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프리츠 크라이슬러의 생애는 어린 시절의 천재성, 잠시 동안의 음악 활동 중단, 그리고 바이올린 거장으로서의 국제적인 명성을 쌓아가는 과정으로 특징지어진다.
1.1. 출생 및 가족 배경
크라이슬러는 1875년 2월 2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인 사무엘 크라이슬러였고, 어머니는 안나 레헤스(Anna Reches, 본명은 차예 리베 Chaje Riwe)였다. 그는 유대인 혈통이었으나, 12세에 세례를 받았다.
1.2. 초기 음악 교육
크라이슬러는 3세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여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그는 7세의 나이에 특례로 빈 음악원에 입학하여 1882년부터 1885년까지 요제프 헬메스베르거 2세에게 연주를, 안톤 브루크너에게 작곡을 배웠다. 10세에 빈 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1885년부터 1887년까지 파리 음악원에서 레오 들리브, 람베르 마사르, 쥘 마스네 등 저명한 스승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파리 음악원에서도 12세에 "프리미에 프리(Premier Prix)" 금메달을 수상하며 수석으로 졸업했는데, 당시 20세 이상의 40명 이상의 경쟁자들을 제치고 이룬 성과였다.
1.3. 음악 활동 중단과 복귀
1888년 미국 뉴욕의 스타인웨이 홀에서 데뷔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1888년부터 1889년까지 모리츠 로젠탈과 함께 첫 미국 투어를 진행했다. 이후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그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입단 지원을 했으나, 악장 아르놀트 로제에게 거절당했다. 이로 인해 그는 음악 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잠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에서 복무하기도 했으나, 1899년 바이올리니스트로 복귀하여 아르투르 니키슈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이 콘서트와 1901년부터 1903년까지 이어진 일련의 미국 투어를 통해 그는 진정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2. 바이올린 연주 경력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데뷔 이후 독특한 연주 스타일과 중요한 협연을 통해 세계적인 바이올린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2.1. 데뷔와 명성 획득
1888년 11월 10일 뉴욕 시의 스타인웨이 홀에서 미국 데뷔 무대를 가졌으며, 1888년부터 1889년까지 모리츠 로젠탈과 함께 첫 미국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지원했으나, 악장 아르놀트 로제에게 "음악적으로 거칠고 초견 연주에 미숙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1899년 아르투르 니키슈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은 외젠 이자이로부터 극찬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이를 계기로 그의 연주 활동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1901년부터 1903년까지 이어진 일련의 미국 투어는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주었으며, 1902년에는 런던 데뷔 무대도 성공적으로 치렀다.

2.2. 연주 스타일과 기법
크라이슬러는 달콤하고 따뜻하며 부드러운 음색으로 유명했으며, 표현력 있는 프레이징과 지속적인 비브라토, 포르타멘토, 루바토 기법을 특징으로 했다. 특히 그는 바이올린 연주에 지속적인 비브라토를 도입하고 대중화시킨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독특한 스타일은 그만의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소리를 만들어냈으며, 그의 연주는 여러 면에서 프랑코-벨기에 악파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빈의 gemütlich독일어(아늑한) 라이프스타일을 연상시키는 특유의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바이올린 거장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으며, 그의 연주 스타일은 후대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3. 주요 연주 및 협연
1910년, 크라이슬러는 에드워드 엘가가 자신을 위해 작곡하고 헌정한 바이올린 협주곡의 초연을 맡았다. 그는 또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와 같은 저명한 음악가들과도 활발하게 협연했다. 라흐마니노프와는 에드바르 그리그의 바이올린 소나타 3번을 비롯하여 베토벤의 소나타 8번과 소나타 9번, 프란츠 슈베르트의 소나타 5번 등 여러 곡을 녹음했으며,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크라이슬러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3. 작곡 및 음악 작품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바이올린 연주자로서의 명성 외에도 뛰어난 작곡가로서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특히 그의 오리지널 작품들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바이올린 레퍼토리가 되었다.
3.1. 주요 작곡
크라이슬러의 가장 유명한 오리지널 작품으로는 "사랑의 기쁨(Liebesfreud영어)", "사랑의 슬픔(Liebesleid영어)", "아름다운 로즈마린(Schön Rosmarin영어)"이 있다. 이 세 곡은 흔히 "세 개의 옛 빈 춤곡"으로 불리며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외에도 그는 "빈 기상곡(Caprice Viennois영어)" 작품 2, "중국 북(Tambourin Chinois영어)" 작품 3, "레치타티보와 스케르초 카프리스(Recitativo and Scherzo-Caprice영어)" 작품 6, "로망스(Romance영어)" 작품 4, "집시의 여인(La Gitana영어)", "싱코페이션(Syncopation영어)", "아름다운 로즈마린(Schön Rosmarin영어)"과 같은 인기 있는 바이올린 소품들을 작곡했다.
3.2. 파스티슈와 음악적 위작
크라이슬러는 자신의 연주회 레퍼토리를 확장하고 청중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과거 작곡가들의 이름을 빌려 작품을 발표하는 독특한 관행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세페 타르티니, 안토니오 비발디, 가에타노 푸냐니, 루이지 보케리니, 조반니 바티스타 마르티니, 루이 쿠프랭, 장 바티스트 카르티에,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 니콜라 포르포라, 프랑수아 프랑쾨르, 칼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 요한 슈타미츠, 장 마리 르클레르 등의 이름을 사용했다. 이 곡들은 "재발견된 고전 작품"으로 소개되었으나, 실제로는 크라이슬러 자신이 작곡한 것이었다.
1935년, 이 사실이 공개되면서 큰 논란이 일었다. 당시 뉴욕 타임스의 음악 담당 기자가 원곡이 공개되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고 크라이슬러에게 증거를 요청하자, 그는 자신이 이 곡들을 작곡했음을 시인했다. 그는 "자작곡만으로는 청중이 지루해할 것이고, 내 이름이 붙은 작품은 다른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연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렸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비평가들이 이미 이 작품들을 가치 있다고 평가했음을 지적하며 "이름은 바뀌어도 가치는 남는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당시 음악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동시에 바로크 음악의 재발견에 기여했으며, 이 "파스티슈"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전 세계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주요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3.3. 카덴차와 편곡
크라이슬러는 여러 주요 바이올린 협주곡을 위해 독창적인 카덴차를 작곡하여 기여했다. 특히 요하네스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니콜로 파가니니의 D장조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위한 카덴차를 남겼다. 그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카덴차는 오늘날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가장 많이 연주하는 카덴차 중 하나이다.
또한 그는 다양한 음악 작품을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곡으로 편곡했다. 여기에는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슬라브 무곡집, 아르칸젤로 코렐리,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로베르트 슈만, 펠릭스 멘델스존의 작품들이 포함된다.
3.4. 오페레타 및 기타 장르
크라이슬러는 독주 바이올린 작품 외에도 다양한 장르에서 작곡 활동을 펼쳤다. 그는 오페레타 "사과꽃(Apple Blossoms영어)"(1919년)과 "시시(Sissy독일어)"(1932년), "랩소디(Rhapsody영어)"(1944년) 등을 공동 작곡하거나 작곡했다. 1936년 영화 "왕의 외출(The King Steps Out영어)"의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현악 사중주곡과 실내악 작품도 남겼다.
4. 음반 녹음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방대한 음반 녹음 경력을 통해 그의 독특한 연주 스타일과 해석을 후대에 남겼다.
4.1. 녹음 경력
크라이슬러는 빅터/RCA 레드 실 및 HMV와 같은 주요 음반사에서 광범위하게 녹음 활동을 했다. 그의 녹음은 LP와 CD 재발매를 통해 꾸준히 대중에게 소개되고 있다. 그의 마지막 녹음은 1950년에 이루어졌다.
4.2. 주요 녹음
크라이슬러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루트비히 판 베토벤, 요하네스 브람스, 펠릭스 멘델스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니콜로 파가니니, 프란츠 슈베르트 등 여러 작곡가들의 주요 작품을 녹음했으며, 이 중 상당수는 그가 직접 편곡하거나 작곡한 카덴차를 포함하고 있다.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D단조, BWV 1043 (1915년 1월 4일 녹음, 에프렘 짐발리스트와 협연)
-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 61 (1926년 12월 15일 레오 블레히 지휘 베를린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와, 1936년 6월 16일 존 바비롤리 지휘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녹음)
-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8번 G장조, Op. 30, No. 3 (1928년 3월 22일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와 녹음)
-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 A장조, Op. 47 (1936년 6월 17~19일 프란츠 루프와 녹음)
- 요하네스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 77 (1927년 11월 21일 레오 블레히 지휘 베를린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와, 1936년 6월 18일 존 바비롤리 지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녹음)
- 에드바르 그리그의 바이올린 소나타 3번 C단조, Op. 45 (1928년 12월 14~15일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와 녹음)
- 펠릭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Op. 64 (1926년 12월 9일 레오 블레히 지휘 베를린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와, 1935년 4월 8일 랜던 로널드 지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녹음)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4번 D장조, K. 218 (1924년 12월 1일 랜던 로널드 지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녹음)
- 니콜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D장조, Op. 6 (크라이슬러가 재작곡, 1936년 12월 13일 유진 오르만디 지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녹음)
- 프란츠 슈베르트의 소나타 5번 A장조, D. 574 (1928년 12월 20일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와 녹음)
- 안토니오 비발디의 C장조 바이올린 협주곡, RV Anh. 62 (크라이슬러 작곡, 1945년 5월 2일 도널드 부어히스 지휘 RCA 빅터 오케스트라와 녹음)
5. 개인사
프리츠 크라이슬러의 개인사는 그의 음악적 경력만큼이나 다채롭고 중요한 사건들로 채워져 있다.
5.1. 해리엇 라이스와의 결혼
1901년 미국 콘서트 투어 중 크라이슬러는 뉴욕 태생의 이혼녀 해리엇 라이스(Harriet Lies)를 만났다. 그녀는 바서 칼리지를 졸업한 독일계 미국인 담배 상인의 딸이었다. 두 사람은 즉시 사랑에 빠졌고 이듬해 결혼했다. 법적인 문제로 인해 결혼식을 세 번 더 반복해야 했지만, 그들은 60년 동안 해로하며 1962년 크라이슬러가 사망할 때까지 함께했다. 그들에게는 자녀가 없었으며, 해리엇은 남편의 경력을 헌신적으로 지원하며 그의 유능한 매니저 역할을 수행했다. 그녀는 크라이슬러가 음악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의 생활을 엄격하게 관리했으며, 연주회 개런티 협상 등 대외적인 활동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5.2. 제1차 세계 대전과 시민권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크라이슬러는 오스트리아 육군 장교로 잠시 복무했다. 그는 동부 전선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은 후 명예롭게 제대했다. 1914년 11월 24일 뉴욕에 도착한 그는 전쟁의 남은 기간을 미국에서 보냈다. 그는 1924년 유럽으로 돌아와 베를린에 거주하다가 1938년 프랑스로 이주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943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이후 그는 생애의 남은 기간을 미국에서 보냈으며, 다시는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5.3. 말년과 건강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크라이슬러는 미국에서 생활했다. 1941년 4월 26일, 그는 뉴욕에서 길을 건너다 트럭에 치여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두개골 골절을 입고 일주일 이상 혼수상태에 빠졌으며, 한때는 재기 불능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나 기적적으로 회복하여 무대에 복귀했다. 그러나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시력 저하와 간헐적인 기억 상실을 겪었다. 1947년에 마지막 공개 콘서트를 가졌고, 이후 몇 년간은 방송 공연을 이어갔다. 말년에는 청력 손실과 백내장으로 인한 시력 저하로 고통받았다. 그는 1962년 뉴욕 시에서 노환으로 인한 심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뉴욕 시 브롱크스의 우드론 공동묘지에 있는 개인 영묘에 안장되었다.
6. 유산과 평가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바이올린 연주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독특한 음악적 스타일과 작곡은 후대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6.1. 음악적 영향
크라이슬러는 바이올린 연주 예술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달콤한 음색, 표현력 있는 프레이징, 그리고 지속적인 비브라토와 포르타멘토, 루바토의 사용은 후대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중요한 본보기가 되었다. 특히 그는 지속적인 비브라토를 대중화한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그의 연주 스타일은 많은 젊은 연주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전 세계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주요 레퍼토리로 활발히 연주되고 있다.
6.2. 비평적 평가와 대중적 이미지
크라이슬러의 경력과 독특한 음악 스타일, 그리고 작곡 관련 논란에 대해서는 다양한 역사적 및 현대적 평가가 존재한다. 1935년의 "파스티슈" 논란은 당시 음악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나, 크라이슬러는 "이름은 바뀌어도 가치는 남는다"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이 사건은 그의 음악적 진정성을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동시에 그의 뛰어난 작곡 능력을 재확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유쾌하고 소탈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돈에 어려움을 겪는 젊은 연주자들에게 자신의 악기를 아낌없이 나누어주기도 했다. 또한 악기와 미술품 수집에도 조예가 깊었다. 은퇴 후 대부분의 소장품을 처분했지만, 요하네스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자필 원고와 에르네스트 쇼송의 시곡 자필 원고는 소장하여 후에 미국 의회도서관에 기증했다.
그는 동료 음악가들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야샤 하이페츠의 연주를 듣고 "나의 궁극적인 도달점을 시작점으로 삼아 무한히 기록을 갱신한 천재"라고 극찬했으며, 하이페츠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 같은 스승을 둔 에프렘 짐발리스트에게 "나도 자네도 이 바이올린을 부숴버리는 게 좋겠다"고 말한 일화도 전해진다. 또한 요절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하시드를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세계적인 바이올린 거장은 많지만, 하시드는 200년에 한 번 나올 만한 인물"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6.3. 헌사 및 기념
크라이슬러의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다양한 헌사와 기념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의 이름을 딴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인 "국제 프리츠 크라이슬러 바이올린 콩쿠르"가 개최되어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의 등용문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가 소유했던 주세페 과르네리 바이올린은 1952년 미국 의회도서관에 기증되어 도서관 내 공연에 사용되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여러 명기들이 존재한다.
7. 저술
7.1. 자서전
크라이슬러는 1915년 제1차 세계 대전 중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회고록 "참호 속의 사주(Four Weeks in the Trenches영어)"를 출판했다. 이 책은 호튼 미플린 하코트에서 출간되었으며, 그의 전쟁 경험에 대한 귀중한 통찰을 제공한다.
- [https://www.lib.byu.edu/~rdh/wwi/memoir/Kreisler/Kreisler.htm Four Weeks in the Trenches] (1915년, 호튼 미플린 하코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