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기와 교육
뱅상 당디는 유서 깊은 왕당파 가톨릭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이는 그의 음악적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1. 가문 배경과 유년기
뱅상 당디는 1851년 3월 27일 파리에서 왕당파 가톨릭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정치인 조제프 이제아 생탕주 당디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친할머니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았으며, 할머니는 그를 앙투안 프랑수아 마르몽텔과 루이 디에메르에게 보냈다. 14세부터는 알베르 라비냐크에게 화성학을 배웠다. 16세 때 삼촌을 통해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관현악법 논문을 접하게 되면서 작곡가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

1.2. 초기 음악 교육
당디는 피아노 쿼텟을 작곡하여 친구의 스승인 세자르 프랑크에게 보냈다. 프랑크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작곡가의 길을 걷도록 권유했다. 이 만남은 그의 초기 음악 교육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3. 파리 음악원과 세자르 프랑크
19세의 나이로 보불전쟁에 참전했으나, 종전 후 음악 활동으로 복귀하여 1871년 파리 음악원에 입학, 프랑크의 오르간 반에 들어가 1875년까지 재학했다. 그는 1875년에 오르간 1등상을 받았다. 음악원 졸업 후에는 샤틀레 극장 오케스트라의 타악기 연주자로 활동하며 실용적인 경험을 쌓았고, 콜론 콘서트에서 합창 지휘자로도 일했다. 이 시기 쥘 파들루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리허설에서 그의 초기 작품인 교향곡 이탈리아가 처음 연주되었는데, 이 작품은 그가 이미 알고 지내던 조르주 비제와 쥘 마스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2. 초기 경력과 부상
당디는 전쟁 참전 경험을 뒤로하고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으며, 특히 독일 음악과의 만남은 그의 음악 세계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2.1. 보불전쟁과 초기 음악 활동
1870년 보불전쟁에 보병 병장으로 참전하여 국가를 위한 봉사를 다했다. 전쟁이 끝난 1871년, 그는 곧바로 음악 활동으로 복귀하여 뒤파르크의 소개로 세자르 프랑크를 만나 프랑크의 오르간 지도 아래 작곡법을 공부하게 된다. 전후 그는 파들루 관현악단에 소속되어 활동하며 실전 경험을 쌓았다.
2.2. 독일 음악 및 바그너와의 만남
1873년 여름, 당디는 독일을 방문하여 프란츠 리스트와 요하네스 브람스를 만났다. 1874년 1월 25일에는 그의 서곡 레 피콜로미니가 파들루 콘서트에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작품 사이에 연주되었다. 1876년에는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초연에 참석했는데, 이 경험은 그에게 큰 감명을 주어 열렬한 바그너주의자가 되었다. 1882년에는 바그너의 파르지팔을 들었으며,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의 작품에는 바그너 음악의 강한 영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비록 바그너의 "모든 영웅을 혹사하는 대언장담의 히스테리"를 경멸하고 기독교적 사랑과 숭고한 단순함을 작품의 바탕에 두려 노력했지만, 바그너의 영향은 그의 오페라 창작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2.3. 주요 초기 작품
당디는 이 시기에 여러 중요한 초기 작품들을 발표했다. 1875년에는 후냐디 야노시에게 헌정된 교향곡이 연주되었고, 같은 해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초연에서 프롬프터라는 작은 역할을 맡기도 했다. 1878년에는 그의 교향적 발라드 마법에 걸린 숲이 초연되었으며, 1883년에는 합창곡 종의 노래를 발표했다. 1884년에는 교향시 살비아 꽃이 초연되었고, 이 무렵 피아노 모음곡(피아노를 위한 교향시) 산의 시를 작곡했다. 1887년에는 트럼펫, 2대의 플루트, 현악 사중주를 위한 라장조 모음곡이 발표되었다. 같은 해, 샤를 라무뢰의 바그너 오페라 로엔그린 제작에 합창 지휘자로 참여했다. 그의 음악극 페르발은 1889년부터 1895년까지 작업했다.

3. 교육 활동과 기관 설립
당디는 스승 프랑크의 교육 철학에 깊이 공감하며 프랑스 음악 교육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파리 스콜라 칸토룸의 설립은 그의 교육자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이정표였다.
3.1. 파리 스콜라 칸토룸 설립
프랑크에게서 배운 것에 영감을 받았지만, 당시 파리 음악원의 교육 수준에 불만을 느꼈던 당디는 1894년 샤를 보르드와 알렉상드르 기르만과 함께 파리 스콜라 칸토룸을 설립했다. 스콜라 칸토룸은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 및 지휘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나, 1900년부터는 일반적인 음악 교육 기관으로 발전했다. 당디는 1904년부터 교장직을 맡아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서 가르쳤다.
3.2. 교장직과 교육 철학
스콜라 칸토룸의 교육에 대해 옥스포드 음악 동반자는 "독창성보다는 기술의 탄탄한 기초를 장려했다"고 평하며, 졸업생 중 소수만이 파리 음악원 최고의 학생들과 견줄 수 있었다고 언급했다. 당디는 스콜라 칸토룸에서의 직책을 유지하면서도 파리 음악원과 개인적으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로브 음악사전에 따르면, 교육자로서 당디의 영향력은 "엄청나고 광범위했으며, 독단주의와 정치적 편협함에 대한 비난을 훨씬 능가하는 프랑스 음악에 대한 이점을 가져다주었다." 그의 명저 작곡법 강의는 스콜라 칸토룸에서의 강의를 바탕으로 한다.
3.3. 프랑스 국민음악협회에 대한 영향
당디는 스승 프랑크가 1871년에 창립 멤버였던 프랑스 국민음악협회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크와 마찬가지로 당디는 독일 음악을 숭배했으며, 협회가 비프랑스 음악과 작곡가를 배제하는 것에 반감을 가졌다. 그는 1885년 협회의 공동 서기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프랑스 음악만을 다루던 규정을 뒤엎는 데 성공했다. 이에 반발하여 협회 창립자들인 로맹 뷔신과 카미유 생상스가 사임했다. 프랑크는 협회 회장이라는 공식적인 직함을 거부했지만, 1890년 프랑크가 사망하자 당디가 그 자리를 맡았다.
그러나 그의 회장 재임 기간은 젊은 프랑스 작곡가 세대의 불만을 샀고, 모리스 라벨을 필두로 한 이들은 1910년 독립적인 독립음악협회를 창설하여 프랑스 및 다른 나라의 주요 젊은 작곡가들을 끌어모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두 단체의 합병을 추진하려는 시도에서 당디는 보다 "진보적인" 가브리엘 포레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국민음악협회 회장직에서 물러났으나, 이 계획은 결국 무산되었다.
4. 음악 스타일과 주요 작품
당디의 음악은 다양한 영향을 흡수하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특징을 구축했으며, 프랑스 음악사에 중요한 흔적을 남겼다.
4.1. 작품의 특징
당디의 음악은 베를리오즈, 프랑크, 바그너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프랑크의 영향은 주로 선율의 형태에서, 바그너의 영향은 주제의 전개에서, 그리고 베를리오즈의 영향은 관현악법에서 나타났다. 그의 작품은 확고한 건축적 형태를 끊임없이 추구했는데, 이는 베토벤에게 매료되었던 그로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또한 그는 프랑크 학파의 순환 주제 기법을 풍부한 관현악법과 함께 활용했다. 당디의 음악은 민족적인 요소를 작곡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특징을 보였으며, 이는 프랑스의 산인의 노래에 의한 교향곡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음악은 또한 민속적-사실주의적 요소와 종교적-신비적 기조, 그리고 프랑스 문화의 전통과 독일 음악(특히 바그너)의 영향을 결합했다.
4.2. 고음악 부흥에 대한 기여
당디는 당시 거의 잊혀졌던 수많은 바로크 작품들의 부흥에 기여했다. 예를 들어, 그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포페아의 대관식의 자체 교정판을 제작했으며, 장필리프 라모와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작품들을 연구, 복원, 출판, 그리고 상연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안토니오 비발디의 첼로 소나타 (작품번호 14)를 첼로 협주곡으로 편집하여 1922년 모리스 세나르를 통해 출판함으로써 비발디 작품의 부흥에도 기여했다. 그는 그레고리오 성가에 대한 연구와 부흥에도 힘썼으며, 이러한 관심은 그의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다.
4.3. 주요 작품 개요
당디의 작품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그의 음악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현재 그의 작품 중 정기적으로 연주되는 곡은 많지 않지만, 프랑스의 산인의 노래에 의한 교향곡(1886)과 교향시 이스타르(1896)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스타르는 주제가 마지막에 나타나는 변주곡 형식의 교향시이다.
- 교향곡:
- 교향곡 제1번 가단조 이탈리아
- 프랑스의 산인의 노래에 의한 교향곡 작품번호 25
- 교향곡 제2번 내림나장조 작품번호 57
- 교향곡 제3번 라장조 소교향곡 갈리아 전쟁 작품번호 70
- 오페라 (총 6편):
- 오페레타 느릅나무 아래서 날 기다려 줘 작품번호 13
- 종의 노래 작품번호 18 (무대 버전 포함)
- 페르발 작품번호 40 (1889-1895)
- 이방인 작품번호 53 (1898-1901)
- 성 크리스토프 전설 작품번호 67 (1908-1915)
- 시니라스의 꿈 작품번호 80 (1922-1923)
- 관현악곡:
- 교향적 발라드 마법에 걸린 숲 작품번호 8 (1878)
- 교향시 발렌슈타인 작품번호 12
- 비올라와 관현악을 위한 노래 작품번호 19
- 교향적 전설 살비아 꽃 작품번호 21
- 카라데크 모음곡 작품번호 34
- 여행의 풍경 작품번호 36
- 교향적 변주곡 이스타르 작품번호 42 (1896)
- 극음악 메데 작품번호 47
- 코랄 변주곡 작품번호 55
- 교향시 산의 여름날 작품번호 61 (1905)
- 추억 작품번호 62 (첫 번째 부인 사망 후 작곡)
- 교향 모음곡 해변의 시 작품번호 77 (1920-1921)
- 지중해 2부작 작품번호 87
- 협주곡:
- 피아노, 플루트, 첼로와 현악을 위한 협주곡 나단조 작품번호 89
- 실내악곡:
- 현악 육중주 내림나장조 작품번호 92
- 현악 사중주 제1번 라장조 작품번호 35
- 현악 사중주 제2번 마장조 작품번호 45
- 현악 사중주 제3번 내림라장조 작품번호 96
- 피아노 사중주 가단조 작품번호 7
- 피아노 오중주 사단조 작품번호 81
- 피아노 삼중주 제1번 내림나장조 작품번호 29
- 피아노 삼중주 제2번 사장조 작품번호 98
- 클라리넷, 첼로, 피아노를 위한 삼중주
- 노래와 춤(디베르티멘토) 작품번호 50 (플루트, 오보에, 2클라리넷, 2바순, 호른)
- 피아노곡:
- 산의 시 작품번호 15
- 여행의 풍경 작품번호 33
- 주제와 변주, 푸가와 노래 작품번호 85
- 프랑스 오래된 론도의 노래에 의한 환상곡 작품번호 99
- 오르간곡:
- 소품 (전주곡) 내림마단조
- 합창곡:
- 종의 노래 작품번호 18 (무대 버전 포함)
- 여섯 개의 프랑스 민요 제1집 작품번호 90
- 여섯 개의 프랑스 민요 제2집 작품번호 100
- 가곡:
- 수령의 기행 작품번호 11
- 바다의 노래 작품번호 43
5. 개인 생활과 만년
당디의 개인적인 삶은 만년에 큰 변화를 겪었으며, 이러한 변화는 그의 음악뿐만 아니라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보수적이고 우익적인 정치적 견해는 그의 삶의 후반부를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였다.
5.1. 가족 및 재혼
1905년 첫 번째 부인인 이자벨 드 팡펠론느가 사망하면서 당디의 삶에서 안정적인 영향력이 사라졌다. 이 시기에 그는 일시적으로 창작 의욕이 감퇴했다고 전해진다. 전기 작가 로버트 올레지는 이 사망으로 인해 당디가 "스콜라 칸토룸에 대한 정치적 동기의 공격에 점점 더 취약해졌고, 프랑스와 독일 양국의 현대 음악에서 위험하게 퇴폐적인 경향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1920년 당디는 훨씬 어린 카롤린 장송과 재혼했다. 올레지는 이 결혼이 "진정한 창조적 부활을 가져왔으며, 그의 마지막 10년 동안 지중해에서 영감을 받은 평온한 작품들에서 증명되었다"고 기록한다. 그는 세벤느의 성을 떠나 코트다쥐르의 아게에 새 아내와 함께 거처를 옮기고 작곡에 전념했다.
5.2. 정치적·사회적 견해
당디의 미학적 사상은 "점점 더 반동적이고 독단적으로" 변했으며, 그의 정치적 견해는 우익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이었다고 평가된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 당시 프랑스 조국 동맹에 가입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당디는 연합국에 대한 문화 사절 임무를 수행했으며, 세 번째 음악극인 성 크리스토프 전설을 완성했다. 올레지의 관점에서 이 작품은 "현대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 가치에 반대하는 전통적인 가톨릭 지역주의의 찬양"이었다.
5.3. 지휘 활동과 마지막 작품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그는 지휘자로서의 활동을 늘려 유럽과 미국 전역에서 순회 공연을 가졌다. 1913년 2월 11일 하모니움을 연주하는 그의 모습이 사진으로 남겨져 있다. 말년의 작품으로는 '해변의 4개의 시', '지중해 2부작', 피아노와 실내 앙상블을 위한 협주곡, 현악 사중주 제3번 등이 있다. '해변의 4개의 시' 중 제2악장 '깊고 푸른 기쁨'의 도입부가 라벨의 다프니스와 클로에 제2부 도입부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라벨의 작품은 1912년에, 당디의 작품은 1919년부터 1921년에 완성되었다. 1909년에는 프랑스 국민음악협회(SIM)의 기획으로 '하이드의 이름에 의한 미뉴에트'를 작곡했으나, 당시 출판사의 차이로 인해 라벨이나 드뷔시 등의 같은 기획 작품들과 함께 출판되지는 못했다.
당디는 1931년 12월 2일 80세의 나이로 그의 고향 파리에서 사망하여 몽파르나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6. 유산과 평가
당디는 프랑스 음악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그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평가는 그의 보수적 사상으로 인해 논란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6.1. 역사적 평가
당디의 교향곡 프랑스의 산인의 노래에 의한 교향곡(1886)과 교향시 이스타르(1896)는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 꼽힌다. 그로브 음악사전은 그의 베토벤과 프랑크에 대한 존경심이 "불행히도 그의 자신의 작품, 특히 프랑스 남부를 묘사한 훌륭한 관현악곡의 개성을 가렸다고" 평했다. 그의 실내악 작품(완성된 세 개의 현악 사중주 포함)은 일반적으로 관현악 작품보다 덜 흥미롭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디의 음악 활동은 광범위하여 교회 오르간 연주자 및 지휘자로도 활약했으며, 작품 또한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하다.
6.2. 비판과 논란
전기 작가 로버트 올레지는 당디의 첫 번째 부인 사망 이후 그의 심미적 사상이 "점점 더 반동적이고 독단적으로" 변했으며, 그의 정치적 견해는 우익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은 그의 행동, 결정, 이념과 관련된 비판적 시각과 논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특히 그의 스콜라 칸토룸 교육 방식에 대한 독단주의와 정치적 편협함에 대한 비난이 있었다. 또한 그는 젊은 프랑스 작곡가 세대를 소외시켰고, 이로 인해 모리스 라벨을 필두로 한 독립음악협회가 창설되는 등 프랑스 국민음악협회가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에릭 사티와 같이 당디의 가르침에 회의적인 학생들도 있었다. 사티는 3년간 당디에게서 공부한 후 "대체 왜 내가 당디에게 갔던 것일까? 이전에 내가 쓴 작품들은 정말 매력적이었는데. 이제는? 무슨 헛소리인가! 정말 지루해!"라고 쓰기도 했다.
6.3. 저명한 제자들
당디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프랑스 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알베르 루셀은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평가된다. 그 외에도 알베릭 마냐르, 당디의 전기 작가인 조셉 칸트루브, 셀리아 토라, 아서 오네게르, 다리우스 미요가 있다. 다른 학생들로는 피에르 카프데비엘, 레옹 데스트루아메종, 데오다 드 세브라크, 외젠 라피에르, 레비 마데토야, 로돌프 마티외, 헬레나 문크텔, 아흐메트 아드난 사이군, 안 테리에 라파유, 에밀리아나 데 수벨디아, 셴 싱하이가 있다. 이례적인 학생들로는 스콜라 칸토룸에서 2년간의 과정을 등록했으나 몇 달 만에 떠난 콜 포터와 3년간 그곳에서 공부한 에릭 사티가 있다.
스승 세자르 프랑크가 사망한 후 당디의 문하생이 된 기욤 르쿠도 그의 제자 중 한 명이며, 르쿠가 요절하자 당디는 미완성으로 남겨진 그의 첼로 소나타를 보필했다. 일본인 제자로는 육군 군악대장이었던 오누마 사토시, 코마츠 코스케, 코노에 히데마로, 타카기 토로쿠 등이 있으며, 1938년에는 오누마의 곡 '노래와 춤'이 NHK에서 방송되기도 했다.
6.4. 기념
캐나다 몬트리올에 있는 사립 음악대학인 뱅상 당디 음악학교는 당디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1992년에 발견된 소행성 11530 당디 또한 그를 기리기 위해 이름 붙여졌다.
6.5. 저술 및 출판
당디의 주요 저작물에는 3권으로 구성된 작곡법 강의(Cours de composition musicale프랑스어)를 비롯하여 세자르 프랑크와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 대한 연구서가 포함된다. 더 타임스는 그의 프랑크 연구에 대해 "현대 프랑스 전기 중 가장 생생하고 개성적인 작품 중 하나"라고 평했으며, 1912년에 출판된 베토벤 연구서는 "그가 평생 그 스승에게 바친 깊은 연구"를 보여준다고 언급했다.
일본에서는 1941년부터 1943년에 걸쳐 이케우치 토모지로의 번역으로 작곡법 강의(5권, 코가 서점)가 출판되었고, 1943년에는 시인 후지하라 세이이치의 번역으로 베토벤(신타이요샤)이 출판되었다. 1953년에는 사토 히로시 번역의 세자르 프랑크(음악지우샤)가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