쿠바 정부는 "위키" 형식으로 운영되는 EcuRed라는 온라인 백과사전 웹사이트를 제공한다. 인터넷 접속은 통제되며 이메일은 면밀히 감시된다.
2018년부터 모바일 데이터를 통한 인터넷 접속이 가능해졌다. 2019년에는 710만 명의 쿠바인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었다. 와이파이 존, 모바일 데이터 또는 "나우타 호가르" 서비스를 통한 집에서의 인터넷 접속 가격은 특히 2021년 1월 경제 개혁 이후 모든 급여가 최소 5배 인상되고 인터넷 가격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하락해 왔다. 2021년에는 770만 명의 쿠바인이 인터넷에 접속한다고 보고되었다. 2021년 1월 쿠바에는 614만 개의 모바일 연결이 있었다.
8.6. 요리

쿠바 요리는 스페인 요리와 카리브 요리가 융합된 것이다. 쿠바 요리법은 스페인 요리와 향신료 및 기술을 공유하며, 향신료와 풍미 면에서 일부 카리브해의 영향을 받았다. 지난 40년 동안 쿠바에서 일반적이었던 식량 배급은 이러한 요리의 일반적인 가용성을 제한한다. 전통적인 쿠바 식사는 코스로 제공되지 않으며, 모든 음식은 동시에 제공된다.
일반적인 식사는 플랜틴, 검은콩과 쌀, 로파 비에하(잘게 썬 소고기), 쿠바 빵, 양파를 곁들인 돼지고기, 열대 과일로 구성될 수 있다. 모로스 이 크리스티아노스(또는 줄여서 모로스)라고 불리는 검은콩과 쌀, 그리고 플랜틴은 쿠바 식단의 주식이다. 많은 고기 요리는 가벼운 소스와 함께 천천히 조리된다. 마늘, 커민, 오레가노, 월계수 잎이 지배적인 향신료이다.
8.7. 스포츠
미국과의 역사적 연관성으로 인해 많은 쿠바인들은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서 전통적으로 행해지는 스포츠보다는 북미에서 인기 있는 스포츠에 참여한다. 야구가 가장 인기가 많다. 다른 인기 스포츠로는 배구, 권투, 육상, 레슬링, 농구, 수상 스포츠가 있다. 쿠바는 아마추어 권투에서 지배적인 세력으로, 주요 국제 대회에서 지속적으로 높은 메달 수를 기록하고 있다. 권투 선수 란세스 바르텔레미와 에리슬란디 라라는 각각 미국과 멕시코로 망명했다. 쿠바는 또한 올림픽에 참가하는 국가대표팀을 보유하고 있다. 호세 R. 카파블랑카는 1921년부터 1927년까지 쿠바의 세계 체스 챔피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