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education
1.1. Childhood and family
도널드 헨리 럼즈펠드는 1932년 7월 9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외곽인 에번스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재닛 커슬리(결혼 전 성은 허스테드)와 조지 도널드 럼즈펠드였다. 그의 아버지는 1870년대 니더작센주 바이헤에서 이주해 온 독일계 가족 출신이었으나, 어린 도널드는 가끔 "강인한 스위스인"처럼 보인다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
럼즈펠드는 윈네트카에서 성장하며 1949년 이글 스카우트가 되었고, 미국 보이스카우트 연맹으로부터 뛰어난 이글 스카우트 상과 2006년 실버 버팔로 상을 받았다. 윈네트카에 살던 그의 가족은 회중교회에 다녔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그의 아버지가 제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의 항공모함에 주둔해 있는 동안, 럼즈펠드는 캘리포니아주 코로나도에 거주했다. 1949년에는 필몬트 스카우트 랜치에서 레인저로 활동했다.
1.2. Education
럼즈펠드는 베이커 시범학교에 다녔으며, 이후 뉴 트리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학업과 스포츠 모두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밴드에서는 드럼을 연주했으며 색소폰 연주에도 능숙했다. 그는 학업 및 NROTC 부분 장학금을 받고 프린스턴 대학교에 진학했다. 1954년 그는 "1952년 철강 압수 사건과 그것이 대통령 권한에 미친 영향"이라는 졸업 논문을 완성하고 정치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프린스턴 대학교 재학 중 그는 뛰어난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로 활약하여 대표팀 레슬링 팀의 주장이 되었고, 경량급 축구 팀의 수비수 주장이기도 했다. 프린스턴에서 그는 훗날 국방부 장관을 지낸 프랭크 칼루치와 친구 관계였다.
1954년 12월 27일 조이스 P. 피어슨과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으며, 여섯 명의 손주와 한 명의 증손주를 보았다. 그는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교 법학대학원과 조지타운 대학교 법학센터에 다녔지만, 어느 기관에서도 학위를 받지는 않았다.
2. Early political career (1962-1975)
2.1. Member of Congress

1957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절, 럼즈펠드는 오하이오주 11선거구를 대표하는 데이비드 S. 데니슨 주니어 하원의원의 행정 보좌관으로 일했다. 1959년에는 미시간주 로버트 P. 그리핀 하원의원의 보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1960년부터 1962년까지는 투자은행 A.G. 베커 & 컴퍼니에서 2년간 근무한 후, 하원의원이 되기 위한 목표를 세웠다.
그는 1962년 30세의 나이로 일리노이주 13번째 의회 선거구의 미국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964년, 1966년, 1968년에도 큰 득표율로 재선되었다. 의회 재직 중 그는 합동경제위원회, 과학 및 항공 위원회, 정부운영위원회, 그리고 군사 및 대외 작전 소위원회에서 활동했다. 또한 일본-미국 의회 간 협의회의 공동 설립자이자 미국 정보공개법의 주요 공동 발의자이기도 했다.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린든 B. 존슨에게 배리 골드워터가 패배하고 공화당이 하원에서 많은 의석을 잃자, 럼즈펠드는 하원 내 공화당의 새로운 리더십을 제안하며 미시간주 5선거구의 제럴드 포드 하원의원이 찰스 A. 핼렉을 대신할 공화당 리더로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럼즈펠드는 다른 공화당 의원들과 함께 포드에게 공화당 리더 출마를 촉구했고, 포드는 결국 핼렉을 꺾고 1965년 하원 소수당 원내대표가 되었다. 포드의 리더십을 지지했던 이 공화당원 그룹은 "영 튀르크족"으로 알려졌다. 럼즈펠드는 훗날 포드 행정부에서 1974년 그의 수석 보좌관으로 일했으며, 1975년 포드에 의해 제임스 슐레진저의 후임 국방부 장관으로 지명되었다.
하원의원 재직 중 럼즈펠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에 우려를 표명하며, 존슨 대통령과 그의 국가 안보 팀이 전쟁 수행에 지나치게 자신만만하다고 지적했다. 한때 럼즈펠드는 다른 하원의원들과 함께 베트남으로 진상 조사 임무를 떠나 전쟁의 진행 상황을 직접 확인하기도 했다. 이 방문을 통해 럼즈펠드는 남베트남 정부가 미국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럼즈펠드는 베트남 주둔 미군 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으로부터 전쟁 계획에 대한 브리핑을 받은 후에도 불만족스러워했다. 이 방문은 럼즈펠드가 전쟁 수행의 문제를 하원 본회의에 상정하여 미국의 전쟁 운영 실패에 대한 추가 토론과 논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결의안을 공동 발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존슨 행정부의 끊임없는 압력으로 당시 하원 다수당이었던 민주당은 이 결의안의 심의를 막았다.
젊은 하원의원 시절, 럼즈펠드는 시카고 대학교에서 세미나에 참석했으며, 이 경험이 그에게 전원 자원군의 개념과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 및 시카고 학파를 접하게 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나중에 프리드먼의 PBS 시리즈 '자유를 선택할 권리'에도 참여했다.
럼즈펠드는 하원 재직 중 1964년 민권법과 1968년 민권법, 그리고 1965년 선거권법에 찬성표를 던졌다.
2.2. Nixon Administration
럼즈펠드는 1969년 4선 임기 중 의원직을 사임하고 닉슨 행정부에서 다양한 행정부 직책을 맡았다. 닉슨 대통령은 럼즈펠드를 미국 경제기회국 (OEO) 국장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내각급 직위였다. 럼즈펠드는 의회에서 OEO 창설에 반대했었으며, 2011년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OEO가 이득보다 해를 더 많이 끼친다는 자신의 본질적인 신념 때문에 닉슨의 제안을 처음에는 거절했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이 그 자리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고 느꼈다. 많은 협상 끝에 그는 닉슨으로부터 "대통령 보좌관으로서 내각급 지위와 백악관에 사무실을 보장"받은 후에 OEO 국장직을 수락했고, 이는 OEO 직책에 "지위와 책임을 더해"주었다.
국장으로서 럼즈펠드는 OEO를 그가 2011년 회고록에서 "실험적인 프로그램들을 위한 연구실"이라고 묘사한 방식으로 재편성하려 했다. 그는 성공적이지 못한 다른 정부 프로그램들로부터 자금을 할당하여 여러 유익한 빈곤 퇴치 프로그램들을 살려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프랭크 칼루치와 딕 체니를 자신의 부하로 고용했다.

그는 언론인 잭 앤더슨의 칼럼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앤더슨은 "빈곤 퇴치 황제" 럼즈펠드가 빈곤층을 돕는 프로그램들을 축소하면서 자신의 사무실 재단장에 수천 달러를 지출했다고 주장했다. 럼즈펠드는 앤더슨에게 4쪽 분량의 답변을 받아쓰게 하여 그 비난들이 거짓이라고 반박했고, 앤더슨에게 자신의 사무실을 둘러보도록 초대했다. 방문에도 불구하고 앤더슨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고, 한참 후에야 자신의 칼럼이 실수였음을 인정했다.
1970년 12월 럼즈펠드가 OEO를 떠나자 닉슨은 그를 대통령 고문이라는 일반적인 자문 직위로 임명했으며, 이 역할에서도 그는 내각 지위를 유지했다. 그는 1969년 웨스트 윙에 사무실을 배정받아 닉슨 행정부 고위층과 정기적으로 교류했다. 그는 또한 1970년 경제 안정화 프로그램 국장으로 지명되었고, 나중에 생활비 위원회를 이끌었다. 1971년 3월, 닉슨은 럼즈펠드에 대해 "최소한 럼즈펠드는 충분히 강인하다"며 "그는 무자비한 작은 자식이다. 그것만은 확실하다"고 언급한 것으로 녹음되었다.
1973년 2월, 럼즈펠드는 워싱턴을 떠나 벨기에 브뤼셀의 NATO 주재 미국 대사로 부임했다. 그는 북대서양 이사회와 국방 기획 위원회, 그리고 핵 기획 그룹의 미국 상임 대표로 활동했다. 이 자격으로 그는 광범위한 군사 및 외교 문제에서 미국을 대표했으며, 키프로스와 튀르키예 간의 분쟁을 미국을 대신하여 중재해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2.3. Ford Administration

1974년 8월, 워터게이트 스캔들의 여파로 닉슨이 대통령직에서 사임하자 럼즈펠드는 신임 대통령 제럴드 포드의 전환 위원장을 맡기 위해 워싱턴으로 다시 불려왔다. 그는 포드가 하원 소수당 원내대표가 되기 전부터 하원 시절 포드의 신임을 받았으며, 포드를 하원 공화당 리더십으로 이끄는 데 주요 역할을 한 "영 튀르크족"의 일원이었다. 포드 대통령이 취임 후 자리를 잡아가자, 포드는 알렉산더 헤이그 장군이 새로운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럼즈펠드를 백악관 수석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럼즈펠드는 1974년부터 1975년까지 이 직책을 수행했다.
3. First term as Secretary of Defense (1975-1977)
3.1. Key policies and initiatives

1975년 10월, 포드 대통령은 할로윈 대학살이라 불리는 내각 개편을 단행했다. 당시 여러 신문과 잡지는 럼즈펠드가 이 사건들을 주도했다고 보도했다. 포드는 럼즈펠드를 제임스 슐레진저의 후임으로 제13대 미국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하고, 조지 H. W. 부시를 중앙정보국장으로 임명했다. 밥 우드워드의 2002년 저서 '전쟁의 부시'에 따르면, 두 사람 사이에 경쟁 관계가 형성되었으며, "부시 시니어는 럼즈펠드가 자신의 정치 경력을 끝내기 위해 자신을 CIA로 내몰고 있다고 확신했다."
럼즈펠드의 국방부 장관 인준 청문회는 1975년 11월 12일에 시작되었다. 청문회 동안 럼즈펠드는 주로 냉전에 대한 행정부의 국방 정책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그는 베트남 전쟁 종식 이후 소련이 지배력을 강화할 기회를 얻었다고 언급하며, 소련이 "분명하고 현존하는 위험"이라고 진술했다. 1975년 11월 17일, 럼즈펠드는 97대 2의 표결로 국방부 장관으로 인준되었다. 43세의 나이로, 럼즈펠드는 2025년 현재까지 미국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인물 중 최연소 기록을 세웠다.


국방부 장관 재임 기간 동안 럼즈펠드는 전원 자원군으로의 전환을 감독했다. 그는 국방 예산의 점진적인 감소를 되돌리고 미국의 전략 및 재래식 군사력을 증강하려 노력했으며, SALT 회담에서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을 약화시켰다. 그는 팀 B (그가 설립을 도왔던 조직)와 함께, 지난 15~20년간 미국-소련 군사력 비교 추세가 미국에 유리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추세가 계속되면 "세계에 근본적인 불안정성을 주입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순항 미사일, B-1 랜서 폭격기, 그리고 주요 해군 함정 건조 프로그램의 개발을 감독했다.
럼즈펠드는 펜타곤에서도 몇 가지 변화를 단행했는데, 여기에는 두 번째 미국 국방부 차관 임명(1972년에 신설되었으나 로버트 엘스워스 이전에는 채워지지 않았던 직책)과 특정 부서들의 통합이 포함된다. 이전 국방부 장관들보다 더 자주 미국 국내외를 여행하며, 국방부의 핵심 대표 역할을 수행했으며, 특히 미국 국방부의 예산 증액이라는 필수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방 역할의 정치적 측면에 집중하여 소련과의 전략적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이전에 하원 과학 및 우주 비행 위원회에 소속되었던 럼즈펠드는 1969년 성공적인 달 착륙 이후의 우주 프로그램의 다음 단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방부 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럼즈펠드는 미국 국방부와 나사 간의 공동 협력을 조직하여 스카이랩 개발을 추진했다. 이 협력의 또 다른 결과는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이었다.
3.2. SALT II Treaty
국방부 장관 재임 기간 동안 럼즈펠드는 SALT II 조약을 마무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럼즈펠드는 합동참모의장 조지 스크래칠리 브라운 장군과 함께 조약 초안을 작성했다. 그러나 1976년 선거 이전에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SALT II 조약은 지미 카터 행정부 동안에 완성되고 서명되었다.
1977년 럼즈펠드는 미국 최고 민간인 훈장인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의 관료적 적수였던 키신저는 훗날 그에게 다른 종류의 칭찬을 건넸는데, 그를 "야망, 능력, 본질이 완벽하게 융합된 숙련된 전업 정치인이자 관료: 특별한 워싱턴 현상"이라고 평했다. 럼즈펠드의 첫 국방부 장관 임기는 1977년 1월 20일에 끝났다. 그의 후임으로는 전 미국 공군장관 해럴드 브라운이 임명되었다.
4. Return to private sector (1977-2000)
4.1. Business career
1977년 초, 럼즈펠드는 프린스턴의 우드로 윌슨 스쿨과 노스웨스턴의 켈로그 경영대학원에서 잠시 강의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사업으로 향했고, 1977년부터 1985년까지 G. D. Searle & Company의 최고경영자, 사장, 그리고 회장을 역임했다. 스코키에 본사를 둔 이 제약회사는 전 세계적으로 사업을 펼쳤다. 럼즈펠드가 재직하는 동안 그는 회사의 재정적 회생을 이끌어냈고, 이로 인해 '월 스트리트 저널' (1980년)과 '파이낸셜 월드' (1981년)로부터 제약업계 우수 최고경영자 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하퍼스 매거진의 언론인 앤드루 콕번은 럼즈펠드가 식품의약국에 있는 옛 정부 인맥을 활용하여 Searle의 핵심 제품인 아스파탐이 잠재적으로 위험한 효과를 가질 수 있다는 정보를 억압했다고 주장했다. 1985년, Searle은 몬산토에 매각되었다.
럼즈펠드는 1990년부터 1993년까지 제너럴 인스트루먼트의 회장 겸 최고경영자를 역임했다. 케이블, 위성 및 지상파 방송 애플리케이션을 위한 광대역 전송, 배포 및 접근 제어 기술 분야의 선두 주자인 이 회사는 최초의 올디지털 HDTV 기술 개발을 주도했다. 회사를 상장하고 수익성을 회복시킨 후, 럼즈펠드는 1993년 말 민간 사업으로 복귀했다.
1997년 1월부터 2001년 1월 제21대 국방부 장관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럼즈펠드는 길리어드 사이언시스의 회장을 역임했다. 길리어드는 조류 독감 치료에 사용되는 타미플루(오셀타미비르)를 개발했으며, 인간의 인플루엔자 A 및 인플루엔자 B 치료제도 개발했다. 그 결과, 럼즈펠드가 국방부 장관으로서 두 번째 임기를 수행하는 동안 조류 독감이 대중의 불안을 야기하면서 길리어드 사이언스에 대한 그의 지분 가치는 크게 증가했다. 그는 표준 관행에 따라 길리어드와 관련된 모든 결정에서 자신을 기피했으며, 조류 독감 팬데믹이 발생하여 펜타곤이 대응해야 할 경우 자신이 관여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명시하는 지침을 발행하도록 펜타곤의 법무 자문관에게 지시했다.
4.2. Part-time public service

사업 경력 중 럼즈펠드는 다양한 직책에서 시간제로 공공 서비스 활동을 계속했다. 1983년 11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그를 중동 특사로 임명했는데, 이는 이란-이라크 전쟁 중 이라크가 이란과 싸우던 격동의 시기였다. 미국은 이라크가 이 분쟁에서 승리하기를 원했고, 럼즈펠드는 대통령을 대신하여 중동에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1983년 12월 20일 바그다드를 방문했을 때, 럼즈펠드는 사담 후세인과 그의 궁전에서 만나 90분간 회담을 가졌다. 그들은 시리아의 레바논 점령 반대, 시리아 및 이란의 팽창 방지, 이란에 대한 무기 판매 저지 등에서 대체로 의견을 같이했다. 럼즈펠드는 미국-이라크 관계가 개선되면 미국이 요르단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석유 수송관 건설을 지원할 수 있다고 제안했으며, 이라크는 이에 대해 재고할 용의를 보였다. 럼즈펠드는 또한 이라크 부총리 겸 외무장관 타리크 아지즈에게 "화학 무기 사용을 언급하며, 우리의 지원 노력이 특정한 어려움으로 인해 방해받았다"고 밝혔다.
럼즈펠드는 자신의 회고록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에서 후세인과의 만남이 "25년 이상 동안 가십, 소문, 미치광이 음모론의 대상이 되어왔다... 표면적으로 나는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비밀 석유 거래를 협상하거나, 이라크를 무장시키거나, 이라크를 미국의 고객 국가로 만들기 위해 사담을 만나러 파견되었다고 한다. 진실은 우리의 만남이 더 간단하고 덜 극적이었다는 것이다"라고 썼다. '워싱턴 포스트'는 "전직 미국 관리들은 럼즈펠드가 레이건 행정부의 이라크 편향 정책의 설계자가 아니었다는 점에 동의하지만(그가 중동 특사로 임명될 당시 민간인이었음), 문서에 따르면 그의 바그다드 방문이 광범위한 분야에서 미국-이라크 협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도했다.
중동 특사 직책 외에도 럼즈펠드는 다양한 공공 서비스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대통령 군비 통제 자문위원회 위원(1982년~1986년), 레이건 대통령의 해양법 조약 특별 특사(1982년~1983년), 레이건 대통령의 전략 시스템 패널 고문(1983년~1984년), 미일 관계 합동 자문 위원회 위원(1983년~1984년), 공공 서비스 전국 위원회 위원(1987년~1990년), 국민경제위원회 위원(1988년~1989년), 국방 대학교 방문 위원회 위원(1988년~1992년), FCC의 고선명 텔레비전 자문 위원회 위원(1992년~1993년), 미국 무역 적자 검토 위원회 위원(1999년~2000년), 외교협회 위원, 그리고 국가 안보 우주 관리 및 조직 평가 위원회 의장(2000년)을 역임했다.
그의 가장 주목할 만한 직책 중 하나는 1998년 1월부터 7월까지 9인으로 구성된 탄도 미사일 위협 평가 위원회의 위원장이었다. 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라크, 이란, 북한은 5~10년 안에 대륙간 탄도미사일 능력을 개발할 수 있으며, 미국 정보 당국은 그러한 시스템이 배치되기 전에 거의 사전 경보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1980년대에 럼즈펠드는 미국 공공행정국의 회원이 되었으며, 제럴드 R. 포드 재단, 아이젠하워 교류 펠로우십, 스탠포드 대학교의 후버 연구소, 국립공원 재단의 이사회 이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또한 미국/러시아 비즈니스 포럼의 일원이자 의회 지도부의 국가 안보 자문 그룹 의장을 역임했다. 럼즈펠드는 미국의 우위를 유지하는 데 전념하는 싱크탱크인 신미국세기 프로젝트의 회원이었다. 또한 그는 1990년부터 1993년까지 미국 국무부의 외교 정책 컨설턴트로 활동했다.
럼즈펠드는 부시 행정부에서 북한에 대해 가장 강경한 강경파 중 한 명으로 간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90년부터 2001년까지 유럽 엔지니어링 대기업인 ABB의 이사회에서 활동했는데, 이 회사는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체결된 조미 제네바 합의의 일환으로 한반도 에너지 개발 기구에 경수로 두 기를 판매하여 북한에 설치했다. 럼즈펠드의 사무실은 그가 "이 문제가 이사회에 보고된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밝혔지만, '포춘'지는 "이사들은 이 프로젝트에 대해 통보받았다"고 보도했다. 부시 행정부는 1994년 합의와 클린턴 전 행정부의 북한에 대한 유화 정책을 반복적으로 비판했으며, 북한을 테러 지원국으로 규정하고 나중에 악의 축의 일부로 지정했다.
4.3. Presidential and vice-presidential aspirations
1976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럼즈펠드는 부통령직을 추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표를 얻었으며, 후보 지명은 포드가 선택한 밥 돌 상원의원이 쉽게 획득했다. 1980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도 그는 다시 부통령 지명에서 한 표를 받았다.
럼즈펠드는 1988년 대통령 후보 지명을 잠시 모색했지만, 예비선거가 시작되기 전에 경선에서 철수했다. 1996년 선거 시즌에는 처음에는 대통령 탐색위원회를 구성했지만, 공식적으로 경선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공화당 후보 밥 돌의 선거운동 전국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5. Second term as Secretary of Defense (2001-2006)

럼즈펠드는 2001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취임 직후 국방부 장관으로 지명되었는데, 이는 이전 부시 대통령과의 과거 경쟁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일이었다. 부시의 첫 번째 선택은 페덱스 창립자 프레더릭 W. 스미스였으나 그가 불가능하자, 딕 체니 부통령 당선인이 럼즈펠드를 추천했다. 럼즈펠드의 두 번째 국방부 장관 임기는 그를 로버트 맥나마라 이후 가장 강력한 펜타곤 수장으로, 그리고 부시 행정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내각 구성원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시켰다. 그의 임기는 미국 군대를 21세기로 이끈 중대하고 험난한 시기로 판명되었다. 9.11 테러 이후 럼즈펠드는 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뒤이은 2003년 이라크 침공의 군사 계획 및 실행을 이끌었다. 그는 두 분쟁 모두에 가능한 한 소규모 병력을 조속히 파견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는데, 이는 '럼즈펠드 독트린'으로 체계화된 개념이었다.
국방부 장관 재임 기간 내내 럼즈펠드는 주간 기자 회견이나 언론과의 대화에서 솔직함과 재치 있는 언변으로 유명했다. 'U.S. 뉴스 & 월드 리포트'는 그를 "직설적인 중서부 출신"으로 묘사하며, "언론인들을 번번이 폭소하게 만든다"고 평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의 리더십은 이라크 분쟁을 다룬 밥 우드워드의 '부인 상태', 토머스 E. 릭스의 '대실패: 이라크에서의 미국 군사 모험', 시모어 허쉬의 '지휘 계통'과 같은 서적들을 통해 많은 비판에 노출되었다.
5.1. September 11, 2001 attacks and immediate response

9.11 테러 당시인 2001년 9월 11일, 알카에다 테러리스트들은 민항기를 납치하여 뉴욕시 맨해튼 남부의 세계 무역 센터 두 타워와 워싱턴 D.C.의 펜타곤에 동시다발적인 충돌을 일으켰다. 네 번째 비행기는 펜실베이니아주 섕크스빌 들판에 추락했으며, 그 목표는 워싱턴 D.C.의 주요 건물, 아마도 미국 국회의사당 또는 백악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첫 납치 사건 발생 3시간 이내, 그리고 아메리칸 항공 11편이 세계 무역 센터에 충돌한 지 2시간 이내에 럼즈펠드는 미국의 공격 대비 태세 신호를 DEFCON 3로 격상시켰다. 이는 1973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럼즈펠드는 테러 발생 불과 8시간 만에 펜타곤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이것은 우리 국가에 대한 끔찍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가 기능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펜타곤에서 브리핑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덧붙여야겠습니다. 펜타곤은 기능하고 있습니다. 내일도 정상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5.2. Military decisions in the wake of 9/11

9월 11일 오후, 럼즈펠드는 고위 정책 담당자 스티븐 캠본이 작성한 메모에 따르면, 보좌관들에게 즉시 발생한 사건과 이라크의 연관성에 대한 증거를 찾도록 명령했다. 캠본의 메모에 따르면 럼즈펠드는 "빨리 최고의 정보를 찾아라. 동시에 사담 후세인(S.H.)을 공격할 만큼 충분한지 판단하라. 빈 라덴뿐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 단기 목표에 필요한 것은 대규모 작전이다. 모든 것을 휩쓸어 버려야 한다. 관련된 것이든 아니든 상관없이"라고 덧붙였다.
테러 당일 열린 미국 국가안보회의의 첫 긴급 회의에서 럼즈펠드는 "왜 알카에다뿐만 아니라 이라크를 공격해서는 안 되는가?"라고 물었고, 그의 부관 폴 울포위츠는 이라크가 "깨지기 쉽고 억압적인 정권으로, 쉽게 무너질 수 있었다. 실행 가능한 일이었다"고 덧붙였다. 존 캄프너에 따르면, "그 순간부터 그와 울포위츠는 가능한 모든 기회를 이용해 주장을 펼쳤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럼즈펠드의 제안에 "잠깐만요, 저는 (사담 후세인이) 공격의 책임자라는 말은 한마디도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반응했고, 이 아이디어는 처음에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의 요청으로 거부되었지만, 캄프너에 따르면, "럼즈펠드와 울포위츠는 굴하지 않고 사담에 대한 두 번째 전선 개설에 대해 비밀 회의를 열었다. 파월은 배제되었다." 이러한 회의에서 그들은 나중에 부시 독트린이라고 불리게 될 정책을 만들었는데, 이는 "선제 공격"과 이라크 전쟁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는 PNAC가 이전 서한에서 옹호했던 바였다.
당시 백악관 대테러 조정관이었던 리처드 A. 클라크는 테러 다음 날 열린 또 다른 국가안보회의 회의의 세부 사항을 공개했다. 그는 이미 관계자들이 알카에다가 책임이 있다고 확신했으며 이라크의 개입 징후는 없었다고 말했다. 클라크에 따르면, "럼즈펠드는 이라크를 폭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클라크는 럼즈펠드가 회의에서 "아프가니스탄에는 좋은 목표물이 없고 이라크에는 좋은 목표물이 많다"고 불평했다고도 밝혔다. 럼즈펠드는 심지어 리비아, 수단과 같은 다른 나라들을 공격할 것을 제안하며, 이것이 진정으로 "테러와의 세계 전쟁"이라면 모든 테러 지원국들을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럼즈펠드는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에서 "9.11 테러 이후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집중 문제에 대해 많은 글이 쓰였다. 논평가들은 대통령과 그의 고문들이 사담 후세인이 어떻게든 공격의 배후에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이상하거나 강박적이었다고 지적했다. 나는 그 논란을 이해한 적이 없다. 이라크가 관련되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떤 행정부도 그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었을 것이다"라고 썼다.
2001년 11월 27일자 럼즈펠드가 작성한 메모에는 이라크 전쟁에 대한 고려가 담겨 있다. 메모의 한 부분은 "어떻게 시작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미국-이라크 전쟁에 대한 여러 가지 가능한 정당화 사유를 나열하고 있다.

5.3. War in Afghanistan
럼즈펠드는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전쟁 계획을 지휘했다. 2001년 9월 21일, USCENTCOM 사령관 토미 프랭크스 장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알카에다를 파괴하고 탈레반 정부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프랭크스 장군은 또한 럼즈펠드에게 6개월의 준비 기간을 거쳐 6만 명의 병력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재래식으로 침공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럼즈펠드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재래식 침공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소련에, 그리고 1842년 카불 퇴각에서 영국에 일어났던 것처럼 교착 상태에 빠질 것을 우려했다. 럼즈펠드는 프랭크스의 계획을 거부하며 "지금 당장 지상군을 투입하라!"고 말했다. 프랭스는 다음 날 미국 특수부대를 활용하는 계획을 가지고 돌아왔다. 아프가니스탄의 알카에다에 대한 공습 및 미사일 공격에도 불구하고, USCENTCOM은 그곳에서 지상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기존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2001년 9월 21일의 계획은 광범위한 대화 끝에 나왔지만, 럼즈펠드 장관은 아프가니스탄을 넘어선 더 넓은 계획을 요구하기도 했다.
2001년 10월 7일, 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시작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럼즈펠드는 펜타곤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오늘 우리의 공습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과 외국 테러리스트에 집중되어 있지만, 우리의 목표는 훨씬 더 광범위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테러리즘을 사용하는 자들과 그들을 숨겨주거나 지원하는 자들을 격퇴하는 것입니다. 세계는 이 노력에 단합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럼즈펠드는 또한 "이러한 테러 위협을 다루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존재하는 곳에서 그들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모든 장소에서, 모든 시간에, 상상할 수 있는, 심지어 상상할 수 없는 모든 테러 공격에 대해 방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루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있는 곳으로 전투를 가져가서 그들을 뿌리 뽑고, 그들을 지원하고 은닉하며 촉진하는 국가, 조직, 비정부 기구, 개인들이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도록 하고,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럼즈펠드는 2001년 10월 29일 펜타곤에서 열린 또 다른 기자 회견에서 "이 노력의 첫 몇 주가 진행됨에 따라, 우리의 목표가 단순히 테러 행위를 줄이거나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다루는 것임을 다시 강조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과 알카에다뿐만 아니라 다른 네트워크들도 뿌리 뽑고 그들을 무력화시킬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언급했듯이, 알카에다 네트워크는 40, 50개 이상의 국가에 걸쳐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럼즈펠드는 2001년 11월, 알카에다의 3인자이자 9.11 테러의 주요 계획자였던 무함마드 아테프가 미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는 "확실한 보고"를 받았다고 발표했다. 럼즈펠드는 "그는 매우, 매우 고위 인물이었다"며 "우리는 분명히 그를 추적해 왔다"고 말했다.
2001년 11월 19일 펜타곤에서 열린 기자 회견에서 럼즈펠드는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 지상군의 역할을 설명했다. 북부에서는 미군이 "북부동맹" 부대에 "합류"하여 식량 및 의료품을 준비하고 공습 목표를 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남부에서는 특수부대 및 다른 병력들이 더욱 독립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며, 진지를 습격하고 도로 검문을 감시하며 차량을 수색하여 알카에다 및 탈레반 지도자에 대한 추가 정보를 확보하려 했다고 밝혔다. 2001년 12월 16일, 럼즈펠드는 바그람 공군 기지에 주둔한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을 방문했다.
2002년 3월 15일, 펜타곤에서 열린 또 다른 기자 회견에서 럼즈펠드는 아나콘다 작전의 임무에 대해 언급하며 "아나콘다 작전은 아프가니스탄 동부 가르데스 남부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전투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연합군은 대부분 탐색 단계에 있으며,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의 동굴을 수색하고 정리하는 어려운 작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병력은 무기, 탄약, 그리고 일부 정보 정보를 찾고 있습니다. 상위 25명의 알카에다 중 일부는 사망했고 일부는 사망했을 수 있으며, 일부는 체포되었고, 더 많은 수는 알 수 없습니다. 탈레반의 경우도 대략 같은 비율입니다"라고 말했다.
2003년 5월 1일, 럼즈펠드는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주둔한 미군을 방문하여 언론에 "프랭크스 장군과 저는 이 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진전을 검토했으며, 우리가 주요 전투 활동에서 안정화 및 재건 활동 단계로 분명히 넘어왔다고 결론 내렸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여전히 위험이 존재하며, 일부 지역에는 저항 세력이 남아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합니다. 맥닐 장군과 프랭크스 장군, 그리고 그들이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 정부 및 지도부, 그리고 마샬 파힘의 지원과 협력하여,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정부 및 새로운 아프가니스탄 국군과 계속 협력하여 정부 및 연합군에 대한 저항이 있는 모든 지역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할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또한 펜타곤과 CIA 사이에는 프레데터 드론에서 헬파이어 미사일을 발사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비록 드론이 2002년까지 배치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다니엘 벤자민과 스티븐 사이먼은 "이러한 다툼이 프레데터가 알카에다에 사용되는 것을 막았다"고 주장했다. 익명의 한 관계자는 이 사건을 "전형적"이라고 부르며 "럼즈펠드는 협력하지 않을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사실, 국방부 장관은 장애물이다. 그는 테러리스트들을 도왔다"고 불평했다.
2005년 12월, 럼즈펠드는 다시 카불을 방문하여 아프가니스탄 국방장관 라힘 와르닥을 만났다. 회의에서 럼즈펠드는 아프가니스탄 국군의 효과에 대해 의구심을 표명하고, 아프가니스탄 상황 악화의 원인을 비효율적인 통치에 돌렸다. 그는 아프가니스탄군을 7만 명으로 확장하려는 오랜 계획을 비판하고, 아프가니스탄의 제한된 수입에 맞게 군 규모를 최대 5만 2천 명으로 줄일 것을 요청했다. 이 방문 직후, 럼즈펠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3천 명을 철수시키고, 그곳으로 향할 예정이었던 한 육군 여단의 배치를 취소했다.
2009년, 럼즈펠드의 국방부 장관 임기가 끝난 지 3년 후,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는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연합군의 초기 단계였던 2001년 12월의 토라 보라 전투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그들은 럼즈펠드 국방부 장관과 프랭크스 장군이 토라 보라 주변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충분한 병력을 투입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알카에다의 최고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이 토라 보라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의 탈출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장기화시켰다고 믿었다. 럼즈펠드와 프랭크스는 당시 파슈툰족의 조직적 역량 부족에도 불구하고, 토라 보라 근처에 상당한 규모의 미군이 주둔하면 현지 파슈툰족의 반란을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병력 투입을 꺼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뒷문이 열려 있었다"고 경고했던 찰스 E. 앨런을 포함한 많은 CIA 분석가들과 "이 아기를 요람에서 죽여라"며 육군 레인저 투입을 요구했던 게리 번트센의 강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 레인저나 미국 해병대 대신, 토라 보라에 대한 미국의 공격은 CIA의 지원을 받는 하즈라트 알리와 자히르 카데르의 아프가니스탄 민병대에 B-52 폭격이 추가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수백 명의 알카에다 전투원들이 파키스탄으로 유입되어 파키스탄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파키스탄-미국 관계에 해를 끼쳤다. 스티브 콜은 후속 작전인 아나콘다 작전이 "지휘 계통의 분열로 인한 계획 및 실행 실패를 목격했다"고 회고했다. 2002년 중반, 럼즈펠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은 끝났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그곳의 국무부, CIA, 군 관계자들의 불신을 샀다. 그 결과, 럼즈펠드는 아프가니스탄군을 카르자이가 구상했던 25만 명보다 훨씬 적은 7만 명으로조차 필요성을 경시했다.
5.4. Iraq War



이라크 전쟁 이전과 전쟁 중, 럼즈펠드는 이라크가 활발한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2002년 2월 12일 펜타곤 기자 회견에서 유명한 "알려진 미지"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어떠한 비축물도 발견되지 않았다. 부시 행정부 관리들은 또한 알카에다와 사담 후세인 사이에 작전적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펜타곤 감사관 보고서에 따르면, 럼즈펠드의 최고 정책 보좌관인 더글러스 J. 페이스는 "이라크와 알카에다 관계에 대한 대안적 정보 평가를 개발, 생산, 그리고 고위 의사 결정자들에게 배포했는데, 여기에는 정보 공동체의 합의와 일치하지 않는 일부 결론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WMD를 찾고 공격의 정당성을 제공하는 임무는 정보 기관에 떨어졌지만, 캄프너에 따르면 "럼즈펠드와 울포위츠는 기존 보안 기관도 역할이 있지만, 지나치게 관료적이고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 결과, "그들은 미국 국방부 내에 새로운 특별 계획국(OSP)에 기반을 둔 8~9명의 분석가들로 구성된 '카발'이라 불리는 조직을 설립했다." 허쉬가 인용한 익명의 펜타곤 소식통에 따르면, OSP는 "울포위츠와 그의 상사 럼즈펠드 국방부 장관이 사실이라고 믿었던 것, 즉 사담 후세인이 알카에다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라크가 이 지역과 잠재적으로 미국을 위협하는 엄청난 양의 화학, 생물학, 그리고 어쩌면 핵무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만들어졌다."
2003년 1월 22일, 독일과 프랑스 정부가 이라크 침공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자 럼즈펠드는 이 국가들을 "구 유럽"의 일부로 낙인찍으며, 전쟁을 지지하는 국가들이 더 새롭고 현대적인 유럽의 일부임을 암시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시작된 후, 럼즈펠드는 이라크와의 전쟁 시 국방부의 비상 계획 검토 회의에 참여했다. 당시 구상된 이 계획은 최대 50만 명의 병력 투입을 상정하고 있었는데, 럼즈펠드는 이는 지나치게 많다고 생각했다. 고든과 트레이너는 다음과 같이 썼다.
"뉴볼드 장군이 계획을 설명할 때 ... 럼즈펠드는 점점 더 짜증이 나는 것이 분명했다. 럼즈펠드에게 그 계획은 너무 많은 병력과 보급품을 요구했고, 실행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럼즈펠드는 그것이 '낡은 사고방식의 산물이며 군대의 모든 문제점을 구현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2003년 2월 27일 펜타곤 기자 회견에서 럼즈펠드는 육군 참모총장 에릭 신세키 장군이 이라크를 확보하고 안정을 제공하는 데 수십만 명의 지상군이 필요하다고 제안한 것이 "틀렸느냐?"는 질문에 대해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답했다. "수십만 명의 미군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은 훨씬 벗어난 것입니다. 현실은 이미 여러 국가들이 병력을 동원하여 안정화 활동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만약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면 말이죠."
럼즈펠드는 2003년 3월 20일 펜타곤에서 열린 기자 회견에서 2003년 이라크 침공이 시작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이라크 해방을 위한 전쟁의 첫 공격을 발표하며 "사담 후세인 정권의 시대는 얼마 남지 않았다"고 선언했고, "만약 이라크 지도자들이 스스로를 구하고 그러한 분쟁을 막기 위해 행동한다면 더 광범위한 갈등이 필요 없다고 계속해서 느낀다"고 말했다.
럼즈펠드가 이라크 전쟁을 지휘한 역할에는 충격과 공포 작전이 포함되었는데, 이는 14만 5천 명의 병력이 투입된 전격적인 침공으로,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바그다드를 점령했으며 미군 사상자도 매우 적었다. 그러나 사담 후세인 정권의 몰락에서 이라크 연합 잠정 당국 설립으로 전환되는 동안 많은 정부 건물, 주요 박물관, 발전 시설, 심지어 석유 장비까지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군사 작전이 시작된 직후에는 폭력적인 반란이 시작되었다.
2003년 3월 30일, ABC의 '디스 위크' 프로그램에서 조지 스테파노풀로스와의 인터뷰에서 럼즈펠드는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를 찾는 것에 대한 스테파노풀로스의 질문에 "우리는 그들이 어디 있는지 압니다. 그들은 티크리트와 바그다드 주변 지역, 그리고 동쪽, 서쪽, 남쪽, 북쪽 어딘가에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2003년 4월 9일, 펜타곤 기자 회견에서 럼즈펠드는 바그다드 함락 당시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유로운 이라크인들이 거리에서 축하하며, 미국 탱크를 타고, 바그다드 중심에서 사담 후세인 동상을 무너뜨리는 장면은 숨 막힐 듯 아름답습니다."
이라크 침공 이후, 미군은 이라크 국립박물관에 있는 역사 유물과 보물들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2003년 4월 11일, 펜타곤 기자 회견에서 미군이 무질서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은 이유를 묻자, 럼즈펠드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유는 지저분하고, 자유로운 사람들은 실수하고 범죄를 저지르며 나쁜 일을 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자신의 삶을 살고 멋진 일을 할 자유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곳에서 일어날 일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더 나아가 "텔레비전에서 보는 이미지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누군가가 건물에서 꽃병을 들고 나오는 같은 그림입니다. 그것을 20번 보면 '세상에, 꽃병이 그렇게 많았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라고 덧붙였다.
2003년 7월 24일 펜타곤 기자 회견에서 럼즈펠드는 사담 후세인의 사망한 아들들인 우다이 후세인과 쿠사이 후세인의 사진 공개에 대해 언급했다. 럼즈펠드는 "이는 미국이 일반적으로 관여하는 관행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솔직히 이 두 사람은 특히 나쁜 인물들이며, 이라크 국민들이 그들을 보고, 그들이 죽었고,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럼즈펠드는 또한 "이는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생각하며, 제가 그 결정을 내린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2003년 10월, 럼즈펠드는 국방부의 비밀 홍보 "로드맵"을 승인했는데, 이는 해외 정보 작전과 국내 언론 사이에 "경계"를 두도록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로드맵은 미국 정부가 고의적으로 미국 대중을 목표로 하지 않는 한, 심리 작전이 미국 대중에게 도달해도 상관없다는 정책을 추진했다.
2003년 12월 14일, 사담 후세인이 붉은 새벽 작전으로 미군에 체포된 후, 럼즈펠드는 '60분' 프로그램에서 언론인 레슬리 스탈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 총을 쏘고 자신이 얼마나 강인한지 보여주는 사진을 수백 번 찍혔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사실 그는 그리 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땅속 구멍에 숨어 있었고, 권총이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았으며, 전혀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 그는 정말 많은 이라크 국민들의 죽음을 초래했지만, 결국 그는 그리 용감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국방부 장관으로서 럼즈펠드는 국방부의 공개 메시지를 신중하게 작성했다. 회의 후 럼즈펠드는 사람들이 "희생"이라는 단어에 "단합"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들은 리더십을 찾고 있습니다. 희생 = 승리." 2004년 5월, 럼즈펠드는 테러와의 전쟁을 "전 세계적 반란"에 대한 싸움으로 재정의할지 여부를 고려했다. 그는 보좌관들에게 테러와의 전쟁의 이름이 바뀌면 "어떤 결과가 있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보라고 지시했다. 럼즈펠드는 또한 전쟁의 부정적인 측면을 보도하는 미국 신문 칼럼에 대해 펜타곤의 구체적인 공개 공격과 대응을 명령했다.
럼즈펠드는 재임 기간 동안 이라크에 주둔한 미군 병사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방송 협회는 럼즈펠드가 이라크에서 미군 철수 시점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라크가 평화로워질 때까지 미군이 철수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며, 이라크는 결코 평화롭고 완벽한 적이 없었다고 덧붙였다"고 보도했다.
2006년 8월 2일 펜타곤 기자 회견에서 럼즈펠드는 이라크의 종파 간 폭력에 대해 "종파 간 폭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죽고 있습니다. 수니파가 시아파를 죽이고 시아파가 수니파를 죽이고 있습니다. 쿠르드족은 관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유감스러운 일이며, 그들은 화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라고 언급했다.
2006년 10월 26일 펜타곤 기자 회견에서 이라크에서 함께 전진 작전이 실패한 후, 럼즈펠드는 "이라크에서의 패배가 그렇게 나쁠까요?"라는 질문에 "예, 나쁠 것입니다. 이라크 정부에 맞서 싸우는 자들은 권력을 장악하여 테러리스트들을 위한 새로운 은신처와 작전 기지를 구축하려 합니다. 그리고 미군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접근 방식을 완강히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전혀 틀렸습니다. 군은 필요에 따라 계속해서 적응하고 조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려움과 문제점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결과, 럼즈펠드는 이라크에 침공한 병력의 규모가 충분했는지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2006년, 럼즈펠드는 폭스 뉴스의 브릿 흄이 토미 프랭크스 장군에게 전쟁에 필요한 40만 명의 병력 요청을 줄이도록 압력을 가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신화입니다. 이 도시(워싱턴 D.C.)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지상군 병력 수준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국방부 장관이나 대통령이 아닙니다. 우리는 권고를 듣지만, 권고는 전투 사령관과 합동참모본부 구성원들이 합니다. 그리고 지난 6년 동안 전투 사령관들이 요청한 병력 수가 부족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럼즈펠드는 흄에게 프랭크스가 궁극적으로 그러한 병력 수준에 반대했다고 말했다.
재임 기간 내내 럼즈펠드는 미국 국민들에게 9.11 테러와 미국인에 대한 위협을 상기시키려 노력했으며, 2006년 메모에서 한때 "미국 국민들이 폭력적인 극단주의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가디언'지 보도에 따르면, 럼즈펠드는 성경 구절을 극비 브리핑 자료에 포함시켜 독실한 종교적 신념으로 알려진 조지 W. 부시에게 이라크를 "성전" 또는 이슬람에 대한 "종교적 십자군 전쟁"처럼 침공하도록 호소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2007년 9월 '데일리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침공 당시 영국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마이크 잭슨 장군은 럼즈펠드의 이라크 침공 계획을 "지적으로 파산했다"고 비판하며, 럼즈펠드가 "이라크 현 상황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 중 하나"이며, "테러와의 세계 전쟁에 대한 미국의 접근 방식은 '부적절'하며 국가 건설과 외교보다는 군사력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다"고 느낀다고 덧붙였다.
2004년 12월, 럼즈펠드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병사 가족들에게 보내는 1,000통이 넘는 위로 편지에 자동 서명 기계를 사용하여 직접 서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하게 비판받았다. 그는 향후 모든 편지에 직접 서명하겠다고 약속했다.
5.5. Prisoner abuse and torture concerns

이라크 전쟁 이전의 군사력 증강 기간 동안, 국방부의 포로 구금, 수용, 심문에 대한 예비 우려가 제기되었다. 사담 후세인의 군사력이 군사 작전 직면 시 항복했기 때문에, 럼즈펠드와 미국 중부 사령부 토미 프랭크스 장군을 포함한 국방부 내 많은 사람들은 이 포로들을 각자의 국가로 인계하는 것이 모두에게 최선이라고 결정했다. 또한, 당시에는 대규모 구금 시설을 유지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판단되었다. 대신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와 같은 여러 시설을 사용하여 관심 포로들을 인계하기 전에 수용했으며, 럼즈펠드는 적대 전투원들을 구금하기로 한 부시 행정부의 결정을 옹호했다. 이 때문에 미국 상원 군사위원회 위원들을 포함한 비판론자들은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수감자 학대 사건에 대해 럼즈펠드가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럼즈펠드 자신도 "이 사건들은 제가 국방부 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발생했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스캔들 직후 부시 대통령에게 사임을 제의했지만, 수락되지 않았다.

관타나모만 수용소 심문관들이 포로들을 최대 4시간 동안 한 자세로 서 있게 함으로써 스트레스를 유발했다는 내용의 메모를 읽은 럼즈펠드는 메모에 "나는 하루에 8~10시간 서 있다. 왜 (포로들의) 서 있는 시간이 4시간으로 제한되는가? D.R."이라고 손으로 휘갈겨 쓴 메모를 남겼다.
휴먼 라이츠 워치와 같은 다양한 단체들은 럼즈펠드가 이라크 전쟁 관리와 강화된 심문 기술이라는 부시 행정부 정책(이는 널리 고문으로 간주됨)을 지지한 것과 관련하여 그에 대한 조사를 요구했다. 법학자들은 럼즈펠드가 "ICC에 의해 기소될 경우 형사 책임을 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05년 ACLU와 휴먼 라이츠 퍼스트는 "럼즈펠드 국방부 장관의 지휘 아래 미군에 의해 고문과 학대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8명의 남성들을 대리하여" 럼즈펠드와 다른 고위 정부 관리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도널드 반스와 네이선 에르텔도 비슷한 이유로 미국 정부와 럼즈펠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며, 자신들이 고문을 당했고 인신보호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주장했다. 2007년, 토머스 F. 호건 미국 지방법원 판사는 럼즈펠드가 "자신의 정부 직책과 관련하여 취한 행동에 대해 개인적으로 책임을 질 수 없다"고 판결했다. ACLU는 2011년에 이 사건을 다시 살리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2004년, 독일 검사 볼프강 칼레크는 럼즈펠드와 다른 11명의 미국 관리들을 전쟁 범죄자로 기소하는 형사 고발장을 제출했는데, 이들은 포로 고문을 지시하거나 고문 사용을 합법화하는 법률을 초안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 혐의는 유엔 고문 방지 협약과 독일 국제형사법에 대한 위반을 근거로 했다.
럼즈펠드는 상원 청문회에서 내부 고발자 조 더비에게 익명성을 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원을 공개하여, 더비와 그의 가족이 지역 사회에서 외면당하고 괴롭힘과 살해 위협을 받아 미 육군에 의해 보호 구금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더비는 자신의 신원이 의도치 않게 공개되었다는 것을 의심하게 되었지만, 럼즈펠드는 악의적인 의도가 없었으며 언급은 칭찬의 의미였고, 럼즈펠드는 더비의 익명성을 알지 못했다고 설명하는 편지를 보냈다.
5.6. Resignation

2006년 초 "장군들의 반란"이라 불리는 사건에서 미국 및 다른 NATO 회원국의 퇴역 장군 및 제독 8명이 럼즈펠드의 사임을 요구하며, 그가 "형편없는" 군사 계획과 전략적 역량 부족을 보였다고 비난했다.
당시 논평가 팻 뷰캐넌은 이라크를 자주 방문하고 전쟁을 지지했던 '워싱턴 포스트'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가 장군들이 "현장 장교들의 75% 이상, 그리고 아마 더 많은 장교들의 견해를 반영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럼즈펠드는 이러한 비판을 일축하며 "수천 명의 제독과 장군 중에서 두세 명이 동의하지 않을 때마다 미국 국방부 장관을 교체한다면, 그것은 마치 회전목마 같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은 내내 럼즈펠드를 옹호하며 럼즈펠드가 "정확히 필요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2006년 11월 1일, 부시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동안 럼즈펠드를 국방부 장관으로 계속 지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럼즈펠드는 2006년 11월 6일자 사임서를 작성했고, 편지의 날인에 따르면 부시 대통령은 선거일인 2006년 11월 7일에 이를 확인했다. 2006년 총선에서 하원과 상원은 민주당으로 넘어갔다. 선거가 끝난 다음 날인 2006년 11월 8일, 부시 대통령은 럼즈펠드가 국방부 장관직에서 사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많은 공화당원들은 이러한 지연에 불만을 표했는데, 유권자들이 럼즈펠드가 사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더 많은 표를 얻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럼즈펠드의 후임으로 로버트 게이츠를 지명했다. 2006년 12월 15일, 펜타곤 몰 테라스에서 퇴임하는 럼즈펠드를 위한 전군 의장대 사열과 19발의 예포가 포함된 송별식이 거행되었다.
6. Retirement and later life (2006-2021)
6.1. Post-government activities

사임 후 몇 달 동안, 럼즈펠드는 잠재적인 회고록을 준비하기 위해 뉴욕시 출판사들을 방문했다. 한 업계 소식통이 "거액의 입찰"이라고 언급한 제안을 받은 후, 그는 펭귄 그룹과 자신의 회고록을 센티넬 HC 출판사를 통해 출간하기로 합의했다. 럼즈펠드는 회고록 출판에 대한 선불금을 받지 않았으며, 모든 수익을 참전 용사 단체에 기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책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회고록'은 2011년 2월 8일에 출간되었다.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출간과 함께 럼즈펠드는 책의 "미주"와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그의 공직 활동과 관련된 문서들을 담은 웹사이트 "럼즈펠드 문서"를 개설했다. 책 출간 이후 몇 달 동안 이 웹사이트는 그의 아카이브에서 4,000개가 넘는 문서들로 확장되었다. 2011년 6월 기준으로, 이 문서들에는 그의 의회 투표 기록, 닉슨 행정부, 포드, 레이건,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의 회의 문서 및 메모, 민간 부문 문서, NATO 문서 등이 포함되었다.

2007년, 럼즈펠드는 럼즈펠드 재단을 설립했는데, 이 재단은 미국 내 공공 봉사를 장려하고 해외에서 자유로운 정치 및 경제 시스템의 성장을 지원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 교육 재단은 민간 부문에서 정부에 일정 기간 봉사하고자 하는 재능 있는 개인들에게 펠로우십을 제공한다. 럼즈펠드는 개인적으로 이 재단을 후원했다. 2014년 1월 기준으로, 재단은 중앙아시아 출신 90명 이상의 펠로우를 후원했으며, 대학원생들에게 튜션 및 생활비 지원으로 수백만 달러를, 소액 금융 보조금으로 수백만 달러를, 그리고 참전 용사 자선 단체에 수백만 달러를 기부했다.

럼즈펠드는 2011년 2월 10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보수정치행동회의에서 "헌법 수호자 상"을 수상했다.
정부에서 은퇴한 후, 럼즈펠드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전 내각 동료인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을 비판하며 그녀가 기본적으로 공직에 부적합하다고 주장했다. 2011년 라이스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독자들은 갈등하는 문제에 대해 무엇이 올바른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2011년 2월, 럼즈펠드는 군의 "묻지도 말하지도 마라" 정책 폐지를 지지하며, 게이와 레즈비언의 공개 복무 허용이 "때가 온 생각"이라고 말했다.
2011년 3월, 럼즈펠드는 2011년 리비아 내전의 군사 개입에 대해 언급하며 ABC 뉴스 백악관 선임 특파원 제이크 태퍼에게 오바마 행정부가 "임무가 연합군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연합군이 임무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럼즈펠드는 또한 유엔이 지원하는 리비아 군사 노력에 대해 "혼란"이라는 단어를 여섯 번 사용했다.
2011년 10월, 럼즈펠드는 알자지라 워싱턴 D.C. 지국장 압데라힘 푸카라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푸카라는 럼즈펠드에게 돌이켜보면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국경을 확보하기 위해 충분한 병력을 파견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수십만 명의 무고한 이라크인들이 연합군과 그들이 말한 범죄자들에게 살해된 것에 대해 미국이 책임이 있는지 물었다. 푸카라는 펜타곤 관계자들이 럼즈펠드에게 이라크에 파견된 병력 수가 부족하다고 말했다고 언급했다. 럼즈펠드는 "당신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주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펜타곤의 누구도 병력이 부족하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푸카라가 계속해서 럼즈펠드를 압박하자, 럼즈펠드는 "소리를 지를 것입니까, 아니면 인터뷰를 할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푸카라는 다시 "당신이 이라크에 투입한 병력 수가 당신을 수십만 명, 어쩌면 수십만 명의 무고한 이라크인들이 연합군과 당신이 말한 범죄자들에게 살해된 책임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었다. 럼즈펠드는 그 질문을 "폄하적"이라고 불렀고, 푸카라가 "존중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고 말했다.
럼즈펠드는 2013년 에롤 모리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주제가 되었는데, 제목은 2002년 2월 기자 회견에서 그의 답변("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을 언급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 럼즈펠드는 "1960년대 초 의원 시절부터 2003년 이라크 침공 계획에 이르기까지 워싱턴 D.C.에서의 그의 경력을 논한다."
2016년 1월, 럼즈펠드는 문학 및 창작 에이전시인 재블린과 협력하여 윈스턴 처칠이 플레이했던 솔리테어 변형 게임인 '처칠 솔리테어'라는 모바일 앱 게임을 출시했다. 럼즈펠드와 처칠 가족은 게임 수익을 자선 단체에 기부할 것이라고 밝혔다.
2016년 6월, 럼즈펠드는 2016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21년 1월 5일, 럼즈펠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20년 대선 분쟁에 군대를 개입시키지 말 것을 경고하기 위해 서한을 보낸 10명의 현직 전직 미국 국방부 장관 중 한 명이었다.
6.2. Views and statements
은퇴 후, 럼즈펠드는 회고록에서 전 내각 동료이자 국무장관이었던 콘돌리자 라이스를 비판하며 그녀가 본질적으로 공직에 부적합하다고 주장했다. 2011년, 라이스는 이에 대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독자들은 그 갈등의 문제에 대해 무엇이 정확한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2011년 2월, 럼즈펠드는 군의 "묻지도 따지지도 마라" 정책 폐지를 지지하며, 게이와 레즈비언이 공개적으로 복무하는 것이 "이제는 때가 된 아이디어"라고 말했다.
2011년 3월, 럼즈펠드는 2011년 리비아 내전의 군사 개입에 대해 언급하며 ABC 뉴스 백악관 선임 특파원 제이크 태퍼에게 오바마 행정부가 "임무가 연합을 결정해야 한다. 연합이 임무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럼즈펠드는 또한 유엔의 리비아 군사 개입을 설명하기 위해 "혼란"이라는 단어를 여섯 번 사용했다.
2011년 10월, 럼즈펠드는 알자지라의 워싱턴 D.C. 지국장 압데라힘 푸카라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푸카라는 럼즈펠드에게, 돌이켜보면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국경을 확보하기 위해 충분한 병력을 파견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수십만 명의 무고한 이라크인들이 연합군과 그들이 말한 범죄자들에게 살해된 것에 대해 미국이 책임이 있는지 물었다. 푸카라는 펜타곤 관계자들이 럼즈펠드에게 이라크에 파견된 병력 수가 부족하다고 말했다고 언급했다. 럼즈펠드는 "당신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주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펜타곤의 누구도 병력이 부족하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푸카라가 계속해서 럼즈펠드를 압박하자, 럼즈펠드는 "소리를 지를 것입니까, 아니면 인터뷰를 할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푸카라는 다시 "당신이 이라크에 투입한 병력 수가 당신을 수십만 명, 어쩌면 수십만 명의 무고한 이라크인들이 연합군과 당신이 말한 범죄자들에게 살해된 책임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었다. 럼즈펠드는 그 질문을 "폄하적"이라고 불렀고, 푸카라가 "존중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고 말했다.
럼즈펠드는 2013년 에롤 모리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주제가 되었는데, 제목은 2002년 2월 기자 회견에서 그의 답변("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을 언급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 럼즈펠드는 "1960년대 초 의원 시절부터 2003년 이라크 침공 계획에 이르기까지 워싱턴 D.C.에서의 그의 경력을 논한다."
7. Death
2021년 6월 29일, 럼즈펠드는 뉴멕시코주 타오스 자택에서 다발성 골수종으로 사망했다. 사적인 장례식은 마이어 요새에서 거행되었으며, 그는 2021년 8월 24일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8. Legacy and reception
8.1. Overall evaluation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럼즈펠드를 자신이 아는 "가장 무자비한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디 애틀랜틱'의 조지 패커는 럼즈펠드를 "미국 역사상 최악의 국방부 장관"이자 "생각을 바꿀 지혜가 부족했던 사람"이라고 평했다. 2009년 6월 23일 출간된 '자기 방식대로: 도널드 럼즈펠드의 야망, 성공, 그리고 궁극적인 실패'의 저자이자 '워싱턴 포스트' 기자였던 브래들리 그레이엄은 "럼즈펠드는 로버트 맥나마라 이후 가장 논란이 많은 국방부 장관 중 한 명으로 퇴임했으며, 이라크 전쟁 관리와 의회, 행정부 동료들, 군 장교들과의 어려운 관계로 인해 광범위하게 비판받았다"고 밝혔다. 신보수주의 논평가 빌 크리스톨도 럼즈펠드를 비판하며, 그가 이라크 전쟁에서 저지른 계획 실수, 특히 불충분한 병력 수준에 대해 "경솔하게 책임을 회피했다"고 지적했다. 존 미첨의 2015년 11월 출간된 '운명과 권력: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의 아메리칸 오디세이'에서 제41대 대통령 조지 H. W. 부시는 럼즈펠드를 비판하며 그를 "오만한 친구"라고 불렀고, "나는 그가 한 일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의 강철 같은 시각이 대통령에게 해를 끼쳤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8.2. Criticism and controversies
럼즈펠드는 이라크 전쟁의 수행 방식, 대량살상무기(WMD) 정보 조작 의혹,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학대 사건 책임, 그리고 동료 정치인 및 군 고위 장교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강력한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집권기동안 미군은 눈에 띄게 축소되었다. 그 당시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 국가들은 4세대 전투기가 최고의 전투기였는데, 4세대 전투기를 상대로 144:0이라는 교환비를 가진 전략 자산 F-22 5세대 전투기를 700대 생산에서 200대로 축소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RAH-66 코만치의 사업도 취소했고, 크루세이더 자주포도 취소되었다.
그는 이라크에 대한 침공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군 병력 규모와 전략에 대한 독단적인 접근 방식으로 인해 군 지휘관들과 마찰을 빚었다. 특히 육군 참모총장 에릭 신세키 장군이 이라크 안정화를 위해 수십만 명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을 때 이를 공개적으로 반박하며, 소규모 병력으로 신속한 승리를 추구하는 이른바 '럼즈펠드 독트린'을 강행했다. 이는 전후 이라크의 불안정 심화와 장기적인 반란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 이라크 점령 초기 바그다드 박물관 약탈 사태에 대한 그의 "stuff happens(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는 발언은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또한 그는 이라크 침공의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의 존재를 강하게 주장했지만, 전쟁 후 어떠한 WMD도 발견되지 않아 정보 조작 의혹에 휩싸였다. 펜타곤 내부에 '특별 계획국'을 설치하여 정보 공동체의 합의와는 다른 독자적인 정보를 생성하고 유포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가장 큰 논란 중 하나는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수감자 학대 사건이다. 럼즈펠드는 이 사건에 대해 "제가 국방부 장관으로 있는 동안 발생한 일이며, 제가 책임이 있습니다"라고 인정했으나, 그가 수감자들의 심문 과정에서 강화된 심문 기술(고문으로 간주되는) 사용을 승인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그가 서 있는 시간을 4시간으로 제한한 메모에 "나는 하루 8~10시간 서 있다. 왜 (포로들의) 서 있는 시간이 4시간으로 제한되는가?"라고 직접 손글씨로 적은 사실이 드러나 인권 단체의 강력한 비난을 받았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그는 사임을 제의했지만 수락되지 않았고, 이후 여러 인권 단체와 법학자들로부터 국제법 위반 및 전쟁 범죄 혐의로 소송과 기소 요구를 받기도 했다.
2006년에는 여러 퇴역 장성들이 그의 사임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장군들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군 내부에서도 그의 리더십에 대한 불만이 표출되었다. 이러한 비판은 럼즈펠드가 이라크에서 미국의 이미지와 군사적 위상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다는 평가로 이어졌다.
9. Publications
럼즈펠드의 주요 저서와 공식 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 동아시아의 전략적 명령 (Heritage Foundation, 1998)
- 럼즈펠드의 규칙: 좋은 삶을 위한 지혜 모음 (Free Press, 2002)
-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회고록 (Sentinel HC, 2011)
- 센터가 유지되었을 때: 제럴드 포드와 미국 대통령직의 구출 (Free Press, 2018)
10. Awards and honors
도널드 럼즈펠드가 생애 동안 받은 주요 상훈 및 표창은 다음과 같다.
- 전 해군 레슬링 챔피언 (1956년)
- 미국 성취 아카데미 황금 접시상 (1983년)
- 미국 육군 협회 조지 C. 마셜 메달 (1984년)
- 프린스턴 대학교 우드로 윌슨 메달 (1985년)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메달 (1993년)
- 미국 해군 기념 재단 론 세일러 상 (2002년)
- 미국 전직 의원 협회 국가 지도자상 (2003년)
- 로널드 레이건 자유상 (2003년)
- 허드슨 연구소 제임스 H. 두리틀 상 (2003년)
- 포드 대통령과 포드 재단이 수여하는 제럴드 R. 포드 메달 (2004년)
- 미국 보이스카우트 연맹 뛰어난 이글 스카우트 상 (1976년)
- 영화 '화씨 9/11' 출연으로 제25회 골든 라즈베리 최악의 남우조연상 (2004년)
- 필라델피아 유니언 리그 시민권 금메달 (2006년)
- 클레어몬트 연구소 국가 지도자상 (2007년)
- 리처드 닉슨 재단 자유의 승리상 (2010년)
- 밸리 포지 군사학교 앤서니 웨인 훈장
- 알바니아 대통령 부야르 니샤니로부터 국가 깃발상 (2013년)
- 대통령 자유 훈장 (1977년)
- 욱일대수장 (2015년)
- 압둘아지즈 국왕 훈장 대수장 (2002년)
- 폴란드 공화국 공로 훈장 대십자 (2005년)
- 루마니아의 별 훈장 대장교 (2004년)
- 르완다 왕실 사자 훈장 메달 (2007년)
- 광화성장 대수장 (2011년)
11. Electoral history
럼즈펠드가 참여했던 주요 선거의 결과와 해당 선거에서의 역할 및 성과는 다음과 같다.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62년 선거 | 하원의원 (일리노이 제13선거구) | 88대 | 공화당 | 63.52% | 139,230표 | 1위 | 당선 |
1964년 선거 | 하원의원 (일리노이 제13선거구) | 89대 | 공화당 | 57.82% | 165,129표 | 1위 | 당선 |
1966년 선거 | 하원의원 (일리노이 제13선거구) | 90대 | 공화당 | 76.01% | 158,769표 | 1위 | 당선 |
1968년 선거 | 하원의원 (일리노이 제13선거구) | 91대 | 공화당 | 72.74% | 186,714표 | 1위 | 당선 |
그는 일리노이주 제13하원 선거구를 대표하기 위해 출마한 네 번의 선거에서 58%(1964년)에서 76%(1966년)에 이르는 득표율을 기록했다. 1975년과 2001년에는 각각 제럴드 포드와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의해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된 후 미국 상원의 압도적인 인준을 받았다.
12. Organizational affiliations
도널드 럼즈펠드가 활동했던 주요 연구소, 위원회, 기업 이사회 등 민간 및 공공 기관의 소속 이력은 다음과 같다.
- 기관 소속
- 안보 정책 센터: 오랜 협력자; 1998년 CSP의 "불꽃 수호자" 상 수상.
- 후버 연구소: 전 이사회 이사.
- 신미국세기 프로젝트: PNAC의 창립 원칙 성명 및 이라크에 관한 두 정책 서한에 서명.
- 프리덤 하우스: 전 이사회 이사.
- 랜드 연구소: 전 회장.
- 자유 세계를 위한 위원회: 전 회장.
- 국립공원 재단: 전 회원.
- 아이젠하워 교류 펠로우십: 전 회장.
- 르 세르클레: 회원.
- 보헤미안 클럽: 회원.
- 알팔파 클럽: 회원.
- 미국 공공행정국: 회원.
- 정부 직책, 패널 및 위원회
- 국방부 장관 (2001년~2006년)
- 국가 안보 우주 관리 및 조직 평가 위원회: 의장 (2000년)
- 미국 무역 적자 검토 위원회: 위원 (1999년~2000년)
- 탄도 미사일 위협 평가 위원회: 의장 (1998년)
- 공공 서비스 전국 위원회: 위원 (1987년~1990년)
- 국민경제위원회: 위원 (1988년~1989년)
- 레이건 대통령의 군비 통제 자문위원회: 위원 (1982년~1986년)
- 미일 관계 합동 자문 위원회: 위원 (1983년~1984년)
- 중동 대통령 특사, 레이건 행정부 (1983년~1984년)
- 해양법 조약 대통령 특사, 레이건 행정부 (1982년~1983년)
- 국방부 장관 (1975년~1977년)
- 포드 행정부 백악관 수석 보좌관 (1974년~1975년)
- NATO 주재 미국 대사 (1973년~1974년)
- 미국 의회: 일리노이주 하원의원 (1962년~1969년)
- 미국 해군: 항공사 등 다양한 직책 (1954년~1957년); 예비군 (1957년~1975년); 1989년 해군 대령으로 전역.
- 기업 연계 및 사업 이권
- 이스턴 항공: 전 이사
- 길리어드 사이언시스: 1988년 이사로 합류, 회장 (1997년~2001년)
- 제너럴 인스트루먼트: 회장 겸 CEO (1990년~1993년)
- G. D. Searle & Company: CEO/회장/사장 (1977년~1985년)
- 걸프스트림 항공우주: 이사
- 트리뷴 컴퍼니: 이사
- 메트리컴: 이사
- 시어스: 이사
- ABB: 이사
- [[켈로그}}: 1985년~1999년 이사 (카를로스 구티에레스가 2005년부터 부시 행정부 상무장관으로 임명되기 전까지 켈로그의 사장, CEO, 회장을 역임한 시기)
- 랜드 연구소: 1981년~1986년; 1995년~1996년 이사회 의장
- 아밀린 파마슈티컬스: 이사
13. See also
- 아가시디움 럼즈펠디
- 올라드 K. 로웬슈타인#보수주의자들과의 연관성
- 알려진 미지
- 럼즈펠드 독트린
-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회고록
- 밀턴 프리드먼
- 딕 체니
- 이라크 전쟁
14. External links
- [http://www.rumsfeld.com/ 공식 웹사이트]
- [https://archive.defense.gov/speeches/ 미 국방부: 연설 자료실]
- [https://web.archive.org/web/20180524031137/http://www.rumsfeldsrules.com/ 럼즈펠드의 규칙]
- [http://www.project-syndicate.org/contributor/722 도널드 럼즈펠드의 프로젝트 신디케이트 칼럼]
- [http://churchillsolitaire.com/ 처칠 솔리테어]
- [https://georgewbush-whitehouse.archives.gov/government/rumsfeld-bio.html 백악관 전기]
- [https://web.archive.org/web/20061115085641/http://www.defenselink.mil/bios/secdef_bio.html 국방부 전기]
- [https://www.c-span.org/person/?donaldrumsfeld C-SPAN 출연]
- [http://media.washingtonpost.com/wp-srv/nation/pdf/12112008_detaineeabuse.pdf 미 의회 상원 군사위원회, 미군 구금자 대우 조사]
- [https://www.imdb.com/title/tt2390962 알려지지 않은 미지 (에롤 모리스 감독 다큐멘터리)]
- [https://www.pbs.org/wgbh/pages/frontline/shows/pentagon/ PBS 프론트라인 - 럼즈펠드의 전쟁 (2004년 다큐멘터리)]
- [http://www.gwu.edu/~nsarchiv/NSAEBB/NSAEBB82/ 럼즈펠드(중동 특사)와 후세인의 만남 영상]
- [https://www.pbs.org/wgbh/pages/frontline/shows/pentagon/etc/cronfeld.html 도널드 럼즈펠드의 생애와 경력 (PBS)]
- [https://www.washingtonpost.com/wp-srv/liveonline/partners/frontline.htm 워싱턴 포스트 - 럼즈펠드의 전쟁 아카이브 (2001~2004)]
- [http://www.airforcetimes.com/legacy/new/0-AIRPAPER-1610997.php 럼즈펠드 실상 공개 (에어 포스 타임스 기사)]
- [https://www.theatlantic.com/issues/2003/11/mann.htm 클로즈업: 젊은 럼즈펠드 (더 애틀랜틱 기사)]
- [http://www.bbc.co.uk/radio4/news/bh/rumsfeld.shtml 도널드 럼즈펠드 어록 (BBC 라디오 4)]
- [https://web.archive.org/web/20090427201621/http://frontlineclub.com/events/2007/05/insight-with-andrew-cockburn-rumsfeld---the-man-behind-the-us-military-disaster.html 전기 작가 앤드루 콕번의 럼즈펠드 논평 (프론트라인 클럽)]
- [http://www.chicagomag.com/Chicago-Magazine/June-2001/The-Don-A-Look-at-Former-Defense-Secretary-Donald-Rumsfeld/ 더 돈: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에 대한 시선 (시카고 매거진)]
- [http://www.ft.com/cms/s/2/76c3f776-3563-11e0-aa6c-00144feabdc0.html 파이낸셜 타임즈와의 점심: 도널드 럼즈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