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샹카르 다얄 샤르마(शंकरदयाल शर्मा힌디어, 1918년 8월 19일 ~ 1999년 12월 26일)는 인도의 변호사이자 정치인으로, 1992년부터 1997년까지 제9대 인도 대통령을 역임했다. 보팔에서 태어난 그는 아그라, 알라하바드, 러크나우에서 학업을 마친 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헌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링컨 법조원에서 변호사 자격을 얻었으며 하버드 대학교에서 브랜다이스 펠로우를 지냈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 보팔주의 인도 합병 운동을 이끌며 8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인도 국민회의 당원이었던 샤르마는 보팔주의 수석 장관(1952~1956)을 지냈고, 마디아프라데시주 정부에서 여러 부처의 장관(1956~1971)을 역임했다. 그는 보팔주 국민회의 위원장(1950~1952), 마디아프라데시 국민회의 위원장(1966~1968), 전인도 국민회의 위원장(1972~1974)을 거쳤다. 인디라 간디 총리 재임 시절에는 연방 통신부 장관(1974~1977)을 지냈다. 그는 로크 사바에 두 차례 당선되었으며, 1987년 무투표로 인도 부통령에 선출되기 전 안드라프라데시주, 펀자브주, 마하라슈트라주의 주지사(1984~1987)를 역임했다.
1992년 인도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97년까지 재임하는 동안 네 명의 총리를 상대했으며, 이 중 세 명은 임기 마지막 해에 직접 임명했다. 그는 P. V. 나라심하 라오 내각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하여, 정부가 한 주지사를 해고하도록 압박하고 바브리 마스지드 철거에 강력히 대응했으며, 1996년 총선을 앞두고 제출된 법령 서명을 거부하기도 했다. 가장 의석이 많은 당의 지도자라는 이유로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를 총리로 임명한 것은 광범위한 비판을 받았는데, 바지파이가 13일 만에 불신임 투표에 직면하지도 않고 사임했기 때문이다. 이후 H. D. 데베 가우다와 인드라 쿠마르 구지랄을 총리로 임명할 때는 국민회의 당의 지지 약속을 받았지만, 두 정부 모두 1년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샤르마는 재선에 나서지 않고 K. R. 나라야난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었다.
샤르마는 인도의 법치주의와 민주적 가치 수호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사회 정의와 세속주의를 강조했다. 1999년 사망 당시 국장이 치러졌으며, 그의 사마디는 델리의 카르마 부미에 안치되어 있다.
2. 생애 및 교육
2.1. 출생 및 어린 시절
샹카르 다얄 샤르마는 1918년 8월 19일, 당시 보팔주의 수도였던 보팔의 힌두교 가우르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보팔에서 초등 교육을 마쳤다.
2.2. 학력 및 초기 연구 활동
샤르마는 아그라의 세인트 존스 칼리지와 알라하바드 대학교, 러크나우 대학교에서 영어, 힌디어, 산스크리트어로 석사 학위(MA)와 법학 석사 학위(LL.M.)를 취득했다. 그는 두 과정 모두에서 수석을 차지했으며, 사회봉사 공로로 차크라바르티 금메달을 수상했다. 또한 러크나우 대학교에서 수영 챔피언을 세 차례, 알라하바드 대학교에서 크로스컨트리 챔피언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연방 헌법 하의 입법권 해석(Interpretation of Legislative Powers under Federal Constitutions)'이라는 논문으로 헌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런던 대학교에서 공공행정 디플로마를 취득했다. 1940년부터 러크나우에서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으며, 러크나우 대학교에서 법학을 가르쳤고 곧 인도 국민회의에 입당했다. 1946년 링컨 법조원에 입학했으며, 1946년부터 1947년까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강의했다. 이듬해에는 하버드 로스쿨에서 브랜다이스 펠로우로 임명되었다. 그는 케임브리지 재학 시절 타고르 협회와 케임브리지 마지리스의 회계원이기도 했다. 후에 1993년 링컨 법조원의 명예 변호사이자 명예 이사회 의원으로 위촉되었으며,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비롯해 소피아 대학교, 부쿠레슈티 대학교, 타라스 셰브첸코 키이우 국립 대학교 등 여러 인도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도의 부통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그는 인도의 여러 대학 총장을 겸임했다.
3. 정치 경력
3.1. 보팔주 정치 경력
샤르마는 1940년대부터 영국령 인도 제국으로부터의 인도 독립 운동에 참여했으며, 이후 평생 인도 국민회의에 충성을 다했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 보팔 왕국의 인도 합병을 위한 대중 운동을 이끌었고, 이로 인해 8개월간 투옥되었다. 보팔의 나와브는 자신의 주가 인도 영토에 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합병 조약 서명을 거부하려 했다. 대중 운동은 전인도 주 인민 회의의 지지를 얻었으며, 1948년 나와브는 차투르 나라얀 말비야를 수장으로 하는 임시 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운동이 더욱 확산되자 나와브는 이 정부를 해산했다. 대중의 압력과 V. P. 메논의 개입으로 나와브는 1949년 4월 30일 인도 연방과의 합병 조약에 서명했고, 보팔주는 인도 연방의 'C급 주'로 재편되어 1949년 6월 1일부터 최고 행정관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
샤르마는 1950년부터 1952년까지 보팔주 국민회의의 위원장을 역임했다. 1952년 베라시아 선거구에서 보팔 입법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에 보팔주의 주 수석 장관이 되었다. 그는 이 당시 최연소 수석 장관이었다. 1956년 주 재편성법에 따라 보팔주가 새로운 마디아프라데시주와 합병될 때까지 수석 장관직을 맡았다. 샤르마는 이 새로운 주의 수도로 보팔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7년, 1962년, 1967년 주 의회 선거에서 우다이푸라 선거구의 국민회의 후보로 마디아프라데시주 입법 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마디아프라데시주 내각 장관으로서 교육, 법률, 공공 사업, 산업 및 상업, 세무 등 여러 부처를 담당했다. 교육부 장관으로서 그는 학교 교육에서 세속주의적 교수법을 강조했으며, 교과서도 종교적 편견을 없애기 위해 개정되었다.
3.2. 마디아프라데시주 정치 경력
샤르마는 1967년부터 1968년까지 마디아프라데시주 국민회의 위원장을 지냈으며, 1968년부터 1972년까지 당의 총서기로 활동했다. 1969년 당 분열 당시 인디라 간디 편에 서서 S. 니잘링가파 당수에 의해 당직에서 해임되었으나, 간디의 파벌에서 다시 임명되었다.
3.3. 연방 의회 및 당 지도부
1971년 총선에서 보팔 로크 사바 선거구를 통해 로크 사바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듬해에는 인디라 간디 총리에 의해 인도 국민회의 총재로 임명되었다. 총재로 임명되기 전부터 샤르마는 1967년부터 국민회의 실무 위원회 위원이었고 1968년부터 당의 총서기였다. 총재로서 샤르마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인도 내 폭력 조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공개적인 캠페인을 시작했다.
1974년 10월, 샤르마는 인디라 간디 내각의 인도 통신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국민회의 총재직은 D. K. 바루아가 승계했다. 그는 1977년 총선에서 아리프 베그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1980년 총선에서는 보팔에서 재선되었다.
3.4. 주지사 재임
3.4.1. 안드라프라데시주
1984년 8월 15일, 텔루구 데삼 당을 이끌고 1983년 주 의회 선거에서 승리했던 안드라프라데시주의 N. T. 라마 라오 주총리는 당시 안드라프라데시주 주지사였던 타쿠르 람 랄에 의해 해임되었다. 람 랄은 라마 라오 밑에서 재무장관을 지냈던 N. 바스카라 라오를 새 주총리로 임명하고 의회에서 한 달 안에 다수 의석을 입증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라마 라오는 이틀 안에 다수 의석을 입증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대부분의 의원들이 그를 지지한다는 증거가 있었다. 광범위한 시위가 벌어진 후 람 랄은 1984년 8월 24일 사임했고, 샤르마가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샤르마는 1984년 9월 11일 의회 회기를 소집했으나, 바스카라 라오가 람 랄이 정한 한 달 이내에 다수 의석을 입증하지 못하자 샤르마는 9월 16일부로 사임할 것을 제안했다. 바스카라 라오는 며칠 뒤 의회를 다시 소집하자며 이를 거부했다. 이에 샤르마는 그를 해임하고 라마 라오를 주총리로 재임명했다. 라마 라오는 1984년 9월 20일 의회가 다시 소집되었을 때 신임 투표에서 승리했다. 직후 라마 라오 정부는 조기 총선을 요청했고, 샤르마는 1984년 11월 의회를 해산했다.
1985년 주 의회 선거에서 텔루구 데삼 당은 3분의 2 이상의 다수 의석을 확보하며 재집권했고, 라마 라오는 주총리로 복귀했다. 몇 달 후, 샤르마는 라마 라오 정부가 보낸 세 가지 법령의 재공포를 거부했다. 그는 법령은 의회에서 비준되어야 하며, 재공포는 헌법적 부적절성을 초래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법령들은 시간제 마을 공무원 직위 폐지, 지역구 형성, 공무원 급여 지급 및 자격 박탈 해제에 관한 것이었으며, 네 번째 재공포 거부로 주 정부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85년 7월 31일, 샤르마의 딸 기타안잘리와 사위이자 국민회의 정치인이었던 랄리트 마켄이 시크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는 마켄이 1984년 반시크 폭동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에 대한 보복이었다. 이 살인에 연루된 세 명의 남성, 란지트 길 '쿠키', 하르진더 싱 진다, 수크데브 싱 수카는 결국 체포되었다. 진다와 수카는 푸른 별 작전을 이끈 아룬 슈리다르 바이댜 장군 살해에 연루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흥미롭게도, 이 두 사람의 사면 청원은 1992년 샤르마 대통령에게 제출되었으나 거부되었고, 결국 두 사람 모두 처형되었다. 란지트 길은 2003년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이는 후에 마켄의 딸 아반티카의 동의로 감형되었다. 샤르마는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자신에게 제출된 모든 사면 청원을 기각했다. 이 사건 이후 샤르마는 펀자브 주지사로 전임되었고, 안드라프라데시주에는 쿠무드벤 조시가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3.4.2. 펀자브주
샤르마는 1985년 11월 호키시 세마의 후임으로 펀자브주 주지사에 취임했다. 그의 임명은 해당 주의 주 의회 선거 이후 라지브-롱고왈 협정이 펀자브 반란을 해결하려던 시점에 이루어졌다. 샤르마의 임기 동안에도 폭력 사태는 계속되었으며, 그는 1986년 4월 시드하르타 샹카르 라이로 교체되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찬디가르의 행정관직도 겸임했다.
3.4.3. 마하라슈트라주
샤르마는 1986년 4월 마하라슈트라주 주지사로 취임하여 1987년 9월 인도 부통령으로 선출될 때까지 재임했다.
3.5. 인도 부통령
샤르마는 1987년 인도 부통령 선거에 인도 국민회의 후보로 지명되었다. 27명의 후보가 입후보했으나, 샤르마의 후보 지명만이 회기 책임자에 의해 유효하다고 판명되었다. 후보 철회 마감일이 지난 후, 1987년 8월 21일 샤르마는 만장일치로 당선이 선언되었다. 그는 부통령직에 무투표로 당선된 세 번째 인물이었다. 샤르마는 1987년 9월 3일 부통령으로 취임했다.
라지야 사바의 당연직 의장이기도 했던 샤르마는 1988년 2월 사임 의사를 밝혔다. 당시 안드라프라데시주 주지사의 호화로운 생활에 대한 논의를 허용한 그의 결정에 정부 의원들이 격렬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라지브 간디 총리가 회의에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각의 여러 장관들이 샤르마의 결정에 대한 항의를 주도했으며, 간디는 당원들을 제지하거나 개입하지 않았다. 샤르마의 대응은 항의하던 의원들을 진정시켰지만, 의사록에서 해당 논의를 삭제해달라는 그들의 요청은 샤르마에 의해 거부되었다.
1991년 라지브 간디의 암살 이후, 소니아 간디는 샤르마에게 국민회의 총재직과 인도 총리직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건강 악화와 고령을 이유로 거절했다. 이후 P. V. 나라심하 라오가 국민회의를 이끌게 되었다.
3.6. 선거 이력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결과 |
---|---|---|---|---|
1987년 선거 | 인도 부통령 | 8대 | 인도 국민회의 | 무투표 당선 |
3.7. 인도 대통령

3.7.1. 대통령 선거 및 취임
1992년 6월, 샤르마는 인도 국민회의에 의해 1992년 인도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지명되었으며, 이는 라마스와미 벤카타라만의 뒤를 잇기 위함이었다. 그의 지명은 인도 공산당의 지지도 받았다. 선거는 1992년 7월 13일에 치러졌고, 3일 후에 득표수가 집계되었다. 샤르마는 주요 경쟁 상대였던 야당 인도 인민당 후보 조지 길버트 스웰이 얻은 346,485표에 비해 675,804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두 명의 다른 후보인 람 제트말라니와 카카 조긴더 싱은 소수의 표를 얻었다. 샤르마는 1992년 7월 16일 당선이 선언되었고, 1992년 7월 25일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취임 연설에서 샤르마는 "평등 없이는 자유가 거의 의미가 없으며, 사회 정의 없이는 평등이 거의 의미가 없다"고 말하며, 인도 내 테러리즘, 빈곤, 질병, 종교 갈등과의 싸움에 전념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선거의 유효성은 인도 대법원에 이의가 제기되었으나 기각되었다.
3.7.2. 나라심하 라오 정부 시기
샤르마의 승리는 소수 정부를 이끌던 인도 국민회의와 P. V. 나라심하 라오 총리의 승리로 간주되었다. 주로 의례적인 직책으로 여겨지지만, 대통령직은 국정 선거 후 의회에서 과반수를 얻는 당이 없거나 정부가 불신임 투표에서 패배할 경우 정부 수반을 지명해야 하므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라오 내각은 재임 기간 동안 세 차례의 불신임 투표에 직면했으며, 1993년 7월에 열린 세 번째 투표에서는 뇌물 수수 혐의와 이후 라오 자신에 대한 형사 기소가 있었다.

1992년 12월 6일, 아요디아의 바브리 마스지드가 광적인 힌두교도 폭도들에 의해 철거되면서 인도 전역에서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다. 샤르마는 이 철거 사태에 깊은 비통함과 고통을 표명하며, 모든 종교를 존중하는 인도의 전통적인 정신과 힌두교의 교리에 반하는 행위라고 규탄했다. 샤르마의 강력한 비난으로 라오 정부는 같은 날 저녁 아요디아가 위치한 우타르프라데시주의 주 정부를 해임하고 대통령령을 발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인도 정부는 대통령령을 통해 모스크가 서 있던 지점과 그 주변의 67 acre의 토지를 취득하고, 이 취득으로 분쟁 지역과 관련된 모든 소송이 해소되도록 규정했다. 1993년 1월, 샤르마는 인도 대법원에 바브리 마스지드가 서 있던 분쟁 지역에 모스크 건설 이전에 힌두 사원이나 종교 건축물이 존재했는지 여부에 대한 법률 참조를 요청했다. 1994년, 대법원은 다수 의견으로 이러한 참조가 세속주의 정신에 어긋나고 특정 종교 공동체에 유리할 수 있다는 이유로 답변을 거부했다.
1995년, 샤르마는 구자라트주에 재건된 솜나트 사원을 인도 국민들에게 봉헌했다. 봉헌식에서 샤르마는 모든 종교가 단합의 동일한 교훈을 가르치며 인간주의를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한다고 강조했다. 이 사원의 건설은 50년간 지속되었다. 인도 독립 운동 이후 수년 동안 사원의 자금 조달, 재건에서 국가의 역할, 우상 설치 중 헌법 기관 관계자의 참석 여부에 대한 논쟁은 세속주의에 대한 논쟁을 야기했다. 같은 해, 나라심하 라오 정부가 히마찰프라데시주의 주지사 실라 카울에 대한 조치를 주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이 그녀가 형사 소송을 피하기 위해 주지사 면책 특권을 사용하고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자, 샤르마는 정부가 즉시 그녀를 사임시키도록 강제했다.
샤르마는 대체로 나라심하 라오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1996년, 라오 정부가 보낸 두 가지 법령을 반환했다. 이 법령들은 달리트 기독교인과 달리트 무슬림을 위한 주 정부 고용 및 교육에서의 인도 내 유보제 혜택을 확대하고, 선거 운동 기간을 단축하려는 내용이었다. 샤르마는 선거가 임박했으므로 그러한 결정은 다음 정부에 맡겨야 한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3.7.3. 바지파이, 데베 가우다, 구지랄 정부 시기
1996년 총선에서 어떤 정당도 의회에서 과반수를 얻지 못했으나, 인도 인민당이 543석 중 160석을 얻어 최대 정당이 되었고, 집권 국민회의 당은 139석으로 2위를 차지했다. 1996년 5월 15일, 샤르마는 단일 최대 정당의 지도자인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를 총리로 초대했으며, 5월 31일까지 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입증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바지파이와 11명의 장관으로 구성된 내각은 이튿날 취임했다. 샤르마 대통령은 5월 24일 새로운 의회에서 연설했다. 5월 27일과 28일에 신임 투표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투표에 부쳐지기 전, 바지파이는 사임을 발표했다. 이 정부는 13일 만에 막을 내렸는데, 이는 인도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이었다.
샤르마 대통령이 바지파이를 총리로 선택한 결정은 여러 방면에서 비판을 받았다. 라마스와미 벤카타라만이나 닐람 산지바 레디 같은 전임 대통령들이 총리 후보들에게 지지 인도 의회 의원 명단을 요구하여 임명된 총리가 신임 투표에서 승리할 수 있는지 확인했던 것과 달리, 샤르마는 바지파이에게 그러한 요구를 하지 않았고, 단순히 의회에서 가장 큰 당의 지도자라는 원칙에 따라 그를 임명했다. 또한, 벤카타라만 대통령과 달리 샤르마는 자신의 결정에 대한 근거를 설명하는 언론 보도를 발표하지 않았다. 공산당은 샤르마가 자신들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념적 반대자를 총리로 초대했다고 비판했다. 샤르마가 바지파이를 초대한 것은 어떤 정당도 정부 구성 주장을 하지 않았고, 13개 정당 연합인 통합 전선이 지도자를 결정하고 국민회의 당의 지지를 얻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샤르마가 바지파이에게 다수 의석을 입증하도록 준 2주의 기한은 이전 사례들의 총리들에게 주어진 시간보다 훨씬 짧았으며, 이는 말 바꾸기를 막으려는 조치였다.
바지파이의 사임 후, 샤르마는 그에게 관리 내각 총리를 계속 맡아달라고 요청했고, 1996년 5월 28일 국민회의 당의 지지를 확인한 후 H. D. 데베 가우다를 총리로 임명했다. 가우다와 21명의 장관으로 구성된 내각은 6월 1일 취임했으며, 샤르마가 정한 12일 이내에 신임 투표에서 승리했다. 카르나타카주의 전 주총리였던 가우다는 3주 만에 세 번째 총리가 되었으며, 지역 정당, 좌파, 기타 후진 계급 힌두 정치인들로 구성된 다양한 연합을 이끌었다. 그는 또한 인도의 힌디어에 능통하지 않은 최초의 총리였다. 이 정부는 10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새로운 당 대표인 시타람 케스리가 이끄는 국민회의 당에 의존했다. 국민회의 당은 1997년 4월 북인도에서 힌두 민족주의 정당의 성장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지지를 철회했다. 샤르마는 가우다에게 의회에서 신임 투표를 요청하도록 지시했다. 가우다는 1997년 4월 11일 신임 투표에서 패배했고, 샤르마 대통령이 다음 조치를 고려하는 동안 관리 내각을 계속 이끌었다.
1997년 4월 21일, 데베 가우다 내각에서 인도 외교부 장관을 지냈던 인드라 쿠마르 구지랄이 총리로 취임했으며, 의회에서 신임 투표를 통과하는 데 이틀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는 샤르마가 임명한 세 번째 총리였으며, 그의 정부는 국민회의 당이 다시 통합 전선 내각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때까지 322일 동안 지속되었다.
3.7.4. 해외 순방

대통령으로서 샤르마는 불가리아, 칠레, 체코, 그리스, 헝가리, 이탈리아, 나미비아, 오만, 폴란드,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트리니다드 토바고, 튀르키예, 우크라이나, 영국, 짐바브웨 등 여러 국가를 순방했다. 1996년 오만 방문 당시 카부스 빈 사이드 오만 술탄은 의전 규칙을 깨고 직접 무스카트 국제공항에 나와 샤르마 대통령을 영접했다. 카부스 술탄은 샤르마가 자신의 '구루'(스승)였음을 밝히며 모든 비판을 잠재웠는데, 카부스는 푸네에서 샤르마에게 개인 교습을 받은 적이 있었다. 1996년 짐바브웨는 한 쌍의 아프리카코끼리를 외교 선물로 인도에 보냈으며, 이들은 1998년 인도에 도착했다. 수컷 코끼리는 샤르마 대통령을 기려 샹카르로 이름 지어졌으나, 2005년 동반자 코끼리 밤바이가 사망한 후 델리 국립 동물원에서 외롭게 지냈다. 동물권 운동가들이 코끼리의 처지를 문제 삼자 델리 고등법원은 동물원에 샹카르의 짝을 찾아줄 가능성을 모색하라고 명령했다. 2022년 10월 기준으로 델리 동물원은 샹카르의 암컷 동반자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조달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임기 말, 그는 재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K. R. 나라야난 부통령이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직에 올랐다.
4. 개인 생활
샤르마는 비말라 샤르마와 결혼하여 두 아들과 한 딸을 두었다. 1985년 7월 31일, 그의 딸 기타안잘리와 사위 랄리트 마켄은 시크 무장세력에 의해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이들은 1984년 반시크 폭동 당시 3,000명의 시크교도를 살해한 혐의를 받던 랄리트 마켄을 겨냥했으며, 그의 딸은 교전 중에 휘말렸다. 샤르마는 훗날 대통령으로서 이들의 사면 청원을 기각해야 하는 비극적인 상황에 처했다.
5. 사망 및 장례
샤르마는 생애 마지막 5년간 건강이 좋지 않았다. 1999년 12월 26일, 그는 심각한 심근 경색을 겪고 뉴델리의 에스코츠 심장 연구소에 입원했으나 그곳에서 사망했다. 인도 정부는 그의 사망을 기려 7일간의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1999년 12월 27일 국장이 치러졌으며,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델리의 카르마 부미에 안치되었다.
6. 평가 및 영향
6.1. 사상적 기여 및 사회적 영향
샤르마는 정치 경력 전반에 걸쳐 사회 정의, 세속주의, 민주적 가치 수호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마디아프라데시주 교육부 장관 시절 그는 교육에서 세속주의를 강조하고 종교적 편견을 제거하기 위해 교과서를 개정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사회 통합과 평등을 위한 그의 사상적 지향을 보여주는 사례다.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평등 없이는 자유가 거의 의미가 없으며, 사회 정의 없이는 평등이 거의 의미가 없다"고 천명하며, 테러, 빈곤, 질병, 종교 갈등과의 투쟁을 약속했다. 특히 1992년 바브리 마스지드 철거 사건 당시, 그는 이 행위를 "인도의 전통적인 종교 존중 정신과 힌두교 교리에 반하는 것"으로 강력히 규탄하며 세속주의적 입장을 명확히 했다.
국제변호사협회는 샤르마가 국제적으로 법조계에 기여한 공로와 법치주의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하여 그에게 '살아있는 전설상'을 수여했다. 이는 법률 전문가로서 그의 높은 평가와 사회적 영향력을 보여준다.
6.2. 공적 및 기념

샤르마의 삶과 대통령 재임 기간을 다룬 1999년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 '닥터 샹카르 다얄 샤르마'가 인도 정부의 영화국에서 제작되었다. 2000년에는 인도 우체국에서 그의 명예를 기리는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그의 이름을 딴 여러 기관이 설립되어 그의 유산을 기리고 있다. 보팔에는 닥터 샹카르 다얄 샤르마 아유르베다 칼리지 병원과 닥터 샹카르 다얄 샤르마 칼리지가 있다. 러크나우 대학교 산하의 닥터 샹카르 다얄 샤르마 민주주의 연구소는 2009년에 개관했다. 또한, 샤르마가 기부한 기금을 바탕으로 1994년부터 여러 인도 대학에서 매년 '샹카르 다얄 샤르마 금메달'이 수여되고 있다.
7. 저술 활동
샤르마는 영어와 힌디어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인도 국민회의의 국제 문제 접근(The Congress Approach to International Affairs), 인도-소련 협력 연구(Studies in Indo-Soviet cooperation), 법치주의와 경찰의 역할(Rule of Law and Role of Police), 자와할랄 네루: 현대 영연방의 건설자(Jawaharlal Nehru: The Maker of Modern Commonwealth), 저명한 인도인들(Eminent Indians), 의식의 샘(Chetna Ke Strot), 힌디어와 문화(Hindi Bhasha Aur Sanskriti) 등이 있다. 또한 그는 러크나우 법률 저널(Lucknow Law Journal), 사회주의 인도(Socialist India), 조티(Jyoti), 일름-오-누르(Ilm-o-Nur) 등의 저널 편집자로도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