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알렉시스 아르게요는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과에서 빈곤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찍부터 노동에 뛰어들었다. 그의 어린 시절 경험은 그가 복싱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알렉시스 아르게요는 1952년 4월 19일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공이었고 어머니의 이름은 조일라였다. 그는 마나과에서 극심한 빈곤 속에서 자라며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5살 때 아버지가 자살을 시도했고, 9살 때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낙농장에서 일하려고 집을 떠났다. 13살에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캐나다로 이민을 가기도 했다. 십대 시절 내내 거리 싸움에 끊임없이 휘말렸지만, 7명의 형제자매 중 한 명인 누나 마리나가 복싱 선수와 결혼하면서 어린 아르게요는 복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형 에두아르도 호세는 한때 니카라과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여겨졌으며,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을 정도였다.
1.2. 아마추어 경력
프로 데뷔 이전에 아르게요는 짧은 아마추어 복싱 경력을 쌓았으며, 총 58승 2패의 기록을 남겼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가 프로 선수로서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프로 복싱 경력
알렉시스 아르게요는 1968년부터 1995년까지 활동하며 세 체급을 석권한 세계 챔피언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싱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링 위에서 자신의 세계 타이틀을 한 번도 잃지 않고, 더 높은 체급의 타이틀을 추구하기 위해 매번 자발적으로 타이틀을 반납했다.
2.1. 페더급 챔피언
아르게요는 1968년 10월 26일 전직 복싱 선수 미겔 앙헬 리바스의 지도를 받으며 프로에 데뷔했다. 첫 세 경기를 승리한 후, 그는 4라운드 KO 패배와 스플릿 판정 패배를 연이어 겪었다. 그러나 이후 5년간 30경기 중 29승을 거두며 호세 레그라를 꺾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결국 아르게요는 노련한 WBA 페더급 챔피언 에르네스토 마르셀과의 세계 타이틀전을 얻게 되었다. 이 경기는 마르셀의 고향인 파나마에서 열렸으며, 어린 도전자 아르게요는 15라운드 만장일치 판정패를 당했다. 이는 마르셀의 은퇴 경기였다. 마르셀이 은퇴한 지 몇 달 후, WBA 페더급 타이틀은 전 밴텀급 통합 챔피언 루벤 올리바레스가 획득했다.
아르게요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연승 행진을 이어갔고, 올리바레스의 첫 방어전 상대로 WBA 페더급 타이틀에 다시 도전하게 되었다. 이 경기는 1974년 11월 2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잉글우드의 더 포럼에서 열렸다. 올리바레스가 심판 채점표에서 약간의 리드를 잡고 있던 13라운드, 아르게요와 올리바레스는 동시에 왼손 훅을 날렸다. 올리바레스의 왼손 훅은 아르게요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표정을 안겼지만, 아르게요의 왼손 훅은 올리바레스를 캔버스에 강하게 쓰러뜨렸다. 몇 초 후, 아르게요는 새로운 페더급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아르게요의 첫 방어전은 베네수엘라 페더급 챔피언 레오넬 에르난데스를 상대로 치러졌다. 이 경기는 카라카스에서 열려 아르게요는 다시 적지에서 싸웠지만, 8라운드 TKO로 도전자에게 쉽게 승리했다. 니카라과에서 치른 첫 방어전은 리고베르토 리아스코를 상대로 했으며, 아르게요는 다시 압도적인 경기를 펼쳐 2라운드에 리아스코를 제압했다. 다음 상대는 당시 무패를 기록하던 일본의 유망주 로열 고바야시였다. 긴장감 넘치는 접전 끝에 아르게요의 끊임없는 보디 블로우가 5라운드 중반 고바야시를 무너뜨렸고, 도전자는 두 번이나 캔버스에 쓰러졌다. 1975년 10월 12일 일본 도쿄의 구라마에 고쿠기칸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아르게요는 5라운드 2분 47초 KO승을 거두며 타이틀을 방어했다.
2.2. 주니어 라이트급 챔피언
네 번째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아르게요는 체급을 올려 푸에르토리코 바야몬에서 세계 주니어 라이트급 챔피언 알프레도 에스칼레라에게 도전했다. 이 경기는 많은 이들에게 '바야몬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에스칼레라는 10차례의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치른 바쁜 챔피언이었고, 도쿄에서 시바타 구니아키를 2라운드 만에 제압한 바 있었다. 일부 전문가들(링 매거진 기자 포함)이 역사상 가장 잔혹한 싸움 중 하나로 꼽는 이 경기에서 에스칼레라는 초반에 눈, 입, 코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지만, 채점표에서 다시 추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르게요는 13라운드에 다시 한번 에스칼레라를 쓰러뜨리며 승리했다. 1978년 1월 28일 열린 이 승리로 아르게요는 WBC 주니어 라이트급 챔피언이 되었다.
주니어 라이트급 챔피언으로서의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이탈리아 리미니에서 열린 에스칼레라와의 재대결에서 승리했으며, 전 세계 챔피언이자 미래의 세계 챔피언인 보비 차콘, 미래의 2회 세계 챔피언 라파엘 리몬, 루벤 카스티요, 미래의 챔피언 롤란도 나바레테, 그리고 단 1라운드 만에 제압한 디에고 알칼라 등 수많은 도전자들의 도전을 물리쳤다.
에스칼레라와의 두 번째 승리에서 아르게요는 얼굴에 많은 상처를 입었다. 현장 의사는 그를 입원시키고 싶어 했지만, 아르게요는 다음 날 로마에서 니카라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기에 리미니에서 기차에 탑승했다. 의사는 아르게요와 동행하기로 결정했고, 아르게요가 깨어있는 상태에서 그의 상처에 성형수술을 시행했다.
2.3. 라이트급 챔피언
성공적인 8차례의 타이틀 방어 후, 아르게요는 다시 체급을 올려 영국 런던으로 가서 세계 라이트급 챔피언 짐 와트에게 도전했다. 와트는 15라운드까지 버텼지만, 심판들은 아르게요에게 15라운드 만장일치 판정승을 주었다. 이로써 그는 세 체급에서 세계 타이틀을 획득한 역대 6번째 복싱 선수가 되었고, 윌프레도 베니테스가 한 달 전에 모리스 호프를 꺾고 첫 번째 라틴 아메리카 선수가 된 이후 두 번째로 이 위업을 달성한 라틴 아메리카 선수가 되었다. 이 경기는 1981년 6월 20일 웸블리 아레나에서 열렸다.
그는 이 체급에서 몇몇 덜 알려진 도전자들과 맞서야 했지만, 유명한 유망주 레이 맨시니 (별명 "붐 붐")는 예외였다. 맨시니와 아르게요는 1980년대 최고의 경기 중 하나로 꼽히는 경기를 펼쳤으며, 아르게요는 14라운드에 맨시니를 쓰러뜨리며 TKO 승을 거두었다. 경기 후, 아르게요는 맨시니를 포옹하고 CBS 텔레비전 시청자들에게 당시 병으로 고생하던 맨시니의 아버지를 돕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하며 많은 미국 팬들을 얻었다. 앤드루 개니건은 아르게요의 가장 힘든 도전 중 한 명으로, 2라운드에 아르게요를 다운시켰지만, 결국 챔피언은 5라운드에 개니건을 제압하며 승리했다.
2.4. 상위 체급 도전
아르게요는 라이트급 타이틀을 네 차례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제임스 '부바' 부세미를 6라운드 TKO로 꺾은 후, 아르게요는 다시 체급을 올리기로 결정했고, 1982년 11월 12일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챔피언들의 전투'로 불린 경기에서 더 무거운 체급의 미래 명예의 전당 헌액자 아론 프라이어를 만나 네 번째 체급에서 세계 챔피언이 되기 위한 도전을 시도했다.
2.4.1. 아론 프라이어와의 대결
아르게요는 아론 프라이어와의 첫 대결에서 14라운드에 TKO 패배를 당했다. 이 경기는 프라이어의 트레이너인 파나마 루이스가 13라운드 이후 "내가 섞은 병"이라고 묘사한 두 번째 물병을 들고 나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물병에 금지 약물이 섞여 있었다는 추측이 제기되었고, 플로리다주 복싱 위원회가 경기 후 소변 검사를 실시하지 않아 이러한 의혹은 더욱 증폭되었다. 루이스는 여러 차례 이 물병에 페퍼민트 슈냅스나 페리에가 들어있어 프라이어의 속쓰림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중에 루이스에게 훈련받았던 전 복싱 선수 루이스 레스토와의 인터뷰에서 루이스가 천식 치료에 사용되는 항히스타민 알약을 부수어 물에 섞어 넣었고, 이는 루이스의 선수가 경기 후반 라운드에서 더 큰 폐활량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른 이들은 이 물병에 코카인, 꿀, 오렌지 주스가 섞여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재대결이 결정되었다. 이번에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경기에서 아르게요는 10라운드에 KO패를 당했으며, 경기 후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재정적인 이유로 다시 링으로 돌아왔다.
2.5. 복귀와 은퇴
1980년대 동안 아르게요는 잠시 고향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과 함께 싸웠지만, 몇 달간의 정글 생활 후 전쟁에서 물러났다. 당시 산디니스타 민족 해방 전선 정권은 그의 재산을 몰수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여러 차례 복싱 복귀를 시도했고, 일부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1986년 텔레비전 중계된 경기에서 전 세계 주니어 웰터급 챔피언 빌리 코스텔로를 4라운드 TKO로 꺾으며 다시 주니어 웰터급 타이틀 도전 기회를 잡았다.
그는 1995년 최종적으로 은퇴했으며, 총 82승 8패 65KO의 전적을 기록했다. 그는 팬, 전문가, 복싱 선수들 사이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존경받는 선수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1992년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8년에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니카라과 선수단의 기수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는 또한 당시 12세였던 로만 곤살레스를 지도하기도 했다. 아르게요는 심장병 진단을 받은 후 한동안 선수 생활을 중단하고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는 여러 차례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으며, 경제적 어려움과 코카인 중독,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충동을 고백하기도 했다.
2.6. 복싱 기록 및 타이틀
알렉시스 아르게요의 총 프로 전적은 90전 82승 (65KO) 8패이다.
번호 | 결과 | 전적 | 상대 | 유형 | 라운드, 시간 | 날짜 | 장소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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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 패 | 77-8 | 스콧 워커 | UD | 10 | 1995년 1월 21일 |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애리조나 찰리스 디케이터 | |
84 | 승 | 77-7 | 호르헤 팔로마레스 | MD | 10 | 1994년 8월 27일 |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비치 컨벤션 센터 | |
83 | 승 | 76-7 | 빌리 코스텔로 | TKO | 4 (10), 1:42 | 1986년 2월 9일 | 미국 네바다주 리노 롤러 이벤트 센터 | |
82 | 승 | 75-7 | 팻 제퍼슨 | TKO | 5 (10), 2:47 | 1985년 10월 25일 | 미국 알래스카주 앵커리지 설리번 아레나 | |
81 | 패 | 74-7 | 아론 프라이어 | KO | 10 (15), 1:48 | 1983년 9월 9일 | 미국 네바다주 패러다이스 시저스 팰리스 | WBA 및 더 링 라이트 웰터급 타이틀전 |
80 | 승 | 74-6 | 클로드 노엘 | TKO | 3 (10), 0:37 | 1983년 4월 24일 | 미국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 쇼보트 애틀랜틱시티 | |
79 | 승 | 73-6 | 빌로마르 페르난데스 | UD | 10 | 1983년 2월 26일 | 미국 텍사스주 샌안토니오 프리먼 콜리세움 | |
78 | 패 | 72-6 | 아론 프라이어 | TKO | 14 (15), 1:06 | 1982년 11월 12일 |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마이애미 오렌지 볼 | WBA 및 더 링 라이트 웰터급 타이틀전 |
77 | 승 | 72-5 | 케빈 루니 | KO | 2 (10), 3:07 | 1982년 7월 31일 | 미국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 밸리스 파크 플레이스 | |
76 | 승 | 71-5 | 앤드루 개니건 | KO | 5 (15), 3:09 | 1982년 5월 22일 | 미국 네바다주 패러다이스 알라딘 | WBC 및 더 링 라이트급 타이틀 방어 |
75 | 승 | 70-5 | 제임스 부세미 | TKO | 6 (15), 2:35 | 1982년 2월 13일 | 미국 텍사스주 보몬트 시빅 센터 | WBC 및 더 링 라이트급 타이틀 방어 |
74 | 승 | 69-5 | 로베르토 엘리존도 | KO | 7 (15), 3:07 | 1981년 11월 21일 |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쇼보트 호텔 앤 카지노 | WBC 및 더 링 라이트급 타이틀 방어 |
73 | 승 | 68-5 | 레이 맨시니 | TKO | 14 (15), 1:44 | 1981년 10월 3일 | 미국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 밸리스 파크 플레이스 | WBC 및 더 링 라이트급 타이틀 방어 |
72 | 승 | 67-5 | 짐 와트 | UD | 15 | 1981년 6월 20일 | 영국 런던 웸블리 아레나 | WBC 및 더 링 라이트급 타이틀 획득 |
71 | 승 | 66-5 | 로버트 바스케스 | TKO | 3 (10), 2:55 | 1981년 2월 7일 |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비치 컨벤션 센터 | |
70 | 승 | 65-5 | 호세 루이스 라미레스 | SD | 10 | 1980년 11월 14일 |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마이애미 하이알라이 프론톤 | |
69 | 승 | 64-5 | 코넬리우스 보자-에드워즈 | TKO | 8 (10) | 1980년 8월 9일 | 미국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 스틸 피어 | |
68 | 승 | 63-5 | 롤란도 나바레테 | RTD | 4 (15), 3:00 | 1980년 4월 27일 | 푸에르토리코 산후안 히람 비토른 스타디움 | WBC 슈퍼 페더급 타이틀 방어 |
67 | 승 | 62-5 | 제럴드 헤이스 | UD | 10 | 1980년 3월 31일 | 미국 네바다주 패러다이스 시저스 팰리스 | |
66 | 승 | 61-5 | 루벤 카스티요 | TKO | 11 (15), 2:03 | 1980년 1월 20일 | 미국 애리조나주 투손 커뮤니티 센터 | WBC 슈퍼 페더급 타이틀 방어 |
65 | 승 | 60-5 | 보비 차콘 | 코너 은퇴 | 7 (15), 3:00 | 1979년 11월 16일 | 미국 캘리포니아주 잉글우드 더 포럼 | WBC 슈퍼 페더급 타이틀 방어 |
64 | 승 | 59-5 | 라파엘 리몬 | TKO | 11 (15), 1:40 | 1979년 7월 8일 | 미국 뉴욕주 뉴욕시 펠트 포럼 | WBC 슈퍼 페더급 타이틀 방어 |
63 | 승 | 58-5 | 알프레도 에스칼레라 | TKO | 13 (15), 1:24 | 1979년 2월 4일 | 이탈리아 리미니 스포츠 팰리스 | WBC 슈퍼 페더급 타이틀 방어 |
62 | 승 | 57-5 | 아르투로 레온 | UD | 15 | 1978년 11월 10일 | 미국 네바다주 패러다이스 시저스 팰리스 | WBC 슈퍼 페더급 타이틀 방어 |
61 | 패 | 56-5 | 빌로마르 페르난데스 | MD | 10 | 1978년 7월 26일 | 미국 뉴욕주 뉴욕시 매디슨 스퀘어 가든 | |
60 | 승 | 56-4 | 디에고 알칼라 | KO | 1 (15), 1:56 | 1978년 6월 3일 | 푸에르토리코 산후안 로베르토 클레멘테 콜리세움 | WBC 슈퍼 페더급 타이틀 방어 |
59 | 승 | 55-4 | 레이 탐 | TKO | 5 (15), 1:54 | 1978년 4월 29일 | 미국 캘리포니아주 잉글우드 더 포럼 | WBC 슈퍼 페더급 타이틀 방어 |
58 | 승 | 54-4 | 마리오 멘데스 | TKO | 3 (10), 2:00 | 1978년 3월 25일 | 미국 네바다주 패러다이스 시저스 팰리스 | |
57 | 승 | 53-4 | 알프레도 에스칼레라 | TKO | 13 (15), 2:36 | 1978년 1월 28일 | 푸에르토리코 바야몬 후안 라몬 루브리엘 스타디움 | WBC 슈퍼 페더급 타이틀 획득 |
56 | 승 | 52-4 | 엔리케 솔리스 | KO | 5 (10) | 1977년 12월 18일 | 니카라과 마나과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 스타디움 | |
55 | 승 | 51-4 | 제롬 아티스 | TKO | 2 (10) | 1977년 9월 29일 | 미국 뉴욕주 뉴욕시 매디슨 스퀘어 가든 | |
54 | 승 | 50-4 | 벤자민 오르티스 | UD | 10 | 1977년 8월 27일 | 푸에르토리코 산후안 로베르토 클레멘테 콜리세움 | |
53 | 승 | 49-4 | 호세 페르난데스 | TKO | 1 (10), 2:06 | 1977년 8월 3일 | 미국 뉴욕주 뉴욕시 매디슨 스퀘어 가든 | |
52 | 승 | 48-4 | 에세키엘 산체스 | TKO | 4 (10) | 1977년 6월 22일 | 미국 뉴욕주 뉴욕시 매디슨 스퀘어 가든 | |
51 | 승 | 47-4 | 알베르토 에레라 | KO | 1 (10) | 1977년 5월 14일 | 니카라과 마사야 로베르토 클레멘테 스타디움 | |
50 | 승 | 46-4 | 고드프리 스티븐스 | KO | 2 (10) | 1977년 2월 19일 | 니카라과 마사야 로베르토 클레멘테 스타디움 | |
49 | 승 | 45-4 | 살바도르 토레스 | KO | 3 (15), 1:25 | 1976년 6월 19일 | 미국 캘리포니아주 잉글우드 더 포럼 | WBA 및 더 링 페더급 타이틀 방어 |
48 | 승 | 44-4 | 모데스토 콘셉시온 | KO | 2 (10) | 1976년 4월 10일 | 니카라과 마나과 유니버시다드 | |
47 | 승 | 43-4 | 호세 토레스 | SD | 10 | 1976년 2월 1일 | 멕시코 메히칼리 플라사 데 토로스 칼라피아 | |
46 | 승 | 42-4 | 사울 몬타나 | KO | 3 (10) | 1975년 12월 20일 | 니카라과 마나과 폴리데포르티보 에스파냐 | |
45 | 승 | 41-4 | 로열 고바야시 | KO | 5 (15), 2:47 | 1975년 10월 12일 | 일본 도쿄 구라마에 고쿠기칸 | WBA 및 더 링 페더급 타이틀 방어 |
44 | 승 | 40-4 | 로살리오 무로 | TKO | 2 (10), 2:54 | 1975년 7월 18일 | 미국 캘리포니아주 데일리 시티 카우 팰리스 | |
43 | 승 | 39-4 | 리고베르토 리아스코 | TKO | 2 (15), 2:00 | 1975년 5월 31일 | 니카라과 그라나다 에스타디오 론 플로르 데 카나 | WBA 페더급 타이틀 방어; 공석이던 더 링 페더급 타이틀 획득 |
42 | 승 | 38-4 | 레오넬 에르난데스 | TKO | 8 (15), 2:52 | 1975년 3월 15일 |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폴리에드로 데 카라카스 | WBA 페더급 타이틀 방어 |
41 | 승 | 37-4 | 오스카르 아파리시오 | UD | 10 | 1975년 2월 8일 | 엘살바도르 산살바도르 누에보 폴리에드로 | |
40 | 승 | 36-4 | 루벤 올리바레스 | KO | 13 (15), 1:20 | 1974년 11월 23일 | 미국 캘리포니아주 잉글우드 더 포럼 | WBA 페더급 타이틀 획득 |
39 | 승 | 35-4 | 오토니엘 마르티네스 | KO | 1 (10) | 1974년 9월 21일 | 니카라과 마사야 로베르토 클레멘테 스타디움 | |
38 | 승 | 34-4 | 오스카르 아파리시오 | 점수 판정 | 12 | 1974년 8월 24일 | 니카라과 마사야 로베르토 클레멘테 스타디움 | |
37 | 승 | 33-4 | 아트 해피 | KO | 5 (10) | 1974년 5월 18일 | 니카라과 마사야 로베르토 클레멘테 스타디움 | |
36 | 승 | 32-4 | 엔리케 가르시아 | KO | 3 (10) | 1974년 4월 27일 | 니카라과 마나과 아레나 케네디 | |
35 | 패 | 31-4 | 에르네스토 마르셀 | UD | 15 | 1974년 2월 16일 | 파나마 파나마시티 히мна시오 누에보 파나마 | WBA 페더급 타이틀전 |
34 | 승 | 31-3 | 라울 마르티네스 모라 | KO | 1 | 1974년 1월 12일 | 니카라과 마사야 로베르토 클레멘테 스타디움 | |
33 | 승 | 30-3 | 호세 레그라 | TKO | 1 (10) | 1973년 11월 24일 | 니카라과 마사야 로베르토 클레멘테 스타디움 | |
32 | 승 | 29-3 | 시그프리도 로드리게스 | TKO | 9 (10) | 1973년 10월 27일 | 니카라과 마나과 아레나 케네디 | |
31 | 승 | 28-3 | 나초 로멜리 | KO | 1 (10), 2:33 | 1973년 8월 25일 | 니카라과 마사야 로베르토 클레멘테 스타디움 | |
30 | 승 | 27-3 | 옥타비오 고메스 | KO | 2 (10) | 1973년 6월 30일 | 니카라과 마나과 아레나 케네디 | |
29 | 승 | 26-3 | 키드 파스쿠알리토 | TKO | 3 (10) | 1973년 5월 26일 | 니카라과 마나과 아레나 케네디 | |
28 | 승 | 25-3 | 마갈로 로사다 | UD | 10 | 1973년 3월 31일 | 니카라과 마나과 아레나 케네디 | |
27 | 승 | 24-3 | 페르난도 페르난데스 | TKO | 2 | 1973년 2월 24일 | 니카라과 마나과 아레나 케네디 | |
26 | 승 | 23-3 | 라파엘 곤살레스 | TKO | 3 | 1972년 12월 16일 | 니카라과 마나과 아레나 케네디 | |
25 | 승 | 22-3 | 메모 오르티스 | KO | 2 (10) | 1972년 11월 19일 | 니카라과 마나과 아레나 케네디 | |
24 | 승 | 21-3 | 메모 바레라 | TKO | 2 | 1972년 10월 21일 | 니카라과 마나과 아레나 케네디 | |
23 | 승 | 20-3 | 호르헤 베니테스 | KO | 1 | 1972년 9월 9일 | 니카라과 마나과 에스타디오 토마스 크랜쇼 | |
22 | 패 | 19-3 | 호르헤 레예스 | TKO | 6 (10) | 1972년 1월 15일 | 니카라과 마나과 에스타디오 토마스 크랜쇼 | |
21 | 승 | 19-2 | 비센테 워렐 주니어 | KO | 2 (10) | 1971년 12월 18일 | 니카라과 마나과 에스타디오 토마스 크랜쇼 | |
20 | 승 | 18-2 | 레이날도 멘도사 | TKO | 4 | 1971년 10월 10일 | 니카라과 마나과 | |
19 | 승 | 17-2 | 에밀리오 부이트라고 | UD | 10 | 1971년 10월 2일 | 니카라과 마나과 에스타디오 토마스 크랜쇼 | 공석이던 니카라과 밴텀급 타이틀 획득 |
18 | 승 | 16-2 | 카탈리노 알바라도 | KO | 1 | 1971년 8월 14일 | 니카라과 마나과 에스타디오 토마스 크랜쇼 | |
17 | 승 | 15-2 | 에밀리오 부이트라고 | TKO | 5 (10) | 1971년 7월 17일 | 니카라과 마나과 에스타디오 토마스 크랜쇼 | |
16 | 승 | 14-2 | 마르시알 로욜라 | TKO | 2 | 1971년 6월 26일 | 니카라과 마나과 에스타디오 토마스 크랜쇼 | |
15 | 승 | 13-2 | 키드 차풀라 | KO | 1 | 1971년 6월 5일 | 니카라과 마나과 에스타디오 토마스 크랜쇼 | |
14 | 승 | 12-2 | 마우리시오 부이트라고 | KO | 7 (10) | 1971년 5월 1일 | 니카라과 마나과 에스타디오 토마스 크랜쇼 | |
13 | 승 | 11-2 | 훌리오 에르난데스 | UD | 10 | 1971년 4월 17일 | 니카라과 마나과 에스타디오 토마스 크랜쇼 | |
12 | 승 | 10-2 | 훌리오 에르난데스 | UD | 10 | 1971년 3월 13일 | 니카라과 마나과 에스타디오 토마스 크랜쇼 | |
11 | 승 | 9-2 | 안토니오 키로스 | KO | 6 (8), 2:06 | 1971년 2월 13일 | 니카라과 마나과 에스타디오 토마스 크랜쇼 | |
10 | 승 | 8-2 | 아르만도 피게로아 | TKO | 1 | 1970년 12월 19일 | 니카라과 마나과 에스타디오 토마스 크랜쇼 | |
9 | 승 | 7-2 | 훌리오 모랄레스 | KO | 3 | 1970년 12월 5일 | 니카라과 마나과 에스타디오 토마스 크랜쇼 | |
8 | 승 | 6-2 | 호세 우르비나 | KO | 1 | 1970년 11월 14일 | 니카라과 마나과 에스타디오 토마스 크랜쇼 | |
7 | 승 | 5-2 | 마리오 보호르케 | KO | 1 (6) | 1970년 9월 24일 | 니카라과 마나과 에스타디오 토마스 크랜쇼 | |
6 | 승 | 4-2 | 마르셀리노 베클레스 | TKO | 8 (8) | 1970년 9월 24일 | 코스타리카 산호세 히мна시오 나시오날 | |
5 | 패 | 3-2 | 오스카르 에스피노사 | SD | 6 | 1969년 4월 26일 | 니카라과 마나과 에스타디오 토마스 크랜쇼 | |
4 | 패 | 3-1 | 오마르 아마야 | KO | 4 | 1969년 3월 1일 | 니카라과 레온 | |
3 | 승 | 3-0 | 부리토 마르티네스 | TKO | 3 | 1969년 2월 15일 | 니카라과 마나과 에스타디오 토마스 크랜쇼 | |
2 | 승 | 2-0 | 오스카르 에스피노사 | SD | 4 | 1968년 12월 14일 | 니카라과 마나과 에스타디오 토마스 크랜쇼 | |
1 | 승 | 1-0 | 이스라엘 메디나 | KO | 1 (4) | 1968년 10월 26일 | 니카라과 마나과 에스타디오 토마스 크랜쇼 |
알렉시스 아르게요는 다음과 같은 주요 타이틀을 획득했다.
- WBA 페더급 챔피언 (1974년 11월 23일 ~ 1976년 10월 9일, 반납)
- WBC 슈퍼 페더급 챔피언 (1978년 1월 28일 ~ 1980년 11월 1일, 반납)
- WBC 라이트급 챔피언 (1981년 6월 20일 ~ 1983년 2월 15일, 반납)
- 더 링 매거진 페더급 챔피언 (1975년 5월 31일 ~ 1977년 6월 20일, 반납)
- 더 링 매거진 라이트급 챔피언 (1981년 6월 20일 ~ 1983년 2월, 반납)
- 니카라과 밴텀급 챔피언 (1971년 10월 2일 ~ 1974년, 반납)
3. 정치 경력
복싱 선수로서 은퇴한 후, 아르게요는 니카라과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한때 산디니스타 민족 해방 전선과 대립했던 콘트라 반군에 잠시 몸담았으나, 이후 산디니스타 정당으로 입장을 바꾸어 활동했다. 그의 정치적 신념 변화는 니카라과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3.1. 초기 정치 참여
아르게요는 1980년대에 니카라과의 반정부 민병대인 콘트라에 잠시 참여했으나, 몇 달 만에 전쟁에서 물러났다. 이후 그는 과거 자신이 무기를 들고 대항했던 바로 그 정당인 산디니스타 민족 해방 전선(FSLN)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2004년에는 마나과 부시장으로 선출되었다.
3.2. 마나과 시장
2008년 11월 9일, 아르게요는 자신의 고향이자 니카라과의 수도인 마나과의 시장 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며 당선되었다. 그는 친정부 성향의 산디니스타당의 지지를 받았으며, 상대 후보는 2006년 니카라과 대통령 선거에서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에게 패했던 입헌 자유당의 에두아르도 몬테알레그레였다. 아르게요는 득표율 51.30%를 기록하며 간신히 승리했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마나과 시장으로서 여러 행정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그의 당선은 부정 선거 의혹을 불러일으켰고, 아르게요 지지자들과 몬테알레그레 지지자들 간의 충돌로 마나과 시내에서 정치적 소요가 발생하기도 했다.
3.3. 정치적 논란
마나과 시장 당선 과정에서 부정 투표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이로 인해 지지자들 간의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는 등 사회적 파장이 컸다. 또한, 재임 중에는 화려한 해외 시찰로 비판을 받았고, 세금 부정 사용 혐의로 고발되기도 했다. 그는 산디니스타 민족 해방 전선의 정권 운영에 점차 실망감을 느끼고 당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등 정치적 입장 변화와 관련된 비판에 직면했다. 이러한 논란들은 그의 사망 원인을 둘러싼 의혹과도 연결되었다.
4. 연기 경력
복싱 및 정치 활동 외에도 아르게요는 다른 대외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1989년 영화 강철 주먹에서 비중 있는 조연 역할을 맡았다.
5. 개인 생활
아르게요는 여러 차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복잡한 개인사를 겪었다. 그는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으며, 코카인 중독과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충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기도 했다.
6. 사망

아르게요는 2009년 7월 1일 마나과 자택에서 가슴에 두 발의 총상을 입은 채 사망했다. 산디니스타 정권의 통제를 받는 국가 경찰은 사망 직후 이를 확인했으며, 부검 후 자살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경찰은 부검 결과를 공식적으로 공표하지 않았다.
아르게요의 딸 도라 아르게요와 아들들을 포함한 그의 측근들은 그가 다니엘 오르테가 정권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아르게요가 오르테가 정권과 산디니스타 민족 해방 전선에 점점 환멸을 느끼고 있었으며, 곧 산디니스타당을 떠날 계획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살해당했다고 주장했다. 니카라과 현지 신문 또한 자살설에 이견을 제기하는 기사를 게재하며, 아르게요가 부패에 연루되었거나 산디니스타 정권 운영에 실망하여 탈당을 고민했다는 등 다양한 사망 동기 추측이 제기되었다.
7. 유산 및 평가
알렉시스 아르게요는 그의 뛰어난 복싱 경력과 니카라과 사회 및 스포츠계에 미친 영향으로 깊이 기억되고 있다. 그는 '폭발적인 마른 남자'(El Flaco Explosivo스페인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178 cm의 키와 183 cm의 리치를 가졌다.
7.1. 인정 및 순위
아르게요는 복싱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꾸준히 언급되어 왔다. 그는 1992년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더 링 매거진은 그를 '역대 가장 위대한 펀처 100인' 중 20위에 선정했으며, AP 통신은 그를 20세기 세계 최고의 주니어 라이트급 선수로 평가했다. 또한 더 링 매거진은 그를 지난 80년간 가장 위대한 20명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선정했으며, 그는 라틴 아메리카 출신 복서 중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이자 네 개의 다른 십 년 동안 싸운 몇 안 되는 선수 중 한 명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니카라과 선수단의 기수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7.2. 비판 및 논란
아르게요의 삶은 그의 복싱 경력과 정치 활동, 그리고 개인 생활과 관련하여 여러 비판과 논란에 휩싸였다. 정치적으로는 마나과 시장 선거에서의 부정 선거 의혹과 재임 중 발생한 세금 부정 사용 논란이 제기되었다. 또한 그의 사망 원인을 둘러싼 자살과 타살 주장의 대립은 니카라과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개인적으로는 코카인 중독과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충동을 고백하는 등 어두운 면도 있었다. 이러한 논란들은 그의 복잡하고 다면적인 삶을 보여주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