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뉴트 깅리치는 어린 시절부터 학업과 정치에 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이후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교수로 재직하며 정치 경력의 기반을 다졌다.
1.1. 출생 및 가족 배경
깅리치는 1943년 6월 17일 펜실베이니아주 해리스버그의 해리스버그 병원에서 뉴튼 르로이 맥퍼슨(Newton Leroy McPherson영어)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생모 캐슬린 "킷" 도허티(Kathleen "Kit" Daugherty영어, 1925~2003)와 생부 뉴튼 설스 맥퍼슨(Newton Searles McPherson영어, 1923~1970)은 1942년 9월, 각각 16세와 19세의 나이로 결혼했으나 며칠 만에 파경을 맞았다. 그의 외조부모는 제이콥 르로이 도허티(Jacob Leroy Daugherty영어, 1890~1939)와 에델 M. 헨드릭스(Ethel M Hendricks영어, 1896~1942)이며, 친조부모는 로버트 넬슨 커스테터(Robert Nelson Kerstetter영어, 1888~1930)와 루이스 S. 맥퍼슨(Louise S McPherson영어, 1905~1982)이다.
1946년 그의 어머니는 로버트 깅리치(Robert Gingrich영어, 1925~1996)와 재혼했고, 로버트는 뉴튼을 입양하여 그의 성은 깅리치로 바뀌었다. 로버트 깅리치는 미국 육군 장교로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1956년 가족은 유럽으로 이주하여 프랑스 오를레앙과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잠시 거주했다. 깅리치는 어머니를 통해 세 명의 이복동생을 두었는데, 캔디스 깅리치(Candace Gingrich영어), 수잔 깅리치(Susan Gingrich영어), 로버타 브라운(Roberta Brown영어)이다. 그는 펜실베이니아주 허멜스타운과 양아버지가 주둔했던 군사 기지에서 성장했으며, 가족의 종교는 루터교였다. 1960년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족은 조지아주 포트 무어로 이주했다.
1.2. 학력
1961년 깅리치는 조지아주 콜럼버스의 베이커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십대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프랑스 오를레앙에 거주할 때 베르됭 전투 현장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치러진 희생과 정치적 리더십의 중요성에 대해 배웠다.
깅리치는 1965년 애틀랜타의 에모리 대학교에서 역사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툴레인 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아 1968년 역사학 석사 학위, 1971년 유럽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9년부터 1970년까지 6개월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콩고에서의 벨기에 교육 정책 1945-1960"이라는 제목의 박사 학위 논문을 작성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학생이자 가장으로서 병역 연기를 받았다. 1985년 그는 "내가 믿는 모든 것을 고려할 때, 내 안의 상당 부분은 내가 (전쟁에) 갔어야 했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1.3. 교수 경력
1970년 깅리치는 웨스트조지아 대학교 역사학과에 합류했으나, 그곳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데는 거의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환경 연구 프로그램을 조율했으며, 1976년에는 역사학과에서 지리학과로 옮겨졌다. 대학 재직 중 그는 미국 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세 차례 무급 휴가를 냈고, 두 번의 낙선 끝에 대학을 떠났다. 당시 대학 시스템 규정상 현직 교수는 공직에 출마할 수 없었다. 그는 1977년 종신 재직권 심사에서 탈락한 후 대학을 떠났다.
2. 초기 정치 경력
깅리치는 정치 활동 초기에 여러 선거에 도전하며 보수주의 정치 세력을 결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1. 의회 선거 운동
1974년 깅리치는 조지아주 북중부 제6선거구에서 공화당 후보로 정치 경력에 처음 도전했다. 그는 20년 동안 현직에 있던 민주당의 존 제임스 플린트 주니어에게 2,770표 차이로 패배했다. 깅리치의 상대적인 성공은 정치 분석가들을 놀라게 했다. 플린트는 이전에 심각한 도전을 받은 적이 없었으며, 깅리치는 그에게 맞선 두 번째 공화당 후보였다. 1974년은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워터게이트 스캔들 여파로 공화당 후보들에게 전국적으로 재앙적인 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플린트를 상대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깅리치는 1976년 플린트와의 재대결을 모색했다. 전국적으로 1974년보다 1976년 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약간 더 나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1976년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후보는 조지아주의 전 주지사 지미 카터였다. 카터는 고향 조지아에서 득표율의 3분의 2 이상을 얻었다. 깅리치는 이 선거에서 5,100표 차이로 패배했다.
1978년 선거를 앞두고 플린트가 은퇴를 결정하자, 깅리치는 민주당 주 상원의원 버지니아 셰퍼드를 7,500표 차이로 꺾고 당선되었다. 그는 이 선거구에서 다섯 차례 재선에 성공했으며, 이후 선거구 조정으로 변경되었다. 그는 1990년 하원 선거에서 공화당 허먼 클라크와의 예비 선거에서 978표 차이로 승리하고, 본 선거에서는 민주당 데이비드 워리에게 974표 차이로 간신히 승리하며 한 차례 근소한 차이의 접전을 치렀다. 이 선거구는 전국적으로 공화당 지지 성향이 강해지고 있었지만, 1980년대 후반까지도 보수적인 민주당원들이 대부분의 지역 공직과 조지아주 총회 의석을 장악하고 있었다.

2.2. 보수 기회 사회 (COS) 창립
1981년 깅리치는 군사 개혁 코커스(MRC)와 의회 항공우주 코커스를 공동 설립했다. 1983년 의회 페이지 성추문 사건 당시, 깅리치는 댄 크레인과 게리 스터즈 의원의 축출을 요구하는 목소리 중 하나였다. 깅리치는 국제 통화 기금의 공산주의 국가 대출 금지 제안을 지지했으며,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날을 새로운 연방 공휴일로 지정하는 법안을 지지했다.
1983년 깅리치는 젊은 보수 공화당 하원의원들로 구성된 보수 기회 사회(Conservative Opportunity Society, COS영어)를 설립했다. 초기 COS 회원으로는 로버트 스미스 워커, 저드 그레그, 댄 코츠, 코니 맥 3세 등이 있었다. 이 그룹은 점차 수십 명의 의원으로 확대되었고, 매주 만나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발전시켰다. 깅리치의 여론조사 분석은 이 그룹의 초기 초점을 결정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1984년 재선 캠페인에서 "기회 사회" 아이디어를 채택하여 경제 성장, 교육, 범죄, 사회 문제에 대한 그룹의 보수적 목표를 지지했다. 레이건은 첫 임기 동안 이들을 강조하지 않았다. 레이건은 또한 두 번째 임기의 첫 국정연설에서 "기회 사회"를 언급했다.

2.3. 하원 소수당 원내총무
1988년 3월, 깅리치는 1987년 시민권 회복법에 반대 투표를 했으며 (레이건 대통령의 거부권 유지를 지지했다). 1988년 5월, 깅리치는 77명의 다른 하원의원들과 커먼 코즈와 함께 민주당 하원의장 짐 라이트에 대해 윤리 위반 혐의를 제기했다. 라이트는 책 거래를 이용하여 선거 자금법과 하원 윤리 규정을 위반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조사 과정에서 깅리치 또한 자신의 책 『기회의 창(Window of Opportunity영어)』에 대한 특이한 책 거래가 있었음이 보도되었다. 이 책은 홍보 비용이 유한 책임 조합에 의해 충당되었으며, 깅리치의 책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공화당 정치 후원자들로부터 10.50 만 USD를 모금했다. 깅리치가 라이트의 사임을 강제하는 데 성공하면서 공화당 코커스 내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커졌다.
1989년 3월, 깅리치는 에드워드 렐 매디건과의 치열한 선거에서 승리하여 미국 하원 소수당 원내총무가 되었다. 이는 깅리치가 공화당 내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권력직을 맡은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의도가 "훨씬 더 공격적이고 활동적인 당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원내총무로서의 초기 역할 중 하나로, 1989년 5월 깅리치는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 1989년에 임명될 예정이었던 파나마 운하 관리자 임명에 대한 논의에 참여했다. 깅리치는 파나마 독재 정권이 임명한 관리자에게 운하 통제권을 넘기는 것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다.
깅리치와 하원의 다른 의원들, 특히 새로 결성된 "7인조"는 거의 40년간의 민주당 통치 기간 동안 발생한 윤리적 결함을 비난했다. 하원 은행 스캔들과 의회 우체국 스캔들은 드러난 부패의 상징이었다. 깅리치 자신도 하원 은행에서 부도 수표를 발행한 의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90년 미국 국세청에 보낸 9463 USD 수표를 포함하여 22개의 수표를 부도 처리했다.
1990년, 여론조사 전문가 프랭크 런츠의 도움을 받아 포커스 그룹의 자문을 거친 후, GOPAC은 깅리치가 서명한 "언어, 통제의 핵심 메커니즘(Language, a Key Mechanism of Control영어)"이라는 제목의 메모를 배포했다. 이 메모는 공화당원들에게 "뉴트처럼 말하라"고 권장했다. 여기에는 "급진적", "병든", "배신자"와 같은 부정적인 의미의 "대조적인 단어" 목록과 "기회", "용기", "원칙적인"과 같은 긍정적인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통치 단어" 목록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깅리치는 이를 각각 민주당원과 공화당원을 묘사하는 데 사용하도록 권장했다.

하원과 상원에서 다수당이었던 민주당과의 협상 과정에서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자신의 선거 공약인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새로운 세금은 없다"에도 불구하고 증세가 포함된 적자 감축 패키지에 합의했다. 깅리치는 초기 세출 패키지를 부결시키고 1990년 미국 연방 정부 폐쇄로 이어진 반란을 주도했다. 이 합의는 오랜 협상 끝에 대통령과 양당 의회 지도자들이 지지했지만, 깅리치는 백악관 로즈 가든에서 TV 중계 중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하원 소수당 원내대표 로버트 H. 미셸은 깅리치의 반란을 "천 개의 악의"라고 특징지었다.
1990년 미국 인구조사에서 기록된 인구 증가로 인해 조지아주는 1992년 미국 하원 선거에서 추가 의석을 확보했다. 그러나 민주당이 장악한 조지아주 총회는 극도로 당파적인 하원의장 톰 머피의 지도 아래 깅리치를 특별히 표적으로 삼아 깅리치가 대표하던 선거구를 없앴다. 게리맨더링으로 인해 깅리치의 지역구는 세 개의 인접 선거구로 분할되었다. 깅리치 지역구의 남부 대부분, 그의 고향인 캐럴턴을 포함한 지역은 5선 민주당 의원 리처드 레이가 대표하는 콜럼버스 기반의 제3선거구로 편입되었다. 깅리치는 "하원의장은 모금과 게리맨더링을 통해 나를 제거하는 데 자신의 경력 일부를 진정으로 바쳤다"고 언급했다. 조지아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찰스 S. 불록 3세는 "머피 하원의장은 공화당원이 자신을 대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990년대 초, 깅리치는 조지아의 10개 의회 선거구 중 유일한 공화당 대표였다가 1992년 제4선거구의 창설과 잭 킹스턴 및 맥 콜린스의 공화당 의석 확보로 상황이 바뀌었다.
총회는 애틀랜타의 부유한 북부 교외 지역인 풀턴과 캅 카운티에 새로운 공화당 성향의 제6선거구를 만들었는데, 이는 깅리치가 이전에 대표한 적이 없는 지역이었다. 깅리치는 캐럴턴의 집을 팔고 새 선거구의 마리에타로 이사했다. 그의 예비 선거 상대였던 주 대표 허먼 클라크는 2년 전에도 깅리치에게 도전했던 인물로, 하원 은행 스캔들에서 깅리치의 22개 부도 수표 문제를 제기하고 깅리치가 선거구로 이사 온 것을 비판했다. 재검표 끝에 깅리치는 51% 대 49%로 980표 차이로 승리했다. 그가 예비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11월 본 선거에서의 당선은 거의 확실해졌다. 그는 명목상의 민주당 반대파를 상대로 이 선거구에서 세 차례 재선에 성공했다.
1995년, 깅리치의 1993년 대학 강의인 "미국 문명 재건(Renewing American Civilization영어)"은 조지아주 웨일스카의 라인하르트 칼리지에서 토요일마다 진행되었으며, 케이블 채널인 마인드 익스텐션 대학교에서 방영되었다.
3. 의회 경력 및 하원의장
깅리치는 연방 하원의원으로서 중요한 입법 활동을 주도하고 하원의장으로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으나, 동시에 여러 논란의 중심에 서며 미국 정치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3.1. 연방 하원 입성
1978년 조지아주 제6선거구에서 당선된 뉴트 깅리치는 1979년 1월 3일 연방 하원의원으로 취임하며 의회에 입성했다. 그는 이후 1999년 사임할 때까지 20년간 하원의원으로 재직했다.
3.2. '미국과의 계약' 및 '공화당 혁명'
1994년 선거 시즌 동안, 민주당 정책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공화당의 여러 파벌을 통합하기 위해 깅리치와 여러 공화당원들은 "미국과의 계약"을 고안했다. 이 계약은 공화당이 선거에서 승리할 경우 새로운 의회의 첫 100일 동안 하원에서 표결에 부칠 것을 약속한 10가지 정책을 담고 있었다. 이 계약은 깅리치와 다른 공화당 하원의원 후보들이 서명했다. 계약은 복지 개혁, 임기 제한, 범죄, 균형 예산/세금 제한 수정안과 같은 문제부터 유엔 임무에 대한 미국 군사 참여 제한과 같은 더 전문적인 법안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1994년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54석을 추가하여 1954년 이후 처음으로 하원의 통제권을 장악했다. 일리노이주의 오랜 하원 소수당 원내대표 밥 미셸은 재선에 출마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의회로 돌아오는 최고위 공화당원인 깅리치가 하원의장이 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놓였다. 의회 권력을 공화당으로 넘긴 이 중간선거는 워싱턴 D.C.의 "중심축을 바꿨다." 타임지는 깅리치를 선거에서의 역할로 인해 1995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3.3. 하원의장 재임
하원의장으로서 깅리치는 "미국과의 계약"에 명시된 10가지 쟁점을 회기 첫 100일 이내에 모두 표결에 부치겠다는 약속을 이행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이를 "미국에 대한 계약"이라고 불렀다.

제104차 미국 의회가 제안한 법안에는 의회 의원의 임기 제한, 감세, 복지 개혁, 균형 예산 수정안뿐만 아니라 하원 재정의 독립적인 회계 감사 및 하원 이발소와 구두닦이 서비스와 같은 비필수 서비스의 폐지가 포함되었다. 깅리치가 하원의장으로 재직한 첫 2년 후, 공화당 다수당은 1996년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는데, 이는 공화당이 68년 만에 처음으로 재선에 성공한 것이며, 민주당 대통령이 재선된 것과 동시에 하원 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80년 만에 처음이었다.
하원의장으로서 깅리치는 기독교 보수주의를 공화당과 점점 더 밀접하게 연결시키려고 노력했다. 2018년 연구에 따르면, 기독교 보수주의는 2000년까지 공화당의 정책 강령에 확고히 자리 잡았다. 예일 대학교 의회 학자 데이비드 메이휴는 깅리치를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로 묘사하며, "깅리치에게서 우리는 공공 영역에서 중요한 결과를 낳는 의회 의원의 좋은 사례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1997년 깅리치 하원의장은 대만과 중국 베이징을 방문했다.
3.3.1. 주요 입법 성과
클린턴 대통령의 선거 공약 중 하나는 수혜자에 대한 근로 요건 추가와 같은 변화를 통해 복지 시스템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94년까지 빌 클린턴 행정부는 보편적 의료 보험 프로그램 추진에 더 관심을 두는 것처럼 보였다. 깅리치는 클린턴이 복지 문제에서 지연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의회가 90일 이내에 복지 개혁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공화당이 대통령이 복지 법안을 승인하도록 계속해서 정치적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6년, 클린턴이 거부권을 행사한 두 개의 복지 개혁 법안을 만든 후, 깅리치와 그의 지지자들은 복지 시스템을 재건하기 위한 개인 책임 및 근로 기회 법안의 통과를 추진했다. 이 법안은 주 정부에 복지 제공에 대한 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연방 정부의 책임을 줄였다. 이 법안은 복지 지원에 시간 제한을 두는 빈곤 가족을 위한 임시 지원 프로그램을 도입했으며,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부양 가족을 위한 원조 프로그램을 대체했다. 복지 시스템의 다른 변화에는 식품 지원 프로그램 자격에 대한 더 엄격한 조건, 이민자 복지 지원 감소, 수혜자에 대한 근로 요건 등이 포함되었다. 이 법안은 1996년 8월 22일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법으로 서명되었다.
1998년 저서 『힘들게 배운 교훈(Lessons Learned the Hard Way영어)』에서 깅리치는 자원봉사와 영적 갱신을 장려하고, 가족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며, 빈곤 지역 기업에 대한 세금 인센티브와 규제 완화를 추진하고, 저소득층 가족의 주택 소유를 늘릴 것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짓는 것을 돕는 운동을 통해 삶을 개선하도록 촉발한 해비타트 포 휴머니티를 칭찬했다.

1994년 "미국과의 계약"의 핵심 측면은 균형 연방 예산에 대한 약속이었다. 정부 폐쇄가 끝난 후, 깅리치와 다른 공화당 지도자들은 의회가 1996년에 균형 예산을 편성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대신, 그들은 백악관이 이미 승인한 약간의 감축을 승인하고 다음 선거 시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1997년 5월까지 공화당 의회 지도자들은 연방 예산에 대해 민주당 및 클린턴 대통령과 타협에 도달했다. 이 합의는 연방 적자를 줄이고 2002년까지 균형 예산을 달성하도록 설계된 연방 지출 계획을 요구했다. 이 계획에는 5년 동안 총 1520.00 억 USD의 초당적 감세가 포함되었다. 지출 계획의 다른 주요 부분은 메디케어 구조 조정을 통해 1150.00 억 USD를 절감하고, 근로 빈곤층 자녀의 건강 보험 확대를 위해 240.00 억 USD를 할당하며, 대학 등록금에 대한 세액 공제와 20.00 억 USD 규모의 복지-근로 일자리 이니셔티브를 포함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1997년 8월 예산 법안에 서명했다. 서명식에서 깅리치는 "두 당을 하나로 모은 것은 보통 미국인들의 정치적 의지였다"며 일반 미국인들에게 공로를 돌렸다.

1998년 초, 예상보다 좋은 경제 실적으로 인해 세수 증가가 연방 예산 적자를 250.00 억 USD 미만으로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클린턴은 원래 제안된 것보다 3년 앞서 1999년 균형 예산을 제출했으며, 이는 1969년 이후 처음으로 연방 예산이 균형을 이룬 것이었다.
1997년, 클린턴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자본 이득세 인하를 포함하는 1997년 납세자 구제법을 발효시켰다. 이 법에 따라 개인 주택 판매 이익(기혼 부부의 경우 50.00 만 USD, 독신자의 경우 25.00 만 USD)은 지난 5년 중 최소 2년 동안 거주한 경우 면제되었다. (이전에는 55세 이상에게 일생에 한 번 12.50 만 USD 면제로 제한되었다.) 또한 여러 다른 투자 이득에 대한 세금도 인하되었다.
또한 이 법은 상속된 재산과 증여세 면제 한도를 높였다. 깅리치는 자본 이득세 인하, 특히 균형 예산과 상속세 및 자본 이득세 인하를 목표로 한 "미국과의 계약"의 의제를 만든 공로를 인정받았다. 일부 공화당원들은 클린턴과의 예산 및 세금 법안 합의가 불충분하다고 느꼈지만, 깅리치는 이 감세가 클린턴 행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화당 의회의 중요한 성과라고 밝혔다. 깅리치는 밥 돌과 함께 이전에 전 미국 주택도시개발부 장관 잭 켐프가 이끄는 켐프 위원회를 설립했는데, 이 세금 개혁 위원회는 배당금, 이자, 자본 이득에 대한 비과세 등 여러 권고안을 제시했다.
깅리치의 새로운 의회에서 통과된 첫 번째 법안 중 하나는 1995년 의회 책임법이었다. 이 법은 의회 의원들에게 1964년 민권법과 1990년 미국 장애인법을 포함하여 기업과 직원에게 적용되는 것과 동일한 법률을 적용했다. "미국과의 계약"의 조항으로서, 이 법은 새로운 공화당 다수당의 목표인 의회가 누리던 특권 중 일부를 제거하는 것을 상징했다. 이 법안은 하원과 상원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으며, 1995년 1월 23일 법으로 서명되었다.
깅리치는 높이 평가받던 기술 평가국을 폐쇄하고, 대신 원자력 과학자 회보가 "이기적인 로비스트와 싱크탱크"라고 부른 것에 의존했다.
3.3.2. 정부 폐쇄와 탄핵 추진

깅리치와 새로 들어선 공화당 다수당의 정부 지출 속도 둔화 약속은 메디케어, 교육, 자연 환경, 공중 보건에 대한 대통령의 의제와 충돌하여 총 28일간의 두 차례 연방 정부 일시 폐쇄로 이어졌다.
클린턴은 공화당의 수정안이 미국 재무부가 차입 위기를 피하기 위해 연방 신탁 기금을 사용하는 능력을 박탈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화당의 수정안은 사형수들의 항소를 제한하고, 건강, 안전, 환경 규제 발행을 더 어렵게 하며, 대통령이 7년 균형 예산을 약속하도록 했을 것이다. 클린턴은 대부분의 지출 권한이 만료된 시점 이후에도 정부가 계속 운영되도록 허용하는 두 번째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클린턴이 반대한 공화당 수정안은 메디케어 파트 B 보험료를 인상할 뿐만 아니라, 예정된 인하를 취소할 것이었다. 공화당은 1996년 1월 메디케어 파트 B 보험료를 월 53.5 USD로 인상할 것을 고집했다. 클린턴은 당시 노인들이 지불하는 보험료를 42.5 USD로 인하하는 현행법을 선호했다.
정부 폐쇄 기간 동안 대부분의 비필수 기관이 문을 닫았는데, 이는 당시 미국 역사상 가장 긴 폐쇄였다. 폐쇄는 클린턴이 의회 예산국이 승인한 균형 예산 계획을 제출하는 데 동의하면서 종료되었다.
위기 동안 깅리치의 대중적 이미지는 이츠하크 라빈의 장례식을 위해 이스라엘을 오가는 에어 포스 원 비행 중 클린턴이 깅리치를 무시했다는 인식 때문에 손상되었다. 깅리치는 비행 중 클린턴이 자신을 예산 논의에 초대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표하며, 자신과 돌이 비행기 뒷문으로 내리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 "더 강경한 잠정 예산안을 보낸 이유 중 일부"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NBC 뉴스는 깅리치와 돌이 클린턴 바로 뒤에서 앞쪽 계단을 통해 텔아비브에서 내리는 모습을 담은 비디오 영상을 공개했다.
깅리치는 정부 폐쇄가 자신의 개인적인 불만 때문이라고 암시한 것에 대해 널리 조롱당했으며, 그를 아기가 "떼를 쓰는" 모습으로 묘사한 널리 공유된 사설 만화도 있었다. 척 슈머를 포함한 민주당 지도자들은 예산 대치에 대한 깅리치의 동기를 공격할 기회를 잡았다. 1998년 깅리치는 이러한 발언이 하원의장으로서 자신의 "가장 피할 수 있었던 실수"였다고 말했다.
정부 폐쇄가 공화당에 미친 영향에 대해 깅리치는 나중에 "워싱턴의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큰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완전히 틀렸다. 1928년 이후 재선된 공화당 다수당은 없었다. 우리가 재선된 이유 중 일부는 ... 우리 지지층이 우리가 진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대결에 직면했을 때 움츠러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진지하다고 생각했다"고 언급했다. 2011년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칼럼에서 깅리치는 정부 폐쇄가 1997년 균형 예산 합의와 1920년대 이후 처음으로 4년 연속 균형 예산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으며, 1928년 이후 처음으로 공화당 다수당이 재선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주장했다.
3.3.3. 윤리 위반 및 징계
깅리치가 하원의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민주당원들에 의해 84건의 윤리 위반 혐의가 제기되었다. 이 중 정치적 목적으로 운영되는 대학 강의에 대해 세금 면제 지위를 주장한 한 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각되었다. 1997년 1월 21일, 하원은 깅리치에게 공식적으로 견책을 내리고 (찬성 395표, 반대 28표) "조사 비용 중 30.00 만 USD를 하원에 상환하도록 명령했다." 이는 하원의장이 윤리 위반으로 징계를 받은 첫 사례였다.

또한 미국 하원 윤리 위원회는 깅리치를 대신하여 수사관들에게 제공된 부정확한 정보가 하원 규칙을 "고의적으로 또는 ... 무모하게" 무시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윤리 위원회의 특별 고문 제임스 M. 콜은 깅리치가 연방 세법을 위반했으며, 위원회가 자신에 대한 고발을 기각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윤리 위원회에 거짓말을 했다고 결론 내렸다. 전체 위원회는 세법 위반 여부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고, 그 문제는 미국 국세청에 맡겼다. 1999년, 국세청은 가능한 세금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던 "미국 문명 재건" 강의와 관련된 단체들을 무혐의 처분했다.
이 상황에 대해 깅리치는 1997년 1월 "나는 나를 대신하여 위원회에 제출되는 정보를 철저히 지시하거나 검토할 만큼 충분히 집중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다. 내 이름으로, 그리고 내 서명으로 부정확하고 불완전하며 신뢰할 수 없는 진술이 위원회에 제출되었지만, 나는 위원회를 오도할 의도가 없었다 ... 나는 국민의 집에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약화시킬 수 있는 논란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3.4. 의장직 사임
1997년 여름, 여러 하원 공화당원들이 깅리치의 대중적 이미지가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그를 하원의장에서 교체하려 시도했다. 이 "쿠데타" 시도는 7월 9일 오하이오주 공화당 회의 의장 존 베이너와 뉴욕의 공화당 지도부 의장 빌 팩슨의 회의로 시작되었다. 그들의 계획에 따르면, 하원 다수당 원내대표 딕 아미, 하원 다수당 원내총무 톰 딜레이, 베이너, 팩슨은 깅리치에게 최후통첩을 전달할 예정이었다: 사임하거나, 투표로 해임되거나.
그러나 아미는 팩슨을 새로운 하원의장으로 만들자는 제안에 주저하며, 자신의 비서실장에게 깅리치에게 경고하라고 지시했다. 7월 11일, 깅리치는 상황을 평가하기 위해 고위 공화당 지도부와 만났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만약 그가 투표로 해임된다면, 새로운 하원의장 선거가 있을 것이고, 이는 민주당원들과 반대하는 공화당원들이 민주당의 딕 게파트를 하원의장으로 선출할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었다.

7월 16일, 팩슨은 자신의 직위에서 사임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자신이 상황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고 느꼈으며, 지도부에서 유일하게 깅리치에 의해 임명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깅리치는 팩슨의 사임을 수락하고 팩슨에게 즉시 지도부 사무실을 비우라고 지시했다.
1998년, 깅리치의 비공개 여론조사는 동료 공화당원들에게 클린턴-르윈스키 스캔들을 밀어붙이면 클린턴의 인기가 손상되고 공화당이 하원에서 6석에서 30석을 추가로 얻을 것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동시에 깅리치는 자신보다 23세 어린 여성인 칼리스타 비섹과 불륜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의석을 얻는 대신 공화당은 5석을 잃었고, 이는 대통령직을 차지하지 못한 정당으로서는 64년 만에 최악의 중간선거 성적이었다. 인기 없는 책 거래를 포함한 다른 윤리 위반도 그의 인기를 떨어뜨렸지만, 그는 자신의 지역구에서는 재선에 성공했다.
선거 다음 날, 그에게 반기를 들 준비가 된 공화당 코커스는 그의 하원의장직 사임을 촉발했다. 그는 또한 몇 주 후에 하원에서도 완전히 물러날 의사를 밝혔다. 1999년 1월 그는 의원직에서 사임했다. 하원의장직을 포기하면서 깅리치는 다른 공화당원들을 언급하며 자신이 "식인종들을 이끌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1998년 11월, 뉴욕 타임스는 깅리치를 "권력을 잡는 데는 전문가였지만, 권력을 유지하는 데는 초보자"라고 묘사하며, 그가 "급진적이고 양극화적인 인물이 지도부에서 얼마나 오래 버티기 어려운지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1997년 12월, 깅리치는 2000년 대선 출마 가능성을 시사했지만, 당의 중간선거 성적과 그의 사임으로 인해 모든 계획을 철회했다.
4. 하원의장 퇴임 이후
의회 활동을 마친 후에도 뉴트 깅리치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자신의 정치적, 이념적 영향력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4.1. 싱크탱크 및 정책 활동
2003년, 깅리치는 건강 변화 센터를 설립했다. 깅리치는 2003년 메디케어 처방약, 개선 및 현대화 법안을 지지했는데, 이 법안은 메디케어 파트 D 연방 처방약 혜택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이 법안의 비용 때문에 그를 비판했다. 2011년 5월 15일, 미트 더 프레스 인터뷰에서 깅리치는 "우리 모두는 건강 보험 비용을 지불하는 데 책임이 있다"는 자신의 오랜 신념을 반복하며, 이를 건강 보험 가입 의무화 또는 보험 보장을 보장하는 채권 발행을 통해 이행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같은 인터뷰에서 깅리치는 "우파 사회 공학이 좌파 사회 공학보다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파나 좌파로부터 급진적인 변화를 강요하는 것은 자유 사회가 운영되는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으며, 이 발언은 공화당 내에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2005년, 깅리치는 힐러리 클린턴과 함께 21세기 건강 정보법을 발표했다. 이 법안은 서류 작업을 기밀 전자 건강 정보 네트워크로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깅리치는 또한 2007년에 알츠하이머병 퇴치를 위한 미국의 조치들의 강점과 약점을 평가하기 위해 구성된 건강 정책 전문가들로 구성된 독립적인 의회 연구 그룹의 공동 의장을 맡았다.
깅리치는 여러 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그중에는 미국 국가 안보/21세기 위원회로 공식 명명된 하트-루드만 위원회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 위원회는 미국군, 법 집행 기관, 정보 기관에 영향을 미치는 국가 안보 문제를 조사했다. 2005년 그는 유엔 개혁 태스크포스의 공동 의장이 되었는데, 이 태스크포스는 미국이 유엔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계획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2010년 현재, 깅리치는 20년 넘게 미국 공군의 공군 대학교에서 합동 고위 장교 전투 과정의 최장기 교사로 재직했다. 또한 그는 국방대학교의 명예 특별 초빙 학자이자 교수이며, 2012년 현재 모든 국방 서비스의 장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깅리치는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부 장관에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포함한 전략적 문제에 대해 비공식적으로 조언했으며, 국방부가 국무부와 미국 국가안보회의에 외교 정책 영향력을 "양보하지 말라"고 장려했다. 깅리치는 또한 국가 안보 개혁 프로젝트의 지도 연합 회원이다.

깅리치는 2007년에 설립된 527 그룹인 미래 승리를 위한 미국적 해법을 설립하고 의장을 역임했다. 이 그룹은 셸던 아델슨과 석탄 회사 피바디 에너지와 같은 주요 기부자들로부터 5200.00 만 USD를 모금한 "모금 거물"이었다. 이 그룹은 규제 완화와 해상 석유 시추 및 기타 화석 연료 추출 증가를 촉진하고 직원 자유 선택법에 반대했다. 폴리티코는 "여론조사원과 모금가들을 포함하는 이 조직은 깅리치의 책을 홍보하고, 직접 우편을 보내고, 그의 대의를 선전하는 광고를 방영하며, 전국 여행 자금을 지원한다"고 보도했다. 깅리치가 조직을 떠난 후 2011년에 미래 승리를 위한 미국적 해법은 해체되었다.
깅리치가 설립하거나 의장을 맡은 다른 조직 및 회사로는 창의적 제작 회사인 깅리치 프로덕션스(Gingrich Productions영어)와 종교 교육 조직인 미국 리더십 갱신(Renewing American Leadership영어)이 있다. 깅리치는 전 외교 관계 협의회 회원이다. 그는 보수적인 싱크탱크인 미국 기업 연구소와 후버 연구소의 연구원이다. 그는 때때로 케이블 뉴스 쇼, 예를 들어 폭스 뉴스 채널의 논평가, 게스트 또는 패널로 활동한다. 그는 폭스 뉴스 채널의 기고자로 등록되어 있으며, 다양한 코너에 게스트로 자주 출연한다. 그는 또한 폭스 뉴스 채널의 특별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깅리치는 정부 지출을 줄이기 위해 식스 시그마 방법을 홍보하겠다고 약속하는 "지금 강한 미국" 서약에 서명했다.
깅리치는 전 하원의원 패트릭 J. 케네디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전 국내 정책 고문이었던 밴 존스와 함께 오피오이드 회복을 위한 옹호자들을 설립했다.
4.2. 사업 및 재정 활동
1999년 의회를 떠난 후, 깅리치는 여러 영리 기업을 설립했다. 2001년부터 2010년 사이에 그와 그의 아내가 전부 또는 일부를 소유한 회사들은 거의 1.00 억 USD의 수익을 올렸다. 2015년 현재 깅리치는 캐나다 광업 회사 배릭 골드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2011년 7월 공개된 재정 공개 서류에 따르면, 깅리치와 그의 아내는 2010년에 최소 670.00 만 USD의 순자산을 보유했으며, 이는 2006년의 최대 순자산 240.00 만 USD에 비해 증가한 수치이다. 그의 순자산 증가는 대부분 자신의 영리 기업으로부터 받은 지급금 때문이었다.
4.2.1. 깅리치 그룹 및 건강 변화 센터
깅리치 그룹은 1999년 컨설팅 회사로 조직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비건강 관련 고객들은 줄어들었고, 건강 변화 센터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두 회사는 2001년부터 2010년 사이에 5500.00 만 USD의 수익을 올렸다. 수익은 300개 이상의 건강 보험 회사와 다른 고객들로부터 나왔으며, 회원은 깅리치와의 만남 및 기타 특전을 위해 연간 최대 20.00 만 USD를 지불했다. 2011년, 깅리치가 대통령 후보가 되면서 그는 사업 지분을 매각하고, "가능한 한" 고객 전체 목록과 받은 금액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2012년 4월, 건강 변화 센터는 파산법 제7장을 신청하여 100.00 만 USD에서 1000.00 만 USD에 달하는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자산을 청산할 계획을 세웠다.
2001년부터 2010년 사이에 깅리치는 프레디 맥을 위해 컨설팅을 제공했다. 프레디 맥은 의회에서 고려 중인 새로운 규제에 대해 우려하고 있던 정부 후원 기업의 2차 주택 담보 대출 회사였다. 컨설팅 비용으로 160.00 만 USD를 받은 것에 대해 깅리치는 "프레디 맥은 다른 컨설팅 회사에 지불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 직원과 여러 사무실을 가진 깅리치 그룹에 컨설팅 비용을 지불했다"고 말했다. 2012년 1월, 그는 프레디 맥이 허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 변화 센터의 사업 파트너들도 동의해야만 프레디 맥과의 계약을 공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4.2.2. 깅리치 프로덕션스
깅리치 프로덕션스(Gingrich Productions영어)는 깅리치의 아내 칼리스타 깅리치가 이끄는 회사로 2007년에 설립되었다. 2011년 5월 현재 회사 웹사이트에 따르면, 이 회사는 "뉴트와 칼리스타 깅리치의 작품을 선보이는 공연 및 제작 회사이다. 뉴트와 칼리스타는 역사 및 공공 정책 다큐멘터리를 기획 및 제작하고, 책을 쓰고, 오디오북과 내레이션을 녹음하며, 사진 에세이를 제작하고, 텔레비전 및 라디오에 출연한다."
2008년부터 2011년 사이에 이 회사는 종교에 관한 세 편의 영화, 에너지에 관한 한 편, 로널드 레이건에 관한 한 편, 그리고 급진 이슬람의 위협에 관한 한 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이 모든 영화는 보수 단체인 시티즌스 유나이티드와의 공동 프로젝트였다. 2011년, 뉴트와 칼리스타는 미국의 예외주의를 주제로 한 영화 『언덕 위의 도시(A City Upon a Hill영어)』에 출연했다.
2011년 5월 현재, 이 회사에는 약 5명의 직원이 있었다. 2010년에는 깅리치에게 240.00 만 USD 이상을 지급했다.
4.2.3. 깅리치 커뮤니케이션스
깅리치 커뮤니케이션스(Gingrich Communications영어)는 깅리치의 공개 출연, 그의 폭스 뉴스 계약, 그리고 그의 웹사이트 newt.org를 홍보했다. 2011년까지 깅리치는 연설 한 번에 최대 6.00 만 USD를 받았으며, 연간 80회까지 연설했다. 깅리치의 비영리 단체 중 하나인 2009년 3월에 설립된 미국 리더십 갱신(Renewing American Leadership영어)은 깅리치 커뮤니케이션스에 2년 동안 22.00 만 USD를 지불했다. 이 자선 단체는 기부자들의 이름을 깅리치와 공유했으며, 깅리치는 이를 자신의 영리 기업에 활용할 수 있었다. 가장 규모가 컸을 때 15명의 직원을 고용했던 깅리치 커뮤니케이션스는 깅리치가 대통령 선거 운동을 시작한 2011년에 문을 닫았다.
4.2.4. 기타
- 셀러브리티 리더스(Celebrity Leaders영어)는 깅리치의 강연뿐만 아니라 전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 마이클 스틸과 전 펜실베이니아주 상원의원 릭 샌토럼과 같은 다른 고객들의 강연도 주선하는 에이전시이다. 이 에이전시의 사장 겸 CEO인 캐시 러버스(Kathy Lubbers영어)는 깅리치의 딸이다. 깅리치는 이 에이전시의 지분을 가지고 있으며, 2010년에 이 에이전시로부터 7.00 만 USD 이상을 받았다.
- FGH 퍼블리케이션스(FGH Publications영어)는 깅리치가 공동 저술한 소설의 제작 및 인세 관리를 담당한다.
4.3. 언론 활동 및 논평
깅리치는 폭스 뉴스 채널의 기고자로 활동하며 다양한 코너에 게스트로 자주 출연했고, 때로는 폭스 뉴스 채널의 특별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2013년 6월 26일, CNN은 깅리치가 2013년 가을에 재개될 새로운 버전의 『크로스파이어』에 S. E. 컵, 스테파니 커터, 밴 존스와 함께 패널로 참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깅리치는 이 개편된 토론 프로그램에서 우파를 대표했다. 이 프로그램은 다음 해에 취소되었다.
4.4. 자문 및 기타 역할
깅리치는 하원의장 퇴임 이후에도 여러 정부 기관, 비영리 단체에서 자문 역할을 수행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미국 국방부의 국방 정책 자문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유엔 개혁 태스크포스 공동 의장, 미국 공군의 공군 대학교 및 국방대학교 교수 등 국방 및 안보 분야에서 자문 및 교육 활동을 펼쳤다.
5. 대통령 선거 출마 및 정치 활동
뉴트 깅리치는 하원의장 퇴임 후에도 미국 정치의 주요 무대에서 활동하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거나 주요 후보들을 지원하는 등 활발한 정치적 행보를 이어갔다.
5.1. 2012년 대통령 선거

2005년부터 2007년 사이에 깅리치는 200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에 관심을 표명했다. 2005년 10월 13일, 깅리치는 "나는 특정 상황에서 출마할 것"이라며 대통령 출마를 고려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그는 자신이 옹호하는 정책 아이디어를 다른 후보가 옹호하지 않을 경우 출마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7년 9월 28일, 깅리치는 자신의 지지자들이 10월 21일까지 자신의 캠페인에 3000.00 만 USD를 약정하면 후보 지명을 모색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강력하게" 출마를 고려했음에도 불구하고, 9월 29일 대변인 릭 타일러는 깅리치가 200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가 출마할 경우 매케인-파인골드 법안에 따라 자신의 정치 조직인 미래 승리를 위한 미국적 해법의 의장직을 사임해야 했기 때문이다. 깅리치는 "캠페인이 현실적인지 탐색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적 해법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2008년 말, 애틀랜틱의 마크 앰빈더와 워싱턴 포스트의 로버트 노박을 포함한 여러 정치 평론가들은 깅리치를 2012년 대선에서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지목했으며, 앰빈더는 깅리치가 "이미 아이오와주와 뉴햄프셔주에 씨앗을 뿌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2010년 7월 퍼블릭 폴리시 폴링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깅리치가 공화당 후보 중 선두를 달리고 있었으며, 공화당 유권자의 23%가 그에게 투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2009년 3월 그레타 반 서스터런과의 『온 더 레코드(On the Record영어)』 출연에서 가능한 후보로서의 견해를 설명하며 깅리치는 "많은 공화당원들이 이 나라가 이정표에 질려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매우 슬프다. [미국인들은] 정치인들이 자신들만 챙기는 것에 질려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돈이 도저히 변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쓰이는 것에 질려 있다... 미국 납세자들이 점점 더 지쳐가고 있기 때문에 현직 의원들의 반대자가 꾸준히 증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11년 3월 3일, 깅리치는 공식적인 예비 위원회 대신 잠재적인 대통령 출마 탐색을 위한 "뉴트 탐색 2012(Newt Exploratory 2012영어)"라는 웹사이트를 공식 발표했다. 2011년 5월 11일, 깅리치는 2012년 공화당 후보 지명을 모색할 의사를 공식 발표했다.
2011년 6월 9일, 깅리치 캠페인의 고위 참모진이 대거 사임하면서 그의 대선 출마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2011년 6월 21일에는 두 명의 고위 참모가 추가로 사임했다.
이에 대해 깅리치는 공화당 후보 지명 경쟁에서 포기하지 않았다고 밝혔으며, 의회 의석을 얻기 위해 5년간 출마했던 경험, 하원에서 공화당 다수당을 구축하는 데 16년간 기여했던 점, 그리고 조지아주에서 공화당 다수당을 구축하기 위해 수십 년간 노력했던 점을 강조했다. 일부 평론가들은 깅리치의 경력 전반에 걸친 회복력, 특히 그의 대선 캠페인과 관련하여 주목했다.

당시 선두 주자였던 허먼 케인이 과거 성희롱 의혹으로 타격을 입은 후, 깅리치는 지지를 얻었고, 특히 케인이 캠페인을 중단한 후 빠르게 경쟁자로 부상했다. 2011년 12월 4일까지 깅리치는 전국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12월 내내 상대 후보들이 대량의 부정적인 광고를 내보낸 후, 깅리치의 전국 여론조사 선두는 미트 롬니와 동률로 떨어졌다.
2012년 1월 3일, 깅리치는 아이오와 공화당 코커스에서 릭 샌토럼, 롬니, 론 폴에 크게 뒤처진 4위를 기록했다. 1월 10일, 깅리치는 뉴햄프셔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롬니, 샌토럼, 존 헌츠먼 주니어, 폴에 크게 뒤처진 5위를 기록했다.
헌츠먼과 릭 페리가 경선에서 철회하면서 후보군이 좁혀진 후, 깅리치는 1월 21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약 40%의 득표율로 승리하여 롬니, 샌토럼, 폴을 크게 앞섰다. 이 예상치 못한 승리는 깅리치가 플로리다로 향하면서 다시 한 번 선두 주자로 부상할 수 있게 했다.
2012년 1월 31일, 깅리치는 플로리다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47% 대 32%로 15%포인트 차이로 2위를 기록했다. 이러한 결과에 기여한 요인으로는 롬니의 두 차례 강력한 토론 성과 (이는 일반적으로 깅리치의 강점이었다), 텔레비전 광고에서 깅리치 캠페인이 훨씬 적은 비용을 지출한 점, 그리고 깅리치가 2020년까지 미국 우주 프로그램을 재활성화하기 위해 달에 영구 식민지를 건설하자는 널리 비판받은 제안 등이 있다.
나중에 롬니가 플로리다 토론에서 더 나은 성과를 내기 위해 토론 코치를 고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깅리치는 샌토럼과 폴을 크게 앞섰다. 2012년 2월 4일, 깅리치는 네바다 공화당 코커스에서 21%의 득표율로 크게 뒤처진 2위를 기록했으며, 50% 이상의 득표율을 얻은 롬니에게 패배했다.
2012년 2월 7일, 깅리치는 미네소타 공화당 코커스에서 약 10.7%의 득표율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샌토럼이 코커스에서 승리했으며, 폴과 롬니가 그 뒤를 이었다.
슈퍼 화요일에 깅리치는 가장 많은 대의원 수를 가진 자신의 고향 조지아주에서 승리했지만, 이는 "그에게는 다른 모든 면에서 암울한 밤"이었다。 샌토럼은 테네시와 오클라호마를 차지했는데, 깅리치가 이전에 여론조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곳이었지만, 깅리치는 롬니에 이어 근소한 차이로 3위를 기록했다.
4월 4일, 릭 샌토럼 캠페인은 입장을 바꿔 깅리치에게 경선에서 물러나 샌토럼을 지지할 것을 촉구했다.
4월 10일, 샌토럼은 캠페인 중단을 발표했다. 이 발표 이후, 뉴트 2012 캠페인은 깅리치를 "마지막 남은 보수주의자"라고 칭하는 새로운 슬로건을 사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월 19일 깅리치는 뉴욕의 공화당원들에게 롬니가 후보 지명을 확보하면 총선에서 롬니를 돕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4월 24일 델라웨어 예비선거에서 실망스러운 2위를 기록하고, 400.00 만 USD가 넘는 캠페인 부채를 안고 있던 깅리치는 2012년 5월 2일 캠페인을 중단하고 선두 주자인 미트 롬니를 지지했으며, 이후 롬니를 위해 선거 운동을 벌였다 (즉, 유세 연설과 텔레비전 출연).
깅리치는 나중에 2012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공화당 전국위원회가 주최한 "뉴트 대학교(Newt University영어)"라는 여러 정책 워크숍을 진행했다. 그와 그의 아내 칼리스타는 로널드 레이건 테마의 소개와 함께 전당대회 마지막 날 연설했다.
미국 연방 선거 관리 위원회 규정에 따라 캠페인은 부채를 청산할 때까지 운영을 중단할 수 없었기 때문에 뉴트 깅리치 캠페인은 공식적으로 해산되지 않았다. 2016년, 캠페인은 114개 기업 및 컨설턴트에 대한 미결제 부채를 상환하지 않고 폐쇄하자는 제안을 제출했지만, 연방 선거 관리 위원회는 이 제안을 거부했다. 당시 캠페인은 여전히 460.00 만 USD의 부채를 지고 있었으며, 지난 1년 동안 캠페인 위원회가 모금한 금액은 1.70 만 USD에 불과했다.
5.2. 2016년 및 2020년 선거 지원
깅리치는 다른 많은 기성 공화당원들보다 빠르게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했다。 2016년 트럼프 캠페인의 자문을 맡은 후, 깅리치는 동료 공화당원들에게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트럼프를 중심으로 단결할 것을 촉구했다. 깅리치는 트럼프의 러닝메이트 최종 후보 3인 중 한 명으로 거론되었으나, 결국 마이크 펜스 인디애나 주지사가 이 자리를 차지했다.

트럼프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후, 깅리치가 국무장관, 비서실장 또는 고문이 될 가능성에 대한 추측이 나왔다. 그러나 깅리치는 결국 내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와 관련된 어떤 역할에도 관심이 없다고 강조하며, 개인 시민으로서 "직업을 구하기보다는 전략 계획"을 위해 개인들과 교류할 것이라고 밝혔다.
2017년 5월, 그는 힐러리 클린턴과 민주당이 2016년 대선 기간 중 민주당 전국위원회 직원 세스 리치를 살해했다는 음모론을 퍼뜨렸다.
깅리치는 2017년 10월 백악관에서 열린 그의 아내의 교황청 주재 미국 대사 취임식에 참석했다. 언론인 로버트 미켄스에 따르면, 뉴트 깅리치는 사실상의 대사 또는 "그림자 대사" 역할을 했으며, 애틀랜틱의 맥케이 코핀스가 표현했듯이, 칼리스타 깅리치는 "일반적으로 대사관의 의례적인 얼굴로 간주된다."
2020년 대선에서 개표가 진행되는 동안, 깅리치는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시도를 지지하며, 근거 없는 사기 주장이 제기된 후 개표 중단을 요구했다. 2020년 대선 이후, 깅리치는 선거 사기에 대한 근거 없는 주장을 제기하고 조 바이든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선거 이후 펜실베이니아주 투표 관리원들의 체포를 요구했다.
5.3. 기타 정치 활동
2009년 뉴욕주 제23선거구 특별 선거에서 깅리치는 전국적으로 저명한 공화당원들이 지지했던 뉴욕 보수당 후보 더그 호프만 대신 온건 공화당 후보 디디 스코자파바를 지지했다. 그는 이 지지 때문에 보수주의자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으며, 일부는 그의 2012년 대선 출마에 의문을 제기하고 심지어 그를 베네딕트 아놀드에 비유하기도 했다.
2021년 1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퇴임하기 전, 트럼프는 깅리치를 미국 국방부의 국방 정책 자문 위원회에 임명했다. 이는 저명한 트럼프 충성파들이 전임 위원들을 대체하는 일련의 개편의 일환이었다. 2021년 2월, 조 바이든이 임명한 로이드 오스틴 국방부 장관은 깅리치를 포함하여 트럼프가 임명한 모든 위원들을 해임했다.

2022년 1월, 깅리치는 폭스 뉴스 진행자 마리아 바티로모에게 1월 6일 국회의사당 공격 조사 특별위원회 위원들이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한 후 감옥에 갈 실제 위험에 처해 있다고 말하며, 어떤 법률이 위반되었는지 설명하지 않고 그들이 법을 어겼다고 비난했다. 이는 CNN 등에서 위협으로 해석되었다.
2022년 7월, 그는 "2024년 공화당 대선 후보를 위한 트럼프에서 영감을 받은 플랫폼"을 홍보하는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 연구소 회의에 참석했다.
2022년 8월 현재, 깅리치는 언론인 다나 밀뱅크에 따르면 케빈 매카시와 하원 공화당원들에게 2022년 중간선거에 대해 조언하고 있었다.
6. 정치적 입장 및 이념
뉴트 깅리치는 보수주의적 신념을 바탕으로 다양한 정책 분야에서 명확한 입장을 표명했으며, 그의 정치적 행보는 미국 정치 지형에 지대한 영향을 미 미쳤지만 동시에 많은 논란을 야기했다.

6.1. 주요 정책 및 신념
깅리치는 1994년 "미국과의 계약"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미래 승리를 위한 미국적 해법의 설립자이다. 최근에는 미국 환경보호청을 대체할 "환경 솔루션 기관(Environmental Solutions Agency영어)"을 제안했다.
그는 이민 국경 정책과 임시 근로자 프로그램을 지지한다. 에너지 정책 면에서 그는 미국에서 판매되는 자동차에 대한 유연 연료 의무화를 주장하고 에탄올 사용을 전반적으로 장려했다. 2021년 8월, 깅리치는 폭스 뉴스 인터뷰에서 위대한 교체론을 되풀이한 것으로 알려졌다.
깅리치는 다자주의와 유엔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는 2015년에 "몇 년 동안 유엔을 살펴본 결과, 그것이 충분히 부패하고 충분히 비효율적이어서 어떤 합리적인 사람도 그것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07년 깅리치는 『미국에서 신을 재발견하다』라는 책을 저술했다.

깅리치의 후기 저서들은 『미래를 이기다』와 가장 최근의 『미국을 구하기 위해』를 포함하여 대규모 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깅리치는 교육을 "미래 번영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지목했으며, 앨 샤프턴 및 아르네 던컨 교육부 장관과 교육 문제에 대해 협력했다. 그는 이전에 동성 결혼에 반대했지만, 2012년 12월에는 공화당이 이에 대한 반대 입장을 재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2014년, 깅리치는 국민 투표 주식회사의 존 코자 박사에게 서한을 보내 국민 투표 주간 협약을 지지했다. 이 협약에 참여하는 주들은 미국 전국 득표율 승자에게 미국 선거인단 투표를 부여할 것이다.
2016년 7월 14일, 깅리치는 샤리아법을 믿는 무슬림 배경의 미국인들은 추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슬람 국가나 알카에다를 홍보하는 웹사이트를 방문하는 것은 중죄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 관찰자들은 이러한 견해가 미국 헌법 수정 제1조의 언론의 자유 및 종교의 자유 조항을 위반하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2016년 7월 21일, 깅리치는 NATO 회원국들이 미국의 방어 약속에 대해 "걱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약속에 대해 걱정해야 한다. 모든 대통령은 NATO 국가들이 공정한 분담금을 지불하지 않는다고 말해왔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한 러시아 침공 시 에스토니아 (NATO 회원국)에 미국이 원조를 제공할지 여부와 관련하여 "매우 심각하게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이언스(Science영어)』지에 따르면, 깅리치는 기후 변화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1980년대 후반의 조심스러운 회의론자에서 2000년대 후반의 신봉자로, 그리고 [2016년] 캠페인 기간 동안 다시 회의론자로" 바꿨다.
2022년 1월, 깅리치는 1월 6일 국회의사당 공격 조사 특별위원회를 "기본적으로 린치 폭도"라고 특징지으며, 위원회 위원들이 법을 위반하고 시민의 자유를 짓밟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화당이 그해 선거에서 하원을 장악하면 위원회 위원들이 감옥에 갈 수도 있다고 시사했다.
6.2. 정치적 영향력 및 논란
깅리치의 정치적 영향력은 막대했으나, 그의 행보는 끊임없이 논란을 낳았으며, 특히 미국 정치의 양극화를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학자들은 깅리치가 미국에서 민주주의 규범을 훼손하고 정치적 양극화와 당파적 편견을 가속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하버드 대학교 정치학자 대니얼 지블랫과 스티븐 레비츠키에 따르면, 깅리치의 하원의장 재임은 미국 정치와 미국 민주주의의 건강에 심오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깅리치가 공화당에 "전투적인" 접근 방식을 심어주었으며, 이로 인해 증오심 표현과 극단적인 당파주의가 만연하고 민주주의 규범이 무시되었다고 주장한다. 깅리치는 민주당원들의 애국심에 자주 의문을 제기하고, 그들을 부패했다고 비난하며, 파시스트에 비유하고, 미국을 파괴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또한 깅리치는 여러 차례의 주요 정부 폐쇄를 감독했다.
메릴랜드 대학교 정치학자 릴리아나 메이슨은 깅리치가 공화당원들에게 민주당원들에 대해 "배신하다, 기괴한, 부패, 파괴하다, 탐욕, 거짓말, 한심한, 급진적, 이기적인, 수치심, 병든, 훔치다, 배신자"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도록 지시한 것을 사회 규범 위반과 당파적 편견 악화의 예시로 들었다. 콜게이트 대학교 정치학자 샘 로젠펠드의 2017년 저서 『양극화자들(The Polarizers영어)』에서 깅리치는 미국 정치 시스템이 양극화와 교착 상태로 전환하는 데 핵심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로젠펠드는 깅리치를 "깅리치에게는 책임 있는 당의 원칙이 가장 중요했다... 처음부터 그는 의회 소수당의 역할을 의회 시스템에서 발견되는 용어와 유사하게 보았으며, 다수당을 거버넌스의 하위 참여자로 참여시키는 것보다 극명한 프로그램적 대조를 그리는 것을 우선시했다"고 묘사한다.
텍사스 대학교 정치학자 숀 M. 테리올트에 따르면, 깅리치는 다른 공화당 의원들, 특히 하원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의원들에게 심오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들은 그의 방해 전술을 채택했다. 테리올트와 듀크 대학교 정치학자 데이비드 W. 로데의 2011년 『정치학 저널(Journal of Politics영어)』 연구는 "1970년대 초 이후 상원 정당 양극화의 거의 모든 증가는 깅리치가 처음 하원에 당선된 1978년 이후 하원에서 활동했던 공화당 상원의원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깅리치는 하원의장실의 권력을 강화했다. 깅리치는 신참이자 더 이념적으로 극단적인 하원의원들을 세출 위원회와 같은 강력한 위원회로 승진시켰으며,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위원회 내규의 붕괴로 이어졌다. 위원회 의장에게도 임기 제한이 부과되어 공화당 의장들이 공화당과 분리된 권력 기반을 구축하는 것을 막았다. 그 결과 깅리치의 권력은 강화되었고, 공화당 의원들 사이의 순응도가 증가했다.
그의 개인적인 윤리 문제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97년 하원 윤리 위원회는 그에게 30.00 만 USD의 벌금을 부과하고 견책을 내렸는데, 이는 하원의장이 윤리 위반으로 징계를 받은 첫 사례였다. 또한 그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모니카 르윈스키 스캔들을 이용해 탄핵을 추진하면서도 자신은 불륜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비난을 받았다. 1995년 정부 폐쇄 당시 에어 포스 원에서 클린턴 대통령에게 무시당했다는 불만을 표출한 것이 "떼쓰는 아기" 만화로 풍자되며 그의 이미지를 손상시켰다.
2020년 대선 이후 도널드 트럼프의 선거 사기 주장을 지지하고 투표 관리원들의 체포를 요구하는 등 민주주의 절차를 훼손하는 발언을 이어갔으며, 2022년에는 1월 6일 국회의사당 공격 조사 특별위원회 위원들이 감옥에 갈 위험이 있다고 위협하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7. 사생활
뉴트 깅리치의 사생활은 그의 정치 경력만큼이나 대중의 관심을 받았으며, 특히 그의 결혼과 종교적 신념은 여러 차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7.1. 결혼 및 자녀
깅리치는 세 번 결혼했다.
7.1.1. 재클린 메이 "재키" 배틀리
1962년, 그는 자신의 고등학교 기하학 교사였던 재클린 메이 "재키" 배틀리(Jacqueline May "Jackie" Battley영어, 1936년 2월 21일 ~ 2013년 8월 7일)와 결혼했다. 당시 깅리치는 19세였고 그녀는 26세였다. 그들은 캐시(Kathy영어)와 재키 수(Jackie Sue영어)라는 두 딸을 두었다. 캐시는 깅리치 커뮤니케이션스의 사장이며, 재키 수는 작가, 보수 칼럼니스트, 정치 평론가이다.
1974년 의회 선거 운동 기간 내내 깅리치는 젊은 자원봉사자와 불륜 관계에 있었다. 1970년대 내내 깅리치와 함께 일했던 한 보좌관은 "뉴트가 재키와의 결혼 생활 중 다른 여성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1980년 봄, 그는 매리앤 긴터와 불륜 관계를 시작한 후 재키에게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재키는 나중에 1984년에 이혼이 자신에게 "완전히 놀라운 일"이었다고 말했다.
1980년 9월, 두 사람을 모두 아는 친구들에 따르면, 뉴트는 재키가 자궁암 수술을 받은 다음 날 병원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뉴트는 이혼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재키는 그를 방에서 쫓아냈다. 깅리치는 이 주장을 부인했다. 깅리치의 대선 캠페인 참모진은 2011년에도 재키가 이혼을 요청했다고 주장했지만, 조지아주 캐럴 카운티의 법원 문서에 따르면 그녀는 사실 이혼 절차를 막아달라고 판사에게 요청했으며, "이혼할 충분하고 풍부한 근거가 있지만 ... 현재로서는 이혼을 원하지 않으며 이 결혼이 회복 불가능하게 파탄 났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깅리치의 캠페인 회계 담당자 L. H. 카터에 따르면, 깅리치는 재키에 대해 "그녀는 대통령 부인이 되기에는 충분히 젊지도 예쁘지도 않다. 게다가 그녀는 암에 걸렸다"고 말했다고 한다. 뉴트는 이 발언을 부인했다. 이혼 후 재키는 자신과 아이들을 위해 교회 친구들로부터 돈을 모아야 했다. 그녀는 나중에 법원에 뉴트가 가족을 제대로 부양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뉴트는 판사에게 재정 진술서를 제출했는데, 그 내용은 자신이 "한 달에 400 USD만 제공하고, 딸들에게 40 USD의 용돈을 주는 것" 외에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신의 지출을 언급할 때는 "식비/드라이클리닝 등"으로만 400 USD를 기재했다. 1981년, 판사는 그에게 훨씬 더 많은 금액을 제공하라고 명령했다. 1993년, 재키는 법정에서 뉴트가 1981년 명령을 "발령된 날부터" 지키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조지아주 캐럴턴의 제일 침례교회 집사이자 자원봉사자였던 재키는 2013년 애틀랜타에서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7.1.2. 매리앤 긴터
1981년, 재키와의 이혼이 확정된 지 6개월 후, 깅리치는 매리앤 긴터(Marianne Ginther영어)와 결혼했다. 매리앤은 그들이 빚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재정을 관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정치인의 아내로서 공개적인 삶을 원하지 않았다. 그의 딸 캐시는 이 결혼 생활을 "어려웠다"고 묘사했다.
7.1.3. 칼리스타 비섹

1993년, 매리앤과 결혼 중이던 깅리치는 자신보다 20년 이상 어린 하원 직원 칼리스타 비섹과 불륜 관계를 시작했다. 깅리치는 빌 클린턴 탄핵을 주도하던 중에도 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깅리치는 매리앤이 다발성 경화증 진단을 받은 지 몇 달 후인 1999년에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이 결혼에서는 자녀가 없었다. 2012년 1월 19일, 매리앤은 ABC의 『나이트라인(Nightline영어)』 인터뷰에서 뉴트가 제안한 개방 결혼을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뉴트는 이 주장을 부인했다.
2000년 8월, 깅리치는 매리앤과의 이혼이 확정된 지 4개월 후 칼리스타 비섹과 결혼했다. 그와 칼리스타는 버지니아주 맥린에 거주한다.
2011년 크리스천 브로드캐스팅 네트워크의 데이비드 브로디와의 인터뷰에서 깅리치는 자신의 과거 불륜에 대해 "내 인생에서 때때로, 이 나라에 대해 얼마나 열정적으로 느꼈는지에 부분적으로 이끌려, 너무 열심히 일했고 내 삶에 부적절한 일들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2011년 12월, 아이오와 기독교 지도자 연합이 그에게 소위 "결혼 서약"에 서명할 것을 요청하자, 깅리치는 장문의 서면 답변을 보냈다. 여기에는 "배우자에 대한 개인적인 충실을 지킬 것"이라는 서약이 포함되어 있었다.
7.2. 종교
루터교 신자로 자랐던 깅리치는 대학원 시절 남침례교 신자였다. 그는 2009년 3월 29일, 세 번째 아내 칼리스타 비섹의 신앙인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는 "수년에 걸쳐 점차 가톨릭이 되었고, 어느 날 이미 받아들인 신앙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2008년 교황의 미국 방문 때 베네딕토 16세를 보고 공식적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날 베네딕토 교황을 얼핏 보았을 때, 그가 내뿜는 행복과 평화로움에 감명받았다. 교황의 기쁨과 빛나는 존재는 수년간 내가 생각하고 경험했던 많은 것들을 확인시켜주는 순간이었다." 2011년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열린 행사에서 그는 "미국에서는 종교적 신념이 문화 엘리트들에 의해 도전받고 있으며, 그들은 신이 공공 생활에서 배제되는 세속화된 미국을 만들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톨릭 교회는 그의 두 번째 결혼에 대한 혼인 무효 선언과 첫 번째 아내의 사망을 바탕으로 그의 세 번째 결혼을 유효한 결혼으로 인정한다.
7.3. 기타 관심사

깅리치는 동물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깅리치의 시민 활동에 대한 첫 참여는 고향 펜실베이니아주 해리스버그 시의회에 도시 자체 동물원을 설립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연설한 것이었다. 그는 『미국 최고의 동물원(America's Best Zoos영어)』 서문을 썼으며 100개 이상의 동물원을 방문했다고 주장한다.
깅리치는 공룡에 대한 열정을 보여왔다. 『더 뉴요커』는 그의 1995년 저서 『미국을 재건하다(To Renew America영어)』에 대해 "매력적으로도 그는 중년이 되어서도 멸종된 거인들에 대한 열정을 유지했다. 공룡 연구의 돌파구를 미래의 경이로운 목록에 포함시키는 것 외에도, 그는 자신의 교육 제안으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주요 예시로 '공룡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명시했다"고 평했다.
우주 탐사는 깅리치가 십대 시절 미국-소련 우주 경쟁에 매료된 이후로 추가적인 관심사였다. 깅리치는 미국이 지구 밖 문명을 유지하는 것을 포함하여 우주에서 새로운 성과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진전을 이끄는 데 미국 항공우주국과 같은 공공 자금 지원 기관보다 민간 부문에 더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0년부터 그는 국립 우주 학회 이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2012년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아트인포』는 깅리치가 두 명의 미국 화가 작품에 대한 감상을 표현했다고 언급했다. 그는 제임스 H. 크로마티의 미국 국회의사당 그림을 "탁월하고 진정으로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라고 묘사했다. 노먼 록웰의 작품에서는 1965년경의 미국을 구현한 것을 보았는데, 이는 현대 "문화 엘리트"의 지배적인 정서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CNN은 2013년 6월 26일, 깅리치가 2013년 가을에 재개될 새로운 버전의 『크로스파이어』에 S. E. 컵, 스테파니 커터, 밴 존스와 함께 패널로 참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깅리치는 이 개편된 토론 프로그램에서 우파를 대표했다. 이 프로그램은 다음 해에 취소되었다.
8. 저술 및 미디어 활동
뉴트 깅리치는 정치적 경력 외에도 다양한 저술 활동과 미디어 출연을 통해 자신의 사상과 비전을 대중에게 전달해왔다.
8.1. 비소설
- 『사회 문제 해결에 대한 정부의 역할(The Government's Role in Solving Societal Problems영어)』, Associated Faculty Press, 1982년 1월
- 『기회의 창(Window of Opportunity영어)』, Tom Doherty Associates, 1985년 12월
- 『미국과의 계약(Contract with America영어)』 (공동 편집). Times Books, 1994년 12월
- 『꿈을 되찾다(Restoring the Dream영어)』, Times Books, 1995년 5월
- 『깅리치 하원의장의 명언(Quotations from Speaker Newt영어)』. Workman Publishing Company, 1995년 7월
- 『미국을 재건하다(To Renew America영어)』, Farrar, Straus and Giroux, 1996년 7월
- 『힘들게 배운 교훈(Lessons Learned The Hard Way영어)』. HarperCollins, 1998년 5월
- 『32개 주요 불법 마약 생산 및 경유국 인증에 관한 대통령 결정(Presidential Determination Regarding Certification of the Thirty-Two Major Illicit Narcotics Producing and Transit Countries영어)』, DIANE Publishing Company, 1999년 9월
- 『생명 구하기와 돈 절약하기(Saving Lives and Saving Money영어)』, Alexis de Tocqueville Institution, 2003년 4월
- 『미래를 이기다』, Regnery Publishing, 2005년 1월
- 『미국에서 신을 재발견하다: 우리 민족 역사와 미래에서 신앙의 역할에 대한 성찰』, Integrity Publishers, 2006년 10월
- 『변혁의 기술』, 낸시 데스몬드와 공저. CHT Press, 2006년 11월
- 『지구와의 계약』, 테리 L. 메이플과 공저.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07년 10월
- 『진정한 변화: 실패하는 세상에서 작동하는 세상으로(Real Change: From the World That Fails to the World That Works영어)』, Regnery Publishing, 2008년 1월
- 『지금 시추하라, 지금 시추하라, 더 적게 지불하라: 휘발유 가격을 대폭 인하하고 에너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핸드북』, 빈스 헤일리와 공저. Regnery Publishing, 2008년 9월
- 『성공적인 삶을 위한 5가지 원칙: 우리 가족으로부터 당신에게(5 Principles for a Successful Life: From Our Family to Yours영어)』, 재키 깅리치 쿠시먼과 공저, Crown Publishing Group, 2009년 5월
- 『미국을 구하기 위해: 오바마의 세속-사회주의 기계를 멈추다』, 조 데산티스와 공저, Regnery Publishing, 2010년 5월
- 『로널드 레이건: 운명과의 만남(Ronald Reagan: Rendezvous with Destiny영어)』, Dunham Books, 2011년 1월
- 『다른 어떤 나라와도 같지 않은 나라: 왜 미국 예외주의가 중요한가』, Regnery Publishing, 2011년 6월
- 『돌파구: 미래의 개척자들, 과거의 감시자들, 그리고 미국의 운명을 결정할 장대한 전투(Breakout: Pioneers of the Future, Prison Guards of the Past, and the Epic Battle That Will Decide America's Fate영어)』, Regnery Publishing, 2013년 11월
- 『트럼프 이해하기』, Center Street, 2017년 6월
- 『트럼프의 미국: 우리 민족의 위대한 재기 뒤에 숨겨진 진실(Trump's America: The Truth about Our Nation's Great Comeback영어)』, Center Street, 2018년 6월
- 『트럼프 대 중국: 미국의 가장 큰 도전(Trump vs China: America's Greatest Challenge영어)』, Center Street, 2019년 10월
- 『트럼프와 미국의 미래: 우리 시대의 큰 문제 해결(Trump and the American Future: Solving the Great Problems of Our Time영어)』, Center Street, 2020년 6월
- 『바이든을 넘어서: 우리가 사랑하는 미국 재건(Beyond Biden: Rebuilding the America We Love영어)』, Center Street, 2021년 11월
- 『큰 정부 사회주의 타파(Defeating Big Government Socialism영어)』, Center Street, 2022년 7월
- 『다수당으로의 행진: 공화당 혁명의 진짜 이야기(March to the Majority: The Real Story of the Republican Revolution영어)』, Center Street, 2023년 6월
8.2. 소설
깅리치는 윌리엄 R. 포스트첸과 함께 다음 대체 역사 소설 및 소설 시리즈를 공동 저술했다.
- 『1945』, Baen Books, 1995년 8월
- 남북 전쟁 시리즈
- 『게티즈버그: 남북 전쟁 소설』, Thomas Dunne Books, 2003년 6월
- 『그랜트 동쪽으로 오다』, Thomas Dunne Books, 2004년 6월
- 『결코 후퇴를 부르지 마라: 리와 그랜트: 최후의 승리』, Thomas Dunne Books, 2005년 6월
- 『분화구 전투: 소설(The Battle of the Crater: A Novel영어)』, Thomas Dunne Books, 2011년 11월
- 태평양 전쟁 시리즈
- 『진주만: 12월 8일의 소설』, Thomas Dunne Books, 2007년 5월
- 『치욕의 날들』, Thomas Dunne Books, 2008년 4월
- 미국 독립 전쟁 시리즈
- 『인간의 영혼을 시험하다: 조지 워싱턴과 미국 자유를 위한 싸움에 대한 소설(To Try Men's Souls: A Novel of George Washington and the Fight for American Freedom영어)』, Thomas Dunne Books, 2009년 10월
- 『밸리 포지: 조지 워싱턴과 승리의 시련(Valley Forge: George Washington and the Crucible of Victory영어)』, Thomas Dunne Books, 2010년 11월
- 『요크타운의 승리(Victory at Yorktown영어)』, Thomas Dunne Books, 2012년 11월
- 브룩 그랜트 시리즈
- 『이중성: 소설(Duplicity: A Novel영어)』, Center Street Press, 2015년 10월 13일, 피트 얼리 공동 저술
- 『반역: 소설(Treason: A Novel영어)』, Center Street Press, 2016년 10월 11일, 피트 얼리 공동 저술
- 『복수: 소설(Vengeance: A Novel영어)』, Center Street Press, 2017년 10월 10일, 피트 얼리 공동 저술
- 메이베리 및 개릿 시리즈
- 『공모: 소설(Collusion: A Novel영어)』, Broadside Books, 2019년 4월 30일, 피트 얼리 공동 저술
- 『강탈: 소설(Shakedown: A Novel영어)』, Broadside Books, 2020년 3월 24일, 피트 얼리 공동 저술
8.3. 영화
- 『로널드 레이건: 운명과의 만남(Ronald Reagan: Rendezvous with Destiny영어)』, 깅리치 프로덕션스, 2009년
- 『세상을 바꾼 아홉 날(Nine Days That Changed the World영어)』, 깅리치 프로덕션스, 2010년
9. 평가 및 영향력
뉴트 깅리치는 미국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지만, 그의 행보와 이념은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격렬한 비판과 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9.1. 긍정적 평가
예일 대학교 의회 학자 데이비드 메이휴는 깅리치를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로 묘사하며, "깅리치에게서 우리는 공공 영역에서 중요한 결과를 낳는 의회 의원의 좋은 사례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깅리치 자신은 정부 폐쇄가 공화당에 미친 영향에 대해 "워싱턴의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큰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완전히 틀렸다. 1928년 이후 재선된 공화당 다수당은 없었다. 우리가 재선된 이유 중 일부는 ... 우리 지지층이 우리가 진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대결에 직면했을 때 움츠러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진지하다고 생각했다"고 언급하며, 자신의 강경한 입장이 당의 재선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정부 폐쇄가 1997년 균형 예산 합의와 1920년대 이후 처음으로 4년 연속 균형 예산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으며, 1928년 이후 처음으로 공화당 다수당이 재선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했다.
9.2. 비판 및 논란
많은 학자들은 깅리치가 미국에서 민주주의 규범을 훼손하고 정치적 양극화와 당파적 편견을 가속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하버드 대학교 정치학자 대니얼 지블랫과 스티븐 레비츠키에 따르면, 깅리치의 하원의장 재임은 미국 정치와 미국 민주주의의 건강에 심오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깅리치가 공화당에 "전투적인" 접근 방식을 심어주었으며, 이로 인해 증오심 표현과 극단적인 당파주의가 만연하고 민주주의 규범이 무시되었다고 주장한다. 깅리치는 민주당원들의 애국심에 자주 의문을 제기하고, 그들을 부패했다고 비난하며, 파시스트에 비유하고, 미국을 파괴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또한 깅리치는 여러 차례의 주요 정부 폐쇄를 감독했다.
메릴랜드 대학교 정치학자 릴리아나 메이슨은 깅리치가 공화당원들에게 민주당원들에 대해 "배신하다, 기괴한, 부패, 파괴하다, 탐욕, 거짓말, 한심한, 급진적, 이기적인, 수치심, 병든, 훔치다, 배신자"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도록 지시한 것을 사회 규범 위반과 당파적 편견 악화의 예시로 들었다. 콜게이트 대학교 정치학자 샘 로젠펠드의 2017년 저서 『양극화자들(The Polarizers영어)』에서 깅리치는 미국 정치 시스템이 양극화와 교착 상태로 전환하는 데 핵심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로젠펠드는 깅리치를 "깅리치에게는 책임 있는 당의 원칙이 가장 중요했다... 처음부터 그는 의회 소수당의 역할을 의회 시스템에서 발견되는 용어와 유사하게 보았으며, 다수당을 거버넌스의 하위 참여자로 참여시키는 것보다 극명한 프로그램적 대조를 그리는 것을 우선시했다"고 묘사한다.
텍사스 대학교 정치학자 숀 M. 테리올트에 따르면, 깅리치는 다른 공화당 의원들, 특히 하원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의원들에게 심오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들은 그의 방해 전술을 채택했다. 테리올트와 듀크 대학교 정치학자 데이비드 W. 로데의 2011년 『정치학 저널(Journal of Politics영어)』 연구는 "1970년대 초 이후 상원 정당 양극화의 거의 모든 증가는 깅리치가 처음 하원에 당선된 1978년 이후 하원에서 활동했던 공화당 상원의원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깅리치는 하원의장실의 권력을 강화했다. 깅리치는 신참이자 더 이념적으로 극단적인 하원의원들을 세출 위원회와 같은 강력한 위원회로 승진시켰으며,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위원회 내규의 붕괴로 이어졌다. 위원회 의장에게도 임기 제한이 부과되어 공화당 의장들이 공화당과 분리된 권력 기반을 구축하는 것을 막았다. 그 결과 깅리치의 권력은 강화되었고, 공화당 의원들 사이의 순응도가 증가했다.
그의 개인적인 윤리 문제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97년 하원 윤리 위원회는 그에게 30.00 만 USD의 벌금을 부과하고 견책을 내렸는데, 이는 하원의장이 윤리 위반으로 징계를 받은 첫 사례였다. 또한 그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모니카 르윈스키 스캔들을 이용해 탄핵을 추진하면서도 자신은 불륜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비난을 받았다. 1995년 정부 폐쇄 당시 에어 포스 원에서 클린턴 대통령에게 무시당했다는 불만을 표출한 것이 "떼쓰는 아기" 만화로 풍자되며 그의 이미지를 손상시켰다.
2020년 대선 이후 도널드 트럼프의 선거 사기 주장을 지지하고 투표 관리원들의 체포를 요구하는 등 민주주의 절차를 훼손하는 발언을 이어갔으며, 2022년에는 1월 6일 국회의사당 공격 조사 특별위원회 위원들이 감옥에 갈 위험이 있다고 위협하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10. 관련 항목
- 미국과의 계약
- 미국 하원 의장
- 정치적 양극화
- 빌 클린턴 탄핵 소추
- 도널드 트럼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