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쿠웨이트는 서아시아, 페르시아만 북서쪽 끝에 위치한 입헌 군주국이다. 북쪽과 서쪽으로는 이라크, 남쪽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국경을 접하며, 동쪽으로는 페르시아만을 마주하고 있다. 면적은 약 1.78 만 km2이며, 인구는 2024년 기준 약 482만 명으로, 이 중 쿠웨이트 시민은 약 153만 명이고 나머지는 100여 개국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이다. 수도는 쿠웨이트시티로, 대부분의 인구가 이 도시와 주변 지역에 거주한다.
쿠웨이트의 역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딜문 문명, 그리스 식민지 시대, 초기 이슬람 시대를 거쳤다. 18세기 초 사바 가문이 이 지역에 정착하여 통치를 시작했으며, 1899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1938년 석유가 발견된 이후 경제적으로 급성장하였고, 196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현대 국가로 발전했다. 1980년대에는 이란-이라크 전쟁의 영향과 주식 시장 붕괴로 경제 위기를 겪었으며, 1990년 이라크의 침공으로 걸프 전쟁이 발발했으나 이듬해 다국적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쿠웨이트는 아미르를 국가 원수로 하는 입헌 군주국으로, 사바 가문이 통치한다. 정치 체제는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의 삼권 분립을 기반으로 하며, 국민의회가 입법 기능을 수행한다. 석유 중심의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세계 6위의 석유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다. 쿠웨이트 정부는 '쿠웨이트 비전 2035'를 통해 경제 다각화를 추진하고 있으나, 여전히 석유 의존도가 높다.
사회적으로 쿠웨이트는 걸프 지역에서 비교적 개방적인 편이며, 여성의 사회 참여가 활발하다. 교육과 보건 시스템은 국가 재정 지원으로 잘 발달되어 있으나, 외국인 노동자 및 비 시민(비둔)의 인권 문제는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고 있다. 문화적으로 쿠웨이트는 '걸프의 할리우드'로 불릴 만큼 연극, 드라마, 음악 등 대중문화가 발달하여 주변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2. 어원
'쿠웨이트'라는 국명은 아랍어로 '물가에 지어진 작은 요새'를 의미하는 단어 '쿠트'(كوت쿠트아랍어)에서 파생된 지소형 명사이다. 쿠웨이트는 17세기 초 현재의 쿠웨이트시티 지역에 작은 요새가 건설되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공식 국호는 1961년 독립 이후 '쿠웨이트국'(دَوْلَة ٱلْكُوَيْت다울라트 알쿠와이트아랍어)이다.
3. 역사
쿠웨이트 지역의 역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 시기부터 시작되어 다양한 문명의 영향을 받으며 발전해 왔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와 사바 왕조의 등장, 영국의 보호령 시기를 거쳐 1961년 독립을 이루었으며, 석유 발견 이후 급격한 경제 성장을 경험했다. 그러나 이라크의 침공과 걸프 전쟁 등 현대사에서 큰 위기를 겪기도 했다.
3.1. 고대


페르시아만 분지의 빙하기 이후 해수면 상승으로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의 퇴적물이 삼각주를 형성하며 현재 쿠웨이트 영토의 대부분과 해안선이 만들어졌다. 쿠웨이트에서 인류가 거주한 가장 오래된 증거 중 하나는 기원전 8000년경의 중석기 시대 유물이다. 역사적으로 현재 쿠웨이트 영토의 대부분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일부였다.
우바이드 시대(기원전 5500년~3700년경)에 쿠웨이트는 메소포타미아인들과 신석기 시대 동부 아라비아 사람들 간의 교류 중심지였으며, 수비야 지역의 바흐라 1과 H3 유적이 대표적이다. 쿠웨이트의 신석기 시대 주민들은 세계 최초의 해상 무역가 중 하나였으며, H3 유적지에서는 우바이드 시대의 갈대 배 유적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쿠웨이트의 파일라카섬에 정착했으며, 수메르 도시 우르의 상인들이 파일라카에 거주하며 상업 활동을 벌였다. 기원전 4000년부터 2000년까지 쿠웨이트는 딜문 문명의 일부였으며, 알샤다디야, 아카즈섬, 움안나밀섬, 파일라카섬 등이 딜문 문명에 속했다. 파일라카섬은 딜문 문명의 신 엔자크의 땅인 '아가룸'으로 알려졌다. 이후 파일라카섬에는 메소포타미아의 카시트인들이 거주하며 바빌로니아 카시트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 치하에서 쿠웨이트만은 바빌로니아의 통제하에 있었다. 바빌로니아 멸망 후에는 아케메네스 제국(기원전 550년~330년경)의 지배를 받았으며, 파일라카섬에서 아케메네스 시대의 고고학적 증거와 아람어 비문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의 고대 그리스인들이 쿠웨이트만을 식민지화했다. 그리스인들은 쿠웨이트 본토를 '라리사'(Λάρισσα라리사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파일라카섬을 '이카로스'(Ίκαρος이카로스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라 불렀으며, 쿠웨이트만은 '히에로스 콜포스'(성스러운 만)로 명명되었다. 당시 유프라테스강 하구는 쿠웨이트 북부에 위치했으며, 파일라카섬은 유프라테스강 하구에서 15 km 떨어져 있었다.
기원전 127년 쿠웨이트는 파르티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현재 쿠웨이트 지역인 테레돈 주변에 카라케네 왕국이 세워졌다. 카라케네 주화가 아카즈, 움안나밀, 파일라카섬에서 발견되었다. 서기 224년 쿠웨이트는 사산 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당시 '메샨'으로 알려졌다. 아카즈섬은 파르티아-사산 시대 유적지로, 북부에서는 조로아스터교의 침묵의 탑이 발견되었다. 부비얀섬에서도 사산 시대부터 초기 이슬람 시대에 이르는 인류 거주 흔적이 확인되었다.
서기 636년 사산 제국과 라쉬둔 칼리파조 사이에 벌어진 사슬 전투가 쿠웨이트에서 일어났다. 라쉬둔 칼리파조의 승리로 쿠웨이트만 지역에는 초기 이슬람 시대 도시인 카즈마(카지마)가 들어섰다.
3.2. 오스만 제국과 사바 왕조 시기

1700년대 초중반, 쿠웨이트시티는 작은 어촌이었으며, 행정적으로는 바니 칼리드 부족의 현지 셰이크들이 다스리는 셰이크령이었다. 1700년대 중반경, 바니 우트바 부족이 쿠웨이트시티에 정착했다. 바니 칼리드 지도자 바라크 빈 압둘 모흐센이 사망하고 바니 칼리드 토후국이 멸망한 후, 우트바 부족은 연이은 혼인 동맹을 통해 쿠웨이트의 지배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현재의 쿠웨이트를 통치하는 사바 가문은 이 바니 우트바 부족에서 나왔으며, 1756년경부터 사바 가문의 셰이크가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하에서 이 지역의 통치를 맡기 시작했다.
18세기 후반, 쿠웨이트는 해상 항구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고 점차 바그다드, 인도, 페르시아, 무스카트, 그리고 아라비아반도 사이의 물품 수송을 위한 주요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1700년대 후반까지 쿠웨이트는 페르시아만에서 알레포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확립했다. 1775년~1779년 페르시아의 바스라 공성전 당시, 이라크 상인들이 쿠웨이트로 피신하여 쿠웨이트의 조선 및 교역 활동 확장에 부분적으로 기여했다. 그 결과 쿠웨이트의 해상 무역은 호황을 누렸으며, 바그다드, 알레포, 스미르나, 콘스탄티노폴리스와의 인도 교역로가 이 시기에 쿠웨이트로 전환되었다. 동인도 회사는 1792년에 쿠웨이트로 이전했다. 동인도 회사는 쿠웨이트, 인도, 아프리카 동해안 사이의 해상 항로를 확보했다. 1779년 페르시아인들이 바스라에서 철수한 후에도 쿠웨이트는 계속해서 바스라로부터 무역을 유치했다. 바스라의 불안정은 쿠웨이트의 경제적 번영을 촉진했다. 18세기 후반, 쿠웨이트는 오스만 정부의 박해를 피해 도망친 바스라 상인들의 피난처였다.
쿠웨이트는 페르시아만 지역 조선업의 중심지였으며, 그 배들은 인도양 전역에 명성이 높았다. 19세기 쿠웨이트는 말 거래에서 중요해졌으며, 정기적으로 범선을 통해 운송되었다. 19세기 중반에는 쿠웨이트가 매년 평균 800마리의 말을 인도로 수출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3.3. 영국의 보호령 시기


19세기 말, 오스만 제국은 쿠웨이트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으나, 1899년 당시 쿠웨이트의 통치자였던 셰이크 무바라크 알사바흐는 영국의 보호를 받는 조약을 영국령 인도 정부와 체결하여 쿠웨이트를 영국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이 조약은 영국에게 쿠웨이트와의 독점적인 접근권과 무역권을 부여하는 동시에, 북쪽의 오스만 및 독일령 주들이 페르시아만에 항구를 확보하는 것을 막았다. 쿠웨이트 셰흐국은 1961년까지 영국의 보호령으로 남아 있었다. 1913년 영국-오스만 협약 이후, 쿠웨이트는 오스만 제국의 자치 카자(군)이자 사실상 영국의 보호령으로 설립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 제국은 당시 쿠웨이트 통치자였던 살림 알무바라크 알사바흐가 오스만 제국을 지지했기 때문에 쿠웨이트에 무역 봉쇄를 가했다. 영국의 경제 봉쇄는 쿠웨이트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1919년 셰이크 살림 알무바라크 알사바흐는 쿠웨이트 남부에 상업 도시를 건설하려 했으나, 이는 나지드와의 외교적 위기를 초래했고 영국이 개입하여 셰이크 살림을 만류했다. 1920년 이흐완이 쿠웨이트 남부에 거점을 건설하려 하자 함드 전투가 발발했다. 함드 전투에는 2,000명의 이흐완 전사와 100명의 쿠웨이트 기병, 200명의 쿠웨이트 보병이 참여했다. 전투는 6일간 지속되었고 양측 모두 막대한 사상자를 냈으며, 이흐완 군대의 승리로 끝나 자흐라 전투로 이어졌다. 자흐라 전투는 함드 전투의 결과로 발생했다. 파이살 알다위시가 이끄는 3,000~4,000명의 이흐완 군대가 알자흐라의 붉은 요새를 공격했고, 1,500명이 이를 방어했다. 요새는 포위되었고 쿠웨이트의 상황은 위태로웠다. 이흐완의 공격은 잠시 격퇴되었고, 살림과 알다위시 사이에 협상이 시작되었다. 알다위시는 쿠웨이트 군이 항복하지 않으면 다시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현지 상인 계층은 살림에게 영국군에 도움을 요청하도록 설득했고, 영국군은 비행기와 군함 3척을 동원하여 공격을 종식시켰다. 자흐라 전투 이후, 이븐 사우드의 전사들인 이흐완은 쿠웨이트에게 모든 시아파를 추방하고, 이흐완 교리를 채택하며, 터키인을 "이단자"로 규정하고, 흡연, 문카르(금기시되는 행위), 매춘을 폐지하고, 미국 선교 병원을 파괴하라는 다섯 가지 규칙을 따르도록 요구했다.

1919년~1920년의 쿠웨이트-나지드 전쟁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발발했다. 전쟁은 나지드의 이븐 사우드가 쿠웨이트를 합병하려 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쿠웨이트와 나지드 간의 첨예한 갈등은 수백 명의 쿠웨이트인 사망으로 이어졌다. 전쟁은 1919년~1920년 내내 산발적인 국경 충돌을 야기했다. 1919년~1920년 쿠웨이트-나지드 전쟁 이후, 이븐 사우드는 1923년부터 1937년까지 쿠웨이트에 대한 무역 봉쇄를 단행했다. 사우디의 경제적, 군사적 공격 목표는 쿠웨이트 영토를 최대한 많이 합병하는 것이었다. 1922년 우까이르 의정서 회의에서 쿠웨이트와 나지드의 국경이 설정되었으나, 영국의 개입으로 쿠웨이트는 우까이르 회의에 대표를 보내지 못했다. 우까이르 회의 이후에도 쿠웨이트는 사우디의 경제 봉쇄와 간헐적인 사우디의 습격을 받았다.
무역 봉쇄와 세계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쿠웨이트는 지역 경제 중요성이 크게 하락했다. 1930년대 초, 천연 진주 무역이 주요 산업이자 외화 수입원이었던 쿠웨이트는 심각한 경제 위기에 처했다. 이는 당시 일본의 미키모토 고키치가 진주 인공 양식 기술 개발에 성공하여 일본산 양식 진주가 세계 보석 시장에 점차 침투하면서 쿠웨이트와 바레인 연안에서 채취되는 천연 진주의 수요를 잠식했기 때문이다. 쿠웨이트의 진주 산업은 세계 경제 대공황의 결과로 붕괴되었다. 전성기 쿠웨이트의 진주 산업은 세계 고급 시장을 주도하며 정기적으로 750~800척의 배를 보내 유럽 엘리트들의 진주 수요를 충족시켰다. 경제 불황기에는 진주와 같은 사치품 수요가 거의 없었다. 일본의 양식 진주 발명 또한 쿠웨이트 진주 산업 붕괴에 기여했다.
1938년 2월 22일 부르간 유전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되었다.
3.4. 독립과 국가 건설 (1946년 ~ 1980년)

1946년과 1982년 사이 쿠웨이트는 석유와 자유로운 문화적 분위기에 힘입어 번영기를 누렸으며, 이 시기를 "쿠웨이트의 황금기"라고 부른다. 1946년 처음으로 원유가 수출되었다. 1950년 대규모 공공 사업 프로그램이 시작되어 쿠웨이트 국민들이 호화로운 생활 수준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1952년까지 쿠웨이트는 페르시아만 지역에서 가장 큰 석유 수출국이 되었다. 이러한 대규모 성장은 특히 팔레스타인, 이란, 인도, 이집트 등지에서 많은 외국인 노동자를 유치했으며, 후자는 아랍 냉전의 맥락에서 특히 정치적이었다. 1958년에는 알아라비 잡지가 창간되었다. 많은 외국 작가들이 중동의 다른 지역보다 더 큰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쿠웨이트로 이주했다. 쿠웨이트 언론은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언론 중 하나로 묘사되었다. 쿠웨이트는 중동 문학 르네상스의 선구자였다.
1961년 6월, 영국 보호령이 끝나면서 쿠웨이트는 독립했고 셰이크 압둘라 알살림 알사바흐가 쿠웨이트의 아미르가 되었다. 그러나 쿠웨이트의 국경일은 셰이크 압둘라의 대관식 기념일인 2월 25일에 기념된다(원래는 독립일인 6월 19일에 기념되었으나 여름 더위에 대한 우려로 정부가 변경했다). 당시 쿠웨이트는 이 지역에서 가장 발전된 국가로 여겨졌다. 쿠웨이트는 중동에서 석유 수출 외 수입원 다변화의 선구자였다. 쿠웨이트 투자청은 세계 최초의 국부펀드이다. 쿠웨이트 사회는 1960년대와 1970년대 내내 자유롭고 비전통적인 태도를 수용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쿠웨이트 여성들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히잡을 착용하지 않았다.
1961년 쿠웨이트가 공식적으로 독립했지만, 이라크는 처음에 쿠웨이트가 이라크의 일부라고 주장하며 국가의 독립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이라크는 영국의 군사력 과시와 쿠웨이트 독립에 대한 아랍 연맹의 지지 이후 잠시 물러섰다. 1961년 7월 단기적인 밴티지 작전 위기가 발생했는데, 이라크 정부가 쿠웨이트 침공을 위협했고, 아랍 연맹이 쿠웨이트에 대한 잠재적인 이라크 침공에 맞서 국제 아랍군을 창설할 계획을 세운 후 침공은 마침내 저지되었다. 밴티지 작전의 결과로 아랍 연맹이 쿠웨이트의 국경 안보를 맡았고 영국은 10월 19일까지 군대를 철수했다. 이라크 총리 압둘카림 카심은 1963년 쿠데타로 사망했지만, 이라크가 쿠웨이트의 독립을 인정하고 군사적 위협이 줄어든 것으로 인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상황을 계속 감시하며 1971년까지 쿠웨이트를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켰다. 당시 쿠웨이트에 대한 이라크의 군사 행동은 없었는데, 이는 이라크 내부의 정치 및 군사 상황이 계속 불안정했기 때문이었다. 1963년 이라크와 쿠웨이트 사이에 우호 조약이 체결되어 이라크는 1932년 쿠웨이트 국경을 인정했다. 새로 제정된 쿠웨이트 헌법에 따라 쿠웨이트는 1963년 첫 의회 선거를 실시했다.
쿠웨이트 대학교는 1966년에 설립되었다. 쿠웨이트의 연극 산업은 이 지역 전역에 잘 알려지게 되었다. 1967년 6일 전쟁 이후 쿠웨이트는 다른 아랍어권 국가들과 함께 하르툼 결의의 세 가지 '아니오'(이스라エル과의 평화 없음, 이스라エル 불인정, 이스라エル과의 협상 없음)에 투표했다. 1970년대 이후 쿠웨이트는 모든 아랍 국가 중에서 인간 개발 지수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라크 시인 아흐메드 마타르는 1970년대에 이라크를 떠나 쿠웨이트의 보다 자유로운 환경으로 피신했다. 2024년 세계 평화 지수에 따르면 쿠웨이트는 세계에서 25번째로 평화로운 국가이다.
1973년 3월 20일 쿠웨이트-이라크 사미타 국경 분쟁이 발생하여 이라크군 부대가 쿠웨이트 국경 근처 엘사미타를 점령하면서 국제적 위기를 불러일켰다. 1974년 2월 6일,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이 쿠웨이트 주재 일본 대사관을 점거하여 대사와 다른 10명을 인질로 잡았다. 무장세력의 동기는 라주 사건으로 알려진 싱가포르 페리호에서 인질을 잡고 있던 일본 적군파 조직원과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인질들은 석방되었고 게릴라들은 아덴으로 날아갈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이는 셰이크 사바흐 알살림 알사바흐가 이끄는 알사바흐 왕가가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에 자금을 지원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쿠웨이트에서 공격한 첫 사례였다. 쿠웨이트는 과거 팔레스타인 항공기 납치의 단골 종착지였으며 스스로 안전하다고 여겼었다. 쿠웨이트 국제공항은 1979년 알하니 건설과 발라스트 네담의 합작 투자로 개장했다.
3.5. 전쟁과 위기 (1981년 ~ 1991년)


알사바흐 가문은 1980년대 내내 이슬람주의를 강력히 옹호했다. 당시 알사바흐 가문의 연속성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은 1976년 의회 정회에 항의하던 국내 민주주의자들로부터 나왔다. 알사바흐 가문은 쿠웨이트 군주제에 대한 충성을 포함하는 위계적 질서의 미덕을 설교하는 이슬람주의자들에게 매력을 느꼈다. 1981년 쿠웨이트 정부는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유리하도록 선거구를 게리맨더링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정부의 주요 동맹자였고, 따라서 이슬람주의자들은 정부 부처와 같은 국가 기관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란-이라크 전쟁 동안 쿠웨이트는 이라크를 열렬히 지원했다. 그 결과, 1983년 폭탄 테러, 1985년 5월 자베르 국왕 암살 시도, 1985년 쿠웨이트시티 폭탄 테러, 여러 차례의 쿠웨이트 항공기 납치 등 이란을 지지하는 다양한 테러 공격이 쿠웨이트 전역에서 발생했다. 쿠웨이트 경제와 과학 연구 부문은 친이란 테러 공격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동시에 쿠웨이트는 수크 알마나크 주식 시장 붕괴와 유가 하락 이후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난 후, 쿠웨이트는 이라크의 650.00 억 USD 부채 탕감 요청을 거부했다. 쿠웨이트가 석유 생산량을 40% 늘린 후 양국 간 경제 경쟁이 이어졌다. 1990년 7월, 이라크가 OPEC에 쿠웨이트가 국경 근처 유전인 루마일라 유전에서 경사 시추를 통해 석유를 훔치고 있다고 불만을 제기하면서 양국 간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1990년 8월, 이라크군은 예고 없이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합병했다. 일련의 실패한 외교 협상 끝에 미국은 걸프 전쟁으로 알려진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몰아내기 위한 연합군을 이끌었다. 1991년 2월 26일, 사막 폭풍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진행된 단계에서 연합군은 이라크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후퇴하면서 이라크군은 유전에 불을 지르는 초토화 정책을 펼쳤다. 이라크 점령 기간 동안 쿠웨이트에서 약 1,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또한, 이라크 점령 기간 동안 600명이 실종되었으며, 이 중 약 375명의 유해가 이라크의 집단 매장지에서 발견되었다. 쿠웨이트는 2월 26일을 해방 기념일로 기념한다.
3.6. 현대 (1992년 ~ 현재)


1990년대 초, 쿠웨이트는 약 4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을 추방했다. 쿠웨이트의 정책은 PLO가 사담 후세인과 동조한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는 집단 처벌의 한 형태였다. 쿠웨이트는 걸프 전쟁 이후 수천 명의 이라크인과 예멘인도 추방했다. 또한, 수십만 명의 무국적 베둔인들이 1990년대 초중반에 쿠웨이트에서 추방되었다. 1995년 영국 하원에서는 알사바흐 왕가가 15만 명의 무국적 베둔인을 이라크 국경 근처 쿠웨이트 사막의 난민 캠프로 추방했으며, 이들은 최소한의 물, 불충분한 식량, 기본적인 피난처도 없이 생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많은 무국적 베둔인들이 이라크로 도피했고, 그곳에서 오늘날까지도 무국적자로 남아 있다.
2003년 3월, 쿠웨이트는 미국 주도의 이라크 침공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 2005년 여성들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얻었다. 2006년 1월 자베르 국왕이 사망하자 셰이크 사드 알사바흐가 그를 계승했지만, 건강 악화로 9일 만에 물러났다. 그 결과 셰이크 사바흐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흐가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 이후로 쿠웨이트는 정부와 의회 간의 만성적인 정치적 교착 상태로 인해 여러 차례의 내각 개편과 해산이 있었다. 이는 쿠웨이트의 투자와 경제 개혁을 크게 방해하여 국가 경제가 석유에 훨씬 더 의존하게 만들었다. 정치적 불안정에도 불구하고 쿠웨이트는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아랍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간 개발 지수 순위를 기록했다. 중국은 2012년 3월에 부여된 3.00 억 USD에 더해 쿠웨이트 투자청에 추가로 7.00 억 USD의 쿼터를 부여했다. 이 쿼터는 중국이 외국 투자 기관에 부여한 것 중 가장 높은 것이다.
2014년 3월, 당시 미국 재무부 테러·금융정보 담당 차관이었던 데이비드 S. 코언은 쿠웨이트가 테러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쿠웨이트가 테러 자금을 지원한다는 비난은 정보 보고서, 서방 정부 관리, 학술 연구, 저명한 언론인 등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한 출처에서 제기되었다. 2014년과 2015년, 쿠웨이트는 특히 ISIS와 알카에다에 대한 세계 최대의 테러 자금 지원처로 자주 묘사되었다.
2015년 6월 26일, 쿠웨이트의 시아파 이슬람 사원에서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가 이 공격의 책임을 주장했다. 27명이 사망하고 227명이 부상당했다. 이는 쿠웨이트 역사상 가장 큰 테러 공격이었다. 그 여파로 쿠웨이트 정부가 테러 공격에 대한 태만과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는 소송이 제기되었다.
2010년대 중후반 유가 하락으로 인해 쿠웨이트는 역사상 최악의 경제 위기 중 하나에 직면했다. 사바흐 알아흐마드 해상 도시는 2016년 중반에 개장했다. 동시에 쿠웨이트는 중국과의 경제 관계에 상당한 투자를 했다. 중국은 2016년부터 쿠웨이트의 최대 교역 상대국이다. 일대일로 구상 하에 쿠웨이트와 중국은 현재 쿠웨이트 북부에 건설 중인 알무틀라를 포함한 다양한 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셰이크 자베르 알아흐마드 알사바흐 해상교량은 실크 시티 프로젝트의 1단계 사업의 일부이다. 이 해상교량은 쿠웨이트 비전 2035의 일환으로 2019년 5월에 개통되었으며, 쿠웨이트시티와 쿠웨이트 북부를 연결한다.
코로나19 범유행은 쿠웨이트의 경제 위기를 더욱 악화시켰다. 쿠웨이트 경제는 2020년에 460.00 억 USD의 재정 적자에 직면했다. 이는 1995년 이후 쿠웨이트의 첫 재정 적자였다. 2020년 9월, 쿠웨이트의 왕세자 셰이크 나와프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흐가 91세의 나이로 사망한 셰이크 사바흐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흐 국왕의 뒤를 이어 제16대 쿠웨이트 국왕이 되었다. 2020년 10월, 셰이크 미셸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흐가 왕세자로 임명되었다. 2023년 12월, 쿠웨이트 국왕 셰이크 나와프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흐가 사망하고 미셸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흐가 그 뒤를 이었다.
쿠웨이트는 현재 중동 전체 지역에서 미군 주둔 규모가 가장 크다. 쿠웨이트에는 14,000명 이상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캠프 아리프잔은 쿠웨이트에서 가장 큰 미군 기지이다. 미국은 쿠웨이트의 기지를 중동 작전을 위한 집결지, 훈련장, 병참 지원 기지로 사용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쿠웨이트의 인프라 프로젝트 시장은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정치적 교착 상태로 인해 정기적으로 부진했다. 쿠웨이트는 현재 지역에서 경제 다각화 비중이 가장 낮고 석유 의존도가 가장 높은 국가이다. 세계 경제 포럼에 따르면 쿠웨이트는 GCC 지역에서 인프라 품질이 가장 취약하다. 2024년 3월부터 미셸 국왕은 수천 명의 시민권(칙령에 의해)을 박탈하고 있다.
4. 지리
쿠웨이트는 아라비아반도 북동쪽, 페르시아만의 정점에 위치하며, 세계에서 면적이 가장 작은 나라 중 하나이다. 쿠웨이트는 북위 28도에서 31도, 동경 46도에서 49도 사이에 위치한다. 쿠웨이트는 대체로 저지대이며, 가장 높은 지점은 해발 306 m인 무틀라 능선이다. 쿠웨이트에는 10개의 섬이 있으며, 그중 가장 큰 섬은 면적이 860 km2인 부비얀섬으로, 2380 m 길이의 다리로 본토와 연결되어 있다. 쿠웨이트 국토 면적의 0.6%만이 경작 가능하며, 499 km에 달하는 해안선을 따라 희소한 초목이 발견된다. 쿠웨이트시티는 자연적인 심해항인 쿠웨이트만에 위치한다.
쿠웨이트의 부르간 유전은 약 700억 배럴(110.00 억 m3)의 확인된 석유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다. 1991년 쿠웨이트 유전 화재 당시 500개 이상의 유정이 불타면서 총면적 약 35.7 km2에 달하는 석유 호수가 형성되었다. 석유와 매연 축적으로 인한 토양 오염으로 쿠웨이트 동부 및 남동부 지역은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다. 모래와 석유 잔류물은 쿠웨이트 사막의 넓은 부분을 반 아스팔트 표면으로 만들었다. 걸프 전쟁 중 발생한 유류 유출 또한 쿠웨이트의 해양 자원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4.1. 기후
쿠웨이트는 이라크와 이란에 근접해 있어 겨울철 기온이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바레인 등 페르시아만 연안의 다른 국가들보다 낮고 습도도 덜하다. 3월의 봄은 따뜻하며 가끔 뇌우가 발생한다. 북서풍은 겨울에는 차갑고 여름에는 뜨겁다. 남동풍은 7월에서 10월 사이에 불며 습하다. 봄과 초여름에는 덥고 건조한 남풍이 분다. 6월과 7월에 흔히 부는 북서풍인 샤말(Shamal)은 극심한 모래폭풍을 일으킨다. 쿠웨이트의 여름은 지구상에서 가장 더운 곳 중 하나이다. 2016년 7월 21일 미트리바에서 기록된 최고 기온은 54 °C로, 이는 아시아에서 기록된 최고 기온이다.
쿠웨이트는 다른 대부분의 국가에 비해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많다. 최근 몇 년간 쿠웨이트는 1인당 CO2 배출량 측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 국가로 꾸준히 평가받고 있다.
4.2. 자연보호구역과 생물 다양성
현재 쿠웨이트에는 국제 자연 보전 연맹(IUCN)이 인정한 5개의 보호 지역이 있다. 쿠웨이트가 람사르 협약의 169번째 서명국이 됨에 따라, 부비얀섬의 무바라크 알카비르 보호구역이 국내 최초의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로 지정되었다. 면적 5.09 만 ha의 이 보호구역은 작은 석호와 얕은 염습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 개의 주요 철새 이동 경로에서 철새들의 중요한 중간 기착지이다. 이 보호구역은 세계에서 가장 큰 게물떼새 번식 군서지이다.
현재 쿠웨이트에서는 444종의 조류가 기록되었으며, 그중 18종이 국내에서 번식한다. 아르파즈는 쿠웨이트의 국화이다. 쿠웨이트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하구 근처 페르시아만 정점에 위치하여 여러 주요 철새 이동 경로의 교차로에 있으며, 매년 200만에서 300만 마리의 새가 통과한다. 쿠웨이트의 해양 및 연안 생태계는 국가 생물 다양성 유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쿠웨이트 북부와 자흐라의 습지는 통과 철새들의 피난처로서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쿠웨이트에는 28종의 포유류가 서식한다. 저보아, 사막 토끼, 고슴도치와 같은 동물들이 사막에서 흔히 발견된다. 늑대, 카라칼, 자칼과 같은 대형 육식동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멸종 위기에 처한 포유류 종으로는 붉은여우와 들고양이가 있다. 파충류는 40종이 기록되었으나 쿠웨이트 고유종은 없다. 쿠웨이트, 오만, 예멘은 멸종 위기에 처한 매끈이빨흑기흉상어가 서식하는 것으로 확인된 유일한 지역이다.
쿠웨이트의 섬들은 4종의 제비갈매기와 소코트라가마우지의 중요한 번식지이다. 쿠바르섬은 흰뺨제비갈매기의 번식 군서지를 지원하기 때문에 국제조류보호협회(BirdLife International)에 의해 중요조류지역(IBA)으로 인정받았다.
4.3. 수자원과 담수화
쿠웨이트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일부이다. 여러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의 합류점이 쿠웨이트-이라크 국경의 일부를 형성한다. 부비얀섬은 샤트알아랍강 삼각주의 일부이다. 쿠웨이트는 부분적으로 메소포타미아 습지의 일부이다. 쿠웨이트에는 현재 영구적인 강이 없지만, 가장 주목할 만한 와디인 와디 알바틴이 쿠웨이트와 이라크 사이의 국경을 형성하는 등 여러 와디가 있다. 쿠웨이트에는 또한 부비얀섬 주변에 여러 강과 유사한 해협이 있으며, 특히 카우르 압드 알라는 현재 하구이지만 한때 샤트알아랍강이 페르시아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점이었다. 카우르 압드 알라는 이라크 남부와 쿠웨이트 북부에 위치하며, 이라크-쿠웨이트 국경이 하구의 하부를 나누지만, 움카스르 항구에 인접한 하구는 완전히 이라크 영토가 된다. 이는 부비얀섬의 북동쪽 해안선과 와르바섬의 북쪽 해안선을 형성한다.
쿠웨이트는 식수 및 생활용수의 주요 공급원으로 해수 담수화에 의존하고 있다. 현재 6개 이상의 담수화 플랜트가 가동 중이다. 쿠웨이트는 세계 최초로 대규모 생활용수 공급을 위해 담수화를 사용한 국가이다. 쿠웨이트의 담수화 역사는 1951년 첫 번째 증류 플랜트가 가동되면서 시작되었다.
1965년 쿠웨이트 정부는 스웨덴 엔지니어링 회사인 VBB(현 Sweco)에 쿠웨이트시티의 현대적인 상수도 시스템 개발 및 실행 계획을 위탁했다. 이 회사는 수석 건축가 수네 린드스트룀이 설계한 "버섯 타워"로 불리는 5개의 급수탑 그룹(총 31개 타워)을 건설했다. 여섯 번째 부지에 대해 쿠웨이트 국왕 셰이크 자베르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흐는 더 멋진 디자인을 원했다. 이 마지막 그룹은 쿠웨이트 타워로 알려져 있으며, 3개의 타워로 구성되고 그중 2개는 급수탑으로도 사용된다. 담수화 시설의 물은 타워로 펌핑된다. 33개의 타워는 총 102,000 입방미터의 물을 저장할 수 있다. "급수탑"(쿠웨이트 타워 및 쿠웨이트 급수탑)은 아가 칸 건축상(1980년 주기)을 수상했다.
쿠웨이트의 담수 자원은 지하수, 담수화된 해수, 처리된 폐수로 제한된다. 3개의 주요 도시 폐수 처리장이 있다. 현재 대부분의 물 수요는 해수 담수화 플랜트를 통해 충족된다. 하수 처리는 전국 시설의 98%를 포괄하는 국가 하수도망에 의해 처리된다.
5. 정치
쿠웨이트는 아미르가 국가 원수인 토후국이다. 아미르는 사바 왕가에 속한다. 정치 체제는 임명된 내각과 사법부로 구성된다. 폴리티 데이터 시리즈는 쿠웨이트를 독재로 분류하는 -7점으로 평가하며, 이코노미스트의 민주주의 지수 또한 쿠웨이트를 독재로 분류한다. 쿠웨이트는 이전에 "준민주주의"로 묘사되기도 했다. 프리덤 하우스는 이전에 세계 자유 지수 조사에서 쿠웨이트를 "부분적 자유" 국가로 평가했다.


행정권은 정부가 행사한다. 아미르가 총리를 임명하고, 총리는 정부를 구성하는 각료를 선택한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쿠웨이트 정부의 많은 정책, 특히 쿠웨이트의 무국적 베둔인 위기 및 쿠웨이트 귀화 역사와 관련된 정책들이 "인구 공학"으로 특징지어졌다.
아미르가 판사를 임명한다. 쿠웨이트 헌법은 1962년에 공포되었다. 헌법재판소는 법률과 법령이 헌법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판결할 책임이 있다.
입법권은 아미르가 행사한다. 이전에는 국회가 행사했다. 쿠웨이트 헌법 제107조에 따라 아미르는 의회를 해산할 권한이 있으며, 새 의회 선거는 2개월 이내에 실시되어야 한다. 아미르는 셰이크 사바흐 알살림 알사바흐 치하의 1976년 8월 29일, 셰이크 자베르 알아흐마드 알사바흐 치하의 1986년 7월 3일, 그리고 셰이크 미셸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흐 치하의 2024년 5월 10일에 헌법의 여러 조항을 세 차례 정지시켰다. 쿠웨이트의 정치적 불안정은 국가의 경제 발전과 인프라를 크게 저해했다. 쿠웨이트는 통치 가문이 석유 수입을 사용하여 시민들의 정치적 묵인을 구매하는 "지대 국가"로 정기적으로 특징지어진다. 정부 지출의 70% 이상이 공공 부문 급여와 보조금으로 구성된다. 쿠웨이트는 공공 부문 임금 총액이 GDP의 12.4%를 차지하여 GCC 지역에서 가장 높다.
쿠웨이트 여성은 중동에서 가장 해방된 여성 중 하나로 간주된다. 2014년과 2015년에 쿠웨이트는 세계 성 격차 보고서에서 아랍 국가 중 1위를 차지했다. 2013년 쿠웨이트 여성의 53%가 노동력에 참여했으며, 이는 일하는 쿠웨이트 남성보다 많은 수치로, 쿠웨이트는 GCC 국가 중 여성 시민의 노동력 참여율이 가장 높다. 사회 진보 지수에 따르면 쿠웨이트는 아랍 세계와 이슬람 세계에서 사회 진보 부문 1위, 이스라엘에 이어 중동에서 두 번째로 높다. 그러나 쿠웨이트 여성의 정치 참여는 제한적이었다. 쿠웨이트 여성 참정권을 부여하려는 여러 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2005년이 되어서야 영구적으로 참정권을 얻었다. 쿠웨이트는 기대수명, 여성 노동력 참여, 세계 식량 안보, 학교 질서 및 안전 부문에서 세계 상위권 국가 중 하나이다. 쿠웨이트는 이전에 정치 및 사회 조직을 갖춘 공론장과 시민 사회를 가지고 있었다. 쿠웨이트 상공회의소와 같은 전문 단체는 쿠웨이트 기업 및 산업의 이익을 대변하며 여전히 존재한다.
5.1. 사바 왕가

사바 왕가는 수니파 말리크파를 따른다. 쿠웨이트 헌법 제4조는 쿠웨이트가 세습 토후국이며 그 아미르는 무바라크 알사바흐의 후손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무바라크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으나, 1915년 그가 사망한 이후 아들들인 자베르와 살림의 후손들 사이에서 비공식적인 교대 패턴이 나타났다. 이 계승 패턴은 2006년 이전에 한 차례 예외가 있었는데, 살림의 아들인 셰이크 사바흐 알살림 알사바흐가 왕족 내부의 다툼과 합의 부족으로 인해 이복형인 셰이크 압둘라 알살림 알사바흐의 뒤를 이어 왕세자로 지명되었을 때였다. 교대 체제는 셰이크 사바흐 알살림이 자베르 가문의 셰이크 자베르 알아흐마드 알사바흐를 왕세자로 지명하면서 재개되었고, 그는 결국 1977년부터 2006년까지 29년간 아미르로 통치했다. 2006년 1월 15일, 자베르 알아흐마드 국왕이 사망하고 그의 왕세자인 살림 가문의 셰이크 사드 알아브둘라가 아미르로 지명되었다. 2006년 1월 23일, 국회는 셰이크 사드 알아브둘라가 치매 형태의 질병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셰이크 사바흐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흐에게 양위하는 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관례에 따라 살림 가문에서 후계자를 지명하는 대신, 셰이크 사바흐 알아흐마드는 이복동생인 셰이크 나와프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흐를 왕세자로, 조카인 셰이크 나세르 알무함마드 알사바흐를 총리로 지명했다. 2023년 12월 16일, 셰이크 나와프 알아흐마드가 사망하고 셰이크 미셸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흐가 그 뒤를 이었다.
이론적으로 헌법 제4조는 신임 아미르의 왕세자 지명이 국회의 절대다수 찬성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승인을 얻지 못하면 아미르는 헌법상 국회에 3명의 대체 왕세자 후보를 제출해야 한다. 이 과정은 과거 권력 경쟁자들이 정치 무대에서 동맹을 맺도록 유도했으며, 이는 역사적으로 왕족 내부의 사적인 불화를 "공적 영역과 정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5.2. 사법 제도
쿠웨이트는 프랑스 법체계를 모델로 한 대륙법 체계를 따른다. 쿠웨이트의 법체계는 대체로 세속적이다. 샤리아 법은 무슬림 거주민의 가족법에만 적용되며, 쿠웨이트의 비무슬림은 세속적인 가족법을 적용받는다. 가족법 적용을 위해 수니파(말리크파), 시아파, 딤미(비무슬림)의 세 가지 별도 법원 구역이 있다. 유엔에 따르면 쿠웨이트의 법체계는 영국 보통법, 프랑스 민법, 이집트 민법, 이슬람법이 혼합된 형태이다.
쿠웨이트의 법원 시스템은 세속적이다. 다른 페르시아만 아랍 국가들과 달리 쿠웨이트에는 샤리아 법원이 없다. 민사 법원 시스템의 일부가 가족법을 관장한다. 쿠웨이트는 페르시아만 지역에서 가장 세속적인 상법을 가지고 있다. 의회는 1983년에 음주를 범죄화했다. 쿠웨이트의 가족법은 1984년에 공포되었다.
5.3. 인권과 부패
{{본문|쿠웨이트의 인권|베둔}}
쿠웨이트의 인권은 특히 베둔(무국적자)과 관련하여 상당한 비판을 받아왔다. 쿠웨이트 정부의 무국적 베둔인 위기 처리는 많은 인권 단체와 심지어 유엔으로부터도 비판을 받아왔다. 1995년 휴먼 라이츠 워치에 따르면 쿠웨이트는 30만 명의 무국적 베둔인을 양산했다. 쿠웨이트는 전체 지역에서 무국적자 수가 가장 많다. 1986년부터 쿠웨이트 정부는 출생 증명서, 사망 증명서, 신분증, 혼인 증명서, 운전면허증을 포함한 어떠한 형태의 서류도 베둔인에게 발급하기를 거부해왔다. 쿠웨이트 베둔인 위기는 미얀마의 로힝야족 위기와 유사하다. 여러 인권 단체에 따르면 쿠웨이트는 무국적 베둔인에 대해 인종 청소와 집단살해를 자행하고 있다. 또한, 쿠웨이트의 성소수자는 법적 보호를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인권 단체들은 외국인에 대한 인권 유린으로 쿠웨이트를 비판해왔다. 외국인은 쿠웨이트 전체 인구의 70%를 차지한다. 카팔라 제도는 외국인들을 착취에 취약하게 만든다. 행정적 추방은 경미한 교통 위반을 포함한 사소한 위법 행위에 대해 쿠웨이트에서 매우 흔하다. 쿠웨이트는 인신매매에서 세계 최악의 위반 국가 중 하나이다. 수십만 명의 외국인들이 비자발적 노역을 포함한 수많은 인권 유린을 당하고 있다. 그들은 신체적, 성적 학대, 임금 미지급, 열악한 노동 조건, 위협, 가택 감금,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여권 압수 등을 당한다. 코로나19 백신 접종 시작 이후 쿠웨이트는 외국인에 대한 외국인 혐오적 백신 정책을 시행했다는 비난을 정기적으로 받아왔다. 쿠웨이트의 외국인 노동자 학대는 여러 차례 세간의 이목을 끄는 외교 위기를 초래했다. 2018년에는 쿠웨이트 내 필리핀 노동자 학대로 인해 쿠웨이트와 필리핀 사이에 외교 위기가 있었다. 쿠웨이트 내 필리핀인의 약 60%가 가사 노동자로 고용되어 있다. 2020년에는 쿠웨이트 내 이집트 노동자 학대로 인해 쿠웨이트와 이집트 사이에 외교 위기가 있었다.
여러 쿠웨이트인들이 알사바흐 왕가를 비판한 후 투옥되었다. 2010년 미국 국무부는 쿠웨이트 블로거이자 언론인인 모하마드 압둘카데르 알자셈의 사건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는데, 그는 알사바흐 왕가를 비판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었으며 유죄 판결 시 최대 18년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그는 쿠웨이트 국왕 셰이크 사바흐 알아흐마드 알사바흐 사무실에서 그에 대한 고소장이 발부된 후 구금되었다.
쿠웨이트 고위 정부 관리들 사이의 광범위한 부패는 정부와 대중 간의 긴장을 야기하는 심각한 문제이다. 2007년 부패 인식 지수에서 쿠웨이트는 179개국 중 부패 순위 60위를 기록했다(가장 부패하지 않은 국가가 목록 상단에 위치). 0점에서 10점까지의 척도(0점이 가장 부패, 10점이 가장 투명)에서 국제 투명성 기구는 쿠웨이트를 4.3점으로 평가했다.
2009년 소년원 청소년의 20%가 난독증을 앓고 있었는데, 이는 일반 인구의 6%에 비해 높은 수치이다. 1993년 연구 자료에 따르면 쿠웨이트 교도소의 정신 질환 유병률이 일반 인구보다 높았다.
6. 대외 관계
쿠웨이트의 외교는 외무부 차원에서 처리된다. 최초의 외무부 부서는 1961년에 설립되었다. 쿠웨이트는 1963년 5월 유엔의 111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쿠웨이트는 아랍 연맹과 걸프 협력 회의(GCC)의 오랜 회원국이다.

걸프 전쟁 이전, 쿠웨이트는 페르시아만 지역에서 유일하게 "친소련" 국가였다. 쿠웨이트는 소련이 다른 페르시아만 아랍 국가들과 접촉하는 통로 역할을 했으며, 친소련적 입장의 이점을 보여주는 데 사용되었다. 1987년 7월, 쿠웨이트는 자국 영토 내 미군 기지 건설을 거부했다. 걸프 전쟁의 결과로 쿠웨이트와 미국의 관계는 개선되어 (주요 비NATO 동맹국) 현재 쿠웨이트는 중동 전체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미군 주둔지이다. 미국 정부는 쿠웨이트에 있는 군사 기지를 지역 및 국제 군사 작전을 위한 집결지, 훈련장, 병참 지원 기지로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기지에는 캠프 아리프잔, 캠프 뷰링, 알리 알살렘 공군 기지, 해군 기지인 캠프 패트리어트가 포함된다.
쿠웨이트는 또한 중국 및 아세안과 강력한 경제 관계를 맺고 있다. 일대일로 구상 하에 쿠웨이트와 중국은 알무틀라 남부 및 무바라크 알카비르 항구를 포함한 많은 중요한 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6.1. 대한민국과의 관계
쿠웨이트는 대한민국과 1979년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는 선수단과 임원진을 파견하여 참가했으며, 1991년 걸프 전쟁 당시에는 대한민국 국군이 다국적군 자격으로 쿠웨이트에 참전했다. 과거 대한항공이 쿠웨이트 국제공항에 직항 노선을 운항했으나 현재는 폐지되었다. 쿠웨이트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일본에 원유 500만 배럴을 무상 지원했으며, 대한민국에도 경제 개발 및 인도적 지원을 제공한 바 있다.
6.2. 주변국과의 관계
쿠웨이트는 역사적으로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 주요 주변국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어왔다. 이라크와는 1990년 침공 이후 관계가 단절되었으나, 2010년 이후 외교 사절 교환 등 관계 회복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는 전통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GCC의 핵심 회원국으로서 협력하고 있다. 이란과는 종교적 갈등으로 인해 일정 거리를 유지해 왔으나, 최근에는 관계 개선의 조짐도 보이고 있다.
7. 군사

쿠웨이트군은 육군, 공군(방공군 포함), 해군(해안경비대 포함), 국가경비대, 아미르 경비대로 구성되며, 총 병력은 현역 17,500명, 예비역 23,700명이다. 아미르 경비대는 쿠웨이트 아미르 보호 임무를 맡는다. 국가경비대는 정규군 지휘 체계와 독립적으로 아미르와 총리에게 직접 보고하며, 내부 안보와 외부 방어 모두에 관여한다. 해안경비대는 내무부 소속이며, 다른 모든 부대는 국방부 소속이고 국가경비대는 두 기관 모두에 지원을 제공한다. 1991년 이후 미국은 쿠웨이트의 주요 안보 파트너로서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있으며, 쿠웨이트는 걸프협력회의의 반도 방패군에도 참여하고 있다. 쿠웨이트군은 미국, 러시아, 서유럽 장비를 사용한다.
2017년 쿠웨이트는 남성 시민을 대상으로 4개월 훈련과 8개월 복무로 구성된 의무 군 복무 제도를 재도입했다. 징병제는 이전에 1961년부터 2001년까지 시행되었으나 당시에는 완전히 시행되지 않았다. 쿠웨이트는 2014년 카타르도 이 정책을 시행하기 전까지 군 징병제를 시행한 유일한 걸프 국가였다.
사우디아라비아가 2015년 초 예멘 내전에 개입하기 시작했을 때 쿠웨이트는 사우디 주도 연합군에 합류했다. 쿠웨이트군은 포병대대와 전투기 15대를 제공했지만 예멘 작전에서의 기여는 제한적이었다.
8. 행정 구역
{{본문|쿠웨이트의 행정 구역|쿠웨이트의 지역}}

쿠웨이트는 6개 주(무하파자)로 구성되어 있다. 각 주는 여러 지역으로 세분된다.
- 알아시마주(수도주) - 주도: 쿠웨이트시티
- 하왈리주 - 주도: 하왈리
- 파르와니야주 - 주도: 파르와니야
- 무바라크알카비르주 - 주도: 무바라크알카비르
- 아흐마디주 - 주도: 알아흐마디
- 자흐라주 - 주도: 알자흐라
쿠웨이트의 주요 도시로는 쿠웨이트시티와 알자흐라가 있다. 살미야와 하왈리는 많은 사람이 거주하는 도시이자 상업 중심지이다. 알아시마주의 슈와이크는 공업이 발달한 지역이다. 쿠웨이트 아미르의 궁전인 아스시프궁은 살와 지역에 위치하며, 이곳에서 국정이 논의된다.
9. 경제

쿠웨이트는 부유한 석유 기반 경제를 가지고 있다. 공식 통화는 쿠웨이트 디나르이다. 다양한 1인당 경제 생산량 지표에 따르면 쿠웨이트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이다. 2021년 쿠웨이트는 GCC 지역에서 가장 석유 의존도가 높고 인프라가 가장 취약하며 경제 다각화 비중이 가장 낮은 국가로 간주되었다.
2019년 이라크는 쿠웨이트의 주요 수출 시장이었으며, 식품/농산물이 전체 수출 상품의 94.2%를 차지했다. 전 세계적으로 쿠웨이트의 주요 수출품은 석유를 포함한 광물 연료(총수출의 89.1%), 항공기 및 우주선(4.3%), 유기 화학제품(3.2%), 플라스틱(1.2%), 철강(0.2%), 보석 및 귀금속(0.1%), 컴퓨터를 포함한 기계류(0.1%), 알루미늄(0.1%), 구리(0.1%), 소금, 황, 석재 및 시멘트(0.1%)였다. 쿠웨이트는 2019년 세계 최대의 술폰화, 질산화, 아질산화 탄화수소 수출국이었다. 쿠웨이트는 2019년 경제 복잡도 지수(ECI)에서 157개국 중 63위를 차지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쿠웨이트는 안보 문제로 인해 외국인 노동자를 규제하기 위한 특정 조치를 시행했다. 예를 들어, 조지아 출신 노동자는 입국 비자 신청 시 강화된 심사를 받으며, 기니비사우 및 베트남 출신 가사 노동자의 입국은 전면 금지되었다. 방글라데시 출신 노동자도 금지되었다. 2019년 4월 쿠웨이트는 에티오피아, 부르키나파소, 부탄, 기니, 기니비사우를 금지 국가 목록에 추가하여 총 20개국으로 늘렸다. 이주민 권리 단체에 따르면 이러한 금지 조치는 주로 해당 국가들이 쿠웨이트에 대사관과 노동 협력 기관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시행된다.
9.1. 석유와 천연가스
{{본문|쿠웨이트의 석유 산업}}
상대적으로 작은 영토에도 불구하고 쿠웨이트는 확인된 원유 매장량이 1,040억 배럴에 달하며, 이는 세계 매장량의 10%로 추정된다. 쿠웨이트는 또한 상당한 천연가스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다. 국내의 모든 천연자원은 국가 재산이다.
쿠웨이트 비전 2035의 일환으로 쿠웨이트는 석유화학 산업의 글로벌 허브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알주르 정유공장은 중동에서 가장 큰 정유공장이다. 이는 쿠웨이트에서 가장 큰 환경 친화적 정유공장으로, 이는 연소로 인한 전 세계적 환경 영향보다는 지역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의미한다. 이 알주르 정유공장은 일대일로 구상 하의 쿠웨이트-중국 협력 프로젝트이다. 알주르 LNG 터미널은 중동 최대의 액화천연가스 수입 터미널이다. 이는 세계 최대 용량의 LNG 저장 및 재기화 신규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30.00 억 USD 상당의 투자를 유치했다. 다른 대규모 프로젝트에는 바이오 연료 및 청정 연료가 포함된다. 2025년 1월 20일, 쿠웨이트 석유 회사는 알즐라이아 해상 유전에서 주요 탄화수소 발견을 발표했으며, 이는 국가 에너지 부문의 중요한 이정표로 보고 있다. 이 개발은 해상 탐사 및 생산 능력을 향상시키려는 쿠웨이트의 전략적 계획과 일치한다.
9.2. 제조업
가장 큰 비석유 산업은 철강 제조업이다. 유나이티드 스틸 산업 회사(KWT Steel)는 쿠웨이트의 주요 철강 제조 회사로, 쿠웨이트 국내 시장 수요(특히 건설)를 모두 충족한다. 쿠웨이트는 철강 자급자족 국가이다.
9.3. 농업
2016년 쿠웨이트의 식량 자급률은 채소 49.5%, 육류 38.7%, 유제품 12.4%, 과일 24.9%, 곡물 0.4%였다. 쿠웨이트 전체 영토의 8.5%가 농경지이지만, 경작 가능지는 쿠웨이트 전체 영토의 0.6%에 불과하다. 역사적으로 자흐라는 주로 농업 지역이었으며, 현재 자흐라에는 다양한 농장이 있다.
9.4. 금융업
쿠웨이트 투자청(KIA)은 쿠웨이트 최대의 국부펀드로 해외 투자에 특화되어 있다. KIA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부펀드이다. 1953년부터 쿠웨이트 정부는 유럽, 미국,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투자를 해왔다. 2021년 기준 보유 자산 가치는 약 7000.00 억 USD에 달한다. 이는 세계에서 3번째로 큰 국부펀드이다.
쿠웨이트는 GCC 금융 산업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아미르는 쿠웨이트가 경제 발전 측면에서 금융 산업에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장려해왔다. 쿠웨이트가 금융 분야에서 (GCC 군주국 중) 역사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52년 쿠웨이트 국립 은행 설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은행은 GCC 지역 최초의 현지 상장 기업이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 GCC 기업 주식을 거래하는 대체 주식 시장인 수크 알마나크 주식 시장이 쿠웨이트에 등장했다. 전성기에는 시가 총액이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3위였으며, 영국과 프랑스를 앞섰다.
쿠웨이트는 대규모 자산 관리 산업을 보유하고 있다. 쿠웨이트 투자 회사는 훨씬 규모가 큰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하고 다른 어떤 GCC 국가의 회사보다 많은 자산을 관리한다. 쿠웨이트 금융 센터는 대략적인 계산으로 쿠웨이트 기업이 GCC 전체 운용 자산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한다고 추정했다. 금융 산업에서 쿠웨이트의 상대적인 강점은 주식 시장으로까지 이어진다. 수년 동안 쿠웨이트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모든 기업의 총 가치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한 다른 어떤 GCC 증권거래소의 가치보다 훨씬 높았다. 2011년 금융 및 은행 기업은 쿠웨이트 증권거래소 시가 총액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모든 GCC 국가 중에서 쿠웨이트 금융 부문 기업의 시가 총액은 총액 기준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두 번째였다. 최근 몇 년간 쿠웨이트 투자 회사들은 자산의 상당 부분을 해외에 투자했으며, 해외 자산은 국내 자산보다 훨씬 커졌다.
쿠웨이트는 1961년 국제 개발 기관의 패턴에 따라 설립된 자치 국가 기관인 쿠웨이트 아랍 경제 개발 기금을 통해 다른 국가에 대한 주요 해외 경제 지원국이다. 1974년 이 기금의 대출 권한은 전 세계 모든 개발도상국을 포함하도록 확대되었다.
지난 5년 동안 쿠웨이트에서 기업가 정신과 중소기업 창업이 증가했다. 비공식 부문도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주로 인스타그램 사업의 인기 때문이다. 2020년 쿠웨이트는 UAE,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MENA 지역 스타트업 자금 지원에서 4위를 차지했다.
9.5. 과학기술 및 우주 프로그램
{{본문|쿠웨이트 우주 로켓}}

쿠웨이트는 2024년 세계 혁신 지수에서 71위를 차지했다. 미국 특허청에 따르면 쿠웨이트는 2015년 12월 31일 기준 448건의 특허를 등록했다. 2010년대 초중반 쿠웨이트는 이 지역에서 1인당 과학 간행물 및 특허 건수가 가장 많았고 지역적으로 가장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쿠웨이트는 이 지역에서 5G 기술을 최초로 구현한 국가이며, 5G 보급률 면에서 세계 주요 시장 중 하나이다.
쿠웨이트는 주로 민간 부문 주도로 우주 산업이 부상하고 있다. 세계 최초의 통신위성 텔스타 1호 발사 7년 후인 1969년 10월, 쿠웨이트는 중동 최초의 위성 지상국인 "움 알라이시"를 개국했다. 움 알라이시 위성국 단지에는 움 알라이시 1호(1969년), 움 알라이시 2호(1977년), 움 알라이시 3호(1981년) 등 여러 위성 지상국이 있었다. 이곳은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당시 이라크군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쿠웨이트에서 위성 통신 서비스를 제공했다. 2019년 쿠웨이트의 오비탈 스페이스는 쿠웨이트 상공을 통과하는 궤도 위성 신호에 무료로 접속할 수 있도록 아마추어 위성 지상국을 설립했다. 이 지상국은 "움 알라이시" 위성국의 유산을 이어가기 위해 움 알라이시 4호로 명명되었다. 움 알라이시 4호는 FUNcube 분산 지상국 네트워크 및 위성 네트워크 개방형 지상국 프로젝트(SatNOGS)의 회원이다.
쿠웨이트의 오비탈 스페이스는 스페이스 챌린지 프로그램 및 엔듀로샛과 협력하여 "코드 인 스페이스"라는 국제 이니셔티브를 도입했다. 이 이니셔티브는 전 세계 학생들이 우주에서 자신들의 코드를 보내고 실행할 수 있도록 한다. 코드는 위성 지상국에서 해발 500 km 상공을 공전하는 큐브위성(나노위성)으로 전송된다. 그런 다음 코드는 위성의 온보드 컴퓨터에서 실행되어 실제 우주 환경 조건에서 테스트된다. 이 나노위성은 아랍어로 "쿠웨이트의 달"을 의미하는 "QMR-KWT"(아랍어: قمر الكويت)로 불린다. QMR-KWT는 2021년 6월 30일 스페이스X 팰컨 9 블록 5 로켓에 실려 우주로 발사되었으며, D-오빗의 ION SCV 돈틀리스 데이비드라는 위성 운반체의 탑재물 일부였다. 2021년 7월 16일 최종 궤도(태양 동기 궤도)에 배치되었다. QMR-KWT는 쿠웨이트 최초의 위성이다.
쿠웨이트 우주 로켓(KSR)은 아라비아 최초의 준궤도 액체 이원추진제 로켓을 제작하고 발사하는 쿠웨이트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두 단계로 나뉘며 두 개의 개별 로켓을 사용한다. 초기 테스트 단계에서는 고도 8 km에 도달할 수 있는 시험용 로켓인 KSR-1을 사용하고, 더 광범위한 준궤도 테스트 단계에서는 고도 100 km까지 비행할 계획인 KSR-2를 사용한다.
쿠웨이트의 오비탈 스페이스는 쿠웨이트 과학 센터(TSCK)와 협력하여 쿠웨이트 최초로 학생들이 우주로 과학 실험을 보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 이니셔티브의 목표는 학생들이 (a) 우주 과학 임무 수행 방법, (b) 미소중력(무중력) 환경, (c) 실제 과학자처럼 과학을 수행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기회는 오비탈 스페이스가 드림업 PBC 및 나노랙스 LLC와 체결한 계약을 통해 가능해졌으며, 이들은 NASA와 우주법 협정에 따라 협력하고 있다. 학생들의 실험은 "쿠웨이트의 실험: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이산화탄소 소비 대장균"으로 명명되었다. 이 실험은 2020년 12월 6일 스페이스X CRS-21(SpX-21) 우주 비행을 통해 국제우주정거장(ISS)으로 발사되었다. 우주비행사 섀넌 워커(ISS 엑스페디션 64 대원)가 학생들을 대신하여 실험을 수행했다. 2021년 7월, 쿠웨이트 대학교는 국가 주도의 지속 가능한 우주 부문 개척 노력의 일환으로 국가 위성 프로젝트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9.6. 관광업

쿠웨이트의 관광업은 열악한 인프라와 주류 금지로 인해 여전히 매우 제한적이다. 매년 열리는 "할라 페브라예르" 축제는 인근 GCC 국가의 관광객을 다소 유치하며, 음악 콘서트, 퍼레이드, 카니발 등 다양한 행사를 포함한다. 이 축제는 쿠웨이트 해방을 기념하는 한 달간의 행사로, 2월 1일부터 28일까지 열린다. 해방 기념일 자체는 2월 26일에 기념된다.
2020년 쿠웨이트의 국내 여행 및 관광 지출은 61.00 억 USD였다. 세계 여행 관광 협회(WTTC)는 2019년 쿠웨이트를 여행 및 관광 GDP 성장률이 가장 빠른 국가 중 하나로 선정했으며, 전년 대비 11.6% 성장했다. 2016년 관광 산업은 약 5.00 억 USD의 수익을 창출했다. 2015년 관광업은 GDP의 1.5%를 차지했다. 사바흐 알아흐마드 해상 도시는 쿠웨이트의 가장 큰 관광 명소 중 하나이다.
아미르궁은 최근 셰이크 압둘라 알살렘 문화센터, 셰이크 자베르 알아흐마드 문화센터, 알샤히드 공원, 알살람궁으로 구성된 새로운 쿠웨이트 국립 문화 지구(KNCD)를 개관했다. 총자본 비용이 10.00 억 USD 이상인 이 프로젝트는 세계에서 가장 큰 문화 투자 중 하나이다. 쿠웨이트 국립 문화 지구는 세계 문화 지구 네트워크의 회원이다. 알샤히드 공원은 아랍 세계에서 수행된 가장 큰 녹색 지붕 프로젝트이다.
10. 교통
쿠웨이트는 현대적인 고속도로망을 갖추고 있다. 도로는 총 5749 km에 달하며, 그중 4887 km가 포장되어 있다. 200만 대 이상의 승용차와 50만 대의 상업용 택시, 버스, 트럭이 운행 중이다. 주요 고속도로의 최고 속도는 시속 120 km이다. 국내에 철도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동차로 이동한다.

쿠웨이트의 대중교통망은 거의 전적으로 버스 노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영 쿠웨이트 대중교통 회사는 1962년에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쿠웨이트 전역의 시내버스 노선과 다른 걸프 국가로 향하는 장거리 노선을 운영한다. 주요 민간 버스 회사는 시티버스로, 전국적으로 약 20개의 노선을 운영한다. 또 다른 민간 버스 회사인 쿠웨이트 걸프 링크 대중교통 서비스는 2006년에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쿠웨이트 전역의 시내버스 노선과 인접 아랍 국가로 향하는 장거리 노선을 운영한다.
쿠웨이트에는 두 개의 공항이 있다. 쿠웨이트 국제공항은 국제 항공 여행의 주요 허브 역할을 한다. 국영 쿠웨이트 항공은 국내 최대 항공사이다. 공항 단지의 일부는 알무바라크 공군 기지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곳에는 쿠웨이트 공군 본부와 쿠웨이트 공군 박물관이 있다. 2004년 쿠웨이트 최초의 민간 항공사인 자지라 항공이 출범했다. 2005년에는 두 번째 민간 항공사인 와타니야 항공이 설립되었다.
쿠웨이트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해운 산업 중 하나를 보유하고 있다. 쿠웨이트 항만청은 쿠웨이트 전역의 항구를 관리하고 운영한다. 쿠웨이트의 주요 상업 항구는 슈와이크와 슈아이바로, 2006년에 총 753,334 TEU의 화물을 처리했다. 미나 알아흐마디는 국내 최대 항구이다. 부비얀섬의 무바라크 알카비르항은 현재 건설 중이며, 운영이 시작되면 200만 TEU를 처리할 것으로 예상된다.
10.1. 도로 교통
쿠웨이트는 잘 발달된 고속도로망을 갖추고 있으며, 주요 도로들은 도시와 주요 지역을 연결한다. 교통 문화는 자동차 중심이며, 개인 차량 소유율이 높다. 교통 체증은 특히 출퇴근 시간에 주요 도시 지역에서 흔히 발생한다. 정부는 도로 인프라 개선과 대중교통 확충을 통해 교통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10.2. 항공 교통
쿠웨이트 국제공항은 쿠웨이트의 주요 국제 관문으로, 쿠웨이트시티 근처에 위치한다. 국영 항공사인 쿠웨이트 항공을 비롯하여 다수의 국제 항공사가 취항하고 있다. 쿠웨이트 국제공항은 여객 및 화물 운송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최근 확장 및 현대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민간 항공사인 자지라 항공과 와타니야 항공도 국내외 노선을 운영하며 항공 시장 경쟁에 기여하고 있다.
10.3. 해상 교통
쿠웨이트는 페르시아만에 위치하여 해상 운송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주요 항구로는 슈와이크항과 슈아이바항이 있으며, 이들 항구는 컨테이너, 일반 화물, 석유 제품 등 다양한 화물을 처리한다. 미나 알아흐마디항은 쿠웨이트 최대의 석유 수출항이다. 현재 부비얀섬에 건설 중인 무바라크 알카비르항은 완공 시 이 지역의 주요 물류 허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쿠웨이트는 해운 산업을 통해 국제 무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1. 인구와 사회
쿠웨이트의 인구는 민족, 종교, 언어 등 다양한 측면에서 다채로운 특징을 보인다. 교육, 보건, 대중 매체 등 주요 사회 시스템은 국가의 지원을 받아 발전해왔으나, 외국인 노동자 및 비 시민(비둔) 문제 등 사회적 과제도 안고 있다. 쿠웨이트 사회는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며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1.1. 인구 구성
2024년 기준 쿠웨이트의 총인구는 약 482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 중 쿠웨이트 국적을 가진 시민은 약 153만 명이며, 나머지 약 329만 명은 100여 개국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이다. 외국인 노동자는 쿠웨이트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2를 차지하며, 인도인과 이집트인이 가장 큰 외국인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 쿠웨이트 사회에는 베둔으로 알려진 무국적자 문제도 존재하며, 이들은 시민권을 갖지 못해 여러 사회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11.2. 언어
쿠웨이트의 공식 언어는 현대 표준 아랍어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쿠웨이트 아랍어가 주로 사용된다. 쿠웨이트 아랍어는 걸프 아랍어의 한 방언으로, 주변 해안 지역의 방언과 유사점을 공유한다. 역사적으로 이민과 무역의 영향으로 쿠웨이트 아랍어에는 페르시아어, 인도어, 발루치어, 튀르키예어, 영어, 이탈리아어에서 차용한 단어가 많다.
영어는 널리 통용되며 종종 비즈니스 언어로 사용된다. 학교에서는 인문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제3언어로 프랑스어를 2년간 가르친다. 역사적 이민으로 인해 아잠 쿠웨이트인 사이에서는 쿠웨이트 페르시아어가 사용된다. 이란계 방언인 라레스탄어, 콘지어, 바스타키어, 게라시어 또한 쿠웨이트 아랍어 어휘에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시아파 쿠웨이트 시민은 이란계 혈통이다.
11.3. 종교


쿠웨이트의 국교는 이슬람교이며, 대부분의 쿠웨이트 시민은 무슬림이다. 공식적인 국가 인구 조사는 없지만, 수니파가 60~70%, 시아파가 30~40%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배 가문인 알사바흐 가문은 수니파의 말리크파를 따른다.
쿠웨이트에는 또한 외국인 기독교, 힌두교, 불교, 시크교 공동체가 크게 형성되어 있다. 2020년 기준, 쿠웨이트에는 약 837,585명의 기독교인이 있으며, 이는 인구의 17.93%를 차지하여 두 번째로 큰 종교 집단이다. 쿠웨이트의 기독교인 대부분은 인도 케랄라주 출신으로, 말랑카라 정교회, 마르토마 시리아 교회,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들이다. 최초의 말랑카라 정교회 교구는 1934년에 설립된 성 토마스 인도 정교회 파자야팔리 아흐마디이다. 쿠웨이트에는 토착 기독교 공동체도 있으며, 259명에서 400명 사이의 쿠웨이트 시민으로 구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쿠웨이트는 바레인과 함께 시민권을 가진 현지 기독교 인구가 있는 유일한 GCC 국가이다. 소수의 쿠웨이트 시민은 바하이 신앙을 따른다.
11.4. 사회적 특징
쿠웨이트의 도시 사회는 다른 걸프 아랍 사회보다 개방적인 편이다. 쿠웨이트 시민은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아잠)으로 구성되어 민족적으로 다양하다. 쿠웨이트는 이 지역에서 공공 영역에서 여성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데 가장 자유로운 국가로 두드러진다. 쿠웨이트 여성은 노동력에서 남성보다 수가 많다. 쿠웨이트 정치학자 가님 알나자르는 이러한 특성을 쿠웨이트 사회 전체의 표현으로 보며, 걸프 아랍 지역에서 "전통에 대해 가장 덜 엄격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여전히 보수적인 사회 관습과 가치관이 존재하며, 특히 가족 구조와 관련된 전통은 중요하게 여겨진다. 현대 사회로의 변화와 함께 서구 문화의 영향도 나타나고 있으나, 이슬람적 가치와 전통 문화는 여전히 쿠웨이트 사회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11.5. 교육
{{본문|쿠웨이트의 교육}}
쿠웨이트는 2010년 아랍 세계에서 문해율이 가장 높았다. 일반 교육 시스템은 유치원(2년), 초등학교(5년), 중학교(4년), 고등학교(3년)의 4단계로 구성된다. 초등학교 및 중학교 교육은 6세에서 14세까지의 모든 학생에게 의무이다. 고등 교육을 포함한 모든 단계의 국가 교육은 무료이다. 공교육 시스템은 세계은행과의 공동 프로젝트로 개편 중이다. 쿠웨이트에는 2개의 국립 대학교와 14개의 사립 대학교가 있다.
11.6. 보건
{{본문|쿠웨이트의 보건|쿠웨이트의 의료}}
쿠웨이트는 국가 재정으로 운영되는 의료 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며, 쿠웨이트 국민에게 무료로 치료를 제공한다. 쿠웨이트의 모든 주거 지역에는 외래 진료소가 있다. 외국인을 위한 저렴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공 보험 제도가 존재한다. 민간 의료 기관 또한 국내에서 의료 시설을 운영하며, 해당 보험 제도 가입자들이 이용할 수 있다. 쿠웨이트 비전 2035의 일환으로 최근 많은 새로운 병원이 문을 열었다. 코로나19 유행 이전 몇 년 동안 쿠웨이트는 다른 대부분의 GCC 국가보다 비례적으로 높은 비율로 의료 시스템에 투자했다. 쿠웨이트 비전 2035 의료 전략에 따라 공립 병원 부문은 수용 능력을 크게 늘렸다. 최근 많은 새로운 병원이 개원하여 쿠웨이트에는 현재 20개의 공립 병원이 있다. 새로운 셰이크 자베르 알아흐마드 병원은 중동에서 가장 큰 병원이다. 쿠웨이트에는 또한 16개의 사립 병원이 있다. 쿠웨이트의 민간 부문 병원은 다양한 전문 분야를 제공한다. 이러한 추세는 특히 해외 치료를 줄이고 고급 전문 병원을 개발하여 국내 의료 관광 시장을 개발할 기회를 활용하는 데 있어 더욱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11.7. 대중 매체

쿠웨이트는 인근 국가보다 1인당 신문 및 잡지 발행 부수가 더 많다. 국영 쿠웨이트 통신사(KUNA)는 국내 최대 언론사이다. 정보부는 쿠웨이트의 미디어 산업을 규제한다. 쿠웨이트 미디어는 프리덤 하우스의 언론 자유도 조사에서 매년 부분적 자유로 분류된다. 2005년부터 쿠웨이트는 국경 없는 기자회의 연례 언론 자유 지수에서 모든 아랍 국가 중 가장 높은 순위를 자주 차지했다. 2009년, 2011년, 2013년, 2014년 쿠웨이트는 중동에서 언론 자유도가 가장 높은 국가로 이스라엘을 앞섰다. 쿠웨이트는 또한 프리덤 하우스의 연례 언론 자유도 조사에서 아랍 국가 중 언론 자유도가 가장 높은 국가로 자주 평가된다.
쿠웨이트에는 15개의 위성 텔레비전 채널이 있으며, 그중 4개는 정보부가 관리한다. 국영 쿠웨이트 텔레비전(KTV)은 1974년 최초로 컬러 방송을 시작했으며 5개의 텔레비전 채널을 운영한다. 정부 지원을 받는 라디오 쿠웨이트는 아랍어, 페르시아어, 우르두어, 영어를 포함한 여러 언어로 AM 및 단파를 통해 매일 정보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12. 문화
쿠웨이트의 문화는 아랍 문화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페르시아, 인도, 아프리카 등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특징을 발전시켜 왔다. 전통적인 생활 양식과 현대적인 요소가 공존하며, 특히 예술, 음악, 음식 등에서 그 다양성이 두드러진다.
12.1. 공연 예술

쿠웨이트는 아라비아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공연 예술 산업을 보유하고 있다. 쿠웨이트의 텔레비전 드라마 산업은 걸프 아랍 드라마 산업 중 가장 크고 활발하며 매년 최소 15편의 연속극을 제작한다. 쿠웨이트는 걸프 텔레비전 드라마 및 코미디 분야의 주요 제작 중심지이다. 대부분의 걸프 텔레비전 드라마 및 코미디 작품은 쿠웨이트에서 촬영된다. 쿠웨이트 연속극은 걸프 지역에서 가장 많이 시청되는 연속극이다. 연속극은 가족들이 단식을 깨기 위해 모이는 라마단 기간에 가장 인기가 많다. 주로 쿠웨이트 방언으로 공연되지만, 멀리 튀니지에서도 성공적으로 상영되었다. 쿠웨이트는 텔레비전 연속극과 연극의 인기로 인해 종종 "걸프의 할리우드"로 불린다.
쿠웨이트는 GCC 지역의 무대 예술 및 공연 예술 교육의 주요 중심지이다. 중동의 많은 유명 배우와 가수들은 쿠웨이트에서의 훈련 덕분에 성공했다고 말한다. 고등 연극 예술원(HIDA)은 연극 예술 분야의 고등 교육을 제공한다. 이 학원에는 여러 부서가 있으며 GCC 지역 전역에서 연극 전공 학생들을 유치한다. 수아드 압둘라, 모하메드 칼리파, 만수르 알만수르와 같은 많은 배우들과 이스마일 파흐드 이스마일과 같은 저명한 비평가들이 이 학원을 졸업했다.
쿠웨이트는 자생적인 연극 전통으로 유명하다. 쿠웨이트는 걸프 아랍 지역에서 연극 전통을 가진 유일한 국가이다. 쿠웨이트의 연극 운동은 국가 문화 생활의 주요 부분을 구성한다. 쿠웨이트의 연극 활동은 최초의 구술 드라마가 발표된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극 활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기가 있다. 쿠웨이트의 연극은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이전에는 사회부에서, 현재는 국립 문화 예술 문학 위원회(NCCAL)에서 지원한다. 모든 도시 지역에는 공공 극장이 있다. 살미야의 공공 극장은 배우 압둘후사인 압둘레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연례 쿠웨이트 연극 축제는 쿠웨이트에서 가장 큰 연극 예술 축제이다.
쿠웨이트는 사우트와 피지리와 같은 다양한 인기 음악 장르의 발상지이다. 전통 쿠웨이트 음악은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은 국가의 해상 유산을 반영한다. 쿠웨이트는 GCC 지역 전통 음악의 중심으로 널리 간주된다. 쿠웨이트 음악은 다른 GCC 국가의 음악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쿠웨이트는 현대 할리지 음악을 개척했다. 쿠웨이트인들은 걸프 지역 최초의 상업 음반 예술가였다. 최초로 알려진 쿠웨이트 녹음은 1912년에서 1915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살레흐와 다우드 알쿠와이티는 쿠웨이트 사우트 음악 장르를 개척했으며 650곡 이상을 작곡했는데, 그중 다수는 전통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쿠웨이트와 나머지 아랍 세계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매일 연주되고 있다.
쿠웨이트는 국립 문화 예술 문학 위원회(NCCAL)가 주최하는 국제 음악 축제를 포함하여 다양한 음악 축제의 본고장이다. 셰이크 자베르 알아흐마드 문화센터에는 중동에서 가장 큰 오페라 하우스가 있다. 쿠웨이트에는 대학 수준의 음악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여러 학술 기관이 있다. 고등 음악 예술원은 정부에 의해 설립되어 음악 학사 학위를 제공한다. 또한 기초 교육 대학은 음악 교육 학사 학위를 제공한다. 음악 연구원은 중등학교에 해당하는 음악 교육 자격을 제공한다. 쿠웨이트는 GCC 국가들의 중심적인 음악적 영향력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 10년 동안 위성 텔레비전 방송국을 통해 많은 쿠웨이트 음악가들이 다른 아랍 국가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예를 들어, 바샤르 알샤티는 스타 아카데미 덕분에 유명해졌다. 현대 쿠웨이트 음악은 아랍 세계 전역에서 인기가 있다. 나왈 엘 쿠웨이티아, 나빌 쇼아일, 압둘라 알로와이셰드는 가장 인기 있는 현대 공연자들이다.
12.2. 시각 예술
{{본문|쿠웨이트의 미술}}
쿠웨이트는 아라비아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현대 미술 운동을 보유하고 있다. 1936년부터 쿠웨이트는 걸프 아랍 국가 중 최초로 예술 분야 장학금을 수여했다. 쿠웨이트 예술가 모젭 알두사리는 걸프 아랍 지역에서 가장 초기에 인정받은 시각 예술가였다. 그는 이 지역 초상화 예술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술탄 갤러리는 걸프 지역 최초의 전문 아랍 미술관이었다.
쿠웨이트에는 30개 이상의 미술관이 있다. 최근 몇 년간 쿠웨이트의 현대 미술계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칼리파 알카탄은 쿠웨이트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최초의 예술가이다. 그는 1960년대 초 "순환주의"로 알려진 새로운 미술 이론을 창시했다. 다른 주목할 만한 쿠웨이트 예술가로는 사미 모하마드, 투라야 알바크사미, 수잔 부쉬나크가 있다.
정부는 알쿠라인 문화 축제와 조형 예술 축제를 포함한 다양한 미술 축제를 개최한다. 쿠웨이트 국제 비엔날레는 1967년에 시작되었으며, 20개 이상의 아랍 및 외국 국가가 이 비엔날레에 참여했다. 저명한 참가자로는 레일라 알아타르가 있다. 2004년에는 현대 아랍 미술을 위한 알카라피 비엔날레가 시작되었다.
12.3. 음식 문화
{{본문|쿠웨이트 요리}}
쿠웨이트 요리는 아라비아 요리, 이란 요리, 메소포타미아 요리가 융합된 것이다. 쿠웨이트 요리는 동부 아라비아 요리의 일부이다. 쿠웨이트 요리의 대표적인 음식은 마치부스로, 보통 바스마티 쌀에 향신료를 넣어 양념하고 닭고기나 양고기를 곁들여 만든다.
해산물은 쿠웨이트 식단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특히 생선이 그렇다. 무타바크 사마크는 쿠웨이트의 국민 음식이다. 현지에서 인기 있는 다른 음식으로는 질감과 맛 때문에 주로 구이, 튀김 또는 비리야니 밥과 함께 제공되는 하무르(그루퍼), 사피(토끼고기), 마이드(숭어), 소바이티(도미) 등이 있다.
쿠웨이트의 전통 플랫브레드는 이란식 쿠브즈라고 불린다. 이것은 특수 오븐에서 구운 큰 플랫브레드로, 종종 참깨를 뿌린다. 전국에 수많은 현지 빵집이 있으며, 제빵사들은 주로 이란인이다(그래서 빵 이름이 "이란식 쿠브즈"이다). 빵은 종종 마햐와 생선 소스와 함께 제공된다.
12.4. 박물관
{{본문|쿠웨이트의 박물관 목록}}


새로운 쿠웨이트 국립 문화 지구(KNCD)는 셰이크 압둘라 알살렘 문화센터, 셰이크 자베르 알아흐마드 문화센터, 알샤히드 공원, 알살람궁 등 다양한 문화 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총 자본 비용이 10.00 억 USD 이상인 이 프로젝트는 세계에서 가장 큰 문화 지구 중 하나이다. 압둘라 살렘 문화센터는 중동에서 가장 큰 박물관 단지이다. 쿠웨이트 국립 문화 지구는 세계 문화 지구 네트워크의 회원이다.
사두 하우스는 쿠웨이트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 기관 중 하나이다. 베이트 알오트만은 쿠웨이트 역사를 전문으로 하는 가장 큰 박물관이다. 과학 센터는 중동에서 가장 큰 과학 박물관 중 하나이다. 현대 미술관은 쿠웨이트와 이 지역 현대 미술의 역사를 보여준다. 쿠웨이트 해양 박물관은 석유 이전 시대 국가의 해양 유산을 전시한다. 파테 알카이르와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 다우선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된 알하셰미 II와 같은 여러 전통 쿠웨이트 다우선이 일반에 공개되어 있다. 역사, 빈티지, 클래식 자동차 박물관은 쿠웨이트 자동차 유산의 빈티지 자동차를 전시한다. 1983년에 설립된 국립 박물관은 "활용도가 낮고 간과되고 있다"고 묘사되었다.

몇몇 쿠웨이트 박물관은 이슬람 미술에 전념하고 있으며, 가장 주목할 만한 곳은 타레크 라잡 박물관과 다르 알아타르 알이슬라미야 문화 센터이다. 다르 알아타르 알이슬라미야 문화 센터에는 교육 시설, 보존 실험실, 연구 도서관이 있다. 쿠웨이트에는 여러 미술 도서관이 있다. 칼리파 알카탄의 거울의 집은 쿠웨이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미술 박물관이다. 쿠웨이트의 많은 박물관은 민간 기업이다. 다른 걸프 국가의 하향식 접근 방식과 대조적으로 쿠웨이트의 박물관 개발은 시민 정체성을 더 잘 반영하며, 많은 독립적인 문화 사업을 창출한 쿠웨이트 시민 사회의 힘을 보여준다.
12.5. 문학
{{본문|쿠웨이트 문학}}
쿠웨이트는 최근 몇 년간 20편 이상의 소설과 수많은 단편 소설집을 저술한 이스마일 파흐드 이스마일과 같은 저명한 현대 작가들을 배출했다. 쿠웨이트 문학이 오랫동안 영문학 및 프랑스 문학과 상호작용해왔다는 증거도 있다.
12.6. 스포츠
{{본문|쿠웨이트의 스포츠}}
{{참고|올림픽 쿠웨이트 선수단}}

축구는 쿠웨이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쿠웨이트 축구 협회(KFA)는 쿠웨이트 축구의 관리 기구이다. KFA는 남자, 여자, 풋살 국가대표팀을 조직한다. 쿠웨이트 프리미어리그는 18개 팀이 참가하는 쿠웨이트 축구의 최상위 리그이다. 쿠웨이트 축구 국가대표팀은 1980년 AFC 아시안컵 우승, 1976년 AFC 아시안컵 준우승, 1984년 AFC 아시안컵 3위를 차지했다. 쿠웨이트는 또한 1982년 FIFA 월드컵에 한 번 출전했다. 그들은 체코슬로바키아와 1-1로 비긴 후 프랑스와 잉글랜드에 패해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쿠웨이트에는 알아라비, 알파힐, 알자흐라, 알쿠웨이트, 알나세르, 알살미야, 알샤바브, 알카디시야, 알야르무크, 카즈마, 카이탄, 술라이비카트, 사헬, 타다몬 등 많은 축구 클럽이 있다. 쿠웨이트에서 가장 큰 축구 라이벌 관계는 알아라비와 알카디시야 사이이다.
농구는 쿠웨이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중 하나이다. 쿠웨이트 농구 국가대표팀은 쿠웨이트 농구 협회(KBA)에서 관리한다. 쿠웨이트는 1959년에 국제 대회에 데뷔했다. 국가대표팀은 FIBA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 11번 출전했다. 쿠웨이트 디비전 I 농구 리그는 쿠웨이트 최고 프로 농구 리그이다. 쿠웨이트 크리켓은 쿠웨이트 크리켓 협회에서 관리한다. 다른 성장하는 스포츠로는 럭비 유니언이 있다. 핸드볼은 축구가 전체 인구 사이에서 더 인기가 있지만 쿠웨이트의 국가적 상징으로 널리 간주된다.
쿠웨이트 아이스하키는 쿠웨이트 아이스하키 협회에서 관리한다. 쿠웨이트는 1985년에 국제 아이스하키 연맹에 처음 가입했지만 아이스하키 활동 부족으로 1992년에 제명되었다. 쿠웨이트는 2009년 5월에 IIHF에 재가입했다. 2015년 쿠웨이트는 IIHF 챌린지컵 오브 아시아에서 우승했다. 2020년 2월 쿠웨이트는 마리나 비치 시티 앞에서 처음으로 UIM 아쿠아바이크 월드 챔피언십의 한 라운드를 개최했다. 2022년 5월 쿠웨이트는 360 마리나에서 제3회 걸프 협력 회의(GCC) 게임을 개최했다. 이 행사에는 배구, 농구, 수영, 육상, 가라테, 유도 등 16개 종목이 포함되었으며 1,700명 이상의 남녀 선수가 참가했다.
12.7. 공휴일
쿠웨이트의 주요 국경일은 쿠웨이트 건국 기념일(2월 25일)과 쿠웨이트 해방 기념일(2월 26일)이다. 이 외에 새해 첫날(1월 1일)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으며, 이슬람력에 따른 종교 관련 공휴일(예: 이드 알피트르, 이드 알아드하, 이슬람력 새해, 마울리드 안나비)도 중요한 휴일로 기념한다. 종교 관련 공휴일은 이슬람력에 따라 매년 날짜가 변경된다.
13. 주요 인물
쿠웨이트의 역사와 발전에 기여한 주요 인물들은 다양하다. 역대 아미르들은 국가의 정치적 방향을 설정하고 현대화를 이끌었다. 특히 무바라크 알사바흐는 영국과의 보호 조약을 통해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압둘라 알살림 알사바흐는 독립과 헌법 제정을 주도했다. 자베르 알아흐마드 알사바흐는 걸프 전쟁의 위기를 극복하고 국가 재건에 힘썼다.
정치 분야에서는 국회의장과 총리를 역임하며 쿠웨이트 정치에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 있으며, 경제 분야에서는 쿠웨이트 투자청과 같은 기관을 설립하고 운영하며 국부 증진에 기여한 인물들이 있다.
문화 예술 분야에서는 "걸프의 할리우드"라는 명성에 걸맞게 연극, 음악, 미술 등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예술가들이 많다. 배우 압둘후사인 압둘레다는 쿠웨이트 연극의 상징적인 인물이며, 가수 나왈 엘 쿠웨이티아는 아랍 전역에서 사랑받는 아티스트이다. 미술가 모젭 알두사리와 칼리파 알카탄은 쿠웨이트 현대 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문학가 이스마일 파흐드 이스마일은 다수의 작품을 통해 쿠웨이트 문학을 대표한다. 이 외에도 각 분야에서 쿠웨이트의 발전과 국제적 위상 제고에 기여한 많은 인물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