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background
카를 에른스트 하우스호퍼는 예술가와 학자 집안 출신으로, 그의 개인적 배경과 성장 환경은 훗날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1. Childhood and education
하우스호퍼는 1869년 8월 27일, 독일 바이에른 왕국의 수도 뮌헨에서 저명한 경제학 교수이자 정치인이자 학술 및 문학 작가였던 막스 하우스호퍼 주니어와 아델레 하우스호퍼(프라스)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인 막스 하우스호퍼 시니어는 유명한 풍경화가이자 프라하 예술 아카데미 교수를 지냈다.
q=Munich|position=right
1887년 뮌헨의 인문주의 김나지움(고등학교)을 졸업한 후, 바이에른 육군 제1 야포 연대 "프린츠레겐트 루이트폴트"에 자원병으로 입대하며 군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바이에른 육군사관학교(Kriegsschule독일어), 야포 학교(Artillerieschule독일어), 그리고 바이에른 육군대학교(Kriegsakademie독일어)를 수료하며 군사 교육을 받았다.
1.2. Military career before WWI
1888년 바이에른 왕국 육군 제1 야포병 연대의 사관 후보생이 되었고, 1898년에는 고급 장교의 등용문인 바이에른 육군대학교를 수료했다. 이후 1899년부터 2년간 참모본부에서 근무했으며, 1901년에는 육군 대위로 원대에 복귀하여 3년간 포병 중대장으로 재직했다. 1903년에는 바이에른 육군대학교에서 교직을 맡아 군사 역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1904년부터 다시 참모본부 중앙 사무국으로 이동했으며, 이후 육군대학교 교수직을 제안받아 전쟁사 교관이 되었으나, 1907년 학기 도중 팔츠 지방 란다우의 바이에른 제3사단 참모로 전근되었다. 하우스호퍼는 이를 징벌적 조치로 간주하고, 육군 장교로서의 승진을 단념한 채 지리학 연구 분야로의 경력 전환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08년 11월부터 1910년 6월까지 일본 도쿄에 주재 무관으로 파견되어 일본 제국 육군을 연구하고 포병 훈련 군사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는 부인과 함께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경유하여 1909년 2월 일본에 도착했으며, 메이지 천황을 알현하고 일본의 정치 및 군부의 주요 인사들과 교류했다.
q=Tokyo|position=left
q=Imperial Japanese Army|position=right
1909년 가을에는 부인과 함께 한 달간 조선과 만주를 여행하며 철도 건설 현장을 시찰하기도 했다. 1910년 6월 러시아를 경유해 독일로 귀국했으나, 귀국 직후 심각한 폐 질환을 앓아 3년간 군 휴직을 명령받았다.
q=Korea|position=left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서부 전선에서 여단을 지휘했으며, 이 시기에 급속도로 승진하여 최종적으로 육군 소장 계급을 받았다. 그러나 전쟁 기간 동안 독일의 전쟁 준비 태세에 실망감을 느꼈다. 특히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자, 그는 미국에 대해 극심한 증오심을 품게 되었는데, "미국은 기만적이고 탐욕스러우며 위선적이고 파렴치한 맹수이다", "미국인들은 내가 깊고 본능적인 증오를 품는 유일한 사람들이다"라고 기술하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유대인에 대한 극도로 심한 반유대주의 감정을 드러냈다. 유대인 아버지를 둔 그의 부인 마르타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우스호퍼는 유대인들의 "국민, 인종, 국가에 대한 반역"을 언급하며, 유대인들이 자국을 위해 싸우지 않았고 전쟁 영리 행위로 유죄를 지었다는 거짓되지만 흔한 비방을 반복했다. 그는 독일의 병폐를 해결할 방법은 강력하고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이며, "한 사람! 그 이름에 걸맞은 왕국, 제국의 왕관을!"이라고 외치기도 했다.
2. Academic activities and geopolitical theories
군에서 은퇴한 후, 카를 하우스호퍼는 학술 분야에 뛰어들어 독일의 재건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주된 원인이 지리적 지식과 지정학적 인식이 부족하여 불리한 동맹 및 적대 관계에 놓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2.1. Doctoral studies and early academic career
1911년부터 1913년까지 병가를 내고 뮌헨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 연구에 매진하여, '대일본: 대일본의 군사력, 세계적 지위, 그리고 미래에 대한 고찰'(Dai Nihon, Betrachtungen über Groß-Japans Wehrkraft, Weltstellung und Zukunft독일어)이라는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를 통해 그는 극동 문제에 관한 독일 최고의 전문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지정학 월간지 『지정학 저널』(Zeitschrift für Geopolitik독일어, ZfG)을 공동 창간하여 제2차 세계 대전 말기까지 공동 편집자로 활동했다.
1919년, 육군 소장으로 전역한 후 그는 두 번째 박사 학위를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뮌헨 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에서 정치지리학의 강사(Privatdozent독일어)가 되었다. 1933년에는 정교수로 임명되었으나, 군인 연금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공식적인 직위와 급여를 거절했다. 1922년에는 뮌헨에 지정학 연구소를 설립하여 지정학적 사상을 널리 알리는 데 주력했다.
1925년부터 1931년, 그리고 1933년부터 1939년까지 그는 국제 정치 상황에 대한 월간 라디오 강연인 '세계 정치 월보'(Weltpolitischer Monatsbericht독일어)를 진행하며 당시 독일에서 대중적인 인물로 떠올랐고, 학계 밖에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독일 학사원의 창립 멤버였으며, 1934년부터 1937년까지 총장을 역임했다.
q=Deutsche Akademie|position=right
그는 수백 편의 논문, 서평, 주석, 부고 기사, 그리고 아시아 관련 서적을 포함한 수많은 저작을 출판했으며, 그의 저서들이 나치당 및 독일 군부의 많은 지도자들에게 전달되도록 주선했다.
2.2. Development of Geopolitik
하우스호퍼는 지리, 역사, 경제, 인구 통계, 정치학, 인류학 분야를 결합하여 '지정학'(Geopolitik독일어)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창시했다. 그는 국가를 고유한 지리와 역사에 의해 형성된 특정 민족적 특성을 지닌 개인이나 유기체로 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레벤스라움'("생활 공간" 또는 "생존권")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는데, 이는 건강하고 팽창하는 국가가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영토를 설명하는 개념이었다. 이 개념은 히틀러와 나치당에 의해 가장 공격적이고 군국주의적인 방식으로 채택되었다.
지정학은 오스발트 슈펭글러, 알렉산더 폰 훔볼트, 카를 리터, 프리드리히 라첼, 루돌프 첼렌, 핼퍼드 매킨더 등 다양한 사상가의 저술에서 영감을 받아 발전했다. 그의 이론은 주로 나치 독일의 대외 정책, 특히 '레벤스라움'의 전략과 정당화에 기여했다. 지정학은 전간기 독일 외교 정책에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핵심 사상을 제공했다.
- 유기체 국가론: 국가를 생물학적 유기체처럼 성장하고 발전하는 존재로 보는 관점.
- 레벤스라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영토 확장.
- 자급자족론: 국가 경제의 독립성과 자급자족을 강조.
- 범지역주의: 세계를 여러 지배권역으로 나누고, 특정 대국이 해당 권역을 통합하여 지배해야 한다는 사상.
- 육상권력/해상권력 이분법: 육상 기반 제국과 해상 기반 제국 간의 대립 구도.
q=Friedrich Ratzel|position=right
q=Rudolf Kjellén|position=left
하우스호퍼는 1935년 지정학을 "제국 국경 내의 토지뿐만 아니라 더 넓은 민족적 및 문화적 토지에 대한 권리, 즉 가장 넓은 의미의 토지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는 의무"로 정의했다. 그는 문화 자체가 역동적인 공간 확장에 가장 도움이 되는 요소라고 보았으며, 군사적 또는 상업적 힘으로는 불가능했던 확장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도시화가 국가의 쇠퇴 징후라고 주장하며, 이는 토지 통제력, 출산율, 중앙집권적 통치의 효율성 감소를 증명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국가의 존재는 생활 공간에 달려 있었으며, 이를 추구하는 것이 모든 정책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독일은 인구 밀도가 높았지만, 과거 식민 강대국들은 훨씬 낮은 밀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자원 부유 지역으로의 독일 확장이 사실상 의무적이라고 주장했다. 공간은 장거리 무기를 가진 적대적인 이웃 국가로부터의 초기 공격에 대한 군사적 보호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국경에 있는 완충 지대나 중요하지 않은 국가들이 독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필요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하우스호퍼는 작은 국가들의 존재가 국제 시스템의 정치적 퇴보와 무질서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독일 주변의 작은 국가들은 독일의 핵심 질서 내로 편입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이들 국가들은 실제적인 자율성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작으므로 독일 내에서 보호와 조직화를 통해 더 나은 서비스를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럽에서는 벨기에, 네덜란드, 포르투갈, 덴마크, 스위스, 그리스 그리고 '해체된 동맹'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보았다.
하우스호퍼의 자급자족론은 지구가 인구로 포화 상태가 되어 더 이상 모든 사람에게 식량을 공급할 수 없을 것이라는 준-맬서스주의적 사상에 기반을 두었다. 본질적으로 생산성 증가는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하우스호퍼와 뮌헨 지정학 학파는 결국 '레벤스라움'과 자급자족 개념을 1914년의 국경선과 "햇살 아래의 한자리"를 훨씬 넘어 '신유럽 질서'로, 나아가 '신 아프리카-유럽 질서'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유라시아주의' 질서로 확장했다。이 개념은 미국의 먼로 독트린과 국가 및 대륙의 자급자족 사상에서 가져온 범지역주의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식민지 확장을 위한 추진력을 미래 지향적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지정학자들은 이를 경제적 필요성이라기보다는 명예의 문제로 보아 기존 식민 강대국에 압력을 가했다. 근본적인 동기는 경제적이 아닌 문화적, 정신적이었다.
하우스호퍼는 오늘날 '유라시아주의자'로 불리는 주창자로서, 영미권 강대국의 잠재적 지배 영향력을 상쇄하기 위해 독일-러시아 간의 헤게모니와 동맹 정책을 옹호했다. 범지역주의는 경제적 개념을 넘어선 전략적 개념이기도 했다. 하우스호퍼는 영국 지정학자 핼퍼드 매킨더가 제시한 심장 지대 이론의 전략적 개념을 인정했다. 만약 독일이 동유럽과 이어서 러시아 영토를 통제할 수 있다면, 적대적인 해상권이 접근할 수 없는 전략적 지역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탈리아 및 일본과의 동맹은 유라시아에 대한 독일의 전략적 통제를 더욱 강화하여, 이들 국가들이 독일의 고립된 지위를 보호하는 해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q=Halford J. Mackinder|position=right
미국 해군 전문가 앨프리드 세이어 마한과 영국 지리학자 핼퍼드 J. 매킨더의 지정학 이론에 명목상 기반을 둔 독일 지정학은 더 오래된 독일 사상을 추가했다. 프리드리히 라첼과 그의 스웨덴 제자 루돌프 첼렌이 가장 강력하게 주창한 이 사상에는 국가의 유기적 또는 의인화된 개념, 그리고 사회의 상위 조직화를 통한 자급자족의 필요성이 포함된다. 독특한 독일 지정학의 뿌리는 카를 리터의 저술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는 훗날 라첼이 정교화하고 하우스호퍼가 받아들인 국가의 유기적 개념을 처음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정복이 국가 성장에 생물학적 필수 조건이므로 다른 국가들의 존재를 희생하더라도 '레벤스라움'을 정당화했다.
q=Alfred Thayer Mahan|position=left
라첼의 저술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독일 산업주의의 성장과 그에 따른 시장 탐색과 맞물려 영국과의 경쟁을 초래했다. 그의 저술은 제국주의 확장을 위한 환영받는 정당화로 작용했다. 마한의 영향을 받은 라첼은 독일 해군력 확장을 열망하며, 해상권은 무역 이익으로 상선대 비용을 충당하여 스스로 유지될 수 있지만 육상권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 동의했다. 하우스호퍼는 경제 지리학 교수였던 자신의 아버지와 친구였던 라첼에게 영향을 받았고, 해상 및 육상 강대국 간의 구분에 대한 라첼의 사상을 자신의 이론에 통합하며, 양쪽을 모두 가진 국가만이 이 갈등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우스호퍼의 지정학은 라첼과 첼렌의 지정학을 확장한다. 후자 두 명은 지정학을 지도자를 위해 공간 속에서 국가를 유기체로 보는 것으로 개념화했지만, 하우스호퍼의 뮌헨 학파는 전쟁과 제국 설계와 관련하여 지리학을 특별히 연구했다. 그리하여 이전 지정학자들의 행동 규칙은 '레벤스라움'과 세계 권력을 위한 역동적인 규범적 교리로 바뀌었다.
3. Relationship with the Nazi regime
카를 하우스호퍼와 나치 정권의 관계는 복잡하고 모순적이었다. 그의 지정학 이론이 나치 이데올로기에 깊은 영향을 미쳤지만, 그 자신은 당원이 아니었으며, 정권의 일부 정책과 충돌하기도 했다.
3.1. Influence on Hitler and Nazi ideology
1919년 하우스호퍼는 젊은 루돌프 헤스와 친분을 쌓았는데, 헤스는 그의 학술 조수가 되었고 후에 나치당의 부총통으로 히틀러에 이어 두 번째 권위를 가진 인물로 성장했다. 1921년에는 아돌프 히틀러와 만나게 된다.

1923년 히틀러가 실패한 뮌헨 폭동으로 투옥되자, 루돌프 헤스는 지도자와 함께 란츠베르크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하우스호퍼는 1924년 6월 24일부터 12월 12일까지 매주 수요일 뮌헨에서 란츠베르크까지 왕복 100 km를 오가며 헤스와 히틀러에게 집중적인 개인 지도를 제공했다. 학자 홀거 헤르비히에 따르면, "마른 스펀지처럼 히틀러는 하우스호퍼가 제공하는 것을 흡수했다"고 한다. 히틀러의 가장 다작적인 전기 작가인 요아힘 페스트는 "하우스호퍼와 히틀러를 연결시킨 것이 루돌프 헤스가 국가사회주의의 창조와 면모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개인적 공헌이다"라고 평가했다. 하우스호퍼의 아들 알브레히트는 그의 아버지가 헤스와 히틀러에게 가장 강력하게 기여한 것은 군인이자 학자로서의 상당한 신뢰성이었다고 보았다.
q=Landsberg Prison|position=left
히틀러는 하우스호퍼의 '레벤스라움' 이론에 흥미를 느껴 "생존권을 가지지 못한 민족인 독일인은 생존을 위해 군사적 확장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나치당의 정책에 도입했다. 그러나 하우스호퍼는 1945년 10월 17일 뉘른베르크에서 증언할 당시 히틀러가 자신의 지정학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이해하기 위한 올바른 전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확신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프리드리히 라첼과 같은 지정학의 기초를 강의하려 했으나 히틀러가 거부했다고 전한다. 하우스호퍼는 이를 히틀러가 "정규 교육을 받은 자에 대해 반독학자 특유의 불신감을 품고 있다"는 점 때문이라고 보았다.
대부분의 하우스호퍼 연구자들은 그가 최소한 자신의 가르침과 저술을 통해 히틀러와 나치에게 지적 정당성을 부여했으며,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이 전쟁과 테러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할 정치적, 철학적 어휘를 제공했다는 점에 동의한다. 전후 하우스호퍼는 자신이 히틀러를 가르쳤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나치당이 헤스의 지정학 연구를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하우스호퍼는 히틀러와 나치 지도자들과의 관계에 대해 히틀러를 헤스가 설명한 지정학 원리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반교육받은 인물로 보았고,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외무장관(재임 1938-1945)을 히틀러의 마음속에서 지정학을 가장 크게 왜곡한 인물로 보았다. 그는 자신이 수많은 선전 임무에 헤스와 동행하고 나치와 일본 지도자들 간의 협의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나치들은 단지 반쯤 개발된 아이디어와 표어만을 붙잡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더욱이 나치당과 정부에는 지정학을 수용할 만한 공식 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하우스호퍼의 이론은 선택적으로 채택되고 제대로 해석되지 못했다. 궁극적으로 하우스호퍼는 헤스와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독일 외무장관(재임 1932-1938)만이 지정학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인정했다.
조지타운 대학교의 지정학 교수이자 학장이었던 에드먼드 A. 월시 신부는 뉘른베르크 재판 준비를 위해 연합군 승리 후 하우스호퍼를 심문한 뒤, 히틀러와 나치들이 지정학을 심하게 왜곡했다는 하우스호퍼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작은 국가들이 존재할 권리가 없다고 선언한 히틀러의 연설과 나치들이 하우스호퍼의 지도, 언어, 주장을 사용한 것을 인용했다. 비록 다소 왜곡되었을지라도, 월시 신부는 그것만으로도 하우스호퍼의 지정학이 나치 범죄에 연루되었다고 보기에 충분하다고 느꼈다.
하우스호퍼와 정치적 극단주의와의 연관성에 대한 더 심각한 주장들이 수년 동안 제기되었다. 루이 포웰스는 자신의 저서 『구르지예프 씨』에서 하우스호퍼를 그리스-러시아 신비주의자 게오르기 이바노비치 구르지예프의 전 학생으로 묘사한다. 다른 이들은 하우스호퍼가 브릴 협회를 창설하고 툴레 협회의 비밀 회원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우스호퍼가 『나의 투쟁』을 공동 집필했거나 집필을 도왔다는 이론도 제기되었다. 또한 하우스호퍼가 헤스의 아버지이거나, 반대로 두 사람이 연인이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홀거 헤르비히는 이러한 입증되지 않은 주장들을 "신화 만들기"와 "소문"으로 일축했다.
하우스호퍼는 전후 이러한 비난들 중 일부를 인지하고 『나의 투쟁』 집필을 도왔다는 주장을 부인하며, 자신이 이 책의 존재를 인쇄된 후에야 알았고, 한 번도 읽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월시 신부는 학자들이 이후 밝혀냈듯이, 하우스호퍼가 히틀러를 직접 돕지 않았더라도, 히틀러가 이전에 했던 연설과 비교했을 때 『나의 투쟁』에는 명백히 새로운 요소들이 나타났다는 것을 발견했다. '레벤스라움', 종심 방어를 위한 공간, 자연 국경에 대한 호소, 육상 및 해상 권력의 균형, 그리고 군사 전략에 대한 지리적 분석과 같은 지정학적 아이디어들이 히틀러가 투옥된 시점과 『나의 투쟁』이 출판된 시점 사이에 그의 사상에 스며들었다. 특히 동유럽 정책에 대한 제14장은 하우스호퍼가 히틀러와 헤스가 투옥되어 있는 동안 가져다준 자료들의 영향을 명백히 보여준다. 전시 폴란드 총독이었던 한스 프랑크는 히틀러가 자신에게 "란츠베르크는 국가 비용으로 받은 나의 대학 교육이었다"고 말했다고 인용했다.
3.2. Position and conflicts under Nazism
카를 하우스호퍼는 나치당원이 아니었으며, 당과의 이견을 표출하기도 했다. 그는 나치 운동 내의 좌익 사회주의 인물들(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이끌던)과의 접촉과 독일-러시아 동맹을 본질적으로 옹호했기 때문에 의심을 받았다. 나치 좌익은 독일 공산당과 일부 지도자들, 특히 에른스트 니키쉬, 율리우스 에볼라, 에른스트 윙거, 프리드리히 힐셔 등 "보수 혁명" 인물들이 주창한 민족 볼셰비즘 철학에 영향을 받은 인사들과 일부 연관이 있었다. 하우스호퍼는 총통에 대한 충성을 표명하고 반유대주의적 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그의 주된 강조점은 항상 인종보다는 공간에 있었다. 그는 인종적 결정론보다는 환경 결정론을 믿었다. 개인적인 유대인 혐오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가 정책으로서의 반유대주의와는 거리를 두었는데, 특히 그의 아내가 절반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우스호퍼는 1933년 이후 자신이 쓴 많은 내용이 강압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아내는 헤스의 영향력으로 보호받아야 했고(그녀는 "명예 독일인" 지위를 부여받았다), 그의 아들과 손자는 두 달 반 동안 투옥되었다.
q=Scotland|position=left
하우스호퍼와 나치 정권 사이의 접촉에 대한 더 모호한 각도들도 여러 작가들에 의해 탐구되었다. 하우스호퍼와 구르지예프의 오컬트와의 연관성, 혹은 그가 선불교를 공부했거나 티베트 라마승들에 의해 입문되었다는 주장들은 논쟁의 대상이다.
하우스호퍼가 나치 이데올로기에 미친 영향은 1943년 단편 다큐멘터리 선전 영화인 파괴 계획에 드라마화되어 아카데미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4. Personal life and family
하우스호퍼의 사적인 삶은 그의 공적인 역할만큼이나 그의 시대적 배경과 깊이 얽혀 있었다.
4.1. Family background and marriage
카를 하우스호퍼는 예술가이자 학자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막스 하우스호퍼 주니어는 유명한 경제학 교수, 정치인, 학술 및 문학 작가였다. 그의 조부는 풍경화가 막스 하우스호퍼 시니어였다. 1896년, 그는 마르타 마이어-도스(1877-1946)와 결혼했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유대인이었다. 마르타의 가족은 그의 아버지 대에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들은 두 아들,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와 하인츠 하우스호퍼(1906-1988)를 두었다. 마르타의 사촌으로는 법학자 막스 에른스트 마이어가 있다.
4.2. Son Albrecht and the July 20 plot
장남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는 아버지처럼 지리학자였으며, 혼혈 유대인이라는 특이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제자였던 루돌프 헤스의 추천으로 대학 교수가 될 수 있었다. 알브레히트는 외교관으로도 활동했으나, 후에 혼혈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반나치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944년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는 7월 20일 히틀러 암살 계획에 연루되었다. 이 사건으로 카를 하우스호퍼는 1944년 7월 28일 체포되어 한 달 동안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알브레히트는 숨어 지내다가 1944년 12월 7일 체포되어 베를린의 모아비트 감옥에 수감되었다. 카를은 아들을 위해 히틀러에게 자비를 구하는 개인 서한을 썼지만, 끝내 보내지 못했다.
q=Moabit Prison, Berlin|position=left
q=Dachau concentration camp|position=right
베를린 전투를 며칠 앞둔 1945년 4월 22일에서 23일 밤 사이, 알브레히트는 다른 수감자들(그 중에는 클라우스 본회퍼도 있었다)과 함께 친위대 죽음의 부대에 의해 감옥에서 끌려나가 요제프 괴벨스의 명령으로 총살당했다. 그의 동생 하인츠가 알브레히트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 알브레히트는 마지막 날들을 보내며 자신의 삶과 아버지의 업적, 그리고 전쟁의 의미를 이해하려 노력하며 쓴 수십 편의 시가 담긴 서류 뭉치를 움켜쥐고 있었다. 이 80편의 시는 후에 모아비트 소네트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그 중 38번째 소네트인 '아버지'에서 알브레히트는 나치의 잔혹한 만행을 촉발하는 데 일조한 아버지를 비난하며 "나의 아버지가 봉인을 뜯었네. 그는 악의 숨결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지 못했네. 그는 악마가 세상으로 날아오르게 했네."라고 썼다.
카를 하우스호퍼는 알브레히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나치들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전쟁이 독일을 폐허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우스호퍼는 자신의 사랑하는 뮌헨의 파괴를 "뉴욕의 금융 유대인들" 탓으로 돌렸다. 이는 그의 개인적인 비극에도 불구하고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5. Later life and death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하우스호퍼의 운명은 그의 복잡한 역사적 역할과 얽혀 파멸에 이르렀다.
5.1. Post-war interrogation
그가 그토록 혐오했던 미군에 의해 여러 차례 체포되었다. 1945년 9월 24일부터 카를 하우스호퍼는 뉘른베르크 재판 검사 로버트 H. 잭슨을 대신하여 에드먼드 A. 월시 신부에게 비공식적으로 심문을 받았다. 이는 하우스호퍼가 나치 전쟁 범죄 공모 혐의로 기소되어야 하는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함이었다. 월시 신부는 결국 하우스호퍼가 "교육을 전쟁 준비로 타락시킨 지정학의 역할"을 들어 그가 나치 전쟁 범죄 공모에 법적, 도덕적으로 유죄라고 잭슨에게 보고했다. 그는 하우스호퍼와 그의 동료들이 "더 잘 알려진 전쟁 범죄자들과 기본적으로 같은 만큼 유죄"라고 비난했다. 월시 신부는 뉘른베르크 재판에 대한 그의 회고록에서 "카를 하우스호퍼의 비극"은 그가 학문적 학술을 "국가화"하고 지정학을 "국제적 약탈에 대한 과학적 근거와 정당성"을 제공하는 무기로 전환하는 데 참여한 것이라고 추가로 주장했다.
일본어 원문에서도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연합국들 사이에서 히틀러의 침략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고 언급한다. 독일 패전 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중요한 전쟁 범죄자로 그를 심판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고령에 병약한 상태였고 히틀러 정책에 대한 그의 직접적인 관여를 입증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기소가 보류되었다. 하우스호퍼는 자신의 이론이 나치 독일에 사용된 것에 대해 "자신은 학자이기보다 독일인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5.2. Suicide
1946년 3월 10일에서 11일 밤, 카를 하우스호퍼는 부인과 함께 펠/암머제에 있는 하르트시멜호프 사유지 내 외딴 골짜기에서 동반자살했다. 두 사람 모두 비소를 마셨고, 그의 부인은 그 후 나무 가지에 목을 매달았다.

q=Pähl|position=left
하우스호퍼는 아들 하인츠가 시신을 찾을 수 있도록 자세한 지도를 남겼다. 유서에서 그는 "어떤 형태의 국가나 교회 장례식도, 부고나 묘비명, 묘의 식별도 원치 않는다... 나는 잊히고 잊히기를 원한다"고 선언했다. 월시 신부는 그들의 무덤을 방문하고 자신의 일기에 "외딴 골짜기에서 홀로 밤에 맞이한 이 죽음, 마지막 지정학자에게 닥친 깊은 비극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우스호퍼의 가르침에 대해 미국에 19년 동안 가르치고 경고한 내가 오늘 바이에른의 가장 외딴 곳 중 한 곳에서 그의 자살한 시신 위에 무릎 꿇고 있다니, 얼마나 헤아릴 수 없는 운명인가!"라고 적었다.
6. Legacy and reception
카를 하우스호퍼의 지정학 사상과 활동은 독일의 대외 정책과 국제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후대 지정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이론이 나치 독일의 침략 정책과 홀로코스트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끊임없는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6.1. Influence
하우스호퍼는 소비에트 연방과 독일의 동맹을 강력히 주장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이끌던 나치 좌파와 에른스트 니키쉬와 같은 민족 볼셰비즘 철학, 그리고 일부 독일 공산당 간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 주재 무관으로서의 경험은 그가 지정학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는 대체로 친일적인 인물이었다. 일본에 대해서는 주요 저서인 『태평양 지정학』(Geopolitik des pazifischen Ozeans독일어) 외에도 주로 일본의 군사력, 아시아에서의 패권, 경제 발전 등에 관한 다수의 저작을 남겼다. 또한 메이지 천황에 관한 저서(Mutsuhito, Kaiser von Japan독일어, 1933년)도 있다.
하우스호퍼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일본을 유럽의 독일에 비유했으며, 나아가 독소 동맹에 일본을 포함할 것을 제안했다. 따라서 만주 이북으로의 북진론이나 중일 전쟁에 반대하는 남진론자로서 일본군에 대한 공작 활동을 펼쳤으나 이는 실패로 끝났다. 일본 체류 중에는 일본어는 물론 한국어와 중국어를 익혔고, 널리 아시아를 여행하며 힌두교와 불교 경전, 그리고 아리아인이 많이 거주하는 북인도와 이란에도 해박하여 아시아 신비주의의 권위자이기도 했다.
하우스호퍼는 세계를 여러 블록으로 나누어, 미국, 소련, 일본, 독일 등이 각 지역에서 주요 지위를 차지하며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세력 균형 이론에 기반하여 세계적인 세력 균형을 확립할 것을 제안한 것이지만, 그 모든 것을 총괄하는 국가가 독일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배경이 된 알렉산드르 두긴의 신유라시아주의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q=Aleksandr Dugin|position=right
6.2. Criticism and controversies
하우스호퍼의 지정학은 주로 '레벤스라움'의 전략과 정당화에서 나치 외교 정책에 기여했다. 그의 이론은 나치 독일의 침략 정책과 홀로코스트를 정당화하는 데 활용되어 비판의 대상이 된다. 많은 학자들은 그가 자신의 가르침과 저술을 통해 히틀러와 나치에게 지적 정당성을 부여했으며,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이 전쟁과 테러의 목표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할 정치적, 철학적 어휘를 제공했다고 본다.
하우스호퍼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자신이 히틀러를 가르쳤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나치당이 헤스의 지정학 연구를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히틀러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반쯤 개발된 개념과 표어만을 취사선택했다고 주장했지만, 에드먼드 A. 월시 신부와 다른 학자들은 히틀러의 연설과 『나의 투쟁』에 나타난 지정학적 개념들이 하우스호퍼의 영향을 명백히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그의 아들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는 '아버지'라는 시를 통해 아버지 카를이 "봉인을 뜯었고, 악의 숨결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악마가 세상으로 날아오르게 했다"고 비판하며, 아버지의 이론이 나치즘의 재앙을 초래하는 데 기여했음을 통렬하게 지적했다. 이러한 비판은 개인적인 비극에도 불구하고 지정학적 사상이 전체주의 정권에 미친 파괴적인 영향에 대한 중요한 증언으로 남아 있다.
하우스호퍼는 나치당원이 아니었으며, 당의 정책에 대해 이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그는 인종적 결정론보다는 환경적 결정론을 믿었고, 개인적으로 반유대주의적 발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내가 혼혈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국가 정책으로서의 반유대주의와는 거리를 두려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은 아들 알브레히트의 비극적 죽음을 막지 못했으며, 그의 이론이 결국 나치즘의 폭력성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7. Works
카를 에른스트 하우스호퍼의 주요 저작 및 출판물은 다음과 같다.
- 일본 및 아일본 지역의 지리적 발전에 있어 독일의 역할과 전쟁 및 군사 정책을 통한 그 촉진(Der deutsche Anteil an der geographischen Erschließung Japans und des subjapanischen Erdraumes und deren Förderung durch Krieg und Wehrpolitik독일어, 1913년)
- 대일본: 일본의 군사력, 세계에서의 지위, 그리고 미래에 대한 고찰(Dai Nihon: Betrachtungen über Gross-Japans Wehrkraft, Weltstellung und Zukunft독일어, 1913년)
- 일본 제국의 지리적 발전(Das Japanische Reich in seiner geographischen Entwicklung독일어, 1921년)
- 일본 및 일본인(Japan und die Japaner독일어, 1923년)
- 동남아시아의 자결을 향한 재도약(Südostasiens Wiederaufstieg zur Selbstbestimmung독일어, 1923년)
- 태평양 지정학: 지리와 역사 간의 상호 관계 연구(Geopolitik des Pazifischen Ozeans: Studien über die Wechselbeziehungen zwischen Geographie und Geschichte독일어, 1924년)
- 지리적 및 정치적 의미의 국경(Grenzen in ihrer geographischen und politischen Bedeutung독일어, 1927년)
- 지정학의 구성 요소(Bausteine zur Geopolitik독일어, 1928년)
- 메이지 시대부터 현재까지 일본 제국의 재건(Japans Reichserneuerung von der Meiji-Ära bis heute독일어, 1930년)
- 범-이념의 지정학(Geopolitik der Pan-ideen독일어, 1931년)
- 강대국의 피안(Jenseits der Großmächte독일어, 카를 하우스호퍼 편집, 1932년)
- 세계에서의 국가사회주의 사상(Der nationalsozialistische Gedanke in der Welt독일어, 1933년)
- 세계 강대국 및 제국으로서 일본의 발전(Japans Werdegang als Weltmacht und Empire독일어, 1933년)
- 무쓰히토: 일본의 카이저(Mutsuhito - Kaiser von Japan독일어, 1933년)
- 오늘날의 세계 정치(Weltpolitik von heute독일어, 1934년)
- 공간을 초월하는 힘(Raumüberwindende Mächte독일어, 1934년)
- 나폴레옹 1세(Napoleon I.독일어, 1935년)
- 키치너(Kitchener독일어, 1935년)
- 포슈(Foch독일어, 1935년)
- 세계 대전 전후의 강대국(Die Großmächte vor und nach dem Weltkrieg독일어, 카를 하우스호퍼, 루돌프 첼렌 공저; 카를 하우스호퍼, 후고 하시거, 오토 마울, 에리히 옵스트 공편, 1935년)
- 세계 해양과 세계 강대국(Weltmeere und Weltmächte독일어, 1937년)
- 격동하는 세계: 독일 지정학자들의 시사 보고서(Welt in Gärung. Zeitberichte deutsche Geopolitiker독일어, 카를 하우스호퍼, 구스타프 포흘러-하우케 공편, 1937년)
-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독일 문화 정책(Deutsche Kulturpolitik im indopazifischen Raum독일어, 1939년)
- 지정학적 기초(Geopolitische Grundlagen독일어, 1939년)
- 일본은 제국을 건설한다(Japan baut sein Reich독일어, 1941년)
- 독일 민족의 형성: 다양한 부족에서 국가의 통일로(Das Werden des deutschen Volkes: Von d. Vielfalt d. Stämme zur Einheit d. Nation독일어, 1941년)
- 대륙 블록: 중앙유럽, 유라시아, 일본(Der Kontinentalblock: Mitteleuropa, Eurasien, Japan독일어, 1941년)
- 국방 지정학: 국방학의 지리학적 기초(Wehr-Geopolitik: Geographische Grundlagen einer Wehrkunde독일어, 1941년)
- 제국: 서양에서의 대독일 발전(Das Reich: Großdeutsches Werden im Abendland독일어, 1943년)
- 지정학에 대하여(De la géopolitique프랑스어, 1986년)
- 카를 에른스트 하우스호퍼 소장의 태평양 지정학 영어 번역 및 분석: 지리와 역사 간의 관계 연구(English Translation and Analysis of Major General Karl Ernst Haushofer's Geopolitics of the Pacific Ocean: Studie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Geography and History영어, 2002년)
8. Honors
- 일본 훈이등 서보장 (193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