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정일권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빈곤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이후 군사 교육을 통해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1.1. 출생 및 가족 배경
청사 정일권은 1917년 11월 21일,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당시 니콜리스크)에서 이주민인 영광 정씨 정기영(丁基永)과 김해 김씨 김순복(金順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 제국 육군에서 통역 장교로 근무했다. 본적은 함경북도 경원군 경원읍이다. 할아버지 정좌진(丁座鎭) 대에 만주 간도로 이주해갔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 첫째 형이 병으로 죽고, 1919년 둘째 형이 요절하여 사실상의 4대 독자가 되었다.
1.2. 어린 시절과 빈곤
1922년 러시아 볼셰비키 폭동의 여파가 극동 지역에까지 미치면서 극동혁명위원회가 창설되자, 제정 러시아 극동군 통역 장교였던 부친 정기영이 러시아 육군 중위로 강제 전역(면직)되고 감시받게 되었다. 이에 모친 김순복과 함께 함경북도 경원군으로 돌아왔다. 부친도 간신히 처형을 모면하고 경원으로 돌아왔다. 1924년 봄 경원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1926년 3학년 재학 중 아버지 정기영이 실종되었다. 1928년에는 아버지 정기영이 불령선인이라는 이유로 할아버지 정좌진이 개간한 농경지를 몰수당하고 두만강변으로 건너가 황무지를 개간하며 극심한 빈곤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후 경원보통학교 6년 과정을 어렵게 마치고 1930년 봄 만주 북간도 용정의 영신중학교(1921년 5월 개교)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정일권은 혼자서 학비를 벌어야 했다. 신문팔이와 우유배달, 일본인 집 물지게 운반 등을 하며 학비를 마련했다. 1934년 5학년 재학 중 일본 관헌의 정책에 따라 영신중학이 학교법인 광명학원에 흡수되었고, 이듬해 광명중학교를 졸업했다. 광명중학교 재학 당시 성적이 우수했으며, 학교 선배이자 영어 교사인 장내원의 권유와 교련 교관의 추천을 받아 봉천군관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이때 만난 중학교 동창 문익환은 훗날 제3공화국, 제4공화국 당시 그의 반대편에서 민주화 운동을 펼쳤다. 항일 시인 윤동주와 사회 운동가 장준하 또한 그의 광명중학교 동창이었다.

1.3. 교육 및 군사 훈련
1935년 5월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정일권은 만주국 초급 장교 양성기관인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에 합격했다. 같은 해 6월 1일자로 치치하얼 제3교도대에서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후 중앙육군훈련처에서 정식 과정을 이수했다. 그는 만주군관학교를 다니면서도 종종 자신이 다니던 중학교에 찾아와 후배들에게 군인이 될 것을 적극 추천하기도 했다.
1937년 9월 봉천군관학교 5기로 수석 졸업한 뒤, 성적 우수자로서 동기생 김석범에 이어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생으로 추천되었다. 병과를 보병에서 기병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1년간 만주군 기병훈련소 갑종후보 과정을 거쳤다. 그 뒤 홋카이도에 있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기병과 본과에 들어갔다.
194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55기를 졸업하고 만주국으로 돌아와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1946년에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졸업하며 대한민국 국군에 합류했다. 한국 전쟁 중이던 1951년에는 미국 육군참모대학교에 유학하여 군사 지식을 심화했다. 군 복무 이후 외교관으로 활동하던 중에도 학업을 이어가,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대학원과 미국 하버드 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에서 정치학과 국제 관계를 수학했다.
그는 여러 국내외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5년 10월 말레이시아 국립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1966년 3월 중앙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1966년 6월 부산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1967년 2월 베트남 사이공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1967년 3월 미국 롱아일랜드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1967년 9월 태국 출라롱콘 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이후 1970년 중화민국 타이완 국립 정치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1971년 중화학술원 명예 철학박사, 1972년 태국 출라롱콘 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1988년 미국 마이애미 대학교 옥스퍼드 교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 군 경력
정일권은 만주국군과 일본군 복무를 시작으로 한국 전쟁에서 대한민국 육군의 주요 지휘관으로 활약하며 중요한 군사적 기여를 했다.
2.1. 만주국 및 일본군 복무
1940년 일본육군사관학교 55기를 졸업하고 만주로 돌아와 만주군 소위로 임관해 만주군 지린부대 교관에 보임되었다. 만주군 헌병 장교로 계인주, 최남근 등과 함께 일본이 시베리아 철도를 폭파하려고 만든 특수부대 돌격대에서 3개월간 폭파훈련을 받은 뒤 독립헌병대에 배치되어 랴오허 방면으로 출동했다. 1941년 신징(신경)에 있는 만주군 총사령부 고급부관실에서 근무하면서 3월에 헌병 중위로 진급했다. 1942년 모교인 광명중학교를 방문해 후배들에게 만주국 군관으로 입대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소위로 있던 정일권은 계속 자신이 다니던 중학교를 방문하여 "앞으로 군에 입대하는 것이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가장 유망하고 현명한 길이다"라며 졸업 예정자들을 모아놓고 졸업 후의 진학 지도를 했다. 1938년 신경에 4년제 군관학교가 생기면서 사관학교에 진학하는 졸업생들이 늘어났다고 한다. 만주국 헌병 상위(대위)로 진급한 후 간도헌병대 대장으로 근무했다. 1944년 만주국 고급 장교 양성기관인 고등군사학교(1943년 신징에 설립)에 제2기생 합격자 25명 가운데 유일한 조선인으로 입교했으나, 재학 중 태평양 전쟁 종전을 맞이했다.
사학자 류연산은 정일권이 간도헌병대 대대장으로 일본군 중령이었으며, 해방 전 만주국 군대에서 계급이 가장 높은 조선인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일제로부터 여러 번 훈장을 수여받았다고 언급했다.
2.2. 한국 전쟁 지휘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정일권은 미국 하와이에서 군사 훈련 중이었다. 개전 소식을 듣고 1950년 6월 30일 급히 귀국하여 해임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을 대신하여 제5대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했다. 동시에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7월부터 육해공군 총사령관을 겸임하여 대한민국 육해공군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했다. 그는 패퇴한 한국군을 재편성하고 유엔군과의 협력을 조율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당시 한국군 부대를 조직하고 작전을 지원하여 북한군을 무력화시키는 데 기여하며 전쟁 영웅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1951년 6월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감독 책임을 지고 참모총장직과 국군 총사령관직을 사임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육군참모대학교에서 추가 훈련을 받았다. 1952년 7월 귀국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사단장으로 강등되어 최전선 전투 부대로 배치되었다. 하지만 3개월 뒤 미국 제9군단 부군단장으로 승진하여 전선의 유엔군을 지휘하며 여러 공세와 역공세에 참여했다. 다시 3개월 후에는 대한민국 육군 제2군단장으로 승진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휘를 맡았다.
2.3. 대한민국 육군 경력 및 진급


광복 후 1945년 12월 15일 미군정청이 창설한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했다. 1946년 1월 15일 군사영어학교 1기생 중 1차로 졸업하고 정위(대위)로 임관하여(군번 제5번) 국방경비대 제1연대 중대장을 거쳐 제4연대장 겸 경비대 총참모장을 역임했다. 1946년 5월 1일 설치된 조선국방경비대가 정식 편성되면서 그는 정식으로 대위가 되었다. 1946년 12월 소령으로 진급, 남조선국방경비대 제4연대의 임시 연대장이 되었다. 1947년 중령으로 승진하고, 조선경비대 총참모장을 거쳐 조선경비사관학교장을 역임했다.
1948년 1월 만주 신경군관학교 4기생 출신이자 신경보안사령부에 함께 있었던 예관수와 함께 '공산군의 유격전법과 경비와 토벌'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그해 대한민국 국군으로 정식 발족되면서 국군 육군 중령이 되었고, 바로 대령으로 승진했다. 이어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1948년 6월 보임) 등을 거쳐 육군참모학교 부교장을 역임했다. 그 뒤 1949년 2월 육군 준장으로 승진, 1949년 3월 1일 지리산 지구 전투 사령부가 설치되고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지리산 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지리산과 기호 지역의 야산에 은신하던 남로당 빨치산 토벌 작전에 참가했다.
1949년 12월 육군참모차장 겸 행정참모부 부장이 되었다. 1950년 초 미국 육군참모대학에 유학했으나 한국 전쟁 발발로 귀환하게 되었다.


1951년 육군 중장으로 승진했으며, 1954년 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이승만 정권 당시 백선엽, 이형근 등과 함께 군내 주요 파벌을 형성하기도 했다. 그는 국군 내의 만주군벌, 일본군벌, 광복군 출신 등이 경쟁할 때 만주군 인맥의 리더 중 한 명이었다. 1954년에는 백선엽 참모총장을 대신하여 다시 제8대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했다. 이어 1956년 합동참모본부 총장(合同參謀本部總長)에 발령되었다.
1954년 5월 정일권 참모총장은 그와 친밀한 관계에 있던 공국진을 육군 헌병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군내 부패 척결과 수사기관 사이의 갈등 해결 등을 주요 과제로 지시했다. 공국진은 이 과제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직무 한계를 자의로 무시하는 김창룡 특무대장과 잦은 갈등을 빚었고, 김창룡은 이 과정에서 공국진이 탄피를 일본에 밀수출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해임을 기도했다. 김창룡의 공세 앞에 정일권 참모총장도 역부족으로 그가 임명한 헌병사령관의 해임을 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후 공국진이 강문봉이 군단장으로 있는 2군 참모장으로 발령되는 것도 김창룡의 방해로 무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김창룡은 참모총장 정일권의 명령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공국진의 보좌관을 체포, 연행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김창룡의 월권 행위에 분노한 정일권과 강문봉은 1955년 10월 진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에게 직접 찾아가 김창룡의 전근 또는 유학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의 건의를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김창룡에 대한 신뢰를 재확인했다. 김창룡은 정일권과 강문봉의 비리에 대한 집중 수사로 이에 대응했고, 이는 정일권과 강문봉의 김창룡 암살 음모와 교사라는 극단적인 대응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김창룡에게 정일권의 비리를 수사하게 했고, 정일권에게는 역으로 김창룡의 비리를 수사하라는 밀지를 내렸다는 점이 주목된다.


2.4. 전역 후 군 경력
1956년 6월 합동참모본부 의장에 선출되었다. 그해 프랑스공화국 명예훈장과 미합중국 총사령관 공로훈장을 수여받았다. 1956년 말 이승만 대통령의 특사로서 남베트남을 방문하고 귀국, 1957년 5월 예비역 육군 대장으로 예편되었다. 예편과 동시에 주 터키 대사로 임명되며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되었다.
3. 외교 경력
정일권은 군에서 예편한 후 터키, 프랑스, 미국 등 주요 국가의 대사를 역임하며 대한민국의 외교적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예편 후 주터키 대사(1957년 1월)를 지냈다. 1959년 4월 17일, 대한민국 정부는 공석 중이던 주프랑스 초대 대사에 당시 주터키 대사 정일권을 임명했다. 주프랑스 대사(1959년 6월 16일 ~ )를 거쳐 주미국 대사 등을 지냈다. 1960년 1월, 정일권은 부무관 윤응렬 대령 등과 함께 에티오피아를 방문하여 외상서리와 회담하기도 했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6월 22일로 예정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허정 과도 정부는 공석 중이던 주미 대사에 정일권 주프랑스 대사를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과도 정부는 당초 신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주미 대사에 대한 임명을 보류하려 했으나, 외국의 국가원수가 방문할 때 주재 대사가 수행하거나 본국으로 귀국하여 환영 준비와 절차를 보고하는 것이 관례이며, 당시 주미대사관에 대리대사가 공관장직을 대행하는 상황에서 대사 없이 국가원수를 맞는 것은 우방국가인 미국 정부에 대한 예우가 되지 못하리라는 판단에 따라 부득이하게 임명을 단행했다.
정일권은 6월 5일 미국에 도착하여 6월 7일 허터 미국 국무장관을 방문하고 신임장 사본을 전달했다. 1960년 6월 8일 백악관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또한 남미 각국 대사를 겸임하다가 장면 정권 출범 후 사임했다.
이후 야당 인사로 있다가 1961년 미국으로 유학, 하버드 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에서 연수했다. 하버드 대학교 유학 중이던 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박정희의 지시를 받아 미국 조야를 다니며 군사정부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 냈다. 1961년 12월, 주미 겸 주브라질 한국 대사 정일권은 부인과 1명의 보좌관을 동반하여 브라질과 멕시코를 여행했다. 멕시코에서는 4일간 체류하며 12월 20일, 한국-멕시코 양국 간의 경제적 및 문화적 관계 증진 문제에 관하여 마누엘 텔로 외상과 회담을 가졌다. 12월 21일, 워싱턴으로 귀임했다.
미국 대사로 있으면서 브라질, 콜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에콰도르 등의 겸임 대사를 겸하기도 했다. 한편 그가 주미 대사로 재직할 당시 대사관에는 박보희가 중령으로서 무관 일을 맡고 있었다. 박 중령은 김종필이 당시 매콘 미 CIA 국장, 맥나마라 국방장관 등을 만날 때 통역을 맡는 등 잔무를 거들어 주었는데, 이때를 전후하여 박보희와 통일교의 관계, 김종필과 정일권의 통일교 관련 여부가 먼 훗날 미국 매스컴의 시비의 대상이 되는 첫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각국 대사와 유엔 총회 한국 대표 등을 지낸 뒤 박정희 정권 지지를 선언하고 1963년 12월 12일 제3공화국이 출범할 때 외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4. 정치 경력
정일권은 군 및 외교관 경력 이후 정치에 입문하여 외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하며 박정희 정권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4.1. 정치 입문 및 성향
1963년 박정희로부터 소환되어 도움을 요청받은 정일권은 그해 12월 외무부 장관으로 입각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핵심 동맹이자 조력자로서, 5.16 군사 정변 이후 박정희를 지지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그는 민주공화당의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
4.2. 외무부 장관
정일권은 1963년부터 1964년까지, 그리고 1966년부터 1967년까지 두 차례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특히 1965년 2월 이른바 '불도저 내각', '돌격 내각'이라 불리던 시기에 일본을 방문해 사토 에이사쿠 수상과 회담을 마무리하고 6월 한일협정을 조인하는 데 앞장섰다. 1966년 12월부터 1967년 6월까지는 총리직과 외무부 장관을 겸임하며 한일협정 직후의 외교적 문제들을 수습하는 데 주력했다.
4.3. 국무총리
1964년 박정희 정권에서 강행한 한일협정 회담에 대한 국민적 반대가 이어지고 1964년 5월 9일 최두선 국무총리가 사임하자, 정일권은 5월 10일부터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1970년 12월 20일까지 6년 7개월 동안 재임했다. 취임 초 연설에서 그는 한일회담의 조기 타결, 식량 증산 및 확보, 물가 안정, 공개 및 신속한 행정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빠르면 6개월, 늦어도 1년 안에는 국민이 원하는 모든 일을 과감하게 실천하겠다고 공약했다. 그 뒤 아무도 외무부 장관직을 선뜻 맡으려 하지 않아 그가 2개월간 외무부 장관직을 겸직하기도 했다. 1964년 8월 13일 아리앙스 프랭세즈 프랑스연합회 한국위원회 명예회원에 위촉되었다. 같은 해 6월 장면 전 부통령의 국민장에 참석하여 추도사를 낭독했다.
국무총리 재직 중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이 불거지자 국회에서 재벌과 정부를 비판하던 김두한 의원의 국회오물투척사건 당시 오물 세례를 맞기도 했다.
4.4. 국회 활동 및 지도력
1970년 민주공화당 총재 상임고문이 되었다가 일시 귀국하여 1970년부터 1971년까지 민주공화당 의장 상임고문을 지냈다. 1971년 7월의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며 제8대 국회의원에 재직했다. 1972년 5월 박정희에 의해 민주공화당 당의장 서리에 임명되었다. 그 뒤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통과될 때 민주공화당 의장을 맡았으며, 협력위원회 제8회 합동위원회 한국 측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1973년 2월의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원도 속초·인제·고성·양양 선거구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입후보하여 9대 국회의원에 당선, 재선되었다.
유신체제 아래 입법부가 행정부의 시녀 노릇을 해 국회가 '통법부'나 '행정부의 시녀'라고 세간의 조롱을 받을 때 1973년부터 1979년까지 국회의장을 지냈다. 1973년 국제의원연맹(IPU), 아시아의원연맹(APU) 한국지부 회장에 선임되었다. 1979년 2월의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 속초·인제·고성·양양 선거구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입후보하여 국회의원에 재선되었다. 1979년 민주공화당 총재 상임고문과 한일의원연맹회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0월 26일 10·26 사태 이후 정일권은 하와이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1980년 5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 이후 내사를 당했으나 별 혐의점이 없어서 내사 종결되었다. 그해 8월 신군부 집권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으나 이후 제5공화국의 국정자문회의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정계에서 은퇴한 뒤에는 정치 원로이자 시민사회단체 원로로 자유수호구국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제6공화국 시절 1988년 국정자문위원, 1989년 한국자유총연맹 초대 총재가 되었고, 민주자유당 출범 후 상임고문을 지냈다. 그 뒤 1990년 한국자유총연맹 총재에 재선되었으며, 그해 초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의 서재에는 늘 박정희의 사진이 걸려 있었고, 박정희를 지칭할 때에는 꼭 각하라는 존칭을 쓰며, 박정희를 민족주의자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또한 박정희가 자신에게 말을 놓지 않고 선배님이라고 늘 지칭했던 것도 반쯤 자랑 삼기도 했다. 1992년에는 민주자유당 상임고문에 임명되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기간 중 그는 김영삼을 공식 지지하여 직접 전국 지원 유세를 다니기도 했으며, 1993년 1월 민주자유당을 탈당했다.
5. 개인 생활
정일권의 개인적인 삶은 두 번의 결혼과 자녀들, 그리고 다양한 아명과 별칭으로 특징지어진다.
5.1. 가족 및 결혼
정일권은 두 번 결혼했다. 첫째 부인은 윤계원이었으나 사별했다. 윤계원과의 사이에서 세 딸 정영혜, 정성혜, 정지혜를 두었다. 정영혜는 이훈과, 정성혜는 이동휘와, 정지혜는 최상규와 결혼했다.
둘째 부인은 박혜수이며, 박혜수와의 사이에서 장남 정기훈(정세훈)과 넷째 딸 정희진을 두었다.
5.2. 아명 및 별칭
정일권의 아명(兒名, 어렸을 때의 이름)은 정일진(丁一鎭)이었다. 그의 호(號)는 청사(청사Cheongsa한국어)이다. 창씨개명 당시의 일본식 이름은 나카지마 잇켄(中島一權Nakajima Ikken일본어)이었는데, 1930년대 중반 당시의 소련 연해주 영토에서는 이켄 테이(ИккЭн ТЭиIkken Tei러시아어)라 불리기도 했다.
5.3. 기타 활동
정일권은 다산 정약용의 추모 행사에 적극 참여하였다. 1975년에는 경기도 양주군 조안면 능내리(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던 정약용의 묘소와 양주군 조안면 팔당호변에 있던 여유당(與猶堂, 다산정약용 선생 생전 거처) 주변을 정리하고 성역화하는 사업을 주관하였다. 또한 여유당에 휘호를 새로 작성하기도 했다.
1974년 10월에는 당시 경기도지사와 함께 여유당 정약용 유적지 정비를 기념하여 자연석에 친필로 새긴 기념비를 여유당(與猶堂) 입구에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여유당 입구에 새겨진 정일권의 친필 기념비는 2000년 누군가에 의해 정으로 쪼아져 훼손당했다.
6. 논란 및 비판
정일권의 경력은 일제강점기 활동과 관련된 친일 행적 논란, 그리고 정인숙 살해 사건과의 연루 의혹 등 여러 비판에 직면했다.
6.1. 친일 행적 논란
정일권은 일제강점기 만주국군 장교로 복무한 경력으로 인해 친일 행적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는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생으로 추천받아 졸업한 뒤 만주군 헌병 장교로 복무하며 후배들에게 만주군 입대를 권유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의 군 부문에 포함되었고,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도 등재되었다.
6.2. 정인숙 사건

정일권은 정인숙 살해 사건과의 연루 의혹으로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근처 도로에서 발생한 의문의 살인 사건으로, 고급 요정 직원이던 정인숙이 차량에서 총격을 받아 사망하고, 차량을 운전하던 그녀의 넷째 오빠 정종욱은 대퇴부에 관통상을 입고 구사일생으로 구조되었다.
정인숙은 여러 정부 고위 인사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특히 3세 된 아들 성일의 아버지가 당시 국무총리였던 정일권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정일권은 정인숙을 만난 뒤 그와 관계를 맺게 되었고, 정인숙을 유독 좋아하여 그녀의 집에 수시로 출입하다가 주민들에게 목격되어 소문이 유포되었다. 그녀가 임신 사실을 알리자 정일권은 낙태를 권유하려다가 대신 아이를 낳으라고 했다. 정인숙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산했다.
이후 아들의 아버지가 박정희 대통령이라느니, 정일권 전 총리라느니, 이후락 전 중정부장이라느니 하는 소문들이 무성했다. 정인숙은 1968년 6월 아들 성일을 낳았고, 이 해에 해외로 나가기 위해 갑자기 수속을 밟았다. 유흥업소에서는 접대부가 아이를 낳는 것이 금기였으나, 정인숙은 아이를 낳았다. 아이의 아버지는 유력 인사였고,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그녀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입을 열지 않는 가운데 소문이 확산되었다. 정인숙은 정일권이 자신을 서운하게 할 때마다 자신이 정일권 총리의 아이를 낳았다는 말을 떠벌리고 다녀 정일권을 난처하게 했다. 이 사실이 야당 인사들과 박정희 대통령의 귀에 들어가게 될까 봐 정일권은 불안해했고, 서둘러 불법 여권 두 개를 만들어 정인숙을 해외로 내보내고 생활비를 풍족하게 줄 테니 아이를 키우며 해외에서 조용하게 살라고 당부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은 후부터는 "내 말 한마디면 안 되는 일 없다" 혹은 "서교동 집도 아기 아빠가 사준 거야" 등의 말을 공공연히 했다. 그러나 주변의 발설에 의해 국무총리 정일권이 아이의 아버지라는 설이 유포되었고, 이는 신민당 의원들이 국회와 언론에 언급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계속된 질문 공세에 가족들은 그 아이가 정인숙의 아이가 아니고 정인숙의 배다른 동생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신원조회는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형욱의 비서실장인 문학림이 맡았고, 고위층만이 가질 수 있었던 회수 여권은 국무총리 정일권의 비서관 신성재가 주선했다. 여권 발급 날짜는 1968년 12월 30일이고, 이후 정인숙은 1969년 3월 큰오빠를 만난다는 명분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10월에는 워싱턴 D.C. 한인회장 노진환의 안내로 미국에서 3개월 동안 머물다가 1970년 1월 21일 귀국했다.
사건 직후에는 나훈아의 노래 '눈물의 씨앗'을 풍자한 노래가 확산되기도 했다.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 청와대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 / 만약에 그대가 나를 죽이지 않았다면 / 영원히 우리만이 알았을 걸 / 죽고 보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 "성일이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 고관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 그대가 나를 죽이지 않았다면 / 그렇게 모두가 밉지는 않았을 걸 / 죽고 나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은 물론 평소 거느리는 주변 사람들의 여자 문제에도 관대한 편이었다. 심지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직원을 시켜 정적이었던 김대중, 김영삼 등의 사생활을 캐서 보고서로 제출하자 화를 내며 찢어버렸다. 그러나 자신과도 술자리 또는 잠자리를 같이 한 정인숙이 국무총리 정일권이 관계를 맺어 자식까지 두었다는 사실에 크게 분노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사건 직후 "정 전 총리를 물러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주위의 건의에 "남자가 여자 만나는 것은 예사"라며 사건을 무마했다는 후문이 있다. 그러나 신민당의 정치 공세는 계속되었다. 정일권은 박정희를 찾아가 무릎까지 꿇었다고 했고, 바로 해임을 시키면 세간의 루머만 커질 것을 우려한 박정희는 정일권을 불러 자진 사퇴를 권고한 뒤, 정종욱이 구속된 이후 잠잠해질 무렵 정일권을 해임하고 바로 미국으로 내보냈다.
1991년 정성일은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와 외삼촌으로부터 정일권 씨가 1967년 어머니와 교제해 다음 해 나를 낳았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정성일은 정인숙의 사망 이후 외가에서 살다가 고등학생 때인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갔고 1990년에 귀국했다. 1989년 가석방된 정인숙의 오빠 정종욱은 정성일이 정일권의 아들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일권이 한 달에 한 번 꼴로 서교동 집으로 찾아왔지요. 그리고 동생이 '그이가 아들 하나만 낳아달라고 한다'며 상의를 해 처음엔 가족들이 극구 반대를 했지요. 출산 후에는 일 주일에 한 번 꼴로 찾아와 성일이를 안고 즐거워했으며, 늘그막에 아들을 얻어 소원을 이뤘다는 뜻에서 성일이란 이름까지 직접 지어왔어요. 성일이도 자기 아빠가 TV에 비치면 '아빠'라고 소리치며 좋아했지요"라고 증언했다. 정종욱은 출감 후 기자 인터뷰에서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며 억울함을 호소하며 "나는 범인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내 동생을 죽일 수는 없다. 그리고 내 동생 아들 성일이는 정일권 전 국무총리의 아들이 확실하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누명을 벗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관이었던 선우련도 정성일이 정일권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정일권 씨가 1971년 봄, 형님인 선우휘 씨를 찾아와 '이동원 외무장관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정 여인을 알게 되었으며, 내 아들을 낳았으나 공개할 수가 없다'고 털어놓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1971년 정일권을 만난 재미 언론인 문명자는 정일권에게 "문 기자, 나는 정인숙과 딱 한 번 같이 잤는데, 그 아이가 내 아들일 리가 없소. 나는 이미 불임 수술을 해서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몸이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일권이 불임 수술을 한 상태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977년 재혼한 부인 사이에 2남매가 출생했기 때문이다. 문명자는 이 글에서 정일권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정일권이 먼저 불임 수술을 풀었다고 말해 그만두었다고 밝히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정성일의 생부가 정일권이라는 견해들이 나오고 있다. 2007년 초 언론의 취재 결과 당시 주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숨겨진 사건의 진상이 조금씩 실체를 벗고 있다. 일요신문은 정성일의 판사 납치 사건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 당시의 여야 국회의원을 찾아다녔고, 이들에 따르면 정 씨의 친아버지는 정일권 전 총리일 가능성이 높으며 정 전 총리는 정 씨 측의 요구로 생전에 적잖은 금전적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정 여인의 살해범은 그 가족들조차 넷째 오빠로 확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성일은 '저는 당신의 아들이었습니다'라는 책에서 1991년 11월 미국에서 정일권과 대화를 나눈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문을 사이에 두고 한 대화에서 정일권은 정성일에게 "아가야, 나는..... 나는 지금 가슴이 떨려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구나. 내일 아침에 전화를 하고 다시 와주련?"이란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1993년 SBS 주병진 쇼에 출연한 정성일은 "최근 정 씨(정일권)가 나와의 직접 통화에서 '당신은 나의 아들이 아니며 내가 모시던 분의 아들'이라고 밝혔다"고 말해 자신이 박정희의 아들일 수 있음을 시사했다.
정성일의 친아버지 논란 역시 정일권일 가능성이 높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한 전 의원은 "우리 친인척 중의 한 분이 정 전 총리 부인과 이웃에 살며 둘도 없는 친구였다.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정 전 총리 부인이 친구에게 자기 집 남편을 가리키며 '어디서 아들 하나를 만들었다'고 한숨짓고는 했다고 한다. 실제 4대 독자였던 정 전 총리에게는 딸만 셋뿐이었기에 생전에 그 모친의 아들 독촉이 아주 성화였다고 한다"고 전했다. 또 다른 한 관계자는 "정 전 총리의 측근인 김 아무개 전 의원과 얼마 전 식사를 함께했는데 이 자리에서 그가 최근 납치범으로 보도된 정 씨에 대해 고개를 흔들더라. '(금전적으로) 그렇게 많이 도와줬는데도 툭하면 손을 내밀고 하더니, 그 못된 버릇을 못 버리고 이런 흉악한 범죄까지 저질렀다'고 분개하더라"고 전했다.
6.3. 기타 비판
국무총리 재직 시 장기영 부총리는 나라의 경제 정책을 거의 도맡아서 처리했다. 정일권이 총리라고 해도 경제 정책에 관한 한 일체의 간섭을 하지 못했다. 장기영은 대통령 박정희에게 직접 보고했고, 정일권이 경제 문제에 간섭하지 못하게 사전에 못을 박아두었다. 정일권과 장기영은 사이가 썩 좋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하여 서로 으르렁댈 나쁜 사이도 아니었다. 비록 장기영이 경제 문제에 대해서는 독주를 했을망정 정일권 자신이 경제에는 문외한이었고, 그보다는 정일권의 천성적인 겸손함이 두 사람 사이를 그렇게 나쁜 관계로까지 몰고 가지는 않았다. 싸움을 싫어하는 정일권의 성격과 정일권 스스로도 자신은 경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고 인정했으므로 장기영과 직접적인 갈등은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간격이 있었고, 결국 장기영은 정 총리보다 3년 앞서 자리를 물러나게 되었다.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당시 언론계에 복귀해 있던 장기영이 차기 총리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정인숙 사건이 터지자 장기영은 이것을 문제 삼아 박 대통령을 상대로 정일권 실각 공작을 벌였다는 것이다.
7. 사망
정일권은 말년에 림프암 투병 끝에 1994년 1월 17일 미국 하와이에서 사망했다.
7.1. 사망 경위
1991년 3월, 정일권은 림프암 치료를 위해 미국 하와이에서 요양했다. 1992년에는 민주자유당 상임고문으로 임명되었고, 1992년 대선 기간 중 김영삼을 지지하며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1993년 정인숙의 아들 정성일이 그를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제기했으나, 지병 악화로 치료차 출국했다. 1994년 1월 하와이 스트라웁 병원에 입원했고, 같은 해 1월 17일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7.2. 장례 및 안장
정일권의 유해는 비행기편으로 귀국하여 1994년 1월 22일 오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국회의원 이만섭의 주도로 영결식과 노제를 거행한 뒤, 경찰 병력의 호송 하에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산44-7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제3 묘역에 안장되었다.
한편, 그의 광명중학교 동문인 문익환 목사가 같은 날인 1994년 1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문익환 목사의 영결식은 한신대에서 시작해 대학로, 동대문에 이르기까지 수십만 명이 참여한 노제로 치러진 반면, 정일권의 장례식은 현충원에서 정치인들이 참가한 가운데 이루어져 TV 뉴스에서 대비되었다. 그들은 태어난 해도 같고, 같은 중학교를 다녔으나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았으며, 같은 날 사망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8. 유산 및 평가
정일권은 군인, 외교관, 정치인으로서 한국 현대사에 긍정적 및 부정적 영향을 동시에 미쳤다는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다.
8.1. 역사적 평가
정일권은 생애 내내 2등에 만족하며 권력의 핵심에 있었지만 최고 권력을 넘보지 않고 현실에 순응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경력은 친일 행적 논란과 정인숙 살해 사건 연루 의혹 등 여러 비판에 직면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주요 인물로서 한일협정 체결을 주도하는 등 국가 발전에 기여한 측면이 있지만, 동시에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발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피할 수 없다.
8.2. 공헌 및 업적
군사 분야에서 정일권은 한국 전쟁 발발 초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대한민국 육군을 재편성하고 유엔군과의 협력을 조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지원 등 주요 작전에서 그의 지휘력은 높이 평가된다.
외교 분야에서는 주미 대사 등 여러 국가의 대사를 역임하며 대한민국의 외교적 기반을 다지고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5.16 군사 정변 이후 박정희의 지시를 받아 미국 조야에 군사정부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낸 점은 그의 외교적 수완을 보여준다. 외무부 장관으로서는 한일협정 체결을 주도하며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치 분야에서 국무총리로서 1964년부터 1970년까지 6년 7개월간 재임하며 박정희 정권의 주요 정책을 집행했다. 그는 국회의원과 국회의장을 역임하며 입법 과정에도 참여했다.
8.3. 부정적 평가
정일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주로 그의 일제강점기 만주국군 장교 복무 경력과 정인숙 살해 사건과의 연루 의혹에서 비롯된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된 그의 군 경력은 역사적 평가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또한 정인숙 사건은 그의 사생활 문제뿐만 아니라 당시 권력층의 부패와 비윤리적인 행태를 드러낸 사건으로, 사회적 정의와 인권 문제에 대한 논란을 야기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났으며, 그의 책임과 도덕성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이처럼 정일권의 경력은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과 사회적 이슈에 복합적인 함의를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9. 훈장 및 수상
정일권은 군인, 외교관, 정치인으로서 국내외에서 다양한 훈장과 명예 학위를 수여받았다.
9.1. 국내외 훈장
- 대한민국:
- 대통령 개인 표창 (1948년 6월)
- 충무무공훈장 (1950년 12월)
- 금성태극무공훈장 (1951년 10월)
- 은성태극무공훈장 (1953년 3월)
- 공로훈장 (1969년 10월)
- 수교훈장 광화장 (1970년 8월)
- 충무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태극무공훈장, 수교훈장 흥인장, 청조근정훈장, 금성충무무공훈장 등 다수
- 미국:
- 공로훈장 (장교급) (1950년 10월)
- 공로훈장 (지휘관급) (1951년 10월 24일)
- 실버스타 (1952년 5월 13일)
- 특수십자훈장 (1953년 11월 3일)
- 공로훈장 (사령관급) (1954년 6월)
- 공로훈장 (총사령관급) (1957년 4월 29일)
- 에티오피아: 대성비훈장 (1955년 4월), 성령훈장 (1968년 5월)
- 그리스: 최고십자훈장 (1955년 7월)
- 프랑스: 명예훈장 (1956년 7월)
- 필리핀: 공로훈장 (1956년 12월)
- 중화민국: 제1급 명성훈장 (1964년 10월), 특종대수경성훈장 (1974년 6월)
- 말레이시아: 최고명예공로훈장 (1965년 4월)
- 아르헨티나: 산 마르틴 대십자훈장 (1966년 4월)
- 독일: 제1급 공로대십자훈장 (1967년 3월)
- 태국: 백상훈장 (1967년 4월), 백상최고특종대훈장 (1978년 3월)
- 엘살바도르: 대은십자훈장 (1968년 10월)
- 튀니지: 대수장 (1969년 7월)
- 나이지리아: 대십자훈장 (1969년 10월)
- 일본: 훈일등욱일대수장 (1969년 12월)
- 브라질: 의회대십자공로훈장 (1974년 6월)
- 콜롬비아: 특종금판대십자훈장 (1976년 6월)
- 멕시코: 수교훈장 1등장 (1979년 10월)
9.2. 명예 학위
10. 저서
정일권은 자신의 군인 및 정치인으로서의 경험을 담은 회고록을 저술했다.
- 전쟁과 휴전 (회고록)
- 정일권 회고록 (1991)
11. 대중문화에 나타난 정일권
11.1. TV 시리즈
- 최범호 → 김건호 - 《야인시대》(2003년) SBS 드라마
- 김홍석 - 《코리아게이트》(1995년) SBS 드라마
- 정승현 - 《제3공화국》(1993년) MBC 드라마
- 최정훈 - 《제4공화국》(1995년) MBC 드라마
- 노주현 - 《전쟁 6.25》(1984년) KBS 드라마
12. 역대 선거 결과
연도 | 선거 | 대수 | 직책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1971년 | 총선 | 8대 | 국회의원 | 전국구 | 민주공화당 | 6,254,921표 | 48.8% | 전국구 2번 | 당선 | 초선 |
1973년 | 총선 | 9대 | 국회의원 | 강원 속초시·양양군·인제군·고성군 | 민주공화당 | 57,994표 | 64.03% | 1위 | 당선 | 재선 |
1978년 | 총선 | 10대 | 국회의원 | 강원 속초시·양양군·인제군·고성군 | 민주공화당 | 58,251표 | 60.28% | 1위 | 당선 | 3선 |
13. 관련 인물 및 사건
- 장면
- 김종필
- 한국 전쟁
- 백선엽
- 박정희
- 한일협정
- 국민방위군 사건
-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 정인숙 살해 사건
- 국회오물투척사건
14. 외부 링크
- [https://www.rokps.or.kr/profile/profile_view.asp?idx=1699&page=1 정일권(丁一權)] - 대한민국헌정회 홈페이지
- [http://bluecabin.com.ne.kr/split99/jik.htm Chung Il-kwon]
- [http://www.pmo.go.kr/pmo_web/main.jsp?sub_num=54&state=view&idx=23 역대 주미 대사관 대사]
- [http://www.koreaembassyusa.org/han_koreaus/koembassy/kor_ambassadors.asp 역대 주미 대사관 대사]
- [http://www.ilyosisa.co.kr/bbs/zboard.php?id=society&page=3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238 다시 떠오른 '정인숙의 추억'의문의 피살 미스터리 전모]
- [http://www.ilyo.co.kr/news/articleView.html?idxno=61889 정인숙과 그아들, 진실은 이것]
- [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807/h2008070802511484800.htm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16>정인숙 사건과 나]
-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722698 3共 최대스캔들...희대의 여인 정인숙 피살사건]
- [http://www.minjog21.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2358 침묵의 현대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59546 "홍난파·안익태·장면·정일권, 친일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