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1.1. 출생과 가족
조르주 뱅자맹 클레망소는 1841년 9월 28일 프랑스 방데주 무이롱앙파레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소피 외카리 고트로(Sophie Eucharie Gautreau프랑스어, 1817~1903)는 위그노 가문 출신이었고, 아버지 뱅자맹 클레망소(Benjamin Clemenceau프랑스어, 1810~1897)는 대대로 의사 집안이었으나 직접 의업에 종사하지 않고 토지와 투자로 생계를 유지했다. 뱅자맹 클레망소는 열렬한 정치 활동가로, 1851년과 1858년에 체포되어 잠시 수감되기도 했다. 그는 아들에게 배움에 대한 사랑, 급진주의 정치에 대한 헌신, 그리고 가톨릭교회에 대한 증오를 심어주었다. 클레망소의 동생으로는 변호사 알베르 클레망소(Albert Clemenceau프랑스어, 1861~1955)가 있다.
어머니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지만, 아버지는 무신론자였으며 자녀들이 종교 교육을 받지 않도록 주장했다. 클레망소는 종교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평생 무신론자로 살면서도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가톨릭교회와 정치적 가톨릭 세력에 맞서 싸운 반교권주의 또는 "급진주의" 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교회와 국가가 엄격하게 분리된다면 가톨릭교회를 약화시키기 위한 억압적인 조치를 지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1.2. 교육
클레망소는 낭트의 리세에서 학업을 마친 후 1858년에 프랑스 바칼로레아 문학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파리로 가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1865년에 "해부학적 요소의 생성에 관하여(De la génération des éléments anatomiques프랑스어)"라는 논문으로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파리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3. 미국에서의 경험
파리에서 젊은 클레망소는 정치 활동가이자 작가로 활동했다. 1861년 12월, 그는 친구들과 주간 뉴스레터 르 트라바이유(Le Travail프랑스어)를 공동 창간했다. 1862년 2월 23일, 그는 시위를 선동하는 포스터를 붙였다는 이유로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마자스 감옥에서 77일간 수감되었다. 이 무렵 클레망소는 프랑스 혁명가 오귀스트 블랑키와 또 다른 공화주의 활동가 오귀스트 셰르르-케스트네르를 감옥에서 방문하며 나폴레옹 3세 정권에 대한 증오를 더욱 깊게 하고 열렬한 공화주의를 발전시켰다.
1865년 5월 13일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여러 문학 잡지를 창간하고 많은 기사를 썼는데, 대부분이 나폴레옹 3세의 제정 체제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실패한 연애 후, 제국주의 정부 요원들이 반체제 인사들을 단속하여 대부분을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의 섬 형벌 시스템으로 보내기 시작하자, 클레망소는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클레망소는 미국 남북 전쟁 이후인 1865년부터 1869년까지 뉴욕시에서 활동했다. 그는 의사로 개업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파리 신문 르 탕(Le Temps프랑스어)의 정치 저널리즘에 할애했다. 그는 매사추세츠주 그레이트 배링턴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고, 코네티컷주 스탬퍼드에 있는 사립 여학교에서 승마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그곳에서 미래의 아내를 만났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뉴욕에서 제국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프랑스 망명 클럽에 가입했다.
저널리즘 활동의 일환으로 클레망소는 남북 전쟁 이후 국가의 회복 과정, 미국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 그리고 노예제도 종식과 관련된 인종 문제들을 다루었다. 미국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는 프랑스의 제국주의 정권과 대비되는 미국의 민주적 이상에 대한 강한 믿음과 함께, 훗날 그의 정치적 경력의 특징이 될 정치적 타협의 감각을 갖게 되었다.
2. 언론 활동 및 초기 정치 경력
2.1. 언론인 및 활동가

클레망소는 파리에서 정치 활동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1861년 12월 주간지 르 트라바이유(Le Travail프랑스어)를 공동 창간했다. 1862년 2월 23일, 시위를 선동하는 포스터를 붙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77일간 수감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여러 문학 잡지를 창간하고 나폴레옹 3세의 제정 체제를 비판하는 기사를 다수 집필했다. 제국주의 정부의 탄압이 심해지자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 교사,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중 스당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프랑스 제2제국이 붕괴된 1870년, 클레망소는 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방데주에서 다시 의사로 활동한 후, 몽마르트를 포함하는 파리 18구의 시장으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18구의 국민의회 의원으로도 선출되었다.
2.2. 정치 입문
1871년 3월 파리 코뮌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 클레망소는 코뮌의 급진적인 지도자들과 보수적인 프랑스 정부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코뮌은 그가 시장으로서의 법적 권한이 없다고 선언하고 18구청을 점거했다. 그는 파리 코뮌 의회 선거에 출마했지만 800표 미만을 얻어 당선되지 못했고, 코뮌 통치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1871년 5월 프랑스군에 의해 코뮌이 진압될 당시 보르도에 있었다.
코뮌의 몰락 후, 그는 1871년 7월 23일 클리냥쿠르 지구의 파리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1876년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는 처음에는 서기 및 부회장을 역임했고, 1875년에는 회장이 되었다.
1876년, 클레망소는 국민의회를 대체한 대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18구에서 당선되었다. 그는 극좌파에 합류했으며, 그의 에너지와 날카로운 웅변은 그를 급진주의파의 지도자로 빠르게 만들었다. 1877년 1877년 5월 16일 위기 이후, 그는 알베르 드 브로이 공작 내각을 비난한 공화주의 다수파 중 한 명이었다. 클레망소는 5월 16일 사건의 발현이었던 반공화주의 정책에 대한 저항을 이끌었다. 1879년, 브로이 내각의 기소를 요구하며 명성을 얻었다.
1876년부터 1880년까지 클레망소는 누벨칼레도니로 추방된 1871년 파리 코뮌의 혁명 정부 구성원인 수천 명의 코뮌 가담자들에 대한 일반 사면을 주요하게 옹호했다. 그는 다른 급진주의자들과 시인이자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빅토르 위고, 그리고 늘어나는 공화주의자들과 함께 여러 차례 실패한 제안들을 지지했다. 마침내 1880년 7월 11일 일반 사면이 채택되었고, 그의 친구 루이즈 미셸을 포함한 나머지 추방된 코뮌 가담자들이 프랑스로 돌아오면서 클레망소가 구상했던 "화해"가 시작될 수 있었다.

1880년, 클레망소는 자신의 신문 라 쥐스티스(La Justice프랑스어, '정의')를 창간했는데, 이 신문은 파리 급진주의의 주요 기관이 되었다. 이때부터 쥘 그레비 대통령 재임 기간(1879~1887) 내내 그는 스스로는 공직을 맡지 않으면서도 "내각의 파괴자(le Tombeur de ministères프랑스어)"로 널리 알려졌다. 대의원에서 극좌파를 이끌며, 그는 쥘 페리 총리의 식민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그는 도덕적인 이유와 함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독일에 합병된 알자스-로렌을 되찾는 "독일에 대한 복수"라는 더 중요한 목표로부터의 이탈이라는 이유로 식민 정책을 반대했다. 1885년, 청불 전쟁의 진행에 대한 그의 비판은 그해 페리 내각의 붕괴에 크게 기여했다.

1885년 프랑스 총선에서 그는 강력한 급진주의 프로그램을 옹호하며 파리의 옛 지역구와 바르주 드라기냥 지역구 모두에서 당선되었고, 후자를 대의원에서 대표하기로 선택했다. 자신이 전복시킨 내각을 대체할 내각 구성을 거부한 그는 1886년 샤를 드 프레시네 총리를 권좌에 유지시키는 데 우파를 지지했으며, 조르주 에르네스트 불랑제를 프레시네 내각의 전쟁 장관으로 포함시키는 데 책임이 있었다. 불랑제 장군이 야심찬 야심가임을 드러내자, 클레망소는 지지를 철회하고 이질적인 불랑제 운동의 강력한 반대자가 되었다.
다니엘 윌슨 스캔들을 폭로하고 개인적인 직설적인 화법을 통해 클레망소는 1887년 쥘 그레비의 프랑스 대통령직 사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모리스 루비에 내각의 몰락 후 그레비의 내각 구성 요청을 거절했으며,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샤를 플로케, 쥘 페리, 샤를 드 프레시네에게 투표하지 말라고 조언하여 "외부인"인 마리 프랑수아 사디 카르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데 주로 책임이 있었다.
불랑제주의를 둘러싼 급진당의 분열은 그의 입지를 약화시켰고, 불랑제주의의 붕괴는 온건 공화주의자들이 그의 도움이 필요 없게 만들었다. 파나마 스캔들에서 코르넬리우스 헤르츠와의 관계 때문에 클레망소가 일반적인 의심을 받게 되면서 또 다른 불운이 닥쳤다. 민족주의 정치인 폴 데룰레드가 제기한 부패 혐의에 대응하여 클레망소는 1892년 12월 23일 그와 결투를 벌였다. 여섯 발의 총탄이 발사되었지만, 양측 모두 부상당하지 않았다.

클레망소는 프랑스 급진주의의 주요 대변인으로 남아 있었지만, 러불 동맹에 대한 그의 적대감은 그의 인기를 너무나 떨어뜨려 1893년 프랑스 총선에서 1876년 이래 계속 유지했던 대의원 의석을 잃게 되었다.
2.3. 정치적 이상과 급진주의
클레망소는 반교권주의자이자 정교분리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그는 파리 코뮌 가담자들의 사면을 지지했으며, 알자스-로렌의 반환을 위해 활동했다. 또한 식민주의에 반대하며 쥘 페리 내각을 무너뜨리는 데 기여했다. 독일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그의 정치적 사상의 핵심을 이루었다.
3. 드레퓌스 사건
1893년 선거 패배 이후 거의 10년 동안 클레망소는 자신의 정치 활동을 언론에 한정했다. 그의 정치적 경력은 길고 지루했던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해 더욱 빛을 발했는데, 그는 에밀 졸라의 지지자이자 반유대주의 및 민족주의 캠페인의 반대자로서 이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드레퓌스 사건 내내 클레망소는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665개의 기사를 발표했다.
1898년 1월 13일, 클레망소는 자신이 소유하고 편집하던 파리 일간지 로로르(L'Aurore프랑스어)의 1면에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J'Accuse...!프랑스어)"를 게재했다. 그는 프랑스 대통령 펠릭스 포르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 형식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 기사를 실어 드레퓌스 사건의 유명한 부분이 되도록 결정했다. 그는 에밀 졸라, 아나톨 프랑스, 장 조레스와 같은 지식인들과 함께 드레퓌스의 결백을 위해 가톨릭교회와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과 맞서 싸웠다.
4. 상원 의원 및 첫 번째 총리직
4.1. 바르 주 상원의원
1900년, 클레망소는 라 쥐스티스에서 물러나 주간지 르 블록(Le Bloc프랑스어)을 창간했으며, 사실상 그가 유일한 기여자였다. 르 블록의 발행은 1902년 3월 15일까지 계속되었다. 1902년 4월 6일, 그는 이전에 프랑스 상원을 보수주의의 온상으로 간주하여 폐지를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르주 드라기냥 지역구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20년까지 드라기냥 상원의원으로 재직했다.
클레망소는 상원에서 독립 급진주의자들과 함께 앉았고 자신의 입장을 완화했지만, 반교권주의 공화주의 투쟁을 주도한 에밀 콩브 총리의 급진 사회주의 내각을 여전히 강력히 지지했다. 1903년 6월, 그는 자신이 창간한 신문 로로르의 운영을 맡았다. 그 안에서 그는 드레퓌스 사건을 재심하고 프랑스에서 정교분리를 확립하기 위한 캠페인을 이끌었다. 후자는 1905년 프랑스 교회와 국가 분리법에 의해 실행되었다.
클레망소가 관여했던 또 다른 사회 정의 운동은 청년 튀르크당이 압뒬하미트 2세 정부에 맞서 싸우는 것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당국이 아흐메트 리자의 메슈베레트(Meşveret튀르키예어)를 폐간하기로 결정했을 때, 주로 클레망소를 비롯한 많은 언론인들이 윌디즈의 소송에 맞서 그의 노력을 지지하기로 선택했다. 클레망소의 언론 자유 보호 사명을 존중한 프랑스 검열관들은 터키어판 신문만 금지하고 프랑스어 보충판은 계속 발행하도록 허용했다.
4.2. 제1차 내각 (1906-1909)
1906년 3월, 교회와 국가 분리법의 시행과 1906년 프랑스 총선에서 급진파의 승리로 촉발된 시민 소요 사태의 결과로 모리스 루비에 내각이 붕괴되었다. 페르디낭 사리앙의 새 정부는 클레망소를 내각의 내무장관으로 임명했다. 국내적으로 클레망소는 프랑스 경찰을 개혁하고 노동 운동에 대한 억압 정책을 지시했다. 그는 알퐁스 베르티용의 과학 경찰 창설을 지지하고 셀레스탱 에니옹이 이끄는 브리가드 모빌(Brigades mobiles프랑스어, '기동대')을 창설했다. 이 기동대들은 클레망소의 별명인 "호랑이"를 따서 "호랑이 여단"(Brigades du Tigre프랑스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쿠리에르 광산 참사로 천 명 이상이 사망한 파드칼레주의 광부 파업은 1906년 5월 1일에 광범위한 혼란을 초래할 위협을 가했다. 클레망소는 파업 노동자들에게 군대를 투입하고 랑그도크루시용의 포도 재배자 파업을 진압했다. 그의 행동은 프랑스 노동자 인터내셔널 지부 사회당을 소외시켰고, 그는 1906년 6월 대의원에서 SFIO의 지도자인 장 조레스에게 한 주목할 만한 답변에서 이들과 완전히 결별했다. 클레망소의 연설은 그를 프랑스 정치의 실력자로 자리매김하게 했고, 10월에 사리앙 내각이 사임하자 클레망소는 총리가 되었다.
대의원 폴 뒤소수아의 지방 선거에서 제한적인 여성 참정권 제안에 대해, 클레망소는 1907년 소책자를 발행하여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지면 프랑스가 중세로 돌아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랑그도크 포도 재배자들의 반란이 확산되자 클레망소는 처음에는 불만을 일축했지만, 1907년 6월에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1907년과 1908년 동안 그는 영국과의 새로운 영불 협상 발전을 이끌었으며, 이는 프랑스에게 유럽 정치에서 성공적인 역할을 부여했다. 1905~06년 제1차 모로코 위기 처리와 관련하여 독일과의 어려움과 사회당의 비판은 알헤시라스 회의에서 해결되었다.
클레망소는 1909년 7월 20일 대의원에서 해군 상태에 대한 토론에서 패배했는데, 이 토론에서 그는 자신이 몰락에 기여했던 전 국무회의 의장 테오필 델카세와 격렬한 언쟁을 벌였다. 델카세의 기술적인 질문에 답변하기를 거부한 클레망소는 당일 의제 투표 제안이 거부되자 사임했다. 그는 재구성된 내각과 함께 아리스티드 브리앙에게 총리직을 넘겨주었다.
5. 제1차 세계 대전
5.1. 전쟁 중 언론 활동
1909년부터 1912년까지 클레망소는 여행, 강연, 그리고 자신의 질병 치료에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1910년 남아메리카로 가서 브라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를 여행했다. 그곳에서 그는 프랑스 문화와 프랑스 혁명이 현지 엘리트들에게 미친 영향에 놀랐다.
그는 1910년 4월 10일 바르 저널(Journal du Var프랑스어)의 첫 호를 발행했다. 3년 후인 1913년 5월 6일, 그는 파리에서 자유로운 사람(L'Homme libre프랑스어)이라는 신문을 창간하고 매일 사설을 썼다. 이 언론 매체에서 클레망소는 점차 외교 정책에 집중하며 사회주의자들의 반군국주의를 비난했다.
1914년 8월 프랑스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클레망소의 신문은 정부에 의해 검열된 최초의 신문 중 하나였다. 이 신문은 1914년 9월 29일부터 10월 7일까지 발행이 중단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클레망소는 신문 이름을 속박된 사람(L'Homme enchaîné프랑스어)으로 바꾸고 정부의 투명성 부족과 비효율성을 비판하는 한편, 독일 제국에 맞서는 애국적인 성스러운 연합을 옹호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 프랑스 정부가 클레망소의 저널리즘에 검열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클레망소는 루이 말비 내무장관에게 동원령 발동 시 체포될 예정이었던 알려진 전복자 및 의심자 명단인 카르네 B를 발동하여 전쟁 노력에 대한 대중의 지지 붕괴를 막으라고 조언했다. 파리 경찰청장도 같은 조언을 했지만, 정부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결국 카르네 B에 전복자로 등재된 2,501명 중 80%가 자발적으로 복무했다. 1914년 가을, 클레망소는 거국 내각에 법무장관으로 합류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전시 프랑스 정부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충분히 노력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며 맹렬히 비판했다. 그의 입장은 알자스-로렌 지방을 되찾으려는 의지에 의해 추진되었으며, 이는 여론과도 일치했다. 1917년 가을에는 카포레토 전투에서의 비참한 이탈리아 패배,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볼셰비키의 정권 장악, 그리고 전 총리 조제프 카이요와 내무장관 루이 말비가 반역 행위에 가담했을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폴 팽르베 총리는 독일과의 협상을 시작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클레망소는 독일이 알자스-로렌을 반환하고 벨기에를 해방한다 해도 프랑스가 동맹국들을 버리는 것을 정당화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알렉상드르 리보와 아리스티드 브리앙 (이전 두 총리, 후자는 독일 외교관의 접근을 받았던 훨씬 더 강력한 정치인이었다)은 공개적으로 단독 평화는 없을 것이라고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수년 동안 클레망소는 가능한 타협 평화를 막았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이제 독일 문서를 검토한 결과 독일이 알자스-로렌을 넘겨줄 진지한 의도가 없었음이 분명해졌다. 그의 반대 입장이 두드러지면서 그는 가장 잘 알려진 비평가가 되었고, 다른 이들이 실패했을 때 마지막까지 남은 인물이 되었다. 클레망소의 신문은 "신사 여러분, 독일군은 여전히 누아용에 있습니다"라고 끊임없이 썼다.
5.2. 제2차 내각 (1917-1920)

1917년 11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의 전쟁 노력이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클레망소는 총리직에 임명되었다. 그는 전임자들과 달리 내부 불화를 막고 고위 정치인들 간의 화합을 촉구했다.
클레망소는 생도미니크 거리의 전쟁부에서 통치했다. 총리로서 그의 첫 번째 조치 중 하나는 살로니카 전선 사령관 모리스 사라이 장군을 해임하는 것이었다. 이는 12월 6일 전쟁 위원회 첫 회의의 주요 논의 주제였으며, 클레망소는 "사라이는 그곳에 머물 수 없다"고 말했다. 사라이의 해임 이유는 사회주의 정치인 조제프 카이요와 루이 말비 (당시 독일과의 반역적인 접촉이 의심되던 인물들)와의 연관성 때문이었다.
윈스턴 처칠은 훗날 클레망소가 "우리 안에 갇힌 야생 동물처럼 앞뒤로 서성거렸다"고 썼는데, 그를 그 자리에 앉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무엇이든 했을 의회는 그를 앉힌 후에는 복종해야 한다고 느꼈다고 덧붙였다.
1917년 클레망소가 총리가 되었을 때 승리는 요원해 보였다. 서부 전선에서는 미국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제한적인 공격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활동이 거의 없었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는 방어적이었고, 러시아는 사실상 전투를 중단했으며, 독일과 단독 평화를 맺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국내에서는 전쟁 반대 시위 증가, 자원 부족, 그리고 파리에 막대한 물리적 피해를 입히고 시민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공습에 대처해야 했다. 또한 많은 정치인들이 비밀리에 평화를 원한다고 여겨졌다. 클레망소에게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전쟁 내내 다른 사람들을 비판했던 그는 갑자기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그는 어떤 의회 지도자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특히 전쟁 중에 그들을 끊임없이 적대시했기 때문에)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에게 의존해야 했다.
클레망소의 집권은 처음에는 참호 속 병사들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그를 "또 다른 정치인"으로 생각했고, 매달 병사 사기 평가는 소수만이 그의 임명에서 위안을 찾았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가 소수에게 불어넣은 신뢰는 모든 전투 병력에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잦은 참호 방문은 그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이 신뢰는 참호에서 본국으로 퍼져나갔고, "우리는 조상들이 잔 다르크를 믿었던 방식과 비슷하게 클레망소를 믿었다"는 말이 나돌았다. 프랑스군이 보수적이고 가톨릭적이라는 비판을 수년간 해왔던 클레망소는 건전한 전략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군 지도자들과 잘 지내기 위한 도움이 필요했다. 그는 앙리 모르닥 장군을 자신의 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모르닥은 군대에서 정부로 신뢰와 상호 존중을 불어넣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이는 최종 승리에 필수적임이 입증되었다.
클레망소는 또한 언론으로부터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가 강력한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전쟁 내내 그가 결코 낙담하지 않았고 프랑스가 완전한 승리를 달성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믿었다는 점은 널리 인정되었다. 그러나 회의론자들은 클레망소도 다른 전시 지도자들처럼 재임 기간이 짧을 것이라고 믿었다. "다른 모든 사람처럼... 클레망소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전쟁을 정리할 만큼만 있을 것이다"라는 말이 나돌았다.
1918년 초 군사 상황이 악화되자 클레망소는 "우리는 총력전이라는 단 하나의 생각으로 여러분 앞에 섰다"는 총력전 정책과 "끝까지 전쟁"(la guerre jusqu'au bout프랑스어) 정책을 계속 지지했다. 이 정책을 옹호하는 그의 3월 8일 연설은 너무나 효과적이어서 1940년 영국 총리가 되었을 때 비슷한 연설을 할 윈스턴 처칠에게 생생한 인상을 남겼다. 클레망소의 전쟁 정책은 정의로운 승리, 전투 병력에 대한 충성, 그리고 프랑스에 대한 범죄에 대한 즉각적이고 엄격한 처벌을 포함했다.
전 프랑스 총리 조제프 카이요는 클레망소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독일에 항복하고 평화를 협상하기를 원했고, 따라서 클레망소는 카이요를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이전 장관들과 달리 클레망소는 카이요에 대해 공개적으로 조치를 취했다. 그 결과, 의회 위원회는 카이요가 체포되어 3년 동안 수감될 것이라고 결정했다. 클레망소는 장 이바르네가레이의 말을 빌려 카이요의 범죄가 "승리를 믿지 않고 국가의 패배에 도박을 건 것"이라고 믿었다.
카이요와 다른 사람들의 체포는 클레망소의 가혹함 문제를 제기했고, 그는 오직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필요한 권한만을 행사했다고 주장했다. 수많은 재판과 체포는 대중의 큰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재판은 대중에게 정부를 두려워하게 하기보다는 신뢰를 불어넣었는데, 대중은 전쟁 중에 처음으로 조치가 취해지고 있으며 확고하게 통치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클레망소의 "확고한 정부"가 독재라는 주장은 거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클레망소는 여전히 국민과 언론에 책임을 졌다. 그는 신문이 정치인들을 비판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정치적 견해에 대한 검열을 완화했다. "정부 구성원을 모욕할 권리는 불가침이다."
1918년, 클레망소는 프랑스가 우드로 윌슨의 14개조 평화 원칙을 채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주로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할 것을 요구하는 조항 때문이었다. 이는 승리가 프랑스 대중에게 중요한 전쟁 목표를 달성할 것임을 의미했다. 그러나 클레망소는 국제 연맹에 관한 조항을 포함하여 다른 일부 조항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는데, 후자는 유토피아적 사회에서만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918년 초 독일군이 대규모 독일 춘계 공세를 시작했다. 연합군은 불시에 기습당했고, 영국군과 프랑스군 전선에 틈이 생겨 독일군이 파리로 진격할 위험에 처했다. 이 패배는 클레망소와 다른 연합국 지도자들에게 통일된 지휘 체계가 최선의 선택이라는 믿음을 굳혔다. 페르디낭 포슈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기로 결정되었다.
독일 전선이 계속 진격하면서 클레망소는 파리 함락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믿었다. "호랑이"뿐만 아니라 포슈와 필리프 페탱이 한 주만 더 권력을 잡고 있으면 프랑스는 패배할 것이고, 아리스티드 브리앙이 이끄는 정부가 유리한 조건으로 독일과 평화를 맺을 것이라는 여론이 일었다. 클레망소는 이러한 의견에 단호히 반대하며 대의원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이후 대의원은 377대 110으로 그에 대한 신뢰를 표결했다.
백일 공세가 독일군을 밀어내기 시작하면서 독일군이 더 이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들은 여전히 막대한 프랑스 영토를 점령하고 있었지만, 공격을 계속할 충분한 자원과 병력이 없었다. 독일에 동맹했던 국가들이 휴전을 요청하기 시작하면서 독일도 곧 뒤따를 것이 분명했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과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클레망소는 거리에서 환영받았고 많은 찬사를 보내는 군중을 끌어모았다.
6. 파리 강화 회의와 베르사유 조약
6.1. 강화 회의 주재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남겨진 국제 정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파리 강화 회의가 개최되기로 결정되었다. 유명하게도 독일과 연합국 간의 베르사유 조약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체결되었지만, 그 기초가 된 심의는 파리에서 진행되었으므로, 패전국들과 체결된 조약들을 만들어낸 승전국 정상들의 회의는 1919년 파리 강화 회의라고 불린다. 1918년 12월 13일,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프랑스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의 14개조 평화 원칙과 국제 연맹 구상은 전쟁에 지친 프랑스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첫 만남에서 클레망소는 윌슨이 원칙과 양심을 가진 사람임을 깨달았다.
강대국들은 회의가 프랑스에서 열리므로 클레망소가 가장 적합한 의장이라고 동의했다. 또한 그는 회의의 공식 언어인 영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구사했다. 클레망소는 프랑스 대표단을 완전히 통제하는 확고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의회는 1918년 12월 30일 398대 93의 투표로 그에게 신임 투표를 부여했다. 회의 규칙에 따라 프랑스에는 5명의 전권대사가 허용되었다. 이들은 클레망소와 그의 꼭두각시인 다른 4명이었다. 그는 모든 군인, 특히 페르디낭 포슈를 배제했다. 그는 프랑스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를 배제하고 협상 진행 상황에 대해 그를 알리지 않았다. 그는 모든 의회 의원들을 배제하며, 자신이 조약을 협상하고 완성되면 의회의 의무는 찬성 또는 반대 투표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회의 진행은 예상보다 훨씬 느렸고 결정은 끊임없이 보류되었다. 이러한 느린 속도는 클레망소가 미국 언론인에게 짜증을 내는 인터뷰를 하게 만들었다. 그는 독일이 공장들이 온전하고 곧 "조작"을 통해 빚을 극복할 것이기 때문에 산업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짧은 시간 내에 독일 경제가 프랑스보다 훨씬 강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프랑스의 영향력은 클레망소의 윌슨과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에 대한 불신, 그리고 푸앵카레 대통령에 대한 강한 반감으로 인해 반복적으로 위태로워졌다. 협상이 교착 상태에 이르자 클레망소는 다른 국가 원수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더 이상의 논의에 참여하지 않고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는 습관이 있었다.
6.2. 암살 시도
1919년 2월 19일, 클레망소가 아파트를 나서던 중 한 남자가 차를 향해 여러 발을 발사했다. 클레망소를 공격한 아나키스트 에밀 코탱은 거의 린치당할 뻔했다. 클레망소의 비서는 그가 창백했지만 의식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클레망소는 그에게 "그들이 내 등을 쐈어. 감히 정면에서 공격하지도 못했지"라고 말했다. 총알 한 발이 클레망소의 갈비뼈 사이에 박혔고, 중요 장기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너무 위험해서 제거할 수 없었던 그 총알은 그의 남은 생애 동안 몸에 남아 있었다.
클레망소는 종종 "암살자"의 형편없는 사격 솜씨에 대해 농담을 했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끔찍한 전쟁에서 막 승리했는데, 여기 프랑스인이 근거리에서 일곱 발 중 여섯 발을 놓치는군. 물론 이 친구는 위험한 무기를 부주의하게 사용하고 사격 솜씨가 형편없기 때문에 처벌받아야 해. 사격장에서 집중 훈련을 받으며 8년 동안 감금하는 것을 제안하네."
6.3. 주요 협상 및 정책
클레망소가 3월 1일 10인 위원회로 돌아왔을 때, 그는 변한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전혀 변하지 않은 한 가지 문제는 프랑스의 동부 국경과 독일 라인란트 통제에 대한 오랜 논쟁이었다. 클레망소는 독일이 이 영토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프랑스가 동쪽에 자연 국경이 없어 침략에 취약하다고 믿었다. 영국 대사는 1918년 12월 클레망소의 라인란트 미래에 대한 견해를 보고했다. "그는 라인강이 갈리아와 독일의 자연 국경이며, 지금 독일 국경이 되어야 하고, 라인강과 프랑스 국경 사이의 영토는 중립이 강대국들에 의해 보장되는 독립국가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 우드로 윌슨이 독일이 도발 없이 공격할 경우 즉각적인 군사 지원을 보장하면서 문제가 해결되었다. 또한 연합군이 15년 동안 영토를 점령하고, 독일은 이 지역을 재무장할 수 없도록 결정되었다. 로이드 조지는 독일이 조약을 이행할 경우 연합군 조기 철수를 허용하는 조항을 주장했고, 클레망소는 조약에 제429조를 삽입하여 도발 없는 침략에 대한 연합군 안보 보장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15년 이상 연합군 점령을 허용하도록 했다. 이는 미국 상원이 보장 조약을 비준하지 않아 영국 보장도 무효화될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러한 상황이 발생했다. 제429조는 미국 상원이 보장 조약을 비준하지 않더라도 조약이 약화되지 않도록 보장했다.
레몽 푸앵카레 대통령과 페르디낭 포슈 원수는 모두 자치적인 라인란트 국가를 거듭 주장했다. 포슈는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 너무 관대하다고 생각하며 "이것은 평화가 아니다. 20년간의 휴전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4월 25일 내각 회의에서 포슈는 클레망소가 중재한 거래에 반대하며 별도의 라인란트 국가를 추진했다. 4월 28일 푸앵카레는 클레망소에게 독일이 모든 배상금을 지불할 때까지 연합군 점령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상세히 설명하는 긴 편지를 보냈다. 클레망소는 미국 및 영국과의 동맹이 라인란트를 고수하는 고립된 프랑스보다 더 가치 있다고 답했다. "15년 후 저는 죽겠지만, 제 무덤을 방문하는 영광을 주신다면, 독일군이 조약의 모든 조항을 이행하지 않았고 우리가 여전히 라인강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클레망소는 6월에 로이드 조지에게 "우리는 앞으로 몇 년 동안 우리 국민이 폐허를 재건하기 위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장벽이 필요합니다. 그 장벽은 라인강입니다. 저는 국민 감정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것이 제가 공직을 잃을까 두렵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저는 그 점에 대해 매우 무관심합니다. 그러나 저는 점령을 포기함으로써 우리 국민의 의지를 꺾는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훗날 그는 장 마르텔에게 "포슈와 푸앵카레의 정책은 원칙적으로 나빴습니다. 그것은 다른 보장, 다른 이점을 얻을 희망이 없다면 어떤 프랑스인도, 어떤 공화주의 프랑스인도 잠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정책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종류의 일을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맡깁니다."라고 말했다.
10인 위원회를 둘러싼 느린 진행과 정보 유출에 대해 클레망소, 로이드 조지, 우드로 윌슨 사이에 불만이 커졌다. 그들은 4인 위원회라고 불리는 더 작은 그룹에서 만나기 시작했는데,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가 네 번째 멤버였지만 비중은 적었다. 이는 더 큰 사생활 보호와 보안을 제공하고 의사 결정 과정의 효율성을 높였다. 4인 위원회가 논의한 또 다른 주요 문제는 독일 자르 분지의 미래였다. 클레망소는 독일이 프랑스 북부의 탄광을 고의로 파괴했기 때문에 프랑스가 이 지역과 그 탄광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윌슨은 프랑스의 주장에 너무나 단호하게 반대하여 클레망소는 그를 "친독일적"이라고 비난했다. 로이드 조지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탄광은 프랑스에 주어졌고, 영토는 15년 동안 프랑스 행정 아래 놓였으며, 그 후 투표를 통해 이 지역이 독일로 재합류할지 결정하기로 했다.
클레망소는 해체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지만, 그곳의 소수 민족 집단들의 대의를 지지했으며, 그의 단호한 입장은 트리아농 조약의 엄격한 조건으로 이어져 헝가리를 해체시켰다. 클레망소는 자결 원칙 내에서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를 인정하기보다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헝가리를 약화시키고 중앙 유럽 내에서 그러한 강대국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했다. 전체 체코슬로바키아 국가는 공산주의로부터의 잠재적 완충 지대로 간주되었으며, 이는 헝가리 다수 지역을 포함했다.
6.4. 배상금
클레망소는 경제나 금융 분야에 경험이 없었으며,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지적했듯이, "그는 배상금이나 [프랑스의] 압도적인 재정적 어려움 중 어느 것도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독일의 배상금 청구액을 가능한 한 크게 만들라는 강력한 대중 및 의회 압력에 시달렸다. 일반적으로 독일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지불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지만, 감당할 수 있는 금액에 대한 추정치는 크게 달랐다. 수치는 20억 파운드 스털링에서 200억 파운드 스털링 사이였다. 클레망소는 어떤 타협도 프랑스와 영국 시민 모두를 화나게 할 것이며, 유일한 선택은 독일의 배상 능력 조사를 위한 배상 위원회를 설립하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이는 프랑스 정부가 배상금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6.5. 조약 비준 및 옹호
베르사유 조약은 1919년 6월 28일에 체결되었다. 클레망소는 이제 자신이 협상한 타협안이 프랑스의 국익에 불충분하다고 보는 비평가들로부터 조약을 방어해야 했다. 프랑스 의회는 조약을 논의했고, 9월 24일 루이 바르투는 미국 상원이 보장 조약이나 베르사유 조약에 투표하지 않을 것이므로 라인강을 국경으로 삼는 것이 더 현명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클레망소는 상원이 두 조약 모두를 비준할 것이라고 확신하며, "라인강에 관한 새로운 합의"를 규정한 제429조를 조약에 삽입했다고 답했다. 제429조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바르투에 의해 이의가 제기되었다.
조약에 대한 클레망소의 주요 연설은 9월 25일에 행해졌다. 그는 조약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전쟁은 연합군에 의해 치러졌으므로 조약은 관련 당사자들의 최소 공통분모를 표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조약 세부 사항에 대한 비판이 오해를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하며, 비평가들은 조약 전체를 보고 어떻게 이득을 얻을 수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조약은 모든 복잡한 조항들과 함께, 여러분의 가치만큼의 가치를 가질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만드는 대로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투표할 것은 시작조차 아닙니다. 시작의 시작일 뿐입니다. 그 안에 담긴 아이디어들은 자라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패배한 독일에 그것들을 강요할 힘을 얻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을 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마랭 씨는 문제의 핵심을 짚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돌아서서 절망적인 어조로 '당신들은 우리를 경계의 정책으로 전락시켰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말입니다. 네, 마랭 씨, 어제만 해도 피를 흘리며 싸웠던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경계의 필요성을 없앨 수 있는 조약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삶은 전쟁에서든 평화에서든 끊임없는 투쟁입니다... 그 투쟁은 피할 수 없습니다. 네,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계를 해야 합니다. 이 시작된 위기가 몇 년, 어쩌면 몇 세기 동안 계속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네, 이 조약은 우리에게 부담, 문제, 고통, 어려움을 가져다줄 것이며,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계속될 것입니다."
대의원은 372대 53으로 조약을 비준했으며, 상원은 만장일치로 비준에 찬성했다. 10월 11일 클레망소는 상원에서 마지막 의회 연설을 했다. 그는 독일을 분할하려는 어떤 시도도 자멸적일 것이며, 프랑스는 6천만 독일인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앙시앵 레짐의 귀족들처럼 부르주아지도 지배 계층으로서 실패했다고 말했다. 이제는 노동 계급이 통치할 차례였다. 그는 국가 통합과 인구 혁명을 옹호하며 말했다. "조약은 프랑스가 많은 자녀를 가질 것이라고 명시하지 않지만, 그것이 거기에 가장 먼저 쓰여야 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프랑스가 대가족을 갖지 않는다면, 조약에 아무리 훌륭한 조항을 넣고, 모든 독일군의 총을 빼앗아도 프랑스는 더 이상 프랑스인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패배할 것입니다."
7. 전후 및 국내 정책
7.1. 암살 시도
1919년 2월 19일, 클레망소가 아파트를 나서던 중 아나키스트 에밀 코탱이 차를 향해 총을 발사했다. 총알 한 발이 클레망소의 갈비뼈 사이에 박혔고, 중요 장기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너무 위험해서 제거할 수 없었던 그 총알은 그의 남은 생애 동안 몸에 남아 있었다. 클레망소는 이 사건에 대해 "우리는 역사상 가장 끔찍한 전쟁에서 막 승리했는데, 여기 프랑스인이 근거리에서 일곱 발 중 여섯 발을 놓치는군"이라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7.2. 국내 개혁
클레망소의 마지막 총리 재임 기간 동안 노동 시간 규제를 목표로 하는 다양한 개혁이 시행되었다. 1919년 4월에는 프랑스 노동법을 개정하는 일반적인 8시간 노동제 법안이 통과되었고, 그해 6월에는 광업 분야의 노동 시간 규정에 관한 기존 법률이 개정되어 "지하 또는 지상에서 고용된 모든 계층의 노동자"에게 8시간 노동제가 확대 적용되었다. 이전 1913년 12월 법률에 따르면 8시간 제한은 지하에서 고용된 노동자에게만 적용되었다. 1919년 8월에는 프랑스 선박에 고용된 모든 사람들에게 비슷한 제한이 도입되었다. 1919년에 통과된 또 다른 법률(1920년 10월부터 시행)은 제빵소에서 오후 10시부터 오전 4시까지의 고용을 금지했는데, 이 법률은 프랑스에서 바게트가 지배적인 빵 형태로 대중화된 원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1919년 4월에는 8시간 노동제와 주 6일 근무제를 위한 시행령이 승인되었지만, 농업 노동자는 이 법에서 제외되었다.
7.3. 대통령 출마
1919년 프랑스는 새로운 선거 제도를 채택했고, 총선에서 국민 블록 (우익 정당 연합)이 다수당이 되었다. 클레망소는 선거 운동에 단 한 번만 개입했는데, 11월 4일 스트라스부르에서 연설하며 국민 블록의 선언문과 인물들을 칭찬하고 전쟁에서의 승리가 경계를 통해 보호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사적으로 그는 이러한 우익으로의 거대한 전환에 우려를 표했다.
그의 친구 조르주 망델은 클레망소에게 다가오는 선거에서 대통령에 출마할 것을 촉구했고, 1920년 1월 15일 그는 망델에게 자신이 당선될 경우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발표하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클레망소는 이 직책을 위해 선거 운동을 할 의도가 없었고, 대신 국가적 상징으로서 박수갈채를 받으며 선택되기를 바랐다. 공화당 간부회의 (국민의회 투표의 전신) 예비 회의에서는 클레망소 대신 폴 데샤넬을 408대 389로 선택했다. 이에 클레망소는 국민의회 투표에 출마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그는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기를 원하지 않고 거의 만장일치로 승리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만 동맹국들과 자신감을 가지고 협상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1월 18일 내각에 대한 마지막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세계에 우리의 승리의 정도를 보여주어야 하며, 다시 한번 유럽의 선두에 서는 승리한 국민의 정신과 습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제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그렇게 인내심 있고 고통스럽게 세워진 건물을 파괴하는 데는 그것을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과 생각보다 적게 걸릴 것입니다. 불쌍한 프랑스여. 실수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8. 말년 및 사망

클레망소는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자마자 (1920년 1월 17일)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더 이상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사적으로 그는 1920년 프랑스군이 독일 도시 프랑크푸르트를 일방적으로 점령한 것을 비난했으며, 자신이 권력을 잡았다면 영국을 설득하여 동참시켰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920년 2월부터 4월까지 이집트와 수단에서 휴가를 보낸 후, 9월에는 극동으로 떠나 1921년 3월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6월에는 영국을 방문하여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다. 그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를 만나 휴전 후 그가 프랑스의 적이 되었다고 말했다. 로이드 조지는 "음, 그것이 항상 우리의 전통적인 정책이 아니었습니까?"라고 답했다. 그는 농담이었지만, 클레망소는 숙고 끝에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1922년 로이드 조지가 실각한 후 클레망소는 "프랑스에게는 진짜 적이 사라진 것입니다. 로이드 조지는 그것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제가 런던을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그는 냉소적으로 인정했습니다"라고 말했다.
1922년 말, 클레망소는 미국 북동부 주요 도시에서 순회 강연을 했다. 그는 전쟁 부채와 배상금을 포함한 프랑스의 외교 정책을 옹호하고 고립주의를 비난했다. 그는 환영받았고 많은 청중을 끌어모았지만, 미국의 정책은 변하지 않았다. 1926년 8월 9일, 그는 미국 대통령 캘빈 쿨리지에게 프랑스가 모든 전쟁 부채를 갚는 것에 반대하는 공개 서한을 썼다. "프랑스는 친구에게조차 팔리지 않습니다." 이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1923년 푸앵카레의 루르 점령을 프랑스와 영국의 협상 파기로 비난했다.
그는 그리스 웅변가 데모스테네스와 프랑스 화가 클로드 모네의 짧은 전기 두 권을 썼다. 또한 1923년부터 1927년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여 철학, 역사, 과학을 다룬 방대한 두 권짜리 저서 사유의 저녁(Au Soir de la Pensée프랑스어)을 집필했다.

그는 이전에 회고록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회고록을 썼다. 이는 주로 파리 강화 회의에서의 클레망소의 정책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던 페르디낭 포슈 원수의 회고록 출간에 자극받았기 때문이었다. 클레망소는 초고를 완성할 시간밖에 없었고, 그의 회고록은 사후에 승리의 위대함과 비참함(Grandeurs et misères d'une victoire프랑스어)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는 포슈와 독일의 부활에 직면하여 베르사유 조약이 훼손되도록 허용한 그의 후임자들을 비판했다. 그는 모든 개인 편지를 불태웠다.
클레망소는 1929년 11월 24일에 사망했으며, 무샹에 있는 아버지 옆의 소박한 무덤에 안장되었다.
9. 개인적인 삶
9.1. 결혼과 가족
1869년 6월 23일, 그는 뉴욕시에서 메리 엘리자 플러머(Mary Eliza Plummer영어, 1849~1922)와 결혼했다. 그녀는 그가 승마를 가르치던 학교에 다녔던 그의 학생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해리엇 A. 테일러와 윌리엄 켈리 플러머의 딸이었다.
결혼 후 클레망소 부부는 프랑스로 이주했다. 그들은 함께 세 가족을 두었는데, 마들렌(1870년생), 테레즈(1872년생), 미셸(1873년생)이다.
클레망소는 많은 정부를 두었지만, 그의 아내가 자녀들의 가정교사를 연인으로 삼자, 클레망소는 그녀를 2주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가 3등석 증기선을 태워 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 결혼은 1891년 논쟁적인 이혼으로 끝났다. 그는 자녀들의 양육권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아내의 프랑스 국적을 박탈했다.
9.2. 신념과 취미
클레망소는 무신론자였다. 정치적 반대자들과 수십 차례 결투를 벌였던 클레망소는 운동의 중요성을 알았고, 노년에도 매일 아침 펜싱을 연습했다.
그는 일본 예술, 특히 일본 도자기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약 3,000점의 작은 향합(香合일본어, 고고)을 수집했으며, 이들은 현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78년 몬트리올 미술관은 그의 소장품 특별 전시회를 개최했다.
클레망소는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의 오랜 친구이자 후원자였다. 그는 1923년 모네가 백내장 수술을 받도록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0년 이상 동안 클레망소는 모네에게 현재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전시된 대규모 수련(Les Nymphéas프랑스어) 그림들을 프랑스 국가에 기증하도록 독려했다. 이 그림들은 1927년 대중에게 공개된 특별히 건설된 타원형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
10. 유산과 영향력
10.1. 평가와 비판
조르주 클레망소는 프랑스 제3공화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호랑이"라는 별명처럼 강력하고 단호한 리더십을 보여주었으며,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를 승리로 이끈 "승리의 아버지"로 기억된다. 그의 드레퓌스 사건 개입과 정교분리 원칙 지지는 프랑스 민주주의와 세속주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경력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측면도 많다. 그는 "내각의 파괴자"로 불릴 만큼 여러 내각을 전복시키는 데 일조했으며, 총리 재임 중에는 노동 운동을 강경하게 진압하여 사회주의자들과의 관계를 단절시켰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는 독일에 대한 가혹한 배상금 요구와 영토 문제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여 다른 연합국 지도자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페르디낭 포슈 원수는 베르사유 조약에 대해 "이것은 평화가 아니다. 20년간의 휴전일 뿐이다"라고 비판하며 클레망소의 조치가 독일에 너무 관대하다고 보았다.
또한 그의 개인적인 발언 중 일부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일본 대표단의 일본어 억양 연설에 대해 "저 난쟁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라고 말했다는 일화나, 남부 이탈리아가 아랍인과 이슬람교도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를 언급하며 "이탈리아인은 절반이 더러운 피가 섞여 있다"고 공언했다는 발언은 그의 인종주의적 편견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왕자에게 미국이 일본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경고하는 등 국제 정세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역량과 별개로 그의 성격적 결함이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10.2. 프랑스 정치 및 사회에 미친 영향
클레망소의 정치적 사상과 리더십은 프랑스 정치 및 사회 전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급진 공화주의는 프랑스 제3공화국의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으며, 특히 반교권주의와 정교분리에 대한 그의 확고한 입장은 프랑스 사회의 세속주의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드레퓌스 사건에서의 그의 역할은 지식인의 사회 참여와 정의 실현에 대한 중요성을 각인시켰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그의 "총력전" 정책과 "끝까지 전쟁"이라는 신념은 프랑스의 전쟁 수행 의지를 결집시키고 최종 승리를 이끄는 데 결정적인 동력이 되었다. 전후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에 대한 그의 강경한 입장은 프랑스의 안보를 최우선으로 하는 외교 정책의 기조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또한 8시간 노동제 도입과 같은 사회 개혁은 노동자들의 권리 신장과 생활 조건 개선에 기여하며 프랑스 사회 복지 정책의 초석을 놓았다. 그는 프랑스 사회의 근대화와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10.3. 기념 및 명칭

그의 이름을 딴 수많은 장소, 기관, 물건들이 그를 기리고 있다.
- 클레망소 박물관 (파리): 제임스 더글러스 주니어가 1926년 클레망소를 위해 파리에 구입한 아파트로, 훗날 박물관이 되었다.
- 애리조나주 클레망소: 1917년 그의 친구 제임스 더글러스 주니어가 클레망소를 기려 명명했다.
- 캐나다 로키산맥의 클레망소 산(3658 m): 1919년 클레망소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리슐리외급 전함 중 한 척: 1939년 1월 기공되었고 1944년 연합군 폭격으로 파괴되었으며, 클레망소의 이름을 따서 명명될 예정이었다.
- 프랑스 항공모함 클레망소 (R98): 클레망소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파리 메트로 1호선과 13호선의 샹젤리제-클레망소역: 샹젤리제 거리와 클레망소 광장 아래에 위치한다.
- 쿠바의 로미오 이 훌리에타 시가 브랜드는 한때 그를 기려 클레망소라는 이름의 시가를 생산했으며,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생산되는 종류는 여전히 그러하다.
- 레바논 베이루트의 클레망소 거리는 클레망소를 기려 명명되었다.
- 캐나다 몬트리올 남동부 교외의 베르됭에도 클레망소 거리가 있다.
- 싱가포르의 클레망소 애비뉴와 1920년대에 싱가포르강을 가로지르던 클레망소 다리는 클레망소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클레망소는 1920년대 동양 순방 중 싱가포르를 방문하여 추모비 정초식에 참석했고, 이때 클레망소 애비뉴의 기공을 기념하는 영광을 얻었다.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중심부와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중심부, 프랑스 앙티브 중심부에도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11. 영화 및 드라마 출연
조르주 클레망소는 여러 영화와 TV 드라마에서 묘사되었다.
- 레너드 셰퍼드: 드레퓌스 (1931)
- 그랜트 미첼: 에밀 졸라의 생애 (1937)
- 알베르토 모린: 테네시 존슨 (1942)
- 마르셀 달리오: 윌슨 (1944)
- 그나트 유라: 잊을 수 없는 해 1919 (1951)
- 피터 일링: 나는 고발한다! (1958)
- 존 베넷: 독수리의 몰락 (1974)
- 마이클 앤서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의 삶과 시대 (1981)
- 아놀드 다이아몬드: 위험한 남자: 아라비아 이후의 로렌스 (1992)
- 브라이언 콕스: 환상적인 모험 세계의 자연 휴가 (2016)
- 제라르 샤이유: 장교와 스파이 (2019)
- 앙드레 뒤솔리에: 호랑이와 대통령 (2022)
12.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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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선거 | 대통령 | 11대 | 민주공화연합 | 6.11% | 53표 | 3위 | 낙선 |
13. 관련 항목
- 국제 관계 (1919년-193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