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
잔 다르크가 등장한 1429년 무렵의 프랑스는 백년 전쟁으로 인해 극심한 혼란과 절망에 빠져 있었다.
1.1. 출생과 가계
잔 다르크는 1412년경 프랑스 동부 바 공작령의 작은 마을 동레미에서 자크 다르크와 이자벨 로메의 딸로 태어났다. 동레미는 오늘날의 보주주에 속한다. 그녀의 정확한 생일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1월 6일이라는 주장은 샤를 7세의 고문이었던 페르스발 드 불랭빌리에의 편지에 근거한 것으로, 문학적 비유가 많아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잔 다르크의 부모는 약 20 ha에 달하는 토지를 소유한 농부였으며, 아버지는 마을의 하급 관리로서 세금 징수와 지역 자경단을 이끄는 역할로 가계 수입을 보충했다. 잔 다르크에게는 세 명의 오빠와 한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잔 다르크는 사지가 균형 잡히고 강건하며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고, 키는 약 158 cm로 추정된다.
당시 동레미는 부르고뉴파 영토에 둘러싸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마냐크파와 프랑스 왕가에 대한 확고한 충성심을 유지했다. 잔 다르크의 어린 시절, 마을은 여러 차례 전쟁의 영향을 받았는데, 1425년에는 부르고뉴군에 의해 마을이 공격받고 가축이 약탈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은 마을 주민들 사이에 잉글랜드군을 프랑스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강한 인식을 심어주었다. 잔 다르크는 이 약탈 사건 이후 첫 번째 환시를 경험했다고 증언했다.
1.2. 시대적 배경: 백년 전쟁
잔 다르크가 태어난 시기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백년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1337년 잉글랜드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 주장과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토의 지위 문제를 두고 시작된 이 전쟁은 거의 모든 전투가 프랑스 영토 내에서 벌어져 프랑스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14세기 흑사병의 여파로 인구가 감소하고 대외 무역이 단절되면서 프랑스는 경제적으로 황폐해졌다. 잔 다르크가 등장할 무렵, 프랑스군은 수십 년간 이렇다 할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잉글랜드는 프랑스 전체를 거의 장악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잔 다르크가 태어날 당시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정신 질환으로 인해 통치 불능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로 인해 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 루이와 사촌 부르고뉴 공작 장 사이에 섭정권과 왕자들의 후견인 자리를 놓고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이 갈등은 1407년 부르고뉴 공작의 지시로 오를레앙 공작 루이가 암살되면서 내전으로 비화되었다. 오를레앙 공작을 지지하는 세력은 아르마냐크파로, 부르고뉴 공작을 지지하는 세력은 부르고뉴파로 나뉘어 대립했다.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는 프랑스의 이러한 내부 분열을 틈타 1415년 침공을 감행했다. 그는 아쟁쿠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프랑스 북부의 많은 도시를 점령했다. 샤를 6세의 아들이자 미래의 국왕인 샤를 7세는 네 명의 형들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14세에 도팽의 자리에 올랐고, 아르마냐크파와 연합했다. 1419년, 도팽 샤를은 부르고뉴 공작 장과 평화 협상을 시도했으나, 협상 도중 아르마냐크파 지지자들에 의해 장 공작이 암살되면서 협상은 파탄 났다. 새로운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는 도팽 샤를을 비난하며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었고, 이로 인해 프랑스 영토의 상당 부분이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1420년, 샤를 6세의 왕비 바이에른의 이자보는 트루아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아들인 도팽 샤를이 아닌 잉글랜드의 헨리 5세와 그 후계자에게 넘겼다. 이 조약은 도팽 샤를이 샤를 6세의 친자가 아니라는 소문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1422년,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두 달 간격으로 사망하자, 9개월 된 헨리 5세의 아들 헨리 6세가 트루아 조약에 따라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이중 군주가 되었다. 헨리 6세가 어렸기 때문에 헨리 5세의 동생인 베드포드 공작 존이 프랑스의 섭정을 맡았다.
1429년 초, 프랑스 북부 대부분과 남서부 일부 지역은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의 통제하에 있었다. 부르고뉴파는 프랑스 왕들의 전통적인 대관식 장소인 랭스를 점령했고, 잉글랜드는 파리를 장악했다. 잉글랜드군은 루아르강 유역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프랑스 왕실에 충성하는 마지막 주요 도시 중 하나인 오를레앙을 포위했다. 오를레앙은 프랑스 심장부로 향하는 마지막 방어선이었으며, 당시 역사학자들은 "프랑스 왕국 전체의 운명이 오를레앙에 달려 있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그 중요성이 컸다. 오를레앙이 잉글랜드의 공격을 오래 버틸 수 있으리라고 예상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2. 이름
잔 다르크의 이름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기되었다. 16세기 이전에는 그녀의 이름에 대한 표준 철자가 없었으며, 그녀의 성은 일반적으로 아포스트로피 없이 'Darc'로 쓰였지만, 'Tarc', 'Dart', 'Day'와 같은 변형도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의 이름은 재판 기록에 'Tart'로 기록되어 있다. 잔 다르크는 '잔 다르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 그녀가 이 이름으로 불렸다는 최초의 기록은 그녀가 사망한 지 24년 후인 1455년에 나타났다.
잔 다르크는 어린 시절에 읽고 쓰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편지를 구술로 받아쓰게 했다. 그녀는 편지에서 자신을 '처녀 잔'(Jeanne la Pucelle프랑스어) 또는 단순히 '처녀'(la Pucelle프랑스어)라고 부르며 자신의 순결을 강조했고, 'Jehanne'라고 서명했다. 16세기에는 그녀가 '오를레앙의 처녀'로 알려지게 되었다.
3. 생애와 활동
잔 다르크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믿음으로 프랑스군을 이끌고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샤를 7세의 대관식을 성사시켰으나, 결국 체포되어 재판과 처형이라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3.1. 보쿠뢰르와 시농에서의 활동
1428년 5월, 잔 다르크는 16세의 나이로 삼촌에게 부탁하여 인근 마을 보쿨뢰르로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주둔군 사령관 로베르 드 보드리코르에게 시농에 있는 아르마냐크파 궁정을 방문할 수 있도록 호위를 요청했다. 보드리코르는 처음에는 그녀를 강하게 거절하며 돌려보냈으나, 잔 다르크는 좌절하지 않고 1429년 1월 다시 보쿨뢰르를 찾았다. 이때 그녀는 보드리코르의 병사 두 명, 장 드 메츠와 베르트랑 드 폴뤼니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이 무렵, 그녀는 오를레앙 포위전 중 청어 전투에서 아르마냐크파 구원대가 패배할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을 적중시키며 보드리코르의 신뢰를 얻었다.
보드리코르는 잔 다르크의 예언이 적중하자 그녀의 시농 방문을 허락했다. 잔 다르크는 남자 옷을 입고 여섯 명의 병사 호위 아래 적대적인 부르고뉴 영토를 가로질러 시농으로 향했다. 그녀는 남은 생애 동안 계속해서 남자 옷을 입었다.

1429년 2월 말 또는 3월 초, 잔 다르크는 시농의 왕궁에서 당시 26세였던 도팽 샤를을 처음 만났다. 당시 잔 다르크는 17세였다. 그녀는 샤를에게 오를레앙 포위전을 해제하고 그를 랭스로 인도하여 대관식을 치르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샤를과 잔 다르크는 사적인 대화를 나누었고, 이 대화는 샤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잔 다르크의 고해성사 담당자인 장 파스케렐은 훗날 잔 다르크가 도팽에게 그가 샤를 6세의 합법적인 아들이자 정당한 왕임을 확신시켜 주었다고 증언했다.
샤를과 그의 고문들은 더 많은 확신이 필요했기에, 잔 다르크를 푸아티에로 보내 신학자들로 구성된 위원회의 심사를 받게 했다. 위원회는 그녀가 선량하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선언했다. 그들은 잔 다르크의 영감의 원천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았지만, 그녀를 오를레앙으로 보내는 것이 왕에게 유용할 수 있으며 그녀의 영감이 신성한 것인지 시험해 볼 수 있다고 동의했다. 이후 잔 다르크는 샤를의 장모인 아라곤의 욜란다가 지휘하는 여성들에 의해 신체 검사를 받아 그녀의 순결이 확인되었다. 이는 그녀가 예언된 프랑스의 처녀 구원자일 수 있는지, 그녀의 헌신이 순수한지, 그리고 그녀가 악마와 결탁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시험 결과에 안심한 도팽은 잔 다르크에게 판금 갑옷을 제작해 주었다. 그녀는 직접 자신의 깃발을 디자인했으며, 생트카트린드피에르부아 교회의 제단 아래에서 발견된 칼을 받았다. 이 무렵 그녀는 자신의 순결을 사명의 징표로 강조하며 스스로를 "처녀 잔"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잔 다르크가 시농에 도착하기 전, 아르마냐크파의 전략적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아르마냐크군은 오를레앙에서 장기 포위전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었고, 부르고뉴파는 영토 분쟁으로 인해 최근 포위전에서 철수했으며, 잉글랜드군은 계속할지 여부를 논의 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한 세기 동안의 전쟁으로 아르마냐크군은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 잔 다르크가 도팽의 대의에 합류하자, 그녀의 인품은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시작했으며, 신성한 도움에 대한 헌신과 희망을 불어넣었다. 그녀의 사명이 신성한 것이라는 믿음은 오랜 잉글랜드-프랑스 간의 왕위 계승 분쟁을 종교 전쟁으로 바꾸어 놓았다. 오를레앙으로 떠나기 전, 잔 다르크는 베드포드 공작에게 자신이 하느님의 명을 받아 그를 프랑스에서 몰아내기 위해 왔다는 경고 서한을 받아쓰게 했다.
3.2. 군사 활동
잔 다르크는 프랑스군을 이끌고 오를레앙 해방을 시작으로 루아르 강 유역의 주요 도시들을 탈환하며 샤를 7세의 대관식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파리 공방전에서의 실패와 이후의 군사 활동은 그녀의 위상을 약화시켰고, 결국 콩피에뉴에서 체포되었다.
3.2.1. 오를레앙 해방

1429년 4월 마지막 주,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 구원군에 합류하여 블루아를 출발했다. 그녀는 4월 29일 오를레앙에 도착하여 오를레앙의 사생아 장으로 알려진 장 도를레앙 사령관을 만났다. 오를레앙은 완전히 고립되지 않았고, 장 도를레앙은 그녀를 도시 안으로 들여보냈으며, 그녀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잔 다르크는 처음에는 사기를 높이는 상징적인 인물로 여겨졌고, 전장에서 자신의 깃발을 들고 다녔다. 그녀에게 공식적인 지휘권이 주어지거나 군사 회의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아르마냐크 병사들의 지지를 빠르게 얻었다. 그녀는 전투가 가장 치열한 곳에 항상 나타났고, 자주 선봉에 섰으며, 병사들에게 구원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었다. 아르마냐크 지휘관들은 때때로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였는데, 어떤 위치를 공격할지, 언제 공격을 계속할지, 포병을 어떻게 배치할지 등을 결정하는 데 그녀의 의견을 따랐다.
5월 4일, 아르마냐크군은 공세로 전환하여 오를레앙 외곽의 생장드브레에 있는 생루 요새를 공격했다. 잔 다르크는 공격 소식을 듣자마자 깃발을 들고 오를레앙 동쪽 1.6 km 떨어진 전투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아르마냐크 병사들은 실패한 공격 후 퇴각 중이었다. 그녀의 등장은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웠고, 병사들은 다시 공격하여 요새를 점령했다. 5월 5일은 주님 승천 대축일이었기에 전투는 없었다. 그녀는 잉글랜드군에게 프랑스를 떠나라는 또 다른 서한을 받아쓰게 했고, 이 서한은 석궁병에 의해 발사된 볼트에 묶여 전달되었다.
5월 6일, 아르마냐크군은 다시 공세에 나서 잉글랜드군이 버려둔 생장르블랑을 점령했다. 아르마냐크 지휘관들은 진격을 멈추려 했지만, 잔 다르크는 수도원 주변에 세워진 잉글랜드 요새인 레 아우구스탱에 대한 공격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다. 이 요새를 점령한 후, 아르마냐크 지휘관들은 점령지를 굳히려 했으나, 잔 다르크는 다시 공세를 계속할 것을 주장했다. 5월 7일 아침, 아르마냐크군은 잉글랜드의 주요 거점인 레 투렐을 공격했다. 잔 다르크는 강 남쪽 제방의 참호에서 깃발을 들고 있다가 목과 어깨 사이에 화살을 맞았지만, 나중에 돌아와 요새를 점령하는 마지막 공격을 독려했다. 잉글랜드군은 5월 8일 오를레앙에서 철수하며 포위전은 끝났다.
시농에서 잔 다르크는 자신이 하느님에 의해 보내졌다고 선언했다. 푸아티에에서 그녀에게 이를 증명할 징표를 보여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녀는 오를레앙으로 가면 징표가 주어질 것이라고 답했다. 오를레앙 포위전의 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 징표로 해석되었다. 앙브랭 대주교 자크 젤루와 신학자 장 제르송 같은 저명한 성직자들은 이 승리 이후 잔 다르크를 지지하는 논문을 작성했다. 반대로 잉글랜드인들은 이 농민 소녀가 자신들의 군대를 격파할 수 있는 능력을 악마에 홀린 증거로 보았다.
3.2.2. 루아르 전역과 랭스 대관식

오를레앙에서의 성공 이후, 잔 다르크는 아르마냐크군이 도팽의 대관식을 위해 즉시 랭스로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샤를은 그녀가 알랑송 공작 장 2세의 지휘 아래 군대에 동행하는 것을 허락했으며, 알랑송 공작은 잔 다르크와 협력하며 그녀의 조언을 정기적으로 따랐다. 랭스로 진격하기 전, 아르마냐크군은 루아르 강을 따라 있는 다리 도시들인 자르조, 멍쉬르루아르, 보장시를 탈환해야 했다. 이는 시농에서 랭스로 가기 위해 오를레앙 근처의 루아르 강을 건너야 하는 샤를과 그의 수행원들을 위한 길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루아르 도시들을 정리하는 전역은 6월 11일 알랑송과 잔 다르크가 이끄는 아르마냐크군이 자르조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잉글랜드군을 도시 성벽 안으로 후퇴시켰다.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군에게 항복하라는 메시지를 보냈으나 거부당했고, 다음날 성벽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주장했다. 이날이 끝날 무렵, 도시는 점령되었다. 아르마냐크군은 포로를 거의 잡지 않았고, 항복한 잉글랜드군 대부분이 살해되었다. 이 전역 동안 잔 다르크는 전투의 한가운데에서 계속 활약했다. 그녀는 깃발을 들고 공성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으나, 성벽에 오르기도 전에 돌에 맞아 헬멧이 쪼개지는 부상을 입었다.
알랑송과 잔 다르크의 군대는 멍쉬르루아르로 진격했다. 6월 15일, 그들은 도시의 다리를 장악했고, 잉글랜드 수비대는 루아르 강 북쪽 제방의 성으로 철수했다. 대부분의 군대는 루아르 강 남쪽 제방을 따라 보장시의 성을 포위하기 위해 계속 진격했다.
한편, 존 패스톨프 경이 지휘하는 파리 주둔 잉글랜드군은 멍쉬르루아르의 수비대와 합류하여 루아르 강 북쪽 제방을 따라 보장시를 구원하기 위해 이동했다. 이를 알지 못한 보장시의 잉글랜드 수비대는 6월 18일 항복했다. 잉글랜드 주력군은 파리로 후퇴했고, 잔 다르크는 아르마냐크군에게 그들을 추격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으며, 같은 날 늦게 두 군대는 파타이 전투에서 충돌했다. 잉글랜드군은 숨겨진 궁수들로 아르마냐크군의 기습 공격을 준비했으나, 아르마냐크 선봉대가 이들을 발견하고 흩어지게 했다. 이어진 패주로 잉글랜드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패스톨프는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탈출했지만, 많은 잉글랜드 지휘관들이 포로로 잡혔다. 잔 다르크는 결정적인 전투에 참여하기에는 너무 늦게 전장에 도착했지만, 잉글랜드군을 추격하라는 그녀의 독려가 승리를 가능하게 했다.
파타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괴멸된 후, 일부 아르마냐크 지도자들은 잉글랜드가 점령한 노르망디를 침공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잔 다르크는 샤를이 즉시 대관식을 치러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다. 도팽은 이에 동의했고, 군대는 6월 29일 지앙을 출발하여 랭스로 진격했다. 진격은 거의 저항 없이 이루어졌다. 부르고뉴파가 점령한 오세르는 3일간의 협상 끝에 7월 3일 항복했으며, 군대의 진격로에 있던 다른 도시들도 저항 없이 아르마냐크파에 합류했다. 소수의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이 주둔하던 트루아만이 저항했다. 4일간의 협상 끝에 잔 다르크는 병사들에게 도시의 해자를 나무로 채우고 포병을 배치하라고 지시했다. 공격을 두려워한 트루아는 항복을 협상했다.
랭스는 1429년 7월 16일 성문을 열었다. 샤를, 잔 다르크, 그리고 군대는 저녁에 입성했고, 다음날 아침 샤를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잔 다르크는 의식에서 명예로운 자리를 부여받았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선포했다.

대관식 후, 왕실은 부르고뉴 공작과 15일간의 휴전을 협상했으며, 부르고뉴 공작은 최종 평화 협상을 계속하면서 파리를 아르마냐크파에 넘기려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휴전이 끝날 무렵, 부르고뉴는 약속을 어겼다. 잔 다르크와 알랑송 공작은 파리로의 신속한 진격을 선호했지만, 샤를 궁정의 분열과 부르고뉴와의 지속적인 평화 협상으로 인해 진격은 지연되었다.
3.2.3. 파리 공방전 및 이후 활동

아르마냐크군이 파리에 접근하면서, 도중에 있던 많은 도시들이 싸움 없이 항복했다. 8월 15일, 베드포드 공작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은 몽테피유아 근처의 요새화된 진지에서 아르마냐크군과 대치했는데, 아르마냐크 지휘관들은 이곳이 공격하기에는 너무 강력하다고 판단했다.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 진지 앞으로 나아가 그들을 공격하도록 도발하려 했으나, 그들은 거부했고, 결국 대치 상태가 되었다. 잉글랜드군은 다음날 후퇴했다. 아르마냐크군은 계속 진격하여 9월 8일 파리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전투 중 잔 다르크는 석궁 볼트에 다리를 맞았지만, 밤이 되어서 구조될 때까지 도시 성벽 아래 참호에 남아 있었다. 아르마냐크군은 1,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다음날 아침, 샤를은 공격 중단을 명령했다. 잔 다르크는 이에 불만을 표했고, 공격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와 알랑송은 파리를 공격할 새로운 계획을 세웠지만, 샤를은 공격에 필요한 파리 접근 교량을 해체시켰고, 아르마냐크군은 후퇴해야 했다.
파리에서의 패배 이후, 프랑스 궁정에서 잔 다르크의 역할은 줄어들었다. 그녀의 공격적인 독립성은 부르고뉴와의 외교적 해결책을 강조하는 궁정의 입장과 맞지 않았고, 파리에서의 패배는 궁정의 그녀에 대한 신뢰를 감소시켰다. 파리 대학교의 학자들은 그녀가 파리를 점령하지 못한 것은 그녀의 영감이 신성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9월, 샤를은 군대를 해산했고, 잔 다르크는 다시는 알랑송 공작과 함께 일할 수 없게 되었다.

10월, 잔 다르크는 부르고뉴파와 잉글랜드군에 복무했던 용병 페리네 그레사르의 영토를 공격하는 부대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다. 군대는 생피에르르무티에를 포위했고, 11월 4일 잔 다르크의 직접 공격 독려로 함락되었다. 이어서 군대는 11월과 12월에 라샤리테쉬르루아르를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퇴각 중에 포병대를 버려야 했다. 이 패배는 잔 다르크의 명성을 더욱 떨어뜨렸다.
잔 다르크는 12월 말 궁정으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왕과 왕국에 대한 공로로 샤를에 의해 귀족으로 서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9월 파리 공격 이전에 샤를은 부르고뉴파와 4개월간의 휴전을 협상했으며, 이는 1430년 부활절까지 연장되었다. 이 휴전 기간 동안 프랑스 궁정은 잔 다르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3.2.4. 콩피에뉴 포위전 및 체포

부르고뉴 공작은 조약으로 자신에게 양도되었으나 아직 복종하지 않은 도시들을 되찾기 시작했다. 콩피에뉴는 지난 몇 달 동안 아르마냐크파가 탈환했던 많은 지역 중 하나였다. 잔 다르크는 1430년 3월 말, 포위된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자원병들을 이끌고 출발했다. 이 원정은 휴전을 준수하고 있던 샤를의 명시적인 허가 없이 이루어졌다. 일부 작가들은 잔 다르크의 콩피에뉴 원정이 궁정의 허가 없이 이루어진 절망적이고 반역적인 행동이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이들은 궁정의 재정적 지원 없이는 원정을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4월, 잔 다르크는 부르고뉴 수비대를 축출했던 믈룅에 도착했다. 잔 다르크가 진격하면서 다른 지휘관들이 합류하여 그녀의 병력은 증가했다. 잔 다르크의 군대는 라니쉬르마른으로 진격하여 용병 프랑케 다르가스가 지휘하는 잉글랜드-부르고뉴군을 격파하고 프랑케를 생포했다. 일반적으로 포획한 용병은 몸값을 받고 석방되거나 교환되었겠지만, 잔 다르크는 재판 후 마을 주민들이 그를 처형하도록 허락했다.
잔 다르크는 5월 14일 콩피에뉴에 도착했다. 부르고뉴 포위군에 대한 방어적 출격 이후, 주변 지역이 더 이상 병력을 지원하기 어려워지자 그녀는 대부분의 군대를 해산해야 했다. 잔 다르크와 그녀의 남은 병사 약 400명은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1430년 5월 23일, 잔 다르크는 콩피에뉴에서 출격하여 도시 북동쪽 마르니레콩피에뉴에 있는 부르고뉴 진영을 공격하는 아르마냐크군에 동행했다. 공격은 실패했고, 잔 다르크는 생포되었다. 그녀는 장 드 뤽상부르의 부대원인 친부르고뉴 귀족 리오넬 드 방돔에게 항복하기로 동의했다. 그녀는 빠르게 볼리외레퐁텐의 성으로 옮겨졌다. 첫 탈출 시도 후, 그녀는 보르부아르 성으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탑 창문에서 뛰어내려 마른 해자에 떨어지는 또 다른 탈출을 시도했으나, 부상을 입었지만 살아남았다. 11월, 그녀는 부르고뉴 도시 아라스로 옮겨졌다.
잉글랜드와 부르고뉴는 잔 다르크가 군사적 위협에서 제거된 것을 기뻐했다. 잉글랜드는 부르고뉴 동맹국들과 잔 다르크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녀를 자신들의 통제하에 넘겨받는 협상을 벌였다. 최종 합의에 따라 잉글랜드는 룩셈부르크로부터 그녀를 얻기 위해 10,000 리브르 투르누아(Livre tournois)를 지불했다. 잉글랜드가 몸값을 지불한 후, 그들은 잔 다르크를 프랑스 주둔 본부인 루앙으로 이송했다. 잔 다르크가 잉글랜드로 이송된 후, 샤를 7세가 그녀를 구하려 했다는 증거는 없다.
4. 복장
잔 다르크의 남장은 재판 중 그녀에 대한 혐의 12개 조항 중 5개 조항의 주제였다. 재판관들의 관점에서 그것은 그녀의 이단성의 상징이었다. 그녀의 최종 유죄 판결은 그녀가 다시 남자 옷을 입은 것이 발견되었을 때 시작되었는데, 이는 그녀가 이단으로 재범했음을 나타내는 징표로 받아들여졌다.

시농으로의 여정부터 배교에 이르기까지, 잔 다르크는 주로 남자 옷을 입었고 머리를 남성적인 스타일로 짧게 잘랐다. 그녀가 보쿨뢰르를 떠나 시농에서 도팽을 만나러 갈 때, 그녀는 검은색 더블릿, 검은색 튜닉, 짧은 검은색 모자를 입었다고 전해진다. 그녀가 붙잡힐 무렵에는 더 정교한 의상들을 갖추게 되었다. 재판에서 그녀는 브리치스, 망토, 쇠사슬 갑옷, 더블릿, 20개의 끈으로 더블릿에 연결된 호스, 꽉 끼는 부츠, 박차, 흉갑, 부츠, 검, 단검, 창을 착용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녀는 또한 모피, 갑옷 위에 입는 황금색 서코트, 그리고 귀한 천으로 만든 호화로운 승마복을 입었다고 묘사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잔 다르크는 자신이 남장한 실용적인 이유를 기록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 옷을 입는 것이 자신의 선택이었으며, 남성의 요청이 아니라 하느님과 천사들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진술했다. 그녀는 자신의 소명을 완수하면 여자 옷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잔 다르크의 남장은 그녀의 처형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지만, 이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명확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남장은 죄로 여겨졌지만, 그 심각성에 대한 합의는 없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성이 적에게 숨기거나 다른 옷이 없을 경우 남자 옷을 입을 수 있다고 진술했으며, 잔 다르크는 두 가지 경우 모두에 해당했다. 그녀는 적대적인 영토를 통과하여 시농으로 가기 위해 남자 옷을 입었고, 배교 후 드레스를 빼앗긴 감옥에서도 남자 옷을 입었다. 오를레앙 포위전이 해제된 직후, 장 제르송은 잔 다르크의 남자 옷과 짧은 머리가 그녀의 소명에 적합하며, 그녀는 전사였고 남자 옷이 더 실용적이라고 말했다.
남장은 강간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을 수 있다. 무효화 재판의 증인들은 잔 다르크가 배교 후 남자 옷으로 돌아간 이유 중 하나로 이것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그녀가 투옥되었을 때 대부분 쇠사슬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남자 옷을 입는 것이 강간에 대한 사소한 억제책에 불과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잔 다르크는 활동적인 삶의 대부분 동안 자신의 성별을 숨기기 위해 남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그녀의 독특한 정체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했을 수 있다. '처녀'(La Pucelle프랑스어)로서 그녀는 성 역할을 초월하고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미덕의 모델이었다.
5. 재판과 처형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불공정한 종교 재판을 받았고, 결국 이단 혐의로 화형에 처해졌다.
5.1. 이단 심문과 유죄 판결

잔 다르크는 1431년 1월 9일, 루앙에서 이단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그녀는 남자 옷을 입어 신성모독을 저지르고, 악마적 환시에 따라 행동했으며, 자신의 말과 행동을 오직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겠다고 주장하며 교회의 판단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잔 다르크를 사로잡은 자들은 그녀의 재판을 교회 법원에 맡김으로써 세속적인 측면을 축소하려 했지만, 이 재판은 정치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잔 다르크는 자신의 환시가 잉글랜드군을 물리치고 샤를을 왕으로 즉위시키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으며, 그녀의 성공은 그녀가 하느님의 대리인으로 행동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주장되었다. 만약 그녀의 증언이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다면, 이는 잉글랜드의 프랑스 통치 주장을 무효화하고, 잉글랜드 왕이 통치하는 이중 군주제를 지지했던 파리 대학교의 권위를 훼손했을 것이다.
재판의 판결은 이미 정해진 결론이었다. 잔 다르크의 유죄는 그녀가 이단자의 행동으로 인해 즉위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샤를의 정통성 주장을 훼손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코숑 주교는 재판의 정식 재판관으로 활동했다. 잉글랜드는 코숑 주교와 프랑스 종교재판관을 대리했던 장 르 메트르에게 지급금을 포함하여 재판 비용을 지원했다. 재판에 참여한 131명의 성직자 중 8명을 제외한 모두가 프랑스인이었으며, 3분의 2는 파리 대학교와 관련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친부르고뉴파이자 친잉글랜드파였다.

코숑 주교는 올바른 종교재판 절차를 따르려 했지만, 재판에는 많은 불규칙성이 있었다. 잔 다르크는 재판 중 교회 관할 하에 여성 간수들의 감시를 받아야 했지만, 대신 잉글랜드군에 의해 투옥되어 베드포드 공작의 지휘 아래 남성 병사들의 감시를 받았다. 교회법에 위배되게도, 코숑 주교는 재판을 진행하기 전에 잔 다르크의 불명예를 확정하지 않았다. 잔 다르크는 심문이 시작된 지 한참 후에야 자신에 대한 혐의를 전달받았다. 절차는 종교재판의 기준에 미달했으며, 잔 다르크는 변호인 없이 장시간의 심문을 받았다. 재판 성직자 중 한 명은 증언이 강압적이며 잔 다르크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의도라고 느껴 사임했다. 또 다른 성직자는 코숑 주교의 재판 관할권을 문제 삼아 투옥되었다. 재판 기록이 위조되었다는 증거도 있다.
재판 동안 잔 다르크는 뛰어난 통제력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심문관들에게 질문을 동시에 하지 말고 순차적으로 질문하도록 유도했으며, 필요할 때 기록을 참조하고, 자신이 요청할 때 심문을 중단하도록 했다. 재판의 증인들은 그녀의 신중한 답변에 감탄했다. 예를 들어, 한 심문에서 그녀는 자신이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는지 아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 질문은 학문적 함정이었다. 교회 교리상 아무도 자신이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음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긍정적으로 답했다면 이단 혐의를 받았을 것이고, 부정적으로 답했다면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셈이 되었을 것이다. 잔 다르크는 자신이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지 않다면 하느님이 자신을 그곳에 두시기를 바라고, 만약 그곳에 있다면 계속 그곳에 머물기를 바란다고 답함으로써 함정을 피했다. 그녀의 재판 공증인 중 한 명은 심문관들이 그녀의 답변에 경악했다고 훗날 증언했다. 그녀를 복종시키기 위해 잔 다르크에게 고문 도구가 보여졌다. 그녀가 위협에 굴하지 않자, 코숑 주교는 약 12명의 참사원(성직자 배심원)과 만나 그녀를 고문해야 할지 투표했다. 대다수는 고문에 반대했다.
5월 초, 코숑 주교는 파리 대학교에 이단 혐의를 요약한 12개 조항에 대해 심의를 요청했다. 대학교는 혐의를 승인했다. 5월 23일, 잔 다르크는 법원으로부터 공식적인 훈계를 받았다. 다음날, 그녀는 공개적인 비난을 위해 생투앙 수도원 교회 마당으로 끌려갔다. 코숑 주교가 잔 다르크의 선고를 읽기 시작하자, 그녀는 복종하겠다고 동의했다. 그녀는 무기를 들거나 남자 옷을 입지 않겠다는 동의가 포함된 배교 문서를 제시받았다. 문서가 그녀에게 낭독되었고, 그녀는 서명했다. 잔 다르크의 배교에 대한 세부 사항은 불분명한데, 원래 문서가 단 8줄에 불과했을 수 있지만, 공식 기록에는 더 긴 문서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5.2. 화형
공개적인 이단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으며, 회개하지 않거나 재범인 이단자는 세속 법정의 심판을 받아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배교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잔 다르크는 더 이상 회개하지 않는 이단자가 아니었지만, 이단으로 재범이 선고되면 처형될 수 있었다.
배교의 일환으로 잔 다르크는 남자 옷을 입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녀는 옷을 여자 옷으로 바꾸고 머리를 깎았다. 그녀는 교회 감옥으로 이송되지 않고 대신 감옥으로 돌아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재활 재판의 증인들은 잔 다르크가 잉글랜드 귀족을 포함한 학대와 강간 시도에 시달렸으며, 간수들이 그녀의 감방에 남자 옷을 놓아두어 강제로 입게 했다고 증언했다. 코숑 주교는 잔 다르크가 다시 남자 옷을 입기 시작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는 성직자들을 보내 그녀에게 복종 상태를 유지하라고 훈계하려 했지만, 잉글랜드인들이 그들의 방문을 막았다.
5월 28일, 코숑 주교는 다른 성직자 몇 명과 함께 잔 다르크의 감방으로 갔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잔 다르크는 남자 간수들과 함께 갇혀 있는 동안 남자처럼 옷을 입는 것이 더 적절했기 때문에 다시 남자 옷을 입었다고 말했다. 또한 판사들이 그녀를 미사에 참석하게 하고 쇠사슬에서 풀어주겠다는 약속을 어겼으며, 약속을 지키고 적절한 감옥에 가두어 준다면 복종할 것이라고 진술했다. 코숑 주교가 그녀의 환시에 대해 묻자, 잔 다르크는 두려움 때문에 배교한 것에 대해 목소리들이 자신을 비난했으며, 다시는 그들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잔 다르크의 배교는 그녀가 환시를 부인하도록 요구했으므로, 이는 그녀를 이단 재범으로 유죄 판결하고 사형을 선고하기에 충분했다. 다음날, 42명의 참사원들이 잔 다르크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두 명은 즉시 세속 법원에 넘겨야 한다고 권고했고, 나머지는 배교 문서를 다시 읽어주고 설명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결국, 그들은 만장일치로 잔 다르크가 이단 재범이며 처벌을 위해 세속 권력인 잉글랜드에 넘겨져야 한다고 투표했다.
약 19세의 잔 다르크는 1431년 5월 30일 처형되었다. 아침에 그녀는 이단자들에게 성사를 거부해야 하는 재판 절차에도 불구하고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그녀는 루앙의 비외 마르셰(옛 시장터)로 끌려가 공개적으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이때 그녀는 세속적 선고를 위해 루앙의 집행관에게 넘겨져야 했지만, 대신 잉글랜드군에게 직접 넘겨져 화형을 위해 높이 석고를 바른 기둥에 묶였다. 그녀는 죽으면서 십자가를 볼 수 있도록 요청했고, 잉글랜드 병사가 나뭇가지로 만든 십자가를 주자 그녀는 그것에 입을 맞추고 가슴 옆에 두었다. 생소뵈르 교회에서 행렬용 십자가가 가져와졌다. 그녀는 손이 묶이기 전에 그것을 껴안았고, 처형 중에는 그녀의 눈앞에 들려 있었다. 그녀가 죽은 후, 그녀의 유해는 센강에 던져졌다.
6. 사후 복권
잔 다르크의 처형은 군사적 상황을 바꾸지 못했다. 그녀의 승리는 아르마냐크군의 사기를 높였고, 잉글랜드군은 다시 기세를 회복하지 못했다.
6.1. 재심과 명예회복

잔 다르크의 처형은 샤를 7세에게 정치적 부담이 되었다. 이는 프랑스 국왕으로서 그의 즉위가 이단자의 행동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암시했기 때문이다. 1450년 2월 15일, 루앙을 되찾은 지 몇 달 후, 샤를은 신학자이자 파리 대학교의 전 총장이었던 기욤 부이예에게 조사를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짧은 조사에서 부이예는 잔 다르크 재판의 증인 일곱 명을 심문하고 잔 다르크에 대한 판결이 자의적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그녀는 정치범으로 취급된 전쟁 포로였으며, 근거 없이 처형되었다.
부이예의 보고서는 판결을 뒤집을 수는 없었지만, 이후의 재심을 위한 길을 열었다. 1452년, 교황청 사절이자 샤를의 친척인 기욤 데스투트빌 추기경과 새로 임명된 프랑스 종교재판관 장 브레알에 의해 잔 다르크 재판에 대한 두 번째 조사가 시작되었으며, 약 20명의 증인을 심문했다. 조사는 잔 다르크 재판이 어떻게 편향되었는지를 설명하는 27개 조항에 따라 진행되었다. 조사 직후, 데스투트빌은 6월 9일 오를레앙으로 가서 포위 해제를 기념하는 잔 다르크 추모식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대사를 부여했다.
이후 2년 동안 데스투트빌과 브레알은 사건을 담당했다. 브레알은 1454년 잔 다르크의 어머니 이자벨과 두 오빠 장, 피에르의 청원을 교황 니콜라오 5세에게 전달했다. 브레알은 자신의 조사 결과를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신학자 및 법률가들, 그리고 빈 대학교의 교수에게 제출했으며, 대부분이 잔 다르크에게 유리한 의견을 제시했다. 1455년 초 니콜라오 5세가 사망한 후, 새로운 교황 교황 갈리스토 3세는 재활 재판을 허락하고, 랭스 대주교 장 쥐베날 데 쥐르생, 파리 주교 기욤 샤르티에, 쿠탕스 주교 리샤르 올리비에 드 롱게유 세 명의 위원을 임명했다. 그들은 브레알을 종교재판관으로 선택했다.
재활 재판은 1455년 11월 7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잔 다르크의 어머니가 딸의 재활을 공식적으로 요청하면서 시작되었고, 약 115명의 증인들의 증언을 들은 후 1456년 7월 7일 루앙 대성당에서 끝났다. 법원은 원래 재판이 불공정하고 기만적이었다고 판단했으며, 잔 다르크의 배교, 처형 및 그 결과는 무효화되었다. 브레알은 재판 요약에서 코숑 주교와 그를 지지했던 참사원들이 악의와 이단죄를 저질렀을 수 있다고 시사했다. 법원의 결정을 강조하기 위해 고발 조항 사본이 공식적으로 찢어졌다. 법원은 잔 다르크의 처형 장소에 십자가를 세우도록 명령했다.
6.2. 재심의 정치적 의도
잔 다르크의 사후 복권은 순수한 의도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잔 다르크의 도움으로 프랑스 왕위에 오른 샤를 7세에게는 그녀를 복권시켜야 할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만약 그녀가 계속해서 마녀로 남아 있다면, 샤를 7세의 왕위 정통성에 큰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잔 다르크에 대한 종교 재판은 교황청의 공식적인 승인하에 진행되었으므로, 샤를 7세는 교회가 마녀로 규정한 인물의 도움으로 즉위한 왕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없었다. 따라서 샤를 7세는 잔 다르크를 복권시킴으로써 프랑스 왕위에 대한 자신의 정통성과 명분을 다시 한번 확고히 하고자 했다.
그러나 교황청은 샤를 7세의 재심 요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과거에 교회가 내렸던 결정을 뒤집어야 한다는 점과, 잉글랜드가 십자군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는 점 때문에 교황청의 입장은 난처했다. 곤경에 빠진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어머니가 교황에게 편지를 쓰도록 하여 사안을 비정치화하는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했다. 또한, 과거의 종교 재판 자체를 문제 삼는 대신, 재판장 코숑 주교, 종교 재판소 대표 장 르메트르, 종교 전문가 장 에스티베 등 잔 다르크를 재판했던 판사들을 고발하는 형식을 취하여 재심 진행을 관철시켰다.
7. 환시와 신의 계시
잔 다르크는 13세 때인 1425년경, 첫 환시를 경험했다고 증언했다.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들판에 홀로 있을 때 대천사 미카엘, 성녀 가타리나, 성녀 마르가리타가 나타나 잉글랜드군을 프랑스에서 몰아내고 도팽 샤를을 랭스로 데려가 국왕으로 즉위시키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녀는 이 환시가 너무나 아름다워 눈물을 흘렸다고 덧붙였다. 잔 다르크는 평생 동안 이 환시를 자주 경험했으며, 특히 교회 종이 울릴 때마다 환시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 목소리들에 순결 서약을 했다고 증언했다. 마을의 한 청년이 잔 다르크가 결혼 약속을 어겼다고 주장했으나, 그녀는 약속한 바 없다고 진술했고, 교회 법원은 이 사건을 기각했다.
잔 다르크의 젊은 시절, 프랑스 시골에는 무장한 처녀가 나타나 프랑스를 구할 것이라는 예언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는 아비뇽의 마리 로빈의 환시와 멀린의 예언에 기반한 것이었다. 잔 다르크는 자신이 이 예언 속 처녀임을 암시하며, 프랑스가 한 여인(바이에른의 이자보)에 의해 파괴되지만 한 처녀에 의해 회복될 것이라는 당시의 속담을 언급하기도 했다.

잔 다르크가 목격한 성인들의 모습과 들었던 하느님의 목소리는 오늘날까지도 큰 관심을 받고 있다. 학자들은 잔 다르크의 신앙심이 확고부동했다는 점에 거의 일치된 견해를 보인다. 잔 다르크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을 때 성 마르가리트, 성 카트린, 그리고 대천사 미셸의 환시를 보았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녀가 환시를 본 것이 이 세 성인이 확실한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확실한 부분이 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잔 다르크에게 일어난 일이 분명히 신성한 계시였다고 믿는다.
잔 다르크의 환시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신비 체험에 대한 주요 정보원은 그녀가 혹독하게 심문받았던 이단 재판 기록이다. 이 기록에는 잔 다르크가 재판 진행에 저항하고, 신비 체험에 대한 심문 시 증언을 거부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그녀의 신비 체험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잔 다르크는 이단 재판에서 증언하는 것이 과거 샤를 7세와 맺었던 기밀 유지 서약을 어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존하는 이단 재판 기록의 내용이 편향된 법정의 조작인지, 아니면 잔 다르크가 샤를 7세와의 기밀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잔 다르크의 신앙심의 발현이라고 여겨지는 신비 체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그녀의 실제적인 측면만을 연구하기도 한다.
잔 다르크의 군사적 측면을 연구하는 학자 켈리 드브라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잔 다르크가 보았다고 하는 성인들의 환시나 환시의 신빙성은 잔 다르크의 군사적 자질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잔 다르크의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그녀 자신이' 믿었다는 점이다."
잔 다르크와 동시대의 기록 및 20세기 초까지의 역사학자들은 잔 다르크가 심신 모두 건강했다고 보았으며,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잔 다르크의 신비 체험을 정신 의학적 또는 신경 의학적 관점에서 설명하려 한다. 잔 다르크의 환시 원인으로 뇌전증, 편두통, 결핵, 조현병 등이 가능성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잔 다르크의 생애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이러한 가설들 중 정설로 인정되는 것은 없다. 의학 저널 '뉴로사이코바이올로지'에서 측두엽 결핵종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두 명의 의학자는 잔 다르크의 신비 체험을 질병으로 설명하는 경향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증 질환인 만성 결핵에 '이 환자'가 이환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생활 방식과 활동력을 고려할 때 중병에 걸렸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잔 다르크가 저온 살균되지 않은 우유를 마셔서 소 결핵에 걸렸다는 설도 있지만, 역사학자 레지느 페르누는 저온 살균되지 않은 우유를 마시는 것만으로 잔 다르크와 같은 은혜를 입을 수 있다면 프랑스 정부가 우유 저온 살균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릴 것이라고 일축했다.
잔 다르크가 정신 질환을 앓았다는 설에 대한 반론으로는 그녀가 샤를 7세의 궁정에서 지지를 얻었다는 점이 있다. 샤를 7세의 아버지인 프랑스 국왕 샤를 6세가 정신 질환을 앓았기 때문에, 샤를 7세는 '정신 장애인'을 식별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샤를 6세는 '광기왕 샤를'로 불렸으며,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많은 신하와 군인들은 그의 광기 어린 행동이 프랑스 몰락의 한 원인이라고 여겼다. 그의 아버지인 선왕 샤를 5세도 샤를 6세의 정신이 허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샤를 7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는 트루아 조약의 체결도 샤를 6세의 피를 이은 샤를 7세가 아버지와 같은 광기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배경에 있었다. 샤를 6세의 광기는 다음 세대에도 이어져,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가 1453년에 정신 질환을 앓게 되는데, 헨리 6세는 샤를 7세의 조카이자 샤를 6세의 손자였다. 잔 다르크가 시농 왕궁에 도착했을 때의 인상을 왕실 고문관 자크 젤루가 기록했다.
"성인의 환상을 보았다는, 영향받기 쉬운 농부의 딸과의 대화로 쉽게 신념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 외국과의 문제에 대해서는 합리적이어야 한다."
샤를 7세의 궁정에서는 정신 건강 문제에 대해 조심스럽고 회의적이었다. 재활 재판에서 왕실 고문관 미망인 마르그리트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그녀(잔 다르크)가 미친 사람으로 여겨져 버려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녀의 태도에 모두가 매료되었다."
잔 다르크가 조현병과 같은 정신 질환을 앓았다는 징후는 전혀 없다. 죽기 직전까지 그녀의 정신은 명료했으며, 재활 재판에서도 잔 다르크가 명민했다는 증언이 있었다.
"그들(이단 심문 재판관들)은 계속해서 질문을 바꾸며 (잔 다르크를) 몰아붙였지만, 그녀의 답변은 조심스러웠고, 뛰어난 기억력을 지녔음이 분명했다."
심문에 대한 잔 다르크의 명료한 답변에 두려움을 느낀 재판관들은 이 이단 심문을 비공개 재판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 질환이 반드시 심각한 인지 기능 장애를 동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잔 다르크의 신비 체험은 현재의 정신 질환 진단 기준과 비교할 때 분명히 해로운 정신 상태라는 주장도 여전히 강하다. 미국 정신의학회가 정한 '정신 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에는 조현병의 징후로 엉뚱한 대화, 긴장병성 행동, 정서적 둔화, 실어증, 의욕 상실 등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러한 증상은 잔 다르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다만, 조현병의 병태는 매우 다양하여 환청 외에는 전혀 증상이 없는 경우도 있지만, 천사 등의 환시는 비교적 드물다.
잔 다르크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그녀의 정신 상태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정신과 의사들도 있다. 예일 대학교 심리학 교수 랄프 호프만은 '하느님의 목소리'와 같은 신비 체험이나 환시가 반드시 정신 질환의 징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호프만은 잔 다르크의 신비 체험이 자신이 '영감을 받은 목소리'라고 설명한 사례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8. 영향과 유산
잔 다르크는 프랑스의 군사적, 정치적 상징이자 종교적 위상을 지닌 성녀로 추대되었으며, 문학, 예술, 영화 등 다양한 문화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8.1. 군사적 및 정치적 상징

잔 다르크가 잉글랜드군을 프랑스에서 몰아내는 데 기여한 군사적 지도자로서의 명성은 그녀가 죽기 전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샤를의 대관식 직후, 크리스틴 드 피장은 잔 다르크를 신성한 섭리에 의해 보내진 샤를의 지지자로 칭송하는 시 Ditié de Jehanne D'Arc를 썼는데, 이는 오를레앙에서의 승리 후 프랑스의 낙관주의를 반영한 것이었다. 일찍이 1429년부터 오를레앙은 5월 8일 포위 해제를 기념하는 축제를 열기 시작했다.
잔 다르크의 처형 후, 오를레앙 승리에서 그녀의 역할은 그녀의 복권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이끌어냈다. 잔 다르크는 연례 축제의 중심 인물이 되었고, 1435년에는 Mistère du siège d'Orléans (오를레앙 포위전의 미스터리)라는 연극이 그녀를 오를레앙을 해방시킨 신성한 의지의 도구로 묘사했다. 오를레앙의 잔 다르크 축제는 현대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녀의 복권 재판이 있은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 교황 비오 2세는 잔 다르크를 프랑스 왕국을 구한 처녀로 묘사하는 짧은 전기를 썼다. 루이 12세는 1500년경 그녀의 전체 전기를 의뢰했다.
잔 다르크의 초기 유산은 프랑스를 통치하는 군주제의 왕권신수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프랑스 혁명 동안, 그녀의 명성은 군주제 및 종교와의 연관성 때문에 의문시되었고, 1793년 오를레앙에서 열리던 그녀를 기리는 축제는 중단되었다. 1803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축제 재개를 승인하고 오를레앙에 잔 다르크의 새로운 동상을 세우며 "저명한 잔 다르크는... 국가의 독립이 위협받을 때 프랑스인의 천재성이 이루지 못할 기적이 없음을 증명했다"고 선언했다.
그 이후로 그녀는 프랑스 국가의 수호자로서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후, 잔 다르크는 그녀의 출생지인 로렌 지방을 되찾기 위한 새로운 십자군의 결집점이 되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은 5월 8일 오를레앙에서의 승리를 기념하며 그녀를 기리는 애국적인 시민 휴일을 제정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그녀의 이미지는 승리를 고취하는 데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프랑스 내 모든 세력이 그녀의 유산을 이용했는데, 비시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페탱의 상징으로, 자유 프랑스에서는 샤를 드골의 리더십 모델로, 프랑스 레지스탕스에서는 공산주의 저항의 본보기로 사용되었다. 최근에는 군주제 및 국가 해방과의 연관성으로 인해 그녀는 왕당파 운동인 액시옹 프랑세즈와 국민연합을 포함한 프랑스 극우 세력의 상징이 되었다. 잔 다르크의 이미지는 프랑스 정치의 모든 스펙트럼에서 사용되었으며, 프랑스 정체성과 통합에 대한 정치적 대화에서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고 있다.

잔 다르크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전통에 도전하고 가부장제 문화에서 개인으로서 목소리를 내며, 자신의 환시의 목소리에 따라 자신의 길을 개척한 자율적인 여성의 모델로 묘사되어 왔다. 그녀는 전통적으로 남성의 역할인 군사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용감한 여성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양성 모두와 관련된 자질을 융합한 잔 다르크는 수세기 동안 수많은 예술 및 문화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19세기에는 그녀에 대한 수백 편의 예술 작품(전기, 연극, 악보 포함)이 프랑스에서 창작되었고, 그녀의 이야기는 유럽과 북미에서 예술적 주제로 인기를 얻었다. 1960년대에는 그녀가 수천 권의 책의 주제가 되었다. 그녀의 유산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소설, 연극, 시, 오페라, 영화, 회화, 아동 도서, 광고, 컴퓨터 게임, 만화 및 대중문화에 영감을 주고 있다.
8.2. 종교적 위상과 성인 추대

잔 다르크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이다. 그녀는 오를레앙 포위전이 해제된 후 오를레앙에서 종교적 인물로 여겨졌고, 1800년대까지 그녀를 기리는 연례 찬사가 그곳에서 행해졌다. 1849년, 오를레앙의 펠릭스 뒤팡루 주교는 국제적인 관심을 끈 연설을 했고, 1869년에는 시복 절차를 시작해 달라고 로마에 청원했다. 그녀는 1909년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20년 5월 16일 교황 베네딕토 15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녀의 축일은 그녀의 처형 기념일인 5월 30일이다. 1922년 3월 2일, 교황 비오 11세는 교황 교서를 통해 잔 다르크를 프랑스의 수호성인 중 한 명으로 선포했다. 그녀는 걸스카우트, 순교자, 여군, 포로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잔 다르크는 동정녀로 시성되었지, 기독교 순교자로는 시성되지 않았다. 이는 그녀가 정식으로 구성된 교회 법원에 의해 처형되었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아닌 그녀의 사적 계시로 인해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죽음 이후부터 순교자로 대중적으로 숭배되어 왔다. 그녀는 겸손과 순결, 조국, 그리고 신념의 강인함 때문에 고통받은 순교자로 여겨진다.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 성공회에서도 5월 30일에 기념된다. 그녀는 까오다이교의 판테온에서도 숭배된다.
그녀의 생애 동안, 잔 다르크는 이미 에스더, 유딧, 드보라와 같은 성경 속 여성 영웅들과 비교되었다. 그녀의 순결 주장은 그녀의 미덕과 진실성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며, 백년 전쟁의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잉글랜드 양측의 고위 여성들, 즉 샤를의 장모인 아라곤의 욜란다와 베드포드 공작부인 부르고뉴의 안에 의해 지지되었다.
8.3. 문화적 영향
잔 다르크는 재판 기록이 풍부하기 때문에 중세 시대의 인물 중 가장 많이 연구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녀의 이미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프랑스의 구원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순종적인 딸, 초기 여성주의자, 그리고 자유와 독립의 상징을 포함하여 변화해 왔다.
8.3.1. 소설
- 마크 트웨인의 잔 다르크에 대한 개인적인 회상 (1895)
- 미셸 투르니에의 성녀 잔 다르크와 악마 질 (1992)
- 사토 겐이치의 용병 피에르 (1996)
- 후지모토 히토미의 잔 다르크 암살 (2001) 및 성녀 잔 다르크와 창녀 잔 다르크 (2005)
- 야자키 쓰토무의 재판소기 ~잔 다르크에의 길 (2007)
- 히가시데 유이치로의 Fate/Apocrypha (2012-2014)
- 하루히 미카게의 율리시스: 잔 다르크와 연금술사 기사 (2015-현재)
8.3.2. 음악
-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오를레앙의 처녀
-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조반나 다르코
- 아르튀르 오네게르의 오라토리오 화형대 위의 잔 다르크
- Janne Da Arc의 곡 -구세주 메시아- (앨범 Z-HARD 수록)
- DEEN의 곡 영원한 잔 다르크 (2013년 앨범 CIRCLE 수록)
- 사카이 다카유키의 관악 합주를 위한 서사시 잔 다르크
- 사잔 올 스타즈의 곡 잔 다르크에게 안녕
8.3.3. 희곡
-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 1부 (극 중 잔 다르크는 악인으로 묘사된다.)
- 볼테르의 시 오를레앙의 처녀
- 프리드리히 실러의 희곡 오를레앙의 처녀
-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성녀 잔 다르크 (1923년, 쇼의 작품 중 높은 평가를 받는다.)
- 장 아누이의 희곡 종달새
-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도살장의 성녀 잔 다르크
- 맥스웰 앤더슨의 희곡 로렌의 잔 다르크
8.3.4. 영화
- 잔 다르크의 수난 (1928년,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 마리아 팔코네티 주연)
- 잔 다르크 (1948년, 빅터 플레밍 감독,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
- 화형대 위의 잔 다르크 (1954년,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
- 성녀 잔 다르크 (1957년, 오토 프레밍거 감독, 진 시버그 주연)
- 잔 다르크 재판 (1962년, 로베르 브레송 감독, 플로랑스 들레 주연)
- 잔 다르크 (1994년, 자크 리베트 감독, 산드린 보네르 주연)
- 잔 다르크 (1999년, 뤽 베송 감독, 밀라 요보비치 주연)
- 잔 다르크의 어린 시절 (2017년, 브뤼노 뒤몽 감독, 리즈 르플라 프뤼돔 주연)
- 잔 다르크 (2019년, 브뤼노 뒤몽 감독, 리즈 르플라 프뤼돔 주연)
8.3.5. 애니메이션
- 슬픔의 벨라돈나 (1973년, 일본, 나가야마 아이코 목소리 출연)
8.3.6. 만화
- 미우치 스즈에의 하얀 백합의 기사 (1974년)
- 사카미 겐이치의 D'arc ~잔 다르크 전 (1995년)
- 아마카와 스미코의 잔 다르크 (1995년)
-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잔 (1995년)
- 자쓰쿤 호프의 월드 히어로즈 2 (1993-1997년, 2권부터 잔 다르크를 주제로 한다.)
- 아키사토 카즈쿠니의 봉 쿠라주! 오토메 (라 퓌셀) (1995-1996년, 주인공은 잔 다르크의 환생이다.)
- 타네무라 아리나의 신풍괴도 잔느 (1998-2000년, 주인공은 잔 다르크 환생의 변신 히로인이다.)
- 마스기쓰/가에루조라의 마법소녀 타루토☆마기카 The Legend of "Jeanne d'Arc" (2013-2017년, 잔 다르크가 마법소녀였다는 설정으로 그녀의 생애를 마법소녀 이야기로 그린다.)
- 야마기시 료코의 계시 (2014-2020년)
- 오코지시 타로의 데조르도르 (2017-2018년)
8.3.7. 게임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에이지 오브 킹스 - 잔 다르크의 행적을 다룬 캠페인이 등장한다.
- JEANNE D'ARC (2006년,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용 게임)
- 컴패스 전투섭리해석시스템
- 온게키 - 오리지널 곡 잔 다르크의 통곡
8.3.8. 유해 논란
1867년 파리의 한 약국에서 "오를레앙의 처녀 잔 다르크의 화형터에서 채취된 유해"라는 설명이 붙은 병이 발견되었다. 이 병 안에는 불에 탄 인간의 갈비뼈, 탄화된 나무 조각, 삼베 조각, 그리고 고양이의 대퇴골(마녀를 화형에 처할 때 불 속에 던져진 검은 고양이의 뼈라고 주장됨)이 들어 있었다. 이 유물들은 현재 시농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006년, 프랑스의 고병리학자이자 법의학자인 필리프 샤를리에는 이 유물을 6개월간 조사했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과 다양한 분광법 분석 결과, 이 유물은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 사이의 이집트 미라의 일부로 밝혀졌다. 검은색 외관은 연소 때문이 아니라 시체 방부 처리에 사용된 화학 물질의 반응 때문이었다. 또한, 조사에서 다량의 소나무 꽃가루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미라 제작에 사용된 송진의 존재와 일치한다. 불에 타지 않은 삼베 조각도 미라를 감쌀 때 흔히 사용되는 재료였다. 유명 향수 제조업체인 겔랑과 장 파투는 과거 이 유물에서 바닐라 향이 난다고 말했는데, 바닐라 향은 육체가 부패할 때 발생한다. 중세 시대에는 미라가 약의 재료로 사용되었으므로, 이 유물 또한 원래 약병에 담겨 있던 것이 프랑스 민족주의가 고조되던 시기에 잔 다르크의 유해로 위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8.3.9. 기타
- 소행성 127 요한나는 1872년 P.M. 앙리가 발견했으며, 잔 다르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잔 다르크의 짧은 머리 스타일은 20세기 여성 헤어스타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09년, 파리의 헤어스타일리스트 앙투안은 잔 다르크에게서 영감을 받아 보브컷을 창안했는데, 이는 수세기 동안 여성의 머리 자르기를 금기시하던 관습을 깨뜨렸다. 이 스타일은 1920년대에 인기를 얻었으며 여성의 자유와 연관되었다. 이후 등장한 거의 모든 서양 헤어스타일은 최소한 정기적으로 머리를 자르는 여성을 위해 디자인되었다.
9. 관련 항목
- 백년 전쟁
- 샤를 7세
- 질 드 레
- 헨리 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