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1.1. 출생 및 어린 시절
언드라시 줄러는 1823년 3월 8일, 언드라시 카로이 백작(Andrássy Károly언드라시 카로이헝가리어)과 서파리 에텔커(Szapáry Etelka서파리 에텔커헝가리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는 헝가리 왕국의 올라흐퍼터크(Oláhpatak, 현재 슬로바키아 로즈나바 지구의 블라호보)이며, 그의 출생 연도와 장소는 다소 논란이 있는데, 코시체 등록부에 따르면 1823년 3월 3일 코시체(당시 카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버지 카로이 언드라시는 당시 정부에 반대하는 것이 매우 위험했던 시기에 정치적 야당에 속했던 자유주의자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언드라시는 어린 나이부터 당대의 정치적 투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으며, 처음부터 애국적인 입장을 취했다.
1.2. 교육
언드라시는 공식적인 교육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많지 않지만, 10년간의 망명 생활 동안 그는 당시 유럽 외교의 중심지에서 정치학, 특히 국가 간의 외교를 깊이 연구했다. 이 시기에 그는 프랑스 제2제국의 화려한 외관 속에 감춰진 약점을 날카롭게 간파하는 등 국제 정세에 대한 통찰력을 길렀다.
1.3. 초기 경력

언드라시의 능력을 처음으로 높이 평가한 사람은 세체니 이슈트반 백작(Széchenyi István세체니 이슈트반헝가리어)이었다. 1845년, 언드라시는 티서강 상류 수자원 관리 협회 회장으로 임명되면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1846년에는 코슈트 러요시의 신문인 페슈티 히를러프(Pesti Hírlap페슈티 히를러프헝가리어)에 정부를 비판하는 격렬한 기사를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다. 1848년 의회 선거에서 급진적 후보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으며, 그의 관대하고 충동적인 성격은 그를 철저한 애국주의자로 만들었다.
요시프 옐라치치 휘하의 크로아티아인들이 당시 헝가리 영토였던 메지무르예를 크로아티아로 반환하려 하자, 언드라시는 군 복무에 나섰다. 그는 자신의 지역 젠트리 사령관으로, 괴르게이 어르투르의 부관(1848년)으로 파코즈드 전투와 슈베하트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혁명 정부는 언드라시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하여 오스만 제국의 중립, 나아가서는 지원을 얻어내려 했다.
빌라고시에서의 헝가리 혁명군 패배 이후, 언드라시는 런던으로, 그 다음에는 파리로 망명했다. 1851년 9월 21일, 그는 헝가리 혁명 가담 혐의로 오스트리아 제국 정부에 의해 궐석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모형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10년간의 망명 생활 후 1858년에 헝가리로 돌아왔으나, 그의 입지는 여전히 어려웠다. 그는 사면을 요청하지 않았고, 오스트리아 정부와 마자르 보수주의자들(왕국의 완전한 자치권보다 낮은 수준의 자치권을 받아들였을)의 모든 제안을 꾸준히 거부했다. 대신 그는 데아크 페렌츠(Deák Ferenc데아크 페렌츠헝가리어)의 당을 열렬히 지지했다.

1865년 12월 21일, 언드라시는 의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866년 3월, 그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간의 대타협(아우스글라이히)을 성립시키기 위해 의회 위원회에서 임명한 소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권한의 "대표단" 개념을 창안했다. 당시 그는 위원회에서 국가적 요구의 정당성을 법원에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2. 주요 활동 및 업적
언드라시 줄러는 헝가리 정치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외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주요 활동과 업적은 대타협에서의 역할, 헝가리 수상으로서의 재임,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외무장관으로서의 외교 정책 수립 및 실행으로 나눌 수 있다.
2.1. 헝가리 대타협에서의 역할
1866년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킨 후,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처음으로 언드라시와 공식적으로 협의했다. 언드라시는 헌법의 재확립과 책임 있는 외무 및 국방부 장관의 임명을 권고했다. 1867년 2월 17일, 황제는 그를 새로 형성된 이중 군주국의 헝가리 측 초대 수상으로 임명했다. 대타협의 설계자 중 한 명인 데아크 페렌츠가 수상직을 고사하고 언드라시를 추천했으며, 데아크는 언드라시를 "하느님의 은총으로 헝가리에 주어진 섭리적 정치가"라고 칭송했다.
2.2. 헝가리 수상
수상으로서 언드라시는 그의 단호함, 온화함, 그리고 능숙한 토론 능력으로 곧 지배적인 위치를 확보했다. 그는 국방과 외교 부문을 직접 맡았다. 그는 헝가리 국민군 체계를 재조직했으며, 군사 국경 지역의 규제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고 자주 언급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자, 언드라시는 오스트리아 군주국의 중립을 단호하게 옹호했다. 1870년 7월 28일 연설에서 그는 오스트리아가 1863년 이전 독일에서 가졌던 지위를 회복하려 한다는 가정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다.

1871년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폰 보이스트가 총리직에서 물러나자(11월 6일), 언드라시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의 수상 재임 기간은 획기적이었다. 보이스트가 독일에 적대적이고 러시아에 우호적이었던 반면, 언드라시는 정반대의 접근 방식을 취했다. 당시 한 가지 문제는 독일이 이탈리아와 가까웠지만,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는 국경 지역 통제권을 놓고 갈등을 겪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그동안 역사적인 신성 로마 제국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독일에서의 영향력 상실, 그리고 그에 따른 이중 제국의 형성은 마침내 미래 외교의 적절한, 아니 유일한 영역이 근동, 즉 발칸반도 민족들의 국가 형성 과정이 아직 미완성인 곳임을 시사했다. 문제는 이 민족들이 독립할 것인가, 아니면 술탄의 폭정에서 차르나 합스부르크 황제의 폭정으로 단순히 지배자가 바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전까지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인들을 막아내거나 그들과 전리품을 나누는 데 만족했다. 그러나 이제는 불행한 사태로 인해 유럽 회의에서의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한 상태였다. 언드라시는 오스트리아가 유럽 협조 체제에서 제자리를 되찾도록 했다. 먼저 독일 황제에게 접근했고, 이어서 베를린, 빈, 상트페테르부르크, 베네치아에서 열린 회의를 통해 이탈리아와 러시아 궁정과의 관계를 개선했다.
2.3. 오스트리아-헝가리 외무장관
1871년 11월 14일, 언드라시는 수상직을 사임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외무장관으로 취임했다. 이 직책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양국 공통의 외교를 담당하는 공통 각료 회의 의장으로서의 역할을 포함했다. 언드라시는 러시아 및 슬라브계 국가들에 대항하기 위해 독일 제국과의 협력을 추진했다. 이는 독일 제국 성립에 따라 이중 제국에게 '독일 (통일) 문제'보다 '발칸 문제'의 비중이 높아졌고, 동시에 제국 내 슬라브계 민족의 독립 운동을 부추기는 범슬라브주의와 러시아의 남하 정책이 헝가리의 영토 보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2.4. 외교 정책 및 외교 활동
언드라시는 러시아와의 부분적인 화해에도 힘썼다. 1872년에는 독일, 러시아와 함께 삼제 동맹을 체결했으며,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는 중립을 지켰다.
언드라시 문서
1875년 보스니아주에서 심각한 소요 사태가 발생한 후 오스트리아의 영향력 회복이 분명해졌다. 빈, 베를린, 상트페테르부르크 세 궁정은 동방 문제에 대한 입장을 합의했으며, 이들의 견해는 1875년 12월 30일 언드라시가 보이스트 백작을 통해 성 제임스 궁정의 오스트리아 대사에게 보낸 "언드라시 문서"라는 공문에 담겼다.
이 문서에서 언드라시는 열강들이 반란을 국지화하려는 노력이 실패할 위기에 처했으며, 반군이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고 있고, 오스만 제국의 개혁 약속(여러 칙령에 명시된)은 모호한 원칙적 진술에 불과하며 실제 적용될 의도도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대규모 충돌의 위험을 막기 위해, 그는 열강들이 오스만 정부에게 약속 이행을 압박하기 위한 협력 행동에 나설 때가 왔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필수적인 개혁의 개요가 제시되었다. 여기에는 기독교에 대한 단순한 관용이 아닌 인정, 조세 징수 시스템의 폐지, 그리고 종교 문제 외에 농업 문제까지 얽혀 있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기독교 농민들을 자유로운 소유주로 전환시켜 무슬림 오스만 지주에 대한 이중 종속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등이 포함되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는 선출된 지방 의회가 설립되고, 종신직 판사가 임명되며,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마지막으로, 무슬림과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혼합 위원회가 이러한 개혁의 이행을 감독할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술탄이 자신의 약속 이행에 대해 유럽에 책임을 지게 됨으로써 반군들의 자연스러운 의심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도 언급되었다. 이 계획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는 전반적으로 동의했으며, 언드라시 문서는 협상의 기초로 채택되었다.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간의 전쟁이 불가피해지자, 언드라시는 러시아 궁정과 협상하여 러시아가 승리할 경우 오스트리아 군주국에 불리하게 현상 유지가 변경되지 않도록 합의했다. 그러나 산스테파노 조약이 근동에서 러시아의 패권을 위협하자, 언드라시는 독일 및 영국 궁정과 함께 최종적인 문제 조정이 유럽 회의에 제출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오스트리아의 수석 전권대사로 참여하여 러시아의 이득을 줄이고 이중 군주국의 이득을 증대시키는 데 주력했다. 회의가 6월 13일 개막하기 전, 언드라시와 영국 외무장관 솔즈베리 후작 간의 협상은 이미 "6월 6일 영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모든 제안에 동의하고, 오스트리아는 영국의 요구를 지지한다"는 합의로 마무리되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점령 및 행정 외에도, 언드라시는 노비 파자르의 산자크에 병력을 주둔시킬 권리(행정은 여전히 오스만 정부가 담당)를 얻어냈다. 산자크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를 분리하는 역할을 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주둔군은 테살로니키 진격로를 확보하여 "발칸반도 서부를 영구적으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 아래 두게 될 것"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고위 군 당국자들은 "테살로니키를 목표로 하는 즉각적인 대규모 원정"을 원했다.
이러한 점령은 재정적 이유와 마자르인들의 강한 친튀르크 정서 때문에 헝가리에서 매우 인기가 없었다. 1878년 9월 28일, 재무장관 콜로만 폰 젤은 알브레히트 대공이 이끄는 군대가 테살로니키로 진격할 경우 사임하겠다고 위협했다. 1878년 11월 5일 헝가리 의회 회기에서는 야당이 외무장관이 근동 위기 동안의 정책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점령으로 헌법을 위반했으므로 탄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동의안은 179대 95로 부결되었으며, 야당의 일반 의원들은 언드라시에 대해 심각한 비난을 제기했다.
1878년 10월 10일, 프랑스 외교관 멜시오르 드 보귀에(Melchior de Vogüé멜시오르 드 보귀에프랑스어)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특히 헝가리에서는 이 '모험'으로 인한 불만이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는데, 이는 마자르 민족을 움직이고 그들의 운명의 비밀인 강한 보수적 본능에 의해 촉발된 것이다. 이 활발하면서도 배타적인 본능은 역사적으로 고립된, 소수의 집단이 다른 민족 다수가 거주하는 나라를 지배하고, 수적 중요성이나 지적 문화에 비해 유럽 문제에서 엄청난 역할을 하는 역사적 현상을 설명한다. 이 본능은 오늘날 깨어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점령이 헝가리 정치 조직에 새로운 슬라브 요소를 도입하고, 크로아티아 반대파의 활동 영역을 넓혀 마자르 지배의 불안정한 균형을 깨뜨릴 위협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언드라시는 이러한 비난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1879년 10월 8일 황제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 퇴임 전날 그는 독일과의 공수 동맹에 서명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외교 관계를 다시 안정적인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그의 퇴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구스타프 지그문트 칼노키 외무장관 아래에서 러시아와의 협력을 중시하는 외교를 추진했다. 언드라시의 외교는 발칸반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이권을 일시적으로 확대하는 데 성공했지만, 장기적으로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병합으로 이어져 러시아 및 슬라브 국가들과의 비화해적 대립을 초래하고,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제국 해체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3. 개인 생활
언드라시 줄러의 개인 생활은 그의 정치적 삶만큼이나 주목받았다. 그는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으며, 특히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황후와의 관계에 대한 소문은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3.1. 가족 관계

언드라시는 1856년 파리에서 켄데피 커틴커 백작 부인(Kendeffy Katinka켄데피 커틴커헝가리어)과 결혼했다. 그들은 두 아들 언드라시 티버더르 (1857년 7월 10일 출생)와 줄러 (1860년 6월 30일 출생), 그리고 딸 일로너 언드라시 (1858년 출생)를 두었다. 두 아들 모두 헝가리 정치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티버더르는 1890년 헝가리 하원 부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아버지를 이어받은 차남 줄러 역시 성공적인 정치 경력을 쌓았다.
언드라시 줄러 백작의 손녀인 클라라는 헝가리 귀족이자 기업가인 카로이 오데스칼키 공작과 결혼했다. 언드라시에게는 네 명의 손녀가 있었는데, 클라라 외에 보르발라는 팔라비치니 후작과, 카탈린은 미하이 카로이 백작과, 일로나는 팔 에스테르하지 공작의 전쟁 미망인으로 요제프 치라키 백작과 재혼했다.
3.2. 엘리자베트 황후와의 관계 소문
언드라시 백작과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황후(시시로도 알려진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아내)가 오랜 기간 동안 연인 관계였다는 많은 소문이 있었다. 일부에서는 엘리자베트의 넷째 아이인 오스트리아의 마리 발레리 대공녀가 언드라시의 딸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러나 이러한 소문은 모두 거짓으로 판명되었으며, 이를 뒷받침할 증거는 없다. 이 소문은 엘리자베트와 언드라시 백작 모두 헝가리, 그 문화, 그리고 민족적 관습에 대한 깊은 애정(엘리자베트는 헝가리어에 유창했고, 둘 다 헝가리 시를 높이 평가했다)을 가지고 있었으며, 헝가리를 위한 공동의 꿈을 추구하며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또한, 마리 발레리가 성장하면서 그녀의 외모가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와 매우 흡사해졌다는 점도 소문의 신빙성을 떨어뜨렸다.
4. 평가 및 영향

언드라시는 퇴임 후에도 대표단과 상원에서 공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885년에는 마그나트원 개혁 프로젝트를 열렬히 지지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1867년 대타협의 불가침성을 열렬히 옹호했으며, 1889년 3월 5일 상원에서 공동군에 대한 어떠한 특정주의적 간섭에도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다시 인기를 얻었으며, 1890년 2월 18일 66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그의 죽음은 국가적 재앙으로 애도되었다. 그가 사망한 볼로스코(현재 크로아티아 리예카와 오파티야 사이)에는 그를 기리는 명판이 남아 있다.
4.1. 긍정적 평가
언드라시는 수세기 만에 처음으로 유럽적인 지위를 차지한 마자르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마자르 대귀족과 근대 신사의 면모를 동시에 지녔다는 평을 들었다. 그의 좌우명은 "약속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쉽다"였다. 만약 데아크 페렌츠가 근대 헝가리 국민국가의 설계자라면, 언드라시는 그 건축가라고 할 수 있다.
4.2. 비판 및 논란
언드라시의 외교 정책, 특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점령은 헝가리 내에서 큰 비판을 받았다. 이는 재정적인 이유와 마자르인들의 강한 친튀르크 정서 때문이었다. 의회에서는 그의 정책이 헌법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탄핵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또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획득으로 인해 헝가리 영내의 슬라브계 주민 비율이 증가할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그의 외교가 장기적으로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병합으로 이어져 러시아 및 슬라브 국가들과의 비화해적 대립을 초래하고,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제국 해체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5. 훈장 및 영예
언드라시 줄러는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다양한 훈장과 영예를 수여받았다. 다음은 그가 받은 주요 훈장 및 영예 목록이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왕립 헝가리 성 이슈트반 훈장 대십자장 (1867년)
- 황금양모 기사 (1877년)
- 바덴 대공국: 충의 가문 훈장 기사 (1873년)
- 바이에른 왕국: 성 후베르트 기사 (1873년)
- 벨기에: 레오폴드 훈장 대훈장
-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대십자장
- 그리스 왕국: 구세주 훈장 대십자장
- 이탈리아 왕국: 성모영보 최고 훈장 기사 (1873년 11월 28일)
- 몰타 기사단: 명예와 헌신의 바이리프 대십자장
- 네덜란드: 네덜란드 사자 훈장 대십자장
- 오스만 제국: 메지디예 훈장 1등급 (다이아몬드)
- 페르시아: 어거스트 초상화 훈장 (다이아몬드)
- 포르투갈 왕국: 탑과 검의 훈장 대십자장
- 프로이센 왕국: 흑수리 훈장 기사 (1872년 9월 10일)
- 러시아 제국:
- 성 안드레이 훈장 기사 (1874년)
- 성 알렉산드르 넵스키 훈장 기사
- 백수리 훈장 기사
- 성 안나 훈장 1등급 기사
-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1등급 기사
- 작센 왕국: 루관 훈장 기사 (1872년)
- 시암: 태국 왕관 훈장 대십자장
- 뷔르템베르크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관 훈장 대십자장 (1874년)