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슈만의 생애는 그의 개인적인 배경, 출생, 성장 과정, 가족 관계, 그리고 주요 삶의 사건들을 연대기 순으로 살펴볼 수 있다. 특히 그의 유년 시절과 교육, 대학 시절과 초기 경력, 클라라 비크와의 결혼과 가정생활, 그리고 말년에 겪었던 정신 건강 문제들은 그의 음악 세계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1.1. 유년 시절과 교육

로베르트 슈만은 1810년 6월 8일 작센 왕국 츠비카우에서 아버지 아우구스트 슈만과 어머니 요한나 크리스티안(혼전 성 슈나벨) 사이에서 다섯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6월 14일 자택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츠비카우는 2년 후 작센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슈만에게는 세 명의 형과 한 명의 누나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 아우구스트는 서적 판매 및 출판업을 운영하며 상당한 부를 축적한 인물로, 사전 편찬자이자 작가, 그리고 기사도 문학의 출판인이기도 했다. 그는 세르반테스, 월터 스콧, 바이런 등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슈만은 아버지의 서재에서 고전 문학 작품들을 탐독하며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아우구스트는 온화하고 성실한 성품이었으며, 슈만이 음악의 길을 걷는 것을 진심으로 지지했다. 슈만의 어머니 요한나는 짧은 시를 쓰고 피아노로 가벼운 선율을 연주할 줄 알았으며, 노래를 잘 불러 아우구스트가 모차르트의 아리아를 가르치기도 했다.
슈만은 3세부터 5세 반까지 대모인 엘레오노레 루피우스 부인의 집에서 양육되었다. 6세부터 4년간 사립 초등 예비학교에 다녔다. 7세 때 츠비카우의 지역 오르가니스트 요한 고트프리트 쿤츠슈에게 일반 음악과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한동안 시립 음악가인 카를 고틀리프 마이스너에게 첼로와 플루트 레슨을 받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과 문학에 대한 그의 사랑은 병행되어, 작은 규모의 작곡(주로 피아노곡과 가곡)과 함께 시와 극적인 작품들을 창작했다. 그는 모차르트나 멘델스존과 같은 음악 신동은 아니었지만,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은 일찍부터 두드러졌다. 1850년 《일반음악신문》에 실린 슈만의 전기에는 어린 시절부터 멜로디로 감정과 특징을 정확하고 유쾌하게 묘사하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817년 7세의 슈만은 아버지와 함께 드레스덴에 가서 베버가 지휘하는 베토벤의 교향곡을 듣고 감동을 받았다. 이 무렵부터 피아노로 작은 춤곡을 작곡하며 주변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819년 여름, 9세 때 아버지와 함께 카를로비바리에 가서 저명한 피아니스트 이그나츠 모셸레스의 연주를 듣고 압도적인 감명을 받았다. 이 경험은 슈만이 피아니스트를 지망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라이프치히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를 처음 접하고 강렬한 자극을 받아, 모차르트의 오페라 발췌곡을 피아노용으로 편곡하기도 했다.
1820년부터 슈만은 츠비카우 리체움(지역 고등학교)에 다니며 18세까지 전통적인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학업 외에도 광범위하게 독서했는데, 초기에는 실러와 괴테의 작품에 열광했다. 특히 장 파울은 슈만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였으며, 그의 감수성과 환상적인 문체는 슈만의 창의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슈만은 호메로스, 소포클레스, 호라티우스, 플라톤, 키케로, 타키투스 등 고전 작가들의 작품과 셰익스피어, 바이런 등 외국 작가들의 작품도 접했다. 훗날 슈만이 음악 비평에서 보여주는 대화체 기법은 플라톤의 영향이 크다고 알려져 있다.
음악적으로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작품과 당대 작곡가 베버의 작품을 알게 되었다. 아우구스트 슈만은 베버에게 로베르트를 가르쳐달라고 요청했으나 실패했다. 아우구스트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아들의 음악적 관심사를 격려하여 슈트라이허 그랜드 피아노를 사주고, 《마술피리》 공연을 위해 라이프치히로, 모셸레스의 연주를 듣기 위해 카를스바트로 여행을 주선했다.
1821년 11세 때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오라토리오 《시편 제150번》을 작곡하는 등 작곡을 시작했으며, 피아노로 즉흥적으로 환상곡이나 변주곡을 연주하여 가족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품들은 대부분 소실되었다.
1826년 8월, 슈만이 16세 때 아버지 아우구스트 슈만이 사망했다. 아버지의 죽음 몇 주 전에는 누나 에밀리에가 29세의 나이로 투신자살했다. 에밀리에의 자살은 어린 시절부터 앓던 피부병으로 인한 우울증 때문이었고, 아우구스트는 딸을 잃은 충격에서 회복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은 슈만의 성격에 평생 영향을 미쳐, 그는 죽음이나 장례식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힘들어하게 되었다.
1.2. 대학 시절과 초기 경력

1828년 3월 츠비카우 김나지움을 우등으로 졸업한 슈만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학교는 이제 뒤로 하고, 눈앞에는 세상이 펼쳐져 있다. 학생 생활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눈물을 금할 수 없지만, 슬픔보다 기쁨이 더 크다. 지금이야말로 진실된 영혼이 앞으로 나아가 그 진가를 세상에 보여줄 때이다"라고 썼다.
슈만은 어머니 요한나와 후견인 고틀로프 루델(1776년~1859년)의 권유에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했다. 라이프치히에서 슈만은 같은 대학 신학과 친구 에밀 플렉시히와 법학과 친구 모리츠 젬멜과 함께 살았다. 젬멜의 소개로 기스베르트 로젠을 알게 되었고, 로젠은 장 파울의 숭배자였기에 슈만과 금세 의기투합했다. 4월, 슈만은 로젠을 츠비카우로 초대했고, 5월 새 학기를 앞두고 둘이서 바이에른으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 중 바이로이트에서 장 파울의 미망인 로르벤첼로부터 장 파울의 초상화를 받았고, 뮌헨에서는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를 만났다. 슈만은 하이네에 대해 "하이네는 인정미 있는 그리스의 아나크레온처럼 친근하게 나를 맞이해주었고, 우정을 담아 내 손을 굳게 잡았다. 다만 그의 입가에는 신랄하고 비꼬는 미소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5월부터 대학 생활이 시작되자 슈만은 법학 공부에 매진하려 했으나, 강의 출석률은 점차 낮아졌다. 그는 어머니에게 냉철한 법학을 좋아할 수 없다고 편지를 보냈다. 라이프치히 주변에 고향 츠비카우처럼 숲이나 들의 자연이 없었던 것도 그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슈만은 피아노를 구입하고 학생 친구들 중 현악기 연주자들을 찾아 실내악 연주에 열중했다. 이 무렵 그들이 즐겨 연주한 곡은 슈베르트의 피아노 삼중주 1번이었다. 또한 1827년 사망한 베토벤을 기념하여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이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회를 개최했을 때, 슈만은 이를 듣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 성 토마스 교회 예배에서는 바흐의 칸타타 등을 들었다. 이 시기 습작으로 가곡, 연탄을 위한 8개의 폴로네즈, 다단조 피아노 4중주곡 등을 작곡했으며, 특히 피아노 4중주곡은 교향곡으로 개작하려는 흔적도 보였다.


츠비카우에서 교류했던 아그네스 칼스의 남편 에른스트가 1828년부터 라이프치히 대학교 의학 교수가 되면서 슈만은 라이프치히에서 칼스 가문과 재회했다. 칼스 가문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슈만은 피아노 교사 프리드리히 비크와 그의 딸 클라라, 라이프치히 오페라 극장 지휘자 하인리히 말슈나, 악보 출판상 호프마이스터 등을 만났다. 비크의 피아노 레슨은 비싸고 엄격하며 심지어 잔인하다는 평판을 받았지만, 슈만은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 허락을 받고 비크에게 레슨을 신청하여 승낙받았다. 당시 9세였던 클라라는 슈만 앞에서 훔멜의 피아노 삼중주곡을 "놀랄 만큼 교묘하게" 연주했다. 클라라는 그 해 10월 20일 음악계에 데뷔했다. 이처럼 슈만은 1828년 여름부터 비크에게 피아노를 사사하고 클라라와도 친해졌다.
친구 로젠의 편지를 읽은 슈만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로 전학을 결심하고 후견인 루델을 설득하여 승낙받았다. 당시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는 안톤 프리드리히 유스투스 티보와 미텔마이어 등 저명한 법학 교수들이 있어 그들의 강의를 듣는 것이 슈만의 전학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슈만은 새벽부터 피아노를 연주하며 이미 법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상태였다. 친구 젬멜은 슈만에게 법과 음악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충고했지만, 슈만은 당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1829년 5월, 츠비카우로 돌아온 슈만은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길에 남부 독일을 여행했다. 마인강과 라인강을 따라 마차로 내려가 프랑크푸르트, 마인츠, 코블렌츠 등을 거쳐 5월 21일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다. 이때 처음 라인강을 본 슈만은 깊은 감명을 받아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늙고 당당한 아버지 라인이 처음 보여주는 광경을 냉정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저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라인강은 내 앞에 오래된 독일의 신처럼 느긋하게, 소리도 내지 않고, 엄숙하게, 자부심 넘치는 모습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산과 계곡의 모든 것이 포도의 낙원인, 꽃이 피고 푸르른 라인가우의 멋진 전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 여행에서 그는 당시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빌리발트 알렉시스(본명 게오르크 빌헬름 헤링)와 의기투합하여 코블렌츠까지 동행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베토벤의 제자였던 페르디난트 리스의 부인에게 매료되기도 했다.
그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슈만은 다시 여행을 떠나 스위스와 북이탈리아를 방문했다.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는 로시니의 오페라를 들었다. 여행 중 슈만은 가진 돈을 모두 써버려 여행지에서 후견인에게 송금을 재촉하는 편지를 자주 보냈고, 밀라노에서는 빚까지 지게 되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안톤 프리드리히 유스투스 티보 교수는 법률학의 권위자이자 열성적인 아마추어 음악가였다. 그는 합창단 '징그페라인'을 조직했고, 자택에서는 매주 목요일 저녁 음악회를 개최했다. 티보는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헨델의 오라토리오를 연주하기도 했다. 티보는 슈만에게 신이 그에게 법률가로서의 운명을 주지 않았다는 견해를 밝혔고, 슈만은 이를 계기로 대부분의 시간을 음악에 할애하기 시작했다. 피아니스트로서 슈만의 명성은 하이델베르크를 넘어 바덴 대공비 스테파니(1789년~1860년)의 초청을 받아 만하임에서 연주회를 가질 정도였다. 슈만의 작품번호 1번인 《아베크 변주곡》이 바로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슈만은 샴페인과 시가뿐만 아니라 선술집과 레스토랑을 드나들고, 댄스 파티와 사육제 가장무도회에도 참여하며 지역 여성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그는 편지에서 자신이 "하이델베르크의 인기인"이 되었다고 자랑했다. 동시에 낭비벽이 심해져 가족, 후견인, 친구들에게까지 돈을 빌려달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1830년 4월, 친구들과 프랑크푸르트로 여행을 떠난 슈만은 니콜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는 어머니 요한나에게 자신의 결심을 털어놓았다. "저의 지금까지의 인생은 시와 산문 사이에서 발버둥 쳐온 20년의 고통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인생의 갈림길에 서서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예술을 향한 자질이 올바른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버지 아우구스트와 달리 어머니 요한나에게 음악은 "빵이 되지 않는 예술"이었기에, 아들이 법학의 길을 걷는 것이 그녀의 희망이었다. 슈만의 편지에 비크에게 피아노를 사사하겠다는 뜻이 적혀 있었으므로, 요한나는 비크에게 의견을 구했다. 비크는 슈만을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답했고, 3년 안에 슈만을 이그나츠 모셸레스나 훔멜 이상의 피아니스트로 키우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요한나는 슈만의 뜻을 일단 받아들였다. 다만 요한나의 승낙에는 슈만을 비크의 정식 제자로 6개월간 채용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반년 후 비크는 슈만의 재능과 소질이 그가 음악가가 되어야 함을 분명히 증명하며, 억지로 법학자로 만드는 것은 어리석다고 재차 답변했다. 요한나는 마침내 납득하고 슈만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인정했다. 슈만은 1830년 9월 24일 하이델베르크를 떠나 10월에 라이프치히로 돌아왔다. 슈만이 20세 때의 일이다.
1.3. 결혼과 가정생활

1830년 10월 라이프치히로 돌아온 슈만은 프리드리히 비크의 집에 거주하며 레슨을 받았다. 또한 비크의 소개로 라이프치히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 하인리히 도른에게도 음악 이론을 배웠다. 그러나 까다롭고 엄격한 비크에게 점차 불만을 품게 된 슈만은 이듬해인 1831년 8월 당시 명성을 떨치던 피아니스트 훔멜에게 편지를 써 비크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고 레슨을 받고 싶다고 부탁했다. 슈만은 이 사실을 비크에게도 말해 호된 질책을 받았다. 1831년 10월 비크가 클라라를 데리고 연주 여행을 떠나자 슈만은 비크의 집을 떠났다.
그 후에도 비크에게 레슨을 계속 받았지만, 슈만은 다시 파티나 사교 활동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슈만은 자신의 하숙집과 카페 바움 등 거리의 커피 하우스에서 예술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 모임은 후에 '다비드 동맹'에 영감을 주었다. 이 시기에 작품번호 2번 《나비》를 작곡하였다.
1831년 슈만은 "자서전적 기억"에서 "테크닉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 오른손이 망가졌다"고 적었는데, 이 시기에 오른손 부상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부상 원인으로는 슈만이 독자적으로 고안한 기계 장치로 피아노를 연습하다가 오른손의 힘줄을 다쳤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는 지료술, 동종요법, 전기 치료 등 당시 유행하던 모든 치료법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 상태는 그에게 강제 군 복무를 면제받는 이점을 주었지만, 1832년에는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로서의 경력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작곡에 주력하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 슈만은 눈병에 걸려 실명을 걱정하기도 했다. 슈만은 한때 첼로로 전향하거나 아예 신학을 공부하는 것도 고려했지만, 1832년 5월부터 작곡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는 일단 피아노를 떠나 교향곡 작곡을 시도했지만, 《츠비카우 교향곡》은 미완으로 끝나고 다시 피아노곡을 주로 쓰기 시작했다.

1832년 슈만은 라이프치히의 《일반음악신문》에 〈제군, 모자를 벗어라, 천재가 나타났다〉는 제목으로 프레데리크 쇼팽을 소개하는 글을 투고했다. 그러나 그는 독일 음악 비평의 수준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 때문에 1833년경부터 카페 바움 등에서 친구들과 새로운 잡지 발행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고, 1834년 4월 3일 《음악신보》(Neue Zeitschrift für Musik)를 창간했다.
《음악신보》의 초대 편집장은 율리우스 크놀이었고, 슈만은 편집을 도왔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크놀이 병에 걸리고, 비크가 이 일에 흥미를 잃고, 친구 루트비히 슝케가 1834년 말 폐결핵으로 사망하자, 슈만이 모든 편집 업무를 이어받게 되었다. 슈만은 《음악신보》에서 '새로운 시적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저속한 '불레셋인'과 싸우는 '다비드 동맹'이라는 가상의 동맹을 만들어 비평을 전개했다. 그는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라는 필명을 통해 자신의 성격 중 충동적인 면과 내성적인 면을 대변했으며, '마이스터 라로'라는 인물은 현명한 중재자 역할을 맡았다.

1833년 가을 형 율리우스와 형수 로잘리에가 잇따라 사망하면서 슈만은 고독과 공포감에 시달렸다. 이 해의 일기에 슈만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10월부터 12월까지 무서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미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는다"
그러나 친구 루트비히 슝케와 예술 후원자였던 상인 카를 포익트, 그리고 그의 아내 헨리에테 포익 등과의 친밀한 교제가 그에게 위로가 되었다. 슈만은 슝케에게 '사도 요한'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작품번호 7번 《토카타》를 헌정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슝케가 1834년 말 폐결핵으로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또한 슈만은 헨리에테에게 마음이 끌려 그녀를 '내림가장조의 영혼'이라 부르며 피아노 소나타 2번을 헌정했다.

1834년 4월, 당시 18세였던 에르네스티네 폰 프리켄이 비크의 새로운 제자로 비크의 집에 머물기 시작했다. 슈만은 에르네스티네와 연애 관계가 되었고, 반년도 채 되지 않아 그녀와 약혼했지만, 이후 몇 주 안에 양측의 합의로 파혼했다. 에르네스티네는 폰 프리켄 남작과 체트비츠 백작 부인 사이의 사생아였는데, 그녀가 이러한 복잡한 가정사를 슈만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고, 이를 알게 된 슈만이 상처를 입었다고 전해진다. 두 사람의 연애에서 영감을 받아 《사육제》(작품 9)와 《교향적 연습곡》(작품 13)이 탄생했다. 《사육제》에서는 슈만이 에르네스티네의 고향인 '아슈(ASCH)'의 철자를 바탕으로 한 음형을 사용했다. 《교향적 연습곡》은 에르네스티네의 아버지 폰 프리켄 남작이 작곡한 주제에 기초한 변주곡이다. 1835년부터 슈만과 클라라의 연애가 시작되자 에르네스티네는 오히려 두 사람을 응원하며 물러났다.

슈만은 1838년 10월부터 이듬해 1839년 4월까지 빈에 머물렀다. 클라라가 빈 연주회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것을 알고, 클라라의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과 《음악신보》의 본거지를 빈으로 옮기면 비크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시인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권유도 있었다고 한다. 동시에 빈은 슈만이 1832년 이래 목표로 삼았던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음악 도시'이기도 했다.
그러나 빈의 출판사들은 오히려 적의를 품고 슈만을 맞이했다. 당시 빈은 반동주의적 정치 체제 하에 있었고, 각지의 자유주의 운동과 혁명의 파급을 우려하여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슈만은 《음악신보》가 검열에 의해 억압받을 것을 우려하여 계획을 포기했다.
빈에 머무는 동안 슈만은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무덤을 방문했다. 베토벤의 무덤 앞에서 슈만은 철제 펜 한 자루를 주워 들고 돌아갔는데, 나중에 교향곡 1번을 이 펜으로 썼다. 또한 돌아오는 길에 슈베르트의 형 페르디난트(1794년~1859년)의 집을 방문하여 슈베르트의 유고 중 교향곡 9번의 초고를 발견했다. 이 교향곡은 1839년 3월 21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연주회에서 멘델스존의 지휘로 초연되어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더 이상 비크와의 화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슈만은 1839년 6월 15일 클라라의 동의를 얻어 변호사를 선임하여 소송 절차를 시작했다. 그해 7월 슈만은 비크와 이혼하여 베를린에 거주하던 클라라의 친모 마리안네 바르길을 찾아가 클라라와의 결혼 동의를 얻었다. 또한 공적 지위를 얻는 것이 결혼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1840년 2월 셰익스피어와 음악의 관계에 대한 논문을 통해 예나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소송 사실을 알고 격분한 비크는 클라라가 피아노 치는 것을 금지하고 집에서 내쫓았다. 클라라는 베를린에서 데리러 온 친모 마리안네와 함께 살았다. 비크는 클라라의 상속권을 정지시키는 등 맞서려 했지만, 법정에서는 유효한 주장을 하지 못하고 재판관에게 꾸지람을 들을 정도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거리에서 슈만을 마주칠 때마다 뺨을 때리기도 했는데, 이러한 비크의 극단적인 행동은 웃음거리가 되었다. 형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비크는 1840년 1월, 이번에는 클라라의 동요를 노리고 '레만'이라는 가명을 사용해 슈만에 대한 온갖 비난을 늘어놓은 편지를 써 베를린에서 열린 클라라의 리사이틀 당일에 전달했다. 그러나 클라라의 남동생 알빈이 슈만에게 미리 경고하여 클라라는 사전에 대비할 수 있었다. 슈만은 이 일로 비크를 별건의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1840년 8월 12일 슈만과 클라라의 결혼을 허가하는 판결이 내려졌고, 두 사람은 9월 12일 라이프치히 근교 쇠넨펠트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다음날인 9월 13일은 클라라의 21번째 생일이었다. 이 결혼식에는 4월에 막 알게 된 프란츠 리스트도 참석했다. 명예훼손 소송에서도 슈만이 승소하여, 1841년 비크는 슈만을 중상모략한 죄로 2주간 금고형에 처해졌다.

슈만은 1839년 당시 "성악곡은 기악곡보다 수준이 낮아 위대한 예술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말하며 작품번호 23번의 《녹턴》까지 거의 피아노곡만 작곡했다. 그러나 1840년 클라라와의 결혼이 가까워지자, 그는 갑자기 연이어 가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1840년 3월부터 7월까지 슈만은 음악사에 길이 남을 다섯 편의 뛰어난 가곡집을 작곡했다. 두 편의 《리더 크라이스》(작품 24, 39), 《미르텐의 꽃》(작품 25), 《여인의 사랑과 생애》(작품 42), 그리고 《시인의 사랑》(작품 48)이다. 이들을 포함하여 이 해에 120곡 이상의 가곡과 중창곡이 작곡되었다. 이는 슈만이 평생 남긴 가곡의 대부분을 넘어서는 것으로, 1840년은 '가곡의 해'라고 불린다. 이에 대해 슈만은 "다른 음악에는 전혀 손이 가지 않았다. 나는 나이팅게일처럼 죽을 때까지 계속 노래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결혼 후 슈만은 클라라와 함께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연구했고, 이후에는 베토벤 등 빈 고전파의 현악 사중주곡을 공부했다. 1841년에는 교향곡 1번 '봄'(작품 38)이 완성되었다. 이 교향곡은 슈만의 '라이프치히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이 곡의 성공은 슈만의 창작 활동에서 피아노곡과 가곡에서 교향곡 작가로의 전환이라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후에도 슈만은 《서곡, 스케르초와 피날레》(작품 52),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훗날 피아노 협주곡 1악장), 라단조 교향곡(훗날 교향곡 4번) 등 관현악 작품에 몰두했다.
이듬해인 1842년 슈만은 실내악 분야에 발을 들여놓아 세 편의 현악 사중주곡(가단조, 마장조, 가장조의 작품 41), 피아노 오중주곡(작품 44), 피아노 사중주곡(작품 47) 등이 탄생했다. 이는 프란츠 리스트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인데, 리스트는 1839년 6월 5일자 편지에서 슈만에게 실내악곡 작곡을 권유했었다. 이에 따라 1841년을 '교향곡의 해', 1842년을 '실내악곡의 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슈만과 클라라는 어린 시절부터 일기를 썼는데, 결혼과 동시에 각자의 일기를 하나로 합쳐 매일의 일들을 서로에게 보고했다. 매주 일요일에는 한 주간의 일기를 낭독하며 서로 반성하고 의견을 나누었다. 슈만이 집에서 작곡할 때 클라라는 피아노 연습을 자제했다. 이 때문에 클라라는 결혼 5개월 후 일기에 연주력 저하를 한탄하기도 했다.
슈만과 클라라 사이에는 여덟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슈만은 아이들을 좋아하여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었고, 자녀가 늘어남에 따라 클라라는 연주가, 주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병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슈만의 수입만으로는 생활비가 부족하여 클라라는 가계를 꾸리기 위해 연주 여행 횟수를 늘려야 했다.
클라라의 연주 여행에 슈만이 동반하면, 이미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이 높았던 클라라에 비해 슈만은 소홀히 대우받았다. 1842년 연주 여행에서는 올덴부르크에서 클라라 혼자 궁정에 초대되자 슈만은 상처를 받고 라이프치히로 돌아오기도 했다. 굴욕을 겪은 그는 한때 미국으로 이주하는 것까지 생각했다. 1844년 러시아 여행에서도 슈만은 '피아니스트의 남편'으로서 종속적인 위치에 놓였다. 그러나 슈만은 이러한 자신들의 특수한 상황을 명확히 이해하고 "예술가가 결혼하면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할 수는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행복을 오랫동안 지속시키는 것이다. 서로를 소유하고, 마음 깊이 이해하며, 사랑해야만 우리는 함께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슈만 부부 사이에는 일상생활의 부담과 예술적 관점의 차이로 인한 피할 수 없는 긴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보완하는 부부로서 종종 이상적인 커플로 묘사된다.
1.4. 정신 건강 문제

결혼 후 슈만 부부가 4년간 살았던 라이프치히는 빠르게 독일 음악계의 중심이 되어갔다. 그 중심에는 멘델스존이 있었다. 그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맡는 한편, 1843년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창설하고 이그나츠 모셸레스 (피아노), 페르디난트 다비트 (바이올린), 모리츠 하우프트만 (음악 이론) 등과 함께 슈만을 작곡과 피아노 교수로 초빙했다. 멘델스존은 영국의 윌리엄 스턴데일 베넷, 덴마크의 닐스 가데 등을 라이프치히로 초빙했고, 슈만도 이들과 친분을 맺었다. 슈만은 이들을 《음악신보》에서 응원했으며, 베넷에게 《교향적 연습곡》(작품 13)을 헌정하고, 《어린이를 위한 앨범》(작품 68)의 제42곡 '북유럽의 노래'에서는 가데의 이름 철자인 GADE의 음을 주제로 사용했다.
슈만은 이 시기 두 차례 병으로 쓰러졌다. 첫 번째는 1842년으로, '과로'로 인해 클라라와 함께 보헤미아의 온천으로 요양을 떠났다. 슈만은 가정을 유지하는 경제적 부담을 지고 대작을 써도 예상한 수입을 얻지 못해 피로감에 시달리며 점차 신경쇠약 증세를 보였다. 이 때문에 1842년부터 1843년까지 작곡이 거의 진전되지 않았고, 슈만은 내성적으로 변하며 외부와의 새로운 접촉을 꺼리게 되었다. 그러나 1843년 1월 엑토르 베를리오즈가 파리에서 라이프치히를 방문한 것은 슈만에게 자극과 기쁨을 주었다.
1843년 2월경부터 창작 의욕을 되찾은 슈만은 토머스 무어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독창, 합창, 관현악을 위한 오라토리오 《낙원과 페리》(작품 50)를 완성했다. 《낙원과 페리》의 성공은 작곡가로서 슈만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이 해 클라라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가 슈만 부부에게 화해를 요청한 것도 이 곡의 성공이 한 가지 이유였다.

두 번째는 1844년 8월, 러시아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로, 이때는 더욱 심각했다. 이 해 1월 25일부터 5월 말까지 슈만과 클라라는 러시아에 머물렀다. 클라라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황제 앞에서 연주하며 피아니스트로서 성공했지만, 5개월간의 여행은 슈만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라이프치히로 돌아온 슈만은 《음악신보》의 편집장직을 오스발트 로렌츠에게 넘기고, 괴테의 《파우스트》를 음악화할 구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여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고소공포증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슈만은 《파우스트》 제2부 마지막 '신비의 합창'을 작곡했지만, 강도 높은 신경 피로로 인해 구상은 중단되었고, 이 작품의 완성은 드레스덴 시대를 거쳐 뒤셀도르프 시대까지 미뤄지게 된다. 또한 9월에 슈만은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강의를 하려 했으나, 증상 악화로 인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0월 슈만은 드레스덴에서 동종요법 의사 헬비히 박사의 치료를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슈만의 증상은 환청, 끊임없는 떨림, 고소공포증과 날카로운 금속 물체에 대한 다양한 공포증 등이었다. 특히 환청 때문에 작곡도 할 수 없었다. 클라라는 이 무렵 슈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로베르트는 밤새 잠들지 못했습니다. 그의 상상력은 끔찍한 망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일찍, 저는 눈물 흘리는 그를 봐야 합니다. 그는 이미 완전히 포기한 상태입니다"
병 회복에는 기후 조건이 바뀐 곳이 좋다고 생각한 슈만은 드레스덴으로 이주를 결심했다. 이 해 멘델스존이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상임 지휘자직을 사임했고, 슈만은 그 후임을 희망했지만, 덴마크인 닐스 가데가 선택되면서 낙담하고 자괴감에 빠진 것도 이주 이유가 되었다. 1844년 12월, 슈만은 라이프치히 음악원 교수직을 사임하고 클라라와 가족과 함께 라이프치히를 떠났다.

드레스덴으로 이사한 슈만은 바흐의 작품을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다. 1845년 4월 25일, 피아노에 발건반(페달)을 부착한 페달 피아노를 도입하여 바흐의 오르간곡을 연습할 수 있게 했다. 이 해 작곡된 페달 피아노를 위한 《연습곡》(작품 56), 《스케치》(작품 58), 《BACH의 이름에 의한 6개의 푸가》(작품 60) 등은 그 성과이다. 창작력을 서서히 회복한 슈만은 1841년에 썼던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을 개정하고, 새로 두 악장을 추가하여 피아노 협주곡(작품 54)을 완성했다. 이듬해에는 훗날 《교향곡 2번》(작품 61)으로 출판될 곡을 작업했다. 이 작품의 진행은 더딘 편이었고, 건강 악화로 인해 여러 차례 중단되었다. 교향곡이 완성된 후 그는 오페라 《게노베바》 작업에 착수했으며, 이 작품은 1848년 8월에야 완성되었다.
당시 드레스덴은 작센 왕국의 수도로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통치 아래 있었다. 예술가들은 왕의 고용인 신분이었으며, 궁정 화가들은 지원을 받았지만 음악가들은 냉대받았다. 또한 교향곡이나 실내악보다는 오페라가 선호되었다. 이러한 보수적이고 답답한 환경에서 슈만의 친구가 된 인물은 아마추어 남성 합창단 지휘자였던 페르디난트 힐러였다. 슈만과 힐러는 협력하여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와 같은 회원제 연주회를 기획했고, 1845년 11월 10일 연주회를 성사시켰다. 이때 출연 예정이었던 클라라가 병으로 인해 대역으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독주를 맡은 이는 당시 14세였던 요제프 요아힘이었다. 그러나 일반 대중에게 음악이 잘 보급되지 않은 드레스덴에서의 운영은 어려웠고, 활동 지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슈만은 드레스덴 궁정 오페라 극장의 악장이었던 리하르트 바그너를 만났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냉랭했고, 발전하지 못했다. 반면, 멘델스존을 높이 평가했던 슈만은 더욱 친밀한 서신 교류를 이어갔다.
슈만 부부에게 드레스덴은 라이프치히에 비해 음악적으로 뒤떨어져 있었고, 편안한 곳이 아니었다. 가계에 도움을 주기 위해 클라라는 출산과 육아 사이사이에 종종 연주 여행을 떠났다. 1846년 11월 말부터 이듬해 1847년 1월까지 두 사람은 빈에서 일련의 연주회를 개최하여 슈만의 교향곡 1번과 피아노 협주곡 등을 연주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음악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는 이때 연주회 종료 후 분장실에서 "모두 차가운 사람들이야, 은혜도 모르는 것들"이라며 화를 내는 클라라와 "진정해요. 클라라, 10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변할 거예요"라며 달래는 슈만의 모습을 기록했다. 두 사람의 위기를 구한 것은 '스웨덴의 나이팅게일'이라 불리던 소프라노 제니 린드였다. 그녀와의 협연 덕분에 1월 11일 마지막 연주회는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또한 린드를 통해 슈만과 안데르센과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1847년부터는 오페라 《게노베바》(작품 81) 작업에 착수했지만, 정신 장애에 시달리면서 작곡을 진행했다. 7월, 고향 츠비카우에서 슈만을 기리는 기념제가 2주간 개최되었고, 초청받은 슈만은 은사 쿤츠슈와 어린 시절 친구들을 재회했다。기념제의 하이라이트는 슈만의 교향곡 2번 발표였으며, 이 사건은 슈만 부부의 빈에서의 좌절을 보상해 주었다. 한편 이 해 장남 에밀이 요절하고, 11월 4일 멘델스존이 사망한 것은 큰 타격이었다.
1847년 11월, 친구 힐러가 뒤셀도르프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며 드레스덴을 떠나게 되었다. 슈만은 힐러의 지명을 받아 남성 합창단 '리더타펠'의 지휘자가 되었다. 슈만은 이듬해 1월 이 합창단을 70명 규모의 혼성 합창단으로 확대했다. 자작 발표의 장을 얻게 되면서 슈만은 이후 많은 합창곡을 작곡했다. 이 시기 슈만의 양식은 원숙의 경지에 이르러 깊이와 철학적 사색을 보여주었다. 성악곡으로는 오페라 《게노베바》(작품 81), 바이런의 시를 바탕으로 한 극 부수 음악 《만프레드》(작품 115), 《괴테의 파우스트로부터의 장면》(WoO 3) 제1부의 주요 부분이 작곡되었고, 가곡으로는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 가곡》(작품 98)이나 《레나우 가곡집》(작품 90) 등이 있다. 관현악 작품으로는 앞서 언급한 피아노 협주곡과 교향곡 2번 외에 《4대의 호른과 관현악을 위한 콘체르트슈튀크》(작품 86, 1849년)가 있다. 실내악 분야에서는 피아노 삼중주 1번, 피아노 삼중주 2번 외에 오보에, 클라리넷, 첼로, 호른을 위한 작품들이 쓰였다. 또한 피아노곡으로는 《숲의 정경》(작품 82)과 《어린이를 위한 앨범》(작품 68)이 있다. 후자는 '즐거운 농부' 등 친숙한 곡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드레스덴에서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지낸 삶 속에서 작곡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독일 삼월 혁명은 1849년 5월 드레스덴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상적으로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에 공감했지만, 폭력을 싫어했던 슈만은 바그너와 같은 정치적 행동은 하지 않았다. 슈만은 가족과 함께 교외의 클라이샤로 피신했다. 1850년, 바흐의 많은 작품이 출판되지 않고 묻혀 있는 것에 분개했던 슈만은 바흐 서거 100주년을 맞아 '바흐 협회' 설립에 힘썼고, 바흐 작품 전집 계획에 참여하여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 이 무렵 고소공포증이 악화되어, 같은 해 오페라 《게노베바》의 라이프치히 공연 당시에는 숙소의 2층 방에 머물 수 없어 1층으로 방을 바꿔야 할 정도였다. 이 무렵 슈만은 음악계에서 정규직을 얻고 싶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고, 1847년에는 공석이 된 빈 음악원 원장직 취임을 타진했으며, 멘델스존 사망 후에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지휘자 취임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지만, 모두 실현되지 않았다. 1849년 가을, 힐러로부터 쾰른에서 새로운 직책을 맡게 되어 뒤셀도르프 음악 감독 자리를 슈만에게 양보하고 싶다는 편지를 받았다. 슈만은 망설였지만, 드레스덴의 구습에 싫증을 느끼던 클라라는 슈만에게 정규직을 얻을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권유했다. 슈만은 이를 수락했고, 1850년 9월 가족과 함께 뒤셀도르프로 떠났다.
1.4.1. 뒤셀도르프 시기

뒤셀도르프에서 슈만 부부는 환영을 받았다. 이 곳에서 슈만은 관현악단과 합창단의 지휘를 맡았고, 슈만이 지휘한 첫 콘서트는 성공을 거두었다. 창작력도 왕성하여 이 시기에 연이어 작곡된 《첼로 협주곡》(작품 129)과 《교향곡 3번 '라인'》(작품 97)은 슈만의 뒤셀도르프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첫 시즌이 끝나고 1851년 3월, 지역 신문이 슈만의 지도력을 비판하는 익명 기사를 게재하며 논란이 시작되었다. 이 해 슈만은 실내악 협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다음 시즌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슈만은 오른손 불편함 때문에 종종 지휘봉을 떨어뜨렸고, 예를 들어 미사곡 연주에서는 곡이 끝나고 신부가 기도를 시작했는데도 계속 지휘를 하는 등의 일이 발생했다. 또한 슈만의 내향적인 성격과 특히 이 무렵 두드러지기 시작한 자폐증 때문에 단원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지휘 기술 부족과 자신의 생각을 오케스트라에 명확히 전달하는 능력 부족이 드러나면서 슈만의 명성은 급속히 시들었다. 1852년 겨울에는 오케스트라 이사회가 슈만의 연습 방식에 대해 비판하는 서한을 보내 마찰이 표면화되었다. 서한에는 사임 권고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고, 슈만은 거부했지만, 이에 대해 이사회는 총사퇴로 응했다. 새로 조직된 이사회와 슈만은 율리우스 타우슈를 보조 지휘자로 합창단 연습을 맡기고, 슈만은 오케스트라 연습과 공개 콘서트 지휘를 계속하기로 합의했다.
1853년 5월 개최된 '저지대 라인 음악제'에서는 개정된 슈만의 교향곡 4번 (작품 120)이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5월 17일에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요제프 요아힘과 협연했다. 요아힘은 슈만에 대한 찬탄을 표했고, 두 사람의 교류를 통해 두 편의 바이올린 소나타(작품 105, 작품 121),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작품 131), 바이올린 협주곡(작품 번호 없음)이 쓰였다.

그러나 같은 해 가을에는 오케스트라와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요아힘을 초청하여 열린 공개 콘서트에서 슈만은 연주를 시작할 수 없었다. 요아힘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젊은 시절에는 정확하게 박자를 맞출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는 연주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낙원과 페리》 리허설에서는 클라라(피아노를 치고 있었다)가 '주인님은 여기를 약하게 쳐 달라고 하십니다'라고 말했고, 슈만은 옆에서 그 말대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연주가 잘 안 되면 혼자 화를 냈다. 언젠가 자신의 교향곡을 연주할 때, 그는 지휘봉을 든 채 서 있었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악기를 든 채 언제 연주를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첫 번째 악보대에 앉아 있던 쾨니히스레우와 내가 손으로 신호를 보내 연주를 시작하자, 슈만은 기쁜 듯 웃으며 따라오는 식이었다"
이러한 슈만의 기이한 행동은 병의 진행에 따라 그의 신체 기능이 침범되어 동작, 언어, 청력 등이 불균형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된다. 이 이후 슈만에게 지휘할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오케스트라 통솔력을 잃은 슈만에게 이사회는 타우슈를 정식 지휘자로 임명하여 콘서트 지휘를 모두 맡길 것을 요구했다. 슈만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슈만과 클라라는 경제적인 이유로 이러한 굴욕을 감내해야 했다고 전해진다.
슈만의 병세는 점차 심해졌다. 1851년 6월 슈만 자신도 "신경 발작"에 계속 시달리고 있음을 밝혔다. 1852년 여름에는 신경 과민, 우울증, 청각 불량, 언어 장애 등의 증상이 있었고, 의사의 권유로 슈만 부부는 북해 연안의 휴양지 스헤페닝언에 갔지만 효과는 없었다. 1853년 3월, 슈만은 강령술을 다룬 책을 읽고 차녀 엘리제와 함께 영매 실험을 시작했다고 한다. 슈만은 5월 25일자 힐러에게 보낸 편지에 "정말 신기한 현상입니다"라고 썼다. 1853년 6월 클라라가 기록한 일기에는 슈만이 잠에서 깨어나 마비성 발작에 시달렸음이 기록되어 있다. 슈만의 말은 점차 두서가 없어지고, 발음도 어눌해지고 불분명해졌다.


1853년 9월 30일, 당시 20세였던 요하네스 브람스가 요아힘의 소개장을 들고 슈만 가를 방문했다. 브람스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자작 소나타를 연주하기 시작하자, 몇 마디도 채 지나지 않아 슈만은 흥분하여 방을 뛰쳐나가 클라라를 데리고 돌아와 "자, 클라라, 네가 아직 들어보지 못한 훌륭한 음악을 들려줄게. 젊은이, 처음부터 다시 연주해 주겠나"라고 말했다. 이 만남은 음악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었으며, 슈만 가의 암울한 나날에 한 줄기 빛을 주었다. 슈만은 브람스의 뛰어난 작곡가적 재능을 인정하여 '젊은 독수리'라 불렀다. "그가 성장할수록 나는 사라질 뿐"이라고도 말했다.
슈만은 라이프치히의 음악 출판사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에 편지를 써 브람스를 소개하는 한편, 10년 만에 다시 붓을 들어 '새로운 길'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평론을 《음악신보》에 기고하여 브람스의 천재성과 빛나는 미래를 예언했다. 슈만의 후의에 깊이 감사한 브람스는 슈만의 가장 충실한 제자가 되었고, 슈만이 절망의 나락에 있을 때도 변함없는 우정을 보여주었다. 브람스는 또한 클라라가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위로하며 그녀의 정신적 지지대가 되었다. 브람스는 10월 내내 슈만 가에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요아힘도 뒤셀도르프를 방문했고, 슈만은 브람스 및 제자 알베르트 디트리히와 함께 《F.A.E. 소나타》를 공동 작곡하여 요아힘에게 선물했다.
슈만은 클라라와 함께 종종 뒤셀도르프를 벗어나 연주 여행을 다녔다. 특히 네덜란드에서는 슈만의 작품이 받아들여져 높은 평가를 받았다. 1854년 초에는 요아힘과 브람스와 함께 여행하며 하노버에서의 연주회를 성공시켰다. 슈만의 일기에 따르면, 1854년 2월 10일 밤 그는 심한 귓병에 시달렸다. 나흘 뒤인 2월 14일, 레스토랑에서 바이올리니스트 베커와 동석한 슈만은 손에 든 신문을 내려놓고 "더 이상 읽을 수 없다. A음이 계속 울려서 들린다"고 말했다고 한다. 클라라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불쌍한 로베르트,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다. 그에게는 어떤 소리도 음악으로 들리는 것이다. ...이것이 멈추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다고 몇 번이나 호소한다. 거대한 관현악 같은 것이 들리고, 그것이 끝날까 싶으면 또 다른 음악이 그의 환상 속에 들려와, 환청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1.4.2. 뒤셀도르프 시기 작품
슈만의 뒤셀도르프 시대 작품은 다방면에 걸쳐 있으며, 실생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의 창조력에는 거의 영향을 미 미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첼로 협주곡은 1850년 10월 10일부터 24일까지, 교향곡 3번은 1850년 11월 2일부터 12월 9일까지,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은 4일, 바이올린 소나타 2번은 6일, 피아노 삼중주 3번은 7일 만에 작곡되는 등 놀라운 속필을 보여주었다. 《헤르만과 도로테아》 서곡은 불과 몇 시간 만에 작곡되었다.
드레스덴 시대부터 시작된 '문학적 음악'의 계열로는 위에서 언급한 괴테의 《헤르만과 도로테아》 서곡 외에 실러의 《메시나의 신부》 서곡,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 서곡(모두 1850년), 울란트의 《왕자》, 《가수의 저주》(1852년) 등이 있다. 슈만 평생의 대작이 된 《괴테의 파우스트로부터의 장면》은 라이프치히 시대인 1844년 제2부 종말 장면을 작곡한 이래 10년에 걸친 구상이 되었고, 마지막 서곡은 1853년 4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작곡되었다。
뒤셀도르프 음악 감독의 직무에는 가톨릭 교회의 전례를 바탕으로 한 종교 음악의 실천 의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슈만은 팔레스트리나와 바흐,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등의 작품을 접하며 종교 음악 분야에 손을 대어, 1849년 관현악 반주에 의한 남성 중창을 위한 모테트 《고통의 골짜기에서도 절망하지 말라》(작품 93), 1852년에는 미사곡(작품 147), 레퀴엠(작품 148) 등이 작곡되었다.
1.5. 음악 비평 활동
슈만의 음악 비평 활동은 1832년 라이프치히의 《일반음악신문》에 투고한 "제군, 모자를 벗어라, 천재다"라는 유명한 논문으로 프레데리크 쇼팽을 소개한 것에서 시작된다. 당시 독일에서 유력한 음악 잡지로는 《일반음악신문》과 《음악 예술의 여신》 두 가지가 있었는데, 《일반음악신문》은 1798년 창간된 독일 최초의 음악 잡지로 베토벤 작품 보급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1830년경에는 음악 비평의 자세가 극도로 보수적이어서, 이 신문은 이후 슈만의 기고를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여 게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 무렵 라이프치히의 커피 하우스 '카페 바움'에서 열리는 음악 담론에는 슈만 외에 프리드리히 비크, 피아니스트 율리우스 크놀, 화가 요한 페터 뤼저, 의사 모리츠 에밀 로이터, 슈만의 친구이자 피아니스트 루트비히 슝케 등이 참여했다. 그들의 논의에서 새로운 음악 잡지 계획이 세워졌고, 1834년 4월 3일 《음악신보》(Neue Zeitschrift für Musik)가 창간되었다.
《음악신보》의 의의와 목적은 현재와 미래를 대변하는 젊은 음악가들의 진가가 인정받고 귀 기울여질 수 있도록 노력하여 성과를 얻는 데 있었다. 슈만 자신의 말에 따르면, 창조적인 예술가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그 자신의 실력뿐만 아니라 글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관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19세기 전반 라이프치히에서 많은 중요한 음악 잡지가 출판된 가운데, 1834년에 창간된 《음악신보》는 혁신적이라고 자부하는 젊은 세대의 작곡가와 비평가들의 강력한 반격으로 볼 수 있다.
《음악신보》의 초대 편집장은 율리우스 크놀이었고, 슈만은 편집을 도왔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크놀이 병에 걸리고, 비크가 이 일에 흥미를 잃고, 슝케가 1834년 말 폐결핵으로 사망하자, 슈만이 모든 편집 업무를 이어받게 되었다.
1.5.1. 《음악신보》 창간과 다비드 동맹
《음악신보》 지면에서 슈만은 '다비드 동맹'이라는 가상의 단체를 만들어 음악계의 속물인 '불레셋인'과 싸운다는 개념으로 비평을 전개했다. '다비드 동맹'의 구성원으로는 슈만 자신과 친구, 동료들을 상정하고, 비평 내용에 따라 필명을 부여했다. 예를 들어 '플로레스탄'은 행동적인 정열가, '오이제비우스'는 온화한 몽상가로, 슈만 자신의 성격의 두 가지 측면을 대표한다. 또한 '마이스터 라로'는 분별력 있는 중재자 역할을 하며, 그 모델로는 프리드리히 비크를 상정하는 설과 슈만과 클라라의 이름을 합친 'claRARObert'에서 유래했다는 추정이 있다. '리비아', '마리아', '엘레오노레', '에스트렐라', '키아리나', '치리아' 등의 여성 이름은 리비아 게르하르트, 헨리에테 포익트, 에르네스티네 폰 프리켄, 그리고 클라라 비크 등 당시 슈만과 교류했던 여성들에게서 따왔다. 이 외에도 '서펜티누스(뱀 신사. 클라라와의 연애 관계를 둘러싼 라이벌이었던 카를 방크)'나 '크니프(라이벌 음악 비평 잡지 편집자 핑크의 역순)'처럼 특정 인물을 비꼬는 필명도 있었다. 이러한 기법은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라이프치히 시민들은 이 필명들의 정체를 자신들이 잘 아는 음악가들 중에서 찾으려 했다.
슈만 자신은 사망 2년 전에 다음과 같이 의도를 설명했다.
"예술에 대해 대조적인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정반대의 예술적 인격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중에서도 플로레스탄, 오이제비우스와 중용을 취하는 인물로서의 라로 악장이 가장 중요했다."
이러한 슈만의 음악 철학은 그가 경도했던 장 파울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소설 《건방진 시절》에 등장하는 '발트'와 '부르트'가 저자 장 파울 성격의 대조적인 두 면을 나타냄을 슈만은 간파했으며, 그는 대위법을 음악 교사들보다 오히려 장 파울에게서 배웠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이러한 이중성을 슈만의 조현병 초기 증상으로 보는 해설가들도 있다.
'다비드 동맹'은 슈만의 작품에 실제로 나타난다. 1835년 완성된 《사육제》(작품 9)에는 '오이제비우스'나 '플로레스탄' 등 동맹 구성원들이 등장하며, 종곡은 '다비드 동맹원들의 행진'이다. 슈만은 여기서 저속한 불레셋인을 풍자하기 위해 17세기 '할아버지의 춤'이라는 멜로디를 인용했다. 같은 해 완성된 피아노 소나타 1번(작품 11)의 헌사에는 슈만이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고 "클라라에게 바침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로부터"라고 적었다. 1837년 완성된 《다비드 동맹 춤곡집》(작품 6)에는 각 곡에 'E'(오이제비우스의 첫 글자)나 'F'(플로레스탄의 첫 글자) 또는 'E와 F'와 같은 서명이 있으며, 곳곳에 "이때 플로레스탄은 침묵했지만, 감정의 고조에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와 같은 메모가 덧붙여져 있다.
슈만의 음악 비평은 새로운 독일 근대 음악의 특성을 시적으로 명확히 하는 목적을 가졌다. 쇼팽과 베를리오즈, 베넷, 존 필드 등 외국 작곡가들도 옹호했지만, 슈만이 의도한 것은 자신이 사는 시대와 풍토에 뿌리내린 음악 고유의 요소를 명확히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는 쇼팽 등의 천재도 마찬가지로 시대와 풍토의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슈만은 이탈리아 음악의 영향을 독일 음악 발전에 해롭다고 보았고, 이탈리아인을 '카나리아'에 비유하며 '벨칸토' 정신을 비판했다. 마이어베어에 대해서는 "텅 빈 데클라마치온(극적 낭독. 노래에서 음악보다 말을 우선시하는 것)"이라 했고, 로시니의 콜로라투라를 무용하다고 공격했다. 또한 자작에는 프랑스어 곡명이나 독일어 음악 용어를 부여하여 이탈리아어 개념에서 벗어나려 했다.
슈만은 약 10년에 걸쳐 《음악신보》를 단독으로 주재했다. 재치 있고 화려하며 상상력 넘치는 그의 문체는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음악신보》는 독자층을 넓혀 독일 전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 잡지가 되었다. 슈만은 음악 저널리즘에 확고한 입지를 다졌고, 처음에는 작곡가로서보다 오히려 비평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슈만의 비평 활동은 그가 작곡가로서 자립할 때까지 재정적 안정감을 주는 역할도 했다.
슈만은 1844년에 《음악신보》의 편집장직을 오스발트 로렌츠에게 넘기고 드레스덴으로 이사했다. 그 후 상근 편집부원으로는 카를 방크, 루트비히 뵈너, 그리고 리하르트 바그너도 합류했다. 1853년 브람스와의 만남을 계기로 슈만은 10년 만에 다시 붓을 들어 '새로운 길'이라는 제목의 평론을 써 브람스를 세상에 소개했다. 이 평론은 쇼팽의 천재성을 일찍이 발견했던 슈만의 첫 평론과 호응하여 '천재는 천재를 안다'는 명언의 훌륭한 실례가 되었다.
《음악신보》 발행을 중심으로 한 슈만의 저술 활동은 근대 음악 비평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슈만의 논문이 오늘날에는 너무나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색채가 짙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마르부르크 대학교 교수 지크하르트 되링에 따르면, 슈만은 자신만의 예술 방침을 관철하는 데 열심이었지만, 편향된 판단을 피할 수 없었고, 그렇게 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열광적인 열정에 사로잡혀 음악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려 했지만, 음악 전반의 발전을 촉진하려 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경향에 내재된 사고방식은 로렌츠로부터 편집권을 이어받은 프란츠 브렌델이 오로지 '신독일악파'만을 부각시키면서 더욱 명확해졌다.
1.6. 악기
로베르트 슈만이 연주한 악기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콘라트 그라프의 그랜드 피아노이다. 이 피아노는 1839년 로베르트와 클라라가 결혼할 때 피아노 제작자가 선물한 것이었다. 이 악기는 뒤셀도르프의 슈만 작업실에 놓였고, 나중에 클라라 슈만으로부터 요하네스 브람스에게 양도되었다. 여러 곳을 거쳐 음악협회가 소유하게 되었으며, 현재는 빈의 미술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2. 작품
슈만은 당대 주요 음악 장르인 독주 피아노곡,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곡, 실내악, 관현악, 합창곡 및 오페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들은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2.1. 피아노 작품

슈만의 작품번호 23번까지의 곡은 모두 피아노곡이다. 피아니스트를 지망했으나 손을 다쳐 포기하고 작곡으로 전향한 경위로 볼 때, 슈만에게 피아노는 가장 친밀한 악기였다. 초기에는 미출판곡을 포함하여 거의 변주곡만 작곡했으며, 작품 1번인 《아베크 변주곡》도 마찬가지이다.
피아노 작법 면에서는 페달 사용법에 특징이 있는데, 《나비》(작품 2)의 끝 부분에서는 딸림7화음의 구성음을 점차 줄여나가 마지막에 딸림음만 남아 사라지도록 페르마타를 놓는다. 이러한 페달이 필수적인 종결부는 《아베크 변주곡》의 종곡에서도 볼 수 있다.
《사육제》(작품 9)와 《교향적 연습곡》(작품 13)에서 슈만은 초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이 직면했던 대곡의 음악 구성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들은 실로 꿰어진 진주처럼 작은 곡들이 끊임없이 연주되는 새로운 형식의 음악이다. 19세기 전반에는 멘델스존이나 쇼팽, 리스트 등도 피아노 소품을 작곡했지만, 슈만의 경우 소품들의 모음이 하나의 곡으로 구성되거나 문학적·환상적인 연관성으로 묶여 있으며, 이러한 곡의 구성 방식은 슈만만의 독창적인 것이다.
또한 슈만은 곡에서 마음에 드는 리듬을 도입하면 그것에 극도로 오랫동안 집착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교향적 연습곡》의 종곡이나 피아노 소나타 등 다른 작품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나타난다.
클라라와의 결혼을 둘러싼 비크와의 다툼 동안, 슈만은 그의 대표적인 피아노곡들을 연이어 작곡했다. 즉 피아노 소나타 1번(작품 11), 《환상 소곡집》(작품 12), 피아노 소나타 3번(작품 14), 《어린이의 정경》(작품 15), 《크라이슬레리아나》(작품 16), 《환상곡》(작품 17) 등이다. 클라라와의 결혼까지의 6년간은 슈만의 작품에 피아노 역사상 유례없는 비극적인 웅장함을 부여했으며, 이 작품들에는 클라라에 대한 사랑이 기쁨, 희망, 고통, 비탄의 형태로 담기지 않은 마디가 한 마디도 없었다.
한스 요제프 오르타일은 이 몇 년간 슈만이 쓴 모든 작품이 클라라와의 관계를 소재로 삼고 있으며, 그 핵심을 이루는 것이 《어린이의 정경》이라고 말한다. 이 곡집은 슈만 자신이 정확히 언급했듯이 어린이용이 아니라, 클라라와의 인연부터 1838년 봄 작곡 시기까지 슈만이 비크 가정과의 관계에서 분명히 떠올린 과거의 일들을 음악으로 재창조한 '기억의 대화'이다.
슈만의 피아노곡에는 곡의 시작부와 종결부를 같은 프레이즈로 하는 특징적인 곡들이 많다. 예를 들어 《어린이의 정경》의 제4곡 '조르는 아이'나 《숲의 정경》(작품 82)의 제7곡 '예언하는 새'가 있다. 또한 싱코페이션을 좋아하여 종종 표기상의 박자와 귀로 듣는 박자가 다른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어린이의 정경》의 제10곡 '아주 진지하게(열중하여)'나 《환상 소곡집》의 제1곡 '저녁에' 등이 그러한데, 후자는 곡 전체에서 3/8박자로 들리지만 악보는 2/8박자로 쓰여 있다.
장 파울의 영향으로 슈만의 초기 피아노곡의 기조에는 유머의 개념이 있으며, 《유모레스크》(작품 20)에서는 이 개념이 제목 자체가 되었다. 슈만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유머'는 독자적인 독일적 내용을 가지며, '몽환적'이면서 '눈물 아래에서 미소 짓는' 마음이다. 영감은 시적인 사념이 되어 피아노 소리로 전환된다. 이러한 것이 슈만 고유의 세계이다.
일반적으로 '슈만의 피아노곡'으로 알려진 것은 1839년의 《4개의 소품》(작품 32)까지이며, 드레스덴 시대 이후에는 페달 피아노를 위한 《6개의 연습곡》(작품 56), 같은 《4개의 스케치》(작품 58), 《6개의 푸가》(작품 60), 《4개의 푸가》(작품 72)와 같은 바흐의 대위법 연구 성과를 보여주는 작품군이 나타나고, 또한 《어린이를 위한 앨범》(작품 68)을 비롯한 가정용 또는 교육용으로 보이는 피아노 작품들도 쓰였다. 또한 1850년 슈만은 '젊은 음악가에게 주는 조언'을 발표했는데, 이는 《어린이를 위한 앨범》의 서문으로 자주 사용된다.
2.2. 가곡

낭만주의 가곡의 역사에서 슈만은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슈만은 낭만주의의 동경 그 자체를, 또한 그 가장 본질적인 특징을 구현하고 있으며, 그의 가곡은 모차르트를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작곡가도 미치지 못하는 더할 나위 없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슈만의 가곡은 시와 음악의 향기 넘치는 합일이다. 슈만이 가곡만 썼다면 그는 더 위대한 거장으로 평가받았을 것이라는 평도 있다.
슈만이 본격적으로 가곡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840년으로, 슈만은 이 해 9월 클라라와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슈만은 30세였으며, 클라라의 존재가 그의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그 전까지 피아노곡을 주로 써왔던 슈만은 1839년 헤르만 힐슈바흐에게 보낸 편지에 가곡에 대해 "기악곡에 비해 훌륭한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슈만의 견해는 놀라운 전환을 이루어, 가곡 창작은 슈만에게 큰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여기에는 친구이자 성악 교사였던 오스발트 로렌츠의 영향도 있었다.
1840년에만 슈만은 120곡 이상, 평생 동안은 270곡 이상의 가곡을 작곡했다. 슈만의 문학에 대한 풍부한 소양이 시 선택에도 반영되어 있다. 그가 선택한 시인 중에는 하인리히 하이네가 44편으로 가장 많고, 이어서 프리드리히 뤼케르트가 42편으로 뒤를 잇는다. 그 다음은 엠마누엘 가이벨이다.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와 유스티누스 케르너는 각각 20곡씩이다. 괴테에 대해서는 가곡은 18곡으로 그리 많지 않지만, 더 대규모의 합창 작품이 있다. 이 외에도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팔러스레벤, 니콜라우스 레나우, 에두아르트 뫼리케, 루트비히 울란트, 프리드리히 헤벨 등 독일 시인·작가,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번스, 덴마크의 안데르센, 영국의 바이런 등이 다루어졌다.
형식 면에서는 변화 유절 형식과 통작 형식이 특히 많으며, 몇몇 가곡집에서는 주제적 연관성을 엮어내는 시도를 성공시켰다. 또한 가곡에서 기존에는 반주에 불과했던 피아노의 위상을 높였다. 슈만의 가곡에서는 피아노가 노래에 대해 대등하며, 때로는 작품을 지배하는 역할을 맡는다. 예를 들어 《시인의 사랑》(작품 48)의 종곡은 충실한 독주 피아노로 끝난다. 이 때문에 슈만의 가곡은 '노랫소리 반주가 있는 피아노곡'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3. 관현악 작품

슈만은 관현악법을 익히기 어렵다고 인정했으며, 많은 분석가들이 그의 관현악 작법을 비판했다. 슈만의 관현악법에 대한 비판적 측면으로는 (i) 현악 파트가 연주하기 어렵다는 점(현악기 기법에 대한 그의 불충분한 이해를 보여줌), (ii) 선율선과 화성선 사이의 만족스러운 균형을 확보하는 데 자주 실패한다는 점, 그리고 가장 심각하게는 (iii) 현악, 금관, 목관 섹션이 대부분의 시간 동안 함께 연주되어 작곡가이자 음악학자인 애덤 카스가 '풍부하지만 단조롭게 진한 색조'라고 부르는 효과를 내는 경향이 있다는 점 등이 있다. 분석가 스콧 번햄은 "불분명하고 뭉툭한 음질로, 베이스 라인을 식별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언급했다. 말러, 막스 레거,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오토 클렘페러, 조지 셀 등 여러 지휘자들이 그의 관현악곡을 지휘하기 전에 악기 편성을 변경하기도 했다. 음악 학자 줄리어스 해리슨은 그러한 변경이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슈만의 따뜻하고 생동감 넘치는 음악의 본질은 그의 예술적 성격을 이루는 모든 개인적인 특성, 사랑스러운 특징, 그리고 결함과 함께 솔직한 낭만적 매력에 있다." 슈만의 관현악법은 이후 소규모 편성으로 역사적 고증에 따른 연주 경향이 생기면서 더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1841년 그의 네 편의 교향곡 중 첫 번째 곡의 성공적인 초연 후 《일반음악신문》은 이 곡이 "잘 유창하게 쓰였고... 또한 대부분 지식 있고, 취향 있으며, 종종 매우 성공적이고 효과적으로 관현악화되었다"고 묘사했지만, 훗날 한 비평가는 이를 "주로 일상적인 관현악법을 사용한 부풀려진 피아노 음악"이라고 불렀다. 그해 말 두 번째 교향곡이 초연되었으나 덜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슈만은 10년 후 이 곡을 개정하여 교향곡 4번으로 출판했다. 브람스는 원본의 더 가벼운 악기 편성 버전을 선호했는데, 이 버전은 가끔 연주되고 녹음되지만, 개정된 1851년 악보가 더 일반적으로 연주된다. 현재 《교향곡 2번》(1846년)으로 불리는 작품은 네 곡 중 구조적으로 가장 고전적이며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영향을 받았다. 《교향곡 3번》(1851년)은 '라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교향곡으로는 이례적으로 5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쾰른 대성당의 엄숙한 종교 의식과 라인란트 주민들의 야외 축제를 묘사하는 악장들로 이루어져 있어 작곡가의 회화적 교향곡에 가장 가깝다.
슈만은 1841년 그의 《서곡, 스케르초와 피날레》(작품 52)에서 비전통적인 교향곡 형식을 실험했는데, 이 곡은 때때로 "느린 악장이 없는 교향곡"으로 묘사된다. 그 비정통적인 구조 때문에 덜 매력적이었을 수 있으며, 자주 연주되지 않는다. 슈만은 여섯 편의 서곡을 작곡했는데, 그중 세 편은 바이런의 《만프레드》(1852년), 괴테의 《파우스트》(1853년), 그리고 자신의 《게노베바》에 앞서는 연극 공연을 위한 것이었다. 나머지 세 편은 실러의 《메시나의 신부》,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 괴테의 《헤르만과 도로테아》에서 영감을 받은 독립적인 콘서트 작품이었다.
피아노 협주곡(1845년)은 빠르게 가장 인기 있는 낭만주의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가 되었고, 그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20세기 중반, 교향곡들이 지금보다 덜 높이 평가받던 시기에는 이 협주곡이 《레코드 가이드》에서 "슈만의 대규모 작품 중 일반적인 동의에 따라 완전히 성공한 유일한 작품"으로 묘사되었다. 피아니스트 수잔 톰스는 "녹음 시대에는 종종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역시 가단조)과 짝을 이루어 녹음되었는데, 이는 슈만 협주곡의 영향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언급했다. 1악장은 슈만의 예술적 본성에서 솔직한 플로레스탄과 몽상적인 오이제비우스 요소를 서로 대조시킨다. 활기찬 도입부에 이어 넷째 마디에서 시작되는 애수 어린 가단조 주제가 이어진다. 슈만의 다른 협주곡이나 콘체르탄테 작품 중 피아노 협주곡의 인기에 필적하는 것은 없지만, 《4대의 호른과 관현악을 위한 콘체르트슈튀크》(1849년)와 《첼로 협주곡》(1850년)은 콘서트 레퍼토리에 남아 있으며 음반으로도 잘 발매되어 있다. 후기의 《바이올린 협주곡》(1853년)은 덜 자주 연주되지만 여러 차례 녹음되었다.
2.4. 실내악
슈만은 상당한 양의 실내악곡을 작곡했는데, 그중 가장 잘 알려지고 많이 연주되는 작품은 피아노 오중주 내림마장조(작품 44), 같은 조의 피아노 사중주(모두 1842년), 그리고 세 편의 피아노 삼중주이다. 그중 첫 번째와 두 번째는 1847년에, 세 번째는 1851년에 작곡되었다. 피아노 오중주는 클라라 슈만을 위해 작곡되었고 그녀에게 헌정되었다. 음악학자 린다 코렐 로스너는 이 곡을 "매우 '공개적'이고 화려한 작품이지만, 클라라가 작곡한 주제를 인용하여 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묘사했다. 슈만의 피아노와 현악 사중주 (두 대의 바이올린, 한 대의 비올라, 한 대의 첼로)를 위한 작곡은 슈베르트의 《송어 오중주》(1819년)와 같이 악기 조합이 다른 이전의 피아노 오중주와는 대조적이었다. 슈만의 앙상블은 브람스, 프랑크, 포레, 드보르자크, 엘가 등 후대 작곡가들의 모범이 되었다. 로스너는 사중주가 오중주만큼 화려하면서도 더 친밀하다고 묘사했다. 슈만은 세 편의 현악 사중주곡(작품 41, 1842년)을 작곡했다. 다흘하우스는 슈만이 이 이후 현악 사중주 작곡을 피했는데, 베토벤이 이 장르에서 이룬 업적이 너무나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후기 실내악 작품 중에는 1851년 두 달간의 강렬한 창작 시기에 쓰인 세 편의 실내악곡 중 첫 번째인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가단조 소나타(작품 105)가 있으며, 이어서 피아노 삼중주 3번과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라단조 소나타(작품 121)가 있다.
슈만은 표준적인 악기 조합을 위한 실내악곡 외에도 특이한 악기 조합을 위해 작곡했으며, 종종 어떤 악기를 사용할지 유연하게 결정했다. 그의 《아다지오와 알레그로》(작품 70)에서는 피아니스트가 작곡가에 따라 호른, 바이올린 또는 첼로와 함께 연주할 수 있으며, 《환상 소곡집》(작품 73)에서는 피아니스트가 클라리넷, 바이올린 또는 첼로와 듀엣을 이룰 수 있다. 그의 《안단테와 변주곡》(1843년)은 두 대의 피아노, 두 대의 첼로, 한 대의 호른을 위한 곡이었으나, 나중에는 피아노만으로 연주하는 곡이 되었다.
2.5. 오페라 및 합창곡

《게노베바》는 슈만 생전에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오페라 극장에서는 여전히 희귀한 작품으로 남아 있다. 초연 이후 이 작품은 "가곡의 밤일 뿐,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작품을 옹호했던 지휘자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는 이 작품이 저평가된 이유를 음악 비평가들에게 돌렸다. 그는 비평가들이 오페라가 어떠해야 한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이 작품에 접근했으며, 《게노베바》가 그들의 선입견과 일치하지 않자 무조건 비난했다고 주장했다. 아르농쿠르의 견해는 이 오페라에 드라마가 부족하다는 것과 대조적으로, 1987년 미국에서 이 작품의 첫 전문 무대 제작을 지휘했던 빅토리아 본드는 이 작품이 "고도의 드라마와 넘치는 감정으로 가득 차 있다. 내 생각에는 무대화하기에도 아주 적합하며, 결코 정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오페라와 달리 슈만의 세속 오라토리오 《낙원과 페리》는 그의 생전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후에는 간과되었다. 차이콥스키는 이 작품을 "신성한 작품"이라 묘사하며 "모든 음악에서 이보다 더 높은 것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지휘자 사이먼 래틀 경은 이 작품을 "들어보지 못한 위대한 걸작이며, 이제는 그런 작품이 많지 않다. ...슈만 생전에 이 작품은 그가 쓴 작품 중 가장 인기가 많았고, 끊임없이 연주되었다. 모든 작곡가들이 이 작품을 사랑했다. 바그너는 슈만이 이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에 얼마나 질투했는지에 대해 썼다"고 말했다. 토머스 무어의 서사시 《랄라 루크》의 한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19세기에 유행했던 페르시아 신화의 이국적이고 다채로운 이야기를 반영한다. 1843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슈만은 "지금 나는 큰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착수한 것 중 가장 큰 프로젝트이다. 오페라는 아니고, 콘서트홀을 위한 거의 새로운 장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844년부터 1853년 사이에 작곡된 《괴테의 파우스트로부터의 장면》은 또 다른 혼합 작품으로, 오페라적인 양식을 띠지만 콘서트 연주를 위해 쓰였고 작곡가는 이를 오라토리오라고 불렀다. 이 작품은 슈만 생전에 완전하게 연주된 적은 없지만, 1849년 괴테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바이마르에서 세 번째 부분이 성공적으로 연주되었다. 옌센은 슈만이 대중적 취향에 전혀 타협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이 놀랍다고 언급한다. "음악은 특별히 선율적이지 않다... 파우스트나 그레트헨을 위한 대규모 아리아도 없다." 이 작품 전체는 슈만 사망 6년 후인 1862년 쾰른에서 처음으로 연주되었다. 슈만의 다른 성악 및 관현악 작품으로는 진혼곡이 있는데, 비평가 이반 마치에 의해 "오랫동안 간과되고 저평가된" 작품으로 묘사된다. 모차르트처럼 슈만도 이 미사곡이 자신의 진혼곡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2.6. 종교 음악
슈만이 종교 음악에 진지한 열정을 쏟았다는 사실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슈만은 "만약 성경과 셰익스피어와 괴테를 읽고 그것들을 자신 안에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에게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말했다. 또한 슈만이 아우구스트 슈트라칼리안에게 보낸 1851년 1월 13일자 편지에는 "예술가의 지고한 목적이 종교 음악에 창조적인 힘으로 기여하는 것임은 확실하다"고 적혀 있다.
1852년부터는 바흐의 미사곡 나단조나 마태 수난곡 연주회도 적극적으로 개최했으며, 이 무렵 《스타바트 마테르》나 뤼케르트의 시에 의한 《독일 레퀴엠》, 개신교 전례를 바탕으로 한 레퀴엠이나 오라토리오 등의 작곡도 계획했지만, 이들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만의 종교 음악에 대해 비평가들은 대체로 혹평을 내렸다. 예를 들어 슈만의 미사곡과 레퀴엠의 텍스트 선택에 대해 슈피타는 낭만적, 신비적 성격, 내밀한 것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지만, 아우구스트 라이스만(1825년~1903년)은 이 작품들의 구성적 약점을 지적했다. 담스는 슈만의 기악곡에서 대위법의 숙련도에 비해 교회 음악에서 성부의 폴리포니가 빈약한 이유를 의문시하며, 슈만의 미사곡과 레퀴엠은 단순히 음악적 기록으로만 다루어져야 하며 연주될 가치가 없다고까지 말했다.
3. 동시대 음악가와의 관계
슈만은 당대 주요 작곡가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음악적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의 교류는 그의 음악 세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3.1. 바흐,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은 편지에 "나의 모범이 되는 양대 산맥은 바흐와 베토벤입니다"(1838년, 지모닌에게)라고 썼으며, 특히 바흐에 대해서는 "나의 확신컨대, 바흐에게는 도저히 미치지 못합니다. 그는 차원이 다릅니다"(케퍼슈타인에게), "(바흐는) 예술의 반신이며, 모든 음악의 근원"(철학자 크뤼거에게) 등이라고 기록했다.
1840년 클라라와 결혼한 슈만은 둘이서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연구했고, 그것이 끝난 후에는 베토벤 등 빈 고전파의 현악 사중주곡을 공부했다. 또한 1845년 드레스덴으로 이사했을 때도 바흐의 오르간곡을 연구하기 위해 피아노에 발건반(페달)을 부착한 페달 피아노를 도입했다. 뒤셀도르프 시대인 1853년에는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 6곡과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 6곡의 피아노 반주부를 작곡하는 등, 때때로 바흐 작품으로 돌아갔다.
베토벤에 관해서는 6세 무렵부터 피아노 작품에 친숙했으며, 1825년경부터는 피아노 연탄으로 교향곡 3번 '영웅'을 연주했다. 1828년부터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연주회에서 베토벤 교향곡을 접했으며, 베토벤의 9개 교향곡 총보 외에 현악 사중주곡(대푸가 제외 전곡), 《미사 솔렘니스》, 오페라 《피델리오》, 피아노 협주곡 1번, 피아노 협주곡 4번, 피아노 협주곡 5번, 레오노레 서곡 1번 ~ 3번, 코리올란 서곡, 에그몬트 서곡, 봉헌식 서곡, 피아노 삼중주 7번 '대공', 칠중주곡, 피아노 소나타 전곡, 《가창·바이올린·첼로·피아노를 위한 25개의 스코틀랜드 민요집》 악보를 소유하고 있었다. 슈만의 《환상곡》(작품 17)에서는 베토벤의 가곡집 《멀리 있는 연인에게》 중 '연인이여, 당신을 위해 부르는 이 멜로디를 받아주세요' 부분이 인용되어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어린이를 위한 앨범》(작품 68)의 제2곡 '병사의 행진'에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의 스케르초 악장과의 유사성이 보여 패러디로 추정된다. 피아노 소나타 2번(작품 22)의 종악장에서도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의 종악장을 의식한 것으로 생각된다. 가장 인용이 명확한 것은 《사육제》(작품 10)의 종곡 '다비드 동맹원들의 행진'으로, 여기서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의 피날레 인용이 명확히 들린다.
슈베르트에 대해서는 라이프치히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친구들과 실내악을 연주할 때 가장 좋아했던 곡이 피아노 삼중주 1번이었다. 슈만은 이 무렵부터 슈베르트에게 특별한 친근감을 느끼며 "나만의 슈베르트"라고 말했고, 1828년 11월 슈베르트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는 밤새 울었다고 한다. 1829년 5월부터 하이델베르크에 머무는 동안에도 피아노로 가장 많이 연주한 것이 슈베르트 작품이었고, 이 시기에 연주한 베토벤 작품은 피아노 독주곡이 아닌 실내악곡이 3곡뿐이었다. 슈만은 1838년 가을부터 빈에 머물며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을 발견했고, 1839년 3월 멘델스존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이 사건은 1841년 교향곡 1번 '봄'이 작곡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3.2. 멘델스존, 쇼팽, 리스트

멘델스존에게 슈만은 경외심을 가지고 그 재능을 바라보며 "19세기의 모차르트"라고 불렀다. 1835년 8월 라이프치히에서 만난 이후, 두 사람의 교류는 멘델스존이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일반적으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슈만 측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존경, 멘델스존 측의 적절한 거리를 둔 존경 및 거듭된 원조와 지지 형태로 이해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슈만의 멘델스존에 대한 태도는 무조건적인 찬미가 아니었으며, 멘델스존의 과도한 표현에 대한 반발이나 해석상의 충돌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슈만은 멘델스존이 지휘한 베토벤의 교향곡 9번에 대해 1악장의 템포가 너무 빠르다고 불평했으며, 멘델스존 음악의 미래성에 대해서는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이 끝났음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찬미가》 이후의 작품에는 한 줄기 우울함이 종종 따라붙는다. 그의 사명은 끝났다.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애처롭다."
같은 해 태어난 프레데리크 쇼팽을 슈만은 1831년 "제군, 모자를 벗어라, 천재다"라고 소개했다. 이는 슈만이 발표한 첫 번째 평론이다. 쇼팽은 1835년 10월 라이프치히를 방문했고, 슈만은 쇼팽의 연주를 듣고 《음악신보》에 보고했다. 그 후에도 1836년부터 1842년까지 쇼팽이 출판한 피아노곡 대부분을 《음악신보》에 소개했다. 슈만은 쇼팽을 파리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생각했다. 쇼팽에게 대곡이 없음을 한탄하며 처음에는 더 광범위하고 깊이 있는 음악을 기대했지만, 이내 그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며 실망했다.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작품 35)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았고, 특히 종악장에 대해서는 "이것은 음악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반면 쇼팽은 슈만의 음악에도 비평에도 거의 무관심했으며, 가끔 편지에서 슈만을 언급할 때도 철자를 틀리곤 했다.

슈만과 프란츠 리스트의 관계는 복잡했다. 리스트는 슈만을 일찍이 높이 평가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슈만과 공통된 음악관에 입각하여 슈만의 시적인 음악 이념을 지지했다. 슈만과 리스트 모두 '시적'이라는 말을 좋아했지만, 두 사람에게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미묘하게 달랐으며, 리스트의 경우 표제 음악적인 지향이 더 강했다. 리스트는 또한 슈만의 변주 기교의 뛰어남에도 주목하여, 변주곡에 관해서는 베토벤의 후계자라고 평가했다.
리스트는 슈만의 작품 성장과 발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슈만은 자신의 모든 작품을 리스트에게 보내 조언을 구했고, 리스트가 콘서트에서 슈만의 곡을 연주하는 것에 감사했다. 리스트는 언젠가 슈만에게 피아노가 너무 시시해질 것이라고 간파하고, 1839년 6월 5일자 편지에서 슈만에게 실내악곡 작곡을 권유했다. 슈만이 실내악 분야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842년이다. 이러한 경위로 인해 1840년 처음 리스트를 만났을 때 슈만은 "서로 20년 지기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슈만은 리스트의 졸부 취향이나 상류층 지향에 당혹감을 느꼈다. 또한 멘델스존에 따르면 리스트는 "스캔들과 음악적 이상 사이를 오가는 인물"이었고, 슈만의 아내 클라라는 리스트를 "피아노 파괴자"라고 불렀다. 슈만은 리스트의 너무나 화려한 개성에 점차 견디기 힘들어졌다.
슈만의 드레스덴 시대인 1848년 6월, 두 사람 사이에 유명한 다툼이 일어났다. 구스타프 얀센의 전언에 따르면, 리스트가 슈만 부부를 갑자기 방문하게 되었고, 슈만은 리스트를 맞이하기 위해 음악이 있는 만찬을 준비했다. 그러나 리스트는 약속 시간보다 2시간이나 늦게 도착했다. 음악가들이 슈만의 피아노 사중주곡을 연주하자, 리스트는 "과연 '라이프치히 방식'이군"이라고 평했고, 만찬회는 어색한 분위기가 되었다. 이윽고 멘델스존과 마이어베어의 공적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자, 리스트는 마이어베어를 칭찬하고 멘델스존을 비판했다. 멘델스존은 전년 11월에 사망했었기에, 분노를 폭발시킨 슈만은 리스트의 양 어깨를 잡고 "멘델스존 같은 음악가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당신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라고 외치며 방을 나갔다. 리스트는 클라라를 향해 "그는 저에게 심한 말을 했지만, 그는 제가 그러한 말을 냉정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유일한 상대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사건은 라이프치히와 바이마르의 거의 20년에 걸친 음악계 라이벌 간의 다툼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리스트는 1848년 바이마르에 정착하여 이곳을 새로운 음악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고전주의적 이상을 믿고 교향곡을 지키려 했던 슈만과 달리, 리스트는 표제를 바탕으로 한 교향시를 고안하고 바그너와 함께 '예술의 종합'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화적 분열은 훗날 브람스와 바그너를 각 이론의 수장으로 하는 '낭만주의 시대의 대항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훗날 슈만은 긴 편지를 써 리스트에게 보내 이 일을 덮어두었다. 편지의 마지막은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향상하는 것입니다"라고 맺어져 있다. 사건 후에도 리스트는 바이마르에서 슈만의 작품을 지휘와 피아노 양면에서 적극적으로 다루었다. 《괴테의 파우스트로부터의 장면》 제3부, 《메시나의 신부》 서곡, 극 부수 음악 《만프레드》 발췌, 교향곡 4번, 피아노 협주곡, 《4대의 호른과 관현악을 위한 콘체르트슈튀크》 등이다.
3.3. 브람스


1853년 9월 30일, 당시 20세였던 요하네스 브람스가 요아힘의 소개장을 들고 슈만 가를 방문했다. 브람스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자작 소나타를 연주하기 시작하자, 몇 마디도 채 지나지 않아 슈만은 흥분하여 방을 뛰쳐나가 클라라를 데리고 돌아와 "자, 클라라, 네가 아직 들어보지 못한 훌륭한 음악을 들려줄게. 젊은이, 처음부터 다시 연주해 주겠나"라고 말했다. 이 만남은 음악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었으며, 슈만 가의 암울한 나날에 한 줄기 빛을 주었다. 슈만은 브람스의 뛰어난 작곡가적 재능을 인정하여 '젊은 독수리'라 불렀다. "그가 성장할수록 나는 사라질 뿐"이라고도 말했다.
슈만은 라이프치히의 음악 출판사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에 편지를 써 브람스를 소개하는 한편, 10년 만에 다시 붓을 들어 '새로운 길'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평론을 《음악신보》에 기고하여 브람스의 천재성과 빛나는 미래를 예언했다. 슈만의 후의에 깊이 감사한 브람스는 슈만의 가장 충실한 제자가 되었고, 슈만이 절망의 나락에 있을 때도 변함없는 우정을 보여주었다. 브람스는 또한 클라라가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위로하며 그녀의 정신적 지지대가 되었다. 브람스는 10월 내내 슈만 가에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요아힘도 뒤셀도르프를 방문했고, 슈만은 브람스 및 제자 알베르트 디트리히와 함께 《F.A.E. 소나타》를 공동 작곡하여 요아힘에게 선물했다.
3.4. 바그너

리하르트 바그너는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으며, 슈만과의 친분은 바그너가 10대였던 1831년부터 시작되었다. 훗날 바그너는 드레스덴 궁정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를 맡았고, 슈만이 드레스덴으로 이사하면서 재회했지만, 두 사람은 친해지지 못했다. 슈만이 교류했던 페르디난트 힐러의 모임에서 두 사람은 여러 번 만났지만, 슈만은 바그너의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았고, 마이어베어의 영향을 받아 이탈리아 취향에 물들었다고 판단했다. 또한 "그(바그너)의 수다스러운 재능에는 질려버린다. 그의 머릿속은 항상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바그너는 "슈만은 너무 보수적이어서 나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비난하며, 슈만의 상처받기 쉬운 성격을 '노처녀'라고 비하하기도 했다.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에 대해서는 슈만이 의도적으로 침묵을 지켰다. 1845년 10월 《탄호이저》를 접한 슈만은 2년 후인 1847년 8월 7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탄호이저는 간단히 논할 수 없는 오페라이다. 천재적인 필치로 쓰인 것은 확실하다. 만약 그가 발명의 재능만큼이나 선율의 재능도 갖춘 음악가였다면, 실로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이 오페라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고, 또한 그 가치가 있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다른 기회로 미루겠다."
그러나 슈만의 상세한 평론은 끝내 보류되었다.
슈만의 이러한 태도는 훗날 브람스가 바그너에게 보인 태도와 유사하다. 브람스는 바그너에게 시종일관 거리를 두었지만, 바그너가 브람스에게 보인 태도에 비하면 훨씬 공정했다. 브람스는 빈에서 요아힘에게 보낸 편지에 "지금 바그너가 이곳에 있다. 그리고 나는 바그너주의자가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모순이지만, 이곳 음악가들이 그를 반대하는 경솔한 방식을 보면, 사려 깊은 인간으로서는 이 모순도 감히 감수하고 싶어진다"(1862년 12월 29일)고 썼다.
4. 영향과 평가

슈만은 19세기와 그 이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인물로는 포레와 앙드레 메시제와 같은 프랑스 작곡가들이 있는데, 이들은 1879년 본에 있는 슈만의 묘지를 함께 순례하기도 했다. 또한 비제, 비도르, 드뷔시, 라벨을 비롯한 상징주의 발전에도 영향을 주었다. 알프레드 코르토는 슈만의 《어린이의 정경》이 비제의 《어린이의 놀이》(1871년), 샤브리에의 《그림 같은 소품》(1881년), 드뷔시의 《어린이의 코너》(1908년), 라벨의 《어미 거위》(1908년)에 영감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유럽 다른 지역에서는 엘가가 슈만을 "나의 이상"이라고 불렀고,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은 슈만의 작품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리그는 슈만의 가곡이 "세계 문학에 대한 주요 기여"로 인정받을 가치가 있다고 썼다. 슈만은 또한 안톤 루빈시테인과 차이콥스키를 포함한 러시아 작곡가 학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차이콥스키는 슈만의 관현악법에 비판적이었지만, 그를 "천재 작곡가"이자 "우리 시대 음악의 가장 인상적인 대표자"라고 묘사했다.
브람스는 슈만에게서 체스 두는 법만 배웠다고 말했지만, 다른 독일어권 작곡가들 중 슈만의 영향을 보여주는 인물로는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쇤베르크 등이 있다. 최근에는 슈만이 볼프강 림의 음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는데, 림은 슈만의 음악 요소를 실내악 작품(《이국적인 장면 I-III》, 1982년~1984년)과 오페라 《야코프 렌츠》(1977년~1978년)에 통합했다. 20세기와 21세기 슈만의 영향을 받은 다른 작곡가로는 마우리시오 카겔, 빌헬름 킬마이어, 앙리 푸스외르, 로빈 홀로웨이 등이 있다。
19세기 후반에는 '낭만주의 전쟁'으로 알려진 현상이 발생했다. 클라라와 브람스를 포함한 슈만의 후계자들은 요아힘과 음악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와 같은 지지자들과 함께 베토벤, 멘델스존, 슈만의 고전 독일 전통 음악의 옹호자로 여겨졌다. 이들은 리스트와 바그너의 추종자들, 즉 펠릭스 드라제케, 한스 폰 뷜로(한때), 그리고 음악 비평가로서 조지 버나드 쇼 등과 대립했는데, 이들은 더 극단적인 반음계 화성과 명시적인 표제 내용을 선호했다. 바그너는 교향곡이 죽었다고 선언했다. 세기 전환기에는 풀러 메이틀랜드와 헨리 크레비엘과 같은 비평가들이 양측의 작품을 동등하게 평가했다.
4.1. 슈만 전집 편찬과 메트로놈 문제

슈만 사망 직후인 1856년, 클라라와 브람스는 슈만 작품 전집 출판에 대해 논의했다. 전집 편찬에는 오랜 시간이 걸려, 1879년부터 1893년까지 총 29권의 슈만 작품 전집이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클라라는 1861년 4월 슈만 작품의 메트로놈 지정을 개정하는 문제로 브람스와 상의했다. 브람스는 클라라에게 조언하며 자신의 연주 속도를 매번 기록하고 평균값을 취하기로 했다. 그 결과, 메트로놈 지정이 변경된 곡은 피아노 소나타 3번, 《환상곡》, 《어린이의 정경》, 《녹턴》(작품 23), 《숲의 정경》의 다섯 곡에 불과했으며, 다른 피아노 작품이나 관현악 작품 등은 변경되지 않았다. 변경된 다섯 곡도 수치적으로 아주 미미한 것이었다.
한편,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한스 폰 뷜로는 자신이 교정한 요한 크라머의 1869년판 피아노 연습곡집 서문에 "슈만이 작곡에 몰두하는 동안 내내 고장 난 메트로놈을 사용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라고 언급했다. 또한 1886년 슈만 서한집을 간행한 구스타프 얀센은 그 초판에 슈만 사망 후 메트로놈 지정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고, 슈만 작품 대부분의 메트로놈 지정이 부적절하다고 주장하며 뷜로의 견해를 지지했다. 1887년에는 클라라가 자신의 개인적인 연주 습관을 바탕으로 한 슈만 피아노 작품의 교정판을 같은 출판사에서 출판하며 슈만이 부여한 메트로놈 지정을 대폭 개정했다. 동시대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이자 평생 슈만의 뛰어난 해석자였던 클라라의 개정은 슈만의 메트로놈이 고장 났다는 견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어린이의 정경》에서 제2곡 '이상한 이야기'의 슈만 메트로놈 표시는 ♪=112인 반면 클라라의 지정은 ♪=132이며, 제3곡 '술래잡기'에서는 슈만의 ♪=138에 대해 클라라가 ♪=120으로, 클라라의 해석은 슈만의 메트로놈 표시와 비교하여 빠른 것과 느린 것이 혼재되어 있다. 만약 메트로놈이 고장 났다고 해도, 어떤 때는 빨라지고 또 어떤 때는 느려지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더욱이 슈만은 1853년 작곡가 페르디난트 뵈메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계로 자신의 메트로놈을 확인하여 이상이 없었음을 보고했다. 워커는 이 문제의 발단이 클라라에게 있었다고 본다. 그녀는 슈만의 메트로놈 표시를 수시로 변경했으며, 가끔 보이는 '기발한' 템포 지시에 대해 슈만의 메트로놈이 고장 난 탓이라고 소문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1887년 무렵에는 클라라가 이미 슈만의 의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템포로 연주하고 있었다고도 한다. 워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만의 템포 표시는 종종 부자연스럽게 빠르게 들린다고 말하며, 이에 대해 작곡가가 악보를 보면서 머릿속으로 '연주'했을 때 실제 연주보다 빨라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슈만이 머릿속 템포에 메트로놈을 맞추면서 혼란이 발생했다고 설명한다.
5. 연보
- 1810년 6월 8일: 작센 왕국 츠비카우에서 탄생.
- 1816년 (6세): 데너 경영의 사립 학교에 입학.
- 1817년 (7세): 이 무렵 요한 쿤츠슈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 드레스덴에서 베버 지휘의 베토벤 교향곡을 듣다.
- 1819년 (9세): 카를로비바리에서 모셸레스의 연주를 듣다. 이 무렵 라이프치히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를 관람.
- 1820년 (10세): 츠비카우의 김나지움에 입학.
- 1822년 (12세): 시편 150편. 서곡과 합창 (농부의 합창).
- 1823년 (13세): 아버지의 간행 잡지에 단문 기고 시작.
- 1825년 (15세): 김나지움에서 '독일 문학' 서클 리더가 되다.
- 1826년 (16세): 누나 에밀리에 자살. 아버지 아우구스트 슈만 사망.
- 1827년 (17세): 이 무렵부터 장 파울에 열중. 리디 헨퍼, 난니 파치와의 연애 경험. 아그네스 칼스와 만나 친밀하게 교류.
- 1828년 (18세): 3월, 김나지움 수료. 라이프치히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 바이로이트, 아우크스부르크, 뮌헨 (하이네 만남) 등을 여행. 5월, 라이프치히 도착. 자작 가곡을 비데바인에게 보냄. 프리드리히 비크에게 피아노 배우기 시작.
- 1829년 (19세): 5월, 프랑크푸르트, 코블렌츠 등을 여행, 하이델베르크 도착.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법학과로 전학, 티보 교수의 서클에서 음악 친숙. 8월, 스위스, 이탈리아 여행.
- 1830년 (20세): 프랑크푸르트에서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음악가 되기로 결심. 10월, 라이프치히로 돌아와 비크 집에 하숙. 성 토마스 교회 칸토르 바인리히에게 음악 이론 배움. 《아베크 변주곡》 작품 1.
- 1831년 (21세): 바인리히를 떠나 하인리히 도른에게 사사. 《나비》 작품 2.
- 1832년 (22세): 손을 다쳐 작곡가로 전향 결심. 11월, 《츠비카우 교향곡》이 츠비카우에서 초연. 라이프치히 음악 잡지 《일반음악신문》에 쇼팽 소개 논문 기고. 《파가니니 연습곡집》 작품 3.
- 1833년 (23세): 10월 형수 로잘리에, 11월 형 율리우스 사망. 신경쇠약 증상 나타남. 《클라라 비크의 주제에 의한 즉흥곡집》 작품 5.
- 1834년 (24세): 음악 잡지 《음악신보》 창간. 에르네스티네 폰 프리켄과 연애.
- 1835년 (25세): 멘델스존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상임 지휘자 취임. 비크 집에서 모셸레스 만남.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 평론을 《음악신보》에 기고. 12월, 클라라 비크가 멘델스존 지휘로 라이프치히에서 데뷔. 《사육제》 작품 9, 피아노 소나타 1번 작품 11.
- 1836년 (26세): 2월, 어머니 요한나 사망.
- 1837년 (27세): 8월, 클라라와 비밀리에 약혼. 9월, 클라라와의 결혼 동의를 비크에게 요청하나 거절당함. 《다비드 동맹 춤곡집》 작품 6, 《교향적 연습곡》 작품 13.
- 1838년 (28세): 10월부터 이듬해 1839년 4월까지 빈에 머뭄. 《어린이의 정경》 작품 15, 《크라이슬레리아나》 작품 16.
- 1839년 (29세): 1월 1일, 프란츠 슈베르트의 형 페르디난트 방문, 교향곡 9번 초고 발견. 《꽃의 곡》 작품 19, 《녹턴》 작품 23.
- 1840년 (30세): '가곡의 해'. 2월, 예나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 수여. 3월, 라이프치히 방문한 리스트와 친분. 9월, 클라라와 결혼. 《빈 사육제의 어릿광대》 작품 26, 《리더 크라이스》 작품 24, 39, 《미르텐의 꽃》 작품 25, 《여인의 사랑과 생애》 작품 42, 《시인의 사랑》 작품 48.
- 1841년 (31세): '교향곡의 해'. 9월, 장녀 마리에 탄생. 11월, 클라라와 바이마르 연주 여행. 《교향곡 1번》 '봄', 《라단조 교향곡》(후에 개정).
- 1842년 (32세): '실내악의 해'. 2월, 클라라와 브레멘 등 연주 여행. 3월, 혼자 라이프치히로 돌아옴. 현악 사중주곡 작품 41 (3곡), 피아노 오중주곡 작품 44, 피아노 사중주곡 작품 47.
- 1843년 (33세): '오라토리오의 해'. 라이프치히 방문한 베를리오즈와 친분. 4월, 라이프치히 음악원 교수 됨. 차녀 엘리제 탄생. 12월, 비크와 화해. 오라토리오 《낙원과 페리》 작품 50.
- 1844년 (34세): 클라라와 5개월간 러시아 연주 여행. 《음악신보》 편집장 사임. 12월, 라이프치히 음악원 교수 사임, 드레스덴으로 이사.
- 1845년 (35세): 삼녀 율리에 탄생. 《피아노 협주곡》 작품 54.
- 1846년 (36세): 2월, 장남 에밀 탄생. 클라라와 빈, 프라하 등 연주 여행. 《교향곡 2번》 작품 61.
- 1847년 (37세): 6월, 장남 에밀 사망. 7월, 고향 츠비카우에서 슈만 음악제 개최. 11월, 멘델스존 사망. 리더타펠 지휘자 됨. 혼성 합창단 창설. 피아노 삼중주 1번 작품 63, 피아노 삼중주 2번 작품 80.
- 1848년 (38세): 1월, 차남 루트비히 탄생. 《어린이를 위한 앨범》 작품 68.
- 1849년 (39세): 5월, 독일 삼월 혁명 소동 피해 드레스덴에서 피신. 7월, 삼남 페르디난트 탄생. 오페라 《게노베바》 작품 81, 《만프레드 서곡》 작품 115, 《숲의 정경》 작품 82.
- 1850년 (40세): 1월, 《낙원과 페리》 상연, 성공. 브레멘 등 연주 여행. 뒤셀도르프시 음악 감독직 수락. 6월, 라이프치히에서 《게노베바》 상연. 바흐 협회 설립에 힘씀. 9월, 뒤셀도르프로 이사. 《교향곡 3번》 '라인' 작품 97, 《첼로 협주곡》 작품 129.
- 1851년 (41세): 뒤셀도르프 합창단 및 관현악단과 문제 발생. 12월, 사녀 오이게니에 탄생. 《장미의 순례》 작품 112, 《환상 소곡집》 작품 111, 피아노 삼중주 3번 작품 110, 바이올린 소나타 1번 작품 105, 바이올린 소나타 2번 작품 121.
- 1852년 (42세): 정신 장애 증상 악화. 《레퀴엠》 작품 148.
- 1853년 (43세): 저지대 라인 음악제에서 《교향곡 4번》 연주, 대성공. 9월, 브람스와 만나 《음악신보》에 '새로운 길' 기고. 《음악과 음악가에 관한 논집》 정리, 출판 준비 (이듬해 1854년 간행). 《미사곡》 작품 147, 《괴테의 파우스트로부터의 장면》,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작품 131, 《F.A.E. 소나타》.
- 1854년 (44세): 1월 하노버 여행. 2월, 환청 등 정신 증상 악화, 라인강에 투신 자살 시도. 3월, 본 근교 엔데니히 요양원에 수용. 6월, 사남 펠릭스 탄생.
- 1856년 7월 29일: 46세로 사망.
6. 관련 항목
- 슈만의 작품 목록
- 낭만주의 음악
- 음악신보
- 클라라 슈만
- 요하네스 브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