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아르투르 니키슈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이를 발전시켰다.
1.1. 출생과 가족 배경
아르투르 아우구스티누스 아달베르투스 니키슈는 1855년 10월 12일 오스트리아 제국령 헝가리 왕국의 모숀센트미클로시(Mosonszentmiklós헝가리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헝가리인이었고, 어머니 루이제 폰 로보츠(Luise von Lobotz독일어)는 모라비아 출신이었다. 가족이 이주한 후 그는 모라비아 지방의 뷔쇼니츠(Büssönwitz독일어)에서 성장했으며, 헝가리어보다는 독일어를 사용하며 자랐다.
니키슈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신동으로 여겨졌다. 5세 때 학교 교사로부터 피아노와 초보적인 음악 이론을 배웠고, 같은 해부터 바이올린도 연주하기 시작했다. 7세에는 자동 연주 악기인 오케스트리온을 처음 접하고 조아키노 로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와 '윌리엄 텔 서곡', 자코모 마이어베어의 '악마 로베르' 서곡을 들은 뒤, 집에 돌아와 한 번 들은 곡들을 피아노로 완벽하게 재현했다고 한다. 8세에는 피아니스트로 공개 연주회를 열었으며, 당시에는 지기스문트 탈베르크의 오페라 피아노 편곡을 연주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또한 소나타, 콰르텟, 칸타타, 교향곡 등 다양한 곡을 직접 작곡하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보고 정규 학교 교육 대신 가정교사를 두었으며, 이 덕분에 니키슈는 깊은 교양을 쌓고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1.2. 빈 음악원 시절
1866년, 11세의 나이로 빈 음악원에 입학하여 작곡, 피아노,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의 성적은 매우 우수하여 입학 직후 졸업생들에게만 개방되는 상급 작곡반에 편입될 정도였다. 그는 작곡 부문 1등상(수상작은 현악 육중주), 바이올린 부문 1등상, 피아노 부문 2등상 등 음악원의 여러 상을 수상했다. 16세에는 대역으로 빈 궁정 오케스트라와 함께 바이올린 솔로를 연주하기도 했다.

니키슈는 학생 시절부터 다양한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도 활동했다. 1872년에는 스승 요제프 헬메스베르거 2세의 추천으로 리하르트 바그너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베토벤의 교향곡 제3번을 연주했으며, 일주일 후에는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 착공식에서 역시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을 연주했다. 니키슈는 이 경험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회고하며 "바그너가 빈에서 지휘한 '영웅 교향곡'과 바이로이트에서의 '합창 교향곡'은 나의 베토벤 이미지, 나아가 나의 오케스트라 해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바그너는 결코 '숙련된 지휘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움직임' 자체가 이미 음악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1873년에는 빈 궁정 오케스트라에 제2바이올린 연주자로 참여하여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 본인의 지휘로 교향곡 제2번을 연주했다. 그는 이 경험을 회고하며 "나는 이 교향곡을 연주하면서 즉시 감동했다. 그리고 46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이 곡과 다른 교향곡에 대해 같은 감동을 느끼고 있다"고 언급했다.
18세에는 음악원 졸업 연주회에서 처음으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자신의 '교향곡 제1번'을 연주했다. 니키슈는 작곡가로서도 인정받았지만, 훗날 "굳이 옥상옥을 짓지는 않겠다"며 작곡을 그만두었다.
2. 음악 경력
니키슈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시작하여 지휘자로 전향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다.
2.1.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활동
1874년 1월 1일, 니키슈는 빈 궁정 오페라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 그는 프란츠 리스트, 요하네스 브람스, 주세페 베르디, 안톤 루빈시테인 등의 지휘 아래 연주했지만, 오케스트라 생활을 지루하게 느꼈다. 1875년부터 1876년까지 8차례나 무단결근을 했고, 대역을 고용하기 위해 사비까지 쓰는 바람에 종종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했다. 특히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가 연주될 때는 자주 빠졌다.

음악원 시절 니키슈의 작곡 스승이자 궁정 악장이었던 펠릭스 오토 데소프는 니키슈의 이러한 모습을 염려했다. 라이프치히 오페라의 감독이었던 안젤로 노이만으로부터 "라이프치히 시립 극장에서 합창 지휘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자, 데소프는 니키슈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이를 계기로 니키슈는 빈을 떠나 지휘자로서 활동하기로 결심했다.
2.2. 초기 지휘 활동
1878년 니키슈는 라이프치히 오페라의 합창 지휘자로 취임했지만, 4주 만에 악장(카펠마이스터)으로 승진했다. 1878년 2월 11일 폴 라콤브의 오페레타를 암보로 지휘하며 데뷔했으며, "오케스트라와 무대가 마법에 걸린 듯했다"는 평을 들으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데뷔 1년 후 24세의 젊은 나이로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가 되었으나, 첫 리허설에서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너무 어리다"며 반발하여 리하르트 바그너의 '탄호이저' 연주를 거부했다. 잘츠부르크에서 이 반란 소식을 들은 노이만은 "니키슈의 리허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서곡 연주 후 해산해도 좋다"는 전보를 보내 간신히 리허설을 재개시켰다. 그 결과 단원들은 니키슈의 지휘에 감동하여 '탄호이저' 전곡을 연주했다고 한다.
취임 후 10년간 니키슈는 라이프치히 시립 극장을 위해 헌신했으며, 오래된 작품을 새로운 연출로 상연하는 한편,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와 '트리스탄과 이졸데' 같은 새로운 작품들을 무대에 올렸다. 또한 니키슈 시대의 라이프치히 시립 극장에는 이그나츠 브륄, 아우구스트 분게르트 같은 작곡가들이 지휘자로 등장했으며, 특히 자신의 작품 '제킹엔의 트럼펫 연주자'를 지휘한 빅토르 네슬러는 큰 호평을 받았다. 니키슈의 지휘 아래 라이프치히 시립 극장은 독일 오페라 극장의 최고 위치로 도약했다고 평가된다.
니키슈의 수준 향상 덕분에 다른 유능한 지휘자들도 라이프치히 시립 극장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1886년부터 1887년까지는 알렉산더 폰 필리츠가 오페라 지휘자로 활동했으며, 같은 해 구스타프 말러가 부악장으로 부임했다. 니키슈와 말러는 청중의 마음을 크게 사로잡았고 서로 존경심을 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친해지지 못했다. 2년 후 말러가 라이프치히를 떠나자 니키슈도 라이프치히가 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또한 니키슈는 라이프치히 시립 극장의 오케스트라인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연주회에도 자주 등장했다. 1880년에는 로베르트 슈만의 교향곡 제4번을 지휘하여 미망인 클라라 슈만에게 격찬을 받았으며, 1884년에는 이 오케스트라와 함께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7번을 세계 초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3. 주요 지휘 활동
니키슈는 여러 주요 오케스트라에서 음악적 역량을 발휘하며 지휘자로서의 명성을 확립했다.
3.1.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35년간 음악 감독을 맡았던 카를 라이네케가 은퇴한 후, 1895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은 그의 후임으로 니키슈를 선임했다. 니키슈는 라이프치히 청중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이후 25년간 "라이프치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로 불렸다. 라이프치히와의 계약은 후술할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계약과 마찬가지로 니키슈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니키슈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레퍼토리를 크게 확장했다. 라이네케 시대에는 고전 작품과 슈만 작품이 주를 이루고 동시대 음악은 거의 연주되지 않았지만, 니키슈는 프란츠 리스트, 안톤 브루크너, 요하네스 브람스, 표트르 차이콥스키, 리하르트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라이프치히에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1896년에는 자신이 지휘하는 교향곡 제4번 연주회에 작곡가 브람스를 초청했으며, 1919년부터 1920년 시즌에는 브루크너 교향곡 연속 연주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또한 니키슈는 무보수로 "노동자 연주회"를 열기도 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1918년 대미사(大彌撒)에서는 "자유와 평화의 축제"에 모인 라이프치히 노동자들을 위해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을 연주했다. 니키슈는 라이프치히 시민들에게 깊은 사랑을 받았다. 라이프치히 전기 노동조합이 파업 중일 때 "니키슈가 심장마비로 쓰러져 정전 때문에 구명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자, 즉시 파업이 중단될 정도였다.
3.2.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1889년, 니키슈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창립자 헨리 리 히긴슨의 요청으로 지휘자로 취임하며 라이프치히를 떠났다.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부유한 후원자들의 지원을 받는 우수한 오케스트라였으며, 니키슈에게 연봉 1.00 만 USD (당시 왕후급 금액)를 지급하고 연주 여행 시에도 호화로운 살롱풍 전용 차량을 제공했다. 그러나 니키슈는 미국 국내를 거의 30.00 만 km 가까이 여행하며 스트레스를 받아 4년 만인 1893년에 사임했다. 사임 시에는 여러 도시에서 고별 연주회가 열렸다. 우에치 다카히로는 "악단 창설 초기 니키슈가 재임했다는 사실만으로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역사에 더욱 무게가 더해진다"고 평했다. 오토카르 노바체크는 니키슈 지휘 아래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연주했다.
3.3. 부다페스트 왕립 오페라
1893년 유럽으로 돌아온 니키슈는 헝가리 국립 오페라의 수석 악장으로 취임했으나, 권모술수에 염증을 느껴 임기 도중 사임했다. 이 시기에 대해 니키슈는 "나 자신이 헝가리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싫어졌다"고까지 언급했다. 한편, 그는 하프 연주자 알프레트 케스트너를 위해 국립 왕립 아카데미의 자리를 주선해주기도 했다.
3.4.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초대 수석 지휘자 한스 폰 뷜로가 은퇴한 후, 한동안 한스 리히터, 펠릭스 모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같은 객원 지휘자들을 초청했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1895년 니키슈를 수석 지휘자로 선임했다. 같은 해 맺어진 라이프치히와 베를린의 이중 계약은 1922년 니키슈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니키슈 시대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제2의 전성시대"를 맞이했다고 평가된다. 다만 취임 초기에는 베를린에서의 인지도가 낮아 고전을 면치 못했다. 1895년 10월 14일 열린 베를린 데뷔 콘서트는 나흘 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에서 열린 데뷔 콘서트만큼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무료 표를 배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연장이 절반밖에 채워지지 않았다. 비평가들도 니키슈를 "거드름 피우는 자", "화려함을 좋아하는 자"라고 평했으며, 베토벤 해석에 대해서는 수준 이하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니키슈는 서서히 명성을 얻어갔다. 1897년에는 독일, 스위스, 프랑스 연주 여행이 니키슈 한 사람에게 맡겨졌으며, 이 연주 여행은 큰 성공을 거두어 특히 파리에서는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파리 연주회에서는 며칠 전 발생한 화재 희생자들을 위해 곡목을 베토벤의 교향곡 제3번으로 변경했으며, 제2악장 장송 행진곡에서는 악단원들을 기립시켜 연주하게 했다.
해외에서의 성공에 힘입어 베를린 시민들도 니키슈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입석 표가 매진될 정도였다. 이로 인해 1898년에는 "유리 지붕 홀"이 건설되었고, 이듬해에는 1036석 규모의 "베토벤잘" 건설 부지가 확보되었다. 또한 베른부르거 거리의 오래된 건물들이 철거되면서 슈테른 음악원까지 수용 가능한 광대한 부지를 갖게 되었다. 이후 1899년, 1901년, 1904년에 다시 대규모 연주 여행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후에도 연주 여행은 계속되었지만,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해외 연주 여행은 불가능해졌다. 스칸디나비아 중립국들은 문호를 개방했지만, 1917년 예정되었던 오슬로 연주회는 독일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좌절되었다. 니키슈 자신은 오랫동안 세계 시민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대전 중에도 "국제주의적인 예술가"임을 자처하며 "예술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 상호 이해와 우정의 다리를 놓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고 한다.
니키슈 시대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는 마티아 바티스티니, 테레사 카레뇨, 프리츠 크라이슬러, 엘레나 게르하르트, 파블로 카잘스, 하인리히 슐루스누스, 야샤 하이페츠 같은 유명 솔리스트들이 협연했다. 또한 악단원으로는 콘서트마스터 바츨라프 탈리히, 루이스 퍼싱어, 첼리스트 조지프 말킨 등이 니키슈 지휘 아래 연주했다。 니키슈 재임 중인 1903년 12월 7일에는 악단원들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유한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3.5.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니키슈는 1905년부터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 시작했으며, 1912년부터 1914년까지는 이 악단의 수석 지휘자를 역임했다. 1912년 4월, 그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미국 순회 연주를 떠났는데, 이는 유럽 오케스트라로서는 최초의 미국 순회 연주였다. 니키슈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호른 연주자 아돌프 볼스도르프를 높이 평가했으며, 리허설 중에는 그의 연주가 너무 아름다워 지휘봉을 떨어뜨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3.6. 객원 지휘
니키슈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의 인기 있는 객원 지휘자였으며,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를 지휘하기도 했다. 또한 1902년부터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원장을 역임하며 지휘 수업을 가르쳤다. 189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함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도 활동했다.
니키슈는 이 외에도 여러 곳에서 객원 지휘 활동을 펼쳤다. 예를 들어, 페르디난트 프폴의 니키슈 평전에는 1903년 봄의 일정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목요일: 알텐부르크에서 궁정 연주회
- 금요일: 함부르크에서 마지막 정기 연주회
- 토요일: 하노버에서 연주회를 마친 후 야간 열차로 베를린으로 돌아가 일요일에 악단원 연금 기금 연주회 공개 리허설을 진행하고 월요일에 직접 그 연주회를 지휘했다.
- 월요일 밤: 지칠 줄 모르는 그는 열차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여 3회의 연주회를 지휘했고, 모스크바도 놓치지 않고 같은 횟수의 연주회를 소화했다.
한편, 그는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에서는 한 번도 지휘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국제적인 경력을 가진 지휘자는 바이로이트에 적합하지 않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지휘 외에도 니키슈는 피아니스트로서 가수들의 반주를 맡기도 했다. 1921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테아트로 콜론에서 여러 콘서트를 지휘했으며, 이 중 일부 콘서트에서는 당시 22세였던 그의 아들 미차 니키슈가 피아노 솔리스트로 협연했다.
4. 레퍼토리와 해석
니키슈는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해석으로 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4.1. 동시대 작곡가 소개
니키슈는 평생 동안 아직 널리 인정받지 못한 작곡가들의 작품을 프로그램에 반복적으로 올리는 것을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으며, 후기 낭만주의 작품과 동시대 음악을 적극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프란츠 리스트, 안톤 브루크너, 요하네스 브람스, 표트르 차이콥스키, 리하르트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물론, 아르놀트 쇤베르크, 클로드 드뷔시, 쿠트 아테르베리, 한스 피츠너, 막스 레거, 후고 볼프, 장 시벨리우스, 에드바르 그리그, 림스키-코르사코프, 안토닌 드보르자크, 세자르 프랑크, 카미유 생상스, 뱅상 당디, 에드워드 엘가, 프레데릭 딜리어스, 오이겐 달베르, 에밀 자크-달크로즈, 후고 카운,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아나톨리 랴도프, 모리츠 모슈코프스키, 요아힘 라프, 에밀 폰 레즈니체크, 프란츠 크사버 샤르벤카, 막스 폰 실링스, 게오르크 슈만, 크리스티안 신딩, 요세프 수크, 조지 셀, 헤르만 웅거, 로베르트 폴크만,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프리드리히 게른스하임, 오토카르 노바체크 등 수많은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다루었다. 니키슈 시대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는 초연 작품이 연주되지 않은 시즌이 없었다.
동시에 니키슈는 카를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루이 슈포어와 같은 과거 작곡가들의 작품도 연주했다. 다만 요제프 하이든이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작품은 많이 다루지 않았으며, 1906년에 모차르트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모차르트의 저녁"이 열린 정도였다.
헬베르트 하프너는 니키슈가 "뒤섞인 프로그램"을 선호했다고 지적하며,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8번을 함께 연주하거나,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 제1번과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9번을 묶어 연주했다고 언급했다. 파울 베커는 "아르투르 니키슈는 차이콥스키와 브루크너의 연주로 유명해졌다"고 말했다.
- 안톤 브루크너**: 1873년 오케스트라의 제2바이올린 연주자로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2번을 연주하며 그 웅장함에 감동한 니키슈는 훗날 지휘자로서 브루크너의 작품을 수없이 연주하고 세계 초연도 지휘했다. 라이프치히 시립 극장 악장 시절, 니키슈는 자신이 개최하던 "현대 음악의 저녁"에 아직 연주되지 않은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7번을 포함하라는 프란츠 샬크의 권유를 받고 분석을 시작하며 이 작품에 매료되었다. 이후 작곡가와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받으며 1884년 12월 30일에 세계 초연을 지휘했다. 연주회는 성공을 거두었고, 브루크너에게는 두 개의 월계관이 수여되었다. 또한 니키슈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프로그램에 브루크너의 작품을 서서히 포함시켜 청중의 지지를 얻었다. 1896년 10월 26일, 그 달 11일에 사망한 브루크너를 추모하며 교향곡 제7번의 제2악장을 연주한 것을 시작으로, 1898년 교향곡 제5번, 1902년 교향곡 제2번, 1903년 교향곡 제9번, 1904년 역시 교향곡 제9번, 1905년 교향곡 제3번, 1906년 교향곡 제8번, 1907년 교향곡 제4번을 차례로 연주하며 브루크너 작품을 오케스트라의 레퍼토리로 정착시켰다. 이는 당시 브루크너의 작품이 청중과 음악 평론가들에게 잘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리하게 홍보하기보다는 서서히 소개하는 니키슈의 전략이었다.
- 표트르 차이콥스키**: 니키슈는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지휘했다. 타이밍을 재어 서서히 소개한 브루크너 작품과는 달리, 차이콥스키 작품은 일상적으로 프로그램에 포함되었다. 특히 교향곡 제4번, 교향곡 제5번, 교향곡 제6번, 피아노 협주곡 제1번, 바이올린 협주곡은 니키슈의 프로그램에 여러 번 등장했다.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을 때 혹평받았던 교향곡 제5번을 니키슈가 성공적으로 연주하자, "이 교향곡이 거부당하면 불에 태울 생각이었다"고 말하며 청중의 박수 속에서 니키슈를 굳게 안아주었다. 당초 오케스트라는 교향곡 제5번 연주를 거부했지만, 니키슈는 이 곡을 연주하지 않으면 객원 지휘를 하지 않겠다고 협상했다고 한다.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니키슈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으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첫 시즌부터 그의 작품을 다루었다. 특히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영웅의 생애', '가정 교향곡', '축전 전주곡', '알프스 교향곡'은 4회 이상 지휘했다.
- 구스타프 말러**: 라이프치히 시립 극장 시절 구스타프 말러와 니키슈의 관계는 좋지 않았지만, 니키슈는 말러의 작품을 종종 연주했다. 1896년 11월 9일에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교향곡 제3번의 제2악장을 초연했으며, 라이프치히에서도 같은 곡을 지휘했다. 또한 베를린에서는 교향곡 제5번,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교향곡 제2번, 교향곡 제4번, 대지의 노래, 교향곡 제1번을 지휘했으며, 1907년에는 말러 자신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대에 서서 교향곡 제3번 전곡을 지휘했다. 다만 가곡 외에는 한 번 지휘한 것으로 끝난 경우가 많아, 음악 평론가 베르너 에르만은 "(니키슈가) 말러의 음악에 대해서는 다소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했다.
4.2. 베토벤과 리스트 해석
니키슈의 베토벤 해석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지휘 아래 연주했던 교향곡 제3번과 교향곡 제9번 경험에서 깊은 영향을 받아 그의 오케스트라 해석의 기반이 되었다. 그는 음향적인 효과를 위해 템포를 조절하거나, 현악기의 포르타멘토와 페르마타 등을 사용했으며, 필요에 따라 악보를 수정하거나 작품 내 연주 순서를 변경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레오노레 서곡 제2번'과 '제3번'의 연주 순서를 바꾸기도 했다.
음악 평론가 베르너 에르만은 니키슈의 사운드 메이킹에 대해 "그 자신 숙련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만큼, 그의 사운드 메이킹의 기본은 현악기였다. 먼저 현악기의 소리를 풍성하게 칠한 캔버스 위에 다른 악기들의 광채가 겹쳐지는 방식이었다"고 설명했다. 니키슈는 "일정한 법칙에 따라 음악을 해석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를 움직이는 감정의 강도에 따라 해석은 거의 모든 연주에서 세부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말했다. 지휘자 유진 오먼디는 니키슈에 대해 "똑같은 연주를 다시 반복하는 일은 없었다"고 언급했다.
한편, 니키슈는 지휘자들이 손목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모두 바이올린을 먼저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암보로 지휘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고 청중과 동료들을 놀라게 했다.
5. 지휘 스타일 및 철학
니키슈는 최소한의 동작으로 최대의 효과를 이끌어내는 독특한 지휘 기법과 깊이 있는 음악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5.1. 절제되고 카리스마 있는 지휘
니키슈의 지휘는 매우 절제되었다고 평가된다. 오른손에 든 긴 지휘봉은 손목의 스냅으로 끝만 움직일 뿐이었고, 왼손은 음악의 강조 지점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악단원들에게 눈빛으로 부드러운 신호를 보내 어려운 부분을 극복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프리츠 라이너는 니키슈로부터 "팔을 휘두르지 마라. 신호를 보낼 때는 눈을 사용하라"는 조언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이러한 지휘 기술로 니키슈는 악단원들로부터 이상적인 소리를 이끌어냈다고 평가된다. 악단원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니키슈가 원하는 소리를 냈다고 증언했으며, 지휘자 에이드리언 볼트는 "니키슈가 레가토를 지시하면, 숙련된 악단원이라도 스타카토로 연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까지 말했다. 볼트는 또한 "그는 항상 가능한 한 단순한 방식으로 결과를 얻었으며, 아주 적은 움직임으로도 극히 큰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듯했다"고 덧붙였다.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의 오랜 경험이 콘체르토나 오페라 지휘 시 나타나는 지대한 배려와 결합되어, 대다수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일들을 그에게는 쉽게 가능하게 했다"고도 평가했다.
"마법"이라고 불린 지휘의 원리는 악단원들뿐만 아니라 니키슈 자신도 잘 알지 못했다. 니키슈는 "어떻게 나의 감각을 연주자에게 전달하는지 자주 묻지만, 어떻게 하는지 모른 채 그저 하고 있다. 한 작품을 지휘할 때는 음악의 자극적인 힘에 마음을 빼앗긴다. 나는 일정한 법칙에 따라 음악을 해석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를 움직이는 감정의 강도에 따라 해석은 거의 모든 연주에서 세부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말했다. 지휘자 유진 오먼디는 니키슈에 대해 "같은 연주를 다시 반복하는 일은 없었다"고 언급했다。 한편 니키슈는 지휘자들이 손목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모두 바이올린을 먼저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암보로 지휘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고 청중이나 동료들을 놀라게 했다.
표트르 차이콥스키는 니키슈의 지휘에 대해 "한스 폰 뷜로의 효과적이고 독특한 방식과는 정반대였다. 뷜로의 지휘는 몸짓이 격렬하고 청중을 선동하며 때로는 시각적 효과를 노렸다. 반면 니키슈는 조용하고 불필요한 동작을 최대한 억제했다. 그러나 단호하고 힘차며, 어디까지나 자제가 되어 있었다. 그는 지휘하는 것이 아니었다. 뭔가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운 마법에 자신을 맡겼다. 청중은 그에게 거의 주목하지 않았고, 그 또한 청중의 주의를 자신에게 끌어들이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케스트라 전체는 이 신비로운 거장의 손에 걸리면 하나의 악기가 된 것처럼 그의 지휘에 완전하고 최면에 걸린 듯 따랐다"고 평했다. 반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니키슈와 펠릭스 바인가르트너에 대해 "양손의 움직임이 격렬하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또한 지휘자 이고리 마르케비치는 작곡가들이 오케스트라 편성을 확장함에 따라 현대 지휘자들은 "니키슈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같은 사람들이 필요했던 것보다 훨씬 유연하고 훨씬 광범위한 기술"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니키슈는 "하나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지휘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일 것이다. 교향곡을 아주 훌륭하게 지휘하기 시작해도, 그 악장이 끝난 후 휴지 동안 다음 악장에 대한 기대의 분위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최고의 연주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청중 한 명이 옆 친구에게 "마법이 시작되면 알려줘"라고 속삭였다는 일화를 자주 이야기했다.
5.2. 지휘자의 역할에 대한 신념
니키슈는 리허설에서 먼저 곡 전체를 통째로 연주한 다음, 주의가 필요한 부분을 골라 반복시켰다. 하지만 세세하게 지시하지 않고 구체적인 연주법은 각 연주자에게 맡겼다. 연주 중에 생기는 직관을 중요시했던 니키슈는 이러한 방식으로 악단원들의 신뢰를 얻었으며, 그 결과 니키슈의 리허설에서는 단원들의 비협조적인 태도가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단원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했던 니키슈는 바이올리니스트 시절 함께 연주했던 단원을 보면 먼저 말을 걸기도 했다. 니키슈는 "오케스트라가 열정적으로 일에 매진하면 거기서 탁월한 기량이 길러진다. 어떤 악단원도 각자의 개성, 각자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 올바른 소리를 이끌어내는 데 그들을 개인적으로 알 필요는 전혀 없다.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로 음악가의 경우, 악기가 인간을 만든다.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전체를 말하자면 혀끝에 올려놓고, 악단원들의 악기와는 전혀 다른 울림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지휘자는 목적을 달성한다. 개별 연주자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방식으로 연주한다. 하지만 일단 지휘자의 말도 들어주자,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지휘법의 요령이다"라고 말했다.
니키슈의 리허설을 참관했던 지휘자 프리츠 부슈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의 인사 방식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었고, 지휘대에 섰을 때 이미 악단 전체는 흥분하여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박수가 끝나자마자 잘 통하는 목소리로, 이 유명한 오케스트라를 한 번 지휘하는 것이 오랜 꿈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객원 지휘하는 어느 오케스트라에서나 똑같은 말을 타고난 붙임성으로 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감동한 듯, 나이 든 비올라 연주자에게 팔을 내밀며 이렇게 외쳤다. '셸체 씨, 당신을 여기서 만나다니! 아직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리스트 선생님의 지휘 아래 마그데부르크에서 '산상 교향곡'을 연주했을 때를.' 악단원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는 것도 니키슈의 흉내낼 수 없는 재능 중 하나였다. 나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지휘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오케스트라 전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것을."
탁월한 기억력과 즉시 사물을 파악하는 이해력 덕분에 니키슈는 지휘할 곡을 리허설에서 처음 접하는 경우도 있었다. 음악 평론가 베르너 에르만은 "그의 경우, 실제로 소리가 울려 퍼지고 귀에 들릴 때는 이미 그것이 완성된 음악이 되어 있었다. 미리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 총보에서 직접 소리의 전체 모습이 떠올랐고, 동시에 그것을 머릿속에서 정교하게 그려내고 음영을 입힐 수 있었다. 그에게 음악은 소리였고, 소리는 한없는 색채와 밝기, 강도와 뉘앙스가 풍부한 울려 퍼지는 실세계의 매체였다"고 기록했다. 한편, 막스 레거의 신작을 리허설에서 지휘하게 되었을 때, 니키슈가 곡을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은 작곡가 레거는 "먼저 마지막 푸가를 연습해 달라"고 니키슈에게 전했는데, 니키슈는 "그것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참고로 그 곡에는 최종 푸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6. 녹음 및 선구적 활동
니키슈는 초기 녹음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역사에 길이 남을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6.1. 초기 녹음 경력
니키슈는 관현악 녹음 분야의 선구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초기 녹음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6.2. 미국 순회 연주 및 최초의 교향곡 전곡 녹음
1912년 4월, 그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미국 순회 연주를 떠났는데, 이는 유럽 오케스트라로서는 최초의 미국 순회 연주였다.
1913년 11월 10일, 니키슈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을 녹음하며 완전한 교향곡 전곡을 녹음한 최초의 사례 중 하나를 만들었다. 이 녹음은 훗날 LP와 CD로 재발매되었으며, 도이체 그라모폰과 다른 현대 레이블에서도 출시되었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이 녹음에 대해 "니키슈의 예술성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다"고 평했지만, 음악 평론가 고이시 다다오는 "음질은 열악하지만 연주의 골격만은 알 수 있다. 의외로 단정한 연주이며, 토스카니니가 니키슈를 열광적으로 숭배했던 이유를 잘 알 수 있는 연주이다"라고 평했다.
그는 또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도 일련의 초기 녹음을 남겼는데, 이 중 일부는 20세기 초 연주의 특징인 포르타멘토를 보여준다. 1920년에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로마의 사육제' 서곡과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 제1번을 녹음했다. 고이시는 "특히 헝가리풍의 표정을 가진 리스트가 흥미롭다"고 언급했다. 사무엘 H. 시라카와는 니키슈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녹음에 대해 "지휘자의 해석력의 규범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유물로서의 가치가 훨씬 높다"고 평가했다. 1920년에는 니키슈가 차이콥스키 교향곡을 지휘하는 모습이 무성 영화로 남아있어, 그의 지휘 모습을 영상으로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다음은 니키슈가 지휘한 주요 녹음 목록이다. 1920년 도이체 그라모폰과 녹음한 두 곡을 제외한 모든 녹음은 EMI에서 발매되었다.
- 베토벤: 극음악 '에그몬트' 서곡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1913년 6월 25일)
- 카를 마리아 폰 베버: 오페라 '오베론' 서곡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1913년 6월 25일)
- 프란츠 리스트: 헝가리 광시곡 제1번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1913년 6월 25일 또는 1914년 6월 21일)
- 베토벤: 교향곡 제5번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13년 11월 20일)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서곡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1914년 6월 21일)
- 베버: 오페라 '마탄의 사수' 서곡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1914년 6월 21일)
- 베를리오즈: 서곡 '로마의 사육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20년)
- 리스트: 헝가리 광시곡 제1번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20년)
7. 개인 생활
니키슈는 음악적 재능뿐만 아니라 매력적인 외모와 성격으로도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7.1. 결혼과 가족
1885년 7월 1일, 니키슈는 가수이자 배우였던 아말리 호이스너(Amélie Heussner독일어, 1862년 ~ 1938년)와 결혼했다. 아말리는 그 전해 구스타프 말러와 함께 카셀 궁정 극장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었다.
그들의 아들 미차 니키슈(Mitja Nikisch독일어, 1899년 ~ 1936년)는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얻었으며, 아버지의 지휘 아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솔리스트로 협연하기도 했다. 미차 니키슈는 주로 재즈 밴드의 지휘자로 활동하며 명성을 얻었지만, 나치스가 집권하면서 재즈가 퇴폐 음악으로 비난받고 연주 방해를 받게 되자 밴드를 해산해야 했다. 이로 인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는 베네치아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니키슈의 며느리인 그레테 메렘-니키슈(Grete Merrem-Nikisch독일어)도 소프라노 가수로 활동했다.
7.2. 외모와 성격
니키슈는 파란 눈에 검은 곱슬머리를 가졌고, 잘 가꾼 턱수염을 길렀다. 그는 모피 코트, 금 사슬 시계, 키드 가죽 장갑, 다이아몬드 반지 등으로 화려하게 치장했으며, 지휘봉도 장식이 새겨진 상아로 만든 것을 사용했다.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는 1999년 인터뷰에서 "우리가 지금 쓰는 봉과는 전혀 다른 물건"이라고 언급했다.) 니키슈의 전기 작가 페르디난트 프폴은 "니키슈는 말하는 방식, 걷는 방식, 옷차림 등 모든 면에서 귀족 같았다. 사적인 자리에서나 공적인 자리에서나 그는 신사를 연기했다"고 말했다.
베르너 에르만은 베를린 데뷔 당시의 니키슈에 대해 "그의 등장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중등 키에 흰 피부, 긴 머리, 온화하고 여유로운 신사의 태도. 그것은 어딘가 격렬하고 고뇌에 찬 한스 폰 뷜로의 추종자가 아니었다. 우아하고 사교적이며, 사랑스러움과 자연스러운 기품으로 사람을 끄는, 전혀 다른 유형의 음악가라는 인상이었다"고 기록했다.
니키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매우 원만하여 오케스트라 단원, 정부 요인, 심지어 엘리베이터 보이에게까지 밝고 예의 바르게 대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많아, 지휘자 피에르 몽퇴는 "그는 유럽에서도 미국에서도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명인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청중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다. 베를린에서의 지휘자 생활 25주년 콘서트 때 니키슈가 청중들에게 "아직 제가 필요합니까?"라고 묻자, 청중들은 "살아있는 한"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러시아 소위가 간수에게 "니키슈는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는 일화도 있다.
니키슈는 자신의 마법 같은 이미지를 연출하는 한편,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겼다고도 전해진다. 밤마다 포커를 즐기며 막 벌어들인 돈을 모두 걸기도 했다. 에바 바이스바일러는 니키슈에 대해 "책을 읽기보다는 카드를 가지고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그는 요양지 바트 이슐을 자주 찾았다. 유명 인사들이 많이 모이는 이슐에서 니키슈는 브람스와 동석하여 리하르트 뮐펠트와 크나이젤 사중주단이 연주하는 브람스의 클라리넷 오중주곡을 들었는데, 당시 니키슈는 감동한 나머지 브람스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니키슈는 건강한 편이었으며, 베를린에서의 연주회를 병으로 취소한 것은 두 번뿐이라고 한다. 그중 한 번은 니키슈가 사망한 날의 연주회였다.
8. 사망
니키슈는 1922년 1월 23일 라이프치히에서 연주회를 준비하던 중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그의 유해는 라이프치히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망 직후, 그가 살았던 광장은 '니키슈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71년 시 당국은 젊은 지휘자들을 위한 '아르투르 니키슈 상'을 제정하여 그를 추모했다。
니키슈의 장례식에서는 고인의 뜻에 따라 율리우스 클렝겔의 '12개의 첼로를 위한 찬가'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에 의해 연주되었고, 바그너의 '파르지팔' 전주곡의 파이프 오르간 편곡 버전도 연주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니키슈의 죽음을 애도했다. 당시 김나지움 학생이었던 볼프강 슈트레제만은 "모두가 니키슈의 죽음으로 인해 채울 수 없는 공백이 생겼으며, 이는 제국 수도 베를린의 음악 생활에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라고 느꼈다"고 회상했다. 각 신문들도 니키슈의 죽음을 애도하며, '베를린 일간 신문'은 "이 손실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그가 필요했는데..."라고 썼고, '독일 일반 신문'은 "우리 지휘자들을 아무리 둘러봐도 그처럼 국제적인 권위와 보편성을 지닌 사람은 사실상 아무도 없다..."고 보도했다. '포스 신문'은 "우리는 도대체 누구를 이 거장의 대역으로 삼아야 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고 기록했으며,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은 니키슈를 "음악계에 출현한 기적의 인물"이라고 칭송했다. 니키슈가 객원 지휘했던 모든 큰 홀의 입구에는 조기가 게양되었다.
한편,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사와 동시에 후임자를 예상하는 기사들도 작성되었는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지크문트 폰 하우제거 등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결국 푸르트벵글러가 베를린과 라이프치히의 후임자가 되었다.
9. 유산과 영향력
니키슈는 현대 지휘법의 기초를 확립하고 수많은 후대 지휘자들에게 영감을 주며 음악계에 지대한 유산을 남겼다.
9.1. 현대 지휘법의 기초 확립
니키슈는 한스 폰 뷜로와 함께 근대 지휘법의 기초를 다진 업적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그는 악보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 단순하고 절제된 지휘 동작,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완전한 음색을 이끌어내고 음악의 깊이를 탐구하게 하는 카리스마를 통해 현대 지휘의 필수적인 요소들을 확립했다.
9.2. 후대 지휘자들에게 미친 영향
니키슈의 지휘 스타일은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에이드리언 볼트, 프리츠 라이너, 에르빈 니레지하지, 그리고 조지 셀을 포함한 많은 지휘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셀은 니키슈를 "오케스트라의 마법사"라고 불렀다. 라이너는 "팔을 휘두르지 말고 눈으로 신호를 주라"는 조언을 니키슈에게서 들었다고 말했다.
헨리 우드는 "나는 그가 지휘하는 모든 악구를 얼마나 깊이 경청했는지 기억한다... 멜로디를 리허설할 때 그는 항상 큰 감정을 담아 오케스트라에게 노래를 불렀고, 그리고는 '이제 당신이 느끼는 대로 연주해보세요'라고 말했다. 내가 들어본 어떤 지휘자도 그의 감정 표현과 극적인 강렬함을 능가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아르투르 니키슈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푸르트벵글러는 니키슈를 "유일하게 모범으로 삼은 지휘자"라고 여겼다. 니키슈는 푸르트벵글러의 경력 초기에 그를 지지했으며, 그가 자신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한스 크나퍼츠부슈도 니키슈를 존경했으며, 오토 클렘페러 역시 니키슈의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된다. 이고리 마르케비치는 베토벤 교향곡 개정 시 니키슈의 연주를 참고했다고 언급했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니키슈를 "음악적 할아버지"라고 불렀으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니키슈가 지휘하는 영상을 볼 수 있다면 "많은 돈을 지불할 것"이라거나 "오른팔을 희생할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니키슈의 제자인 에이드리언 볼트에게 사사한 콜린 데이비스는 니키슈의 "긴 지휘봉을 사용하여 손목만으로 지휘하는" 자세에 감명받았다고 말했다.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는 "독일적인 울림이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아르투르 니키슈, 프리츠 부슈, 에리히 클라이버에게서 연상되는 울림이다"라고 언급했다.
지휘자가 칭찬받을 때 니키슈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기도 했다. 1924년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을 지휘한 오토 클렘페러를 "당대 최고의 지휘자"라고 칭송한 크라스나야 가제타지는 클렘페러를 니키슈, 말러에 비유했다. 조안나 피들러는 발레리 게르기예프에 대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카리스마적인 자질을 발산했다. 아르투르 니키슈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위대한 지휘자들 대부분이 소유했던 자질이다. 그는 청중에게 등을 돌리고 있을 때조차 강렬한 열정을 발산했다"고 말했다. 동시에 지휘자가 비판받을 때 니키슈와 비교되기도 하는데, 비평가 제임스 허네커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에 대해 "그는 안톤 자이들이나 아르투르 니키슈가 이룬 최고점에 항상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9.3. 작곡가 및 음악가들의 평가
"새로운 시대의 지휘자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임무는 작곡가의 대리인으로 지휘봉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지휘자의 역할을 작곡가의 그것에 필적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신념 아래 지휘 활동을 펼친 니키슈는 다양한 작곡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자신의 교향곡을 지휘한 니키슈에게 "당신의 방식은 내 생각과 전혀 다르다. 하지만 당신의 방식이 옳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니키슈에 대해 "그는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울림을 이끌어내는 능력을 타고났다"고 평했다.
니키슈는 널리 인정받지 못한 작곡가들의 작품을 프로그램에 반복적으로 올리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겼으며, 그러한 작곡가들에게서도 찬사를 받았다. 안톤 브루크너는 자신의 교향곡 제7번 세계 초연을 지휘하여 대성공을 거둔 니키슈를 "신의 대리인 중 한 명"이라고 칭송했다. 표트르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을 때 혹평받았던 교향곡 제5번을 니키슈가 성공적으로 연주하자, "이 교향곡이 거부당하면 불에 태울 생각이었다"고 말하며 청중의 박수 속에서 니키슈를 굳게 안아주었다. 당초 오케스트라는 교향곡 제5번 연주를 거부했지만, 니키슈는 이 곡을 연주하지 않으면 객원 지휘를 하지 않겠다고 협상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신랄한 비평가로 알려진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도 니키슈의 지휘에 만족했다고 한다.
프란츠 리스트는 1885년 콘서트를 들은 후 니키슈를 "명인 중의 명인"이라고 평했으며,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가장 높이 평가하는 지휘자로 니키슈의 이름을 들며 특히 니키슈의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5번 해석을 칭찬했다. 반면 니콜라이 메트너는 니키슈의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5번 연주에 대해 "작곡가 자신이 지휘했을 때처럼 완전히 실패로 끝나는 것을 막아준 것은 확실하지만, 그의 비애 가득한 느린 템포는 그를 맹목적으로 따른 지휘자들에 의해 강화되어 차이콥스키 연주의 불문율이 되었다"고 말하며, 특히 제4악장의 해석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니키슈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연주했던 합창 지휘자 지크프리트 옥스는 "놀랍게도 그는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움직임으로, 때로는 얼핏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지휘로 악단원을 이끌어간다. 니키슈의 지시가 어떻게 이해되는지 악단원에게 물어보면, 그들 자신도 전혀 모르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연주해야 한다는 답이 항상 돌아온다"고 말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니키슈를 칭찬했으며, 이 악단의 후고 부르크하우저는 니키슈에 대해 "그는 지휘대에 서면 그 유연하고 창백한 양손에서 이른바 손을 뻗어 자기력 같은 것을 발산하여 주위에 마력을 퍼뜨렸다는 전설이 생겼다"고 언급했다.
지휘자 기피증으로 유명했던 바이올리니스트 카를 플레쉬조차 "이런 지휘자를 만난 것은 처음이다. 리듬의 진행 방식, 다이내믹과 아고긱의 뉘앙스, 그리고 음표 뒤에 신비롭게 얽힌 감정을 근원적인 힘으로 흘러나오게 하여 눈에 보이듯 공중에 나타나게 할 수 있는 드문 지휘자다. 니키슈로부터 지휘 예술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자신의 성장에 영향을 준 음악가로 소년 시절 함께 연주했던 니키슈의 이름을 들었다.
실제로 니키슈의 연주회를 접했던 음악 평론가 율리우스 코른골트는 "나는 소리가 다이내믹하게 고조되는 클라이맥스에서 공연장이 '피와 같은 붉은색'으로 물들고, 때로는 공연장 조명이 갑자기 빛을 더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반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취임 초기, 음악 평론가들은 니키슈를 "거드름 피우는 자", "화려함을 좋아하는 자" 등으로 평하며 베토벤 해석에 대해서는 수준 이하라고 판단했지만, 점차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후대의 평론가들은 니키슈의 스타성을 지적한다. 사무엘 H. 시라카와는 니키슈를 "현대 슈퍼스타 지휘자의 원형"이라고 말했다。 루퍼트 슈트레는 "어쨌든 의심할 여지 없는 것은 하나 있다. 지휘자라는 특수한 직업은 니키슈 이후 본래의 의미를 잃었다는 것이다. 음악 작품이 청중의 관심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휘자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니키슈가 청중에게 미친 매력은 그의 인품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연주회는 그가 자아내는 신비로운 아우라에 의해 연주가 시작되기도 전에 신묘한 에테르에 휩싸여 있었다. 니콜로 파가니니나 프란츠 리스트가 그 아우라로 수백 수천 명의 숙녀들을 실신시켰듯이, 니키슈는 그들의 직접적인 후계자였다"고 말했다. 크리스티앙 메를랭은 "19세기 후반이 되면, 음악을 시작시키는 수수께끼 같은 동작과 함께 지휘자는 마에스트로 압솔루토, 즉 살아있는 신으로 변신하여, 그전까지는 스타의 지위를 먼저 차지했을 피아노 비르투오소나 디바 이상으로 각광받게 된다. 1세대인 한스 폰 뷜로, 아르투르 니키슈, 구스타프 말러와 2세대인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빌럼 멩엘베르흐, 3세대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레너드 번스타인, 세르주 첼리비다케 등은 생전부터 신화적인 존재가 된 전설적인 지휘자들이며,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숭배 대상이 되었다"고 언급했다.
한편, 언론인 헬베르트 하프너는 니키슈에게 "뷜로의 엄격한 합리성", "음악적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접근", "교육에 대한 사명감"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니키슈의 후임이 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지휘자로서 오랫동안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동안 시대의 흐름에 뒤처져 근대파에서 보수파가 되었다"고 말했다. 음악 평론가 베르너 에르만도 "(니키슈는) 어디까지나 '세기말' 예술가의 입장에 머물렀으며, 이 음악 세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20세기 초 전위적인 음악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했다"고 지적했다.
10. 기념 및 추모
니키슈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라이프치히 시의회는 '니키슈 기념 반지'(Nikisch-Gedenkring독일어)를 제정했으며,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프란츠 콘비츠니, 카를 뵘, 쿠르트 마주어 등이 이 반지를 수상했다. 프란츠 엔들러는 이 반지가 배우계의 '이플란트 기념 반지'에 필적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