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잭 프렌치 캠프는 1935년 7월 1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프랜시스 엘리자베스(결혼 전 성은 포프)와 폴 로버트 캠프 시니어의 4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폴은 오토바이 배달 사업을 트럭 운송 회사로 성장시켜 트럭 1대에서 14대로 확장했다. 어머니 프랜시스는 고등 교육을 받은 사회복지사이자 스페인어 교사였다.
캠프는 유대인 인구가 많은 윌셔 지구의 웨스트 로스앤젤레스에서 성장했지만, 그의 화목한 중산층 가족은 그리스도 과학 교회를 다녔다.
1.1. 유년 시절 및 교육
어린 시절부터 스포츠에 몰두했던 캠프는 한때 학교 에세이 주제로 중요한 발명품 중 하나로 포워드 패스를 선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피아노 레슨과 할리우드 볼 방문을 통해 그의 지평을 넓히려 노력했다.
캠프는 멜로즈 애비뉴의 페어팩스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당시 이 학교는 유대인 학생들과 유명인 자녀들이 밀집해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학급 친구의 95% 이상이 유대인이었으며, 그는 나중에 유대인 단체들을 지지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동창으로는 음악가 허브 앨퍼트, 야구 투수 래리 셰리, 학자 주디스 A. 라이스만 등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캠프는 형들과 함께 로스앤젤레스 시내에 있는 아버지의 트럭 운송 회사에서 일했다. 여가 시간에는 역사와 철학 책을 선호하는 열렬한 독서가였다.
1.2. 대학 시절
1953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NCAA 디비전 III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체육협회의 창립 회원인 옥시덴탈 칼리지에 입학했다. 캠프가 옥시덴탈을 선택한 이유는 그곳의 미식축구팀이 프로 수준의 포메이션과 플레이를 사용했기 때문인데, 그는 이를 통해 프로 쿼터백이 되기를 희망했다. 키 178 cm에 몸무게 79.4 kg였던 그는 USC 트로잔스나 UCLA 브루인스와 같은 주요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 미식축구 프로그램에서 뛰기에는 너무 작다고 생각했다.
옥시덴탈에서 캠프는 기록적인 투창 선수였으며, 미식축구팀에서 쿼터백, 수비 백, 플레이스 키커, 펀터 등 여러 포지션을 소화했다. 그는 근시였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에서 끈질긴 투지를 보여주었다. 선발 쿼터백으로 활약한 시절, 1955년과 1956년 옥시덴탈 팀은 각각 6승 2패와 3승 6패의 기록을 세웠다. 캠프는 1,100야드 이상을 던진 한 해에 리틀 올 아메리카 선수로 선정되었다. 그 해 그는 전국 소규모 대학 리그에서 패싱 부문 1위를 차지했다. 그와 절친한 친구이자 나중에 NFL 헤드 코치가 된 짐 E. 모라는 알파 타우 오메가 형제회 회원이었다. 또 다른 대학 동료로는 수년 동안 NFL 심판으로 활약했으며 (기록적으로 슈퍼볼 5회 출전) 론 보찬이 있었다. 캠프는 학생 자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옥시덴탈에서 체육 교육 학사 학위를 받은 후, 그는 롱비치 주립 대학교와 샌디에이고의 캘리포니아 웨스턴 대학교에서 경제학 대학원 과정을 밟았으며, 1958년부터 1962년까지 군 복무를 했다.
2. 미식축구 경력
1957년 NFL 드래프트 17라운드에서 디트로이트 라이언스에 지명되었지만, 1957년 NFL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팀에서 방출되었다. 그는 1957년을 피츠버그 스틸러스에서, 1958년을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와 뉴욕 자이언츠의 택시 스쿼드에서 보냈다. 자이언츠는 "역대 최고의 경기"이자 최초의 연장전 NFL 플레이오프 경기로 알려진 1958년 NFL 챔피언십 경기를 주최했지만, 3군 쿼터백으로서 택시 스쿼드 멤버였던 캠프는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1958년, 캠프는 미국 육군 예비군에 입대하여 초기 훈련을 완료하기 위해 사병으로 1년간 현역 복무했다. 그는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샌디에이고에 본부를 둔 제977수송중대 소속이었다. 1961년 베를린 위기로 그의 부대가 동원되었을 때, 캠프는 만성적인 왼쪽 어깨 탈구로 인해 의학적 면제를 받았다. 이 부상으로 그는 1962년 7월 예비군에서 제대했다. 1959년, 캠프는 캐나디언 풋볼 리그의 캘거리 스탬피더스에서 한 경기를 뛰었고, 이로 인해 1959년에 NFL 출전 자격을 상실했다. 그의 형 톰에 따르면, 부모님은 그가 해고되는 것을 보기 위해 캘리포니아에서 캘거리까지 차를 몰고 갔다. 이때까지 캠프는 라이언스, 스틸러스, 자이언츠, 포티나이너스, 스탬피더스 등 5개의 프로 팀에서 방출되었고, 그의 가족은 그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격려했다. 1960년 2월 9일과 11일, 새로 결성된 AFL은 NFL 및 CFL과 각각 "선수 유인 금지" 정책에 합의하여 각 리그의 선수들을 보호했다. 당시 캠프와 같이 NFL 경험이 미미한 선수들은 종종 AFL에 의해 영입되었다. 캠프는 AFL의 로스앤젤레스 차저스와 자유 계약으로 계약했다.
2.1. 초기 경력 및 AFL 활동
1960년, 캠프는 차저스를 10승 4패의 기록으로 서부 디비전 챔피언십으로 이끌었다. 그는 프랭크 트리푸카에 이어 패싱 시도, 성공, 야드 부문에서 리그 2위를 차지하며(그와 트리푸카는 리그 최초의 3,000야드 패서가 되었다) 리그에서 야드당 성공률과 색 당한 횟수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러싱 터치다운 1개가 부족하여 리그 선두를 놓쳤다. 캠프 지휘 아래 차저스의 공격은 마지막 4경기에서 평균 46점을 기록했고, 마지막 9경기 중 5경기에서 41점 이상을 득점했다. 1960년 아메리칸 풋볼 리그 챔피언십 경기에서 그는 팀을 초반 두 차례 공격에서 필드골로 이끌었지만, 휴스턴 오일러스가 2쿼터에 터치다운을 기록하며 7대6으로 앞서간 후, 차저스는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
1961년, 『더 샌디에이고 유니온-트리뷴』 편집자 잭 머피는 배런 힐턴을 설득하여 차저스를 로스앤젤레스에서 샌디에이고로 이전하게 했다. 캠프는 이전된 팀을 12승 2패의 기록으로 이끌며 서부 디비전 챔피언십을 다시 차지했다. 그는 다시 패싱 야드 부문에서 2위를 차지했다(이번에는 조지 블랜다에 이어). 차저스는 1961년 아메리칸 풋볼 리그 챔피언십 경기에서 휴스턴 오일러스와 다시 맞붙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차저스가 4쿼터 필드골 전까지 득점을 올리지 못하며 10대3으로 패했다.
1962년, 캠프는 시즌 두 번째 경기인 뉴욕 제츠와의 경기에서 헬멧에 부딪혀 중지가 부러졌고 경기에 나설 수 없었다. 그는 의사들을 설득하여 부러진 손가락을 풋볼 주위에 고정시켜, 손가락이 나으면 그립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했다. 차저스 코치 시드 길먼은 그를 숨기기 위해 웨이버 공시했다. 버펄로 빌스 코치 루 사반은 캠프가 시장에 나왔다는 것을 알아채고 1962년 9월 25일에 100 USD의 웨이버 비용으로 그를 영입했는데, 스포츠 작가 랜디 슐츠는 이를 프로 미식축구 역사상 가장 큰 대박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댈러스 텍선스와 덴버 브롱코스도 캠프를 영입하려고 시도했지만, AFL 커미셔너 조 포스는 그를 버펄로에 배정했다.
빌리 쇼에 따르면, 캠프의 영입은 빌스의 쿼터백 문제를 해결했지만, 캠프는 버펄로에 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밴 밀러에 따르면, "잭은 스키어였고, 덴버에 가서 브롱코스에서 뛰고 싶어 했다. 그는 버펄로에 오는 것을 싫어했다." 버펄로에서 그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책들을 포함한 광범위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으며, 이로 인해 사반으로부터 잔소리를 듣기도 했다.
부러진 손가락을 포함한 부상으로 인해 캠프는 1962년 대부분의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 시즌에 캠프는 베트남 전쟁 참전 통지서를 받았지만, 무릎 문제로 인해 징병 면제를 받았다. 부상이 치유된 후, 캠프는 1962년 11월 18일 버펄로에서 데뷔하여 오클랜드 레이더스와의 경기에서 유일한 터치다운 드라이브를 지휘하며 10대6 승리를 이끌었다. 그는 1962년 버펄로에서 4경기만 뛰었지만, AFL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빌스는 마지막 4경기 중 3경기를 이겨 7승 6패 1무로 시즌을 마쳤다. 1962년 12월 14일, 빌스는 그린베이 패커스를 제치고 노터데임 쿼터백 대럴 라모니카를 영입했다.
1963년부터 4시즌 동안 라모니카가 레이더스로 떠나기 전까지 주전 쿼터백 경쟁이 시작되었다. 라모니카는 "잭으로부터 쿼터백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빌스에서 이 포지션에서 정말 훌륭한 원투 펀치였다고 진심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1963년, 캠프는 빌스를 부진한 출발에서 7승 6패 1무의 기록으로 AFL 동부 디비전 공동 선두로 이끌었다. 캠프는 다시 패싱 시도, 성공, 야드 부문에서 2위를 차지했고, 러싱 터치다운에서는 팀 동료 쿠키 길크리스트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빌스는 12월 28일 뉴욕주 버펄로의 워 메모리얼 스타디움에서 영하 -12 °C의 날씨 속에 보스턴 패트리어츠와 동부 디비전 플레이오프 경기를 치러 디비전 우승을 가렸다. 경기 도중 버펄로는 16대0으로 뒤진 후 캠프를 라모니카로 교체했지만, 여전히 26대8로 패했다.
캠프는 분쟁을 중재하는 역할 때문에 빌스의 "클럽하우스 변호사"로 불렸다. 1964년, 그는 플레이가 자신에게 호출되지 않으면 경기장을 떠나곤 했던 길크리스트와 다음 주에 길크리스트를 방출하려던 사반과 같은 선수들을 관리했다. 그는 또한 빌스의 첫 7경기에서 4번의 승리 터치다운 드라이브를 이끌었던 라모니카와의 쿼터백 경쟁에서도 정치력을 발휘했다. 캠프는 1964년 캔자스시티 치프스와의 시즌 개막전에서 프로 미식축구 선수로는 처음이자 유일하게 1쿼터에 3개의 터치다운 패스를 기록했으며, 이 기록은 47년 후인 2011년 애런 로저스에 의해 동률을 이룰 뿐 깨지지 않았다. 1964년 팀은 첫 9경기를 이기고 정규 시즌을 12승 2패로 마감했으며, 펜웨이 파크에서 패트리어츠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하며 동부 디비전 우승을 차지했다. 캠프는 시도당 야드에서 리그 1위를 차지했으며, 러싱 터치다운 1개가 부족하여 길크리스트와 시드 블랭크스가 공동으로 차지한 리그 선두를 놓쳤다. AFL 챔피언십 경기에서는 경기 종료 9분여를 남기고 최종 터치다운을 기록하여 20대7 승리를 이끌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캠프는 경기장 밖에서의 중요한 결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챔피언십 경기 3주 후인 1965년 아메리칸 풋볼 리그 올스타전은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쿠키 길크리스트와 어니 워릭 같은 팀 동료들이 뉴올리언스에 있는 동안 택시 운전사 등으로부터 차별을 겪자 흑인 선수들이 경기를 보이콧하는 움직임을 주도했다. 캠프는 길크리스트와 워릭이 자신과 택시를 함께 탈 수 없다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캠프는 보이콧 회의에 참석했고, 론 믹스와 함께 백인 선수들을 설득하여 보이콧에 동참하도록 했다. 선수들이 도시를 떠난 지 하루 만에 AFL 커미셔너 조 포스는 경기를 텍사스주 휴스턴으로 옮겼다.
라모니카에 따르면, 1965년 빌스 팀은 새로운 강조점을 두었다: "1964년에는 길크리스트와 우리의 러닝 공격에 많이 의존했다... 하지만 1965년에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빌스는 오프 시즌에 길크리스트를 덴버 브롱코스에 트레이드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전보다 더 패스 위주의 경기를 했다. 우리는 리시버들에게만 던진 것이 아니라, 러닝백들에게도 많이 던졌다. 그리고 나는 그 해 잭이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정말 생각한다." 1965년, 빌스는 10승 3패 1무의 기록으로 시즌을 마쳤다. 캠프는 리그 패스 성공 부문에서 2위를 차지했다. 1965년 AFL 챔피언십 경기에서 버펄로는 차저스를 23대0으로 이겼다. 캠프에게 이 승리는 자신이 뛰었던 전 소속팀을 상대로 거둔 것이었기에 특별했다. 길크리스트 없이, 그리고 스타 리시버 앨버트 듀버니언이 3경기만 뛰었음에도 빌스를 2회 연속 챔피언십으로 이끈 캠프의 역할은 그에게 전 차저스 팀 동료인 폴 로와 함께 AFL MVP 상을 공동으로 수상하는 영광을 안겨주었다. 캠프는 또한 AP 통신 상과 챔피언십 경기 MVP 상을 수상했다.
2.2. 주요 업적 및 통계
챔피언십 경기 후, 사반은 메릴랜드 대학교의 코치로 사임했고, 수비 코디네이터 조 콜리어가 1966년 시즌의 헤드 코치로 승진했다. 캠프는 빌스를 9승 4패 1무의 기록으로 3년 연속 디비전 타이틀로 이끌었다. 그러나 슈퍼볼 I에서 AFL을 대표할 권리를 놓고 벌어진 1966년 아메리칸 풋볼 리그 챔피언십 경기에서 빌스는 캔자스시티 치프스에 31대7로 패했다. 캠프는 6년 연속 AFL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1967년 빌스는 4승 10패를 기록하며 부진했으며, 캠프는 AFL 경력에서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선정되지 못했다.
1968년 8월 23일, 빌스는 휴스턴 오일러스와의 프리시즌 경기에서 대패했다. 8월 26일, 콜리어는 빌스 선수들에게 40플레이 스크리미지를 진행시켰다. 스크리미지 도중 론 맥돌이 캠프의 오른쪽 무릎에 쓰러져 부상을 입었고, 캠프는 1968년 시즌 전체를 결장하게 되었다. 캠프 없이 빌스는 1승 12패 1무를 기록했다.
캠프가 부상에서 복귀하고 러닝백 O. J. 심슨이 합류했음에도 불구하고, 빌스는 새로운 코치 존 라우치 아래 1969년 시즌에 4승 10패만을 기록했다. 캠프는 리그의 10년 동안 7번째로 AFL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그는 리그의 인정을 옹호했으며, 리그의 마지막 해인 1969년에는 피트 로젤에게 AFL 팀들이 리그를 기리기 위해 AFL 패치를 착용하도록 로비했다. 1969년, 뉴욕주 이리군 공화당은 그에게 미국 의회 선거에 출마할 것을 제안했다. 1970년 1월 17일 AFL 올스타전 이후, 캠프는 집에 돌아와 아내와 상의한 후 정치에 입문하기로 결정했다. 캠프는 "그때 빌스와 4년짜리 무조건 계약이 있었다. ... 나는 만약 내가 진다면 언제든지 돌아와서 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팬들이 선택했고, 나는 의회에 선출되었다"고 말했다.
캠프는 버펄로를 4년 연속 AFL 플레이오프(1963년~1966년), 3년 연속 동부 디비전 타이틀(1964년~1966년), 2년 연속 AFL 챔피언십(1964년~1965년)으로 이끌었다. 그는 통산 패스 시도, 성공, 패싱 야드에서 리그 선두를 기록했다. 그는 AFL의 챔피언십 경기 10회 중 5회에 출전했으며, 챔피언십 통산 기록(패스 시도, 성공, 야드)에서도 동일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통산 및 단일 경기 패서 레이팅을 포함한 다른 여러 챔피언십 경기 부문에서 2위를 차지했다. 그는 스티브 영의 52개, 오토 그레이엄의 44개에 이어 NFL 또는 AFL 쿼터백의 러싱 터치다운 부문에서 40개로 3위를 기록했다. 1960년과 1965년 더 스포팅 뉴스 AFL 올리그 쿼터백으로 선정되었고, 1965년 AFL MVP였다. 그는 리그가 존재한 10년 내내 주전으로 등재된 유일한 AFL 쿼터백이었으며, 그 10년 동안 모두 활약한 20명의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그의 등번호 15번은 1984년 빌스에 의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2012년, 프로 미식축구 연구자 협회는 캠프를 2012년 PRFA Hall of Very Good 클래스에 선정했다. 그러나 그의 성공과 중요한 AFL 기록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경기 최다 쿼터백 색 기록 보유자 등 덜 좋은 기록으로 NFL 기록부에 가장 두드러지게 등재되어 있다. 캠프의 수많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조 네이머스와 렌 도슨이 올타임 AFL 팀의 쿼터백으로 선정되었다. 캠프는 그레이터 버펄로 스포츠 명예의 전당과 버펄로 빌스 명예의 전당의 회원이다.
연도 | 팀 | 경기 | 패싱 | 러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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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선발 | 기록 | 성공 | 시도 | 성공률 | 야드 | 평균 | TD | INT | 레이팅 | 시도 | 야드 | 평균 | TD | ||
1957 | PIT | 4 | 0 | - | 8 | 18 | 44.4 | 88 | 4.9 | 0 | 2 | 19.9 | 3 | -1 | -0.3 | 0 |
1960 | LAC | 14 | 12 | 9-3 | 211 | 406 | 52.0 | 3,018 | 7.4 | 20 | 25 | 67.1 | 54 | 238 | 4.4 | 8 |
1961 | SD | 14 | 14 | 12-2 | 165 | 364 | 45.3 | 2,686 | 7.4 | 15 | 22 | 59.2 | 43 | 105 | 2.4 | 6 |
1962 | SD / BUF | 6 | 5 | 3-2 | 64 | 139 | 46.0 | 928 | 6.7 | 5 | 6 | 62.3 | 20 | 84 | 4.2 | 2 |
1963 | BUF | 14 | 12 | 5-6-1 | 193 | 384 | 50.3 | 2,910 | 7.6 | 13 | 20 | 65.1 | 50 | 239 | 4.8 | 8 |
1964 | BUF | 14 | 13 | 11-2 | 119 | 269 | 44.2 | 2,285 | 8.5 | 13 | 26 | 50.9 | 37 | 124 | 3.4 | 5 |
1965 | BUF | 14 | 13 | 9-3-1 | 179 | 391 | 45.8 | 2,368 | 6.1 | 10 | 18 | 54.8 | 36 | 49 | 1.4 | 4 |
1966 | BUF | 14 | 14 | 9-4-1 | 166 | 389 | 42.7 | 2,451 | 6.3 | 11 | 16 | 56.2 | 40 | 130 | 3.3 | 5 |
1967 | BUF | 14 | 11 | 3-8 | 161 | 369 | 43.6 | 2,503 | 6.8 | 14 | 26 | 50.0 | 36 | 58 | 1.6 | 2 |
1969 | BUF | 14 | 11 | 4-7 | 170 | 344 | 49.4 | 1,981 | 5.8 | 13 | 22 | 53.2 | 37 | 124 | 3.4 | 0 |
경력 | 122 | 105 | 65-37-3 | 1,436 | 3,073 | 46.7 | 21,218 | 6.9 | 114 | 183 | 57.3 | 356 | 1,150 | 3.2 | 40 |
연도 | 팀 | 경기 | 패싱 | 러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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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선발 | 기록 | 성공 | 시도 | 성공률 | 야드 | 평균 | TD | INT | 레이팅 | 시도 | 야드 | 평균 | TD | ||
1960 | LAC | 1 | 1 | 0-1 | 21 | 41 | 51.2 | 171 | 4.2 | 0 | 2 | 41.8 | 3 | 19 | 6.3 | 0 |
1961 | SD | 1 | 1 | 0-1 | 17 | 32 | 53.1 | 226 | 7.1 | 0 | 4 | 36.2 | 4 | 5 | 1.3 | 0 |
1963 | BUF | 1 | 1 | 0-1 | 10 | 21 | 47.6 | 133 | 6.3 | 0 | 1 | 48.3 | 2 | -4 | -2.0 | 0 |
1964 | BUF | 1 | 1 | 1-0 | 10 | 20 | 50.0 | 188 | 9.4 | 0 | 0 | 82.9 | 5 | 16 | 3.2 | 1 |
1965 | BUF | 1 | 1 | 1-0 | 8 | 19 | 42.1 | 155 | 8.2 | 1 | 1 | 66.8 | 0 | 0 | 0.0 | 0 |
1966 | BUF | 1 | 1 | 0-1 | 12 | 27 | 44.4 | 253 | 9.4 | 1 | 2 | 59.6 | 1 | 3 | 3.0 | 0 |
경력 | 6 | 6 | 2-4 | 78 | 160 | 48.8 | 1,126 | 7.0 | 2 | 10 | 50.2 | 15 | 39 | 2.6 | 1 |
2.3. 선수 협회 활동
캠프는 보스턴 패트리어츠의 톰 애디슨과 함께 AFL 선수 협회를 공동 설립했으며, 5차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선수 조합의 창립 및 참여는 그의 경력 후반에 민주당의 노동 문제에 자주 동조하는 데 기여했다. NCAA 최고의 영예인 테오도어 루스벨트 어워드는 1992년 캠프에게 수여되었고, 그는 2006년 협회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학생 운동선수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3. 정치 경력
캠프의 정치 경력은 1970년 선거 운동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1960년과 1961년, 캠프는 『더 샌디에이고 유니온-트리뷴』 편집장이자 미래 리처드 닉슨 보좌관이 될 허브 클라인의 편집 보좌관으로 일했다. 이후 캠프는 배리 골드워터의 1964년 대통령 선거 운동과 로널드 레이건의 성공적인 196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 운동에서 자원 봉사자로 활동했다. 1967년 미식축구 비시즌 동안, 캠프는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 있는 레이건의 참모진으로 일했다. 1969년에는 공화당 전국 위원회 위원장의 특별 보좌관을 지냈다.
캠프는 독서광이었으며, 그의 정치적 신념은 골드워터의 『보수주의자의 양심』, 아인 랜드의 『샘솟는 원천』과 같은 소설, 그리고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의 『자유의 헌법』 등의 초기 독서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또한 흑인 팀 동료들과 미식축구를 하면서 인종 평등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캠프는 "나는 로자 파크스나 킹 목사나 존 루이스와 함께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여기 있고,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지붕 꼭대기에서 소리칠 것이다"라고 말했다. 캠프의 미식축구 동료들은 이러한 영향을 확인했다. 존 매키는 "허들은 색맹이다"라고 설명했다.
잭 캠프는 "프로 미식축구는 나에게 좋은 시각을 주었다. 정치 무대에 들어설 때, 나는 이미 야유를 받고, 환호하고, 해고당하고, 팔리고, 트레이드되고, 밀랍 인형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라고 말했다.
3.1. 초기 정치 활동
캠프는 1960년과 1961년에는 『더 샌디에이고 유니온-트리뷴』 편집장 허브 클라인의 편집 보조로 일했으며, 이후 배리 골드워터의 1964년 대선 캠페인과 로널드 레이건의 196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 캠페인에서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1967년 미식축구 비시즌 중에는 새크라멘토에 있는 레이건의 참모진에서 일했고, 1969년에는 공화당 전국위원회 위원장의 특별 보좌관을 지냈다. 그의 정치적 신념은 골드워터의 『보수주의자의 양심』, 아인 랜드의 소설,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의 『자유의 헌법』 등 초기 독서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또한, 미식축구 선수로서 흑인 팀 동료들과 함께 뛰면서 얻은 인종 평등에 대한 신념은 그의 정치적 행보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나는 로자 파크스나 킹 박사나 존 루이스와 함께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여기에 있으며,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지붕 위에서 소리칠 것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인권 문제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했다.
3.2. 미국 하원 의원 시절

자신을 "피 흘리는 마음을 가진 보수주의자"라고 묘사한 캠프는 1971년부터 1989년까지 뉴욕주 버펄로 외곽 지역인 사우스타운스 지역(전통적으로 민주당이 강세인 지역)을 대표하는 미국 하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초기 존 F. 케네디와 같은 카리스마를 가졌다고 묘사되기도 했다. 데이비드 로젠바움은 캠프를 위원회 관할을 벗어나 자주 입법 활동을 펼치고, 당의 정치 강령보다는 이상과 원칙을 옹호하는 독립적인 정치인이라고 묘사했다. 공급주의자로서 그는 균형 예산을 지지하지 않았고, 성장을 경제 목표로 언급하면서 이를 경시했다.

이리군 공화당은 현직 의원 리처드 D. 매카시가 미국 상원에 출마하기로 결정한 후 캠프를 공천했다. 그의 첫 선거 운동 당시, 그의 지역구는 경제적 침체에 시달리고 있었고, 『뉴욕 타임스』는 그를 가족 가치, 애국심, 스포츠, 국방을 내세워 선거 운동을 벌인 존 F. 케네디의 재림이라고 묘사했다. 62명의 신입 의원 중 한 명으로 의회에 당선된 그는 로널드 델럼스, 벨라 앱저그, 루이즈 데이 힉스, 로버트 드리넌, 피트 뒤퐁과 함께 『타임』지에서 다루어진 6명의 신입 의원 중 한 명이었다. 이 기사는 그를 리처드 닉슨 대통령처럼 미식축구 팬이며, 백악관 고문 로버트 핀치와 캠프의 전 상사였던 닉슨의 통신 국장 허브 클라인으로부터 조언을 받았다고 묘사했다. 닉슨 보좌관들은 캠프에게 캄보디아 침공을 지지하고 닉슨의 전쟁 정책에 대한 비판에 반대하여 군 강경파로부터의 지지를 확고히 하도록 격려했다.
캠프는 시카고 학파와 공급주의 경제학의 여러 이슈를 옹호했는데, 여기에는 경제 성장, 자유 시장, 자유 무역, 조세 단순화 및 고용 소득과 투자 소득 모두에 대한 낮은 세율이 포함된다. 그는 오랫동안 단일세율을 지지했다. 그는 또한 중앙 아메리카의 콘트라 반군에 대한 지원을 옹호했으며, 금본위제를 지지하고, 시민권법을 옹호하며, 낙태에 반대했고, 기업 구역을 대중화한 최초의 의원이었는데, 이는 기업가 정신과 일자리 창출을 촉진하고 공공 주택 세입자들의 주택 소유를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력 내내 그는 때때로 자유주의적 민주당원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는 적극적 우대 조치와 불법 이민자의 권리를 지지했다. 『뉴욕 타임스』는 캠프를 로버트 F. 케네디 이후 빈곤과의 전쟁에서 가장 적극적인 투사라고 묘사했다. 그는 록펠러 공화주의자들이나 린든 존슨과 같은 이전 투사들과 달리 전통적인 사회 프로그램 대신 인센티브 기반 시스템을 지지했다. 공화당 내에서 빈민가 문제에 대한 그의 헌신으로, 데이비드 거겐은 그를 "광야의 용기 있는 목소리"라고 칭송했다. 그는 많은 사회 문제에 대해 자유주의적이었고 동성애자의 시민적 자유를 지지했지만, 학교에서 가르칠 권리와 같은 특정 동성애자 권리에는 반대했다. 캠프는 때때로 자신의 역할을 "자유분방하고 기업가적인, 예측 불가능한 평의원"으로 여겼다.
『타임』지는 1974년 "미래의 얼굴들" 특집에서 38세의 재선 의원 캠프를 미래의 지도자로 선정했다. 또 다른 초기 경력의 주목할 만한 잡지 등장은 1978년 『에스콰이어』지였다. 그 기사에서는 1967년 로널드 레이건의 새크라멘토 사무실 직원들 사이의 동성애 활동 의혹을 설명했지만, 캠프는 연루되지 않았다.
캠프는 1980년 미국 상원 출마를 고려했고, 휴 사이디는 그를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지미 카터를 물리칠 경쟁자로 언급했으며, 1980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부통령 후보 선두 주자였다. 당시 그는 조지 H. W. 부시의 보수적인 반대자들로부터 43표를 받았다. 1980년 6선에 재선된 후, 공화당 동료들은 그를 당 지도부 직책으로 선출했고, 그는 7년 동안 하원 공화당 회의 의장을 지냈다. 이러한 승진은 캠프와 데이비드 스톡먼이 레이건에게 취임 후 100일 동안 의회와 경제 패키지를 위해 노력하도록 촉구하는 메모를 보낸 직후에 이루어졌다. 캠프는 1982년 뉴욕 주지사 출마를 고려했지만, 결국 하원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1984년에는 많은 사람들이 캠프를 레이건의 유력한 후계자로 보았다.
캠프는 1976년 『월 스트리트 저널』의 주드 와니스키가 의회 사무실에서 그를 인터뷰하면서 공급주의 경제학을 처음 접했다. 캠프는 와니스키에게 하루 종일(베데스다에 있는 캠프의 집에서 자정까지) 질문했고, 결국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교수 아서 래퍼의 공급주의 학파에 귀의했다. 이후 캠프는 공급주의 경제학을 자유롭게 옹호했으며, 1978년에는 윌리엄 로스 상원의원과 함께 감세 법안을 제안했다. 캠프는 로버트 먼델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 당시, 많은 이들이 먼델, 래퍼, 로버트 바틀리, 와니스키에게 더 많은 공을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레이건 대통령의 경제 계획에 공급주의 경제학을 포함시킨 책임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1979년 캠프는 "밀물은 모든 배를 들어 올린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미국의 르네상스』(An American Renaissance)를 저술했다. 1980년대 초의 감세는 레이건에게 공로가 있지만, 이는 1981년 캠프-로스 감세 입법을 통해 캠프와 로스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다. 이 법안에 기초한 레이건의 예산은 미국 하원 세입 위원회 위원장 댄 로스텐코프스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과되었다.
레이건 시대 동안, 캠프와 그의 추종자들은 감세와 경제 성장을 장려하면서도 예산 균형은 무시했다. 이러한 감세는 1983년부터 1990년까지의 경제 성장(1996년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긴 평시 확장 중 하나)에 대해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공로가 인정되었다. 캠프는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 폴 볼커의 인플레이션 억제 성공과 유리한 규제 환경 또한 주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비판론자들은 이러한 확장이 도박, 교도소, 의료, 신용카드 사용 등 바람직하지 않은 부문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지적한다.
캠프의 초기 세금 개혁 시도는 1979년 생활비 변동에 따른 세금 등급 인덱스화를 제안했으나 실패했다. 이 아이디어는 1980년 레이건의 정책에 포함되었다. 캠프는 1980년 기업 구역에 대한 입법 시도를 공동 발의했다. 의원으로서 캠프의 가장 힘든 시기 중 하나는 1982년 레이건이 감세를 철회하고 증세를 추진하기로 결정했을 때였다. 이러한 전환은 논란이 많았고 캠프의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정된 세금 법안은 통과되었다. 1983년, 캠프는 여러 차례 볼커 의장의 정책에 반대했다. 이 논쟁에는 국내 통화 정책 개입과 국제 통화 기금 자금 지원 역할이 포함되었다.
캠프는 여러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연설했다. 그는 1980년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7월 15일에 연설했고, 1984년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열린 1984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8월 21일에 연설했다. 1984년 전당대회에서 트렌트 로트가 공화당 강령 위원회 의장으로 있을 때, 캠프 의원과 뉴트 깅리치는 공화당 상원의원 밥 돌과 하워드 베이커를 당혹스럽게 하며 당 강령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했다. 캠프의 공식적인 역할은 외교 정책 분과 위원회 의장이었다. 그러나 그가 제안한 세 가지 강령 항목은 증세, 금본위제, 그리고 연방준비제도의 역할을 포함했다. 캠프의 공식적인 역할에도 불구하고, 작가로서 그의 실제 영향력은 증세 강령의 문법적 구조에 있었다. 1985년까지 캠프는 1988년 대선 후보의 유력한 경쟁자였다. 그는 또한 1992년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열린 1992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자유 기업 구역에 대한 발언을 했다. 그의 정치적 영역을 확장하려는 노력과 고려에도 불구하고, 캠프는 8선 의원 생활을 한참 지난 후에야 서부 뉴욕 교외 지역구를 벗어나 모금 행사를 가졌다.
캠프는 축구 (미국에서는 사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1986년, 미국이 1994년 FIFA 월드컵을 개최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원 회의에서 캠프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나는 언젠가 진정한 미국식 축구를 하고 싶어 하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공을 던지고 차고, 달리고, 손으로 잡는 축구와 사커는 다르다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축구는 민주적 자본주의이고, 사커는 유럽 사회주의 스포츠이다." 캠프는 자신의 연설을 조지 칼린의 1984년 야구와 미식축구의 차이에 대한 코미디 루틴과 비교하며, 연설할 때 "혀가 볼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고 썼다. 연설의 가벼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는 상당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사커의 가장 큰 문제는 "쿼터백이 없다"는 것이라고 계속 주장했다. 캠프는 자신의 손주들 중 절반 가량이 조직적인 사커를 하거나 했다는 점을 언급하며, 사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바꾸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심지어 오랜 사커 팬인 헨리 키신저와 함께 1994년 FIFA 월드컵에 참석했지만, 2006년 FIFA 월드컵 당시에는 사커가 보는 재미는 있을지라도 여전히 "지루한 게임"이라고 썼다.
3.3. 대통령 선거 출마 (1988년)

1988년, 캠프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면, 그는 제임스 A. 가필드 이후 미국 하원 의원에서 곧바로 백악관으로 직행한 첫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탐사 위원회를 구성했을 때, 그는 레이건의 1984년 재선 캠페인 정치 국장이었던 에드 롤린스를 고문으로 영입했다. 처음부터 캠프는 조지 H. W. 부시 부통령의 주요 대안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실패했다. 소수의 전문가들을 제외하고는, 일반 대중은 그가 성공적인 아이디어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캠프의 리더십 능력을 인지하지 못했다. 사실, 공화당 유권자 대부분은 그의 캠페인 초기에 캠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정치 전문가들은 그를 비전 있는 아이디어맨으로 인정했다. 게다가 그는 청중과의 소통을 잃을 때가 있는 장황한 연설가로 빠르게 인식되었다. 캠프는 보수주의자들에게 호소하려고 노력했지만, 그의 관용과 개인의 권리에 대한 자유지상주의적 철학, 그리고 소수자, 여성, 블루칼라 노동자, 노동조합을 지원하려는 그의 헌신은 보수 유권자들의 사회적, 종교적 가치와 충돌했다. 민주당원들에게 캠프의 자유 시장 철학은 자유방임주의적 무정부 상태의 한 형태였다. 그러나 캠프가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싶어 했던 만큼, 그는 더 자유방임적인 시스템으로의 전환이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인정했다.
1987년 5월 게리 하트-도나 라이스 스캔들 이후, 『뉴욕 타임스』의 설문지는 14명의 대선 후보 모두에게 정신과 기록과 FBI 파일 접근 권한 등을 요청했다. 각 당의 후보들은 개인 정보 보호 문제에 대해 양쪽 입장을 표명했고, 캠프는 『타임스』의 요청을 "대통령 후보의 위엄에 미치지 못한다"고 거부했다. 그의 캠페인은 뉴햄프셔에서 많은 주요 초기 지지를 받으며 긍정적인 초기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부시는 뉴욕의 공화당 기득권층의 많은 지지를 유지했다. 그가 다양한 지지자들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캠프의 캠페인은 값비싼 다이렉트 메일 모금 기술을 사용한 탓에 예상되는 연방 매칭 펀드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 빠르게 적자를 기록했다. 사회적으로 온건한 입장을 상쇄하기 위해 캠프는 낙태 반대, 전략방위구상 (SDI) 지지, 그리고 국무부 장관 조지 슐츠가 선호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군사력 지지를 분명히 했다. 레이건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캠프는 슐츠가 아프가니스탄과 니카라과의 자유 투사들을 등한시하고 SDI에 대해 이랬다저랬다 했다는 주장을 근거로 슐츠의 사임을 요구했다. 핵심 레이건 시대 외교 정책 이니셔티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강조하기 위해 캠프는 1987년 9월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엘살바도르를 방문하여 이들 국가의 대통령들에게 아리아스 평화 계획(미국 보수주의자들이 중앙 아메리카 공산주의자들에게 너무 유화적이라고 생각했던 평화 협정)에 반대하도록 로비했다. 이 여행에는 50여 명의 미국 보수 지도자들이 동행했다.
모든 정치적 주제를 다루는 강령에도 불구하고, 캠프의 주요 선거 운동 무기는 감세를 기반으로 한 재정 정책이었다. 그의 재정 정책의 일환으로 그는 사회 보장 혜택 동결에 반대하고 정부 지출 동결을 지지했다. 일부는 캠프의 공급주의적 입장을 국가 재정 적자를 무시하려는 시도로 보았다. 1987년 후반, 정치 전문가들은 캠프가 사회적 문제가 아닌 분야에서 극우파의 지지를 얻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캠프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소련과의 중거리 핵 전력 조약에 반대하는 대다수 공화당 후보들 중 한 명이었지만, 공화당 유권자들은 일반적으로 조약을 승인했다. 낮은 여론 지지율을 보인 모든 후보들은 우파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동일한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1988년 초, 온건파(부시와 돌)는 확실히 선두 주자였고, 캠프는 온건파의 보수적인 대안으로 팻 로버트슨과 경쟁하고 있었다.
그는 다소 부정적인 광고 캠페인을 사용했는데, 이는 그를 진지한 경쟁자로 끌어올리려는 의도된 초기 효과를 보인 것으로 보였다. 그의 1988년 캠페인은 공급주의 경제학과 도심 기업 구역이라는 강령에 기반을 두었다. 『맨손과 뒷방: 미국 정치에서의 내 삶』에서 캠페인 의장 롤린스는 캠프를 결점을 가진 후보라고 묘사했다. 캠프의 캠페인 매니저들은 그가 통제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그는 연설 시간을 무시하고, 후원자들에게 전화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토론 준비를 연습하는 것을 거부했다. 결국 대통령 후보가 된 부시, 그리고 돌과 팻 로버트슨보다 적은 39명의 대의원을 얻은 치욕적인 슈퍼 화요일로 그의 캠페인은 끝이 났다. 경선에서 철회한 후에도 그는 여전히 부통령 후보로 고려되었다. 1989년, 캠프 부부는 공식 거주지를 뉴욕 함부르크에서 메릴랜드주 베데스다로 옮겼고, 이곳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의 거주지였다. 1994년, 캠프의 1988년 캠페인은 연방선거위원회와 합의하여, 과도한 기부금, 부적절한 직접 기업 기부금, 언론 과다 청구, 아이오와와 뉴햄프셔에서의 지출 한도 초과, 항공 운송 제공에 대한 기업 보상 실패 등 1988년 선거법 위반에 대해 12.00 만 USD의 민사 벌금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3.4. 주택도시개발장관 시절

"피 흘리는 마음을 가진 보수주의자"로 불린 캠프는 공공 주택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공공 부문 및 민간 부문 방법을 육성하는 미국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직에 조지 H. W. 부시가 임명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로널드 레이건의 주택도시개발부 장관 새뮤얼 피어스의 스캔들과 대통령의 무관심은 처음부터 장애물이었고, 캠프는 기업 구역 제정 및 공공 주택 세입자 소유권 증진이라는 두 가지 주요 계획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이 두 가지 계획의 목표는 공공 주택을 세입자 소유 거주지로 바꾸고, 연방 인센티브를 통해 산업과 기업을 내부 도시로 유인하는 것이었다.
캠프는 주택도시개발부 국장으로서 많은 정책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주택도시개발부의 평판을 회복시켰고, 연방 주택청을 구제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특정 프로그램을 중단하거나 개편하고 마약 퇴치를 위한 공세를 개발했으며, 이를 통해 국가 마약 통제 정책 국장 빌 베넷과 협력할 수 있었다. 그는 공공 주택에서의 총기 소유를 금지하는 "오퍼레이션 클린 스윕"과 유사한 움직임을 지지했다.
캠프는 부시를 설득하여 공공 주택 세입자들이 자신의 아파트를 살 수 있도록 장려하는 40.00 억 USD 규모의 주택 프로그램을 지원하도록 했지만, 민주당 의회는 이 계획에 3.61 억 USD만을 배정했다. 의회의 반대 외에도 캠프는 자신의 주요 사업인 HOPE(모든 사람을 위한 주택 및 기회)에 반대했던 백악관 예산 국장 리처드 다먼과 싸웠다. 이 프로젝트는 공공 주택을 세입자에게 판매하는 것을 포함했다. 다먼은 또한 캠프가 제안한 정부 보조금의 복지 조정을 반대했다. HOPE는 1989년 6월 백악관 비서실장 존 H. 수누누에게 기업 구역을 만들고, 저소득층 임차인에 대한 보조금을 늘리고, 노숙자와 노인을 위한 사회 서비스를 확대하며, 주택 구매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세금 변경을 시행할 것을 처음 제안했다. 수누누는 처음에는 내각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반대했지만, 1990년 8월, 미국 법무부 장관 딕 손버그의 요청으로 수누누는 부시 대통령에게 캠프의 경제 역량 강화 태스크포스를 지지하도록 장려했다. 그러나 걸프 전쟁과 예산 협상이 캠프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가렸다. 다먼은 캠프와 깅리치, 제임스 핑커턴, 빈 웨버와 같은 그의 동맹자들과 싸웠다. 예산은 그의 계획에 2.56 억 USD만을 남겼는데, 캠프는 일부 예산 싸움 동안 이를 늘렸다. 클레이턴 유터가 백악관 국내 정책 수석 고문으로 임명된 직후, 캠프의 경제 역량 강화 태스크포스는 폐지되었다.
부시 대통령은 연방 반빈곤 정책 문제를 회피하고, 대신 캠프를 활용하여 행정부의 우선순위가 낮은 보수적 활동 의제를 대변하게 했다. 부시의 도시 의제에 대한 기여는 그의 "천 개의 빛" 주제를 통한 자원봉사였으며, 캠프는 빌 클린턴 대통령 후보로부터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해 더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당시, 부시는 기업 구역, 세입자 소유권, 복지 개혁을 지지하는 데 다소 늦었었다. 모트 주커먼은 부시의 인종 문제에 대한 비전을 기차에서 뒤로 타고 가는 사람에 비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처음에는 캠프가 간과되었지만, 폭동은 캠프를 행정부의 중심 인물로 만들었다. 그러나 찰스 E. 슈머는 1989년에 "돈이 있는 좋은 아이디어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돈 없는 좋은 아이디어는 아마도 많은 것을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캠프의 성공 가능성을 가장 잘 요약했을 것이며, 여기서 문제는 캠프의 아이디어를 지원하지 않기로 한 결정이었다. 캠프는 그의 비전을 위한 자금을 확보하지 못했지만, 행정부에서 일등석 기업 제트기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주택 장관으로서 정부 비용으로 일등석을 타야 했던 이유로 무릎 부상의 잔여 효과를 들었다.
대체적으로 그의 주택 장관 재임 기간은 실패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는 재임 기간 동안 기업 구역에 대한 연방 자금 지원을 통과시키지 못했지만, 1992년까지 38개 주에서 기업 구역을 조성했으며, 1994년에는 클린턴 대통령 아래 35.00 억 USD가 승인되었다. 주택 소유자들이 과도한 관료주의 없이 임대 단위를 만들기 위해 주택을 분할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자유 시장 캠프 이니셔티브는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에서 실행되지 않았다. 1992년, H. 로스 페로가 강력한 캠페인을 펼치자, 캠프는 다시 부통령 후보로 고려되었다.
캠프가 주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책임은 부분적으로 그가 나머지 내각과 잘 지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때 캠프는 백악관 비서실장 제임스 베이커에게 부시가 재선에서 승리할 가장 좋은 기회는 그의 경제 고문들을 극적으로 해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992년 공화당 전당대회 이전에, 캠프와 6명의 저명한 공화당 보수주의자들은 부시에게 경제 정책을 수정할 것을 촉구하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메모를 작성했다. 동시에 윌리엄 F. 버클리 주니어와 조지 윌과 같은 현직 및 언론의 보수 공화당원들은 댄 퀘일을 캠프로 교체해야 한다고 느꼈다. 이는 캠프가 1992년 국정 연설 이후 대통령의 경제 정책 일부를 "속임수"라고 언급한 데 따른 것이었다. 캠프는 부시에 반대한 것으로 당내에서 존경받았고, 부시 행정부 말기에는 내부자들이 그의 가치를 인정했다. 1991년 말, 166명의 공화당 의원 중 81명은 커트 웰던과 댄 버튼이 공동으로 작성한 서한에 서명하여 부시에게 일부 국내 권한을 캠프에게 "국내 정책 황제"로서 양도할 것을 요청했다. 캠프의 "에너지, 열정, 그리고 국가적 영향력"을 강조한 이 서한은 부시를 모욕했다. 캠프는 부시의 대통령 재임 기간 내내 부시 내각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강경한 입장을 취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부시 행정부 구성원 중 한 명으로 묘사되었다. 캠프는 1992년에 공화당이 재선된다 해도 자신이 유임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고, 일부 전문가들도 그와 의견을 같이했다.
3.5. 부통령 후보 지명 (1996년)

캠프는 가장 주목받는 진보적 공화주의자라는 평판을 가지고 있었다. 돌이 전국 유색인종 지위 향상 협회에 연설 초청을 거절했을 때, 그는 캠프가 부통령 후보가 되기 전에도 캠프를 대타로 제안했다. 1996년 8월 5일, 돌은 포브스 캠페인과 캠프의 세금 개혁 위원회에 대한 응답으로 15% 일괄 감세를 발표했다. 돌의 다른 캠페인 아이디어 중 일부는 캠프와 빌 베넷의 엠파워 아메리카에서 나왔는데, 이 단체는 진 커크패트릭, 웨버, 포브스, 알렉산더를 주요 인물로 삼았다. 예를 들어, 돌은 커크패트릭의 강경한 외교 정책, 베넷의 "올바른 행동", 심지어 알렉산더의 학교 선택 관심까지 차용했다.
베넷은 돌의 러닝메이트 제안을 거절했지만, 돌의 적수라고 묘사된 캠프를 제안했다. 1996년 8월 16일, 공화당은 캠프를 부통령 후보로 선정하여 전 상원의원 돌과 함께 출마하게 했다. 캠프는 포브스와 팻 뷰캐넌과 같은 강력한 후보 도전자들의 보수적이고 자유지상주의적 성향의 유권자들을 끌어들이는 수단으로 여겨졌다. 캠프는 코니 맥 3세, 존 매케인, 캐럴 캠벨을 제치고 선정되었는데, 이는 캠프가 돌의 고문으로서 영향력 있는 위치에 여러 전직 참모들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돌은 오랫동안 당의 예산 균형파를 대표해 왔고, 캠프는 감세 옹호자들을 오랫동안 대표해 왔으며, 캠프의 감세 재정 정책 기록은 대선 후보에 완벽하게 적합하다고 여겨졌다. 캠프가 1996년 돌의 러닝메이트가 되었을 때, 그들은 1996년 8월 19일자 『타임』지 표지에 실렸지만, 화성에서 외계 생명체가 발견되었다는 보도 기사로 거의 대체될 뻔해서 『타임』지는 표지 안에 이를 삽입하고 결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에 대해 썼다.
두 정치인은 상반된 관점과 목표로 인해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돌은 존 F. 케네디의 감세에도 반대했던 오랜 보수적 적자 강경파였고, 캠프는 거침없는 공급주의자였다. 1980년대 초, 데이비드 스톡먼에 따르면, 캠프는 레이건에게 30%의 일괄 감세를 1980년 대선 캠페인의 핵심 기능으로 만들도록 설득했다. 레이건이 당선되자 돌은 상원 재정 위원회 위원장이 되었고, 캠프는 돌이 그 계획에 모든 단계에서 저항했다고 주장한다. 돌은 1981년 계획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했음을 인정한다. 큰 대립은 세금 계획이 승인된 후 돌이 개혁이라고 언급한 증세를 제안하면서 발생했다. 캠프는 이 개혁에 강력히 반대하며 『뉴욕 타임스』에 기고문을 쓰기도 했는데, 이는 돌을 격분시켰다. 레이건은 돌의 요청으로 개혁을 지지했고, 이로 인해 캠프는 동맹국들을 소집하여 법안을 저지하려 했지만, 결국 1982년에 통과되었다. 1984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캠프는 깅리치와 로트 같은 동맹자들과 함께 레이건 대통령이 증세를 배제한다는 당 강령에 조항을 추가했다. 깅리치는 이 행동을 강령을 "돌에게서 방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불렀고, 이 조항은 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과되었다. 그리고 1985년, 돌은 재정 긴축 예산을 제안했고, 이 예산은 상원에서 맹장 절제술 환자 피트 윌슨이 동률 투표를 하고 부시 부통령이 결정 투표를 함으로써 간신히 통과되었다. 돌을 제외한 대통령과의 회의에서 캠프는 중요한 사회 보장 삭감 항목을 제외하도록 예산을 수정했다. 이는 돌의 가장 뼈아픈 정치적 패배였고, 공화당이 상원 통제권을 잃는 데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1988년 대선 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적대시했다. 부시가 승리하고 캠프가 의회를 떠나 내각에 합류한 후, 두 사람은 1996년 3월 뉴욕 예비 선거 직전에 캠프가 돌의 상대인 포브스를 지지했을 때까지는 다시 마주칠 일이 없었다.
돌은 캠프의 경제 이론을 경멸했지만, 캠프와 같은 감세가 선거에서 성공할 최고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느꼈다. 캠프도 양보해야 할 부분이 있었다. 그는 캘리포니아주에서 불법 이민자 자녀의 공립학교 퇴학 조치(그가 오랫동안 반대했던 캘리포니아 주민 발의 187호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와 적극적 우대 조치 프로그램 폐지에 대한 반대를 약화시켜야 했다. 일부는 그의 타협을 비난하며 그를 "사기꾼"이라고 불렀다. 캠페인 초반부터 돌-캠프 진영은 뒤처졌고, 당내에서도 회의적인 시각에 직면했다. 그러나 캠프는 지명을 이용하여 클린턴의 부분 출산 낙태 금지 법안 거부에 대한 반대 입장을 홍보할 수 있었다. 캠페인 동안 캠프와 포브스는 돌보다 더 강력한 감세 입장을 옹호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캠프가 빌 클린턴을 따라잡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캠프의 옹호는 성공적인 캠페인 시 세금 개혁이 어떻게 이루어질지에 대한 명확한 그림을 제시했다. 캠프는 여러 유형의 스윙 보터들, 특히 그의 고향 캘리포니아 주의 유권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었고, 민주당원들조차 캠프가 유권자들을 유인할까 봐 두려워했다.
지명을 받은 후, 캠프는 선거 운동에서 소수자와 내부 도시의 대변인이 되었다. 루이스 파라칸이 백만인 행진을 비롯한 여러 포럼에서 지지했던 자조 정책에 동의했기 때문에, 캠프는 어떤 의미에서 파라칸과 자신을 연합시켰다. 그러나 파라칸은 반유대주의자로 인식되었고, 캠프는 공화당 유대인들의 동맹자로 여겨졌다. 이 문제는 일부 정치적 회피를 필요로 했다. 후보로서 캠프는 때때로 돌을 압도했다. 사실, 한 번 이상 캠프는 마치 자신이 대통령 후보인 것처럼 묘사되기도 했다.
돌을 압도한 것 외에도, 돌-캠프 진영이 사용한 부정적인 광고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캠프는 미식축구 관련 은유와 과장으로 가득 찬 "페프 랠리" 유형의 캠페인 투어에 의존하는 매우 긍정적인 러닝메이트였다. 일부는 캠프의 스타일을 즐기며 그를 "선한 목자"라고 불렀지만, 『US 뉴스 & 월드 리포트』의 작가 스티븐 V. 로버츠와 같은 비판론자들은 공을 패스하는 이야기에 대한 과도한 언급을 법안을 통과시키는 이야기에 대한 언급과 비교하며 비판했다. 캠페인 동안, 캠프는 공화당 지도자들이 후보에 대해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캠프가 소수자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콜린 파월이 지지했으며, 흑인의 약 30%가 학교에서의 기도, 학교 바우처, 형사 사법과 같은 문제에 대해 자신을 보수주의자라고 밝힌 여론 조사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유권자들로부터 역사적인 지지 수준을 개선하지 못했다.
앨 고어와 캠프 모두 대통령의 열망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더 높은 수준의 토론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또한, 고어와 캠프는 고어와 그의 이전 부통령 경쟁자 댄 퀘일과는 달리 오랜 친구였다. 따라서 토론자로서 그들은 개인적인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일부는 캠프가 실질적인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느꼈다. 1996년 10월 9일 앨 고어와의 마지막 부통령 토론(돌-캠프 선거 운동이 전국 여론 조사에서 크게 뒤처진 상황에서 개최됨)에서 캠프는 완패했으며, 앨 고어의 성과는 현대 토론 중 최고 중 하나로 평가된다. 토론 주제는 낙태와 외교 정책과 같은 일반적인 주제부터 당시 야구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발생한 사건, 즉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2루수 로베르토 알로마르가 심판에게 욕설을 하고 침을 뱉은 사건과 같은 특이한 주제까지 폭넓게 다루어졌다. 멕시코 정책 토론은 비평적 검토를 위한 가장 흥미로운 주제 중 하나였다. 고어의 승리는 캠프가 이전 대결에서 고어에게 밀렸고, 고어가 경험 많고 높이 평가받는 토론가라는 평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4. 철학 및 이념
잭 캠프의 정치적 신념은 자유지상주의적 사고와 시카고 학파 및 공급주의 경제학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는 독서광이었으며, 특히 배리 골드워터의 『보수주의자의 양심』, 아인 랜드의 소설,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의 『자유의 헌법』 등의 저서에서 영향을 받았다.
4.1. 공급주의 경제학
캠프는 경제적 보수주의자로서 공급주의 경제학의 강력한 옹호자였다. 그는 낮은 세금과 자유 시장을 통한 경제 성장을 주장했으며, 이러한 정책이 모든 경제 계층에 혜택을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특히 단일세율의 오랜 지지자였으며, 조세 단순화와 고용 및 투자 소득에 대한 낮은 세율을 강조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윌리엄 로스 상원의원과 공동으로 발의한 1981년 경제 회복 세법, 일명 "캠프-로스 감세"였다. 이 법안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레이거노믹스의 핵심이 되었고, 이후 1980년대 경제 성장의 기반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균형 예산보다는 경제 성장을 통한 문제 해결을 우선시했으며, 적자를 무시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감세를 강력히 추진했다. 캠프는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 폴 볼커의 인플레이션 억제 성공과 유리한 규제 환경 또한 경제 성장의 주요 요인이라고 인정했다。
4.2. 지역사회 개발 및 사회 정책
캠프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내부 도시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방 정부의 인센티브를 통해 산업과 사업을 유치하는 기업 구역 개념을 대중화한 최초의 의원이었다. 이는 기업가 정신과 일자리 창출을 촉진하고, 공공 주택 세입자들의 주택 소유를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는 보수당 내에서 이례적으로 적극적 우대 조치를 지지하고, 불법 이민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등 자유주의적인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 특히 그는 캘리포니아 주민 발의 187호(불법 이민자의 공공 서비스 접근 제한)에 강력히 반대했으며, 이민자들이 미국에 "축복"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피 흘리는 마음을 가진 보수주의자"라는 별명을 얻게 했으며, 로버트 F. 케네디 이후 빈곤과의 전쟁에서 가장 적극적인 투사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는 전통적인 사회 프로그램 대신 인센티브 기반 시스템을 통해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낙태 문제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유지하며 낙태 반대를 분명히 했다. 그는 또한 동성애자의 시민적 자유를 지지했지만, 학교에서 가르칠 권리와 같은 특정 동성애자 권리에는 반대했다.
4.3. 외교 및 안보 정책
외교 및 안보 정책에 있어서 캠프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중앙 아메리카의 콘트라 반군에 대한 지원을 옹호했으며, 전략방위구상(SDI)을 지지했다. 그는 국무부 장관 조지 슐츠가 아프가니스탄과 니카라과의 자유 투사들을 등한시하고 SDI에 대해 입장을 번복했다는 이유로 그의 사임을 요구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 간의 중거리 핵 전력 조약에 대해 일반 공화당 유권자들이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이는 보수 진영의 강경한 외교 정책 기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5. 개인적인 삶
캠프는 1957년 옥시덴탈 칼리지를 졸업했으며, 1958년 옥시덴탈을 졸업한 대학 시절 연인 조안 메인과 결혼했다. 메인은 캘리포니아주 벤투라군의 필모어에서 자랐고, 필모어 고등학교를 다녔다. 캠프의 성경 문학 교수였던 키스 비비가 결혼식을 주례했다.

캠프 부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 다 프로 미식축구 쿼터백이었다. 제프 캠프(1959년생)는 1981년부터 1991년까지 NFL에서 뛰었고, 지미 캠프(1971년생)는 1994년부터 2002년까지 CFL에서 뛰었다. 캠프는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이나 대학 시절 경기 중 단 한 번도 그들의 경기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두 딸도 있었다. 제니퍼 캠프 앤드루스(1961년생)와 주디스 캠프(1963년생)이다.

조안 캠프는 한때 유산을 겪었는데, 캠프는 나중에 이 사건이 자신이 인간 생명의 신성함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낙태 반대 입장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결혼 후, 캠프는 아내의 장로교 신앙으로 개종했다. 그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혔다.
캠프는 북부 메이슨 관할구역의 33단계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
6. 후기 경력 및 활동
1993년, 캠프는 빌 베넷, 진 커크패트릭, 금융 후원자 테오도어 포스트만과 함께 자유 시장 옹호 단체인 엠파워 아메리카를 공동 설립했으며, 이 단체는 나중에 사운드 이코노미를 위한 시민과 합병하여 프리덤 웍스를 설립했다. 엠파워 아메리카는 당의 대중주의적 날개를 대표했다. 낙태나 동성애자 권리와 같은 분열적인 문제들을 피하면서, 이 단체는 예산 균형이나 적자 감축보다는 자유 시장과 성장을 옹호했다. 그는 2005년 3월, FBI가 유엔 석유-식량 교환 스캔들에 연루되어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정부의 미등록 로비스트로 불법 활동한 4건의 형사 혐의를 인정한 새미르 빈센트와의 관계를 조사한 후 프리덤 웍스 공동 의장직을 사임했다. 캠프에 대한 증언은 재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FBI 정보원인 리처드 피노는 1996년 선거 불과 몇 주 전에 캠프를 제임스 코센티노와 연결시켰다.
1996년까지 캠프는 6개의 기업 이사회 이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호크 코퍼레이션, IDT 코퍼레이션, CNL 호텔스 앤 리조트, 인포닉, 사이릭스, 아메리칸 뱅커스 인슈어런스 그룹의 이사였다. 캠프는 1996년 친구 래리 엘리슨이 CEO인 오라클 코퍼레이션 이사회에 잠시 몸담았지만,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면서 사임했다. 그는 2005년 12월 식스 플래그스 이사회에 임명되었다. 캠프는 2006년 IDT 이사회 재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는 또한 해비타트 포 휴머니티 이사회와 애틀랜타 기반 소프트웨어 회사 EzGov Inc. 이사회에서도 활동했다. 캠프는 세계 최초의 인터넷 선거(앨 고어가 승리한 2000년 애리조나 민주당 예비선거)를 운영했던 민간 회사 Election.com의 이사회에서도 활동했다.
캠프는 또한 에드라 블릭세스와 팀 블릭세스와 함께 엘리트 프라이빗 스키 및 골프 클럽인 옐로스톤 클럽의 회원 유치를 위한 사업 파트너였다. 캠프는 또한 블릭세스와 함께 실패한 반테러 소프트웨어 벤처인 Blxware에 파트너로 참여했는데, 이 회사는 알카에다의 비밀 메시지를 텔레비전 방송 신호에서 감지한다고 사기적으로 주장하는 소프트웨어에 대해 연방 정부로부터 2000.00 만 USD에 달하는 계약을 "사기" 친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캠프는 고객의 사업 및 공공 정책 목표 달성을 돕는 전략 컨설팅 회사인 캠프 파트너스의 설립자 겸 회장이었다.
기업 이사회 외에도 캠프는 UCLA 공공 정책 대학원 자문 위원회, 도요타 다양성 자문 위원회와 1993년부터 활동한 하워드 대학교 이사회 등 여러 자문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2003년 3월 25일, 캠프는 내셔널 풋볼 리그(NFL)와 NFL 선수 협회가 설립한 아마추어 미식축구 전국 옹호 단체인 USA 풋볼의 이사회 의장으로 선정되었다. 이 단체는 팝 워너 리틀 스칼라스, 아메리칸 유스 풋볼, 미국 소년소녀 클럽, 미국 레크리에이션 및 공원 협회, 경찰 체육 연맹, YMCA, 아마추어 육상 연합을 지원한다. 그는 또한 NFL 자선단체의 부회장을 지냈다.

1990년대 후반, 캠프는 정치 문제에 대해 계속해서 솔직하게 발언했다. 그는 빌 클린턴의 국제 통화 기금이 한국에 대해 취한 안일한 정책을 비판했다. 1998년 초, 그는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후보였지만, 그의 캠페인 가능성이 약해졌고, 대신 결국 당선된 조지 W. 부시를 지지했다. 캠프는 세금, 사회 보장, 교육 개혁에 대한 정치적 옹호를 계속했다. 1997년 예산 흑자가 부채 상환에 배정되자, 캠프는 감세 대신 이 계획에 반대했다. 존 애슈크로프트와 앨런 크루거와 함께 그는 이중 과세를 없애기 위한 급여세 개혁을 지지했다. 재정 및 경제 정책 외에도, 캠프는 의회가 부분 출산 낙태 금지 법안을 고려할 때 낙태에 반대하는 입장을 옹호했다. 그는 또한 심혈관 검진, 보조 생활, 장애 수당, 그리고 2007년 인공 관절 치환 프로그램과 같은 문제에서 은퇴한 NFL 참전 용사들을 지지했다. 그는 이민법 개혁을 지지했다. 1990년대 후반, 캠프는 또한 아프리카 대륙이 독재주의 및 국가주의적 정부 정책을 버린다면 큰 경제 성장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아프리카의 자유 시장 개혁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1997년, 뉴트 깅리치가 하원 윤리 문제에 휘말렸을 때, 캠프는 공화당 지도자를 구하기 위해 돌과 깅리치 사이의 중개인 역할을 했다. 이후 2002년, 트렌트 로트가 스트롬 서몬드에 대해 날카로운 발언을 했을 때, 캠프는 불쾌감을 느꼈고, 그가 "모든 형태의 인종 차별을 거부하라"고 격려했다고 말하며 로트의 사과를 지지했다. 캠프는 2005년, 중앙정보국 정보 유출과 관련된 위증 및 사법 방해 혐의로 기소된 스쿠터 리비의 변호 자금을 모으겠다고 약속한 저명한 지도자들 중 한 명이었다.
2004년 6월, 캠프는 버논 로빈슨이 "팻 뷰캐넌 공화주의자"로 출마하기로 결정한 것을 언급하며, 로빈슨의 이민법에 대한 견해 때문에 그에 대한 의회 지지를 철회했다.
2006년, 캠프는 2004년 부통령 후보였던 존 에드워즈와 함께 미국 외교 협회 러시아 태스크포스를 공동 의장으로 이끌었으며, "러시아의 잘못된 방향: 미국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이라는 문서를 발표했다. 태스크포스 역할을 마친 후, 두 사람은 다양한 포럼에서 미국 빈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옹호했다.

2008년 1월 6일, 캠프는 뉴햄프셔 예비 선거 직전 2008년 공화당 대통령 예비 선거에서 존 매케인을 지지했는데, 이는 보수 공화당 감세론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매케인이 공식 후보 지명에 가까워질수록 언론은 매케인을 캠프와 점점 더 연관시켰다. 캠프는 매케인을 대신하여 숀 해니티, 러시 림보, 로라 잉그러햄 및 다른 보수 토크쇼 진행자들에게 공개 서한을 작성하여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했다. 또한 캠프와 필 그램은 매케인에게 경제 정책에 대해 조언했다.
그는 신디케이트 신문 칼럼니스트였다. 2008년 2월, 캠프는 하원에서 실패한 전자 감시 법안을 옹호하는 "민주주의 수호"라는 단체와 연관되어 있었다. 이 단체의 텔레비전 광고는 너무나 큰 논란을 일으켜 척 슈머와 도나 브라질을 포함한 일부 고문들이 사임했다. 그는 공산주의 희생자 기념 재단 자문 위원회 위원이자 에이브러햄 링컨 탄생 200주년 위원회 내각의 공동 의장을 지냈다. 그는 프로 풋볼 명예의 전당 수비 백 로니 로트의 이름을 딴 로트 트로피의 이사회 회원이었다. 이 트로피는 매년 대학 미식축구 최고의 수비 IMPACT 선수에게 수여된다.
7. 질병 및 사망

2009년 1월 7일, 캠프의 사무실은 그가 암에 걸렸다고 발표했다. 암의 종류와 예상되는 치료법은 발표되지 않았다. 그의 의학적 진단과 예후는 공개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사망할 때까지 워싱턴에 기반을 둔 캠프 파트너스 컨설팅 회사의 회장직을 유지했으며 자선 및 정치 활동에 계속 참여했다.
2009년 5월 2일, 캠프는 메릴랜드주 베데스다의 자택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73세였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인종 문제에 대한 캠프의 공로를 칭찬하며, 캠프가 인종과 계급을 둘러싼 분열이 국가의 공통 목표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고 덧붙였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캠프가 "레이건 혁명에 대한 중요한 공헌과 그의 길고 빛나는 공직 경력 동안 보수적 원칙에 대한 확고한 헌신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캠프가 사망한 암의 종류는 악성 흑색종으로 밝혀졌다.
8. 유산 및 평가
캠프의 유산에는 1980년대의 캠프-로스 감세, 일명 두 가지 "레이건 감세" 중 첫 번째가 포함된다. 이는 레이거노믹스로 알려진 공급주의 경제학의 토대가 되었다. 많은 공화당원들은 감세가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적자를 줄일 수 있다는 래퍼 곡선의 견해를 지지해왔다. 조지 H. W. 부시는 이러한 철학을 부두 경제학이라고 불렀지만, 조지 W. 부시와 그의 재무장관 존 W. 스노우는 이를 신봉했다. 캠프는 또한 조지 월리스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과 함께 패배에도 불구하고 대선 방향을 바꿔 역사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기억된다.
21세기 초에도 캠프는 스티브 포브스와 함께 공급주의 감세의 구현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정치인으로, 그리고 정치적 아이디어 시장에서 계속해서 그 자리를 지키는 데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정치인으로 로널드 레이건과 함께 여겨졌다. 그는 경제적 보수주의의 등대이자 도시 의제를 위한 영웅으로 묘사되어 왔다. 오늘날에도 그는 자유 시장과 낮은 세금이 정부 관료제보다 더 잘 작동한다고 믿는 재정적 보수주의자들에게 영웅으로 묘사되고 있다. 캠프는 사회적으로는 보수적이지만 보호무역주의적 재정 및 무역 정책을 피하는 진보적 보수주의자들의 리더로 간주되었다.
8.1. 주요 업적 및 기여

캠프는 로스 외에도 수많은 정치적 동맹들을 가지고 있었다. 때로는 뉴트 깅리치와 트렌트 로트와 함께 규제 완화와 감세에 협력했으며, 존 매케인과 필 그램과는 감세와 지출 억제에 대해 협력했다. 조지프 리버먼과는 입법 활동을 함께하고 선거 운동을 도왔으며, 제임스 핑커턴과는 빈곤 퇴치를 위해 노력했다. 피트 뒤퐁은 진보적 보수주의 동맹이었다. 의원직에서 은퇴하고 내각에서 봉사한 후에도 캠프는 깅리치, 로트, 빈 웨버, 코니 맥 3세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캠프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탄생일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연방 위원회 위원이었다. 진보적 유권자로서 그는 벤저민 훅스, 앤드루 영, 코레타 스콧 킹과 같은 시민권 지도자들과 글렌 C. 로리, 로버트 L. 우드슨과 같은 보수적인 흑인 지식인들을 지지자와 친구로 두었다. 그는 윌리엄 H. 그레이 3세, 찰스 B. 랜젤, 로버트 가르시아와 같은 민주당 친구들을 자랑으로 여겼다. 켄 블랙웰은 캠프 밑에서 차관보를 지냈다. 레이건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캠프가 감세를 시행할 수 있었을 때, 주요 미국 상원 감세 지지자 중 한 명은 전 농구 스타인 민주당원 빌 브래들리였다.
몇몇 미식축구 선수들이 캠프를 따라 의회에 진출했는데, 여기에는 스티브 라젠트, J. C. 와츠, 히스 슐러가 포함된다.
폴 라이언 하원의원은 캠프를 멘토로 꼽았으며, 2012년 공화당 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그를 언급했다.
2014년 잭 캠프 재단 포럼의 "성장! 성장! 성장!" 세션 개회식에서 프레드 반즈는 "성장은 분명히 잭 캠프의 핵심이었다"고 말했다. 캠프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믿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시대의 많은 정치인들이 공유했던 맹점이었으며, 1991년 유엔 인구 기금 보고서를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게 만들었다.
8.2. 비판 및 논란
캠프는 1996년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을 때 캘리포니아 주민 발의 187호에 대한 오랜 반대 입장에도 불구하고, 불법 이민자 자녀의 공립학교 퇴학 조치를 지지해야 하는 타협을 했다. 또한 캘리포니아주의 적극적 우대 조치 프로그램 폐지 반대 목소리도 낮춰야 했다. 이러한 타협으로 인해 그는 일부로부터 "사기꾼"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앨 고어와의 부통령 토론에서 그는 내용적인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그는 국무부 장관 시절 일등석 기업 제트기를 과도하게 사용했다는 지적을 받았으며, 무릎 부상으로 인한 잔여 효과를 이유로 정부 경비로 일등석을 타야 했다고 해명했다.
공직 은퇴 후 사업 활동 중에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는 유엔 석유-식량 교환 프로그램 스캔들에 연루된 인물과 관계를 맺었다는 의혹으로 FBI의 조사를 받았으며, 이후 자신이 설립한 프리덤 웍스 공동 의장직에서 사임했다. 또한, 그는 알카에다의 비밀 메시지를 탐지한다고 사기적으로 주장한 소프트웨어 개발 벤처인 Blxware와 관련하여 연방 정부를 속여 2000.00 만 USD를 가로챈 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했다.
초기 경력에서 그는 축구를 "유럽 사회주의 스포츠"라고 비하하는 발언을 하여 비난을 받았으며, 이는 그의 경력 내내 따라다니는 논란 중 하나가 되었다.
캠프가 암으로 사망한 지 하루 만에 알렌 스펙터 상원의원은 연방 정부가 암 연구에 대한 자금 지원을 더 잘했다면 캠프가 여전히 살아있었을 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8.3. 유산
캠프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지미 캠프는 아버지의 유산을 잇기 위해 잭 캠프 재단을 설립했다. 501(c)(3) 자선 단체인 이 재단의 사명은 "미국적 아이디어를 옹호하는 탁월한 지도자를 개발하고, 참여시키며, 인정하는 것"이다. 워싱턴 D.C.에 위치한 이 재단은 성장, 자유, 민주주의, 희망이라는 미국적 아이디어의 보편적 가치를 진전시키는 데 전념하고 있다. 옥시덴탈 칼리지의 미식축구 경기장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9. 저서
의원으로서 중요한 법안을 저술한 것 외에도 캠프는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거나 공동 저술했다.
- 『미국적 아이디어: 성장의 한계 종식』(An American Idea: Ending Limits to Growth), (워싱턴 D.C.: 아메리칸 스터디 센터, 1984, ISBN 없음)
- 『세금 정책과 경제: 마이클 해링턴과 잭 캠프 하원의원의 논쟁, 1979년 4월 25일』(Tax policy and the economy : a debate between Michael Harrington and Representative Jack Kemp, April 25, 1979), (뉴욕주 뉴욕: 민주사회주의 연구소, 1979, ISBN 없음)
- 『미국의 르네상스: 1980년대를 위한 전략』(An American Renaissance: Strategy for the 1980s), (하퍼 앤 로우, 1979, ISBN 0-06-012283-8)
- 『국세청 대 국민』(The IRS v. The People), (헤리티지 북스, 2005, ISBN 0-891-95077-X). 켄 블랙웰이 저술하고 캠프가 편집.
- 『국민을 믿는다: 경제를 자유롭게 하고 더 나은 미국을 만들 돌-캠프 계획』(Trusting the People : The Dole-Kemp Plan to Free the Economy and Create a Better America), (하퍼콜린스, 1996, ISBN 0-694-51804-2 오디오북). 밥 돌과 공동 저술, 크리스틴 토드 휘트먼 내레이션.
- 『함께 도전에 맞설 수 있다: 마약과의 전쟁에서 승리』(Together We Can Meet the Challenge : Winning the Fight Against Drugs), (미국 주택도시개발부, 1994, ISBN 9780788102721)
- 『프로 스포츠: 정부가 개입해야 하는가?』(Pro Sports: Should the Government Intervene?), (미국 기업 연구소, 1977, ISBN 9780844720975)
- 『숫자로 본 미국: 미국에 남은 것, 옳은 것, 틀린 것』(U.S. By the Numbers: What's Left, Right & Wrong with America), (캐피탈 북스, 2000, ISBN 9781892123145). 레이먼드 J. 키팅 및 토머스 N. 에드먼즈와 공동 저술.
- 『우리 공동체, 우리 집: 미국 도시와 주에서의 주택 및 주택 소유로 가는 길』(Our Communities, Our Homes: Pathways to Housing and Homeownership in America's Cities and States), (주택 연구 공동 센터, 2007, ISBN 9780976148111). 헨리 G. 시스네로스, 켄트 W. 콜튼, 니콜라스 P. 레치나스와 공동 저술.
캠프는 또한 여러 책의 서문을 작성했다.
- 『레이거노믹스: 행동하는 공급주의 경제학』(Reaganomics: Supply Side Economics in Action) (브루스 R. 바틀릿 저, 아서 래퍼 공저), (웨스트포트, 코네티컷: 알링턴 하우스, 1981, ISBN 0-87000-505-7)
- 『라울 발렌베리: 구조의 천사』(Raoul Wallenberg: Angel of Rescue) (하비 로젠펠드 저), (프로메테우스 북스, 1982, ISBN 0879751770)
- 『올해 최고의 사설 만화: 1986년판』(Best Editorial Cartoons of the Year: 1986 Edition) (찰스 브룩스 편집), (펠리컨 출판사, 1986, ISBN 9780882896052)
- 『리더십은 상식이다』(Leadership Is Common Sense) (허먼 케인 저), (태피스트리 프레스, 2001, ISBN 9781930819023)
- 『온 세상이 지켜본다: 경제의 탈탄소화와 세계 구하기』(Whole World's Watching: Decarbonizing the Economy and Saving the World) (마틴 터너 및 브라이언 오코넬 저), (와일리, 2001, ISBN 9780471499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